사랑으로 부르시는 예수님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녹취자: 배미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모든 광경을 제자들이 다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것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칼빈 선생은 정확하게 지적하기를 “그것은 잘못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특별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나타나셔서 “너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거라” 그때까지 제자들은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이신 줄 몰랐습니다. 진짜 그물을 던져 보니 밤새도록 안 잡히던 고기가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잡혔습니다. 그때 누가복음 5장에서 똑같은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 예수시구나” 하고 베드로가 외치면서 그 소리를 들으면서 바다로 뛰어들어서 예수님께 달려갔고 제자들도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왔더니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리를 잡으시고 앉아서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감히 예수님께 무어라고 말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죽는 데까지 따라간다고 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였으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다시 교제 속으로 들어오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가지를 하셨습니다.
제일 먼저 식탁을 차리셨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니 허기졌을 것입니다. 날씨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아마 굉장히 새벽에 서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준비하셨는지 붉게 타오르는 숯불 위에 이미 떡을 맛있게 구워놓으셨고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무안해할까봐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셨습니다. “너희에게 생선이 있느냐” 제자들이 생선을 가져다드렸더니 그 생선도 함께 불에 구우시며 제자들을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식탁을 차리신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숯불 가까이 모이기는 했지만 감히 먹을 엄두를 못 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따끈따끈한 구운 떡을 하나씩 나눠주시면서 “먹어라. 밤새도록 고기 잡느라고 얼마나 배고팠겠느냐 먹어라, 먹어라.” 생선도 가시를 발라주시면서 “먹어라. 너도 먹어라. 더 많이 먹어라. 넉넉히 있다. 내가 떡을 또 구우마.” 이렇게 친절하게 말씀하시면서 식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십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성경 속에 흐르는 식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흐르고 있는 식사에 대한 신학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입니다. 지금은 모두 자유 민주주의 국가 사회가 되었지만 조선 시대에는 상민과 양반의 구별이 엄격했습니다. 그때를 예를 들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여행길이어서 상황이 어쩔 수 없으면 상민과 양반이 같은 여인숙에서 같은 방에 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양반은 절대로 상민과 함께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을 포함한 동양 사상 속에는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가족이 된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탁을 나눈다는 것은 그들과 한 형제자매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야곱의 스토리를 보면 밧단아람에서 많은 재산을 모아서 도망을 갑니다. 그때 라반이 자식들과 달려와서 요절을 내고 모두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을 손대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두려워서 야곱을 축복하고 놓아줄 때 마지막으로 한 일이 바로 그 야곱의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갈사하두다’라는 무덤을 쌓아두고 이제 우리가 서로를 헤치지 말자하며 아주 정표 있게 헤어지게 된 마지막을 장식한 순서가 식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한솥밥을 먹게 하셨습니다. 동일하게 빈부나 귀천에 차이가 없이 모두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이른 아침에 거두어서 먹게 하신 것은 그것을 먹게 할 때마다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이 비난을 받으시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했습니다.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과 함께 밥을 잡수시느냐!” 하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창기나 세리 혹은 이름이 알려진 죄인은 자신들과 형제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하대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은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고자 이 땅에 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셨으니 이 죄인들은 그 뛰어난 선지자요, 고매한 학자처럼 여겨지시는 그분이 자신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신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아마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의미는 “너희는 나의 형제라. 그러니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을 듣고 영적으로도 진정한 형제가 되거라.” 하는 메시지를 바로 식사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끝없이 많이 있지만 계시록 하나만 넘어가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덥지도 차지도 않은 교회여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를 예수님은 그 교회가 회개하고 온전한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문을 열라. 문을 열면 네게 들어가 너로 더불어 먹고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하셨으니 이는 곧 예수님과 라오디게아 교회가 함께 다시 먹고 마시는 가족됨, 형제됨을 다시 회복하는 그런 사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메시지인 것 입니다.
이 정도만 설명을 듣고 나면 예수님이 식탁을 그 새벽에 꼼꼼하게 준비하셔서 제자들 모두 불러 먹이신 것이 처음입니다. 모든 제자들을 함께 만나서 이렇게 먹이신 것은 처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예수님은 이미 이 제자들이 그렇게 당신을 버릴 것을 알고 있었으니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함과 같이 그렇게 당신 홀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나 혹은 징벌하는 생각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연히 용서하시고 일체에 상처가 없는 단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실패한 제자들이 고통받고 있는 그 갈릴리 밤바다에 새벽 시간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떡과 고기를 구워서 제자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 충만하고 헌금 많이 하고 젊고 건강해서 매력이 있는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패한 사람, 주님을 배반하고 멀리멀리 세상으로 나갔던 사람, 자신의 능력만 믿고 까불다가 망한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푸십니다.
여러분들이 인생 살면서 곤고할 때 그리고 정말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는 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로 괴로운 날에 어떻게 여러분들이 위로를 받으셨는지를 생각해보십니다. 육신은 이 땅에 기름진 것을 많이 먹어 배부르지만, 영혼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영적으로 굶주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의 떡을 먹여주시고 진리의 물고기를 먹여주셨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을 먹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돌아 볼 수 있었고, 자신이 정말로 주님을 멀리멀리 떠났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곤고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죄 가운데 고통받는 여러분, 인생의 허무에 몸 부린 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십시오. 허기진 그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 새 생명을 주시는 우리 예수를 만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는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조반을 다 먹은 후 그때까지도 누가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찬양)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원래 베드로의 이름은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요한이고 그리고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라는 뜻이고 ‘시몬’은 ‘듣는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과장을 하자면 예루살렘에서 허공에 돌을 던지면 열 개 던지면 한사람쯤은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맞을 정도로 그렇게 흔해 빠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이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 베드로가 그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 이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똑같이 “바요나 시몬아” 이것도 역시 똑같이 요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후로 너의 이름을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리라” 다시 말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은 예수님이 버리라고 하신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 대신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으니 이것은 반석과 같다는 뜻이고 그 반석과 같은 신앙 고백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서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베드로야’라고 부르시지 않으시고 당신이 버리라고 하신 이름 즉. 그 옛날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를 때 불리던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을까요? 이 이유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지금 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에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저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완전히 실패한 베드로였습니다. 그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께서 “큰 믿음이여! 반석과 같은 신앙이여!”라고 부른다면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만나기 전에 세상에서 친근했던 이름,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 전까지 지녔던 이름을 가지고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멀리 떠난 우리를 부르실 때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부끄럽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너무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교회에 갈 수 없습니다. 이러이러한 일들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염치가 없어서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실패했다면 실패한 모습 그대로, 주저앉았다면 주저앉은 모습 그대로, 당신을 찾으라고 가리켜 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을 나의 길이라 부르면서도 그 길로 가기 싫어 딴 길로 헤맸네
어둡고 캄캄한 그곳 가시밭길에 길 잃은 양 한 마리 떨고 있을 때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이런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성령 충만하고 헌금 많이 할 때만 찾으시는 예수님이 아니시라 시련과 고통 속에서 실패했을 때 도저히 살길을 찾을 수 없는 인생에 캄캄한 밤길,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님은 여러분들이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께 나아오기를 원하셔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뜻이 있으셔서 저를 보내셔서 주님이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오늘 이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예수를 다시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질문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였다면 틀림없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질문했을 것 같습니다. “나를 따라 죽는 데까지 쫓아온다더니 네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었구나.” 저 같으면 틀림없이 그렇게 질문했을 것 같습니다.
“네가 내가 보는 데서 저 멀리서 나를 몇 번 부인했더라. 생각나니?” 이렇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 하고 물으셨으면 베드로는 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사랑했다면 예수님을 배반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네가 나를 사랑할 것이냐?”라고 미래형으로 물어보았어도 아마 대답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왜?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미래에 대해 확실하게 “지금까지는 실패했으나 앞으로는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현재형으로 물어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를 너는 왜 버렸었느냐?’라고 물으면 할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머뭇거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묻자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 “네 주님 그러하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라고 돌려서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세 번 다시 물어서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세 번의 잘못을 하나씩 하나씩 씻어 주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소망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돈을 손에 넣어본 적도 있을 것이고 높은 지위를 가진 적도 있었고 미모를 뽐내는 젊은 시절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때에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즐겁지 않았습니다. 돈이 많아도 높은 지위에 올라도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회할 여지 없이 진심으로 행복했던 때는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때가 아니었겠습니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사랑을 그렇게 가슴에 와닿도록 절절히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 사랑의 감동을 받을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돈 많이 벌게 해주실 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출세시켜주셨을 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자녀들을 훌륭한 학교에 보내주셨을 때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 놀라워서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이 심장의 힘줄을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찢는 것처럼 가슴이 아픈 것처럼 고통을 사랑은 동반합니다. 왜 그러는지 아십니까?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사랑에 감격했던 때는 언제나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거기에는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살아갈 때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왜 사랑하게 되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셨는지를 깨달으면서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그분이 사람의 모양을 입고 오셔서 복종하고 복종하고 복종하기를 죽으시기 직전까지 복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 모든 구원받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았던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구약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고르라면 다윗이고 또 한 사람을 고르라면 이사야이고 신약에서 그런 인물을 고르라면 바울입니다. 이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엄청나게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경험하는 방법은 모두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하시는 지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았을 때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자 자신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할 정도로 아주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그를 용서하시고 정결케 하신 후에는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며 죽어간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땠습니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큰 죄를 지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통곡하며 회개했고, 그가 죄를 무릅쓰고 옷을 찢으며 회개한 때는 한 나라의 위대한 임금이 아니라 거의 노예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영혼 깊은 밑바닥에 있는 죄까지 모두 토설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며 눈물로 회개하였으니 그는 범죄보다 회개로 소문이 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에서 어떤 인물도 따라올 수 없으리만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고 주님의 영광이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한 것을 찬송할 수 있는 위대한 우주적인 철학자이자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생의 황혼역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마지막 고비에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나는 사도다. 나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내 설교를 듣고 회개해 예수를 믿은 사람이 130만 명쯤 된다’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역에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한 죄수로서 고백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신앙의 타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러면 타락이 아닌 것이 무엇일까요?
(찬양)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여러분 모두 처음 사랑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젊은 시절이던 연세 드셨던 시절이건 나 처음 믿은 그 시절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열네 살에 내 발로 교회를 떠나고 무신론자가 되겠다고 다짐했고 6년 후에 전도하는 사람 없이 주님의 교회로 돌아와서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 없이 사는 6년은 저에게 마치 탕자를 위한 돼지우리였고 쥐엄 열매도 없는 거친 뜰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살아보겠다고 수많은 책을 읽고 문학작품을 읽고 철학 서적을 읽었지만 어디에도 나를 살려주는 생명은 없었습니다. 19살이 되던 해 저는 자살을 결심했고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21살에 저는 전도하는 이 없이 스스로 주님의 교회에 나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flying but now I see
그 예배당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풍금 소리에 맞춰 찬송을 부르면서 저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누구시길래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관대 이 더러운 죄인, 무지몽매해서 당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무신론자가 되겠다고 하고 믿는 자를 꼬여 교회를 못 나가게 하고 성경을 뜯어버렸던 이 완악한 죄인을 위해 당신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왜 나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고결한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셨습니까?’ 가르쳐주는 사람 없어도 저는 어릴 적 주일 학교 때 들었던 이야기들이 생각나며 예수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생각할 때 이제까지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한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 한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이 믿어졌습니다. 그날 주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나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 용서에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내가 그렇게 무한한 죄를 지으며 주님 앞에 강퍅하게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이 고백이 나에게만 있겠습니까? 나에게만 있다면 저만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여러분 모두에게 크기는 다르고 상황은 같지 않아도 모두 이런 고백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매일 매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쯤은 다른 이웃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국에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스펄전의 아내가 스펄전의 서재를 아침에 열었습니다. 원래 그 시간은 남편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시간이었는데 왜 그런지 남편이 기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여보 뭐 어려운 일 있어요? 왜 아침부터 그렇게 서럽게 흐느끼세요?’ 그러자 스펄전은 눈물이 젖은 얼굴을 들고 자기 아내를 향해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아침은 참 이상해.’ ‘왜요?’ ‘아침마다 나는 이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한다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왜 그런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무리 묵상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으니 내 메마른 신앙이 하도 가엾어서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답니다.’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성경학교 때 혹은 수련회 때 고사리 같은 손을 붙들고 가슴을 치면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칠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가슴을 치면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송합니다.’ 이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매일 매일 예수가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여러분도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명을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고 예수님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성경을 가만히 보면 요한복음은 20장으로 끝나면 딱 맞는 책입니다. 20장 마지막 절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절인 동시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의 마지막입니다. 뭐라고 하냐면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훌륭한 마무리입니다.
그런데 21장이 붙어있는데 이거는 완벽한 요한의 복음에 부록입니다. 그러면 왜 요한복음에 21장이라는 부록이 들어가야 했을까? 요한복음 21장이라는 부록을 쓰게 하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패한 베드로와 제자들을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다시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부록을 여기에 끼워 넣으신 것입니다. 만약에 21장에 부록이 없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요한복음 20장으로 끝날 때 열두 제자는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간 사람들이었고 그 다음에 사도행전 1장에 가면 이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나타나서 크게 쓰임을 받으며 설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누가 보더라도 아니 바로 앞장에서까지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던 그런 실패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면 누가 그것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꿈꾸는 영웅상은 이런 것 아닙니까? ‘제자들이 모두 다 주님을 버리고 갔지만 한 제자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예수님과 따라가서 예수님을 붙들고 매달리다가 칼에 찔리고 창에 찔려서 죽은 줄 알고 구덩이 갖다 버렸는데, 간신히 살아나서 다시 산 아래로 내려와서 유일하게 신앙의 지조를 지킨 그 사람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런 영웅적인 스토리를 우리는 오히려 기대합니다. 믿음의 절개를 지켰던 사람,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옆에서 함께 죽어갔던 사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없게 만드셨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예수님보다 더 높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패한 자들로 용서를 받고 다시 사명을 받아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실패한 자를 이렇게 놀랍도록 바꿔서 쓰실 수 있다는 것을 복음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모든 제자들은 매일매일 자신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던 것을 배반했던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용서를 받은 목숨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 예수의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주님 앞에 충성하며 양떼를 돌보라는 사명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주일 설교를 마쳤을 때 그곳에 장로님과 목사님이 저를 데리고 식당을 가셔서 식사를 한 다음 한 교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교회당에 들어가니까 사람 발자국이 새겨진 돌판이 놓여있었습니다. 쿼바디스 교회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로마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베드로도 견디다 못해 제자들과 함께 가까스로 탈출을 할 때 바로 그 교회 앞 지점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여쭙기를 ‘쿠오 바디스 도미네’ ‘주님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야 나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의 양떼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노라’ 할 때 그 자리에서 베드로가 엎드려 울며 회개하고 예수님 대신 로마에 들어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십니다. 사명은 항상 즐겁고 유쾌한 것만 한 것이 아니고 항상 높임을 받거나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명의 길은 가시밭길이고 때로는 자갈밭이고 때로는 쓰라린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전 한 15년 전 북경에 있는 한 오 천명 되는 교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곳에 가서 어떻게 설교를 하고 식사 시간에 그 교회에 담임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동석했던 조선족 통역하는 목회자가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문화혁명 시대에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목회에 헌신했고 신학교를 다니면서 자기 동네에 교회를 세워서 열렬하게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오쩌둥의 문화 대 혁명이 일어나고 모두 숙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신학생은 그저 교회를 세우고 전도한 것밖에 없는데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강제 노역장에 배치되었습니다. 15년 동안 가족들과 단 한 번의 면회 한 번의 전화 통화, 한 통의 편지도 주고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만기를 채우고 이 목사님은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시는 바와 같이 문화대혁명은 처참하게 실패하고 그 당시 2~3천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동네에 와보니 하나도 변한 것이 없고 오히려 다 낡았습니다. 자기의 집을 찾아가 보니 사람이 살지를 않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이 와서 자기 얼굴을 알아보고 ‘아이고 전도사님이 오셨네요. 교회는 문을 닫았고요. 전도사님의 집안은 전도사님이 잡혀가신 다음에 사모님은 화병으로 1년을 못살고 돌아가셨고 큰아들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고 둘째 아들은 마약중독자가 되어 살다가 죽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마당에 서서 흙바닥에 주저앉아서 울었습니다. 한참을 서러운 마음에 통곡하며 우는데 아주 또렷하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얘야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겠느냐? 네 아내가 죽고 아들 하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고 하나는 마약 중독자로 살다가 죽었는데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 이 목사님은 눈물을 쏟으며 주님 앞에 고백했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이보다 더한 일을 만나도 나는 주님만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거기 엎드려 통곡하며 울었던 그분이 오천 명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세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질문이 우리의 인생의 행복을 좌우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셔서 어떻게 날 위해 죽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 흐르는 피 중 주를 위해 흘리기를 거부하는 한 방울의 피까지 쏟아 버리고 우리의 살 중 예수 위해 찢어지기를 거부하는 한 점의 살도 도려내어 버린 채 우리 모두를 위하여 주님 자신이 당신 전부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전부를 주님께 드려 주님을 사랑하며 사명을 감당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