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강의
녹취자: 박효준
자, 그럼 구원론에 들어가서 이제 부르심과 중생. 19과에 나오고 그 다음에 20과에서 회심과 믿음. 이렇게 나옵니다. 그렇죠? 그 다음에 이제 뒤에 가서 칭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22과에 가서 성화와 성도의 견인. 이렇게 나옵니다. 성화에 대해서는 열린교회 교인들이 강점이 있습니다. 꼭 많이 성화가 되어서 그렇다기보다는 하도 성화에 대해서는 설교를 소나기처럼 많이 들어서 “성화에 대해서는 성화가 되고 안 되고는 그만두고라도 일단 하여튼 들은 이야기는 되게 많다.” 그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부르심, 중생 그 다음에 회심, 믿음. 그 다음에 나아가서 칭의 그 다음에 성화 이렇게 나가는 게 무엇이냐면 인간이 경험한 구원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경험의 순서입니다. 그렇다고 이 순서가 뒤죽박죽된다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뭐냐면 루터파 같은 데서는 제일 먼저 믿음의 문제를 다룹니다. 왜냐면 믿지 않고 이따 보면 알겠지만 내가 믿게 된 것도 하나님이 나를, 내가 믿게 되고 서야 비로소 내가 중생한 것도 알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도 알고 등등 이렇게 나가기 때문에, 이것이 경험적 순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경험적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의 순서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해도 논리적이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원론을 서술해 가느냐, 구원받은 인간의 입장에서 구원론을 서술해 가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신 그 구원론의 순서를 따라 가서 진술을 하는 것이다.” 그게 이제 우리들이 개혁주의에서 흔희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부르심입니다. 설명부터 먼저 하고 일사천리로 나가겠습니다. 부르심이 있는데 부르심이라고 하는게 뭐냐면 소명이라고 어려운 말로 이야기 하는데 소명은 무슨 “목사가 된다, 사모가 된다, 선교사가 된다.” 그런 걸 소명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구원과 관련된 소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에 대한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죄인인데 그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아라.” 그러고 부르시는 초청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으로 나누어집니다. 외적인 부르심이 무엇이냐면 외적으로 요건이 갖춰져서 이렇게 해서 너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너는 죄인이고 그리스도 예수만이 너의 구원의 길이고 믿으면 하나님이 너에게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영원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이렇게 제시하는 것 자체를 우리가 외적인 부르심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외적인 부르심은 인간이 내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안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외적인 부르심은 인간이 수납할 수도 있고 수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면에서 외적인 부르심이 있어도 그가 구원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 그것이 외적인 부르심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한번 가봅시다. 예수님 믿으십시오. 예수 믿으면 복 많이 받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부르심의 요건이 안 됩니다. 외적인 부르심의 요건이 되려면 최소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리스도가 당신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 그리고 그 분을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신다는 것, 이 구원이 변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당신에게 가져다준다는 것, 천국과 소망.” 이렇게 세트로 이야기를 다해서 전체를 들을 수 있어야지만 이것이 비로소 외적인 부르심의 요건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내적인 부르심이 뭐냐면 내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이 이런 외적인 것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실제로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이 구원으로 그를 부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내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성령의 의해서 직접 이뤄지는 역사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효한 부르심 혹은 유효적 부르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중생하게 됩니다. 이 중생은 무엇이냐면 우리들이 논리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이 살려주시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입니다. 완료형입니다. 과거에 일어나서 그 사건이 계속되어서 계속 죽어 있는 상태가 계속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살려내신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영적으로 한 사람이 죽어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이야기 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영혼의 죽음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가 되어야지만 중생의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오늘날 이 기독교계에서는 이미 중생 그 자체를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적인 교파들도 아주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래도 좀 더 보수적인 샘입니다. 그런 것들을 아예 인정을 안 하는 기독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유럽 쪽이 그렇습니다. ‘born again’이라고 합니다. 중생. ‘regeneration’. ‘re’는 ‘다시’고 ‘generation’이라고 하는 것이 ‘태어나다’. 희랍어의 ‘γῆ(ge:게)’에서 나온 것입니다. 희랍어의 ‘γῆ’는 ‘땅’이기도 하고 ‘종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미국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Eugene(유진)’이라고 있습니다. ‘Eugene o"neill, Eugene peterson, Eugene...’. "Eugene"이 뭐냐면 ‘좋은 종자’라는 뜻입니다. ‘eu-’가 ‘좋은’이고 ‘-gene’이 ‘종자’라는 뜻입니다. 진짜 좋은 사람 되고 싶어서 자식을 나았을 때 ‘Eugene(유진)’이라고 짓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발생’, ‘생성’이런 뜻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Regeneration.”
그러면 여기서 생명의 문제를 얘기 하려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항상 조심해야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영혼과 육체는 존재의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도 다른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 사랑이 이동했어.” 이 이야기와 “물병이 이동 했어.” 이 이야기가 똑같습니까? 틀리다고 하면 틀린 것이고 “다르다.”라고 해야 합니다. 다시 얘기해 봅니다. “제 마음에서 사랑이 이동했어.” 이 사람 사랑하다가 이 사람한테로 간 겁니다. “물명이 이동했어.”라는 말은 단어는 ‘이동’이라는 단어는 똑같지만 의미하는 바는 다릅니까? 틀립니까? 다릅니다. 국어를 바르게 하셔야합니다. 다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물병의 존재 방식과 우리 마음 안의 사랑의 존재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 아닙니까? 중생은 결국 죽어 있는 영혼이 다시 사는 것을 의미 하지 않습니까? 죽음이라는 의미는 육체의 죽음이라는 것은 ‘멸절(滅絶)’을 의미합니다. 그냥 죽어서 육체의 고유한 활동을 못하는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죽음이 뭐냐면 2가지입니다. 첫째는 용어를 잊어버렸는데... 외부에 대해서 뭔가 자기를 외부에 대해서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반응하는 것. 이것이 생명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리로 오면 눈을 감는다든지 피한다든지 더우면 자신을 좀 더운 곳으로부터 피하려고 한다든지. 이런 어떤 외부에 대한 반응이 있어야지 사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면 메타볼리즘(Metabolism). 자기 생명 자체를 지탱하는 신진 대사가 있어야지만 그게 진짜 사는 것입니다. 이 2가지가 생명의 조건입니다. 이런 생명체는 다시 후손들에게 자기 자신의 요소들을 Transcription(전사, 傳寫 또는 轉寫)이라고 하는데 전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닮은꼴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갑니다. 이게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제 영혼은 육체와 다르기 때문에 죽음의 개념도 다릅니다. 영혼은 처음 창조부터 불멸하는 존재입니다. 죄를 범해도 인간의 영혼은 불멸합니다. 그런데 “죽었다”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이냐면 멸절되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영혼이든지 멸절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육체에서는 멸절과 죽음이 동의어인데 영혼에 관해 말 할 때는 멸절과 죽음이 동의어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 되십니까? 멸절과 죽음이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에 멸절과 죽음은 다릅니다. 영혼에서는. 그래서 “멸절되지 않았는데도 죽었다.”라고 이렇게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갖고 있는 고유한 기능 중 하부적인, 하위적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건 남아있는 것입니다. 죄 짓고 타락했어도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욕망을 느끼고, 도덕적으로 결정하고 하는 것들은 영혼이 죽었어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을 향하여 삶을 이끌어갈 힘이 그 영혼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님 앞에 생명만 없으면 완전히 도덕을 유지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면 이 세상이 엄청난 혼란으로 이뤄졌을 것입니다. 살인과 약탈이 아주 공공연하게 행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못하게끔, 아까 우리 지난 시간에 배운. 여론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식, 양심 그리고 특별히 국가의 제도 같은 것들을 두어서 그래서 이 인류가 멸절되지 않고 보존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도덕적 본성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두 가지가 일치할 수 있지만 그러나 완전히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것에 대해 좀 더 상세하게 알고 싶다면 좀 어렵기는 한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두 편의 논문이 있습니다. <천지 창조의 목적>와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두 책이 하나는 존 파이퍼가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써서 나온 책이 있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부흥과 개혁사>에서 나왔고 아예 그 전체를 8권 전체를 묶어서 나온 것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왔을 걸요? 어쨌든 8권이 3개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천지 창조의 목적>, <참된 미덕의 본질> 그리고 마지막에 <고린도전서 13장 강해>이렇게 나왔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강해>는 일부러 안 읽었습니다. 일부러 안 읽었습니다. 내 책을 내고 읽으려고. 대가의 작품을 읽으면 내가 압도되어 버릴지도 모르잖습니까. 책을 내고 그리고 그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18세기에 나왔던 그 논의를 해야 했던 그 도덕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저 나름대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논문입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한번 다 여러분 교육 옛날에 철학도 하고 역사도 배웠으니 한번 해보는 겁니다. 또 책을 읽는데 이해 안 되는 책을 만났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나는 책을 읽다가 제일 짜증 내는게 다 읽었는데 내가 이 사람보다 더 잘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때 그때 짜증이 나고 모두 이해할 때 화가 납니다. 왜 이런 책을 내가 읽나? 내가 읽을때 그래도 한 10% 정도는 잘 모르겠을때 그때 아주 짜릿한 지적인 쾌락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10%를 알아갈 때. 그때 “그 사람보다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겠다.”라고 하는. 어깨를 딛고 올라가는 그런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사람이 내 책을 읽고 “목사님, 책이 너무 어려웠어요.” 라고 할 때 야릇한 쾌감이 느껴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책이 좀 어렵지 않았어요?”했는데 “아니요.”라고 할 때 굉장히 실망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넓혀 가는 겁니다. 그런 건 우리의 말하자면 행복입니다. 행복. 이 세상에서 정말 큰 행복이 뭐냐면 의미 있는 지적인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지적인 행복도 있잖습니까? 배워 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막 몰입하는 것. 게임하는 것. 도박 하는 것. 그것도 하나의 지식이잖습니까?
영혼이 죽어 있는 상태가 되면 하부적인 기능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상위적인 기능. 이것은 하나님과 이렇게 영적인 연결 속에서 그의 생명과 사랑이 공급되는 것입니다. 이런 게 없는 것입니다. 내일 주일 설교를 잘 들으십시오. 그러면 내가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잘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것들이 있어야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격하고 신령한 것에 대한 지식이 생겨서 하늘 가치에 대한 인식과 천적인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으로 이 세상의 있는 것들을 판단하고 그 다음에 이런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통로 자체가 없는 것을 가리켜서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모두 포함이 되냐 하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성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것, 내가 필멸하여야할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2천년전에 오신 그분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 받는다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이성의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 그것이구나!” 깨닫게 만드는 그 무엇이 주워지기 위해서는 죽어있는 영혼의 상태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한 죽은 영혼은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화) 무슨 얘기냐면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귀에 다 대고 “사랑해.” 시체가 국물이 흐르는데 코에서 입으로 흐르는데 그 사람 귀에다 대고 이야기하는데 듣겠냐는 말입니다. 못 듣잖습니까? 그 사람이 뭐 예전에 양주를 무지하게 좋아했다. 양주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런데 죽은 사람 눈앞에 두고 발렌타인 30년 산을 흔든다고 반응을 하겠냐는 말입니다. 반응을 못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살려내야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그래서 이 중생 교리가 나온 것입니다. 이 중생 교리는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중생에 관한 교리 자체를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1851-1921) 20세기에 3대 칼빈주의자가 있었습니다. 뉴프린스턴의 교수였는데 아주 굉장히 경건한 분이였고 아내를 너무너무 뜨겁게 사랑해서 세계적인 대학자인데 일평생 살면서 4시간 이상 아내의 곁을 떠난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웃음이 뭡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부인이 아프니까 일평생 4시간 이상을 부인 곁을 떠난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집이 이만큼 됩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뭐냐면 “구원론은, 중생 교리는 모든 신학의 피벗(Pivot)이다.” 피벗 아십니까? 왜 그래요? 농구에서 피벗 플레이(Pivot Play)라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하나를 추구를 하고 돌때 이것을 피벗이라고 합니다. 번역이 적당한 번역이 없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축입니다. 중생에 관한 교리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신학이 어떻게 전개 되느냐. 그러니까 여기에 피벗을 둔 사람이 도는 이거하고 여기에 두고 도는 사람하고 완전히 다를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중생 교리가 피벗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중생 교리가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그 인간을 중생시켜야지만 그 다음에 구원을 위한 그 다음의 인간의 반응들이 가능해진다는 얘기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쉽습니까? 그 다음에 19과를 보겠습니다.
부르심. 줄치십시오. “부르심이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구원을 받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정의할 수 있다.” 그러면 시험에 꼭 나옵니다. 자, 이 부르심은 먼저 외적 부르심이 있습니다. “외적 부르심이란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그리스도 영접하도록 하는 권고로서 죄인들을 향한 구원을 제시하고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줄쳤습니까? “외적 부르심은 다음 3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이 3가지 외우셔야합니다. “첫째 복음적 사실과 개념의 제시. 둘째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초청. 세 번째 용서와 구원의 약속.” 그러니까 아까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한 것들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그 다음. “이 부르심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우주적 부르심. 진정한 부르심.”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주적 부르심이 무엇이냐면 복음을 듣는 모든 자에게 온다는 의미에서 볼 때” 줄치세요. “우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르심은 어떤 시대나 국민, 계급,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택한 자 뿐만이 아니라 유기된 자에게도 온다.” 무슨 뜻인지 이해되십니까? 부르심은 한 사람, 한 사람 빼 놓지 않고 모두 그렇게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어느 민족, 어느 계급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가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은 전해진다는 면에서 우주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B. 이 “부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줄치세요.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믿음 가운데 부르시며 초청을 받기를 열망하시며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신다.” “2번 외적 부르심에서 하나님은 죄인을 향한 요구를 계속 하신다. 만일 인간이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요구를 멸시하는 것이고 죄가 증가 된다. 또 외적 부르심이란 하나님이 세상 국민들로부터 택한 자를 모으기 위해 저한 방법인데 비록 죄인들이 이 부름을 욕되게 하더라도 어쨌든 죄인을 위한 하나의 축복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예화)1945년도 7월입니까? 일본 나카사키하고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떨어지기 전날. 미군이 비행기가 거기를 지나면서 어마어마한 삐라를 뿌렸습니다. 시간까지 알려줬습니다. “몇날 몇 월, 몇 일 8시 경 폭탄이 떨어질 텐데 특별한 폭탄인데 모두 죽는다. 그러니까 몇 십 km 바깥으로 도망가시오.” 그러고 부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고 도망을 쳤고 어떤 사람들은 “뻥! 뻥까지 말라!” 그러고 있다가 남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래서 20만 명이 죽었습니다. 어마어마합니다. 핵폭탄의 위력을 아십니까? 모르시죠? 어마어마합니다. 그 핵폭탄의 이름을 “Enogla Gay(에뇰라게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폭탄 앞에 뭘 달았는지 아십니까?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수 없이 평화 공세를 하면서 평화 매달을 교환을 했습니다. 그 평화 매달을 폭탄 앞에 매달아서 그래서 이제 가져가서 뿌린 겁니다. 그리고 떨어졌습니다. 꽝! 하고 터지면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원자 폭탄 지금 미국에 보면 이번에도 중국도 보면 전략 핵 잠수함을 20년까지 보유하겠다 이야기하잖습니까? 그게 말하자면 강대국의 최후 보험입니다. 여러분들이 보면 전략 핵 잠수함을 보면 시커먼게 커다란게 이렇게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데 그런 것들을 몇 십 척을 만들어서 전 세계에 뛰어 놓는데 이쪽에 6개, 이쪽에 6개를 두는데 각각 12발의 미사일이 들어있습니다.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이. 그 들어있는 미사일이 하나의 핵폭탄인데 그 하나의 핵폭탄의 위력이 한 도시를 완전히 기화 시켜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그거 하나가 떠돌아다니면서 마음을 먹으면 12개 정도의 도시만 폭파하면 그 나라는 거의 마비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그렇게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소 폭탄은 얼마나 무서우냐? 수소 폭탄도 갖고 있잖습니까? 미국, 소련, 중국도 갖고 있습니다. 수소 폭탄은 원자 폭탄이 뇌간입니다. 원폭을 터트려야지 수소 폭탄이 터지는 겁니다. 그거는 실제로 피해를 본 나라가 없기 때문에 그 한방에 터질 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지금 전 세계가 갖고 있는 핵의 양이 지구를 24번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의 핵의 양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참,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지금 왜 하고 있는 것이죠?
아! 불렀을 때 응답 하느냐 안하느냐. 내적 부르심!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2가지 면으로 구분 했는데. 줄치세요. “내적 부르심이 진정한 부르심이다.” 계속 줄치세요. “내적 부르심은 성령의 역사로서 외적 부르심을 효과 있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적 부르심은 외적 부르심을 같이 동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우리 누구는 아무도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없는데 혼자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그런 사람도 있는데요? 혼자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거는 어떤 거냐면 이미 그것에 대해서 옛날에 언젠가 들어서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느 순간 성령이 사용 하셔서 그를 유효한 부르심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하든 못하든지 간에 특히 자녀들을 앉혀 놓고 정확하게 중생과 회심의 교리를 잘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성령님이 언젠가는 사용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이해되십니까?
(예화)그래서 우리 전도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대단합니다. 성도인데 자신이 하나님 만나고 은혜를 받고 나니까 너무너무 전도를 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교리반 하기 전에 꼭 한 사람을 전도하십시오. 그것이 원래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숙제여서가 아니라 오늘부터 간절히 기도 하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을 전도 하십시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안주잖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다음에 누가 타락 했고 이게 얘기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짧게 해도 5분은 걸리는 겁니다. 그만큼 시간을 안 주는 겁니다. “교회 한번 가볼래?” 그것은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보험 회사 사람은 대개 보험 회사 직원이 고객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잖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고객인데 보험회사 직원에게 잘 일려고 애를 쓴 겁니다. 그래서 보험도 들어 주고 그리고서 막 이런 겁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랬냐면 거냐면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나에게 딱 10분만 여유를 달라.” 그래서 뭐냐 그러니까 “내가 전도를 하고 싶은데 내가 얘기를 할 수 있도록 10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 들어 주겠습니까? 자기 보험도 들어주고 그렇게 자기에게 해줬는데. “알았다고.” 열린공간에 앉아서 10분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역사를 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믿을 마음을 주신 것 입니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그 전도를 받아 들인 겁니다. 놀라운 겁니다. 해도 끝도 없습니다. 오늘날은 어느 집사님이 중학교 다닌 딸을 대리고 딸인데 아주 까칠합니다. 대화도 잘 안통해. 그때 교리반인가? 전도학교에서 숙제가 있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라고. 그런데 밤이 되었는데 그날 전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한 겁니다. 하는 수 없이 공부하는 딸내미를 불러다 놓고 “일루 와봐라. 엄마가 숙제가 있는데 숙제하는 것 좀 도와줄래?” 그랬는데 애는 뭐 이렇게 타이퍼 치는 건줄 알고 “응, 엄마.” 그러는데 “아니 너는 할 거 없고 너는 앉아서 내 이야기를 들으면 되.”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눈물을 흘리며 거기서 주님을 영접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정말 이거는 하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전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도 학교에 꼭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에 외적인 부르심은 우리가 주고 성령은 내적인 부르심을 주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자, 이 부르심은 계속 줄치세요. “후회 없는 부르심이며 취소되지 않는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분명히 구원받을 것이다.” 똥그라미 치셔야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말씀 선포를 통하여 말씀의 권위를 유효케 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개몽 된 지력에 호소함으로 인간은 의식한다. 이 내적 부르심은 항상 일정한 목적에로 인도되며 그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이룩하기 위한 부르심이며, 축복을 누리게 함이며, 자유를 위함이며, 화평을 위함이며, 거룩함을 위함이며, 소망을 위함이며, 영생을 위함이며,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함한 부르심이다.” 아멘.
Regeneration. 중생에의 본질. 우선 조심해야할게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중생이라는 말이 칼빈의 기독교 강의에서 나옵니다. 칼빈도 사용을 합니다. 그런데 Regenerātiōn(기게네라치오)라는 라틴어로 나오는데 이제 이 중생이라는 단어를 의미가 크게 2가지입니다. 하나는 뭐냐면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사람이 구원을 받는 과정은 떨어지고 찢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믿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죽고 영화의 이르는 모든 과정 전체가 Regeneration에 해당된다고 보는 견해를 갖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을 갖고 “넓은 의미의 중생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설”은 16세기까지는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칼빈이 이야기하는 중생의 개념은 지금처럼 영혼이, 죽은 영혼이 살아난다는, 이 협의의,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 개념이 아니라 칼빈만이 아니라 당시의 많은 신학자들이 전부다 “넓은 의미의 중생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17세기에 와서 도르트 회의(혹은 도르트 교회회의 : 敎會會議. Synod of Dort)라는 것이 열립니다. 화란입니다. 거기서 유명한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Dort A.D. 1619)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도르트 신조는 무엇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느냐면 아르민(Armin),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 자들이 나오게 된 겁니다. 우트레이트 대학(Utrecht University)에 아르미니우스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고마루스(프란시스 고마루스, Francis Gomarus)라는 신학자입니다. 그 밑에 아르미니우스 신학자가 사이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사람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의존한다라고 하는 교리를 부분적으로 고치고 싶어 했습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은 불러주시기까지만 하고 마지막에 구원 받을지 말지 결정은 인간이 하는거다. 이렇게. 인간의 역할을 그 안에 말자면 상당부분 집어 넣어서 구원에 관해서는 동인 자체가 하나님 단독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 사역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당시의 넓은 의미의 중생설. 즉, 중생 자체를 구원의 전 과정이라고 생각하던 입장에서 보면 사실 구원의 그런 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명백히 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서 도르트 회의가 열리고 도르트 회의에서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의 교리를 말자면 정죄하고 유명한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확립합니다. 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그것이 뭐냐면 첫째가 외우기 쉽습니다. TULIP. T는 뭐냐면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그 다음에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그 다음에 Limited Atonement. 제한 속죄설. 그 다음에 Irresistible Grace.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그 다음에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써 드릴게요. 전적 타락 그 다음에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 다음에 성도의 견인. 요고 꼭 외워 놓으셔야합니다. 그러면서 뭐가 나오느냐면 이제 중생을 넓은 의미의 중생과 좁은 의미의 중생을 구별합니다. 넓은 의미의 중생은 사실은 하나님이 이니셔티브(Initiative, 주권)를 쥐고 전 과정을 움직이시지만 인간도 참여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하는데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절대로 인간이 자기의 힘과 의지를 보탤 것이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것을 그 교리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자, 중생의 본질. 줄치십시오. “오늘날에는 보다 협의의 의미를 갖는다. 엄밀한 의미로 중생이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심으시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꼭 외워야 합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중생이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심으시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요것이 뭐냐면 말하자면 은혜의 주입니다.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으로 인간 안에 은혜를 심으시고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을 “콱!” 하고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그걸 주십니다. 하나님이 심적인 방법으로 인간에게 사랑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감동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시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연애 해보셨습니까? 별로 대답이 없으십니다.
(예화) 어느 청년이 그랬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열린 교회에 와서 배우는데 청년들이 그거라도 연애라도 해본 사람들은 설교를 빨리 알아듣고 그것조차 못해본 사람은 훨씬 느리다.”고 하더랍니다. 그럴 겁니다. 그게 뭐냐면 여러분 대게 “어떤 사람을 선을 보러 간다.” 그러면 대개 자리에 앉기 전에 이미 결정 되지 않습니까. 저 멀리서 이제 가까이 가면서 문을 “탁!” 열고 들어갔는데 저기 웬 사람이 깔끔하게 입고 있으면 그 선보러 온 사람이잖습니까. 나이 좀 들고 그리고 다리 꼬고 이러고 얌전하게 앉아 있으면 보잖습니까. 옆모습을 “탁!” 보면서 이미 결정이 됩니다. “이 사람 다시 만날까? 말까?” 결정이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사랑은 항상 한순간의 시선으로 시작이 되잖습니까. “탁!” 문을 여는 순간 “탁!” 하고 마음에 꽂히면서 “아! 저 사람이다.”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닙니까? 우린 일 주일 만에 결혼하기로 했는데... 물론 이전에는 몰랐던 건 아니지만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기도하고 일주일 만에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두 달 후에 약혼 하고 두 달 후에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이게 운명적이잖습니까? 다~ 그렇게 “탁!” 된 것이 됐다. 그렇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 저 사람 너무 괜찮다.” “탁!” 꽂혔어. 그런데 그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까 얼굴은 멀끔한데 흰죽사발 개 할타먹은 것처럼 얼굴은 멀끔한데 그런데 얘기하는데 아, 수준이 너무 없는 겁니다. 진짜. 온 몸은 전부다 짝퉁으로 휘감고 말입니다. 아, 이게 설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 이 사람이다.” 하고 “탁!” 들어 왔는데 그 다음에 대화를 해 보는데 아, 사람 얼굴은 아무리 봐도 그렇게 멋있다고 말할 수 없는데 교양있고 아는 것도 풍부하고 그러면서도 예의 바르고 하나씩 하나씩 설득되어 가면서 사랑하게 되는 거잖습니까? “아! 저 사람이다!”하고 꽂히는 게 중생이라면 그 다음에 이제 “아! 진짜 괜찮아. 오~ 공부도 그렇게 많이 했어? 사람이 그렇게 성실해? 남에 대한 배려도 뛰어나네? 오~ 영어도 잘하고?”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설득되어 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거듭난 다음에 이런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에 대한 제시를 받으면서 신앙이 “촥!” 자라난 사람하고 안자란 사람하고 어떤 차이가 있으냐면 애는 낳았는데 거의 아무 것도 안 먹여 갔고 소말리아 사람처럼 피고 상접한 아이하고 계속 먹고 계속 커져가는 우량아가 되어가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 오늘 설명 기가 막힙니다. 써 놔야겠습니다.
자, 그러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설명이. “중생이란 생명의 원리와 영혼의 지배적 성향...” 영혼의 지배적 성향 옛날에는 자기 사랑이었는데 중생한 다음에는 하나님 사랑으로 바꿔 놓으신 겁니다. “일어나는 근본적인 변화이므로 중생은 그 인간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계속 줄쳐야합니다. “중생은 순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순간적” 동그라미 치고 “성화와 같이 점진적” 동그라미 “과정이 아니다.” “중생하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 중생은 인간에게 예측되고 파악되지 않으나 결과에 따라 알려질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사역인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파 같은데서 중생한 시간을 대라고 하잖습니까? 중생한 시간을 대라... 참 어렵습니다. 그렇죠? 중생은 우리의 영혼의 심층부에서 무의식 세계에서 이러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파악이 안 되고 회심은 의식 속에서 이뤄 납니다. 회심과 중생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에는 중생의 기억이 있는 게 아니라 회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이 중생을 추정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짜를 대라고 하는 것은 좀 그런거다... 이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구원파 사람들은 교회를 안가면 안 갔지 다른 교회를 안갑니다.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10년 동안 안 나가도 다른 교회는 안갑니다. 굉장히 힘들죠? 그런데 요번에 전라도에서는 내년부터 방송이 나가는데 충청도 쪽으로 골든타임에 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지금 한 7, 8년 넘었는데 계속 내보냈습니다. 거기 구원파들이 많았답니다. 구원파들이 모여서 제 설교를 들은 겁니다. 열린 교회 설교를. 그래 놓고 굉장히 그 놀랍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게 뭐냐면 “저 목사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목사는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다 죽은 시체들이 걸어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몇 사람이 왔었습니다. 와서 은혜도 받고 또 다른 데로 간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서는 충격 받은 것이 성화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이제 깨진다고 하더랍니다. 거기서 성화를 안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안 가르치면 안 됩니다.
그다음, 중생케 하시는 분. “중생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해준다.”, “성령의 사역.” 동그라미. “우리는 아르미니우스파와 반대로...” 줄치세요. “중생이 인간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독자적 사역이라고 본다.” 계속 “중생 사역에는 협동 사역이란 있을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은 새 생명을 심는 것으로 성령의 직접, 즉각적 역사이다. 중생은 복음의 사역이 도구로소 사용 될 수 없는 것으로 봄으로 하나의 독창적인 사역이다.” 무슨 뜻이냐면 복음을 전해도 전하는 복음을 듣고 깨닫는 것으로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은 그렇게 깨닫는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밀스러운 사역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경우 이 복음을 전할 때 성인의 경우에는 회심과 함께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획일화 하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을 하고 나중에 회심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자, 예를 들자면 “리버한이 모태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더라.” 할때 이런 것들을 개혁 신학자들은 이 사람이 모태에서 중생했다고 봅니다. 그러면 회심은 나중에 하게 됩니다. 의식 생활 속에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겁니다. 자, 그 다음. 어쨌든 회개와 중생의 가치를 보더라도 회개하는 것 때문에 중생한다고 말하면 인간의 자신의 자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 다음에 “중생에 필요한 필요성과 구원 자세서의 위치”. 거기도 나오네요. 자, “설교의 말씀이 중생에 있어서 도구로 사용된다고 증거 하지만 이 구절은 신생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서의 중생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중생은 보다 총괄적인 의미로 볼 때 확실히 말씀에 방편을 통하여 이뤄진다. 중생의 필요성은 인간은 본래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임으로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 받아야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소명과 중생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느냐다.” 줄치세요. “이에 대한 대답으로는 성인에 경우에는 외적 부르심이 항상 선행하지만 엄밀한 의미로는 중생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새 생명을 심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중생은 내적...” 줄치세요. “내적 부르심보다는 앞서며 외적 부르심은 넓은 의미의 중생 혹은 신생보다 앞선다.” 그러니까 외적 부르심이 있고 그 다음에 중생이 있고 그 다음에 내적 부르심이 있다. 그 순서는 “루디아의 전환”이 아니라 회심. 회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외적 부르심),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중생)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한신지라(내적 부르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회심과 믿음. “중생에서 이룩된 변화가 의식적 생활 가운데서 나타나기 시작할 때, 이를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회심에 대해서 회심도 성경에 대해서 넓은 의미의 회심, 좁은 의미의 회심을 이야기합니다. 좁은 의미의 회심은 구원에 이루는 회심이고 넓은 의미의 회심은 이미 이뤄진 회심의 반복적 경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도 회심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정의가 나옵니다. “회심이란...” 줄치세요. “회심이란 중생한 자로 하여금 의식적 생활 가운데서 믿음,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를 통해 보면 1) 하나님이 회심의 창시자” 그 다음에 “2) 중생은 생활의 의식적인 변화를 통해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영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3) 중생에 있어서는 하나님만 역사하시고 인간은 피동적이지만 회심에 있어서는 인간은 협동...” 동그라미. “협동 하도록 요청을 받는다. 그런 경우에 인간은 다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행하는 것뿐이다. 회심은...” 줄치세요. “회심은 중생과 같이 순간적 변화이지, 성화와 같은 점차적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과는 달리 회심은 무의식적 생활에서 일어 난다기 보다는 오히려 의식적인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회심은 모든 성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회심이 반드시 각 사람의 생활에서 현저한 전환점으로 나타나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나아만, 므낫세, 삭개오, 구스, 내시, 고넬료, 바울, 루디아 등과 같은 사람의 회심을 예로 들어 말해준다. 국민적 회심, 마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일시적 회심, 반복적인 회심이 있다. 회심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복을 인정치 않지만...” 이 반복은 회심의 반복이 아니라 흐려졌던 새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 한다 이겁니다. 침체로 부터의 회복을 말합니다. “회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두 줄 쳐 놓으십시오. “소극적 요소인 회개와 적극적 요소인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회개 그러면 항상 머릿속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 믿음 그러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이렇게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회개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이 두 가지가 손바닥 양 처럼 짝을 이루며 이것을 회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회개. 회개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데, 1) 지적 요소. 과거 생활이 자신의 비행과 추행과 무력함을 수반하는 죄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2) 감정적 요소. 이것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항하여 범한 죄를 슬퍼하는 것이다. 3) 의지적 요소. 이것은 목적의 변화에서 일어나는 요소인데 죄로부터의 내적인 전환과 죄를 용서받고 씻어 버리고자 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는 본래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인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이게 놀라운게 회개가 일어나는 순서가 죄가 들어오는 순서와 똑 같습니다.
(예화)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예를 들면 이것을 봤습니다. “어? 목사님 방에 500년 된 도자기가 있네?” 딱,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 저거 5억 원짜리인데...” 이게 진짜 5억 원짜리는 아닙니다. 1,500원이면 삽니다. 이게 뭡니까? 인식입니다. 그리고 이 속에서 굉장히 빠르게 막 마음이 움직이는데 “어, 이걸 갖고 가서 골동품에서 팔아서 5억이지만 최소한 장물이니까 3억을 받을 거다. 그 3억을 받으면 여행도 갈 수 있고 그다음에 집도 살 수 있고...” 막 생각을 하면서 이 속에서 이제 이것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는 겁니다. 거기까지는 감정입니다. 아까는 지성, 감정. 그리고 와서 이걸 Take 하는 겁니다. 갖고 가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완벽하게 죄가, 절도죄 가 성립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봤는데 계속 만지작거리고 갔으면 마음으로만 좀 죄를 진 것이지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죄를 실행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렇죠? 법적으로 처벌인 안 될 겁니다. 뭐 무단 침입한 것은... 무단 침입이라고 말할 수는... 교인이 왔으니까. 만지작거리다 갔다. 그런데 집에 갖고 갔어요. 그런데 회개 할 때 어떻게 되냐면 “저건 우리 목사님 건데...” 지성입니다. 지식이 인식을 하는 겁니다. “저걸 내가 훔쳐오다니...” 마음이 이제 감정적 요소입니다. “이럴 수 없어. 돌려 드려야지...” 그러고 갔다 와서 갖다 놓고 나감으로써 회개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설명이 깔끔하지 않습니까? “세 가지 중에서 어떤 하나를 결핍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결핍을 하면 죄의 실행이 성립이 안 되고 그 다음에 회개가 완결이 안 됩니다. 이거 보면서 “아, 저거 목사님 건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지금은 나에게 있잖아.” 그러면 회개가 아닙니다. “어, 저거 목사님 건데! 내가 어떻게 목사님 걸 갖고 온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올 수가 있어?” 막 하면서 핸드폰 하면서 “500년 전 작물인데 이거 도자기 얼마 줘요?” 이건 회개가 아니잖습니까? 사실 그런 사람들이 많단 말입니다. 영원히 잊어먹지 않게 머릿속에 딱 넣어 두십시오. 하나님이 놀랍게 죄 짓는 순서, 회개 하는 순서 똑같이 만들어 놓으신 건 뭡니까? 죄를 지을 때 마음을 더럽히면서 들어온 그것을 똑같이 죄를 씻으면서 하나님이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놀라운 지혜입니다.
자, 그 다음. 시험에 꼭 나옵니다. 그 다음에 “로마 교회의 개념. 로마 카톨릭은 회개에 대한 외적 관념을 갖음으로 회개는 선천적 죄에 대한 슬퍼험이 아니라...” 줄치세요. “외적 형벌에 대한 공포로부터 일어난 것에 불과한 개인적 범죄에 대한 슬픔이며 용서해 줄 수 있는 신부에게 말하는 고백이며 금식 고행과 성지 순래와 같은 고해 성사의 외부적 행위에 의한 배상의 표준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이게 뭐냐면 보속(補贖)이라고 합니다. 개신교에서 보는 것은 훨씬 영적이고 그 다음에 종신적이에요. 그러면서 통존적인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어떻게 보냐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자기가 그 공의를 따라서 일정한 것을 자기가 댓가를 지불함으로서 그 죄가 면죄 된다 이런 교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교리가 연혹 교리나 면죄부 같은 것들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잖습니까. 그게 참 어렵습니다. 말이 좀 안 되지 않습니까. 어떤 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그 내적인 특성이 많이 무시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그래서 어떤 식으로 하냐면 고해 성사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그런데 신부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가난한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막 폭식하고 그랬습니다.” “주기도문을 100번 써라.” 이정도로 나오는 겁니다. “내가 이웃집 여자와 간음 했습니다.” 그러면 “성지순례 하거라.” 성지 순례를, 지금은 성지 순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웃기는 겁니다. 성지 여행이지 그게 무슨 순례입니까? 성지 순례 당시에는 나라와 나라를 거쳐서 그 수천리 길을 여행을 해야 하는 겁니다. 사실 거기에서 강도를 만나거나 어려움을 만나서 죽을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겁니다. 독실한 신앙심이 없으면 감희 할 수 없는 모험입니다. “성지 순례를 해라...” 그런데 뭐 “돈을, 전 재산을 기부를 해라.” 이런 식으로 신부가 정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이행을 하면 자기의 죄가 면제가 되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굉장히 미신적입니다. 여러분 동의 하시겠습니까? “목사님 제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뭘 고백 하는데?” “목사님 제가 크리스챤 청년으로서 이러면 안 되는데 계속 게임의 유혹을 못 끊으면서 제가 야한 동영상으로 매일 밤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무슨 컴퓨터를 갖고 그랬느냐?” “삼성 586 컴퓨터를 갖고 그랬습니다.” “며일 동안 그랬느냐?” “제가 5일 동안 그랬습니다.” “그러면 삼성 S 컴퓨터 신형 5대를 교회에 바치거라.” 이러면 여러분 동의가 되겠습니까? 안되죠? 교회가 그런 모든 것을 사해줄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참, 천주교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신부님이 말씀 하실 때 “아니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교사 좀 하거라.” 그러면 “아니요.” 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뭐냐면 가장 강조 되는 게 뭐냐면 순명(順命)의 길입니다. 순명의 삶입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삶. 개신교는 그런 점에서 개판입니다. 질서가 너무너무 없습니다. 없어도 너~ 무 없습니다. 진짜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는 조금 질서를... 그것도 개념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개념없음> 책도 썼지만 질서가 없습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건 교회를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어휴, 오늘 내가 왜 이렇게 잔소리를 이렇게 많이 합니까?
회심의 적극적 요소인 믿음.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동일한 의미로 말하지 않습니다. 자, 역사적 믿음입니다. 이건 뭐냐면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건 구원과 상관이 없습니다. 일시적 믿음입니다. 이건 뭐냐면 중생한 자의 마음에 뿌리 박은 믿음이 아닙니다. 양심의 자극이나 감정의 흥분으로 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결국 영속적인 성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겁니다. 그게 뭡니까?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걸 보면 믿음이 거기에 믿음이 3 종류가 나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 나오고 그 다음에 돌자갈밭 그 다음에 가시밭 그 다음에 마지막 옥토에 떨어진 밭나왔잖습니까. 그 네 가지 중에서 구원을 얻는 믿음은 다음 중 어떤 것일까? 1) 4번만 구원 얻은 믿음이다. 2) 3,4번만 구원 얻은 믿음이다. 3) 2,3,4 모두 구원 얻은 믿음이다. 답이 어떤 것입니까? 틀렸습니다. 4번만 구원 얻은 겁니다. 아! 맞았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2,3,4 다 구원 얻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건 아닙니다. 그럼 염려는 어떻게 되냐고 합니다. 염려는 거기서 그러는건 믿음이라는 형체를 갖고는 있지만 사실은 진정한 믿음이 아닌겁니다. 그래서 결실한 믿음. 거기입니다. 거기까지가 이제 진정한 믿음입니다.
자, 그 다음에 이적적 믿음. 이거는요 두 가지인데 이적에 의해서 믿음을 갖거나 자신의 믿음이 이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건 구원 얻은 믿음일 수도 있고 구원을 못 받은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D) 구원적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해야하는데 다른건 줄칠 필요는 없고 이것만 줄치세요.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 대해 말할 뿐만이 아니라 그 필연성을 강조 한다. 이 신앙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중생한 생명의 뿌리박고 있다. 신앙의 씨는 중생의 밭에 뿌려지고 능동중 믿음이 된다. 그러므로” 꼬불꼬불(??)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란 성령에 의해 마음속에 일어나는 복음, 진리에 대한 개인적 확신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실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 “믿음의 요소. 세 가지로 구분하다.” 똑같은 겁니다. “지적 요소. 진리에 대한 적극적 인식” 줄치세요. “죄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진리에 대한 영적 통찰력이 있다. 이 요소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이 지식은 신자에게 복음의 기본적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을 재공하기에 충분해야 된다.” 뭘 믿는지도 모르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믿어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면 “Jesus died for us.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가장 요약하면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게 됩니다. 길게 이야기하면 훨씬 길고.
“B) 감정적 요소. 찬동. 왜냐면 이 요소가 구원 받는 믿음에 지식 속에 실지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요소가 대상의 중요성을 강한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지식의 특성인데 이것을 찬동이라고 한다.” Approbation이라고 하는데 찬동입니다.
그 다음에 “의지적 요소. 이 요소는 구원 받는 믿음에 으뜸가는 요소가 된다.” 줄치세요. 계속. 꼬불꼬불하게. “이것은 사죄와 영적 생명에 관해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인격적 신뢰. Trust인데 Trust는 그리스도께 범죄한 영혼의 항복을 포함한 것이다.” 항복은 뭐죠? Surrender.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맞기는 것. 그분께 절대적인 무한대의 복종의 삶을 살겠다는 겁니다. “마지막 분석에 의하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구원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워진다. 이 신앙은 인간의 행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신앙의 수행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복적으로 권고 받는 인간의 활동이다.” 거기서 2,4,6,7 줄 동그라미 치십시오. 전체를. 그게 핵심입니다.
“믿음의 확신.” 이것은 뭐냐면 ‘확신’ 그럴 때 두 개가 있는데 ‘Conviction' 있고 'Assurance'가 있습니다. 'Conviction'은 죄에 대한 확신입니다. 'Assurance'은 구원 받은 것 자체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구원 받은 사람이 그것을 항상 충만하게 갖고 있는 것이 좋지만 그것을 구원 받은 사람이 항상 갖는 것은 성화의 정도와 비례를 합니다. 이런 확신이 사람에게 충만하게 있을 수도 있고 'Assurance'가 매우 적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 여부와는 관개가 없다고 보는 것이 개혁파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 있잖습니까? “구원에 확신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물어 보잖습니까? 확신이 있어도 그게 가짜일 수 있고 확신이 없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좋은 것은 구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확신이 넘쳐서 기쁘게 삶을 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마지막 “감리교회에서는 믿는 자가 곧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다고 말하지만 궁극적인 구원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은혜에서 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올바른 견해는...” 줄치세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께 대해 신뢰를 포함하는 진정한 믿음이란 자연히 안전과 보호의 의미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 확신은 신자의 영구한 의식적 소유물이 아니다. 언제나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신을 얻도록 권고를 받는다.” 줄침으로소... 아. 줄침으로소가 아니라... 저녁을 안 먹었더니 말이 헛 나왔습니다. 하하하.... “이 확신은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명상함으로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진전에 의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 너무 좋습니다.
아하~ 칭의 교리를 할까요. 20과 까지 나갔습니까? 하나, 둘, 셋 아! 네 주면 끝나겠습니다. 네주. 기뻐하십시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한 사람만 받겠습니다. 질문? Question? Question. 없습니까? 네. 좋습니다. 그러면 잠깐 기도하고 우리 시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