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대 특강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리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0-32).
사도 바울이 이 에베소서를 기록한것은 인생에 말년이었습니다.
복음과 하나님을 믿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소유한 이후에 복음에 의미를 새롭게 진술해 갔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에베소서는 1장부터 이제 3장까지 우주와 교회와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그 다음에는 초점을 교회에 이동해서 그러한 하나님에 우주적인 계획을 바라보면서 사는 구속받은 하나님에 백성들이 어떻게 교회에서 그러한 하나님에 계획에 부합하는 교회가 되도록 한 몸을 이루며 살아야 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생활에 관한 여러 충고를 한 후에 서로 용서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며 4장을 마치고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주님을 만났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에 몸에 접붙여져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께 접붙여져 이제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기로 했다는 점에서는 완성된 사람이지만 아직까지도 마음 속에 자기를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에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이기심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는 아직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 모여서 함께 찬송을 하고 주님을 높이면서도 사실은 그들이 서로 서로 결함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기도 하고 혹은 큰 결점이 없지만 내 마음에 있는 잘못으로 인하여서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될 수 있는 이런 갈등의 소지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 교회인것입니다.
저는 두 개의 대학에서 9년정도 교수생활을 했고 지금은 총신대학교에 석사교수로 있습니다만은 지금이야 목회가 바쁘니까 학교에 깊이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그 학교 생활이 참 힘들고 어렵다 하는것을 교수생활 하면서 느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누구를 만나도 서로에 대해서 호평을 하는 사람이 없어요. 정치적인 이유에 있어서 맞수가 되기때문에 비판을 하던지, 학문적인 경향이 맞지 않아서 다른 견해때문에 비판을 하던지 더욱이 학교에 선생으로 있는 분들은 특별히 대학사회에서는 그 생명이 분석과 비판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의견을 내놓으면 그것을 아멘하고 받아들여서는 학문성이 없는거예요. 그걸 정확하게 판단하고 비판하고 분석하고 하는 것이 그것이 학자로써 몸에 베인 습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다면 학자로써 결코 성공할 수 가 없습니다.
저도 아마 학교 생활하면서는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개척교회를 시작을 해서 한 17년이상 이렇게 목회를 하다보니까 교회는 학교와는 전혀 다른 정신을 요구해요. 그것은 뭐냐하면 분석과 비판이 아니라 통합과 조화의 마인드를 갖지 않으면은 교회는 이끌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 타당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면서 함께 살아가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돌보는 그것이 아니면은 목회자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도덕적이고 그리고 진리에 속한 문제일 경우에는 칼같아야 되겠지만 그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서로에 다름을 인정하면서 살고 그리고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때문에 비판하고 미워하기 보다는 나와 다르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를 아름답게 하는 한 이유다라고 생각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연세 드신 교수님들은 그 역사를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우리 나라에는 농업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때에 학자들이 통일벼라는걸 만들어 냈습니다. 근데 이 벼가 참 기적의 볍씨예요. 같은 면적에 벼를 심었는데 다른 볍씨를 심었을때보다 30%소출이 더 나오는 거예요. 물론 결점도 있습니다. 낱알이 많이 떨어져서 다시 이삭을 주워야하고 그런건 있지만 그래도 30%정도가 소출이 더 나오는거죠. 그 당시에 30%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거죠. 100가마를 거둘 수 밖에 없는 면적에서 130가마에 벼를 거둔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요. 그래서 독특한 군대정신으로 밀어부쳐서 전국에 전부 다 통일벼를 심었습니다. 뭐 처음에는 기가 막혔죠. 30%이상씩 소출이 더 나오니까 너무 행복했죠. 어느해에 병충해가 몰아닥쳤습니다. 근데 완전히 초토화되버렸어요.
왜냐면 품종이 모두 같으니까 하나에 병이 딱 생기니까 막 막을 수 없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거예요. 그때에 커다란 식량위기를 겪으면서 학자들이 대오각성을 하게된건데 아 이거는 아무리 효율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농업정책을 해서는 안된다하게 된거예요. 지금도 보면은 이렇게 인제 밭이 논이 4개가 있다면은 절대 통일해서 같은 벼를 심지 않습니다. 여긴 통일벼 여긴 다른 종류 여기 또 다른 종류 다른 종류 섞어서 심어서 면적을 나누어요. 병충해가 이쪽을 쾅하고 강타해도 이쪽을 넘어오지 못하는 병충해가 많아요. 왜냐하면 품종이 틀리기 때문에. 그렇게 해가지고 하는 거예요. 밤하늘에 별을 보십시요.
크고 환하게 빛나는 별이 있는가 하면 흐리고 작은별이 있습니다. 붉은색 별이 있는가 하면 은색빛을 내는 별이 있습니다. 그 별들에 빛깔과 그 밝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밤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기독교 대학에 부합하지 않는 비리와 불법이 있다든지, 아니면은 정확하게 진리적인 측면에서 오류에 빠졌다든지 하는 것은 기독교 대학으로써 신앙인으로써 잘잘못을 가려내고 책임을 묻고 엄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외의 것들로는 다투거나 서로를 미워하면 그것은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하는 것이죠.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용서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두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사람들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되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그 성령님을 슬프시게 하는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과에 온전한 교제가 불가능해 지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로써 기독교 대학을 섬기고 계십니다. 우리가 모든걸 아는 것도 아니고,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것을 행할 힘이 우리에게 있는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지혜를 구하고 또 겸손하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빕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기도에 응답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때 그런 삶이 가능해 지는 것이죠.
그런데 한쪽으로 사람들을 미워하고 쉽게 원수맺고 마음에 불편한 것은 결코 용서하고 풀지를 않고 이렇게 하면서 지혜를 주십시요. 용기를 주십시요 환경을 열어주십시요 능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마치 같은 친구에게 한 쪽손으로는 돈을 빌려달라고하고 한쪽 손으로는 따귀를 때리는 것과 같은 거라는 거죠. 그렇게 해선 안된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에 삶이 그렇게 이율배반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교회가 확장 되어간다는 것. 아마 여러분도 기독교 대학에 종사하는 교직원들로써 이 대학이 성장하기를 원하실겁니다.
해마다 입학하는 학생수가 줄어들고 교수들이 비젼이 없다고 학교를 떠나서 어느 대학교처럼 학교 건물을 매각하는 그런 학교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한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 대학이 성장하고 그리고 확장된다고 하는것은 어떤 성격의 것일까요? 무조건 학교가 커지고 그리고 온갖 이상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오고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 대학이라는 껍질만 가졌을뿐 거기에서 반기독교적인 사람들을 수 없이 만들어내고 이율배반적인 신앙을 가진 교수들을 만나서 그나마 이 싹이 기독교 신앙의 싹이 날만한 사람들이 오히려 기독교 대학에 들어와서 다 짤려나가는 그런 대학이 되는건 원하지 않으실겁니다.
우리에 소명은 단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밥을 벌어먹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각자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때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찌도 우리에게 정해주셨지만 그것은 삶의 양태일 뿐입니다. 공부를 가르키고 학문을 하는 교수가 학교에서 마당을 쓸고 청소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앞에서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두 종류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각각 다르게 평가하겠지만 그 평가만을 바라보면서 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20세기 중엽에 미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복음주의 지도자 가운데 윌리엄 에이든 토즈라고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자기에 책속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늘에 천사가 셋이 있었는데 그 천사 셋에게 하나님이 각각 명령을 내리셨답니다. 한 천사에게는 왕의 지휘봉을 들려주면서 한 나라에 가서 임금노릇을 하라고 시켰답니다. 두번째 천사에게는 주판을 주면서 너는 가서 큰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되라고 시켰답니다. 마지막 세번째 천사에게는 육군철모에다 막대기를 끼어서 들려주면서 너는 가서 똥을 푸라고 그랬데요. 각기 세 천사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왔답니다. 그 목사님에 질문은 이겁니다. 한 천사는 임금의 호를, 한 천사는 주판을, 한 천사는 똥바가지를 들고 구름을 타고 내려왔을때 그들이 마음이 각각 달랐겠느냐 이겁니다. 자기의 일에 대한 마음이 각각 달랐겠느냐?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 직업관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수많은 학생들이 아무리 시대가 악해졌다고 하더라도 제일 먼저 학교에 오면은 선생님들에게 지대하게 영향을 받게 되있습니다. 그때에 이 선생님이 성령님과 동행하고 그 분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 은혜로운 모습을 보면 엄청난 영향을 그 아이에게 끼칠 수 있습니다. 대학이 확장되어 간다는 것은 바로 그런 extension 사랑의 확장입니다. 그 사랑의 확장을 주도하는 분이 성령님이예요. 그런데 오늘 '너희가 사람을 미워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성령님이 슬퍼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를 슬프게 하시고야 어떻게 그에 의해서 확장되는 기독교적 대학사회를 꿈꿀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우리들이 그 안에서 인쳤다고 하는 것을 가르켜주는 거예요. 여기서 인쳤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보증인이 되셨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면 출생증명서가 있습니다. 나이가 차서 18살이 되면 주민등록이 나옵니다. 객관적으로 내가 대한민국에서 사람으로 태어난것과 그리고 이 나라에 정당한 성인이 된것을 증명하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물은 없습니다. 교회에 교적부가 있지만 그게 무슨 법적인 효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며 또 부족한 것이 많지만 하나님에 사랑을 받는 언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져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굳게 붙드실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인치심, 쓸림입니다.
최근에 그리스가 디폴트사태 가까이 다가가면서 부랴부랴 독일과 프랑스가 보증을 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즉 그리스의 국채를 샀는데 국가가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면 독일 정부와 프랑스가 돈을 대신 물어주겠다는 뜻이 그게 바로 보증입니다.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증하는 유일한 징표예요. 그런데 그 성령의 보증하는 인치심의 강도는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기뻐하는 그분이 얼마나 기뻐하는 삶을 살면서 그 분과 화해를 누리느냐에 의해서 이 보증의 강도는 각각 달라지는 거죠. 가끔 아마 신앙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내가 구원받았을까? 그런 질문을 하기도합니다. 그것은 만약에 그가 구원 받은 사람인데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남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것 그것도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형제 자매된 사람들끼리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그게 결국은 우리에게 성령을 슬프시게 해서 약속에 인치심의 효과를 현저히 상실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한 봉사예요. 그래서 위대한 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어요.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악을 행할때 그 사람에게 악한 일을 당한 사람보다 더 나쁜일이 그에게 악을 행한 사람속에 이미 일어났습니다. 누군가 나를 때려서 피를 흘리면 약을 바르고 시간이 지나면 나는 치료가 되겠지만 그렇게 폭력을 행한 그 사람 마음에는 더 심각한 이 악이 깃들게 되어서 그 다음엔 자신도 더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 마음의 쓴 뿌리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 사도가 악독이라고 표현한 이 말에 원래 히랍어는 영어에 bitterness라고 하는 뜻입니다. 쓴것입니다. 쓴 것. 그 쓴것이 마음 깊은 곳에 잠겨있는데 사람과에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마음안에 그런 쓴뿌리가 있는것을 미처 몰랐는데 그것들을 솟아나게 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용서하지 못해서는 안되는 이유인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참 진실하게 알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나를 선대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만났더라면은 나에게 그런 못된 쓴뿌리가 있는줄을 몰랐을 텐데 아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함께 어울려 살면서,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결코 보지못했을 자기 자신에 모습을 보게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그것은 아주 단기적인 이익으로 보면은 굉장히 불쾌하고 가슴 아픈거지만 장기적으로 보면은 그것은 굉장히 고마운 이웃이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우리에 몸에 있는 어떤 잘못된 부분들을 찾아내는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는 노인 한 분이 있었는데 사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으세요. 이 분이 죽어도 안하는게 있어요. '건강검진' 그래서 왜 그렇게 안하십니까? 그랬더니 모르고 사는게 낫지 만약에 검진을 받아서 큰 병이라도 있다그러면 그 얼마나 가슴이 아프냐. 결국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철저하게 건강검진을 합니다. 오히려 50만원 100만원을 주고 전신을 촬영했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면 나쁠거 없죠. 좋죠. 그러나 더 돈을 많이 들여서 검사를 했더니 어떤 잘못된 부분이 내 몸에서 발견됐다할때 내게 그것을 발견하게 해준 그 의사를 원망할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나는 그런게 있는줄 전혀 몰랐고 자각도 없었는데 당신 어떻게 그것을 발견했냐 참 고맙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 맘에 들이 않고 우리를 자꾸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일 수 가 있는 거에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쳐져야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시금석이라고 아시죠? 테스트라고 하는것 말이죠. 광물질이 고체상태에 있을때는 검은색이었는데 조흔석에다가 갈면 가느다란 가루가되요. 그 회색이예요. 거 본질은 회색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조흔석의 역할을 우리와 잘 맞지않는 때로는 상식이 부족한 때로는 아주 못된 그 사람이 나를 자기에게 갈아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는거예요.
사실은 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서 진실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 진실을 우리를 아주 미워하는 사람, 악의에 가득차서 비난을 퍼붓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우리에 관한 부풀려진 과장도 발견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콩꺼풀이 씌여서 우리를 보지 못하는 그 부분을 그 사람들은 봅니다.그래서 예리하게 지적을 해요. 직장생활은 위계질서가 있으니까 회장이 한 마디하면은 법적으로 쫙 통합니다.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불행한 사람들이예요. 자기가 고쳐지기가 힘든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인제 교회라고 하는건 그리스도인으로써 사랑의 삶을 살려고 할때에는 그런 권력만을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때때로 저도 지도자에 길을 걸으면서 비난을 받을때도 있고 호평을 받을때도 있을것 아닙니까? 처음엔 전 완벽주의적인 성격이라서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나와 마음에 엉킨것이 있는 사람이 있다라고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을 못자는 성격이었습니다. 밤중에 달려가서라도 진위를 가려야되는 성격이었어요.
나중에 그것이 잘못됐다는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호평하거나 비난할때, 만약에 내가 똑같이 감정적으로 격동해서 퍼붓는다면 그러면 오줌물과 똥물을 주고 받는 격이 되잖아요.
그 두사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깨달은것이 뭐냐하면 누가 나를 비난하면 일단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한번 물어보는거죠.
어떤 사람이 나보고 너는 이런 사람이라고하고 비난을 퍼붓습니다. 상세하게 말씀을 드려요.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응답이 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안한다.
그럼 그 사람 잘못한거죠. 그러고 이제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너무 분해서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저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비난을 퍼부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저 자식이 나쁜 자식아닙니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말이 과장은 있지만은 그러나 그 말이 대체로 줄거리는 맞다. 니가 나쁘다. 그래도 회개하게 되는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회개하게 하지 못했어요. 근데 나쁜 사람들은 나에게 그렇게 하게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정정당당하게 찾아가서 내가 당신에 말을 들을때 처음에는 굉장히 분노했는데 내 스스로를 반성해 보니까 당신 말에 상당부분이 맞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부족하니까 앞으로 잘 하도록 노력할테니 그리스도안에서 나를 용서해 다오. 그렇게해도 용서를 안해주면 그러면 할 수 없는거예요.
그리고 새 출발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양심에 언제나 구김이 없어요.
무슨 구김이 있을 수 가 있습니까?
부족하면 주님께 용서를 빌고 모자라면 주님께 채워달라고 하면서 살면되는거죠.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한 몸을 입은사람들로써 그렇게 용서하며 살아야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예요.
그리스도에 몸에 접붙여진 성도들로써 잃어버리지 말아야될 삶이 둘이 있습니다.
기둥과 같은 두 삶이 있는데 인간관계에서.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는 나누어 주는것이고 또하나는 용서해 주는것이예요.
그래서 나눔을 통해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눔을 통해서 이 약하고 부족한 자들이 더 많은 사람을 인해서 가난을 면하게 되는것, 이것과 그 다음에 내가 죄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줌으로써 사람들의 이기심과 악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용서라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막혔던 혈관에 피가 흐르듯이 다시 사랑이 흐르게 되는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 삶이어야 하는 것이예요.
오늘 아침에 잠깐 운전을 하면서 레디오를 들으니까 좋은 사람이 성격이 좋은 사람이 되야겠는데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라고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물었어요.
그랬더니 신경정신과 의사가 자기네 정신의학계에서는 인간이 세 조건을 갖췄을때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른다른 거예요.
첫째가 뭐냐하면은 자기에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된다고해요.
그러니까 막 분노하고 싶어도 그것을 배설하듯이 쏟아내서는 그가 아무리 좋은걸 많이 가지고 있어도 좋은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감정조절이요.
두번째가 뭐냐 그랬더니 건전한 자아상이라는 거예요.
자기가 아주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자아상을 가져도 안되고 여기 있는 모든 인간들은 내 발닦개 밖에 안돼 이렇게 생각해도 안된다.
그러니까 한 인간으로써 건전한 자아상을 가져서 너무 바람이 들어가지도 말고 찌그러지도 말아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아이들이 계속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자아상 자체가 '나는 엄마 아빠에게 인정을 받는 찌그러진 인간이야. 나는 학교에서도 나보고 선생님이 못됐대.'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자아상이 못된 못된 자기예요.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못되게 살아도 나에게 어울린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세번째가 뭐냐면 다른 사람에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것 이거예요. 이거예요. 근데 이 세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뭐냐하면 사랑이예요. 사랑.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이예요. 사랑이예요.
그런데 결국 그리스도안에 있는 인간관계라고 하는것은 그 시작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이 되는 거거든요. 내가 하나님에 사랑과 은혜를 알고, 그래서 내가 이제는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인생에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며 살지를 않겠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앞에서 자기가 죄인이요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닫는 참회에 의해서 하나님에 사랑과 하나님에 사랑을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다시 관계를 맺으신다고 하는 이 경험에 의해서 그 사랑을 깨닫게 되는거. 그게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 본질인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이런 고백을 하잖아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but now I see
그 고백이 없으면 크리스찬이 아니예요.
그래서 하나님에 사랑이 어떤 사람은 통해서 나에게 전해지고 그들이 나를 사랑해 근데 그 그런 사랑 그 다음에 우리 물질도 연약한 지체들에게 나누어 주잖아요?
그러면 나는 원래 없었는데 그런 하나님에 사랑을 통해서 그것이 강물에 배가 떠다니듯이 이렇게 떠내려와서 나에게 오는 거예요. 근데 이 떠내려온 모든 것들이 내가 그 모든것들을 사용하는 종착역이 되는 그 순간, 인간은 악에 빠지게 되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도에 참된 행복은 이렇게 하나님께로 부터 시작된 사랑이 지체들을 통해서 나눔과 용서라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작용을 통해서 교회 전체를 휘도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베풀어 주셨나 하면서 또 자기가 거기에 굴복할때 주님이 주신 그것들을 이렇게 또 흘려보내는 거에요.
제가 대학에 있을때 학생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선생들은 들어와서 공부해서 남주냐그러는데 공부해서 남줄려고 하는거다 공부해서 남줄려고 하는 거다.
돈벌어서 남주냐 그러는데 돈 벌어서 자기 가질려고 살아서는 안돼. 남을 줄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야야된다 이거예요.
거기에 인생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흘러가는 거예요.
이것을 가로 막게 하는것이 바로 물질적으로는 이기심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는건 자기사랑인데 표현이 다를 뿐이지 두 개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인에 삶이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에 사랑으로 부터 시작되서 거대하게 인간에 영혼과 마음을 통해 흐르는, 흘러서 그것이 우주를 휘돌아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다시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와서 우주로 인류 전체를 휘감아 돌아가는 하나님의 신적인 자기 회기적 사랑의 통로에 있는것이 인간의 존재이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빛나고 존귀하고 고귀해지는 아름다운것은 그런 자기회기적 사랑의 아주 아름다운 통로로써 인생을 살아갈때 그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거죠.
사도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내게 악을 행하거나 잘못했을때, 의도가 있든지 없든지 그를 충심으로 용서해주는 마음의 은혜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것이 첫째는 '인자하게 대함'이란 거죠.
인자함이라 하는 것이예요. 번역이 문제가 많습니다.
적합하게 옮길 수 있는 우리 나라 말이 없어요. 히랍어로 '크레스토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원뜻은 '이용할 만한' '쓸만한' 혹은 '섬길 수 있는' '써먹을 수 있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인자한 마음을 품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하면 그가 그 자신에 이익을 위해서 나를 이용할 수 있도록 내가 자기 개방성을 가지고 있느냐 이게 바로 인자함인거예요. 이게.
인자함인거예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대로 차라리 남을 속이고 싶은 사람은 있어도 자기가 속임을 당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나 자신의 부를 쌓고 직위를 높이고 나를 즐겁게 하는데에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내가 좋아도, 다른 사람이 나를 이용해서 그 사람에 이익이 되게하게 위해서는 내가 희생을 해야 되는데 그게 좋은 사람이 어디에 있냐 이거죠.
그런데 너희는 그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예요.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선을 베풀거나 대할때에 그 사람의 중요성이나 혹은 그 사람이 나에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우리 자신이 그 사람에게 이용되어줍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이용하는 거예요. 이용하는거.
유용애라고 합니다.
'유용' 자기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게 뇌물이잖아요. 지금 교육계가 뭐 완전히 난장판이 됐는데 결국은 그게 뇌물이죠.
그것이 바로 그런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 자신의 박애로운 성향으로 부터 사람들에게 우러나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그것,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예요.
우리 교육에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기독교교육 뿐만아니라 모든 민주시민 사회에서 교육을 하나로 모아서 딱 하나로 정의를 세우고 목표를 세우라면 이겁니다.
'참다운 인간이 살아가야 할 그 삶을 실천하는 것이 자기에게도 즐겁고 행복한 성향을 사람에게 갖게해 주는것' 다시 말씀드리죠. '참된 인간으로써 마땅히 살아야할 그 삶이 그 사람에게도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스럽게 여겨지는 성향을 이 속에 넣어주는거' 그것이 참다운교육에 목표예요.
그러면 보십시요.
우리가 기독교적인 관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류역사 모든 사람들이 용서를 가르쳐 왔습니다. 비록 우리와 종교는 다르지만은 저는 달라이라마의 그 '용서'를 읽으면서 그 분을 정말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그 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다 용서했어요.
그 글이 가식이 아니라면 그는 정말 용서했어요.
그것이 자신이, 자신과 자기에 민족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믿는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런 용서를 그리스도에게로 부터 배우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 당하는것, 이것을 삶에 보람이라고 여겨야 되는 것이죠.
그러면 사람이 욕심이 있고 자기 행복을 위해 살려는 본성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그래서 하나님에 은혜가 필요한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먼저 그것을 보여주셨죠.
그래서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날동안 자기에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부유한 분이지만 가난한 우리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낮아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에 죄를 용서받게 해주기 위해서 죄인 중에 괴수처럼 모든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죠.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사람들은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할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되게 이용할려고 합니다. 여기도 목사님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은 뭐 우리 교무실장님은 완전히 열외로 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목사들이 공짜를 참 좋아합니다.
왜그런지 모르겠어요.
제가 책을 제법 한 20년동안 많이 썼습니다. 이제까지 180만권 정도 제 책이 판매가 됐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그 책을 내가 집에 쌓아놓고 있는줄 아는 모양이예요.
어느날은 전화가 따르릉하고 비서실로 왔어요.
그래서 "여보세요" " 아 김목사님 저 아무개 목사입니다." "아 예 그러세요. 반갑습니다. 잘지내세요?" "저 목사님 부탁이 좀 있어서 왔습니다."
거 목소리가 전혀 부탁하는 목소리가 아니예요.
"저 목사님 최근에 쓴 책 그거 있죠? 그거 30권만 보내주시요."
거 책 한권에 10000원짜리 였거든요. 거 30권은 머리 속으로 탁 계산이 되잖아요. 30만원이잖아요. 나도 출판사에서 사와야 되는데...그래 "왜요?" 그랬더니 "아 목사님 우리 동창들이 우리 교회에서 모이는데 제가 한 권씩 나눠줄려고 그럽니다."
'아니 목사님 동창이 모이는데 내가 왜 목사님 동창한테 책을 30만원어치 줘야됩니까?'
여기까지 올라오는 거예요.
꾹 참았어요.
"아, 예" 마음에 꾹 참았어요. 그러고 마음에 생각했어요.
얘야 니가 맨날 교인들에게는 흘러가는 강물처럼 살아라, 강물이 그 황폐한 대지를 가로질러서 물이 흐르기만 하면 몇년 지나면 생태형성이 됩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 어디서 왔는지 물고기가 거기 살고요, 풀들이 나고 나무들이 깃들고 벌레들이 살고 수초가 자랍니다.
그래 너는 교인들보고 맨날 강물처럼 흘러가라고 살라고 그러고 너는 내가 왜 그거를 줘야되냐고 전화통에 다가 소리를 지르고 하면 되겠니? 꾹 참았어요.
"아 그러세요. 보내드려야죠. 아 30권이면 충분하겠습니까?" "아, 충분합니다."
"걱정마십시요 목사님. 제가 비서 바꿔드릴테니까 주소 불러나 주십시요. 내가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아 김목사님 택배비는 내가 내겠습니다." "됐거든요."
뭐 택배비 내고 같이 샀다고 그럴것 같애 그래서 "택배비도 제가 내겠습니다."
이렇게 했어요.
참 이 세상이요 친구가 없는것 같애도요, 이용을 당해도 좋다라고 마음을 열면 친구들 많이 생깁니다. 정말 많이 생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냐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많이 이용하고 사용해도 나는 주님께로부터 받은것이 더 많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사람들이 나를 이용하고 나를 누리며 살아가는것 때문에 행복하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서 살아가는 거. 그 마음에는 자유가 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은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베풀어준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것을 보면 행복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가 이런 시를 남겼죠.
주여 나를 평화에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에 도구로 써주소서
참 아름답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편지를 한 장 받았는데 그 편지를 보낸 발신자가 누구냐하면 카드빚때문에 어머니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고 석유를 끼얹어서 집 전체를 불살라버렸는데, 체포된 그 카드 살인범이예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부모를 얼마나 이 그 치밀하냐면요. 빨개벗고 칼을 들고 부모가 자는 방으로 갔어요. 아무 흔적도 안남게. 그렇게 죽였어요.
그러니 그 사람에 정신구조가 어떻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가서 그에게 진심으로 사랑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에 깊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한 동안 우리 교회가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에 자녀삼으신 것은 바로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예요.
모든 사람에게 인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하나는 '긍휼히 여기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가 굉장히 재밌습니다.
우리말에는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은데, 희랍어로 '유스프랑크노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원래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좋은 창자' 그런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영혼의 좌소가 뇌나 심장에 있다고 믿지를 않고 창자에 있다고 믿었어요. 상당히 타당성 있는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이 되는데, 그런 세계관이.
왜냐하면은 우리가 오장육부라고 했을때 이게 뭐냐면 오욕칠정이 들끓는 가마솥이거든요. 근데 그 가마솥이 좋은 가마솥이라는건 뭐냐하면 아까 얘기한대로 욕망이 선한 방면으로 조절되는 사람들이예요.
여기에 영혼에 좌소가 있다고 믿은 거예요.
이 단어가 아주 감동적으로 쓰인곳이 있습니다. 이게 마태복음 9장 35절, 6절 사이인데 성겨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할때 이게 무슨 뜻이냐면 '창자가 떨리기까지 감동을 받다' 그런뜻이예요.
그러니까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인간들을 보니까 예수님이 너무 그들이 불쌍해서 이 영혼의 좌소인 창자가 떨릴정도로까지 감동을 받으신.
그래서 그걸 우리말로 옮기면은 그렇게 번역하면 안되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마음이 찢어지듯 아프셨으니' 그렇게 번역을 하면 좀 비슷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죠.
이 '긍휼'이라고 하는 심리학적인 감정은 정의를 내리자면 이런것입니다.
어떤 설명하자면, 이런거죠 어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감정을 느끼게 되면 그 감정이 판단에 종속되지 않습니까? 즉 어떻게 아이구 저사람이 되게 아프겠다 그랬는데 그 사람이 나쁜짓을 한 과정을 알게된거야, 그러면 우리에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에이그 인간이 그 짓을 했으니 저 꼴이지, 그거는 긍휼이 없는 마음입니다.
긍휼에 마음은 물리적인 추론에 과정을 제외하고 현재 당하게 된 고통스러운 장면만을 보면서 충분히 불쌍히 여기는 감정, 그것이 긍휼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써 갖는 이 사랑의 감정의 절정의 상태가 이 긍휼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아주 놀라운 심리학적인 감정이 그 기원자체가 어디에서 오는 거냐면 마음과 영혼에서 오는 겁니다. 그 영혼이 순결하고 그리스도와 아름다운 교통을 누리고 있으면, 주님에 마음에 느껴지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그대로 전수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인에 올바른 감정상태는 돌멩이처럼 그렇게 무감각한 상태가 되는 것이 우리에 최고에 덕이라고 여기지 않아요. 그런 견해는 스토아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견해였어요. 오히려 희로애락에 감정이 아주 정당하고 분명할때 이게 그리스도인에 삶에 균형잡힌 인격의 그 내면질서가 되는 거죠.
예수님이 우리에 대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다는거죠.
그래서 당신은 아무 죄도 없으시고,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한 몸에 받으시는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그리고 우리에 비참하고 그리고 고통받는 상태는 마땅히 우리의 죄로 말미암는 자연스러운 결과였지만, 우리가 그런 보은을 받아 마땅했던 과거에 죗가와 진행과정들은 사살하고 그리고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고통을 겪고 있는가, 이 한 장면을 스틸사진처럼 보시면서 그러면서 이 분 자신의 안에 있는 이 사랑이 솟구친 것이 바로 우리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에 고난과 죽음의 이유란 말이죠.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미 받은 사랑이예요.
그렇기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한 모든 그리스도인에 삶에 아름다운 섬김과 이 기여의 질서희생 이 모든것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것이 현재적으로 자기 자신 속에 살아있을때, 그것이 자원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죠.
이게 바로 우리들이 기도 많이 하고, 은혜를 받고,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그리고 인정을 받아도 우리가 다만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인데,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은 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이 선생님과 직원들에게서 따뜻한 그리스도에 사랑을 발견하고 그리고 용납되고 용서하고 그 허물을 대신 짊어져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되고, 자기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교수와 직원들을 보면서, 그렇게 행복해할때, 그때 그 아이들은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되는 거죠.
저희 교회에 전혀 예수를 믿지 않다가 미국에 유학가서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형제가 있어요. 그래서 신방을 하면서 그렇게 안믿던 예수를 어떻게 믿게됐냐 그랬더니 한마디로 딱 간단해요.
대학에 들어갔는데요.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달라요. 설명할 수 없는데 그들은 달라요. 그것이 나로 하여금 수 많은 사람이 전해줘도 예수를 믿지 않던 내가 그리스도를 믿게된 이유였습니다.
달라야 합니다. 달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저는 기독교 대학이 그저 아무 학생들이나 뽑아서, 옛날에 제가 대학 보니까 교회 음악과에 불교 신자가 들어왔어요. 그건 좀 아니잖아요? 그죠? 아무리 양보해도.
그렇지만 신자들로만 학교가 꽉 차있는건 나는 별루 좋은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적절하게 불신자들이 섞여 들어올때, 거기에서 참된 신자들이, 문제는 불신자들이 많이 학교에 들어오는게 문제가 아니라 신자들이 자기 정체성을 아주 또렷하게 보여주지 못하는거, 이것이 학원선교에 위기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십시요.
아주 아름답지 않습니까?
밤하늘이기때문에 아름답지 낮이면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에 몸에는 약 60조개의 세포로 우리에 몸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1경개까지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은 대체적으로 60조개 정도의 세포로 되어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 몸에 모든 세포는 석달이상 가는 세포가 없습니다.
6개월쯤 지나면 우리는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완전히 새사람이 된겁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은 세포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이 일을 마치 60조개의 꼬마전구를 켜놓고 불이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하는 것처럼 우리 온 몸에서 그런 작용이 일어나요.
뇌만을 제외하고, 뇌세포는 한번 사라지면 다시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런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참 그 생화학적으로 풀리지 않는 과학에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지만 오죽했으면 제가 생물학을 독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게 들어가보면 뭐냐면은 세포가 있는데 세포가 죽습니다. 죽는데 그 죽음이 두 종류예요. 네크로시스라는 죽음이 있는 아포프톱시스라는 죽음이 있어요.
네크로시스의 죽음은 세포가 타격을 받아서 부서지든지 수명이 다해서 죽는거예요.
그게 네크로시습니다.
근데 이해안되는 세포에 죽음이 있는데 아포프톱시스의 죽음입니다. 이거는 세포가 그냥 스스로 죽어버리는 거예요. 자살이예요. 자살.
그럴때 죽으면서 발생하는 APT라는 화학 에너지가 옆에 있는 세포에 전달되면 그거를 전기를 삼아서 이제 생화학적인 작용을 하고 세포분열의 동력으로 사용을 하는 거예요.
우리 몸에서 그런 작용이 다 일어나는데 이 작용이 우주에서도 일어납니다.
우주에 별들이 생겨나는 그 원동력은 별들이 소멸하는것 때문에 생겨나는 거예요.
별들이 40억년 70억년 정도 지나면, 이제 이것이 외성의 상태가 되다가 쾅하는 어마어마한 천문학적 폭발을 일으키면서 사라집니다. 이때에 소위 얘기하는 star storm 별폭풍이 우주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에 이 어마어마한 열로 말미암아서 h밖에 없는 우주에 그 수소들과 여러가지 원소들을 발생시키고 이것들을 결합해서 소위 얘기하는 stardust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이것들이 쾅하는 폭발과 함께 엄청난 핵반응을 일으키면서 한 곳으로 모이게 됩니다.
모여서 휘돌면서 그것이 장고한 시간을 거치면서 거기에서 새로운 별이 폭발과 함께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죽는 별이 없으면 태어나는 별이 없는거죠.
우주는 1000억개 내지 2000억개의 별들이 모인 은하계가, 1000억개 내지 2000억 모여있는 것이 우주라고 해요.
몇 초당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이 생성의 과정을 통해서 우주에 질서가 유지되는 이 아름다운 원리가 인간에 몸에 그대로 투영되요.
그런데 몸에 어떤 부분은 세포들이 모여서 살려고만 하고, 누구도 네크로시스의 죽음을 죽거나 아포프탑시스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래서 모여진 세포에 덩어리를 우리들이 암세포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우리에 몸은 죽으려는 세포들때문에 생명을 유지하고 죽지않으려는 세포들때문에 결국은 죽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에 고백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내 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이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용서해야합니다. 그리고 깊이 사랑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허물을 용서하고, 다른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면서, 아 이 직장은 대학이긴 하지만 다른 곳과는 틀리구나 우리 모든 구성원들에 마음속에 주님이 계시구나.
그러한 자각을 우리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줄 수 있는 그런 학교가 되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안에서 이 대학이 주님에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며 아름답게 발전하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