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신대원 개강수련회(2012.3.6)
목회자의 신앙적 준비 3월 6일(첫째 날 저녁집회 요약)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 1:80)
I. 본문해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는 선지자로 등장을 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몇 편의 설교만을 남기고 비극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손가락과 같은 생애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정적의 관계에 있던 헤롯까지도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알아 마음속으로 그를 두려워했고, 완악했던 유대인들조차도 그는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흔들어놓은 위대한 말씀의 역사는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긴 세월동안 외로운 광야에서 연단된 그의 영성을 통해 나타난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II. 역사와 사람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사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역사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꼭짓점 삼아서 줄을 이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일하신 역사입니다.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기이한 성력의 능력, 지성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하고 밝은 빛, 놀라운 중생과 회심의 능력, 말씀의 탁월한 능력은 인간이 만든 방법 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A. 성경의 역사
창세기를 열면, 하나님께서는 무의 상태에서 세계를 창조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본떠 사람을 만드십니다. 죄가 들어오고 인간은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능력으로 세계를 구원하실 계획을 펼치십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가문을 이어가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수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중요한 인물인 모세가 나타납니다. 영적이며 세상의 학문에도 탁월하여서 구약성경 중 첫 번째 다섯 권을 저술하는 영예를 누립니다. 다음에는 믿음의 역사성을 보여준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또한 그 후에는 직임적인 선지자와 왕의 제도를 도입한 훌륭한 인물인 사무엘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셔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는 중요한 역사를 이루십니다. 또한 신구약을 통틀어 높은 준봉을 이루는 위대한 신학자이며 철학자가 등장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한 인물입니다. 그 후 내리막길을 달리다가 이사야라는 높은 봉우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태양과 같은 분이 등장하는데, 세례요한 다음으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B. 교회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신 후 사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모세나 다윗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사도 바울이 등장합니다. 그는 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가요, 목회자요, 교회개척자요, 철학자요, 사상가였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의 절반이상을 저술하는 영예를 안게 됩니다. 그 후 속사도 교부들이 지나가며, 오리겐(Origenes, 185-254)이나 이레네우스(Irenaeus115-202),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이라는 중요한 교부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3-430)가 나타나는데, 그는 기독교 역사와 서구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입니다.
중세로 접어들면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 1095-1160),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가 나타납니다. 11세기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필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가톨릭에 영향을 끼쳤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등장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철학으로 기독교를 설명했고,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본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 했으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방대한 기독교 사상의 집적을 이루었던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12세기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등장합니다. 또한 루터가 이뤄 놓은 종교개혁을 실질적으로 마무리하고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인물인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등장합니다.
주후 16세기 후반에는 개신교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는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열립니다. 천재적인 학문의 역량과 깊은 경건을 소유한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들은 종교개혁 1, 2세대가 굵은 붓으로 그린 커다란 종교개혁의 대의를 미세한 붓으로 상세하게 그리면서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겨놓습니다. 이때 또한 저의 학문적 스승 중 한분인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이 등장합니다. 17세기에 오웬이 활동하고 있을 때, 이성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변증신학강요』를 쓴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이 높은 산으로 나타납니다. 18세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후 미국 대륙에서 위대한 사상가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나타납니다. 19세기에는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 20세기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등등의 인물들이 나타나고 또 벤저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 같은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개혁주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리고 이제 자잘한 신학자들과 유구한 개혁신학의 전통을 잘 모르는 목회자들이 작은 산을 이루면서 살아가며, 우리도 그 중 한 구릉과 같은 세대입니다.
세상의 역사의 중심은 구원의 역사이고 구원 역사의 핵심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었고 동시에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신실한 믿음과 신앙과 인격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싶다면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준비해갈 때, 역사 속에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III. 목회자의 소명
A. 그리스도와의 만남
목회자의 소명은 무엇일까요? 소명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목회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소명의 주가 되어야합니다.
1. 십자가와 부활사건
소명은 사명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설명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가 그를 짓눌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과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며, 다시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서 신적인 조화가 필요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충격적으로 깨달은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심판을 받으셔서 죽으신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신 사실과는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이렇게 바울처럼 지성의 벼락을 맞지 않고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김세윤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에 의하면, ‘신적인 강제력’의 경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나는 이제 복음을 온 천하 만민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신적인 확신이 바울의 가슴속에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신학, 목회, 선교, 모든 사역의 핵심이며 진원지입니다. 그래서 소명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세계 속에 밀려들어 옵니다.
한 사람에게 목회의 소명이 밀려오기 직전 그의 의식은 요한복음 3장 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로 집약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 바쳐 영혼을 구원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싶은 신적인 강제력이 내 안에 역사할 때 그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2. 아가페(Agape)와 까리따스(Caritas)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아가페와 까리따스에 대한 경험이 생겨나게 됩니다. 복음의 빛을 발견하면 자신의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가 바로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의 경험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 사랑에 대한 나의 전인격적인 반응으로 까리따스의 사랑이 일어납니다. 저는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을 ‘지순애(至純愛)’라고 부릅니다.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은혜의 작용이 가져단 준 결과입니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화를 받게 되면 사랑해야 할 모든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까리따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로부터 나와서 모든 창조세계를 휘돌고 하나님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우주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은 그 흐름 속에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사라지고 나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만이 흐르고, 하나님만이 온 땅과 우주에 가득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B. 소명 없는 신학공부
소명이 없이 신학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소명이 없는 신학공부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지 못하면 인간적인 세속주의에 흐르게 되고, 공부를 잘하면 자유주의 신학으로 흐르게 됩니다.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 1630-1706)라는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는 자신의 책속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이다.’ 라고 못 박았습니다. 신학은 학문을 하는 주체보다 학문의 대상이 무한히 큽니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 처음부터 신학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의 목적이 학문이 아니라 소명이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싫은 사람에게 신학은 쓸모없는 것입니다.
IV. 소명의 불변성과 가변성
A. 과거적 소명의 유익과 한계
목회에 대한 소명이 이러한 것이라면, 그 소명은 현실적으로 불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가변적인 것일까요? 먼저 과거의 소명의 유익을 생각해봅시다. 사도바울은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푯대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는 것’(빌 3:10)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 그 한길로 달려가는 것이 이 사람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께 붙잡혀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하나니’ 라는 신앙 고백이 생겼고, 그것이 푯대가 됐습니다. 앞의 푯대가 있기 위해서는 뒤의 푯대가 분명해야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유혹에 흔들리며 침체에 빠질 때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불러주셔서 죽든지 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데 나를 온전히 바치도록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하며 신학을 하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소명을 받았던 순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적 소명은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명 자체가 지속적인 헌신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소명은 중요한 헌신의 동기이지만 지속적인 헌신을 자동적으로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소명을 받아도 쓰레기같이 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지속적인 성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소명을 확실히 받았음에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희랍어로 갈라디아서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를 보면 현재완료형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까지도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붙잡혀서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 없이는 성화를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셋째는 지속적인 영적인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힘적인’(physical) 방식과 ‘설득적인’(persuasive)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로, 힘적인 방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초월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당신을 사랑하는 경향성을 심으시는 것인데, 중생시에 이러한 일이 우리의 영혼에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신령한 것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new sense)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설득적인 방식은 도덕적인 설득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날마다 내 안에 추한 것을 발견하여 자기 사랑을 버리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그분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증거 하는 자료들의 정수입니다. 회심한 사람이 새로운 감각으로써 하나님의 진리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면서 예전보다 점점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지성적으로뿐만 아니라 초월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도록 개인적인 영적 부흥과 지성의 설득을 동시에 추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매일매일 말씀에 은혜를 받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알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초월적 사랑의 경험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B. 소명을 유지하는 길
1. 소명의 유지: 지식(知識) + 사랑
소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식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보에티우스(Gisbertus Voetius, 1589-1676)는 ‘지식은 경건과 결합한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신학의 특성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삼십 대 중반에 신학의 모든 분야들이 어떻게 아름답게 통합을 이루는지를 영적으로 경험했고 사십 대 후반에는 모든 학문이 결합을 이루면서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경험했습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분에게서 모든 지식이 나오고 모든 지식은 다시 하나님께로 회귀합니다. 그 안목은 신학만으로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이런 것들을 공부해가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폭넓은 안목을 갖도록 부지런히 독서를 해야 합니다. 또한 그 중심에는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2. 소명의 영역: 신앙
소명의 영역은 신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공부를 좀 못해도 소명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지를 들고 예수를 믿으라고 계속 전하며, 교회에서 어린 영혼들에게 설교를 하다가도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것이 소명이며, 소명은 신앙에서 유지가 됩니다.
a. 신앙의 질료-신학의 형상
신앙이 빵의 재료라면 신학은 그 빵을 빚어내는 제빵사의 손입니다. 신앙은 질료이고 신학은 형상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불특정하고 설명하기 힘든 신앙적인 체험들이 신학에 의해서 올바르게 빚어질 때 하나님에 관한 아름다운 증거가 됩니다. 생생한 신앙체험도 있고,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이 불타오르는데 주일에 설교 할 때마다 생명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신학이 정리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방향을 잃은 채 자기만의 길을 가게 됩니다.
b. Stigmata tou Jesu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의 말씀에 자기를 합치시키면서 살려고 하는 비장한 몸부림이 있어야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몸부림은 ‘예수의 흔적(stigmata tou Jesu)’입니다. 즉,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도다.’입니다. 흔적은 당신의 노예라는 표시입니다. 그것을 자기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예수께 붙잡힌바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c. 신뢰할 수 없는 사역자
제가 신뢰하지 않는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목회적 가치는 자기 신앙의 차원에서 습득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목회자의 자리에 세워 놓으면 지도자로서 일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기도회를 이끌 것이며, 교회의 치리를 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자였던 적이 없는 예배 인도자, 진지한 설교의 청취자였던 적이 없는 열렬한 설교자, 교회의 치리에 복종해본 적이 없는 당회장, 간절한 기도자였던 적이 없는 뜨거운 기도 인도자, 애타는 전도자였던 적이 없는 선교사, 이런 사람들은 신뢰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목회적인 과업들은 사역이지만, 그 사역들을 참으로 생명력 있게 하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3. ‘한 책’의 사람
우리는 또한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철학 수업을 들어가면 철학공부를 안하면 인간이 안 될것처럼 설명하고, 실천신학과목에 강의를 들으면 실천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나머지 신학지식들이 아무 가치 없는 것들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조직신학과목을 수강하면, 조직신학을 모르면 꿰지 않은 구슬인 것처럼 말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존경하는 김희보 박사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항상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하시는 말씀이 “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습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여러 종류의 신학 서적을 읽으면서 어떤 신학적 사실들을 발견하시면 해당 성경구절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을 해 두셨습니다. 신학을 하면서 고민하는 신학적 내용들이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에 도움을 주도록 수렵되어야 한다고 믿으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많은 책을 읽어도 이처럼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그리스도를 사랑함
오년 전에 LA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총신신대원 교수님으로 계셨던 이상근 박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그분은 은퇴하실 때까지 저를 조교로 데리고 계셨습니다. 참 자애로우시고 경건하신 노인이셨습니다. 내가 찾아 뵈었을 때는, 사모님은 이미 칠년 전에 돌아가시고 94세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은 거동이 불편하셔서 보호장구를 의존하여 절뚝거리면서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셨습니다. 큰절을 올리고 나서 제가 여쭈었습니다. “목사님 혼자서 이렇게 계시기 얼마나 외로우셔요” 그랬더니 그분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대답하셨습니다. “외롭긴 뭐가 외로워. 내가 혼자인가?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비록 사랑하는 아내가 곁을 떠나도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살아계셔도 그분은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계신 것이 느껴졌습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나도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저분처럼 홀로 남겨졌을 때,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신학 공부를 하면할수록 더욱 뜨겁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열애에 빠진 지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마음을 쏟아 기도함
신앙적인 준비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하십시오. 보에티우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마음을 쏟는 간절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 목사님은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매일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 학기가 끝나면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영혼은 깊은 때가 묻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친구들과 강원도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여름방학 때는 여름성경학교를 앞두고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겨울방학 때는 신년 목회계획에 복을 주시도록 빌면서 친구들과 함께, 혹은 혼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례하여야 하는 일처럼 여겼습니다. 하나님 앞에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는 인생인데 정말 주님을 위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살게 해달라고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서로 “우리 정말 주님 뜻대로 살아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들이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역사에 쓰임 받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인간으로 태어날 필요는 없지만, 평범하게 살아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V. 결론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지금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급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경쟁상대는 존 오웬, 존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 헨리 마틴(Henry Martyn, 1781-1812) 같은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았던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신학교 외에 광야의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장이 되셔서 그들을 훈련시키시므로 그들은 불꽃같은 생애를 살아서 하늘의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신학공부를 통해서만 목회자로서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준비를 통하여 목회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타오르는 젊음을 핏빛 신앙으로 물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총신신대원 개강수련회(2012.3.7)
목회자의 인격적 준비 3월 7일(둘째 날 저녁집회 요약본)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 1:80)
I. 들어가는 말
어린 시절부터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전, 빈들에 있는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고 한 누가복음 3장의 보도는 전형적으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사의 소명 기사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임했다고 하는 것은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까지 선지자에게 이입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경험했고,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면서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회개 없는 세례를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들의 삶을 규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친 선포,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놀랍게도 잠시 후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선포와 일치하였습니다. 그는 광야에 있는 긴 세월동안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연단의 과정을 통하여 한사람의 설교자로서 그의 외침에 적합한 인격으로 변모 되어갔습니다.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준비하다가 어느 순간 그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인격의 그릇에 담겨서 고고한 울림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갔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II. 목회자를 세우심
A. 성육신의 원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삶과 인격, 섬기는 모든 것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자비를 보여주시기 위해 말씀으로만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비참하게 죽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주님께 이르는 거룩하고 새로운 산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신 방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원리가 그대로 목회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어떤 모습으로 사셨을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이 우리에게 육화될 때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몸소 들려주실 뿐 아니라 보여주시기 위해서 목회자를 세우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내가 곧 그 길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道)’삼아 따라가는, 구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관심이 없는 목회자는 목회 사역을 그릇된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벽한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벽하게 본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똑같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를 본받아서 성도들과 구도의 길을 걸어가며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고, 또 성도들과 한 형제로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르지만 진리이신 그리스도 한분을 사랑하며 일치를 이루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B. 지복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셨습니다. 이 형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 안에 있는 형상이고, 이 형상의 가장 고귀한 표현이 지성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과 모든 세계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바로 지성입니다. 지성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사물들을 아는 라티오(ratio, 이성)와 직관을 통해 모든 사물들을 논리를 초월해서 인식할 수 있는 인텔레겐티아(intellegentia, 오성)로 나뉩니다. 지성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의 가장 고귀한 기능이며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책속에서 인간이 행복을 느끼고 누리는 것은 인텔렉투스(intellectus), 지성을 통해서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 받는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지복을 상실했습니다. 죄가 들어오고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내적인 기반인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물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두 개의 인식능력을 주셨는데, 하나는 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성은 어느 정도 남아있지만, 신앙은 산산이 파괴되어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게 망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를 선택하여 주시고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어두운 밤바다와 같은 우리의 영혼에 지성의 진리의 밝은 빛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천년 전에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이 시대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C. 목회자와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약에 와서는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온전한 앎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참된 인간의 모본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관한 이중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구체화되어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보다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까지 자라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 1813-1843)은 책속에서 ‘신자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목회자였고, 그가 기도실에서 기도한 후 강단에 올라서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성도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만났고 그 분이 저렇게 거룩하신 분이시라면 지금 예배드리러 나온 우리는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라고 생각하면서 흐느껴 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을 닮기를 사모하십시오. 교회를 향한 목회자의 최고의 섬김은 참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III.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A. 목회자의 자격
목회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목회자의 자격이 있습니다. 몇 해 전, 『나는 외과의사다』(강구정. 사이언스북스, 2003)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의사 중에 의사는 외과의사라고 하면서 외과의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세 가지 말합니다. 첫째는 독수리의 눈, 바로 지성(知性)입니다. 사람의 배를 갈라놓고 간이 어디 있는지 심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되겠습니까? 치열하게 공부해서 고도의 지성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사자의 심장, 담력(膽力)입니다. 심장이 손톱만 해서는 의사 못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상처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벌벌 떠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죄로 인해 곪아터졌으면 외과 의사처럼 칼로 갈라서 바꿔 끼우든지 잘라내든지 하는 담력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는 여인의 손길, 곧 기술(技術)이 필요합니다. 외과의사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잘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꼭 같이 적용될 수 있는 자격입니다. 탁월한 지성과, 담대한 영력, 그리고 세밀한 목회 기술이 그것입니다. 신학 공부를 조금 잘 한다는 분들은 영력을 하찮게 여기도, 기도를 많이 하여 영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목회 기술 자체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여겨서 얕잡아 보는 데, 이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한 자격으로는 지성과 영력과 목회의 기술 세 가지 모두 구비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루 아치에 터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쉬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기도하고,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B. 인격적으로 준비됨
1. 목회와 리더십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준비가 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연단 받는 것은 지도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 일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리더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소인배형 리더십과 성자형 리더쉽입니다. 소인배형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는 보스가 되고 싶어서 옆에 자신의 똘마니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분열과 분쟁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권력을 잃어버렸을 때는 엄청 비굴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는 잔인하리만치 가혹합니다. 이에 비해서 흔하지는 않지만 조용하지만 성자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자신이 보스가 아니라 리더로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맘껏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리더십입니다. 목회자가 되고자하는 사람은 괴로움과 고통은 자신이 짊어지고 편안하고 좋은 것은 성도에게 돌리려고 하는 마음, 자신은 잊혀 져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아로 새겨지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해하는 사람. 바로 그런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지금 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잡히고 이타적인 리더십으로 자기를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고 말했습니다. ‘너희를 위해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서서히 지도자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2. 겸손과 예의
영성, 탁월한 소명, 헌신이라고 하는 특수한 가치는 보편가치의 토대위에 세워집니다. 그래서 저는 실력 있는 목사, 영적인 설교자가 되기 전에 먼저 신사가 되라고 항상 목회자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목회를 하면 아주 비천하고 예의바르지 못한 사람부터 사회적으로 여러분과 비교될 수 없이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폭 넓은 사람들을 만날 것 입니다. 그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겸손과 예의입니다. 너무 겸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예의바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에티켓에 관한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모른 채, 어느 한 순간 목회자가 됩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목회자에게 쏠립니다. 그런데 그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인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십시오.
3. 인내와 견딤
첫째로 모함을 참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도 다른 것은 참아도 모함을 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악의를 가지고 나의 평판을 깎아내리거나 파멸시키기 위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서 나를 모함하는 사람들까지도 목회자는 참아야 됩니다. 우리는 모함을 받을 때조차도 그리스도를 향한 평상심을 잃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악을 악으로 대적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둘째로는 비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우리는 근거 없는 비난도 견딜 줄 알아야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악의적인 비난에 귀를 기울이라. 우리를 향한 악의적인 비난 속에는 우리에 대한 진실이 담겨있다.” 그래서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로 삼아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였습니다.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대해주자.” 이러한 노력들은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 자신을 때로 오해와 비난을 받아서 아파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온전한 채로 상처 없이 남기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셋째로는 혈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계에서는 끝없는 소송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모든 일치가 깨뜨려지고 도덕적으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들의 참지 못하는 혈기 때문입니다.
4. 정직과 올곧음
a. 정직의 학교에서
목회자로 산다는 것은 정말 정직해야 합니다. 제가 교수가 되어서 수백 명의 레포트를 받았는데, 똑같은 내용의 레포트들이 있었습니다. 비교해보니 내용은 같은데 한 학생은 명조체, 다른 학생은 필기체 이렇게 낸 것입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출석을 대신 해줍니다. 누구에게 부탁한 사람도 나쁘지만 그 부탁을 들어준 사람도 나쁩니다. 주님이 보고 계시는데, 그런 부탁을 받으면 ‘주 앞에 바르게 살아라’ 하며 충고를 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부탁을 받았다면, 그런 정도의 부탁을 해도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양심이 혼탁한 인간이라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신학교에 가서 컨닝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신앙의 양심의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날 같은 양심을 가지고 이런 문제와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b. 공짜를 미워함
이 세상에서 정말 공짜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교입니다. 이것은 신학교에 다닐 때부터 길들여집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평생 잊혀 지지 않을 하나의 지침을 주겠습니다. ‘구원 이외의 모든 공짜는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사랑의 빚을 지는 것을 성격이 허락했지만, 받는 자보다 부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타인을 자기 성취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남을 위하여 그렇게 내어주어 유익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어떠한 경우에라도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말고, 더욱이 다른 이들에게는 여러분이 신학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은 연필하나라고 할지라도 도움을 받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여기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부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신학생 시절에 교회의 특정인에게 신세를 지고 그 때문에 개인에게 지나치게 굽신거리는 것은 선자지자의 후예로서 자라나는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공짜는 늘 부자연스럽고, 기쁘지 않은 것이 되도록 여러분 안에 그러한 성향을 깃들게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학회의 경비를 연말에 결산하고 보니 구십 퍼센트에 가치운 지출항목이 식비와 간식비였습니다. 학생들의 학문활동을 돕기 위하여 책정된 공금을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공돈으로 먹기를 좋아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5. 고난과 기도
a. 스트라디바리우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악기를 제조하는 사람이었는데 바이올린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바이올린뿐만 아니라 하프 등 약 1100개 정도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그가 만든 바이올린을 봤는데 시가로 45억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악기가 탄생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 악기를 제조한 장인의 탁월한 솜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무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모진 언덕에 몇 십 년 동안 자라도 조금밖에 자라지 않는 그런 차지고 옹진 나무들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선별될 수 있는 나무 자체가 아주 희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악기의 품질을 결정합니다.
b. 고난의 두 얼굴: 성화와 패역
우리는 고난을 받지 않습니까?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을 받을 때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한편으로는 아주 패역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주 거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전도사로 목회자 생활을 하는데 교회에서 고난을 많이 받습니다. 박한 대우, 인격적인 학대, 교인들로부터 대접받지 못하는 무관심을 겪으니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참고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모든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커다란 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과 마음을 쏟아 부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 삶에도 고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신학대학원 3학년에 재학중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던 할머님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팔 년 동안이나 사랑하며 섬기던 사역자는 떠났고, 이제 돌도 채 안 된 사랑하던 외아들은 연일 이어지는 시위로 최루탄을 마시고 급성 폐렴으로 위중하여 소아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학교 앞에 전세 들어 살던 저희는 집주인의 사기로 길거리로 내어 쫓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방학 때였기에,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공부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신관 5층 채플실에 올라가서 매일 오후 시간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빌었습니다. 그 때는 하루에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세 시간 정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해도 무엇인가 희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면서 다시 주님을 부르며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주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 목회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셨는데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도 지셨는데 나도 이 고난을 믿음으로 이기리라.’ 그리고 벌레만도 못한 이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고난 속에서도 나를 붙드시는 주님의 은총을 찬양하며 한편으로는 괴로움의 눈물을 또 한편으로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잔인한 여름을 보내고, 다시 그 채플실에서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알던 신학이 하얗게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그런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 그의 달콤함에 대한 초월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난이 올 때마다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 한분께 마음을 쏟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 고난의 신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배운 눈물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던 경험들은 이후에 목회를 하면서 나의 모든 기도생활에 척도가 되어서 어떤 경우에도 성령충만하다고 교만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조나단 에드워즈.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9)를 6권을 샀고 6번을 읽었습니다. 21살에 회심하고 24살에 선교사로 헌신하여 28살에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 때문에 숨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수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조나단 에드워즈가 일기로 영국에서 출판했을 때 그 일기책은 헨리 마틴, 짐 엘리엇(Jim Elliot, 1927-1956) 같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이 젊음을 그리스도를 위해’라는 고백 속에서 선교지를 향하여 순교의 길을 마다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폐결핵 4기의 몸을 이끌고 자주 기도의 동산에 올랐습니다.
어느 생일날의 브레이너드의 일기입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기도하기로 결심하였다. 기도하러 숲속에 들어가는 때에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나는 생각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땀과 눈물을 쏟아 부으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기도가 끝마쳤을 때 하늘의 달콤함이 내 마음에 밀려 들어왔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에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눈 덮인 언덕에 엎드려 잃어버린 인디언의 영혼들을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했고 그가 기도하다 일어난 언덕에는 붉은 선혈이 하얀 눈 위에 가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주를 위해 살고 또한 마치 주를 위해 죽기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자신의 젊음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불태우며 주님을 섬기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젊음의 날들을 나태와 허비, 위선과 거짓, 태만과 가치 없는 일에 대한 몰두와 허탄한 일을 좇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며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고난은 기도가 없으면 상처와 패역으로 남고 기도가 있으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양약이 될 것입니다. 치열한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IV. 결론: 하나님을 추구하라
인생은 속히 지나는 바람과 같습니다. 꼭 한 번 주님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하지 않고 열렬히 공부하지 않고 보내는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바로 내일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누가 여러분의 이름 석 자를 부르든지 기도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의 인격의 특징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보석처럼 소중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총신신대원 개강수련회(2012.3.8)
목회자의 지성적 준비 3월 8일(셋째날 저녁집회)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눅 1:80)
I. 본문해설
세례 요한은 빈들에서 성장했고, 자라면서 심령이 강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이나 먹으면서 할 일 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자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떠한 식으로든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경건을 익히며 선지자로 자라갔을 것입니다. 한 시대를 깨워 그리스도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살기 위한 영적인 준비는 지적인 준비 없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결정적인 소명 사건을 체험하기까지 그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자라며 하나님의 성품과 언약백성들의 역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갔을 것입니다.
II. 신학이란 무엇인가?
A. 기독교의 힘
기독교의 힘은 기독교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한 시대에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게 하시고, 그들의 섬김 위에 성령의 권능을 더하심으로써 무지와 어둠을 밝혀 그들의 악한 의지를 사랑으로 감화시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복음 사역입니다. 세상은 기독교를 파멸하고자 무진히 애를 썼습니다. 지역교회는 파괴되기도 하고 배교에 삼킨바 되기도 하였으나 보편교회는 무엇에 의해서도 파멸되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채 오히려 영적으로 번영하여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가진 힘의 정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힘의 근원을 말함에 있어서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 가시적 영역: 사상+윤리
가시적 영역에서 기독교의 힘은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사상은 하나님을 아는 길이요, 윤리는 그렇게 알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상이 믿어야 할 규칙들(regulae credendi)과 살아가야 할 삶의 교훈들(praecceptae vivendi)의 체계라면, 윤리는 그 가치의 체계와 규범을 따라 살아감으로 드러난 도덕적인 삶입니다. 그리고 윤리는 그 자체가 옳음과 그름의 기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 사상이 없는 종교적 윤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것이 가능하다면 종교의 모양을 기독교에서 취하고 윤리의 기준은 세상에서 도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과 윤리의 분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상의 기술(記述)은 지적인 형식을 띠고 계몽주의의 학문 형태를 따른다는 점에서 가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윤리적인 삶은 종교 유무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도덕과 관련하여 판단할 수 있도록 드러난다는 점에서 가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비가시적 영역: 은혜
기독교의 위대한 힘이 철저한 신학 사상과 엄격한 윤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교회가 정치(精緻)한 신학 사상을 따르고 있어도 윤리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부패한 경우가 많으며, 또한 윤리적인 삶을 살아간다할지라도 그것들을 통하여 자신이 신앙하는 진리의 내용들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은혜라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이것은 비가시적 영역의 힘으로, 이성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의 영역에 속합니다. 은혜의 힘은 사상과 윤리를 연결해 주는 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지성적이며, 윤리적일 뿐 아니라, 영적인 사람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B. 지성과 감성의 진자운동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신앙의 중심이 지성인가, 혹은 정서인가에 대한 진자운동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생명력 있는 역사가 일어나지만, 점점 성령의 불길이 식어갑니다. 유능한 변증가들이 나타나 기독교는 점점 지성 중심으로 흐르게 됩니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갈 때 ‘몬타누스주의’(Motanism)가 일어나게 됩니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성령이라고 주장하면서 극단적인 신비체험과 열정, 감성을 중시한 운동을 펼치고,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저명한 교부들도 그 유혹에 굴복하게 됩니다. 2,3세기에는 지성 쪽으로 치우치면서 거대한 지성주의적인 이단, ‘영지주의’(Gnosticism)를 맞이하게 됩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지식은 구원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 후 4~10세기경에는 수도와 개인의 체험, 내적인 광명과 직관을 중시하는 수도원주의가 성 안토니우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11세기에 강력한 지성주의 운동인 ‘스콜라주의’(Scholasticism)가 일어납니다. 그리스 철학의 체계를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의 구원, 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영적인 은사, 체험들을 철저히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신앙적인 열정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14, 15세기에 와서 다시 체험과 열정, 내적인 교통을 중시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중세 후기 신비주의는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 요한 타울러(J. Tauler, 1300-1361), 하일리 수소(H. Suso, 1295-1366) 등의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 후 얀 후스의 영향을 받은 공동생활의 형제단과 라위스 브레이크 등에 의하여 새로운 경건 운동이라 불리는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 운동이 일어납니다.
그 후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위대한 16세기에는 불변하는 계시의 말씀을 성경에서 찾게 됩니다.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곧 ‘스피리투스 쿰 베르보’(spiritus cum verbo)라는 신앙고백을 낳았던 종교개혁의 신학이 태동하게 됩니다. 교회의 강단은 지식과 감정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개혁교회의 중요한 교리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 개신교 안에서 분파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첨예한 교리 논쟁들 속에서 논쟁을 위해 다시 스콜라주의가 채택 되고,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거치면서 16, 17세기까지 건전했던 신학들이 18세기로 넘어가면서 1825년을 마지막으로 개혁파 정통주의의 경건과 지식의 온전한 결합의 시대가 끝이 나고 이성으로 흐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역사에서는 종종 간과하지만 종교개혁과 경건주의시대 사이에 개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네덜란드에서 일어납니다. 역사적으로 ‘나데레 레포르마티오’(Nadere Reformatio) 라고 제 2의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역사적으로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 1576-1633), 페투루스 판 마스트리히트 등이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이 일을 위하여 당시 우트레흐트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보에티우스가 아주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7세기 말과 18세기에는 교리 보다는 삶이라는 구호를 내건 경건주의운동이 일어납니다. 독일의 할레 대학을 중심으로 진젠도르프 백작(Nicolaus Ludwig Zinzendorf, 1700-1760)과 프랑크푸르트의 목회자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 등에게서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 후로는 경건주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계몽주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 사상이 들어오게 되고, 계몽주의의 망명아래 기독교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쓰러지게 됩니다. 그리고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이성주의도 계몽주의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날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유주의, 동시에 과학주의에 신물이 나서 무엇인가 초월적인 것을 꿈꾸는 신비주의, 진리가 기독교에만 있겠느냐고 이야기하는 다원주의, 인간중심주의적인 인본주의운동들이 아주 혼란스럽게 얽혀있습니다.
C.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은 발견한 성경의 진리들, 믿음으로 알게 된 지식들을 인과관계 속에서 엮으면서 체계를 형성하고, 가르치고 전파할 수 있는 체제를 세운다는 점에서 학문입니다. 그러나 학문의 대상이 신입니다. 유한자는 무한자를 파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인간에게 알리기를 기뻐하십니다.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종교 행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지식이 신학의 질료가 됩니다. 그래서 신학은 다른 학문과는 다르게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해야 하며 철저히 공부해야 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즉, 신학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가르침과 모든 규칙을 포괄합니다. 신학은 ‘삶의 방식’(way of living)에 대한 지식입니다. 페투르스 판 마스트리히트가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doctrina est viendi Deo per Christum)라고 정의한 것도 바로 신학의 이러한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19, 20세기 넘어오면서 삶의 지혜(sophia)로서의 신학에 대한 관점을 거의 다 상실하였습니다. 모든 신학의 목적은 ‘삶의 방식’(the way of living)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참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하나님이 세계를 어떤 의미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어떠한 위치이고 나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앎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이 없는 경건도 경건이 없는 사상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경건은 우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삶 전체를 포괄하는 체계에서 우러납니다.
III. 우리 시대에 신학을 한다는 것
A. 거목의 숲을 꿈꾸며
조국교회가 아름다운 거목의 숲이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는 큰 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거목의 숲이 사라져 가는 살림 황폐화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무가 어렸을 때는 산의 신세를 지지만, 나무가 자란 후에는 산이 그들에게 신세를 집니다. 거목과 같은 목회자가 될 것인가 분재와 같은 목회자가 될 것인지를 생각하며 우리가 목회자로서 자신을 제대로 준비하며 살고 있는 지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 어는 시대보다도 보편적인 가치를 부인하는 상대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다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더욱 배척을 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바 신학의 내용 뿐 아니라 그것을 믿지 않으려는 이 세상의 정신에 대하여도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B. post-modernism과 탈신학화
1. 모더니즘과 탈근대주의
오늘날 교회가 기독교사상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그것을 실용적이지 않은 공리공담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는 반지성적인 태도는 심각한 질병이며 이로 인하여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자신들이 믿는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정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계시와 은총 아래 복종하여야 할 이성은 계몽주의를 통하여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없이도 인간의 이성만으로써 인간의 도덕규범을 위한 보편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모더니즘은 데카르트를 통해서 도입되고 칸트(Immanuel Kant) 같은 사람에 의하여 발전됩니다. 그들은 이제껏 존재론 중심 인간의 사고 체계를 인식론 중심으로 전환시켜 버림으로써 존재하시는 하나님보다 인식하는 인간을 사유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성이 판단의 최고의 기준이고 권위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공통적인 도덕적 감각이 있으므로 통일적인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주의(modernism)입니다. 그러나 이십 세기에 들어서서 두 번의 세계대전과 많은 사회악들을 경험하면서 인간들은 이성을 신뢰하며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이성의 퇴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절대적 가치는 없으며 세계의 목적이나 초자연적 의도는 없으며, 과학적인 법칙의 우연한 연속이 존재할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해체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가 들어오고, 니체, 사르트르, 하이데거 같은 사상가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입니다.
2. 지식의 대상: 하나님+세계+인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구속 계획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지식은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세 대상에 대한 지식들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계시되었고,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한 지식의 계시의 정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과 학문을 통하여 이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교리학교에 입학한 교인들에게 외우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스투데오 에르고 숨’(studeo, ergo sum) 즉,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페투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을 해설하는 가운데, “인간의 행복은 인간의 ‘인텔렉투스’(intellectus), 지성에 속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라면 그것은 지식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학문들을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C. 개혁신학: 그 불멸의 가치
개혁신학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목회에 있어서 불멸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개혁신학이야말로 성경적인 기독교를 가장 잘 가르쳐 주는 신학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변하는 진리를 변화하는 시대 속에 어떻게 적용하며 복음 사역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탁월한 기준과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1. 외로운 섬 하나,「기독교강요」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학 사상이 개혁주의적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존 칼빈의『기독교강요』를 꼽습니다. 칼빈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신학자임에 틀림이 없고, 그의 책도 탁월함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 권이 모든 개혁신학을 대변하지는 못합니다. 그 책은 거대한 개혁신학(여기서는 좁은 의미의 개혁신학을 가리키는 것임)의 역사적이고 찬란한 스펙트럼 중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조차도 신학교 시절에 그 책을 완독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 책은 원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본격적으로 성경 읽기 전에 읽는 기독교신앙에 대한 입문서입니다. 존 칼빈의 저작들을 열심히 탐구하여야 할 뿐 아니라 역사적 맥락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은 종적으로는 초대와 중세, 그 후에 일어난 후기 개혁파 정통주의와의 연관성 속에서, 횡적으로는 계몽주의와 근대주의, 후기 근대주의와의 연관성 속에서 탐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혁신학의 탐구를 위하여 최소한 다음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2. 역사적 맥락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함
첫째로, 보편교회와 그리스철학에 대한 공부입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의 개혁신학을 공부할 때 이 둘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철학의 영향으로 잘못된 것들과 유익하게 이바지한 것들을 구별하는 세심한 분석 작업과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상당한 양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둘째로, 종교개혁과 인문주의에 대한 공부입니다. 인문주의의 이해 없이는 종교개혁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세속적 인문주의와 그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문주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 후에 전개되는 계몽주의에 대한 연구, 특히 18세기의 영국의 경험주의와 신플라톤주의운동과 함께 생겨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학문적 부흥과 계몽주의와의 연관성에 대한 공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특히 당시 철학적 논의의 중심지였던 스코틀랜드가 어떻게 시간이 흐르면서 신학이 인본주의적인 부패에 물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전개되는 보다 더 극단화되어 간 인본주의와의 관계성을 살펴보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러한 시대정신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부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에 대한 공부입니다. 종교개혁 제3세대 이후로부터 시작되는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연구는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중요성과 한계를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대의 종교개혁가들이 굵은 붓으로 그려놓은 기독교 신학을 상세화하는 작업에 헌신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이후로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 신학을 이성주의로 물들인 신학이라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편견이라는 사실이 최근 약 30년 동안의 연구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밝혀지면서 이제는 대체로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 대한 연구 없이는 개혁신학을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정통주의에 대한 이해는 이미 그 이전 세대들이 이루어놓은 중세와 인문주의, 중세와 종교개혁 사이의 역사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연구의 업적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의 유산들 안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비옥한 신학적 자양분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자료들이 라틴어와 화란어, 독일어, 불어들로 되어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틈나는 대로 라틴어를 익혀 그 자료들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상당부분의 자료들이 이미 그 당시 영어로 번역되기도 하였으므로 더욱더 연구에 도전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의 유산들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우리의 목회와 선교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대사회와의 적실성이라는 한계들을 인식하면서 이 자료들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와 우리의 신학의 적실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또 다른 고민과 공부와 준비가 필요합니다.
IV. 그러면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시간관계상 저는 신학공부에 필요한 모든 학문의 범주와 저자들을 여러분들에게 다 소개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이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개혁신학의 줄기,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확고한 기독교신학을 가지고 목회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와 신학 자체의 분야들 중 교의학을 중심으로 주요 저자들을 소개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저작들을 구해서 꾸준히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A. 교과과정에 충실할 것
우리 모두 경험하고 있는바와 같이 신학교 시절의 우리는 대부분 과중한 교회사역과 많은 교과과정의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학교 공부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하는 신학공부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를 찾아야할지를 질문합니다. 이에 대한 저의 답은 분명합니다. 첫째로 할 수 있으면 신학교 1,2학년 시절에는 목회사역에 뛰어 들지 말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교회에 출석만 하고 아무 봉사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서 부지런히 봉사하여 꼭 필요한 사람이 되십시오. 교회에 여러 봉사들 중 여러분들은 영혼을 직접 다루는 일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사이든지 혹은 교육전도사이든지 혹은 무보수 전도자이든지 관계없습니다. 다만 영혼을 구원하고 회심에 이르게 하고 돌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그 일을 위해 기도와 말씀으로 섬기며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헌신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의 근육이 자라는 시기와 공부의 근육이 자라는 시기가 겹치기 때문에 둘 다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학교 커리큘럼에 충실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학교 공부는 학교에서 끝내십시오. 그리고 토요일과 주일 월요일 3일 동안에는 교회봉사와 나름대로 세워놓은 장기적인 신학공부의 계획을 따라 독서하고 명상하십시오. 특히 방학 동안에는 꼭 필요한 시간만큼 헌신적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여 마음을 쏟아 부으며 목회자로서 준비되기 위한 필수적인 공부들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셋째로 아무리 목회사역이 바쁘고 힘든 일이 많아도 공부에 끈을 놓지 않으려는 과감한 결단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덜 자고 덜 쉬고 덜 먹으면서 공부에 마음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후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B. 신학적 사유: 준비와 학문들
그러면 신학적인 사유를 위해서 어떤 준비와 학문들을 할 것인가? 첫째는 언어습득에 몰입을 해야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영어, 라틴어를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개혁파 신학을 위해서는 화란어 공부를 권장하며 독일어, 중세 불어 공부를 하면 아주 좋습니다. 둘째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강화해야 합니다. 문학, 역사, 철학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 과거와는 달리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상당히 많이 열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사실 공부할 기회가 많습니다. 셋째는 철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주의 할 점은 객관적인 거리를 늘 유지하고, 절충주의적인 방식을 사용함으로 철학 사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선 그리스철학부터 시작해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부터 플라톤(Plato, 424/423-348/34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 플로티누스(Plotinus, 204/205–270)라는 사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특별히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Enneades)는 기독교신학을 조직화하는데 엄청난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넷째는 자연과학에 대해서 관심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신학 자체 안에서 보지 못했던 신학의 아름다움을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다섯째는 현대사회와 세계관에 대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와 그의 계승자들인 낸시 피어스(Nancy R. Pearcey), 찰스 콜슨(Charles Colson) 그리고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의 저작들, 특히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교회와 현대사회의 관계를 선교와 연관 지어 광범위하고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의 4부작, 『신학실종』,『거룩하신 하나님』,『윤리실종』,『위대하신 그리스도』는 반드시 필독해야 할 책 입니다. 그 외에도 일반학문 분야와 기독교학문 분야에서의 과학, 철학에 관한 책들과 현대사상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수집하고 틈나는 대로 읽으시길 바랍니다.
C. 신학 자체의 분야들
1. 교의학과 성경신학의 중심성
신학 자체의 분야들은 교의학 혹은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은 물론 교회사 혹은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학 등 제 분야에 대하여 골고루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시간관계상 이 모든 것들을 제시하고 저자들을 소개할 수는 없어서 교의학 분야를 중심으로 여러분들이 꼭 공부해야 할 저자들을 역사의 순서를 따라 여러분들에게 제시하고자 합니다.
2. 보편교회의 신학
첫째로 초대교회 교부들에 대한 공부입니다. 초대교회 교부들 가운데 이레네우스, 오리겐, 터툴리아누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5-373), 그리고 갑바도기아 교부들 중에서 유명한 세사람 나지안수스의 그레고리(N. Gregoprius, 329-390), 바실(Basilius the Great, 330-379), 니사의 그레고리(Gregorius of Nissa, 335/40-394)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동방교회의 마지막 신학자인 다메섹의 요한은 매우 중요한 저자입니다. 특별히 그의 『지식의 원천』(The Fountain of Knowledge)이라는 작품을 비롯하여 교의학에 관한 글들을 숙독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중세교회 교부들에 대한 공부입니다. 중세로 넘어가면 일평생 읽을 결심을 해야 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드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저자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상 나타난 모든 기독교신학의 공통적인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정통교회의 신조들과 종교개혁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중세철학자들, 그리고 18세기의 기독교 유신론의 신학, 현대저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신학자의 학문의 뿌리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대충 몇 권의 책을 읽고 넘어갈 저자가 아닙니다. 가능하면 그의 저작 전체를 숙독하기를 바라며 그것이 불가능하면 우선 그의 중요한 신학 저작들만이라도 숙독하여야 합니다. 특히 지금까지 기독교뿐만 아니라 철학에 영향을 주고 있는 선악, 인간의 의지와 자유, 시간과 영원에 관한 그의 사유는 주제별로 한 학기 이상씩 탐구하여야 할 매우 중요한 기독교신학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동방교회의 마지막 신학자인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 645/676-749)은 매우 중요한 저자입니다. 그 다음은 안셀무스와 피터 아벨라르도스(Peter Abelardus, 1079-1142)입니다. 칼빈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가 있습니다. 그의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는 칼빈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아랍 철학과 유대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아비첸나(Aviccena, 980-1037)와 아베로에즈(Averoez, 1126-1198)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대철학자 가운데는 유대교의 맥락에서 풀어놓았던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 1135-1204) 한 사람 정도만 기억 하면 됩니다. 알렉산드리아 필로(Philo of Alexandria) 같은 사람을 공부하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셋째로 스콜라주의에 대한 공부입니다. 스콜라주의로 넘어오게 되는데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200-1280), 프란치스코 학파의 보나펜츄라(Bonaventura, 1217-1274), 그리고 거대한 산맥이 나오는데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옵니다. 이 사람도 사실은 개혁신학과는 안 맞는 면도 많이 있지만, 신구교를 막론하고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이 세 사람은 가톨릭 신학의 기초가 되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여러면에서 개혁신학자들에게 풍부한 신학의 자양분과 신학 방법론을 가르쳐준 인물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사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과 신학은 반드시 한번 살펴보고 넘어가기 않으면 안 됩니다. 특히 그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한권으로 된 축약본이 아니라 전체를 약 10여년에 걸쳐서 읽을 결심을 하고 공부하여야 합니다.
넷째로, 14세기 스콜라주의에 대한 공부입니다. 14세기 스콜라주의의 첫 번째 문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었고 마지막 닫는 문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tus, 1265-1308)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섯째로, 근대로 가는 길목에 대한 공부입니다. 윌리암 오캄(William Occam, 1288-1348)과 유명한 실재론, 유명론, 관념론 논쟁에 대한 역사가 나옵니다. 이 시기는 중세 철학이 붕괴되고 분열이 일어나는 역동적인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서 탐독할 수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존재론에 대한 논쟁들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그 핵심적인 내용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특히 이 시기는 존재론 중심의 철학에서 어떻게 인식론 중심 철학으로 넘어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데카르트의 사유의 자양분도 바로 이러한 중세철학의 붕괴와 도전 속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혁파 정통주의와 후기 개혁 신학자들의 형이상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후사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에 대해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3. 루터와 칼빈 이후 종교개혁자들과 후예
여기서는 루터와 칼빈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 곧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중 신학적으로 공부하여야 할 중요한 인물들을 선별적으로 제시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주요 저작들을 숙독함으로써 개혁신학의 굵은 선과 함께 다양한 스팩트럼을 아울러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종교개혁 2세대에 대한 공부입니다. 종교개혁 2세대에 넘어가서는 칼빈, 츠빙글리, 필립 멜랑히톤(Phillip Melanchton, 1497-1560),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 1497-1563), 하인리히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 1504-1575),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나오는데 피터 마터 버미글리(Peter Martyr Vermigli, 1500-1562)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안드레아스 히페리우스(Andreas Hyperius, 1511-1564), 피에르 비레(Pierre Viret, 1511-1571) 같은 사람이 나옵니다.
둘째로, 전성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에 대한 공부입니다. 전성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에는 테오도레 베자(Theodore Beza, 1519-1605), 자카라이아 우루시누스(Zacharius Ursinus, 1534-1583), 프란시스쿠스 유니우스(Franciscus Junius, 1545-1602), 윌리엄 퍼킨스(W. Perkins, 1558-1602), 부카누스(Buccanus), 윌리엄 에임즈, 아만두스 폴라누스(Amandus Polanus, 1561-1610), 프란시스쿠스 고마루스(Franciscus Gomarus, 1563-1641), 요한 폴리안더(Johann Poliander, 1568-1646)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에티우스, 존 오웬, 피터 판 마스트리히트, 튜레틴이 있습니다. 튜레틴은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에 빛나는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변증신학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특히 튜레틴의 변증신학 강요는 현대 개혁신학자 찰스 핫지(C. Hodge, 1797-1878)의 조직신학의 모체입니다. 튜레틴은 역사상 가톨릭과 기독교 이단들에 대해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단적 사상에 맞서서 기독교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변증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내용이 쉬운 책은 아니지만 영어로 번역되어 있고 이 책을 읽는다면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마스트리히트의 『이론실천신학』(Theoretico-Practica Theologia)은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에 있어서 길이 빛나는 교의학 교과서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경 다음으로 탁월한 책이라고 극찬하였던 이 책은 라틴어로 쓰여 있으며 그 중 일부가 영어로 번역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최근 예일대학의 교수 안드리안 네일러(Adriaan C. Neele)가 그의 신학의 일부 논제에 대한 개관을 연구한 책, 『Petrus Van Mastricht』(Brill Academic Pub, 2009)를 내놓았으니 숙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브라켈(W. a Brakel, 1635-1711)이라는 사람이 『the Christian Resonable Service』을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토마스 리즐리(Thomas Ridgley, 1667-1734), 요한 하인리히 하이덱거(Johann Heinrich Heiddeger, 1633-1698)가 있습니다.
4. 현대개혁신학을 공부함
첫째로, 미국 복음주의의 뿌리 논쟁에 대한 공부입니다. 현대 개혁신학의 뿌리에 대한 논쟁에 있어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의 복음주의의 뿌리가 개혁파 정통주의인가, 혹은 18세기에 일어났던 부흥운동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복음주의는 이 둘을 모두 뿌리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좋은 증거가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여러 명의 개혁파 정통주의 저자들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또한 부흥운동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대복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역사를 함께 추적해 가야합니다.
둘째로, 지난 세기 3대 칼빈주의자들에 대한 공부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아브라함 카이퍼, 벤자민 워필드입니다. 이 사람들의 저작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중요성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틈나는 대로 이 세 사람의 작품들을 읽어가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과 철학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로, 널리 읽히는 개혁주의교의학에 대한 공부입니다.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 찰스 핫지, A. 핫지(A. Hodge, 1912-1979)입니다.
넷째로, 현대신학자들에 대한 공부입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개혁신학과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도 있지만 꼭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 Pannenberg), 유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입니다. 이후에 나온 사람들은 개혁파 신학자들,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 1913-1988),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Reymond), 도날드 맥클라우드(Donald MacLeod), 로버트 리담(Robert Letham),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에드먼드 클라우니(Edmond Clowney, 1917-2005),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862-1949), 그레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 고든 스파이크맨(Gordon J. Spykman, 1926-93), 리차드 린츠(Richard Lintz),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 빌럼 판 엇 스페이거르(Willem van't Spijker), 리차드 멀러(Richard Muller), 특히 리차드 멀러의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Baker Academic, 2003) 네 권의 책은 꼭 읽기를 권합니다.
V. 주님을 영화롭게 한 지성
A. 마르틴 루터의 승리
1519년 7월 4일부터 14일까지 라이프지히(Leipzig)에서 마르틴 루터는 당대 최고의 입문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던 에크(Johann Eck)와 공개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 사람은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에크는 루터의 논제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오벨리스크'(Obelisk)라는 제목으로 책을 써서 루터를 공격했습니다. 오벨리스크는 호메로스의 저작들 안에 있는 글에 표시되었던 사본학적인 표시인데, 이것은 원래의 본문인 것 같지 않다고 의심이 되면 붙이던 것이었습니다. 즉, 루터의 주장이 진리가 아닌 것 같다는 뜻으로 오벨리스크를 낸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틴 루터는 ‘아스테리스크’(Asterisk) 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습니다. 아스테리스크는 호메로스의 저작을 사본 비평하는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에다가 표시를 해 놓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인문학적인 지식과 소양, 누구와 논쟁해도 우리가 믿는 개혁신앙이 참된 진리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저력이 있었기 때문에 당대의 논쟁가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습니다. 이때 한 증인은 루터에 관하여 이러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중간 정도의 키로, 근심과 연구로 인해 살갗 위로 드러나는 뼈를 숫자까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또렷하여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며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으며 희랍어와 히브리어에 정통하여 성경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을 충분히 판단 할 수 있었다.” 그는 천재적인 기억력과 폭포수와 같은 달변, 섬뜩할 정도의 통찰력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증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가로서의 지성적 준비가 충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B. 영력만큼 귀한 지성
1536년 어느 날 로잔에서 공개회담이 열렸습니다. 가톨릭과 개혁파 신학자들 양측이 만나서 토론을 통해 도시 전체가 가톨릭에 남든지 개혁파로 돌아가든지 합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3일 동안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칼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의 주제는 성만찬이었습니다. 가톨릭 측의 유능한 변론자인 미마르가 등장해서 연설문을 읽고,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교부들의 교훈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바로 그 때 마른 체구의 젊은이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칼빈이었습니다. 그는 준비된 원고가 없는 상태에서 가톨릭 측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논거들이 철저히 성경과 교부로부터 이끌어져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개혁파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비난하던 교부들의 글을 통해서 자신들이 이렇게 궁지에 몰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칼빈은 먼저 교부 터툴리안의 견해를 인용한 후 그것을 주석하기 시작했고, 교부 크리스소스톰의 설교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출처를 밝히기를 “이상은 크리스소스톰의 설교 제 11장 중간 부분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 23장 마지막 부분이며...” 마니교도인 아만투스를 반박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또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상 제가 말씀 드린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디만투스 반박 중간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98편 주석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요한복음 설교 시작부분인데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8번째 설교 아니면 9번째 설교일 것입니다.” 칼빈은 상당한 시간동안 교부들의 저작들을 인용하고 주석했습니다. 그는 원고도 책도 없이 완벽하게 정리된 기억 속에서 어마어마한 신학적 자료들을 그들 앞에 쏟아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 사람의 천재성이 드러난 순간이 아니라 자기 신앙에 의해서 확증되고 성령에 의해서 감동이 된 거룩한 진리가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가톨릭 측의 사제들도 경악에 가득 차 질린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때 프란시스 교단의 탁발 수도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모으던 유능한 가톨릭의 설교자, 장 탕디로서 개혁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며 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바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는 것은 명백한 진리에 반하는 완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들은바 칼빈 선생의 연설을 통해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 동안 무지 때문에 오류 속에서 살았고, 그릇된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왔습니다. 나의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거슬려 행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용서를 빕니다. 여기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도 내가 그릇된 것을 가르친 것에 대해서 용서를 구합니다. 나는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의 순수한 가르침만을 따르기 위해 성직의 옷을 벗어버리겠습니다.” 120명의 사제들이 수개월 내에 수도원을 탈출해서 개혁교회로 돌아오고 로잔은 개혁신앙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바람 잡는 허세, 소위 이야기 하는 영력이라고 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태도, 뭔가 사람들을 휘어잡으려는 정치적인 수단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심오한 능력과 강한 은혜가 있었고 거기에는 아주 분명한 지식에 대한 신념, 그 진리를 능히 확신하고 변증할 수 있는 담대함과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창, 칼로도 이룰 수 없었던 엄청난 일들을 스위스 로잔에서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의 신학적인 지식은 영적인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새롭게 태동하는 교회에 형태를 부여하며, 개혁 신앙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백하게 정리함으로써 사실상 종교개혁을 마무리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적으로 준비된 칼빈을 사용하셔서 역사적인 개혁을 마무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목회자가 신학적인 식견으로 무장되는 일은 그의 영력만큼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V. 결론: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부지런히 학문을 습득하기 위하여 애쓰십시오. 항상 마음속에 ‘나는 고3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치열하게 공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준비 되어야 합니다. 항상 게으름과 싸우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지식을 얻기 위하여 전심전력하여서 지성적인 진보가 눈에 띄게 해야 합니다. 둘째는 성경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절대 자유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을 배우도다.’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말씀을 보고 탐구하십시오. 셋째는 성경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진리라는 것을 느끼면서 공부하는 사람일지라도 공부를 많이 하면 교만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몸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고 교회를 온전히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지만 이렇게 준비된다면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