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대 개강수련회 3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백지영
시인은 5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시편 23편 속에 나오는 하나의 클라이맥스를 보여 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감사 그리고 자기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양 삼으셔서 목자 되어주신 그것에 대한 한없는 감격과 기쁨 그리고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이 이러이러한 일을 베푸셨기 때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잔칫집 문맥입니다. 잔칫날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신랑신부의 혼인을 축하하고 좋은 포도주를 따르며 잔에 가득 차서 서로 건배를 하는 그런 광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고백을 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이 시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넘치는 기쁨과 감격이 잔에 가득 포도주가 차서 넘쳐흐르는 것 같은 희열과 기쁨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학문을 하면서 주님을 섬겨가는 인생의 길에는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들이 있고 진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그런 고달픈 인생길을 살면서도 항상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기쁨과 희열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우리가 행복하게 보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찾고 찾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모르고 있는 참된 어떤 인생의 가치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고 확신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교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이 빈 잔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인간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인간 내면의 빈 공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희미한 지식이 있고 그래서 그 지식이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에 의해서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참된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이 차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은 가득 차게 됩니다. 결국 지식과 참된 기쁨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도 자신이 쓴 피터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의 해설이라는 책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지성의 행복에 있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고 춤추는 데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거룩함과 진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아는 것만큼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이고 이러한 행복으로부터 소외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통해서만 그 행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의 가치를 그렇게 드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르만 바빙크가 자기의 글 속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목마르도록 그리워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하나님을 떠나 멀리 도망치려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 인간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그러면서도 이 안에 있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공허를 쾌락과 방탕과 이 세상에 있는 일시적인 것들로 가득 채우며 살아보려고 하는 이 미친 듯한 발광들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 하나님 앞에 채워주는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지 않으면 선교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영국의 사상가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예화) 한 20년 전에 어느 신문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서울 변두리에 수유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 어느 의사가 쓴 글인데 새벽에 당직을 서고 있는데 급히 어떤 사람들이 양복 입은 신사를 메고 와서 내려놓으면서 이 사람 좀 살려달라고 하는데 보니까 심장마비 같더랍니다. 진찰을 해 보니까 이미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덮어놓고 한 시간 반쯤 지나니까 가족들이 울고불고 뛰어왔습니다. 의사야 죽은 사람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겠습니까? 가족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의사가 보니까 자기가 의사생활을 한 20년 했는데 이렇게 죽은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두 손을 움켜쥐고 태어나서 죽을 때는 펴고 죽는데 이 사람은 한 손은 움켜쥐고 한 손은 펴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저런 기묘한 폼으로 죽을 수 있을까, 저 주먹 속에 뭐가 들어있을까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보았더니 화투 2장이 떨어지는데 삼팔광땡입니다. 실화입니다. 스토리가 무엇이냐 하면, 밤새도록 장사 집에서 화투를 치다가 돈을 많이 잃었습니다. 막판에 돈이 잔뜩 쌓였는데 패를 딱 깠는데 삼팔광땡, 그러니까 너무 놀라서 들여다보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웃었지만 화투 두 장을 들고 삼팔광땡 중얼거리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나 땅문서 몇 장 들고 죽은 사람이나 박사학위 석사학위 들고 몇 장 펴보다가 죽은 사람이나 차이가 뭐가 있습니까?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것이 결국은 신앙입니다. 인생입니다. 이 시인은 그렇게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소원이 없습니다. 너무나 기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환희와 감격을 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 것이 그렇게 감격스러운 고백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제 여러분들에게 한번 눈물로 흠뻑 젖을 정도로 기도해 본 적이 언제이냐고 물었습니다. 오늘 다른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너무 기뻐서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같은 행복을, 그것도 이 세상의 돈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느껴 본 적이 언제 입니까? 빌 하이벨스 목사는 자기가 쓴 어느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아내와 함께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병든 것이다.”
그러면 이 시인의 마음이 이렇게 터질 것처럼 행복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발라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랬는데 이 상이라는 단어를 개혁 한글 성경 있을 때까지 많은 성도들에게 설교를 해 보면 절반 정도는 졸업할 때 총장님이 학생들에게 주는 상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상이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슐한’이라는 상인데 이것은 밥 먹는 식탁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식탁이 높지 않고 소파하게 비슷하게 야트막하게 되어있고 기대어서 식사를 하는 그러한 식탁이 있었습니다. 그 식탁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한 밥상을 나를 위해 차려주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수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도 히브리어 성경에 ‘쪼레라이’라고 나오는데 ‘짜라르’,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의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을 에워싸서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고 고통을 주었던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을 부음을 받기 전 까지는 그저 한적한 동네에서 평화롭게 목동 생활이나 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주시자 그는 이제 항구에 머물던 배와 같던 인생이 대양 속으로 나아온 것같이 온갖 풍랑과 시련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풍랑과 폭풍 시련을 겪으면서 시인은 자기를 미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였습니다. 자기는 사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존중하였지만 사울은 끊임없이 자객을 풀어 이 시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미친 척 하며 수염에다 침을 바르고 정신병자 행세를 하면서까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던 고통스러운 인생의 길을 지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노래했습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래서 원수들은 시인을 괴롭히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핍박과 살인의 위협을 가했지만 언제나 그것은 신앙 안에서 노래로 변했고 기도로 변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위해서 밥상을 차려주신 것이 이 시인에게 왜 그렇게 뜨거운 감격이 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문화에 있어서 밥상의 의미를 이해를 해야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여러 면에서 서양에 가까운 나라가 아니라 동양에 가깝습니다. 통합적인 사고방식 사물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에 대한 많은 이해들이 동양에 굉장히 가까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밥상문화입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대가족 사회 살던 생활을 생각해 보면 물론 삼심 명씩 되는 가족들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도 부족했겠지만 상을 한 군데 차리지 않고 여러 군데 차립니다. 안방에는 제일 좋은 식탁을 차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우리 어머니도 못 들어가시고 우리 아버지 정도가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옆에 방에는 삼촌, 고모, 우리 어머니, 나 이렇게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며느리들은 마루에서, 종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먹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하고 우리 집사람하고 들어가고 우리 아들이 올라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집 안에 위계의 질서가 정확히 있어서 그 밥상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가 정연한 상태에서 가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양반이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상민들과 함께 잠은 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밥은 같이 먹는 법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식탁을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은 브라더 후드(brotherhood) 곧 형제 됨, 가족 중의 일원이라는 그런 개념이 동양 문화 속에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저는 선교 역사를 가르치던 어느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중국 내지 같은데 방언이 하도 많으니까 언어를 다 습득하고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들어가서 거기서 바디 랭귀지를 하면서 거기에 살면서 언어를 읽혀서 성경을 번역해 주고 복음을 전파하고 이런 식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선교사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 문화적 차이를 몰라서 순교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자면 선교사가 가서 지도를 펴 놓고 나 이런 나라에서 왔고 나쁜 사람 아니고 당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하면 촌로들의 회의가 열립니다. 수염이 긴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장시간의 토론을 끝낸 후에 파란 눈의 외국인들 이방인들을 가족으로 받아주기로 합니다. 그러면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 선교사들을 데리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마을 회관 같은 데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서양 사람들이 도저히 보도 듣도 못한 몬도가네 음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중국만 해도 거의 모든 것을 다 먹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에게 그런 말이 있습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해서 북경을 방문하면 중국 사람들이 너희 그 나라의 대통령은 누구냐고 물어보고 상해에 도착하면 너희 나라에서 무엇을 팔면 장사가 되느냐고 물어보는데 광동으로 내려가면 그 외계인을 얼마나 맛있을까 하고 잡아먹는답니다. 지금도 만주 지역에 가면 결혼식을 하면 반드시 먹어야 되는 메뉴가 있는데 뱀국입니다. 팔뚝만한 긴 뱀을 사다가 동태처럼 토막을 내서 무를 넣고 푹 끓여서 한 그릇씩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결혼할 때 된 처자들을 보고 국수 먹을 때가 됐는데 그러는데 거기서는 뱀국을 먹을 때가 됐다고 한답니다. 그러니까 그런 음식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면서 또 서양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이니까 솔직하게 난 이런 음식은 안 먹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확 식으면서 싸늘해지면서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식탁을 거절하는 것은 그 문화에서는 형제 되기 싫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커다란 문화적인 장벽이 있는 것입니다. 동양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봅시다. 구약에서 밧단 아람에서 가축을 치던 야곱이 결국은 라반에게 몇 번의 속임을 당한 다음에 결국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아가지고 도망을 갈 때 라반이 추격을 합니다. 추격을 해서 결국은 붙잡았는데 하나님이 손대지 말라고 그러십니다. 그래서 완전히 화해를 한 다음에 마지막에 헤어지기 전에 한 것이 식탁을 나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로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욕을 잡수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너희 선생님은 왜 만날 먹고 마시냐고, 그것도 죄인들하고 먹고 마시냐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가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의원이 쓸데가 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오히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 오셨다.”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세리와 창기 같은 일반 백성들을 자기와 같은 하나님 안에서의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 주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그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로만 듣고 전해만 듣던 하나님의 성품을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그리스도 예수의 섬김과 인격을 통해서 찬란한 빛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래서 그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처럼 받아주시면서 그들이 진정한 회개에 이르도록 사랑으로 도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까칠하게 죄인들을 향해 불쾌한 마음으로 탄핵을 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먼저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면서 형제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회개하여 주님께로 돌이키도록 설교했던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요한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던 장면을 기억할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교회 속에 다시 모셔 들여 보좌에 앉히실 때에 주님이 그에게 주시는 보상이 이 세상의 커다란 명예나 번영, 부, 성공 이런 것이 아니라 최대의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이 “나는 너와 더불어 먹고 너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교통과 사랑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성경 최대의 요절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창세기 1장 1절의 토대가 없으면 요한복음 3장 16절은 공중에 뜬 신기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창세기 1장과 1절과 요한복음 3장 16절 사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한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 임마누엘로 실현되고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껍질처럼 깨어져 소멸됨으로써 영적인 이스라엘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마신다는 이 식탁을 공유하는 사상은 성경에서 아주 풍부한 신학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는 언약적인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에 있는 사랑과 연합의 관계가 생명적인 연합이 바로 먹고 마신다는 이 말 속으로 집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인은 바로 주께서, 성경에는 당신께서 이렇게 나오는데, 당신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원수들이 악한 마귀들조차도 다윗이 아무 힘없이 외롭게 있는 것을 보고 박살을 내기 위해서 덤비다가 얼핏 눈을 떠보니까 다윗과 함께 상을 겸상하고 있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견이고 얼마나 놀라운 관계의 축복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어쩌면 다윗시대의 문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이 이상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언약관계를 이 안에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감격 속에서 시인이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그리고 너무 너무 행복한 것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좋은 학교 다니고 지식이 많고 이런 것들이 아니라 그 좋으신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으시고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산다는 것, 이 속에서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고 그 안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그것이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헌신적인 삶을 살고 싶어도 그 헌신이 순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 헌신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인격적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야망에 의한 충성, 대가를 바라는 충성, 보상을 요구하는 충성, 어려움을 참고 끝까지 충성하면 상처가 쌓여서 원한이 생기는 그런 종류의 충성 아닌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어제 총장님도 일부의 이야기겠지만 교역자들의 헌신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여러분들이 이다음에 목회에서 꼭 승리하는 사람이 되는 비결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교회의 부교역자로 가든지 간에 담임목사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저는 신학대학교 다닐 때 3학년 때부터 전도사 생활을 했는데 나는 담임목사로 교회를 개척할 때까지 내가 한 번도 전도사로서 담임목사보다 교회를 덜 사랑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담임목사를 보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해 주고 나와 함께 하신 이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 때문에 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상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깊은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한 25년 전쯤 시편 23편을 히브리 성경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읽다가 너무 감격해서 정말 한참 동안을 설렜습니다. 그 이유가 ‘베푸시고’ 라는 단어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한 상을 ‘베푸시고’, 이 단어가 히브리 성경으로 ‘아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이 ‘아라크’는 구약에 아주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어디서 많이 나오느냐 하면 군대와 관련된 용어로 많이 사용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수많은 군대들을 좌우로 배열을 지어 행 오를 갖추는 동작을 가리켜서 아라크라고 불렀습니다. 물건을 질서 있게 분류를 하거나 줄 지어 놓는 것을 아라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상을 아라크 하셨다고 하는 의미는 시인을 위하여 베푸신 이 식탁이 간단하고 심플한 분식집 스타일의 식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는 전라도 쪽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자주 내려갈 기회는 없는데 한 15년 전에 그쪽 교회에서 오라고 해서 집회를 했는데 장로님이 좋은 점심을 사 주겠다고 봉고로 태워가지고 50분을 달려서 갔는데 한정식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싼 집은 아니었지만 양심에 가책을 느낄 정도로 비싼 집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밥을 먹는데 한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쯤 먹고 나니까 풀이에요. 그래서 조용히 앉아서 접시 수를 셌습니다. 그런데 4인상이 뚜껑까지 포함해서 피스가 200피스였습니다. 그러니까 풀 식탁을 차려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예화) 자매들이 결혼을 해서 신혼여행을 갔다 오면 친정에를 갑니다. 그래서 딸이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내일 점심때 김 서방하고 간다고 맛있는 것 해 주어야 한다고 그리고는 아침에 남편이 밥 달라고 하니까 밥은 뭘 먹느냐고 엄마가 점심 맛있게 해 줄 테니 가자고 그리고는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전 부치는 냄새도 안 나고 음식 만드는 기미가 전혀 없습니다. 조용하고 식구도 없습니다. 엄마 혼자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다가 절을 받으시고는 주방으로 가시는데, 이 엄마는 저런 녀석이 자기 딸을 채 간 것이 매우 맘에 안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을 차려 오셨는데, 먹다 남은 밥에다가 찬물을 붓고 거기다 수저 하나를 꼽고 귀퉁이 떨어져나간 작은 소반에다가 반찬은 아무 것도 없이 무수한 젓갈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 딱 올려놓고, ‘들게.’ 하고는 탕 하고 갖다 놓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너는 네게서 마음에 없는 손님이다. 너 같은 것은 와도 되고 안 와도 된다.’라는 뜻입니다.
(예화) 목회를 하면 심방을 가야하는데, 저는 집에서 밥하는 것을 절대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자매들이 음식 하나를 만드는데 얼마나 고생을 하는 줄 알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식사시간 피해가고, 식사시간에 어쩔 수 없이 해야 된다면 나가서 갈비탕이나 하나 먹자 그러는 주의입니다. 한 10여 년 전 일인데, 50대 초반쯤 되는 자매님이 교회 와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교역자가 목사님이 당신 집에 심방 가시는데 목사님이 밥하는 것 싫어하신다고 하니까 그래도 하겠다고 절대 하지 마라 그랬는데도 절대로 하겠다니 할 수 없이 갔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한 12, 3년이 지났는데도 그 밥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정성스러운 밥상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 자매님이 열흘 전부터 밥상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김치를 담그고 밑반찬을 다 하고 일주일 전부터 장보기 시작하고 삼일 전에 본격적으로 봐서 하루 전서부터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자상에다가 셋이서 들고 오는데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것을 왜 하느냐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님의 종에 불과한 사람인데 이 음식을 하나하나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시간과 노력이 들었겠느냐 그 시간에 기도도 하고 성경을 읽지 그랬더니 자매가 화가 났습니다. “목사님,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빨리 드십시오.” 그런데 정말 예쁘게 그리고 하나하나에 마음이 담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손을 뻗쳐도 젓가락이 사정거리에 안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내 눈을 보면서 먹고 싶어 하는 것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인을 위해서 그런 밥상을 차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열린교회에서 섬김의 날을 하는데 그래서 밥을 잘 차려주려고 했는데 식당에서 밥을 안 하겠다고 해서 아라크의 밥상이 못됐습니다. 도시락을 준비한다고 했는데 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밥상을 보면서 시인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하나님이 이렇게 선하게 인도하시고 베풀어주셨는데 이 다윗이 일평생 하나님 앞에 감격했던 찬송의 제목 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만든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헤세드에 대한 찬송과 주의 진리, 에메트 그런데 사실은 신실하심이라고 번역됩니다. 주의 헤세드와 에메트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송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성품이 신학적으로 언약에 적용이 될 때 신실하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스라엘은 시인은 하나님을 떠나려고 해도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붙드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인생의 시련이 겹치고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우리를 이기며 살게 만들었던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차려주시는 말씀의 식탁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제 나는 아무 희망이 없다 그리고 나 같은 인간은 정말 하나님도 돌보시지 않는 것 같다는 커다란 패배감이 엄습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말씀의 식탁을 차려 주셔서 그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고 우리의 인생이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하나님 없이 핍절한 삶을 살던 사람이 한번 주님을 만나고 말씀의 식탁에 배부를 때 그의 인생의 방향이 바뀌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의 목표가 바뀌는 놀라운 변화가 오게 되었고 그러한 주님과의 사랑의 만남이 오늘 여러분들을 여기까지 인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식탁에서 충만한 배부름을 누리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은혜 가운데 모든 사람들을 붙들어주고 하나님 앞에 살며 그렇게 지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두 번째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세멘’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올리브유를 많이 썼는데 기름은 사실은 성경에서 성령은 의미한다는 것은 토론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명백합니다. 이 다윗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 사건은 구약의 삼직에 대한 이해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을 솥발처럼 떠받들 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을 이루어가는 세 개의 신적 기관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적인 오피스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왕, 제사장, 선지자였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의지를 자신의 나라 안에서 성취하는 사람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이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죄인들에게로 나오는 사람이고, 제사장은 죄인들과 같은 한 형제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의 기능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관심은 계시에 우선하고 있었고 제사장들의 관심은 전통과 율법에 우선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들이 각기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복종하며 자신의 임무를 올바로 수행해 감으로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 선택된 진정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가당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별한 일을 맡은 이 사람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시간이 없지만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시대의 성령의 경륜의 역사와 구약 시대의 성령의 경륜의역사가 약간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다윗은 일생동안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고 그의 생애에 가장 강력한 기름부음의 인상을 남긴 시점은 바로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그는 일생에 경험해 보지 못한 매우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여 여호와의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통해서 다윗은 자기가 내면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인생관과 세계관이 파쇄 되는 것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 죄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매우 탁월한 감각을 갖게 되었고 좀 더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율법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만물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 있는 인식의 능력의 엄청난 재고를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그리고 들풀에 핀 꽃 한 송이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고 이것들이 수많은 찬송가 속에서 그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성령은, 이것은 디테일한 논의를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해가, 성령이 오셔서 그 성령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매우 특별한 교통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데 그 스피리투스(spiritus)를 가리켜서 우리는 신약에서 성령의 내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주하신 성령은 떠나지 않고 늘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그런 개념하고는 좀 달라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위해 당신을 위해 특별한 일을 하게 하실 때 그에 합당하도록 성령을 부으시고 그 성령이 그에게 지혜와 탁월한 능력을 줍니다. 그래서 그런 능력이 어떤 때는 통치와 예언 심지어는 어떤 기술과 예술을 통해서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사렐과 오홀리압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건설할 때 성령께로부터 충만한 능력을 받아 그들이 탁월한 지혜로 성막의 공사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한 예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오셔서 자연적인 은사와 우리의 특별한 은사를 빛나게 만들어주고 이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그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그에 맡겨진 직임에 적합한 사람으로 예비되도록 그를 새롭게 빚는 역할을 하도록 했고 때로는 그것이 육체적인 커다란 힘을 가져다주기도 했으니 삼손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 런 것입니다. 담대함과 용기, 지혜, 능력, 자연적인 은사의 빛남, 특별한 은사의 수여,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 시인이 깊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은혜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 “더 이상 주님 앞에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과 영광이 무엇인지를 체험해 본 사람들은 그 기쁨과 영광을 맛보기 전까지는 다른 무엇으로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정말 생수를 먹고 그 참맛을 안 사람들은 다른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 안에 있는 세속주의와 번영주의 그리고 무엇인가 정직한 복음을 상실하고 무엇인가 이 세상을 개혁시키고 변화시키기보다는 생존하기에 급급한 이 모든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의 도입은 결국은 목회자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기쁨과 참된 만족이 어떻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지는가 하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서 오는 모든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서 우리에게 한사람 한 사람에게 이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그 성령의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정말 성령 충만합니까? 그리고 정말 찬송이 우리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그런 고백이 있습니까? 저는 21살에 회심했고 그 전에는 끊임없이 자살을 생각하던 슬픈 청년이었습니다. 아침이면 매일 눈 뜰 때마다 인간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섭고 괴롭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학교공부 제쳐놓고 독서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진정한 만족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잠시 문학작품을 읽으면서는 나 말고도 이런 인생의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서 위로를 받았고 사상과 철학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는 나름대로 그 답을 찾았다는 사람들도 있었구나 하며 기뻤지만 그러나 그들도 그 답을 찾고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읽은 쓰레기 같은 내용들이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그때는 참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하다가 결국은 어느 날 밤을 새워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저 들판에 외딴 곳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새벽이면 항상 종소리가 들립니다. 뎅그렁 뎅그렁. 나도 모르게 새벽마다 이끌려서 뒤뜰로 나아가서 저 멀리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뎅그렁 뎅그렁 하는데 무수한 언어를 나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그리고 특별히 전도하는 사람 없이 저는 그해 봄여름 내내 그 종소리를 듣다가 가을에 나 스스로 예배당을 찾아갔습니다. 교인 한 30명 모이는 2층의 조그만 교회당, 삐그덕 거리는 풍금소리 그리고 톱밥 난로,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초라한 예배당이었습니다. 거기 무릎을 꿇고 풍금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안식을 느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좀 다니니까 목사님이 세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 학습도 안 받았는데. 그래도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바로 세례를 받으라고. 청년들도 없는데 내가 갔으니까 목사님이 아주 귀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날 밤부터 고민이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은 것만 해도 감사한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결혼을 해서 신부가 될 수 있을까? 매일 30분을 걸어서 벌판을 지나서 그 조그만 2층 예배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나 같은 인간이 아무래도 주님을 알고 지내는 것은 어떨지 모르지만 혼인신고를 하는 것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세례 받을 날이 왔습니다.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그리고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그런데 처음 경험이었습니다. 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죽 내려오더니 내 몸이 뜨는 것 같아서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에 한참을 울었고 그리고 나서 한참 동안 기도하고 보니까 교인들이 대부분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11월 중순에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은 유리창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비치고 들어올 때 이제껏 내가 가졌던 인생의 꿈과 야망 욕심 다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간절한 소원,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간절한 소원은 오직 하나,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싶고 거룩해지고 싶다는 정말 주님을 닮아서 거룩해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유사한 일이 많았었지만 하나만 더 소개를 하자면 신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큰 기도제목이 있어서 새벽마다 가서 창자가 끊어지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응답의 기미는 안 보이고 해결해야 될 날짜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어느 날 기도하다 보니까 사람들도 다가고 목사님도 가셨습니다. 무지하게 춥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기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편안히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나보다 어린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지하게 추운데 영하 18도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 차가운 땅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불쌍해서라도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고 무엇엔가 이끌려서 바닥으로 내려왔는데 시멘트 바닥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다가 댔는데 견딜 수 없는 냉기가 확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저는 원래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그런 기도를 싫어합니다. 조용히 묵상하면서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주님이 박대하시면 제가 어디를 가겠습니까? 좋으신 하나님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도와주십시오.” 기도하는데, 한번 내가 이 설교를 했더니 인터넷에서 김남준 목사 이상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이상하게 강대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축구공보다는 좀 작고 핸드볼만한 불덩어리가 빠르지도 않고 천천히 천천히 날아오는 것입니다. 저것 가만두면 나한테 맞을 텐데 그러고 있는데 슉 날아오더니 머리에 부딪치는데 쾅 하고 부딪치는 게 아니라 슉하고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더니 이번에는 온 몸이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땀이 쏟아지면서 온 몸이 불같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의 모든 죄와 모든 것들이 회개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내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입었는지, 그때는 나도 모르게 열렬히 소리를 내어서 기도를 했는데 한참 기도하다 이상한 소리가 막 나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방언이었습니다. 나는 혼자 조용히 기도하다가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체험한 것과 성령의 체험이 달랐지만 하나 확실하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 두 번째는 거룩해지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을 다 드려 주님을 위해 죽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떠보니까 교회에는 아무도 없고 그리고는 아침 태양이 붉은 기운을 내면서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게 만드는 힘, 그리고 소돔과 같이 사랑을 입은 거리에도 자신을 버리는 희생과 헌신으로 이 길을 가게 하는 모든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그 은혜, 그분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기쁨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일평생 여러분들이 주님의 자녀로, 하나님 종으로 부름을 받았으니 일평생 그렇게 우리 주님을 높이며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