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공과특강
녹취자: 백지영
빛으로 부르신 신학적인 의미와 함께 윤리적인 의미를 강조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화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가 없으면 하나는 그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오히려 이교도들이 기독교도보다 훨씬 윤리적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에 그 빛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 점에서 이 둘은 조화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가 없는 하나는 그것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처음서부터 그것은 아주 확고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 전체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목양을 할 때에도 목양에서 풍성한 삶을 강조할 때에도 은혜와 진리, 예배에 있어서도 두 가지 영과 진리,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지성과 의지로 창조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동기도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지혜, 지성, 진리, 신학, 사상 이런 것들은 전부 다 한쪽에 경건에 있어서 두 요소인 지식과 경외심도 마찬가지고, 지식과 사랑도 마찬가지고, 한쪽 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이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 성령 그 다음에 은혜, 그 다음에 경건의 한 요소로서의 사랑, 이 모든 것들이 또 한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과 사랑이라는 문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들로 쭉 이어지면서 영원 후까지도 결국은 이것들이 영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식과 사랑 그 자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지성이다. 의지는 사랑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정의하기를, “사상은 하나님의 지혜를 안 것이고 윤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다.” 하나님이 엄중하게 우리에게 심판을 경고하시면서 어떤 의무를 부과해도 사실은 그것이 시작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손해가 된다면 하나님은 충분한 하나님이 아니지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그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독교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그것을 체계화하고 사상화 하고 그 틀을 가지고 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지에 대한 근거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사상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실은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2장에 나오는 ‘복음지혜와 성령’이라는 설교를 주의 깊게 들었으면 좋겠어요. 거기에 무엇이냐고 나오느냐 하면, 그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2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해요. 사람들이 거의 간과하고 지나가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내가 사람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만 있게 하였노라.” 고린도전서2장입니다. 그리고 나서 6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반의어가 나와요. “그러나”, 앞의 이야기를 뒤집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려고 했다. 그 말을 뒤집는 것입니다. 틀려서 뒤집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사실은 그러면서 뒤집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앙이 다 자란 사람, 어른스러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지식과 윤리, 영적 생활 이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텔레이온'이라는 사람, '텔레이오스' 그런 사람들에게만 내가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직 신앙이 어린 사람들 말고. 그런데 믿음이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만 있다는 그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이면에 있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면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지혜를 말하는데 철학입니다 이것이 철학. 소피아. 그러니까 필로소피아(philosophia)가 지혜를 사랑하다잖아요? 필로소피아에서 찾았던 그 소피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문맥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도 모든 사람이 학문의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고린도 시민들이 굉장히 수준 높은 시민들이었어요.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아고라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국제무역시장입니다. 그 당시에 배를 기다리면서 사람들이 마작 두고 땅따먹기 하고 놀던 그림들이 아직도 다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외국과 문물이 활발하니까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오는 거지요. 그리고 그 아고라 앞에 커다란 아크로폴리스가 있어요. 그 광장에 모여서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는 장사치들이 모여 있는 아고라인데, 여기서는 그것이 아니라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면 하면 인생이 행복하냐?” 부요한 도시였으니까 먹는 것에 그렇게 구애 받지 않았으니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그것을 존중해서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 분위기에서 기독교 복음이 선포될 수 있는 기회를 굉장히 많이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나타났을 때 그렇게 관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를 로마제국이 제공했던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뉴 필로소피(new philosophy)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려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온전했던 자들 중에서 내가 지혜를 말하노니, 그러면서 단서를 붙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철학을 말한다. 그런데 이 철학은 세상철학이 아니란다. 세상에 없어질 관원들의 철학도 아니다.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철학이다.’ 그러면서 그 철학의 핵심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정말 놀랍지요? 그래서 언젠가 나는 이 부분을 아주 아름답게 책으로 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금방도 아까 우리 교역자들의 모임에서 이야기했는데 오늘날의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문학작품을 안 읽어요. 문학작품을 안 읽은 사람들은 철학이나 사상적인 것을 읽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문학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에게 '너라는 인간이 이런 데가 아프단다.' 그러면서 결점과 인간의 실존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학에는 답은 없어요. 물음표만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 물음표는 사상가들에 의해서 먼저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가들에 의해서 제시가 되요. 감성적으로 뛰어나니까 무수하게 물음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런 물음표를 제공하는 데서 자기 인간의 실존의 고통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데도 인간은 이렇게 찢어져야 되는 경우가 있구나. 그때에 혼자 있는 고통과 괴로움들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것이며 그리고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면서 인간이 이렇게 늙음에 복종하면서 희망 없이 완전성으로부터 멀어지는데, 그런 것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모든 의미들을 갖게 되는가? 이런 문제들을 광범위한 시각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을 보면 볼수록 신학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옛날에 백금산 목사가 모여서 도스토예프스키 토론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굉장한 사람입니다. 나는 처음에는 톨스토이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보니까 도스토예프스키가 훨씬 더 인간을 깊게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토론을 하는데 백목사가 깊이 도전을 받았어요. 열심히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데요. 3일에 걸쳐서 죄와 벌인가를 읽었는데,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데요. ‘내가 목사가 되서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시기가 있는 것이지 아무 때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들을 많이 갖고 그 다음에 사상서나 그런 책들을 보게 되면 무릎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은 이렇게 해결하려고 했구나.’ 그러면서 나 같은 경우에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결국은 남이 내 준 답이지 내 답인가, 그리고 답을 찾았다는 사람들도 행복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고민을 하게 될 때 마지막 소피아는 복음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무섭게 단절시켜 버리게 되니까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발견한 그 진리는 사실 저쪽에도 답이거든. 그런데 이것을 강을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야. 그것을 강영안 교수님이 언어의 표현의 한계라고 이야기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기가 신의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 한 학기 동안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중립적으로 사회만 보고 양쪽 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두 진영으로 갈리더랍니다. 크리스찬과 넌 크리스찬. 막 싸우고 이야기가 험하게 되었는데 한 학기가 끝났을 때 어느 신실한 학생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더래요. 자기는 교회 열심히 다니는 그리스도인인데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답은 다 알고 있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지 저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통하는지에 대해서 자기는 언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토론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더라면 자기가 휘어잡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거의 모르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그런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상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요. 나이가 들수록 그런 확신이 점점 깊어지고 사상의 나무에 걸리지 않은 기독교의 지식은 길 위에 구르는 낙엽과 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하찮은 것들입니다. 그 하찮은 것들 중에 몇 개라도 붙들고 아주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되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서 우쭐해지거나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그리고 다음에 나오고 있는 신학생에 관한 책에서 나의 그런 생각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대단히 만족스러워요. 이 책에 대해서는. 그리고 여러분이 혹은 교인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설교시간에 이야기했던 산발적인 통합사고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보면서 현대문명을 바라보는 눈들이 함께 열려야지만 사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이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소비적 영성이야기도 나오고 그 다음에 윤리의 힘 이야기도 나오는데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잖아요. 소위 이야기하는 영적인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 안에 들어온 물질적 소비주의에 대해서 많이 비판들을 하잖아요. 물론 그것도 당연히 잘못된 것이구요. 물질을 허무한 일에 낭비하는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물질적 은혜보다도 낭비했을 때 더 커다란 손해를 가져 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적인 은혜를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범한 커다란 잘못 가운데 하나에요. 60, 70년대 때 하나님이 부어주셨던 은혜들을 너무 소비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신학사상이 잘못됐기 때문에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부어주시면 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그에게 내려주시는 물질의 번영의 징표라고 본다든지, 은혜를 많이 받고 자기 힘든 것이 없어지고 만족을 느끼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풍조라든지 이런 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 돈 잔뜩 걷어서 교회 짓고 그 다음에 기도도 별로 안하면서 기도원 사고, 요즈음은 많이 없어졌지만 교회 묘지까지 사는 운동이 벌어졌는데 이런 것들을 물질적인 소비라면, 영적인 소비도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묶어줄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다. 올바른 방식으로 사상이 취해지게 되면 은혜가 동반되지 않고 그렇게 되는 법이 없고, 윤리가 올바로 추구되면 그것은 윤리를 향하여 의무를 부여하는 사상과 체계 없이는 사실은 그 윤리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쪽에 있든지 간에 둘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전해지는 것이다. 그 은혜의 핵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윤리가 아주 거친 윤리가 아니라 사랑의 윤리에요. 사랑의 질서를 따라가는 그런 윤리라고 우리들이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이 은혜 없이 윤리를 추구하게 되면 결국은 도덕주의에 빠져서 자기 의에 흐르게 되고, 그것을 거부하게 되면 무율법주의로 흐르게 되고, 그 다음에 지성적으로 건너가면 잘못하면 반지성주의가 되든지 지성주의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오류입니다. 굽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하거나 할 때, 어느 진리를 하나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설교하면 안 되고 다른 모든 진리들과의 연관을 이루면서 그것들을 전체를 보여주는 부분이 되도록 그렇게 구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답이 됐나 모르겠어요.
(질문) 인간 안에 하나님께서 본성의 빛, 계몽주의 시대 가운데 인간의 이성을 기본으로 해서 지식을 추구하고 그 지식이 빛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하는 경우에도 낙관적인 세계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본성의 빛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낙관으로 나타나는데 역사의 긴 안목으로 볼 때에는 지금 시대 같은 경우에도 윤리, 도덕 같은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인간에게 정말 이런 본성의 빛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하는 것 그래서 그 본성의 빛을 개발하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 그런데 긴 역사적인 안목으로 볼 때에는 더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라는 것 그런 문제가 있고요, 그래서 성령의 일반은총과는 어떤 관계로 본성의 빛을 이해하면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71페이지에 세상을 세 가지로 나누셨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또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회복하고자 하는 세상, 세 번째는 타락하고 구속받아야 할 세상인데, 타락하고 구속받아야 할 세상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42페이지에 보면 질문한 내용들이 거의 다 나오는데, 첫 번째 단락에 보면 동북아시아의 사상가들 중에도 우리들이 흔히 동양철학, 동양철학 그러잖아요? 그런데 철학자들 중에서 좀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들이 무엇인가 하면 동양철학이라는 말은 너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동북아사상이라고 이야기해야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중국, 일본, 우리나라, 몽골, 몽골에 무슨 적절한 사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해당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요. 인도도 사실은 동양이잖아요? 우리가 그것은 동양사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애매하다는 것이고 동북아사상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관 속에서 인간을 신화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가치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사회적 활동은 세 견해로 분류됩니다.” 내재적 가치론입니다, 인간 안에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외재적 가치로는 계몽주의의 가치관하고 비슷하지요. 굳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어렵겠지만 그러나 내재적 가치론을 유명론이라고 본다면 외재적 가치는 실제론이 될 것이고 중형적 가치론은 관념론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재적 가치는 밖에 객관적인 가치가 있는데 그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서. 내재적 가치론은 그렇게 사유하는 인간 자신이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형적 가치론은 그 중립을 취하는 것인데, 그래서 내재적 가치론은 인간의 본성이 하늘이 내린 초월적 내재자, 사물의 근원적 이치로 보니까 그것이 진리의 연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욕적 본성을 거슬러 직접 상승하여 깨닫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수행의 핵심이라고, 밑에 보면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맹자에 나오잖아요? “측은지심(惻隱至心)을 사람들이 다 가졌으면, 수오지심(羞惡至心)을 사람들이 다 가졌으면, 공경지심(恭敬至心)을 다 가졌으면 희비지심(喜悲至心)을 다 가졌다. 인의예지는 밖에서 나에게 녹아들어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졌던 것이지만 육욕적 자아나 육욕적 본성에 어두워져서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것들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결국은 신의 마음을 자신이 가졌고 그 마음이 곧 신이다. 유주(劉晝)의 신론에는, “홀로 행해도 자신의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고, 잠을 자도 이불에 부끄러운 바가 없다.” 홀로 행하는데 그림자는 자신을 항상 따라다니잖아요? 밖에서 누가 나를 규율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 안에 천적(天的) 본성이 있기 때문에 천적 본성은 지상적 본성에게 ‘이렇게 하지 말아라’, ‘저렇게 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하고 통하는 것입니다. 칠정은 끊임없이 요동치면서 일어나는 인간의 가변적인 것들입니다. 정동(情動)들입니다. 덧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없으면 또 안되요. 예를 들어 보면, 우리나라에 법정 스님이 훌륭하지만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이 법정스님처럼 30년 전에 만든 빠삐용 의자 하나만 쓴다면 가구회사 다 문 닫아야 해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이 있는 것이 훌륭하지만 나라 전체에는 누군가는 또 어떤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면서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고 해서 나라가 나라의 모습을 갖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림자에 부끄러움이 없고 홀로 잠을 자도 이불에게 부끄러운 바가 없다, 이불 속에 홀로 조용히 누웠는데 이불 속에서 만약에 이웃을 해꼬지 하는 생각을 한다든지 바르지 못한 부도덕한 욕망을 품는다든지 하면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지만 이불은 봤다 이것입니다. 이불이 자기 자신을 체화(體化)한 것입니다. 비유로 얘기한 것입니다. 이불이 무엇을 보겠어요? 그러니까 이불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이야기는 자기 자신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조차도 모두 성령의 역사로 보았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과 이 세계 사이에 있는 포괄적인 관계로 보게 되지요. 그러나 비판도 많이 받아요. 그러니까 성령의 일반은총의 역사들을 너무 광범위하게 생각을 해버리면 결국은 인간의 죄라든지, 자율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설명들이 만족스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악한 이교도들 가운데서도 어떤 선들이 있을 때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부르는 것이 과연 맞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그런 성령의 역사 없이는 인간은 어떠한 자율적인 선도 찾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라는 일반은총적인 문제들도 나오게 되고, 또 “그 일반은총은 어떻게 보면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쉽게 정복되는가, 굽어져버리는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많은 문제들이 나오기는 하지요. 그러나 그렇게 역사상 있었던 신학자들 가운데 그렇게 세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빈틈없이 설명하려고 했던 신학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강점이 될 수도 있고 약점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인간의 본성의 빛 같은 문제는 개혁신앙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지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찾아가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어둡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율법이 없었다고 변명하기에는 너무 분명하다.” 이 정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잘못된 사상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 한 굉장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깨어짐 책 1장에 들어가서 읽어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법들이 약화되는 양심의 기능이 저해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예를 들었는데, 제일 커다란 것은 실용주의 같은 데서 도덕적인 기준 자체를 공격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양심은 현저히 면죄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힘이 있느냐의 문제는 수학적으로 대답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인간의 역사들을 지탱해온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통치의 한 수단이었다고 우리는 이렇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본성의 빛, 대부분 양심인데, 이런 것들을 통해서 사회가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나는 많이 회의적입니다. 왜 회의적이냐 하면, 그런 양심의 빛 자체가 있다는 것을 하나씩 둘씩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심의 빛은 우리 바깥에 있는 외재적인 어떤 진리들을 인식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외재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 자체를 현대사상은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보면 3장에서 진리를 도전하는 사상적 도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철학이나 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과 문화에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심지어는 도시미학 같은 곳에서도 펼쳐진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아길레뜨 공원 같은 것을 보면, 길이 있어요. 공원이 길을 만들었어요. 길을 만든 목적은 어디로 가기 위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길 따라 가면 아무데도 안 나오는 것입니다. 중간에 가다보면 길이 없어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이 어떤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덕원갑니다’라는 팻말이 있으면 인덕원으로 꼭 가지 말아야 된다 이것입니다. 꼭 가야 된다는 그것이 고정관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이제 파격적인 실험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공부를 하는 유익이 무엇이냐 하면, 삼성의료원 가보셨지요? 삼성의료원 1층에 들어가 보면 양쪽에 크게 파인 공간이 나오고 정원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쪽에 있는 정원을 보세요. 이것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 따위 정원을 만들었나 이런 느낌이 들어요. 원래 정원이라는 것은 햇볕도 잘 드니까 나무 데크도 있고 아니면 잔디가 있고,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풀이 있고, 군데군데 조각도 있고 이런 것이 정원이잖아요? 가보면 아무 것도 없고 굉장히 비싼 돌입니다. 자디잔 조약돌입니다. 그것을 흑석이라고 하는 데 나는 곳이 많지 않아요. 그것을 몇 트럭을 가져다가 쫙 깔아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바위를 마치 커다란 수박 자르듯이 횡으로 자르듯이 툭하고 친 다음에 이쪽은 울퉁불퉁한데 위만 반질반질하게 갈아버린 것입니다. 색깔이 두 개가 비슷해요. 그것을 몇 개 갖다놓았는데 그것이 정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설치하는 데 돈 굉장히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구성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많은 돈을 요구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포스트모던과 모던 사이를 걸쳐 있는 작품입니다. 똑같은 작품이 6층 건강센터 위로 올라가면 옥상에다가 정원을 만들었는데, ‘뭐 이런 게 있어?’ 그럴 정도에요. 나무 그늘도 없고 아무 것도 없고 데크하고 벽돌하고 돌하고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뭉쳐 있어요. 각자.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물의 물성(物性) 그 자체를 조화와 균형이라는 이런 개념이 아니라 물성 그 자체를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돌이다. 큰 돌 작은 돌을 한꺼번에 보여주어서 돌의 물성을 느끼게 만드는, 그 속에 있는 조화와 균형 그런 것들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굳이 찾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백남준씨 데뷔작이 그랜드 피아노 위에다가 소대가리룰 피 뚝뚝 떨어지는 것을 잘라서 올려놓고 무대 위에 올라가서 도끼로 소대가리하고 그랜드피아노하고 다 때려 부수는 것이 데뷔작이었어요. 엄청나 파격이었지요. 60년대니까. 이분은 굉장히 벌써 생각이 앞서 간 것입니다. 그런 기준 자체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학이 마지막 도달한 것이 미학의 죽음의 선언을 미학이 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해서 밥그릇을 날리는 것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살아 있다고 해야지 책도 쓰고‘ 강의도 하고’ 교수 자리도 얻을 텐데 하나님은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문학은 문학의 죽음을, 신학은 신학의 죽음을, 심지어 수학이 수학의 죽음을 선언하지요. 굉장히 재미있어요. 성성(性性), 섹슈얼리티(sexuality) 그 자체를 죽음을 선언해요. 그래서 여자가 호리호리하고 예쁘고 그러는 것 자체가 편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기준 그 자체를 공격하기 때문에 사실은 인간의 양심이나 이런 것들이 살아 있어도 히마리가 없어서, 김영민인가 그 친구는 "아니 왜 한 남자가 성 생활을 자기 부인하고만 해야 되냐? 아무나 하고 하면 어떠냐? 그리고 한 다음에는 한 사람을 호적에다가 올려주자. 한 번 한 사람, 두 번 한 사람, 세 번 한 사람 이렇게 올려주자." 그런 코드들이 전부 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저 말발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모르는데 그런 사상에 전부 다 물든 것입니다. 그것이 왜 나쁜데? 그러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럼 할 말은 없는 것입니다. 왜 한 사람이 결혼을 해서 자기 부인하고만 성생활을 해야 되냐? 이 사람 저 사람하고 하면 뭐가 나쁘냐? 물으면 여러분 답을 할 수 있겠어요? 성경에 기록돼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차피 성경 안 믿으니까. 그러니까 당신들이나 그렇게 해. 우리는 성경 안 믿으니까 우리는 우리끼리 할 테니까. 그러니까 1980년대 초에 미국 오렌지카운티에서, 그전에도 물론 다 있었겠지만, 처음으로 스와핑이 일어나가지고 미국 전체가 휘둘렸거든요. 굉장히 큰 충격이었지요. 굉장히 평화로운 도시였는데. 그러면서 그 전에도 다 있었겠지만 스와핑이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도 스와핑 사이트가 아주 많아요. 호적등본까지 가지고 가야 되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부부가 왔는데 한 사람은 길거리에서 사 가지고 오면 자기네들이 불리하잖아요 그러니까 호적등본하고 주민등록증하고 같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등기된 내 아내다. 등기된 남편이다. 그 다음에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주 일반화되어 있을 정도로 엄청나요. 더 이상 이런 것들은 화제꺼리도 아니에요. 그럼 그것을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믿으니까 그렇게 산다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겨우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 얘기는 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는 너무나 배고픈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만들면 소용이 없는 것이 여기서 신앙생활 잘 한다고 하던 아이들이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가가지고 한 두 마디에 변절한다고 할까? 이오시프 스탈린 이야기 여기 나오잖아요. 낸스 피어스의 책에 보면 내가 쓴 것보다 훨씬 극적으로 나와요. 사실하고는 좀 다르더라고요. 착실한 신학생이었는데 진화론을 가르쳐 주고 나서 이 사람이 뿅하고 가버려 가지고 혁명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서부터 그런 내력이 있었더라고요. 어쨌든 결정적인 역할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근거가 있느냐 하면 사실 근거가 없거든요. 그런데 하다하다 안 되니까, 세상이 그 절대적인 기준을 허물어버렸을 때는 잠시는 인간의 자율,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자율 때문에 행복한 데 사실은 그것을 어기고 나서 보면 그 다음에는 더 많이 인간은 고통스럽고 소외되고 이런 것들이 밀려오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규범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당성도 없고. 그래서 나온 것들이 비토리오 훼슬레의 객관적 관념론이라든지, 마이클 셀던의 종의 법칙 같은 그런 것들이 사실은 말이 안 되요. 논리 자체가 너무 허술한 것입니다. 칸트 자체가 그래요. 왜냐하면 결국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것들의 후원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물론 그 사람도 은혜도 이야기하고 성령도 이야기하고 예정도 이야기하고 다 얘기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의 전적인 후원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만들어 낸 인간의 인식론에 기초한 사상이나 사고라고 하는 그 자체가 그것이 근거가 든든할 수가 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든든할 수가 없지요. 요새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르네 지라르라는 사람이 혜성같이 나타나서 엄청난 충격들을 주고 있는데, 그 사람은 그것을 비토리오 훼슬레나 아니면 마이클 셀던 이런 사람 같은 방식이 아니라 훨씬 더 직설적으로 복음을 많이 이야기하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폴 리퀘르보다도 훨씬 더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까지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진리의 근거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한국에서 기독교 철학하는 사람들한테 엄청나게 관심을 끌고 있지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구라파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도 자끄 데리다, 미쉘 푸코 이런 사람들한테 주도되어 온 20세기 프랑스 철학에 대해서 질린 것입니다. 잠깐 신나는 일이지 니네 맘대로다 그러는데 그것이 뭐가 그렇게 행복하겠어요. 인간이. 허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르네 지라르같은 사람은, 글쎄 우리가 거기서 개혁주의 신학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나왔던 철학자들 중에는 훨씬 복음적 사실들을 기초로 전개를 하려고 하는, 리퀘르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대가 좀 되지요. 그래서 요새 고신측 젊은 학자들 중에서도 르네 지라르 공부하는 들도 나오고 그래요. 프랑스 유학간 사람들 중에서. 그만큼 어필한다는 이야기인데, 글쎄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어쨌든 이렇게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 풀 한포기를 발견했다고 할까? 그렇게 해석할 수는 있지요. 그런 점에서 궁극적으로 우리는 프란시스 쉐퍼도 보면 인간의 이성의 발달에 대해서 결국은 두 가지 견해를 함께 말하는 것이거든요. 하나는, 낙관적으로 본다면 결국은 인간은 그렇게 모질게 하나님을 거절하고 진리의 기준들을 거절해도 결국은 그 영원한 그리움들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낙관론이고. 비관론은 그러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 그 다음에 인간이 그런 이성에만 호소해서 무엇인가를 이루어 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안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성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이성 신뢰 안하거든요. 이성을 보좌 위에서 끌어내렸잖아요. 그리고 남는 것이 직관, 감정 이렇게 되는데 여기서 굉장히 현대사회가 극단의 물질주의와 극단의 스피리취얼리즘(spiritualism)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 예고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점집과 이런 것들은 과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성업 중일 것입니다. 마치 결혼중개업처럼 망하지 않고 계속 발전할 사업입니다. 그런 것들이 굉장한 현대인의 끊임없는 욕구로 남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 재벌의 기업가들 이런 사람들의 중요한 결정을 누가 내려주는 줄 아세요? 점쟁이들이 내려주어요. 커다란 사업 같은 것들의 결정을. 전속 점쟁이들이 있어요. 옛날에 이병철씨 같은 경우는 옆에 역술하는 사람을 두었어요. 다른 이들이 모두 점수를 좋게 주어도 이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흔들면 그냥 떨어졌어요. 왜? 그러면 느낌이 안좋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뢰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아예 그런 팀들이 거대한 집단을 이루면서 나라를 자문을 해요. 그리고 심지어 엑스맨 그룹이 있어서 국가의 구분을 그들이 좌우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비가 오게 하거나, 어느 나라를 특별히 저주한다거나 이런 능력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요새 기도발이 좀 떨어졌는지 중국이 요새 어지러워요.
그 다음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은 세 가지인데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배제한 채 그냥 현존하는 의미로서의 세상입니다. 그 다음에 창조하고 구속하신 후 회복하고자 하는 세상, 그것은 완성된 세상을 이야기하지요. 셋째로는 타락하고 구속받아야 할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러니까 지금 상태가 인간의 타락에 의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 자신의 저주를 받고 있는 상태잖아요.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이 선하다고 창조하신 세계를 아무리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저주하신다는 것은 자기 모순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런데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고, 왜냐하면 자기가 만든 것이지만 재창조를 위해서 자기가 망가뜨릴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창조적 파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린 어느 정도의 저주도, 그렇다고 은총을 거두신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 안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리몬 가설이라는 이야기 들어보았어요? 리몬 가설이라고 하는 것은, 수학의 십대 난제 중의 하나이거든요. 소수의 정의는 1과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누어지지 않는 수를 소수라고 해요. 굉장히 많을 것 같지요? 그런데 수를 계속 나가다 보면 어떤 것은 72개가 나가도록 소수가 안 나오는 때가 있어요. 그것을 피아노 건반처럼 만들어놓고 소수만 하나씩 위로 뺀다고 봐요. 그러면 그것이 무한대로 쭉 펼쳐질 것 아니에요? 그 안에 규칙성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리몬이라는 사람이 ‘규칙성이 있다’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증명을 해 보아라’ 숙제를 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받은 공식입니다. 그것을 풀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미친 사람도 있어요. 그 미친 사람이 바로 뷰티풀 마인드에 나오는 존 내쉬에요. 내쉬가 그것을 발표하는 발표회장에서 미쳐요. 나중에 경제학상 받았잖아요? 그것은 틀렸어요. 다들 틀렸다고 보아요. 내쉬는 못 풀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일러라는 사람이 그 후에 나와서 그 법칙을 정리를 해요. 놀랍게 6분의 파이 자승이 나와요. 소수가 나오는 격차의 공식이. 그러면서 거기에서 복잡한 수학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그것은 잘 모르는데, 그러면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수가 나오는 수열의 공식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증명한 것은 아니에요. 규칙성을 찾아낸 것뿐입니다. 그런데 해결이 안 되다가 돌파구가 마련이 되는데 어떻게 돌파구가 마련이 되느냐 하면 다이스프리드만이라는 물리학자와 이것을 풀던 수학자가 둘이 만나요. 두 사람이 잘 아는 사이인데, 공식이 이렇게 나왔단다 그러고 소수의 공식을 보여주는데 물리학자가 그것을 받아보고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이 공식은 원자핵 에너지에 관한 공식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소수의 공식에 나오냐?” 그러면서 “아, 이것이 수학이 수학으로써 풀려지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서 학문 간의 소위 이야기하는 융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제를 푸는데 더 충격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소수 자체가 불규칙하니까 이것을 삼차원방정식 그래프로 옮겨 놓으면 매우 불안전할 것이다고 생각되었는데 놀라운 규칙성이 거기서 나타나요. 3차원의 3D를 만들어 놓고 방정식을 대입을 해 가지고 그것을 포장처럼 쳐 있는 3차원을 대입을 시키니까 모든 점의 소수가 잡아 댕겨졌을 때 그 끝나는 지점이 ‘0’으로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끝없이 길게 포장이 쳐져 있는데 군데군데 잡아 댕겨서 잡아 댕긴 지점을 바닥에 일치시켜서 마치 텐트를 잡아 내린 것 같은 똑같은 모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굉장히 신비로웠어요. 난 수학자는 아니지만 신학적으로는 그래야 맞는 것 같아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많은 불규칙 이런 것들이 불규칙으로 확 하고 뿌려진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세계에서 또 다른 규칙이 종으로 만나는 것이야. 그 파악을 못하니까 이것이 불규칙으로 보이고 이런 것들이 모두 변칙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규칙을 또 다르게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망가지고 불규칙해보이지만 이것은 또 다른 차원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규칙성들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다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이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섭리 속에서 드러나면서 어느 정도까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들이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인간의 죄와 타락 때문에 망가진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에 대해서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를 해요. 'The wisdon of God displayed in the salvation of world.' 책은 아니고 한편의 논문 같은 것인데 그렇게 아름답게 설명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