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코넬 저녁특강
녹취자: 김경애
우리들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좋은 일이고 더욱이 여러분들은 지금 이제 사역에 온 마음을 쏟을 때가 아니라 훈련하면서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될 시기이기 때문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너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오늘날은 이미 신학이 올바른 방식으로 다루어지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이렇게 하는 것이 신학을 하는 것이려니 하고 공부를 하지만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냉정한 시각에서 살펴서 신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고 그리고 이것을 소위 이야기하는 ‘Doing Theology’ 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되겠는가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 오늘날 우리들은 그저 신학이라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신학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 관련된 과목들이 신학이라고 하고 그리고 신학의 목적은 대부분 우리들이 공부를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혹은 복음 사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고민들은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도 그렇게 신학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되고 신학자들마다 나름대로 자기 자신이 신학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가 여태까지 만난 신학의 Definition 가운데 가장 Simple 하면서도 가장 훌륭했던 Definition은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 가운데 한사람인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고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굉장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쓴 책이 이 학교에 있을 줄 모르겠습니다. ‘Theoretico Practicae Theologia’ 라는 라틴어로 된 책입니다. 있다면 여러분들은 굉장히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구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 책이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역사에서 아주 보석처럼 빛나는 세 사람의 교의학서적 가운데 한권으로써 두 권으로 되어있는데 그 책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독트린아 에스트 삐에르 크리스툼 데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살기위한 것이다.’ 이것이 신학의 정의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중간에 있는 것은 다 빼 버리고나면 ‘신학이 무엇이냐 하면 사는 것이다.’ 그것이 신학의 정의인데 어떻게 사는 것이냐 하면 첫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둘째는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 신학의 정의를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대로 계승합니다. 그래서 ‘Doctrine is to live to Christ.’ 라고 되어있습니다. 나는 사실 이 정의가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고 나는 거기다 한 가지 더 보탭니다. 더 보태면 아주 보다 더 완성도가 높은 신학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Theology is to live to God through Christ and in Spirit.’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학 자체가 이미 우리가 이야기하는 무엇, 무엇을 하기 위한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정의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학이라는 학문의 독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은 이렇게 강의실에서 혹은 교수님에게 공부하면서만 하는 것이 신학이 아니라 그 신학은 말하자면 일반 이 세상의 학문에 대한 정의에서 나오는 그 방식들을 적용한 것이고 우리의 신학은 Living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이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면 오늘 집중된 기간에 학습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습득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살기위한 혹은 살아가는 한 과정 속에 있는 요소로써의 공부이지 그 자체가 신학이 아니라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삶의 가치나 보람 이것들은 결국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에 달렸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인간의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한 인간의 존재의 가치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그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들이지만 모든 존재의 가치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의 크기입니다. 그러면 그 선한 의지라는 것은 결국은 뭐가 좌우하는 것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16세기의 종교 개혁자였던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사용했던 제네바 아카데미의 문장이 있습니다. 그 문장을 보면 사람의 손이 나오고 손 위에 하트가 올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라틴어로 쓰였습니다. ‘꼬르메움 띠비 오페론 도미네 프롬프터 엥크 싱크테’ ‘나의 이 마음을 주님께 드리나이다. 기꺼이 그리고 진심으로.’ 칼빈 같은 사람은 이 신학의 엄정한 의미를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러면 현실적으로 이 신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학자로서 참 중요한 자질과 동시에 목회자요 복음사역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모든 중요한 그 들어가는 입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경험입니다. 누구도 이것이 없이는 자기가 진정으로 크리스천 사역자로서 소명되었다 특히 목회자로서 소명되었다는 것을 있을 수 없고 더욱이 신학자로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더욱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알기에 그렇게 위대한 신학자요, 그리고 목회자요 동시에 선교사인 이러한 위대한 기독교 신학에 기초를 놓았던 역사상 존재했던 가장 탁월한 성도로서의 모본으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모티브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그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이런 내용들을 사실은 학문적인 형태로 가장 탁월하게 진술한 책이 바로 김세윤 박사의 박사논문인 The Origin of Force Gospel. 이라는 논문입니다. 그 논문은 나온 지가 벌써 4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유럽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논문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이 사실은 사실과 또 간증의 형태로 사실 세 번이나 사도행전에 언급이 되니까 이것은 사도 바울이 개인으로서 경험한 사건으로써만이 아니라 사실 신약성경에 있어서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체험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 사람은 원래 기독교 신학자나 목회자가 될 이유가 추호도 없는 사람이었고 유대주의의 가르침을 따라서 종교지도자의 꿈을 꾸면서 살아가던 야심만만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기가 고백하는 바와 같이 열심의 의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 아주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의 순간이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느냐 하면 아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나무에 매달려 죽인 것이었고 그것은 신명기서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또 살아나신 모습으로 자기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만약에 남에게 들은 사건이라면 자기가 부인할 수 있는데 자기가 직접 맞닥뜨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모순된 명제 사이에는 무엇인가 연결을 이어줄 수 있는 해명이 필요합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이 부활하셨다는 명제는 자기가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당시 표준적인 유대인들은 모세가 부활했다고 확고하게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의 승천기 같은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도 표준적인 유대인으로서 부활, 혹은 육체로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정해주시는 최고의 사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았던 에녹에 대한 이야기, 그 다음에 병거타고 올라간 엘리아의 이야기,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듯이 죽었으나 부활하여 다시 승천한 모세의 이야기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최고로 인정해주신 최고의 Sanction 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났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인정해주신 사람이면 저주를 받아서 죽으면 안 되는 것이었고 만약에 저주를 받아서 죽은 것이 Fact였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해서 그렇게까지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명제가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 사이에는 어떤 해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에 사도 바울의 지성을 뚫고 들어온 한줄기 중요한 빛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Satisfaction 이라는 말하자면 만족의 교리 즉 대속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저주가 예수 자신 때문에 받은 저주라면 하나님이 그를 인정해 주실 수 없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대속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어두운 지상의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그리스도가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러면서 온 땅과 만물위에 계신 최고의 중보자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이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에베소서 1장 10절에 보면 만물을 그로 말미암아 통일되게 하신다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번역이고 아나카펠리오 라는 희랍어가 나오는데 아나는 again 혹은 다시라는 뜻이고 카펠레오는 카프쳐라는 라틴어가 거기서 나오는데 머리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다시 머리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하게 하셨던 것처럼 구속하실 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시고 구속된 이 모든 세계를 완성하실 때 다시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신다는 그 유명한 레칼라타파치오의 교리라는 역사상 위대한 교리가 나오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사도 바울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의 한 젊은이 그리고 유대인 중에 태어나서 하나님에 관한 헛된 사상을 전하다가 죽은 그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해하는 것처럼 정치적인 메시아로 온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랍비로 이 세상에 오신분이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지탱되고 마지막에 모든 세상이 돌아가야 할 최종적인 목적지로서 그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 체험은 우리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적인 체험입니다. 큰 땅과 가득한 그리스도 예수의 말하자면 주되심 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이 바로 부활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기독교 복음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말하자면 부르심의 체험의 핵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학을 잘하는 비결은 공부만 잘하면 안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것 그것이 신학을 하나로 통일시켜주는 아주 위대한 작업입니다. 자 그러면 두 번째로 도대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람으로 넘어갑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안 믿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믿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몰라서도 안 믿지만 예수를 안 믿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혼자 살 수 있는 한은 혼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그 삶의 한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나 혼자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의지할 곳이 없다.’ 이것이 절망의 정체입니다. ‘나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의지할 데는 아무데도 없다.’ 이것이 바로 키에르 케고르가 이야기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절망의 정체입니다.
저는 스물한 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회심하기 전에도 물론 교회를 나갔지만 그러다가 교회가 세상보다 더 많이 타락했고 부도덕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중학교 때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6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그때 정말 그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를 보냅니다. 지금도 보면 고등학교 때 영어를 빼놓고는 공부를 잘한 흔적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뭐가 무서웠느냐하면 오늘 하루도 사람으로 살아야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발아래 구르는 돌이 그리고 담장 밑에 피어나는 풀포기들을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나처럼 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무거운 짐을 가지지 않고도 살아가는데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할까 철없던 때였는데도 유명해지고 싶다든지 돈을 많이 벌고 싶다든지 예쁜 여자를 만나면 행복하겠다든지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셋 다 없었지만 그래서 나의 구원은 무엇이냐 하면 독서였습니다. 그때 뜻도 모르면서 무지하게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셔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아니 늦은 감이 아니라 늦었습니다. 지금 학위를 하느라고 바쁜데 문학작품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문학을 읽는 것은 철학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순서가 이렇게 됩니다. 문학작품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에 가면 영국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는 셰익스피어만 읽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물음표를 던져주는 것이 문학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답은 문학의 소관이 아닙니다. 물음표를 던져줍니다. 그런데 결국은 신학의 깊이는 이 물음표가 얼마나 많으냐? 이 물음표가 얼마나 가슴에 품고 신학을 했느냐가 신학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물음표가 목회자의 마음속에 없다면 그러면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하면 자기는 잘났다고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앉아있는 사람이 아무런 접촉점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고뇌를 해본사람이 던지는 답과 고뇌는 해보지 않았는데 어디서 모범답안을 보고 답을 불러주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음표가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물음표를 많이 끌어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해결을 안 하면 죽을 맛이 드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경우는 문학작품을 읽어서라기보다 그렇게 인간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을 했는데 문학작품을 보니까 현실세계에서는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런데 문학작품으로 들어가 보니까 그곳에는 수많은 주인공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 것입니다. 각도가 다른 종류의 고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동병상린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만 바보같이 물음표를 던지는 것이 아니구나! 이 사람도 던지고 저 사람도 던지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내가 던진 물음표도 감당할 수 없는데 저 책을 읽으니까 물음표를 더 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고민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어 보려고 문학으로 들어갔는데 구원을 받기는커녕 짐을 더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그런 속에서 어떤 고민을 느끼게 될 때 혹시 여러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비장미! 아름다움이 무엇이냐 하면 비장미입니다. 아름다움인데 그 미감을 비참한데서 찾는 미입니다. 그와 비슷한 한자의 단어 가운데 하나가 처연이라는 단어입니다. 너무 아름다운데 슬픔입니다. 그게 미학적으로 그 두 개의 감정이 사실은 완성 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얼마만큼 문학작품을 읽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이제는 이 물음표가 문제가 아니라 이 물음표를 어떻게 느낌표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느낌표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마침표만이라도 찍어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학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그 다음에 사상서들이나 철학서들이 있는 것입니다. 문학이 먼저입니다. 그 사람들은 문학에서 던진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문학 안에서는 답을 못하고 철학과 사상에서 답을 내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구나!’ 라고 답을 만나게 될 때 인생의 고민들이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은 내가 신학을 공부할 때 거기서 충분히 느낌표와 마침표를 많이 발견했더라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될 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읽는 순간에는 무릎을 칠정도로 감탄을 하는데 사실은 그게 감탄을 하지만 사실 끝나고 나면 감탄할 때만 무릎을 치는 것이지 실제로 나의 삶속에서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느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게 사실은 예전에는 왜 배가 고픈지도 몰랐다가 지금은 왜 배가 고픈지를 알게 되었을 뿐이지 사실 배고픈 것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면서 사상적으로 많이 방황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에 칸트,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니체 이런 책들을 굉장히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날에 와서 나름대로 회중들을 이해하는데 좋은 도구로 쓰일 줄은 잘 몰랐습니다. 어쨌든 그러면서 그 다음 작업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과연 내가 찍은 느낌표가 맞는가? 왜냐하면 그 위에서 그것들을 검증해줄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으로 들어가 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느냐하면 결국은 사람의 문제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모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자기를 지극히 사랑합니다. 결국은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을 믿으러 갈 때에도 사실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지만 가는 것입니다. 갈때까지만해도 이 사람의 모든 의식 속에 있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어야지만 그래도 내가 살겠다는 것이고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사랑의 길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라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의하면 에로스의 사랑인데 이것은 남녀 간의 불꽃 튀는 사랑만이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이 모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그 다음에 욕망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전부 에로스라고 그리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데 그런 에로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까 이야기한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보게 되느냐하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전존재적인 체험입니다. 그것이 과격하고 어떤 시점이 분명한 그런 어떤 드라마틱한 회심의 체험이냐? 그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만이 이 모든 존재 중에 존재이시며 최고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러면서 깊이 그 사랑에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아가페 사랑에 대한 체험입니다. 그런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라는 존재 자체가 무화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부은바 되었으니’ 이것을 체험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랑이 내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가리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지극히 순결한 사랑, 지순애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까리따스의 사랑에 특성이 무엇이냐 하면 ‘아마레데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아마레데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포괄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에로스의 사랑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가페의 사랑의 지평의 융합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도 사실은 신약성경에서는 아가페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기도 하고 그 아가페의 사랑을 받고 우리들이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까리따스의 사랑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Lover들에게도 ‘아가페토이’ 라고 씁니다. 결국은 구약으로 넘어가면 그것이 바로 핫시드의 번역입니다. 사랑을 하나님께 깊이 받은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그 다음에는 삶의 목표나 이런 모든 것들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중심성입니다. 예전에는 나를 중심으로 나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는데 이것들이 아무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것을 꺾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사랑 하나로 자기 자신을 회귀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이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자기 자신을 거쳐서 휘돌아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이런 거대한 사랑의 순환 속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들이 바로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려함이라.’ 또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혹은 ‘내 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라.’ 라는 고백이 바로 이런 사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신학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의 신학은 무엇을 위한 신학이냐 하면 살기위한 신학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의 복음사역에 적용시키면 그러면 결국은 우리의 목회사역, 선교, 복음사역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신학이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선교이고 그것이 바로 말하자면 교회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하느냐 하면 이 신학을 전수해준다는 것 자체가 포괄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지 단선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내가 신학을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해주면 신학이 전수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신학은 무엇이냐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신학이 자기 자신이 그 신학을 따라서 살아가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하고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적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학의 의미이기 때문에 신학의 정의 그 자체가 공동체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학, 이것이 말하자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본질적인 신학공부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증가 속에서 증진된 행복을 온몸으로 누리면서 사는 이것이 신학을 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신학을 하면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거나 그리고 어떤 Be Attitude 복됨이 없다는 것, 그것은 신학을 하는 것 자체가 방향이 잘못 정의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하지만 역사를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History를 이어가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항상 신학을 공부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하느냐하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쓰신다는 것 그리고 쓰시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준비되는가하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학을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신학이라는 것은 결국은 형상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질료가 있고 질료위에 형상이 부여됨으로써 사물이 되는 것처럼 신학은 하나의 형상을 부여하는 작업이고 형상을 부여하는 작업이 열매를 맺는 것은 질료를 통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질료가 결국은 뭐냐 하면 신학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신앙의 경험이고 신앙이 신학의 질료가 되고 그 질료위에 신학이 부여될 때 아주 훌륭한 삶으로써의 한 가치 있는 그런 어떤 신학의 한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어떤 사람이 빵을 만들고자하는 아주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형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빵을 위해 반죽한 덩어리가 있어야합니다. 그 덩어리를 가지고 자기의 머릿속에 있는 형상대로 빚을 때 여러 종류의 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만들겠다는 아이디어와 형상은 있는데 빵 반죽이 없습니다. 그러면 빵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반죽은 있는데 아무도 이것을 생각을 가지고 만들 수 없으면 이것도 음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충만한 은혜 속에서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신앙의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은 신학을 풍요롭게 하는 아주 중요한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이런 것을 Sacrifice하고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육체의 영광을 위한 공부이지 그 자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현으로써의 신학공부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비극이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 안하고 신앙생활이 뜨거운 사람들은 공부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로서는 결격사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를 보면 산이 이렇게 줄기를 이루면서 달려가는 것처럼 인물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여 가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나오고, 그러면서 족장들이 나오고, 그러다가 큰 인물인 요셉이 나오고, 다시 한참의 세월이 지난다음에 모세라는 거대한 봉우리가 나오고, 그러면서 봉우리가 오르내리면서 구약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약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시대로만 들어와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아주 위대한 사도들의 봉우리들이 나오고 거기에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서있는 신약역사에서 누구도 능가하지 못하는 봉우리가 나오는데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다시 봉우리들이 약간 낮아집니다.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테르툴리아누스나 이레네우스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낮아집니다. 그러다가 굉장히 거대한 봉우리가 하나 떠오릅니다. 그 봉우리가 바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런 사상가들을 공부해야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전공해서 미세한 부분을 파고 들어가는데 그런 것들만 공부하면 안 되고 위대한 사상가들을 공부해서 사상 전체의 얼개 속에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미세한 지식들의 위치가 어디이고 다른 신학의 요소들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라는 것들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굳이 말한다면 분리할 수는 없겠지만 영적성장을 위한 공부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육을 십년이상 받았지만 그러나 박사과정은 논문을 쓰지 않고 끝냈는데 나는 오히려 이렇게 자유롭게 공부했기 때문에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러다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지나가고 그 다음에 중세로 접어들게 되면서 중세에 많은 박사들이 나옵니다. 커다란 봉우리가 안셀무스라든지 페트루스 롬바르드시라든지 토마스 아퀴나스라든지 이런 거대한 산맥들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뒤에 가서 정말 높은 봉우리들이 다시 나타나는데 마르틴 루터라든지 츠빙글리라든지 이런 봉우리들이 나타나고 그러다가 다시 봉우리가 점점점점 낮아지기 시작하다 18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거대한 인물들이 떠오릅니다. 실천적인 분야에서는 조지 휫필드나 존 웨슬레 같은 인물들이 떠오르고 그 이후로는 다시 내려가는 것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빌리 그래함이나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 이외에는 사상가이면서도 또 엄청나게 기독교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이 많지 않습니다. 영적인 인물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위대한 기독교의 산맥속의 산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를 깊이 고민하면서 나도 그 산맥의 줄기를 달려가고 있는 한 봉우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자기를 자리매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부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부에 몰입해서 온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 것과 동시에 열렬한 경건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공부에서 가장 심각하게 약화되는 것이 기도생활입니다. 그래서 열렬한 기도생활로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보완하면서 신학공부를 하지 않으면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분명히 공부는 여러분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이 했는데 설교는 전혀 별로인 사람을 동의가 됩니까? 안됩니까? 별로 동의가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설교에 은사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배운 신학의 지식들이 이렇게 자기의 전 삶으로 연결되고 진리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숙들을 가져오지 못한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밥을 먹으면 배안에서 소화가 안 되면 밤에 드러누워 있으면 이것들이 계속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소화가 되면 이것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그 다음날 아침에 에너지가 나오듯이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되 항상 공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깊이 경험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함께 하나님 앞에 고뇌하며 살아가는 그런 성도의 삶이 동행되어야만 신학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눈물이 있는 신학공부, 기도의 은혜에 잠긴 지식, 십자가를 진 신학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국에는 지금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온 사람들이 갈 데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실망스럽겠지만 갈 데가 없습니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시간강사도 상당한 백이 있어야지만 자리를 잡습니다. 여러분들이 커다란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심각합니다. 포화상태입니다. 발에 차이는 것이 미국서 박사학위를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 어느 한 학교에서 두 과목이라도 지속적으로 시간강사로 가르치면 동료들에게 모두 부러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렇게 자리를 갖기가 어려울정도인데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진짜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들은 이제는 외국에서 유학을 해서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좋은 포지션을 차지하던 그런 전근대적인 방식은 한국에서도 지나갔습니다. 한국교회도 그런 점에서 성숙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담임목사 자리가 비었을 때에 이력서를 받는데 거기에 박사학위를 기재하면 아예 그런 사람들의 이력서를 빼놓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미 한국교회의 교인들 자신이 목회를 얼마나 훌륭하게 신실하게 잘하느냐가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20년 동안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이제는 그런 사람들이 환영을 받는 시대가 아니라 학문과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 그 다음에 냉철한 지식과 그 다음에 뜨거운 가슴, 이런 것들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살도록 세울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환영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끔 후배들이 그럽니다. ‘선배님 이렇게 공부를 하고 가면 과연 길이 있습니까?’ 물어봅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하지 않으시는 일이 있습니다. 준비된 사람을 내팽개쳐두시는 것입니다. 그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이 투자하신 것이 얼마인데 내버려두십니까? 그러니 자신이 준비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쓰십니다. 그런데 그 준비는 학문적인 준비는 그 준비되는 것 중의 일부입니다. 작년에 왔을 때 간절히 이야기 했는데 이곳이 옛날에 수도원이었습니까? 여기에 기도할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아름다운 산에서 온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로 하나님이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말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뼛속깊이 체험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이렇게 사는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줄 때 그것들이 설득력 있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두스 디벤디 꼬피아 도캔디.’ 직역을 하면 ‘삶의 방식, 가르침의 풍부함.’ 이런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가르침의 풍부함은 삶을 어떻게 사느냐하는 그 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고뇌하면서 살면 그 자체가 신학적인 풍부한 가르침입니다.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신학의 지식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진중한 삶, 그리고 정말 그런 삶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복, 이런 것들을 자신이 체험하면서 살수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를 맡겨주지 않으면 안달이 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기쁨이 없기 때문에 허한 것입니다. 또 이렇게 저렇게 해서 누군가의 우위에 있거나 안일한 길로 들어가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 모두 그렇습니다. 끝없이 탐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제보다는 오늘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어제 안 것보다는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그래서 5년 전에 자신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그런 학문과 그런 영적 생활에 진보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틴루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사람의 신학자가 된다는 것은 독서와 명상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이다.’ 텐타치오라고 합니다. 고뇌입니다. 고뇌. 괴로움입니다. 그런 견디기 힘든 고뇌와 괴로움을 통해서 한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학원 강사 같은 신학자가 있고 도사 같은 신학자가 있습니다. 학원 강사 같은 신학자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됩니다. 어디에 가서 남이 모르는 지식을 가르쳐주면 되니까 말입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공부하는 신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신학이 깊어지면 이 세상을 달관한 것 같아야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그냥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질문1)
답변1) 공부 이야기가 또 나오는데 오늘날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 특히 소위 나는 복음주의 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거나, 개혁신학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나, 이론적으로 조직신학을 공부했거나, 신약을 공부하든지, 구약을 공부하든지, 실천신학을 공부하든지, 탄탄하게 오랜 세월 치열하게 공부해서 이론을 탄탄하게 했다면 실제로 사역을 해보면 열매가 그렇게 애써서 공부한 것만큼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 자신의 여러 가지 인격적인 결함이나 다른 여러 가지 많은 데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그중의 중요한 요인이 뭐냐 하면 현실에 대해서 너무 공부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데이비드 웰스 교수하고 4시간동안 이야기하고 왔는데 안타까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저런 분들의 이야기에 기울이고 단지 저분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저분과 같이 이렇게 교회를 마치 변화산 위에 있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귀신들리고 고통 하는 사람들, 질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Context 안에 있는 교회를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공부를 너무 안합니다. 내일 여러분들에게 책을 한권씩 주고 갈 텐데 한국에는 아직 서점에도 나오지 않은 책입니다. 내 생각에는 다음 주 초쯤에는 깔릴 것입니다. 만들자마자 제일 먼저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360페이지 정도 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바쁜데 그 책을 읽을지 못 읽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내가 꼭 읽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360페이지라도 다 읽으면 그 시간에 내 책을 읽지 않고 여기에서 주는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더 많은 소득을 줄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금 현대사회를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물리적인 사회를 공부해서 통계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사회에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사람이 어떤 인간인가를 보려면 어떻게 됩니까? 영혼을 보면 금방 알겠는데 영혼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 내 마음 몰라?’ 모릅니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보려면 주위를 집중해서 6개월이고 1년이고 그가 하는 짓거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빌려간 돈을 안주는 것입니다. ‘셈이 흐리구나!’ ‘정의의 개념이 흐리구나!’ 그 다음에 ‘이익에 밝구나!’ 이렇게 보니까 모임에 항상 제때에 안 나옵니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공동체성이 없고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일 년만 관찰해보면 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마음속에 들어가본적이 없어도 어떤 인간인지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대도 똑같이 사회를 공부한다는 것은 사회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하나의 인격체처럼 되어있어서 온갖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현상들 속에서 코드를 읽어내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Zeitgeist 시대의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내 책을 읽는다면 섬뜩해지는 느낌을 3장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야, 이 세상이 기독교신앙을 해체하기 위해서 이렇게 정교하게 접근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무력화시키는구나!’ 그런데 그것에 맞서야할 교회는 아주 낭만적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홀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만날 이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는 아닌데 충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코드들입니다. 데이비드 웨일즈 박사님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만나려고 했는데 공항에서토네이도에 붙잡혀서 9시간동안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바람에 지난해에 못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큰마음을 먹고 만났는데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웰스 박사님의 책을 거의 다 읽었습니다. 아마 나만큼도 안 읽었을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별히 No Place for Truth, No Place for Virtue는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그 정도로 예리한 시각으로 현대사회와 교회의 관계들을 분석해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은 웰스박사님이 그렇게 소중한 분이시라는 것을 이야기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깊이 고민하면서 여러분들이 이 현대사회를 공부해야합니다. 내 책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자극을 한번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역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건축, 음악, 미학, 패션, 디자인까지 세부적으로 공부해나가면 그런 코드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할 때 그때 뭐가 되느냐하면 예를 들어 이제 우리들이 의사소통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해야할 분명한 메시지가 있고 그 다음에 전하는 방식이 효과적이어야 하고 전하는 방식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Speaker에게 먼저 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은 세상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말씀을 전하면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고 저 사람이 우리가 던지고 있는 수많은 물음표를 가지고 고뇌한 사람으로서 답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 느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매우 중요하고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우선 아쉬운 대로 지금 복음주의 계열에서 나온 중요한 저자들 데이비드 웰스 그다음에 프란시스 쉐퍼, 란돌프 피어스, 지난주에 돌아가신 로저 콜슨, 마크 모어 이런 사람들의 책들을 쭉 읽으면서 그리고 여러분들이 미국에서 사역을 하든지 한국에서 사역을 하든지 필수적으로 공부해야할 것이 있는데 미국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의 현상이나 신학적 논쟁들을 할 때에 미국사의 그물망 위에 올려놓아야합니다. 역사의 그물망 위에 올려놓고 그 다음에 사회든지 교회든지 신학이든지 이런 역사를 분석해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탈정황적인 공부를 많이 합니다. 역사적 인물만을 딱 떼어냅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나 통용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반밖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황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20년 동안이나 즐겨 읽어온 저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도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았던 역사적인 상황을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 18세기 인물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굉장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공부를 하든지 여러분이 역사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고 나는 심지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느냐하면 신학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역사적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항상 신학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항상 그것을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신약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전공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도바울 이래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대한 해석사를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내가 지금 13장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는 입체적인 Normal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 필요 없다. 과거는 과거이고 옛날은 옛날이고 나는 내가 아는 것이 독불장군으로 최고라고 생각한다면 나르시시즘입니다. 신학적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런 것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학문적으로도 가치가 없고 목회적으로도 매우 위험한 독단으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사, 그리고 특별히 미국과 캐나다의 교회사 같은 것을 공부한 것이 매우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공부의 양이 너무 많으니까 전공한 사람처럼 그렇게 집중할 수는 없고 공부해야할 양이 너무 방대하고 많으니까 그럴 수는 없지만 그러나 반드시 공부해야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전공에 집중해야할 때지만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든지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없습니다. 설령 박사논문을 쓴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기 전공만 공부하지 말고 목회자로서 균형 잡힌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읽어야할 책들을 같이 병행하면서 읽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방법은 뭐냐 하면 독서와 휴식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독서는 읽어야할 책을 읽는 것이고 휴식은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게 휴식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자기가 전공을 공부하다가 머리가 아프면 읽고 싶은 책들을 읽으면서 그러면서 이렇게 다른 전공들과 만나면서 공부해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질문2) 목사님 해왔던 모든
답변2)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그 이야기와는 좀 다른 이야기인데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해석한다고 하면 설교를 한다면 누가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항구적인 가치가 있는 제대로 된 책이 되려면 고린도전서 13장을 나만 지금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 해석해왔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해석의 흔적들이 저 교부시대부터 남아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Open된 마음으로 이 사람들이 원래 고린도서가 쓰인 1차적인 맥락은 어떤 맥락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Primary Reading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그것 해석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위 렉스칼라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약 해석사에서 거울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때 루돌프 키텔을 기억하십니까? 키텔의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 이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신약의 금자탑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역사상 아무도 그렇게까지 시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도서관에 가서 키텔의 티디앤티디를 열어보십시오. 그러면 예를 들자면 알토스라고 칩시다. 나오면 빵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러면 빵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알토스를 가지고 저 그리스의 문헌 호모부터 시작해서 쭉 캐 들어가면서 세큘러그릭에서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었고, 시대별로 어떻게 사용되었고 그러면서 신약에 와서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었고 그 다음에 신약성경 이외에서 Early Christian 리들레이처에서 이것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수없이 펼쳐집니다. 그러면서 알토스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종합하면서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면서 알토스를 이야기해야한다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시아 실바라는 사람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 제임스 바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그런 식의 렉스칼라지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초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불과 한 20년 사이에 거의 가치가 없는 책으로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중요한 주장점이 이런 것입니다. 요즘은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나는 사상에 빠져서 옛날에 읽었던 책의 이야기지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알토스라는 말 하나에 호모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부터 시작해서 호메릭, 그릭, 클래식 그릭, 뉴테스트먼트 꼬이네, 그 다음에 얼리크리스찬 아더 리틀레이쳐 이런데서 알토스라는 말을 썼다는 이런 많은 다양한 말을 썼다고 그럴 때 그 신약시대 때에 예를 들어서 주후 60년의 알토스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는대로 알토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지 그 사람이 알토스를 이해할 때 저기 호모시대부터 이것이 어떻게 생각되었을까를 다 머릿속에 그리면서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빵이라고 그러면 그냥 빵이지 이것이 포르투갈어에서 왔고 그게 무슨 일제 강점기 때를 거치면서 어떻게 되었는지 누가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접근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직격탄을 날린 이런 해석사를 알지 못하면 단어 하나에 렉스칼라지에 있어서도 이런 식의 해석사를 알지 못하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독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 자체가 하나도 없다면 항상 자기가 독불장군이고 최종적이고 최고의 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내린 해석은 수없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양성 속에서 무엇이 최종적인 해석이고 의미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구약성경의 경우에 보면 여기에도 구약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단어중 40%가 의미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전통적으로 독법이 그렇게 익힐 뿐이지 히브리 문헌이 그 당시 문헌이 지금 많이 나와야지만 그 문헌들을 언어학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해서 통계적인 렉스칼라지를 해서 그것들을 규명할 텐데 그것들이 지금 없습니다. 지금 히브리 Text 있는 최고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다윗시대에 나온 계절의 캘린더 다윗시대 10세기 때 나온 것 돌판 하나 있는 것 그것이 다입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봐야 2세기 3세기 때 쿰란사본이나 이런 것들이 다입니다.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찾아내겠습니까? 그리니 할 수 없이 안 되겠으니까 요즘 다시 에이앤이가 뜨고 있다고 하는데(스터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1970년대쯤에 막 붐을 일으키다가 사실은 80년대에 사회학적인 성경해석이 나오면서 한물가고 90년대에 문예적인 접근이 오고 2000년대에 신학적 Interpretation 그러면서 다시는 물 건너갔었는데 요즘 다시 부각이 되는데 부각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구약의 연구나 신학의 연구에 있어서 전에는 아주 뚜렷한 스탠더드와 노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Fact가 굉장히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날에 대한 해석이 나오는데 사실은 옛날 것들을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것 자체도 굉장히 자의성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왜? Exist 했던 것들 가운데 일부만이 Remain 되어있고 Remain 된 것 가운데 일부만 Escalator 되었고 Escalator 된 것 중에서 일부만 Textertlize 되었고 Texterlize 된 것 가운데 일부만 Publish 되었고 Publish 된 것 가운데 일부만 Read 된 것입니다. 읽혀진 것입니다. 읽혀진 것 가운데 일부만 해석된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거슬러 올라가면 여기 Exist 하고 마지막에 말하자면 해석학적 작업이 된 것과 Interpret 된 것을 놓고 비율로 보면 거의 무한대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재해석해내는 자의성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Old Testament 아케올로지 같은 것도 그것도 무슨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객관적인 학문이 전혀 아닙니다. 어떤 Presupposition을 가지고 완전히 다른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한계들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역사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들을 보면서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13장의 해석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풍부하게 해석한 사람도 있고 좀 약간 작은 부분을 해석한 사람도 있지만 이것들을 전부 다 보면서 고린도 13장에 대한 통일된 이해들이 어떻게 변천되었는가 보고 그 의미들에 대한 해석들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럼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것은 이렇게 관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횡적으로 관계가 되어서 1세기는 1세기 문맥에서 그것을 해석했을 것이고 8세기는 8세기 문맥에서 해석했을 것입니다. 중세는 중세의 문맥에서 해석을 하고 무슨 문맥이 이것을 해석하게 만들었는가라는 것을 고려하면서 이 해석사를 더듬는 작업은 종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횡으로도 이루어져야 되는 작업이고 횡으로 된 것들 가운데 다시 종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까지 생각할 때 결국은 씨줄과 날줄처럼 여겨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탄탄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객관적인 결과들을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한편 한편의 설교가 이런 작업을 거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을 때에는 이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들이 고민을 하면서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Church and XXXX 그의 전집 제 8권에서 내놓습니다. 그 유명한 고린도서 13장 강해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13장을 실제로 썼던 것은 주후 1세기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것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문맥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린도교회에 나왔다는 분파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도덕적 해이 이런 것들 속에서 고린도에 가보면 거대한 아고라가 있습니다. 국제무역시장입니다. 저쪽 위쪽에는 아프로디테를 섬기는 신전이 있습니다. 중간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와서 자기의 철학적 주장을 하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로마의 유적을 파보면 밑에 그리스의 유적이 나옵니다. 옛날부터 아주 번화한 도시였고 온갖 물건들이 들어오고 국제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면서 사상의 국제화가 교류되었던 곳입니다. 파당을 형성하는 곳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선생님이 최고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의견에 견해가 다른 사람들끼리 파벌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도시의 정신이 그대로 교회에 파고들어서 나는 게바파, 나는 아볼로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도시니까 그 속에서 뱃사람들이 금욕생활을 몇 달씩 하다가 거기에 들어와서 성적인 욕구를 풀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성적인 욕구를 푸는 것 자체가 무슨 커다란 문제가 되겠느냐는 똘레랑스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무슨 커다란 죄냐?’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도시의 정신들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케도니아 교회는 그렇게 가난한데도 헌신했는데 고린도 교회는 그렇게 부자였는데 헌금을 안했습니다. 요즘 부자들이 헌금을 안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정신들이 파고들어온것인데 이런 것들을 다 이해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봐야지만 ‘아 이래서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개인적으로는 사도바울이 혈기 충천하던 그 사람이 도대체 이 사랑을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핵심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사건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입체적으로 막 가로지르는 가운데 공부하면서 여기에서 풍부하고 정확한 해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해석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13장을 해석하기 위해 부르르 읽고 나서 느끼는 대로 오래 참는 것 이것은 참 중요하지 그러면서 참기만하면 하나님이 복을 준다는 식으로 그냥 아무 문맥과는 상관없이 외치는 것 이것은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경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적인 가치와 덕을 기독교적인 복음의 탈을 씌워서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직한 말씀의 해석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성경을 해석해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지식의 체계와 다양한 종류의 지식과 그 다음에 학문적인 기준들과 노르마들의 도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외로 한 가지를 들입다 공부해서 들어간 사람들이 의외로 Adoptability가 없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조심해야하는 것입니다.
아까도 데이비드 웰스교수와 그 이야기를 하다가 배를 잡고 웃었는데 내가 만들어낸 예화입니다. 어느 성도가 성경을 읽다가 모르겠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를 찾아가서 물었더니 담임목사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은 너무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신학교수를 찾아가라고 그래서 신학교수를 찾아가서 물어보았는데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무슨 구절이냐고 그랬더니 신학자가 하는 이야기가 나는 조직신학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모른다고 그래서 누구를 찾아가야하느냐고 하니까 성경 신학을 하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그래서 성경 신학박사를 찾아가서 이것을 질문했더니 성경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 정말 죄송하다고 그러면서 나는 구약전공이라서 신약을 모르겠다고 그러더랍니다. 신약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갔더니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나는 공관복음서 전공이라서 서신서는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미안하다고 나는 공동서신 전공자라 바울서신은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바울서신 전공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정말 미안한데 자기는 데살로니가전서 전공이라고 그래서 누구를 찾아가야겠느냐고 하니까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고해서 드디어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정말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나는 7장을 전공한 사람이라서 8장은 모르겠다고 그랬습니다. 이게 어저께 내가 예일대학에 가서 XXXX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몇 시간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서로 대화를 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가를 돌아보았는데 이 이야기를 하니까 막 웃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게 그렇게 우스운 것은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한 4년 전에 영국에 갔습니다. 영국에 가서 재영총신동문회 수련회를 인도했습니다. 거기에 나하고 백금산 목사와 가서 오전하고 오후로 나누어서 강의를 했는데 거기 온 친구는 대부분이 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박사를 마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것과 관계없이 목회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은데 다 유학의 푸른 꿈을 안고 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마치고 공부하는 사람들인데 끝나고 질문을 하라고 그랬는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의 수준이 우리 열린 교회에서 새가족반에서 나오는 정도의 질문입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뭐냐 하면 학문의 Relation을 공부하지 못하니까 질문 자체가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왜 선악과를 따먹게 내버려두셨습니까?’ 라든지 ‘인간이 의지가 자유로운 존재이면 어떻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됩니까?’ 그런 등등의 유치한 문제들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은 들어가서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내린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위한 공부와 목회를 위한 공부는 구조가 다르다.’ 이것이 그날 저녁에 내린 결론입니다. 내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조가 다르다기 보다는 훨씬 더 입체적이어야지만 유용성이 있는 신학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가느다랗게 공부해서 7장을 전공했기 때문에 8장을 물어보면 잘 모르는 그런 식으로 신학공부를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렇게 공부할수록 주변에 있는 광범위한 내용에 대한 윤곽을 떠서 자기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이 신학적인 고민이 신학 전체의 위치에서 어디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학위를 5년에 마칠 것을 7년에 마치더라도 그렇게 전체적인 공부를 한 사람이 나중에 대단한 학자가 될 가능성이 높고 학자가 아니더라고 교회에서 목회를 해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훨씬 더 아름답게 하나님을 묘사할 수 있는 역할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동일한 충고를 한 것 같은데 위대한 사상가 한사람을 평생 동안 공부하고 자기는 자기 전공대로 공부하고 아우구스티누스라든지 존 오웬이라든지 칼빈이라든지 마르틴 루터든지 이렇게 해보면 공부해야할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항상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 아는 것입니다. 그것도 은혜가 됩니다. 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서 ‘이 학교에서 나만 한 사람이 없지!’ 그러면 기도가 되겠습니까? 진짜 천재 같은 친구들을 보면서 ‘아 진짜 왜 사나?’ 그러면서 강의실을 걸어 나올 때 채플실을 향해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 책을 못 사서 눈물이 났는데 요새는 읽을 시간이 없어서 눈물이 납니다.
질문 3)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실 때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XXXX 저희들이야 오랜 시간 동안 고도의 지적 트레이닝을 받는 사람들이지만 일반 평신도들은 성경에 대해서 어떤 권위를 오는 영감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답변 3) 자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뭐냐 하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갔단다.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다짐했단다.’ 그때가 시기적으로 언제였느냐 하면 아테네 전도가 끝난 다음에 방문한 곳이 고린도였습니다. 그런 해석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테네에서의 사도 바울의 말씀사역을 어떤 사람들은 ‘Contexterlization 에 있어서 성공한 사례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과 아테네에서 논쟁을 합니다. 사실은 바울이 이깁니다. 이기는데 소수의 사람들만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그 자체를 보면 실패라고 말할 수 없지만 앞뒤에 너무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것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고린도에 왔을 때에도 아테네에서 했던 그 기억들이 사도 바울을 겸손하게 했던 것입니다. 왜? 고린도도 그 당시에 아테네에 못지않은 변증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결심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뿐이다.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그런데 그것을 잘 읽어보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너희 어른스러운 믿음을 가진 너희에게만 특별히 말하는데 이런 의미로 말하는데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을 Sophy 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당시의 Sophy. 그러면서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그 수많은 역사속의 사람들에게 찾았던 철학의 실체가 될 수 있는지를 분명히 강론하면서 제가 2장 불과 열 몇 절 되는 것을 6개월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복음이 어떻게 철학이 될 수 있는가? 복음이 철학이 된다는 것보다도 그렇게 찾았던 철학들이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 십자가가 해결해 주었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뭐냐 하면 모두 알아야지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다음에 우리를 마지막에 데려가시려고 하는 Ultimately Goal 이 있을 것 아닙니까? 최종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 속에서 설명해내는 것은 상당히 많은 신학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하나 질문을 해보면 여러분 아무도 만족스러운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마지막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실 것인가?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을 때 우리 중에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많은 사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도서관에 가보시면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 8권을 펼쳐서 보시면 앞의 두 개의 논문이 있는데 한번 읽어보십시오. 쌍둥이 논문인데 읽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마 평소에 지적인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특히 두 개는 머리를 쥐어뜯어야지만 이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논문입니다. 쉽게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다 이해해야지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느냐하면 그러면 사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길을 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린아이같이 단순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 모든 사람들을 설명할 수 없어도 우리 모든 사람을 그 창조의 목적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두 가지인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과 어떻게 믿어야 할 것에 대해서 입니다. 믿어야 될지에 대해서는 믿음의 규칙들이고 살아야할 교훈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계명의 형태로 나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기도를 많이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면서 아멘 아멘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이 신학의 많은 비밀들을 알고도 아멘 아멘을 안 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훌륭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혼자만 살면 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가르쳐주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보는 사람가운데는 아멘 아멘 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노멘 노멘 하면서 다른 데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멘 아멘 하고 걸어가면서도 확신이 없어서 주저앉은 사람도 있고 길을 잃은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명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계명이 이 모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고 인도하시려고 하는 구원의 목적 속에서 어느 부분에 있다는 것을 규명해보여줄 수 있는 지성을 갖추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힘이라는 것은 두 개입니다.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이 두 개를 엮어주는 은혜의 힘입니다. 이 두 개를 엮어주는 Bridge를 통해서 이 두 개가 기독교의 위대한 힘입니다. 이 지성의 힘은 공부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윤리의 힘은 우리의 의지가 선한 의지로 가득차서 하나님 사랑에 의해 감화되고 이 두 개를 연결해주는 이것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진보하는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은 이 두 가지를 힘차게 하는 것이고 선교는 이 두 가지가 안 되어 있는 땅에 이 두 가지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상의 나라이고 빛의 나라이고 그 다음에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안 하고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난센스입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신학을 하지 말고 어느 시골교회로 들어가서 목사님 말씀을 잘 듣고 아멘 아멘 하면서 매일 새벽기도 나오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더 많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질문 4)
답변 4)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결국은 질문하는 것 자체가 해석학적 능력입니다. 해석학은 전제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 아닙니까? 연예라도 해보아서 한 사람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신앙이 빨리 이해됩니다. 시편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내가 이렇게 바짝 바짝 말라갑니다. 아니면 새같이 슬프게 웁니다. 이런 것들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 나마도 이해가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성경을 통해서 고민을 역추적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과연 그 고민이 내가 그런 고민이 없는데 그 고민이 그 속에서 얼마나 보이겠습니까! 십자가를 깊이 체험하고 나면 성경을 읽으면 온통 십자가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기도를 뜨겁게 하고 신약성경을 많이 읽고 오면 온 신약성경의 명령 전체가 기도하라는 명령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물음표를 던지는 이것이 성경에 대한 해석이 크게 좌우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물음표를 던진 그 자체가 성경해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음표를 가지고 답을 찾으려고 했던 몸부림이 있을 때 그러니까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때 성경이 제시하는 답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자기가 답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소중하게 느껴지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도울 사람이 하나도 없고 버림받아서 혼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하면 감격이지만 그런 고민이 없는데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고맙긴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그러지 마시지 나는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율법에 대한 고민이 없으니까 복음이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그래서 구약을 읽으면서 고민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 신약에서 빛이 확 들어오는 것입니다. 구약을 읽으면서 고민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신약에서 그 빛이 빛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질문 5) xxxx 목회자가 성경을 해석해나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답변 5) 그것을 해석하지 않으면 외치는 것이 가능합니까? 예를 들자면 예수님도 시대를 알라고 말씀하셨고 또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고 하고 담대하게 외치는데 시대를 모르면 담대하고 목숨을 걸 수 있겠습니까? 그게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그리고 마치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면 역사를 해석을 안 한 것처럼 우리들이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틀려도 설교한다는 행위 자체가 역사에 대한 해석학적 행위입니다.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벌써 사회를 상정하고 문화를 상정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도 되지 않는 해석을 내려서 하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고민을 많이 하고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시대의 정신을 정확하게 읽어냈기 때문에 정확하게 그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경우를 보십시오. 선지자들이 외쳤던 것은 결국은 궁극적인 메시지는 사실 모세오경입니다. 모세오경을 자기 시대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있는데 모세오경의 진의에 대한 지식, 그 다음에 어느 것이 가변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불변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시대 사람에게 국한된 가변적인 것 그것은 다른 사람의 시대에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지만 세월이 흘러가도 불변하는 율법의 요체 이런 것들은 불변하는 진리인데 불변하는 진리는 가변적인 시대의 말하자면 다른 형태로 적용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해석하면서 미가 선지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어 해석을 하고 그 다음에 아모스는 공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자비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역사에 대한 해석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자기가 사실은 그것을 죽어라하고 역사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역사 속에서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느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행위를 어떤 식으로 책임질까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신분 그 자체가 사실은 지혜자여야 합니다. 높은 위에서 변화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면서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세상에 대해서 이해를 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Guidance 해주는 임무가 바로 목회자의 임무인 것입니다.
질문 6) 너무 귀한 분을 모셔서 이 시간이 흘러가면 다시 XXX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풀어 나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독특한 경험을 하긴 했는데 XXX 여기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데 우리는 이단에 대해서 역사도 많이 있고 사례도 많이 있고 그런 전통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단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굉장히 민감한데도 불구하고 요즘 신천지라는 그 무리들이 있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혹하게 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자기애, 자기가족애 사회전체 공동체적인 안목보다는 어떻게든지 나와 내 자식과의 관계인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거기의 대표되는 사람이 자기의 영이 임해서 하나님이 자기만을 통해서 계시를 하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만이 Inner Circle 144,000명 이외에는 소망이 없다. 그래서 불쌍한 사람들을 끌어와서 자기네 교회로 가야한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 교회의 입장들이 제가 보기에도 너무 유치하고 대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졸렬한 그런 반응들밖에 없어서 너무 실망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변 6) 결국은 뭐냐 하면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단에 대해서 민감한 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정통 신학을 위협한다고 할 때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통신학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침투 당했는지 안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 근처에 본부가 있었습니다. 쓰나미가 덮쳤습니다. 우리교회에 가까운데 있는 교회는 75명이 나갔습니다. 교인들이 신천지로 갔는데 데리고 간 사람이 부목사하고 장로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응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법적으로 대응하고 심리를 하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피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들어왔는데 파악도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교리교육을 철저히 시켰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 정도에 넘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여서 목회자들이 대책을 세운다고 그러는데 어떻게 경찰에 고발하고 법원에 호소하고 그러는데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교리교육을 시켜라. 왜 안 시키느냐?’ 안 시킵니다. 그야말로 No Place For Truth입니다.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Virtue라는 것이 아까 이야기했던 윤리라고 그랬습니다. 윤리라는 것은 확고한 사상의 체계 속에서 선악의 기준이 마련되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괴로워하는 가운데 Virtue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미 벌써 처음부터 목표자체가 Truth 가 아닙니다.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에 대해서 한없이 관용을 취하는데 거기에서 무슨 덕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장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기독교신앙을 갖는다는 의미 자체가 진리를 찾는 의미이고 사실은 진리를 알고 하루를 거지처럼 살아도 진리 없이 호의호식하면서 황제처럼 백년을 사는 것보다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이런 어떤 진리에 대한 집착과 정신들이 사실은 구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사실은 목회자가 가르치고 목회자가 진리의 참다운 맛을 보여주어서 그 진리를 따라서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경험하여야지만 이단이 얼마나 무섭고 진리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모든 것을 가져도 진리를 떠나면 어둠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텐데 진리와 함께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없는 고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애매모호함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질문 7) 그런데 제가 이런 것들을 처음부터 XXX 차치하더라도 사람을 구하고 좋게 하겠다는 의도는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것 때문에 다른 공동체 다른 울안에 들어가서 질서를 파괴시키고 데려온다는 자체가 그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고 저항하는 것에 대해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도 그 당시에 이단이라고 그러면서 핍박받은 것이 아니냐며 자기네들이 그런 영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핍박하는 확실한 증거라는데 어떻게 이야기해볼 도리가 없고 진리의 탐구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 굉장히 아주 빨려 들어가는 Logic이 있습니다. 물론 굉장히 메타포를 가지고 은유적으로 계속 돌리고 돌리게 될 때 곁가지로 간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안에도 우리가 몰라서 그런다고 치부하기에는 굉장히 강력한 힘이고 일반교회에서는 원론적으로만 아니라고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진리를 가르치면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르치는 어떤 교리적이거나
답변 7) Logic이 강력하다기 보다는 무엇을 고려해야 하느냐하면 사실 그런 이단들 속에는 미혹의 영들이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Logic을 초월해서 사람들을 빠지게 하는 영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Logic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이제 고려를 많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단들이 나왔을 때 그것을 토론하자고 사람들을 불러내는데 안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뭐냐 하면 그런 것들을 경솔히 임하고 조직적으로 대응할 때 상당히 반대급부 적으로 그들을 상승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대등하게 기독교와 정통기독교와 토론을 할 그런 위치에 있는 중요성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기술적으로 상당히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지 단순히 불러내서 한 번 더 훌륭한 학자들이 나와서 떡이 되게 눌러버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데 이단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닙니다.
질문 8) 지금도 이 순간에도 교인들이 144,000명의 Inner Circle 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그 자리가 기다리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히려 그 사람들을 보면 교회 안에서 그들이 진리탐구에 대한 허기짐, 어떤 목마름이 있었는데 그쪽에서 그것을 해결해주니까
답변 8)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해결해준다기보다 해주고 있다고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것입니다. 결국은 사실은 하나님과 기독교의 진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깊이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게끔 만들어야지만 합니다. 예를 들자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집에서 내가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고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출을 왜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관계들이 깨지니까 자꾸 가출을 하고 바람이 나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그만큼 방황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실은 교회 안에서 한국교회에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절반은 될까? 나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질문 9)
답변 9) 아무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작아도 그 일을 못할 수 있고 커도 그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큰 것이 별로 안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존 오웬 목사님 같은 경우는 200명에서 500명 정도면 가장 적합한 사이즈라고 이야기했고 나 같은 경우도 목회를 할 때 교인 적으로 가장 행복한 것은 350명까지 그때까지였습니다. 1,100이 모일 때까지 새 신자 심방을 했습니다. 1,100명이 넘으면서 손을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주일 내내 심방을 해도 등록한 사람들을 다 Catch Up을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역은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내려놓고 사역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되었는데 항상 그런 어려운 점이 존재합니다. 자기 교회 교인들이 누군지 잘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다 쪼개서 작은 교회와 되어버리면 이름은 알고 가족도 알고 친밀성은 있을 수 있지 모르지만 과연 그렇게 나누기만 하면 누구든지 와서 그렇게 깊이 있는 목회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사이즈를 추구하지 말고 양적인 발전을 위해서 질적인 순수성을 손상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필요한 것입니다.
질문10)
답변10)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한 번도 내년의 목표를 정해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교역자들에게 너 금년까지 몇 명을 모아야 된다고 그렇게 지시한적도 없고 성과 때문에 해고시킨 적도 없습니다. 항상 내가 물고 늘어지는 것은 ‘본질적으로 볼 때 네가 목회를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 ‘네 자세가 잘못되었다.’ 항상 그런 지적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교역자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나는 그대들이 아무리 사역을 못해도 하나님만 사랑하고 신앙생활만 잘하면 나는 그것으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세례를 주면 안 됩니다. 아까도 데이비드 웰스목사님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리교회에서는 분명히 회심한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합니다.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완벽하게 외워야합니다. 외운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새벽2시에 일어나서 발로 툭 차고 ‘외워!’ 그러면 외울 수 있어야합니다. 못 외우면 아무리 회심한 것이 확실해도 우리는 안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떨어뜨립니다. 끝까지 세례를 받지 않는다면 세례를 안 받는 사람으로 남는 것입니다. 양보를 안 합니다. 그것은 양보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님들 12명과 부목사들하고 편성해서 한방에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면담을 하면서 공부를 가르치고 문답을 하고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시키고 그 다음에 철저하게 성도들의 삶을 최대한 보살펴서 지도합니다. 누가 완벽하게 했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쨌든 성장을 위해서 질적인 것들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강력한 의지와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교인들이 구원을 받았는가하는 문제를 체크하는 고민하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실제적인 길들을 강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가 7명 정도 시작해서 지금은 꽤 커져서 오천 명이 모이는데 남이 보기에는 안 그럴 수 있지만 나는 적어도 나 자신이 의식하는 한도 내에서는 사이즈를 키우기 위해서 본질을 희생해야겠다고 결심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교회가 더 순수할 수 있다면 교회가 천 명 정도 줄어드는 것에 대해서 나는 다즌케어하지만 그러나 조금만 본질을 양보하면 천 명 정도 늘어날 수 있다고 해서 나는 유혹을 받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목회자에게 커다란 Benefit를 안겨주는 것입니까? 목회자가 무슨 실적수당을 받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것이 무슨 큰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교회가 커지면 좋은 점도 있습니다. 교회가 커지니까 여기에 와서 장학금도 줄 수 있습니다. 교인이 50명쯤 모이면 내가 어떻게 여기에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장학금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내가 여기 미국에서 4,5명의 박사과정 학생들을 면접을 봅니다. 뭐냐 하면 열린 교회에 신학인들 양성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서 통과되면 1년에 최소한 12,000불 정도에서 36,000불까지 줍니다.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작으면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 커지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사이즈를 키우겠다는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19년 동안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갈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있습니다. 부목사님들이 있는데 나가야하는데 나가라는 규정은 없지만 죽을 때까지 우리 교회에서 원로부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나갈 것 아닙니까?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부목사들이 나갈 때 교인들이 한 300명씩 따라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따라가면 충분히 교회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공간도 좁으니까 300명이 빠져나가면 자리가 남으니까 어차피 사람도 늘어나고 좋은데 안갑니다. 어떤 때는 강제로 내보냅니다. 그런데 가서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결과가 매우 안 좋아집니다. 이게 말하자면 생명체가 되어서 칼로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진심으로 이야기는 합니다. 내가 상처를 절대 안 받으니까 따라가라고 합니다. ‘200명만이라도 따라가서 저 목사를 도와주어라.’ 하도 따라가지 않으니까 1년만 가서 도와주고 마음이 변해서 온다고 하면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다 받아주마. 그래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질문11) 아까 목회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답변11) 목회의 본질은 존 오웬 목사님 같은 경우는 두 가지로 요약을 하시는데 첫째는 회심입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그 회심할 때에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 주님만 사랑하겠다며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오직 주님 한분께만 복종하겠습니다. 라는 Lordship에 대한 Submission을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회심과 회심의 은혜의 보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목회의 본질입니다. 여러 가지의 본질이 있는데 두 가지입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현실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목회사역 그 자체가 아주 Spiritual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인터렉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진리의 말씀을 이제는 다 가르쳤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계속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어야 하니까 목회자는 계속 지적으로 성장해야합니다. 처음 와서 6개월을 들을 때는 막 황홀한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이런 설교를 들어보랴!’ 하다가 한 1년을 들으면 이상하게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고 3년을 듣고 나면 이제는 본문만 읽어도 훤하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회심의 은혜가 보존되기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러다가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갈등을 일으키다가 머리를 쥐어뜯고 교회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가 지적으로 계속 성장을 해서 새로운 차원의 신앙과 세계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진리의 세계에 대한 지평들을 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윤리적인 삶을 살아서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가르쳐준 말씀대로 살면 어떤 사람이 될까?’ 그 본보기가 목회자 자신이어야 합니다. 설교하는 것은 설교하는 대로 가고 사는 것은 사는 대로 살아서 예수님 말씀하시듯 저들의 말과 행실은 본받지 말라는 이런 식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하는데 목회자도 죄인인데 그런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매일 매일 영적인 삶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싸움이 너희에게도 본 바요 내 안에도 있는 싸움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내가 좋은 정보를 알려주겠습니다. 필기해보십시오. yullin.org 이것이 우리 열린 교회의 Address입니다. 치면 거기 배너에 아마 총신신학대학원 개강수련회라는 배너가 뜰 것입니다. 거기에 들어가 보면 이번에 총신에서 개강수련회를 인도한 3편의 설교가 있습니다. 조금 길긴 하지만 한편의 설교가 두 시간 반이 됩니다. 그래서 세 번의 설교가 있고 거기를 찍으면 설교 Manuscript가 A4용지 60p 내지 70p 정도 되는데 여러분들이 Printout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 개를 다 읽겠지만 그중에 특별히 세 번째 것이 이번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떻게 신학적인 정체성을 개혁주의로써 분명히 할 때 우리들이 어떤 라이터들을 읽으면서 공부할것인가 하는 것을 저기 초대교회부터 시작해서 쭉 제시하고 인문학의 공부방법과 철학과의 관계까지 다 이야기했습니다. 이상으로 마칩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