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을 위한 교육 2
녹취자: 김경애
지난 시간에 목양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와 교인들이 목자와 양의 관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목자와 양의 관계는 둘이 만나서 세운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양도 예수님을 만나고 목자도 예수님을 만나서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그래서 목자도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목자가 된 것이고 또 양떼들도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양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양을 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위해서이고 목양을 받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허락하셨겠습니까?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목자와 양의 관계를 그냥 즐기게 하려고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의 완전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즉시 하나의 교회에 합쳐진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주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교회를 통해서 각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을 교회가 충만히 가지고 있을 때 교회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고 이런 교리를 배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배운 것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대로 살고 그 깨달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낳아서 기르는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자녀를 낳아 놓는다고 해서 그 아이가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냥 나갔던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7살, 한 아이는 13세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말을 전혀 하지 못하고 네발로 기어 다녔습니다. 그리고 전혀 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짐승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아이들이 산속에서 발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정글북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이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짐승에 의해서 물려가서 거기서 짐승들에게 길러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아이들이 인간의 세계로 돌아왔지만 인간으로서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낮이면 어두운 그늘 속에 들어가서 숨어있고 밤이면 나와서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학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어떻게 하든지 인간사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두 아이가 다 죽었습니다. 한 아이는 나이가 17때까지 살았는데 그때 아이의 지능이 3살이나 4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교육학자들이 깨닫게 된 아주 충격적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교육은 아무 때나 받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참 인간이 되기 위한 교육은 또 2살, 3살, 4살, 5살 이때 유아기에 교육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실은 목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적절히 교육을 받고 가르쳐지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참된 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가 교육을 위한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때 올바르고 풍부하게 교육을 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가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충분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충만한 사랑 안에서 부모와 관계를 맺으면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처럼 또한 어린 양떼들도 목자의 충만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렇게 성장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장을 위해서 목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정말 그를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확인해야합니다. 그 말씀이 충분히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해서 그의 인격을 바꾸고 삶을 고치도록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가르쳐야합니다. 이것을 단순한 상하 명령 복종의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저도 중국에 가끔 보면 교회 가운데 목회자가 고난을 주고 교인들을 부하 직원처럼 부리는 교회를 보았습니다. 마치 황제처럼 군림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내가 영혼을 섬긴다는 마음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원리로 교육하고, 심방하고, 설교하고, 또 그들의 실제의 삶을 돌봐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래서 그 양떼들이 하나님 앞에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자신의 소원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범사를 하나님을 사랑으로 섬기라고 지도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직접 잘 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와서 신학을 배우지만 어떻게 목회를 하는지는 신학교의 선생님한테 배운다기보다는 자기의 목사님에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목자를 만나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잘 자라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럴 때 신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어떻게 목회에 적용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목양의 관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목양의 핵심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가 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의 은혜가 감사하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 목회자가 그런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에 늘 감격하면서 목양을 한다면 그가 어떻게 불충성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어떻게 교인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정말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양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은혜를 받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신앙이 뜨거울 때도 있고 식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목양의 관계로 함께 묶여짐으로써 다른 사람의 좋은 영향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은혜가 식었을 때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 다시 뜨거운 신앙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심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목양의 관계를 갖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겪는 어려움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중국학생들이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이런 목양을 잘 받은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주어도 이것을 어떻게 목양에 적용할지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현장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런 현장들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우고 목양관계를 경험하면서 ‘이런 것이 목회구나!’ 하는 것을 터득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목양에 관한 통찰을 키워가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 한 절을 봅시다. 요한복음 10장 15절부터 16절입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5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알고 또 자신도 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로서 예수님이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아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관계입니까? 성부와 성자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성자가 이루셨습니다. 또 성자는 성도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그러면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때야 할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사랑해야합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과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방식이 다릅니다. 마치 예수님을 하나님이 예수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과는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는 것처럼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떼를 향한 사랑입니다.
자, 그런데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또 다른 양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아직 들지 않은 양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계획하신 사람들이지만 아직 전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마음을 품어야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런 뜨거운 열심과 사랑을 품어야합니다. 그것 없이는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의 열정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은 바로 그렇게 이 세상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전도자로서 아주 훌륭하게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들은 전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들 중 많은 사람이 평신도 시절에도 그렇게 뜨겁게 전도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생생하게 전도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그 영혼의 가치를 압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를 압니다. 그래서 그들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많이 불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목회를 잘 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목회자가 직접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께 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마음이 항상 한 영혼을 향해 뜨거운 사랑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점점 커지고 교인들이 많이 모이기 시작하면 목회자는 이런 생생한 전도자의 마음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배에 많이 탔는데 그만 배가 암초에 부딪혀서 파선 되었습니다. 파도는 높고 배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암초에 부딪히면서 배가 쪼개졌습니다. 배는 기울어졌고 결국은 가라앉아서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죽었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간신히 나무 조각을 의지해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헤엄을 쳐서 간신히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이렇게 살아났으니 그러면 내가 인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여기가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리고 그들이 조난당했을 때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배가 난파당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작은 쪽배를 만들어서 타고 가서 사람들을 두 사람을 다시 구했습니다. 그리고 모여서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자기가 목숨을 건진 것에 너무 감사하며 자신들도 그 일에 동참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거할 수 있도록 작은 천막을 치고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구출되었고 그들도 많은 사람을 이루면서 구조대를 형성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집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지었습니다. 집을 짓고 나자 그들이 좀 더 편안히 거할 수 있는 침대가 필요했습니다. 침실과 거실, 욕실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번을 정해서 자기 시간에만 그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단합하기 위해서 파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주 화려한 파티를 열고 서로 잘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날 밤 커다란 태풍이 불어왔고 배가 여러 척 암초에 부딪혀 난파를 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빠져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거기 모인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파도가 높고 바람이 많이 부는 어두운 밤에 구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파티는 계속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반성을 하게합니다. 바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아파하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목양의 관계가 어떻게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눈물을 계속 간직하게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삼중사역 즉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그리고 약한 자들을 고치고 돕는 봉사의 사역,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어떻게 구현해나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강력하고 은혜롭게 설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눈물과 열정을 간직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뜨거운 은혜가 있을 때에 비로소 양떼들은 ‘저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하신 삶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뜨거운 열정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생명처럼 귀한 것이 아닙니까? 교회가 커지고 교인들이 좀 모인다고 해서 그런 열정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식들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자녀들을 아주 뜨겁게 사랑하는 엄마는 대부분 자기 엄마로부터 그렇게 양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양떼들도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되는지를 누구에게 배우겠습니까? 바로 목회자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랍니다. 그리고 양들에게 그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과 외적인 행동으로써가 아니라 진실한 사람으로 가르쳐주어야합니다. 그런 전도의 열정을 열렬하게 유지해야합니다. 여기서 설교를 듣고 났을 때, 성경공부가 끝났을 때,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절절할 기도가 나와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 안에 들지 못한 양떼를 바라보면서 가슴 아파하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좀 더 큰 우리를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의 품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어린양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들을 안타까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과 자신의 양떼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이 사랑 없이는 저 사랑이 없고, 저 사랑이 없다면 이 사랑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한 30년 전에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사람이 쓴 그의 생애의 일기였습니다. 이 사람은 18세기에 인디언에게 전도하던 미국의 선교사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딸과 결혼을 할 뻔 했던 그런 선교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인디언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인디언과 백인 사이가 매우 나쁜 관계였는데 백인들은 인디언들은 영혼이 없다고 믿었고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머리 가죽을 벗기고는 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인디언 선교를 위해서 아주 아름답게 헌신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정말 뜨거운 기도의 사람이었고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설적인 사역을 하고 어마어마하게 많은 대중을 모아놓고 설교한 그런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보따리에 물과 음식을 가지고 말을 타고 아주 외진 곳으로 가서 소수의 인디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핍박을 받기도 하고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만 그는 자기의 일을 계속했습니다. 너무 뜨겁게 인디언들의 영혼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은 나의 생일날이다. 새벽에 별을 보며 숲속으로 기도하러 들어갔다. 하루 종일 생각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인디언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했다.’ 그렇게 기도해보셨습니까? 그 사람은 자기의 일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것을 제가 한 30년 전에 곡을 만들어서 붙였습니다. 제가 노래를 부를 테니까 여러분들이 통역을 통해서 내용이 무엇인지 들어보십시오.
(찬양)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대신할 수는 없노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교수로 갔을 때 학생들에게 그 책을 쭉 읽혔습니다. 학생들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정말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과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로 나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배우면 무엇 합니까?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면 무엇 합니까?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 합니까? 그 속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데. 눈물이 없는데. 영혼을 향한 뜨거운 기도가 없는데. 그래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울리는 꽹과리와 같고 소리 나는 징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과 하나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은 말로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그분께로부터 직접 배워야합니다. 그분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무슨 일을 하였나를 생각해야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랑에 깊이 감격하는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그렇게 깊이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으로 목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