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설교 1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녹취자 : 조원정
이 장면은 여러분이 잘 아는 사마리아에서 물을 길러 온 여자를 예수님이 만난 장면입니다. 이 여자는 다섯 번이나 남편을 바꾼 여자이고 사연이야 많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품행이 정숙하고 경건한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사마리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앗수르가 이 도시를 국제화 시킵니다. 대대적으로 자신의 나라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보내어 거주하게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쫒아냅니다. 국제결혼이 이루어지게 만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피를 다 섞어 버립니다. 민족적인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남쪽 유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피를 더럽힌 혼혈민족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사마리아 지역을 매우 경멸했기 때문에 갈릴리 갈 때에도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지 않고 요단강을 통해서 돌아갑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접촉하기 싫어했던 사마리아 땅을 예수님이 들어가셨다는 자체가 당시로서는 굉장히 생소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해 가지고 계셨던 어떤 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마음은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해 구원하여야 할 우리 바깥에 있는 양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복음적인 메시지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여자와 대화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예배에 대해서 매우 신학적인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 신학적인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는 이것은 중요한 진술입니다. 아마 성경 어디에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명확하게 가르친 곳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가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 피조물과 다른가 하는 것은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우리들이 생각하는 물질로 되어 있는 그런 사물들과 같은 성질을 가지신 분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과 같은 존재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보다는 우리의 영혼과 닮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간의 영혼과 꼭 같은 분이시라고 생각을 해도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그 영이 막 돌아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은 내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와 꼭 같은 영이라고 보면 하나님은 어느 장소에만 계시고 다른 곳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면서 우리의 영혼과는 다르십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지만 우리의 영혼과는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세계 안에 계시지는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 주어진 메시지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사실이 언급이 됩니다. 그것은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예배는 제사였는데 그 제사는 아무데서나 드리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드려집니다. 이게 북 왕국 이스라엘의 하나의 콤플렉스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경이 막혀서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여호보암이라는 왕이 어떤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예루살렘에서만 꼭 경배할 필요가 없다. 벧엘과 단이라는 곳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거기서 제사하면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전통이 사마리아에 계속 내려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처소를 그릿심산에 만들어 놓습니다. 일찍이 그릿심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선포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자신들에 맞게 살짝 수정한 사마리아 오경을 가지고 경전을 삼았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께 여쭤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고 하고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새로운 때가 올 텐데 그때에는 어디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장소가 문제가 되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며 그때 그런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가가 훨씬 중요한 때가 온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그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 성령님이 오셨을 때부터입니다. 예루살렘, 육적인 이스라엘, 이런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신약의 교회를 이루실 하나의 예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세상의 구원을 이루고 나면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에 제사를 드리는 것에 매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의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서 성경은 간략하게 말합니다. 영과 진리로서 말합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성령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교통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므로 또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안에서 뜻입니다.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신가 하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영 안에서 진리 안에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진리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지식이 설교를 통해 전달되고 그 전달 된 것을 사람들이 깨달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목양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모든 걸 다 잊어버려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목양을 통해서 세워져야할 두 개의 기둥입니다. 하나는 목양을 통해서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진리를 통해 아는 것, 사랑은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생겨납니다. 사랑과 진리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은혜와 진리, 성령과 진리이기도 합니다. 결국 목회도 성령과 진리, 예배도 성령과 진리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 정말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아 이런 진리가 있었구나 하는 진리의 깨달음이 있습니까? 이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한번 주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옵니다. 사람들이 늦게 옵니다. 영화구경을 갈 때는 15분전에 가서 기다려서 표도 사고 먹을 것도 준비합니다. 그렇지만 교회 올 때는 5분전에 도착합니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옵니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얼른 예배드리고 집에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배를 드린다기보다 예배를 견디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견디기의 극치는 설교시간입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설교를 듣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 시간에 주보를 봅니다. 그 주보를 읽습니다. 빨간 펜을 들고 틀린 글자를 찾아냅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교인들의 소식을 들춰 보입니다. 누가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기 낳고 하는 소식들을 읽으면서 교회 소식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설교 시간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런 것에 개의하지 않는 것처럼 원고를 보면서 지루하게 설교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 사람하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합니다. 주보위에다가 글씨를 써서 필담을 나눕니다. 또 요새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립니다. 목사님이 예화를 들면 핸드폰을 찾아보면서 네이버 같은 곳에서 그게 사실인지 확인합니다. 전화가 오면 하나님 보다 높은 어디에서 전화가 왔는지 전화기를 들고 바깥으로 뛰어 나갑니다. 그런 모든 일들이 끝나면 사람들은 졸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상하 전후로 운동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좌우, 졸다가 성경책을 떨어트립니다. 거기 하나님 안 계십니다. 백번 얘기해도 하나님 못 만납니다. 헛수고를 하고 갑니다.
더 심각한 것은 목회자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끝난 다음에 저기 문 앞에서 성도들과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합니다. 하는 말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교회가 음식점입니까? 뭐가 감사합니까? 교회 와준 것이 그렇게 감사합니까? 저는 그 앞에서 성도들하고 인사하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인사는 음식점 주인이 손님들에게 하는 인사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못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 회개하고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주님을 만나고 감동 받아서 기도하든지 그래야 하지 않습니까? 교인들이 그런 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목회자가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끝난 다음에 예배당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예배시간에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씀을 깨닫고 그러고 나와도 세상이 바뀔지 말지인데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데 무슨 세상이 변화되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계속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게끔 교인들을 내버려 두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진정한 목양일수가 없습니다. 그건 장사꾼입니다. 삯군 목자입니다. 진정한 목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가 되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얼마나 엄중하고 위대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 만나지 못한 사람을 주님 만나게 하라고 거기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회개도 없이 뻔뻔스럽게 활짝 웃으면서 교인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양심 있는 목회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깨트려지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교인들에게 그렇게 되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어떤 방법들을 사용해서 교인들을 많이 모이게 만들고 헌금이나 많이 걷고 그렇게 해서 일이나 많이 하려고 하는 것이 사업이지 어떻게 목회일 수 있습니까?
예배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는 예배를 드려서 교인들을 하나님 만나게 해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에 모든 관심사가 어떻게 교인들을 하나님 앞에 데리고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줄 수 있는가 이어야 합니다. 저의 목회의 경험에 의하면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교인들이 회심하지 않으면 목양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목양이라고 하는 것은 양떼를 치는 것이지 맹수를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예화) 제가 계림에 갔을 때 일입니다. 중국의 계림에 가서 재미있는 광경을 많이 봤습니다. 이강도 참 멋있고 아름다웠지만 거기에 있는 백호 동물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백호는 정말 몸집이 하얗고 큰 호랑이인데 중국에서도 거의 멸종위기랍니다. 짐승들의 눈에 너무 잘 띄어서 먹잇감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설명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전설적으로만 듣던 호랑이들이 묘기를 부리는 광경을 보면서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황소의 두 배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호랑이들이 지휘자의 구령에 맞추어서 엎드려, 옆으로 굴러, 좌로 굴러, 우로 굴러 하면서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잘했다고 고기를 하나씩 줍니다. 아무리 호랑이가 말을 잘 들어도 호랑이는 양이 아닙니다. 그러다 한번 화가 나서 사람을 물면 사람을 죽여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맹수입니다.
목양을 공부하면서 배운 기본적인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목자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그 목양을 받는 것이 교회의 질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양떼들이 만나지 않았을 때는 목자가 아무리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목회를 하려해도 그 목회를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목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목회는 목회자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떼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예수님을 위해서 결정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그 말씀대로 살자. 그런데 만약에 양떼가 예수가 누구관데 우리가 예수의 말에 복종하겠느냐? 난 싫다. 이렇게 될 경우 어떻게 됩니까? 그럼 처음서부터 목양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 회심입니다.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누구도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회심해야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목양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물론 그런 회심이 꼭 예배시간에 일어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혼자 조용히 성경을 읽다가도 그런 회심을 경험합니다. 혼자 기도하다가 회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혹은 가족들과 예배드리다가 회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반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서 회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예배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예배자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설교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설교 시간에 자기의 인생에 대한 생각이나 늘어놓고 잡담이나 하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 자기의 신념을 가르쳐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순수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결코 그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예배시간에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진리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수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펼쳐 놓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떤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착실하게 공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그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분쟁을 일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비결들이 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 사람들이 함께 한 장소에서 주님을 깊이 만났기 때문에 그들이 정말 변화되어서 우리가 한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하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을 사랑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 목회자처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런 마음이 그 사람을 움직일 때 교회가 다양한 사람이 모여도 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가졌던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서로의 물건을 통용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모두 회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향해 경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 어떻게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에 대한 인식이 있습니까? 그래서 일주일 동안 예배에 합당하도록 준비합니까? 제가 염려스러운 것은 오늘날 중국의 목회자들도 한국의 목회자를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좀 모이고 하면 사업가 비슷하게 되어 갑니다. 교회 돈을 가지고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늘 일에 대한 생각이 꽉 차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일에 대한 생각입니다. 일주일 동안 예배를 위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헌신하는가에 대해 여러분이 반성해야 합니다.
먼저 설교를 아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솔직히 이 아래서 설교를 하는 사람의 설교를 들어보면 물건을 팔아도 저런 식으로 설명하면 물건이 안 팔리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듣고 물건을 사겠습니까? 저는 매우 부끄러운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 언변의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더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말도 잘 못하는데 설교 준비도 대충하고 심지어는 설교준비도 안하고 올라옵니다. 하나님께 죄송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선한 목자일 수 없습니다. 설교를 아주 진지하게 깊이 성경을 탐구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설교가 되도록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아야 합니다.
(예화) 저는 목사니까 남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여러해 전에 눈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안과에 입원을 했습니다. 몸이야 멀쩡하니까 목사가 주일날 예배를 안 드리고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은 옳지 않습니까? 외출증을 끊어가지고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오전에는 병원 근처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대부분 저의 얼굴을 알아 볼 리 없습니다. 저는 제 얼굴이 사진이나 책이나 메스컴에 나오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책에다가 사진을 거의 안 놓습니다. 책이 내용을 가지고 승부를 하는 것이지 책을 쓴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승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갔습니다. 설교시간이 되었습니다. 별로 그렇게 나이도 많지 않은 목회자가 올라와서 설교하는데 정말 마음이 너무 싫었습니다. 설교시간 내내 목회자를 잘 섬겨야지만 자기와 자기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학적인 반감이 마음속에서 계속 생겨났습니다. 성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런 이야기만 한 시간 내내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거기에서 예배를 끝나고 돌아왔습니다. 참 한국교회 큰일 났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오후에는 더 좋은 설교를 기대하면서 침례교회 갔습니다. 거기에서도 40분정도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전에 설교가 훨씬 낫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오전에는 그래도 말이 안 되지만 주제는 뚜렷했습니다. 오후에 드린 예배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 설교자 본인도 잘 모르는 설교였습니다. 주제가 없습니다. 그런 설교를 듣고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설교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헌신을 하십시오. 헌신은 힘들고 어려워도 그 일의 가치를 알고 희생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에 헌신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지만 예배시간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내일 아침에 계속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