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우주론적 성격
녹취자: 김세나
어떤 신학적인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을 때 제일 먼저 다가와야 할 것은 그 속에 있는 파편이 아닙니다. 책 전체를 외우라는 의미가 아니라 책 전체의 얼개 같은 것들을 암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커다란 얼개가 들어오고 그 얼개가 자신이 가진 얼개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할 때 여기에서 말하자면 신학적인 충격, 철학적인 충격,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면서 지성의 크기가 커집니다. 인간 지성의 크기가 무엇과 무엇의 크기라 하였습니까? 지성과 감성의 크기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지의 선한 크기는 실제적인 삶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 정신의 크기라 할 때 정신이 큰 사람을 가리켜 우리가 모두 훌륭하다고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신의 크기가 커져 갑니다. 발표를 들으면서 계속 고개를 젓고 이 소중한 시간에 발표를 더 듣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아주 온전한 숲을 보았습니다. 미국에 가면 요세미티 공원이나 자이언트 공원에 가보면 거대한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보통 기본적인 연령이 천 년입니다. 많이 먹은 애들은 3천 년 정도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서 입이 딱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데 숲 자체를 전혀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와, 웅장하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안경을 쓰지 않습니까? 맨 처음 안경을 쓸 때 대게 답답한 것이 무엇입니까? 안경테가 자꾸 보입니다. 뇌과학에서 이야기하는데 안경을 오래 쓰면 이게 계속 뇌의 상에 맺히는데 뇌 자체가 이것을 삭제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안 보이고 불편함이 없습니다. 눈으로 들어가는데 계속해서 말하자면 지워집니다. 안 보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거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진리의 상실, 상대주의, 그것이 어떻게 인간 삶의 전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 기독교가 어떤 의미에서 위기이고 어떤 의미에서 기회인가 이야기해야 하는데 전혀 안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그러한 식으로 교육을 받으면 절대로 사상적인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깊이 있는 책을 안 읽을 뿐 아니라 우리 학교 다닐 때 지금은 교계 꽤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그 친구가 로이드존스 책 읽으면서 맨날 하는 이야기가 “로이드존스는 왜 이렇게 만연체야. 아무리 읽어도 저녁 예배에 써 먹을 것이 없어.” 써 먹을 것이 있는 것을 즉석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원한다면 워런 워어스비나 이동원 목사님 설교집을 찾아야 합니다. 설교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한 설교는 말하자면 종류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사상적인 책을 읽을 수 없고 끊임없이 설교집을 찾으면서 예화집을 찾으면서 자기가 해 나갑니다. 성경 자체를 연구해야 할 도전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성경을 매일 읽으면서 큐티는 할지 모르겠지만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3장을 읽으면서도 엉뚱한 이야기 하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엉뚱한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대원 2학년 때 헬라어를 공부하였습니다. 페트라 어학원에 가서 김창진 목사님이 그래서 내가 거기 출신이라고 광고를 많이 합니다.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단에서 온 예쁜 자매가 있었습니다. 여 전도사였는데 얼굴도 예쁘게 생겼습니다. 자기가 점심을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10명 정도를 데리고 가서 중국집에서 거하게 사준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왔는가 물으니까 김기동 교회 목사님 교회에서 왔는데 자기는 원어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원어를 공부하니까 우리 김 목사님 말씀이 정말 성경적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이 없으면 원어를 공부해도 해석학적인 굴절이 올바르게 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신학교육이 갖는 심각한 문제이고 이것은 신선하고 새롭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 중세 시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종교개혁 시대 루터가 들어온 시대에도 이러한 가르침의 터 위에 모든 복음과 이러한 것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누군가 사람들이 나를 연구한다면 굉장히 흥미를 끌 주제가 기독론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강의를 한 2년 들었지만 그런데 이것을 들은 다음에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라는 설교 5개짜리 시리즈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오. 들어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이것이 결국 어마어마한 사상의 토대가, 우주와 인간사회와 교회와 인간 개인 내면의 세계 이 모든 것들이 사중적으로 오중적으로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 있구나. 그래서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어마어마하게 충격을 받은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이야기 하였던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나라입니다.”라고 끝이 납니다. 그 사람의 나라의 아주 완벽한 전범이 창세기 2장에 나타납니다. 두 사람을 딱 만들었을 때 타락하기 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것을 듣고 강영안 교수님이 굉장히 강한 도전을 받으면서 언제 한번 자기가 설교시리즈『고린도전서 13장』을 부분적으로 들었는데 그것은 굉장히 연구할만한 말하자면 중요한 성경에 대해 결정적인 것을 이야기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철학적으로 받았다고, 자기가 한번 36개에 도전을 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팔복에서도, 소금에서도, 빛에서도, 저쪽으로 가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모두 다 기독론입니다. 다 기독론입니다. 기독론에서 모든 것들이 풀어갑니다. 인간론도 기독론을 제외하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간이 만들어졌고 결국 타락 전 상태는 그것이고 타락 후 상태는 자연인의 상태로 끊어진 것입니다. 회복된 인간은 다시 접붙여진 상태이고, 그 다음에 완성된 상태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되심이 회복되던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사상적으로 철학적으로 써도 마지막에 묶여지는 것은 다른 철학자들과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딱 마지막 중심축이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의 모든 위대한 진리가 기독론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똑같은 절차를 거칩니다. 처음에는 철학과 이성의 조화, 그 다음에 교회, 마지막에 말년에 가서는 기독론, 그리고 죽기 전에는 기독론이 완성되는 “City of God" 말하자면 기독교 철학을 기독론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최초의 기독론 중심의 역사철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물론 사전 정보도 있겠지만 작은 말을 하고 있고 똑같은 이야기를 내 친구가 했더라면 한번 까일 수 있는데 왜 그런지 주저주저 하면서 저 사람의 말이 약간 안 되는 것 같아도 반박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힘이 세거나 돈이 많거나 그래서가 아니라 그러면 그것은 지적인 비범함인가. 그것이 아니라 저 말 뒤에 정말 깊은 사상이 있을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성철 스님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애들이 그런 말을 했으면 장난 하냐고 뒤통수 한 대 맞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히 논박을 못하는 것은 산이 산이라는 것과 물이 물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데, 저 사람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고 이야기 할 때 저 사람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고 하는 얼마나 많은 사유를 하였을까? 그렇게 해서 도달한 결론이니까 당연한 이야기를 하여도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이란 철학자가 “2+2=4”라는 증명하는데 600페이지 분량으로 증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 앞에서 감히 그 논문을 보고 “야 이 자식아, 초등학생도 아닌데 그것을 왜 쓰냐?”고 던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수학에서도 그것을 증명하려면 매우 고도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결국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됨이란 것들이 우주론과 연결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지체됨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조잡하니까, 한번 읽어 보십시오. 김용옥씨가 『사랑하지 말자』책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동의는 안 되지만 지역적인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동의가 됩니다. 그러면서 그 책을 읽고 덮으면서 혼자 중얼 거린 것이 있습니다. “니가 본 사랑은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고, 진짜 예수님이 하라고 한 사랑은 당신이 직접 본 것은 아니다.”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여도 소위 이야기 하는 accomodation이 있지 않습니까? acommodatio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모순이 생겨납니다. 그 이상인데 그 사람을 참으로 안다면 당신이 어쩌면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적용하는 것이 너무 웃기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단합대회” 그 다음에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그러더랍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자기네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교회.”그렇게 해서 ‘우리교회’ 그 다음에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 중등부’, ‘우리 고등부’ ‘우리 교역자’ 결국 사랑을 해도 다른 교회 어려운 교회 사랑하자고 할 때 굉장히 적선적 개념입니다. 우등한 위치에서 무엇인가 떨어뜨려서 주는 그러한 식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여도 그러한 것이 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 개인의 거룩한 생활, 성경의 많은 개념들이 다 작은 것들인데 이것들을 모두 합쳐서 한 가지 통일된 목적을 지향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주의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 그리고 그 우주 아래 살고 있는 나와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 4-5일 전에 도정일 교수, 우리나라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문학자입니다. 그 사람이 쓴 『우주의 발견과 인문 교육』이라는 한겨레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이 신문을 꼼꼼히 잘 보십시오. 골고루 보면 제법 우리의 지식을 넓혀 주는 것들이 나옵니다. 이 사람이 말하자면 ‘폭발’, ‘빅뱅’에 관한 근거들이 나왔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습니다. 그 의미를 연결시키는 것이 인문학 교육의 목표라고 하면서 그러한 토대위에서 견실한 삶을 쌓아 올려가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키케로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기술은 사물을 사용해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그리고 덕은 자기 자신을 사용해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나라까지는 가보았다고 하더라도 달나라 밖에 우리가 가보지도 못한 곳인데 아무리 우리에게 우주선으로 찍어서 보여주고 “금성이 가스 덩어리다.”라고 아무리 이야기 해봐야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물을 사용해서 우리를 이롭게 하는 기술 문제만을 이야기 하니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덕’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 할 때 그러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주가 있는 목적과 내가 있는 목적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물들이 서로 목적 의존적인 존재로 되어 있으니까 그러면 그 ‘목적 의존적’은 무엇인가. 하이데거 같은 실존주의자, 니체 이러한 사람들이 “목적은 무슨 목적?” “왜 그러면 목적을 못 생각해?” “우리가 알 수가 없잖아. 우리가 이성으로 파악이 안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면 실존주의자들에게 와서 “왜 존재하는가?” 하면 “그것은 우연히 존재하는 거야. 필연이 없는 거야.” “왜 우연이야?” “우연은 필연만큼 왜 우연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연이야. 우연은 왜 그랬냐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우연은 우연이야.”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는 그러한 것과 관련해서 가치의 네트워킹 속에서 우리가 발견된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사람들이 각각 존재의 목적과 네트워크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을 규명하는 것이 진리이다.” 진리는 뭐냐. “기반을 다 허물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웃기는 거야.” “진리는 그 시대에 상품화할 수 있는 현금의 가치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진리는 현금의 가치이다.” “우리 모두가 동성애를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행복하고 좋아하면 무엇이 문제냐.” “옛날엔 안 그랬는데.” “그것은 그때 일이고.” 끊임없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출렁거리며 지나갑니다. 그러한 속에서 흔들리지 않게 세워주는 것이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하신 세계의 계획이 우주의 계획과 관련이 되고 그 중심에 구원이 오는 것인데 구원도 끝이 아니라, 여기에서 보면 끝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끊어졌던 창세기 2장의 속편으로서 다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머리의 구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면 성경을 다 못 읽어도 그러한 커다란 구도를 깊은 회개와 함께 받아들이는 것, 사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to be a Christian"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라는 단어, 김용옥씨가 실랄하게 비판을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회개’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문헌비평 방식에 있어서 잘못되었습니다. 똑같은 단어가 들어가면서 사실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군대에서 사용되면 응원군을 보내줘서 자기네들이 죽을 전쟁에서 살려주는 것이지만 기독교에 들어오니까 영적인 의미가 생겨납니다. 그러한 언어적인 접근은 굉장히 무식한 접근입니다. 자기가 여기에서 한국어로 뭐라고 썼는데 중국어와 다르다고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기독교권에서 그렇게 이해를 했다고 하는데 뭘 그렇게 이야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원래의 헬라 세계에서 ‘메타노에오’라고 하는 것은 ‘노에오’(νοέω)의 결과입니다. 맨 처음 기독교에서 ‘메타노에오’라고 할 때에는, 초대교회 사람들이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를 기독교 안에서 읽을 때 제일 받은 충격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가슴 아파하고 복장을 뜯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이 생각의 머리 자체가 휙 돌아가서 예를 들어서 헬라스 세계에서는 말하자면 다신론이고 사실은 유물론 같은 여러 가지 사조들이 있었습니다. 당시로 이야기 하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사실 대표적으로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사상도 모두 다 큰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피쿠로스도 간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루크레티우스의 글을 읽어 보면 에피쿠로스는 우리들이 쾌락주의라고 해서 쾌락만 이야기 하나 그러는데 절대 그것이 아니고 결국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야기하는 인간의 행복과 평안입니다. 그것이 중심축에 있다고 봅니다. 그것을 자기 안에서 찾아져야 된다고 보는 것이고, 이 사람들은 바깥에 있다고 봅니다. 실재론의 뿌리가 되고, 유명론의 뿌리가 됩니다. 유명론은 무엇인가 하면 뭔가 ‘보편자’ ‘이데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이름뿐이지, 결국 그것 또한 사람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결국 관념론과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 근대의 실재론, 유명론, 관념론의 개념과 중세의 관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중세의 유명론이 오히려 근대의 실재론과 비슷하고, 중세의 실재론은 근대의 관념론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서로 의미하는 바가 매우 다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 속에서 결국 ‘메타노에오’라는 단어가 기본적으로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노에오’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딱 따라오는 것이 뭐냐 하면 "the way of Living"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에 보면, "the difference of the way of Living between a Catholician, and a heretic." 이교도들(마니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의 삶의 방식의 차이. 제가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지성 그 다음에 사상, 사상 그 다음에 윤리, 살아가는 삶. 이 두 개가 딱 묶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윤리 운동이 실패하는 것이 이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절대 개선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사상 속에서 커다란 골격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메타노에오’는 그러한 사상 속으로 예전의 사상을 내려놓고, 사상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상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또한 사상입니다. 다 내려놓고 딱 터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기독교의 우주적인 가르침을 접하면서, 자기 것을 다 내려놓고 그것을 다 받아들이면서 "How should we live?-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주론 속에서 결정하고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회개가 들어왔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뉘우침이 들어왔던 이유는 거기에서 기독교의 기독론적인 의도를 보게 됩니다. ‘메타노에오’와 ‘크리스톨로지’(Christology)의 형성의 관계는 너무 너무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메타노에오’, 소위 이야기하는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회개로 봅니다. ‘회개하다’라고 번역을 합니다. 사실 그것이 ‘conversion'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conversion'은 신학용어입니다. ‘conversio'. ‘aversio' 하던 인간이 ‘conversio.' 하는데 ‘conversio' 의 핵심은 교리학에서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면 ‘회개와 믿음’으로 정의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회개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앎을 전제로 합니다. 생각이 확 바뀌는 것이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인데 그래서 예전에 자기가 가졌던 조잡한 세계관을 버리고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에 사회관, 인생관, 모든 것들 'view point'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세히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폴라루스’같은 학자는 뭐라고 보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세계에 관한 지혜”라고 보았습니다. 신학은 바로 그 지혜를 탐구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잘 보면 그 지혜를 가르쳐 주는데 그것이 바로 고대의 철학서부터 인간이 먹고 살만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면서 괴로워하면서 던졌던 수많은 질문에 관한, 그러나 궁극적으로 답이 주어지지 않은 문제에 관한 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 교부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철학이라고 거침없이 불렀고 그것은 사도바울에게서 배운 바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지혜를 ‘소피아’(Sophia)라고 이야기 하였을 때 두 가지 전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호크마’(구약의 지혜)에 대한 전통과 당대 있었던 헬레니즘에서 온 ‘소피아’에 대한 전통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마음 속에 의미하였던 것은 그 철학을 말하자면 희랍 사람들이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였다. 정말 이 답은 이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다른 데를 두드리는데, 이것은 사실은 구약의 ‘호크마’에 있는 것이라 본 것입니다. ‘호크마’의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면서 희랍에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이 사람이 ‘호크마’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마지막에 ‘소피아’에 말하자면 해결을 이 안에서 발견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해결이구나. ‘호크마’가 그리스도에게서 신학적인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지혜의 나타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일관적인 사상입니다. 이것은 석사 Th.m 논문의 재료로서 충분한 것입니다. 기독론적으로 아주 섬세하게 신구약을 꿰뚫으면서 이러한 것들을 다루는 논문을 별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구약의 지혜문학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많이 탐구합니다. 역시 이러한 통합성은 우리들이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것들이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이 되었다.”고 할 때 초대교회로 기준을 보면 ‘그리스도’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죽고 부활하심’ 그리고 ‘착한 생애’ 이 세 가지가 떠오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을 뽑을 때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해 회상하면서 나온 세 가지 주제가 ‘죽음, 다시 사심, 온갖 착한 일을 행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회고가 나옵니다. 그러면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여러분이 이미 들었겠지만,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하여 옛날에 들려준 것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왜 사도바울의 결정적인 회심의 계기가 되었는가.” 신학적인 설명 말입니다.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그를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메타노에오’의 의미가 기독교적으로 수정이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헬라식 문명에서의 ‘메타노에오’로 들면서 이러한 것에는 이러한 뜻이 전혀 없다고 줄을 거 버리는 것은 마치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어디 전쟁 났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언어역사적인 탐구의 방법에 있어서 매우 조잡한 접근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기독교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것이 기독교에 어떻게 들어오고 어떠한 의미가 ‘conversion'되었는가 생각하면서 원래 의미가 있었지만 기독교에서 변화시켰다고 이야기해야지, 없는 것을 기독교에서 집어넣었다고 이야기 하면 안 됩니다. 모든 언어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변천되면서 오는 것인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식’이란 말도 천 년전에는 아들을 의미하였지만 지금은 욕이 되지 않았습니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이렇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으니까 설교를 해도 파편적이게 되어 버립니다. 가르침도 다 파편적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파편적인 가르침은 둘 중 하나입니다. 욕심을 내어 어떠한 사상을 심으려고 하면 나중에 자신이 하는 설교와 충돌을 일으키고 그것이 위험하니까 빼 버리고 나면 흐물흐물한 설교가 됩니다. 감동은 줄지 모르지만 사실은 삶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나 스펄전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 그러한 것들을 많이 느끼는데, 토마스 쉐퍼드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아무 데나 열어서 한 편만 계속 읽어보면 ‘깊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사람들은 통찰이라고 운운하는데 물론 성경을 보는 통찰도 있습니다. 그런데 통찰도 알아야 통찰하는 것 아닙니까? 모르면 무슨 통찰을 합니까? 통찰이라는 것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있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누군가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 정말 깊다.” 이야기 하고 감탄할 정도이면 그 사람 자신이 상당히 그러한 깊이에 들어간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 인턴십에서 “신학과 현대사상”에 대해 90분 특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CD에 담아서 만들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숫자만큼 하나씩 가져와서 들어보고 정신을 차려 봅시다.
철학책을 10권을 읽는 것 보다 1권을 읽고 큰 충격을 받고 이것을 두 번, 세 번 줄치면서 읽는 그것이 그 사람의 깊이를 훨씬 더 합니다. 읽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내용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 사람의 얼개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것이 이제 기본적으로 마음에 꽂혀야지 사유라는 것이 되지 흘러가 버렸는데 사유가 되겠습니까? 아무 것도 정보가 ‘catch'가 안 되었는데 사유가 되겠습니까? 사유는 씨앗이 땅에 뿌려진 것처럼 뿌리를 내리면서 이렇게 이렇게 나오게 됩니다.
(질문) 사상가로서의 바울을 이야기 하시고, 성경을 사상사라고 표현하셨는데 사람들이 많이 동의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상사라고 하면 왠지 인본주의라 느낄 것 같은데, 성경신학과 해석학이나 주석을 보면서 느끼는 것인데 현대 주석을 보면서 가장 실망한 것 가운데 하나가 약간 책임감이 없게 느껴지는 것이랄까? 유다서의 어떤 부분을 주석을 하는데 창세기의 어떤 부분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런데 창세기 6장 “하나님의 아들들” 문제와 얽혀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유다서는 그냥 “타락한 천사”라고 해 버리고 그 이상의 아무런 해결도 하려고 하지 않고, 그것은 창세기 문제로 해버리면서 성경의 연관 문제를 어떠한 통일성 문제가 있는데 모두 신경 쓰지 않고 그 부분만 보는 것 같습니다. 통일성에 대한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너무 성경을 해석할 때 인간저자의 의도, 그 순간의 의도에만 국한지어서 그냥 성경을 해석하려는 관점이 많이 있는 것 같고 성경을 어떻게 보면 사상서로서 대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러한 한계가 있는 것 같은데 저희가 이제 “사상사로서 성경을 본다.”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차이와 방법론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지 묻습니다.
(답변)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성경 해석을 요청하면 성경에서 해석이 이끌어져 나오는 것이 성경과 일치하기 위해서서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기본적인 사상의 얼개와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해석자-해석되는 성경-해석의 결과”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몰몬교 같은 경우 성경이 가르치는 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의 확신에 차 있는 해석자가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확신에 차 있으면 그 해석자가 해석의 대상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 볼수록 몰몬교의 확신에 더 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해석의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해석의 결과는 해석자와 일치를 합니다. 자기가 성경의 등을 두드려서 토해낸 해석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과 일치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해석학적인 선전제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제 코넬리우스 반틸의 유명한 ‘프리서퍼지셔니널리즘’이라는 게 이성주의 신학한테 엄청나게 깨지고 비판을 받았지만 사실 개혁신학을 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전제 없는 학문이 가능한가. 어떤 학문이든지 전제가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현대 과학철학에 있어서 쌍 거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칼 포퍼’와 ‘토마스 쿤’입니다. ‘칼 포퍼’는 ‘비판 정신’으로 대변이 되고, ‘토마스 쿤’은 ‘귀납주의’로 귀결이 됩니다. 이미 토마스 쿤은 고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학은 결국 관측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된 관측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이 쪽에 칼 포퍼 같은 사람은 “야, 그러면 관측이라는 것이 정확하냐?” 여러분, 백조가 무슨 색깔입니까? 하얀색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창조주가 백조를 하얗게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을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돌아다니는 모든 백조들 가운데 하얀 것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귀납주의는 하나 하나를 가지고 보면서 결국 일반화 할 수 있는 어떤 법칙을 만들어 냅니다. 뉴질랜드로 갔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까만 백조를 발견하였습니다. 와서 이야기 하니까 모두 ‘미친놈’이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열 받아서 뉴질랜드로 가서 박제를 만들어서 가져왔습니다. 유명한 ‘백조 파라독스’입니다. 유럽 사람들의 생각이 깨진 것입니다. 언어 자체가 성립이 안 하는 것입니다. ‘까만 백조’ 고등학교 다닐 때 애들이 걸스카우트가 교통정리하는데 “너 오면서 걔네들 봤어?” “누구?” “여자 보이스카우트 말야.” 마찬가지입니다. 깨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이 과학이 발전하면서 보면 귀납주의적인 관측이, 칼 포퍼가 “봐라. 결국 인간이 모든 것을 비판 정신으로 봐야지 인류 역사 이래 한 번도 변함없이 동에서 해가 떠서 서로 갔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정한 조건에서 보는 것이지 그것은 항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을 깨야지만 과학의 진정한 발전이 오는 것이다.”고 보았습니다. 사실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퀴즈 하나 내 보겠습니다. 어디다가 집을 세워놓고 사방의 창문을 다 열면 모두 남향인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북극점에서 집을 지으면 됩니다. 북극점은 동, 서가 없습니다. 사방이 다 남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매일도 아니고 6개월에 한번 뜹니다. 남쪽에서 해가 떠서 남쪽으로 집니다. 남극점에 집을 지면 모든 사방 창문을 열면 모두 남극이고 해는 북쪽에서 떠서 북쪽으로 집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다. 그래서 칼 포퍼의 유명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토마스 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놀라운 것들이 발견됩니다. ‘수, 금, 지, 화, 목, 토’까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천왕성’이 관측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당돌한 사람이 이거 이거 별들 사이에 관측을 하면서 확률적으로 비율을 따져 가면서 이것은 태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고 얼마 떨어지고 얼마 떨어지고 인데.. 하면서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관측에 의해서 여기와 여기와 여기 궤도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틀림없이 저 쪽에 어떠한 커다란 별 덩어리가 있어서 그것이 앞의 별을 당기기 때문에 궤도가 찌그러져있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한 가설을 세웠는데 몇 년 후에 정확하게 발견되었습니다. ‘해왕성’도 또 그렇게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칼 포퍼와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접근하면 영원히 발견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일단 그것이 그런가 보다 믿는 기존의 결과에 대한 관습에 대해서,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 관습적인 믿음을 가지고 동의를 하면서 과학은 폭발적으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골자입니다. 토마스 쿤과 칼 포퍼와 맞섰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결국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하면, 과학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재밌지 않습니까? 칼 포퍼의 사상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있어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리가 관측하는 것도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 눈앞에서 관측되는 것뿐이다. 이것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여기에서 아주 파편화된, 말하자면 이성으로 근거를 지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모든 것을 단절하고 데카르트적인 성찰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는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하든지 실재론적으로 모든 것을 묶어서 우주 속에 하나의 통일된 무엇인가 물리적인 의미에서의 법칙이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통일된 근거들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발견을 못한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실재론적인 구도, 그러한 양대의 구도가 결국 철학에서 해결이 안 나고 과학에서도 해결이 안 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두 가지를 놓고 누가 맞다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과학에서는 이것이 맞다고 보고, 예를 들어서 토마스 쿤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들어갔던 대표적인 사람이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예를 들어 거시 세계를 이야기 할 때 빛이 휜다는 가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빛이 휠 것이다.’라는 생각을 한 그 당시로서는 입증이 안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과학자가 나타나서 관측을 하였습니다. 태양 옆에 별이 있는 것입니다. 그 별 빛이 오면서 휘기 때문에 틀림없이 빛이 휠 것이라고 아인슈타인이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보는 이 위치에 별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빛나는 태양 옆에 있는 별인데 그것을 어떻게 보냐는 것입니다. 밤에는 태양이 없어지니까 그 위치가 확인이 안 됩니다. 그 때 한 사람이 머리가 팍 하고 터지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계기일식’때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계기일식 때 관측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진짜 눈에 보이는 별과 실제로 그 별이 있는 위치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이 발견이 되고 휘어졌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고 유럽을 다 뒤집어 놓을 정도로 저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때까지의 확신을 깬 것입니다. 뉴턴은 뭐냐 하면, 거기에서 뉴턴은 끝났습니다. 뉴턴주의로는 설명이 안 되었습니다. 뉴턴주의의 법칙이 여기에서 우주 공간을 떠돌아도 된다고 하는 것을 최초의 회의를 품었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최초가 아니라 많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927년에 솔베이 학회에서 양자역학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닐스보어와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와 슈레딩거와 파동이론 주장한 사람과 편을 먹고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참패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닐스보어는 자기 직관으로 이 양자의 세계는 원자 이하의 세계에서 통하는 법칙은 여기에서 통하는 법칙과 다를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 사람은 당연히 이 거시세계 우주에서 통하는 법칙이 뉴턴법칙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였으면 당연히 밑으로 내려가도 그럴 수 있다고 전향적으로 생각하였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 안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고전적인 생각을 그대로 고수하였습니다. 결국 참패를 하고 완전히 양자역학 세계에서는 아인슈타인과 슈레딩거의 이름들이 폐기되고 지금까지는 하이젠베르크와 닐스보어의 이론에 의해서 현대 양자역학이 다 세워지고 문명의 폭발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즘에 와서 다시 새롭게 초끈이론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닐스보어의 이론으로 입증할 수 없는 상당히 많은 부분들을 다시 아인슈타인에게로 돌아가서 이 문제를 파동이론이라든지, 초끈이론이라든지, 이것을 끈 이론을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한다고 하는 연구가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가운데 이루어지는 논의에 대한 것은 워낙 전문적인 것이라 사실 나도 파악이 안 됩니다. 어쨌든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까 질문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해석하는 사람과 사이에 연관관계가 있으니까, 전제 없이 무엇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닐스보어도 실험을 통해 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주의하고 있다가 원리를 발견하면서 ‘혹시 이게 아닐까?’하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모든 학문은 학문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주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토마스 쿤과 칼 포퍼에 대해 모두 이야기 했는데 ‘저 이야기 모두 뻥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여기 올 수 없지 않습니까? 믿음을 토대로 우리 인간은 상상과 활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왜 신학만 그것이 안 된다고 이야기 하느냐.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전제라고 하는 것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명백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진리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인간이 타락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교회.” 이러한 것들에 대한 기본적인 진리들을 아멘으로 수납한 것이 얼개가 되어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제 없이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성서해석자들이 성서를 통해서 많은 해석들을 해 냅니다. 이것들은 뭐냐 하면 쓴 물과 단 물을 함께 쏟아 냅니다. 우리는 지혜롭게 그 사람들의 그러한 노력들을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그 속에서 그들이 발견하는 많은 성경적인 진리를 예전에 교리적인 그늘 아래 있을 때에는 관심 밖에 있었던 그러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였을 것 아닙니까?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이 사람이 배열한 것과는 다른 배열로 우리들이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쓴 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신학적으로 기본적인 토대가 안 되어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석의 결과와 기독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지하던 신앙과 대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러한 싱크로닉 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말하자면 성서학을 보호하는 것처럼 이야기 되어 집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두 개가 이제 지혜롭게 성경을 통해서 교리를 세우고,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다음에 개별적인 성경에서 나오는 진리를 가지고 전체성은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온전해져 가고 그 다음에 성경에 나오는 개별적인 해석의 결과들은 전체성의 통제,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여기에서 이렇게 해석하면 저 교리와 모순되는 것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서 눈여겨봐야 합니다.
최근에 김세윤 교수가 책을 한 권 썼는데 견인의 교리를 상당히 양보한 것 같은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읽어보지는 않았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경우도 결국 뭐냐 하면 결국 견인의 문제는 전에 이야기 한 시공간의 개념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결국 양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사실 어떤 논리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을 우리들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경의 이러한 것들을 그대로 이야기 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견인의 가변성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 이제 더 높은 차원에서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말하자면 일관성을 가지고 이야기 하려면 하나님을 그러한 식으로 묘사하면 안 된다. 그것을 충분히 설득시킨 다음에 어떻게 조화를 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푼 그 결과가 개혁신학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을 한 사람들은 아래의 고민이 너무 없고 비개혁신학을 한 사람들은 위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견인이라는 것이 결국 접붙여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끝까지 붙드신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실질적으로 안 한다고 하면 이렇게 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되는데 계속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살짝 떨어졌습니다. 그 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떨어져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딱 붙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계속 몇 달에 한번씩 이 짓을 계속 하였는데 어느날 살짝 되었는데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몸입니까? 아닙니까? 살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닐 때는 무엇입니까? 다시 붙었습니다. 다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와서 몸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떤 시공을 초월해서 전체적으로 진리를 진술해 낼 수 있는 그러한 기개 자체가 무너져 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에 대한 일방적인 신뢰, 성경신학에 대한 일방적인 불신, 이러한 것도 안 되고 반대도 안 됩니다. 마스트리히트가 뭘 보여주는가 하면 확고한 사상의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사상의 체계를 성경의 해석의 결과가 항상 맞는가 비춰 보면서, 그들의 문명사로 내려가 보면 그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작은 부분에 있어서 계속 쪼고 깨면서 개혁신학이 발전하였습니다. 개혁신학이 이것이라고 써놓고 어떠한 비판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그러한 태도는 신학적인 태도로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