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의 목회를 회복하자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행 20:21)
녹취자: 김명진
어쩌면 순교의 길을 될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에 사도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여 불러 유언과 같은 교훈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목회한 것을 회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분명하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적인 권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시아에서 섬긴 사역을 회고할 때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하였던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이것이 바로 이 위대한 사도의 아시아에서의 사역의 회고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발언을 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양심의 구김이 없이 목회자로서 헌신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믿음을 외친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예언하시기를 많은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예고합니다.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고난과 핍박, 투옥과 어쩌면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사형이 즐거웠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지 않을 수 없는 내적인 강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를 향하여 붉은 카펫을 깔고 그를 환영하기 위한 수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은 모든 피를 토해도 마지막 그들에게 증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메시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게 대한 믿음을 촉구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21살이 되어서야 회심을 하였지만 저는 저의 눈에 비쳤던 50년 전의 한국교회를 뚜렷이 기억합니다. 그때 저는 서울 변두리에서 작은 개척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교회가 매우 커져서 큰 교회에도 있어보았습니다. 여러 교회를 출석해 보았지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예배에 가든지 목사님의 설교 속에는 회개를 외치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있었습니다.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는 어린 나이에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가마니를 깔고 빽빽이 앉아서 설교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설교가 끝나고 나면 모든 교인들이 눈물로 기도했던 기억은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길게 보면 오십 년 짧게 보면 삼십 년 어간에 조국 교회에서 우리도 알지 못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변화가 바로 회개에 대한 진지한 외침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개혁 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개혁신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성인이 된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ale는 소위 신학적인 회심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회심은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중생한 영혼이 의식 속에서 움직이는 최초의 활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회개의 진지한 외침이 교회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사실상 개혁 신앙의 견지에서 보면 사실상 구원받지 않은 비회심자들이 교회에 굉장히 많이 있고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비회심자의 수가 진실하게 회심한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사인 우리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다. 피를 토하는 열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 앞에서 우리가 회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깊은 몸부림의 외침을 우리가 언제 토해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가 끝났는데 온 교인들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기 위해서 예배를 끝나고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 적이 최근에 우리에게 언제 있었습니까?
위대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어도 이 구원은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새생명의 원리를 심어 놓으셨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서는 끊임없이 죄가 잇고 세상도 죄에 물들고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이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매일 매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진실한 자기죽임 없이는 생명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개혁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어떤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어도 정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정말 희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깊이 회개하고 이런 비참한 죄에 있는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고 나도 쓸모없다고 여기는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버려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우리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믿음의 고백이 우리에게 정말 일상화 되고 있냐고 물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조국교회의 복음이 풍성하던 때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그런 설교를 들었습니다. 정말 목사님들이 교육도 훌륭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도 뒷줄에 앉아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저 목사님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이해는 못하지만 얼굴이 시뻘개져서 주먹을 쥐고 외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는 저 목사님 속에서 나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그에게는 있다는 것이 그 어린 나이에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각기 다양한 회심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젠가 우리가 주님을 처음 깊이 만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인생관을 바꾸어 놓았고 우리의 가치관을 변화시켰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지금처럼 신학교육을 받고 정돈된 생각을 갖고 있지는 못했어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 끊임없이 자기를 죽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복종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려고 하는 착한 성도들의 가슴 속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천국과 지옥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고집대로 살다가 죽을 이 인생이 그렇게 허무한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이 세상을 열애하고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일을 위해서 몸부림 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이 느껴지고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렇게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이 비참한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14살 2개월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기어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또렷이 기억합니다. 우리 나이로 15살, 정확하게 14살 2개월 되던 어느 주일 날, 교회를 가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교회를 가다가 논둑위에 엎어져서 이 14살 소년이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돈이 없고 가난했지만 그것 때문에 울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한없이 통곡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은 정말 살아계신가’ 한참을 혼자 통곡하고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일어섰을 때 그 어린아이는 결심했습니다. ‘신은 없다. 있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6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C. K. 채스터 턴이라는 영국의 사상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나님만 답하실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그때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달았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비참함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습니다.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이 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밖기까지 사랑하셨을까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준 것은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누군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렇게 구원을 얻은 이후 한걸음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만 위해서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고 하늘의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비교적 흔들리지 않고 그 하나님이 부르신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었던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매일매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섬기시던 그 손에 못 박히고 우리를 사랑하던 그 분이 발에 못 박혀 죽으시던 그 때의 그 광경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입었는지를 매일매일 깨달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예수를 전파하다가 죽음의 길까지 갈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압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기 전 두 가지 신념에 사로잡혔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는 심리적인 신념이었는데 유대인 이외의 모든 이방인들은 쓰레기라고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인 신념이었는데 그것은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부활했습니다. 부활했다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나무에 매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부활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커다란 혼란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했던 사람이라면 다시 살리실리가 없고 살리실 사람이면 저주 하셨을리가 없는데 저주 당하여 못 박힌 것도 사실이었고 하나님이 살려내셔서 부활하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깨닫게 된 것이 바로 대속의 교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같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을 위해 대신 고난 받으신 것임을 십자가에서 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신학적인 충격이 그의 어두운 지성을 찢으며 찬란한 빛같이 내리쬐었습니다. 그리고 눈의 비늘이 벗겨지면서 이 세계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기가 쓰레기처럼 생각했던 이 수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그분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도저히 자신이 억제할 수 없는 강한 사랑이 불붙는 것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해야 한다는 불붙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불신자에게만 회개를 전하고 불신자에게만 믿음을 전했습니까?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 의미에서는 이 회개와 믿음이 구원에 이를 때에 그 첫 번째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끊임없이 믿음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처음 회심의 경험이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앙의 위대한 힘은 구원론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확고한 기독교 신앙의 기초로 놓은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아주 분명하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고 신학적인 큰 충격 속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놓는 대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몬타누스주의자로 최후를 마치기는 했지만 후대의 신학자들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위대한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 자신의 태어난 목적이 매일매일 회개하기 위해서라고 못 박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초석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이후에 최대의 신학자이고 서양사상의 바다로 나아가는 문을 연 위대한 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과정을 거쳐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회개를 하였고 고백록속에서 그는 말하기를 “드디어 나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의 제사가 올려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강물처럼 흘렀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진실한 참회와 회개, 이러한 강조들이 교회에서 사라지면서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의 과정을 거치며 중세로 접어들었고 이러한 아주 중요한 회심의 교리들이 잊혀져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어두운 칠흑 같은 밤을 영적으로 지나고 있을 때 종교개혁의 위대한 횃불을 높이 들었던 마르틴 루터가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개신교 신앙을 우리에게 물려주게 되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자력으로 구원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벗은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오르며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스스로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고 수많은 고행과 금식 속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결국은 에르푸르트 수도원을 떠나 비텐베르그로 옮겨오게 되었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묵상하다가 복음에 의한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혼의 어두움이 지나고 찬란한 복음의 빛이 비추며 그는 천국의 희열을 맛보았습니다. 바로 그 경험 속에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년 동안 계속되어 오던 이 영광의 신학을 버리고 십자가의 신학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의 위대한 종교개혁가 틴데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분명한 회심을 교회에서 경험했습니다.
우리에게 이 개혁신학을 물려 준 위대한 선생인 요한 칼빈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로마 카톨릭에 반항하는 개신교도들을 무시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 있을 때에 아주 비밀스러운 회심을 경험하고 복음의 영광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완벽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개신교 신앙으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신자의 모든 일생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생이고 그것은 결국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평생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천구의 영광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기독교 강요에서 못 박았습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정통주의의 유산을 물려주었던 영국의 청교도 존 오웬도 그는 학생시절 위대한 설교자 캘러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그 교회에 찾아갔다가 그 목사님은 출타하고 이름 없는 설교자가 올라와서 하는 설교를 들으며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꾸짖는 설교 속에서 깊은 회심을 경험하고 우리가 아는 위대한 청교도, 그리고 개혁파정통주의 신학자가 되어서 그 아름다운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뒤를 잇는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 길을 걸었고 18세기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알미니안주의자였으나 어느 순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중보자의 위대한 영광을 경험하고 난 다음 칼빈주의자로 돌이켜 섰고 그는 그 아름다운 숲속에서 오랫동안 눈물을 쏟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영광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평양신학교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서 우리 조상들이 받은 신학 교육의 수준은 지금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뚜렷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신학교를 졸업했던 우리의 선배들 가운데 회심이 모호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 있습니까? 그랬기 때문에 그들이 피죽을 먹으면서도 목회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이방인 선교에 힘썼고, 제주도에 가서도 교회를 세웠고, 많은 사람들의 도전과 고난 속에서도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인 우리가 다른 이유 말고, 교회가 힘들어서, 장로들이 괴롭게 해서, 그리고 교회에 돈이 없어서, 정치적인 모함 때문에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 무엇 때문에, 그분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 왜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그 욕을 당하셨을까? 그것 때문에 목사인 우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본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는 오늘날 교회의 도덕적인 문제들을 이야기 하고, 또 사회에서 우리 교회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염려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묻고 싶은 것이 그런 질문도 좋지만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교회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더 두려워하는지 세상의 이목을 더 신경쓰는지 묻고 싶습니다. 세상이 썩고 교회가 건강하지 않다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건강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교회가 그렇게 문제가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순수한 신앙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보편적인 신앙이 된 따가 교회사 속에서 얼마나 됩니까? 언제나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 참과 거짓이 섞여 있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요 장로들인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신앙의 참된 본질을 외치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결코 크고, 힘 있고, 권세가 있고, 많이 모이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가치이지 예루살렘의 가치는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방법이라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지 말고 중국이나 로마를 선택하셨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두 줄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그것으로 충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설교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날 찰스 스펄젼이 서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남편의 서재를 보니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인이 물었습니다. “여보, 무슨 일이 있으세요?” “어, 무슨 일이 있어.” 눈물 젖은 눈으로 스펄젼이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은 참 이상한 아침이야.” “아침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데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아. 그렇게 메마른 나의 영혼을 생각하니까 한없이 슬퍼서 울고 있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아시아에서 당한 그 모든 고난을 회고했습니다. 위대한 사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짓밟히고, 핍박 받고, 가슴 아프고 눈물 흘리고, 비굴할 정도로 겸손하고, 그렇게 만물의 찌끼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과 환란으로도 끌 수 없는 사도의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었던 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을 외치는 것 이었습니다 그 외침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에게 미운 물건이 되었고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제자인 멜란히톤의 설교를 듣고 나서 충고했습니다. “당신은 설교를 할 때 회중이 당신의 설교를 듣고 화가 나든지 당신 자신이 스스로의 설교를 듣고 자신에게 화가 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라.”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우리가 뿌리지만 그것을 사람의 마음속에 던져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윌리엄 스틸이라고 하는 영국의 경건한 목회자는 우리 목회자가 빠지기 쉬운 오류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람을 세우고 우리가 교회를 세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는 동안에 그 사람 안에, 교회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맞습니다. 우리가 좀 부족해도 성령께서 이렇게 내가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는 설교에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하십니다. 내가 듣고는 내 설교가 창피해서 얼른 꺼버리는데 그것을 듣고 저 뒤에서 눈물을 흘리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열매는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소명, 이 참된 십자가의 회개와 그리스도예수의 부활의 능력 앞에서 그분에게 자신의 인생을 던지는 믿음, 이것을 외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외침이 진실하고 참되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열매 맺게끔 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주 어린 아이가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자기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를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래, 네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니?” “엄마, 우리 목사님이 강단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설교할 때는 내가 아무것도 믿어지지 않았어. 그런데 선생님이 나에게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나는 모든 것이 믿어졌어.”
오늘날 과연 우리는 교회에 와 있는 많은 사람들을 정말 회개하고 구원을 얻어야 할 사람으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회개하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인간들이라고 보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설교자 로이드 존스가 옥스퍼드 채플에서 설교하고 내려왔을 때 그 학교 총장님 사모님이 목사님의 손을 꼭 잡으며 노인이신 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여기에 와서 긴 세월 설교를 들었지만 모인 우리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설교한 유일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서 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부목사님 한 분이 자기의 교회가 요즘 얼마나 교인들이 모이고 있는지를 자랑했습니다. 한참 뜨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저는 하나라도 배우면 좋으니까 하나둘씩 질문을 했습니다. 궁금한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800명 정도 되는 장년 교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개혁 신학을 공부했을테니 회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지요?” “네” “그러면 당신이 돌보고 있는 그 800명 중에서 목회자의 양심에 손을 얹고 오늘 죽으면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20%〜30%쯤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그렇게 자랑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목양하고 있는 교인들 가운데 70〜80%가 사실상 불신자입니다. 많이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이 사도바울이 유언처럼 남기고 있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음미해야 합니다. 그는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증거 되고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환영받고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목회자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어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어도 그에게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너희들의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밖에는 믿을 분이 없다는 것을 외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한 번의 설교를 목숨과 바꾸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장로님 여러분, 교인들은 지도자를 본받습니다. 지도자가 의도를 하든, 의도하지 않든 상관없이 본받습니다. 만약 목회자가 설교 시간에, 기도시간에, 심방할 때, 혹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때 그리스도 예수 앞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장로가 대표기도 시간에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대신 기도를 하다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에 목이 메어서 몇 초 동안 기도가 끊어지고 울먹인다면 시시한 설교보다도 교인들의 가슴에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가 더 깊이 충격으로 와 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저를 포함해서 모든 동역자들에게 목회의 본질로 돌아가자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불붙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나 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이 있었음에도 이 목회의 길에 들어섰고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장로의 직에 임직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 예수의 십자가 사명에 붙들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잊지 맙시다. 바로 우리가 그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았고, 그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그 십자가 때문에 고난도 이기고 역경도 이기면서 이제껏 살아왔고, 그 십자가 때문에 사명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온 조국 교회의 구석구석에 언제 어느 때 방문하든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에 눈물겨워서 피 묻은 복음을 외치는 그 설교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위해 기도합시다. 그리고 리처드 벡스터가 고백했던 바와 같이 사람들이 회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대신 그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목회자와 장로들의 흐느낌이 있는 교회, 설교 시간에 회심치 못한 자들의 가슴을 때리는 경건한 비명소리가 있는 그런 교회는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불꽃처럼 보호할 것이고 그 불꽃이 횃불처럼 타오르고 마지막에는 불기둥이 되어 길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 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회심의 은혜가 조국 교회에 넘칠 수 있도록 우리 같이 한 번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