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역자수련회 아침설교2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녹취자: 서재임
그리스도는 원래 존귀하신 분인데 어떤 의미에서 사도바울이 그리스도가 또 존귀하게 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리스도는 원래 존귀하신 분이시지만, 그 존귀하신 분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그에 합당하게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또 무슨 목회에 꿈을 가지고 힘쓰고 애쓰고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거짓이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도 사실은 가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목회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이 우리 안에서 무르익어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 사역을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에게 예수님이 존귀하게 여겨지고,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기쁘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내안에서 존귀해지는 비밀들이 더욱 우리 안에서 풍성해져야지 그렇지가 않고 단지 우리들이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말 뿐이라면,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가장 엄격한 규례를 따르는 베냐민의 지파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하신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사실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회 사역이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억지로 애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사는 것 같은 그런 사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 사역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가장 커다란 자격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많이 가르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기뻐하는 생활 속에는 그가 의도하지 않아도 가르침이 항상 넘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거품을 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해도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 가르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 자체가 기독교의 교훈이고 가르침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날마다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기독교 사역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개인적인 경건 생활에 대해서 많이 호소하는 이유도 바로 우리가 그런 개인적인 경건이 없이는 누구도 예수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다면 우리의 가르치고 사역하는 모든 것이 잘하면 위선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마음에 없이 하는 직업적인 생활이 되고 말 것입니다. 최근에도 어느 목회자와 말씀을 나누었는데, 자신들의 교회에 있는 사역자들이 어떤 위기 상황이 오니까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인지 다 보여주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사역을 하다 보니까 신앙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목회자들이 신앙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신앙은 그 목회사역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 오늘 뉴스에 잠깐 보니까 어떤 불자를 다비식을, 화장을 했는데 사리가 500개가 나왔습니다. 불교계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이 스님이 아니라 평신도입니다. 어느 스님의 어머니인데, 불심이 독실해서 늘 절에 살면서 허드렛일을 하고 그리고 스님들의 가르침을 쫒아서 스님들이 하는 것처럼 열심히 따라서 참선을 하고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불경을, 11만자가 되는 불경을 1배 1자를 기록을 해서 11만자를 썼다고 합니다. 사리라고 하는 것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기독교 목사들도 불에 태워 버리면 평소에 기도도 안하고 농땡이 친 사람은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그런데 고정된 자세로 성경을 연구하거나 기도를 많이 한사람은 태우면 똑같이 사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위에 상관없이 그 할머니가 그렇게 신실한 불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더니, 자존심 상하게 스님을 태워도 별로 안 나오던 사리가 평신도를 태웠는데 500개가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의 직위라든지 혹은 우리가 맡은 일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서 편의롭게 우리에게 주신 것이지 그것 자체가 우리의 영혼에 어떤 보증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너희에게 있는 싸움이 나에게도 있다.” 말하자면, “나는 대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너희들은 내 편지를 받고 겨우 신앙생활을 하는 어린 신자들이지만, 너희에게 있는 싸움이 나에게도 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너희나 나나 다름이 없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마음에서 존귀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물을 가득 부으면 흘러넘치듯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충만하게 되면 굳이 우리가 가르치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가 거기 있는 것 자체, 혹은 숨 쉬는 것 자체, 말 한마디와 웃음 하나, 혹은 눈물 한 방울도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맨 처음 목회 사역을 시작하던 그 때에 비해서 지금 우리 마음에 주님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책이 나와서 한 5일 동안에 한번을 읽었습니다. 꼼꼼히 끝까지 다 읽었는데, 그러면서 맨 처음에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은 때가 떠올랐습니다. 참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기도문의 이런 유장한 의미에 대해서 사실은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고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하고 나니까 당시의 나의 기도가 정확하게 주기도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고통, 나라가 임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괴로움,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와 좌절, 그리고 떡 한 덩어리 물 한 방울도 주님이 주셔야만 내가 먹을 수 있다는 의존의 마음, 그리고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탄원, 그리고 나를 한순간도 주님이 붙들어 주지 않으면 내가 시험에 들 수밖에 없고 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의존, 그리고 정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만 있다고 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망이 정말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똑같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성령의 체험이 복음적인 체험인가, 혹은 어느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부흥이 진정한 성경적인 부흥인가 라고 하는 것은 그 회중 속에서 그 개인 속에서 주기도문이 얼마나 리바이벌 되는 가를 보면 진위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많이 교육해도 교육으로는 그 주기도문이 사람들 마음에 리바이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자체가 말하자면, 코드가 다르게 먹여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 리바이벌된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쳐주실 때에는 예수님이 그 기도를 가르쳐주신 공동체가 어떤 이상과 목표를 가지고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어떤 삶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그 그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정말 항구적이고 영구한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460페이지를 썼지만 욕심 같아서는 정말 너무 간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훨씬 더 깊고 심오한 의미들을 드러내는 작업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여러분 마음속에 날이 갈수록 존귀하게 되는 사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