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구역장 수련회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눅15:4)
녹취자: 김경애
요즘에는 만약에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안 찾아다닌다고 그렇게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보면 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99마리를 우리에다 안전하게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간다는 것인데 여러 가지로 의문이 납니다. 99마리 양의 안전에도 문제가 있고 그 다음에 또 찾다가 강도를 만난다든지 계곡을 잘못 걸어가다가 골절이라도 당하면 양한마리 값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치료비가 많이 들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시대 때에 양을 기르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양을 기르는데 가난해서 집집마다 양을 많이 못 기릅니다. 그러면 양 20~30마리밖에 안되는데 거기다가 혼자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가지고는 밥벌이가 안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일을 하면서 양을 길러야하니까 양은 계속 돌봐야하는데 그렇게 안 되니까 그렇게 조금씩만 양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양을 다 합칩니다. 양에다가 표시를 해놓고 양을 모읍니다. 공동으로 돈을 모아서 삯군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삯군 목자입니다. 그 사람은 이집 양 저 집 양 모아서 한 이백 마리 되면 혼자 기를 정도가 되는데 그놈들을 몰고 다니면서 꼴도 주고 먹고 싶다고 그러면 물도 주고 그렇게 해서 저녁이 되면 우리에 집어넣고 이렇게 하면 새끼도 낳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각자 나누어가지고 거기서 나오는 이익으로 자기 몫에서 삯군에게 줄 월급으로 자기의 양의 수만큼 내놓으면 그것을 모아서 삯군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삯군입니다. 보통 때는 삯군이 문제가 안 됩니다. 여기서 풀을 뜯어먹다가 ‘가자!’ 그러면서 우리에 집어넣고 그런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보통 때는 삯군이라고 그래서 처음부터 아주 나쁜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선한 목자가 아닌 사람은 다 삯군입니다. 삯군이 뭐 처음부터 아주 종자가 다른 그런 삯군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가끔 풀이 많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양떼를 몰고 이동을 해야 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에 가보면 알지만 이동을 해야 합니다. 이동을 하는데 때로는 아주 굉장히 멀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목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게 갔는데 때로는 노숙을 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밤에 맹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삯군입니다. 이 양이 자기 양이 아니라 이 양 때문에 월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사람은 양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양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별문제가 안 일어나면 자기 할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월급이 나오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왜? 다른 곳에 취직하면 되는 것이지 여기에서 그런다고 해서 보험을 들어놓은 것도 아닌데 맹수하고 싸우다가 물려죽든지 다리라도 하나 잘려서 병신이 되면 무슨 보람이 있겠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들이 자기의 양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개를 길러보셨습니까? 개나 고양이나 이렇게 반려동물을 길러본 사람들은 다릅니다. 양이 반려동물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동물들을 길러본 사람들은 다릅니다. 단순히 비록 그 동물을 길러서 고기를 팔아서 수입을 얻는 사람이라도 그것은 관계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우리가 개를 기를 때 보면 나는 한 번도 못 받는데 우리 할머니가 강아지가 새끼를 날 때면 강아지를 받으러 마루 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면 강아지가 한 마리씩 나올 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닐봉지 같은 것에 폭 싸여서 나옵니다. 못 보셨을 것입니다. 비닐봉지 같은 것에 싸여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하나를 받습니다. 그러면 그 주인이 그 개가 그냥 단순한 보신탕용 개라든지 아니면 한 마리의 새끼를 시장에 내놓고 500원에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의 애정관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양을 지킬 때에 사자를 물매로 던져서 이기고 양을 물어 가면 쫒아가서 사자의 입을 벌리고 양을 뺏어오고 이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양에 대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게 선한 목자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이제 구역장을 하는데 그만두고 싶을 때가 없냐고 그럴 때 아까 그 구역장은 너무 극단적입니다. 매일 그만두고 싶다니 말입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매일 그만두고 싶다니……. 나도 구역장도 해보고 목사도 하지만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가끔 그렇지 그래도 매일 그렇지는 않은데 아까 그분은 매일 그렇다고 그래서 좀 불안합니다. 걱정입니다. 구역원들도 참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양에 비유했지만 사실 우리 교인들은 양만 못합니다. 양은 멍합니다. 그래서 머리가 없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아직도 양 같은 놈이라고 팔레스타인에서 욕을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멍하지 않습니다. 똑똑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하면 양은 이렇게 모아놓으면 ‘따라오너라.’ 그러면 따라옵니다. 그런데 양보다 머리가 좋은 짐승들은 뭐라고 이야기는 않겠지만 그런 것들은 이렇게 모아놓고 ‘이리 오너라.’ 그러면 절대 따라오지 않습니다. 각기 제 길로 갑니다. 우리 지체들의 마음속에 그런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서 독립하려는 죄의 본질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설교했지만 유전자가 뼛속 깊이 배어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성화로 완성시키시기 전까지는 이 종자가 아주 뼛속깊이 배어있어서 결국은 기본적인 그 종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구역장으로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구역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기도도 많이 합니다. 그것도 구역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리고 얼굴도 잘생겼습니다. 손해 볼 것 없습니다. 그리고 또 부자입니다. 그리고 늘 아까 이야기했듯이 몇 년 전에 구역장이 밥을 한번 사주었는데 그것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6년 전 이야기입니다. 돈도 많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서 구역장을 에워쌀 것 같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목양이 영적 사역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을 해야하느냐하면 구역을 하는데 식구들이 잘 모여서 내가 잘 가르치면 ‘아멘! 아멘!’ 하면서 정말 잘 받아들이고 말씀을 잘 배우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것은 매우 특별한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구역식구들이 서서히 마음들이 찢어지기 시작하면서 아까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눈이 이렇게 올라가서 째려보고 있고 그 다음에는 심지어는 교역자한테 가서 구역장을 바꿔달라고 그러고 그럴 때 ‘아 원래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로구나!’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평안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있을 때 이것이 너무 특별한 때이지 일상적인 때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위로가 됩니다. ‘아! 그런 것이로구나!’
자, 그러면 이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사역에 어떤 한계가 있느냐하면 항상 우리가 갈수 있는데 까지만 뻗어나가고 그 다음에 그 이상은 더 이상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흔히 우리 구역장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할 때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우리의 한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던지고 싶은 화두는 그 한계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만약에 교회에서 우리는 구역장들의 Quality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이게 함부로 구역장을 막 늘리지 못합니다. 구역장이 되려면 열린 교회에 와서 최소한 3년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익습니다. 익어서 이제 딱 따서 이렇게 씹어보면 구역장 맛이 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3년, 그리고 나와서 설교를 많이 듣고 변화를 정말 많이 받아서 아주 신속하게 탐구정신이 있어서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해가면서 활동적으로 교구 속에 스며들어서 열심히 배우는 사람인 경우에는 2년 정도 걸립니다. 그 안에는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교회가 갑자기 커지면서 구역장 수가 늘어나니까 이제 뭐라 그럴까요? 구역장이 옛날과 같은 그런 Quality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갑갑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막 쪼개고 싶습니다. 아마 다섯 명 미만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데 구역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구역장에게 사람들을 많이 맡기게 됩니다. 청년부의 어떤 구역은 한 구역에 28명이나 됩니다. 물론 전도도 열심히 했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고 그런 대부분의 경우에 1월 달에 올라가서 구역장을 맡아서 15명이 맡겨지면 서너 사람 안 나와도 별로 가슴을 아려할 것 없습니다. 아직도 11명이 남아있으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한 1/3이 빠지고 나니까 아주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우리끼리 모이는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린 교회의 문제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 안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보십시다. 만약에 우리에게 15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전구역장이 너무너무 은혜를 많이 끼치고 성령님이 이들을 만지고가서 진짜 15명이 쪼르륵 앉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 구역장에게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데 이 구역장이 내용도 탄탄하게 있는 사람입니다. 아까 여기서 지식 가지고는 안 된다고 했지만 지식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구역장이 항상 가르칠 때는 빙산의 원리를 이해해야합니다. 열 개가 있으면 하나만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9개는 물밑에 담가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역 원들이 가끔 툭툭 찔러봅니다. 그때 이 밑에 얼음이 9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몇 번 툭툭 쳐본 다음에 그 다음에는 안 그럽니다. ‘중생준비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물어볼 때에 ‘아 Preparation을 말씀하시는군요?’ ‘그것은 목사님이 각주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쓰셨지만 이것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논쟁이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이것은 20세기 개혁신학계에서도 상당한 토론이 되었고 청교도들은 이 Preparation 에 절대적으로 따랐지만 그러나 사려 깊은 조나단 에드워즈는 첫 번째 대각성 운동을 경험하면서 이것이 케이스별로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청교도의 견해를 따르던 자기의 입장을 유보하면서 이것들이 획일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Preparation의 원리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런 것을 모든 사람에게 규칙적으로 적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견해입니다. 담임목사님의 견해도 사실은 청교도의 견해를 따르면서도 이것을 획일화할 수 없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견해에 매우 가까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쭉 설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한번만 하는 됩니다. 그러면 막 적느라고 바쁩니다. 그러니까 무시당할 정도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것입니다. 10명이나 15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목회라는 것을 하려면 이것이 스며들어야합니다. 어차피 15명이 있는데 15명이 모두 성령 충만하고 그냥 구역예배에 모이기만 하면 하소연하고 싶은 그런 구역원만 모이는 구역이 과연 존재하겠습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섞여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15명이 있으면 한번 나누어보십시오. 인간적으로도 매우 친하고 신학적으로도 서로 소통하고 이야기가 되고 구역장을 좋아하는 사람이 네댓 명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적으로는 친하지만 말씀의 교제는 좀 없는 사람 등등 나눠지고 그리고 항상 맨 바깥 껍질 속에는 누가 있느냐하면 난공불락으로 스며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듯이 접촉 자체를 아예 싫어하는 사람, 장기결석자나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전화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딱 끊어버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두 번 이렇게 시도를 하는데 이 사람이 완강하게 거절하면 거기서 완전히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 구역이 섞일 때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지만 사실은 기도를 해도 안 돌아옵니다. 제가 사실 교사리바이벌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심방을 가지전까지는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에 이제 이런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내가 이야기하려고합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연다고 그러는데 사실 구역예배에 나와서 팔자를 그리고서라도 앉아있는 사람은 그래도 마음이 꽤 많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요즘에 의사소통의 수단이 무지 많습니다. e-mail, face book, 자기 미니홈피 등등 별의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런 소통수단을 가지고 즉각적으로 소통수단을 하는데 친밀성을 아주 높이는데 이바지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예를 들자면 직원이나 교역자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목사님! 정말 죄송해요! 이런 것은 잘못했어요. 제가 정말 앞으로는 잘하겠습니다.’ 이런 문자가 왔는데 그러면 제일 좋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즉시 문자를 보내서 ‘괜찮습니다.’ ‘괜찮다. 네가 원래 잘했는데 잠깐 실수한 것인데 뭐! 괜찮다. 나는 마음상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즉시 웃음 표를 이렇게 해서 보내주면 그럼 저쪽에서 웃음 표를 해서 눈물 두 방울을 찍어서 보냅니다. 그게 빠르죠. 그렇게 해서 교역자나 직원이 문자를 보냈는데 일주일 있다가 두루마리로 붓글씨로 써서 편지가 왔다면 이것은 소통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절대 마음을 안 여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다 이런 수단들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이메일도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쓰던 방법이에요. 하도 오래된 방법이라 내가 지금은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어떻게 편지를 쓰느냐하면 있으면 보여주겠는데 옛날에는 우편엽서가 있었어요. 그때 나는 예쁜 것을 살줄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고등부를 할 때인데 요만한 엽서를 가방에 항상 20장씩 넣어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엽서 요만한 것 한 장에다가 원고지 50장 정도를 쓰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느냐하면 플러스펜 아주 가늘게 써지는 것 가지고 두 단으로 나누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엄청나게 많은 양이 나옵니다. 원고지 50매까지는 모르겠는데 옛날에 김대중 대통령은 그것 하나를 가지고 원고지 150매까지 썼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깨알같이 쓰는 것입니다. 받아보면 거무스름한 편지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글씨입니다. 그때 고등부에 안 나오던 아이들 열댓 명에게 그런 편지를 보냈는데 세장을 받고도 교회에 안 나오는 애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받고 안 나오는 애들은 있었는데 그런데 세 번을 받고도 안 나오는 애들은 없었습니다. 그게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것을 언제 쓰느냐하면 수련회 답사를 갔는데 기차가 안 오더라. 그러면 이제 대합실에 앉아서 혹은 찻집에 앉아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에는 항상 그것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쓰는데 어떤 효과가 있느냐하면 우리들은 영혼들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많은 가식과 위선에 둘러싸여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구역장으로서 사람들을 숫자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나와 주면 귀엽고 안 나오면 이 속에서 받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역이 바뀌고 나면 안면 몰수하는 구역장들은 바로 그래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구역장에게 살갑게 했었다면 구역장이 왜 구역이 바뀌었다고 안면몰수를 하겠습니까. 그것은 안면 몰수한 구역장에게만 책임을 묻지 말고 구역장을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구역이 바뀐 다음에 안면몰수를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습니다.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선물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잠언에 나옵니다. 그래서 주는 것을 싫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쭉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세 번을 써서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는 안 나와도 최소한 내가 전화를 하면 만나는 줍니다. 왜냐하면 그 편지를 쓰면서 처음에 예를 들면 두 줄, 세 줄을 쓰는 것은 가식으로 쓸 수 있지만 만약에 원고지 30매를 쓴다고 그럴 때는 이 진심이 따라주어서 이 속에서 솟아나지 않으면 그 정도 양의 길이를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편지를 간절히 쓰는 가운데 있어서 자기도 평소에 만나서 이야기할 때는 개방하지 못했던 마음이 터지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목양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와서 오는 그날 열린 교회에서 회심을 하고 예수님을 만나면 너무 좋습니다. 그러면 구역장들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랑받고 싶은 것입니다. 정말 사랑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목회가 참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게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말씀에 굳게 서지 못해도 구역장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많이 받아도 ‘저 사람은 말씀을 많이 받았으니까 혼자 잘 서겠지! 나는 약한 지체나 돌볼 거야 너는 스스로 서!’ 그럽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우르르 무너지면서 정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하면 마음을 여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다음에 무엇이 필요 하느냐 하면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교회를 안 나오고 신앙생활을 안 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할 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 할 말이 많은 것은 은혜를 많이 받은 지체들이 막 침을 튀기면서 은혜를 이야기하는 그곳에서는 하기 싫은 말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은혜를 받아도 할 말이 많고 못 만나고 소외되어도 할 말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할 말 많은 것이 성격이 다릅니다. 그래서 섞여놓으면 한사람이 많이 말을 하면 한쪽에서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역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마음이 열리도록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날 교회에 안 나오는 아이들을 심방했을 때 절대 물어보지 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주일날 왜 안 나와?’ 그러면 만약에 커다랗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고 왜 안 나오느냐고 그것을 물어보면 싫은 것이죠. 교회 나오기 싫어서 안 나오는데 무엇을 물어봅니까? 답이 하나인데 말입니다. 쭉 이야기하다가 자기 스스로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냐하면 만나러 갈 때 들어주러가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구역장들 중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특히 열린 교회 구역장들은 청산유수입니다.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그런 구역이 있을 것입니다. 구역원들에게는 문제만 읽으라고 시키고 자기가 다 강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구역장을 제가 제일 힘들어하는 구역장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말이 라틴어로 끌어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까 여성교구 발표자는 너무 잘하셨습니다. 절대 변명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그러면 안 됩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야기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고 ‘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요?’ 그러면 계속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나서 처음에는 말을 안 해도 시원하게 쏟아놓고 난 다음에는 항상 하는 말이 ‘참 좋은 구역장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말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잘 들어주어서입니다. 그러니까 성급하게 가르치려고 그러지 말고 그냥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이 열립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열려야지만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마음을 연 사람들을 향해서는 집요함이 있어야합니다. 집요함입니다. 그 집요함이 무엇으로 나타나느냐하면 찾기, 심방, 이렇게 나타납니다. 찾기는 무엇이냐 하면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은혜가 떨어지거나 구역에 갔는데 다른 사람들만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 숨어버립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전화도 안 받는다고 그랬습니다. 종적을 감춰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심히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숨긴다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를 찾아봐라.’ 라는 뜻입니다. 관심을 끌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왜 또 그런 분이 있습니다. 구역예배를 안 나올 때 꼬박꼬박 구역장에게 보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못나갑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와서 나를 데려가라. 나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오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사정을 해보아라.’ 그런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그러면 구역예배 시간을 좀 옮겨볼까요?’ 이런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찾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사를 갔다든지 숨어버린 사람들을 집요하게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 사람들이 다시 제 발로 교회에 들어왔을 때 교회 문 앞에서 만난 것과 집요하게 찾아서 결국에는 찾아내서 그래서 아르바이트 하는 장소든지 직장 생활하는 곳이든지 이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만났을 때 그 느낌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느냐하면 열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사랑은 모든 창조적 사고의 원동력입니다. 자주 찾아가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빨리 와서 은혜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거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지체를 찾아가는 데는 항상 수많은 제약들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교회를 안 나오는 애들은 가보면 주일날 예배 끝나고 오후에 심방을 가보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교회에 안 나오고 다른데 놀러가든지 어디로 공부를 하러가든지 학원을 가든지 다른 데로 놀러가든지 새서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희생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이 녀석을 만나고야 말리라. 밤 12시가 되더라도 만나고야 말리라.’ 그런 각오를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고 난 다음에는 전도사님들이 계셨으니까 그런 식의 심방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으니까 가서 벨을 눌렀는데 ‘누구세요?’ 그러는데 분명 그 녀석의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초인종을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옆에 있는 교사가 담을 넘었습니다. ‘전도사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면서 담을 넘습니다. 와우 정말 대단합니다. 쓰레기통을 밟고 담을 넘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여니까 얘가 문고리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참, 문고리를 붙들고 있는데 이 자매는 힘도 셉니다. 그 교사는 자매였습니다. 형제는 무슨 이야깃거리도 안 됩니다. 자매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매가 쓰레기통을 밟고 넘었습니다. ‘야, 너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문 열어!’ 그러면서 문을 확 여니까 그 화상이 거기에 그러고 앉아 있었습니다. 잊히지도 않습니다. ‘전도사님 오셨어! 나와 봐!’ 전도사님이 왔다니까 이제 나옵니다. 그러면 걔가 그렇게 문을 두드려도 문도 안 열 정도의 애인데 ‘선생님 왜왔어요? 나가요.’ 그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런데 왜 못합니까? 찾아왔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나와요. 그때는 벌써 기가 푹 꺾였습니다. 선생님이 담을 넘고 문고리까지 확 잡아당겨서 꺼냈기 때문에 더군다나 선생님하고 말해보려고 하는데 ‘전도사님 오셨다!’ 그러니까 저를 굉장히 무서워했습니다. 나는 대걸레 가지고 막 팼습니다. 한번만 그랬습니다. 나왔습니다. 이 학생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혼났구나!’ 생각했는데 그런데 내가 가서 어깨를 이렇게 안아주면서 ‘오늘도 힘들었지?’ 눈물이 핑 도는 것입니다. 모두 신앙생활을 잘하려는 사람은 다 곤고합니다. 다 곤고합니다. 겉으로는 기가 살아서 막 떠들고 교구에 가서는 꺽꺽거리면서 구역장 바꿔달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니 구역장을 바꾸겠습니까? 저를 바꾸는 것이지요. 그래도 곤고한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었지?’ 사내 녀석인데 눈물이 핑 도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입니다. 바람이 쌩 붑니다. 달동네 꼭대기니까 어디 들어갈 때도 없습니다. ‘너 안 나와서 걱정 많이 했다.’ 그리고 마음이 움직일 때쯤 되면 단도직입적으로 딱 말해요. 그러면 끝납니다. ‘네가 그렇게 방황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냐? 돌아와라.’ 그때쯤이면 마음이 이렇게 누그러집니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보안등 아래에서 이제 어느 정도 스며들었다고 생각이 되면 ‘우리 같이 기도하자.’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면 얘가 눈물을 흘리기 전에 내가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싫고 하나님을 떨어져서 살자니 곤고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럴 때 간절히 기도하면 지도 웁니다. 분위기가 그래요. 전도사도 울지 선생님도 울지 울어주어야 박자가 맞을 것 같으니까 울어줍니다. 나는 항상 손수건을 가지고 다닙니다. ‘가라.’ 그리고 가방에서 조그만 책 한권을 꺼내서 주고 선물을 하나 주고 귤이나 초코파이나 뭐든지 하나 주고 그리고 ‘내가 매일은 못하지만 이번 주는 내가 약속하마. 오늘밤부터 토요일까지 너를 위해서 매일 기도할게 너도 기도해라.’ 그러면 그 주에 나옵니다. 틀림없이 나옵니다. 몇 주를 나오다가 안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 나오게 될 때 그때에 말을 하지 않아도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그들을 버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때 그들은 느끼는 것입니다. 목표의식이 흐리니까 불가능하다고 그러고 힘들다고 그러는데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지난번에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갔는데 마사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거기는 천하의 요새입니다. 이렇게 똑바로 90도로 쳐다보아야하는 산꼭대기입니다. 거기는 요즘군대가 와도 공격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결국 점령당합니다. 어떻게 점령당했느냐하면 밑에서 아무리 무슨 화살을 쏘고 군대를 보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90도의 벼랑꼭대기에 성을 쌓고 있는데 거기를 어떻게 점령하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망합니다. 100명이 올라와도 한명이 다 죽일 수 있는 그런 지형입니다. 그럼 어떻게 했느냐하면 놀라지 마십시오. 연합군대가 들통에 모래를 지어다가 삼년동안 모래성을 쌓았습니다. 옆에 있는 마사다 하고 똑같은 높이로 쌓아서 나무 탑을 세운다음에 그것을 쓰러뜨려가지고 다리를 만들어서 건너가서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저것을 어떻게 공격하느냐? 아무리 공격해도 안 되는데’ ‘아이 뭐 어떻게 해! 산 높이만큼 흙을 쌓으면 되지!’ 우리는 그럴 것입니다. ‘에이!’ 싸움에서 이겨야겠다는 필연성이 없는 사람들은 ‘에이!’ 못이기는 것입니다. 목표를 가지면 됩니다. 지으면 된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심방해서 찾아내서 그다음에는 ‘에이!’ 이것을 버려야합니다. 끝까지 간다는 각오를 가져야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건져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하나만 이야기하고 끝내겠습니다. 그 다음에 뭐냐 하면 구역장이 아무리 그런 열심을 바쳐서 영혼들을 끌어내고 그 다음에 뜨겁게 사랑해서 자기에게 묶어졌습니다. 그것이 다라면 그것은 인간조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솔직히 이야기해서 말씀이 없는데 구역장을 열심히 좋아하고 따라다닌다면 그것은 똘마니 아닙니까? 똘마니입니다. 아무개 구역장의 똘마니입니다. 그런 사람을 다른 구역장에게 가서 적응하려면 적응을 못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목자와 양에서 배웠지만 가장 나쁜 목회의 형태입니다. 제가 고등부에서 그렇게 설교하고 말씀으로 먹였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전체가 세 시간 동안 울었습니다.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나하나 악수를 하고 헤어졌는데 애들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전도사님, 선한 싸움 다 싸우다가 예루살렘성에서 만납시다.’ 그것이에요. ‘전도사님 가셔서 어떻게 해요. 우리 따라갈래요.’ 한명도 없습니다. 거기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사람들을 우리에게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묶어주는 그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사람들을 집요하게 심방하고 데려오고 마음을 열고 하는 것들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모두 모아서 자기의 품에 안았으면 이놈들을 먹일 수 있는 젖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영적 성장입니다. 자신이 계속 성장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해야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 성장이냐 하면 그 성장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의 인격과 삶에 있어서의 성장입니다. 그래서 구역장들이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느냐하면 ‘정말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저 사람처럼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그러면 그 성장은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느냐하면 지식의 성장과 은혜의 성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식이 성장이라고 하니까 많은 지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목사님은 공부만 좋아한다고 그럽니다. 그게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공부 많이 못하신 연세 많이 드신 권사님이나 연세 드신 집사님이나 어떻게 열린 교회에서 목양을 받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가장 좋은 공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는 모든 기회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가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왜 지식의 성장이라고 그럴 때 여러분은 두꺼운 책, 연필, 책상, 그리고 열공하는 장면만을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것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 배우는 교리 하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 그리고 이것대로 살았을 때 내 마음에 주는 감동 이것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을 아는 말씀의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느냐 하면 살아서 숨 쉬는 모든 과정이 배움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책을 읽고 오늘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교회처럼 배우고자하는 마음을 먹을 때 이렇게 편리하게 접촉할 수 있는 수많은 정보를 시스템 있게 갖추어놓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순복음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깜짝 놀라고 가셨습니다. 어느 청년이 그러더랍니다. 아이 폰이 개통되었다고 나와서 ‘아이 이 교회는 너무 유별을 떠는구나!’ 그랬답니다. ‘그것을 누가 보겠다고 저렇게까지 돈을 쓰고 하는가?’ 그랬답니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그 아이 폰을 가지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야, 이것 진짜 필요한 것이구나!’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모든 수단을 다해서 말씀을 그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갖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만 뻗으면 그 말씀에 접촉할 수 있는데 그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그 말씀을 먹으면서 성장해줄 수 있는 것까지는 해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절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아까 남성구역에서 발표한 것에 깊이 동의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 7,8년 전까지만 해도 교인들이 설교테이프를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남자 집사님들과 성도들이 모여서 정말 테이프 스터디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랬는데 요즘은 그런 분위기가 매우 적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이 설교테이프가 무료라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에누리 없이 천 원씩 주고 샀는데 15년 전에도 천원이었습니다. 굉장히 비쌌던 것이죠. 이만큼 사가지고 가면 십만 원정도 됩니다. 돈이 아까우니까 계속 듣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터넷 치면 다 나오는데 다운받으면 되는데’ 항상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느 목사님이 자기 설교테이프를 열심히 듣는 교인들보고 어느 날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집에 있는 설교테이프를 다 가져오라고 그러더니 교회마당에서 수만 개를 쌓아놓고 석유를 붓고 불태워버렸답니다. 이것을 믿고 열심히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 불 질러 버렸습니다. 저는 이해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심히 지적으로 공부하고
두 번째는 은혜를 계속 받으면서 성장해야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는 구역장은 뭐가 좀 모자라도 항상 마지막에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조금 부족해도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고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으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지식만 다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지적으로 좀 모자라는 사람을 답답해하지 않고 귀엽게 보는 것입니다. 아주 귀엽게 봅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말씀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통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기가 아주 여러분들을 하나님 사람으로 만드는 훌륭한 도장입니다. 보십시오. 구역장이 안 되어 봤으면 구역예배 때에 무의식적으로 구역원들에게 자기자랑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대담한 구역장들은 일 년에 한번쯤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백지를 다 나누어주고 나를 구역장으로 데리고 있으면서 힘든 것을 적어보라고 하면 처음에는 안 적으려고 하는데 괜찮다고 적으라고 그러고 나도 잘하고 싶다고 적으라고 그러면 뭐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그것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고쳐나가는 것입니다. 아까 커피를 하면서 어느 구역장이 산전, 수전, 화생방전까지 다 겪은 사람 같습니다. 다 겪어서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는데 다 자기가 옛날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깨닫습니다. 굉장한 구역장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굽히지 말아야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뜨거우면 죄인의 완고함을 능가하고 죄인의 고집보다 더 강한 영혼에 대한 집념이 우리의 마음을 불태울 때 그때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다. 그래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