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강의
녹취자 : 윤은정
책에 목차를 펴시기 바랍니다.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체계는 7개의 커다란 주제로 이루어 집니다. 우리들이 기독교가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공부한다고 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하나는, 통시적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요것은 뭐냐하면은 디아크로닉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통시적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공시적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싱크로닉 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통시적이라는 말은, 공시적, 통시적이라는 말은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해주신 그 순서를 따라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전체의 내용을 한 번에 내려다 보면서 공시라고 그러잖아요? 공시에 보면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성경 창세기가 제일 먼저 쓰였잖아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이런식으로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요? 창세기 그러면,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이 있을 것 아니에요?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있을 것 아니에요? 이게 B고 A라 그러면 B와 A는 거의 유사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겠죠. 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나님,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을 다이아몬드처럼 본다면, 창세기에는 이 각도에서, 출애굽기는 이 각도에서, 레위기는 이 각도에서, 이런 식으로 성경이 기록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 계시의 순서를 따라서 공부해 나가면서 이렇게 공부하는 것을 우리들이 통시적인 성경연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요것을 공시적인 성경연구라고 그럽니다. 뭐냐하면, 여기에 창세기서부터 계시록까지 전부다 통틀어서,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때, 성경 전체가 말하는 사랑이 뭐냐? 그러면은 이야기 있는 다양성 보다는 여기서 다 추출해서 그래서 사랑을 다 모아서 정돈을 해서 체계를 세우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될 것 아니에요? 이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는 것을, 이것을 쉽게 말하면 책별 성경공부라고 말한다면, 이것을 주제별 성경공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조직신학은, 이 교리는 이 공시적인 성경연구 방법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한 사람의 신자가 되어서 기독교 신앙의 대의가 무엇인가 하는가를 공부해 나갈 때, A와 B중에, 1번과 2번의 방법 중 어떤 것을 먼저 공부해야 될까? 라는 질문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답은 2번을 먼저 공부해야 됩니다. 2번의 방식으로 먼저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1번의 방식으로 들어가서 공부하고, 그 다음에 다시 2번의 방법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제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교리를 찾아내고, 교리를 공부하면서 성경과 친숙해지고 하면서, 이것들을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과, 하나하나를 보는 이 눈들을 아울러 함께 길러갈 때에, 그 때에 기독교가 믿는 내용,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이 살아야 할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한 아주 명백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지식 안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 앞에 놓여 있는 ( )을 보세요. 무슨 책이든지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을 뭐라고 그래요? 서론이라고 그러죠? 서론. 서론에서는 크게 3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종교, 계시, 성경, 이 세 주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종교, 계시, 성경, 그 다음에 이제 그 순서대로 나누는데, 어쨌든 모든, 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잖아요? 하나님에 관한 학문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학문의 중심이 누굴까요? 하나님! 그렇죠. 제일 먼저 하나님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창조하시죠? 사람을 창조하셔요. 그런데, 그 인간이 그만 욕심에 이끌려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타락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누가 오시죠? 예수님! 그래서 기독론입니다. 기독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니까! 기독론입니다. 하나님론! 그 다음에 인간론! 그 다음에 그리스도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죠? 그렇죠. 구원론! 구원받은 사람이 모여서 무엇을 만들죠? 교회론! 그 교회에 모여서 뭘 기다려요? 종말론! 그래요. 그게 다에요. 그러니까 제일먼저, 서론이 나오고, 그 다음에 누가 창조하셨다고요? 하나님! 신론! 그 다음에 누구를 창조하셨다고요? 인간론! 그런데 타락했죠? 그래서 누가 오셨다고요? 기독론! 그래서 어떻하셨다고요? 구원론!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뭘 이루죠? 교회론! 교회에서 뭘 기다려요? 종말론!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책을 보지 말고, 저를 보세요. 외워보세요. 맨 먼저 서론! 그 다음에 신론! 그 다음에 인간론! 그 다음에 기독론! 그 다음에 구원론! 그 다음에 교회론! 그 다음에 종말론! 여러분들은 천재에요. 천재! 그 긴 걸 어떻게 한 번에 다 외우냔 말이에요. 이런 일은 인류사에 없었던 일이에요. 다시 한 번, 제일 먼저 뭐가 나온다고요?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거꾸로 해 보겠어요. 맨 끝에 뭐죠? 종말론! 구원론! 기독론! 인간론! 신론! 서론! 위에서부터 시작!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한 번에 딱 외워버렸잖아요.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게 답니까? 네. 이게 다에요. 이 커다란 7개의 주제를 얼마나 상세히 공부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묻고싶겠죠. 그러면 이런 식으로 해서 성경진리를 7개의 박스속에 넣겠다는 기본 골격은 누가 짰습니까? 참 어려운 질문인데, 이 박스는 사실은 초대교회부터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최종적으로 완성해 준 사람이 누구냐면은 존 칼빈이에요. 칼빈. 칼빈도 처음부터 완성한 게 아니라, 마지막 1559년 반, 거기에 가서 드디어 이제 이 모든 것들을 완성하면서 이제야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이런 틀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 적합하다라고 하는 확신이 서게 되었다. 그래서 탁 나눠주고 이후로 부터는 거의 모든 교회 학자들이, 조직 신학자들이 이것을 물려받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형태는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이 주제들을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리. 학문적 형태로 교리, 혹은 교의 신학, 혹은 조직 신학, 조직적으로 되어 있다고 그래서 조직 신학은 바로 미국사람들이 좋아하고, 교의 신학이라는 말은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이렇게 해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다음에 다시 보세요. 연필 들고 보세요. 한 번에 이 작은 목차를 다 외우게 해 드릴께요. 보세요. 서론에서는 종교, 계시, 성경, 세계의 작은 주제를 다루고, 신론에서는 신론, 그 다음에 기독교, 그 다음에 교회론에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1부와 2부로 나뉘어 지는데 신론, 기독론, 교회론에 있어서 나누어 지는데, 1부는 그것이 무엇인가? 그 다음에 2부는 그것이 무슨 작용을 하는가? 하나님에 관해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기독론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교회는 어떤 것인가? 교회는 무슨 일을 하나? 이렇게 1부 2부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자, 그럼 먼저 신론에 들어가서 보겠어요. 4, 5, 6, 7까지는 줄 그으세요. 4, 5, 6, 7과 8사이에 줄을 그어요. 4, 5, 6, 7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라는 것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그 다음에 8, 9, 10은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그거에요. 그 다음에 4과 기독론에 가면 14, 15 나오는데 15, 16사이에 줄을 그어요. 14, 15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혹은, 누구인가? 하는 내용이고, 16, 17은 예수님은 무슨일을 하시나? 그러면 6번으로 넘어와서 교회론을 보면, 23과, 24과, 24와 25사이에 줄을 그으면 교회는 무엇인가? 이게 23, 24에서 다루는 내용이고, 25, 26, 27은 교회는 무엇을 하는가? 이게 26. 27에서 다루는 것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왜 그렇게 안 다뤘습니까? 인간은 좀 그렇게 다루기가 곤란해요. 왜냐하면 인간이 누구인가? 무슨 일을 하는가? 할 때에, 인간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여기서 뭐, 밥 먹고, 빨래하고, 학원가고, 다 적을 수 없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되고,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태입니다. 상태! 어떻게 하냐면, 원시상태! 이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그 다음에 죄의 상태!이것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 은혜계약 안에 있는 상태! 이것은 뭐냐하면 구원을 받은, 혹은 구원 받을 인간의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2, 3, 4, 다 됐죠. 5번이 좀 문제네요. 5번. 5번은 이제 어떻게 되냐면, 구원은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하나? 이러면 말이 안되잖아요? 구원은 순서대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구원이 이루어 지는가? 라고 하는 것을 이제 성령의 일반적 작용, 그 다음에 소명과 중생, 혹은 부르심과 중생, 회심과 믿음, 칭의, 그 다음에 성화, 성도의 견인, 이렇게 해서 1, 2, 3, 4, 5, 6, 7 이렇게 해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종말론에 가면 육체의 죽음과 사후의 중간상태, 중간상태라고 하는 게 있는데, 중간상태,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재림, 부활, 심판, 무궁세계, 이렇게 그려지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전체적으로 내용이 이렇게 되면은 여러분들이 그 동안도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무엇인가에 대해서 많이 얘기를 들었으니까 대충 얘기 나온거, 특별히 세례문답 받을 때에 철저하게 하신 분들은 대충 다 한번쯤은 제목을 들어본 이야기들을 여기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거죠. 자 그러면 다시 한번, 해봅시다. 제일 먼저 뭐라 그랬죠? 서론! 그다음, 신론! 그 다음, 인간론! 그 다음, 기독론! 그 다음, 구원론! 그 다음, 교회론! 그 다음, 종말론! 자, 그러면 서론에서는 종교, 계시, 성경을 다루고, 그 다음에 서론 다음에 뭐라 그랬죠? 신론! 신론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나? 그다음 인간은 무죄상태, 그 다음에 죄의 상태, 그 다음에 은혜의 계약 안에 있는 상태, 그리고 그 다음에 이제 기독론이 나오죠. 기독론에서는 뭐에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무슨 일을 하셨나? 그 다음에 구원론이죠? 구원은 순서를 따라서 나오고, 교회론에서는 어떻게 된다고요? 교회는 무엇인가? 무슨 일을 하는가? 그 다음에 마지막 종말론,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전체적인 윤곽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서론부터 빨리 시작하겠어요. 시작!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뒤로 넘어가면 서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종교의 본질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쳐준다.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자로서의 위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이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요것은 이제 인간론에 들어가면 따로 공부를 하거든요. 형상, 여러분 이 형상이 라틴어로 ‘이마고’라고 그럽니다. ‘이마고’, 영어로 ‘이미지’라고 그러죠. ‘이미지’, ‘하나님의 형상’,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이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 이렇게 물체적인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거는 이렇게 있어요. ‘형상’ 이라고 이렇게 써요. 이것은 뭐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 이 뜻이에요. ‘닮은 것’ 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셜렘, 그 다음에 데무트라고 나오는데 이런 닮은 것이라고 그러는데 뭐가 닮았냐면, 영혼과 정신에 관한 것입니다. 영혼과 정신, 대표적인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인간이 닮았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들 가운데 두 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자연적인 형상과 도덕적인 형상으로 나뉘어 집니다. 자연적인 형상은 인간이 사색하고, 사고하고, 학문을 탐구하고,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알고 하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그런데, 도덕은 이제 선악을 판단하고, 그것을 따라 행동하고 하는 능력입니다. 영혼과 정신의 능력입니다. 이것은 이제 완전히 뭉게져 버리죠. 요것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지만 죄 때문에,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 넒은 의미에서 인간은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줄치세요.
비록, 인간의 죄된 성품은 종교를 끊임없이 반대하지만, 종교의 씨앗만은 아직도 전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교라는 게 무슨 뜻이냐면, 우리들이 흔히 국어사전에서 이야기하는 오만가지 종교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원래 참된 종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는 그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절대종교서의 이 종교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영어로 릴리전이라는 말인데, 이거는 종교로도 번역이 되지만, 신앙으로 만이 번역이 되는 단어에요. 그래서 어쩧든지 그래요. 이 종교의 씨앗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면, 비록 죄로 말미암아 타락해서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대한 그리움,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마음이 안정감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다. 그것들이 이제 잘못 나타나서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잘못 나타나서 거기서 많은 종교들이, 이방 종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씨앗이라는 것은 뭐냐면, 하나님을 향한 희미한 인간의 의식, 그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종교의 씨앗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구상 모든 민족과 종족에게는 종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거 해 준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욕되다고 비안하지만, 종교야 말로 최대의 축복이다. 종교는 인간생활에 가장 심오한 근원을 다룰 뿐 아니라, 인간의 사상과, 감정과, 욕망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은 마지막에 돌아 가면은 이 종교가 없이는 도덕의 근거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되는가? 대답을... 왜 착하게 살아야 되는가? 원래 그래야 되니까? 왜 원래 그래야 됩니까? 케고 들어가면 답이 안나와요. 결국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 흔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이 악을 행했을 때는 불안하고, 고통을 받고, 선을 행했을 때는 편안하고 하는 이런 도덕 감정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라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종교란 무엇인가? 우리는 말씀을 연구할 때에만 참된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영어에서 종교라는 말은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파생한 것이 아니라 라틴어에서 나온 것으로 영어성경에 내구생한 있다. 라틴어로 ‘렐리 가레’라는 단어에요. 학설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반복하다’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묻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제 종교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르침을 반복하는 것, 혹은, 그 가르침의 사람의 마음과 삶을 묻는 것, 이것을 가리키는 데서 영어의 ‘렐리 지음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렇게 판단을 합니다. 자, 그런데 이제 종교, 혹은 우리들이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거는
줄치셔야 돼요. 줄은 굉장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이 줄 친데서 시험문제가 나와요. 진짜에요.
구약에서는 이 종교의 본질을 주님을 향한, 즉, 여호와를 향한 경외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계속 줄치세요.) 경외는 공포의 감정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감정이며, 사랑과 신뢰와 조화를 이루는 감정이다. (밑으로 내려가서) 신약에서는 율법보다 복음에 반응하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신앙과 경건의 태도를 뜻하는 것이다.
즉, 그래서 이제 종교의 본질을 우리들이 이야기 할 때, 저는 어떻게 설명하냐면, 떨리는 두려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격차 때문에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 그것만 있다면 공포의 대상이 되겠죠. 그 다음에 뭐냐하면, 그렇게 떨림에도 불구하고 이끌리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면서도 떠나고 싶지 않고, 그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 이게 바로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지존하신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지극한 떨림, 그리고, 이제 그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이끌리는 마음, 이것이 바로, 이제 경외의 핵심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그 다음에 이제, 그렇게 보면
종교는 인간의 하나님의 대한 관계, 하나님의 존엄성과 능력을 의식하고, 인간의 비참함과 연약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결론이에요. 꼬불꼬불하게 줄치세요.) 종교란,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영적관계, 특히 감사의 예배와 사랑의 봉사행위에 대한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신앙입니다.
2. 종교의 자리
이것은 신앙의 자리인데, 그러면 이 종교, 혹은 신앙의 자리가 어디 있느냐에 대해서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관점을 가지고 왔어요. 첫째는 뭐냐하면, 종교의 본질이 지성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지식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게 아니라, 신앙의 본질은 종교의 체험에 있다고 보고, 감정이 이 신앙의 중심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그게 아니라, 종교의 참된 본질은 행함에 있다. 의지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 견해는 유교 같은 데서 크게 나타나구요. 두 번째, 감정과 같은 것들은 신비종교 같은 데서 많이 나타나구요. 그 다음에 지성을 굉장히 우선시 하는 것은 불교같은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 견해냐? 기독교는 이 ‘종교의 본질이 참된 신앙의 본질이 지성이 아니라, 감정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냐하면,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이 바로 종교의 자리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냐하면, 여기에 인간의 영혼이 있잖아요? 영혼이 있어요. 이 영혼이 이렇게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기능...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기능이 뭐냐하면, 지, 정, 의,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는 생각하는 것이고, 정은 느끼는 것이고, 의지는 결정하고 행하는 것이잖아요. 이것을 마음이 사용을 하는 것이에요. 이게 마음을... 이것들이 여기와서 작용을 해서 여기에서 생산이 되는데 이 생산된 것들이 뭐냐하면, 이게 인제 실제적인 행위들이 여기서 생산이 되요. 그래서 이게 마음인데, 마음은 그래서 종교적인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얼 요구하시죠? 항상 강조 하시는 게 ‘마음을 달라.’ 잠언 4장에 나오는 것처럼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주며’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키라’ 그래서 이 마음 안에서 사실은 하나님과 그 다음에 인간이, 하나님과 인간이 마음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마음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바로 종교의 자리다. ‘더 싯 오브 릴리존’ 그래서 종교의 자리다. 신앙의 자리다. ‘마음지킴’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 손 들어 보세요. 대단하시네요. 꽤 있네요. 꼭 읽으세요.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뭐냐하면, 인터넷을 들어가서 ‘마음지킴’이라는 시리즈가 있어요. 그 시리즈를 다섯 개로 되어있는데, 항상 어떻게 하셔야지 제일 좋으냐면 가르켜 드릴께요. 책을 먼저 읽지 마시고, 설교를 먼저 들으세요. 설교를 들을 때에는 책을 읽을 때에는 정보를 빨리 확 접하고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읽기 때문에 이게 마음까지 스며들기가 쉽지 않고, 머리에만 정리되기 쉬워요. 그런데, 설교를 들을 때에는 그런 욕망없이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 충분히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 다음에 책으로 돌아가서 이 책에서 어떻게 면밀하게 정리하고 있는지를 쭉 보면 내용을 이미 듣고 은혜를 받은 거기 때문에 빨리 정리가 되요. 그래서, 첫 번째는 테잎을 듣고, 두 번째는 책의 각주는 볼 필요 없고 본문만 짝 보면서 읽어요. 그런데, 그 마음지킴 책은 그렇게 어렵지도 않구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딱 4시간 정도 읽으면 끝 페이지까지 다 갈 수 있어요. 읽고 살 때에는 ‘평신도용’으로 사지 말고 ‘신학생, 목회자용’책을 사세요. 그 밑에 각주가 많이 붙어있어요. 두 번째 읽을 때에는 각주까지 줄치면서 꼼꼼하게 읽는 거에요. 그렇게 하면은 줄까지 딱 쳐놓고 그렇게 되면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지금 이 얘기가 나왔을 때 빨리 가서 읽어야 돼요. 왜냐면, 지나고 나면 그것을 읽을 리가 없어요. 그것을 구역공부나 하면 읽을까? 읽지 않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요번 주에 이거 하나만 가리켜줘도 뭐냐하면, 물론, 숙제하는 거 있지만, 5개니까, 숙제하는 날 빼놓고 하루에 테이프를 출근하면서 듣는다든지, 퇴근하면서 듣는다든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 다음에 책과 테잎을 하나 들으면서 그 과 만큼 한 과씩 읽어가면 되거든요. 그렇게 해서 쫙쫙 읽어서 이번주에는 딱 떨어뜨려서 딱 끝내야돼요. ‘아, 이렇기 때문에 종교의 자리가 마음이라고 그러는거구나. 아, 이제 이해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내용을 여기 종교의 자리라고 되어있는 이 옆부분에다가 그렇게 굵은펜으로 쓰면 안되고, 가느다란 펜으로 깨알같이 쓰고, 안되면, 제가 말씀드리는게 노트를 따로 하지 마요. 그 노트는 결국은 안봐요. 여기다가 깨알같이 쓰고, 안되면 여기다가 종이를 붙여가지고 그래서 이렇게 어떤 사람은 아주 지혜롭게 이 책을 뭐, 그렇게 하면 안되지만, 복사를 했더라구요. 그래서 노트책을 딱 만들었어요. 그리고, 여백을 만들어가지고 새까맣게 적은 것입니다. 최고에요. 그러면, 어디가서도 가리킬때 그거 하나만 딱 펴면 그 다음에 종교의 자리. 마음. 마음이란 무엇인가? 정의. 그 다음에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뭔가? 그 다음에 지성과 마음의 관계는 뭔가? 그러면 무슨 책, 몇 페이지까지 다 적어 놓는 거에요. 그거 한 권만 있으면은 어디가서 딱 펴놓으면 딱 끝납니다. 노트를 펴놓으면 이게 두 개를 펴놓고 이게 여기껀가? 저기껀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딱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다가 어떤 학생들은 여기다가 이렇게 종이를 붙여가지고 옆으로 펼쳐서 거기다 써가지고 여기다 붙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포스트잍을 막 붙여가지고 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지혜롭게 하는데 하나에다가 모든 정보를 다 집어 넣어라. 그러면은 나중에 이제 집에서 가르칠 때, 아이들에게 가르칠때, 뭐, 아니 왜그러냐면은 교사같은 것 되면은 이걸 봐야될 경우가 너무 많거든요. 확인하고 공부하고, 최고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11페이지로 넘어가면, 10페이지 맨 밑으로 넘어가면
성서 심리학에 의하면 마음은 영혼의 중심적 기관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이 영혼이 활동하는 중심적인 자리다. 그 마음에서부터 생활, 사상, 감정, 의지, 모든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종교는 (줄치셔야 돼요. 계속) 한 인간의 지혜, 지성, 감성, 그리고, 도덕생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자리가 마음이라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다.
3. 종교의 기원
종교의 기원이 어디에서 왔느냐?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기원이 어디에서 왔는 것이냐고 여러 가지 설명을 하지만,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가는 거에요.) 성경만이 (줄치세요) 기원에 관한 믿을만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배를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이 계심을 말해주고 있다. 더욱이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을 통해서 또, 특히 그 자신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예배와 봉사를 요구하고 계시며, 어떤걸 기뻐하시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형상을 따라 지으셔서 계시를 이해하고 따를 능력을 주셨으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영화롭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도록 인간에게 자연적인 충동을 심어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그 충동이 올바른 지식의 빛을 받았을 때에 바른 하나님께로 가서 바르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충동은 있는데 올바른 지식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거나 잘못된 지식이 주어지면 이방의 신들을 섬기거나, 자기가 마음에 원하는 종교를 만들어 내어서 살아거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장. 계시
계시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요? 영어로 ‘리블레이션’이라고 그러잖아요? 동사 ‘리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냐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보자기로 덮어논 것을 이 보자기를 이렇게 여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랍어로 ‘아포칼리칩스’라고 그럽니다. 뭐냐하면 가리워진 것을 거둬내면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리 빌드’ 그래서 이렇게 드러나는 것, 확 드러나서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계시한다’ 이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자신, 혹은, 당신 자신의 뜻에 대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알게 해 주는 것이 ‘리블레이션’이에요. 이렇게 거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보자기에 씌어진 것을 이렇게 거둬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자, 그러면, 이 계시는 어떤 것인지 한번 보겠어요. 우선 일반적인 고찰입니다.
1. 계시에 대한 일반적 고찰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알려주지 않으셨다면) 참된 종교는 없었을 것이다.
뭐, 참된 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는 없었을 것이다. 오해 한 것도 뭔가 조금 보여주었기 때문에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아예, 처음서부터 보여주지 않았다면은 오해할 것도 없고, 처음서부터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죠.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알리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으며, 인간 그대로 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 계시는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자연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성경계시)로 구별할 수 있다.
물론 무신론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은 계시를 믿지 않는다.
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신이 있어서 자기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성적 교통의 시도이기 때문에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없고, 불가지론자는 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확신을 못갖기 때문에 신이 그런 행동을 한다라고 하는 자체에 대해서 신념이 없는 것입니다. 범신론이 뭔지 아시죠? ‘사물이 많이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의 신의 각기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물이 얼면은 막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막 얼잖아요. 고드름도 얼고, 그러다가 물이 녹으면 모든 것들이 다 녹아내리면서 평평한 하나의 물이 되듯이 마치 이렇게 다양한 많은, 불교의 견해에요. ‘다양한 많은 사물들의 형체는 속임수 이고, 그 본질은 하나의 자연인데, 그 자연 자체가 신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의 본질이 신의 본질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범신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범신론.
그다음에 이제 무신론, 그 다음에 유신론, 좀 해볼까요. 그러면? 이렇게까지 하면 시간이 많이 가는데, 우선 범신론은 설명했구요. 그 다음에 유신론. 신이 있다 이렇게 하는 주장입니다. 그 다음에 무신론도 있겠죠? 신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무신론. 그 다음에 이제 내재신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혹은 이걸 가리켜서 만유재신론, 요건 뭐냐하면요. 범신론하고는 좀 달라요. 범신론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본질이 신이다.’ 이렇게 보는데, 이건 그렇게 않고, 이것은 ‘신과 구조물 사이에 구분은 분명히 하면서 그 신이 모든 피조물 속에 침투해있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내재신론이라고 부릅니다. ‘판 앤 데이즘’이라고 그러는데, 그 다음에 이제 무신론, 유신론,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것은 유신론 정도가 아니라 유일신론입니다. 유일신론. ‘하나님만이 참 신이다.’ 유일신론. 자, 이정도로 용어를 정리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 다음 보겠습니다.
2. 일반계시
그러면 계시는 둘로 나뉘어 지는데,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뉘어 집니다. 얼굴만 보고 있으면 안돼요. 빨리 필기를 해야 됩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나뉘어 집니다. 그런데, 일반계시를 자연계시라고도 부르고, 특별계시를 초자연 계시라고도 부릅니다. 무슨 뜻이냐면, 일반계시, 특별계시는 인간이 그 계시에 접근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구분입니다. 그러니까 일반계시라는 것은 뭐냐하면, 모든 사람이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시이다.’ 그게 일반계시이고, 특별계시는 아니다. 특별한 사람만 접근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게 특별계시에요. 그런데, 일반계시는 자연계시라고도 불리워지는데, 자연계시, 초자연계시는 무슨 뜻이냐면, 계시를 전달해주는 매개체가 자연적인 것이냐? 초자연적인 것이냐에 따라서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자, 정리를 하면 이렇게 되겠죠. ‘일반계시는 모든 사람이 접근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계시인데, 자연적인 것들을 계시 전달의 도구로 쓰시는 것이다.’ 두 번째, ‘특별계시는 특별한 사람만 접근해서 알 수 있는 계시이고, 그 계시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초자연적인 것을 사용하신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자, 대답해 보세요. 일반계시와 뭐가 있다고요? 특별계시. 그 다음에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 접근하는 것을 기준으로 구분하면 어떻게?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매개 수단을 기준으로 하면? 자연계시와 초자연 계시.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시간상으로(줄치셔야 돼요.) 특별계시보다 앞선다. 일반계시는 인간에게 구술적 전달 형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건과 자연 세력과 자연 법칙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성경은 일반계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시 19:1-2, 롬 1:19-20, 2:14-15 (집에가서 다 찾으셔야 돼요.)
밤은 밤에게 말하고 낮은 낮에게 말하니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 이런 것들이 일반계시의 형식입니다. 좀 더 일반계시의 예를 들어볼까요? 자, 이런 거죠. 이번에 태풍이 여러개 왔잖아요. 마지막으로 온 태풍이 뭐였죠? 산바? 산바인지 판바인지 모르겠는데 어떻든 여수 우동도에 막 쾅하고 파도가 한 10m 파도가 치는데 말이죠? 방파제에 부딪혀가지고 확 퍼지는 그 파도에 크기에 비해서 그 앞에 있는 집은 요만한 손톱만해요. 그러니까 얼마나 어마어마한 파도에요. 그런 자연의 위대한 힘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냐하면 경외심이 들어요. 자연을 존경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위대한 자연을 보면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리고, 이 모든 자연의 세계를 움직이시는 누군가가 계시다고 하는 것들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제 우리에게 전달되어주는 것입니다.
(1) 일반계시의 불충분성
펠라기우스파와 합리주의자들과 자연신론자들은
이런 것은 이제 인터넷에 들어가서 펠라기우스, 합리주의, 자연신론, 뚜드려서 찾는 것입니다. 아셨죠? 출력해가지고 이 밑에다가 쬐끄맣게 프린트해서 붙여놓든지 요약을 해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다 가르켜 주면은 여러분들이 재미가 없잖아요. 그죠? 펠라기우스 찾아보세요.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의 사람입니다. 4-5세기 시대의 사람인데, 인간이 아주 선하고,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다. 라고 하는 인간의 절대 자유를 믿었던 사람입니다. 인간의 선함을 과신했던 사람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적이었습니다.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주의라고도 이야기 하는데 레셔널 리스트들입니다. 이건 뭐냐하면 이제 특별히 게몽주의시대 이후로 모든 것들이 대카르트 이후로 원인과 결과를 밝힐 수 있는 것만이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우리의 판단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주의인데 그런 사람들이 합리주의자이고, 자연신론자들은 이러한 합리주의를 기독교와 합치시켜서 자연신론이라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무슨뜻이냐면 하나님이 살아계시긴 살아계시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살아계실 뿐이고 이세상은 법칙으로만 돌아가게끔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든 법칙대로 돌아가게 하시고 인간은 그 법칙을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 분투하는 그런 존재다. 이제 이렇게 보는 것이 말하자면은 디테리 본에퍼같은 사람의 성숙한 세계관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중요한 의미가 있으니까 한번 찾아보는 것입니다. 이게 인터넷 들어가서 툭툭쳐서 찾아보면요 하나당 뭐 수십페이지짜리 읽을 필요가 없고 그냥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 되는 것을 쪼르르륵 읽으면서 줄쳐서 정리해서 여기다 요약을 하든지 아니면 자료집을 따로 묶어서 뒤에다가 매달아 놓던지 그렇게 하면은 아주 좋아요. 요새는 너무 좋아서 발달을 많이 해서 인터넷 들어가서 탁 찾아보는데 위키피디아드라든지 그 다음에 이런 거 공신력이 있는거 잘 찾지 않으면 초딩들이 이런 거 올리거든요. 정확하지 않은게 많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이런 애들이 올리거든요. 그러니까 잘 보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제 위키피디아드 같은 그런 것들은 내용을 다 검색을 해야 됩니다. (브니티아)같은 것, 그런 것들은 회사에서 아예 학자들이 전부다 검거를 해가지고 그것을 포미션을 합니다. 그런것들은 믿을만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데 들어가서 찾아서 보면은 훨씬 정확한 자료를 볼 수 있고 더 공부하려면 도서관에 나와가지고 사전 찾아서 잘 이렇게 하면서 보면 더 최고죠. 영어를 읽을 수 있는 분들은 이제 영어 위키피디아나 떼오피디아 같은데 들어가면은 두들기면 영어로 쫙 나옵니다. 영어배운 실력 어디다 쓰겠어요. 신학공부하는데 써야지. 쭉쭉쭉쭉 이렇게 하는거에요. 그다음
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이런 것들은 생략할께요. 자, 줄치세요.)
이 일반계시는 (즉 하나님이 당신 자신과 당신의 뜻에 대해서 자연적인 사물들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거에요. 줄치세요.)
이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에 남아있는 죄의 암영(그림자)에 의해 희미하게 되고 말았다.
왜? 인간이 타락 했을 때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형벌을 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세계에 가득찼던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어 가버리셨어요. 그래서 이 자연이 원래 전달하던 생생한 하나님에 관한 전달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아름다우니 진짜 그 죄가 들어오기 전에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죠? 그러니까 이제 인간이 타락하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숲속에 들어가서도 삼겹살밖에는 생각이 안 나는 거에요. 그런 바닷가, 아름다운 그 바다를 그렇게 보면서도 밤하늘의 빛나는 별과 아름다운 파도, 그 들리는 파도소리,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생각없이 그냥 처음처럼만 계속 마시는 것입니다. 참이슬이나 이런거... 계속 마시고 노닥거리는 거죠. 깊이 인간이 무지해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줄치세요.
(그러나) 창조주의 솜씨가 완전히 지워진 것이 아니고 흐려지고 희미해진 것이다. 일반계시는(중요해요) 하님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영적인 일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전달하여 주지 못하므로 인간이 영원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여 주지 못한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를 순수하게 하나의 자연적 근거에만 세우려는 자들의 현재의 종교적 혼란이 (이게 많은 이교가 바로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죠) 바로 일반계시의 불충분성을 분명하게 증명하여 준다.
일반계시가 일반적 종교에도 합당한 기초를 제공하여 주지 못하므로 참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심지어 이방 민족들은 어떤 가상적 특별 계시에 호소한다. 결국 일반계시로서는 죄인들의 영적인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능력에 관한 다소의 지식을 전달하여 주지만,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한다. (이게 일반 계시의 말하자면은 한계에요.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계시에는 가치가 있다. 그죠?)
(2) 일반계시의 가치
그러나 위에 언급한 내용이 일반계시가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계시는 아직도 이교의 진정한 확립 요소를 설명해 주는데, 이 계시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후손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보고,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를 보세요. ‘동양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게 효도인데, 서양에서는 부모를 반쯤 죽이는게 선한일이다.’ 이렇게 가르키진 않아요. ‘동양에서 사람을 찔러 죽이면은 사형인데, 서양에서는 상을 준다.’ 이러진 않아요. ‘서양에서는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동양에서는 가정을 막 짖밟는다.’ 이런거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알죠? 그래서 놀랍게 종교는 달라도 그런 것들이 놀라운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십계명의 흔적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법의 이 확장은 이 십계명의 대한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상이 변하고 하면서 그 법들이 이상하게 자꾸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똑같애요. 그러니까 아프리카 아주 미계한 사람들에게 가도 보면은 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형제들이 우애하고, 그 다음에 남자들이 자신의 종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헌신하고 투쟁하고, 자기의 신들에게 열심을 품고, 그 다음에 가정의 어떤 대의들을 지키고 이런 것들이 그 미계한 사회에서도 매우 지켜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말입니다. 뜬금없이 이런 것들이 확 깨져버리는데도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은 북극의 에스키모인들은 요즘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제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손님이 자기 집에 오면 아내의 얼굴의 고래 기름을 쫙 발라서 그분과 동침하게 해 드리는 것이 손님에 대한 아주 훌륭한 대접이었습니다. 그것을 거절하면 호의에 대한 아주 심각한 무시라고 보고 자기에 대한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선교하러 갔는데, 고래 기름을 바른 여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완전히 이상하게 휘는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놀라운 일치를 보이면서 그래서 십계명의 내용들이 그대로 적용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신학적으로는 ‘일반계시의 효과다.’ 여러분들은 그런 얘기 교리반 배우기 전까지 얘기를 못했을 것입니다. ‘아, 그거 일반계시의 공통성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일류사회는 이렇게 놀라운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하시다는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 이런 결정적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지를 못해.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복음이 필요한 거야.’ 이렇게 설명을 하면은 이제 ‘교리반을 나온 사람이라고 말할 만 해.’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와 무지의 암흑 속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곡해하지만, 말씀의 조명과 성령의 일반적 작용에는 참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계시는 그의 특별계시의 배경을 형성해 주므로, 특별계시는 일반계시 없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과 역사는 성경기록에 대해 빛을 던져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원래는 이 지식이 특별계시의 지식이 전달하는 내용과 일반계시의 빛이 전달해주는 내용이 그 핵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다르지만은 그러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 특별계시를 일반계시의 빛 아래에 놓고 봐야지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번에 우리들이 공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아마 그런 정신들을 한번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이야기가 나오고, 역사, 자연과학, 그 다음에 인문학, 철학, 미학, 심리학, 이런 것들의 대한 다지평적인 이야기들이 나오잖아요. 그것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성경진리를 올려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보석상에 가면 다이아 반지 같은 거 고를 때에 그 주인이 제일먼저 어떻게 해요? 까만 비료들을 딱 깔고 그 위에 불빛이 쫙 떨어지는 곳에다가 다이아를 쫙 보여주죠. 만약에 그 다이아를 유리위에다 확 뿌려놨다면 그게 다이아인지 유리인지 보이겠어요? 예뻐 보이겠어요? 쫙 까만 대 위에다가 딱 깔고 올려놓고 볼 때 빛을 쫙 받으면서 처음에는 빛이 다 흡수되어 버리고 그 다음에 보석 알맹이는 반짝반짝 빛나면서 ‘야, 이게 정말 예쁘다.’ .그러면서 마음에 들어올 거 아니에요. 그찮아요. 그죠? 여러분도 이제 까만 바탕위에 탁 서있으면 예뻐보일꺼에요. 그죠? 보석과 같다면... 자, 그 다음에
3. 특별계시
자연 속에 나타난 일반계시와 함께 우리는 성경에서 구체화 되어 있는 특별계시를 받아들인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인데, 이 계시 속에는 사실과 말씀이 병행하여, 말씀은 사실을 해석하고 사실은 말씀에게 본질을 제공해 준다.
자, 이제 이게 무슨 얘기이냐면요.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직접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 계시의 양은 엄청나게 많죠. 그래서 특별계시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아요. 성경계시가 끝나면서 특별계시가 끝났어요. 있었던 특별계시는 많지만 그 많은 계시 중 필요한 극히 일부만이 성경에 기록이 되었습니다. 특별계시는 성경보다 훨씬 더 많지만 실제로 이것들은 모두 다 끝났고 사라졌기 때문에 누가 그 특별계시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가지고 와도 우리는 신뢰할 수 없고, 성경에 남은 거죠.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은 특별계시 중 특별형태입니다. 그런데 다른 특별계시가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이 특별계시라고 할 수 있는 그 근거는 성경계시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성경계시는 특별계시! 이렇게 등식으로 이해하고 있어도 사실상 문제가 없다.’ 이 뜻입니다.
(1) 특별계시의 필요성
특별계시는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는 의미해지고 부패하게 되었다. (줄치셔야 되요. 계속) 인간은 영적으로 둔하여져서 고통을 받게 되어 과오와 불신앙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고, 우매함과 고집으로 계시의 본래 흔적까지도 명확히 알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보다 깊은 계시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연의 진리를 재해석하고 구속의 새로운 계시를 제공하여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여 오류의 구덩이에서 벗어나도록 해야만 하셨다.
(2) 특별계시의 방법
하나님께서는 특별계시 혹은 초자연적 계시를 주시되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다.
a. 하나님의 현현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타나시는데 하나님을 볼 수가 없어요. 혹시 하나님을 보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나타남을 상징하는 도구를 본 것이지 하나님 자신은 인간의 육체의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본다는 것이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본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 첫 번째가 현현입니다. 현현은 ‘나타나신다’ 이거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하심을, 불과 연기의 구름 속에서와 폭풍 속에서와 세미한 음성 속에서 나타내 보여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임재)의 증거인 것이다. (줄치세요) 구약에 보면 삼위 중 제 2위 되신 여호와의 사자(이것은 이제 말하자면은 제 2위 성자라고 보는 거거든요.)의 현현이 두드러진다. 인간들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인격적 현현은 (줄치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이르러 최절정에 달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b. 직접적 전달
하나님은 가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셨다. 성령의 내적 작용으로 선지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해 주셨다. 하나님은 꿈과 환상의 방법과 우림과 둠밈의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것, 그 다음에 바깥에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것, 그 다음에 때로는 꿈과 환상, 그 다음에 우림과 둠밈.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데 사용되는 도구였죠.
신약에 보면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나타나셨으며, 사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계시 전달의 기관이 되었다.
자, 직접적인 전달은 사도시대까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완성이 되면서 직접적인 전달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쓰지 말아야할 단어가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이런 단어 사용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여러분을 따라해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 교회에서 흔히 못 봤을 거에요.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조심하세요. 그러니까 ‘기도하다가 생각이 났는데, 이런 생각이 내게 드는데, 성경을 읽다가 깨닫는 마음이 생겼는데,’ 그러면 되지. 마치 성경을 읽다가 무슨 생각이 들어서 알게 된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빙자해서 자신이 하나님과의 모종의 직접적인 교통의 상태에 있다고 흉내 내는 것은 신앙적인 교만이고 우월감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들이 존중해 줄 필요가 없어요.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설교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못 들어봤을 거에요.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열린 교회 교인들은 충분히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뭔가 직접적인 무엇을 받는다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c. 이적
(줄치세요) 성경에 나타난 이적은 인간에게 놀라움만 주는 하나의 단순한 경이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필연적인 한 방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만 그런거에요. 오늘날 나타나는 이적은 그렇지 않아요. 이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특별계시의 전달의 의미는 없다. 명심하여야 돼요. 계속 줄치세요
이 이적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의 표현이며, 자신의 특별한 임재(나타나심)의 증표이며, 때로는 영적 진리를 상징하며, 다가 올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적 능력의 징조인 것이다. (줄치세요) 이적 중에 최대의 이적은 성육신(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탄생)하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창조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가며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된 것이다.
(3) 특별계시의 특성 (별표해 놓으세요. 제일 중요해요. 이 과에서, 다 줄치셔야 돼요.)
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구원의 계시인데, (왜? 트별계시의 중심적인 내용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고자 하는가라는 계시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죄인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이 구원계획의 실현 방법을 보여주는 계시이다. 이 특별계시야 말로 인간의 마음을 조명하여 그의 뜻을 선한 데로 이끌어 주며, 거룩한 사랑으로 채워주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집을 준비케 하는 계시인 것이다. 특별계시는 우리에게 구속의 메시지를 전해 줄 뿐 아니라 구속의 사건을 알게 해 준다. 우리를 지식으로 부하게 할 뿐 아니라 죄인을 성도로 변하게 하며 우리 생활을 변화시켜 준다. 그리고 이 계시는 분명히 진보적이다. 속죄의 위대한 진리가 처음에는 희미하게 나타나고 점진적으로 분명해지고 마침내 신약에 와서 이 진리의 충족함과 아름다움이 현저해진다.
3장. 성경
1. 계시와 성경
‘특별계시’란 말은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메시지 전달과 이적적 사실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자기 전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줄치세요)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이따금 기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오래 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왔다. 현재 이 메시지들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것이 성경 전체의 구성요소가 된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계시되지 않은 것이 많이 있지만 역사 연구와 전에 받은 영감의 결과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계시란 말은 진정한 역사적 기반을 가진 구속적 진리와 구속적 사실의 총체인 성경 전체를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아까 설명 드린 거에요. 원래는 특별계시가 지금 성경보다 더 많았지만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성경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계시는 곧 특별계시다라고 부를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이 구속적 진리와 구속적 사실들은 성경에 나타난 진리이며, (줄치세요) 이 성경이 성령에 의하여 무오하게 영감되었다는 사실이 구속진리의 신적 보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모든 성경만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성경을 근거하여 지금도 생명과 광명과 거룩함을 제공하여 주는 것이다.
2. 영감성에 대한 성경적 증거
영감이라는 것은 뭐냐면요. 원래 히랍어로 ‘떼오 프뉴스띠에’ 라는 단어인데 이건 뭐냐하면 ‘후’ 하고 ‘숨을 불어넣다.’ 그런 뜻이에요. 뭐가 생각이 나죠? 하나님이 사람을 흑으로 빚으셔서 ‘후’하고 생기를 불어 넣으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처럼 하나님이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 때에 사람에게 영감을 주셔서 영적인 커다란 감화를 주셔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 오류가 없게끔, 잘못 쓰여진 것이 없게끔, 기록을 하게 하심으로 성경이 믿을만한 내용에 있어서나 글에 있어서나 믿을만한 결과물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영감교리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원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맨 처음 성경 기록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 기록할 때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이니까 죄의 영향이 성경을 기록하는 행위나 성경을 기록하기 위한 사고 활동에 영향을 미치면 계속해서 실수가 있을 수 있겠죠. 그러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사람에 의해서 실수나 잘못된 의도들이 개입함으로 우리에게 전달된 내용과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는 사이에 내용의 불일치가 있겠죠. 그러면 이 성경은 신뢰할 수 없는 결과물이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지 못하게끔 성경기록 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전하고자 하는 것을 완전히 인간에게 전달되게 하셨다는 것이 영감의 교리에요. 영감 교리. 영감설. 혹은 영감 교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줄치세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며, 믿음과 행위의 절대 표준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영감교리를 간혹 부인하기도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영감교리는 인간의 창작적 산물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교리이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많은 성경의 증거를 갖지만, 여기서는 그 중 몇 구절만 지적하고자 한다.
증거를 대는 거에요. 이제,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말씀하셨느니라. 또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한 것,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디모데 후서 3장 16절 줄치세요.
성경의 영감성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영감이에요)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이다.
3. 영감의 성질
(1) 기계적 영감설
그러면 이제, 영감이 어떤 식으로 주어지느냐? 이게 중요해요. 첫째의 견해는 기계적 영감설이에요.
이것을 받아쓰기 설이라고 말하는데, 성령이 이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른다. 적어라.’ 그러면은 그대로 디테이션 띠얼이라고 그래요. 그대로 받아쓰기처럼 하는 거에요. 이런 견해는 우리가 사실 받아들이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렇다면은 성경 전체가 동일하게 하나의 문체여야 하는데,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쓴 성경은 아주 유려하고 아주 유식한 논리와 사상들이 들어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글은 단순해요. 그런데서 차이나는 것입니다.
(2) 동력적 영감설
그 다음에 동력적 영감설. 이건 뭐냐하면, 하나님이 하나하나 지도하신 것이 아니라 천재적인 능력을 주셔서 그래서 실수 없이 잘 쓰게 했다.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세익스피어 같은 사람이 천재적인 문학가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세익스피어 전집이 나왔듯이 그런 종교적인 천재성을 주셨기 때문에 거기에서 성경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견해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아요.
(3) 유기적 영감설
(줄치셔야 돼요.) ① 영감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유기적인 방법으로 감동시켜, 그들의 내적 인간성, 곧 저자들의 성격과 기질, 은사와 재능, 교육과 교양, 용어와 문체를 그대로 사용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셨다는 것이다.
② 성령께서는 저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셨고, 기억을 새롭게 하여 기록하도록 고취시키셨고, 기록함에 있어 죄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장하셨으며, 그의 사상을 표현함에 있어 심지어 용어 선택까지도 지도하셨던 것이다.
③ 성령께서는 한순간이라도 저자들의 능력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신의 연구조사의 결과를 쓸 수 있었고, 그들 자신의 경험도 기록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문체나 용어의 특징을 나타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가감없이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4. 영감의 범위
(1) 부분적 영감
부분 영감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성경전체가 하나님이 감동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중에 일부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오류 없는 말씀이고, 나머지 많은 부분들은 인간의 실수와 착오가 개입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 그것들을 찾아내야 된다고 보는 거죠. 그러면 이제 무슨 문제가 나오냐면, 어떤 것은 하나님께 영감이 됐고, 어떤 것은 영감이 안 돼면, 그것은 무슨 근거로 그것을 된 것과 안 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나오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만 영감됐다.’, ‘신약만 영감됐다.’ 어떤 사람은 ‘복음서만 영감됐다.’ 다양한 주장이 나오는데 일치하지 않는 주장들입니다.
(2) 완전영감 (혹은 만전영감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두 번째가 택하는 것이 우리들의 견해인데, 그게 뭐냐하면 만전영감(Plenary Inspiration) 모든 부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완전히 영감되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줄치세요.
성경 자체의 증명을 따르면,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다고 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어떤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경’ 또는 ‘성경들’이라 하면서 구약성경을 자구 인용했다. 그와 같은 호소는 곧 하나님에 대한 호소와 같은 것이었다. (계속 줄치세요.) 그런데 그들이 인용한 구약의 책들 중에 어떤 책은 역사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령의 말씀인 구약의 구절을 계속 인용한다. 베드로는 바울의 서간을 구약의 문서들과 동일한 위치에 두었고, 바울은 모든 성경은 영감된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 이제 더 중요한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는 보다 깊은 단계에 들어가 성경의 영감이 사용된 낱말에까지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축자적으로(이건 뭐냐하면, 한자 한자 이렇게 보는 거죠) (verbally) 영감되었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영감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축자적 영감교리는 완전히 성경에 근거한 교리이다. 주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기록할 것을 실제로 일러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을 자기들의 입술에 두시고, 그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도록 지도하신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여호와의 말씀을 성령이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표현했고, 바울과 예수님은 한 개의 낱말을 가지고 이론을 펴셨음을 본다.
결국은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언어의 선택이 성령에 의해서 지도되지 않으면 하나님께로 받아서 갖게 된 생각 A와,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A 다시 사이에 심각한 격차가 생겨서 원뜻이 전해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분석철학 언어철학에서 강조하는 것이 그런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완전영감, 그 다음에 축자영감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5. 성경의 완전성
요거는 뭐냐하면 이렇게 하나님이 영감해 주심으로 성경은 완전한 책이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개혁주의 학자들은 로마 카톨릭과 일부 신교 종파와 반대되는 성경 영감론을 택한다.
①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에 두었는데 반하여,
이게 무슨 뜻이냐면, 교회가 그것을 성경이라고 인정을 했기 때문에 성경이 된 거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② 개혁주의는 성경의 권위가 영감된 하나님 말씀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뭐냐하면 오히려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이 교회를 승인한다. 만들었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교회보다 훨씬 위에 있는 권위입니다. 뭐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은 카톨릭에 논리를 따르면 그럴리는 없지만, 이제 우리 교회는 66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선언하면 하루아침에 성경은 짤려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결정할 리는 없겠지만, 그런 극단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성경보다 훨씬 더 위에 권위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개신교, 특히 개혁주의에서는 어떻게 보냐하면 성경이 훨씬 더 높은 권위를 갖는 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걸 증명할 수 있느냐? 그러면 원래 그러면 성경이 처음부터 성경이라고 덜렁 쓰여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 물론이죠. 그래서 그건 이제 성경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는 두 개의 방법이 있는데 익스터너 이비던스, 인터너 이비전트라고 그래서 외적인 증거와 내적인 증거로 나뉘어져요. 내적인 증거는 뭐냐하면, ‘읽어보면 안다.’ 이거에요.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서 우리가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읽어보면, 이 말씀이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새사람을 만드는데 힘이 있다.’ 이것이 성경의 내적인 증거에요. 이것은 신앙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증거는 뭐냐하면, 예를 들자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그러면 이게 언제 쓰여졌는지 이제 날짜를 잡잖아요. 대게 주 60년쯤 쓰여졌다고 보고 있는데, 60년대부터 교회에 그 이후로부터 초대교회에 나오는 기독교의 모든 문집들을 다 찾아서 거기에서 역사 속에서 로마서가 어떻게 받아드려지고 권위있게 되었는가 라고 하는 거를 도표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경으로 나중에 확정된 것들은 수 많은 인용, 그리고, 교회에서 권위있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렸다고 하는 외적인 증거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이 혹은 구속사도 교부들이 설교하다가 사도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렇게 말했는데, 그러면 우리도 따라 해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설교를 했다고 그러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 있게 받아드려지게 되잖아요. 이런 외적인 흔적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내는 거에요. 컴퓨터로 다 찾아내는 거에요. 그러면 이제 분포도가 나오는 거죠. 그런데 거의 언급되지, 거의 나오지 않다가 어느날 갑자기 확 나온다. 그러면 이게 뭔가가 사기가 개입된 거에요. 아무도 모르던 책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가지고 소수의 사람들만 막 인용한다. 그러면 이건 번역으로 인정해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전부다 알려줘서, 그래서 옛날부터 알려줘서 확장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결국은 권위있게 받아드려지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당신의 말씀이라고 도장을 찍으신 것이 인간에 의해서 받아드려지기 까지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리잖아요. 알기까지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지만 우리가 발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거랑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것들을 이제 외증이라고 보는 거에요. 줄치세요.
개혁주의자들은 교회가 성경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정치 않는다는 로마 카톨릭의 주장에 반대하며, 하나님 백성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내적 조명이나 성령의 말씀을 성경보다 높이는 개혁파 일부 종파들의 견해에도 반대하여,
요거는 이제 뭐냐하면, 옛날에 재침례 교파나 퀘이커교도 같은 것들이에요. 성경을 보지만, 여러분, 레마와 로고스가의 구별 같은 거 들어봤어요? 못 들어봤어요? 히랍어로, 그리스어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럴 때에 레마라는 말과 로고스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의도적으로 로고스는 객관적으로 있는 말씀이고 레마는 내게 부딪힌 말씀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는데 성경적인 견해는 아니에요. 그런데 이제 그런 성경을 놓고, 성경계시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부딪힌 것이 훨씬 더 우월한 계시이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주관주의는 안된다. 그런 거에요.
은혜의 신적방편으로서의 성경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또 그들은 로마 카톨릭과는 반대로 성경의 명백성을 옹호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또 그들은 성경에는 인간이 이해하기에 너무 심오한 신비로운 진리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구원에 필요한 지식은 성경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분명하지는 않지만 단순한 방법으로 전달된 것이므로 구원을 열망하는 자라면 누구나 교회나 성직자의 해석에 의존치 않고 스스로 이 구원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죠. 조금 힘들지 모르지만 가능하다고 보는거구요.) 끝으로 개혁주의자들은 또한 성경의 충족성을 옹호했으므로, 로마 카톨릭의 유전의 필요성과 재침례파의 내적 조명의 필요성을 부인했다.
충족성은 뭐냐하면 성경만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는데 충분한 기준이 된다. 그 뜻이에요. 오늘까지 공부한 게 평상시에는 두 시간 공부할 거를 한 시간에 쫙 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자, 오늘 배운 내용 중에 질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