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강의
녹취자: 박은희B
자, 27과입니다. 성찬, 이 성찬 했죠? 안했어요? 성찬은 예수님에 의해 제정된 것입니다 이 새로운 성례는 유월절 음식의 중심요소와 직결된다. 양고기와 함께 먹는 떡은 새로운 용도로 봉헌되었으며 포도주잔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줄치십시오.)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찢어진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이니 이것을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열매에 대한 영적 유용성을 지시해주는 것이며, 성례전체는 구속적 죽음에 대한 계속적 기념이다.
자료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서점에 가면 ‘성찬과 언약’ 이라는 교리 묵상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찬과 언약’ 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것을 들으신다면 여러분들은 성찬에 대해서 아주 깔끔하게 정리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찬과 언약’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줄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서점에 가셔서 구해달라고 하면 해줄 것입니다. 내년서부터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편안한 시스템을 만들어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내년 1월 1일부터 될지 3월 1일부터 될지 모르겠는데 이제 전체적인 것을 정리하고 그래서 여태까지 열린교회에서 행해진 4000편 내지 5000편 되는 설교들을 모두 자유롭게 들어가서 다운받아서 들을 수 있도록, 그리고 개강하기로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활용을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편리하게 들어가서 다운받고 그다음에 듣고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관련된 것들을 계속 들으면서 그러면서 감을 잡고 그 위에 책을 읽고 이러면서 따라온다면 그러면 굉장히 커다란 진전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1.표징과 인침으로서의 성찬, 여기서 ‘표징’이라는 것은 영어로 싸인(sign) 라틴어로 씨그놈(signum)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싸인을 여기에서 표징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싸인이라고 하는 것, 씨그놈이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어떤 것들이 있는 데 그 게 그 자체는 아니지만 더 중요한 실체를 표시하는 것, 그것을 우리들이 싸인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표징, 다른 모든 성례와 마찬가지로 (줄치십시오.) 성찬은 하나의 표징이다. 이 표징은 떡과 포도주라는 유형적 요소뿐 아니라 그것을 먹고 마시는 행위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계속 줄치십시오.) 죽으심에 대한 상징적 표징이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능력에 참여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계속 성찬은 거기 참여하는 자의 고백하는 행위이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을 고백하며 그들의 왕 되신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인침, 인침, 인침은 영어에 실링(sealing)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링(sealing), 씰링 (sealing)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봉인하는 것, 도장 찍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찬은 표징이 아니라 인침이니 이것은 표시하는 사물에 부착되어 실연을 보증하는 것이다. 성찬은 참회하는 자들로 하여금 죽음에 자신을 내어줌으로 보여주신 위대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확신 (동그라미) 시켜주며, 언약의 약속과 복음에 풍요함이 그들의 것임을 확신시켜주며, 구원의 축복이 실제 소유에 있어서 그들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의미를 모르면 성찬에 참여해서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지식이 먼저입니다.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 표징이 있습니다. 표징이 뭐냐 하면 떡을 뗀 것입니다. 그래서 떡을 먹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찢으신 몸을 상징한다라고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진리에 말씀을 알고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그 떡이 아니라 떡을 사용해서 예수가 나를 위해 몸을 찢으시기까지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속에 컨펌((Confirm)해주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그것이 내마음속에 확신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침이라고 얘기 합니다. 이해되십니까?
상징은 외적이 표시물이지만 씰링, 인침은 성령에 의한 내적인 확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임재,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실재성, 실재성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성찬과 그리스도의 실제의 존재가 어떤 연관을 갖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화체설입니다. 화체설이라는 것을 어떻게 쓰냐하면 이렇게 씁니다. 화.체.설 화.체.설 잘 모르겠습니까? 화체설 체, 체육할 때 체, 몸 체자, 그 다음에 루터파에서는 공재설, 개혁파에서는 영적임재설
이것은 스브(sub)입니다. 스브sub 스브스탠셜리즘(transubstantialism )트랜스(trans)가 들어갔으니까 뭐냐 하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체설, 몸으로 변한다. 뭐가? 성찬의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 그 다음에 콘(con) 콘(con)은 함께입니다. 콘스브스탠셜리즘(consubstantialism), 공재설입니다. 그래서 그 떡 안에 떡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도 있다. 이게 루터파의 견해입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에 이건 스피리쳘 프레센스(spiritual presence) 영적임재설입니다.
자, 간략하게 얘기하면 로마교회의 견해, 로마교회는 육체적의미로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한다. “이는 내 몸이니” 라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여 떡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게 말이 안 됩니다. 그렇죠? 이건 좀 말이 안 됩니다. 카톨릭에서는 굳게 믿습니다.
옛날에 직장 다닐 때 카톨릭 믿는 후배하나 있었는데 이 친구 뭐라고 그러냐 하면, “성찬에서 남은 떡을 찬장에다가 넣어두었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예수님의 살로 변해 있던 적도 있다더라.” 그래서 데려다가 “그거 아니다.” 라고 내가 차근차근 교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나서 1년쯤 지났는데 얘가 카톨릭에서 완전히 이상한 사람으로 찍혔습니다. 왜? 개혁교리를 열심히 가르쳐주었더니 성당에 가서 계속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파의 견해는 (줄치십시오.) 루터파는 떡과 포도주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의 .전인격, 즉 살과 피가 그 요소들 속에, 그 요소들 밑에, 그 요소들과 함께 임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손에 떡을 가지셨을 때 자기 몸을 그것과 함께 가지셨으므로 “이는 내 살이니라.” 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떡 받는 모든 자는 그가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살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이 교리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발전시킨 것이 못된다. 뿐만 아니라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편재한다는 불가능한 개념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양성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신성과 인성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신성은 편재합니까? 편재하지 않습니까? 인성은 편재합니까? 편재하지 않습니까? 편재하지 않잖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성도 편재하다고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편재하면 떡 안에, 떡 아래, 떡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겠죠? 그렇죠?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교리와 교리가 연관될 때에 이렇게 밀접하게 같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눈여겨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쯔빙글리의 견해는 ‘기념설’입니다 여기 지금 내가 안 썼는데 쯔빙글리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임재를 부인하지만 그리스도는 신앙 속에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쯔빙글리에 의하면 성찬은 하나의 표징이나 상징, (계속 줄치십시오.) 죽으심에 대한 기념, 고백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것은 기념이라고 봅니다. 기념설이라고 합니다. 기념설.
칼빈의 견해, 이게 이제 우리 개혁주의 적인 입장입니다 칼빈은 육체적, 장소적 임재대신 그리스도의 영적임재를 가르친다. 그는 쯔빙글리와는 달리 성례의 깊은 의미를 강조한다. 성찬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보증으로 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위해 행하시는 인침과 보증으로 보았다. 십자가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덕과 효과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신자들에게 임재하며 실제적으로 전달된다고 본다. 이것은 그가 믿음이, 믿음과 성령에 역사에 의해서 정도가 다르게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임재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여해도 거의 임재를 못 느낄 수도 있고 그 다음에 아주 많이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찬과 참여자, 성찬은 무조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신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분별할 수 있는 연령에 이르지 못하는 아이들은 참여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 진실한 신자라도 참여할 자격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불신자는 자연히 성찬에서 제외 된다 .성례에서 받은 은혜는 말씀의 도구를 통하여 받는 은혜와 다를 바 없다. (줄치십시오. 계속.) 성례는 말씀의 효과와 이미 받은바 은혜의 분량에 부가된 것이다. 이 성례의 영적 유익의 희열은 그 참여자의 신앙에 의존한다.
종말론, 육체적 죽음과 사후의 중간상태, 육체적 죽음은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있다. 성경은 육체적 죽음을 영혼의 죽음과 구별해 말하고 있으며 이거 여러 번 설교시간에 얘기를 했기 때문에 반복 안하겠습니다. 쭉 내려가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째줄, 펠라기우스파와 소기노파는 인간이 죽어야할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지만, 이 견해는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다. (줄치십시오.)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요, 형벌이라고 가르쳐준다. 죽음은 자연적 과정이라기보다는 신적진노의 표현, 하나님심판 정죄이며 저주이다.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며 신자가 구속받았다면 왜 신자들이 계속 죽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거기 줄치십시오.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은 신자들에게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자들에게는 죽음이 형벌이 아니라 성화과정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중간상태, 인간의 죽음은 그 후 일반적 부활 사이에 중간상태에 관한 견해는 상당히 다양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이론들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신자가 죽으면? 아이, 왜 대답을 못합니까? 신자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천국에. 그 다음에 불신자가 죽으면? 그런데 그것은 절반만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면, 천국은 견해에 따라 다르기는 한데 이제 일반적인 개혁파의 견해는 천국은 이렇게 최종적으로 완전한 구원이 완성된 상태에서 갈수 있는 것입니다. 완성된 구원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받는 것만으로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고 육체까지도 구속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육체는 우리가 죽으면 즉시 구속 받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이 세상에 남겨두고 가고 마지막 부활의 날에 우리의 육체를 살리셔서 우리의 영혼과 만나게 해서 몸과 영혼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있죠? 몸과 영혼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게 그 때입니다. 그렇게 몸과 영혼의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 때에 최종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천국이고 지옥입니다.
그러면 이제 무슨 문제가 나오냐 하면, 그러면 지금 죽은 이후에 마지막 우리의 몸이 부활하기까지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있을까? 그걸 가리켜서 중간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 몸과 영혼이 아직 완전히 만나서 구속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 갈 사람들의 중간상태를 낙원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지옥에 갈 사람들의 중간상태에 있는 곳을 우리들이 음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장소적인 개념입니다. 정신적인 개념이 아니라 분명히 장소적인 개념인데 그러나 낙원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러니까 완전한 몸을 입지는 못했지만, 아직 부활한 몸은 아니지만 낙원에 있는데 그 낙원에서 천국과 다름없는 기쁨을 누리는 곳이고, 음부는 아직 완전한 몸을 입어서 완전히 지옥에 던져진 것은 아니지만 지옥의 고통을 영원히 느끼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서 이 두 장소가 지옥과 음부 그리고 천국과 낙원이 칼 자르듯이 구별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음부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현관이고 낙원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현관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제 그 중간상태를 이야기 하는데 이것을 메디에이트스테이트(mediate state)라고 그래서 중간상태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증간상태, 그러니까 중간상태는 신자의 지상의 죽음의 순간부터 부활의 날까지 그때까지에 머물러 있는 곳을 중간상태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개념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 다음 스올, 하데스의 현대적 개념. 스올은 옛음부를 번역한 것이고 하데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자나 악한 자나 누구든지 죽은 후에는 구약에서 스올이라고 부르며, 신약에서는 하데스라고 부르는 중간지대에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곳은 보상과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모든 자의 동일한 운명 장소이며 지상생활의 약화된 반영에 불과한 음침한 장소이며, 생활의 흥미를 잃고 삶의 희열이 슬픔으로 변해가는 약화된 인식과 침체된 무능력의 장소이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스올과 하데스란 말이 항상 경건한 자와 악인이 함께 내려가는 장소를 의미한다면 그곳에 내려가는 것을 악한 자들을 향한 경고로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는가? 진노가 스올에서 불붙고 있는 것으로 성경을 어떻게 경고할 수 있겠는가? 부자는 하데스에서 그의 눈을 들어쳐다보며 자기가 있는 곳을 “고통 하는 곳”이라고 했다. 스올과 하데스란 말은 항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지만 무덤, 죽음의 상태나 조건, 어떤 때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의미되었다
연옥, 로마교회에 의하면 죽을 때 완전한자들의 영혼은 즉시 천당 들어가게 되지만 이거 아주 희소한 것입니다. 아주 희소합니다. 이 사람들은 순교한 사람이거나 정말 성스럽게 산 사람들이거나 뭐 이런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은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 영혼은 연옥이라고 그러는 정화의 장소에 들어가는데 나쁜 짓 많이 하고 더렵혀진 사람들은 거기서 굉장히 오랜 세월을 견뎌야지 정화되고 그 다음에 상태가 괜찮은 사람은 조금만 정결케 된 다음에 천국을 가는데 이제 이 세상에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친구나 가족이나 교회식구들이 기도를 많이 해주면 연수가 좀 줄어들어 가지고 빨리 천국을 가기도하고 연옥으로 막 내려갈려 그러다 그 죽는 순간에 막 열렬히 기도하면 그 기도의 힘에 떠밀려서 이제 연옥으로 안 빠지고 바로 천국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 사람 죽었을 때 기도를 굉장히 중요시 여깁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모여 도우소서. 마리아여 도우소서. 그러다 김대건 신부까지 다 나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자신들의 공로로는 그것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마리아를 비롯해서 이런 많은 성자들에게 간구해서 그 공로를 조금 나누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연옥에 들어가지 않게 해달라고 그런 교리를 이용한 게 유명한 면죄부판매 사건이었잖습니까?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거하는 기간은 개인의 형편에 따라 다른데 경건한 친구와 친척의 기도, 선행, 미사등에 의해 단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거 참 그렇죠? 그죠? 헌금에 의해서도 단축될 수 있다고 하니까 마르틴 루터라는 영화 같은 거 보면 막 그러지 않습니까? 돈이 딱 들어서 째까랑 하는 그 순간에 당신의 불쌍한 아버지의 영혼이 연옥의 고통을 면하고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고 막 호소하는 것입니다. 어, 참 돈 없으면 참 서럽습니다. 그러니까 후손들이 잘 살아야 되겠죠? 그렇죠? 그래야지 천국에 갈수 있으니.
선조림보, 로마교회에 의하면 선조림보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부터 부활하실 사이에 오셔서 해방시켜 줄 때까지 구약성도들이 억류되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러니까 막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 가지로
유아림보,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의 영혼이 거하는 처소다. 적극적 형벌을 당하지 않지만 천당의 축복에서 제외되고 이무런 소망이 없이 거기에서 그냥 살아가고 있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영혼의 수면, 수면설입니다. 영혼이 죽으면 무의적 의식과 수면상태에 들어간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이들은 죽음이 영혼의 잠이라는 사실과 죽은 자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적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전자는 단순히 죽은 육체와 잠자는 육체의 유사성 때문에 죽음을 단순히 잠자는 것으로 말한 것이고, 후자는 단순히 죽은 자는 현세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고 현세의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뿐이다. 성경은 믿는 자가 사후에 즉시 의식적 생활을 향유하게 되는 것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멸절설과 조건적 영생설, 이 교리에 의하면 악인은 죽은 뒤 의식적 존재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멸절설은 인간이 불멸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더라도 죄악 속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불멸성을 박탈당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조건적 영생설에 의하면, 이게 그러니까 멸절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영혼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게 다 틀린 것입니다. 조건적 영생설에 의하면 인간은 사멸하도록 창조되었지만 믿는 자들만은 불멸을 선물로 받는다고 한다. 악인은 멸망하거나 모든 이 의식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줄치십시오.) 이러한 교리들은 성경이 영생을 그리스도 안에 주시는 선물입니다. 죄인들은 죽음과 멸망으로 위협 당한다고 경고 받는다고 표현한 사실을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죄인들이 계속 존재할 것이며 악인의 형벌에도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은 어떤 경우에도 멸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죽음, 영혼의 죽음은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그 다음 제 2의 시련, 어떤 학자들은 죄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 세컨 찬스(second chance)입니다. 주장한다. 누구든지 예수를 알고 영접할 기회를 제공받지 않고서는 멸망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성경구절들은 그러한 이론을 증명해 주는 구절이 아니다. 성경은 사후의 불신자의 상태를 변할 수 없는 고정한 상태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의 심판은 그들의 육신으로 행한 것에 의존한다.
29과 재림, 신약은 그리스도의 초림이 있은 후 재림이 올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하셨으며 천사도 예수님의 승천시에 그의 재림에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바울서신에서도 재림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다.
재림전의 대 사건, 재림 전에는 이러한 사건들이 전조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부르심, 천국복음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온 세계에 전해져야 한다. 이 구절이 내포하는 뜻은 전 국민이 완전히 복음화 되어 복음이야말로 국민생활에 능력이 되며 결신을 촉구하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심, 고린도후서와 로마서는 이스라엘의 회심을 말해주는데 로마서는 이 회심을 시간적 종말과 관련시키는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서 이스라엘 전체 또는 국가적 이스라엘이 결국은 주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로마서의 “온 이스라엘” 이라는 표현은 고대 언약 백성으로부터 선택하여 낸 충족한 무리를 의미할 것이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많은 무리가 세상 끝 날에 주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끔 보면 성경 해석할 때 유럽 EU 유럽연합과 이스라엘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한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렇죠? 스위트쪽에 교단에서도 그렇고 특히 여호와의 증인, 깨어라 파수대 이런데서 나온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만 이야기 하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를 들자면 복음이 예루살렘부터 나왔는데 쭉 돌아서 무슨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세계의 종말이 온다. 등등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선교 역사적으로 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빨리 이스라엘에게 전도하면 마치 종말이 앞당겨 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이미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는 용도가 다 한 것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고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완성된 이후로는 구약의 모든 이스라엘의 모형은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보편교회가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어떤 것 때문에 거기에 모든 역사를 푸는 무슨 암호코드가 달린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은 성경에 대한 전적인 잘못된 생각이다. 이걸 여러분들이 염두해 두시길 바랍니다.
큰 배도와 큰 재난, 성경은 끝 날이 가까울수록 크게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가르쳐 주고 있다. 세상 끝 날에 죄악이 증가할 것이며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하늘에 사무친 악으로 인하여 천지가 시작된 후로 전무후무한 무서운 재난이 초래할 것이다 이날들을 감하지 안했더라면 구원받을 영혼이 없지만 택한 자들을 위해 그 날을 감하실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출현, (줄치십시오.) 사도시대에도 분명히 드러났다. 성경은 끝 날에 개인이 악의 화신으로 일어날 것인데 죄악의 사람, 대적하는 자, 범사의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에 의해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러한 인물이 나타날 것을, 악의 화신이 나타날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은 이 악의 화신이 교황이라고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 성경은 이상한 표적을 세상 끝 날이 시작되는 징조로서 말해주고 있다. 전쟁 기근 지진이 각처에 일어날 것이고 이 재난이 우주의 재생 전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무서운 징조가 나타날 것이며 권세가 흔들릴 것이다.
앞서와 같은 징조가 있은 후 인자가 오게 될 것이다. 재림의 시기,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재림은 언제나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확실한 때를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천사들이나 지상에 계시던 육신을 입은 인자라도 알 수가 없었다.
재림의 양식, (줄치십시오.) 그리스도의 인격은 다시 오실 것이다. 인격적 재림(동그라미) 육체로 다시 오실 것이다. 형태적, 육체적 재림(동그라미) 가견의 눈이 볼 것이다, 가견적 재림,(동그라미) 많은 징조가 일어날 것이지만 생각지 않은 때에 불시에 일어날 것이다. 돌발적 재림, (동그라미) 하늘의 구름이 마차가 될 것이며 천사들은 호위병이며 천사장들은 전령관이 되며 성도들은 영광스런 수행원이 될 것이다. 영광의 재림
재림의 목적, 재림은 미래의 시대, 곧 사물의 영원한 상태를 도입하실 목적으로 재림하시는 것인데 그런데 이게 종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종말이라는 의미는 세상의 역사가 종결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죄 가운데서 쓰여 졌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적하는 역사로서의 종말을 의미 한다 이것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역사가 쓰여 지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말하자면 인간의 타락이후 끊어졌던 그 연결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속의 완성이 종말인데 이 종말로 말미암는 구속의 완성은 창조의 목적을 계승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이 세계의 종말은 구속의 완성인데 구속의 완성은 끊어졌던 창조의 목적을 계승해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종말이 사실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된다는 이것입니다. 그다음
천년왕국, 혹자는 그리스도에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천년왕국 후에 될 것이라고 믿는다.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후에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천년왕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복음시대라고 생각되는데 이 시기 끝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이다 라는 것이다. 복음은 세상 끝 날에 훨씬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며 의와 평화의 시대와 풍요한 축복의시대로 인도하여줄 것이다, 현재도 어떤 학자는 천년왕국이 진화의 완전한 자연적 과정의 거대한 결과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세상 끝 날에 배도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된다.
천년왕국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세계전체를 통할하는 지상정부의 최고지도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왕국이 그러고 난후에 그리스도께서 이번에는 심판주로서 신적인 존재로서 다시 내려오시게 되는데 그러면 그것이 천년동안 그리스도께서 세계를 다스리신 후에 예수님이 이제는 육신을 입은 그런 사람의 모습이 아닌 육신을 입긴 입으셨지만 그런 모습이 아닌 천상적인 존재로 오셔서 심판하실 것이다. 이게 천년왕국에 대한 통치가 있고난 다음 있다 이게 후천년설입니다.
그 다음에 전천년설은 뭐냐 하면 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역사적 전천년설입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뭐냐 하면 세계의 역사를 6000년이라고 보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말하자면 세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역사를 6000년이라고 보고 세대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이 모두 다르다고 보고 마지막 세대에서는 순교해야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소위 이야기하는 이삭줍기의 구원, 7세대의 마지막구원,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이 마지막 7세대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언약의 통일성을 끊어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후천년설과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 이 두개는 완전히 비성경적인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성경에 부합하는 큰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여기 빼먹었는데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입니다.
전천년설이 뭐냐하면 들어보십시오. 전천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지상 위에 다윗왕국을 재건하시고 천년동안 예루살렘을 통치하실 것이라고 한다. 전천년설은 하나님의 나라를 (계속 줄치십시오) 지상적 왕국과 국가적 왕국으로 만드는 반면에 신약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도 존재하는 영적, 우주적 왕국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약은 그런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왕국에 대하여 말한 일이 없지만 하늘의 영원한 왕국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이 이론은 계시록에 근거한 것인데 이 구절은 하늘의 한 장면을 나타내주며 유대와 지상적 국가적 왕국이나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언급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이 분의 견해는 무천년설입니다.
그래서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이 개혁주의에서 믿는 두 가지 견해인데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실제로 재림을 하시는 것입니다. 재림. 재림을 하셔서 오셔서 그래서 이 세계 모든 나라를 하나로 다스리실 때까지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이 지상의 왕국의 최고의 지도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왕처럼 실제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천년동안 그렇게 왕처럼 다스리신 후에 최후의 심판이 온다는 것 이게 전천년설입니다.
나는 실은 개인적으로는 무천년이 더 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냐하면 예수님이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껍질을 사용하셔서 이렇게 새로운 영적인 이스라엘의 재건을 이루셔서 신약시대의 교회를 이루셨는데 그래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이 다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장관들을 거느리고 그리고 법령을 만들고 국회를 만들고 이렇게 해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건 좀 신화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천년설이 언제 강력한 매력을 끄냐 하면 나라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거나 고난을 많이 당할 때,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셔서 이세상의 왕이 되어주셔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한을 풀어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커다란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같은 때에 전천년설에 대한 소망이 막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천년설은 이제 그런 지상에 이루어지는 문자적인 천년왕국은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마지막 심판 때가 되기 전에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서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지만 주님이 이 교회 속에서 다스리는 것 같은 놀라운 일들이 있고나서 마지막에 배도가 있고 급격히 타락하면서 재림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세계를 마무리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신다. 이런 것이 무천년설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그 둘 중에 하나를 믿는다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 이렇게 되면 마지막 30과만 남습니다. 30과는 15분이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여러분들이 그것을 공부를 해가지고 오시고 그래서 그냥 리포트는 안 내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 많이 받는데 그러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 폰에다 다운받아 들으면서 그러면서 오고 가면서 아. 이런 거였구나! 굉장히 도움 됩니다. 여러분들이 책을 10권정도 읽어도 정리되기 힘든 내용을 거기다가 쫙 정리했으니까 이거 한달 썼습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도움이 됩니다. 저녁에 오셔서 7시 15분까지 식사하시고 15분 찬양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15분 이거 강의 끝내고 그 다음에 과제물 토의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8시 한 30분서부터 8시 한 20분, 20분서부터 한 30분 정도 시험보고 실력 있는 사람은 한 20분 만에 나가겠죠? 그렇게 하고 그 다음 에 그것으로서 우리 교리반은 모두 끝내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교리반을 완주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가서 교리반을 완주했다는 이 기쁜 소식을 이제 까지 후원했던 가족들과 남편과 아내와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고 그래서 이제 교리반 졸업생다운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