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가족 아버지 마음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0-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네 복음서의 기록자 중 누가는 예수님의 갈릴리와 유대지방의 사역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역사가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오셨고,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차례대로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옳지 않은 역사적인 거짓들이 난무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는 의사로서 질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질병을 예수님이 어떻게 고치시고, 또 기도하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그림처럼 묘사했습니다. 누가복음의 또 하나의 별명은 가정 복음입니다. 그만큼 따뜻한 가정,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그러한 기록들이 누가복음에 풍부하게 흩어져 있습니다.
II. 불화한 가정의 모습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익숙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나는 민속의 명절인 설 연휴를 맞은 여러분들에게 가정의 문제를 다루어 보기 위해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은 무엇인가 불화한 가정의 모습입니다. 비교적 여유 있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이 비유 자체가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혹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들에 대한 그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로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님이시고, 첫째 아들은 율법대로 사는 도덕적인 유대인들이고, 먼 나라의 허랑방탕하게 살았다가 다시 돌아오는 탕자는 죄인이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창기와 세리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해석처럼 이것은 또한 유대인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사랑에 더 많이 감격할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A. 탐욕으로 가득함
아무튼 슬하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으로 이 비유는 시작이 됩니다. 둘째 아들은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했으니 사실상 아버지의 죽음을 바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나누어준 것은 살림이었다고 오늘 12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말에서 사용하는 ‘살림’이라는 이 단어는 ‘살리다’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를 위한 계획을 짜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하는 이 모든 가정 운영계획이 살리는데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죽어가고 시들어 가던 마음과 정신이 살림을 통해서 다시 되살아나는 기능이 바로 가정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이 살림을 나누어 주었지만 이 살림은 이 아들을 살리는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데 사용이 되었습니다. 모두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써버렸습니다. 재물을 허비하는 동안에는 친구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지만 결국 흉년이 들게 되었고, 더 이상 그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을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는 목부의 신세가 되어 버렸으니 이는 인간으로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나락의 끝에까지 떨어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과 궁핍, 외로움 속에서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고통과 궁핍을 통해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이전에 풍족한 행복을 누렸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죄를 지었고,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매우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늘을 향하여 죄를 지은 것은 결국 아버지를 향해서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둘째 아들이 이렇게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 넘치는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도 이 가정에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사랑하고 살림을 경험하여야 할 가족들이 갈등하고 고통 하는 대부분의 원인은 이기심과 탐욕입니다. 자기 사랑의 이욕을 버리고 순전한 마음이 되면 갈등하지 않을 텐데 가족 구성원들을 이해 다툼의 당사자로 놓고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이용하려고 하니까 사랑으로 가득 차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살려야 할 가정이 우리를 죽이는 장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런 마음의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가족보다는 이 세상의 쾌락을 통해 누릴 즐거움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은 있었으나 그의 마음에 가정이 없었습니다.
B. 관계의 기쁨 없음
한편 첫째 아들은 관계의 기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둘째 아들처럼 방탕한 기질을 가지고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통해서 그가 누구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눈이 짓무르도록 매일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허랑방탕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아들이 비로소 아버지께 고백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 진솔한 고백에 귀도 기울이지 아니한 채 자기가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을 합니다. 종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갖다가 입혀라’ 당시 옷은 신분을 규정하는 표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아들로 받아들여질 리는 없고 종중에 하나인 것처럼 여김을 받으면서라도 굶주리지 않고 그 집안에서 살고 싶어 하던 아들이었는데 자기 앞에 놓여 입혀지는 옷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을 아들로 대해주시는 아버지를 봅니다. 그리고는 예전에는 손에 가락지가 있었다는 말이 없는데 이번에는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당시 이 가락지는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는 인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모두 가지고 가서 탕진해 버린 이 아들에게 아버지는 또 유산을 떼어주며 이제는 그것을 아들 명의로 해주었다는 뜻입니다. 이것도 감당할 수 없는데 발에다가 신을 신겼습니다. 당연히 그 신발도 신발의 모양과 종류에 따라 신분을 규정하였을 터이니 이 신발은 상전의 신발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품꾼 중 하나만으로 여김을 받아도 좋겠다고 생각한 이 아들에게 아버지는 과거의 모든 죄를 하나도 묻지 않고 오히려 더 존귀한 아들의 지위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큰 아들이 돌아올 때 풍악을 울리는 소리, 춤추는 소리가 났습니다. 종들에게 물어보니 “당신의 동생이 건강한 모습을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기뻐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아들은 노하여 들어가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이 아들은 방탕한 기질이 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를 기뻐하는 마음이 이 아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할 도리를 다했고, 아버지와 동생은 자기를 부당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동생이란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삼켜버린 자식이었고, 자기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거늘 친구와 함께 염소새끼 한 마리라도 받아서 즐겨본 일이 없는 가련한 자식이라는 것이 자기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아버지로 말미암는 기쁨이나 동생을 인하여 얻는 기쁨 같은 것이 이 아들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상 이름은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자기의 이익을 따라서 일하고 대가를 받아 거래하려고 하는 사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탐욕은 없었지만 그러나 관계의 기쁨도 없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탐욕은 있었으나 그렇게 고통 중에 회개하고 돌아온 후에는 아버지와의 관계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가족이 나한테 해준 게 무엇이냐고 반문하는데 가족에게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은 경제적인 이익 공동체가 아닙니다. 가족은 하나님으부터 함께 서로를 살리며 지내도록 부름을 받은 한 몸의 공동체입니다. 자신이 그 가족을 떠나서는 자기일 수가 없고, 그리고 인간이 참 자기를 찾으려면 결국은 가족에게로 돌아가 그 뿌리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들에게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오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며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는 기쁨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의 집의 재산의 증식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섭섭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그 모든 것을 마음으로 아들에게 주었고, 그리고 아버지의 즐거움은 그 아들이 그 모든 것을 누리며 당신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버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의미를 알고 난다면 결혼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고, 아버지가 되는 무게감이 얼마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그 일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작은 아들은 탐욕으로 가득차서 관계를 깨뜨리고 재산을 탈취하다시피해서 먼 나라로 가버렸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은 허랑방탕하여 모든 재산을 허비하고 거지가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차거나 복수에 불타거나 잃어버린 재산을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아들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기다린 이유는 혹시라도 그 유산을 남겨갖고 올까봐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이 몸을 상하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기다렸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해서 한없이 희생적이었으나 자식들은 아버지를 티끌만큼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상처받지 않고 언제나 거기 있어서 모든 자기의 자녀들이 결국은 자기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면 이 아버지는 상처도 안 받고 힘들지도 않은가 이렇게 물을 질문이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이 아버지가 바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외롭지도 않고, 결핍도 없으시고, 또 상처를 받지도 않으시고, 누구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신 그 분을 향해 이런 질문은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고자 할 때 우리는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버지로서 이렇게 가족들을 붙들어 주는 그러한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할 텐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상처도 받고 외로움도 느끼고 결핍도 겪으면서 삽니다. 그래서 마땅히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렇게 할 힘이 없을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성숙은 결국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 혹은 어머니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신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아도 자식들과 가족들을 자신의 품에 기댈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가는 것이 바로 한 인간이 사람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입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가정이 무엇인지,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세월을 보냈습니다. 얼마쯤 지나 그런 걸 조금씩, 조금씩 말씀으로 깨닫고 아이가 소중해지기 시작하더니 사랑이 많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니 아빠, 아빠, 엄마, 엄마하고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어느 새 훌쩍 커버리고 부모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여전히 사랑하고 귀엽고 좋아서 가끔씩 가는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우리 딸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 했더니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딸도 아들도 그런 선물에 연연해하거나 아빠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한없이 즐거워하는 그런 시기가 지나버립니다. 아들이 장가를 가서 손녀가 태어납니다. 사랑에 빠집니다. 백화점에서 청소년 코너를 왔다가 갔다 하던 사람은 유아용품 코너에서 왔다갔다 하며 손녀가 무슨 선물을 받으면 뛸 듯이 좋아할까 생각하며 물건을 고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들의 가정의 단위가 아빠와 엄마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눈뜨고 나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또 다시 찬밥이 됩니다. 그리고 코코가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애견 용품 센터에서 코코 줄 선물을 고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외롭거나 힘들거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이 좀 드신 분들하고 대화를 나누면 한결같이 자식에 대한 섭섭함이 마음에 있습니다. 애지중지 길러서 마지막에 바리바리 싸가지고 장가까지 보냈는데 아빠한테 전화 한통을 안 합니다. 그냥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너무 예뻐서 그래서 인생의 의미를 그 딸 기르는데서 찾으면서 그렇게 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시집을 보냈는데 아빠한테는 연락도 안합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어쩌다 만나면 동네 아저씨 만난 것처럼 ‘아빠 안녕?’ 섭섭해 하는 분들에게 내가 그랬습니다. 그것을 건너뛰어야 이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나이 때 우리 부모에게 장가가고 나서 아빠가 생각나고 시집가고 나서 엄마가 그립고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았답니다. 우리가 행한 그대로 받는 것이고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우리 자식들은 잘해주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물위의 사랑은 흘러가지 위로 거꾸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래도 강아지는 주인을 좀 더 오래도록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III. 가족을 세우심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것을 이길까? 그러니까 인생의 어떤 보람과 사랑, 이런 것들을 사람으로부터 실제로 끊임없이 받으면서 채워지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그림은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아버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이상적인 아버지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아버지는 작은 아들한테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았을 텐데 큰 아들의 이 모진 말에 마음에 크게 어려움을 느꼈을 법한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사랑이 나오는지 아버지는 언제나 거기 있어서 두 팔을 벌린 사랑으로 모든 자식들을 언제나 기다려 줍니다.
근데 사실 우리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흔들릴 때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엄마의 사랑, 그런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어디서 깨닫느냐 하면 결국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부모와의 관계에서 직접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부모가 되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 장가를 안가면 영원히 아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철없이 뛰어놀다가 시집을 갑니다. 엄마에 대해서 생각도 안합니다. 그리고 엄마의 희생을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며 십분 이용하면서 일평생을 삽니다. 그러다 애를 낳습니다. 애 낳아도 또 엄마한테 갖다 맡깁니다. 세월이 흘러서 자기가 기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새끼가 말을 지겹게 안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끼를 길러보면서 그 속상하고 괴로운 마음이 들면서 비로소 자기가 그 엄마한테 어떤 새끼였는지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그 새끼를 향한 애미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엄마하고 부를 때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철이 든 딸이 되는 것입니다. 아빠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없이 삽니다. 그리고 나타나지도 않다가 용돈 받을 때만 나타나서 온 몸으로 용돈을 받아갑니다.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그 아빠가 얼마나 외롭게 사는지, 가족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지가 애비가 되어 새끼를 하나씩, 둘씩 낳으면 말 되게 안 들어줍니다. 어떤 때 마누라도 협조를 잘 안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외로워집니다. 그런데 돈은 계속 벌어야 됩니다. 그러면서 온갖 구박을 다 먹으면서 그러면서도 집에 들어오면 또 뭘 도와주지 않는다고 자기를 구박하는 아내를 보면서 자기는 정말 가정을 갖지 않았더라면 오늘 사표를 썼을 텐데 이런 것을 보면서 안으로, 안으로 이 모든 것을 다지면서 어느 한 순간에게 울컥하고 터지면서 도대체 아빠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가족사진을 보면서 이 평안해 보이지만 말이 없는 아버지의 심경이 그 20년, 30여 년전에 어땠을까 하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라고 부를 때 가슴이 쿵하고 울리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마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렇게 아버지가 되고,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설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로워도 참고, 가족들에게 소외당해도 삐치지 않고, 매일매일 가족을 위한 짐을 짊어지고 자신은 죽을 것 같은데도 가족들을 위해서 살림을 해야 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그럼 어디서 그런 것들이 그렇게 한없이 솟아나올 수 있을까? 그게 일반 은총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한 인간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비록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에 휘둘리거나 자신의 상처나 감정에 휘둘려서 자식을 버리거나 가정을 포기하거나 남편이나 아내와의 관계를 내려놓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식들은 돌아올 항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인생을 살고 난 후에 너무 힘들고 외롭고 어려울 때에 부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나고 연애하고 즐거울 때에는 절대로 그렇게 안합니다. 그러다가 너무 힘겹고 외로우면 엄마하고 그러고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눈물이 확 쏟아집니다.
정 채봉이라는 시인이 ‘엄마가 휴가를 온다면’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한때 다 외웠는데 지금은 부분 밖에 생각이 안 납니다. 내용은 이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간 엄마가 휴가를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한 달, 일주일 아니 단 오 분이라도 휴가를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가 휴가 온다면 나는 달려가 엄마 품에 안길거야. 그리고 엄마 젖을 만질 거야.’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 눈물 확 쏟아지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내 일생 살아온 일 중에 가장 억울했던 일 한 가지를 고자질하고 엄마의 품에서 펑펑 울고 싶다.’ 그게 이 땅에 있는 모든 새끼들의 마음입니다 . 그러면 도대체 그 엄마는 누구기에 흔들림이 없이 엄마 아빠는 항구처럼 파도가 쳐도 바람이 불어도 언제나 거기 있어서 들어오는 크고 작은 새끼 배들이 거기에 줄을 내리고 묶을 수 있는 항구의 역할을 하는 것일까? 그게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게 일반 은총의 차원에서 보면 한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냥 정말 제대로 살면 하나님이 놀랍게 그렇게 엄마 아빠가 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자식일 때는 그런 적이 없는데 자식을 낳은 다음에는 먹고 싶은 것을 안 먹을 수도 있고, 가고 싶을 데 안 갈 수도 있고 그리고 쉬고 싶은데 일할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터득하면서 그러면서 한 인간으로서 완성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참 어떻게 보면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놔주는 것입니다. 어떤 교인이 자랑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 애들이 저보고 하와이 여행 같이 데려가겠다고 그랬어요.” “좋으시겠어요.” “예, 우리 아이들이 저를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권사님 이렇게 말하면 애들이 더 좋아할 것입니다. “얘야, 난 그냥 기도하면서 교회에서 쉴란다. 하와이는 너희들끼리 갔다오너라.” 그러면 권사님 더 사랑할 것입니다. 진심입니다.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원래 인간은 고독한 것입니다.
(찬양)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인생 끝나도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평안을 얻으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게 얼마나 복된 건지 생각해 보십시오.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얼마나 놀랍습니까? 조그만 배는 들여다보면 우리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함지박 한 세 개 엎어놓은 것처럼 두 사람이 타면 간신히 들어가는 그런 배입니다. 그런 배를 바다에 띄운다고 칩니다. 그것도 배니까 뜹니다. 그러나 1m 파도만 쳐도 뒤집어질 것같이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한 10만 톤급 크루즈를 타면 한 7~8m 파도가 쳐도 그 거대한 배는 요동하지도 않고 파도를 가르면서 자기 갈 길을 흔들림 없이 천천히 갑니다. 우리의 사랑의 크기도 그러한 것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외로워도 외로운 내색은 하지 않고, 그리고 상처를 받아도 그 상처 때문에 요동하지 않고, 자식들을 사랑하며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결혼과 함께 한 번에 그런 사람이 되면 좋을 텐데 그렇게 안 됩니다. 수많은 시련을 겪고 자기를 깎고, 낮추고, 외로워지고, 그리고 인생이 나 홀로 대면해야 하는 현실인 것에 눈을 뜨면서부터 사람이 차츰 차츰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성에 영긂이 없을 때 그때 현실을 감당해 나갈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식도 파산하고 가족들도 파산하고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주위에서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이치를 통해서 가족을 세우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큰 아들이나 작은 아들이 세운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사랑으로, 그 자비로 언제나 거기 있었기 때문에 작은 아들도 돌아오고 큰 아들은 오해로 가득 찬 잘못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가족으로 돌아올 희망을 남겨 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을 자식에게 다 주었고, 모든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았고, 가산을 탕진한 두 번째 자식에게 반지까지 끼워주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온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며 화목한 가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손해를 보며 자식들 사랑했지만 장자의 존경도 그리고 차남의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까짓 것들에 상처받지 않고 언제나 사랑으로 거기 있습니다. 매일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그리고 거기에서 아버지는 자식들이 돌아와 자신을 묶을 수 있는 항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시키는 일입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땅에 아버지의 소원은 자신들의 가족이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었고 하늘 아버지의 소원은 당신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온 지체들이 서로를 한 살과 뼈처럼 사랑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릇된 줄 알면서도 유산을 나눠주고 사랑 없는 아들을 따뜻하게 타이르면서도 자신은 상처받지 않고 능히 그 모든 아들들의 항구가 되어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속에 있는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기에 그러실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사랑을 공급받지 아니하고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한 사람이 참 아들이 되는 것도 참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온전히 그렇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젊어서는 항상 자신에 대해서 경계하는 것이 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심해서 주님을 깊이 만난 다음에 인생의 유한함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러고 나니까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나를 움켜쥐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큰 후회는 없습니다. 요즘의 욜로(YOLO)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저의 그런 생각은 게으름 같은데서 표현됐던 저의 생각은 자기 파괴적인 사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이제 이만큼 세월이 흐르고 나서 어떤 사람이 게으르기를 원하고 끊임없이 높은 목표에 도전하면서 살지 않는 인생도 제법 살만한 즐거운 인생이라고 주장하면 나는 그것도 삶의 한 양식이라고 너그럽게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는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정말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 두 번째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것, 그것입니다. 그랬더니 세월이 얼마큼 지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잠을 많이 자지 않는 것이 몸에 쫙 뱄습니다. 그래서 6시간 이상 자는 것은 나는 죄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많이 잔 날은 양심에 찔려서 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부터는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몸에 피곤은 쌓이고 잠은 안 옵니다. 꽤 오래되었습니다. 한 15년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면의 질이 너무 나빠져서 고민을 하다가 이제 수면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온 몸에 수십 개의 전극을 붙이고 그것을 컴퓨터가 분석을 하고 옆에서 사람이 지켜보고 나는 방에서 자는 것입니다. 역시 그날도 누워있는 시간은 총 일곱 시간 반 정도 됐는데 약을 먹고서도 세 시간 4분 정도 밖에 못 잤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했던 수십 가지 데이터가 나왔습니다. 두 가지 데이터가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목회자인 제가 좀 예민한 사람 같습니까? 아니면 무딘 사람 같습니까? 저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 다른 사람의 두 배는 될 거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수치로 딱 나왔는데 민감성이, 스트레스 민감성이 평범한 사람의 5.4배,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들도 나는 밤에 잠을 못 자면서 고민할 정도로 그렇게 민감함이 나는 그렇게 평균적인 사람의 5.4배, 나는 그 수치를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스트레스에 저항할 수 있는 저항력이 있는데 저항력이 보통 사람은 400인데 저는 100이 나왔습니다. 25%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민감성은 5배반이고, 그 다음에 저항력은 1/4밖에 안되니까 곱하면 1/20밖에 안됩니다. 그것을 보면서 잠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약한 사람일까? 그런 거 같지는 않습니다. 심히 험한 세월들을 헤치면서 살았고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정신력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마음 밑바닥까지 흔들리거나 불안한 경우는 없습니다. ‘강한데 그러면 뭘까?’ 하고 생각하니까 그림이 딱 떠올랐습니다. 마음은 성화에 의해서 강해졌는데 그것을 담은 그릇이 플라스틱 바가지나 타파 유리그릇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쓰는 플라스크 얇은 유리에 그 강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강해도 몸은 항상 연약하다는 것을 이 신경과 모든 것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정말 인간이 생사 간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만약에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유리그릇처럼 약한 사람이 성화의 과정을 거쳐 마음도 강해지지 못하고 이렇게 남의 1/20밖에 안 되는 연약함을 지고 살았더라면 아마 내 인생은 오래 전에 파산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신병원에 가거나 우울증 환자가 되거나 정신 분열증에 걸리거나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확 쏟아졌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래서 이제는 딸 선물 사러 백화점에 잘 안가고, 유아용품 코너도 안가고 애견 센터를 왔다갔다 해도 외롭지 않습니다. 훨훨 날아서 나를 떠나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들 살 거라. 매순간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엄마 아빠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물리적인 엄마 아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가 되었는데도 딸처럼 엄마의 자리에서 튕겨나가는 사람도 있고, 딸인데도 그 엄마를 가엾이 여기며 요동치는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항구처럼 서 있어서 그렇게 요동치는 엄마를 붙들어 매어주어야 하는 딸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가족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때문에 언제나 거기 서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외롭고 힘들어도 자신은 꿋꿋하게 거기서서 모든 요동치는 가족들을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와 밧줄을 묶게 해 주는 그런 사랑이 가족은 있습니다. 그게 아빠일 수도 있고, 엄마 일 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고, 며느리일 수도 있고 혹은 딸일 수도 잇습니다.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사랑을 자가 발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 생명입니다. 사랑 없이는 우리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은 나는 해석의 힘이라고 봅니다. 탕자가 돌아왔는데 형은 어떻게 해석하냐 하면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놈이 또 왔구나.’ 이게 형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아빠의 해석은 뭐냐 하면 ‘내 아들은 사실상 죽었었는데 다시 살아났고 잃었는데 다시 얻었구나.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돌아오다니 얼마나 기쁠까?’ 이 두 해석의 차이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슬픈 가족의 역사를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조용히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세요. 엄마가 그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진짜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몸과 마음은 엄마가 될 수 없었는데 그 자리에 박혀버렸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어느 순간 파산해 버렸습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이 없다면 그런 사람을 보면서 실패한 엄마, 무자비하게 가정을 파괴한 아빠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 파산해 버린 사람으로서 정말 불쌍한 것입니다. 거기서 흐느끼는 한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여러분들이 정신적으로 엄마 아빠가 되어서 ‘아 그럴 수도 있었겠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철없는 것이 되지도 않는 엄마 아빠 자리에 서서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것을 그렇게 해석하게 만드는 힘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의 회복은 바로 그런 사랑에서 단초를 찾으면서 풀어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미 잘못된 엄마, 아빠를 두고 있거나 잘못된 자녀나 형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상적인 엄마, 아빠, 형, 오빠, 동생, 자녀 이 모습을 너무 많이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을 봐야되냐 하면 한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인류애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도저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사실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하신 것은 사랑의 해석하는 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영광을 훼손하고 당신의 창조의 세계를 망가뜨린 범죄자들이 아니라 그렇게 자기도 책임질 수 없는 죄의 길을 걷고 극복할 수 없는 현실 속에 몸부림치는 아무 희망이 없는 죄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저희들을 도우랴.’ 그게 사랑을 해석하는 힘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했으니 그게 갈보리에서 이루신 구속의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고백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 가장 훌륭한 입증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어 드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신 위대한 계획과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생각하는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이렇게 여러분들의 가정에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그런 역할을 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부모에 대한 최고의 효도는 온 가족이 한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과 무지, 이기심으로 가족관계가 파괴되고 작은 상처에 대한 더 큰 보복이 관계를 파멸로 데려갑니다. 우리가 믿음을 고백해도 매순간 사랑을 실현하면서 살려는 몸부림이 없다면 우리는 결실하지 못한 포도나무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가족과 이 땅의 가족이 있습니다. 하늘의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땅의 가족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음으로써 그렇게 이 가족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요동치는 삶의 바다에서 힘들 때면 그 평화가 생각날 때 여러분들이 떠오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매일 매일의 하나님의 은혜, 말씀의 감화와 사랑의 감동은 바로 이런 미움과 갈등, 무관심을 딛고 그렇게 상처받고 외로운 가족들을 사랑해 주도록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상처 받은 가족들이 있고, 망가진 가족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고 또한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마음 깊이 여러분들의 이 인생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피해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독 속에 우리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내가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는지, 그리고 친구들처럼 좋고 행복한 가정은 왜 내 몫이 되지 않았는지를 우리는 끝까지 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결론도 나지 않을 사변적인 질문에 답을 하는 것보다는 매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고백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5배반이나 되는 민감성을 가지고 1/4밖에 안 되는 저항력을 가지고 살았으니 정말 힘겹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민감성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의 세계를 그림처럼 그려내시고 남이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만드셨고, 남이 발견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묘사해 내게 한 것도 그렇게 내 몸에 운명처럼 달라붙은 연약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것도 나쁜 것을 행하신 적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것은 그 하나님을 매일매일 사랑하며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주님이 내 가슴에 남겨주신 사랑을 삶의 모든 방면에서 고백하며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만족의 삶을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무게는 무겁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인생의 무게 위에 실리는 보석과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인생의 가장 힘겹고 어려워 보여도 그것을 밤하늘 삼아서 하나님 당신의 사랑의 축포를 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연약한 것을 통해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여러분들의 가정을 치료하는 주님의 도구들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