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남편(2)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I. 본문해설
이어서 사도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는 인간의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어떻게 다시 창조시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류의 그리스도를 통한 우주적인 회복과, 세계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오늘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남편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아내, 아내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남편,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자녀, 자녀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부모, 피고용인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고용주와 또 반대편에 서 있는 고용인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이바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별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질서와 사랑으로 요약이 됩니다. 이런 질서와 사랑 안에서 남편과 아내가 각각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 때에 이것을 통해서 자녀들은 아내의 역할과 남편의 역할을 배우는 것과 더불어 참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익히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사회를 형성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을 완성하는 일에 종자 씨로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이바지는 것입니다. 사도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저는 두 주에 걸쳐서 이 짧은 본문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남성들은 불평할 것입니다. 왜 앞 절은 한 주에 끝내고 뒷 절은 두 주에 걸쳐서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관없습니다. 내 맘입니다.
II.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 1: 사랑함
아내에 대한 남편의 덕목을 사랑함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랑하라고 번역된 이 성경 본문의 희랍어 원문입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아가페테’(ἀγαπᾶτε)라는 명령형 동사가 사용이 되었는데, 이것은 ‘아가파오’(ἀγαπάω)라는 동사에서 온 것이고 여기에서 온 명사가 바로 ‘아가페’(αγαπη)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사랑’이라고 번역된 이 말을 당시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 사람들은 관계에 따라 네 가지 단어로 나눴습니다. 남녀상열지사를 이르는 사랑은 ‘에로스’라고 이해했고, 형제간의 사랑은 ‘필리아’라고 이해했으며, 부모 자식 간의 혈연적인 사랑은 ‘스톨게’라고 사용했고, ‘아가페’는 인간에 대한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로스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했으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이 명령은 대단히 의미 있는 것이었고, 교회 밖에 있는 당시 로마 사회의 불신자들에게는 더욱 생경스럽거나 충격적인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A. 로마사회와 아내
이해를 위해서 잠시 여러분을 로마 시대의 사회로 데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가정을 단위로 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일찍부터 가정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가정이 견실하고 확고한 질서의 토대 위에 놓일 때 그 가정들이 집합체로 모여서 피라미드와 같은 안정된 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과 부부사이의 질서를 확고히 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제까지 로마 사회에 대해서 이루어진 전통적인 연구를 통해 로마의 가정은 기본적으로 대가족 사회이고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획일적인 구조로 로마 가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핵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풍조도 꽤 많이 있었고, 커다란 공동체가 아닌 남녀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뭉쳐진 작은 단위의 가족에 대한 관념이 로마 사회에도 상당부분 존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서신이 쓰였던 주후 1세기경은 골로새 지방만이 아니라 로마 전역에 철저한 남존여비 사상이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라든지 가정의 질서라든지 사회의 구조 등, 모든 것들은 남성 중심의 이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남성은 힘과 권력, 외적인 힘을 가지고 가정을 규율로 통제하고 자녀들을 복종시키고 올바른 시민 교육을 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아내를 철저한 규율 속에 복종시킴으로써 가부장적인 체제를 가정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역할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자녀를 생산하고 가사를 돌보고 청결하고 말이 많지 않고 겸손하고 무엇보다 순결을 지키는 여성이 높은 덕목을 가진 여성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내가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 공공장소에 모습을 드러내고 거기에서 자기 의견을 발표하는 것은 남편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학의 역사나 예술의 역사, 혹은 문학의 역사를 보더라도 19세기까지 유럽 사회에서 천재적인 여성들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여성들에게 그런 천재성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정 바깥에서 그것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로마 시대에 있었던 여성 인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학계에 의하면 주후 1세기 경, 로마시민의 평균 연령은 25세였습니다. 대부분 25세면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일찍 떠나는 사람이 절반, 그보다 더 사는 사람이 절반정도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여성들, 가임기에 있는 여성들이 많이 죽었는데 아이를 낳다가 죽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속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배경을 살펴볼 때 로마의 평균적인 시민들은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아내는 남편에 의해 얕잡아 보이고 위협을 당하고 강박을 당하며 때로는 폭력에 피해를 받으며 다스려져야 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할 때 ‘아가페테’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시대의 사회적인 정신에 저항하며 로마 사회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새로운 가정의 질서와 모습을 이루도록 소명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번역되었고, 아내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되었기 때문에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이 자녀의 부모에 대한 복종보다 훨씬 더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것이라고 이해를 하지만 희랍어 성경을 보면 정 반대의 해석이 나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는 ‘아쿠오’(άκούω)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잔말 말고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할 때는 ‘휘포타쏘’(ὑποτάσσω)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의 순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내를 깔보고 얕잡아 보고 위협하고 강박으로 다스리던 당시 사회의 분위기에 저항하면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계의 완성을 향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정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B. 사랑: 성향과 행위
남편들은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할 때 그 사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사랑은 성향과 행위에 있어서 어떤 것을 뜻하고 있을까요?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랑은 타자와 끊임없이 관계를 갖고자 하는 영혼과 정신의 작용입니다. 본질적으로 사랑은 영혼의 경향성이고 이 경향성이 마음에서 나타날 때는 성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현상적인 측면에서는 끊임없는 인간의 관계성과 연관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에 속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감정으로만 보는 것은 그리스적인 사유의 산물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리스 철학에서도 사랑을 단순한 감정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정적인 요소를 훨씬 중시하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도 철학자에 따라서 각각 다릅니다. 오히려 성경적으로 볼 때 사랑은 이성과 감성 전체에 걸쳐있는 전인적인 영혼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교에서 이루어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혹은 ‘이기설’(理氣說)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많은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성경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만큼만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단칠정’이라고 하는 것은 일곱 가지의 정과 네 가지의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단’이라고 할 때 ‘단’은 끝을 가리키고 ‘칠정’이라고 할 때 ‘정’은 인간의 정을 의미합니다. 유교에서는 인간을 ‘인의예지’의 ‘덕’ 자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인의예지를 이룰 수 있는 가능태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봅니다. 즉,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사랑하고 사느냐에 따라 인의예지를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짐승 같은 삶을 사는 타락한 존재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유교의 인간관입니다. ‘사단’은 이성의 속하는 작용이고, ‘칠정’은 인간의 감정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성만 있고 감정이 없는 인간도 삶을 영위할 수 없고, 이성 없이 감정만 출렁거리는 인간이 영위하는 삶은 진정한 의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동물적인 생존입니다. ‘사단’은 네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불쌍한 사람을 보며 가엾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치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오지심’(羞惡之心), 분에 넘치는 무엇을 받았을 때 그것을 사양할 수 있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른 것이 혼재할 때 그것에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시비지심’(是非之心), 이것이 ‘사단’입니다. ‘단’은 끝이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측은지심’과 ‘수오지심’, 염치를 아는 ‘사양지심’과 ‘시비지심’이 이성의 맨 끝에서 불붙듯이 터쳐서, 실제로 불쌍한 자를 측은히 여기는 자비로운 행동을 할 때,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판단이 섰을 때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일 때, 염치를 아는 자기 자신의 교양을 무엇인가 사양하면서 그것을 실제로 실천할 때, 오류와 진리 사이에서 올바른 것을 실제로 구별하여 용기 있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이 때 측은지심은 ‘인’을 이루게 되고, 수오지심은 ‘의’를 이루게 되고, 사양지심은 ‘예’를 이루게 되고, 시비지심은 ‘지’를 이루어서 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이 맹자에 나오는 이론입니다.
‘인의예지’가 인류를 참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대의라고 보았고, 한(漢) 나라 시대에 와서 ‘동중서’(董仲舒)는 이 네 가지로 부족하니 ‘신’(信) 하나를 더 붙여야 한다고 해서 ‘오상’(五常)이라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삼강오륜’(三綱五倫) 같은 윤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동양철학에서는 분명하게 사랑을 이성의 작용에 두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이 어떤 방향으로 자신을 설정하는가에 따라 아래에서 인간의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감정이 출렁거리면서 그를 이런 삶으로 이끌기도 하고 저런 삶으로 이끌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통합적인 측면에서 사랑을 본다면 결국 사랑은 이성의 작용만도 아니고 감정의 작용만도 아니고, 이성과 감정 사이에 걸쳐있는 영혼 전체를 포괄하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마음이 움직이니까 하는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을 감정의 측면에서만 본 것이고, 그런 것이 없어도 사랑을 해야 된다는 것은 이성의 측면에서만 본 것입니다. 우리들이 결혼을 하기 전에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할 때는 서로를 사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침에 깨고 나면 그 사람 생각이 나고 만나고 돌아서면 보고 싶고 저녁에 되면 내일 아침에 만날 텐데 그립습니다. 그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즐거움이고 망설여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 남편과 아내가 살아갈 때는 저절로 사랑이 되는 때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많은 경우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만난 여성도들 가운데는 결혼한 지 10년, 15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남편의 목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설레고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얼굴이 붉어진다는 사람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한 명도 못 만났습니다. 사랑의 원인을 수반 물리학에서는 도파민이라고 보는데 도파민의 유효기간은 18개월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의 임기를 18개월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되니까 사랑을 하게 되는 때도 있지만 해야 하니까 사랑을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결혼할 때 꿈꾸지 말고 쿨 하게 하라는 이유입니다. 반쯤은 사랑이 되는데 태반은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입니다. 여성만 그렇겠습니까? 남성은 더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사랑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반 물리학자들은 인간을 자연 상태로 내버려 두면 겨우 18개월 정도라고 보는데 민감도가 떨어지는 사람은 그 이하일 수 있고 나은 사람이라야 좀 더 길어질 수 있을 뿐, 결국 권태기라는 것은 찾아옵니다.
부부가 살다가 권태기가 느껴집니다. 후하게 잡아서 3년, 4년 정도 쯤 권태기가 슬슬 온다고 합시다. 관계가 서먹해지는데 아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이 태어나면 사실은 아내하고 같이 있을 시간도 없고 아내는 모든 정신을 아이에게 다 빼앗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아이를 가운데 놓고 대화가 이루어져서 이 아이가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여보, 얘가 웃었어. 얘가 걸었어.” “오, 그래?” 그러면서 아이를 징검다리로 부부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예쁩니다. 예쁜 기운이 사라질 때쯤 둘째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재미있습니다. 그러다가 셋째를 봅니다. 그러다 보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가슴 설레는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친구 같은 감정이 흐르고 진짜 식구가 된 것 같은 끈끈한 가족 관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은 쉽지만 그 사이에 수많은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결함이 많은 아내를, 결점이 많은 아내를, 될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되지 않을 때도 사랑하며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아가페와 까리따스에 대한 이해로 돌아가게 됩니다.
C. 아가페와 까리따스
성경은 사랑의 원천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독생자를 화물제물로 주셨음이라”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으니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셨기에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랑으로 인류를 창조하셨고, 창조된 인류와 영적인 관계를 맺고 가족과 같은 사랑 속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하나의 사랑으로 묶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셔서 당신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격차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후로는 그 인간의 몸의 일부를 취하거나 생식을 통하여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인류가 태어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고백은 남녀의 사랑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가 하나님 안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나누면서 공존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인류는 타락했고 이로 말미암아 사랑하여야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찢어져 버렸습니다. 찢어짐은 극단의 미움과 시기심으로 나타났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대신, 서로는 서로에게 찌르는 칼과 화살이 되었습니다. 이런 관계를 고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 용서를 베푸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이상 인간에게 보여줄 수 없는 찬란한 방법으로 보여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도성, 인신(人身)인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사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들을 대속하기까지 희생하심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이 되셨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되, 그 기준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절망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너희도 아내를 위하여 그렇게 하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명령입니까? 여성들은 앞 구절을 보면서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느냐고 투덜댈지 모르지만 남성들은 더 가혹한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별로 되지 않을 때도 사랑하되 체면치레 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의 생명을 버리신 것처럼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는 남편이 가련하지 않습니까? 어떤 남편도 이 기준 앞에서 아내를 충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고 흠이나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사랑의 계획과 의도를 생각하면 남성들은 자신이 부름 받고 있는 높은 아내 사랑의 기준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 희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한 우리들을 돌보시고, 돌본 우리들을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용서한 우리들이 온전케 되기까지 지금도 교회를 사랑하기를 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진정한 결혼의 정신은 이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만나 아내의 희생을 딛고 자신의 꿈을 성취해야 되겠다거나 혹은 아내의 희생을 발판삼아 자신의 비전을 성취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결혼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은 아내를 만나 그의 허물과 잘못, 그의 나쁜 것을 발견할 때마다 ‘저 사람이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저런 상태로 일평생 살았을 사람인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셔서 아내의 모자라는 것들을 나로 하여금 보충하게 하기 위해서 이 여자에게 붙여주셨구나.’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무한히 사랑하시는 것이 가능했지만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아내의 결점과 결함, 심지어 오류와 악을 발견하면서 그것이 바로 나를 이 여자의 아내로 붙여주신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남편의 희생을 요구하는지를 생각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그것을 성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깨달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남편들에게 결함이 많은 아내를 붙여주시고, 아내들에게는 결함이 많은 남편을 붙여주셔서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내를 참되게 사랑한다면 아내의 결점과 결함을 볼 때 가엾은 마음이 들 것이고, 이런 결점을 보완하여 내 아내가 그런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항상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결점을 잘 이해하고 약점으로 알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약점을 지적하면 자신을 비난한다고 반격하기 일쑤이고, 자신을 향한 사랑이 식었다고 비난을 일삼습니다. 그 속에서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향해 베푸신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가 이 결함이 많은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고 많은 희생을 동반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대역죄를 지은 나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당하신 고난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어려운 아내를 발견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시는 고난을 기억하면서 오히려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 생겨나는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경건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못된 아내들도 많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한 번도 그놈의 성질 머리를 죽여본 적이 없는 여자들도 있고, 시집오기 전에 자기 집안에서 버릇없이 자란 그것을 가정에서 남편이 모두 받아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못된 아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제일 좋은 것은 첫 번째, 고를 때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일단 선택한 다음에는 유효 기간이 없습니다. 반품 기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운명이라고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아내를 향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정말 어려울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그 아내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을 때, 그리고 아프게 하였을 때, 폭언 혹은 폭력으로 자신에게 수치심을 안겨주었을 때 남편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여태까지 붙들고 있던 관계의 끈을 놓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갈등 속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끝까지 아내 사랑하기를 포기하면서 사는 남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화) 남자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중의 한 친구에게 다른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아참, 지난주가 자네 결혼 20주년 아니었어?” “아, 그랬지.” “아내에게 선물 해줬어?” “어. 해줬어.” “뭐 해줬는데?” “그냥 다이아반지 하나 해줬어.” 친구들이 “와” 그랬습니다. 그 중의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왜 그랬어? 너의 아내는 몇 번씩이나 우리 있는 데서도 결혼 20주년 기념으로는 지프차를 선물 받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맞아. 그랬지. 그렇지만 이 사람아, 어디에서 지프차를 가짜를 구하겠니?” 아직 무슨 소린지 저 뒤 쪽에서는 이해를 못했습니다. 결혼 10주년을 맞은 친구에게 또 다른 친구가 물어보았습니다. “결혼 10주년에 자네는 아내에게 무엇을 해줄 거야?” “늘 아내가 집에서 살림하느라고 고생만 해서 호주 여행을 시켜줄 거야.” “와, 10년 선물치고는 너무 센 거 아니야? 대단하다. 그럼 20주년에는 무슨 선물할건데?” “데려와야지.” 이런 가십을 들으면서 우리는 웃습니다. 돌아서면 마음이 개운하지 않고 부유물 같은 것이 마음에 남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골프를 치는데 정말 못 칩니다. 이번에도 공이 수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투덜대며 걸어갔는데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내가 하늘에서 당신을 봤는데 당신 참 괜찮은 사람이더라. 그래서 내가 감동을 받고 당신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지금 말해라. 그 대신 네가 자신에 대해서 무슨 복을 빌든지 아내는 두 배로 받는다.” “좋습니다.” “그래. 뭘 원하니?” “요정님, 골프 좀 잘 치게 해주세요.” “왜?” “오늘도 보세요. 부부가 편먹고 치는데 할 때마다 우리가 꼴찌입니다. 정말 창피합니다.” “그래? 그러면 타수를 내려줄게. 잘 치게 해줄게. 그 대신 네 아내는 너보다 두 배 잘 친다.” “문제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합산하는 거니까.” 그래서 골프를 잘 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저를 백만장자로 만들어 주세요.” “그래? 너는 백만장자가 되고 네 아내는 이백만 장자가 된다.” “문제없습니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니?” 한참의 침묵을 깨고 숲속에서 이 남자는 요정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약한 심근 경색을 주세요.” 무슨 뜻인지 예배 끝나고 똑똑한 사람들한테 물어보십시오. 자기가 약한 심근 경색에 걸리면 아내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강한 심근 경색에 걸려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부부관계도 이렇게 피상적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그것을 극복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고, 독신으로 살면서 그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이상한 남자를 만나서, 괴상한 여자를 만나서 무한히 자기를 희생하면서 이 관계를 지속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런 사랑의 관계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복구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거기로부터 나타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끊임없이 아가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게 하셨습니다. 아내의 결함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섬김의 이유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으로 살아가다가 때로는 마음이 갈리고 관계에서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로 다투거나 아주 현저하게 남편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해서 이 여자를 다시 보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비결 하나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선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돈으로 주는 선물은 안 되고 휴가를 내든지 퇴근 후에 거리나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아내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터벅터벅 선물을 사러 길을 걸어가다가 갑자기 역한 감정이 막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나한테 해 준 것이 뭐가 있다고,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이렇게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선물을 사야 돼?’ 그러면서 앞에 있는 애꿎은 깡통을 발로 뻥 차고 그것도 모자라서 쫓아가서 발로 확 밟아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선물을 사러 다니는 것입니다.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은 ‘인연’이라는 수필 속에서 선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물은 자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그래서 선물은 때로는 사치스러워도 좋다.” 기껏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선물이라고 갖다 주었는데 아내가 반색을 하고 뜯어보니까 고무장갑과 수세미가 나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제일 썰렁한 것이 학교 다니는 애들한테 학용품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돌아다니면서 선물을 삽니다. 속에서 수많은 감정이 교차합니다. 저 인간에게 선물은커녕 이혼 통보를 해도 시원치 않은데 선물을 사러 다니면서 괴로운 번뇌의 순간을 넘기면서 선물을 사러 다니는 과정을 통해 자기 수양의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아내가 살림하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선물 하나를 삽니다. 이 속에서 분이 안 풀립니다. 그 선물을 예쁘게 포장을 합니다. 그래도 속에서 극복이 안 됩니다. 그러면 아내를 향한 원망하는 마음으로 이글거리는 미움을 빨간 장미꽃에 담아 그 마음이 크면 한 다발을 만들어서 집으로 들어갑니다. 아내는 아침에 그렇게 다투고 나서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몇 번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여보 점심 먹었어?” 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여보 미안해.” 솔직히 이야기해서 자기가 100% 잘못한 것은 아니고 6:4정도 잘못했는데 이게 10:0으로 굴복한다는 것은 너무 자존심이 상합니다. “여보,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결국은 내려놨습니다. 창문을 내다보니까 저기서 남편이 걸어옵니다. 손에 무엇을 들고 옵니다. “딩동” 하고 문을 두드립니다. 사실은 아내가 6:4 정도로 명백히 잘못을 했는데 남편이 선물을 들고 옵니다. “여보, 아침에 정말 내가 미안했어. 당신을 위한 선물이야.” 그리고 이야기하면 아내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생각나서 미안합니다. “뜯어봐.” 뜯어보니까 놀라운 선물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아내의 마음은 너무 창피하고 아침에 자기가 한 행동이 너무 유치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복수입니다. 그렇게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통쾌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복수했다. 정말 창피하지? 미안하지? 어쩔 줄 모르겠지? 선물이 과분하지? 이게 못된 너에게 안겨주는 나의 복수다. 받아라.’
복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원한을 남기는 복수와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가 있습니다. 원한을 남기는 복수는 끊임없는 원한에 원한을 불러일으킵니다.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에 완벽하게 드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내 아내도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결함을 발견하면서 원한을 남기지 않는 복수의 삶을 살아갈 때 한번 깨졌던 관계는 이런 복수를 통해 아주 견고한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남녀가 있는데 고운 정만 들었던 사람들이 못 헤어질까요? 미운정과 고운정이 함께 든 사람들이 못 헤어질까요? 후자입니다. 수없이 극복하면서 맺어졌기 때문에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 그 시작을 깨어진 부부 관계에서 시작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교회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의 완성은 높은 지위에 도달하는 것이나 많은 재물을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완성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완성입니다. 한 사람의 성숙의 정도는 그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수준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낄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바쳐서 사랑할 사람이 있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할지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내로부터 누적된 상처를 경험하고 지금도 관계에서 어려워하고 있는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아내의 결함이 완전하신 그리스도 앞에 가지고 있는 여러분의 결함보다는 작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불쌍히 여기시고 어떤 자비하신 사랑으로 이곳까지 인도하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모자란 것이 많아 보이는 여러분의 아내가 바로 여러분의 기업이고, 모자라는 것을 여러분이 채워서 아내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그 아내의 남편으로 붙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사랑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한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소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부르심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리시면서 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충만히 받은 우리에게 사랑의 일부로서 아내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내의 결함이 크고 부족한 것이 많아도 그것은 여러분의 기업입니다. 그와 더불어 영원한 유업을 함께 누릴 연약한 그릇이 바로 여러분의 아내입니다. 그 아내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일 없이는 여러분도 자신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희생과 헌신, 그리고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그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견디는 인내들을 지금은 아내가 잘 몰라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아내의 아름다움 때문에만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기로 다짐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비록 많은 순간 여러분의 이런 진지한 노력과 헌신이 아내에 의해 무시되거나 혹은 가볍게 평가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아내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부모도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우리 홀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때에 우리 앞에 서계신 분은 우리 아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오래 인내하며 모든 것을 참고 가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를 구원해 주신 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여자가 나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으로 성숙될 수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내 아내가 온전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내가 온전한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매일 고백하면서 살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 아내도 더디기는 하겠지만 그 진심을 알고 참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자신에게 신앙이 있고 양심이 있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