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혼을 소생시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
녹취자: 조경훈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을 한 후에 2절부터 차례대로 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신지를 진술해 나갑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2절에서는 먹고 입고 마실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공급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다면 3절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소생’이라고 하는 말은 원래 히브리말로 “살아있게 한다.” 라는 뜻입니다. 즉,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오니.”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때가 있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때를 경험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런 영혼을 다시 살려내시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영혼’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우리가 실제로 영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을 맨 처음에 창조하실 때에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보면 인간이 몇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흙으로 사람을 빚으셨습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아파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흙이 아니라 티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먼지를 모아서 그 티끌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이 티끌, 먼지는 가장 무가치 한 것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을 모아서 인간의 육체를 만드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넣어주신 것이 아니라 창조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흙으로 만드시고 후~우 하는 동작으로 영혼을 창조하셔서 그 육체와 영혼을 만나게 하심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이 땅으로부터 왔고 영혼은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둘이 결합되어 있고 때가 되어 죽을 때에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서 모두 썩어 티끌이 되어버리고 인간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불멸하게끔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이 징벌을 내림으로써 인간의 육체는 잠시 이 세상에 있다가 썩고 부스러져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땅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소비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총명한 눈빛으로 여기에 앉아서 설교를 듣고 있지만 일주일만 굶으면 아마 이렇게 앉아 있지 못할 것이고 물조차 안주고 3일만 굶어도 이렇게 앉아있을 기력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종전까지도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소비함으로 우리의 육체에 생명을 지탱합니다. 왜냐하면 육체는 땅으로 왔기 때문에 땅에 있는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늘자원이 필요합니다. 육체는 이 세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은 하늘나라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영혼은 부피나 넓이, 색깔, 길이 이런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영혼의 크기나 그런 것들을 잴 수 없지는 않습니다. 태어날 때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 영혼은 항상 내 안에 있지 다른 사람에게로 출장 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내 영혼은 있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때가 되면 우리의 육체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로 있어서 우리 안에서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고 활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영혼에는 아주 하등한 기능과 아주 고등한 기능이 함께 있습니다. 하등한 기능은 배고픔을 느끼고 목마름을 느끼고 욕망을 느끼고 이렇게 해서 육체와 자손의 번식을 도모합니다. 이에 비해서 영혼의 높은 기능은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의 의미를 추적하는가 하면 그것에 끌려 사랑을 느끼고 또 그것을 선택하여 실행하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함께 작용해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영혼의 고등한 기능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영혼의 하등한 기능부터 고등한 기능까지 모두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배고파도 배고픔을 느끼는 기능이 없다면 언젠가는 영양실조로 죽거나 혹은 거식증으로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적절히 그것을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과대한 욕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고등한 기능에 의해서 하등한 기능들이 잘 통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을 볼 때 안 믿는 사람을 죽은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죽은 영혼은 없습니다. 영혼이 멸망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멸망하지도 않습니다. 영혼은 창조된 시점은 있지만 멸절되는 시점은 없습니다. 신자의 영혼이든 불신자의 영혼이든 영원히 불멸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시간과 공간 안에 태어나고 변하고 죽고 소멸합니다. 심장의 박동이 멈추고, 호흡이 그치고, 피의 흐름이 종식되고, 뇌의 작용이 모두 멈춰서 더 이상 생명체로서 기능하지 않을 때 그것을 우리는 육체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은 육체와 다르기 때문에 죽었다는 의미가 똑같지 않습니다. 여기 컵이 있는데 “컵이 있다.” 이 말과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 라는 말은 똑같지만 있다는 의미는 다릅니다. 컵은 높이 12센치 직경 8센치 짜리가 이런 모양에 하얀 색깔로 설교자의 손위에 강대 위쪽에 있다고 말 할 수 있지만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할 때에는 몇 센치 무슨 색깔 크기는 얼마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한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고 육체가 죽었다라고 할 때와 영혼이 죽어있다고 할 때에는 의미가 다릅니다. 육체처럼 영혼은 죽지 않기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의미가 다릅니다.
‘영혼이 죽었다.’ 죽은 영혼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주셨을 때에 의도하셨던 대로 영혼이 작용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그 영혼을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제일 먼저는 하나님 당신을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습니다. 학문을 통해서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잘 이용해서 옆으로는 사람을 알고 그 사람과 함께 사회를 이루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서 이 세상을 가꾸어 창조될 때보다도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습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누군지 몰라보고 알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그 뜻대로 살지도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 배우지도 않고 인간에 대해서 알거나 사랑하지도 않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갈 때에 그 영혼은 죽은 영혼이라고 합니다. 절대로 영혼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래 영혼을 주신 목적대로 그 영혼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육체는 죽으면 동작이 없고 행동은 멈춥니다. 영혼은 죽으면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그것을 성경은 육체의 죽은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육체는 있는데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만들어내는 수많은 죄들을 짓게 됩니다.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끊임없이 죄를 짓습니다. 그것이 죽은 영혼의 행실입니다. 영혼이 죽어있다고 할 때 엄밀하게 말하면 영혼이 고장이 난 것입니다. 그것을 죽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영혼이 죽었다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이 ‘이거다!’ 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생명은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두 가지 특징을 갔는데 첫째는 환경에 대해서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든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자기 닮은 것을 끊임없이 복사해 냅니다. 동물의 경우에는 생식이라고 이야기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전사라고 합니다. 계속 복사해 내는 것이 생명의 특징입니다. 영혼이 살아있을 때에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반응을 합니다. 죄와 유혹이 온다면 그것과 싸웁니다. 불의와 타협을 할 시점이 온다면 그것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음성인줄을 알고 하나님을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혼이 그것에 대해서 반응합니다. 생명이 없을 때에는 그런 반응이 없습니다. 한 쪽에서는 말씀을 들으며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성령의 은혜를 받고 한 쪽에서는 딴 생각을 하면서 세상 번뇌에 사로잡힙니다. 영혼에 생명이 없으니까 예배도, 기도도, 모든 것도 그에게 어떤 반응을 끌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영혼의 죽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활기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지는 않은데 겨우 꼴딱꼴딱 식물인간처럼 숨만 붙어 있습니다. 식물인간까지는 아니라도 간신히 눈을 뜨는데 몸을 움직여서 그 현실에 대해서 뭔가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졌을 때 우리는 그 영혼이 죽은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감격적으로 고백을 하는 이유는 바로 영혼을 살아나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신의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탁월한 신앙의 사람도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이 되었던 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훌륭한 시인이 무엇 때문에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요즘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로 바꾸면 ‘영적침체’라고 부릅니다. 무엇 때문에 그 영혼이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시편은 어떤 때에 우리의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이 된다고 말합니까? 현상적으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가지 때문에 영혼이 죽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죄’입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예뻐하셨는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 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뒤 따라 오는 자’ 혹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 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바라보실 때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과 다윗의 마음을 묶어서 하나가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두 사람의 마음이 같아지게 되고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찾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지명되었고 왕이 실제로 될 때까지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순종했습니다.
그러다가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비교적 순결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에게 씻을 수 없는 두 가지의 커다란 죄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왕으로서 한 나라의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행정적인 일이었습니다. 인구조사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동기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나라들이 인구를 조사하는 이유는 오늘날과 같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인의 수요를 헤아려서 전투력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때에는 말과 병거와 같은 국방무기에 관한 것들도 함께 조사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습니다. 당시 왕들이 그것을 조사하면서 스스로 우리나라는 이렇게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고 강력하다는 것을 뽐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이 그런 풍습을 따라가면서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군사력을 더 의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에게 사로잡히고 미혹되어서 바보같이 다윗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그 일을 행하게 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매우 진노하셨고 수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역으로 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보다 더 커다란 죄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이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그는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아온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눈에 반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불륜이었습니다. 그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영혼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나단 선지자의 깊은 책망을 받고 회개를 하게 됩니다. 한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이새의 아들 다윗이 성경에 이르기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기에 심히 악하였더라(삼하11:27)” 라고 하는 데까지 가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절망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탄식이 참회의 시 속에 녹아있습니다.
우선 그는 하나님이 구원의 기쁨을 모두 걷어 가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큰 의무는 예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예수를 믿어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다 기뻐할 수 있는 이유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면 독특성이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기쁘다.” 하지만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돈 많으면 기뻐합니다. “아들이 잘 돼서 자랑스럽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굴이 예뻐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세상 사람들도 예쁘면 다 좋아합니다. 그런 것 말고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기뻐하는 여러분들을 볼 때 여러분들이 왜 그렇게 기뻐하며 사는지를 궁금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믿을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다윗은 간음 사건이 있는 후에 그 죄를 덮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간접적인 방법이지만 살인을 하게 됩니다. 그 죄가 더해지면서 깊은 속으로 들어가는데 다윗은 구원의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 주셨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까지를 느껴졌습니다. 앞 선임자인 사울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하나님께서 거두실 때에 어떻게 되는지를 다윗이 똑바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가시니까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일평생 미치광이처럼 살다가 죽어버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될 것 같은 깊은 위기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깊은 침체는 사실 죄 이외에 다른 요인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말 할 것입니다. 내가 내 영혼이 깊은 침체 속에 있다는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생명이 없고 활력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죄를 제가 그렇게 많이 졌습니까? 신문에 나올만한 죄를 진 것도 아니고 경찰에서 나를 찾아다닐 죄를 지은 적도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화) 어느 대학의 실험실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를 논에서 잡아서 납작하게 된 비이커에 냉수를 붓고 거기에다 놓았는데 개구리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1초에 0.02도씩만 올라가게 밑에 불을 붙이고 1시간 20분 뒤에 개구리는 푹 삶아졌습니다. 개구리를 잡아다가 따뜻한 물에 넣었으면 어떠했을까요? 쑤욱 들어가면서 개구리가 시원하다 그랬겠습니까?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러고 뛰어나갔을 겁니다. 살림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애들이 비오는 날 진탕에 뒹굴고 와서 마루로 뛰어 들어오면 마루가 온통 더러워집니다. 야단을 치고 옷을 벗긴 후에 걸레로 싹 닦으면 깨끗한 새 집이 됩니다. 이사 온 지 한 6-7년쯤 지나서 싱크대를 갈아야 되겠다고 해서 한 번 뜯어보았습니다. 뒤에 있는 기름때와 시커먼 것들이 걸레로 닦아집니까? 안됩니다. 약품을 발라서 날 잡아서 빡빡 문질러서 닦기 전에는 닦이지가 않습니다.
(예화) 여러분들이 듣기에 불편하실 수도 있는데 이거보다도 더 좋은 예화가 없어서 예화로 드니까 용서하시고 끝까지 참고 들어주십시오. 요즘은 참 좋아져서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사람들이 가서 이런 교회시설에서 변을 보면 여기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통로를 타고 자기가 다 갑니다. 옛날에는 건물 지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똥통을 파는 것 이었습니다. 교회에 들어갈 사람이 천 명쯤 들어간다면 천명이 대변을 보고 그것을 저장할 수 있는 통을 팝니다.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퍼낸다고 치고 여러 개의 방이 있어서 스스로 그것이 걸러집니다. 그리고 거기에 종균을 집어넣어서 그것을 스스로 부패시킵니다. 그 안에서 그렇게 정화작용을 하지만 6개월이나 1년에 한 번씩 그것을 퍼내야 됩니다. 우리는 칠 백 인분짜리를 파고 교회를 맨 처음에 만들었는데 성도들이 2천명쯤 되었을 때는 6개월에 한 번씩 퍼도 모자랐습니다. 구청에 풀 때가 되었다고 오라고 우리가 신청을 하면 그것이 너무 더러운 작업이니까 낮에는 안하고 항상 새벽에 차가 오게 됩니다. 참 이상한 것이 그 차가 새벽에 올 때는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음악을 틀어놓고 옵니다. 베토벤이 그런 곳에 틀라고 그 곡을 작곡한 게 아닌데 ‘띠리리리리리리~’ 하고 차가 옵니다. 새벽에 아저씨들이 차에서 내려서 호스를 쭉 끌어서 쾅 집어넣어서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쿨컥쿨컥쿨컥 하면서 게이지가 막 올라갑니다. 빈차로 왔는데 이만큼 차는 것입니다. 그러면 게이지를 보고 몇 리터를 펐다고 사인한 종이를 건네받고 우리는 거기에 나오는 돈을 은행에 가서 내게 돼있는 것입니다. 다 펀 후에 차가 가다보면 거기서 건더기가 출렁출렁 거리면서 가는 것이 유리창으로 보입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그 차는 또 거리를 달려가는 겁니다. 지나가면서 보면 볼수록 유리 사이로 출렁거리는 것이 보이는데 얘기만 들어도 역겹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한 국자를 퍼고 그것을 여러 개의 거름지로 걸러서 스테인리스로 된 예쁜 스프레이 병에 담아서 잠그고 빨간 카펫이 깔려있는 예쁜 집에서 아침 햇살이 들어올 때 공중에 쉬익 쉬익 하고 뿌렸습니다. 그러니까 노르스름한 수증기가 쫙 퍼지는 겁니다. 그것을 볼 때는 이상하게 더럽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방도 카펫이 깔린 방이고, 아침에 햇살이 비치고 고급스런 인테리어 위에서 스테인리스로 된 예쁜 병에서 푸우 하고 나가는데 색깔도 약간 노르스름한 빛이 수증기가 되어서 쫙 퍼지는 겁니다. 건더기가 출렁거리면서 가는 똥이나 공중에 작은 물방울처럼 퍼진 것이나 본질이 다르겠습니까? 다르지 않고 동일한 본질입니다.
(예화) 어느 군인들이 시냇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병사들을 불렀습니다. 세 명의 병사에게 “그대들은 가서 즉시 50킬로씩 돌멩이를 이 자루에 담아온다. 실시.” 하고 자루 세 개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병사는 가서 50킬로짜리 돌멩이 하나를 자루에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두 번째 병사는 30킬로짜리 하나 20킬로짜리 하나를 자루에 넣어가지고 왔습니다. 세 번째 병사는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것을 가지고 오라는 게 아니라 짊어지고 어디로 이동을 할 것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편안하게 그것을 들고 갈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저렇게 큰 돌이면 어깨가 아플 것 같아서 자잘한 공깃돌 천 개를 주워서 자루에 담아가지고 갔습니다. 저울에 달아보니까 무게가 거의 다 50킬로 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명령이 군인들을 황당하게 하였습니다. “모두 이 돌멩이를 제자리에 갔다 둔다. 실시.” 하나 가지고 온 사람은 정확하게 그 자리에 딱 갔다 두었습니다. 두 개 가지고 온 사람은 약간 헷갈렸지만 마찬가지로 딱 갔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천 개를 가지고 온 사람은 한 개도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신문에 나올만한 죄, 경찰에 수배를 받을만한 죄를 짓지 않았지만 기도를 못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주님의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는 것, 십자가 사랑에 감격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이 우리 안에 영적인 생명이 심각하게 고갈됐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죄 이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시인은 그런 영혼의 깊은 고갈을 경험했습니다. 시인은 돌멩이 큰 것 두 개를 지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셨을 때 자기의 죄에 대해서 생각이 안 난 것이 아니라 또렷했습니다. 그래서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 번도 잊어버릴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보내셔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니까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승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공부했고, 두 번째로 영혼이 죽은 것처럼 되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세 번째로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나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정답부터 얘기하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이 그 용서를 경험합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을 때와 똑같은 순서를 따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도 어제 하루 동안 헌금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예배당에 들어왔는데 헌금을 발견했습니다. 이거 돈이네. 헌금이네. 이것은 지식입니다. 얼마나 들었을까? 저 돈을 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쓰면 얼마나 좋을까? 이끌리는 사랑이 생겼습니다. 사방을 돌아보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가지고 갔습니다. 의지입니다. 죄가 성립을 한 것입니다.
회개도 똑같은 순서입니다. 집에 가서 하루 자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탁자 위에 헌금이 있었습니다. ‘이게 뭐지? 헌금이잖아. 이거 교회 돈이잖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지성입니다. 두 번째로 이것을 내가 왜 가지고 왔을까? 후회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돌려줘야지 하고 가지고 와서 여기다 올려놓음으로써 회개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갖기 전까지는 누구든지 자기가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죄에 대해서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죄라고 깊이 느끼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신앙 생활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머리입니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해야 됩니다. 그 때 그 말씀이 바로 지성 속에 들어오면서 자기가 어둠 속에서 잘 몰랐던 것들을 깨달으면서 그것이 죄라는 것을 발견해야지만 그 일 한 것을 후회할 수 있는 것입니다. 후회를 해야지만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 속에서 회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다닐 때까지의 교회 분위기를 기억하면 회개하라는 말 빼놓고는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대부분 잡아먹을 듯이 회개하라고 설교하셨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항상 가슴에 찔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모두 회개를 했습니다. 이처럼 강단에 말씀이 바로 서서 죄를 죄라고 지적해 주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우쳐 줘야 됩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든지 싫어 하든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요리사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병원에 가면 돈 많이 주고 진짜 더러운 대접을 받습니다. 저는 몸이 좀 아파보면서 세상에 의료행위만큼 비인간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검사 한번 하려면 세포를 뜯어내거나 항문에 뭘 집어넣어서 조사를 하거나 어떤 때는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내 몸을 마구 대하며 평소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이상한 일을 내 몸속에 행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야지만 건강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의사가 하는 일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설교자를 미워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회개하고 주님을 만나서 설교자에게 감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각자가 할 일입니다. 그것이 설교자로서 운명이구나 생각하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들어갈 때 비로소 “아!” 그러고 죄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요새 계란 잘 안 먹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살충제를 거기에 쳤다고 해서 안 먹잖아요? 아무리 살충제를 많이 쳤어도 누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퍼먹고 있을 것입니다. 알고 나니까 안 먹잖아요? 그래서 지성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이 한마디를 명심하십시오. 초점을 잃은 흐릿한 눈으로는 천국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천국은 똑똑한 사람들이 가는 나라입니다. 세상에 공부 잘 하는 똑똑함을 말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알기 위해서 지성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사람들을 위해 천국은 예비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아 이런 뜻이구나. 아 이런 분이 하나님이구나. 아 죄가 이런 것이구나. 그것을 깨달아 가면서 비로소 회개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 회개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절대 몰랐을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게 됨으로 우리에게 주옥과 같은 시편을 남겨주었던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서 확 살아나게 하셨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죽은 자의 영혼을 그렇게 확 살아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공로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목적이 있고 의도가 있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의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의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말장난인지 모르지만 ‘불의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의롭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게 뭔 뜻입니까? ‘의롭다.’ ‘불의하다.’ 라고 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그 기준이 그 당시에는 모세가 전해준 율법이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없을 때에 우리는 무슨 질문을 많이 합니까?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이렇게 묻잖아요? 컴퓨터 게임에 대해서, 흡연에 대해서, 동성애에 대해서, 저작권침해에 대해서, 마약에 대해서, 중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그러면서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다윗시대에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질문했습니다. 만약에 지금 모세가 살아있다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모세는 뭐라고 말했을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그것을 대변해 준 사람들이 선지자들이였습니다.
선지자들을 예언자라고도 부르는데 예언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씀 사역 중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는 것은 아주 일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미래에 대해서 미리 가르쳐주지 않으십니다. 미래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보여주셨는데 미래에 대한 전망이 너무 밝고 경쾌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미래가 너무 암울하고 비참해도 어차피 그렇게 되기로 결정된 것이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원래의 의도에 어긋납니다. 하나님이 왜 모든 짐승 중에 하필 양을 우리 인간에 비유하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양이 인간을 의존하며 살도록 창조된 것처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매 순간 의존하게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가 나는 미래에 대해서 안다고 얘기할 때 그것은 99.999999 퍼센트가 거짓말입니다. 특별한 경우 꼭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미래에 대해서 알려주실 때가 있습니다. “너희는 애굽을 탈출한다. 너희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다.” 이런 것을 하나님이 알려주시는데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모세는 주전 15세기 사람입니다. 이 시편이 쓰여 지기 500년 전인 주전 10세기 사람입니다. 500년 전에 쓰여 진 모세의 율법의 때와 500년 후의 다윗의 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500년 전의 조선시대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완전히 다릅니다. 달라진 시대에 그 율법이 적용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 기준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 예언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람으로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풀어서 500년 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아.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하면서 결심을 하고 회개를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길을 걸어갔는데 그 길이 의의 길입니다.
의라고 하는 개념은 바깥에 있는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감정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부로부터 밖에까지 하나로 뻗어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예수님도 하십니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알리라.” 하셨습니다. 엄청나게 공부를 많이 한 식물학자가 아닌 한 모든 나무를 잘라 버리고 뿌리만을 뽑아서 거꾸로 세워놓고 이게 무슨 나무냐고 물어볼 때 알아맞힐 사람은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도 궁금하지만 싹이 이만큼 나오는데 뭔지 모르겠지만 기다려보면 됩니다. 그 나무가 성장해서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나무가 배나무에서는 배가 감나무에서는 감이 맺히게 돼있습니다. 원래 감이 하나도 안 달렸을 때에도 그 나무는 감나무였습니다. 그 감나무가 성장을 하니까 감을 열매로 맺듯이 한 사람이 의롭다는 것과 의로운 행동을 한다는 것은 구별 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됩니다. 마음에는 의가 없는데 다른 이유 때문에 가끔 의로운 행동을 하면 위선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회칠한 것을 나무란 것이 아니라 예쁘게 회칠을 해서 하얀 것이 됐으면 문을 열어보면 속에도 깨끗해야 됩니다. 그런데 썩은 뼈가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회칠한 것을 나무란 것이 아니라 밖으로는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속에는 의롭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가 아닙니다. 의는 속과 겉이 일치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는 상태가 된 것이 ‘의’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율법적인 의’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또 다른 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제는 새로운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획득한 의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믿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게 하시는데 이것을 “칭의의 구원” 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죄인인데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면 그 다음은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그분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순종의 원인은 주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시대의 의로운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을 다시 해석하셔서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따라 사는 마음, 삶, 모든 것을 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 의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죽은 영혼을 살아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젊은 시절을 아주 극도의 가난 속에서 보냈습니다. 뜻하지 않게 공부를 계속하고 32살에 교수가 됐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조금 낳아졌지만 가난했던 것 같습니다. 약 4년 쯤 지난 다음에 다른 학교에서 저를 초청을 해서 그 학교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에서 면접을 하는데 “교수님. 주거환경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전세 2천 500만원에 네 식구가 방 2칸에서 살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니까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하더니 5천만원을 10년간 무이자로 빌려주고 10년 후에 갚으라고 했는데 솔직히 얘기하면 그냥 준거나 다름없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강남 방배동에 있는 언덕에서 살고 있다가 40평형 빌라에 세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온 동네를 뛰어다니면서 우리 집은 화장실이 2개 이고 이 끝부터 저 끝까지 한참 달려가야지 끝이 나온다고 자랑을 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때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제가 좀 알려져서 여기저기서 오라는 데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운전해 주는 사람도 없고 개척교회였기 때문에 제가 차를 몰고 다녔는데 1년에 5만 내지 6만 킬로를 탔습니다. 카센터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 “아저씨 영업하세요?” 라고 묻더라구요. 그것도 복음을 팔러 다니니까 그것도 영업은 영업이지요. 그때 충청북도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강연을 해 달라고 저를 초청해서 불렀습니다. 일치감치 집에서 출발을 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차가 꽉 막혀서 뭔가 했더니 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을 때 시간이 조급해서 시골길에 아무것도 없어서 80킬로 달리게 돼 있는 길을 한 100킬로 넘게 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저기서 파란 옷을 입은 경찰이 손을 들고 차를 세우는 겁니다. 속도를 줄이고 차를 가서 세웠더니 “수고하십니다. 면허증 좀 봅시다.” 그래서 왜요? 그랬더니 “선생님은 속도위반 하셨습니다.” 언제 속도위반을 했냐고 보자마자 속도를 줄였는데 그랬더니, “여기서는 위반을 안 하셨는데 산 너머에서 위반하셨습니다.” 그래서 산 너머에서 위반했는지 어떻게 아냐고 그랬더니 거기에서 자기 친구경찰이 선생님 차를 스피드건으로 쐈는데 20킬로 이상을 위반했다고 나와서 저한테 무전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할 말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내가 좀 바빠서 그랬다고 그러니까. 뭐하시는 분이시냐고 물어서 저는 대학교수인데 여기에 있는 이 대학에서 강연을 해 달라고 불러서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더니 갑자기 태도가 예의바라지면서 교수님이셨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벌점 없는 싼 거로 끊었습니다. 라고해서 아. 머. 어쨌든 좋다고 그러면서 뭔 소린지도 잘 모르고 저는 급해서 종이를 받아가지고 햇빛가리개 있는 곳에 넣고 그 학교를 갔더니 간신히 시간에 맞게 도착을 해서 강연을 잘 하고 밤에 차를 몰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교회로 출근을 했는데 교회의 직원한테 이거 갔다 내라고 그럴까 하다가 에이 뭐 이런 것 까지 시키나 내가 천천히 걸어가자 하면서 은행을 갔습니다. 딱지를 끊었으니까 내야지 하면서 펴서 봤는데 너무 싼 6천원짜리 딱지였습니다. 94년도쯤의 일이니까 그 당시에도 속도위반을 하면 2만원은 됐습니다. 6천원이 너무 싸서 이거 6만원 아니야 그랬는데 그 당시 6만원짜리는 없었습니다. 이게 뭐야 그러면서 자세히 봤더니 틀림없이 6천원, 납기 후 20프로 가산금 붙어서 7200원인 것입니다. 먹지를 대고 글씨를 써가지고 흐려서 이게 뭔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범칙금 6천원 범칙사유 금연구역에서 담배 피다 걸렸음.” 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교회 직원이 그것을 봤으면 시험에 들지 않겠어요? ‘우리 목사님이 어디 가서 담배를 피다가 그것도 경찰한테 걸려서 딱지를 끊고 왔나’ 그랬을 것 아니겠습니까? ‘아, 이것은 아니다.’ 나오면서 생각을 해보니 그제야 생각이 났습니다. “교수님 걱정마세요. 싼 걸로 끊어드렸습니다.”
(예화) 그러고 나서 몇 달 후에 제가 심방을 가게 되었습니다. 저한테 배운 약간 연세 있으신 자매님을 전도사로 불렀는데 이 분은 운전도 못하고 길도 몰라서 할 수 없이 제가 모시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운전을 하는 중에 유턴을 해야 되는 차선에 직진 차들이 쭉 서 있으면서 점선을 다 밟고 있었습니다. 오는 차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제가 노란 선을 밟고 돌았습니다. 그랬더니 지하도에서 경찰이 튀어나왔습니다. 똑같이 경례를 붙이면서 “선생님. 면허증을 주십시오.” 라고 해서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도로교통법 몇 조 몇 조 유턴위반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화가 나서 도로 교통법 1조에 봐라. 이 법은 도로 교통을 원활하게하기 위한 법이라고 그랬다. 내 차선에서 다른 차들이 밟고 있어서 아무에게도 피해를 안주고 돌았는데 내가 위반 한 거냐고 그랬더니 “위반하신 겁니다.” 정말 위반한 거냐? 그랬더니 “맞습니다. 위반하셨습니다.” 그러면 됐다고 끊으라고 했더니 제가 안 돼 보였었는지 “아우.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걸로 끊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서 이리로 와보라고 하고 하지마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뭘요?” 그래서 당신에게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느냐? 내가 위반했으면 위반한 대로 끊어라. 싼 거 끊어 준다는데 짜증을 내니까 이 경찰 입장에서는 이상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알았어요.” 하더니 중앙선을 밟고 넘어 왔으니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4만원인가 6만원에 벌점 10점을 맞았습니다. 벌점 점수가 넘었는지 알아보라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경찰서를 가지고 갔습니다. 경찰서에 갔더니 거기 있는 사람이 띠띠띠띠 두드려 보더니 막 웃는 겁니다. 왜요? 그랬더니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요거 끊음으로 면허 정지가 됐습니다.” 라고 해서 제가 순진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사실은 여기저기서 오라는 데가 많은데 제가 차를 운전하지 않고는 안 되는데 어떻게 딴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상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은 집에 가시구요. 6시 넘어서 오세요.” 저는 순진하게 교회로 돌아가서 6시까지 기다렸습니다. 집사님 한분을 만나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더니 막 웃으면서 목사님 6시 넘어서 오라는 것은 봉투가지고 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헐.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그 집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그 앞쪽에 남편이 교수님이신 한 집사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 집사님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 우리 집사람 보고 사모님 제가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 집을 사모님한테 팔라고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복덕방의 원리도 모르시나? 팔 사람한테만 말씀하시면 어떡합니까? 살 사람한테도 말씀해 주셔야지요. 우리는 집을 살 생각도 안했는데 그 아줌마가 와서 응답받았다고 집을 사라고 밀어붙이는 바람에 어쨌든 좋은 조건에 줘서 간신히 집을 샀습니다. 너무 충격 받은 게 제대로 된 집을 그때 처음 산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집이 그렇게 세금이 많이 나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집사람이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세금이 얼마예요? 그러니까 계산하더니 아줌마 얼마예요. 그래서 평생 셋방살이만 살다가 세금을 내라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졸도할 정도가 된 거예요. 아니 뭔 조그마한 집이 세금이 그렇게 비싸요? 그러니까 그 법무사 여직원이 이렇게 보더니 아줌마 비싸요? 비싸지요 그러니까 그러면 반만 내세요. 아니 무슨 세금이 그런 게 있는지 어떡해 여직원이 반만 내라 그러냐?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집 파는 사람하고 잘 의논하셔서 진짜 계약서 말고 집값을 3분의 2쯤 깎아서 가짜 계약서를 써가지고 가져오시면 절반만 내시면 되요.” 그러는 겁니다. 그게 요즘 문제가 되는 다운계약서입니다. 그때는 솔직히 여기 계시는 분들도 했을 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집사람이 들고 와서 물어보는 겁니다. 여보. 세금이 엄청 비싸. 그런데 여직원이 반으로 깎아준다면서 이렇게 이렇게 하래.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여보. 집을 사는 사람은 목사고 파는 사람은 집사인데 둘이 앉아서 작당을 하고 가짜 계약서를 쓰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바라보시면서 정말 기뻐하시겠다. 성령님이 좋아하시겠어.” 다 내야 되겠지? 당연히 내야지. 로마서 13장을 봐라.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우리 아들 벙어리저금통까지 털어서 돈을 맞추어서 세금을 내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여직원이 “아주머니. 오셨네. 어떻게 가짜 계약서 써오셨어요?” 아니요. 그러면 어떡하시려고요? 그냥 다 내려고요 하고 돈을 줄 때에 그 여직원의 표정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아. 존경스러워. 이런 훌륭한 분들에게 내가 이러한 불의한 꾀를 알려 주었다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이랬겠습니까? 어이. 병신들. 속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잘 났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쉽게 넘어갔습니다. 교회를 지하실에서 한 4년 고생을 했는데 교회가 별로 부흥이 안됐어요. 4년 되니까 한 2백 2십 명 모였습니다. 도저히 좁아서 그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릴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가 기니까 공기가 안통해가지고 사람들이 자꾸 기절을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이사를 가야 되겠는데 벌써 아이들이 한 100여명 모이고 4백 2십명 되는 교인인데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이거 보다는 반쯤 되는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전세 월세 써 붙여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이 건축업자한테 그 예배당 땅을 주고 자기네 교회를 지어서 옆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건축업자가 이것을 허물고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했는데 IMF가 터져서 지을 수가 없어서 세를 놓는다는 것입니다. 철야를 하고 가서 보고 제직회까지 다 모이라고 해서 다 하고 그날 저녁 7시엔가 9시에 계약을 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고서 3년 반 정도 있으니까 교인 수가 1,300명이 모여서 도저히 그 예배당으로서는 감당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를 가려고 하는데 교회의 돈이라고는 월세 보증금 5억하고 교회 돈 통에 1,500만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서 봤더니 가고 싶지도 않은 동네인 안양이었습니다. 제가 교수생활을 거기서 했기 때문에 그 동네가 별로 싫었는데 거기밖에 갈 곳이 없는 것 입니다. 거기서 누가 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스스로 거기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땅을 하나 샀는데 그 땅 주인이 너무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팔려고 내 놓았다가 당신이 돈이 생기니까 안 팔겠다고 한 땅인데 땅값이 계속 올라가는 겁니다. 그것을 내놓은 적이 있다고 그래서 그것을 사고 싶다고 그랬더니 그 집이 안 팔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가르쳐 달라고 해서 그 할아버지 찾아가서 교회 집사님들이 사정을 했습니다. 사장님. 그 땅 좀 파십시오. 안 팔아요. 그래서 아. 좀 파십시오. 아니. 주인이 안 판다는데 얼른 나가라고 해서 제발 부탁합니다. 좀 파십시오. 이 할아버지가 내가 땅을 팔면 당신네들 뭐 할라고 그러우? 교회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깜짝 놀라면서 교회요? 일주일만 생각해 봅시다 그러는 겁니다. 야. 이거는 뭔가 길이 열리는구나 하면서 열심히 밤을 새워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가져 가시우. 그러는 겁니다. 26세에 장로님이 되신 분인데 일평생을 거기서 사업을 했습니다. 마지막에 연세가 드셔서 사업을 접으면서 여기에 교회가 세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이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땅을 가져가라는 겁니다. 얼마나 좋으신 분입니까? 얼마냐고 하니까 36억이고 했습니다. 그래서 좋다. 그러면 계약을 하자고 했더니 참 힘든 이야기를 전해온 것입니다. 36억에 하는 대신에 30억이라고 계약서를 쓰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할아버지 이야기도 논리가 있는 것이 워낙 그 땅을 싸게 구해서 세금이 많이 나오는데 이미 그 땅을 저당 잡혀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써가지고 36억을 받으면 은행 빚을 갚고 모든 것을 청산하고 세금을 내면 1억이 모자란다고 하셨습니다. “놔두면 계속 올라가는 땅이니까 내가 교회에 넘겨줄 수는 있지만 여기다 돈을 보태서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소?” 라고 할아버지가 얘기하시는 걸 돌아와서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건 더 큰 문제였습니다. 3억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교회 집사님들한테 “집사님.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물어 봤더니 85퍼센트가 “목사님. 5대 그룹에서도 다 그렇게 합니다. 그거 죄도 안 되고. 그냥 하면 돼요”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떡하나 그러면서 회계사를 오라고 해서 당신이 좀 정확하게 얘기를 해보라고 아무래도 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목사님. 큰 문제 안 됩니다. 그냥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가짜 장부를 써야 됩니다.” 그 얘기를 딱 듣고 그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집사하고 목사가 앉아서 거짓말로 그 장부를 써서 그것을 할 때에 그 장부를 보시면서 하나님이 참 너희는 내 영광을 위해서 별 일을 다 하는구나 그러시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까요? 물어서 세금이 얼마라고 그럽니까? 하니까 3억 이랍니다. 그러면 그 할아버지한테 가서 전해라. 36억을 달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39억을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가짜 계약서는 못 쓰겠습니다. 라고 가서 전했습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그 당시에는 대출도 안 해주는 쌩 돈을 그렇게 내고 눈물을 흘려야 했었습니다.
그 모든 사건을 겪으면서 저와 교인들이 깊이 깨달은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똑바로 삽시다. 이 정권은 썩었습니다. 이 사회가 부패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똑바로 삽시다. 정의롭게 삽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입술에다가 침만 바르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나가서 현실을 맞닥뜨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살기 위해서는 때로는 말도 안 되는 물질의 손해를 봐야 되고 그렇게 손해를 보는데도 존경해 주기는커녕 손가락질 하면서 병신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교인들에게 생생한 학습이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죽어가는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주신 것은 단지 즐거워하고 기분 좋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은혜를 부패하게 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이 현실 속에서 영혼의 생명을 가지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썩어가는 부패한 세상에서 방부제로, 변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로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초대교회로 가서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뜻은 예전에는 내가 내 가치관과 이제껏 배워온 가치관대로 살았는데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그 순간에 “나는 없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세례가 원래 물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나올 때 예수와 함께 부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들어갈 때는 내가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물속에 나를 예수와 함께 수장시키고 다른 나로 물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입니다. 이제는 나의 인생관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의 가치관을 좋아 할 수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세상을 이긴 적이 없고 진리가 대중적이 된 적도 없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소수였고 빛은 일부였고 어두움이 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도 이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시라도 죽을 준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신념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길을 사회나 혹은 권력이나 세상의 부패나 이런 것들이 가로막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라고 외치면서 싸우고 도저히 그 힘이 안 되면 핍박을 받고 죽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한때는 미국이 영토를 넓히고 싶어서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미국에 있는 온 교회가 일어나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영토를 넓히기 위한 침략전쟁을 인정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일어나서 반대시위를 했습니다. 그때에 나온 찬송가가 이것입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이 찬송을 부르면서 온 교회가 궐기를 해서 정부의 무릎을 꿇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하고 누구라도 그 길을 막아서면 목숨을 걸고 그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국가의 권력일 경우에는 거기에 항거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국가가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성경이 인간에게 부여한 존엄을 무참하게 말살하려고 할 때에 그런 정부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죽은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최종적인 소비처가 우리 자신의 만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교회의 담장을 넘어서 이 세상에서 한 줄기 빛으로 어두운 이 세상에서 참 진리가 무엇이고 인간으로서 참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 굉장히 감성이 풍부했습니다. 겨울에 섬에서 공부를 한다고 보따리를 다 싸가지고 섬으로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 공부를 다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아침에 가보니까 그 섬에 풍랑이 많이 일었습니다. 물길이 보이거든요. 배가 안 올 것 같은데 배가 온다고 해서 기다렸더니 배가 많이 늦게 왔고 배를 탔습니다. 배가 출항을 했는데 파도가 점점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보통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인천에 도착을 하는데 캄캄해졌는데도 인천과 그 섬 중간쯤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에 무전이 왔는데 빨리 섬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빨리 인천으로 가버리면 될 것 같은데 거기서 배를 돌려서 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죽는 줄 알았습니다.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배 밑창에 앉았는데 다 토하고 배가 곧 뒤집어질 것 같고 이쪽을 때린 파도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배 전체를 뒤엎고 배 반대편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섬으로 오는데 배는 요동을 쳤습니다. 아무것도 안보이고 캄캄한 바다였습니다. 그 섬에 전기가 들어오는데 천주교회에서 발동기를 미국에서 가져와서 텔레비전 보는 7시에서 10시 사이에 틀어주는데 10시 넘어서 배가 들어오니까 딱 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등대 하나가 깜빡깜빡하는데 그 등대를 보면서 많은 배들이 항구로 대피하려 했습니다. 풍랑이 이는 어두운 밤바다에서 배가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서 수 천 개의 조명탄을 쏘아서 항구를 대낮처럼 밝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등대 하나를 보면서 “아. 저기가 우리 배가 가야 할 항구구나.” 라고 하면서 들어와서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안전하게 대피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그림이 생생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어. 우리가 그렇게 원칙대로만 살 수는 없지. 사회성이 있어야지. 현실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해야지” 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이 아무리 부패하고 진리를 모르고 어두워져도 그것은 하나님도 예상한 것이고 우리도 예상한 것입니다. 문제는 어둠이 너무 칠흑 같아서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등대가 없어서 항구를 못 찾는 것입니다. 하나만 비치고 있어도 되는 것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 고쳐주소서.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타락한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드시고 예수 믿은 우리의 죽어가는 영혼을 살아나도록 소생시키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한 사람이 되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가정주부면 가정주부로서, 사업을 하면 작은 가게를 하는 사업자로서, 환경미화원이면 쓰레기를 치우면서, 동사무소 직원이면 민원을 보면서 거기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존재 자체로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인간이 사는 도리가 저것이구나. 정말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것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라고 우리를 예수 믿게 만들었고 영혼의 침체가 온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따라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그 은혜의 목적을 따라 살려고 분투할 때에 그 은혜는 계속 타올라서 우리의 마음속에 보존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처럼 주님의 의의 길을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