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더욱 넘치는 은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녹취자: 장미연
시인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오늘 5절에서는 더 넘치는 은혜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 하고 있습니다. 5절은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불꽃놀이를 할 때 어두운 밤하늘을 불꽃을 쏩니다. 그러면 한 줄기 희미한 연기를 내며 하늘 높이 불꽃이 오릅니다. 그리고 그 폭죽이 가장 정상에 올랐을 때 쾅하고 터지며 작렬하듯이 아름다운 빛을 뿜고 포물선을 그으며 화약은 떨어집니다. 시편 23편을 폭죽놀이에 비유한다면 5절은 바로 하늘 높은 곳에서 불꽃이 작렬하듯이 터지며 형형색색의 빛깔을 내는 그 광경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잔칫집의 문맥입니다. 신랑 신부가 혼인을 하고 축하하러 온 모든 가족과 일가친지들 친구들이 모두 함께 혼인을 즐거워하는 광경입니다. 주인은 오랫동안 보관해 두었던 그 집안에서 제일 오래된 맛있는 포도주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서로 함께 건배하며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누구도 우울하고 근심스러운 사람이 없는 기쁨의 가득 찬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신앙생활 하고 있지만 정말 기쁩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단어들을 거의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기쁨, 환희, 희열, 가슴 벅차는 감격 이런 것 말입니다.
시인은 오늘 비록 굶주린 때를 지나지만, 하나님이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것도 경험했고 죄를 지어서 영혼이 죽은 자처럼 되어버렸다가 소생하는 은혜도 경험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보호해주시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런 모든 사연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슴이 벅차오르는 환희와 기쁨이었습니다. 여기 “잔”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잔”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문학적으로 표현했지만 이것은 잔칫집의 광경을 빌어다가 시인 자신의 내면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시간에 영혼에 대해서 꽤 길게 여러분들에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모두 빈 잔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돈이 없거나 돈의 욕심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한 것이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부자는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할 때 그 교회와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 집은 이름만 대면 여러분들이 다 아는 국내 굴지의 그룹의 회장 집이었습니다. 집이 매우 넓고 집 안에 농구코트가 있을 정도고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항상 그 집에서 서너 명씩 보초를 서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회장님이 신문에 났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왜 신문에 났냐면 자살 미수로 신문에 났습니다. 그 자살도 그냥 투신 자실이나 목을 맨 자실이 아니라 안방에서 웃통을 모두 벗고 칼로 자기 온 몸을 찔러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발견이 된 겁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 사람이 그런 사람들은 일평생 하루에 10억씩 써도 다 못써볼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사는 게 괴로웠으면 안방에서 웃통을 벗고 그것도 칼로 자신의 온 몸을 자해를 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합니다. 그러면 얼굴이 예쁜 사람들은 행복할까요? 그럴 리가 없겠지요.
모든 것이 이렇게 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 잔을 인간의 영혼 안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전에 복음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영혼이 허기지고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면 그리고 외모가 받혀주면 지식을 쌓으면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채워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빈 잔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그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화) 서울에 가면 저 북쪽으로 의정부 가까이 가는 곳에 수유동이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수유리였는데 다 이제 서울이 됐습니다. 거기에서 근무하던 어느 의사가 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어느 날 당직을 서고 있는데 새벽에 급히 택시가 달려온 겁니다. 병원에 급히 내리더니 양복 입은 신사들이 어떤 환자를 업고 병원으로 뛴 겁니다. “선생님, 이 사람 방금 쓰러졌는데 좀 살려주십시오.” 그때 아주 오래 전이니까 구급차를 부를 여유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의사가 눕혀 놓고 진찰을 해보니까 손 쓸게 없이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애석 하지만 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한 시간 쯤 넘게 지나니까 이제 유족들이 택시를 타고 와서 울고불고 큰 슬픔에 잠긴 겁니다. 그런데 의사가 하얀 보자기에 덮어 놓은 환자를 보니까 의사 생활을 20여년을 했지만 저런 기묘한 자세로 죽은 사람은 처음 본 겁니다. 대게 태어날 때는 아이들이 이렇게 태어나고 죽을 때는 이렇게 하고 죽는데 이 사람은 한 손은 쥐고 한 손은 확실하게 펴고 죽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사람이 저런 자세로 죽을 수가 있을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저 주먹 속에는 뭐가 있을까? 가족들이 없을 때 펴 봤더니 투두둑 화투 두 장이 떨어진 겁니다. 실화입니다. 의사가 뒤집어 보니까 삼팔 광땡입니다. 사연이 어떻게 됐냐면 장례집에 와서 밤새도록 화투를 친 겁니다. 원래 장례집에 가서 밤새는 사람들은 누가 죽었는지도 별로 상관없습니다. 자기네끼리 열심히 화투를 치는데 밤새도록 돈을 잃은 겁니다. 새벽에 끝 발이 붙기 시작한 겁니다. 돈이 이만큼 쌓였습니다. 그런데 탁 들어왔는데 삼팔 광땡이 들어온 겁니다. 저는 화투를 못합니다. 민화투는 어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머지는 하나도 모릅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왜 삼팔 광땡이 들어오는데 죽을 수 있냐? 그랬더니 서로 약속하기 나름인데 여러 명이 돈을 대고 이제 배팅을 하면 보통 세 번까지 배팅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10명이 화투를 치는데 나는 이번에 이길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면 만원을 더 내는 겁니다. 만원이 깔렸는데 만원이 더 낸다는 겁니다. 그러면 10명중에서 5명이 나도 한 번 너랑 겨뤄볼 수 있다고 만원씩을 더 내면 15만원이 됩니다. 나머지 5명은 빠지고 나는 이번 판은 안 될 거 같다 라고 화투를 내려놓는 겁니다. 5명이 또 겨루는 겁니다. 나는 또 할 수 있다고 이것을 세 번까지 배팅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5명이 세 번을 하면 거기에 15만원이니까 25만의 돈이 쌓이는 겁니다. 이렇게 폈는데 삼팔광땡이 나오면 약속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자기가 이미 배팅한 돈에 한 배, 두 배, 혹은 세배까지 돈을 더 내놔야 된다고 합니다. 돈이 이렇게 쌓였는데 딱 들어왔는데 삼팔광땡이 들어온 겁니다. “이게 뭐요?” 이 사람이 딱 펴보고 “삼...삼...삼.. ”그러더니 심장마비로 죽은 겁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곳을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 어떻게 죽었는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집 아이가 엄마한테 물어봅니다. “엄마, 우리 아빠 어떻게 돌아가셨어?” 그 엄마가 뭐라고 말할까요? “화투치다가 삼팔광땡이 들어오니까 네 아빠가 너무 좋아서 심장마비로 죽었대.” 여러분 생각에 그 사람이 굉장히 한심한 사람 같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 사람하고 다를까요? 그 사람은 요만한 화투 두 장을 가지고 보다가 너무 기뻐서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러분은 화투보다 더 큰 집문서, 땅문서, 권리증, 학위 그런 거 가지고 연연해 하다가 죽는다는 점에서 과연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걸까요?
시인은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은 노숙자 같은 신세부터 시작해서 한 나라의 제왕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광과 치욕을 다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지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것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방금 통과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했을 때 이게 배부르고 돈 많고 세상의 지위가 높기 때문에 내 잔이 가득 찼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그 빈 잔이 있는 겁니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고해도 아낌없이 사람들이 돈을 쓰는 곳이 있습니다. 먹는 것, 보는 것, 특히 즐기는 것 엔터테이먼트 텔레비전을 보면 하여튼 보기도 싫습니다. 텔레비전 방송마다 다 뭘 퍼먹는 이야기 아니면 여행지로 구경 다니는 이야기 그렇지 않으면 오락프로입니다. 왜 그럴까요? 인생이 너무 재미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개콘 이라도 보면서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 라도 낄낄 거리고 웃어야지 겨우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쁨이 없는 시대가 된 겁니다. 누구하나를 기쁘게 해주면 너무 좋은 겁니다. 얼마든지 돈을 쓰고 싶을 정도로 나를 즐겁게 해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상황은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집니다. 물질문명이 폭발적으로 발전합니다. 저는 지금도 두 눈에 또렷합니다. 8살 때 초등학교 입학해서 1학년 다닐 때 그때 서울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연세 드신 분들은 몰라도 어린 사람들은 그런 나라는 지금 전 세계에서 어디가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폐허입니다. 폐허. 산에 올라가서 보면 산은 전부다 민둥산이고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동네가 보이는데 동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 아니면 움막집입니다. 높게 제대로 서 있는 빌딩은 학교, 경찰서, 소방서, 구청 이런 거 이외에는 건물다운 건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렇게 비참하도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금년도 1월, 2월 두 달까지의 통계를 제가 외웠는데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이 물건을 팔아서 장사를 잘하는 나라가 중국입니다. 3백 50조 원어치를 우리나라 돈으로 팔았습니다. 2위가 미국입니다. 3백조 원어치를 팔았습니다. 3위가 독일입니다. 2백 50조 원어치를 팔았습니다. 4위가 일본입니다. 백 60조원을 팔았습니다. 5위가 네덜란드입니다. 백 15조를 팔았습니다. 6위가 한국입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모든 나라를 제쳤습니다. 100조를 팔았습니다. 그래서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하고 비교를 하면 상상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학기술은 점점 발달하게 될 것 입니다. 눈부시게 발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더 발달할 것입니다. 그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느냐? 그렇지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1920년대를 기준으로 미국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꼭 있어야 되는 필수적인 물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19가지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로부터 90년쯤 지난다음에 2000년대에 와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꼭 있어야할 물건이 무엇이냐고 하니 256가지가 나왔다고 합니다. 시장에 가면 그냥 주는 게 아니잖습니까? 구청에서 나눠주는 게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걸 손에 넣어야 합니다. 사야합니다. 사려면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면 아버지가 물려주면 문제가 없겠지만 가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일은 아침부터 5시까지 일을 했는데 그 256가지 물건을 다 살 수 없습니다. 못 사면 어떻게 됩니까? 경찰서에서 잡아가진 않지만 삶이 너무 비참해집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돈이 없어서 휴대폰을 못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럼 삶이 비참해지고 사람들하고 소통도 안 됩니다. 그러니 투잡을 뛰어서 돈을 벌어야지 그걸 살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할부로 긁고 그 다음에 갚아 나갑니다. 몸으로 때우면서.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물건은 256가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필요한 건 256가지보다 더 될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손에 넣고 계속 소비하고 한 번 사면 영원히 쓰는 게 아니잖습니까? 휴대폰 한 2년이면 갖다 버리고 또 하나 삽니다. 그러면 돈을 또 벌어야 합니다. 생각할새 없이 미친 듯이 돈을 벌면서 소비를 하는데 정작 자신의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리고 누가 쫓아오는지 미친 듯이 쳇바퀴 굴리듯이 살아야지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데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고 다른 사람이 뛰어가니까 나도 뛰어갑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하고 풍족하지만 영혼은 점점 더 고갈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엽기적인 범죄들이 속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그걸 다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니까. 그래서 주님 없이 살아봤는데 너무 곤고합니다. 돈이 있어도 혹은 돈이 없어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우리 영혼이 너무 곤고합니다. 그러니까 ‘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정말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을 채워줄 수 없구나.’ 그것을 느끼면서 자신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였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인생에 진정한 기쁨이 우리의 육체의 향락이나 물질의 소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보면 전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아주 높은 나라는 소득수가 높은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엉뚱하게 저 부탄,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이런 나라가 행복지수가 1등으로 나옵니다. 일단 인간이 소비에 눈을 뜨고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회가 기술적으로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이렇게 변해가는 것을 우리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우리 중심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 휩쓸리기가 쉬워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산 속에 들어가서 교회를 절처럼 만들어서 한복을 입고 공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서 이 세상에 보낸 뜻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휩쓸리지 않는 주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 사람들이 미친 듯이 추구하는 물질과 기술, 이 땅의 번영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이 채워줄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성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기쁨을 거기에서 찾는 게 아니라 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을 받는 그 분을 사랑하는 기쁨 속에서 살아갈 때 거기서 이 모든 시련과 유혹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힘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그렇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는 정신적인 희열과 환희, 기쁨, 감격, 가슴 벅차는 전율하게 만드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고난과 시련, 상처뿐인 그 인생의 길을 이기며 지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 듣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눈을 들어 위에 것을 찾으라.” 성경이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 3:1) 그 속에서 그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희열과 환희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중 누가 이렇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서 넘치는 기쁨과 가슴 벅찬 환희 속에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 이 시인은 어떠했길래 그렇게 가슴 벅찬 감격스런 희열을 경험했을까요? 그걸 성경은 명쾌하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자신에게 상을 차려 주셨기 때문이고 두 번째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셨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도 읽을 수 있는 성경에서 명백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새로 번역된 성경에서는 오해를 싹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원수의 면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그랬으니까 이게 밥상이라는 게 명료했습니다. 예전에 성경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성도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이 “상”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 교장선생님이 주시는 상인 줄 아는 사람들이 절반이 넘었습니다. 원래 이 “상”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말로 “슐칸”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단어는 상중에서도 밥상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식사 습관은 좀 특이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밥 먹는 식탁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탁자같이 야트막하고 넓은 상에 음식을 차려 놓고 소파같이 생긴데 비스듬히 기대어서 편안한 자세로 옆에 있는 음식을 집어서 먹는 것이 식사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밥상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번역을 하자면 “당신이 나를 괴롭히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나에게 한 밥상을 차려 주시고.”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설마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큰 상에다가 온갖 음식을 다 차려서 저 구름 위 하늘에서 낚시 줄 4개를 매달아서 시인이 배고플 때 그 앞에 떡 하니 내려 놓으셨다고 생각할 정도로 문학적인 상상력이 빈약하시지는 않겠지요? 이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내가 밥상을 누군가로부터 대접받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면전에서 나를 위해 밥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내 빈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과 시인 사이에 있었던 관계를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집에 누군가가 손님으로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약속된 방문자가 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엄마,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그래? 너도 시집 갈 나이가 됐으니 좋은 일이다. 뭐하는 사람이니?” “이런 저런 일을 해요.” “그래, 한 번 보자.” 그러고 집으로 데려 왔습니다. 딸이 푹 빠졌다는 미래의 사윗감을 데리고 와서 차를 마시고 잠깐 이야기를 해보니까 이 녀석은 아닙니다. 티끌만큼도 우리 딸 하고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해줄 정도의 인간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접어라. 나는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살아왔지만 그 녀석은 첫 눈에 아니다. 접고 좋은 사람 다시 만나라.” 근데 첫 사랑입니다. 착실하게 살다가 한 번에 갔습니다. 콩 꺼풀이 푹 씌웠습니다. 단 번에 협박을 합니다. “엄마, 이 사람 나 사랑해. 결혼하게 안 해주면 나 죽어 버릴 거야.”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습니다. 마음에 안 내키는데 엄마, 아빠는 허락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즐거운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에 엄마에게 전화했습니다. “엄마, 우리 신혼여행 다녀왔어요.” “그래, 고단하겠다.” “엄마, 우리 내일 남편하고 인사하러 갈게요.” “와라.” “점심 때 갈 건데 점심 줄 거지요?” “그래, 오너라.” 전화를 툭 끊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남편이 “아침먹자.” 아침하기가 귀찮으니까“참아, 엄마가 엄청나게 맛있는 걸 차려 놓고 기다릴 거야.”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씻고 선물 하나를 들고 엄마 집에 갔습니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 지금 굉장히 분주하시겠지.’ 일부러 시간에 맞춰 갔는데 조용합니다. 벨을 누르려고 보니 열려있어 열고 들어가 보니 아무도 없습니다. 안방에 들어가 보니 조용합니다. 엄마 혼자 낮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엄마, 우리 왔어요.” “그래, 왔구나.”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아빠는?” “볼일이 있다고 나가셨어.” “장모님 절 받으십시오.” “절은 뭐” 그러고 절을 했습니다. 딸이 “엄마 점심 준비해놨지? 우리 아침도 안 먹어서 배고파.” “걱정마라 밥 줄게.” 그러고 엄마가 부스스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방으로 가셨습니다. 2분 만에 밥상을 차려 왔습니다. 옛날에 쓰던 낡은 소반 나무로 된 귀퉁이는 떨어진 것입니다. 밥풀도 좀 말라 붙어있고 거기에다 밥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먹다 남은 밥입니다. 그리고 냉수 두 그릇을 얹어놓고 숟가락 두 개를 얹은 폼이 꼭 가난한 집 제사상 비슷한데 반찬이라고는 딱 하나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딱 하나입니다. “들게.” 그러고 밥상을 탁 내려 놨는데 물이 찍 하고 쏟아 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엄마는 조용히 밥상을 주고 앉아 있지만 그 밥상은 사위에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넌, 왜 왔니? 난 네가 정말 싫다. 어쩌다가 네 놈이 우리 집안과 엮여졌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니?” 밥상은 소리치고 있는 겁니다.
(예화) 교회를 개척하고 제 딴에는 부지런히 심방을 했습니다. 교인이 1,100명 될 때 까지는 등록하면 무조건 심방을 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도저히 심방을 갈 수가 없더군요. 아무리 일주일 내내 심방을 해도 등록한 사람을 다 심방 할 수가 없어서 그 다음부터는 포기를 했습니다. 그게 늘 마음속에 미안합니다. 그래도 심방할 일은 있지만 예전처럼 많지는 않습니다. 저는 가정주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압니다. 가정주부들이 제일 힘들고 표 안 나는 일이 밥하는 일입니다. 교회에 젊은 집사님들이 있었습니다. 젊어봐야 40대 후반이지만 제가 밥을 사줘야 될 일이 있었습니다. 음식점에 가서 밥을 시켜서 사주고 노고를 치 하는데 “그대들은 어떤 밥이 제일 맛있나?” 그랬더니 모두 한 목소리로 “우리가 하지 않은 밥은 다 맛있어요.” 그렇습니까? 어쨌든 교역자들 시간에 어느 목사님이 보고를 하는데 “목사님, 우리 교구에 아무개 집사님 있지요?” “오, 알지” “그 집사님이 목사님이 꼭 가정에 심방을 와 주시기를 원 한답니다.” “뭔 일이 있냐?” “그건 아니고 오셔서 예배를 드려 주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바란답니다. 점심을 대접하겠답니다.” “그래? 가긴 가는데 밥은 하지 말라 그래라.” “네” 저는 밥 하는 거 반대입니다. 왜냐면 거기에 시간을 너무 많이 들이니까. 그러더니 “밥을 하겠답니다.” “하지 말라 그래라. 아무거나 조그만 거 사 먹고 예배드리자고 그래라.” “밥을 하겠답니다.” 두 번을 그럽니다. “그럼 그렇게 해라.” 그러고 이제 때가 되어서 그 집을 심방을 갔습니다. 저는 긴 인생을 살았지만 아직도 그 밥상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1시쯤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30분 넘게 예배를 드렸는데 정말 은혜로운 예배였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50대 초반쯤 된 집사님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오셔서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자기말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는 분이었습니다. 그러고 이제 예배가 끝나니까 “목사님, 점심 준비됐습니다. 점심 드셔야지요.” “먹읍시다.” 앉아있는데 ‘이게 뭔 광경이야?’ 밥상을 세 명인가 네 명이 들고 들어옵니다. 옛날 옛날에 쓰던 큰 교자상 있잖습니까? 요즘은 그런 걸 사려고 해도 못 살 것입니다. 거기다가 반찬을 담아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밥상이 아니라 저를 위한 밥상입니다. 반찬이 중첩되는 게 거의 없이 한 상을 차렸습니다. 딱 갖다 놨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랬습니다. 저는 그걸 보는 순간에 마음이 너무 상했습니다. ‘아니 이거를 준비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가는데 한 끼 먹고 치워버릴 걸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어마어마한 수고를 들여서 이 상을 차렸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습니다.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합니까? 한 끼 먹으면 사라지는 건데 이렇게 수고를 할 시간에 성경을 한 장 더 읽고 기도를 더 하지 왜 이런 일을 했습니까?” 그랬더니 이 자매님이 마음이 약간 상했습니다.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었거든요. 드세요.” 그래서 이제 축복기도를 하고 긴 젓가락을 줬는데 아무리 팔을 벋어도 반찬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집사님이 가운데 딱 앉아서 반찬을 집어서 전달을 해줍니다. 전 태어나서 그런 밥상을 아무데서도 못 받아 봤습니다. 너무 궁금해서 이걸 어떻게 준비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한 달 전에 계획이 끝났고 그 계획에 의해서 시작을 하는데 제일 먼저 보름 정도 앞두고 밑반찬을 만들고 열흘 앞두고 김치를 만들고 일주일, 5일, 3일, 2일 단위로 해서 마지막 그 전날 모든 기본적인 걸 만들어 놓고 해산물 같은 것들은 새벽에 가서 사가지고 와서 아침서부터 두 언니의 도움을 받아서 조리를 할 때 시계를 놓고 시간표를 맞춰서 예배 딱 끝나는 시간에 올려놓게끔 맞춘 것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도 그런 밥상을 못 받아 보겠지요. 돈을 주면 더 많은 가지 수의 반찬이 있는 밥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만들어서 받혔습니다.
제가 한 23년 전에, 이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 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입니다. 성경을 품고 한 참을 감격했습니다. 동사입니다. “원수의 면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이 단어가 “아라크”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군인들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 진을 치거나 행진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밥상에 이런 반찬이 한 두 개가 있었던 게 아니라 정돈을 하고 늘어놓아야 될 정도로 많은 먹을 것이 있는, 거의 왕의 식탁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게 정찬입니다. 성대한 정찬. 제가 받은 그런 밥상입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목사님은 제 인생의 우리 가정을 방문해주신 분 중에 가장 중요한 손님입니다.” 그 말이 그 밥상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밥상은 먹다 남은 밥에다가 물 붓고 숟가락 꽂은 그 밥상이 아니라 그렇게 왕의 식탁으로 모든 것을 차려서 일생에 아무나 받아 볼 수 없는 그런 성대한 정찬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정찬이 원수의 면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원래 원문대로 말하자면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다윗의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히는 원수들이 수없이 도처에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 모든 원수들을 때로는 이 시인이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그런 성대한 식탁을 차려 주심으로써 시인과 하나님이 가족관계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식사에 관한 문화는 서양적이 아니라 동양적입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고 하는 것은 가족관계를 의미합니다. 즉, 형제가 된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종교지도자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이유가운데 하나가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그러면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그들과 한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 교제 속에서 그들을 복음을 믿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회귀하고 죄 된 생활을 버려 의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셔서 그들에게 가족으로 다가가셨던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이 양반이 상민과 잠을 잘 수는 있지만 함께 밥을 먹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함께 식탁을 나누면 형제입니다. 양반은 상민과 형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도 그러한 사상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시인을 괴롭게 하는 자들의 면전에서 성대한 식탁을 차려 주셨다는 이유 때문에 시인은 그렇게 가슴이 터질 것처럼 희열 속에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얼 보여주는 것일까요? 육체는 이 세상의 음식을 소비함으로 칼로리를 얻어 생명을 유지 합니다. 영혼은 그 양식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먹음으로써 영혼은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생명을 지탱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시인의 생애에서 때로는 곤고하고 시련을 겪고 상처를 받으면서 일생을 살아왔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아무도 모르는 밥상을 이 시인에게 차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 시인을 위해서 은밀하게 차려주시는 성대한 영혼의 식탁, 말씀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영의 주 내 영혼의 치료자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하나님은 풍성한 말씀의 식탁으로 우리의 영혼의 활기를 주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며 가도록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물질의 질서를 움직여서 세상에 있는 물질들의 혹은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시는 복입니다. 그것을 좀 어려운 말로 “일반섭리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사업을 했는데 의외로 돈이 잘 벌립니다. 뒷집도 아들이 있고 우리 집도 아들이 있는데 동네 애들은 공부가 별로인데 우리 애는 워낙 총명해서 공부를 잘 합니다. 딸이 있는데 옆집, 뒷집, 왼쪽 집, 오른쪽 집 다 별로 시집도 못 가고 가도 별로 그렇게 행복하지 않은데 왠지 우리 딸은 태어나기를 예쁘게 태어났습니다. 남자들이 줄을 서서 시집을 잘 갔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혹은 공부도 좀 별로였고 얼굴도 별로였는데 너무 좋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들이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그것 말고 또 다른 복이 “영적인 복”입니다. 이것은 사물들을 움직이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 영혼을 어루만져서 주시는 복입니다. 이 복은 앞에 있는 일반섭리의 복 보다 가장 탁월한 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바에 의하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임이요.” 그런 복입니다. 그런 신령한 복을 하나님은 정말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꼭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주시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복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주시지 않으십니다. 이 시인은 지금 일반섭리의 복 때문에 빈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 때문에 빈 잔이 넘친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말씀의 놀라운 은혜가 이 시인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상처뿐인 인생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었고 굶주림 속에 고통 받을 때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분과의 인격적인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이 죽어있는 것 같이 죄에 빠졌을 때도 그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인은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어주신다는 확신 때문에 그 고난의 계곡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주셨던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않고는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절대로 ‘나의 빈 잔이 넘치나이다.’ 그런 고백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럼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희열이 있습니까? 어차피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살다보면 우리 인생은 늘 꼬이게 되어있습니다. 계획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계획대로 안 되는 일인데 살아보면 먼 후일 뒤 돌아보면 그때 계획대로 안 된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될 때 웃고 안 될 때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연속이라면 우리가 신앙을 안 가진 사람하고 다를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도 돈 많이 벌고 명예가 올라가고 지위가 올라가고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면 잠시 즐거워하고 그것들을 하나 둘씩 잃어버리면 슬픔에 잠기는 일 정도는 안 믿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우리가 적어도 신앙을 가졌다고 할 때는 바로 그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그 사랑과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느끼며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이 와도 그것을 의미를 생각하며 극복할 수 있고 행복해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독특한 삶입니다. 모든 낙심하고 희망이 없다고 좌절할 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만이 여러분들의 영혼의 빈 잔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격적인 주님을 깊이 만나고 환희의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자, 그럼 하나는 이해가 됐습니다. 두 번째 무엇 때문에 이 시인의 빈 잔이 그렇게 넘치게 되었을까요?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기 때문에”그랬습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셨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왕을 달라고 애원을 하니까 하나님이 왕을 주셨는데 이에 대해서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진노함으로 왕을 주셨고 분노함으로 왕을 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에게도 왕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때 하나님은 그걸 매우 나쁘게 보셨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만의 독특한 특권이 세상에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처럼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과 똑같이 임금을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마음 내키진 않았지만 허락을 하십니다. 그 후로 부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때 세 개의 직임을 오피스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하십니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제사장입니다. 이 사람의 관심사는 죄 많은 백성인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결한 백성들을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사는 제사입니다. 어떻게 하면 현실적으로 죄를 덜 지어서 불결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불결한 것을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까? 만나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제사장의 관심이었기 때문에 제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집니다. 이에 비해서 왕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 나라의 하나님의 통치에 질서를 세우는 왕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직분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셨습니다. 왕은 하나였지만 선지자는 여럿이었고 제사장은 훨씬 더 수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솥발처럼 3개가 서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가도록 하나님이 불러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잠깐 동안의 설명이지만 듣고 보니 이 세 가지 직분 중 아무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거 같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외치는데 그 말씀을 온 백성이 기뻐하면 선지자의 일처럼 보람 있고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핍박하고 마지막에는 하도 듣기 싫으니까 선지자를 죽여 버립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또 쉬운 일이겠습니까? 왕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 가지 직분을 맡은 사람을 세울 때는 하나님이 기름을 붓게 하십니다. 그때 사용되었던 기름은 올리브기름입니다. 그 기름을 이제 세울 때 그 직분을 받는 사람에게 부으면 그것이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에게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으로써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과 지혜, 용기, 지도력 이런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일생에 왕으로 부름을 받고 세 번 기름 부음을 경험합니다. 그 세 번의 기름부음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사무엘에 의해서 맨 처음 기름부음을 받을 때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첫 번째 기름부음을 받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다윗에게 임했습니다. 예전에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진실한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을 정도의 지혜와 능력, 용기, 결단, 탁월한 통찰력 이런 모든 필요한 것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그에게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때 성령이 임하시면서 이 다윗에게 예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영적인 충만한 기쁨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자,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가 경륜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을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 성령을 교회에 보내셔서 그 성령을 교회에 부으시고 그로 인해서 모든 그 교회에 접붙여진 신자들은 성령이 그 마음속에 내주하게 하십니다. 한 번 오신 그 성령님은 결코 떠나지 않고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폐기되거나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질 않습니다. 구원받은 신자인 경우에는.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달랐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특별히 하나님의 일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이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동안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탁월한 능력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성령을 다시 거두시거나 혹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을 때 진노의 표현으로 성령을 거두어 가신 것인데 다윗의 선임자였던 사울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이 됩니다. 자, 이렇게 사뭇 다른데 어쨌든 확실한 사실 하나는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셨을 때 이 시인은 하나님께 넘치는 충만한 은혜를 받았고 자신의 “빈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범죄 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도와 말씀의 탐구, 하나님께 대한 찬양 속에서 주님이 주신 그 충만함을 유지하며 살았기 때문에 기름부음 받은 것은 평생에 세 번이었고 모두 과거의 일이었지만 여전히 그 기름부음의 효과가 이 시를 쓰고 있는 다윗의 마음속에 충만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내 빈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화) 저는 21살 때 주님께로 돌아와서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교인 2-30명 정도. 주일날은 그래도 4-50명 모이는 교회에 스스로 가서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이 한 40명 정도 밖에 안 모이는 교회에 그것도 아주머니, 할머니들 모이는 교회에 젊은 청년이 가서 등록을 했으니 목사님이 얼마나 마음이 좋았겠습니까? 목사님은 또 나이가 많으셔서 목회를 시작하신 분이었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 목사님이 부르십니다. “청년” “네” “너는 이번에 세례를 받아라.” “목사님, 제가 이제 교회 온지 두어 달 밖에 안됐고 학습도 안 받았는데 제가 어떻게 세례를 받겠습니까?” “너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충분히 학습이 되었으니 세례를 받아도 괜찮다. 세례를 받아라.” 그때 처음 신앙을 가질 때였는데 어떻게 목사님 말씀을 감히 거역을 합니까? 그날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한 2-30분 되는 길을 걸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촛불을 켜 놓고 어두운 밤중에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살다 살다가 도저히 내 힘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눈물을 흘리고 주님께 돌아오기는 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예수님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어린 마음에 이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과의 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같이 그렇게 걸레처럼 하나님 모독하고 무신론에 빠져서 살던 사람이 어떻게 내가 주님과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저녁 나와서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세례 문답을 하러 가서 문답을 다 하고 그 다음 주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 이제 모든 것은 결정 되었구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부담이 있었습니다. 교인까지는 할 수 있겠는데 어떻게 내가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주일이 되었습니다.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아침 일찍 교회에 갔습니다. 드디어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을 찍어서 무릎을 꿇고 있는 나위에 부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 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바로 그 순간에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상한 일이 내 몸에서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목사님이 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얹으신 그 손이 닿았던 머리부터 시작해서 따뜻한 기운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내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 내가 드디어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구나.’ 내가 살아온 수많은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14살 2개월 되던 해에 교회를 갔던 날 주일에 논둑에 엎드러져서 통곡을 하며 울었던 때, 나는 누구인가? 난 어떻게 살아야하나? 세상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신은 정말 있는가? 이때부터 시작을 해서 울고 난 후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무신론자로 살기로 다짐했던 날부터 매일 매일 자살을 생각하며 어두움 속에서 살았던 6년 그리고 회심한 때 이르기까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이 부르셨구나.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이 이 불쌍한 인간을 여기로 데려오시기 위해서 그렇게 긴 날을 이 세상에서 방황하게 하시고 주님의 교회를 떠나 세상을 나간다고 할 때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아들을 보냈던 아버지처럼 나를 그렇게 철들라고 세상에 나가게 하셨구나. 한참을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고 날 때는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따뜻한 기운이 발아래까지 내려오고 난 다음에는 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무게가 하나도 없는 몸이 되어서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비로써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가?’ 내가 가지고 있었던 꿈, 희망, 인생의 욕망, 야망 모두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4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밤이 새워서 이야기해도 다 못할 정도로 수많은 성령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언제나 똑같았습니다. 얼마를 기도를 했는지 눈을 뜨고 나니까 예배는 끝났고 교인들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11월 중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성에가 끼어 있는 유리창으로 주일 오후에 한 줄기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깃털처럼 가벼워진 나는 그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나의 마지막 남은 소원은 하나
(찬양)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세상에 모든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 분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인생에 남은 것들은 어떻게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 거 같았습니다. 성령의 체험은 많았지만 언제나 그 효과는 동일했습니다. 순결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것, 비록 내가 예전에는 방황하고 죄 짓고 악을 행하고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경험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핏기 없는 얼굴로 교회를 다닐까요? 끊지 못하고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기쁨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치 진작 헤어지고 싶지만 창피해서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대학 들어갈 때 까지만 참자고 기다리는 부부처럼 서로가 먼저 죽기를 바라는 부부처럼 그렇게 예수를 믿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은 꼭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사랑의 충만함입니다. 사랑은 둘일 수가 없습니다. 결혼안한 처자들 많이 있는데 제 때 시집가길 바랍니다.
(예화) 어떤 자매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형제가 하나 나타났습니다. 얼굴이 준수하게 생겼습니다. 원래 얼굴이 준수한 사람은 신앙이 별로 없는데 신앙이 너무 깨끗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신앙이 좋은 청년들은 집안이 별로인데 엄청난 부자입니다. 신앙이 좋고 집안이 좋은 사람은 공부를 못하는데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을 막 들어왔습니다. 그 정도 조건을 갖췄으면 과거가 지저분한데 처음 연애입니다. 그런 사람이 좀 답답한데 얼마나 센스가 뛰어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나를 위해 다 해줍니다. 내가 없으면 죽을 거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혼을 해야 되겠습니까? 말아야 되겠습니까? 그럼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형제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건 사실인데 그렇게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둘이 더 있습니다. 그러면 결혼을 해야 되겠습니까? 말아야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왜냐면 세 사람 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겁니다.
이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삽니다. 세상을 만날 수도 있고 세상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고 또 세상과 매일 매일 마주 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둘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이 시인은 온갖 고난과 시련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왕도 되어봤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오직 하나였을 때 이 시인의 마음에 넘치는 기쁨이 있었던 겁니다.
(찬양) 주 예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신앙은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는 그냥 교회 다닌다는 이유 때문에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아마 우리 앞에 펼쳐질 인생의 날들, 수많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침대 옆에 아내가 액자에 넣어 놓은 사진을 봤습니다. 제 고등학교 1학년 때 사진이었습니다. 방에 아무도 없었는데 내가 나 혼자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야, 너만 할 때는 내 인생이 이렇게 펼쳐질 줄 몰랐는데..” 정말 몰랐습니다. 펼쳐집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펼쳐지겠지요. 때로는 가슴 벅차도록 기쁜 날도 있을 거고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하늘나라에서 눈 뜨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육신의 사랑은 세상을 사랑하게 만들고 나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정말 잠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많은 것들은 뜨거운 여름날에 광야의 길을 걷다가 마시는 차가운 설탕물과 같습니다. 먹는 동안 몇 초는 시원하지만 들어가고 나면 그 당분 때문에 더 많은 수분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생수와 같아서 그 사랑을 깊이 맛보면서 사는 사람들은 만족을 누립니다. 어떠한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지나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