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청년 여름수련회
새벽설교 모음
(201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4년 7월 27-29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4년 8월 8일
목 차
1. 처음 사랑을 찾으라(계 2:1-4) 2014.7.28 청년 여름수련회 새벽 59
2. 지식을 기뻐하심(호 6:3) 2014.7.29 청년 여름수련회 새벽 62
2014.7.28 청년 여름수련회 새벽
처음 사랑을 찾으라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1-4)
녹취자 : 이경순
에베소 교회는 우리 예수님께 제일먼저 평가를 받은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지방은 당시 로마시도에도 아주 매우 큰 도시였고 지금도 그 유적지를 보면 정말 어마어마한 도시였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에베소 지역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사도바울의 전도를 통해서 이었습니다. 아주 매우 커다란 영적인 각성이 일어났고 그래서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커다란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 마술하는 책들을 모두 가져와서 불살라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에베소 교회가 제일먼저 예수님의 평가를 받고 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아주 하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정한 시각에서 에베소 교회에 관한 예수님의 평가를 보면 정말 이 지상에 이런 정도의 교회가 얼마나 있을까 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남l깁니다. 제일 먼저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일곱 교회를 평가하시는 분으로서 어떤 분인지를 먼저 설명을 합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그 평가를 받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를 다니시는 이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아주 명료하게 일장 마지막인 20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에서 사자가 그 교회를 붙잡고 있는 천사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서 사자는 그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회자를 의미한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 이 에베소 교회를 평가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 하고 싶으셨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의 목회자가 붙들고 계신 주인이시고 또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인이 일곱 교회를 붙들고 있는 분이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미래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은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굳게 붙들고 계신 것 그것이 교회의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교회가 교회 다와 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목회자들이 주님의 손에 굳게 붙들린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시대의 교회이후로 이제까지 언제나 교회에는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이 섞여있고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항상 함께 있어서 결국은 교회라고 하는 것도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에 세상의 일부라기보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 교회 속에서 악한 사람들도 볼 수 있고 온전히 신앙에 동화되지 않은 사람도 발견됩니다. 이런 일들은 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이 교회를 붙드시고 또 목회자들이 주님의 손에 굳게 붙들리는 것이야 말로 교회에 가장 중요한 미래다 하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교회가 어떤 교회였냐면 제일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그러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지식은 있고 말은 많은데 행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뭔가 교회에서 말은 많지만 실제적인 삶의 행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행위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자기의 몸을 던져서 수고하려고 하지 않는데 이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수고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교회는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우리의 믿음생활은 한순간에 스퍼트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변함없이 하나님을 위해서 온갖 역경과 어려움들을 견디는 인내 없이는 우리가 신앙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 교회는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아직 이교회를 향한 칭찬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 교회는 도덕적인 순결을 지양하는 교회였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저들의 교회에는 스스로 자기가 사도라 하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우면서 말과 그리고 이적을 일으키는 행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던 거짓선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는 그런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해서 그 진위를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말씀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는 속일 수 있어도 에베소 교회는 탁월한 말씀의 지식과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거짓된 사도들이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교인들은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는 말씀의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또 그렇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쉬쉬하고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서 다시는 그들이 그릇된 영향력을 하나님의 교회에 행사할 수 없도록 밝히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또 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정도만 되도 아마 여러분의 기억 속에는 에베소 교회 같은 교회를 다녀본 기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의 교인을 향한 예수님의 이 탁월한 평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네가 참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는 인내하는 교회였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한 번 더 잘 참는 교회라고 말씀하셨으니 에베소 교회가 얼마나 많은 시련과 환란을 당한 교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며 예수님을 믿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니 않은 것을 아노라 다시 견딘다는 말씀이 또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에베소 교회가 당한 환란과 시련 고난과 박해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에 마음이 꽂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였던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그러나 라는 이 한마디가 앞에 언급된 그 수많은 좋은 것들을 한 번에 뒤집어 엎어버리면서 무효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잘한 일 칭찬받을 만한 장점은 아주 여러 개가 등장하는데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것은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니고 오직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는 책망 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이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거짓된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이 모든 것들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전에는 이러이러한 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이 모든 일들을 감당을 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 교회의 처음사랑이었습니다. 처음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 처음 사랑이 크고 위대하다고 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 처음사랑이 말하자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것이었고 처음 예수님을 만나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순수한 사랑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였습니다. 아마 그 후에도 에베소 교회는 존재했을 거고 처음사랑을 잃어버렸어도 교회는 교회대로 남아서 이런저런 섬김으로 주님께 봉사를 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다고 할지라도 이미 에베소 교회의 그 많은 남아있는 섬김 속에서 그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처음 사랑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버렸을 때 사실 그 모든 행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처음 가지고 있었던 행위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정말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맨 처음 우리가 회심하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주님을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위해서 나가는 예배의 시간은 우리의 마음에 커다란 감격이었습니다. 사람이 처음 사랑에 깊이 빠지게 되면 모든 것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석이 됩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신자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석되는 겁니다. 주님 때문에 아침에 눈뜨고 주님 때문에 먹고 주님 생각하며 출근하고 주님 때문에 교회오고 예수님 때문에 물질을 사랑하고 예수님 때문에 봉사하고 그래서 무엇을 하던지 항상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신 예수님과의 교감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에 빠진 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열렬한 신자인 것 같아도 교회에 미친 사람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마음속에 정말 예수님을 향한 그 처음 사랑이 아직까지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이런 저런 모든 것들을 행하고 있으나 그 처음 사랑은 잃어버린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지는 지를 회개하고 즉 잃어버린 처음사랑을 회복하는 가장 근본적인 처방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주님이 처음사랑을 회복시켜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주님을 사랑하며 살기위해서는 매일매일 뉘우치고 회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 같은 교인은 자기는 이 세상에 회개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의 모든 구석구석에 당신을 향한 사랑이 베이기를 원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로 예수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깊이 회개하고 처음사랑으로 돌아간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지식을 기뻐하심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녹취자 : 이경순
호세아는 특이하게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 이었습니다. 호세아가 예언사역을 하던 때에 북광국의 임금은 여로보암 2세라는 인물이었고 아마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시없을 아주 영명하고 그리고 탁월한 지도력을 가진 군주였습니다. 나라는 경제적으로 매우 부강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역사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부강한 나라가 되고 군사적으로도 힘이 있는 나라가 되었지만 신앙적으로는 매우 피폐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사역을 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원래 뭐하던 사람이었는지는 잘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혹시 빵 굽는 이야기가 나오는걸 보면서 그 사람이 혹시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추측합니다. 하나님은 한 시대가 타락하고 부패하면 거기에 걸맞은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타락한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이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선지자를 보내셨던 것처럼 북왕국의 강력한 불신의 때에 하나님은 호세아 같은 인물을 보냈습니다. 원래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 ‘야샤’([v'y)라는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예수라는 이름과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라고 하는 이름은 저희 백성을 구원해 내는 사람이다 그런 유사한 뜻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아주 강력한 예언자이었는데 엘리아나 엘리사 혹은 이사야와 같은 의미에서의 강력한 선지라는 뜻이 아니라 이 사람은 어떻게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은 의미에서의 강력함을 가진 예언자 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 예언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고멜이라는 여자에게 장가를 가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실제로 그 여자에게 장가를 갔는데 그 여자는 이스라엘에서 아주 소문난 창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기록들이 하나의 비유이지 실제의 역사적인 사건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경건한 예언자가 그런 창녀에게 장가를 갈 수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입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행동예언이라고 합니다. 말로만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마음속에는 고멜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바알 교를 섬기는 신전의 창녀였을 거라고 여겨지는데 바알 신을 숭배하는 과정 안에 성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 교에 그렇게 아주 쉽게 오염될 수 있었던 이유가 그런 것들 정당화 해주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런 신전의 창녀였을 거라고 보는데 이 사람과 결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이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이 여자하고 살아야 되는데 이 여자가 뛰쳐나가 외간남자하고 자고 아이를 낳아가지고 오는 겁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자기는 이렇게 끊임없이 사랑하는데 이 여자는 자기를 배반하는 그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절절하게 느끼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예언이 그렇게 핏빛 예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읽은 5장 15 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지금 막 번영합니다.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뭐라고 표현 하냐면 7절에 가면 전병에다가 비유를 합니다. 전병이라고 하는 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식으로 먹는 빵입니다. 빵을 화덕에 굽는데 두툼하게 해서 굽는데 막 불을 세게 때니까 밑에는 타고 위에는 안 익는 겁니다. 그러니 밑은 타서 못 먹고 위는 설어서 못 먹는 겁니다. 그게 무슨 비유나면 경제적 정치적으로는 너무 지나쳐서 타버릴 정도로 열기가 있고 종교적 신앙적으로는 아예 싸늘하게 식어서 윗부분은 아예 익지가 않은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없는 전병, 뒤집지 않은 전병, 그렇게 되어버린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야기는 너희들이 지금은 이렇게 하나님 없이 번영을 누리며 잘 살아도 언젠가 하나님이 너희를 징계하실 텐데 그때는 하나님이 사자 같고 그리고 사자가 마치 짐승을 습격해서 탈취할 때 속수무책으로 그 일을 당하는 것처럼 징계하시는 하나님 앞에 대책이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야 너희들이 말 할 거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지만 살려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렇게 말할 때가 온다. 이겁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하는 이야기가 그러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3절 본문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아멘
그러니까 그때가 되면 그때서야 너희들이 그러니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역으로 거꾸로 우리가 추론을 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군사적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살도록 어쨌든 하나님이 그것도 섭리 속에서 복을 주신 거 아닙니까? 그랬는데 그 속에서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살았던 이유는 결국은 무엇이라는 겁니까?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지를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제적으로는 번영했지만 그렇게 잘못된 나라가 되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됩니다.
성경을 한번 찾아서 호세아 4장 6절과 7절을 읽어보십시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내가 지식을 버렸으니 너도 나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내 하나님의 위법을 잊었으니 너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은 번성할수록 네게 범죄 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폐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와 다를 수 있었던 것은 제사장의 나라입니다. ‘마믈레헤트 코하님’(מַמְלֶכֶת כֹּהֲנִים),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최대의 약속입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를 위하여 제사장의 나라가 되리라.”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내 지식을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할 때 이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렇게 이 호세아 선지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부패하고 종교적으로 아주 무너진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이지적인 신학지식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신학지식 그 자체 속에는 존재적인 울림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신학생들 속에서는 존재의 울림이 장엄해야 됩니다. 성적순으로 말입니다. 동의 안하잖아요. 그거와는 다릅니다. 지난달에 어느 교회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주일날은 잘 안 가는데 한 이년인가 삼년동안 계속 와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안 갔는데 다시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몇 년 동안 부탁을 하는데 힘들어도 내가 가자하고 1, 2, 3, 4부 설교를 하고 거기를 갔습니다. 한 2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이고 교사학교로 모였습니다. 저녁예배인데 일반교인도 나오고 특별히 교사헌신예배를 드리니까 교사에 대해서 설교를 하라고 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 목사님이 내년이면 은퇴하시는 분인데 알고 보니까 우리가 또 우리가 학부에서 같은 신학교를 나오신 분이었습니다. 저보다 연세가 계서서 못 만났지만 이름 대니까 한 다리 건너서 다 아는 목사님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잠깐 나가셨는데 장로님이 자기 담임목사님 자랑을 하는 겁니다. 보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아 박영선 목사님이 우리목사님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럽니다. 그래서 연세도 비슷하고 그러니까 그러시냐고 하니까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답니다. 그게 뭐냐고 하니까 박영선 목사님이하고 같이 어느 집회에 참석을 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앉아서 특별히 예배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주여’ 그리고 주님을 부르시더랍니다. 박영선 목사님이이 깜짝 놀랐답니다. 그리고 친해졌답니다. 그래서 왜 그러십니까, 하니까 당신네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주여’하고 부르는데 자기가 엄청 감동을 받았고 다른 사람이 ‘주여’ 그러는 거 하고 는 다르다는 겁니다. 그런 것이 존재의 울림입니다. 내가 늘 이야기하잖아요. 신학 지식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신학공부가 목회자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게 엉터리입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모든 신자가 신학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게 오늘날 유행하는 이런 신학공부가 아닙니다. 신앙이 좋아지려고 신학교에 갔다가 성공하는 사람은 별로 못 보았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닌 신학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학지식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좋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신학공부가 중요해도 그 신학공부의 지식이 그 자체가 존재적인 울림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무언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존재의 울림, 그런데 그 모든 존재의 울림을 한 마디로 집약을 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이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존재의 울림을 가져다주는 겁니다.
생각난 김에 하나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우리 신학교 다닐 때 일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에 맹인 목사님이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하러 오셨답니다. 담임목사님은 그때도 꽤 연세가 있으셔서 부목사님이 사회를 보았답니다. 사회라는 게 뻔합니다. 찬송 몇 장 부르시겠습니다. 성경 읽고 잠시 후 아무개 목사님 나오셔서 설교하시겠습니다.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설교를 은혜롭게 하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앞이 안보이니까 사회 보는 목사님이 목사님의 손을 잡고 교역자실로 들어갔는데 교역자실에 들어가서 문제가 생긴 겁니다. 목사님이 사회를 보신분입니까?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네’ 그랬더니 당신은 앞으로 목회를 할 겁니까? 아닙니까? 하니까 해서 목회 할 겁니다. 그러니까 ‘ 안 돼’ 그렇게 해서는 ‘안 돼 ’그러는 겁니다. 처음 만났는데, 그래서 왜 안 됩니까 ? 하니까 나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당신이 찬송 부르고 성경을 읽는 것을 들으면 느껴지는데 당신은 아직 멀었다는 겁니다. 그런 게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 거기에 대한 자신의 반응, 이런 모든 것들이 울려 퍼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즐겨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아주 평범하고 짧은 말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전에 가혹하리 만치 긴 세월동안 그 말씀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아주 평범한 짧은 말이 사람의 마음을 깊이 울릴 수 있는 그 무엇이 나옵니다. 그게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의 모든 타락과 문제 한복판에는 열심히 하나님을 알지 않으려고 하는것 에 있다 그것을 거꾸로 추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는 것 이것이 우리를 모든 부패와 우리의 신앙의 이탈로부터 막아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냐 안 지었냐 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를 계속해서 힘쓰면서 사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망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그의 나타나심이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 우리는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듣는 사람의 감정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성질도 나고 기분이 좋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을 할 때는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래서 세상에 재 수없는 죄수가 재판하는 날 재판장이 아침에 부부싸움하고 나온 날입니다. 오전에 재판이 잡혀 있으며 웬만하면 징역입니다. 짜증이 나니까요. 그런데 왜 그런지 판사가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피고가 몇 마디 하는데 판사가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이런 것은 벌써 집행유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안 그러십니다. 그것을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왜? 밤중에 무슨 일이 이 세상에 일어나도 이렇게 아침이면 밝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나라가 다 망한 다음에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나라가 다 망했어요 곳곳에 짓밟힌 흔적입니다. 그런데 새벽이 밝아오는 겁니다. 이 선지자가 가슴이 벅찬 겁니다. ‘아 빼앗긴 들에도 새벽이 오는가?’가슴이 벅찹니다, 왜 벅찰까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거기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당신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자신을 감추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해서 심문을 하던 빌라도가 마지막에 가서 결정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무엇이냐 묻습니다. 예수님이 일평생 하시던 설교가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면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질문하면 ‘아이 엠, ‘나다’ 그러면 됩니다. 그런데 안하십니다. 왜? 빌라도는 그런 대답을 들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 알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침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간절히 알기를 원하는 마음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 그래서 당신께 나아가는 자를 주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무엇을 덧붙이냐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이스라엘은 비가 아주 적은 지역입니다. 물이 부족한 곳입니다. 관개시설은 아주 잘해놓아서 그렇게 번영한 농토가 된 것입니다. 이 당시에 두 번 비가 내립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이른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고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늦은 비가 내리면 마지막 결실을 해서 추수하는 겁니다. 그래서 늦은 비, 늦은 비라는 것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 이유는 결실입니다. 그러니까 이른 비가 아무리 잘 내려서 파종을 했어도 늦은 비가 내려서 결실을 해주지 않으면 농사는 망칩니다. 그래서 늦은 비는 축복의 단비입니다. 결실을 얻는 단비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방탕하고 죄짓고 악을 행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에게 늦은 비처럼 오셔서 결실하게 해주신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환란이나 시련을 당하고 난 후에 사는 게 괴로워서 도피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이고 소망이라고 믿으면서 주님을 알기를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결심하고 그렇구나. 내가 지금 당한 역경과 혹은 순경 좋은 환경이나 나쁜 환경이나 무엇이든지 결국은 하나님이 날 더러 당신을 알기를 힘쓰라고 주시는 기회이구나. 그러니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신실하시니 반드시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찾을 때 나타나시리라 이런 믿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4 청년 여름수련회 새벽설교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