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깨어짐의 신학적 의미에 관한 지혜자적 사유”
들어가면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은 내가 자원해서 하는 것이다. 왜냐면 최근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신앙의 새로운 지평들을 보게 하셨는데 아직은 마음속에 많이 있는데 다 공개할 수도 없고 시간도 안 되지만 조금이라도 빛을 나누어주면 굉장히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정도와 수준이 다르겠지만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현저하게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설교를 통해서는 내용 자체가 너무 추론적이고 철학적이고 이성적이기 때문에 모두 이야기 하는 것은 연속적인 이해에 무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오늘 이야기 하는 것들은 모두 이야기 할 수 없지만, 20p. 분량의 강의안을 참고하시고, 완성된 원고가 아니라 집필하고 있는 원고를 주었기 때문에 감안하셔서 참고하시고 제 강의를 듣고 강의안을 들으면 명쾌하게 이해가 갈 것이다.
-기도-
우선 저는 이 문제를 강의함에 있어서 왜 강의할 필요성을 느꼈는지를 말하고 강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겠다. 우리들은 그동안 많은 시간동안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특별히 성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교를 듣고 공부를 해왔다. 성화라 하는 것은 결국 인간 안에 남아있는 죄 된 부패성을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으로 신자의 순종을 통해서 그것들을 소멸하여 감으로써 우리가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의 온전함을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데 그 성화의 의의가 있고, 그 성화 안에서 인간은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성화 안에서만 행복해 질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교리들은 우리가 배웠고 여러분들은 성화의 필요의 이유를 인간의 죄와 타락을 공부해 가면서 터득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의 비참함과, 희망이 없는 것과 그리스도 구속을 입으며, 그 구속을 통해 남아있는 죄의 부패성을 성화를 통해 회복해 감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여 살아가게 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도 훨씬 더 핵심적인 문제로 들어가게 되면, 성화에 대해 핵심으로 들어가게 되면 회개의 문제가 대두가 된다. 왜 회개의 문제가 대두가 되냐면 사람이 성화가 된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자유롭게 우리의 본성 속에 역사하시면서 우리를 주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우리의 부패성을 녹여 가셔야 하는데 모든 신자들이 그런 성령의 은혜로운 작용에 순응하지 않고 거기에 계속 저항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에 대해 저항하기 때문에 자기의 아집과 죄들이 쌓여간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된 생활들이 익숙해져 간다. 이렇게 되면 일상적인 성령의 거룩해 하시는 이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자기가 상당 기간 동안 계속 해오던 죄 된 행실과 하나님을 떠난 삶에 대해 깊이 참회하는 일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반드시. 그렇다고 해서 참회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자가 계속 순종만 하느냐는 것은 또 아니다. 일상적인 경험으로 보면 성화가 상승 된다 기 보다는 가다가 떨어지거나 가다가 떨어지는 등 굴곡이 있게 된다. 영적 침체의 시기에 항상 참회를 통해 다시 상태가 회복되며 멈추었던 성화의 작용들이 진전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내가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지난 신년사경회 때 번제, 소제, 그리고 전제 중에서 소제 부분, 소제 부분 중에서 적용부분을 썼는데 16쳅터 정도 썼다.
자기 깨어짐은 회개와 참회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특별히 깨뜨려지는 것. 자기 깨어짐이라는 의미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1970년대 워치만 리가 자아가 깨질 때라는 책을 썼는데 신학적으로 전통적 개역신앙의 라인과 다르다. 워치만 리라는 사람이 18세기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는데 후기에 신비주의 쪽으로 기울여져서 그 영향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틀림없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신학적으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 책이다. 어쨌든 그 사람이 그 용어를 쓰고 그 후로 용어가 형성되 있지 않다. 영어로 번역하기 힘들지만 자기 깨어짐이라는 용어를 설명해 보겠다. 깨어짐이라는 것은 자기 사랑에 대한 깨어짐이다. 그 깨어짐 속에서 자기사랑이라는 것이 깨뜨려짐으로서 인간안에 까리타스의 사랑으로 가득차게 된다. 까리따스는 꾸삐디다스와 대조를 이루는 라틴어로 까리타스는 지순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더 이상 순결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그것이 까리따스고 꾸삐디다스는 반대로 육욕적 사랑이다. 육욕적 사랑은 자기 사랑에서 오는 것으로 자기가 좋아하니까 그것을 택한다는 점에서 육욕적 사랑이라 한다. 인간의 사랑은 이까리따스와 꾸삐띠따스의 사랑이 마음을 점령하려고 한다. 본래 신자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해져야하는데 꾸삐띠다스이 사랑에 의해 자꾸 점유가 되는 것이다. 내안에 꾸삐띠다스의 사랑이 우세해 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는 죄와 은혜의 지배에서 다루고 있다. 우세하게 될 때 그것들이 그는 이상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중생과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을 향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정의 된 사람인데 꾸삐띠다스의 사랑이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선을 따라서 살수가 없게끔 만든다. 반드시 하나님을 거스려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복잡하게 얽혀 거듭난 본성으로는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하는데, 작용이 꾸삐띠다스가 작용되어 하나님을 거스려서 선이 아닌 악을 찾아가도록 살아가도록 충동되어 일대 혼란에 빠진다. 신자가 은혜가 떨어져서 죄에 빠지면 하나님을 더 모르는 신자보다 더 불쌍하지 않는가?
여러분이 옛날 때를 생각해보라, 하나님을 모를 때보다 하나님 알고 죄의 비참함에 빠진 때가 더 비참하지 않는가? 이런 의문들이 오늘 강의에서 풀릴 것이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을 GOOD. 으로 나타내고 선이라는 것은 기준이 있어야 나타날 수 있다. 사람마다 선하다라는 것이 틀리므로 기준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그리스 철학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요즘 철학은 이런 것을 고민하지 않는다. 사물을 본질부터 파악하여 문제를 캐 들어가는 고전적 철학은 폐기되고 있는 것을 가지고 현상만을 가지고 인간이 그 현상 속에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를 따진다. 어쨌든 지간에 선이라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기준이 되지 않고는 선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이것을 우리 성경에서는 창조의 목적이라 한다. 창조의 목적이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모든 우주는 146억년정도 전에 창조 되었을거라고 보는데 원래 크기는 원자의 크기정도 밖에 안되는데 빅뱅을 일으켜서, 우주가 되었다고 한다. 제일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세월이 오랜 흐른 후에 이 지구가 블랙홀로 들어간다는데 그 블랙홀에 들어가게 되면 직경 1.4mm 의 깨알보다 작은 존재로 변한다 한다. 지금도 우주는 팽창하면서 초당 2000km,씩 폭발하면서 팽창하고 있다. 어디까지 팽창하느냐는 상관없다.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역사가 이루어졌다. 지금으로부터 4억전이라고 하면, 날짜가 24시간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73억년이 흐르고 난후 예수님이 안오신다면, 밤과 낮이 멈춘다. 이처럼 모든 것들이 다 변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 하셨을텐데 무질서하게 쾅하고 폭발하면서 아무렇게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선 커다란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나하나의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하신 것들은 개개 개체별로 작용하면서, 하나의 유기적 연관을 갖은 가운데 서로 상호 작용을 한다. 모든 만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창조의 핵심은 성부하나님께서 성자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안에서 창조하신 세상이다. 성자를 통해서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은 성령안에서 하나의 연결을 갖게 된다. 피조물 하나하나가 모두 영적인 연결을 갖는다. 연결 되서, 하나하나가 작용하며, 작용하는 하나하나가 존재와 작용이 서로 얽히면서, 일정한 목적에 기여한다. 모든 것들은 연관을 이루고 작용을 해서 하나의 목적을 향하게 만들었는데, 그 모든 작용과 상호관계, 상호작용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권능 아래서 이루어진다. 인간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하나하나의 작용이 또 다른 피조물의 작용과 어울리고 존재와 존재가 서로 연결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이룬다. 커뮤니케이션이 만물의 연결이다. 이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의 신성의 영광을 충만한것을 흘려보낸다. 그래서 만물이 꽉 차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을 가득채운다. 온세계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아래서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며 창조의 영광을 보여준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였다. 이렇게 찬란한 영광에 빛나는 완전한 세계인데도, 이 완전은 더 이상 노동을 보탤 필요가 없는, 그런 의미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상태의 완전이다. 그 완전한 상태를 계속해서 발전시켜가면서 이런 만물사이의 연결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더큰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경륜하셨다. 그렇게 해서, 창조의 영광이 드러난다. 창조의 영광은 창조물 개체의 영광이 아니라, 그 창조물이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는 영광이다. 이 창조가 영광을 드러낸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의 원인인 동시에 그 창조의 목적이기도 하다. 왜 이분이 중요한가 하느냐면, 전통적으로 성경에 나와 있는 대 구속의 드라마를 이야기 할 때 네 가지 주제를 가지고 다루었다. 창조-타락-구속-회복. 이것이 성경 신학에서 인간의 구속사를 다루는 방식이다. 이것들이 이제 교리학에서는 좀 더 상세하게 다루지만, 어쨌든 창조-타락-구속-회복이다. 여기에서 아주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타락하고, 구속하신 다음에 그들을 사용하여, 회복을 하는데, 무슨 문제가 대두가 되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무엇인가 계획을 가지고 창조를 하였는데, 인간이 타락하여 좌절되는 것처럼 느꼈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목적을 무효로 돌리고 재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상태에서 이것을 구속하셨다. 구속하셔서 이것이 지향하는 바가, 정확하게 창조가 원래 지향하고자 했던 바로그것이다. 바로 그것으로 가기 위해 구속을 하였다. 보통 구속을 이야기 할때는 인간의 구속만을 이야기 하지만, 이것은 스페르마타, 대중적 씨앗에 불과하다. 아주 기가막히게 문학적 대조를 이룬다. 창조에는 만물이 다 창조되고 난후, 인간이 창조되었지만, 구속의 역사에서는 인간이 먼저 구속되고 난후 만물이 구속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다음에 화룡정점과 같이 온 창조세계에 영광의 빛이 들어오게 하고, 인간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전원이라면, 인간은 인익선의 스위치와 같은 것이다. 그 인간을 통해서 모든 연결들이 이루어 지며, 만물이 상호작용하며, 천지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과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창조물들과 연관을 맺고 있다. 그렇게 된 것이 타락이 되었다.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셨는데 구속의 목적은 창조의 목적을 계속 이어가려는 것이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온 땅이 저주를 받고 삼라만상 모든 피조물 사이에 영적인 아름다운 열기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거의 희미하게 남아있고 모두다 깨뜨려져버렸다.창조의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것을 어려워 졌다. 인간이 인식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제일 먼저 구속하시어, 구속하신 인간을 통해서 남은 세상을 회복시켜 가려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것은 틀리고, 성경은 오히려 창죄된 세계를 4가지로 분류한다. 다만 존재하는것, 무생물, 그위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것, 식물 등 그위에 존재하고 살아있을 뿐 아니라, 감각기관을 갖는 것 동물, 존재하고, 감각하고, 인식하는 이성적 피조물, 혹은 도덕적 피조물- 인간, 천사를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다. 창조하신 원래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지만, 구속한 후에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을 우주론적으로 연결시킨다면, 구속의 연장선상으로 이야기 되지만, 이것을 인간자신 안으로 축소시킨다면,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때, 인간의 지성과 아름다움은 말할 수 없이 탁월했다. 그 지성의 능력이 굉장히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는데도 그렇게 위대하지 않는가? 다만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지.인간이 그렇게 뛰어난 존재로 태어났는데, 망가졌다. 망가진 인간이 성화의 작용을 통해 점점 거룩해지고 변화되어져 간다. 하나님이 맨처음 인간을 만들어 놓으셨을때, 하시고 싶은 일이 있었지 않겠는가? 그 인간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더 아름답게 가꾸시기를 원하셨다. 어떤일이 있었느냐면, 제 방에다 나무하나를 사다두었다. 시장에서 꽤 예뻐보이는 나무였는데, 점점 시름시름 죽어서, 옥상에 올려다 두었다. 그러다 한 두세달 동안 잊어버렸다. 올라가 보니까 다시 방에 들여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도록 촌스러워졌다. 제멋대로 자라버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세계를 잘 가꾸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충만해 지도록,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창조에 대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 지겠는가? 아담이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더 아름답지 않는가? 어떤 이는, 타락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형제자매가, 벌거벗고 에덴동산에서, 과일을 따먹으며 놀것이라고 얘기한다. 우리의 교리수준이다. 인간이 타락하여, 자기 존재안에 존재의 목적대로 살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이 박탈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거주하는 세상도 파괴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원래의 계획,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동에 옮기신 것이 인간의 구원이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은 타락하자마자 구원이 시작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칼빈 같은 사람도 본다. 구원받을 백성의 씨인 동시에 멸망 받을 백성의 공통분모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두 가지 방면으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 상태를 창조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도록 기여하여야 한다. 그것이 구속의 목적이고, 창조의 목적과 일치한다. 그러면 인간은 크게 구속받은 후에 두 가지 면에서 헌신함으로써, 본래의 창조의 목적에 기여한다. 하나는 자기 밖의 세계에 향해서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이다. 먼저 자기 밖에 세계에 대해서는, 첫째로 사람과 관련된 것과, 사람이외의 것과 관련된 것이다. 사람과 관련한 것에 대해서 그 사람들이 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창조의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자연 세계를 통해 신성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경배하게 하는 작용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중적 이유로 불가능 하게 되었는데, 먼저는, 인식되는 대상 자체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영광의 빛을 상실한 것이다. 판타지 같은 경우, 저주받은 장면에서, 빛을 잃는 장면으로 표현이 된다. 또 하나는 인식할 수 있는 인식의 기능 자체가 고장이 난 것이다. 정확하게 비춰도 인식할 수 없도록 망가졌는데, 그것도 망가지고 이것도 망가진 것이다. 그래서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사물의 이치를 추론하려, 하고, 그것을 따지려 하고 그러다가 바보같이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된다. 태양이나, 물고기나, 사람을 신성시하여, 경배하며 살아가는 삶이 죄아래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이다. 그런것들이 창조의 원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셔야 한다. 다만 일정한 범위 안에서, 자연이나 생태계 같은 것들을 보존하면서 살 수 있다. 그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어떻게 되냐면, 죄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영광을 들어낼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있는 상태를 상실해 버렸다. 이것은 두가지로 설명되는데, 피조물중 일부로서 피조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에 참여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위에 뛰어나게 하나님이 인간 그 자체를 저주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인간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고, 피조물속에 있는 모든 연결을 한 부분을 이루는 피조물로서, 일반적인 저주를 받는다. 일반적 저주와 인간에 대한 개별적인 저주가 합해져서, 결국 인간은 저주받은 상태가 되었고, 인간은 원래의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다스리고 돌보며 살아갈 수있는 그러한 (인떼그레따스)전일성을 상실한다. 하나로 되어있는 전일성을 상실한다. 그렇게 인간은 문제를 갖고 있다. 자연의 세계를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인익선의 스위치와 같은 위치이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변화되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저주가 풀리기 되면, 이땅의 모든 것들이 구속받게 되고 창조의 계획을 회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릴 결론은 인간의 구속이 모든 망가진 피조세계의 구속을 위한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먼저 하나님께서 구속을 하신 것이다. 타락하자마자 구속이 이루어 진다. 인간이 창조세계가 회복이 되기 위해서는, 창조시에는 만물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창조로 마무리 되었지만, 구속은 인간으로 시작해서 바깥으로 퍼져나가서 세계의 구속이 완성된다. 인간이 구속받아서 인간이 구속의 목적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이 급선무가 되는 것이다. 우선, 인간들이 도저히 자신의 지성의 힘으로는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창조의 진실과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의 모든 구원의 길에 대한 지식들을 누군가가 전해주어야 한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계시라는 방법을 통해서 인간에게 그 지식을 전해주시고 그 계시를 받은 인간들이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한다. 말로 전하고, 행동으로 전하고 다른 삶의 모본을 보이는등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게끔 존재하는 사물의 모든 질서 말고 하나님 창조하신 또 다른 원래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고와 삶, 사상 그들의 모든 발언, 표명, 이런것들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판단하고 갖혀있던 것들을 밖에 세계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여러분들중에 미국 한번도 안갔다온 사람들이 많은데, 미국에 대해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전한다. 그러면,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다녀온 사람은 말할 수 없다. 안보았지만, 얘기는 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믿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좀더 확대해서 생각하면, 인간의 이성적 사고에 대해 추론된것은, 자신이 알지만, 추론을 할 수 없다. 사실에 대해 믿을 수 밖에 없다. 이성적 추론으로 불가능한 또다른 영역에 대해 어떻게 하겠느냐, 여기에서 소위 아웃또리따스의 문제가 나온다. 라틴어로 아웃또리따스라는 것은 권위다, 라츄어는 이성이고, 이 권위를 갖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아간다. 이성은 지식적인 추론의 과정이다. 아웃또리따스는 이성적으로 추론이 되지 않지만, 누군가 그것을 보고온 사람들이 지시적으로 전해준다. 너희들이 이성적 추론이 여기까지 되지 않기 때문에 모르나, 뒤집힐수 없는 명제,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공리적 진리, 공리적 명제이다. 명제는 뒤집힐 수 있지만, 공리적이란 말이 붙으면, 바뀔수 없다. 공리적 명제를 주면, 그것을 자기의 이성의 추론으로는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도저히 추론할 수없는 것을, 누군가의 권위를 받고, 그것을 믿고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 명제를 기초로 이성적으로 추론해 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볼 때 가정 이성적인 행동이다. 믿음은 이성적인 행동의 또 다른 선택이다.
인간이 누군가가 가르쳐준 것, 권위로서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계시와 이성은 영원히 중요한 숙제가 된다.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이다. 인간이 그 계시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이성으로 다 추론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계시와 이성을 가지고 진실을 알려준다. 그것들을 추론하고 깨닫고 알게 되며, 듣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 거듭나고, 하나님의 창조도 믿어지고, 창조의 영광도 알게 된다. 하지만, 공부를 해야 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을 정도로 척박해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러다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한 설교자가 가르쳐주는 말이라도 믿으며 성령충만하면 괜찮지만, 무지하다고 충만한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먼저 지성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지성적으로 헌신하지 않는것은 돌이킬수 없는 중대한 범죄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리처드 백스터가 무지는 거의 악이다 라고 했다. 무지는 악이라는 것과 같다. 인간에게 그런 부패성들이 남아있는데, 이제는 타락으로 전일성을 상실했는데, 중생으로 하여금, 전일성을 회복해야한다. 전일성은 (인떼그리따스) 영어의 정직(integrity)이 거기서 왔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문에서는 앙떼그리떼로 나온다. 어떤 사물의 본래적 특성이 존재자체를 꽉 채우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이면 사람으로 가득 찼을 때, 그 사람이 전일성을 갖은 사람이다. 이것이 희랍철학에서 말하는 에이나이, 에이나이로 설명한다. 나무는 나무됨으로 꽉찬것, 돌은 돌됨으로 꽉찬 것, 물은 물 됨으로 꽉찬것, 우주는, 있는 것으로 꽉 찬것, 어느 공간에도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것, 없음 그 자체는, 실유가 아니라, 가상일 뿐이고 온 세계와 우주는 있음 자체로 꽉 찼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보면, 경탄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이 나사렛에 있는 별로 교육수준이 높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이미 전에 희랍의 철학자들을 통해서 이런 사상적 틀을 다 구축하였다. 이것을 가리켜, 복음 이전의 하나님의 역사라 한다. 프리 이반겔리온이라 한다. 이러한 복음 이전에 사상적인 틀들의 마련은, 기독교가 확실하게 전파되고 수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회심을 하고 그러면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사상의 토대를 가지고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런 것들도 하나님이 보게 하셨다. 온 세상의 존재는 하나님 자신으로 꽉 찼다. 인간의 전일성이라는 것은 참된 사람됨으로 꽉 차있는 상태이다. 창조 시에는 꽉 찼다. 참으로 사람됨으로 가득찼을 때, 참사람 됨 안에서, 지성은 창조의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명료하게 분별하고, 정서는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에 대한 느낌으로 꽉 차고, 의지는 지성으로 알게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 준비가 다 갖추어진 자원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 속에서 인간은 그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꽉 찬 가운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계를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림으로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더 찬란하게 드러내면서 자기 자신이 그 안에서 극도의 행복을 느끼는 소위 지복의 상태 (비에뜨튜드)를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여하며 살아가는 삶과, 자신의 행복을 완성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처음 아담과하와의 타락하기 전에는 분리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 영광 받으신 그곳에서 자신도 즐거워하고 행복해 한다. 문제는, 하나님이 인간을 중생시키셨지만,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부패한 성품이 남아있다.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내 안에 세상을 향한 사랑, 자신을 향한 사랑 등이 남아있다. 이 부패성들을 남겨두셨다. 왜 하나님은 그것을 남겨두셨을까? 처음에 창조된 것처럼 원상복귀 시키시지 않았는가? 이것도 굉장히 많은 논증이 필요하지만, 결론만 얘기하면, 죄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어떤 방법으로 받는가는, 좀더 복잡하지만, 한가지 예를 들어 얘기하면, 죄가 없는 상태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연합을 유지하고 기쁨 속에서 살았지만, 그 하나님과의 연합은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는 연합이다. 죄지을 개연성이 남아있는 사람이다. 지금은 개연성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깨어진다.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에겐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려 하는 사람들은 해당이 된다.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또 신자 안에 부패성이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인간이 자기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탁월성을 깨달을 수 없다. 아담도 이것을 이해 할 수 없다. 이해가 가는가?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깊이 느끼고 예수와 하나로 연합되는 놀라운 기쁨은 용서 받을 때 느낀다. 죄가 없다면 용서가 필요 없다. 지금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고 자기 깨어짐 속에서 강물같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 탁월한 영적기쁨은 아담에게는 없는 것이다. 아담이 훨씬 복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더 낫다. 에드워즈 같은 사람은 우리들이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면서 느끼게 되는 그리스도예수와의 놀라운 기쁨도 죄 때문에 가능하다. 어떻든지간에 하나님은 남겨두셨고, 그러면 이제 남아있는 상태에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되고 살아가고, 그렇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창조와 구원의 계획을 알려주어 이 지식의 빛 아래서 살아가게 하고 결국은 인간 하나하나를 통한 원래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것이 인생의 참된 도리이고 인간의 참된 행복이다. 그 밖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비참한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결국 너무 보고 싶어 하면서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고 너무 목말라 하면서 소금을 집어 먹는 것과 같다. 해결의 방법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서 열심히 섬기고 일하는 것보다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때 그 기도가 의미가 있고, 헌신할 때 그 의미가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 깨어짐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분명하다. 자기 깨어짐의 위치는 그렇게 자기가 구속받았지만, 전일성이 원리적으로 회복되었으나, 부패성이 남아있다. 그래서 상당부분 우세하게 창조 시 인간이 갖고 있는 전일성을 놀랍게 회복했으나, 부패성이 남아 있다. 이것이 이 속에서 존재 전체를 움직이는 원리로 작용을 한다. 이제 설명을 본격적으로 해 나가도록 하겠다. 이제 선에 대한 이야기를 다 끝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으로서의 선이 있고, 여기에 모든 피조물들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인간을 중심으로 놓고 이야기 하겠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행동, 태도, 이런 모든 것들이 이렇게 있을 수 있다. 방향이 선이라는 창조의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고, 이렇게 되어 있는 상태를 선함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goodness라 말할 수 있다. 선함이란, 결국 이렇게 창조의 원래의 목적, 그것이 선한 것이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때의 토브가 곧 선이다. 그 선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말하면, 선함이다. 빛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모든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요소이다. 그것이 창조의 원래의 목적인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내고 피조물들을 행복하게 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기여한다. 그것이 선함, 토브라 한다. 그러면, 인간이 선함을 향해 가게 된다. 예전에 있는 인간은, 그렇게 살수 없었으나, 구원을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함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셨다. 중생을 통해서 선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여기를 찾아가지 않는 인간은, 어디를 찾아갔겠는가? 어딘가를 찾아서 가지는 않았겠는가? 그방향은, 여기를 벗어나는 모든 것들은 모두 마찬가지다. 악이다. 악을 향해 간다. 악은, 실제가 아니다. 철학적으로 실제가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선이 없는 그 모든 것은 악이다. 악을 향해 가는 것이다. 원래는 악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인데, 하나님이 구속해 주셨다. 지난 죄는 다 용서해 주시고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렇게 악함을 가진 존재로 악하게 살아갈수밖에 없도록 되어있는 이 사람을 내적인 전일성을 회복시켜서 방향을 되돌리게 만들어 주었다. 그 돌리는 결정적 요인이 사랑의 중심축이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의 중심축이라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 둘중에 하나밖에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둘은, 하나님이냐, 자기를 사랑하느냐 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결국은 자기사랑은 파괴되고, 까리따스의 사랑이 자신안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까리따스가 충만할 때 그때에 하나님의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창조세계에 있는 목적을 합치의 원리에 의해 받아들이게 된다. 무슨 뜻이냐하면, 서로 사랑하게 되면 목표가 합치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의 대상에 목표에 합치가 된다. 이렇게 연합을 이루게 된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 까리따스 만이 이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자기사랑을 버리고, 까리따스를 선택하게 된다.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기사랑에 관해서 깨뜨려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자아사랑이 있는데 그것이 부숴지고, 깨뜨려지고 없어져버리는, 파괴되버리는 것이고, 새로운 사랑이 거기에 서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회기하는 것 이것이 회심이다. 중심축이 옮겨지는 것이다. 나머지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혹시 질문한다면, 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 둘 뿐인가? 민족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돌고래를 보호하기 위해 평생을 보호하는 사람, 나환자 촌에 가서 일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둘로 획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중심축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컴퍼스의 한 축을 놓고 원을 그린다. 짧게 그리면,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그 원을 무한대로 늘린다 하면 사랑하는 대상이 늘어난다. 결국은, 자기 사랑의 확장이다. 그 동심원이 넓어질수록 덜 추하다. 악이라는 것은, 고정적 개념이 아니라, 이행적 개념이다. 악이라는 것은, 넓은 동심원을 그릴 수 있는데 그것이 점점 줄어들어서, 작은 것으로 이행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악이다. 그러나 한계는 중심축이 자신이다. 확장해서 그려가도 중심은 자기인다. 대두되는 문제는, 호수에 돌맹이 두 개를 던졌을때 원을 그리면서 파장이 퍼지는데 그 둘은, 부딪히게 된다. 중심이 자신이기 때문에 어디엔가 다른 곳에서 시작되는 까리따스의 중심의 파문하고 필연적으로 상충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은혜받았음에도 삶이 변화되지 않고, 개선하지 않을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단과, 성령의 은혜로 변화되어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의 작용으로 변화, 이것이 혼돈이 된다. 결국 영적으로 거의 죽어있어도 (까리따스의 사랑의 고갈) 그사람이 도덕적으로 행동을 하면, 굉장히 훌륭한 신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리세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에 대해 선지자들이 비난하기를 너희는 입술로만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다. 너희에게는 나를 경외함이 없다 하였다.
이 사람안에 죄의 오염이 남아있다. 고정적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작용하면서 우리 안에서 우세하려 한다. 선하도록 전일성이 회복된 인간인데, 작은 남아있는 부패성들이 상당히 발육을 하고 성장하여 이것을 틀어놓는다. 이래서 혼란이 온다. 인간은 중생을 통해서 선함의 상태로 선을 좇으며 살아갈 수 있게끔 그렇게 될 때에 행복해 질 수 있도록 포맷이 되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악함으로 가게 된다. 이 속에서 이중의 원리가 뒤엉키게 된다. 결국은 자신 안에 거듭난 본성은 선하게 살아가고 싶어하나, 선함이 아니라 악함을 가지며, 창조의 선이 아닌 다른 것을 찾아간다.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 들일 수 없다. 하나님이 아무리 영광받으셔도 기쁘지 않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묻는다. 죄안에 미친기운에 젖는다. 죄안에 광기와 맹렬함과 무모함이 존재한다. 악함이 되어, 베리타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살았다 하나, 산게 아니라, 죽어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 창조의 목적을 향해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그 존재와 상태에 있는 것이 선함이다. 이런 선한 상태에 인간이 있는 것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많은 만물을 연결하여 창조되는 것이 만물이 각각의 지정된 위치가 있다. 그것이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데,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 가운데서 위치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구상이있다. 이 아름다운 위치 안에서 선함을 갖는 것이다. 그 선함이 선함을 갖게 될 때 이 선함을 갖는 자리 안에서 이 선한 것을 미학적으로 보았을 때 아름답다라고 한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탁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렇게 전일성을 회복하고 부분적인 부패성인 남아있지만, 하나님이 창조시에 지정해준 위치에서 그런 작용으로 돌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베룸을 찾으면서, 하나님의 원래의 선, 보노룸을 향해서 가는 그것이 그런 존재가 선하고 아름답고 탁월하다고 말한다면, 죄가 기승을 부려서, 악을 찾아가면, 악함이 되고 존재가 추루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비천한 존재가 된다. 시편 같은데서 시인들이 죄악속에서 자신의 비루함을 고백하는 것들이 나온다. 그 고백은 거기에서 이탈하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전체적 계획을 깨닫고 나니까, 자신이 이탈한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결국 악을 찾아가게 되는데 선을 향해 가는 것은 논리적이나, 악을 향해 가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악을 향해 가는 것은 무엇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있는가? 악은 무엇을 향해 있는가? 더구나 이렇게 하나님의 선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전일성을 회복한 인간이 남아있는 부패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선함을 상실한 추루하고 비천한 존재가 되어 악을 향해 치달아 갈 때 거기에 무엇이 있는가? 없는 것이다. 목표가 없다. 그러면, 왜 그렇게 미친 듯이 그것을 찾아가는가?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이렇게 되어가는 존재에 관해 이렇게 악을 향해 가는 존재에 대해서 각각 도덕적 평가를 내린다. 전자는 미덕스럽다 얘기하고, 후자는 악덕스럽다 얘기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렇게 선을 향해 찾아가지 않고, 악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죄다. 죄의 뿌리가 결국 아모루수이 자기 사랑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 이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기 사랑이 왜 이렇게 만드느냐를 먼저 알아보겠다. 이 자기사랑은 결국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자기가 찾아가야할 질서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데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자기가 옳고 좋아하는데로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하면, 이렇게 창조의 목적이 성취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것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존재론적으로 가장 위에 계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하나님 아래 인간을 비롯한 이성적 피조물들이 있고 그 밑에 여타의 피조물들의 있다는 질서를 인정해야 한다. 각각 하위의 것은 상위의 질서에 복종해야 한다. 이런 질서에 의해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덕이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올바른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에 대한 올바른 평가이다. 올바른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미덕, 뒤바낀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악덕이다. 자기사랑이라는 것은 이것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최상위 이고, 그다음이 하나님이며 나머지 사물을 배치한다. 이 질서를 내가 받아 들인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합치한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면 왜 이 질서는 안 무너지느냐, 사랑의 질서이다. 사랑의 질서라는 것은 무엇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하느냐 하는 질서이다. 이런 질서가 질서 맨위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자기 사랑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사랑을 발휘하고, 그 위치에 무엇이 있는가는 다르지만, 자신이 결정한 질서이다. 형태는 다르지만, 존재론 적으로 자기가 맨 위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사랑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존재론적 질서의 전복이다.
십계명이 일직선상의 계명이 아니라 원형의 계명이다. 나외의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 마지막에 탐심하지말라, 성경에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라고 말하여, 결국 원형을 말한다. 9개 계명을 다 지켜도 하나를 못 지키면, 모두 못지킨것이 된다. 탐심이 있다는 것은 자기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자기사랑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계명을 지킬수도 없고, 지켰다 하더라도 형식만 지켰을 뿐이다. 화해가 되지 않는다. 자기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이런 문제를 우리들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반대로 얘기해서 악이란 무엇인가? 뒤바뀐 질서를 받아들인 것이다. 선은 목표가 있지만, 악은, 이런것들이 못 이루어지게 방해하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고 범위가 넓으며 도달할 수 없다. 이러면서 인간이 살아간다. 문제는, 사적사랑의 문제이다. 사적사랑의 뜻은, 아모로뿔라비띠스, 개인적인 혹은 사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것과 반대되는 개념은, 아모르소티아리스, 교재적 사랑이다. 이러한 사적인 사랑이 의미하는 것은, 자기를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는 것이 사적 사랑이다. 중심축자체는 옮기지 않고 동심원을 계속 그리며, 확장되어가는 사랑이다. 결국은, 이 사적 사랑을 정의하자면, 확장되어 나간 자기사랑이다. 본질자체는 변화가 없다. 문제는 이런 확장된 자기 사랑 안에서, 이행되어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악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것들이 확장하여 나간다. 인류로, 동포로 사회로 확장되어 나간다. 어떤 사람이 예술을 사랑한다할 때 불신자의 경우와 신자의 경우를 비교해 본다. 그 차이는 불신자는 아무리 확장하여 가도 이것이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이 창조 목적인 선에서 빗나갈 수밖에 없다. 신자의 경우는 중심축 자체가 옮겨져서, 그 가운데 점점 하나님이 주신 세계를 사랑해 가는 것이고,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가 예술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제 지식이 자라감에 따라서 점점 더 많은 범주의 것들을 사랑한다. 그 자체가 까리따스이다.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예술을 사랑하면, 예술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인 선으로 간다. 이것은 전자의 사람 경우 예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잠식시킨, 결핍한 사랑이다. 후자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일치를 이루고 통합된 사랑이다. 의미를 갖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예술을 통해서 창조의 세계를 회복하고, 어떤 사람은 학문, 어떤 사람은 기술을 통해 창조의 세계를 회복해 나간다. 많은 것들이 여기에 기여하며 나가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창조의 원래의 영광의 상태로 돌리기 위해, 학문, 학예, 인간의 예술과 지성, 과학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복종된 가운데 쓰임 받아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지 않았더라도 학문이 성립하지 않았을까? 더 활달하게 성립된다. 아담과 하와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뒤로하고 벌거벗고 뛰어다니며, 과일 따먹고, 자고 그러면서 지냈을 것 같느냐? 그것은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다.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헌신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사람과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헌신해야 한다.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깨끗한 공직자가 된다든지,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 되어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펼쳐간다.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소명이고, 그런 사람들의 헌신적이 노력을 통해서 이세상이 최종적인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질 최종적인 선으로 나아가게 된다. 거기에 기여하며 살아간다. 얼마나 선함을 간직하여 살고, 아름다운 존재로 남아있고 뛰어난 존재로 작용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 목사 된 사람이 상을 제일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이제 무슨 문제가 있느냐면, 사적 사랑이 그리는 동심원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이렇게 사랑의 질서를 만들었다. 질서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자기사랑이 확장되어 나간 것이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원래 만들어 놓으신 질서를 따르지 않은 자기가 판단한 질서이다. 그 질서에 의해서 자기가 제일 위에 있고 판단자에 의해서 그것들을 판단한다. 그것들을 이행해 간다고 할 때 무엇이 선이냐 하는 기준이 있어햐 하는데 이것 하나하나를 판단해 가는 것에 있어서, 그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류한다. 제일위에 자신이 있기 때문에 본체론적인 질문이 요구된다. 니가 제일 중요하냐? 이 질문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죽 정의하는데 니가 뭔데? 라고 질문을 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질문을 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자. 누구냐? 우리의 주님이다. 철학자들은 인정하지 않고 보이라고 말한다. 신자는 너도 믿음을 가져라하고 얘기하는데 대화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제외가 되는 것이다. 불가침의 영역이다. 인간의 교만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도의 것인가를 보여준다. 누가 판단하고 누가 질서를 내리는가? 결국은 자신인데, 자신의 의미를 묻는 것은 어렵다. 이것을 판단할 때는 반드시 선의 개념이 들어와야 한다. 이것이 선하다라는 것을 누군가는 판단을 했을 거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치론적으로 모순이다.
세계에 골칫거리가 되는 불량국가가 하나 있었다. 온 세계 사람들이 아주 골머리를 끓으면서, 세계의 평화를 위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 한나라도 예외 없이 온 나라가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 나라에 간첩이 들어왔다. 간첩은 나머지 나라에서 보낸 것이다. 간첩활동을 하다가 조직이 폭로가 되었다. 일부는 체포가 되고 일부 두 명은 도망을 간다. 전국 지명 수배령을 내려 온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민간인에게 까지 모두다 지명수배를 내려서 이 사람을 은닉하면 사형이고, 신고하면, 상당량 상금을 주겠다고 온 나라에 포고문을 퍼트렸다. 간첩들은 도망을 갔는데 숨을 데가 없어 산골까지 들어갔다. 그곳에서 같은 종족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이 간첩임을 알아보았지만 동포라는 이유로 숨겨주었다. 밥도 주고 경찰을 따돌려주고 며칠을 잘 보내게 되었다. 너무 고마워서 공작금을 상당 떼어주었다. 그 뒤로 도망을 가는데 내려오는 길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그 소리를 듣고 간첩들이 이 사람들을 죽이고 산에 묻었다.
이 비유에서 이 간첩들의 행동은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야? 우선 전 세계의 기준으로 간첩들은 선하다. 그들을 잡기위해 죽어라 눈이 빠지게 돌아다니는 그 나라의 경찰은 악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숨겨준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다. 그 선한 사람들이 나라에서 볼 때는 철천지원수다. 나라를 배역한 원수들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돈을 주고 간 간첩들은 가족들의 입장에서 이 사람들은 선한사람들이다. 산속에서 때려죽인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가족들이었다면 그 간첩들이 그 사람들에게 악한 사람이 된다. 하나의 커다란 원에 크게 들락거리며, 선의 기준이 바뀐다. 누가 선의 기준을 정하며, 누가 신뢰 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은 우리에게 결론적으로 모두 다 자기 자신의 이기심과 주관이 개입을 해서 질서를 재편한다. 내가 세운 이 질서도 신뢰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세운 질서는 더더욱 신뢰할 수 없고, 그것을 신뢰하는 인간들이 모든 인간들이어도 오늘은 그렇게 질서를 신뢰하였어도 내일은 또 어떻게 질서가 될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도 신뢰할 수 없다. 그것도 또 신뢰할 수 없다. 자기 사랑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결말이 무엇인가? 그 진정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이다. 자기 안에 있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는 사랑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이다. 문제는, 이 바보 같은 일을 신자들이 매번 반복을 한다. 왜냐면 자기 안에 남아있는 부패성의 본질적 작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시로 질서를 세운다. 그것도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자기 사랑 속에는 미친 기운이 있기 때문에 비이성적으로 뒤바뀌고 난리를 치며 살아간다. 거기에 휘둘린다. 일생을 살았는데 창조의 목적으로서의 선을 옳 곧게 간 것이 아니라 계속 휘청 이면서 살아간다. 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이 벌래 하나만큼을 통해서 받는 영광만큼을 받으실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산다. 결국 원래의 구원받은 사람은 자체가 포맷이 새로 되어서 창조의 선한 목적을 따라 가게 되어있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이것을 이렇게 부패성과 타협을 해서, 질서를 세우고 가면, 그 목표가 어디인가? 아무런 목표가 없다. 아무리 가 봐도 끝이 없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살아가면 끝이 있지만 창조의 목적이라는 끝에 도달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면, 끝이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행복할 수 있는가? 쾌락은 있을 수 있지만, 행복은 없다. 하나님을 전혀 안 믿는 희랍의 철학자들도 즐거움을 버려야 한다고 보았다. 참되지 않은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 지는 비결로 보고 있다. 춤추는 인간의 충동에 지배받으면서 살아가게 되면 결국 인간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본다. 불신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 때 남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영혼은 피폐해지고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목표가 없다. 보기를 원하지만 어둠속에 뛰어 들어가고, 목이 마르지만, 소금을 퍼먹으면서, 그 끝은 곤고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지 못한 채 죽는 것이다. 허무한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진정한 보람을 하나도 못 느낀 채 그러면서 결국 죽어간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비참한 창조의 목적을 벗어난 모습이다. 이렇게 가는 것이 자기 사랑이다. 여기에서 그런데 왜 인간이 성경적으로 보면 낙관적으로 보지 않는데 놀랍게도 자기 사랑을 절제를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가? 이것은 본성의 빛과 관련된다. 그런 빛이 죄에 대한 억제의 작용을 한다는 등의 다양한 작용을 한다고 보면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국 마지막 대답은 까리따스의 회복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을 우리 안에 충만하게 회복하는 것만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보면 결국은 깨어짐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깨어질 것인가는 나중에 책이 나 올때 보면 되겠지만, 우선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이렇게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 안에 있는 완전히 소멸될 수 없는 본성이라는, 계속 잔디를 깍아 내듯이 자기사랑이 자라서 무성해서 존재론적 질서와 가치론적 질서를 다 뒤엎게 만들지 말고 자기 안에 있는 그 자기사랑을 끊임없는 참회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부수고 파괴해야 한다. 이것은 신자가 매일매일 해야 한다. 신자의 눈에서 회심의 눈물이 사라지게 되면 그 틈에 자기사랑은 길같이 자라서, 저런 식의 가치론적 질서를 전복시킨다. 결국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든다. 하나님 바깥에서 자꾸 행복을 찾는다.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이라고 본다면, 지순한 사랑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자신 안에 회복 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인데,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목표와 자기의 목표가 일치해야 한다. 최근에 사유를 통해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었다. 신자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해 질 수 없다. 완전한 전일성을 회복할 수 없다. 어느 정도 까리따스이 사랑을 회복해야 지만,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이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세 가지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이 관점을 바로 파악하지 못해서 혼란을 일으켜서 결국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다.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신자 안에 세상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공존하는가? 공존한다고 하면, 성경에서는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거기에 있지 아니하니, 혹은, 너희 안에 나를 경외함이 없다는 단정적인 이야기가 없다. 또 다르게 신자 안에 은혜와 죄가 공존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성경은 분명하게 은혜의 죄가 공존한다고 말한다. 은혜의 작용이 바로 까리따스의 작용이다. 호세아서는 너희의 인애가 아침구름과 같다고 말한다. 엄연히 존재하는데 있다고 하는데 왜 없다고 하는가? 죄의 지배아래 있는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지 않는가? 도대체 죄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사유하니까 성경에서 사랑을 보게 되는 세 가지 관점을 있었다. 첫째는 실제론 적 관점이다. 신자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공존할 수 있다. 그 예가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를 경히 여기거나 저를 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 말은, 경히 여기든, 중히 여기든 실제 한다는 말을 한다. 두 번째는 평가론 적 관점이다. 이게 있느냐 없느냐만을 이야기 하지만 있는 것 같기도 하다라는 식의 답변은 인정하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경외함이 없도다라고 말하지, 너희가 나를 경외하지 않지만, 나를 사랑하는 것이 조금은 있다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틀린다. 이것이 몇 대 몇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기준은 가장 좋은 신자 안에도 죄가 거하고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악함이고 추루함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 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이다. 평가론 적인 사랑으로 볼 때 아직까지 죄가 남아있는데 너는 나를 사랑한다. 아직까지 세상을 향한 사랑과 자기의 욕구가 존재하는 데도 너는 나를 사랑한다. 이것이 몇 대 몇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창조의 목적과 관련된 것이다.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창조의 목적, 자기를 구속하시고 창조하신 목적 전체를 수납하면 그것은 평가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중간은 없는가?
두 여자가 있는데 둘 다 동시에 과부가 되었다. 둘 다 어린 아들이 하나씩 있다. 한 여자는 몇 달 살다 보니 적적하고 외로워서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았다. 한 여자는 그럴수가 없어서 이 한 아이만 바라보고 살았다. 요한크리스토스의 어머니처럼 그렇게 살았다. 그 여자는 19살에 과부가 되고 절세의 미녀였으나,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다. 유혹도 많았으나, 아들과 시집가지 않고 살았다. 아들이 자라서 학교에 입학할 때 기뻐해 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하여 좋은 직장을 얻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진정으로 자기가 혼자 산 것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그 아이에 행복을 보면서 행복하면서 미소를 지으며 죽었다. 그러면 그 두 여자 사이의 차이는 한 여자는 자기의 행복의 목표를 아들과 합치 시킬 수 없었다. 자식보다 자기 행복을 사랑한다. 다른 여자는, 아버지를 잃은 아들을 보며 긍휼히 여기면서, 그 아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완전히 합했다. 그 여자가 얼마나 욕심이 많았겠는가?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나서 아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여자가 혼자살기로 결심했는데 어느 날 밤 홀로 있는데 몹시 외로웠다. 그래서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옛날에 시집갔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젊은 여자로서의 성적 욕망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런 그렇게 고민하지만, 뒤집지 않고 번민만 할 뿐이다. 그것 때문에 괴로워 하지만 자기의 욕심을 하나님께 합치시킨 신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시집을 간 여자가 두 번째 남편과 대판거리 싸웠다. 생각나지 않던 그 아들이 생각이 낫고 밤새 울었다. 그 여자의 맘속에 아들에 대한사랑이 꽉 찬 듯 한 느낌이 드는데, 아들이 정말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전자의 여자는 외로움에 대해 다른 남자를 그리워한다 해서, 남자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찬 것은 또한 아니다라고 한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죄의 지배아래 있어서 목적 자체를 통합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인격적 결단을 통해서 자기가 살아가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대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살다보니 죄가 항상 즐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좋았으나 나를 버릴 때가 있는 것이다. 그때 어느 순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립고 서러운데 마음 꽉 차게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연약함 때문에 가끔 세상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고 이것은 평가론 적 관점에서 사랑이 있다 없다 평가하는 것인데 그러면서 순간순간 사랑이 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창조의 목적을 선으로 받아들일 수없는 사랑이다. 그런 사람이 완전 회기하는 것이 바로 회심이다. 만약 회심을 하면서도 그런 상태에 유사하게 들어가게 되더라도 다시 그런 종류의 유사하게 되더라도 다시 새로운 종류의 회심이 필요하다 그것이 자기 깨어짐으로 귀결된다. 거기서 자기 사랑이 얼마나 추루한지를 깨닫고 깨뜨린다.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질투를 이야기 하신다. 질투에 대한 형이상학적정의는 사랑 안에 있는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이 성취되지 못한 것의 분노이다. 배타적 독점의 욕망이 성취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질투이다. 질투가 남아있다는 것은 사랑이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이고 질투가 없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시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그것은 나뉘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해요. 모든 것을 다 드려요. 그렇지만 세상도 그렇게 사랑해요. 그런 것은 하나님을 놀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자매를 몹시 사랑한 한 형제가 있었는데 자매가 결혼하려고 보니까 그렇게 사랑한 것이 다른 자매도 그렇게 사랑을 하였다. 형제가 100이라는 사랑을 두 자매에게 똑같이 사랑하였으나 두 여자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실제론 적으로는 100이나 두 여자에게 그 실제론적 사랑은 의미가 없고 평가론 적 관점으로만 해석을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다.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결론적으로는 회개하라는 것이다. 회개하고 멍청이 같은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이다. 경고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체험을 믿지 말라. 하나님을 버린 사람도 그런 것을 느낀다. 평가론 적 관점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실 때 하나님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저도 똑같다. 정욕에 시달리고 세상 사랑의 위험을 갖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부동의 확신. 하나님 밖에는 아무런 행복이 없다. 내 인생의 목표는 그분의 선에서 합치 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행복을 얻으리라. 며칠 전에는 밤마다 대공원에서 산책하는데 하늘의 별이 빛난다. 마음이 놀랍게 벅차다. [라오다테 에세데이] 하나님이 계심을 찬양하라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그 자체 때문에 마음에 벅차다. 지금 비가 오지 않는가.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 안 계시는 곳 없이 하나님이 계신다.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가 행복하다.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선과 악이 출렁거리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있다 하더래도 그 불변하시는 하나님과 하늘 가득히 빛나는 별들 사이에 존재하고 계시는 하나님 만물에 꽉 차서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생각하라.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필요 없다.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 주님이 계시고 관계하고 있고 인식하고 즐거워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품고 있고,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 하지만 그 위대하신 하나님은 모든 우주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면서 계획대로 이끌어 가길 원하시고 인생의 모든 목표와 인생을 나를 사랑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시킨다. 흐르는 물소리 내리는 빗소리 바람에 나부끼는 모든 소리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낀다. 이것보다 감격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 그것보다 감격적인 이야기가 어디 있는가? 이 뒤집힐 수 없는 명제를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바보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하고 방황하며 신음하며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살아간다.
신자 안에는 이 두 개가 나뉘어 진다. 이 생각하는 원리와 행동하는 원리의 일치가 안 된다. 생각하는 것은 죄를 지으면 안 되지만, 행동은 충동적으로 죄를 짓는다. 가장 극렬하게 죄를 짓는 순간에도 그것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의지가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행복할 수 없다. 극렬하게, 극단적으로 행복한 순간에도 자기 안에 있는 의지는 극단적으로 괴로움을 경험한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난 행복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마취상태에서 얻는 표상적인 행복일 뿐이지 실체를 인식하면서 얻는 행복은 아니다. 모든 것들은 흘러간다. 하나님한분만이 원래 계시는 분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이외에 것들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그 창조된 것들은 전일성이 불변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전하고 출렁거린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천사들도 포함하여 하나님 이외에 것들은 썩고 변화되고 망가지고 마지막은 사라져 간다. 태어나고 망가지고 부패하고 사라져가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망가지고 부패하고 사라져 간다. 그런 잠재적 사물에 우리의 사물을 고정시킨다면 그 속에서 영원히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일관된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자기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미친 비이성적인 사람이 계속해서 살아간다. 저는 최근에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면서 알려주신 것들, 깊은 사유 속에 들어가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정말 성화의 삶을 부르짖고 그렇게 요구하고 나도 애를 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방탕한 삶을 살았다. 짐승처럼 먹고 짐승처럼 살았다. 때로는 나의 무지로 인해 경험적 사랑이 평가적 사랑인 것처럼 자만하고 나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결국 무지한 삶을 살았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에 기도하면서 그랬어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에 의하면 내 인생이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가의 주석을 쓰게 되는 나이가 40이후인데, 인생은 40이요, 40이후에는 주석을 쓰는데 그 나이에 본문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안에 있는 이 어두움과 헤아릴 없는 무지의 어두움. 의지의 왜곡 그리고 그 어두움과 야합하는 나의 어두운 본성. 뿌리 깊은 죄에 대한 사랑. 대체로는 하나님을 위해 살았지만, 예수의 흔적을 갖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을 본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 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소서
정말 무지하게 살았어요. 눈을 떠보면 내 아래 목양을 받는다는 여러분들도 나 못지않게 어둠속에서 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사유의 지평을 신앙과 교회 생활에 국한 시키면, 언젠가 이것이 사적인 사랑으로 변모해서 진흙에 빠지는 자동차 바퀴처럼 헛돈다. 사유의 지평을 계속 확장해서 결국은 이교도들이 추구했던 인생의 본질적인 행복과 목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던 완성을 우리가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혜 적 사유이다. 그것을 시인들이 그렇게 노래한 것이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땅 끝까지 미치도다. 주의 인자하심이 궁창에 까지 미쳤도다. 이 모든 찬양이 신앙의 지평, 종교의 지평을 넘어서 우주 끝까지 다다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정말 주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고 다른 것 다 내게 없어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임마누엘 칸트가 얘기했듯이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두 개의 반짝이는 별, 내안에 반짝이는 도덕률과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님을 찬송한다. 우리 도저히 그렇게 될 수없는 인간인데 하나님이 때가 되매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자인 제가 깨어지십시오, 참회 하십시오 하고 외치는 이소리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물질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 하더라도 그 삶은 짐승의 삶과 방불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깨트려질 때 이런 것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자기자리를 찾는 것은 우주적인 의미를 갖는다. 만물의 회복의 때를 위에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깨트리고 싶어 하신다. 우리들이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