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10주차
녹취자: 김경애
오늘은 22과 성화와 성도의 견인입니다. 아마 성화라는 말은 교회에 와서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혹시 그 성화가 안달하고 보챈다는 뜻으로 이해하지는 않았습니까? ‘왜 그렇게 성화 하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학용어를 익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한번 익히면 너무 편합니다. 여러분, 버스가 외래어입니다. 그 외래어를 쓰지 말고 우리말로 풀어서 말해보십시오. 외우기가 굉장히 불편할 것입니다. ‘아주 크고 그러나 교통비는 싼 여러 명이 타는 대중을 위한 바퀴 4개 달린 큰 자동차’ 이렇게 설명해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버스를 이해하고 있으면 버스라고 이야기하면 모르는 사람은 처음에는 버스가 무엇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한번 이해하고 나면 ‘내가 버스를 타러 가는데 버스가 와서 한참 기다리다가 겨우 버스를 탔어.’ 그것을 아까 말로 풀어서 이야기하면 3분 동안을 이야기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버스가 어떻게 되었는데?’ 그러면 더 복잡해집니다. 용어를 외우는 것은 정신을 안정시키고 경제적이게 만들고 또 부수적인 효과로 잘 모르는 사람을 기를 죽일 수 있는 무기도 됩니다. 그래서 굉장히 유용합니다. 그래서 설교가 어렵다고 그러는데 대부분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 번째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대로 하기가 싫어서입니다. 그러면 어려워집니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교본이 500페이지 550페이지 정도 되는데 아이들은 아주 즐겁게 합니다. 부산 쪽에 사는 애들이 엄마가 일본어를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배운답니다. 왜? 인터넷에 뜬 일본 만화를 보려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열심이 일본의 만화에 대한 초등학생의 열심만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일본의 많은 아줌마들이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한국으로 놀러옵니다. 왜? 욘사마를 보려고 옵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배용준 만도 못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배워야합니다.
내가 감동받은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공부를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책인데 이번에 선물로 주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주었습니까? 제직교육에서 주었나봅니다. 여러분들을 주었으면 좋겠는데 책이 50권밖에 없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신 분 손들어보십시오. 숙제가 많아서 아직 못 읽었습니까? 누가 그랬습니다. 고3때도 이렇게 공부한 적이 없다고 하던데 당연합니다. 그때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훨씬 좋은 대학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은 사실 조금 어려운데 신학생들도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책을 받는 것은 좋아하는데 몇 페이지를 읽다가 머리가 아픕니다. 구역공부를 했는데 가르치는 구역장이 너무 미안해서 그 친구는 잘하는데 너무 미안해서 ‘집사님 이런 책을 가지고 공부하니까 너무 힘드시죠?’ 그러니까 ‘아니에요 구역장님 우리가 교회가 아니면 어디에서 이렇게 어려운 책을 공부해보겠어요?’ 라틴어가 많이 나오니까 구역장이 너무 미안해서 ‘라틴어가 많이 나와서 불편하죠?’ 그러니까 ‘아니에요. 우리가 이 나이에 이렇게 많은 라틴어를 구경해보겠어요?’ 그러더니 그중의 어떤 자매는 인터넷에 들어가서 라틴어 강의를 끊어서 자기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고 했더니 내가 성화반에서 기독교강요 초판을 교재로 읽으면서 한쪽에는 라틴어 한쪽에는 한글로 되어있는데 이해가 가지 않거나 아주 좋은 구절은 라틴어로 읽고 해석을 했더니 그 풍경이 자기는 너무 멋있어서 인터넷강의를 끊은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가 왔습니다. ‘계속해야할까요? 그만둘까요?’ 그래서 기도해보고 마음대로 하라고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일생의 가장 커다란 행복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인가를 깨닫는다는 것이 기쁨인데 더욱이 그것이 진리일 경우에는 그 기쁨은 한없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기쁨의 세 가지를 가르쳐드렸을 것입니다. Pleasure는 무엇입니까? 육체적 쾌락입니다. 감각입니다. '예쁘네! 예쁜 옷 입었네! 보기 좋다!' 이것은 Pleasure 입니다. Happy는 무엇이냐 하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기쁨입니다. Joy는 무엇이냐 하면 깨달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높은 차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일평생 진리의 말씀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 마음을 진리의 말씀에 잠기게 하고 기도하고 그래도 우리들이 잘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려고 하면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자기는 자꾸 머리가 나쁘다고하는데 사용을 안 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용을 하면 좋아집니다. 계속 쓰니까 좋아집니다.
이야기 하나 더 하고 공부하겠습니다. 키더민스터에 리처드백스터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어머님의 교리문답’이라는 책입니다. Mother's Catechism 이라는 책입니다. 두툼한 책인데 Mother's Catechism 이라는 책에서 엄마는 묻고 아이는 대답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무릎에 앉아서 엄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때부터 교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때가 제일 교리를 잘 배우는 때입니다. 아이가 요만할 때 막 사물에 대해서 느끼면서 묻습니다. ‘엄마 이것 뭐야? 이것 뭐야?’ 막 귀찮을 정도로 물어볼 때 그때에 대꾸를 해주지 않으면 아이가 현저하게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지적으로 열등감이 생깁니다. 그때 그것을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다 대꾸를 해줍니다. 아니 정말 여기에 결혼하지 않은 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엄마 말이면 무엇이든지 믿으려는 마음입니다. 그때가 신앙교육하기가 제일 좋을 때입니다. 나이가 들면 머리를 굴리면서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릴 때일수록 복음이 잘 들어가는 것입니다. 엄마가 물어봅니다. ‘얘가 우리 교리문답을 배우자.’ 다 그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엄마 왜 이런 것을 배워야 해요?’ 그러면 엄마가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꼭 필요한 교훈이란다.’ 아이가 묻습니다. ‘그런데 엄마 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배우지 않고 사는데 나는 왜 배워야해?’ 엄마가 뭐라고 대답하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얘야 너무 신경 쓰지 마라. 그 사람들은 짐승이란다.’ 책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짐승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단 말입니다. 사람은 낳아놓고 내버려두면 인간일수 있습니까? 요번에 초범 연령이 14세로 되었습니다. 14살까지는 큰 죄를 저질러도 판단능력이 없다고 얘네 들을 처벌하지 않습니다. 강도, 살인, 강간 수없는 범죄가 14세안에 저질러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얘네들이 그것을 다 압니다 14세까지는 자기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12세로 낮추려고 하는데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인간이 낳아놓고 가르치지 않으면 짐승이 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면 잘 배우고 가정교육을 받은 사람과 막 자란 사람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고 노력해야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드려야할 최고의 예물이 무엇이냐 하면 지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치성이 아니라 지성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이라고 그랬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뜻이 디아노니아 라는 단어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성입니다. 판단능력입니다. 지성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또렷하게 지성이 살아있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존경심의 표현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Concentrate 집중입니다. 그래서 설교시간에는 기본자세가 부동입니다. 눈도 깜박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니까 우리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예배드리는 태도를 보십시오. 그중에 몇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늘 나한테 지적을 받고는 하는데 그러나 대부분의 교역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똑바로 앉아서 자세를 흐트러지지 않고 예배를 똑바로 드립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이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은 스파크가 우리의 영혼에 일어나야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이 계속 자기의 마음속에서 작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고 이해한 다음에 드러누워 버리면 그 지식이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런 교리공부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여러분들이 1미터짜리 구덩이를 판다고 할 때 한 사람은 구덩이를 파겠다고 너무 헌신되어있습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이것을 한 시간 만에 파겠다고 그 추운 겨울날에 장갑도 끼지 않고 손으로 흙을 파는 것입니다. 손톱이 다 까지고 피가 줄줄 나는데 1㎝도 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옆 사람은 천천히 계획을 세우더니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와서 곡괭이로 먼저 동그랗게 직경 1미터를 파고 얼어붙은 땅의 껍질을 깬 다음에 삽으로 퍼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포클레인 조그마한 것을 가지고와서 올라가서 우드드드 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해도 안 됩니다. 도구가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10년쯤 믿었다고 하면 한쪽 벽은 기독교서적이어야 합니다. 왜? 내 인생과 나의 생명과 심지어는 나의 행복, 심지어는 영원한 나의 운명까지 달려있으니까 얼마나 탐구해야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그것이 나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주어서 그 사람을 어둠속에 빛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로도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말하자면 인류를 위한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헌신입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해야지 그냥 공부한다는 그런 생각만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공부고 나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정도의 내용은 우리 교회 초등학교 6학년 수준에서 배워야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한 학기에 한권씩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 이렇게 7학기에 걸쳐서 하나씩 해야 하고 마지막에서는 삼위일체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신학생입니까? 그러는데 이 세상 모든 인류가 다 신학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방종교가 그렇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주 낮은 수준의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된 신학을 높이 공부합니다. 신학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신학이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니까 당연한 신학생들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우리 선조들이 18세기 이전까지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통전적으로 공부해야합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공부해야합니다. 그때에 문학, 철학, 역사, 과학 하다못해 영화 한편을 보더라도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판단력이 세워져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22과 성화와 성도의 견인
칭의 다음에는 성화가 따르게 된다. 그래서 칭의의 상태는 하나님께 헌신된 성화생활을 요청한다.
1. 성화의 본질과 특성
성화의 본질과 특성 줄치십시오. 꼭 시험에 나옵니다. 성화란 죄인을 순결하게 하시며 죄인의 전 성질을 하나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며 두 가지입니다. 1. 순결하게 하시며 2.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하시며 3. 죄인으로 하여금 선행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지속적이고 은혜로운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계속 줄치십시오. 성화는 내부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볼 때 칭의와는 다르다. 칭의는 밖에서 하나님이 선언해주시는 것입니다. 성화는 법적행위가 아니라 재창조적 영적 원기를 북돋는 행위이며 장기적인 과정이며 현세생활에서는 완전하게 도달할 수 없다. 계속 줄치십시오. 성화는 결정적으로 초자연적 사역이지만 하나님이 정해주신 수단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성화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칭의, 중생은 하나님의 동력적인 사역이지만 혼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성화의 사역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지만 인간이 협력해야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순종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성화의 도구가 무엇이냐 하면 은혜의 방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성례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도생활입니다. 이런 많은 성도의 의무를 이행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영향으로 점점 죄인의 전 본성이 성화되어 거룩해져가는 것입니다. 성화에 대해서는 많이 설교했고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것은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이 있습니다. 400페이지가 넘고 깨알 같은 글씨니까 책도 두꺼우니까 잘 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경험자의 말로 8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퇴근해서 부지런히 쭉 읽으니까 8일이 걸리더랍니다. 8일 동안 읽고 나서 많은 사람이 회심했습니다. 책이 많이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야기하는 것처럼 재미있고 구수한 책이 팔리지 머리에 쥐가 나게 하는 책은 사지 않습니다. 좋다고만 합니다. 그런데 그 책이 나왔을 때 인터넷의 어떤 독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자는 나의 다음 두 행동을 이미 알고 있다. 삼백년 후에도 읽힐 책이다.’ 그런데 많이 사지는 않습니다. 300년 후에 사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읽으십시오. 그러면 아마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다음 계속 줄을 쳐야합니다. 줄을 치지 않을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화란 중생에서 주어진 것들로부터 저절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북돋우며 증진시키며 견고케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1. 인간의 오염과 타락의 점진적 제거이며 2.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헌신되도록 하는 새 생활의 점진적 발전이다. 성화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전 생애에 영향을 준다. 내적인 변화는 외적인 생활의 변화를 반드시 동반해야한다. 성화작용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하고 협력해야한다는 사실은 반복적이고 끊임없는 권고에서도 입증된다. 우리가 인간론에서 원죄가 무엇과 무엇으로 구성된다고 했습니까? 역시 시험을 치러야합니다. 중간고사를 보고나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죄책과 오염입니다. 죄책은 무엇에 의해서 제거된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칭의에 의해서 제거됩니다. 어떻게? 천천히 입니까? 단번에 입니까? 그렇습니다. 단번에 제거됩니다. 그런데 오염은 무엇에 의해서 제거됩니까? 성화에 의해서 제거됩니다. 점진적으로 입니까? 단번에 입니까? 점진적으로 제거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내가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그리고 또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믿음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처음 나오는 믿음은 칭의이고 다음 믿음은 성화입니다. 또 그 외에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 이미 구원받은 사람만 그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그게 성화의 구원입니다. 또 고린도서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느니라.’ 시집가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좀 그렇습니다.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교리반을 배우지 않으면 정신없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신천지가 여기에 진을 친 것을 아십니까? 과천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우리교회 교인들이 여러 명이 거기를 가본 것입니다. 갔다 와서 두 달쯤 지나서 우리는 누가 갔다 왔는지 다 파악했습니다. 그 정도의 정보력도 없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불러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부 다 면담했습니다. 그랬더니 가서 한 30명이 갔는데 그중의 20여명이 한번만 들어보고 ‘야 가자 이것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까? 교리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교리반 출신도 아닙니다. 세례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까 그 구절 ‘여자가 해산을 함으로 구원을 얻느니라.’에서 해산하는 것이 전도 잘하는 것이라고 뻥을 치면 성경을 모르니까 멍하게 빨려 들어갑니다. 거기다가 미혹의 영이 임하면 진짜 미혹하는 영이 있습니다. 홀리면 빨려 들어가서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 무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고 그럽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구원이 칭의라고 그러면 말도 안 돼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 믿으러 교회를 나갈 것이 아니라 빨리 시집을 가서 애기부터 낳아야 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성질 못된 여자도 애를 낳고 죽도록 고생하는데 그냥 하면 변하지 않고 ‘하나님 나 좀 도와주세요.’ 하면서 매달리면서 애를 기르다보면 성화된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목사님 이상해요. 내 주위에 애를 넷이나 낳는대도 진짜 못된 자매들이 많아요.’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매들입니다. 그냥 애만 낳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이를 기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게을러서 유아세례도 받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해석할 수 있는 눈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험한다고 했고 야고보서는 시험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그러니까 교리를 배워야합니다.
2. 현세에 있어서의 성화의 불완전성
성화가 인간의 각 부분에 영향을 끼치지만 영적인 성장은 현세에서 불완전한 채로 남아있다. 살아있는 한 죄와 더불어 투쟁해야하는 것이다. 신자들의 생활은 육과 영 사이에 항구적인 투쟁생활인데 가장 잘 믿는 자라도 아직도 죄를 고백해야하며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하며 더 온전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 이 진리는 소위 완전주의자들 이것이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 순간에 완전해지기 때문에 신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요한 1서에서 하나님이 너희가 죄를 범하거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우리의 경험도 그렇게 다윗 같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도 죄를 짓고 사도 바울도 자기 안에 죄가 있다고 고백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뭐라고 죄가 없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그들은 인간이 현세에서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성경에 완전하게 되기를 명령하고 사람이 완전하다고 말하면 죄를 짓지 않는다고 언급한 사실에 대해서 말한다. 그 다음은 줄치십시오. 그러나 완전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완전이란 죄에서의 자유 그것보다는 번역이 잘못되었는데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Free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Free From 그러면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카페인 Free 그러면 카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요한은 그 아래에 새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사실과 신자는 죄 가운데 살지 않는 사실을 언급했다. 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의 주도적인 성향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도적인 성향이 아닌 또 다른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염의 영향력입니다. 죄 된 경향성이 인간의 마음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깨달을 때에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의 은혜도 받지 않고 태만하게 지내면 그것들이 기운을 써서 엄청나게 커져서 자기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표현으로 Dominion of Sin 죄의 우세 혹은 죄의 지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많이 받으니까 그것을 완전히 이겨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의지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Dominion of Grace 은혜의 지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죄가 없다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안에 없다고 말한다.
3. 성화와 선행
인간의 본성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화는 그 성화된 정도만큼 반드시 선한 생활로 그를 이끕니다. 그래서 선행의 생활은 성화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계속 줄치십시오. ➀선행은 완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신앙의 원리에서 솟아나오는 행위이며 ➁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의식적으로 순종함으로써 행해지는 행위이다. ➂하나님의 영광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선행은 하나님의 성령을 말미암아 중생하는 자들만이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비 중생된 자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중생자라도 일반은총을 따라 율법에 맞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불완전하다. 줄치십시오. 시험에 꼭 나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영적 뿌리로부터 분리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진정한 내적 순종을 나타내지 못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겨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설명한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8개로 된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1번, 3번, 4번을 들으시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긴 설명 말고 간략하면서도 분명한 글로 읽고 싶다면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번역된 책과 ‘참된 미덕의 본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서 읽는 순간 ‘테이프를 들을걸!’ 이라고 후회할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특히 ‘참된 미덕의 본질’하고 ‘천지창조의 목적’이 두개의 논문으로 되어있는데 하나는 성경구절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철학적인 논증이고 2부에는 똑같은 글을 신학적 논증으로 해서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굉장히 힘들어하는 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고 ‘이정도 가지고 무엇을……. 정말 이해가 되네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철학적으로 상당히 훈련된 사람이거나 열린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아주 쉬워집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온 연세 많이 드신 어느 여성분이 심방을 갔는데 그 이야기를 얘기 했을 것입니다. ‘도덕적 통치’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게 무슨 예화거리가 되나?’ ‘진짜 그 연세 드신 성도님이 나보다 훨씬 낫네!’ 그럴 것인지 실험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지적인 근육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시험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해보려면 여러분의 구역장에게 물어보십시오. 어느 정도의 근육이 되는지 그리고 한번 ‘참된 미덕의 본질’을 읽고 나서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나보다 5년이나 먼저 왔는데 이 정도는 알 것이라고 목사님이 이야기하던데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내년에 구역장하라고 할지 모릅니다. 교리 반을 졸업하지 않으면 구역장을 할 수 없는 것 아십니까? 왜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졸업을 했다고 해서 모두 시켜주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4. 성도의 견인
성도의 견인이라는 표현은 영어로 Perseverance 라는 단어인데 그것이 영어로 또 다른 번역이 있는데 보존력입니다. 합성보존력입니다. 방부제입니다. 찾아보면 나옵니다. 이것이 방부제라는 뜻이 아니라 ‘성도의 견인’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래참고 붙들어주신다는 뜻입니다. 보겠습니다. 견인의 은혜란 신자 심중에 일어나는 신적 은혜가 계속되고 완성되도록 역사하는바 신자 내부에서의 성령의 계속적인 작용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분명히 교리에 대해서 가르쳐준다. 현세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견인의 은혜를 믿을 때뿐이다. 다시 말하면 견인의 은혜를 믿어야지만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개혁주의노선 외에서는 찬성을 받지 못한다. 이 교리는 배교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과 신자들에게 구원의 길을 계속 유지하도록 권고하는 말씀이다. 심지어는 배교의 경우를 기록된 말씀과 모순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고와 권고는 타락할 가능성을 가정하는 것 같으며 또 배교의 실례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증명해주는 것 같다. 줄치십시오. 인간에게 견인 은혜의 사역에 협력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러면 성경에 보면 배교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 빛의 비췸을 받고 배교한 사람들은 다시 타락한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굉장히 난해한 구절입니다. 이것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토머스 맨튼이라는 청교도가 쓴 ‘거짓된 믿음’인가? ‘거짓된 자의 믿음’인가? 아무튼 배교에 관한 책이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데 그것의 해석이 굉장히 많이 다릅니다. 그것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아주 하나님이 아주 밝게 그의 지성에 비추어주셨는데 그것이 반드시 그 사람을 중생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 비췸이 워낙 컸기 때문에 거기에서 배교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진리를 맛본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면에서 그런 사람들은 다시 구원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교할 사람들은 하나님이 중생하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 이것만 염두에 두면 됩니다. 그래서 배교자들은 절대로 참된 신자였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두 번째 이것이 무엇과 관계되느냐하면 우리가 교회론을 배울 때 그림을 하나 그리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구원론을 설명할 때에 교회론적으로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그리고 교회가 이렇게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접붙여져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런 모양으로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만세전에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시간 속에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구원받게 하심으로써 채워 가시는 것입니다. 정해진 사람이 모두 채워지면 더 이상 구원할 사람이 없고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으로 갈라지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여기에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아 예수께 접붙여졌습니다. 우리들이 연합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좋을 때는 붙어있지만 신앙이 없을 때는 이렇게 떨어졌다가 신앙이 좋으면 다시 들어간다면 이것이 계속 반복된다고 치면 이 사람이 딱 들어가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다행인데 잘 믿다가 잠깐 미끄러졌는데 그때 주님이 오시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 견인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 작정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처럼 이성적인데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논리를 확장해서 만약에 종말과 연결해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몸이 떨어졌다가 붙었다가 계속 붙어있었는데 잠깐 외출을 나갔는데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계속 떨어졌다가 살짝 붙어서 금방 떨어질 참인데 하필이면 이때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교리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보면 요새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양자역학 같은 것은 머리가 터질 정도로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웃긴다고 하겠지만 양자역학에 몇 달 매달렸습니다. 책을 쓰려고 양자역학을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 다큐멘터리도 많이 보고 책도 읽어보고 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영어책을 갖다놓으면 이것이 영어에서 한번 막히고 내용에서 막히고 그럽니다. 새카만 수식이 나옵니다. 이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우선 수학을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수학을 공부합니까? 미적분부터 다시 시작해서 2년을 배우면 된다는데 내가 할 일 없이 그 시간에 차라리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접었습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양자역학에 나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사물의 원인과 결과가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와 보지 않을 때와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이것을 던졌는데 사람이 보고 있으면 떨어지고 사람이 보지 않으면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런데 양자역학에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슈레빙거의 고양이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슈레빙거의 고양이’를 쳐보면 나옵니다. 인터넷에 무지하게 많은 것들이 쏟아져있습니다. 다 읽고 나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를 것입니다. 읽어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때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진짜 이러면 안 되겠구나!’ 생각합니다. 그것만 해도 인간이 얼마나 겸손해집니까?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은 그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 얼마나 유쾌합니까?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슈레빙거의 고양이를 몰라.’ 옆에 있는 사람은 ‘나는 모르는 것도 모릅니다.’ 재미있습니다. 정말 재미있습니다.
23과 교회의 성질
드디어 인간으로 창조되었고 구원도 받았고 그러면 무엇을 이룬다고 했습니까?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론은 크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론은 여기의 내용은 너무 빈약합니다. 이 정도의 내용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제대로 공부해야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열린 교회에서 기본적으로 꼭 읽어야하는 교회론 시리즈가 있습니다. 세 가지인데 그것을 여러분들이 독파하시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이 책은 지금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데 열린 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기가 그러신 분은 도서관에서 빌리시면 됩니다. 뒤를 보면 mp3가 달려있는데 다 듣고 책을 읽으시면 너무 책이 잘 읽힐 것입니다. 그런데 듣기 싫어서 곧바로 책에 접근하시면 굉장히 먹먹한 느낌이 들것입니다. 항상 권하는 것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책을 읽고 정리를 하고 세 번째 메모한 것을 암기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라는 책입니다. 이것은 열린 교회 출판부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책으로는 나오지 않았는데 차기에 공과로 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도의 공동생활’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꼭 한번 들어보시면 성도들이 얼마나 개념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 보게 되고 그러면 우리가 어떤 원리에서 교회생활을 이루어가는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며느리가 시집을 왔는데 집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 결혼이 무엇인지, 가정이 무엇인지, 애를 낳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며느리와 아무 개념이 없이 그냥 오빠가 좋아서 오빠랑 같이 있고 싶어서 시집을 온 며느리 심지어는 데이트 비용이 아까워 그 돈이면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집을 온 사람은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늘 어른들을 고생시킵니다. 성화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해산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며느리를 얻음으로써 혹은 사위를 얻음으로써 성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 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사람들의 성화를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1. 교회에 대한 일반적 고찰
교회에 관해 구약에서 사용된 용어는 ‘부르다는 뜻에서 파생된 것이며 ‘카할’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다음에 신약의 용어는 ‘불러내다는 것입니다. 불러내다는 뜻에서 나온 에클레오라는 단어입니다. 에클레시아가 나옵니다.
(1) 신약용어의 다양한 의미
신약의 다양한 의미의 용어는 일반적으로 예배를 목적하고 모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지교회를 의미한다. 이 지교회라는 용어는 이 공동체가 구별할 수 있도록 나누어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이 용어는 가정적인 교회 즉 집에 있는 가족들로 이루어지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의 가정이 하나의 작은 교회의 최초의 단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서는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 불문하고 믿는 자의 모든 무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열린 교회, 평촌 교회, 새중앙교회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다니는 하나의 모습이고 더 세부적으로는 가정을 이야기하고 ‘그러면 우리 가정이 교회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교회 저 교회를 다녀도 마음에 드는 교회가 별로 없으니까 애들아 우리끼리 예배드리자고 하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신앙고백에 있어서 ‘우리는 거룩한 교회를 믿사오며’ 라는 신앙고백에 정면으로 배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심지어는 요즘에 보니까 인터넷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교훈을 목적으로 영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 인터넷예배를 다시 시청하거나 그럴 수는 있지만 교회에 오기 싫어서, 추워서, 애들을 데리고 가기 힘들어서, 어차피 마찬가지의 설교인데, 생방송인데 그러면 안 됩니다. 돈은 휴대폰으로 보내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인터넷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인터넷의 온라인 열린 교회 교인이 오프라인 열린 교회 교인의 10배입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고 미국에 있는 사람도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도 듣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느냐하면 ‘저녁때에 가서 들으면 되지’ 그러는데 이것은 인터넷 강의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공경의 표현입니다.
(2) 교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견해 차이가 있다. ➀구교는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과 같은 고위 성직자와 사제들로 구성되어 있는 외부적이고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그 본질을 찾는다. 멋있어 보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복장이 근엄합니다. 그리고 성당은 2층 성당이 없습니다. 지하 성당도 없습니다. 성당은 돈을 들여서 제대로 짓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웅장하게 짓습니다. 그렇게 웅장하게 짓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 올 때 기 죽으라고 웅장하게 짓습니다. 사람들은 하찮은 사람이라고 느끼는데 그것이 외부적인 건물로 그것을 느끼게 하는데 아무리 양보해도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천장이 낮아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교만해집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깡충 뛰면 닿을 것 같으니까 ‘하나님이나 나나’ 그렇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아까운 돈이 사람도 올라가지 못하는 고딕식에다가 돈의 절반을 들이는데 너무 아깝습니다. 교회는 없으면서 그러면 무엇 하느냐고 하는데 그렇든 그렇지 않든 신교에 동그라미를 치십시오. 신교는 이러한 외적인 관념을 깨고 성도들의 무형적이고 영적인 교통에서 교회의 본질을 찾는다. 본질적으로 볼 때 모든 시대의 참된 성도들 외에는 교회에 아무도 포함되지 않는다. 교회는 불신자로서는 참가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지체들이다.
(3) 교회의 구별
a. 투쟁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승리적 교회는 무엇이냐 하면 이미 세상의 모든 싸움을 끝내고 천국에 올라가서 이루어진 교회인데 거기에는 더 이상 싸움이 없습니다. 왜? 이미 다 승리해서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서는 어떻습니까? 계속 싸웁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신자의 삶은 전투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씨름이라는 말이 ‘팔레’ 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레슬링인데 점잖은 레슬링이 아니라 여기에다가 가죽 끈을 묶고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고대 로마시대의 격투기를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하나가 피를 흘리고 죽어야 팔레가 끝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실감이 나지 않지만 사도 바울이 그런 격투기를 콜로세움에서 늘 보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무시무시한 것인데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b.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그 다음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이 구별은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에 적용되는 것인데 ➀영적 성질에 관계되는 것에 있어서는 무형적이므로 누구는 교회에 속하고 누구는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교회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절대 확실히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100%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세례 받으신 분 손들어보십시오. 잘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열심히 교리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교리를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그리고 거듭난 표가 없으면 세례를 주지 말아야합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2번 ➁그러나 이 교회가 교인들의 신앙고백과 행위 면에서 말씀과 성례와 사역 면에서 외적인 조직과 정치적인 면에서는 유형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매들이 예배드리러 올 때 하얀 미사수건 가지고 오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개신교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감독에 의해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왜? 장로교회니까. 장로님들에 의해서 대의민주정치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유형적이라는 것입니다.
c.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이 구별은 유형적 교회에만 적용된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 면에서와 세상에 대한 공동적인 반항의 면에서 유형적이며 공동적이며 또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직무와 형체 면에서 유형적이다.
(4) 교회의 정의
무형적 교회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부름 받아 선택받은 자의 영적 무리라고 할 수 있으며 성도들의 영적 회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유형적 교회란 참 신앙을 어린아이처럼 고백하는 자들의 단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무형교회는 진정으로 성도로 구원받은 사람만 속하고 유형교회에는 어중이떠중이들도 섞여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별사람들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청년 하나는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그랬더니 불교를 믿다가 교회를 오게 되었다는데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니까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도저히 살수 없어서 불교에 귀의해서 강원도의 어느 절에 들어가서 불자는 이미 되었고 승려가 되려고 들어갔는데 거기도 절차가 있습니다. 훈련을 받고 충실하게 잘해서 거기서 스님으로 만들어주려고 그랬는데 주지스님은 우리말로 담임목사인데 주지스님이 ‘얘아 너는 읍내에 나가서 이런 이런 책을 사오너라.’ 그리고 메모를 해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읍내에 내려와서 시골 책방에서 책을 다 사가지고 가려고 하는데 보니까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라는 오디오북이 있어서 그것을 자기 돈을 주고 샀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몰래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열심히 절의 일을 하고 법당에 들어가서 참선하는 척하면서 그것을 귀에 꽂고 들은 것입니다. 그것을 선배 스님이 본 것입니다. 참선을 하려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부처님께 몰두해야하는데 저 자식은 귀에다 무엇을 꽂고 듣는지 확 뺏은 것입니다. 열린 교회 김남준 목사의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절이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그래서 주지스님한테 끌려간 것입니다. 어떻게 된 거야? ‘스님 정말 죄송한데요. 아무래도 저의 갈 길은 교회인 것 같습니다.’ ‘머리를 빡빡 깎고 승려 복을 입고 뭐하는 거냐?’ 이만저만한 일이 있는데 여기에 확실히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니까 옆에서 다른 중들은 울그락불그락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군가 하나가 손을 들고 나와서 ‘제가 교리반을 다 들었는데 아무래도 제 길은 절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다 뒤집어지지 않겠습니까? 토요일마다 김밥도 다 주었는데 말입니다. 그것도 물론 자기 돈을 내었지만 말입니다. 주지스님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래 그 길이 진리인 것 같으면 그길로 가야지 사실은 나도 주일학교 선생까지 해봤는데 나는 여기가 제일인 것 같더라.’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오늘은 왜 이럽니까? 수업은 하지 않고 무엇입니까? 발동이 잘못 걸렸습니다. ‘어떻게 열린 교회에 오시게 되었습니까?’ 다 물어봅니다. ‘스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우리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해보라고 했더니 자기가 어느 절에 열심히 다녀서 불자로 성심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영혼의 고단함을 이길 수 없고 이 길이 아닌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자기가 너무 스님을 신뢰하니까 여쭤보았답니다. ‘스님, 제가 이렇게 절을 오래 다녔는데 죄송한 이야기지만 내 마음의 평안도 없고 확신도 안 들고 제가 아무래도 교회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어느 교회로 갈지 정했느냐고 그러더랍니다. 아니 아직 정하지도 않았고 아는 교회도 없다고 하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니까 스님이 ‘그래 가라.’ 그리고는 ‘평촌에 가면 열린 교회가 있는데 거기를 등록하고 열심히 다녀라.’ 그랬답니다. 실화입니다. 내가 토요일 깊은 밤에 실없는 소리를 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너무 황당한 것입니다. 스님이 가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가라고 그러면서 교회까지 지정해주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가라고하니까 ‘내가 많이 목사들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다음 말이 재미있습니다. ‘그래도 그 교회는 경전을 설교하더라.’ 그 사람들은 경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불교방송을 들으면 잡소리는 별로 없습니다. 재미가 없어서 그렇지 경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스님들은 잡소리를 많이 합니다. 아침마당 같습니다.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개신교목사와 스님이 비슷합니다. 부처님만 빼고 더빙을 해서 목사 옷을 입혀서 방송에 내보내도 분간을 못할 정도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종교다원화입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지어낸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사실은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귀를 의심했는데 뭐냐 하면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항상 진리가 올바르게 선포되는 곳이면 누군가의 마음이 울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진리를 붙듭니다. 소수의 사람입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교회의 크기에 대한 야망이 없습니다. 맨 처음에는 교인들에게 내가 잘 쓰던 말이 ‘그렇게 하려면 가라.’ 제발 그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해서 요즘에는 안합니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힘이 듭니까? 얼굴도 잘 모릅니다. 옛날에는 제가 1,100명이 모일 때까지 등록하면 한 사람 한 사람 다 심방했습니다. 450명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부목사님이 왔습니다. 지금은 100명이 안되어도 50명만 되어도 부목사님을 데려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릅니다. 좋은 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교리반도 해서 많이 가르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선교도 할 수 있고 그렇지만 참된 우리들의 가치는 무엇이냐 하면 한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성도를 세워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바지하게 하자. 전도하지 않아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심히 전도해야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항상 올바른 가치를 가지고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2. 교회의 속성과 표지
(1) 교회의 속성
속성이 무엇입니까? 부분이지만 그것을 빼면 그것의 원 주체가 될 수없는 것, 그런 것을 속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미 신론 할 때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속성할 때 배웠습니다. 교회가 이것이 없으면 교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a. 교회의 통일성
로마 가톨릭의 주장에 따르면 이 속성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조직체로써의 통일성을 의미하는데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줄 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b. 교회의 거룩성
로마 가톨릭은 교회의 거룩성을 교회의 교리, 도덕적 교훈, 예배, 권징의 거룩성에서 찾는데 반해 개신교는 완전한 성결로 이끄는 새 생활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고 원리 면에서 거룩한 교회의 회원들 가운데 둔다.
c. 교회의 보편성
로마 가톨릭은 특별히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구교가 전 지구상에 퍼져 있으며 모든 종파의 총수보다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에 개신교는 무형적 교회를 진정한 보편적 교회로 보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모든 시대와 모든 지역의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편 교회라는 이야기를 설교 속에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가톨릭적인 의미가 아니라 개신교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구주로 고백하는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의 연합 과거의 시대와 현재의 시대를 아우르는 모든 신자들의 연합입니다. 피부와 인종과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공항에서 이렇게 보면 화가 나는 것이 같은 외국인인데 미국사람처럼 생긴 사람이 오면 친절하게 대해주고 캄보디아나 제3세계 사람처럼 생긴 사람이 오면 ‘똑바로 서지 못해!’ 물론 그 사람들은 불법체류를 해서 온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그러면 되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도 제3세계 사람들을 만나면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이 우월감을 갖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면 안 됩니다. 절대 그러면 안 됩니다. 저는 특별히 외국인들을 상대하면서 보면 절대 말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보면 공연히 약간 무시하는 듯 한 마음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그 사람이 신학자이고 목사인데도 그러는 것을 보면서 나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한국에 힘들게 온 사람 나야 솔직히 말해서 자기네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목사면 나도 목사고 나도 하나님의 일꾼인데 모르겠습니다. 공부는 더 많이 했을 수도 있지만 나야 아무나 만나서 신학을 한 사람이건 철학을 한 사람이건 역사를 한 사람이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담이 없습니다. 당신 누구냐고 하면 나는 저기 시골의 목회자라고 합니다. 평촌은 평평한 시골입니다. 서울도 아닌 시골사람들을 데리고 목회하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평평한 촌에서 하는데 부담이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겸손해야합니다. 그래서 존중하고 마음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셨다는 그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사랑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정말 나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캄보디아에 갔다 와서 몸살이 나서 죽을 뻔 했는데 캄보디아 애들이 초롱초롱한 대학생들이 열린 교회에서 장학금 받는 학생들이 모였습니다. 같이 인사를 나누고 제가 20분 연설하고 그 아이들 이야기도 듣고 했습니다. ‘너희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예수를 열심히 믿어서 미국으로 이민가지 말고 여기서 살아라. 그래서 이곳에서 작은 등불이 되어라. 그리고 모두 목회자가 되지 말고 너희 중에 몇 사람은 목회자가 되어서 나머지는 정치가, 기업가, 사상가, 사업가, 공무원, 변호사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 예수님을 잘 믿고 정말 불쌍한 너희 민족을 사랑하고 그래서 이 땅에 너희들이 희망이 되어라.’ 그래서 향후 10년 동안 캄보디아를 잘 가르쳐서 20년 후에 캄보디아를 이끌어 갈수 있는 지도자를 길러내고자 하는 소원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생각하면 가슴이 막 벅찹니다. 이런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으로 긍휼히 여기고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자원을 가지고 그래서 내가 가보지도 못한 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예수를 믿고 그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뛰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의 한 몸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할 것이 교회를 욕하는 것입니다. 지난 교회에서 떠날 때 아픈 사연을 가지고 왔어도 그것으로 끝내야합니다. 그것도 여러분들이 모두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난센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집사까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권사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에는 반드시 그 교회로 돌려보내서 이명 증서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걸쩍지근해하는 것입니다. 왜? 대판 싸우고 나왔는데 그래도 회개하고 다 배운 다음에 가서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장로님 제가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다 풀고 이명증서 받아가지고 오면 우리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협동권사, 협동안수집사 받아들이는데 한명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를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보편교회입니다.
(2) 교회의 표지 혹은 외적 특성
교회의 표지는 세 가지입니다. 뭐냐 하면
a. 말씀의 참된 전파
말씀의 참된 전파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이다. 이 말은 말씀 전파가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순수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파가 기독교 근본에 있어서 참 돼야 하며 믿음과 행위에 지배적 영향을 끼쳐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b. 성례의 정당한 집행
합법적인 성직자들에 의해 성도들과 그 자손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
제가 아는 친구 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데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성찬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하니까 명색이 권사라는 사람이 예배가 끝난 다음에 와서 목사한테 대들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이 무엇이 못났습니까? 목사님보다 공부를 못했습니까? 얼굴이 못생겼습니까? 사회적인 지위가 부족합니까? 그까짓 포도주 한모금하고 빵이 무엇이 비싸다고 우리 남편보고 먹지 말라고 그럽니까? 우리 남편이 실족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짐승입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짐승입니다. 반박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이 통해야지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권사가 되어서 되겠습니까?
c. 권징의 신실한 시행
이것은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성례의 거룩성을 보호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24과 교회의 정치와 권세
쉽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권위의 근원이 되신다. 교회를 다스리시되 강제적으로 하지 않고 말씀과 성령에 의해 다스리신다. 교회의 모든 직원은 (이것을 교회에서 월급 받는 직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모든 공식적인 일꾼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로 옷 입은 자이므로 그의 말씀의 지배에 순종해야할 것이다.
1. 교회의 직원
교회의 직원은 두 종류로 나뉜다.
(1) 특수직원
a. 사도
교회 직원 중에 가장 중요한 직원은 사도직이다. 엄밀한 의미로 특수 직원이란 예수님에게 직접 택함을 받은 제자와 바울에게만 적용되지만 사도적 인물에게도 적용된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70인의 전도대원 같은 사람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를 어 마가라든지 누가가 들어갑니다. 시험에 꼭 나옵니다. 사도들은 특별한 자격을 가진다. ➀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부름을 받았고 ➁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➂영감 받음을 의식했고 이것은 성경의 기록과 관련된 것입니다. ④이적을 행했으며 ➄사역을 행하는데 충만한 복을 받았다.
b. 선지자
신약성경은 선지자에 대해 말하는데 교회에 대한 교훈을 말하도록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인물인데 이것은 잠시 동안 있다가 교회의 제도가 세워지면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떤 때는 미래사를 예고하기도 하였다.
c. 전도자
신약은 전도자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 사람들은 오늘날 전도하러 다니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70인의 전도대원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가까이 보필하면서 일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이상의 세 사람들은 단회직이고 한번 역사 속에 있다가 이것이 승계가 되지 않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소위 이야기하는 신사도운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을 갔었나? 중국을 갔었나? 어쨌든 외국사람으로부터 명함을 받았습니다. 너무 황당했습니다. ‘Apostolic Pastor’ Apostolic은 사도 적이라는 것인데 사도적 목사라는 것입니다. 이런 직분이 반복된다는 환상에 빠져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2) 보통 직원
사도행전은 장로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감독이라는 칭호가 사용되는데 이는 동일한 직원에 다른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다. 장로와 감독 모두 동일한 계급의 직원들에게 적용되는데 장로란 칭호는 나이를 강조한 것이며 감독은 직무를 강조한 것이다. 장로는 교사가 아니지만 가르치는 직능이 그들의 직책과 관련되어 있다. 줄치십시오. 디모데5장 17절에 보면 어떤 장로는 치리만 했으나 어떤 장로는 치리하면서 가르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신약은 집사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집사직의 제도는 사도행전 6장 1절에서 6절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교회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목사님이 아니라 장로에게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아닙니까?’ 그래서 모르면 그냥 씩씩하고 용감합니다. 이것이 우리말로는 다 똑같습니다. 장로는 히브리말로 ‘자테이’라는 말인데 늙었다는 뜻입니다. 뭐냐 하면 늙은것이 장로의 조건은 아닙니다. 장로교 헌법을 보면 나이 제한이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대개 젊은 사람을 시키지 않습니다. 어떻게 변심할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변심하면 얼마나 곤란하겠습니까? 장로를 받은 사람이 열심히 장로를 10년 한 다음에 ‘성도 여러분 제가 아무래도 절로 가야하겠습니다.’ 그러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장로교회 그러면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그러면 됩니다. 한국장로교회 그렇게 됩니다. Presbyterian 이것은 형용사이고 Presbyter 인데 이것도 똑같이 장로라고 번역되는데 그런데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elder church 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 elder 도 장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의미의 차이가 있느냐하면 Presbyter 이 A안에 a와 b가 있습니다. 이것이 Elder 이고 이것이 Pastor 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하나의 Presbyter 속에 어떤 사람은 Elder 이고 어떤 사람은 Pastor 입니다. 이 Elder 와 Pastor 모두 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b는 치리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Elder는 치리만 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성도들을 사적으로 가르치지만 그러나 교회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은 목사입니다. 저렇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 그럴 때에는 Elder church 가 아니라 'Presbyterian church' 입니다. 그래서 '무슨 교파입니까?' '기독교입니다.' 그런 엉뚱한 대답을 하면 안 됩니다. ‘I am Presbyterian.’ 장로교인입니다.
2. 교회의 회의
개혁교회는 많은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회의는 당회, 노회, 총회를 말하는 것이다. ➀당회는 지교회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고 그 사람은 정당하게 그 교회에서 투표해서 세우고 노회에서 인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명, 1명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조직교회가 되고 당회가 구성되는 것입니다. 노회는 일정한 지역 내에서 각 지교회 목사 1인과 장로 1인으로 구성이 되며 뭐냐 하면 지 교회에서 장로 한사람 하고 목사 한사람을 파송하면 그것이 3교회 이상 모이면 노회를 만들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작은 노회는 없고 우리가 속해있는 노회는 110개 교회가 모여서 하나의 노회를 이루고 있고 그렇게 약 100개에서 600개 정도 되는 사이즈의 노회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 교회가 12,000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장로교회중에서도 분파가 갈립니다. 장로회중에서 합동 측인데 합동측만 그렇습니다. 전체를 합치면 훨씬 더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그렇게 되고 총회는 노회에서 파송된 같은 수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1) 지교회의 정치는 전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목사와 장로는 하나의 당회를 구성한다. 줄치십시오. ➀장로는 교인들에 의해 선택되나 권위는 인간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다. ➁지교회는 교회 사건을 정치하기 위하여 구비된 하나의 완성된 교회이다. 그러나 공통적 일치점을 근거로 해서 다른 교회와 관련을 맺을 수 있으므로 완전히 독립될 수는 없다. ➂교회의 헌장은 지교회의 권리와 이익을 수호하지만 한편으로는 연합된 교회의 공통된 이익과 권리를 보장해준다.
(2) 주요회의 또는 대회의
지교회가 교회의 연합성을 보다 잘 이룩하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경우 노회나 대회와 같은 큰 회의가 필요하다. 사도행전 15장은 이러한 성질을 말해준다. 회중의 직접 대표자들은 당회를 구성하며 회원 중의 일정한 수가 노회의 총대로 파송된다. 이것이 Delicate합니다. 파송하는 것입니다. 노회 때가 되면 우리도 부목사님과 장로님 3분 내지 4분이 대표로 명단을 내서 참여해서 의사결정에 참여합니다. 교회의 회의는 교회적 사건들 곧 교리와 도덕과 교회의 정치와 권징에 관한 문제들만을 취급한다. 그래야지 총회로 다 모였는데 ‘이번 대통령 후보를 누구를 밀까요?’ ‘박근혜 손들어보십시오.’ ‘통과되었습니다. 자, 우리는 박근혜씨를 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에 관한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회의는 성질상 소회의에 속하거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거기서 해결할 수 없는 사건들이나 성질상 소회의 영역에 속하지만 일반교회에 관계된 사건들까지도 다루게 된다. 그리고 대회의의 결정은 권고적이라고 솔직히 선언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복종해야하는 것이다.
3. 교회의 권세
교회의 권세는 영적권세이다. ➀교회의 권세가 성령에 의해 주어지며 ➁성령의 권세의 표명인 동시에 ➂신자들에게만 관계되며 ④영적인 방법으로만 집행되기 때문이다. ‘여러분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러고도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고 신앙의 기쁨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교회지하실에 감옥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가는데 빨간딱지를 그리면서 ‘김 아무개집사 3주 동안 기도하지 않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벌금에 처함. 300,000원 납부할 것 납기 후에는 20%의 가산금이 추가됨.’ 이렇게 딱지가 발부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것은 영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교인을 패서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집회를 하는 곳에도 가보았는데 막 욕을 했습니다. 싸대기를 때리고 조인트로 발을 까고 그랬는데 교인들이 무릎을 꿇고 은혜를 받고 교회를 떠나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기자가 물은 것입니다. ‘왜 팹니까?’ ‘내 새끼 내가 때렸는데 네가 뭐냐?’ 이 새끼와 저 새끼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자식과 영적인 자식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육적인 자식도 그렇게 하면 아동보호법에 걸립니다. 육적인 자식도 그러면 안 되는데 ‘내 자식 내가 때렸는데 네가 뭐냐?’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안이 없습니다. 그래도 때리면 안 됩니다.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막 때리고 그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으로 심리적으로 매조키스트입니다. 단어 공부 좀 하겠습니까? 이것의 반대말이 사디즘입니다. 사디즘은 막 때려서 쾌감을 얻는 것이고 막 맞으면서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매조키즘입니다. 인간에게 이런 매조키즘이 있습니다. 내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방배동에 살 때 예쁜 자매가 있었는데 30대 후반 정도의 자매였는데 애들도 어렸습니다. 남편이 정말 개도 그렇게 안 팰 것입니다. 남편이 막 팹니다. 어떤 때는 돌멩이도 집어던집니다. 그런데도 삽니다. 우리 집사람이 ‘당신 그런데 어떻게 사냐?’ ‘사모님 잘해줄 때는 너무 잘해줘요.’ 100번 잘해주다가 1번 잘못 맞으면 죽을 수도 있는데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은 그 남편하고 사는 뭔가의 쾌락이 있는 모양입니다. 매조키즘입니다. 그런 것을 좋아하면 인격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가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➄이 권세는 대리적 권세인데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시행된다. 권세는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1)교리권: 가르치는 권세
교리 권은 진리를 수호하고 오고 오는 세대에 진리를 신실하게 전파하고 불신세력으로부터 진리를 보수하도록 위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적극적으로는 전파해야하고 소극적으로는 신조와 신앙고백을 작성하며 장래의 사역자들의 훈련을 위해 준비해야만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이라는 책을 여러분들에게 숙제로 내주었습니까? 전도사님 그 책들을 한권씩 선물할 테니까 다음 주에 제가 강의를 못 들어오는데 그래서 이 성호 목사님이 들어오는데 서점에 이야기해서 내 이름으로 달아놓고 ‘한국교회의 성장과 미래의 역할’이라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가져와서 모두 나누어 주십시오. 숙제는 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양심에 맡기고 한국 사람들은 공짜에 약합니다. 그것은 출근할 때 한번 쭉 읽어보시면 아주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외국에 있는 목회자들이 와서 세미나 할 때 제가 발표한 원고인데 보시고 영어가 더 편하신 분들은 영어판도 있으니까 나누어주고 정확하게 얼마인지 금액을 달아놓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거기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사과는 너무 좋아하는데 나무 심는 것은 싫은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가 신학교 다니고 훈련받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되게 싫어합니다. 다 한사람만 좋아합니다. 그러면 열매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고 무엇인가 그 사람들을 잘 알 수 있도록 훈련하는 그런 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좋은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은 건물을 10개를 짓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를 섬겨보지 않고는 누가 좋은 목회자가 되는지 아직 모릅니다. 구별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교역자 3사람을 뽑는데 오늘 45명이 와서 지원을 했습니다. 서류심사를 해서 그 중에서 어느 정도는 면접을 했다고 하는데 다시 2차 면접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엄선되어서 옵니다. 물론 그분들이 모두 다 훌륭한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해봐야하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우습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교회가 한국에 있는 신학교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신학교를 열심히 도우면서 그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이러는 것은 그 사람이 어느 교회에 가서 일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훌륭한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에서 신학인재양성위원회에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요만큼만 도와주면 나머지는 이름 없는 성도들이 외국에서 유학하는 한국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써달라고 작년, 재작년 이태동안 모금된 돈이 1억 3천만 원쯤 됩니다. 그것을 교회에 광고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 돈을 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보람 있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렇게 하면서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위해서 신학전문도서관을 세웁니다. 이것도 성도들이 하나씩 하나씩 하는데 이것도 광고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열린 교회 도서관을 세우니까 도와주십시오.’ 그러지 않았습니다. 필요한 돈 중에 교회에서 주는 돈은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성도 한분이 할머니였는데 이천만원을 헌금하면서 이것만큼 보람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죽어도 한권도 가져가지 않습니다. 자식에게도 물려주지 않습니다. 이것을 다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진리를 발견하면서 나 혼자 파르르 믿다가 죽으면 나 혼자 믿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잘 믿어서 이렇게 진리를 쌓아가면서 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그러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정말 미안한데 5분만 더하겠습니다. 오늘 괜히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났습니다.
(2) 치리권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므로 교회의 모든 것이 단정하고 질서 있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교회의 일들의 적절한 규정을 제공해 주셨고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할 교권을 교회에 주셨다. 이 교권은 권징의 권한도 포함한다. 권징이 무엇이냐 하면 Discipline 입니다. Discipline이 무엇입니까? 징계하다는 말도 되고 훈육이라는 말도 됩니다. 교회 권징의 목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인들의 입교와 출교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하는 것이며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규정해서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것 그것이 소극적인 측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측면으로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케 함으로써 그들의 영적 교훈을 축적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잘못된 것을 믿겠다고 고집하고 방종한 삶을 살겠다고 회개를 하지 않으면 교회는 할 수 없이 그 사람을 최악의 경우 딱 끊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출교입니다. Ex-communion 입니다. 출교한 사람과 만나고 그 사람과 교제를 해도 그 사람도 또 징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오늘날 교회의 실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그래서 병든 교인이 있으면 치료하려고 노력해야하고 실패한다면 잘라버려야 할 것이다. 공개적인 범죄가 있으면 정식적인 구속이 없어도 치리해야 하며 개인적인 범죄인 경우에는 이러이러한 여기에 언급된 규칙을 적용해야한다.
(3) 봉사권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전도만 하도록 하실 뿐 아니라 모든 질병을 낫게 하기 위해 파송하셨다. 초대 교인들 중에는 신유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더러 있었다. 이러한 특별한 은사는 사도 시대가 지난 후로부터는 중단되었다. 지금 은사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질문을 많이 하는데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강해 33개 중에서 그것을 다 들으라면 놀랄 테니까 뒤에 보면 은사부분을 설교한 것이 7, 8개 됩니다. 굉장히 중요한 시리즈입니다. 그것을 잘 천천히 들으면서 은사와 은혜에 대해서 정리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10분 20분 동안에 간단하게 여러분들에게 말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때부터 자선의 봉사는 교회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을 돌보게 하는데 크게 국한되었다. 뭐냐 하면 신유의 역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따라 다니면서 전매특허 받은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사람들을 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유의 은사를 이야기할 때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 나옵니다.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서 사람들을 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유무상통하는 생활을 실천함으로 궁핍한 자가 없었다. 공궤를 일삼도록 7집사를 임명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식물을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게 하셨다. 집사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집사는 영어로 Deacon 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디아코니아’라는 ‘섬김’이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 후 특히 신약은 가난한 자를 위해 물품을 모아 분배해주는 일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국가도 많이 하지만 교회도 이런 일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엊그제도 우리가 교역자회의를 하는데 여성교역자들이 너무 잘 아니까 성도들이 너무 어려워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교인이 4% 늘었는데 헌금은 1%가 줄었습니다. 그러니까 재정적으로 굉장히 위기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우리가 이번 주에 20,000,000원 정도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힘이 닿은 대로 이렇게 우리에게 주시는 삶이 어떤 삶이어야하느냐 하면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리비아의 수로가 그런 것입니다. 마른땅 사막에 물을 흘려보내면 불과 몇 년 지나면 그곳에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자원을 가지고 그렇게 흘러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고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래야지만 진정한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