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반 7주차
녹취자 : 오희열
14과는 굉장히 어려운 내용이지만 쉽게 가르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15과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16과도 그렇게 심하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배우는 것까지 시험에 나온다고 했으니까 16과까지 오늘 끝내볼까 합니다.
14과를 보겠습니다. 14과 기독론도 초반부에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하신일이 무엇인가 해서 14과 15과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다루고 있고, 16과, 17과는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연습해보겠습니다. 맨 처음에,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역시 여러분은 잘 암기를 하고 있습니다.
14과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명칭과 본질. 예수그리스도의 성함은 다음과 같다. 예수란 ‘야사’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하다’라는 뜻인데, 이 동사에서 온 명사로 ‘예수’, ‘구원하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호세아’ 이런 이름들이 ‘구원’과 관련된 말입니다. ‘ㅇ, ㅎ, ㅅ’이 들어가면 거의 구원과 관련된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아, 여호수아, 호세아’, 이런 이름들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이것이 원래 희랍어로는 ‘크리스토스’입니다. 이것은 ‘크리스오’라는 동사, ‘기름붓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의 피동명사가 ‘크리스토스’,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마사’라는 히브리어가 있는데, 이것은 ‘기름붓다’이고, 이것이 ‘메시아’가 되면 피동명사가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이해가 될 것입니다. ‘크리스토스’의 히브리어가 ‘메시아’입니다. 뜻은 둘 다 똑같은데, ‘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크리스토스’를 우리말로 부드럽게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메시아’는 그대로 부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한자로 옮길 때, ‘기독’으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라는 뜻입니다. 중국어로는 ‘지두’(예수)라고 합니다.
구약에 보면 선지자, 제사장, 왕은 성령의 상징인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각자의 직무를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또 그것을 위해 자격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세 가지 직무를 위해 성령을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기름 붓는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 가지 직무를 위해서 오실 것을 예고한 것이고 성령의 기름부름부음을 받으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기름부음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을 때, 그리고 세례를 받으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인자,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이 명칭은 다니엘 7장 13절에 근거한 것으로 예수께서 자신에게 적용하신 가장 통상적인 명칭이며 다른 사람들은 이 명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줄치십시오. 인자란 명칭은 예수님의 인간성의 표현이지만 그 용어의 사용의 역사적 기원을 보면, 그것은 예수님의 초인간적인 특성을 지적해주며 -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 주는 것을 말합니다. - 또한 그리스도께서 위엄과 영광으로 장차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Son of God. 그리스도는 몇 가지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진다. 1.삼위 중 제 2위이시며 당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2.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시며, 3.그의 탄생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주’라는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우리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존칭어로 사용하듯이 이 명칭을 예수님께 적용했다. 이 명칭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동그라미 치세요. 그리스도의 부활사건부터이다. 그래서 ‘주’라는 명칭은, 줄 치십시오. 교회의 주인이며 통치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하나님께 대한 명칭으로도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원래 주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아도나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고 지배하고 계시다.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으로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모든 만물로 그 발아래에 무릎을 꿇게 하여 그를 ‘주 여호와’라고 부르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모든 세계의 주인으로 다스리시는 그러한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가지 성품,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가르쳐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바 위대한 신비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둘이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또 한편으로 예수님이 참 사람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이해가 갑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본질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사람의 본질을 가지고 계실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우선 첫째는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형벌을 받고 죽으셔야만 우리가 그 공로로 하나님 앞에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는데, 신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신의 제물이 될 수 없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두 번째 이유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할지를 인간들에게 직접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으로만 오셨다면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라도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르시는 것이 없는데, 이 땅에 계실 때는 스스로 신성을 인성 아래에 감추심으로 스스로 자신의 신성이 인성에 의해서 감추어지도록 기꺼이 자기 자신을 제한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계실 때 모르시는 것도 있었던 것입니다. 오류는 없으셨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날 같은 것들을 예수님은 자기 자신도 잘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자, 이제 문제는, 예수님이 이렇게 인성과 신성이 합쳐지신 분이라고 할 때, 인격은 어떻게 되느냐는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몇 개입니까? 하나입니다. 사람의 성품을 취했으면 그에게는 반드시 사람의 인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시니까 그분은 신의 인격을 가지셨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의 몸을 입으실 때 사람의 인격을 가지셨다면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인격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중인격, 다중인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격과 인격이 서로 충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 하나였습니다. 그러면 인성을 어떻게 취하셨습니까? 인격은 취하지 않고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이것은 불가능 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인격을 취하지 않고 인성을 취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엄마의 태에서 수태하여 아이로 태어나면, 그 아이는 반드신 인격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인격이 없이는 아이가 살아서 움직이거나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격 없이 인성을 취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이고 인격 없이 인성을 취하셔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지만 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가지 본질, 두 가지 성품, 양성이라고 얘기합니다. 신성.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합니다. 부인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에게 가장 가까이 간 분, 또는 모든 인류 가운데 탁월한 정신을 소유했던 위대한 성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인성, 예수의 인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론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했던 사람이 초대교회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예수님의 인성은 아무리 극단적인 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번,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이라 말씀하셨고, 줄 치십시오. 2번,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그렇게 불리어졌고, 3번, 인성의 본질적인 요소인 육체와 영혼을 소유하셨습니다. 4번, 인간의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따르셨고, 5번, 인간적인 욕망과 고통에도 영향을 받으셨다. 6번, 그러나 참 인간이시지만 그는 죄가 없으셨다. 다시 말하면,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죄를 지으실 수도 없는 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이 동시에 되셔야 했던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험에 나올 수 있습니다. 1.고난 받아 죽기 위해서, 2.우리의 죄를 구속하실 수 있기 위해서, 3.무한한 가치의 희생을 제공하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인간을 건지실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되셔야 했다. 보통사람이었다면 죽었을 때, 그렇게 사람들의 무한한 죄가 용서받을 수 있을 정도의 희생의 가치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 인격 속에 결합된 두 성품. 매우 중요합니다. 인성을 가지셨지만 인간의 인격이 아니다. 줄 치셔야 합니다. 중보자의 인격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간이 되심으로 하나의 인간의 인격으로 변하신 것도 아니요, 또 육신을 입으실 때 인간 인격을 취하신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격을 가진 신성에 덧붙여 인성을 인격 없이 취하셨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인격과 함께 취하신 인성에 덧붙여 인격 없이 인성을 취하셨는데, 신성을 가지실 때에는 인격을 함께 가지시고 인성을 취할 때에는 인격은 없이 인성을 취하셨는데 그 인성은 다만 독립적 인성으로 발전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 속에서 인격적이 된 인성이다. 이런 인성을 취하신 후 중보자의 인격은 신적일 뿐 아니라 신인적인 것이다. 그는 인성과 신성의 모든 본질을 소유하신 신인, 하나님이며 사람이시다. 신적의지와 인적 의지를 소유하셨듯이 신적의식과 인적의식을 소유하고 계시다. 그런데 이 두 개가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이 진리는 인간으로서 측량할 수 없는 신비이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을 지적해준다. 말하시는 의식이 인적이든 신적이든 언제나 동일한 인격이시다. 인간의 속성과 행동은 가끔 신적 칭호로 표현된 인격으로 묘사되고 신적 속성과 행동도 가끔 인간적 칭호로 표현된 인격으로 묘사된다. 초대교회 알로기파와 에비온파, 대부분 이단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다. 1번. 종교개혁시대에 소키누스주의자, 소시니안이라고 부릅니다. 소키누스주의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유니테리안파, 이 유니테리안파는 ‘단위신론’, 즉 성부 한 분만 믿고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이단이고, 소키누스주의는 극도의 이성주의자들이 만든 이단이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 때부터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삼위일체 같은 것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동정녀 탄생도 모두 거부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현대주의자들도 이러한 신성부인설을 따른다. 2..초대교회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고 그리스도를 반신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같은 하나님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다고 묘사하면서,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적인 존재에 가까운 인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적 로고스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영을 대신하여 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비상한 신적인 감화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로고스, 로고스는 ‘원리, 근본’이런 뜻인데, 그러한 신적인 말씀, 원리가 인간의 영 대신 예수 안에서 있었던 초인간적인 존재였지만 완전한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인격 안에 두 본질의 결합을 부인했고, 유티코스파는 두 본질을 완전히 분간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이 있는데, 물에 기름, 올리브유를 한 컵 부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은 물, 기름은 기름으로 딱 나눠집니다. 그렇게 신성과 인성이 나뉘어져있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다. 두 성품이 서로 관계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네스토리우스파입니다. 이 네스토리우스파가 정죄를 당하고 쫓겨난 후에 아시아 쪽으로 들어와서 당나라에 전파되고 마지막에는 신라까지 들어옵니다. 그래서 신라의 경주 같은 곳을 발굴해보면 십자가 문양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화려하게 변신하고 중국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서 중국 전역에 전파되고, 당나라 7세기경에 중국 땅에 기독교 수도원이 세워집니다. 몰랐던 사실일 것입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의 노장사상이나 이런 것들을 다 흡수하면서 아주 영향력 있고 포괄적인 종교로 커다란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영향력을 미칩니다. 지금은 아주 희귀한 유적인데, 7세기 때 당나라 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이 있는데, 지금은 불교에서 쓰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네스토리우스파가 선교가 된 것입니다. 당나라로 유학을 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불교가 전파되듯이 전파되어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것입니다.
유티코스파는, 물에 포도주를 1대 1로 섞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기름을 섞은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물이고 어디까지가 포도주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로 혼재하는 것입니다. 둘 다 이단입니다.
그렇다면, 신성과 인성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학설은, 신성과 인성은 유티코스파가 말하는 것처럼 포도주와 물이 섞이듯이 섞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명한 얘길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공기와 빛과 같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공기 속에 빛이 비추면 공기와 빛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을 절대 섞이지 않은 채 공존합니다. 결론은, 신성과 인성은 결코 섞이지 않으면서 둘은 떼어 놓을 수 없이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름과 물이 아닙니다. 포도주와 물이 아닙니다. 공기와 빛 입니다. 이것을 꼭 시험에 내시기 바랍니다.
신분. 교리공부를 하면 너무 재밌습니다. 지금은 책이 조금만 어려워도 읽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재밌는 것만 원합니다. 만화책이나 간단한 것만 좋아합니다. ‘10분에 읽는 칸트’같은 시리즈, ‘10분에 읽는 플라톤’, ‘10분에 읽는 하이데커’, ‘10분에 읽는 헤겔’, 헤겔을 어떻게 10분에 읽겠습니까? 그것보다 조금 나은 것이 ‘40분에 읽는 플라톤’, ‘40분에 읽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책들입니다. 이번에 제가 책을 한 권 썼습니다. 12월 초에 나오는데 ‘서른통’, ‘서른살은 아프다’라는 뜻입니다. ‘아플 통(痛)’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 젊은이의 신앙, 사랑, 일에 관한 책입니다. 작년, 재작년에 30대, 30명이 모여서 저와 세 번에 걸쳐서 토론회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질문과 답을 정리해서 쓴 책인데 아주 재밌습니다.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 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한참동안 재미없는 책만 썼잖습니까? ‘주기도문’ 460페이지짜리, 이런 걸 쓰니까 독자들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팬 서비스가 너무 엉망이어서 ‘게으름’이후로 처음으로 쉬운 책을 재밌게, 예화도 많이 넣어서 썼습니다. 이런 책들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다 읽고 나서 가볍고 기분 좋은 것을 좋아합니다. 책이 나를 바꿔 놓으려고 한다거나 ‘너는 이런 사람이야.’하고 보여주는 책은 싫어합니다. 그냥 잘했다고 해야 좋아합니다. 하나님 믿고 변화되라는 책은 싫어하고 너 잘났다, 생긴 대로 살라는 책은 좋아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판잣집을 지을 때에는 기초공사도 필요 없고 말뚝 박고 합판 붙여서 찌그러진 문하나 달아놓고 바람이나 피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롯데에서 짓는 150층짜리 빌딩들은 고도의 공학적인 설계가 들어가지 않으면 지을 수가 없습니다. 수학의 도움을 받고 역학을 쓰지 않으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부르스칼리파 같은 경우는, 바람이 불면 1m가 출렁거린다고 합니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출렁거리지 않으면 건물이 부러진다고 합니다. 63빌딩도 바람 부는 날은 30cm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부르스칼리파가 850m인데 1km짜리를 짓겠다고 하니, 그러면 바람 부는 날 그 꼭대기는 1.5m이상 왔다갔다 움직일 것입니다. 거기에 의자 하나씩 메달아 놓고 3분 태워주는데 100불씩 받아도 다 올라갈 것입니다. 이렇게 교리를 공부하지 않으면 신앙의 지식이 쌓이지를 않습니다. 조금만 어려우면 ‘아이쿠!’합니다. ‘주기도문’같은 책들도 어렵다고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교리공부를 부지런히 하면 교리공부를 하고 나서 예전에 어려워서 못 보던 책을 척 펴서 보면 아주 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책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쌓여갑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는 것에 대해서 쾌락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아름다운 삶으로 여러분이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여기저기 헤매고 돌아다니는 40대 중반의 결혼한 집사가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자기와 같은 교회를 다니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그렇게 헤매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신앙의 의심되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한 30분 정도 그에 대한 답을 해주니까 그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더랍니다. 같이 헤매고 다니다가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니 넌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니?”, “교리를 공부하면 알게 돼” 그래서 교리를 잘 공부하면 상담의 필요성이 없어집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에 스스로 판단이 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성숙한 신앙생활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책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가 7가지를 배웠는데, 주기도문에 보면 이 일곱 가지가 다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이것은 신론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것은 교회론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지금 공과가 여기까지 나가셨습니까? 미식학의 문제, 음식의 맛을 느끼는 이런 부분들은 구원론에 있어서 성화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리를 공부하면 책꽂이가 생겨서 들은 내용이나 읽은 내용이 어디에 해당되는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지식들이 쭉 쌓이면서 설교를 들으면서도 교리적인 지식이 계속 상승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잡동사니 쌓아놓은 것처럼 머리가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정리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놀아도 뭔가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과 놀아야 합니다. 맨날 먹으러만 다니고 놀러만 다니는 사람들과 놀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과는 놀아주더라도 선교하는 마음으로 놀아주십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래도 네가 나같은 사람과 놀아야 너에게 희망이 있다’하는, 적선하는 마음으로 놀아주시고, 공부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주로 만나서 교제하고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느낀 것이, 우리교회처럼 말씀을 공부하려는 사람에 대해서 full service를 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내일도 창고 대방출이라고 해서 교재, 책, 교회에서 찍어낸 것들을 싸게 대방출합니다. 창고에 보관할 곳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사경회가 끝나면 “그리스도인이 소금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주제에 대한 얇은 책이 나오는데 거기에 설교 줄거리가 다 나옵니다. 주일 설교 끝나면 요약된 것이 인터넷에 올라갑니다. 이런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도 아쉬워서 어떤 해에 설교한 것을 두 페이지에 요약해서 그때 무슨 설교를 했는지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면서 설교를 찾아서 들으면 신학공부가 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수고하는지 모릅니다. 많은 헌신자들과 직원들이 묵묵히 일해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아이폰으로 딱 들어가면 뭐든지 찾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가 잘 된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오죽하면 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이 오셔서 우리교회가 이렇게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서 한숨을 쉬고 갔습니다. 자기네 교회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하신 것은 큰 부대자루로 다섯 개인가 열 개인가가 지하실에 있는데 몇 십만 명이 모이면서도 그것을 정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공부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들어가서 무한정으로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마치 밀가루 있으니까 알아서 해 먹으라는 게 아니라, 탁 열면 쿠키, 탁 열면 빵, 탁 열면 떡, 탁 열면 밥, 탁 열면 잡곡밥, 이렇게 칸칸이 되어 있고, 위에서부터 짠 것 싫은 사람은 싱거운 것부터, 짭짤한 것 좋아하는 사람은 짭짤한 것부터, 그리고 말린 것, 반건조한 것, 다 있습니다. 어떤 교인은 이렇게 친절하게 해 줬기 때문에 옛날처럼 말씀을 잘 듣지 않는다고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옛날에는 교인들이 80명이었을 때, 테잎을 1억 원어치 팔기도 했습니다. 교회 예산은 8000만 원이었습니다. 열린 신문을 테잎 팔아서 만들어주다가 나중에 교회가 가져간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다 했습니다. 1993년도에 테잎 한 개의 가격이 1000원이었습니다. 절대 안 깎아 줬습니다. 그리고 1월 첫 주, 한 주만 세일을 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돈을 잔뜩 가져왔습니다. 뷔페처럼 테잎을 차려놓고 해설을 해주고 바구니를 들고 빨리 가서 담아서 샀습니다. 어떤 사람은 50만원어치씩 사가곤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부 구입하는데 200만원이 됩니다. 갈 때는 자동차 트렁크에 라면박스로 두 개, 세 개씩 싣고 가서 듣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집에 도서관처럼 비치해 놓고 있다가 교회를 정하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목자와 양’,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중생과 회심’, 시험에 든 사람에게는 ‘시험을 이기는 길’, 부모와 대판 싸우는 사람에게는 ‘가정회복 시리즈’, 시집못가서 안달하는 사람에게는 ‘젊은이의 독신과 결혼’, 매일 게으른 사람에게는 ‘성화와 게으름’, 이렇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가면 기본적으로 라면박스로 두 박스씩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것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교역자들이 다 예전에 그러던 사람들입니다. 이성호 목사부터 시작해서 김경해 전도사 등등 말입니다. 그렇게 사모하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부요하고 예배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집에 가서 쇼파에 누워서 아이폰 툭 치면 나오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배워야합니다. 잔소리가 많아졌습니다.
신분, 신분이라고도 하고 상태라고 합니다. 영어로 'state', 라틴어로 ‘스타투스’입니다. 우리는 가끔 신분과 상태라는 말은 상호교차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율법 앞에서 그리스도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낮아지셨을 때에는 율법 아래 있는 종이었으나 높아지셨을 때는 초월하신 주님이시다. 두 가지 신분은 생명의 상태와 조화를 동반하게 된다. 낮아지신 신분, 혹은 비하의 상태, 그리고 뒤에 나오는 높아지는 신분은 승귀의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하와 승귀라고 합니다. 낮아지신 신분은,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통치자의 신적위엄을 버리고 인성을 취하셨으면 율법의 최고 수여자이신 그분이 율법의 요구와 저주 아래 굴복하시는 데에 있다. 상태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성육신,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는 자체가 낮아지신 것입니다. 가끔 사극에서 보면 임금이나 왕자가 자기 종이나 친구를 불러서 “야, 이리 와서 네가 내 옷을 입어.”, “제가 감히 어떻게 왕자님의 옷을 입습니까?”, “죽을래?” 하며 옷을 바꿔 입고 내려갑니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답답한 왕궁에서 살다가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배우기도 하고, 가끔은 왕도 평복을 입고 변장한 무사들을 몇 명 데리고 임행순찰을 나갑니다. 그리고는 주막에 앉아서 갓을 눌러쓰고 막걸리를 한 잔 마시면서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듣습니다. “아, 요즘 도대체 살기가 힘들어졌어.” 이런 얘기도 듣는 것입니다. 이럴 때, 왕으로서는 굉장히 낮아지는 것입니다. 누가 변장한 왕에게 “여보슈!”하고 부르면, 왕 옆에 있는 무사가 칼을 뽑으려고 합니다. “감히 왕 앞에서…!” “어허, 왕이라니.” 하면서 말립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육신이 되셨다. 마리아에게 나심으로 인류 중 한 사람이 되셨다. 그런데 재세례파의 주장과 같이 하늘로부터 그의 인간성을 부여받으셨다면 그의 성육신은 참 된 것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신 비슷한 무엇을 입은 것일 뿐이지 사람의 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동정녀 탄생을 가르쳐준다. 이 이상한 출생은 시초부터 죄의 오염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보호해준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이다. 이것은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부터 인성도 취하시고 인격도 취하셨다면 필연적으로 죄를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가톨릭에서 해결하기 위해서 마리아의 무죄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염시태설’이라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용어입니다. 오염이 없이 태를 입으셨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죄가 없으니까 그 태에서 태어난 아들 예수도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의 엄마는 어떻게 해결해야하겠습니까? 마리아가 죄인인 엄마, 아빠에게서 태어났는데 죄가 없다면 뭔가 특별한 조치가 따랐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엄마, 아빠는 어떻게 설명하느냐, 할 수 없이 마리아의 엄마도 성인으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에르푸르트에서 벼락을 맞습니다. 거기서 옆에 가던 친구가 한 번에 죽어버립니다. 벼락 맞아 죽으면 사람이 새까만 나무처럼 타 버립니다. 그것을 루터가 보면서 무시무시한 공포에 떨면서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할 때, 하나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성 안나여!”합니다. 그 성 안나가 마리아의 엄마입니다. 마리아의 엄마가 워낙 죄 없고 거룩한 성인이니까, 자기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봐야 하나님은 너무 바쁘셔서 신경 안 쓰시고 성 안나 정도는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성 안나는 마르틴 루터가 살던 고향의 수호신이었습니다. 마을마다 있었던 수호성인입니다. 에르푸르트같은 곳은 벼락이 많이 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꼭 권하는데 이번에 우리가 35명 정도 종교개혁 여행을 다녀왔는데, 60%가 최근에 교리반을 마친 분들이었습니다. 2년 전쯤에 제가 꼭 돈을 모아서 종교개혁여행을 가라고 했습니다. 발리, 동남아시아는 못 가더라도 거기는 가라고 했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책을 몇 권씩 읽고 종교개혁여행을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말 많이 배워서 갔습니다. 제가 직접 가이드를 했습니다. 제가 가이드를 참 잘했습니다. 첫날 가이드가 30분 설명하는데 ‘저건 아니야, 저렇게 설명하면 안 돼.’했습니다. 그런 설명을 들으면서 12일을 다닐 것을 생각하니까 큰일 날 것 같아서 “내가 할 테니까 당신은 옆에서 듣기만 하세요.”하고 제가 가이드를 시작했습니다. 그 가이드가 열심히 받아 적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가이드를 하는 것인데,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아이폰에서 찾은 것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 쓰는 사람들이 대개 초등학교 4, 5학년 아이들이 쓴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인터넷 답변들을 다 믿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비텐베르크 앞에서는 제가 한 시간을 설명했는데 참 좋았습니다. 여러분도 지금부터 한 달에 10만원씩 2년 정도 적금을 들어서 다음에 갈 때는 제일 먼저 신청하십시오. 가겠다는 사람들이 모두 가질 못했습니다. 3일 만에 마감이 되었습니다. 2년 적금을 부어서 타면 100만 원 정도 더 보태면 됩니다. 그렇게 준비해 두었다가 가십시오. 효도관광 다니듯이 멍하게 따라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고 이렇게 교리반을 하고 교회역사 책을 읽고 뭔가 눈이 떠진 상태에서 가면 팍팍팍팍 가슴으로 막 들어옵니다. 설명을 하면 저쪽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필기를 합니다. 돈은 그런 곳에 쓰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것에 쓰고 먹는 것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우리는 가끔 그리스도의 고난이 최후의 고난에 국한된 것으로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전 생활이 고난의 생활이었습니다. 그 생활은 종이 되신 생활이었으며 저주받은 세상에서 무죄한 자의 생활이었습니다. 사단의 공격을 받았고 백성의 배반을 받았고 대적들도 그를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영혼의 고난은 육체의 고난보다 격렬한 것이었습니다.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고, 불의한 세상에 의해 억압을 받으셨고, 죄 짐에 의해 눌림을 받으셨으므로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죄를 제외한 모든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를 정말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고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를 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다루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유대인들은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죄인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탁월한 마음을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생애가 기록된 복음서가 우리에게 기독교의 기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많이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학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머리가 하얀 연세 많으신 교수님이셨는데, 기독론을 설명하시면서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정말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하시는데, 울먹울먹하시면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아무리 강조하고 여러분이 많은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과 지식,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이 가야합니다.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들어가서 보십시오. 물론 바쁘신 것 압니다. 제가 항상 얘기하지만, 영혼이 곤고할 때, 일주일만 시간을 내서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거나 혹은 일주일만 약속을 잡지 말고 일찍 들어와서 깨끗이 목욕하고 테잎을 하나씩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는 요약본도 있으니 펼쳐놓고 들으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무지한 사람에게 언젠가 한 번 가르쳐주어야겠다.’하는 마음으로 쭉 정리하면서 요약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깊이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죽으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말할 때는 육체적 죽음을 말한다. 그는 불의한 사건의 결과, 암살자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줄 치십시오, 법적 판결에 의해서 죽으신 것이며 죄인으로 간주되셨던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저주된 죽음을 죽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마치 그의 고난이 최후단계였던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지 아니했던가? 그러나 이 말은 그의 능동적 고난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장례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된 자로서 인식했던 바, 낮아짐이 한 형태인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장사되시다니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겸비, 혹은 낮아짐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생이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구원자가 무덤에 머무신 것은 낮아진 신분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덤, 즉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제거해준다.
여러분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언제 느끼셨습니까? ‘메멘토 모리’가 무엇입니까? ‘죽음에 대한 기억’입니다. ‘아, 이렇게 나도 죽어야 하는구나.’ 이어령 씨는 여섯 살 때 느꼈다고 합니다. 들판에서 놀다가, ‘아, 내가 죽어야 하는구나.’하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합니다. 역시 천재입니다. 우리는 60세가 되어도 못 느끼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느끼셨습니까? 죽음이 오면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런 기억이 납니다. 갑자기 엄마, 아빠를 비롯해서 이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확 밀려왔습니다.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죽는 게 뭐야?”, “얘야, 네가 마루에서 거실에서 TV보고 블록을 가지고 놀다가 잠이 들 때 있지? 아침에 일어나니까 어디 있었어?”, “내 방에 있었어요.”, “그렇게 죽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다가 이 세상에서 네가 거실에서 잠들었을 때 엄마가 네 방으로 옮겼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옮겨 놓으시는 거란다. 그게 죽음이란다.” 하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 죽음이 큰 두려움이었는데 예수님 그 두려움을 이기고 사신 것을 보면서 우리가 위로와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실제적인 교리입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대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전쟁, 질병으로 죽어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면서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지옥에 내려가심. 사도신경에 있는, 우리나라에는 번역이 빠져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살아나시고’ 여기에 ‘음부에 내려가시고’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빠졌습니다. 이 뜻은, 로마 가톨릭은 그리스도가 구약성도들을 해방하시기 위해서 ‘림보스펙트룸’, ‘선조림보’, 림보는 사람들이 갇혀있는 곳을 말하는데, 이 림보로 내려갔다고 말하며, 루터파는 죽음과 부활의 기간에 흑암의 권세에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본다. 그런데 아마도 다음과 같은 상징적 표현이 될 것이다. 1. 줄치십시오. 동산에서와 십자가 위해서 영적으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고 사망의 상태에 있어서 가장 낮아지신 상태에 들어가신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려가는 것을 처음부터 보십시오. 성육신, 고난, 죽으심, 장사지내심, 지옥에 내려가심. 외우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처음부터, 성육신, 고난, 죽으심, 장사지내심, 지옥에 내려가심 입니다. 여기가 끝이고 그 다음부터는 올라오는 것입니다. 승귀입니다.
높아지심의 신분, 혹은 승귀의 상태. 높아지심의 신분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시고 죄인을 위해 의와 영생을 준비하심으로 계약의 의무인 율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셨다. 계약의 의무인 율법의 지배는, 예수님은 율법을 능가하시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율법을 어기고 죽었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우리는 것을 치룰 능력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죄는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죄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 죄의 크기가 무한한 것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남의 집에 가서 의자에 한 번 앉아보는 것이 큰 죄입니까, 아닙니까? 그 집에 의자가 있는데 주인 허락을 받지 않고 앉았더라도 “거기 앉으시면 안 돼요.” 이정도 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몰래 살짝 앉았는데 그 의자가 황제의 의자였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의자의 가죽이 닳습니까? 그런데 왜 죽입니까? 좀 앉으면 어떻습니까? 황제의 의자가 있는데, 아무도 없는데, 청소하러 갔다가 한 번 앉았습니다. “어험~” 해봤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그걸 딱 봤습니다. 그럼 어떻게 처벌을 내리겠습니까? “다음에도 와서 종종 이용해라.”하겠습니까? 중국은 3족이 아니라 9족을 멸합니다. 싹 죽여서 씨를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황제가 그 의자를 다 쓰고 쓰레기통에 버렸다면 그때 앉으면 어떻습니까? 괜찮겠습니까? 안 됩니까? 버린 것인데 안 됩니까? 뭐가 문제인 것입니까? 의미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놈이 앉아서 혼자서 “이리 오너라~” 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그 의자를 한 번 깔고 앉았다는 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품느냐” 이것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그 죄의 크기가 엄청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의자가 뒷집에 사는 노인의 것이었다고 한다면, 몇 번 앉아서 붕붕 뛰다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지은 죄가 무한하게 큰 것입니다. ‘아유, 하나님이 쪼잔 하게 선악과 하나를 먹었다고 그러실까?’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의미의 문제입니다. 그 죄의 크기가 그렇게 무한한데 그것을 상쇄시키기 위해서는 공로가 무한한 자가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나님이 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기위해서는 사람이, 공로가 무한하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 부활은 육체와 영혼의 단순한 재결합으로 된 것이 아니라, 줄 치십시오. 자기 안의 인간성, 육체와 영혼이 본래의 아름다움과 강함을 회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이전에 부활한 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셨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자라고 불리어질 수 있다. 부활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줄 치십시오.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든 요구에 응하셨다는 하나님의 선포다. 충분히 당신께서 만족하셨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성도의 칭의와 중생, 최종 부활을 상징한 것이다. 세 번째, 줄 치십시오. 우리의 칭의와 중생과 부활의 원인이 된다.
승천, 부활하신 다음에 40일을 계시다가 승천하십니다. 승천은 어떤 의미에서 부활의 완성이었으나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 줄 밑에, 줄치십시오. 승천은 지상에서 하늘로, 한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따른 유형적 상승이라고 묘사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현저한 영화를 내포한 것이다. 1.루터파는 승천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는다. 승천을 하나의 조건으로 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인성이 어떤 신적 속성의 완전한 기쁨에 들어가셔서 영구히 편재하시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X표를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루터파가 성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공재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개혁파에서는 그렇게 보질 않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무한히 편재하시지만,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인성은 그렇지 않다, 장소에 국한 되어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어떤 사람이 했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면 하늘에서는 어떻게 된 것인가요? 하늘을 떠나서 사람을 입고 오셨으면 하늘에서는 삼위일체가 아니라 이위일체겠네요? 예수님이 잠시 땅 위에 내려오셨으니까요.” 이런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구역원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뭐라고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활짝 웃고 있는 자매가 대답을 해 보십시오. 신성은 하늘에 있고? 인성은 출장가고? 그런 것은 아니고? 다시 저쪽에 활짝 웃고 있는 형제, 뒤 돌아보는 형제, 총명할 것 같은데 대답해보십시오. 오, 박수쳐주십시오. 95점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그 아버지는 성부하나님이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얘기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위격으로서의 아버지로 부를 때도 있고, 본질로서의 아버지를 부를 때도 있는데,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는 위격으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본질로서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하시면, 그 아버지는 당신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르셨을 것입니다. 신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성은 무한히 편재하시기 때문에 여기 계실 때 거기도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성은 여기서 취하셨기 때문에 여기 머무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 인성이 하늘로 옮겨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예수님의 인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파는 그 인성이 여기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찬 하는 그 빵 안에 예수님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재밌습니까? 재밌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심으로 희생을 성부께 나타내기 위해서 성소에 들어가 보좌에서 중보자 역할을 하신다. 우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승천하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처소에 거하게 되었고 승천하심으로 우리도 하늘에 있는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었다. 우편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취급될 수 없으나, 줄 치십시오. 권능과 영광의 처소를 말하는 상징적 지시로 이해된다. 이렇게 시험에 나오면 재밌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이란 하나님의 오른쪽의 보좌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 동그라미를 하면 여지없이 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소에 한정이 없이 충만하신 분인데 왼쪽이 어디고 오른쪽이 어딥니까? “자 여기 나온 형제들, 공기를 중심으로 왼쪽에 서시고, 자매들은 공기 오른쪽에 서십시오.”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자, 이제 장년교구는 빛 왼쪽에 서시고 청년교구는 빛 오른쪽에 서시기 바랍니다.”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환하게 태양빛이 비추는데 안 되는 것입니다. 시험에 이렇게 나오는데 동그라미를 치면 틀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적표를 집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남편과 애들이 다 봅니다. 또 직장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직장에 전화해서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으면, “OO씨가 시험에 떨어지셨습니다. 다음 주일에 재시험 보러 오시라고 전해주십시오.”합니다. “교리반 시험 떨어졌음, 다음 주에 재시험”하고 메모해서 붙여 놓습니다. 그런가하면 1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집에 가서 애들에게 아빠가 수석했다고 자랑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동안, 줄 치십시오. 교회를 다스리며 보호하시며, 우주를 통치하시며, 완전한 희생에 근거해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하신다.
육체의 재림. 예수께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때,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최절정에 달하게 된다. 줄 치십시오. 그리스도의 재림은, 1.육체적이고, 2.유형적이 될 것이다. 3.심판하러 오시는 것이다. 4.재림의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5.심판하러 오실 목적과 자기백성을 구원하러 오신다. 6.구속사역의 완전한 승리를 나타내신다. 자 그럼 이제 되었습니다. 높아지심은, 마지막까지 내려가신 후에, 부활, 승천, 우편에 앉으심, 재림하심, 이렇게 됩니다. 맨 처음부터 외워봅시다. 하늘에 계신 그분이 어디로 오셨습니까? 성육신, 고난, 죽음, 장사되심, 지옥에 내려가심, 끝까지 갔습니다. 그다음에 올라오는 것은, 부활, 승천, 우편에 앉으심, 재림하심, 확실하게 외우셨습니다.
그다음 16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세 가지 직무,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무가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직, 이렇게 나뉩니다. 이것을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삼직이라고 불렀습니다. 솥발과 같이 이 세 개의 기관, 직분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신 것입니다. 각각 하는 역할이 다릅니다. 선지자의 경우에는 주된 관심사가 계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 계시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의 관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의 뜻, 그것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중요한 사명이기 때문에 얼마나 그것을 가감 없이 전달하느냐가 선지자의 충성스러움의 표현이 되었던 것입니다. 백성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신망을 받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달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제사장의 관심사는 하나님도 하나님이지만 인간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사람이지만,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인 그들을 데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관심사는 계시에 있었지만 제사장의 관심사는 전통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사가 달랐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것 같이, 어떻게 하면 나라의 질서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왕의 직무가 되었던 것입니다.
선지자직,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로 오실 것을 구약은 예언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선지자라고 얘기했고, 아버지로부터 말씀을 가져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장래의 일을 예고하셨고 독특한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선지자로 인정했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는 가끔 꿈이나 환상, 언어전달을 통해 계시를 받아 선지자 활동을 하는 가운데 구술적으로나 가시적으로 이 계시를 전달해주었다. 그의 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줄 치십시오. 그의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백성들을 위해 율법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시대에 이미 선지지로 일하셨습니다. 그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 선지자로 일하셨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도들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그 사역을 계속 하셨다. 지금도 그의 선지자의 사명은 말씀의 역사와 영적인 조명을 통해 계속된다. 이 사명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서도 유일하게 인정해주는 그리스도의 직능이다. 이 뜻은, 우리들이 흔히 선지자라고 하는 말을 사용할 때에, “미리 안다”라고 씁니다. 그래서 이것을 예언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선지자가 종종 미래에 될 일을 미리 예고하고, 흔히 말하는 포어텔러(foreteller)의 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아주 작은 일부이고, 이 사람의 본 임무는 율법의 해석자입니다. 모세 시대는 주전 15세기인데, 그 시대에 모세가 율법을 주었으면 선지자들은 그 이후에 계속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주전 10세기 다윗, 8세기, 7세기, 4세기 선지자가 계속 나옵니다. 이 선지자의 고민은, 우리들이 뭔가 판단이 안 설 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저작권법 같은 것에 대해서, 무단으로 복제해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을까? 국정원직원이면서 댓글을 달아서 특정 후보를 떨어뜨리는 일들, 이런 것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데, 그 사람들도 똑같은 고민을 한 것입니다. 지금은 모세 시대와는 거의 700년 차이가 나는 주전 7세기, 8세기인데 이때 모세가 살았더라면 우리에게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라고 외쳤을까, 이것을 설교하던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중요한 사명은 율법을 해석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오늘날의 설교자와 같은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에 대한 그런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잘 안 쓰고, ‘예언자’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예금”할 때의 ‘예(預)’입니다. 즉 ‘말씀을 맡긴다’, ‘말씀을 맡긴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미래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고 점쟁이처럼 미래를 예언하는 것으로, 물론 그런 기능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아주 일부이고 대부분의 기능은 율법을 해석해서 그 시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세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말입니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 놓고 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지자의 사명이 있다고 할 때, 그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직. 구약성경은 오실 구속주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예시했습니다. 신약에는 그를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책이 있는데 히브리서입니다. 다른 저서들도 제사장적 사역에 대해서 말합니다. 줄 치십시오. 예언자는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지만 제사장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하는 일을 한다. 둘 다 선생이었지만 예언자는 도덕적인 것을 가르친데 비해 제사장은 종교, 혹은 예, 제사법, 종교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특권을 가졌으며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특권을 가졌다. 계속해서, 히브리서에서 제사장이 백성 중에서 그들의 대표를 뽑아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백성의 유익을 위해 활동하며, 속죄를 위해 제물과 희생을 드린다는 것과 백성들을 위해 중재를 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제사장의 일이 두 가지가 있는데 희생적 사역과 중재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무엇보다도 사죄의 희생을 드린 일이다. 구약에서의 희생제사는 다가올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을 위한 희생을 예시해 주는 형태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 유월절 양, 모두 제물입니다. 모두 제물로 불리운다. 중재,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죄를 위해 큰 희생을 드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을 위해 중재의 역할을 하기도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우리의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이것은 희랍어인데, ‘파라’는 ‘곁에, 옆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파라’가 들어가는 것은 이런 뜻으로 보시면 됩니다. 영어에 'parable', ‘비유’입니다. 이것은 ‘본래’인데, 던지기는 던지는데 옆에 던지는 것입니다. 정곡을 콕 찌르지 않고 옆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입니다. 이런 것도 있습니다. ‘파라노이아’, ‘노이아’는 ‘지성, 정신’입니다. ‘파라노이아’는 정신이 옆으로 나가서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생각하는 ‘과대망상’이 되는 것입니다. ‘파라’가 들어가는 것은 이런 것과 관련이 됩니다. ‘파라클레토스’, ‘파라’는 옆이고, ‘클레토스’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데, ‘에드버킷(Advocate)’은 ‘변호사’, 중재자라는 뜻이고, ‘돕다’, ‘돕는 사람’, ‘helper’, 세 번째는 ‘카운슬러(counsller)’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에드버킷’, ‘헬퍼’, ‘카운슬러’ 이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드버킷은 중간에서 뭔가 잘 되게 변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헬퍼는 돕는 사람, 카운슬러는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에드버킷은 ‘보’, 헬퍼는 ‘혜’, 카운슬러는 ‘사’, 이렇게 해서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을 만든 것입니다. 없는 단어를 만든 것입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취하면 나머지가 없어져버리니까 고민을 하다가 ‘보혜사’라는 단어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는 아직도 올라오지를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넣어줄만 한데 말입니다. 벌써 80년 정도 되어 가는데 아직도 없습니다. 이 세 가지의 기능이 제사장의 기능이었습니다. 타인의 소송을 변호하는 자를 의미한다. 줄 치십시오.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은 그의 희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끔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계속 줄 치십시오. 하나님께 자신의 희생을 드림으로 신령한 축복을 요구하시며, 사단과 율법과 양심의 고소로부터 신령한 축복을 보호하시며, 이들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용서해 주실 것을 확증하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들의 예배와 봉사를 하나님께 바친다. 이런 중보적 역할을 성질상 국한된 것으로 선택받은 자에게만 관계되어 있다. 이미 믿었든지 아직 불신앙 속에 살든지 선택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이런 혜택을 주신다.
왕직. 그리스도께서는 자연히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참여하신다. 이와 관련해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가 부여받으신 왕권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왕권은 교회를 향한, 줄 치십시오. 영적왕권, 우주를 향한 우주적 왕권,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적왕권. 그리스도의 왕권은 자기 백성들을 향한 통치이다. 줄 치십시오. 이것은 영적영역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이 왕권이 영적영역에 속한 것이며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며,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영적 목적을 가지시며 영적수단인 말씀과 성령에 의해 실시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의 모임과 통치하심과 보호, 완성에 이바지하신다.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와 동일한 것을 뜻한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보이지 않는 교회 회원의 신자만이 그 나라의 시민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사는 모든 보이는 교회에 거하는 자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마음과 생활속에 있는 현재적이고 영적인 실존이며, 또 한편으로는 예수의 재림 때까지 실현되지 않을 미래적 소망이다. 미래의 왕국은 본질상 하나님의 지배가 인간의 마음속에 확립되며 인정되는 것으로 현재의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미래의 왕국이 유형적이며 완전하게 될 것이라는 면에서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그의 재림으로 끝날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 대해서는 이번에 ‘주기도문’에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가셔서 세심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서, 각 장의 맨 뒤에 ‘한눈에 보는 제 몇 장’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주적 왕권.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주적 왕권은, 줄 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리스도의 원래의 왕권과 그 미치는 영역이 동일하지만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왕권은 교회를 위해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께 맡겨진 우주를 다스리시는 권한이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개인과 국민의 운명을 다스리며, 세상생활을 지배하시며 그 왕권을 그의 구속적 목적에 이바지하게 하시며, 그 왕권을 통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위험으로부터 그의 교회를 보호하신다. 이 왕권은 하나님의 나라의 대적을 물리칠 때까지 지속될 것이며 그 목적이 성취되면 우주적 왕권은 성부에게로 반환될 것이다. 이 뜻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권세를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그 다스리시는 것이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교회를 향한 다스리심, 이것은 영적 왕권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세계를 향한 통치, 이것이 우주적 왕권입니다. 영적왕권은 영적 목적을 가지고 영적수단을 가지고 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를 주고 은혜를 받게 하여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고 자기를 버리고 주의 십자가를 따르는 이런 삶을 살도록 통치하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입니다.
어제도 3일 동안 하남시에 있는 어떤 작은 교회에서 집회를 했는데, 너무 썰렁했습니다. 사람들도 적게 오고 교회도 추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시니까 사람들이 막 울면서 회개하고, 나중에 그 교회에 있는 사람이 문자를 보내 왔는데, 이렇게 밤늦게 까지 교인들이 울면서 기도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통치를 하시니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끊임없이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우주적 왕권은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좋은 지도자를 세워주시고, 때로는 그가 불신자인데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나라를 다스리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회의 어떤 악이 있으면 자연히 그것들이 드러나게 하시고 비난을 받게 하셔서 사람들이 그것을 고쳐가게 하시고, 그러면서 나라가 발전하고 결국은 교회가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신 목적에 이바지하게 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여행 자유화가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에 우리나라가 저 캄보디아 같은 나라처럼 못 살았다고 한다면 여행자유화가 아직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쓸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 유학을 가면 그쪽학교에서 모든 돈을 다 대준다는 확약이 오지 않으면 유학을 못 갔습니다. 학비를 미국으로 보내는 것 자체를 여기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49년 전에 한 달 수출이 1억불이었답니다. 한 달 수출이 말입니다. 1년을 해봐야 12억불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가지고 너나 할 것 없이 여행을 다니겠다고 써버리면 나라경제가 어떤 꼴이 되겠습니까? 어림없었습니다. 이민 갈 때도 돈을 못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60년대에 이민 간 사람들은 가져갈 수 있는 돈이 500불인가 200불밖에 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재산이 있어도 가져가질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재산은 팔아서 여기서 써야하고 집이 있어도 이민 갈 때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겨우 100불이나 200불 넣어가지고 가서 어떻게 하든 거기서 비비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나라가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가 잘 살게 되어서 지난달에 500억불을 수출했다고 합니다. 수출과 수입이 작년인가 재작년에 처음으로 1조억달러를 달성했는데, 그것을 달성한 나라가 전 세계에 일곱 나라밖에 안 됩니다. 이 꼬딱지 만한 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여행자유화를 통해서 봇물처럼 터져나간 것이 선교부흥이었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현재 선교한다는 이름으로 가 있는 선교사들이 5만 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경제적으로 이렇게 살게 해 주시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것도 다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통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만이 아니라 이 세상과 고통 하는 인류를 위해서 기도하면 그들이 모두 예수를 믿고 구원받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들을 통치하셔서 무엇인가 올바른 방향으로 세계가 형성되도록 이끄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세밀하게 간섭하셔서 역사하시는 일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 재밌는 것이, 역사속의 미스터리인데,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안보리 상임이사국에서 파병을 동의해야 UN군이 오는 것인데, 당연히 소련을 거부할게 분명했는데, 소련대표가 그 중요한 모임에 오지를 않아서 나머지 네 나라가 가결을 했습니다. 그때 소련대표는 오다가 차가 망가져서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와서 파병하면 안 된다고 훼방해서 한 달 정도만 끌었으면 지금 우리는 북한에서 땅 파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으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야할 이유를 여기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밀어붙이지 않고 가볍게 했는데도 세 과를 나갔습니다.
시험문제를 찍어달라고 자꾸 그러는데, 우리 성령님은 찍신이 아니라 지혜의 신이시기 때문에 “줄 치십시오.”한 것에서 80%이상 나옵니다. 네? 다 쳤습니까? 아닙니다. 안 친 곳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시험을 무지하게 어렵게 냈더니 중간고사를 보고 다들 자퇴를 했습니다. 이 학교 안 다닌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교사도 못하고 집사도 못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너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렇게 절망적으로 어렵게 시험을 내지는 않고 OX문제로 냅니다. 그렇다고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시험공부 하지 않고 오시면 절반밖에 맞추지 못합니다. 신대원 학생들이 시험을 보면 40점 나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대신 공부하면 거의 90점, 하나 틀리거나 두개 틀리거나 합니다. 공부하십시오. 다음주일에 공부 좀 하고 시험 보겠습니다. 다음주일에는 한 과나 두 과 정도 하고 시험 보겠습니다. 지금 현재 28과 했으니까 12과만 하면 마칩니다. 이번에는 일찍 해서 11월에 끝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12월에 여유를 가지고 토요일에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는 중간고사 기간에도 강의를 합니다. 저는 안 하면 좋은데, 강의를 해야만 빨리 끝나니까 한 과나 두 과 정도 공부하고 시험을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