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년 여성 교구 교역자 세미나 2
녹취자 : 김세나
그 다음 이제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이제 교구 식구들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모른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저는 목회 사역을 하면서 그 점을 깊이 느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기도 하고 많이 하기도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신앙이 성숙할수록 신앙이 성숙할수록 목회자를 덜 의지하게 된다는 거죠. 사실 그것은 맞는 이야기이거든요. 신앙이 성숙할수록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의 빛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살아가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또 그런 신자들을 길러내서 자기 자신의 삶의 무게를 감당할 뿐만 아니라 지체들의 영혼을 세워주기 위해서 봉사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성도는 그렇게 성숙해 가야 한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 떼들은 양 떼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 하면서 교인들에 대해서 꼬인 마음을 갖거나 구역장들에 대해서 휜 마음을 갖게 되면 목회의 축복이 없습니다. 그게 참 어려운 거죠. 목회자들도 사람이니까 자기한테 자기 목양을 잘 받고 말씀의 은혜 받고 그리고 자신을 목자로서 잘 인정해 주고 하는 사람들이 사랑스럽지 변화되지도 않고 땍땍 거리고 대들고 이런 사람들이 좋을 리가 없거든요. 밥 한번을 먹어도 전자의 사람들과 먹으면 속이 편안하지만, 후자의 사람들과 먹으면 영 마음에 부담도 스럽고 하여튼 모든 것이 원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목회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이상하게 참 진실하고 그리고 진리도 사랑하고 그러는대도 이상하게 목회가 잘 안 되는 사람이 있고, 그런게 조금 부족해도 사람들이 목회자 주변에 많이 모이는 그러한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뭐냐 하면 그 차이가 뭐냐 하면 그 목회자가 신앙 안에서 사람을 용납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 경우에는 아직 변화되지 않았어도 일단 그 사람에게 이끌려서 자석처럼 많이 붙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들이 극단으로 가면 안 되는게 그게 목회는 아니거든요. 그 끌고 다니는 게 목회는 아니란 말이죠. 그 목표 자체는 인간을 인간의 영혼을 참답게 변화를 경험함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그리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는 게 만드는 것이 목회이지, 사람들 모여서 달고 다니는 그것이 목회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한 사실을 우리들이 인정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는 이러한 극단으로 가면 또 안 돼죠. 나한테는 변화된 사람만 달라 붙어라. 그게 아니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지. 예수님께서도 우선 죄인들과 세리와 창기들에게 다가가시니까 다가가서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니까 그들이 변화된 것이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많이 선전하고 돌아다녀서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그가 다 변화되고 나서 수가성 우물가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냥 죄많은 한 여인으로서 그냥 물길러 왔고 그와 관계를 맺으시면서 예수님이 복음으로 그를 변화시킨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신앙안에서 따뜻한 성품을 가져서 사람들이 그 사람안에 이렇게 깃들게 하는 것 그 자체가 굉장히 목회자에게 필요한 은사에요. 그래서 윗필드가 자기의 생활을 점검하는 가운데 오늘 하루도 나는 붙임성있게 행동하고 말하였는가. 그 붙임성이라는 것이 뭐예요. 사람들이 어려움 없이 자기가 장엄한 진리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러나 근엄한 사람이 아니고 친밀하게 다가와 자기와 접촉할 수 있도록 이렇게 말하자면 그 따뜻한 인격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유지하면서 살았는가 하는 거예요. 그게 필요하다 이거죠. 그게. 그래서 그러한 관계를 하면서 이 목회자 자신이 친절하고 성품적으로 붙임성이 있어서 그래서 사람들이 늘 깃드는 그러한 형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그것만 가지고 목회에 성공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고,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한 힘이 없는 사람에 비해서 그는 목회에 있어서 아주 우위를 차지하면서 목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 자신이 어떠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권위와 말씀의 힘, 그러한 것 때문에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거야 말릴 수가 없지만 그러나 사람 자신의 성품이 모나고 근엄하고 붙임성이 없고 퉁명스럽고 이래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 되는 이런 것들은 그것은 목회자가 고쳐야 할 하나의 존재적인 해로움이라는 거예요. 그것을 고쳐나가야 하는 거예요. 사람을 다루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그 사람을 좋아하는 타이프의 사람이 되어야지만 사람이 붙어서 목회를 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 사람 자신이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싫고 가까이 다가서기 혐오스러운 그러한 어려운 면들을 가지고 있는데 목회를 잘하게 될 수 있느냐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면에서 우리들은 중심을 잘 유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우선 참 깊이 교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역을 하다보면 자기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죠. 그리고 자기 또 다 좋아합니까. 밉다는 사람도 있죠. 그렇지만 그것을 항상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대하듯이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교인들을 볼 수 있어야지 일일이 대응하고 거기에서 말하자면 고통하고 이렇게 하면 사역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가까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믿는 사람들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그 사람의 친절함과 인격 그리고 그 사람의 인품과 사람 됨됨이, 지혜로운 행동, 예의바름, 이런 것들을 칭찬해 줄 수 있는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삶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 사랑이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예수님 자신 속에 있었던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던 그 주님의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거든요. 불쌍한 자를 불쌍히 볼 줄 아시고 고통받는 자들을 인해서 아파하실 수 있는 마음은 바로 그러한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목회자는 바로 그렇게 영혼들이 죄를 지어도 그 죄를 직시하면서도 그러한 죄 가운데 있으면서 고통하는 그 영혼의 아픔을 함께 해아리고 그 죄인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이거든요. 그래서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깊이 사랑하면서 그러면서 목회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교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목회자가 교인을 많이 사랑합니다. 자식을 낳아도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부모가 자식을 많이 사랑하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식을 낳아도 잘 자식을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 영혼들을 깊이 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와 같이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영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고 그리고 자기와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이 사역의 도상에 세우셨는데 하나님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시시때때로 나를 위로하시고 내 영혼을 어루 만지시고, 내 기도를 응답하시고, 나는 힘이 없지만 내가 탄원할 때에 주님께서 내게 힘을 주심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다라고 하는 개인적인 삶의 영적인 경험이 없이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 수 없는 것이에요. 우리의 인격이 몇 푼어치나 되겠어요. 우리가 사랑하겠다라고 결심해보는 그 결심이 얼마치나 되겠냐는 거예요. 며칠이나 가겠냐는 거예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교인들이 힘들게 하면 싫죠. 그리고 마음 아프고 그것 감정들을 제대로 추수리지 못하면 원망하는 마음이 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 따위로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내버려 둘지 보자라는 말하자면 방관자적인 교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객관적일 수 없잖아요. 아파하면 같이 아파하고 그래야지, 자기가 낳은 자식이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어떻게 어려움을 당했든지 간에 당장 찾아가서 아프면 위로하고 함께 울 수 있어야지 것 봐라. 꼴 좋다. 엄마가 그렇게 안 된다고 그러더니 이렇게 될 줄을 내가 다 알았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향한 태도가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을 끌고 내려가면 그 뿌리가 하나님을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영적인 풍만함이 있을 때 이게 이게 다 가능해진 것이란 말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가능해지고 또 기도로 살아가는 것도 가능해지고 그 다음에 사랑할 수 없는 교인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죠. 그게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하여튼 그러한 마음을 살아야 하려고 애를 써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아프게 할 때에 마음이 갈라지고 목양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이렇게 되잖아요. 그 때에 그것을 용서하고 그 교인들의 잘못을 마치 엄마가 젖을 먹이다가 갓난 아기가 엄마인 자기 젖을 깨문 것처럼 취급을 하면 거기에서 사단의 역사가 끝나는데 그런데 거기에서 그것을 교인들을 향해서 악한 마음을 품고 그것을 반응을 하기 시작하면 사단이 역사하는 거예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역사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사단의 고전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진리에 대한 인식도 있어요. 하나님을 향해서 헌신되어 있어요. 그리고 모두 충성해요.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참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갈 때 그것을 허무는 사단의 가장 고전적인 방식이 뭐냐 하면 열심히 특별한 사람들끼리 마음이 가게 하고 화해가 깨뜨려지게 하고 물론 그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다가 부딪히는 수도 있어요. 이러면서 화합을 깨뜨리는 거죠. 그 때에 목회자 자신이 그런 일에 있어서 아주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교인하고 나는 실제에 있어서나 감정적으로나 실제로 맞설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신 적 있어요? 우리하고 맞짱 떠보신 적 있느냐고요, 세상 말로. 절대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시는 분이세요. 때로는 해명하기 보다는 오해를 받으면서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그들에게 잘 알아듣게 이해해서 마음을 풀어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방법과 기술의 문제이고 기본적으로는 교인과 마음이 대치되는 상태를 갖으면 축복이 없다. 그래서 그 한없이 어리게 봐야 합니다. 자기의 속으로 낳은 자녀들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봐야 해요. 그러면서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나는 한 사람의 목회자가 교인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가. 이것은 교인이 기쁜 일을 당할 때 혹은 교인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혹은 교인이 영적으로 축복을 받았을 때, 혹은 교인이 영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잘 나타난다고 생각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영혼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을 보며 가슴아파할 줄 알고 그리고 그의 영혼이 잘 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그를 바라보며 기뻐하면서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 영혼이 깊이 침체에 빠졌을 때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축복해 주셨을 때 하나님을 잘 믿는 그들을 하나님이 복주셨을 때 그것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축복받지 못하고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을 때 오히려 그들을 깊이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이러한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가끔 묻는 게 그것이지. 뭐냐 하면 교구에 교구가 교구에 자기 지체들이 죽고 또 교구에 자기 지체들이 부모님을 여의고 어른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고아가 되고, 어느날 사랑하던 남편이 죽고 그랬을 때에 그것이 가슴이 아파야 해요. 목회자가 가슴이 아파야 해요. 언제까지, 영원히. 그게 목회의 마음이에요. 나는 오늘도 가끔이 연말이 다가오면 가슴이 아리도록 생각나는 사람들이 아빠 엄마 없는 아이들이에요. 아빠 있는 집 아이들이 아빠가 데리고 가서 크리스마스 때 선물도 사주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외식도 시켜주고 형편이 그 정도가 안 된다면 끌어안고 입맞춤이라도 해 주고 그러는데 아빠가 없이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가엾어요. 얼마나 불쌍해요. 그게 더군다나 내 교구의 가족들이에요. 남편을 여읜지 일주년이 되고 그렇게 되어서 그것을 깊은 사랑의 마음, 이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그러한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남편을 여의고, 지체들의 생일은 안 챙겨줘도 되요. 남편 잃어버린 사람은 언제가 일주년인가. 아이들이 아빠를 잃어버리고 어떠한 의미있는 날이 어떠한 날인가. 그래서 지체들 생일은 못 챙겨도 남편 잃어버리고 일주년 쯤 되면 조용히 편지라도 한 장 써서 그래서 일년동안 정말 당신의 남편을 하나님이 데려가셨지만 당신이 이렇게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보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라. 내가 항상 당신 가까이 있고 당신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 아내를 잃어버린 남편도 마찬가지이죠. 그렇죠. 나이 들어서 아내를 잃어버린 남편이 찬밥 아니에요. 또 그렇게 뼈저리게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보낸 엄마, 아빠의 마음은 또 어떻겠어요. 그죠. 이런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교인들을 숫자로 보기 시작하면 이런 감각들은 생겨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아들을 여의고 일년이 지났어요. 아무도 초상끝나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없죠. 그런데 우리는 죽은 그 아들 때문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그 아들은 하나님께서 데려 갔고 죽은 남편이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다 갔고, 아내도 갔고 식구도 갔지만, 엄마 아빠도 갔지만 우리들에게 간 사람들은 주님의 수중에 있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은 우리 수중에 있잖아. 그렇지. 그래서 아내와 남편을 여읜지 일년이 되고 이렇게 된 사람들. 교회에서 상을 치러 주어서 어떻게, 처음 심방부터 시작해서 두 번 입관 예배, 발인 예배, 하관 예배, 그 다음에 또 무슨 화구에 들어가는 예배, 위로 예배, 다섯 번, 여섯 번 지내주는데 그리고 나서 우리들이 기억을 합니까. 기억은 하고 있지만 우리들이 더 이상 그 가족들과 관계를 갖습니다.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당신 집안의 큰 딸이 이제 세상을 여의고 우리 교회 품안에서 잠든지 일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러한 것, 그들이 그 편지를 받고 전도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두 번째 문제이고, 그러한 마음을 품고 조용히 편지라도 쓰는 그것은 절대 낭비가 아니야. 그리고 그러한 것이 바로 목회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목회에요. 그런데 자기 교구 식구들에게 그렇게 세밀하게 배려를 해주는 사람이 누구이겠는지 생각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올해도 성탄절 되기 전에 우리 교회에서도 아빠 없는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나 해 주라고 했습니다. 내복이니 무슨 케이크이니 그런 것들이 아이들에게 선물이 아니에요. 아빠가 이번에 수련회 가서도 이야기 나왔는데 아빠가 살아계셨더라면 아빠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그런 선물들, 아빠가 살았더라면 때를 써서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선물들 그런 것을 사서 선물을 해라.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랑의 마음이 꼭 필요한 섬김입니다. 신기하게 사랑의 마음이 있으면 놀라운 지혜가 생겨납니다. 사랑은 살피는 마음이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지혜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심방을 간다. 무슨 일주기다. 초상이다 그러면 심방을 가면서 먼저 깊이 묵상을 하면서 남아있는 그 교구의 가족들, 그리고 교구 식구들 깊이 그들의 슬픔과 아픔에 동참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그런 거죠. 사람마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이 있고 덜한 사람도 있겠지만 자기 교구의 식구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 목자의 눈에서 눈물 한번 안 나오고 자기의 교구의 가족이 지금 어머니,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 기도할 때 그 마음에 슬픔이 느껴지지 않느냐는 거예요. 이것은 단순히 감정의 풍부하고 부족한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가 하는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영혼들을 그렇게 깊이 사랑하고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항상 이 안에 충만해져서 그래서 교인들을 보면서 고통 하는 그 곳에서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는 그곳에서 아주 함께 기뻐하고 이렇게 그 교인들의 슬픔과 기쁨과 고통에 동참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목회자의 생애입니다. 거기에서 물리적으로 우리들이, 우리가 물리적으로 그 사람을 건져낼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들을 건져낼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뭡니까. 그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목회자의 심정 속에 있어야 할 그런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권위는 두 가지인데 자기를 깊이 사랑하는 것과 그가 진리를 따라 사는 것, 그것이 교인들로 하여금 깊이 머리를 숙이도록 만들어주는 권위의 원천이 되는 것이에요. 이게 원천이 되는 것이에요.
가끔이 이렇게 그 교인들을 아주 혼 낼 때 있죠. 혼 낼 때 있습니다. 요즘 들어 그런 것 잘 못하지만, 혼을 낼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 있게 혼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요. 자기가 자신 있게 사랑한 사람들은 자신 있게 혼낼 수 있어요. 그런데 자기가 자신 있게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혼낼 수 없어요. 혼내면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나요. 부작용이 일어나요. 많이 사랑하면 그럴 수 있다 이거죠. 확실히 목회를 하면서 보면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어요. 사랑보다 더 큰 힘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랑을 이제 오늘 잘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이러한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되지만 특별히 은혜를 많이 받고 든든히 서 있는 것 같이 생각되는 말하자면 자기의 동역자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많이 베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흔히 가끔 그런 이야기 듣죠. 성숙한 신자들은 목회자에게서 빗겨나야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더 연약한 사람을 돌보도록 비켜주어야 하고 그래야 된다고 배우잖아요.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저도 그 동안에 목회해 오면서 밥을 한번 먹어도 믿음이 연약한 교인하고 먹고 그리고 평소에 늘 보는 사람 말고 처음 보는 사람하고 밥이라도 한 숟가락 먹고 차라도 한잔 마시고 대화라도 10-20분이라도 더 하는 것이 그들을 돌보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일리일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진리는 아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교인을 너무 대단한 존재로 보지 말라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교구에서 여러분들한테 은혜를 많이 받고 그리고 사역을 잘 하면서 여러분들의 든든한 사역자가 되어 주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서 무한히 섬김과 희생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양 떼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에요. 과대평가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자신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들도 여러분 자신들도 그렇게 강한 사람들이 아니죠. 제가 얼마 안 되는 목회 사역이지만 이렇게 돌아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많이 변화되었어도 그래도 내곁을 떠나간 사람들이 참 많아요. 전도사때부터 시작을 해서 가만히 어느날 세월을 이렇게 곱씹어 보면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정말 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일평생 나를 위해서 중보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생애의 영광이라고 생각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가 아벨크라리와 같은 삶을 살면서 그렇게 섬기겠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물론 거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내 입장에서 반성해야 할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똑같이 변화를 많이 받았어도 내가 많이 사랑해준 사람들은 오래토록 내 옆에 남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내곁을 떠나간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사실 목회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목회자는 누구든지 다 사랑하지만 목회자는 자신을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정말 말씀의 은혜를 받고 깊이 변화된 사람들 중에 내가 마음속으로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마음의 사랑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라고 하는 거죠. 충분하지가 않다라고 하는 거죠.
(예화) 우리 교회 어느 지체의 이야기인데 참 은혜를 많이 받은 지체죠. 교회를 멀리 떠났습니다. 저를 좀 가슴 아프게 하는 이야기도 하고 다녔죠. 참 뼈저리게 아팠습니다. 내가 진짜 말씀을 깊이 내 주위에서 교회가 조그마했을 때 변화된 사람들 치고 내가 마음속으로 피붙이처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가장 믿었던 지체가 그렇게 떨어져 나가니까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6개월인가 1년 뒤에 우연히 우리 교회에 찾아와서 제게 인사하러 왔습니다. 그럼 뭐 서로 악한 감정을 가지고 헤어진 것은 아니니까 마주 앉아서 차 한잔도 없이 잠깐 대화하는 가운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야, 너는 지난 6개월 혹은 1년 동안 목사님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살았지만 나는 맹세코 단 하루라도 너를 생각하지 지나간 날이 없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죽 흘렀습니다. 그리고는 헤어졌습니다. 결국 그 지체가 돌아왔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어느날 간절한 편지를 이메일로 보냈습니다. 나는 완전히 실패한 사람인데 목사님은 내 실패를 실패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실수라고 보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 영혼이 살았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참 사랑하고 어쨌든 깊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지체들 가운데 내가 사랑하지 않은 지체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깊이 반성하는 것 중에 뭐냐 하면 사랑은 느낄 수가 있어야 해요. 느낄 수가 있어야 해. 그리고 어느날 하나님, 내가 얼마나 사랑이 부족한 목회자인가 생각나게 해주시는데 나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느끼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날 사랑하는 것도 내 인생에 영향을 못 줬어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지 않은 때가 언제에요. 그런데 그 사랑을 느끼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것이 내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 때 깊이 깨달으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사랑이 부족한 거다. 그리고 참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내가 이제껏까지 교인들을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봤다는 사실을 깊이 그 후회했습니다. 깊이 후회하고 참 그게 아니다. 정말 아니다. 그래서 자식들도 부모가 그 가슴으로 뼈저리게 자녀를 사랑해도 자녀들의 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녀들이 그 부모의 사랑을 느끼는 그것이 자녀의 교육에 미치는 거야.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결코 영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의 교인들을 대단하게 보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년도부터 심방을 하는데 이제 원리를 좀 바꾸려고 합니다. 전에는 그저 사고 당한 사람, 그렇지 않으면 또 신앙적으로 좀 어려운 사람, 그저 좀 이런 사람들을 심방했는데 그래서 문제가 생긴 후에 밥도 같이 먹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이제는 교구를 보면서 너무 사랑스러운 사람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사랑스럽고 그리고 사도바울의 표현대로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과 실질적인 사랑을 나누는 것이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목회의 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배웠습니다. 아마 그 옛날 같았으면 그 까짓것 다 인간 적인 것이다. 교인들을 그렇게 약하게 길러서 뭐해서 쓰겠느냐. 그리고 아마 단칼에 날려 버렸을 것입니다. 내가 엊그제도 어느 교구에서 그랬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여러분 그 연주회라는 게 음악을 안 해 본 사람은 모르지만, 아무리 작은 연주회도 그 사람의 생애에는 시집, 장가가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전도사로 말하자면 개척을 하는 것이고, 사역자로 말하면 개척을 하는 것이고 그런 것인데 그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입니까. 내가 허례허식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합니다. 제가 언젠가도 이야기 했습니다만, 제 생애에서 꽃다발을 제일 처음 받아 본 게 우리 입당예배 할 때입니다. 누가 무슨 그것 하나 보내줬습니까. 그 때에 하용조 목사님이 그 꽃다발을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 그러고 입당을 축하합니다, 그것을 본인은 못 오셨지만, 편집부장 통해서 보내고 직원들이 몇 명이 왔었습니다. 교회를 지으면서 천만 원씩, 오백만 원씩, 백만 원씩 그렇게 큰 돈을 헌금한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 교인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꽃다발, 일주일 세워놓았다가 쓰레기통에 버려진 꽃다발이지만 그게 지금도 그렇게 기억이 나고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서부터 저도 그 마음을 가지고 보니까 그게 다 허례허식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장인어른 돌아가셨을 때 꽃다발 오고 그러는 것을 보면서 아, 인간 사는게 그런 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정말 위로가 될 수 없고, 지금도 그 고마운 마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이 좀 들어가긴 하지만 그 노회에 그렇게 기쁜 일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아주 먼 분들은 모르지만, 가까운 분들에게는 제가 꼭 보냅니다. 꽃다발을 보냅니다. 그것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자매가 연주회를 하는데 그 때 처음이었습니다. 꽃다발을 보내기로 하고 꽃바구니를 하나 만들어서 졸업 연주회를 축하한다. 담임 목사 해서 보냈는데 그 자매가 그렇게 그것을 받고 기뻐했답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누가 어느 교회에서 더군다나 작은 교회에서, 작은 교회는 돈이 없어서 못 챙겨주고 큰 교회는 교인이 많고 일이 하도 많아서 안 챙겨 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챙겨주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그 지체가 깊이 교회와 목사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 것을 느꼈다는 그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사실 목회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기쁨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고 하면서 살아가는게 목회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그러한 것들은 기본입니다. 어머님 여윈지 일주년, 아버님 여윈지 일주년, 삼년, 사년 된 다음에까지야 기억을 못하겠지만, 적어도 일년 정도는 남편을 여윈지 일주년, 아들을 여윈지 일주년 이런 정도는 생일은 잊어버려도 이것은 기본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기쁨과 서러움을 함께 하는 그것이 목회가 아니겠어요. 목회는 어떤 면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것이요. 이게 목회에요. 그래서 그렇게 해 놨는데 그것도 하나 챙기지 못해서 시기 하는 것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목회는 저렇게 하는 게 아닌데, 그래서 목회자는 꼼꼼하고 지혜롭게 잘 살필줄 아는 지혜로운 마음과 그리고 지혜로운 눈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일이 바로 목회입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가. 어려움이 무엇인가. 그것이 말하자면 목회입니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전도사 생활을 할 때 교사들의 결혼 기념일까지 다 챙겼습니다. 가족들의 생일은 뭐 다 기억을 못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을 다 수첩에다가 적어놓고 그렇게 챙겨 주었습니다. 목회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아픔과 서러움을 함께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그러한 것, 이게 그 너무 믿지 말아라 하는 거죠. 그래서 균형을 이루어야 해요, 이렇게. 그래서 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몰려 다니면서 밥이나 먹고 그래도 목회가 안 돼죠. 비율을 어느 정도 맞춰서 그래서 계속해서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을 인해서 내가 기쁨을 얻고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새겨 주면서 그러면서 함께 주님을 섬겨 나가는 기쁨들을 사람들에게 깊이 알려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입니다.
네 번째는 이제 그 자기를 다 태워드리는 헌신입니다. 그래서 제단에 올려진 재물이 모두 태워져서 그 향기가 하나님 앞에 올라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는 것처럼 자기를 다 쏟아 붓는 사역이 아니면 그 사역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고 섬기는 과정에서도 자기를 다 쏟아 붓는 열심을 가지고 섬겨온 과정이 아니면 자신의 생애에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흔들흔들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놀고 그저 걸렁 걸렁하게 지내온 그러한 날들은 사역이든지 신앙생활이든지 교제든지 심지어 공부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전심으로 섬기고 자기를 쏟아 붓는 그런 헌신 속에서 사는 날들은 반드시 남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좀 부족한 것이 있어도 우리를 다 남김없이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 우리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당신을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또 누구 특정한 사람을 거론해서 안 됐습니다만, 모두다 헌신적으로 일했지만 임신택 전도사가 그렇게 우리 교회 나왔다가 다른 데 나왔다가 다시 돌아오고 그래서 이제 교리반에서 이렇게 교리반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는데 아주 군계일학이에요. 탁월할 정도로 정리가 깨끗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사실 그가 얼마나 열린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할지는 누가 장담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기도하면서 한번 모험을 해 봤죠. 사실 누구든지 유치부다, 유년부다 거쳐가는 데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참 그 일년 반 가까이 두고 보는데 참 헌신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주일학교 교역자들 모여놓고도 그 형제 이야기를 한번 간곡하게 해주었는데 열매가 없는 것이 환경과 구조때문일수도 있지만 그것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쏟아 부은 사역이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매주 결혼하고 나서도 그 부부가 1시 반서부터 거의 7시 반까지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유치부 애들 30명 되는 아이들 맡겨 주었는데 1년 반 뒤에 그 아이들이 거의 80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유치부 애들이 전도사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은혜를 받고 회심하는 일도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드려서 재물로 삼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은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사역의 성공을 위해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바칠 각오가 되어있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찾고 싶어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이 이렇게 자기의 맡은 일에 사역하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죠. 비록 능력이 없고 부족해도 자기를 다 드려서 혼신의 힘을 다 드리는 사역자들을 보면 마음에 깊이 감동이 옵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박희천 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언젠가 저한테 교역자 회의 시간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분을 잘 모릅니다만, 목사님은 자기는 일평생에 오정현 목사의 은혜를 잊어 버릴 수가 없다. 그분은 아주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그게 뭔 소린가 그랬더니 대학부에 학생이 5-6명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여러분들은 내수동교회 가보셨는지 모르지만 목사님이 그 교회 부임하실 때 교인이 한 150명 쯤 되었답니다. 1층이 되었고 2층이 또 되어 있습니다. 1층, 2층이 되어 있는데 2층에 있는 교회당이 다 사람들이 올라가지 않으니까 난방을 때면 꽉 차니까 그러니까 난방비가 많이 드니까 난방비를 줄이려고 2층을 비닐을 이렇게 쳤답니다. 사실 목회자가 설교를 하러 올라갔는데 비닐이 쳐진 2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매일 눈물로 기도하기를 하나님 올해는 그 비닐을 걷게 도와달라고 그렇게 기도했는데 청년이 5-6명밖에 안 모이던 시절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 대학생 한 두 명이 모여서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하더라는 거죠. 전도사도 없이 그렇게 모여서 기도하고 지체들을 잘 챙기고 예배가 끝나고 오후 예배니까 다들 집에 갔는데 밤 늦게까지 사택 옆방에 모여서 그래서 뭐 두런두런 기도를 하길래 무슨 기도를 하나 보니까 그 안나온 지체들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로 말하자면 구역장들이, 교역자도 없이 구역장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더래요. 기도를 하다가는 찬송을 부르면서 울고 찬송을 부르며 울다가는 지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그러는 거죠. 그 때 목사님이 그래. 자기는 그 옆방에서 그 찬송소리와 기도를 들으면서 한없이 울었다는 거죠. 나도 돌보지 못한 영혼들을 저 전도사도 아니고 사역자도 아닌 평신도가 저렇게 사랑하면서 돌보고 기다린다. 결국은 목사님이 대학부를 많이 밀어주셨죠. 그리고 그 분이 있을 때, 대학부가 150명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목사님이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죠.
결국은 평신도이든 사역자이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정말 자기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역자는 퇴근도 없고, 출근도 없고 언제나 거기 매여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엊그제도 오면서 우리 집사람과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 해 전에 하도 바쁘다가 설악산에 놀러갔는데 그제나 이제나 바빠서 오밤중에 가서 가니까 열두시에요. 여관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막 설악산을 산책하려고 하는데 교인한테 전화가 와서 막 우는 거예요. 뭔 일이냐. 집안일인 모양이에요. 나 오늘은 못 들어간다. 내일이나 들어간다. 그런데 그게 설악산이 눈에 들어옵니까. 그리고 바로 서울로 내려와서 심방 갔죠. 그게 목회입니다. 목회자 자신이 자신의 건강, 자신의 물질, 그래서 자기를 다 주어도 영혼들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가 자신을 다 내어주어도 그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세워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러한 꿈을 꾸면서 사는 사람이 바로 목회현장입니다. 무한대의 헌신과 무한대의 자기희생에 대해서 언제든지 스탠바이 상태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가시고기의 예화를 즐겨 듭니다. 그런 가시고기처럼 그렇게 자기를 다 주면서 사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주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을 계속 뒤흔들어놓아서 그래서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라고 하는 확신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정말 무한대로 언제나 열려진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어느 목회자를 만났는데 목회자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교회 멀리 떨어져서 산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교인들에게 절대로 개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왜 그랬냐. 교인들로부터 가정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도 가만히 보니까 배경이 있더라고요. 상식 없는 교인들이 사택을 드나들면서 쓸데없는 오해를 많이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목사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어요. 그런데 백번 이해가 됩니다. 참 그런 것 목회자에게 너무 힘들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목회에 축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 그 분의 목회에 단언하고 말할 수는 없지만 축복이 넘친다고 말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정말 좋으신 분인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벌써 그러한 삶의 스타일 저변에 교인을 향해 꺾어진 마음이 있는 거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정말 모든 것을 그렇게 내어주면서 살아야 됩니다. 제가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된다. 그 책에도 썼습니다만 우리 한국 교회 유수한 어느 목사님이 사모님이 구속이 되셨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이 된 거죠. 밀반출 하려던 외화가 그 당시로 1억 몇 천만 원 되었답니다. 그 때 함께 그 소용돌이 속에서 시험을 받았던 교인의 이야기가 뭐냐 하면 목사님이 외화를 사모님이 외화를 밀반출을 한 것, 그것 자체는 그렇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실정법에는 문제가 되지만 자식이 워낙 도움이 필요했으면 외국에 사는 자식이 필요했으면 부모의 마음에 자기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문제는 뭐냐 하면 목사님과 사모님이 평소 공식 석상에서 늘 하는 말씀이 우리는 아무것도 없다. 교회에 다 바쳤다. 이제는 우리는 거지다. 그것을 수없이 반복해 오셨는데 그 때에 10여년 전에 1억 6천만 원인가 그 정도는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작은 돈이 아니지만 그 때는 더더욱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는 거기에서 배신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그 외화 밀반출, 불법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래서 자신들은 깊이 존경하고 저 목사님 연로하신 목사님 그 내외분의 노후는 자신들이 책임져야 된다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자신들이 아니면 오고갈 데가 없다라고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니더라 이거죠. 그것 보십시오. 목회자의 목회자는 자기 것이 없습니다. 생명의 주님의, 주님의 것이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도 주님의 것입니다. 노후를 염려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데 뭐 필요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이번에도 그래서 교회가 좀 전체적으로 생각을 많이 바꿨습니다. 그래서 퇴직금을 일단 더 이상 적립하는 것을 중지하고 보험을 큰 것을 하나씩 들으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이 살아가다가 어려움을 당하거나 그러면 목회자가 어려움을 당하면, 사실 목회자 가정들은 참람합니다. 제가 죽어 보십시오. 더군다나 담임 목사는 좀 낫습니다. 그러나 부목사로나 전도사로나 있다가 죽으면 그 가정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퇴직금을 조금 실수액이 조금 적은 한이 있어도 보험을 걸자. 그래서 퇴직금 불입한 것 만큼을 그 이상을 보험에다가 집어넣고 장기간 적립을 해서 적립금도 약간 타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최소한 1억이상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어서 남아있는 가족들의 어려운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자. 이것은 인간적인 생각이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제도적으로 실제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그러한 일에 있어서 너무 과도하게 염려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목회의 소명을 받고 이길로 들어설 때에는 사실은 가족들도 목회자의 가족들로 함께 calling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목회자는 자기 가족들에게 일깨우고 가르치는 것, 부분적으로나마 그 calling에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의 가정을 돌아보아야 할 목회자의 직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맡기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거죠. 그래서 나는 재산 없고 크게 모아놓은 재물이 없어도 일평생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그리고 성도들 안에서 그 성도들을 섬기고 자신의 노후와 모든 생애를 주님 앞에 의탁하면서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면류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헌신은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무엇을 모으고 모으지 않고 그러한 것이 아니죠. 교회가 커지고 형편이 나아지면 생활비도 좀더 넉넉해질 것이고, 사택도 좀 넓어 질 것이고 뭐 모든 면이 조금씩 더 나아지겠죠. 그리고 또한 나아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것은 궁극적으로 인생을 다 살고 난 후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뭘 남겼다. 뭘 아무것도 없이 살았다. 그러한 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 헌신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이 영혼을 위해서 허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파하고 더많이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은 것을 인해서 아파하고 이러면서 영혼들을 섬기면서 영혼에게 손톱만한 유익을 끼칠 수 있다면 내가 더많은 것이라도 희생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사역에 서 있는 사역자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 영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참 그 분 참 존경하는데 그 분이 이제 벌써 80 가까이 되셨겠죠. 그 분이 말씀을 하시기를 자기 사역자들에게 그렇게 상기 시킨대요. 자, 올해도 생활비가 다 책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하고 의논해서 생활비를 책정하지는 않았지만 첫 생활비를 받으면서 마음속으로 아, 어쩌면 이렇게 생활비가 안 올랐을까. 나를 왜 이렇게 조금 줄까 하는 마음 때문에 섭섭한 마음이 들고 넉넉하게 사례비를 받는 다른 교역자와 비교 의식이 생긴다면 그 해에는 사역의 축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정말 어려움 속에서 가난과도 분투하면서 살아온 동안에 터득한 진리를 그 분이 체험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교회의 정책에 순응하고 말 잘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이 피죽도 못 먹으면서 7년간을 굼주리면서 목회를 해 보면서 교회를 일구어놓으신 일생을 통해서 사역자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지 못할 때 그 사역에 축복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우회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점에서 많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통계적으로 보면, 경험적으로 보면 자기 사역이 기름지고 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시는 그 영혼의 축복을 누리는 사역자들은 이 계산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역의 축복이 없고 마음이 가려진 사람들은 완전 자신의 사역이 잘 되가지 않는 것을 교회에 후원, 주위의 사람들의 무관심, 등등으로 자꾸 외연을 확대시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모든 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목회사역이 안 되는 것은 다 제 책임입니다라고 하는 자기 스스로 그 짐을 지는 것이에요. 그러한 자세를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저는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역이 안 되어 나갈 때, 목사님, 뭐도 우리 교회에 없고요. 뭐도 안 되고요. 뭐도 배려가 없고요. 힘이 들고요. 그래서 되는 것이 없고요 이야기 하면서 그렇게 마음이 공허할 수 없습니다. 공허할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 너희들 이야기를 듣고보니까 이렇게 교인이 삼지사방에 흩어져 있는데 차도 없고 교구 교역자들은 차라도 있어서 심방을 다니는데 차도 없고, 하루종일 다녀봐야 2-3집 밖에 못 간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그래서 2-3집을 다니느냐. 그래서 하루에 2-3집을 다녔냐. 정말 그렇게 불편한 것이 뼈저리게 다가올 정도로 마을버스타고 전철타고 시내버스 갈아타고 급하면 사례비 털어서 택시를 타고 아니면 바람부는 긴 길을 걸어서 최선을 다해서 했는데, 하루에 2-3집 밖에 못해서 한주에 한 20집 밖에 심방을 못했는데, 차가 있었으면 50-60집 했을텐데. 그렇게 걸어다니려고 한 20집 밖에 심방을 못한 그것을 해 봤냐 이거예요. 해 봤냐. 그날 새벽 1시 36분까지 이야기 해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하나님은 지금도 전심으로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감동받으시는 분이시다. 감동받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렇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가운데 심방하면서 하나님 앞에 차를 구하면 차를 안 주시겠냐. 나는 주신다고 본다. 나 아는 전도사 한 사람에게 어느 교회의 구역을 하나 맡겨주었어요. 물론 그 구역이 넉넉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죠.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그 구역을 섬기는지 구역 식구들이 그 전도사님처럼 자기를 남자 전도사인데, 그렇게 열심히 심방하고 눈물로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전도사님 처음이야. 구역예배만 하면 은혜 받아. 그 교인들이 모아서 그 당시 엑셀을 사주셨습니다. 구역 식구들이 30만원씩 모아서. 교회에서는 전도사를 차를 안 주게 되어 있는데 구역 식구들이 사주고 기름값 까지 매달 대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공급하십니다. 지금이야 좋은 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만 1992년도 쯤에는 그랜저 타고 다니는, 각진 그랜저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부와 사치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나 어느 교수 한 사람이 내가 직접 잘 알지는 못해요. 그 차를 타고 학교에 직접 나타났습니다. 저 사람 강사로 다니면서 단독 목회를 하는 것도 아닌 것같은데, 교수인 나는 르망 타고 다니는 것도 버거운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것을 했나 그랬더니 옆에 있는 교직원이 얘기를 해 주는 거야. 목사님, 저 차 한번 봐보세요. 저는 속으로만 생각했는데, 저것좀 보십시오. 아무개 강사 차입니다. 그러게요. 참 좋네요. 2.4 그랜저였습니다. 헌신 예배 설교하러 갔는데 그 설교에 은혜받은 청년들이 이렇게 설교를 잘 하시고 이렇게 헌신적으로 집회 다니시는 목사님이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손해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청년들이 거두어서 그랜저를 사주었답니다. 거짓말 같은 일이죠. 내가 그랬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다. 그렇게 사준 것을 그대로 타고 다닌 것이 잘했냐, 못했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하나님은 그러시는 분이십니다. 이게 우리의 사역의 놀라운 역사 아닙니까. 하나님이 비행기를 사달라고 안 주시겠냐. 달나라 심방을 간다는데 로켓을 안 사주겠냐.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정말 괴로우나 즐거우나 영혼들을 섬기고 싶어하고 그 영혼과 함께 울고 싶어하고 웃고 싶어하고 그 영혼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이 고통받는다고 할 때 찾아가고 싶어하고 그 영혼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지 못해서 아파하는 그러한 성도들이 그러한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이 뭘 아끼시겠냐. 뭘 아까시겠냐.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자기를 다 드리면서 헌신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당당해요. 당당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신만만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다 보여 드려요. 감출게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구할 때 담대함이 있어요. 그것이 우리들의 사역의 원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론 끊임없이 교회는 고민하면서 여건을 좋게 하려고 애를 써야 되겠죠. 괜히 쓸데없이 마음 고생할 필요가 없죠. 그러나 근본적인 정신에 있어서 나는 그런 것들을 묻는 거예요. 그래서 헌신적인 그런 사역자들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다섯 번째는 이제 동역자간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이제 한 사람의 그 인품은, 인품은 자기 동료들에게 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지체들 보면 나이든 어른에게는 참 잘 보이는데 또 어떤 지체들은 후배들에게는 참 잘 보이는데 동료들에게 평가가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우리들이 항상 소신껏 사역하면 그만큼 아집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자기 밖에 모르기 쉽고 자기중심적이기 쉽고 자기 아집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 때 이런 것들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뭐냐 하면 동지애입니다. 동지애. 그래서 깊이 서로 사랑하고 그리고 동료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일종의 교만입니다. 사람의 사역이 모두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심방을 잘하는가 하면, 저 사람은 성경을 잘 가르치고 저 사람은 성경을 잘 가르치는가 하면 사귀적인 성품이 뛰어나서 인화력이 있고 저 사람은 인화력이 있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칼 같이 해부해 내는 그러한 말하자면 예리함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떠한 사람에게는 있고, 어떠한 사람에게는 없으며 또 없는 사람들에게는 있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항상 서로 빌려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빌려서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부족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심 세우기 경쟁이 아니라 하나님 더 잘 섬기기 경쟁입니다. 그게 사역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렇게 하면서 동료들로부터 배워나가는 거죠. 여러분들은 그런 것 이해하실지 모릅니다만, 젊은 사역자들은 항상 나이드신 분들이 경계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판에 예민하시기 때문이죠. 저도 가끔 설교를 하러 가면 그 담임 목사님이 저를 좋아해서 초청한 교회와 교인들이 나를 부르려고 나를 초청한 교회의 분위기가, 집회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의 경우는 아주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후자의 분위기는 뭔가 껄끄러운 경계가 남아 있습니다. 특히 연세 드신 목사님의 경우에는 설교에 해나가는 모든 과정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듣고 계시겠죠. 제가 잘 압니다. 그 때에 제가 항상 쓰는 방법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목사님 마음을 풀어 들이는 거예요. 그것도 사실 괜히 해 보는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입니다. 나야 이제 목회를 시작한 입장이고 그 분은 그 교회에서 30년을 목회 했다니까 잔뼈가 굵으신 분이죠. 비록 그 교회가 내 눈에 보기에는 본받을만큼 건강해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30여 풍상을 지나오면서 그렇게 교회를 이끌어서 거기 그렇게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인가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이 젊은 사람이 이렇게 와서 힘들게 집회하는데 그냥 돌려보내지 마시고 그 뭐라고 하나좀 가르쳐 줘 보십시오. 그저 두 개 가르쳐 주시기 힘드면 하나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한사코 자기한테 배울게 뭐 있겠느냐고 갑자기 겸손해 지십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말을 열죠. 그래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뜻밖의 이야기들은 아닙니다. 다 있는 이야기죠. 어느 목사님은 말씀도 어눌하신데, 하시는 말씀이 목회자는 그냥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것만 잘 하면 목회는 저절로 성공합니다. 사실은 그 말이 신학적으로 타당합니까. 타당하지 않죠. 그렇지만 그분을 그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거예요. 진짜 뼈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이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 사람의 목회자를 거기에서 30년 동안 하나님 섬기게 만들었던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들을 발견하는 거죠. 필요하는 것 만큼 내 마음에 담아서 나를 위한 귀한 목회의 재료로 사용하시는 것이죠. 이렇게 여러분들이 서로 나누면서 그러면서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작은 일에 있어서도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형제처럼 지내면서 돈독하게 하고 마음이 어려운 것은 언제든지 흉금없이 기도하면서 털어놓고, 털어놓고나면 그것을 잘 받아들여 주고 그래서 손잡고 기도하고 다시 하나님을 마음속에서 회복하면서 살아가야지 우리의 목회 사역에 축복이 있지, 마음을 접고 꼬고 그렇게 하면 인격적으로도 우리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하고 특별히 여러분들의 사역은 단독사역이지만 또 부분적으로는 단독사역이 아니라 목사님들과 같이 하는 사역입니다. 목사님들이 여러분들 보기에 부족한 것이 있고 아주 불일리한 점이 있고 어떠한 면에서는 경험적으로 여러분들이 더 우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항상 겸손하게 목사님을 섬기고 목사님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잘 보필해서 교구 사역 전체를 세운다고 하는 그런 섬김의 정신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목사들이 자존감을 잃지 않고 여러분들과 함께 사역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보람있고 한편으로는 든든한 그런 섬김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깊이 사랑하고 수고하면서 섬기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그러한 아름다운 사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금년에도 하나님이 많은 영혼들을 우리에게 붙여 주셨습니다만, 내년도에는 더 많은 영혼들을 붙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숫자라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붙여주신 숫자는 붙여주신 수여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미미한 숫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아름답고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아름다운 사역의 금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