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구역장 수련회 새벽예배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요 21:1)
녹취자 : 허 혜숙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20장으로 충분히 끝났습니다. 21장을 덧붙인 것은 이 실패한 제자 베드로를 어떻게 예수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셨는지를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이 21장이 없다면 교회는 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은 20장은 요한복음의 끝일 뿐 아니라 배열 상 모든 복음서의 끝인데 거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고난 받으실 때 버리고 도망 간 제자로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21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베드로에게 지도력을 회복해 주시고 친히 예수그리스도께서 양떼를 다시 맡겨주신 사도로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이 모든 부조화의 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이 없었더라면 베드로는 철저히 실패하고, 한 번의 실패로 영영 버림받은 사역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복음서 속에서 사도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이 실패의 사건이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바라보고 존경하기에는 대단한 인물이고 그리고 마땅히 양떼를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그러해야 할 것이다’ 라는 마음을 주지만 늘 넘어지고 실패하는 우리와는 접촉점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장 중요한 시기에 버린 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예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던 머리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했던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다시 회복시켜주심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자신이 돌보는 양떼들과 함께 똑 같이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고치고 새롭게 만드셔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시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 번 실패한 사람들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고쳐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 보기에는 견고하게 서 있는 것 같아도 우리 모두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그를 붙들고 있을 때는 강한 자 같으나 시련과 고통이 밀려오고 고난이 올 때에는 그 역시 은혜에서 멀어진 그런 존재들입니다. 오늘 이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모든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과 귀신들을 내어 쫓을 수 있는 권세까지도 주님께로부터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이 실패할 것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도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을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돌이키게 한 것이지만 결국은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이 베드로를 실패하도록 허락하시고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부르셔서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지도자로서 순교하기까지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그를 버렸던 과거를 한 순간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지극히 겸손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우리 주님을 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무명의 여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는 데까지 따라가 그 모든 고난의 현장에 참여하였지만 열 두 명의 제자들은 한결 같이 주님을 배반하거나 무서워서 도망을 침으로 고난의 현장에 있지 못하도록, 모두 실패하도록 주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실패하지 않았으면 깨닫게 하실 수 없었을 아주 중요한 목양의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를 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만났을 때 그것은 정확하게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상황의 재현이었습니다. 고기를 잡은 것도 그랬고, 실패한 것도 그렇고 그 때에 예수님이 오신 것도 그랬고, 그리고 명령에 따라서 그물을 던진 것도 그랬고, 찢어질 듯이 고기를 많이 잡은 것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고기가 많이 잡혔어도 베드로의 마음 한 구석에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린 기억들이 또렷했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불러주시고 대면하여 주신 것은 베드로 한 사람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베드로와 똑같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모든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권능을 주시고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게 하셨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한 교회를 맡기시고 목양의 사명을 주신 것은 요한복음 21장이 처음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아갈 때 성령의 능력을 주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때 병을 고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목양의 사역으로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는 아무것도 추가적으로 주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마치 세 번 실패한 베드로의 예수님을 부인한 사건을 하나씩 지우시기라도 하듯이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신 ‘베드로’라는 훌륭한 이름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맨 처음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를 부르셨던 가장 흔한 이름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양떼들 앞에서는 목사이고 또 목자이고 영혼을 맡은 사람들이고 구역장이고 순장입니다. 장로일수도 있고 권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일 뿐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저 주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죄인을 주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에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지체일 뿐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내가 목사인 것도,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 주셨던 모든 직분들을 내려놓고 맨 처음 구원받기 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베드로가 요한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또 이 세상의 자식으로 하나님 없이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아들이 베드로가 된 것은 그 사이에 아무런 요한의 아들의 뛰어난 장점이 없고 오직 그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만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이기 때문에, 구역장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주님 없이 살았던 우리 자신의 옛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 한 분 앞에 나아가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예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의 우리와 오늘 주님을 아는 자가 된 지금의 나 사이에 그 은혜로운 모든 차이점들의 비밀이 그리스도 한 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아니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이 유일무이한 영혼을 베드로에게 맡기실 때의 질문이었고 이것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은 이것이 바로 영혼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조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양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치를 이루지 아니하면 계속할 수 없는 사역이고 그런 사람들이 영혼을 돌 볼 때 반드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생각과 뜻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일치하는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습니다. 또 자연적인 것이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일치가 그 자체로서 훌륭하게 쓰일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일치하는 것이 있다면 살아온 삶의 배경이나 환경,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사는 각각 다르지만 우리 모두 이곳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 그리고 그분께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것, 그것 하나만 같고 나머지는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많은 영혼들을 베드로에게 맡기시면서, 좋은 대학을 나왔느냐? 네가 나를 위해 이러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물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루살렘교회에 충성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신 것은 오직 하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가지였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어떤 일을 16년 길게 보면 제가 83년도부터 전도사 생활을 했으니까 26년째인데 그렇게 하면 ‘이제 이 일은 내 일이다, 참 자연스럽다’ 그럴만한데 아침마다 눈을 뜨면 나는 이 일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쁨도 있고 보람도 있지만 한 번도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구나, 참 딱 맞다. 이 일이 아니면 내가 뭘하랴?’ 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듣는데 그렇게 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 속에서 ‘목회는 아직도 당하기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이고 설교는 이국의 언어입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내 마음 안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만큼만 사랑을 받습니다. 자기뱃속으로 낳은 어미도 자기 새끼를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는데 우리가 피가 섞였습니까? 살이 섞였습니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 원하지 않는 길을 가고 당하기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를 해야합니까?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하게끔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하나님 앞에서 깊이 기도하고 다시 의미를 갖게 되면 주님의 사랑이 넘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양떼와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세 번이나 똑 같이 ‘제가 주님을 사랑 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께 세 번이나 사랑한다고 그렇게 목숨을 걸듯이 고백할 수 있었던 네가 왜 불과 얼마 전에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고 도망을 갔느냐? 가룟유다는 은 30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배반했고, 너는 네 목숨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두 사람의 차이가 50보 백보이지 무슨 차이가 있느냐 질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도 진실이었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 한 것도 진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이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시는 가장 탁월한 하나님의 방법이고, 이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영혼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은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사람들을 용서하심으로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셔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을 자기 가슴에 새기고 그 마음으로 영혼을 돌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풀밭 위를 걸어 다니는 양은 언제나 양일 따름입니다. 배가 고파도 그저 양이고, 어두움을 걸어도 그저 양이고, 동료와 함께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려도 그저 양입니다. 그러나 양이라고 불리 우는 교회의 양떼는 언제나 양이 아닙니다. 진리의 빛이 있고 사랑의 감화가 있는 동안에는 양입니다. 그렇게 유순할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온 마음을 다하여 진리를 가르쳐주면 그 진리의 빛을 받고, 성령의 작용으로 마음의 감화를 경험하고, 그리고 영혼을 돌보는 목자들의 마음이 자신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든지 그와 함께 주님을 섬기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특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빛이 비취지 않은 영혼의 어두움이 드리우기만 하면 그는 그저 힘없는 양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맹수로 돌변합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통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배역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구역장이나 순장을 잘 해본 사람들은 목회자를 가까이에서 잘 돕습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구역장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로 교회 직분자로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섬김을 통해서 어떻게 영혼들을 돌보는지를 알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모자라는 인간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떼는 풀 밭 위의 양은 언제나 양이지만 비유적으로 양으로 지시되는 교인들은, 영혼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절대로 양이 아닙니다. 늑대로 돌변합니다. 무섭게 돌변합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그 양이 다른 양을 잡아먹고 그 잡아먹은 그 양이 또 다른 양을 해치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다면 참 좋은데 그런 일은 세상 끝 날까지 교회에서 언제나 일어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외국에서 목회를 했는데 어느 날 교인 중의 한 사람이, 그것도 한때는 자기 설교에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목사님,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뭡니까?’ ‘당신이 우리 교회의 목사가 되면 안 되는 이유’라고 하면서 서른 한가지를 A4용지에 적어 와서 자기 앞에서 낭독을 하더랍니다. 눈을 들어서 교회를 바라보면 정말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일은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 세상에 교회를 순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알곡과 가라지를 함께 두셨고 양떼인 유순한 당신의 성도들과 맹수와 같은 염소들을 하나님이 아울러 섞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지만 그 고통 때문에 영혼을 돌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우리에게는 그 목양의 질서에 순종하지 않은 사람을 결박하여 지하실에 가두거나 목회만 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무기는 오직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움직이고 붙잡히는 사람이 아니면 치리할 수 있지만 그 치리가 완전한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섭리 속에서 영혼을 돌보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제 강의가 끝나고 산에 올라가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16년 동안 나의 목회에 깊은 고통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은 열린교회에서 주님을 생애적으로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뒤에 앉았다가 돌아간 사람들 중에 아무도 교회에 상처를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무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의 빛이, 은혜의 열기가, 교회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나면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자기 같은 죄인도 용서해주시는 것을 깊이 터득하면서 잃어버린 영혼들, 미끄러진 영혼들에 대한 절실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여러분들이 이전에 잘못했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는 과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베드로가 이 질문을 들었던 시간도 지금과 같은 새벽이었습니다.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을 한 것은 주님이 자기를 다시 받아주신다는 확신이었고 주님이 ‘내 양떼를 너에게 부탁한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주님이 그런 베드로의 믿음이 진실하다고 인쳐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실패한 과거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여러분들이 실패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나를 용서해주셨던 것, 그리고 내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고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아프게 했던 나를 용서해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얼마나 큰 죄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셨고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해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소명으로v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구역장을 1년만 섬긴다. 이것이 무슨 아르바이트입니까 취미생활입니까? 그런 것 없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자기를 드려야 합니다. 하늘 아래 이보다도 더 고귀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스펄전은 자기의 설교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제왕의 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의 임금이 되라고 한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용서하심으로 사랑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에게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고난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으며 영혼을 위해 자기를 바칠 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잠잠히 침묵하며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십시오. 고난이 오고 시련이 많이 와도 양떼를 향한 원망이나 미움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지 마십시오. 양떼는 사랑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은 아닙니다. 마음에 양떼를 향한 원망이나 미움을 품고 있으면 양떼의 영혼이 망가질 뿐만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여러분들의 마음도 망가지고 부서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목양의 길에게 망가진 영혼이 마지막 순간까지 회복되지 못한 체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영혼을 돌보는 이 사역을 우울하고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양떼들을 위해 당신의 마음을 품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아무것에서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떼들은 우리들을 실망시키고 우리들은 양떼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도 가슴 아픈 순간에조차도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래서 때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목양의 시기에 영혼을 돌보고 집에 돌아와서는 가슴을 찢어야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오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영혼을 돌보면서 깊은 고통을 느낄 때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밤이 깊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아주 선명하게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안다. 애들아, 너희들이 얼마나 아픈지 내가 안다.’ 이것이 목양의 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혼을 섬기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알 수 없었을 은혜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형통하고 즐거울 동안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신비한 세계, 인간 갈피갈피에 있는 그런 신비한 비밀들을 깨닫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좋은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때도 있지만, 영혼을 돌보는 동안에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것을 주십니다. 지금은 양떼들이 우리의 섬김에 불만족하고 고통을 주어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죽고 나면 많은 양떼들은 저와 여러분들을 그리워할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사모해야합니다. 잠시 지나는 일생입니다.
한 교회에서 주님을 믿고 한 10년 지냈다면 세 번만 방황하면 인생을 접어야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너무 소중한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죠. 그래서 마음을 다해서 목양이 잘 안되고 영혼들이 미끄러지고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을 하는데도 쓰라린 고통으로 돌아올 때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네 목회지를 돌아보라는 뜻이 아니라 ‘얘야 네가 나의 은혜를 받고 영혼을 돌보지만 사실은 소망은 네 목양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목양지를 붙들고 있는 나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란다. 나를 보아라, 나를 보거라, 모두 두고 가야 할 사람들이고 나만이 너에게 유일한 사람이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금방 갑니다. 제가 30대에 팔팔한 청춘으로 교회를 세웠는데 벌써 이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금방 갑니다. 괴로워도 조금 더 견딥시다. 어려워도 주님이 내게 베푸신 그 큰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이깁시다.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만 하겠습니까? 원래 믿음의 길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서 잘 참고 영혼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사랑할 의무 밖에는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들이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면 여러분들을 향한 수많은 모욕과 더러운 비난이 있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양떼가 추호도 밉지 않습니다. 그저 가엾고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이 땅에 호흡을 허락하시는 날 동안에 산을 옮길만한 믿음, 나를 불사르게 내어줄 사랑이 없어도 주님의 마음을 영혼들에게 흘려보내는 진실한 통로만 될 수 있다면 이렇게 숨 쉬고 살아서 티끌 같은 섬김으로 주님을 위해 일하는 그것이 우리의 섬김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작은 것을 사용하셔서 크게 쓰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정말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바지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영혼을 돌보는 여러분들에게 목자로서 부탁하는 것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견뎌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의 영혼 먼저 돌보지 말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먼저 돌보아야 합니다. 그 은혜 아래 굳게 붙들려야만 이 길을 갈 수 있다고 믿으며 매일매일 주님을 더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