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신학생 세미나
2001년 12월 14~15일
1.모세를 통해 배우는 LeadershipⅠ(출11:3)...............................2
2.모세를 통해 배우는 LeadershipⅡ(출33:11)............................52
1.모세를 통해 배우는 LeadershipⅠ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국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심히 크게 뵈었더라”(출11:3)
①
목회자로써 일생을 살기 위한 목회자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목회자로써 일생을 살기 위해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으면 다른 것은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성품에 관련된 면에 있어서 인자하면서도 단호해서 신앙적인 감화력을 사람에게 끼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고 그것은 정말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연단을 통해서 형성되어 가는 가치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시대를 움직일 걸출한 인물이 되길 원하지만 실제 결과를 보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모세나, 바울 혹은 이사야와 같이 한 시대를 움직이는 그런 놀라운 인물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또 되지 말라는 법도 물론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다 시대를 움직이면 시대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몇 사람만 움직이면 되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다보면 이제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고 해서 아주 쓸모 없는 사람이 되기 쉬운 그런 결과를 빚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학문이나 신앙이나 일반적인 데서 특별한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오늘날 막되먹은 삶을 살다가 기도원에서 주님을 만나고 신학의 길을 가는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신뢰하지 않습니다. 한 20% 정도는 신뢰하지만 80% 정도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학의 길, 목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신자로써의 삶을 분투하면서 살다가 그 위에 플러스 알파의 경험이 있어서 ‘내가 정말 이렇게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그 고통 하는 삶을 볼 수 가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인가 빛을 던져주지 않으면 정말 나는 견딜 수가 없다.’ 이런 것이 목회자가 되는 소명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만히 보면 좋은 신자로써의 삶을 살려고 애를 쓰다가 그런 특별한 부르심이 오는 것이지 막나가는 삶을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 격렬한 체험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주님이 목회에 소명을 주셨다라고 하는 그런 식의 막대기와 같은 부르심 같은 것들은 신뢰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항상 저의 설교를 듣거나 강의를 듣거나 하면서 목회자가 부름 받은 사람들의 영적인 준비, 우리들이 바라보아야 할 본보기가 이 시대에 자잘한 난쟁이와 같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거목과 같이 우뚝 선 신앙의 위인들, 영적인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자로써 준비되어서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훌륭하고 그런 것들을 바라보지 않고는 우리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영적으로 발전된 진보된 사람들이 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굉장히 훌륭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에 앞서서 여러분들이 일반적인 목회자로써의 자질이나 자격 같은 것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면서 그런 것들만을 바라보면서 추구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그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말씀사역을 시작한 이후로 정말 수많은 신학생들을 만났고, 제 강의를 듣고 목사가 된 사람만도 수 천명이 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대하면서 저는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습니다. 정말 뒤집어 진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밑바닥까지 뒤집어져서 소명을 새롭게 하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두 귀한 경험이고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면 목회자로써 모든 것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회선상에 들어서서 제가 요새 8년을 지내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는 우리들이 꿈꾸지 못하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목회를 상당히 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내 전 존재를 들여서 목양을 해본 경험이 있고 거기에서 목회의 굵은 선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목회에 대해서 거의 알고 있고, 내게 필요한 것은 자잘한 세부사항들을 잘다듬기만하면 내 목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그런 나의 생각은 굉장히 커다란 교만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열린 교회를 목회 하는 이 8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매일 매일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되고, 이 목회자로서의 길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 길인가, 그리고 그것이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그 길과 얼마나 생소하고 다른 길인가 하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새 목회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겸비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목회의 길, 그 속에서 목회자가 목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목회의 길속에서 자기의 영혼과 목회의 상관관계까지 확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정말 요즘처럼 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결핍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적이 별로 없을 정도로 이 목회라는 상황은 정말 새로운 것을 느낍니다.
물론 목회를 하면서 그저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그렇게 흐름을 따라서 자신도 그 물 속에 떠 밀려가는 목회라고 할 것 같으면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다음에 신학의 길을 마치고, 목회의 길을 걸어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둘 중의 하나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며 목회를 하든지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교회를 세우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렇죠?
일단 여러분들이 만약에 기존에 만들어진 교회에 가서 그 교회를 핸드링하면서 섬길 때 그때 여러분들은 그 교회를 여러분들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서 ‘이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가야할 길이고, 신자들은 이러한 모습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분명한 본보기를 가지고 목회하지 않는다면 그 목회자는 정말 말만 목회자일분이지 교회라고 하는 제도 속에서 그저 수종을 드는 비즈니스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안에 흐르고 있는 비 신앙적인 물결, 타성,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성품의 무지, 그런 것에서 비롯된 야만적이고 담대한 삶, 이런 것과 맞서서 싸워 나가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골방에서 기도하고 설교단에 올라가서 외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갑니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 많이 하면 여러분들이 변합니까? 주일날 설교를 은혜롭게 듣고 나면 여러분들이 변하냐는 것입니다. 변하죠! 변하는데, 문제는 그것만을 가지고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제가 아는 몇몇 분들은 설교에 있어서 탁월한 은사를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설교 자체가 교회목회에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몇몇 분들은 설교가 탁월해서 교인들에게 그 설교가 어쨌든 영향과 감화를 줍니다. 그러면 교회가 잘 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목회가 건강하지 않은 교회들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중요하다라고 하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상고해 보겠지만) 그러나 ‘목회는 그것 하나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많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냐? 오늘 여기에 출애굽기 11장에서 모세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열 개의 재앙도 다 지나가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따리를 싸가지고 광야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애굽사람들이 볼 때에 굉장히 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모세가 80세에 나이에 바로 앞에 나타났죠. 바로는 83세였고, 그렇게 바로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짐승들을 돌보는 목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불과 짧은 기간동안에 애굽의 바로와 바로의 신하 그리고 그 백성들이 모두 보기에 미디안에서 온 촌스러운 노인네 하나가 자기들이 보기에 어마어마하게 보일 수 있었던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겁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겁나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악인들이 볼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굉장히 겁나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고, 주의 신이 충만한 사람, 하나님이 손에 붙들고 계신 사람, 그래서 지팡이를 들고 손을 펼치면 애굽 천지에 지금이라도 당장 재앙을 내릴 수 있는 사람, 바로와 맏아들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을 정도로, 애굽 사람의 모든 신앙의 얼개를 다 깨드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자연의 세계조차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이 사람을 굉장히 큰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과연 그것 하나가 이 사람을 애굽 사람들이 볼 때에 크고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는가? 더욱이 이 모세가 이후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출애굽 하는 것을, 오늘날 목회자로써 어떻게 생각하면 되냐면 쥐뿔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거의 없으면서 교만은 하늘을 찌들듯하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역사와 전통의 빛나는 교회생활속에서 완고함이 하늘을 찌를 듯한 아주 질이 나쁜 교인들이 모인 교회 거기에 부임한 담임목사라 그렇게 생각하면 되거든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아니 이럴 정도의 위대한 능력을 베풀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받아야 할 정도로 착한 성자입니다. 제가 무슨 한강을 피로 만들었습니까? 아니면 태양의 빛을 가리게 만들었습니까? 우박을 내리게 만들었습니까? 저하고 함께 사역을 하면서 기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정말 그런 것하고는 거리고 먼 사역을 제가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이 정도로 저를 선대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못되먹은 교인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40십년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목회를 하는데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이 모세를 크고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세에 가려서 예수님을 보지 못할 정도로 모세를 어마어마한 인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쨌든 광야에서 40년을 사는 동안에 마지막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세를 보면서 깊이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던 그 권위의 소재가 바로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이 큰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완악한 이스라엘, 질이 나쁜 이스라엘 사람들도 무릎을 꿇고 모세의 사람됨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을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당연히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큰 사람으로 여겼던 것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모세를 향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은 단지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동안이나 모세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주님이 만나주신 사람이 한 둘이겠습니까? 강력하게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냐고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렇다? 아니다? - ‘그렇지 않다.’ 목사가 된 우리들보다도 훨씬 강력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진 평신도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 일 것입니다.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워서 지도자로 크게 보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강력하게 만나 주신 그것이 강조되어야 할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 하나가 지도자의 필요한 조건들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봅시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크게 보였는데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무엇이 이 모세를 불세출의 지도자가 되도록 만들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 할 때에 한 두 가지를 가지고 이야기하기엔 힘들 정도로 복합적인 요인들이 많이 작용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Leadership에 관한 논의가 굉장히 활발하다라고 하는 사실은 이미 여러분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작년인가 제작년에 Time지에 누가 Cover인물로 나왔냐하면 바로 모세가 나왔습니다. 한 이년 정도 되었나봅니다. 그 ‘이집트 왕자’가 나왔을 때. 클린턴 대통령이 재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어느 정도 미국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클린턴이 대통령을 할 때 미국사람들은 정신적으로 굉장한 공허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는 의례로 호황을 맞았습니다. 제가 미국을 몇 번 갔는데 정말 길거리에 돈이 철철 넘치는 것이 보일 정도로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냥 대통령 하게 내버려둬라.’ 그것이었지만 내심은 그 사람을 전혀 국민의 지도자로 인정을 안 하는 것이 미국사람들의 심성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모세와 같은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영화를 보면 미국사람들의 심리를 잘 꿰뚫을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나오는 영화와는 다르게 미국에서 나오는 영화는 철저하게 누구에게 의존합니까? 주연에게 의존합니다. 한사람의 전설적인 인물이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이 탄 전용기 납치되어서 끌려가는데, Air Force One 이야기죠. 대통령이 옛날에 특공 대원이었기 때문에 혼자서 작은 칼 한 자루 들고 납치된 비행기를 다시 빼앗는다 라는 식의 이야기같은 것들이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대통령이 특공 대원이었으면 옛날에 특공 대원이었지 요즘도 대원입니까?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 속에 어떤 한 사람이 등장을 해서 영웅적인 삶을 살아서 감동을 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나온 진주만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에서 두 사람을 등장을 시켰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벤 에플렉 한 사람이 주인공이거든요.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늘 그 사람을 따라 다니는 친구이고 그 사람에게 배운 사람이니까 벤 에플렉 한사람을 내세워서 그 진주만의 사건 속에서 미국 사람들이 그리는 전사적 지도자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영화를 보면 굉장히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주님 오시는 그때까지 의원내각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 사람들의 심정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나라도 그렇게 발전하는 모델을 택한다고 해서 미국의 모델을 택했는데 그래도 그 나라에서는 가끔 가다가라도 지도자다운 사람이 나오니까 무엇인가 이야기가 되는데, 우리는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도 별로 없으면서 그렇게 하니까 나라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이죠.
조금 곁가지로 나갔지만 클린컨 때 당시 미국에서 일어난 것이 모세 신드롬이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이 시대에 나타나서 터미네이터처럼 평정하고 종을 쳐줄 그런 지도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견줄 사람이 없는 불세출의 지도자였습니다. 모세가 그런 지도자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존경과 신망을 받으면서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면서 죽어가기까지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강력하게 만난 영적 체험만이 그 사람을 그 사람되게 만들었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편협한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어떤 것이 이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우선 첫째로 이 사람을 이런 지도자로 만들었던 것은 학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순서는 영향을 끼친 순서는 아닙니다. 우선 이 사람이 40년동안 애굽에서 학문을 철저하게 공부하였습니다. 당시 애굽은 우리시대의 세상에서 비교해보자면 미국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 모세가 자란 이 왕궁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워싱턴 같은 도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는 근동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 멀리는 거기에서 저기 인도나 그쪽지방에 이르기까지 외교적인 관계나 거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면 이집트는 하이에로 그라피즉 상형문자를 사용합니다. 말하자면 상형문자인데 이것은 햄족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이쪽 위로 블레셋을 지나서 팔레스타인으로 올라오면 셈족언어입니다. 설형문자입니다. 전혀 언어의 체계가 다릅니다. 그런데도 하이에로 그라피를 쓰는 이 애굽에서 설형문자 토판들이 굉장히 많이 발견이 됩니다. 팔레스타인지역에서 상형문자 토판은 별로 발견이 안되는데 설형문자 토판이 이쪽에서 굉장히 많이 발견됩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미 그 외교의 필요성에 있어서 다양한 언어들이 그 시대에 사용되고 있었고 통역이나 혹은 외국어를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커리큘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옛날에 우리 나라가 당나라 같은 곳으로 유학을 보내서 중국어를 습득한 사람들을 대려다가 역관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그런 곳이 있었듯이 충분히 그런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자적인 교류를 타고 학문적인 교류들도 많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나에르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허 문명 그리고 인도문명 이 네 가지는 4대문명의 발상지입니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 문명과 이집트지역에 나일강을 주변으로 하는 델타주의 이 문명이 서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문명과 문명이 교류를 할 때 누가 고달파지냐면 학생들이 고달파집니다. 배워야할 것이 굉장히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조선시대 때 배운 많은 학문들은 중국과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서생들이 그렇게 고달팠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나라가 중국과 교류하면서 이미 문명을 받아들이고 하던 삼국 시대정도때 일본은 도끼들고 토끼를 잡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서생들은 고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문명이 교류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살아가던 시대이니까 배워야 할 것이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여러 번에 걸쳐서 ‘모세가 애굽의 모든 학문과 그 모든 술수를 통달했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결국 모세가 받은 이 양대 문명의 교류 속에서 터득해야 했던 학문의 폭이 얼마나 넓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서 전망을 갖게 해준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먹어봐야 맛을 압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경험이 최선의 지식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이 경험이 우리에게 지식을 안겨주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필요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가 애굽에서 그냥 열심히 학문을 익히고 배웠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리라고 마음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셔서 그를 미디안으로 도망가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을 때에는 애굽을 떠나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면서 가나안 땅으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것을 인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들이 동원하게 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선 함무라비 법전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율법의 법전은 정교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썼지만 영감교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대뇌할동을 정지한 다음에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을 썼고,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모세가 그 법전을 여기에 베껴 썼느냐 안배께 썼느냐는 우리들이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함무라비 법전에 대해서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 언어가 이미 외교언어였고, 그런 점에 있어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훨씬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는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중국의 사서삼경을 모르고 천자문을 가르쳤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법률지식을 시작으로 해서 법률, 군사, 정치, 행정, 조직, 심지어 재판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지식들이 동원되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마지막에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누는 모든 방법까지 전부가 다 모세 한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참모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은 진짜로 참모였지 중요한 줄거리들은 모두 다 모세에게서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사람을 하나님이 40년의 공백기를 두고 40년후에 지도자로 쓰시기 위해서 제일 먼저 시작하신 일이 무엇이냐 하면 그를 기어다니던 어린아이시절부터 공부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살려두셔서 애굽의 왕궁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애굽의 왕국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위험이 있었겠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애굽의 왕궁에서 자라면 첫째로 애굽주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애굽에서의 그 왕궁 속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게 될 때에 무엇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백성들의 그 현실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리고 애굽의 왕궁은 당시에 다신교 이교의 신앙의 본산지 였습니다. 그런 것에 전염될 수 있는 우려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모든 우려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런 위험들을 적절하게 막으시면서까지라도 그를 광야로 홀로 보내시지 않으시고, 애굽의 왕궁으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교육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직까지도 바보같이 자신이 교육을 받는 것과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것, 이 두 개가 충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그런 환상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발상자체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인간이 항상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면서 사람의 힘과 능으로는 안되고 하나님의 신으로만 일이 가능하다라고 하면서 신령한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의 부으심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기만이라는 것입니다.
대게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안하고 게으른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보면 여러분의 친구들 중에 이 사람은 계속하고 성장하고 있어서 지도자 감으로써 계속해서 다듬어져 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년, 사년이 지났는데도 그 모습이 그 모습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두 삶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다른 한사람에게는 은혜가 없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학문입니다. 바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 모세가 터득했던 학문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경영학과에 가서 경영을 배운다든지 아니면 법학과에 가서 법을 배운다든지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광범위한 학문들을 공부했는데 결국은 그 모든 학문이 Practical한 것으로 이 모세의 삶에서 집약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 시대의 수학과 같은 신비가 아직까지도 안 풀리고 있지 않습니까? 피라미드의 신비가 아직까지도 안 풀리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뿐만 아니라 토목, 건축, 그 다음에 운하를 만드는 기술, 그 다음에 시신을 처리하는 기술이라든지 육각면체의 비밀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아직까지도 해결이 안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 당시 학문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학문에는 모든 학문의 기초를 가능케 해주는 기초학문과 그것을 응용하는 응용학문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옛날 사람들은 오히려 지금보다도 기초학문을 훨씬 더 강조하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모세가 교육을 받았다고 할 때 막바로 지도자의 길, 그런 식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그런 처지에 있기야 했겠습니까? 이 사람이 지금 바로 하셉투스 공주라고 여겨지는데 그 하셉투스 공주의 양자로 어디에선가 데리고 왔고 그리고 그는 히브리 사람의 핏줄인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기대를 받았던 사람은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학문을 모두 경험하면서 쉽게 이야기하자면 지도자의 일반적인 자질들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이 삶속에서 경험과 부닥치면서 실제적인 것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경험을 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데 저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학교에서 항상 일등을 하고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느냐 하면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을 보면, 제가 학교를 졸업한지 30년이 거의다 되어 가는데 저희 동창들도 가만히 보면 정말 수제였고, 공부도 억수로 잘하던 친구였는데 지금 보면 중간쯤 하던 친구의 수하에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정말 잘하고 있었는데 기껏 해봐야 학교 교수를 하고 있든지 그리고 아니면 고시를 통해 정보부처에 가서 서기관쯤하고 있던지 물론 이 서기관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이 하는 회사에 가서 이사나 아니면 전무나 이런 것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적순으로 지도자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에는 공부를 하는 이 일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열심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학문을 담보로 해서 미래에 촉망받는 좋은 조건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는 그런 욕망과 목회자가 될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아닙니까? 헬라어 단어를 외우면서 사례금 생각하고 외우는 사람 있습니까? ‘내가 이것 못하면 시골로 밀려나지.’ 하고 히브리어 공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공부하면서 ‘교회 공채할 때 학교성적도 본다지?’ 하면서 기말고사 공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신학교에서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가 될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공부를 하는 이 탐구의 습관이 몸에 배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책을 넘기면 10페이지를 못 넘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책이든 지간에 헤리포터의 마법사의 돌을 제외하고는 10페이지를 못 넘기는 것입니다. 별로 안좋다는 것은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진짜 좋다는 것은 열 페이지를 못 넘깁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로써 중대한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독서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집 충만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각의 폭을 넓히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행히도 외국에 나가서 공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간절히 구했는데 하나님이 막으셨고 두 번째는 상황이 열렸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외국에 나가서 공부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도 많이 있지만 단점을 굳이 한가지를 들라면 바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위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 시각이 편협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책이라도 읽으면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실물로 못 보는 것 녹화라도 해서보고 영화로 못 보는 것 흑백필름으로나 보듯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견해들을 이렇게 보면서 총체적인 시야를 넓히는 습관을 가질 수 있는데 책을 거의 읽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채집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 사람이 잘못하다가 목회라도 잘되는 날에는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높은 사람이 없고, 자기의 생각을 거의 절대적인 쪽으로 끌고 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아니 최근이 아니죠.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무슨 다락방운동을 한다고 해서 한참 붐이 일어난적이 있지 않습니까? 우연히 거기서 나온 테입, 주장점들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체계적으로 연구하면 좋겠지만 성경 연구하는데도 정신이 없는데 잘못된 것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연구를 하겠습니까? 그 사람을 두고 이단이다 아니다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분이 좀 일관성이 없습니다. 맘껏 자기의 견해를 제시해놓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지금까지 얘기한 것 다 무효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이 이단이다 아니다는 판단의 문제는 접어두고 신학적으로 매우 부주의한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는데 뒤에 학문적인 Background가 거의 없어서 하나 하나는 진실인데 그것을 엮는, 꿰는 원리가 자기에게 없으니까 말과 말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그 충돌을 일으키면 그것이 아니다라고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독서를 안하고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일년동안에 몇 권이나 책을 읽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중요한 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고유한 학문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우선적으로 그 일에 헌신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에......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학문을 하는 일에 있어서 재미와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역을 하다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안 사용하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다 사용하시다 쓰실 수가 없으면 이 사람처럼 하면 안 된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사용을 하시니까 모든 사람이 쓰임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쓰임을 받다 보면 너나할것없이 교만하게 되고 자기의 분수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런 곳에서 균형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 나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교육을 잘 못 받았지만 여러분들은 좋은 시대의 교육을 받고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영어만큼은 정말 능숙하게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갑절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결국은 다른 나라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한 출입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학문을 끊임없이 넓혀갈 때 지도자로써의 자질이 갖추어져 가는 것이죠.
작게 두 번째는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지식이 우리의 목회를 하는데 정말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지식이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청년시절에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인데 목사님이 고민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고민 했냐면 기도실이 사다리를 타고 본당을 통해서 지하로 내려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김치광처럼 푹파져서 애기들이 떨어지는 위험도 있고, 기도실로 사람들이 내려가려고 하지를 않고, 내려가려고 해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기도실을 우리가 유용하게 사용하면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유익이 되겠습니까?’ 제가 그때 스물다섯인가 스물넷인가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골목 쪽에서 땅을 파서 벽을 뚫고 문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아이들도 청년들도 교회의 문을 잠가둬도 늘 이 기도실에 드나들며 기도하고 그러질 않겠습니까?’ 그랬더니 목사님이 그 말을 기쁘게 여기셔서 ‘그럼 하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제나 이제나 무엇을 하려고 하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돈이 문제가 됩니다. 인부를 사서 땅을 파고 콘크리트를 깨고 목재 문으로 거기에 끼워서 마무리 공사를 하려고 계산을 해보니까 돈이 적잖게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하면 좋겠는가? 고민을 했는데 교회 집사님과 제가 직접 그 공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믿어지질 않죠? 그래서 벽바깥으로 한 세사람이 마주보고 설 수 있을 정도로 직사각형으로 벽을 따라 땅을 파고 벽을 헐어서 올라오는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하시는 그 집사님이 아주 선수입니다. 그래서 둘이 같이 땅을 파는데 한 3일 걸린 것 같습니다. 문짝은 목공소에서 사다가 끼우고.. 그리고 이 집사님이 바쁘다고 하시며 어딜 가셨는데, 그래서 제가 이 공사를 마무리를 하게되었습니다. 흙손으로 콘크리트를 비벼 가지고 바르면서 계단을 만들면서 올라오는데 이 목사님이 목회만 하시던 분이 당신은 손에 흙하나 묻히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팔짱을 끼시고 앉으셔서 제게 훈수를 두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훈수대로 하니까 기가 막힐 정도로 일이 잘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놀라와서 하다가 말고 ‘아니 목사님! 어떻게 목사님이 이 미장공사하고는 거리가 멀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제가 집사였는데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김집사님! 목사는 모든 것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단 성경이외에 아무 것에도 전문가가 되면 안됩니다’. 왜? 전문가가 되면 그 밑에서 배겨날 사람이 없는 것이죠. 성경만 깊게 파서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데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교인들을 이렇게 다뤄보면 다방면으로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낍니다. 애기를 가진 한 자매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지어다’. 이렇게 말하고 그냥 나올 순 없습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매하나가 남편과 매일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유산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불러서 혼을 내주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미련하고 바보 같으냐! 내 이야기대로 해라. 너는 꼼짝 말고 남편혼자 차 타고 다니라고 하고 너는 꼼짝 말고 집에서 기다려라’. 또 어떤 자매는 아이를 가지면 계속 유산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리를 올려놓고 아홉달동안 기다려야 할 사람도 있다’라고 말해줍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방을 하던지 모든 교인들을 다스릴 때에 인생을 살아가는 지식에 대해서 터득하고 있는 것이 목회자로써 지도자가 되게 하는 굉장히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가정의 일도 얽힐 때가 있고,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일어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목사가 의사는 아니지만 영적인 현상과 결부되어서 사람들이 토하거나 별의 별일이 다 일어 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가서 쩔쩔 매고 있으면 일이 안됩니다. 어느 병원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어느 병원에서 환자가 미친 듯이 뛰어나왔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환자가 하는 말이 간호원이 의사선생하고 들어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맹장수술을 하실 시간입니다. 너무 겁먹지 마세요. 2cm만 자르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자기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의사에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무서워서 도망 나왔다는 것입니다. 뒤에는 아직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는 것 같네요.
그런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든 삶을 살아가면서 이 지도를 받는 사람들은 언제 제일 무섭냐하면 우리들이 바라보고 있는 이 지도자도 이 상황이 처음이라는 인상을 줄 때 지도를 받는 이 사람들은 공포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세상의 어떤 순수학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죠.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지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좀 풍부한 상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생각이 다양한 나머지 성경을 아는 지식도 다양성속에 묻혀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큰 일이 일어나서 교인들이 막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저는 예수님의 그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의 배위에서 예수님을 깨우며 ‘어떻게 좀 해보십시오. 어떻게 잠만 주무십니까?’ 하며 난리를 칠 때 예수님이 일어나시며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영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Be quiet! Be quiet! 잠잠하라! 요동치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막 들릴 때 아무리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큰일 났구나! 이 일을 어찌 한단 말이냐!’ 그러면 안됩니다. 막 엄청난 이야기가 다 들려도 ‘앉아! 다 알아!’ 이렇게 말하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지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다 알고 있다는 이야기는 대처할 방안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교회가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에 목회자의 처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요동치는 그러한 상황가운데 지도자가나 목회자가 ‘내가 다안다.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속에서 저 사람이 과거에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과 물을 통과했다라는 암시를 받을 때 지도를 받는 자들의 마음은 평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냐하면 바로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경험에서 획득된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지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으면 살아가면서 경험을 할 때에 마치 마련된 전기에 불이 들어오는 것처럼 아주 명확한 지식들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풍부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하게 모세가 풍부한 삶의 경험과 지식들을 쌓아오면서 살아온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야말로 정말 곱게 자라서 때묻지 않은 아주 깨끗하고 산딸기 수선화 같은 그런 목회자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때 감화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목회자를 보면서 한없이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도자로써의 강함도 결국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예사롭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생을 살아가는 도리와 하나님의 나라들의 교훈들을 설명하실 때 사용하신 수많은 재료들이 다 어디에서 나왔냐하면 삶의 현장에서 흘러나오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에 대한 아주 풍부한 지식! 아주 쉽게 이야기하자면 인생이라고 하는 삶! 그 자체를 아는 그 풍부한 지식 이것이 목회자로 하여금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요한 한 비결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 자신이 애굽에서 싸울 때는 번쩍하고 내리시는 하나님의 번개와 같은 능력 하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왔을 때는 번쩍 하는 그 능력 하나만 가지고는 안되었습니다. 매일 번쩍 하는 능력으로 식탁을 차려 줄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들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과 그 다음에 신앙에 대한 많은 상담들, 그런 것들을 어떤 신비한 능력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 내가 기도하니 가정의 문제들이 다 끊날찌어다!’이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이 사람은 목회자로써 전형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반대자들에게도 애워 싸이고, 심지어는 자기를 떠받들던 자기의 형제 자매에게도 반역을 받아 궁지에 몰리기도 하고, 모든 삶을 다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속에서도 이 사람이 지도자로써 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었냐 하면 백성들의 살아가는 삶을 아는 지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을 처음 경험하던 그때에 지금은 다 돌아가신 목사님이신데 그 목사님은 제가 그 밑에서 설교를 한 8년정도 들었는데 아무 것도 기억나는 설교가 없습니다. 본인 자신은 자신이 세계적인 설교자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아무튼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어버이날 설교하실 때 눈물 흘리시던 것 외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맏아들로 태어나서 어머님을 잃은 그 설움에 그냥 우시던 그 기억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목사님은 다른 목사님에게는 볼 수 없었던 아주 탁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우리가 보면 거의 쓸데없어 보이는 삶에 대한 풍부한 지식! 그런 것들이 그 분으로 하여금 모든 교인으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하고, 그분의 리더쉽을 잘 따르게 하는 아주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목회 하시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물론 어떤 때는 말도 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아시는 것이 정말 많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식이 현란한 지식은 아닙니다.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는 방법이라든지 부부간의 도리라든지 아니면 남편이 바람필 때 그것을 제어하는 방법이라든지 부인이 말을 안들을 때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이라든지 부부 싸움할 때 그것을 말리는 방법이라든지 아주 풍부한 그런 지식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자 교인이 미친 듯이 교회로 뛰어 온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저 좀 살려주세요!’ 이렇게 말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벌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목사님이 물어보니 자기가 교회 다닌다고 남편이 반죽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기도합시다. 제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집으로 귀가해 보세요!’ 라든지 아니면 ‘119를 부르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조금 더 현명했다면 ‘요새 한국교회가 이렇게 가정의 구타당하는 여성을 위해서 쉬는 집을 만들었다는데 그곳으로 제가 바래다 드릴까요?’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 집사님댁에 잠시 피신하십시오’. 아니면 담대하게 용기를 내서 ‘형제님 고정하십시오. 저를 대신 때리십시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맞았어?’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가자’. 하시는 것입니다. 신방 차림도 아니고 그냥 한복차림으로 털신신고 그냥 가시는 것입니다. 아직 까지도 남편이 미친 듯이 펄펄 뛰고 있는데 가셔서 남편의 뒤통수를 치시면서 ‘이놈!’ 하시는 것입니다. ‘뭐야!’ 하면서 남편이 말하는데 ‘이놈!’ 소리를 치시면서 ‘사내자식이 얼마나 못났으면 부인을 치느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뭔데!’ 하고 남편이 말하자 ‘이 자식이! 당신! 너는 네 아비도 없냐!’ 하고 호통을 치시는데 영역이 없어도 단숨에 남편의 기가 꺾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도리에 대해서 그것이 복음이 아니다 할지라도 당신께서 확신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복음과는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그러한 일상적인 삶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지식이 있으니까 말하자면 그것들을 가지고 기선을 제압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일일이 얘기하자면 수도 없습니다. 전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기본적으로 삶을 아는 풍부한 지식들! 왜냐하면 교인들은 진공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어느 교인이 상을 당했는데 돌아가시면서 부모님이 ‘나는 화장을 해달라’. 그렇게 유언을 하셨습니다. 화장을 해서 뼈를 가지고 시골에 가서 그것을 묻어야 하는데 제가 그 할아버지 목사님처럼 풍부하게 인생을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가만히 보니까 화장이면 화장이고, 매장이면 매장이지 화장을 해서 그 뼈를 항아리에 담아서 그것을 가지고 시골로 내려가서 항아리를 묻는데, 그것도 무덤안에 묻는 것이 아니라 무덤앞에 땅을 조금 파서 그것을 묻는다고 하는데, 많은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부모님이 그렇게 유언을 하셨다고 해도 부모님을 화장한다는 것에 대해서 시골사람들이 심정적으로 동의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을 불렀습니다. 유언도 유언나름이다. 고인은 자식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그저 당신이 깨끗하게 사라지시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셨지만 이런 법은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을 당신이 본적이 있습니까? 화장이면 뼈를 뿌려서 끝내는 것이고 매장이면 시신을 가져가서 매장을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유골을 가져다가 무덤에 안치 시킬 수는 있지만 무덤을 안 만들고 무덤 앞에다 그냥 묻는 것은 없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대로 해라. 그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그저 평안하게 시신을 모시고 시골에 내려가서 아버님과 함께 장사해서 거기서 묘소를 쓰고 그리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와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얘기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고 나서 그 분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정말로 제 예기가 맞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리고 나서 장례를 지내니까 안 온다고 하던 동네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모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상하게 장례를 지낸다고 해서 낙인찍힐 수 있는 상황을 면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사소한 것 같지만 이렇게 사소 한 것에 둘러 쌓여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 날 신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목회자들이 갖는 것이 중요한데 이 모세가 바로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율법이 세 가지로 나뉘는데 도덕법, 의식법 그리고 민법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민법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공평하고 그리고 철저하게 상호주의적인 원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리고 손해를 끼쳤어도 그것이 의도적이냐 의도적이 아니냐 하는 것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어떻게 배상을 해주고 하는 것까지 다 배려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모세 자신이 왕궁에 살았던 사람답지 않게 풍부하게 삶을 경험했고, 그리고 특별히 미디안에서의 서민으로 지내던 40년 어간의 그 세월동안에 인생을 살아가는 그 다양한 삶의 모습에 대해서 많이 체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순수한 학문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고통받는 삶의 현장 속에서 일어나는 그 다양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풍부하게 보면서 그런 경험들을 동참하고 지식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지도자가 되기 위한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천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런 크고 작은 일에 얽혀서 살아가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과연 그러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넗히는 방법이 있는데 굳은 일에 많이 자기를 들여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교에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커리큘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구에서 상이 나고 하면 그러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부지런히 쫓아다니십시오. 그리고 그 고통받는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울어보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리고 목사님이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을 지혜롭게 위로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소망을 주는 가 하는 것들을 배우면서 그 속에서 하나하나 배우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인데 그 교회엔 부목사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힘이 드시니까 하관예배(?)드리는 곳에 저를 보내셨습니다. 비록 보기는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제가 처음 하관예배를 드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에 가보니 가관인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신을 가지고 갔는데 4시간을 기다렸다가 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시간을 기다렸다가 묻을려고 하니까 묻고나면 밤중이 될 것 같았습니다. 왜 4시간 후에 묻어야 하느냐고 물어보니 30분전에 묻을 시간이 있었는데 지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관이라는(?) 사람이 나침반을 들고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며 선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에 온 사람들은 문상을 하고 빨리 돌아가서 집을 돌봐야 할텐데 그 지관은 ‘이 시간을 안 지키면 자손들의 팔자가 세고’ 뭐라고뭐라고 하면서 떠들어대고 또 사공은 얼마나 많은지 또 일가 친척들은 제례식으로 장례를 지내야 한다고 우기면서 ‘뭐도 지내야 하고, 뭐도 지내야 하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새파란 전도사가 한 스물 아홉인가 서른정도 된 새파란 전도사가 이렇게 했다가는 아무 것도 안되고, 더군다나 돌아가면 목사님이 ‘너도 전도사냐!’ 하고 호통을 치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래도 혼나고 저래도 혼나는데 유족을 불러서 상주에게 말했습니다. ‘자 여기서 선택을 하십시오. 지체에게 결정권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하관 예배를 드릴려고 하는데 제 말을 들으면 하관예배를 드리고, 안 들으면 저희는 그냥 갑니다. 그러니 결정을 하십시오.’ 그리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얘기도 전도사로써는 뒷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그런데 순간적으로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고 심각하게 상주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전도사하고 목사하고 차이를 잘 모르는데 다행히 그 사람은 순간적으로 제가 이런 방면에 도가 튼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저쪽에 가서 몇 사람하고 의논을 하더니 저를 목사님이라고 부르면서 ‘목사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사람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상주가 기독교식으로 하겠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계십시오’. 그러자 거기 계시던 한 할아버지가 술도 드셨겠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자손의 팔자가 사납고 뭐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팔자대로 안 사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묻어’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주에 장례를 지내러 시골에 내려갔던 성도가 다시 올라왔는데 저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 혼탁한 상황을 평정해주었다고 말입니다. Be quiet!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삶의 현장을 자기 자신이 경험하고 풍부한 지식을 가져야지 만 모든 삶의 상황들을 쉽게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대부분 성경을 통해서도 체득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고통받는 삶의 현장을 경험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그 영혼들을 다루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지식들이 쌓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 연륜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훈련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신학생 세미나에 와서 이런 예기를 하면 여러분이 굉장히 우습게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수울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진자 여러분들이 목회선상에 들어서고 나면 이런 것들을 못한다고 해서 하늘을 가르는 설교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것들을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하늘을 가르는 설교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러분들이 일반적인 성도의 삶을 잘 다룰 수 있는 그러한 식견 있는 사람들이 될 때에 그때야 비로소 사람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따뜻한 목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암 말기의 환자는 복수가 차면서 어마어마한 냄새가 납니다. 진동하는 냄새가 납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경험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면 방문에 들어서는 순간에 토할 것 같아서 그 방문에 들어 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장을 여러 번 경험해본 사람은 가족들은 흰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있어도 목회자는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정말 가까이 다가가서 품어 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교인이 자기의 어머니가 폐결핵에 걸려서 돌아가셨는데 폐결핵은 환자가 죽게 될 때 균이 몸밖으로 다 나온다고 합니다. 속설인지 의학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폐결핵으로 돌아가시는 분은 임종하시는 순간에 가족들이 그 임종을 안 지켜보려고 합니다. 다 도망갑니다. 그런데 먼발치에서 보니까 목사님 혼자 그 환자분옆에 다가가셔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그 냄새나는 현장에서 귀에 입을 대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성도의 위로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기의 손을 꼭 잡고 임종하라고 가르쳐주면서 그 자리에 혼자서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 눈물이 가족들도 버리고 간 바짝 야윈 그 성도의 뺨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도가 그 무의식중에도 목회자의 품에 안기듯이 안겨서 영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들은 두렵기도 하고 더럽기도 해서 어머니 곁에 못 다가간 그 많은 자녀들이 어마어마한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 하나만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없이 사랑만 가지고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그 환자를 끌어 앉는 그런 행동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섭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고통하는 성도들의 삶에 대한 풍부한 지식들이 여러분들 속에 있을 때에 그때에 여러분들이 비로소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목회를 하다가 보면 목회자가 성도들이 경험한 거의 모든 것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도들에게 굉장히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굉장히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어떤 영적인 긴장이 있는 상황이죠. 두려움이 막 몰려오는 데 ‘그래! 어제 은혜 많이 받았다며? 어때!’하고 한 지체에게 목사가 물을 때 지체가 ‘목사님 어제 막 눌리면서 두려운 마음 때문에 혼났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그래! 아니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지? 우리 한번 기도해보자’. 이렇게 말하면 성도가 굉장히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그러면서 그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할 때 성도들이 굉장히 안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세는 풍부한 삶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이 모세로 하여금 지도자가 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입니다. 삶을 아는 지식, 학문과 삶을 아는 지식...
두 번째 모세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살 수 있게 만들었던 중요한 요인은 무었이었냐하면 고난 속에 다져진 강인한 리더쉽이었습니다. 참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적으로 보자면 학문적인 지식이나 지도자로써의 참심한 생각!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나이든 경우보다 젊었을 때가 더 좋았지 않겠습니까? 모세가 지도자가 되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가 40세였을 때였습니다. 40세는 사실 학문적으로 아주 농익었고 성취욕에 있어서, 인생에 대한 경험에서 어찌 보면 지도자로써의 삶을 살기 위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황금기였습니다. 그리고 학문도 아직 녹이 슬지 않았고,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 사용을 하시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40년의 세월을 초야에 묻혀 살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40년 동안에 모세가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에 대해서 이 성경은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민족을 해방시켜야겠다는 그 어마어마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초야에 묻혀서 가축이나 돌보면서 지내는 삶은 실질적으로 그 사람에게 배고픔과 전쟁, 그리고 무슨 대적들로 인한 핍박, 이런 것들이 없었다 할지라도 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 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여러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광야 40년은 그가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갔는지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낮아질 때까지 낮아진 그러한 고통의 삶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지도자로써의 꿈을 접고 현실과 와신상담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애굽에서 누렸던 그 호사스러운 삶을 접고 목부의 삶을 40년 동안 살아간 것입니다.
그가 느꼈을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충격은 고사하고 40년동안 그렇게 살면서 이 모세가 경험했을 심적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 40년 동안에 그렇게 무료하게 자기를 지도자로 써주시지 않은 하나님에 대해서 좌절된 꿈을 안고 살아가는 그런 시기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이 40년 동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던 이 모세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고 추구하면서 살았을 것이고 타지 않은 가시나무떨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하는 사건도 역시 그런 과정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제 추측이지만...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왜 제가 이렇게 추측을 하느냐하면 모세가 가시나무 떨기사이에서 타지 않는 불꽃을 보고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부르심을 받은 후에 바로 앞에 섭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모든 일이 속히 속히 이루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탈출합니다. 그후로부터 즉시 모세는 만천하에 자신의 인격과 성품, 영성을 속속들이 다 들어내게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 다듬어지지 않은 모세의 모습이 많이 나오지만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라고 할지라도 급조되었다고 보기에는 힘든 그런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인품과 지도력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광야생활에서 모종의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모세의 광야에서의 40년의 세월은 정말 고난이 많았던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예고편에 불과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이끌어내어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광야로 들어선 40년의 생활은 그야말로 살을 에이는 것 같이 고통속에서 목회한 기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이 모세는 철저하게 정말 가시밭길과 같은 그런 목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렇게 걸어가면서 인간으로써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거의 다 경험하면서 이 모세는 영화와 관계없고 권세와 관계없는 섬기는 지도자로써의 삶을 살아간 것이죠. 그러나 그는 섬겼지만 사람들에게 종처럼 취급받지 않았고 하나님 곁에 있는 사람이란 취급을 받았고 모든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정신으로 그들을 위해 일했으나 누구도 모세를 자기의 종으로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섬기는 자로 살면서도 그런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써의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40여년의 목회생활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많은 어려움들을 당합니다. 저는 요새 모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광야를 지나가면서 모세가 굉장히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봅시다. 한 일년이나 이년정도 사역을 하고 죽는다 하면 어떻게 한번 온힘을 하해보고 죽을텐데 40년입니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특별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겠지만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혈기는 없었겠습니까? 정욕은 없었겠습니까?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내면적인 위험성을 모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목회자의 업무가 과중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업무의 과중함이 모세에게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남들이 목회자의 많은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할 때 설령 다른 이에게 업무를 맡긴다고 해도 정신적인 부담감까지 그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②
그가 어떻게 자유를 줄 수 있겠습니까? 엄마가 아이를 탁아소에 맡긴다고 해서 이젠 내 책임이 아니고 한달 동안은 탁아소장의 책임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까? 똑같습니다. 그런 경륜(?)에 시달리면서 인생을 산것입니다. 모세는 안식년도 없고 휴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취미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생애는 전체가 영혼들을 돌보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에 소진한 시간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면 홀로 하나님을 묵상 했을 것이고, 그 시간도 아니면 치리 하여야 했고 그리고 더 좋은 창의적인 계획을 가지고 이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많은 계획들을 세우면서 광야의 40면의 세월을 지내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강한 지도자는 하나님도 하루아침에 만드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의 성장에 대한 기록과 세례요한의 성장에 대한 기록이 하나는 누가복음 1장에 하나는 4장에 나오는데 똑같이 무엇이 나오냐하면 ‘아이가 자라면서 강하여졌다’ 입니다. 무엇이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을 강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뭐냐면 다분히 고통스러운 환경이 많이 작용을 하면서 그 사람이 그런 시련 속에서 강한 사람으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얘기하는 ‘강하다’는 것은 저밖에 모르는 독단적인 강함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보면 누가 뭐라 해도 죽어도 안 듣고 고집불통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강함과 관계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강함은 거룩하고 성화된 강함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편집광적인,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워낙 강하고 자아가 깨트려지지 않아서 남들은 뭐라고 그래도 ‘난 이 길로 간다’라는 그런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강함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되면 그리고 지도자로써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잘 구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무엇이냐 하면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하나님앞에 자기가 깨트려지지 안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그 육적인 강함과 성화를 통해 연단되면서 갖게되는 ‘Holy Toughness’ 즉 ‘거룩한 강인함’ 이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예기합니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예기하는데 자기말을 안 들으면 ‘너무 독단적이다. 자아가 너무 강하다’고 예기합니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았던 지도자들 치고 나약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 고집불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단 그것이 육적인 자기가 깨트려지지 않은것에서 비롯된 혈기적인 강함이 아니라 거룩한 목표를 붙들고 타협하지 않는 정신으로 그 길을 따라 가는 강인함이었습니다. 그런 강인함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천사라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목회를 할 때 여러분을 다 좋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다 좋다는 사람이 없는데.. 하나님도 다 좋다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여러분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성격이 모나고 그런 성격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양보심이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은 아니지만 항상 남을 배려하는 그런 교육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천성적으로 여러분들은 안믿을지 모르지만 유리그릇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참 안 좋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도 좀 남아있는데 전도사때인데 누가 저 때문에 맘이 아프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거의 밤에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에 그 분 집에 가서 그분을 만나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그 지체가 나 때문에 마음이 아픈지 가르쳐달라고 하고 그것을 풀어야 집에 와서 기도도 되고 잠도 잤습니다. 은혜받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런 기질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좋은 성격은 아닌데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람과 그렇게 부닥치지 않고 그렇게 살았는데 설교사역에 들어서고 보니까 저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목회를 하고 사역을 해오면서 저에게 마음이 다치거나 부닥친 모든 사람들이 저는 진리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고, 그들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오만 방자하게 말하진 않겠습니다. 그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그런 사실들을 성도들은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대부분 그런 시야를 못 가지신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저 강함이 자아가 안 깨진곳에서 오는 혈기적인 강인함이냐 아니면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강인함이 하나님앞에 수없이 깨트려졌기 때문에 주님앞에서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사역과 인생 그리고 신앙의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는 곳에서 오는 강인함이냐? 그것을 구분을 안하고 무차별로 공격을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암에 걸려서 많이 죽습니다. 그런데 암의 원인은 간단합니다.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면서 그것보다 넘치는 주님의 위로로 그것을 풀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강인함이 이 모세에게 있었는데 그 강인함은 그런 과정 광야의 40년 동안의 기간에서 철저하게 자기 비움과 낮아짐의 과정, 그리고 목회에 들어서서 40년을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 사랑하는 동족들로부터 당하게 된 그 수많은 고난과 고통 그런 것들로 인해서 자신이 깨트려지고 양보할 수 없이 하나님앞에 붙들게 된 그 꿈. 그런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곳에서 비롯된 강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불쌍히 여기셔서 전 조금만 건드려도 쨍그랑 하면서 깨지는 유리그릇과 같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적절하게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에 대한 평가가 사람들을 두루 거치고 제 귀에 들어왔는데 ‘씹어도 이빨도 안 들어가는 사람’이란 예기를 들었습니다. 어쨌든 건들면 깨트려질것같은 유리 그릇 같은 사람이 그 사람이 물어봤는지는 모르지만 ‘이빨도 안들어갈것같다’고 그랬으니 강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나의 이 강함이 어느 부분까지가 거룩한 강인함이고 어느 부분까지가 혈기적인 강인함이냐 하는 것은 냉정하게 하나님앞에서 숨질때까지 싸워야 할 부분입니다. 그런데 강하지 못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혈기적인 자신의 강함을 가지고 거룩한 것인 것처럼 호도해서 그래서 그것으로 인위적인 카리스마를 삼으려는 것! 이런 것들은 사교적인 행동입니다. 사교 집단적인 행동입니다. 그런 것들은 절대로 잘못된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이 지도자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는 강한 방면에 하나님앞에서는 물같이 녹아지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그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목회자가 살아가는 삶은 정말 전투적인 삶입니다. 불황당같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을 고쳐서 새사람 만드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목회자의 임무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정말 일어나는 상황들은 무시무시한 상황들입니다. 최근에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목사가 린치를 당했는데 그것을 주동한 사람이 장로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송이 붙었습니다. 교회가 조폭의 세상인지... 그것을 가지고 우리들이 목회도 능력 있게 잘하려면 태권도도 해야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돌 정도니 얼마나 무서운 세상입니까?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자신이 정말 하나님앞에서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강인해지면서도 돌아서서 하나님앞에서는 물같이 쓰러져서 하나님앞에 엎어지는 그런 경건한 연약함이 없으면 사실 조폭의 지도자와 교회의 지도자의 차이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모세도 가만히 보면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십계명 돌판을 던지는 장면과 몇 가지 장면을 보면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를 쓰신 것입니다. 쓰시는 데 하나님이 얼마나 부단히 그를 달구셨는지, 하나님이 그를 낮아지게 하시고 달구시고 달구시고 하시는 가운데 다행히 그는 하나님앞에 수없는 깨트려짐을 경험하면서 그 혈기적인 강인함이 변해서 거룩한 강인함으로 변해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팀목회가 어떻고 하는데 구상은 이상적입니다. ‘나는 교회의 행정을 잘하고 너는 설교를 잘하고 너는 찬양을 잘하고 너는 심방을 잘하고 너는 선교를 잘하고 너는 운전을 잘하니까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너는 설교하고 나는 행정하고 너는 찬양하고 너는 심방하고 너는 선교하고 너는 운전하고 그러면서 우리모두 대등하게 사역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성공한 교회가 있습니까? 다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은사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부인하느냐?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냐면 지도자의 자리는 그렇게 해서 나누어 가질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나아니면 안 된다’라는 식의 독단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모세가 자기 혼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끈 것은 아닙니다. 모세 주변에는 수많은 돕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 심지어는 하나님의 신받은 사람까지 다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상은 이곳에서 우리들이 읽어낼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도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안나오니까 난쟁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식으로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것들은 결국은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이끌어 가는 궁극적인 대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달란트와 재능,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합력해서 섬길 수 있는 길들을 언제든지 열어주고 그리고 일정한 일들을 위임을 해서 그들로 하여금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선교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나는 진짜로 선교에 대해서 모르겠다. 어떻게 선교를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제가 이런 얘기를 덧붙였습니다. ‘내가 선교지를 보고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것들이 떠오르는데 사실 난 이것도 신뢰할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는 선교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꽤 많은 돈을 선교지에 보내고 있습니다.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저는 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면 내년이고 후년이고 여러분들이면 더 좋고 선교의 풍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선교정책을 움직여야 한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때에 가장 하나님의 뜻에 근접한 선교의 사역들을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전문적인 분야인데 그렇게 어설프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Top Leadership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러한 깊은 고난의 세월을 지내오면서 강인한 지도자로 빚어져 왔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자기에게 허락된 그 고난을 피하려면 피할 수 있는 길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앞에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시지만 저는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버티었던 장면도 사실은 겸손히 아니라 그런 고난을 마다하는 모세안에 내재된 그러한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냐 하면 이 모세를 불속을 통과하는 그런 과정을 지나면서 점점 점점 더 지도자로 온전하면서도 강함을 갖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거룩한 강인함은 이면에 항상 온유함이 있습니다. 혈기적인 강함은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가차없이 제거하거나 아니면 보복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강인함은 안 그렇습니다. 모세가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비난을 받을 때에는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뛰어났다고 성경은 말하질 않습니까? 그럼 이러한 모세의 성장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너무 쉬운 길만 갈려고 하면 한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지도자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굉장히 필요한 것이 이 거룩한 강인함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이 성화의 과정속에서 여러분들의 성격의 한 특징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잔꾀를 부리면서 고난을 피해가는 그런 삶의 방식을 가지고는 여러분들이 결코 지도자로써의 강인함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을 무조건 당하고 그러면서 이를 가는 것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이 거룩한 강인함을 지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떠한 고난도 고난 그 자체가 그에게 거룩한 강인함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은혜의 작용이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그것을 충분히 동의하는데 그러나 은혜만을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세운 그 목표를 가지고 분투하면서 살아가는 그 애쓰는 노력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자의 삶에 있어서 온전해지려는 욕구와도 맞먹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갈 때 그저 부모님이 대주는 넉넉한 학비와 그리고 좋은 공부환경. 그런 속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불행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싸워야 할 적들이 훨씬 더 많은 불행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어제 제 동생과 아이들 교육문제를 의논하면서 ‘요즘 아이들이 왜 이렇게 끊기가 없을까!’ 쉽게 이야기하면 ‘불편한 것을 못 참고 그리고 부모가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데도 그것을 수용하면서 그대로 해보려고 하는 그 끈기가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다가 마지막에 둘이 공통적으로 내린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이 고생이란 것을 안 해보고 자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고생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꿈을 꿔도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것이 좌절이 되어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안 되는 요인이 많기 때문에 내가 더 많이 싸워야지 만 그것을 겨우 얻을 수 있다’라는 것을 어릴 적부터 살아오면서 인생의 교훈으로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유족한 상황 속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거스르는 그런 어떤 진취적이고 분투적인 삶이 결핍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족한 환경속에서 모자란 것이 없이 살았던 사람들의 가장 큰 적은 게으름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 모세가 고난을 당하고 그런속에서 분투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럼 고생을 한 모든 사람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느냐? 여러분들도 당연히 ‘아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지도자로 만들어주느냐? 고난 그 자체를 많이 당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대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 신앙적인 태도가 그 고난을 통해서 그 사람속에 지도자속에 어떤 풍성함들을 맺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요령을 피우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지도자로써 연단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교회의 있는 지체들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지체들에게 일을 시켜보거나 특별히 이사올 때 교회를 지을 때도 또 한번 보겠지만 이사할 때 24시간 대 노동 기록을 세우면서 그러면서 일을 할 때 그 속에서 자신들의 인간성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드러납니다. 그런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요령주의의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인내하는 것에 있어서 현격하게 모자랍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고 역경을 주실 때에는 그 속을 지나가면서 우리 자신이 강해져 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도자로써 준비될 수있도록 그런 남다른 고통과 고난이 있는 길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그 길을 안 갈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사를 부임해서 고달프면 한 6개월하고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때려 치는 것입니다. 어짜치 주의 인도를 받은 것이 아니니까 올 때 자기 마음대로 오는 것입니다. 일년을 턱걸이로 간신히 채운다음에 그 다음엔 ‘못한다’고 하면서 집어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이 이렇게 막돼먹은 교회에서 사역하기엔 너무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삶이기 때문에 이 고통 속에서 인내하는 것을 통해서 서서히 그가 강해져 간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대부분의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고난도 있지만 그러나 요령을 부리면 피할 수 있는 고난도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교 다닐 때 시험을 보는데 어느 놈은 미련해서 밤새면서 머리가 터져라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읽으면서 엎어져서 한숨을 쉬고 그리고 하나하나 배웁니다. 그런데 어느 놈은 탱탱 거리고 놉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시험 본다고 그러면 벌써 3주전부터 페이퍼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예상문제를 뽑으면서 한 학기 배운 것을 정리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녀석은 탱탱 거리고 놉니다. 탁구 치러 다니고 영화 보러 다니고 이러면서 까불고 다니다가 학교에 언제 나오냐고 하면 시험보기 하루 전쯤에 나와서 상당히 모범답안에 근접한 답안을 쓴 것 같은 사람에게 접근해 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야 점심 먹으러 가자. 내가 라면 사줄게. 아니면 삼겹살 사줄깨. 그리고 먹고 나서 너 시험공부 다했냐?’ 요점은 그것입니다. 그것을 얻어서 카피한 다음에 그것을 외워서 시험을 보러 옵니다. 그것이 자신의 답안입니까? 대학원에 가서는 제가 마음이 풀려서 많이 빌려줬는데 학부 다닐 때는 죽어도 안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혐오했습니다. 왜 그렇게 사냐? 그래도 그것은 좀 났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공부하지 않고 가서 목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지도자가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요령을 피울 줄 모르고 고지곧대로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야구를 참 좋아했습니다. 리틀 야구를 알고 계시죠? 초등학교의 야구. 여러분들에게 catcher글러브를 주고 선수들의 공을 받으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요절이 납니다. 하나도 못 받습니다. 거의 한 개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속도가 동네 야구하고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볼이 휘는 정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턱을 향해서 날라 왔는데 눈 위로 볼이 떠버립니다. 그러니까 오죽하면 카메라로 멀리서 잡았는데도 떨어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멍하게 앉아서 그 공을 잡으려고 하면 실컷 두들겨 맞다가 볼일을 다보게 됩니다.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스트라익 존으로 공을 집어넣으면 누구든지 다 때립니다. 밥먹고 그것만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세계적인 추세가 무엇이냐 하면 스트라익 존을 점점 넓힙니다. 왜냐하면 너무 홈런이 많이 나와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초등 학교 야구대회를 하면 자기의 학교를 우승시키려고 6학년학생을 졸업을 안 시킵니다. 학교가 부모와 무엇인가를 트레이드를 하면서 졸업을 안 시키는 것이죠. 그런데 초등 학교 애들인데도 몸집이 큽니다. 그 중에 잘 훈련된 애들은 커브, 슈트 트랏볼(?), 이런 것들을 다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등 학교에서는 이런 것들을 못 던지게 합니다. 통하질 않습니다. 야구 전문가들이 이야기하길 초등 학교 때부터 변화구를 던지기 시작하면 야구를 위한 기초가 튼튼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곳이 곳대로 직구로만 던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을 야구 투수로 이야기하자면 초등 학교 피처정도 됩니다. 물론 인생을 살다보면 무릎으로 튀면서 슬쩍 빗겨 가는 요령을 부려야 할 때가 있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것이 꼭 도덕적인 문제가 있는 요령이 아니다 할지라도 요령을 부려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벌써 그 길을 알기엔 너무도 빠릅니다. 오히려 목회자가 보기에 ‘어쩜 그렇게 융통성이 없냐? 그래 그것을 해오라고 해도 그렇지 밤을 새우다 안돼서 결국은 여기까지 와서 그것을 하고 있는냐?’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곧이곧대로 걸어가는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교역자들의 보고를 이렇게 받아보면 새신자란을 유심하게 봅니다. 항상 새신자 김아무개 밑에는 그 사람을 돌보는 사람 아무개가 쓰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어떤 사람들은 노력하는 것이 보입니다. 출석하다가 하다가 안하고 또 하다가 하다가 안하고 또하고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안나오는 사람에게 가서 부지런히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잘나오다가 딱끊기고 계속안나오면 그것은 내버려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나도록 한번도 출석을 안 하는 것은 거의 안 돌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하나를 하나님이 맡겨주셔도 그것을 잡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으면서 자신을 소진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 가는 동안에는 항상 고통이 있습니다. 항상 고통이 있습니다. 목표를 가지고 섬김을 가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다음에 목사가 되어서 내노라하는 큼지막한 교회에 가서 그저 사람들이 가고 싶다는 대로 가고 해달라는 설교 해주면서 밥이나 먹으면서 목회를 해야하겠다고 맘을 먹으면 세상에 가장 헐렁한 것이 목회입니다. 안 한다고 누가 때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위임목사가 한번 되면 장로도 못 쫓아내는데 얼마나 망고망산입니까? 70될 때까지는 누가 나가라고도 못합니다 일수불퇴입니다. ‘내가 못나간다’ 그러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런 길을 걸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약합니다. 그리고 너무 요령주의적인 삶입니다. 좀 바보스러울정도로 우직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과정에서 거룩하고 강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선교사들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목회나 선교가 잘 안되면 정직하게 하나님앞에서 ‘내 부족이 무엇인가? 내 목장에 축복이 없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선교가 안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가 선교에 대해 인식을 잘 하지 못해서 서포트를 잘 안 해줘서, 돈을 제대로 안보 내줘서 되는 일이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선교 본부의 후원이 제대로 안돼서 이런 식으로 된다’라고 생각하거나 목회가 안되면 ‘담임목회자의 인식이 없어서, 교회자체가 너무도 빈약해서, 터가 나빠서 안 된다.’ 그리고 ‘내 꿈을 펼치기엔 땅이 너무 좁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고 그런 사람들이 그런 어려움과 고난을 통해서 좋은 주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부서져 가는 순간들이 있을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깨어짐이 온전한 신자로 만들어 가는 것인데 그 자기 깨어짐이 결국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그야말로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찔러서 나의 죄를 보이시고 나의 악함을 보여서 나로 하여금 엎어지게 만들 때 자기 깨어짐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향해 원망하고 돌을 던지려고 할 때마다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그 처절한 기도의 모습을 보셨죠? 오죽하면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 제 생명이 족합니다. 이제 저를 데려가십시오? 제가 이 사람들의 유모입니까?’ 하나님앞에 원망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앞에서 깊이 ‘저는 지도자로써 자격이 있다. 그리고 해나갈 수 있다’라는 인간적인 자기의 의지를 믿는 그런 신앙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과정입니다. ‘저는 정말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사실 모세같은 불세출의 지도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행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부단한 자기 깨어짐이었습니다. 모세는 성격상 조금 잘되면 교만해질 가능성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앞에 처절하게 깨어지면서 ‘저는 정말 안됩니다.’ 그렇게 매달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과 관계가 있습니까? 목회상황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의 삶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앞에 연단 받을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을 피해갈려면 피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 중의 대다수의 살아가고 있는 신앙생활이 제가 보기에는 평균적인 신자의 삶 이하입니다. 제가 이 자리를 빌어서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상황인데 그것이 내게 주어졌기 때문에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각오를 가지고 몸부림 쳐 본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작년에 강원도에 첫눈 오던 겨울수련회에서 그 오대산 속에 들어가서 여러분과 4시간동안 쉬지 않고 불을 토하듯이 강의를 했습니다. 갖다가 와서 제 목이 다 쉬어버렸는데 그런데 여러분들이 펑펑 울면서 은혜를 받았는데 좀 싸워보았습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문제를 제시했던 새벽기도 지금도 안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상황을 피해 가는 것입니다. 왜이리 무른 것입니까? 진짜 싸움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다투는 것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트리면서도 깨트려서라도 얻지 않으면 안될 어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굳이 목회의 길을 가려고 합니까? 가지 마십시오. 저는 진짜로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안 가서 안갈수있으면 안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받을 일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혼자 간다고 그러다가 이제 안간다고 그러는데 이제 원위치로 돌아간 것이지 무슨 하나님께서 무엇을 책망하실 것이 있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선교사든지 목회자든지 요즘에 왜 목회자가 되려고 하느냐 물어보면 다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좀 단순하고 명료한 이야기가 나와야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정답 아닙니까?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니 내가 주님 없이 살아가는 이 영혼들을 두고 어찌 다른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매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몰아갔습니다. 상황이 불러줍니까? 하나님이 불러줍니까? 어디 성경에 상황이 그렇게 몰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려주셨다는 증거가 어디에 나옵니까? 그것은 사실 계속 뒷다리 긁는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모세를 보십시오. 상황이 이 사람을 데리고 간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아닙니다. 아닌 것입니다. 접으십시오. 왜 그 길을 갈려고 그렇게 애씁니까? 여러분들의 삶이 소명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수시로 입증을 하고 있는데 왜 수시로 우기고 있는 것입니까? 가요. 평범한 길로 돌아가십시오. 왜 거짓된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평범한 길로 돌아가서 사업을 하던지 취직을 하던지 해서 열심히 섬기면서 소명받은 목회자의 교회에 가서 그 사람을 거들면서 전도나 하고 구역장이나 하면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인정해 줍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전도사나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지 않아도 우리 열린교회속에는 매일매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감격속에서 살아가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이 있습니까? 이 길이 무엇이 그리 좋은 길입니까? 명대로 못 죽는 길이라면서요? 그러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이 있다는 사실에 도장을 찍든지... 육신이 나약해서요? 성경에서 육신이 연약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간절한 가운데 도저히 할 수 없을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죽해서 어떤 주석가는 그런 이야기는 예수님만 하셔야 한다고 못박았습니다. 인간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작년에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싫으면 다른 교회에 가서 봉고라도 몰라고 했습니다. 봉고 운전사가 없어서 난리입니다. 왜 안 합니까? 왜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무슨 ‘한국교회의 설교는 썩었고, 어느 교회에 가니까 그것을 설교라고 하면서 밥을 먹느냐고... 부교역자 생활을 했지만 그 목사님 설교는 설교도 아니라고...’ 자기는? 자기는? 그렇게 해서 나아집니까? 겨우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정도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다 피해 가면서 어떻게 강한 지도자가 됩니까? 그러면서 성공을 꿈꾼다.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저는 목사 되겠다는 여러분들의 이 삶이 열린교회에서 조차도 평균적으로 건강한 신자의 삶 위의 수준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새벽기도에 안나옵니까? 그러면서 무슨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접으십시오. 벌써 여러분들의 삶이 소명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어기는 것입니까? 상황이 몰고가는 소명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한번 찾아보십시오. 없습니다. 베드로는 오히려 상황이 소명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라 상황이 소명의 저 반대쪽으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러면 계속어부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는 듣기도 싫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데리고 가는 것 같습니다.’ 아니 상황이 불러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것입니까? 단지 그것 하나를 지푸라기처럼 붙잡고 말입니다. 상황이 바뀌면 다 놓치는 확신들인데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입니까? 고난이 있습니까? 모세는 분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모세나 바울이나 하는 사람을 보면서 깊이 소망을 갖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이렇게 못됐고 밑바닥에 이렇게 끊없이 더러운 것이 있고, 50년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것이 하나님앞에 정말 죄송하게 느껴집니다. 올해도 그랬습니다 ‘하나님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셨으니까 내가 사과할 필요는 없지만 살아온 삶이 않좋을때에는 자신의 출생을 한탄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욥의 경험이 아닙니까? 그런 심정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분투하는 삶이 있습니까? 정말 분투하는 삶이 있습니까? 고난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그 속에서 끊임없는 분투속에서 자기 깨트림을 경험하면서 주님의 사람으로 서서히 강해져 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약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환경순응형의 사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환경순응형의 사역자. 이번에도 교역자수련회에 가서 몇 교역자들에게 싫은 소릴 좀 했습니다 .교역을 맡겼습니다. 사역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별로 없습니다. 잘 안됩니다. 그러면 두 가지 일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하나님앞에서 ‘왜 제 사역에 축복이 없습니까? 저를 하나님 제가 싫으십니까? 하나님 제가 싫으십니까? 어디가 싫으십니까? 제가 필요하면 뼈마디 하나를 짜르고, 살 한점을 깍아 내겠습니다. 하나님 어디가 맘에 안드십니까?’ 그리고 독대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분투함.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가 못하면 누가 하나님앞에 쓰임을 받는가를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 합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성경이 불충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제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도록 불음을 받았는데 어떤 부서에 내가 맡은 구역에 내가 맡은 교구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 그러면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나에게 주는 개인적인 신앙의 암시가 아닙니까? 물론 잘되가고 있는 것이 항상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시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맡고 있는 지체들속에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독대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지체들 가운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자기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장이라고 가정을 합니다. 여기 대부분이 구역장이죠. 축복이 없습니다. 지체들이 자꾸 떠납니다. 막판에는 이 구역이 완전히 해체될 위기입니다. 그때 ‘하나님 제가 싫으세요? 우리 구역에 왜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까?’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구역장인 그대들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누가 그 기도를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저를 안 기뻐하세요? 왜 열린 교회에 축복을 안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 자리는 제가 나가야 할 자리입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그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앞에 맡겨진 그 사역에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즉시 무릎을 끓어야지 그것이 왜 그렇게 긴 세월이 걸리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데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 어떤 점이 마음에 안드세요?’ 이렇게 토하며 ‘제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 아닙니까? 언젠가 한번 어느 드라마에서 얼핏보았는데 한 연인이 있었는데 남자가 이제는 그 여자가 싫다고 하면서 헤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자가 가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내가 왜 싫으냐? 나는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왜 내가 싫으냐?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겠냐? 내가 정말로 살이라고 깎으라면 깎고 뼈라도 갈라고 하면 갈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사랑하니까 그렇게 순발력 있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신자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런 과정에서 철저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기도의 문을 열고 화두를 던지면서 하나님앞에 매달리게 되면 비로소 자기의 맘의 문이 열리게 되면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부실한 관계에 현주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못 봅니다. 대부분 그런 식으로 안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규모만 다를 뿐이지 여러분 전도사님들이 교구를 맡고 있듯이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구하나는 이 교회의 축소판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을 맡고 있으면 그 구역은 그 교구의 축소판이고 새신자 구역이라고도 맡고 있으면 하나의 작은 구역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작은 상황에서 하나님앞에 자기의 사역에 축복이 없는 것을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뇌하지 않는 사람이 큰 상황에 가서 그런 고뇌가 떠오르겠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이 돌보는 영혼들 때문에 금식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맡고 돌보고 있는 영혼들 때문에 철야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철야는 그만두고 ‘새벽기도만으로는 모자르겠다. 밤에라도 나아가서 내가 이 영혼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해야 되겠다’라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한 적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무 환경순응형입니다. 그리고 영혼들이 쓰러지기 시작하면 그 영혼들을 보면서 그 영혼들이 자신에게로부터 멀리 떠나서 은혜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찾아내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그런 삶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한가지의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삶에 있어서 고통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피해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 지도자로써 강해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왕궁에서 자라게 하셨는데 왜 예수님을 목수의 집안에서 자라게 하셨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시라도, 죄가 없으신 분이시라도 강해지시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했고 시련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그분이 점점 더 강해지는 과정들을 필연적으로 밟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그런 속에서 정말 분투하면서 하나님앞에 고난을 고난으로 알지 않고, 그 고난들을 통해 자기가 온전해지는 과정으로 삼는 그런 신앙적인 반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좋은 설교를 많이 듣는다고 여러분들이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에 의해서 경험되는 세계가 없는 사람들이 깨듣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비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우주 여행 잡지를 보고 우주를 더듬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소련의 어떤 한사람이 260억원을 들여서 민간인 최초로 우주 여행을 갔습니다. 어떻습니까? 물어보니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가 우주에서 경험한 그 내용을 아무리 여기에서 말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똑같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경험하는 세계의 한계와 그 다음에 자기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속에서 고난을 당하면서 자기 속에 무엇인가 맺혀져 가는 결정체가 있는 가운데 체험되는 말씀의 세계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하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들으면서 경험을 경험합니다. ‘놀랍게 새로운 시각이 열렸다. 눈이 열렸다. 정리가 되어간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6개월이나 일년쯤 지나고 나서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냐하면 ‘내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세계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설교도 새로울 것이 없고, 여기서 배우는 것도 별로 새로운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심지어 더 막가면 어떻게 생각을 하면 ‘김목사 설교도 이제 바닥이 드러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좋습니다. 바닥이 없겠습니까? 누구에게나 바닥이 있고, 제 바닥은 더 얇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체들을 많이 다루면서 특별히 신학생들을 많이 다루면서 공통적으로 경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분투하는 삶이 없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말씀을 깊이 터득하고 그 말씀대로 분투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가끔 넘어진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다가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다양한 명암에 대해서 감지하는 인식의 폭이 넓어집니다. 그런데 삶이 멈춰지면 모두 그 소리가 그 소리로 들립니다. 어디를 설교하고 무슨 책을 읽든지 간에 마지막으로 잘살아라. 그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성경은 안 그렇습니까? 누가 성경을 읽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한말을 또 하고 한말을 또하고 하는지...’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나온다는 것입니다. 한 번 잊지 말라고 그 다음에 또 잊지 말아라. 또 잊지 말아라. 그리고 그 다음엔 기억하라. 기억하라. 다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고난 속에서 분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예증으로 드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에 설교를 들으면서 갑갑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본문을 쭉 들어갑니다. 쪽 성경을 풀어갑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너희 마음을 물같이 쏟아놓을 지어다.’ 같은 것이죠. 계속해서 많은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해석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그 성경을 깨트리는 설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호두알을 집어넣고 입속에서 굴리는 것과 같이 계속해서 건드리긴 건드리는데 그것을 와삭하고 깨트리면서 그 속살이 드러날 때에 비로소 성경본문에서 생수의 즙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못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물같이 녹아본 사람이 아니면 그것도 여러 번 그와 같은 경험을 한사람이 아니면 마음이 물같이 녹는 것에 대해서 설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기까지 생명을 걸고 충성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충성은 좋은것이여! 자 해봐! 복도 주신데. 아무개봐 충성하더니 집도생기고, 뭐도 생기고...’ 매일 이런 소리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서 충성하려고 생명을 걸고 몸부림쳤던 사람들은 충성을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대게 충성을 안 하려고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속에 충성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장애요인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깨트리고 들어가면서 성경의 물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다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설교하고자 하는 사람이 삶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녹아든 경험이 없이는 삶이 녹아든 설교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신자로써의 삶이 있는데 그 삶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녹아드는 것을 경험한 사람만이 잠자고 있는 성경속에 자신의 삶을 녹아들게 만들어서 성경말씀을 부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설교의 탁월함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청교들이라고 다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신학적인 견해들도 다양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약간은 알미니안쪽으로 간 사람도 있었고 정통적인 계열의 라인을 밝은 사람들도 있었고, 다양한 라인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쪽을 밟든지간에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분투하는 삶속에 녹아들고 말씀이 녹아들어서 정제된 그 삶이 성경을 설교할 때 스며들어서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분투하는 삶입니다. 분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말하고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는 상황에서 포기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더 이상 인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섬김을 정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평균적인 신자들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지도자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평균적인 신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서 그래서 포기할 영혼들을 데리고 오게 하고, 버려질 영혼들을 끌어안고 통곡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지도자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에 근접한 삶을 살아보지 않고 어떻게 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겠느냐하는것입니다. 어떻게 불을 지를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이 갔던 그 지점까지도 안 가서 포기하고 분투하기를 마다한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사기 행위입니다.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주목세계에서도 왕년에 주먹으로 놀던 사람이 보스가 되는 것인데, 거지들의 세계에서도 깡통차고 많이 빌어먹은 사람이 거지두목이 되는 것인데 이 체험의 세계인 이 신앙의 세계, 선교의 세계에서 자기는 도저히 분투해보지 않던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자기의 존재와 자기의 삶 가운데서 자기는 지도자로써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도장찍으면서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삶속에서 타협이 나오고 적당한 거래관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입니다. 모세는 분투하는 삶에 직면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노년이 되었어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았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백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입니다. 이것이 사실 천연적으로 타고난 성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설명을 안 해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사람이 두 가지 점에서 사역을 하면서 놀라운 감화를 받았습니다. 자기는 이 백성이 지긋지긋한데 하나님이 이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40년의 목회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모세의 가슴이 넓게 녹아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목회는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혼이 지도자인 나를 죽어도 만족시킬 수 없도록 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데도 그들을 향해 눈물로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영혼들을 향한 연민을 읽기 전까지는 결코 목회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중에는 영혼을 돌보는 것을 허술하게 하거나 태만하게 하거나 아니면 그런 소리를 듣기 싫어서 아예 영혼을 안 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목회 적인 마인드가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목회지에 가면 목회마인드가 생길 것이다.’ 절대 그렇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교인들로 보일 뿐이지 절대 그렇게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일학교 영혼들을 붙들고 눈물 흘려본 사람이 중고등부 영혼을 붙들고 울고, 중고등부 아이들을 붙들고 울던 사람이 장년들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지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모세는 여러 번 자기가 타고난 혈기를 발동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라고 하는 소원들을 많이 피력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모세를 감동시킨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래서 모세 자신이 즐겨 부른 찬송의 제목이 무엇이었냐 하면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한번 택하시되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저희 조상들의 언약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건져내시는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을 반역하는 무리들 위에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모세가 그 영혼들을 목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영혼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이 포악한 사람을 변화시켜 가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만약에 천성적으로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부르셔서 그를 사용하셨다면 우리가 얼마나 낙망되겠습니까? 우리의 천성이 얼마나 거칩니까? 모세도 이렇게 만드셨으니까 우리도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이 둘 다 고려를 같이 해야한다고 봐야 하는데 확실히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한 순간에 부어주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화의 경험이긴 하지만 우리가 어떤 때가 있냐하면 정말 저 사람이 미운데 하나님이 어느 한 순간에 내 마음을 녹이셔서 그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부어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보다도 더욱 일반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하려고 애를 쓰면서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람들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가시진 사람들로 우리를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자기 속에 넘쳐나는 주님의 생명력으로 자기 주위를 돌아보는 사람들이 될 때에 비로소 이렇게 따뜻한 가심을 가진 지도자로써 삶을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지도자가 아무리 탁월해도 ‘자기를 향한 사랑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지도자가 자지고 있는 거룩한 확신조차도 무자비한 감정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무자비한 감정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목회에 있어서 이 책망이 굉장히 중요한데 책망을 굉장히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책망을 할 때에 안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느낌이지 실지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무릎을 꿇고 누구에게 실컷 혼나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내가 미울 때가 있기 때문이죠. ‘내가 왜 이렇게 살까!’ 할 때 그때 누군가가 ‘무릎 꿇어! 이놈의 자식!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밖에 못살아. 이것도 목회라고 하냐! 이 녀석아!’ 그리고 ‘그렇게 하면 안돼.’ 하고 타일러주는 사람이 생각 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책망은 우리를 놀랍게 성숙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칭찬을 안 해주었기 때문에 미끄러진 교인들은 별로 못 보았습니다. 한번 안 해주고 넘어가도 좀 섭섭하겠지만 별 탈이 없습니다. 그런데 책망을 해야할 결정적인 순간에 책망을 안 했기 때문에 미끄러진 교인들은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책망이 좋은 데 책망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바로 사랑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사랑한다라고 말할 때는 야단칠 수 있습니다. 책망할 수 있습니다. 이 모세는 자기의 백성들을 굉장히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것도 결국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주님이 주신 은혜로 이긴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백성들을 마지막으로 죽어가면서 축복하였습니다. 굉장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잊혀지지 않는 지도자가 되게 하는 비결이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영혼을 향한 미움과 사랑은 시간이 좀 지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상대방에게 전해집니다. 반드시 전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한없이 커보이고 그리고 내 품안에 안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뭐냐하면 우리 자신의 사랑의 분량이 그렇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우리 안에 안 들어온다는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따스한 가슴을 가지고 영혼들을 깊이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목회현장에서 이상하게 똑똑한 사람들이 목회를 못하고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똑똑해 보이지 않고 어수룩해 보이는데 그런 사람들이 목회를 잘합니다. 똑똑하면 목회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 똑똑한 것이 항상 영혼을 향한 사랑의 물안에 깊이 잠겨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넘어져 신앙적으로 아주 미끄러졌습니다. 한 사람은 ‘난 네가 왜 넘어진줄알아! 첫째 넌 이래서 넘어진 거야! 둘째 넌 이것이 나빴어. 셋째 난 초기부터 알아봤어. 넷째 마지막까지 이렇게 살면 넌 배교자가 되는 거야! 다섯째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칼을 가신데.. 여섯째 회개해!’ 그리고 한사람은 앞사람보다는 넘어진 원인을 그렇게 잘 설명해줄수는 없어도 ‘네가 신앙이 미끄러져서 그렇게 곤고하게 살아가니 내가 견딜 수가 없구나!’ 그리고 목을 끌어안고 우는 사람이 오히려 목회하기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줄 알겠습니까? 그런데 너무 무관심합니다. 저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목사님! 목회의 소명이 어떻게 확인됩니까?’ 이렇게 물을 때 ‘특수한 것 말고 일반적인 것을 먼저 확인해라. 사람이 좋지 않으면 목회의 소명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다. 목회자 좋다. 사람이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사람이 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뭐가 귀합니까? 매일 매일 방탕한 길만 걸어가고 매일 하나님을 속썩이고 목회자의 속이나 뒤집어놓고 다니는데 무엇이 귀합니까? 안귀한 사람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목회자는 그런 시각을 가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소중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 자신의 도덕적인 생활이나 교회에 헌신하는 생활 때문이 아니라 또 나를 추종하는 자세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귀한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 안에 계신 하나님! 그가 주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켜셔서 받으실 영광을 아무도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정말 귀한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는 것이 따뜻한 마음을 갖는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집사가 되었을까? 완전히 날강도 같은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구역장이 되었을까? 저 사람은 신앙생활을 계속 안할줄 알았는데 어떻게 목사가 되었을까?’ 이런 것이 우리주위에 증거가 많습니까? 적습니까?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영혼에게는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기대를 가지고 그를 지켜보는 것이 많은 희생을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면 내가 가서 안아줄꺼야’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끊임없는 무관심과의 싸움이고 자기 이기심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소중한 것을 주고, 그를 위해 시간을 내고, 그를 섬기는데서 보람을 느끼고, 내가 무엇인가를 섬겨서 그 영혼이 잘되는 것을 인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자체를 인해서 내가 하나님앞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그런 훈련들을 지금부터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가만히 보면 이기적인 사람들은 대부분 신학하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사역을 모르고 신학을 모르는 사람은 독선적이지 않고 마음이 많이 열려있고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이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은 이상하게 닫혀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안엽니다. 물론 우리교회에는 내가 신학을 하는데 하면서 뻐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인정을 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제가 깊이 칭찬하는 바입니다. 물론 실제로 특별한 것이 없으니까.. 그러나 제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 교회 신학생들은 신학생이란 티를 안낸다.’ 라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삶에 있어서는 신학생의 티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비록 신학교 1,2학년밖에 안되었지만 그 사람을 씹어보면 목사냄새가 좀 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평신도들이 같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사람이 완전한 나의 모델이라고는 내가 말할 수 없지만 확실히 나와는 다르구나!’ 하면서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그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까지 모두 평준화되어버리는 것이 열린교회에서 신학생에 대해서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는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의 애국 애족주의를 논한다고 하는 것은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그는 하나님때문에 그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보십시오.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볼 때에 그렇게 막돼먹게 사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을 포기 할 수 없었던 내면의 마음의 작용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함께 홍해를 건넜습니다. 함께 애굽의 불병거의 추격을 받으면서 함께 그 밤의 홍해 앞에 서서 울부짖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 광야의 모든 고난의 길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함께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서 한없는 공동체 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제가 설교 중에 늘 이야기 하지만 한 지체를 보고 그저 한 사람이라고 보지 말고, ‘우리의 피를 나눈 형제다. 그리고 정말 주님이 피로 값주고 사신 지체다. 내가 주님 앞에 한없이 소중한 것처럼 그 지체들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내게 있어서는 너무 큰 행복이고,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그들을 돕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아직도 ‘열린교회에서 무엇을 좀 배워가야 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빨리 떠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입니다. 웬만한 교회 같았으면 벌써 정리했을 것입니다. 신학생이 100명이 뭡니까? 물론 거기엔 일반 학과도 있지만 그 사람들은 신학생이라고 여기지 않을 때 한 50명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것이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런데 빨리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워가지고 가야겠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안 배워집니다. 절대 배워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배워가지고 가봐야 소용도 없습니다. 상황이 다리고 사람이 다른데 여러분들이 가가지고 김목사 목회하는 것을 흉내낸다고 그러는데 될것같습니까? 안됩니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다시 한번 부탁하는 바는 여러분들이 신학생으로써의 모든 껍질의 의식을 버리는 것은 좋은데 좋은 신자가 되려고 분투하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명제에 대해서 건성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하면 바로 신학생들입니다 자기는 상당히 됐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이 속에서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를 함께 세워져 가는 가운데에 자신도 세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상당히 뼈아픈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들은 ‘왜 열린교회엔 교회가 커지고 규모가 이만해 졌는데 왜 큰 교회들이 하는 그런 식으로 안 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더라도 나이가 어린 교회는 사람들이 전기줄에 앉아있는 참새와 같습니다. 언제든지 상처를 받으면 훨훨 날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지 상처를 가슴에 부여 앉고 그리스도의 교회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이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 겠다는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정확히 지적한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받고 펑펑 울고 그렇게 해봤자 결국은 당신들이 사랑하는 것은 김남준 목사가 있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초기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는 과도기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우린 이런 사고방식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고 이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 나의 임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자기를 깨트려서 한 장의 벽돌로 삼아 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세워야 되겠다’라는 그런 의식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가끔 잘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은 많이 들려주는데 봉사할 기회를 안 줘서 우리의 신앙이 적극적으로 활기 있게 안되고, 교회의 소속감이 덜하고 그래서 사역의 지경을 넓여야 한다’. 다 좋습니다. 다 좋은데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면 말씀대로만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면 코피 납니다. 그런 얘기가 안나옵니다. 그런 말이 안나옵니다. ‘할 일이 없어서.. 은혜만 받기만 하다보니까 너무 많이 쌓여서 속에서 썩는다’고 그러는데 썩을 만큼 은혜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고 무슨 두부입니까? 사람들의 생각이 굉장히 다른 곳에 가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듣고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인님의 언약의 말씀이 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삶을 살아라’ 그런데 솔직히 그것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그래도 코피가 날 정도로 우리에게 버거운 삶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그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본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더욱이 사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더욱 몰두해야 할 바가 많고,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사역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이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습니까? 주경야독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른 사람과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혼자 걸어가려고 하는 그런 식의 신앙생활과 결별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면서 지체들을 섬기고 지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도 섞이지 않고 살도 섞이지 않은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지체이고 피를 나눈 한 형제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이 사귐을 허락해 주신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된 이 교회를 설교자와 목회자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어떡하던지 교회를 교회되게 세우는 이 일에 기여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교회 되도록 하기 위해서 목양의 관계가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도 필요하고 또한 우리가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만남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그 일에 기여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쓰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제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깊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굉장히 많이 사람들의 마음이 사람들로부터 떠나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길 ‘하나님께 너무 집중된 나머지 사람에게 신경 쓸 수가 없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 정도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모두다 자신의 사랑 없음을 호도하는 이야기입니다. 보십시오. 목회를 하다가 보면 사람들을 수없이 부닥치면서 다양한 삶속에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고 사랑하면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해도 목회자인 나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축복하고 보내야 하고 그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는 돌아올 마음이 없어도 나는 기다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렵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사랑은 가슴앓이입니다. 사랑은 정말 가슴앓이입니다. 이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못 알아주는 것이 하나님앞에서 우리의 상받을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인데 설교를 하다가도 교회를 떠난 지체들의 이야기가 나오면 할말이 없어집니다. 너무너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교인이 하나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사랑이 없는 자’인가 때문입니다. 언젠가 지체 한 명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몇년전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의 깍듯하게 차리고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제게 정식으로 고하고 교회를 떠났는데 저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아서 내가 그의 마음속에 차지 않아서 교회를 떠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정말로 하루도 가슴에서 생각이 안 나는 날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너무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떠나고 나서 나를 거의 생각 안 했겠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 말하건대 네가 떠나간 후로 하루로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적이없다.’ 그것이 가슴앓이입니다. 저도 하나님도 좋아하시고, 나도 내가 좋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면 목회를 하고 싶지 누가 안하고 싶겠습니까? 어떤 때에는 내가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이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가 하면 어떤 때에는 내 자신이 용렬하고 사랑이 없어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 단지 실수로 사람들의 마음에 실수를 주거나 고통을 주어서 그들이 교회를 등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 자신에 있는 하나님의 관계에 있는 결핍이 함께 결합을 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지간에 그 점에 있어서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영혼들을 섬길 때에 그 영혼들이 떠나갔다면 그 영혼들의 일부는 강퍅해서 주님을 거절하고 주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기 때문에 우리 곁을 떠나갔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 판단을 하지를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회심하지 않은 신자는 교회의 회원입니까? 아닙니까 회원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심하지 않은 신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있는 회심의 가능성과 또 회심여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의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주님이 명백하게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양과 염소를 갈라서 세워놓기 전에는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체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끌어않고 이 목회의 길을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어려운 길입니다.
③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지금에야 저도 모르게 왔다가 떠나는 지체들도 있지만 교회속에 깊숙히 들어왔다가 떠나는 지체들이 있었는데 특별히 장년 가운데 마지막에 아직까지도 ‘그래 가라!’ 그렇게 말한적이 없었습니다. 마당에까지 나가서 차에다 시동 거는 자를 붙들고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같이 신앙생활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떠납니다. 마당까지 나가서 도로에까지 나가서 작별을 하면서 돌아서면서 한없이 웁니다. 물론 제겐 판단이 있습니다. 그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제가 양보하는 점이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더 많은 사랑이 있었더라면... 정말 내가 나보다 그를 더 많이 사랑했더라면 나를 대하면서 그가 차가운 논리만을 느끼진 않았을 텐데.. 내게 사랑이 없다.’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 고통 속에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모두 상처난 가슴을 부등껴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들 치고 예수 믿어야 할 명백한 이유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망가진 사람들이 십자가의 깃발아래 모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저는 그래도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일찍 변화를 받았습니다. 스물 다섯 여섯때 변화를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교사를 해도 눈물이 있는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이 안 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혼들이 건강하지 않은데 눈물이 안나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역을 해왔는데 그래도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 자신이 너무 용렬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이 없습니다.
모세처럼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 사랑 받는 사람에게 받는 비난은 원래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 퍼붓는 화살보다도 더 아픈 법이 아닙니까? 그런데 모세가 그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퍼붓는 근거도 없는 그 비난을 보면서도 온유함이 승하였더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이 논리를 덮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이 제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젊은 때에 얽매인 것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고, 사랑해서 부등껴 안고 하루잘수도 있고, 그리고 내가 하루를 내어줄수도 있고,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털어서 다 줄 수도 있는 혼자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때에도 그렇게 지체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목양의 현장에서 자기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자기의 가슴을 찔러서 피흘리게 하는 그 사람들을 끌어안고 갈 수 있을까? 저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자이기 때문에 너무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지만 저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하면서 우리 집사람은 자기의 인생이 바뀐 설교라고 얘길 하는데 저는 그 설교가 진짜 뼈사이에서 울어 났습니다. 이제껏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다시 새로운 각도에서 복음을 보도록 만들어준 제게 있어서 하나의 개안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명제를 내린 다음에 청교도들의 저작들을 보니까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제가 무엇인줄아십니까? 모든 신령한 은혜체험의 마지막 은혜체험은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이는 소용이 없고’ 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과 신령한 은혜의 체험이 적대관계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접촉한 모든 신령한 은혜체험의 진실성, 그 마지막에 맺혀지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들을 모두 올바른 길로 인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교역을 하면서 보면 우리가 영혼들을 향해서 얼마나 무능한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매주매주 절감합니다. 안됩니다. 가르쳐도 안되고, 타일러도 안되고, 심방가도 안되고, 책망을 해도 안되고, 밥을 사줘도 안됩니다. 그런 영혼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느 시점에서 ‘얘야! 너는 할 일을 다했다. 이젠 버려라’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시는 영혼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고백에 의하면 죄인중의 괴수와 같은 자기에게도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우리들이 몸부림을 치면서 영혼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고 섬깁니다. 섬기는데 마지막에 결국 못 섬기고 남는 부분은 무엇이냐 하면 끌어안고 울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목회의 성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때에 형제애를 누리면서 사랑하고 핏덩이처럼 여기면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고 이렇게 하면서 사랑하고 그리고 고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섬기는 것들을 보면 정말 목회자적인 심성이 빈약한 사랑의 실천 속에서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런 뜨거운 사랑을 받아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이 감동시키신 사람으로부터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아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으로 인해서 그를 사랑해주면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 받고 살아가는 것이 오래도록 중단되었으면 그런 식이 되었겠습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앞에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기까지 부단하게 자기 깨어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도 성화의 과정속의 중요한 열매입니다.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은 사랑을 안 합니다. 왜 사랑을 합니까? 사랑이 얼마나 힘든 것인데 그러니까 무단한 자기의 깨어짐 그 속에서 사랑의 의무를 지고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자기에게는 기쁨이 되고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까지 끌어안고 가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영혼을 향한 눈물이 있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그런 사랑이 있습니까? 핍절한 영혼 고통하는 영혼 우리가 사역을 하느라고 애를 쓰는데 결국은 등을 돌리고 총총히 발걸음하며 우리를 떠나가는 그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우리에게 그 영혼의 아픔을 바라보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그런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의 자질들이 목회에 있어서 강조되어야 하는데 그것보다는 단순하게 유능함만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큰 교회 능력 있는 목회자! 그것 말고 여러분이 매일 능력 있는 목회자는 이야기하면서 사랑이 있는 목회자는 왜 이야길 안 합니까? 이미 벌써 능력은 성취를 보장하는데 사랑은 성취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줄 이해하시죠? 능력은 성취 지향적인 삶을 꿈꾸는 삶에 있어서 필수조건인데 사랑은 오히려 성취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를 더디게 만들지 않습니까? 빨리 버리고 가면 더 많이 얻을 수 있는데 그 하나를 붙들고 흐느껴 우는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께 감동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기 때문에 그 무시무시한 카리스마! 굉장했지 않습니까? 비느하스의 사건을 통해서 수없이 사람들이 죽어갔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을 보는데 이 칼날 한가운데 서있던 사람이 이 냉철한 지도자 모세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뢰하고 그를 깊이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너무너무 사람들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편에 서있다는 미명하에 잔인 무도했던 사람들이 누구 였느냐하면 바로새인들 이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는데 하나님앞에 바쳐진바되었다. 고르바라고 하는데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원천적으로 부모에 대한 사랑이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 존재를 안 했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호도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언제나 냉철했지만 언제나 백성들을 끌어안고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그런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
또하나 모세가 이렇게 큰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냐 하면 그의 탁월한 지혜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리고 그 조직을 만들면서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가는 과정을 보면 이것은 굉장히 놀랍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가는 과정들을 보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냐면 이 모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을 하고도 남았을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도록 하신 지혜일수도 있고, 애굽에서의 철저한 교육이 가져다준 조직적인 사고 방식의 소산일수도 있고, 하나님이 일을 부딕칠때마다 그때그때 번득이는 지혜를 하나님이 주셔서 인도해 주셨던것일수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지간에 그것은 세 가지 중에 하나일텐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교역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항상 눈물과 하나님앞에 성결하고 깨끗한 삶.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능력 그것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냐하면 날이면 날마다 모든 사람들이 은혜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이 아무리 은혜 속에서 산다고 해도 교회가 매순간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응답을 받으면서 걸어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화장실 공사를 하는데 무슨 하나님의 응답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기술자를 불러다가 공사를 해야 합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5층에다 유아부실을 만들고, 교회사무실을 큰 곳으로 옮겨가고, 그 다음에 직원들이 더 들어오고, 그리고 인터넷실이 들어오고 이런 변호가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이냐 하면 지혜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도자는 똑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목회자의 대부분은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역이 딸리는 것은 교인이 뒤에서 욕을 하는데 지혜가 모자란 것은 대놓고 욕을 합니다. 영역이 딸리는 것은 미래의 목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는데 지혜가 딸리는 것은 현재의 목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단과 일을 해결하는 능력같은것들이 아주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사람마다 각기 타고 날 때에 탁월한 지혜를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 있고 좀 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좀 멍한 사람은 태어날 때에 별로 엄마아빠의 밭이 시원치 않아서 지혜롭지 않게 태어났습니다. 그럼 어떡하냐 하는 것입니다. 태생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어떡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혜는 선천적인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스러운 삶을 살아가면 지혜가 누적이 됩니다. 옛날에 신학적으로는 우리입장과는 다르지만 워치만 니라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불세출의 영적 지도자이죠. 굉장히 수재에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 전도 여행을 합니다. 그런데 1-2000km를 전도여행을 하면 수천 명의 결실자가 생겨납니다.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방법으로 전도할수있느냐’ 물어보면 그 사람들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연구한 적도 없고 어디서보고 배운적도없고 다만 잘하려고 애를 쓰다가 보니까 그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교역과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목회자는 판단과 모든 생각이 단선적이면 안됩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결정을 할 때 어떤 사람이 튀어나와서 즉흥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런 이런 것이 아닙니까!’ 얘기를 했을 때 목회자는 ‘거의다 그것도 이미 검토했습니다만 이런 측면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한 4-5단 정도 되어도 한 수를 노면 20수까지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판단이 흐린 것입니다. 교회에는 똑똑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똑똑한 교인들이 볼 때에 판단력이 상식이하이고 지혜가 모자란다고 판단될 때에는 성도들이 교회생활을 할 때에 한없이 갑갑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도자로써 신뢰하고 따를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그 점에 있어서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우리들이 모세처럼 많은 학문을 통해서 혹은 선천적인 지혜를 타고나지 않았어도 우리들이 해야할 것은 무엇이냐면 무엇을 하나님앞에 맡았으면 그것을 끝까지 잘하려고 애를 쓸 때에 비로소 거기에서 최상의 열매들이 맺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엔 안 계시지만 콩나물 하나를 가지고 인생을 거신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콩나물을 먹은 다음부터는 다른 콩나물을 안 먹게 되었습니다. 다른 콩나물을 먹지 마십시오. 안 먹는 것이 신상에 좋습니다. 농약이나 비료를 거의 안 쓰고 안벽 하게 콩나물을 만들어 내는 제조법을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농약을 안 쓰거나 비료를 안 쓰면 발육이 더디거나 뿌리가 상하는 것이 콩나물입니다. 그런데 이 양반은 이것을 가지고 엄청나게 연구를 많이 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해낸 것입니다. 그 분이 콩을 놓고 물을 부면 되는 간단한 원리를 얼마나 복잡하게 생각을 했겠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남들이 간 지점까지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로써 그러한 판단을 내리면서 갈 수 있도록 훈련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잘하려는 욕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결코 업그레이드되지 않습니다. 제가 요즘 교역자들에게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인데 뭐냐하면 교회는 교인이 100명일 때에는 300명의 교회를 생각하면서 1000명은 2000명을 생각하면서 교회의 그릇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따라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냐면 사고가 진취적이고 개방적이고 그러면서도 이 사고의 폭이 굉장히 넓고 창의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한다면 우선 교회의 체제자체도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본인 자신이 철저하게 하려고 해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입니다. 교사하나를 하면서도 이 영혼들을 데리고 교사 리바이벌에 나와있는 그 삶을 한번 그대로 구연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그 영혼을 위해서 살면 목회에 대한 윤곽을 거의 잡습니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대충 대충 때우면 3,4,5년 심지어 교역자 생활을 해나간다 할지라도 전혀 변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특성이 있냐면 충성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잘할려고하면 그에게 놀라운 지혜를 하나님이 주셔서 그래서 완성된 지도자로 만들어 가는 측면이 있지만 그가 그렇지 않고 대충 대충 하려고 하면 그 섬기고 사역하는 그 과정이 아예 그를 망가트려 버립니다. 아예 질이 안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질이 안 좋은 사역을 말하자면 하나님앞에 올바르지 않은 태도로 오랫동안 사역을 잘못해온 사람은 아주 쓸모 없는 심성과 이 모든 것들이 일그러지고 망가진 그런 지도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디에서 어떠한 자세로 교역을 하느냐 하는 것도 여러분들이 지도자로써 완성되어 가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 한 예가 무엇입니까? 모세를 이어서 지도자가 외었던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쉽게 말하자면 이미 벌써 모세가 있을 때부터 모세를 이를 지도자로써 자라가고 각광을 받으면서 서서히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아주 신앙이 있고 패기 만만하고 그러면서도 합리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냐 하면 모세와 같은 통이 큰 지도자 밑에서 소신껏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려서 섬기는 훈련을 해온것입니다. 그리고 시류에 연합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배려 받는 곳에서 충성된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죽고나자마자 준비되었듯이 여호수아의 시대가 활짝 꽃핀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잘못하던 사람들이 다시 신앙생활을 하면서 변화되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굉장히 어렵습니다. 쉽게 우리들이 잘 쓰는 용어로 패역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처럼 굽은 것을 펴서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교역을 포함해서 심지어는 작은 구역장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들을 돌보는 그 영혼이 올바로 펴지는 것은 그렇게 패역한 신자들이 똑바로 펴지는 것보다 열 배정도 힘들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좀 냉혹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교역자의 세계에 이렇게 들어가 보면 노는 물이 따로따로 있습니다. 노는 물이라고 말하니까 너무 야비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사실 정말로 그렇습니다. 목회자들이 많이 있는데 같은 목회자다 하고 섞어 논다고 해서 섞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어나 신학적인 사고나 인생관이나 인격적인 수준 이런 것들이 워낙 격차가 나면 아무리 자신이 동류를 만들려고 해도 동류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의 세계의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목사대 목사로 만나는데 이 목사가 저 목사의 양떼입니까? 목양을 합니까? 사랑으로 품어 안아서 한 교회를 세워 가는 것도 아닌데 얼마든지 안 만날 수도 있는데 괜히 만나서 피곤하게 그렇게 성화의 과정의 고통을 당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 자신이 의식이 아예 없고 세속적인 목회자는 의식이 있고 경건하게 살아가려는 하나님앞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속에 놓여있으면 외톨박이가 되어서 할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고민하는 것은 얼마나 교회를 크게 할까? 사례금을 얼마나 올릴까?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조곡교회의 아픔이 어떻게 하는데 얼마나 고통이 고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동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면 목회자들도 가만히 보면 그 교제가 그 사람의 사역에 엄청나게 영향을 줍니다. 그런 문제를 앉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100명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사람을 1000명이 되는 교회에 데려다두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그가 계속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에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셨듯이 그 자신이 잘하려고 끊임없이 애를 쓰는 가운데 자신이 업그레이드 될 때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도 크고 목회자도 같이 커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노력을 안 합니다.
열린교회에 이야기이지만 무엇이냐 하면 우리교회 전도사님 부목사님들. 모두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분들 중에는 모두 600명 이상 되는 교회에서 섬기시던 분들이 없습니다. 교회가 커가면서 제가 느꼈던 가장 커다란 고통은 무엇이었냐 하면 유능한 참모입니다. 지금도 굉장히 간절히 원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파이퍼목사님이라고 미국에 유명한 Writer가있습니다. 굉장히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가진 작가입니다. 우리 나라의 어느 한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얼마 있으면서 파이퍼 목사님께 배우고 싶어서 파이퍼 목사님께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그 교회에 출석하면서 배우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라고 편지하자 답장이 왔는데 파이퍼 목사님께 답장이 온 것이 아니라 실행비서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파이퍼 목사에게 편지를 썼는데 비서가 답장을 보내주었으니까.. 그런데 ‘읽는데 하나도 기분이 안나쁘고 너무 기쁘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뭐하고 적혀있었냐면 ‘우리 목사님이 너무 바쁘셔서 편지를 쓰실 수 가 없으십니다. 목사님에게 당신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 같은 자에게 와서 배우겠다니 오히려 영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여기 와서 우리교회에 출석하시면 우리목사님이 두 번 당신을 만나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외에는 목사님이 너무 바쁘셔서 보장을 하실 수가 없으시답니다. 그러나 오시면 한없이 영광으로 생각하시겠답니다.’라고 답장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써서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이퍼 자신이 너무 사역으로 바쁘니까 그것을 비서가 답장을 해주었는데 받았을 때에 받는 사람이 거의 파이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친절한 편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호가 2-3000천명 정도 되면 담임목사의 비서를 세워두게 되는데 비서의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담임목사는 그 사람을 세우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담임목사가 한없이 욕을 먹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고 앞으로는 사역자체가 이미 전문가를 부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혼자서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양도 할 수 없는 리더쉽의 기본적인 골격들이 있습니다. 설교라든지 기도라든지 목회의 방향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무슨 협의체로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 선교는 선교전문가가 필요하고 장애인사역은 장애인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건축을 하려면 건축전문가가 필요하고 교육을 하려면 교육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안하면 그 사람이 바보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많이 변해가고 얼마나 많이 전문분야에 대해서 연구하는 세상인데 ‘자기 혼자서 다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 근대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것들이 아무리 강조된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함께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이 탁월하게 업그레이드 되어 가는 자기 성장이 없이는 결국은 자신들이 계속해서 뒤로 처지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는데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앉아서 수많은 사람들의 재판을 했는데 결국은 기절할 정도로 피곤했겠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백성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일어났겠었습니까? ‘나는 갔는데 모세가 한참 피곤했는지 대충 판결을 해주더라. 아침에 갔더라면 나에게 손들어 주었을 텐데...’ 그랬지 않았겠습니까? 이드로가 와 가지고 ‘당신의 하는 일이 왜이리 바보 같으냐! 가서 100부장 1000부장 50부장을 세워라. 그래서 작은 일들은 그들로 판단케하고 당신은 커다란 일을 처리해라’ 라고 이 문제를 해결해주니까 모세도 살고, 이스라엘 전체도 살고, 공동체속에 생기가 돌지 않습니까? 이것이 영적인 역사는 아닌데 그만큼 그런 것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공동체 자체가 소진하는 어려움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제가 당부하는데 정말 여러분들이 똑똑한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좋은 학교가 나왔다거나 선천적으로 기가 막힌 머리를 타고 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해도 잘하려고 심여를 기울이는 가운데 그때 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현수막을 걸어둡니다. 물론 제눈에 아직 안 차는 현수막도 많지만 ‘아무 것이나 하나 걸어두면 어떻겠는가?’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교회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 동안에 굉장히 많은 시간동아 지체들이 머리를 짜내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또 심지어는 야단도 맞기도 하고, 잘못해서 지워버리기도 하면서 만드는 제도 업체, 디자인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기획하는 실무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앞으로 사역을 해나가게 되면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평범한 삶은 사역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하난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이 미래에 어떤 재목이 될수있느냐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작은 것을 섬겨도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한 교구에 들어가서 국장하나를 하고 하다못해 구역장 하나를 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면 내게 위임된 권한하에서 어떻게 내가 최선을 다해서 이 영혼들을 잘 돌볼 수 있을 것인가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나름대로 최상의 방안들을 찾아서 같은 구역자장들이 모였을 때 여러분들이 간증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의 지도자들이 가져야될 자질인 것입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모세의 손에 이끌려서 걸어가다가 힘들어서 모세를 대항하긴 했지만 신앙이 없어서 대항하긴 했지만 그러나 결국은 이 모세를 자기의 지도자로 알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그런 복종의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모세가 자신들보다 훨씬 똑똑했기 때문입니다. 완벽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똑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앞에서 목회라고 하는 사역의 길을 준비하면서 걸어갈 때에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설교가 굉장히 중요한데 설교는 열 번을 죽을 쓰다가 한번을 잘하면 열번못한 것을 다용서해 줍니다. 그리고 기대를 걸어봐야 10%밖에 안되지만 항상 ‘오늘 가면 바로 그 장열하는 장외홈런이 설교시간에 터질 것이다’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리더쉽은 다릅니다. 열 번을 잘하다가 한번 지혜가 없어서 공동체를 어려움 속에 몰아넣으면 열번 잘한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교회에 갈 때 지도자가 결단을 내릴 때에는 겁부터 나는 것입니다. ‘저것도 헛방이지! 저곳도 헛방이지!’ 그런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판단력과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해나감에 있어서의 치밀한 지혜! 이런 것들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최선의 섬김을 완수하려고 하는 그런 강인한 목표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만들어 갈 때 지고자가 자신의 공동체를 계속해서 업그레이드하면서 지도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식이 있고, 똑똑한 사람이 교회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는 일이 하도 용렬하고 짜증이 나서라도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지혜가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충성스러운 삶의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충성스러운 삶의 문제입니다. 신약에서 모세를 소개할 때에 제일 먼저 소개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의 집에 충성된 사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또하나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 되기도 했는데 계시록에 넘어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충성된 증인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삶이 이 사람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자기 깨어짐, 그리고 부단한 자기 부서짐, 그리고 하나님을 대면함, 사역을 붙들고 고뇌하면서 씨름하는 모든 것들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운 마음이 남이 걸어가지 않은 그런 삶을 걸어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잘 안되어 갈 때 이유가 없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인이 줄어든다. 신앙이 떨어지고 은혜를 못 받아서 그렇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교인들이 헌금을 안해서 그렇다. 그런 것들은 모두 현상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자기의 관계에 대해서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충성을 하되 이 모세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한 사람입니다. 정확하게 틀림없습니다. 교사를 충성스럽게 하던 사람이 전도사도 충성스럽게 합니다. 제가 교사를 할 때에 신학생들 중에서 ‘저 사람은 안 된다’라고 했던 사람은 목회를 하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안됩니다. 너무너무 가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교회에서 임명을 하고 몇 푼의 사례금을 줘서 명찰을 달아주어야 섬기는 자세가 달라지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슬픈 것입니다. 오히려 바뀐 것이 별로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신학생들이 만약에 구역을 맡았다고 하면 신학을 지망하지 않은 사람과의 구역과는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충성이 남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 충성은 현재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의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충성된 심정을 가졌으면 부귀와 영화와 안일한 길을 모두 버리고 그리고 그 고생스러운 신학의 길을 가겠다고 결단을 내렸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그런 충성스런 마음이 계속 역사해서 영혼들을 맡겨주었으면 그 영혼들에 대해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영혼을 섬겨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몇 일전에는 ‘신학생 교구를 하나만들어?’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제 생각에 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을 방목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우리교회에 있다가 사역을 하러 떠납니다. 떠나야지 어떡하겠습니까? 떠나기는 하는데 아직 미완성입니다. 누군 완성이 있겠습니까? 어떤 지체를 보면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역을 잘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아주 질이 나쁜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이 전격적으로 만나주시는 희망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되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제 열린교회에 들어오는 신학생들에 대해서는 ‘관리를 해야 되겠다. 그것이 결국은 조국교회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평신도인 경우에는 그냥 받아주지만 신학생인 경우에는 가부간의 결단을 내리게 만들어서 그러니까 ‘교회에서 특별관리를 받으면서 목회자로써 훈련을 받겠느냐? 아니면 간섭받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려면 그런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을 했느냐 하면 신학교에 다니는데 목양권안에 안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목양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 신학생이 무엇이 될 사람입니까? 새가족반에 들어오지도 않고, 말도 안 듣고 구역예배도 부탁하면 빠지고 철야기도를 나오나 반을 맡겨주면 이것을 맡나! 이런 식의 삶을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미래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고서 결국은 ‘열린교회에도 별로 배울 것이 별로 없더라’ 하면서 떠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평신도로써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신학생이라는 딱지 이런 것들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앞에 외식함 없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여러분들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적으로는 여러분들이 특별한 관리를 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너무 여러분의 맘대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왜 충성스럽게 살지 않습니까? 소명은 소명받은 일에 대한 열정을 통해서 입증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이 신나고 그 영혼을 돌보는 일이 보람이 느껴지지 않으면 소명이 아닙니다. 왜 자꾸 소명이라고 그럽니까?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은 자기의 부르심과 관련된 일을 할 때에 마음속에 한없는 기쁨이 솟고 마음속에서 그 일에 대한 열정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마치 술꾼들이 술집 옆을 지나가면 그냥 지나갈 수 없듯이 자기의 내재되어있는 어떤 성향이 자기로 하여금 그 일 이외에는 기쁨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소명이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점에서 놓고 보면 신학생인데도 영혼에 대해서 너무 무책임한 사람. 심지어는 소수이긴 하지만 주일도 제대로 지키질 않고 제멋대로 빠지고 특별한 이유 없이 수요예배에도 안나오고 전도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그런 식의 막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는 여러분들에게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가 다 살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약의 기록자들이 모세를 회고하면서 느낀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의 충성된 삶이었습니다. 자신이 뛰어난 불세출의 지도자였지만 하나님께 많은 능력을 받은 사람이었고 주님과 대면한 사람이었지만 그리고 주님과 대면한 신비의 경험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강력한 영력! 그리고 애굽에서 훈련받은 뛰어난 학문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아는 놀라운 지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사역을 하긴 했지만 이런 것들이 자기로 하여금 충성스러운 삶을 어느 정도 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식의 생각을 하면서 사역을 한 것은 아니었다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모세는 자신이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목숨을 내놓은 삶이었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영혼을 향해서 눈물이 있는 지도자 그리고 그 영혼을 인해서 고뇌하는 사람!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고하면 무엇이든지 잘해 보려고 몸부림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역의 길로 들어서길 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역자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능력이 모자라고 경험이 없어서 잘알지못하는 것은 무제한으로 도와준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자신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나는 도와줄 수 없다.’ 그것은 교역자로써 도움을 받을 것이 아니라 그만두고 사역의 날개를 접고 내려가서 평신도로부터 받아야 할 도움입니다. 교역자가 교역의 길, 목회의 길로 들어설 때에는 이미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 자신을 간절히 찾고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몸부림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충성된 삶을 살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그런 것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결국은 영혼을 앞에 놓고 그 속에서 절망을 느끼면서 ‘나는 능력이 모자라는데 주님의 일은 아름답게 완수가 되어야 되겠다’고 하는 이 목표 의식속에서 고뇌하면서 온전함을 이루어갈려고 몸부림 치는것에서 오는 견디기 힘든 압박과 고통! 그 거룩한 긴장! 이런 것들은 그의 사역의 마당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전도사때 영혼을 붙들고 그렇게 아파하면서 울어보지 않았던 사람들은 목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맡았던지 간에 여러분들이 맡겨진 자리에서 하나님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이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과는 문제가 아닙니다. 성과는 나중문제이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섬기는 그 자세 자체를 깊이 인정해주실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여러분들이 지도자로써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주님을 위해서 죽음을 넘나든 삶을 살 때에는 ‘나와 같이 죽으러 가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기가 싫으면, 자기가 그렇게 하나님앞에서 충성스럽게 사는 삶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이야길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로써 있지만 그 지도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지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교역자가 되어서 한번 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에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들의 마음에 불이 질러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 주의 영광을 위한 목매이는 마음!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그 치열한 몸부림! 그것을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내 사역이 그것을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불러 일으키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사역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이들을 이렇게 만들어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혼들은 아주 예민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느낌! 모든 생각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자기가 맡고 있는 일의 성취를 위해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는지,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마음에 불붙어서 영혼들을 위해 목이 매이는 지’를 영혼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양떼들이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영혼들을 향한 연민을 가지고 있는데 ‘수나 불릴 라고 그러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의 생각입니다. 나의 양심이 하나님앞에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앞에서 충성을 발견할수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충성은 환경은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없도록 가로막는데 우리들이 분투해서 그 환경을 개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될 수 없는 것인데 너무도 그 일이 고귀하기 때문에 그 일이 되게 하기 위해서 치르지 않아도 될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그 결과를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입니다. 신학대학에 있을 때 학생들을 전도사로 소개시켜달라고 동료 목사로 연락이 옵니다. 소개를 해줍니다. 그러면 그 목사 밑에서 훈련받는 전도사보다 그 전도사를 데리고 있는 목사가 더 힘들어합니다.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예가 매일 교회만 나오면 힘들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하도 열을 받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야 이 자식아!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 있냐? 토요일날 와서 애들 심방하고 주일날 겨우 중고등부 설교하나 하는데 그것이 뭐가 힘드냐? 안 할려고 하면 그만 둬라!’라고 말했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팽개치고 그냥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무슨 영적 성장을 기대하겠습니까? 고난도 피하고 그리고 충성스러운 삶을 방해하려는 모든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저 교역자가 되고 싶어하는 그 심리도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것이 밥벌이도 아닌데 얼마나 힘든 길인데... 어떻게 그런 교역자의 길에 들어서면 비로소 충성이 발동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마찬가지인데... 여러분들이 대부분 목회에 있어서 기본적인 윤관은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 떠지는 것이 아니라 목회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떠집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제발 충성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밤중에 교회당의 불이 다 꺼졌는데 흐느끼면서 우는 사람을 보니까 신학생이더라 교역자도 아닌데 그렇게 흐느껴 울더라.’ 여기에 전도사님들도 있고 부교역자들도 있지만 제가 벌써 알고있습니다. 제가 수시로 본당에 내려옵니다. 교인들이 영혼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아파하고, 그러면 새벽기도 가지고 성에 차지 않아서 한밤중에 나와서 그렇게 목매어 하나님앞에 기도합니다. 같이 목회를 하는 입장이니까 제 마음도 찢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느 영혼이든지 주님의 마음에 그 영혼들이 바로 서지 못하는데 주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 찢어진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일평생 가슴앓이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충성된 삶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도 그런 충성된 삶의 와중에서 생겨나는 성화의 열매입니다. 리차드 백스터의 회심이라는 책을 보면서 참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그 책에서 그가 회심치 못한 자기의 교구의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 내가 주님의 나라에 간다면 당신들이 하나님을 향해 회심하지 않은 것을 무엇이라고 둘러대야 되겠습니까? 나는 할말이 없을 것이고 마침내 여러분들의 이름을 주님이 부르실 때에 내눈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를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된 삶입니다. 그것이 충성된 삶인 것입니다.
요즘에 번저가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부교역자들의 무기력입니다. 이것을 제가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역자가 가정을 잘 돌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가정을 목회자가 가지고 있을 때에 사역의 날개를 달은 것처럼 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가정을 잘 돌봐야 합니다. 목회자 자신이 가정을 잘 돌보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고 자녀들과 대화도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가정사역이라고 하는 것도 많이 강조되곤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 무슨 일이 일어나냐면 가정이외에는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는 신종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먹고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에 아홉시반 열시에 출근해서 다섯 시에 땡하고 퇴근해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이 없습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집에 심방좀 와주십시오.’ 그러니까 ‘몇 시요?’ 하고 교역자가 물으니 성도가 ‘여섯 시에 와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교역자의 하는 말이 ‘다섯시에 전 퇴근합니다’라고 하면서 안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쟈는것입니까? 남편이 6시에 집에 오는데.... 죽어도 심방을 못받는것입니다. 그런데 대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균형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성경에서 가정에 대해서 강조해도 가정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 다른 쪽에서는 우리가 나실인이라고 우리가 하나님앞에 다 바쳐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너무 자기의 가정을 인해서 마음 아파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내가 언제 자기보고 사모가 되라고 그랬습니까? 자기가 제발로 걸어와서 사모가 된다고 그랬지! 내가 언제 저보고 태어나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지!!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우리 아들보고도 ‘아빠가 목회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너도 책임을 져야한다. 무슨이야기냐하면 아빠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아서 목회사역을 해나가니까 네가 아빠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아빠의 사역을 돕도록 운명지어졌다. 그것을 네가 가슴에 새겨야한다. 그대신 목사인 아빠의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누리는 것도 많지 않느냐! 왜를 들면 교인들이 가져다주는 케이크도 네가 먹지 않느냐! 그리고 엄마 아빠가 새벽마다 너를 위해서 기도하고 경건한 가정에서 살지 않느냐!’ 그것을 아이에게 어려서부터 주입시켜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 아이하고 오랜 시간을 지낼 수가 없습니다. 엊그제 내가 오랜만에 2시간 반 공부를 가르쳐 주었는데 굉장히 행복해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아이를 붙들고 앉아서 공부를 가르치면 학업성적이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게 ‘부모가 되어서 애들이 기말고사 볼 때라도 붙들고 남은 한 달이라도 공부시켜준적이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저는 할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점에 대해서 나를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놀면서 안한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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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뭐냐면 내 인생에는 하나님 앞에서 져야할 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많은 짐들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아들을 교육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미치는 그 교육의 깊이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 할 수 있는데 시간의 길이가 그 영향력에 양을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어제도 한 30분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교훈이 아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드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그렇게 힘들고 바쁘게 사니까 너는 깊이 생각하고, 네가 네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빠를 돕는 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목회자는 균형을 이루면서 일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목회자 자신에게 성경적인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부모라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그 섬김의 방해가 되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돌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출근 시간 땡하면 집에 들어가서 가정 생활 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학문을 연마합니까?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기도를 합니까? 영혼들을 위해서 목매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회사원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아홉 시에 출근해서 다섯 시 땡하면 퇴근하는데 매일 위로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무슨 위로 받을 것이 그렇게 많습니까? 회사에서도 그렇게 해서는 벌써 구조조정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 안 쓸것입니다. 항상 마음속에 내가 신학 목회의 길에 들어서고 나서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을 때가 두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내가 자식으로써 부모에게 대한 도리를 가난해서 못할 때 그때 정말 가슴을 칼로 애이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어려우신 데 내가 아무 것도 도울 것이 없습니다. 동생들이 결혼하고, 가정의 어려운 일들을 당해서 물질이 필요한데 아무 것도 도와줄 것이 없습니다. 물론 가정에 기대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도와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당 안에 들어가서 기도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저 자신은 견딜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견딜 수 있습니다. 저는 굶어도 견딜 수 있고, 배가 고파도 견딜 수 있는데 우리 부모님들에게 ‘내가 맏이가 되어서 돌봐드리지 못하구나!’ 라고 생각을 하니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나는 동역자들도 이것이 하나님앞에 져야할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동역자들이 부모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고통을 느끼면 내가 그렇게 슬픕니다. 오죽해서 선교사로 내 제자들로 나간다고 하면 제가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제가 진짜로 도와주지 못한다할지라도 가는 이의 손을 꼭 잡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힘든 선교사의 길을 가려고 하느냐?’ 우리 교회에서도 교회를 개척하려고 내려가는 지체들이 있었는데 손잡고 꼭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너하고 나하고만 알자! 네가 내려가서 개척을 하거나 선교를 하다가 부모님이 변을 당하거나 네 자식이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도저히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을 상황이 되면 나에게 전화해라.’ 제가 그 아픔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자식에게 못해준다라고 느낄 때입니다. 저는 그래도 다행히 우리 아이들이 태어날 때에는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 아이들이 서너 살 될 때는 저는 교수로 들어갔기 때문에 극빈의 상태는 면하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밥만 먹인다고 아이들이 아이들이 되는 것이 아니쟎습니까? 아이들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 저녁 늦게 심방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한 놈은 공부하고 있다가 아빠가 들어오면 ‘아빠’하고 달려오며 아빠 품에 안깁니다. 그리고 또 한 놈은 책보고 있다가 엎드려서 잡니다. 그러면 그 날은 아빠 얼굴을 못보고 자는 것이죠. 그러면 너무 안됐습니다. 내가 이 목회의 길에 들어서지 않고 만약에 일반적인 사람으로 살아갔더라면 저녁때 둘러앉아서 아이들과 같이 숙제도 해주고 했을 텐데.. 엊그제는 우리 딸이 참 가슴 아픈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마엄마! 사실은 나도 다 알아.’ 엄마가 ‘무엇을 아냐?’고 물어보니까 딸이 ‘우리 아빠가 좋은 아빠이긴 하지만 사실은 엄밀하게 말하면 남들 하는 것만큼 못하지 우리친구 아빠들이 얼마나 잘해주는데...’ 진짜로 애들 데리고 놀이동산 한번 가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전부 사역 때문이라고 핑계대는 것도 옳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늘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픔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제 아이들의 운명입니다. 하나님앞에 타고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로써 내가 잘살아서 내가 하나님앞에 인정을 받으면 그 축복을 그의 자녀들이 나누어 갖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진짜로 저는 제가 아는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충성스럽게 사역을 감당한 사람들 중에서 가정이 망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소수이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녀들을 넘치도록 축복해주셨습니다. 그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빠인 제 맘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항상 자는 아이의 이불을 덮어주고 뽀뽀해주고 그리고 돌아와서 잠을 잡니다. 항상 그런 짐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가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는 하나님앞에서 그렇고, 내가 성에 차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교인들을 보면 그들 앞에서 그렇고, 그리고 돌아와서 가정을 보면 가정 앞에서 또 그렇습니다. 진짜 무엇을 해준 것이 있습니까? 사역을 한다고 말하면서 무엇을 해준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목회사역은 여기저기 다 떼어주고 남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너희의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 하셨겠습니까? 그것이 히브리 사람의 문학적인 표현으로 유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희브리 사람들은 미워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옛날처럼 신방을 못하지만 저는 심방하는 것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 지체들에게 가면 심방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허락이 안됩니다. 몸이 열 개라도 허락이 안됩니다. ‘누가 넘어졌다더라. 아프더라’ 이런 이야기가 들려오면 단숨에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다시 또 아픈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최선을 다해 몸부림을 치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 살수 있겠습니까? 못삽니다. 그래서 못살 때에는 나머지 부분은 참회의 눈물로 매우며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나라보다 이 세상이 더 살만한 나라라고 생각이 되면 목회의 타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제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소원은 빨리 빨리 살고 우리 아이들도 빨리빨리 자라고 빨리빨리 하나님앞에 잘 사역을 해서 그래서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셔서 목회자로 부르셨을때에 주님이 보시고 싶으셨던 그 열매를 다 보여드리고 안식에 들어가는 그것이 꿈입니다. 정말 그것이 꿈입니다.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들이면 물질을 요구하고, 물질을 드리면 마음을 요구하고, 마음을 드리고 나면 목숨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충성이라고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목회의 길에 들어서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영혼을 향한 눈물도 없고, 남들이 물러서는 지점에서 자신도 물러서고, 분투하는 삶도 없고, 주님을 위해서 희생을 해본 적도 없고, 핍박과 고난을 받아본적도 없고, 영혼의 잘됨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포기해본적도 없고, 그저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친구와 함께 넉넉한 삶을 살면서 세상의 많은 즐거움들을 사역의 틈바구니 속에서 골고루 다 맛보면서 살다가 온 사역자가 하나님앞에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할수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들은 피어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길까지는 안 갑니다. 보십시오. 그래도 목회를 하려고 발을 들여 논 사람이 드러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뭐든지 다 해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교인이 점점 줄고, 결국 헌금도 바닥이 나서 집세도 못 내고, 모든 것이 거들이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게 생겼는데 아무 것도 안 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교역의 길에 들어서서 주일학교라도 한 부서를 맡았는데 목사님이 백 명을 맡겨주었는데 육십, 오십, 사십, 삼십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주일학교를 없어버려야 겠다’라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가슴이 타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이미 가슴에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몸부림은 칩니다. 그런데 무엇이냐 하면 피흘리기까지 몸부림을 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멈추는 지점이 거의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도 모두 반응을 안 합니까? 누가 반응을 안 합니까?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반응을 안하고 살수 있습니까? 반응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반응을 하는 그 수준의 차이가 거의 동일합니다. 그의 비슷한 지점에서 그만 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걸출한 지도자가 안나오는 것입니다. 다 비슷비슷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지점에서 모두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하고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단 현실과 가볍게 타협하는 법이 능숙해지기 시작하면 이미 충성은 사라진 것입니다. 충성은 원리적으로 바른길을 걸어가면서 되지 않는 상황과 더불어서 분투하면서 살아가는 그 원동력이 그 충성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만히 생각하면 주일학교, 중고등부 사역을 하면서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정말 충성스러웠던 교사들. 저는 요즘도 그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지 전 그들의 축복을 빕니다. ‘하나님. 그들이 그렇게 충성스럽게 섬겼던 삶들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복주시옵소서.’ 한 사람은 여선생인데 신방가서 문을 두드리다가 문을 안열어주는 것입니다. 거기 있는 것을 아는데 안나오니까 여선생이 치마 바람에 담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어수룩한 저녁때 말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난 저 영혼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리도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단순한지 ‘너 어떻게 그렇게 사냐?’ 그리고 흐느껴 울면 아이들이 거의 100명주중의 90명은 녹아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합니다. 그렇게 하는 교사들을 본적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항상 그 한계는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항상 그 한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많은 지식과 복잡한 이야기만 머리속에서 왔다갔다하지 그것을 박차고 뛰어 나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가 나고 눈물이 나야 합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런 각오를 가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당신 자신을 아는 지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생으로 여러분들이 부름을 받아서 이 길을 걸어가는 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신학생 시절에 살았던 삶 이상의 삶을 목사나 전도사가 되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삶은 착각입니다. 단지 그 삶을 살 수 있을 뿐입니다. 항상 목회자가 될 사람들은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이조시대의 여인들이 단도를 가슴에 품고 자신의 정절을 지키면서 살았던 것처럼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충성된 삶을 가로막는 것은 자신의 환경도 아니고 상황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게으르게 살아가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 나태하고 안일하게 살아가고 싶은 자기 자신이 최대의 적인 것입니다. 마귀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제도도 아니고 상황도 아니고 환경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최대의 적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싸우기 위해서는 피눈물나는 분투의 삶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죽여버려야 겠다’라는 불굴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충성된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충성된 삶을 왜 삽니까? 충성된 삶이 얼마나 어려운데 충성된 삶을 왜 삽니까? 제가 얘기했지 않습니까? 전도사 시절에 영혼들을 위해서 교사들하고 아이들하고 모여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습니다.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그 삶을 누가 우리에게 강요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라는 그 고백 말고 누가 우리에게 그런 삶을 강요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래도 옛날에 충성된 삶을 살아 갈려고 몸부림친 것을 가지고 오늘날 목회 하면서 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기본적인 감각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때 그 눈물이 생각나면 오늘도 울고, 그때 그 헌신이 생각나면 오늘도 그 헌신만을 위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내 자신이 미운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여러분들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에게 충성된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충성된 삶을 살려고 합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항상 현재형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신학도들 중에서도 몇 달 전에 하나님이 불러 가신 분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사명을 받아서 사역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목회의 길을 꽃피우기 전에도 불러 가시고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불러 가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사역을 하고 죽으리라 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부여잡고 하나님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눈물이 있습니까? 피가 있습니까? 정말로 듣고싶습니다. 전도를 나갔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는 이 세상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돌아오는 지체들을 보고싶습니다. 결국 그 사역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백스터가 이야기 한 것이 그것입니다. ‘당신이 회심치 못한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없다면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서 울어주어야 됩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교회 안에도 보면 얼마나 온전하지 못한 지체가 많고 가슴아픈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고통스런 상황을 끌어안고 하나님앞에서 주님의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그런 마음이 일단 부은바 되고나면 기도생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깊이 있는 기도생활이 안나오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내가 충성된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결단과 용기가 현저하게 부족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특별히 여러분들이 앞으로 영혼을 돌볼 길을 걸어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리는 것인데 잘 기억하십시오. 목회자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는 그 순간부터 교회를 사막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싸워도 쓴 뿌리가 돋아나고 그리고 나 싫다는 사람이 나오고 대책 없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주님이 피흘리셔서 값주고 사신교회에서 내가 목양을 하고 내가 이 포도원을 가꾸는데 여기에서 들포도가 맺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데 담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하는 것입니까?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선 여러분들이 정말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여러분들에게 신실 당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역하나에 생명을 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더 큰 것을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어린이반 하나 때문에 여러분들의 눈에 눈물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그 영혼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 모든 것이 여러분 자신 때문이라는 가책을 가지면서 그들의 영혼의 모든 곤고함이 여러분들의 책임인 것처럼 짊어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몸부림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자식된 도리를 못할 때가 있죠! 가슴아파 하세요. 그리고 부모님에게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영원히 부채의식을 지니고 살아요. 그렇게 살다보면 좋은 남편, 좋은 아내 그리고 좋은 자식 그리고 좋은 아버지의 역할을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합니다. 당해야 합니다. 잘하려고 애는 쓰지만 어떻게 우리들이 한가지 일에만 목숨을 걸고 다른 일은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우리들이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도 뜻도 그리고 우리의 목숨도 다 드렸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님의 축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정말 많이 경험했습니다. 심지어는 공부를 하면서도 어떤 때는 영혼을 섬기기 위해서 너무 소진하다가 공부가 부족할 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공부를 축복해주십니다. 학문을 축복해주십니다. 진보가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앞에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앞으로 제 사역을 20년 정도로 봅니다. 20년도 채 안될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한시대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시기가 정해져있습니다. 값진 보호와 같은 것은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교회가 더 이상 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옵니다. 그리고 역사의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면서 자기는 떠납니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앞에 충성스럽게 살 수 있는 것도 말하자면 그 충성을 결과로써 꽃피울 수 있는 제한된 시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 시기 동안에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하겠지만 연애하면 안됩니다. 연애를 왜 합니까? 지금도 쫓아다니면서 추근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할 계획이 없으면 연애를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남겨다 주는지 묻고싶습니다. 여러분들이 결혼할 계획도 없으면서 좋은 자매, 좋은 형제를 만나서 마음이 들떠 있는 동안에 그 마음으로 영혼을 위해서 울겠습니까? 바울이 독신으로 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배필을 구하십시오. 연애할 자신이 없으면 목사님을 찾아오십시오. ‘목사님! 제가 결혼할 계획이 섰습니다. 제가 결혼을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교역자들을 찾아가서 말하십시오. 그리고 좋은 자매 형제를 만나서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해서 정착된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서 사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 시간이 없습니다. 줄다리기하고 맘 상하고, 가서 사정하고 편지 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져도 몇 달 동안 끄떡없이 살던 사람이 자매와의 관계가 깨지면 뒤집어지듯이 전화통에 매달려 살고 편지를 쓴다. 집에 찾아가서 얼굴을 본다. 이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정말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면서 그 한 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불세출의 지도자가 되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한사람이 지금까지 열거한 이 삶을 완성하기 위해선 피 눈물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죠? 누가 지도자가 되겠답니까? 피눈물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모세 한사람의 품에서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님을 알아가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의 신기원을 일으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외에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죽고, 우리는 손해보고, 우리는 희생하고, 우리는 눈물 흘리고, 우리는 가슴을 찢으며 아파도 그것 때문에 천하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귀한 영혼들이 정말 우리의 품안에서 성숙해 갑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이 되길 하나님이 기대하시며 여러분들을 신학의 길로, 목회자의 길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에 대한 모든 사랑과 꿈들을 포기하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최대의 영광은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내 인생 전체가 영혼들이 깃들어 안식을 얻는 둥우리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슴을 벌려서 자기의 양떼들이 자기를 다 파먹고 영생하도록,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영생하도록 그렇게 자기를 하나의 소모품처럼 그들을 위해서 모두 소진하고 죽는 것! 그것이 목회자의 일생입니다. 그러니까 그 삶이 정말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겠냐 하는 것입니다.
밖을 보십시오. 그러면 수없이 고통하는 영혼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지금 유리하고 방황하는 수많은 양떼들은 우리들이 사랑을 가지고 잘 돌보기만 했어도 그 중에 대부분은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사람입니다. 그런데 돌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영혼들을 목양하도록 부름 받은 우리조차도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사랑에 빠져서 그 영혼들을 눈물로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홀로 우시지 않겠습니까? 그 영혼들을 보면서.....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네게 맡겨줄테니
사랑하는 내 친구여 많은 양떼를 부탁한다.
그러니까 늘 우리는 죄인입니다. 부모님앞에서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아내 앞에서 무슨 할말 있겠습니까? 자식들앞에서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영혼들앞에서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울어야 될 이유로 에워싸인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앞에서 놀라운 성화의 진보를 보였습니까? 그것도 아니잖아요. 야비한 성격그대로, 야비하고 게으른 것 그대로, 게으르고 그러면서 양들이 고통받고 아파하고 그리고 신음하고 이리 때들에게 물려 뜯길 때에 난 편안하게 지내고, 그리고 평화롭게 지내고,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먹고 싶은 것 다먹고, 가도 싶은데 가고 충성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시대에 참된 목자가 누구냐?’ 할 때 사실은 다른 시대와는 조금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핍박받는 것! 그런 것 아닙니다. 핍박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시대의 참된 목자의 기준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고 목회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능히 누릴 수 있는 것, 그리고 누려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을 주님 때문에 포기한 것이 무엇인가? 주님 때문에 버린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여러분들이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주어도 주어도 다 준 것같지 않은 그런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영혼들을 위해서 그것을 내어주면서 그러면서 일생을 자기부족에 대한 고백속에서, 자기부족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경건한 두려움으로 최선의 삶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은혜를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목마른 마음으로 구하면서 마지막에 살다가 ‘하나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한 것이 없습니다. 정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죽는 것이 사역자의 일생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그런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모세를 통해 배우는 LeadershipⅡ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33:11)
①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이 모세의 사람됨과 그리고 그 생애의 결정적인 특징 네 가지를 말한다면 첫째는 그 사람이 말하자면 하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천상의 능력, 천상의 영역 속에서 그렇게 사역을 감당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온유한 인격 그리고 마지막은 네 번째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영적 생활입니다. 그것이 모세의 지도력을 특징짓는 결정적인 네 가지 요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충성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제도 다루었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민수기 12장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냐 하면 ‘나의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며’ 하시며 다른 선지자와 모세를 비교할 때 ‘꿈으로도 이상으로도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말했는데 내 종 모세와는 달랐다’고 말씀하십니다. 달랐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 그 뜻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뜻을 전달해주는 방식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이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주셨는데 모세와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대면하여 말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여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32장에서 범죄하고 난 다음에 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에 회막을 만들어 놓고 드나들면서 기도하는데 그때에 모세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친구를 대면함과 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을 의미 하냐면 모세가 가졌던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라고 하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사람들은 흔히 기도생활 그 자체를 기도생활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사실 이 기도생활이라는 것은 독립된 공간 안에 존재하는 기도생활이 아닙니다. 뭐냐하면 한사람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다른 모든 삶의 방향에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목회사역에 있어서 모든 축복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해 흘러나온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어제 사역의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목회를 할 때 가장 좋은 것은 영적인 능력이 있어서 말씀사역을 통해서 영혼들에게 아주 깊은 영향을 끼쳐서 그 사람을 새사람 만드는 것. 이것이 사실 목회사역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어서 새 삶을 살게 만드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에 확장에 기여하는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런 일들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저 전혀 아닐 경우, 설교도 전혀 아니고, 기도도 하나도 안하고, 이렇게 하면 안되겠지만 어느 정도 자기가 설교로 근본적인 변화는 못 일으킨다할지라도 설교로 어느 정도의 영향을 줄 수 있으면 그리고 또 어느 정도 적절하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그 정도만 되면 그 다음에는 교회를 잘 운영하고 어저께 말한 것처럼 유능하기만 하면 교회가 어느 정도 외형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커졌다고 해서 모두 그것이 영적인 열매라고 볼 것도 없고, 또 교회가 작다고 해서 모두 ‘그 교회는 고지곳대로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성장이 안됐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는 말씀사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역을 하는 것이 잘 영혼들을 돌봐서 교회라는 조직을 갖추고, 이렇게 하면서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교회가 성장이 안됩니다. 그래서 제가 어저께도 말씀드린 것이 똑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 가는 하나의 조직체인데 구멍가게 하나도 경영하기 어렵다고 의심이 되는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경영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상당히 많이 목회를 하겠다고 하는 전도사들도 있고, 목회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가서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특별히 깊이 기도하고 응답을 받고 하지 않아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뻔히 알텐데 어떻게 저렇게 미련하게 일을 해나갈까!’ 그리고 ‘저런 속에서 이 교회가 조직화되고 숨통이 틔여서 사람들이 그 속에서 지도자와 일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할까?’ 이렇게 생각할 때 정말 답답합니다. 이렇게 그런 것들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또 본질적인 것보다 어떠한 때는 더 많이 영향을 끼칩니다.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되게 해주는 spiritual power입니다. 영적인 능력이란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경영적인 측면에서 교회라고 하는 조직체를 잘 이끌어서 주님의 사람으로 잘 빚어지도록 만들어 가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전자를 택하겠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두 개가 그렇게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교회라고 하는 조직체를 경영해 가는 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그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영력에 의지해서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이것 때문에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이론상으로는 가능한데 실제에 있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입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영적인 능력만을 의지하면서 목회하는 것도 아니고 둘 다 없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셔서 모세처럼 영력있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실 일이지만 우리는 먼저 일상적인 것들을 잘 처리하면서 그러면서 교회를 상식선에서 꾸려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로써 기본적인 자질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라고 하는 것은 무슨 동우회 모임도 아니고, 그야말로 사업을 하는 모임도 아니고, 이것은 영적인 지체들로써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세워 가는 영적인 모임이고 단체들인데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이 영혼 각자각자 하나하나를 변화시켜서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어떤 힘이 자신에게 없다고 할것같으면 교회가 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를 각자 만나고 그 영혼들이 변화되어서 심령속에서 흘러나오는 그 은혜의 물이 말하자면 접착체같은 역할을 해서 그것이 성도와 성도를 연결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자체가 없으니까 이제 영적인 역사가 사라지고 그런 것들을 영혼들에게 진실한 변화를 끼칠 수 있는 그런 감화력이나 영적인 지도력이 모자라게 되면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할 수 없이 이 사람들이 인간적인 방법들이 나오게 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아주 자기 중심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무엇인가 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만지고 지나가시는 그 목회자의 영혼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런 것들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모세의 지도력에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깊은 친교 속에서 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 점에서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주는 데 모세가 자신의 백성들을 깊이 사랑했지만 그러나 모세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하나님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친교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더군다나 인격적인 앎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탁월한 친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자기민족을 깊이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더 뛰어난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목회라고 하는 것은 즉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개인적인 헌신을 통해 목회의 소명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셔서 물으신 질문은 이런 점에서 영원한 본보기가 됩니다.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예수님은 그 질문을 하신 후에 얼마 안 있어서 승천하셔서 올라가 버리셨기 때문에 오히려 베드로가 직면해야 할 사람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었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목회에 대한 소명을 물으시려고 맘을 먹으시면 ‘네가 이 양떼들을 사랑하느냐? 네가 이 영혼들을 사랑하겠느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셔야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은 올라가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실 이유가 없었잖아요!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나면 목회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헌신을 통해서 목회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여 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께 개인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개인적인 헌신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친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친교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교속에서 사랑의 관계가 촉진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인데 소위 이야기하는 자기는 나름대로 ‘영적인 능력이 있다. 실지로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는 파워가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중에서 사실 하나님과 친교에 있어서는 생소한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해가 안 갔는데 이해가 안 갈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은사와 은혜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무엇이냐면 단지 어떤 재능으로써 어떤 영적인 은사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였던 것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 자신과의 깊은 친교입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하나님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사가 있어도 그 은사 자신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적합하게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지만 실제로 은혜는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 사람을 바꿔놓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소유했던 바로 하늘을 가르고 하는 능력이 은사라고 한다면 이 하나님과의 친교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친교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기도속에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지 못하면서 산다고 할 때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식의 결론을 잘 받아들이질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꾸 다른 핑계를 대고 이야기하는데 결국은 자기자신도 생소한 그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으며, 그런 생소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그런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만히 보면 아주 현격할 정도로 이 한국 교회 교우들의 영적 생활이 감퇴하고 있습니다. 한 20년전까지만해도 한국 교회라고 하면 전 세계교회 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기도의 열기 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거의 교회마다 새벽기도가 빈사상태에 있고 그리고 굉장히 많은 교회에서 새벽기도에 대해서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기도생활을 안 합니다. 그것이 결국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운동으로써의 기도운동같은 것,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어느 한순간에 사람들이 확 기도하게 하는 것들은 결국 그 사람 자신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친교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부목사가 되었는데 목사님이 얼마나 기도를 강조하시는지 교인들 대리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을 강조하는 교회인데 마이크를 가지고 두 시간을 기도인도를 했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기도 시간 내내, 기도가 끝나서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도하는 중에 기도는 열렬하게 해서 목은 다 쉬었는데 자기의 가슴은 하나님을 느낄 수 없어서 공허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따라오는 교인도 그럴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들을 깊이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하나님을 믿는 것 그 자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하듯이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렇게 진실하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과정이 하나님과의 친교속에서 사는 비결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이 모세가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를 누리면서 살았는데 이것이 모세에게 있어서도 오랜 기간동안에 기도생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자체를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모세가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속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의 삶이 절대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런 친교가 가능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무슨뜻이냐 하면 모세가 살아가는 삶의 초점과 기도속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찾는 초점이 일치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맨 처음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라고 할 때에 그때에도 역시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기회를 거절하고 민족과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을 다짐하잖아요? 거기서도 어떤 세상의 부귀와 영화에 대한 욕망이라든지 지도자가 되면 그런 것들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라든지 그런 것들은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모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결함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데올로기 적인 열심. 즉 ‘나는 이 백성을 사랑하고 이 백성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하는 그런 정신들. 해방의 정신들. 이런 것들이 훨씬 더 작용을 많이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사역이 실패로 끝나고 진짜 하나님이 부르셔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소명에서부터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세운 그 모세의 영혼을 만지시고 지나가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하자면 자기 개인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면서 친교를 누리게 되는 그런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들어서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왔을 때 모세의 마음속에 있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소원은 주님이 이들을 이끌어내어서 가나안땅으로 데려가라고 그랬으니까 모세의 마음속에 있는 목표는 오직 이 백성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이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것. 이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생활을 통해서 그 수많은 연단을 받고, 그 연단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하면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목표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친교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주님이 왜 모든 사람들 가운데 모세를 다른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르게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하셨던 방법과는 비교도 안 되는 탁월한 친교를 모세에게 보이셔서 모세가 다른 모든 선지자들과 같은 레벨의 선지자가 아니라 그가 매우 특별한 사람이며 선지자의 원조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셨는가 그것에 대해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말하는데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모세를 친구와 같이 대면하여 말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삶의 초점. 그 자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겠다’라는것에 집중되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과는 비교되지 않는 친교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함께 사귀며 사람들 속에서 교제를 누리며 살아갈 때 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많은 희생이 필요한데 하물며 완전히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과 완전한 친교를 누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자신을 드려야할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의 인격의 결정적인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맘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깊이 그 말씀 앞에서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그리고 괴로워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고통스러우면서도 자기와 싸와서 자신의 삶을 결단하고 버리려고 하고 몸부림치는 그런 분투하는 삶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바라는 것은 다분히 신비주의적인 발상입니다. 그런 친교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영성이 아닙니다. 기도가 왜 이렇게 중요하냐하면 하나님과 그 사람이 나누고 있는 친교의 깊이와 정도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나타나긴 나타나는데 덜 나타납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느끼지도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안 살면서 거룩 한 삶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가능하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설명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설명하는 동안에는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안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고 있는 친교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친교 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하고 그 화목 속에서 살아가는 그 친교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 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 사람들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복음 사역이고 목회사역입니다. 모세 자신이 그런 친교 속에서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인데 삶에 대한 철저하고 단오한 자세가 없이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늘이 갈라지는 은혜를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의 은혜의 불은 육신 적인 불순종에 의해서 언제든지 소멸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소멸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앞에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면서, 그 탁월한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그런 삶을 살려고 분투하는 몸부림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도의 은혜를 많이 잃어버리고 이제 교인들이 거의 기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신학생이라고 하는 여러분들이 나와있는데 여러분중에 하루에 한시간 이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인지 제가 묻고 싶습니다. 거의 기도 안 합니다. 물론 탁월하게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기도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여기 일반학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이런 것을 할 때는 신학생으로 변신하고 기도의 의무를 이야기할 때는 일반학생으로 변신하는 이중의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야 뭐 일반학과 학생인데...’잘 안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기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삶이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계속 분투하는 삶을 살면서 겨우 은혜의 불이 유지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비유를 하나들었는데 기도의 불이 가슴속에서 계속 타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합니다. 그 기름이 무엇이냐 하면 성도의 눈물과 피와 땀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부단히 몸부림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건성으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삶은 그것은 너무 쉬운 삶입니다. 그냥 살아가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순간들을 육체의 기회로 삼으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지도자가 된다고 하니까 ‘큰 틀 안에서, 이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되자’하고 마음먹으면서 나머지는 적절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철저해 지려고 몸부림치고 그리고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몸부림을 칠 때에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진액이 떨어져서 기도의 불을 끄지 않고 계속 타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교인들이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새벽기도를 하던지 금요기도를 하던지 무엇을 하던 지간에 교역자라고 하는 사람 자신들이, 목회자라고 하는 사람 자신들이 의무감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 교인들이 그것을 배우면서 기도가 말하자면 교회속에서 기도로 가득찬 교회의 모습들이 세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영향을 받으면서 세워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복음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도 실지로 세워지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 그 color가 너무도 다양합니다. 그 목회자 자신이 사려 깊으면 교회도 사려 깊은 교회가 됩니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이 사랑이 많으면 교인들도 그 사랑을 배우면서 사랑이 많아집니다. 목회자가 기도를 많이 하면 교인들도 그 영향을 받으면서 기도의 열심을 품는 사람들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제가 ‘새벽기도에 왜 안나오냐?’ 자꾸 이야기를 하는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연습을 해야지만 이 다음에 목회를 하면 새벽기도를 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연습을 안해도 목사가 되면 다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안나오면 그 교인들이 가만 두겠습니까? 당연합니다. 가만두지 않습니다. 나가라고 그럽니다. 안 그럴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담임목회를 하는데 아니 담임목회도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부 목사쯤 되었는데 여러분들이 이유 없이 일주일이면 서너 번씩 집에서 아침에 누워서 자고 새벽기도를 안나오면 나가라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내가 목사라고 해도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은 새벽에 나와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자기는 하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아침시간에 가서 누워서 자고 하는데 사람이니까 한 두 번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일주일이면 서 너번씩 그렇게 안나오고 두달 석달 지나서도 경고를 했는데 변화가 없으면 나가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여러분들이 나중에 교회에 가든지 아니면 개척을 하던지 둘 중의 하나일텐데 왠 만한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갔는데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은 다들 새벽기도를 나오는데 목사가 새벽기도에 안나오면 ‘목사님이 새벽 기도좀 잘 나오시면 좋겠습니다.’ 몇 번 이야기하다가 목사님 얼마 드리면 나가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개척교회는 괜챦겠구나! 그렇지 자기가 세웠으니까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그렇게 목사가 되어서 새벽기도 안 나가면 나가랄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나가라고 하지... 그러니까 저는 목회하고 나서 새벽기도 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를 안 해도 될 때에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 합니다. 그래서 제가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왜 목사가 되려고 그려냐?’ 하는 질문에 ‘상황이 절 그렇게 데리고 가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는 지체들이 있는데 그런 것 하나 겨우 지푸라기처럼 붙들면서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니까 안심하십시오. 상황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개인이 그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러니까 가지 마십시오. 기도하기 싫으면 한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둘 중의 하나가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얘기해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에 소명일 것 같으면 도저히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 길을 안가면 벌 받을것같다고 말하는데 그냥 벌받지... 그리고 무슨 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안 불러주신 사람인데 불러주신줄알고 깝죽대면서 왔다 갔다 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안 불러 주셨구나!’하고 깨닫고 제자리고 돌아갔으면 하나님이 칭찬을 해 주실 일입니다. 어느 특별한 자리가 있어서 누굴 불렀는데 안 불렀는데 그가 오는 것입니다. 맘이 얼마나 불편합니까? 저 친구 부르지도 않았는데 괜히 와 가지고 그리고 나중에는 누가 더 원망스럽나면 데리고 온 사람도 원망스럽습니다. 가끔 형제들이 운전을 하고 함께 심방을 갈 때가 있는데 그 형제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심방은 그 목회자가 심방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전에 있던 목사님께 배운 것인데 기사가 있었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는데 그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누시다가 나중에 식사도 하고 그럽니다. 그럼 기사는 바깥에서 시동을 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안에서 한 형제인데 같이 와서 좀 먹게 만들지 왜 기사를 밖에 세워두시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흘러가니까 그 목사님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집안의 비밀들, 고통스런 문제들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기사가 와서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도 한번은 심방을 갔는데 나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간사가 덜렁덜렁 들어와서 앉아 있습니다. 간사가 들어올리는 없는데 누가 데리고 온 것입니다. 밥 먹는 시간 내내 힘든 것입니다. ‘여기서 오고가는 이야기들이 목회자가 아닌 다른 지체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텐데... 왜 데리고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명도 똑같습니다. 안 불렀는데 와 가지고 자기는 목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답답하지만 그 사람을 보고 거기에 가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와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선명한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여기에 있을 자리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달으며 방석을 가지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바보 같은 미신적인 정죄의식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런데 기도하기 싫으면 소명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보면 이 모세는 선지자의 비조인 동시에 제사장의 직분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모세속에서 이렇게 갈려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모세라고 하는 사람의 직분 그 office안에서 선지자의 직분과 함께 제사장의 직분이 함께 갈려서 나오는 비조가 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물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했던 일들이 무엇이냐 하면 이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앞에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하나님앞에 행했던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가지고 있었던 3중적인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삼직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엔 왕이 없었죠. 왕은 하나님이시지만 요즘으로 말하면 내각의 수장으로써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위를 가지고 다스렸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을 여기서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쳤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선지자직의 모형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제사장적인 직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가르쳤을뿐만 아니라 모세가 일평생을 두고 가슴아파하면서 했던 일이 무엇이냐 하면 이 범죄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 거스리기를 밥먹듯 하는 이 백성들을 붙들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앞에 중보자의 모습으로 기도하며 나아갔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준다고 그들이 다 듣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준다고 그들이 다 변화됩니까? 변화된 사람들이 그렇게 다 순종하며 삽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말씀을 전할 때 영혼들이 거꾸러지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도 그 영혼들이 끝까지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뭐냐하면 우리 힘으로 영혼들을 붙들어주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많이 사용하셔서 그 영혼들을 위해서 일하신다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든든하게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들이 그 영혼들을 섬기는 사역에 있어서 축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회 적인 업적에 대해서 자긍심을 느끼는 사람이 가장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정말 인간이 누구인지를 정말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회가 무엇인지를 정말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정말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영혼들이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들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무엇이 강조되냐하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면 상황이나를 새벽기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꼼짝없이 해야죠. 담임목사인데 안 하면 쫓겨나는데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고 해서 그가 즉시 그 상황과 함께 깊은 하나님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냐하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이런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모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주님과의 교통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가운데 형성된 인격이 하나님과의 친교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러분들에게 기도를 해야된다라고 강조하는 것은 기도를 해야지만 일을 잘할 수 있다든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기도로 많이 투자를 해놔야지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길을 열어 주실 수 있다든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로써의 이런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 사는 인격적인 특징은 잠깐동안의 기도생활을 통해서 구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묻고 싶은데 모든 목회자들이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을 합니까? 브레이너드가 나중에 깊이 회개하는 제목이 되었지만 그는 예일대학에 다녔습니다. 은혜를 굉장히 많이 받고 예일 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서 그 학교를 뛰쳐나온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신학교 교수님들은 강의실의 의자만큼도 은혜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회개하는데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사로써 기능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앞에 성도들로 하여금 깊이 머리를 숙이고 무릎꿇게 하는 것이 안수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옛날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권위주의를 답습하는 것입니다. 권위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하나님께 매우 가까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과의 친교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데서 흘러나오는 것이 진정한 권위의 근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제도도 세우셨으니까 그 제도 안에서 어느 정도 순복하고 순종하면서 사는 것. 그래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권위의 전부라고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슬픈 것입니다. 너무 슬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에 깊이 감동되고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하고 그리고 화려한 학위나 그런 것이 없어도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보면서 깊이 무릎을 꿇게 만들고, 방종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대면하는 것이 두려워지도록 만들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위주의라고 하는 것이 판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누가 자기를 알아주느냐 하는 것에서 근원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학위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인격이 고매한 것도 아니고, 세상적으로 지식이 뛰어나서 정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속에서 살기 때문에 저 사람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있고 나는 무릎을 꿇고 배워도 나는 저 사람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나는 저 사람이 아는 하나님만 알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그런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를 누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 대한 어떤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교역자라는 것. 내가 신학생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안수 받은 목사가 되어서 검은 가운을 입고 설교하러 올라간다는 것. 그것밖에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목사한테 그따위로 밖에 못한다’고 그리고 ‘너는 주의 종에게 제대로 안 하면 하나님이 너를 혼내신다’고 공갈이나 치고 하는 그런 아주 저질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의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봐도 학력이 낮은 사람들에게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온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비율이 좀 적습니다. 그런데 거의 지적인 수준이 핍절한 사람들이 마지막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몇몇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보면서 콤플렉스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력 콤플렉스, 이런 것에 걸려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좀 뜸해져있지만 가짜 학위가 난무하고 그것 때문에 사회문제가 되고 비탄의 대상이 되고 그랬습니다. 그런 콤플렉스가 불러온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것이라도 해서 주보에 모자라도 하나 뒤집어쓰고 학위받았네라고 말하지 않으면 자기가 객관적으로 자신을 살펴봐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신 권위주의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굉장히 역겨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과의 친교속에서 입증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시당하지 않는 당당함. 그런 것들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상황이 나를 기도하게 만든다고 해서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친구와 대면하여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듣는 모세가 나오고 그 바로 뒤에 모세의 뒤를 잇는 지도자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는 회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남아서 그 회막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회막이 뭐하는 곳이었습니까?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벌써 모세의 뒤를 이을 사람이 누군가 하는 것이 여기서 삼척동자라고 하는 사람이 보아도 딱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써 모세의 뒤를 이어서 지도자의 여호수아를 빚어나가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카리스마에 있어서는 모세에게 필적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여호수아가 벌써 부름을 받는 그 1장에서 벌써 하나님과 대면하면서 주님의 그 음성을 듣는 그 장면을 보십시오. 의미심장한 장면입니다. 여호수아 1장을 시작하면서 제일먼저 여호수아서가 기록하고 있는 장면이 무엇이냐 하면 모세가 사라지고 난 뒤에 하나님과 대면하는 그 여호수아의 개인적인 친교를 이야기하면서 여호수아의 대 파노라마가 2장서부터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가나안 정복의 역사가 1장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벌써 거기서 벌써 모세를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대면하여 말씀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탁월한 친교 속에서 그는 불세출의 지도자 카리스마적인 인물 지도자 모세가 사라진 다음에 바로 들어온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이 교회 안에 있는 구역질나는 권위주의를 정말 청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오랫동안에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에 있어서 사역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살아가는 이 현장이 있을 때 목양관계라고 하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을 자꾸 존경하라고 강요를 하니까 권위주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교회가 가져야될 틀이 있고 모양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파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양쪽 극단을 모두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파괴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이제껏 까지 저를 가르쳐준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스승의 날 제가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만나고 싶은 분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선생님들도 종종 생각납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찾아 볼 수도 없습니다.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얼굴도 잊혀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그 사람을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자꾸 나를 제자라고 불러줄 때 그것이 첫 번째 괴로움이고 그리고 그 다음은 나는 저를 제자로 생각을 안 하는데 저는 돌아가니면서 자꾸 자신이 내 제자라고 그럴 때 그럴 때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너 같은 제자를 둔 적이 없는데 계속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제가라고 말할 때 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니면서 ‘나는 그 사람 스승 아니야. 그 애가 말을 잘못했어.’ 하면서 지우면서 지나갑니다.
그 하나님과의 친교가 하루아침에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목회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사람들이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미래가 보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가 얼마나 단단한 아산인데 그것을 헤치고 지나갈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강인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인치심이 필요합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고, 그리고 너는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나님이 아무나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라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해주셨는데 그것이 탱탱히 놀고 대충대충 살아가다가 어느 날 공동의회를 열고 ‘모세가 죽었으니까 그래도 아무리 찾아봐도 맘에는 안차지만 여호수아 네가 하는 일이 제일 나은 것 같다.’ 하고 투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투표를 존중해 주셔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는 수밖에 더 있겠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과 함께 한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도생활을 안 합니다. 저는 정말 그 완고함을 보면서 정말 묻고싶습니다. 왜 새벽기도 안 하는 것입니까? 이유를 한번 대 보십시야. 작년에 이렇게 이야기할 때 여러분 다 흐느끼면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봐요! 소명이 아니란 것이 입증이 되잖아요! 목회자가 숨질 때 되도록 마지막으로 짊어지고 나가야 할 의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앞에 정결한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기도하고, 양떼들의 모든 형편을 짊어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살 그것이 우리들이 일평생 해야 될 일인데 그리고 그 일을 완수하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소명이잖아요. 그런데 그 일이 싫잖아요. 싫잖아 그러니까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 일이 싫은데 어떻게 소명일 수 있습니까? 그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나중문제고 그 일이 기뻐야 합니다. 그 일이 기뻐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이 다른 영혼을 위해서 기도 할 수 있다니.. 나 같은 사람이 다른 지체들의 유익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도할 때 나를 사용하셔서 지체들을 일으켜 세우시는구나! 정말 기쁘다.’ 그렇게 기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그러니까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명이 아니어도 목사가 될 수 있고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왜 안 하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른 교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오늘 저 조사도 안 하겠습니다. 새벽기도 하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묻지도 않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20명이라도 될까 의심스럽습니다. 뭘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한순간에 교역자가 되었다. 목회자가 되었다. 그렇게 살다가 목회자가 되니까 교역자가 되어서도 단 30분도 기도도 안하고 용수철처럼 뛰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도대체 왜 나오는 것입니까? 고도의 외식입니다. 기도의 필요성도 못 느끼면서 교회에 나와서 담임목사나 성도들에게 눈 도장이나 찍고, 기도 시작하자마자 보따리 싸서 들어가서 집에 가서 들어 누어 자거나 다른 곳에서 딴 짓이나 하고... 누굴 위한 새벽기도입니까? 외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진실해 지면 새벽기도 안나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말 이 있으면 해보십시오. 보세요. 이 조국교회가 큰일입니다. 그래도 연세 드신 목사님들을 기도를 좀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옛날에 받은 은혜가 있어서 기력이 딸려서 기도를 못하신다고 해도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역자들은 주보만 이쁘게 만들지 기도 안 합니다. 매일 새로운 시대가 어떻고, 옛날에 패러디임을 바꿔야하고, 쥐뿔이나 무슨 패러디임을 바꿔야 할지는 모르지만 안바꿔야될 패러다임말고, 신타꿈이 있습니다.(?) 기도 생활을 안 하는 것입니다. 아주 현저하게 안 합니다. 아주 기도를 하지 않기로 뜻을 세운 사람처럼 보입니다. 심각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기도의 욕구를 느낍니까? 기도의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중대한 질병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마치 기도라고 하는 것을 은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는 기도의 달란트가 많고, 제는 기도담당 종이 그릇 되고, 제는 설교를 잘하니까 설교담당 종이 그릇 되고, 나는 노는 재능이 있으니까 노는 목사 하면 된다.’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기도하기에 적합한 존재가 아닙니다.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진 상태에서 육신의 소욕을 위해 사는 것이 체질에 맞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 다 싫습니다. 누가 좋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잠자는 것이 편하지 누가 좋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그래도 따뜻합니다. 옛날에 있던 교회는 난방비 아낀다고 불을 안 피는데 새벽기도할때 ‘주여!’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다음에 목회 하면 새벽기도 본당에서 할 것이고 불 뜨듯하게 땔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는데 추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새벽이면 항상 밍크 담료. 그 두꺼운 것을 들고가서 발까지 싸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목회를 하려고 그럽니까? 그리고 더 답답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수없이 이야기해도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을 안 합니다. ‘당신들이 기도할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린 것이고. 그래서 기도할 수 없다면 영혼의 질병상태다.’ 흔히 제게 질문하길 ‘목회자로써의 삶을 위해서 무엇을 갖추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것들을 읽으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이것 이전에 쉽게 이야기해서 운동회 나가기 전에 ‘헬멧은 무엇을 써야합니까? 운동은 무엇이 좋습니까? 장갑은 무엇을 끼워야 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급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병부터 고치는 것입니다. 속이 썩어서 안 좋은데 무슨 운동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병부터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기가 썩었으면 그것을 자르고 고쳐서, 밥을 먹으면 소화가 될 수 있는 기본적인 골격을 갖춘 다음에 체력이고 헬멧이고 운동화고 운동기구가 필요한 것이지 무슨 운동선수가 되겠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합니다. 그런데 저는 진짜 농담이 아닙니다. 확신합니다. 거의 소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신학교 가고 목회를 다 하던데요!!’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하니까 여러분들이라도 그러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선교사를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선교사들을 훈련을 시키는데 선교사 지망생들이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훈련을 받는데 한사람 한사람 살펴봐도 하나님의 은혜가 만지고 지나간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선교라고 하는 하나의 일을 익혀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가서 ‘자신의 선교가 잘 안 되는 것은 상황이 특수하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그래도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개를 끄떡이는데 선교사는 다 지역이 다르니까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은 중국의 이야기고 여기 소말리아는 달라!’ 하면서 자기변호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케냐는 상황이 달라! 네가 케냐 와봤어!’ 그러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할말이 없어집니다. 다르다는데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 안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노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저런 사람들이 목사가 되려고 하면 어떻게 하던지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과하십시오. 다른 과로 빨리 가십시오. 전도사까지는 어떻게 하다가 집어치고 다른 것 할 수 있는데 버티고 앉았다가 목사가 되면 다른 것을 못합니다. 그만둬도 목사입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야 방향전환이 가능하지만 나이 서른 댓 살이 지나서 목사로 몇 년 살았는데 가서 땅을 파겠습니까? 남의 회사에 들어가겠습니까?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억어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영혼의 병적 상태를 깊이 인식하십시오. 그런데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점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여러분들이 제게 목양을 받으며 살아 갈 때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목사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망가졌습니다. 제 영혼은 병들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교역자가 되거나 더 나아가서 목사가 되고 나서는 그것을 인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어느 날 목사가 되고 나서 담임목사와 탁월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어느 날 무릎을 꿇으면서 ‘담임 목사님! 제가 부 목사님까지 됐는데 소명이 아닌 것 같습니다. 취직자리 하나만 알아주십시오.’ 그럴 수 있을 정도의 관계를 가진 목사들의 세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살아가는 사역의 상황이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서 정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교인들 앞에서 자기를 과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기도 안 하면서 기도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의 친교가 없어서 망가져 있으면서도 자기는 건강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극적인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만지고 지나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알아보는 영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와 양에 대해서 이미 깊게 다루었쟎아요! 그 정도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저 사람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깊이 스쳐지나간 흔적이 없다’라고 생각이 될 때에 그때에 정말 무릎을 꿇는 목양의 관계가 생겨나겠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 의해서 만들어질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가 될지는 눈에 훤합니다. 매일 재직들하고 몰러 다니면서 밥이나 먹고 그렇게 하면서 말하자면 친교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갈 것이 눈에 훤합니다.
새벽기도 왜 안나옵니까? 그러니까 이 수련회에서 결단을 하고 가십시오. 미루지 말고 결단을 하고 가십시오. 일반학과 다니려는 학생들을 포함해서 특별히 목회자가 돌려는 사모가 되려는 사람들은 새벽기도에 안 나오려고 하면 소명에 대해서 말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간단히 말할 수 잇느냐? 당신들이 평생 해야 할 일이 그것 이쟎아요! 더군다나 새벽 5시에 나오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6시 15분에 나오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안 나올 수 있어요? 내가 일평생 우리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한번도 ‘그렇게 하려면 그만 둬라!’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딱 한가지 면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새벽기도 안 나오려면 사역의 날개를 접어라! 그만 둬라! 그리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교회를 떠나든지 아니면 평신도로 돌아가라!’ 말합니다. 내적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욕구를 왜 못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사실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 뿐이지 내일까지 기도할 욕구를 회복하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역자가 되면 여러분들에게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삶 자체가 성도들에게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새벽기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메시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역을 접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앞에서 부족하고 아직 아는 것이 없지만 열심히 하나님을 추구하려고 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 세워서 성도들의 중부를 받으면서 이 사역의 세계에서 자라가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묻고 싶습니다. 한시간이라도 기도합니까? 기도 안 합니다. 성경은 매일 읽고 있나요? 옛날에 어느 교역자가 ‘나도 못 읽고 있지만’ 이라고 말했다가 제게 바가지로 혼났는데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자기도 살지 못하는 삶을 어떻게 살라고 강요합니까? 최소한 자기가 살려고 몸부림치는 가운데 사람들에게 살자고 하소연하는 것이 교역이고 목회지, 자기는 살지도 않는 삶을 가지고 살아라 하면서 ‘그렇게 살면 좋대! 가봐!’ 그런 삶을 살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하나님이 쓰신데에는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특별한 세계가 모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을 때 시내산에 올라가서 얼마를 기도했죠? 40일을 기도했습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40일을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시기 전에 40일을 기도하심으로써 대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받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40일 동안을 주리면서 기도한 후에 그것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광야에서 40일 동안을 기도하셨습니다. 이미 그러한 기도를 하기 전에 모세는 우리와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탁월한 영적인 수준을 누리면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처음부터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죄에 에워 쌓여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 속에 쌓이는 불결과 더러움의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살수 있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목회를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미래의 목회에 대해서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느냐가 목회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이야기하면 앞에 있는 푯대가 이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푯대가 이 사람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줄 아십니까? 목회에 대해서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느냐가 이 사람의 목회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이 사람이 어떤 삶을 가지고 살아왔느냐가 이 사람의 목회현장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좋은 꿈을 안 꾸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목회현장이 병들어 있는 교회는 꿈이 병들어서 병들어 있는 것입니까? 비전 후져서 후진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 아무리 훌륭하고 그리고 미래에 꾸는 꿈이 찬란하다고 할지라도 지금 현재의 교회의 상태는 그 꿈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과거의 목회자 자신이 어땠는가 하는 것이 그 교회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한번 가만히 잘 생각해보십시오. 목회자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에 대해서 다구치는 설교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뒤로 물러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과 더불어서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 목회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로 미끄러질 것을 미리 보면서 그때 어떻게 해야 할 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리 예고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해나가는 지도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안에 있긴 하지만 간헐적입니다. 영적 그리스도인 vs 영적 그리스도인 에서도 말했지만 육적 그리스도인에게도 간헐적인 은혜는 있습니다. 가끔 기도할 때 펑펑 울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로부터 고갈되는 경험이 간헐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자기가 고쳐지고 새 사람이 되어져 가는데 그 생활과 하나님과의 친교속에서 사는 것과 그리고 열렬한 기도의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리고 하나님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철저한 삶.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맥락 속에 있는 것이지 따로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고 결심을 해서 내일 아침부터라도 기도해야 되겠다 생각하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앞에 기도할라고 하는데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몇 번 시도해 보다가 나가기는 나가는데, 몇 번 시도는 해보았는데, 기도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때에 지혜로운 사람들은 ‘자기가 이렇게 질병상태에 있구나!’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고쳐질 수 없는 그 질병상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결국은 근본적인 영혼의 변화로 들어가는 것이죠. 그리고 고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못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설교도 그만하면 우리동료들보다 잘하고, 신방에 대해서 내가 도가 텃고, 말씀에 대해서도 내가 잘가르키고, 그래서 조금 내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기도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뿐인데 노력을 해서 조금 시간을 채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말할 진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질병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계속 기도하라고 강요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기도가 안 된다는 것을 네 스스로 확인을 해라! 그리고 더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앞에 직면해서 매일매일 새벽기도에 나가는데 가서 하나님이 너를 본 척도 안 하시는 것을 확인해라. 그 거절감을 느껴라. 생각을 해라. 내가 목회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데,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친교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과의 그 친교를 촉진해주는 그런 안내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 내가 이 길로 들어섰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쳐다도 안 보실까?’ 이것이 말하자면 영적 변화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 이런 식의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거의 못 맞났습니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기본적인 영성들이 완성이 되고, 특별한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역을 하면서 말하자면 둥글게 형성된 영성의 form에 색깔을 입히는 정도의 차이지 사역을 하면서 영성이 확 커지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의 특별한 사람들 이외에는 그런 경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거절감을 맛보면서 ‘항상 이것이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로 사소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라고 이런 식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 몰고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더라고 새벽기도에 나가서 자기가 하나님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느끼라고 다그치니까 상황에 떠밀려서라도 자기가 그것을 정검하게 되는데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자기가 이런 상황에서 다그쳐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하나님앞에 두려움도 느끼고 고통도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정말 교회에 와있는 신학생들을 잘 돌보고 있는가?’ 생각할 때에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욕심 같아서는 한 학기에 한 차례씩 개인적으로 면담을 하고 싶습니다. 혼도 내고, 가망성이 없는 사람은 쫓아내고, 야단도 치고, 격려고 하고싶습니다. 그런데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깊은 기도속에서 하나님과의 친교가 형성된 것입니다.
모세가 기도속에서 하나님과 그렇게 깊이 대화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런 것 때문입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기도하고 내려올 때 그 얼굴이 광채가 났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줍니다. 그런 것들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군다나 옛날의 사람들은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서 기도했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실지로 실험을 해봤는데 총신대 근처에 살 때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두 번째로 읽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을 때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새벽에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을까?’하면서 실지로 새벽에 일어나서 산에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불편해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뜨뜻한 바닥에서 푹신한 카페트 깔린 곳에서 기도하다가 한 11월 달 정도 됐는데 총신 동산에 방석하나를 가지고 올라가서 한 보름정도 기도했는데 서리때문에 올라와서 한 30분도 기도를 못합니다. 무릎이 시럽고 아프고,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 들어와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그 사람한테만 하라고 하고 나는 교회에 가서 해야 되겠다. 뒷방에서 기도하든지 아니면 채플실에 가서 기도하던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존다든지 딴 생각하든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형제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자 over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에 손종호 목사님이라고 제가 참 좋아하던 목사님이 계셨는데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목회하시기전 신학생때 생활을 사모님이 글로 쓰신 것을 보았는데 이분도 참 유별난 분이었습니다. 산기도 가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늑대 쫓는 요령까지 우리에게 알려주셨는데 ‘늑대나 여우가 접근할 수 있는데 그때에는 딴 것을 가지고는 안되고 기다란 막대가 있으면 좋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 하신 것이죠. 늑대나 이런 것들은 영화에 보면 점프를 하고 해서 목도 물고 하는데 이런 것은 다 거짓말이고 항상 물을 때에는 무릎아래를 문다. 그러니까 ‘기도하다가 그런 것이 오면 막대기를 가지고 좌우로 돌리면서 쫓으면 대게 턱을 얻어맞고 도망간다’라고 조언하셨습니다. 저하고 한 열살 정도 차이가 나려나 살아 계신다면 그렇게 나이가 많으신 분도 아닌데 실제로 그런 삶을 사신 것입니다. 아무 곳에서나 기도하면 좀 어때! 그런데 이 양반은 좀 over를 하십니다. 겨울에 한강의 얼음이 꽝꽝 얼 때 그 강 위에 가서 무릎꿇고 고행을 하면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한강이 얼음 얼 때 얼마나 춥습니까? 그 바람 부는데 그곳에 가서 기도를 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산 기도를 잘 다니시는데 ‘산 기도를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까 산기도 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십니다. 눈이 많이 올 때 산에 가서 눈이 많이 쌓인 것을 발로 부지런히 밝는다는 것입니다. 30분 동안 부지런히 밝으면 그 주변이 다져지는데 그 다음엔 야전삽을 가지고 그것을 벽돌 모양으로 뜬다고 합니다. 그리고 눈을 뜬 주변에 눈 벽돌들을 둘러서 주위에 벽을 만들고 기도할 자리에는 비닐과 군용담요를 깔고 그 다음에 엎드려서 눈 속에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들이 많이 가려지기는 했어도 한 30년 전에 신학교를 다니셨던 분들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은혜가 있으셨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리 젊은 사람이 설교를 하고 해도 기도에 대해서는 모두 끄떡이면서 동의를 합니다. 제 책도 보면 의외로 연세 많이든 목사님이 제 책의 독자가 많습니다.
②제 책 속에서 희미하긴 하지만 자신들의 향수를 읽어내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가닥이야 다를지 모르지만 그것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목회자의 세미나에 가서 목회자의 기도 생활에 대해서 강의를 했는데 연세를 많이 드신 할아버지 목사님이 나오셔서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해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젊을 때에 주님을 위해서 좀 over해봐! ‘목사님! 어떻게 이 편한데서, 이렇게 따뜻한데서 이렇게 좋은 음악 틀어놓고 어떻게 기도 할 수 있습니까? 너무 타락한 것이 아닙니까?’ 하면서 옥상으로 올라가 보십시오. over를 좀 해보십시오. 아니면 ‘이 정도 가지면 안되겠다.’ 하면서 산으로 올라가든지... over좀 해보십시오. 엄두도 못 낼걸... 그러니까 정말 자신 속에 말하자면 살고 죽는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속에서도 그렇게 몸부림쳐 본 생각이 없으니까 어려움이 오면 항상 돌아갈 궁리를 하는 것이지 기도해서 하나님앞에 결판을 내야 겠다라고 하는 그런 용사와 같은 생각들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꿈은 크쟎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은 크니까 그런 것을 이루어 가는 방식자체가 신앙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지금 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는 아이들이 있습니까? 생활비 안 벌어온다고 성내는 아내가 있습니까? 그리고 집에서도 대부분 자유롭쟎습니까? 신학교 갈 때 이미 내논 자식 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건강하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면 기도할 때 갑절의 은혜가 없으면 젊었을 때 기도를 많이 하시던 목회자도 나이가 들면 기도를 안 합니다. 난 참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세월이 흐를수록 기도가 원숙해져야 하는데 왜 그러냐?’ 고 물어보니까 너무 힘드니까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무릎도 정상적인 무릎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면 금방 이상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피곤함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점점점점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이를 들수록 더 은혜 속에서 살아야지만 겨우 젊을 때와 같은 은혜 속에서 살 수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직까지는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서 여러분보고 하루에 3시간도 기도 안 한다고 야단을 치곤 하지만 어느 날 이르러서 내 자신의 체력도 그런 것들을 도저히 감당할지 못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제게 남아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분들이 아직까지 젊고, 집안에 매이는 것도 없고 할 때에 그럴 때에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새벽기도, 그것은 기본이고 학교같다가 와서도 나와서 하나님앞에 매달리고 집에 들어 누웠다가도 가슴이 냉냉해지면 교회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피곤하면 그곳에 누워서 자고, 이렇게 무시로 하나님을 찾고 그 교제속에서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세계에 있어서 만큼은 내가 누벼야 할만큼 누비면서 인생을 살았다.’ 그렇게 해서 기도를 할 때 기도의 사람이 되고 나면 성도들이 아무리 까다롭고 유별난 사람이 있어도 품속에 이렇게 들어옵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생기도 해도 그 사람들을 깊이 이해하고 끓어 안을 수 있는 품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인들에게 ‘자기의 목사님이 가장 신뢰가 될 때가 언제냐?’ 물어보면 오랫동안 기도하고 강단을 내려올 때 그때 성도들은 자기 목회자에 대해서 신뢰하는 것입니다. 깊이 그 목회자의 리더쉽에 대해서 영적인 특성을 인정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앞에 더더욱 깊은 기도 생활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견디질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새벽기도에 모이는 성도의 수에 대해서 저는 아직까지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새벽기도가 끝나고 나서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9시가 되었는데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신학을 해서 앞으로 목회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성도들만큼이라도 기도를 안해서 과연 그 사람이 영적인 리더가 된다고 할 때에 누가 그것을 인정해줄지 생각해 보십시오. 6개월이면 한번씩 교역자를 충원하는데 그때마다 아주 고민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덜 익었다는 것입니다. 과일이 있으면 잘 익었을 때 하나씩 따서 먹어야지만 맛이 있는데 덜 익었습니다. 그러나 따긴 따야 합니다. 그러니까 곤욕입니다 이제 따 가지고 집에 가서 익기를 바래야 하는데 그런데 잘 익으면 다행인데 그런데 안 익겠다고 하면 그것도 또 문제입니다. 진짜 고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표를 만드십시오. 표를 만들어서 성경앞에 딱 붙이십시오. 달력표를 만들어서 한쪽은 새벽기도고 한쪽은 성경 읽기표란을 만드십시오. 그래서 그것을 그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얘기해도 잘 안 합니다. 왜? 자신이 없고 매일 성경 펼 때마다 그것을 들여다봐야 하니까 괴로워서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정말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전도사님도 있고 그런데 새벽에 교역자가 안나오면 제가 가끔 전화합니다. 핸드폰으로... 한번도 ‘왜 안나오냐?’ 말한 적은 없습니다. 전화가 오면 8-90%가 제가 직접 건 전화입니다. 그럼 전화 받고 정신이 날것입니다. 담임목사가 전화를 했으니 전화해서 통화를 하면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자네 신랑 뭐하나?’ 이렇게 사모님에게 말하면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그래서 벨만 계속 보내다가 끕니다. 그러면 아니나다를까 한 10분쯤 있으면 교역자가 숨을 헐떡이며 교회당으로 들어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이 짓까지 해야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어떤 생각을 하냐하면 ‘그래도 이것이 저들을 섬기는 기회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그렇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사실 야간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오다가 전도도 하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12시가 다 됩니다. 밥 먹고 씻고 하면 1시입니다. 그런데 4시 반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나와야 합니다. 담임목사님은 부교역자들이 자기보다 새벽기도를 늦게 나오는 것을 용납을 못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상황이 허락하느냐 안 하느냐는 소용이 없습니다.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이틀만 한번 실컷 자보자’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래도 좀 낫습니다. 왜냐하면 나오기만 하면 되었거든요. 그전엔 새벽기도의 군불까지 피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늦어도 4시 20분엔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전날 밤에 한시에 가서 불을 다 피울 수 있도록 준비를 해 놉니다. 세상에 그 기름보일러를 놓으면 해결이 될 것을 나무난로를 때는 것입니다. 연료비를 절약한다고 목사님이 가을이면 집 부시는 곳에 다 돌아다니면서 나무를 모아다가 가져다 놓고 집사들을 시켜서 그것을 다 톱으로 잘라서 겨울내 때도록 준비시켜 둡니다. 그리고 또 난로에서 연기가 나면 ‘너구리 잡나’고 바가지로 욕을 먹었습니다. 저는 정말 서럽게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한번은 수도를 얼렸다고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수도를 녹이면서 수도꼭지를 붙들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웃지요? 웃음이 나오는지.... 한번은 전화로 교인들이 상담을 하는데 좀 길어졌습니다. 목사님 사택이 꽤 먼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문을 활짝 열면서 ‘김 전도사!’ 그럽니다. ‘또 벼락이 났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하시는 말씀이 ‘야 이녀석아! 그 전화가 네 전화냐? 너 쓰라고 논거냐?’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제 개인적인 전화통화도 아니고 교인이 전화를 걸어서 상담해주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장 그따위로 하려면 집어쳐라!’라고 말씀하시는데 말도 못합니다. 그때 이후로 ‘내가 나중에 목회를 할 때 두 종류의 사람들에겐 잘해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역하는 교역자와 사찰. 제가 사찰생활을 해봐서 압니다. 그러니까 ‘사찰 괴롭히면 내가 그 교인을 가만히 안 두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새벽때 4시 좀 넘어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비몽사몽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딱 일어나서 전화벨이 울리면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전화가 왔구나!’ 그리고 막 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니다 다를까 새벽기도시간에 폭격이 날아옵니다. 내가 그렇게 하고 8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7년인지 8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시편 119편을 읽으면 항상 저는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난받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받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 받은 후에는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정말 유리그릇처럼 연약한 사람을 하나님이 강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를 악물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벽기도를 나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도사고 안 나가면 폭탄이 떨어지니까 그러니까 나 야단 받는 것은 괜찮은데 우리 집사람까지 욕을 먹습니다. ‘너는 도대체 신랑도 못 깨우고 뭐하냐?’ 그러니까 자존심이 상하고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는 오기가 생깁니다. ‘내가 토해도 나간다. 가다가 쓰러져도 내가 나간다. 이내가 교역자로써 이 문제만큼은 목사님께 욕먹지 않겠다.’ 오기로 나갔습니다.
새벽 4시에 십분 더 자는 것은 8시에 한시간 더 자는 것보다 더 달콤합니다. 더 자고 싶습니다. 그렇게 꿀맛 같고 정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그날은 자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최고로 행복한때가 언제냐 하면 1월 1일입니다. 너무 너무 행복합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는 새벽기도가 없이 자니까 날아갈 것처럼 행복한 것입니다. 휴가가 어디 있습니까? 무슨 휴가입니까? 24시간 교회를 지켜야하는데 그런데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기도의 은혜를 끌어안고 새벽에 그 기도의 영에 사로잡혀서 잠을 이룰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갔다면 진짜로 좋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이 그때 목회를 시키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러분들 중에는 그 목사님 밑에서 전도사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내 후임으로 간 형제가 있었는데 제 후배인데 넉 달만에 그만두었습니다. 넉 달만에... 딱 사 개월만에... 겨울에 새벽 예배때 목사님이 들어오실 때 이미 교회당이 뜨듯해야만하고 교회당의자 줄이 칼같이 딱 맞아야합니다. 발로 툭툭 차고 해서 줄을 맞춘 것이 아니라 제가 낙시줄을 띄워서 줄을 맞춰야만 했습니다. 교회당에 티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찬송을 부르고 새벽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설교의 맥도 없으면서 설교를 어떤 때는 한 시간 가까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스트레스가 몰려옵니다. 빨리 끝나고 가서 학교 가는 총신버스를 타야하는데 청량리에서 떠나는 총신버스가 있는데 그것을 놓치면 양지까지 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와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렇게 살을 애이는 것 같은 고통스런 훈련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훈련이 때로는 비인격적이었습니다. ‘그따위로 하려면 집어치우라’고 하시고, ‘교회에서 사례금 받고 그 정도밖에 못하느냐’고 했는데 정말 가슴이 매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생각하면 입이 열 개가 있더라도 할말이 없습니다. 해로 치면 8년이고 정확한 기간은 6년인데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동안 달구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절대로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강인함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극복하면서 새벽에 나오면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한없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가난하기는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새벽기도가 끝나고 나서 교회를 청소하는 데 어느 집사님이 다음날 시장에서 싸구려 골덴 바지 하나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나중에 ‘왜 사주셨나?’고 물어보니까 내가 추리닝을 입고 있었는데 엉덩이가 다 나오더랍니다. 하도 작아서... 그것도 여름 추리닝이었는데 그것을 입고 겨울에 눈을 쓸고 있으니까 너무 불쌍해서 골덴바지 하나를 사다가 방문 앞에 두고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신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 황당한 적도 많았습니다. 학생 한 명이 기말고사를 보고 졸업을 해야 하는데 교회목사님이 부흥회를 해야한다고 학교를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얘는 졸업을 해야하는데 목사님이 늘 제 시험을 보시던 분이셨는지 제 시험을 보면 되니까 학교를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뚝뚝 떨구며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아무한테도 말 안 하다가 보따리를 풀어놓고 제 예기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전 근대적인 전도사 생활을 13년했는데 전도사 생활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이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때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 받은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살아 계실 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사실 화해가 안되었습니다. 그 심정을 이해합니까? 화해가 안되었습니다. 내가 교수가 되고 다되었는데 화해가 안됩니다. ‘세상에 어떻게 나를 그렇게 다룰 수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돌아 가시기전에 병상에 누워 계셨는데 하나님이 제게 감화를 주셨습니다. ‘내가 이러면 안되겠다’ 그리고 하고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앞에 가서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고 반밖에는 마음이 없었는데 그 반이라도 억지로 울어내어서 ‘목사님! 목사님 밑에서 신앙생활하며 받은 훈련이 제게 큰 득이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는데 목사님이 또 ‘그럼! 그럼! 네가 그러니까 사람이 되었지!! 나는 너를 위해서 하나님이 너를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영원히 내 은혜를 잊으면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예예!’ 답변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감사한지 그후에 한 달 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그것을 풀지 못했으면 하나님앞에 너무도 죄송했을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제가 미워서 그랬겠습니까? 그 목사님이 원래 성격이 과격하고 직선적이고 그래서 그랬겠죠. 그런데 세월이 이렇게 지나고 나니까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그 속에서 강해지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간 교회의 목사님은 정말 인격적이셨습니다. 저같이 그냥 막 하질 않으십니다. 교역자가 새벽기도 안나오면 저는 ‘새벽기도 왜 안나오냐?’ 하고 야단도 치고 하는데 그 목사님은 새벽 기도 가지고는 말씀을 잘 안 하셨는데 예를 들면 옛날에 기도 안 하다가 목회를 잘 못 하신 분의 이야기를 하시다가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라고 인격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삶이 turning하는 교역자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고 진짜로 천사를 제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좀 험해서 그렇지! 아주 저를 강권적으로 달구셔서 인간이 이렇게 비참해 질 수 있는 가를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그 목사님의 주관이 무엇 이었냐면 ‘전도사는 학대 받으면서 자라야 한다’였습니다. 아주 공공연히 말씀하시고 다니셨습니다. 교인들이 전도사에게 잘해주는 것을 아주 굉장히 싫어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망치는 것이다. 학대를 받으면서 자라야지만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언어가 거칠어서 그렇지 요지는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광야에 선 것과 같이 혹독하게 훈련 되어야지만 네가 이 다음에 이 거친 세상에서 목회라는 것을 해 나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목사님으로부터 받았던 상상하기도 싫은 엄청난 압력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게 너무도 필요하신 분을 제게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으로 하여금 저를 훈련되게 하신 것이죠. 저는 확실히 생각합니다. 내가 이만큼이라도 강함을 가지고 목회 할 수 있게 된 것이 어느 한 순간의 비결이라고 주목하면 안되고 그렇게 긴 세월동안 진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집사를 하다가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를 할 때는 목사님이 그렇게 제게 우호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회개도 보고, 교육도 하고 그랬으니까 너무도 우호적으로 대하시고 저를 쳐다보시면 사랑과 인자하신 얼굴로 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돈 7만 원주고 전도사 시킨 다음부터 완전히 안면을 바꾸시는데 저는 교회에서 밥 먹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 인줄 몰랐습니다. 예배 끝나고는 악수도 안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훈련들이 얼마나 유익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인원이 많아서 제가 할 순 없지만 교구에 있는 전도사님들이나 강도사님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최소한 그 사람들은 새벽에 전화를 걸어서 새벽기도 안나오면 잠이라도 못 자게 괴롭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통신에다 알아보려고 하는데 몇 시되면 전화가 울리는 것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전호를 받으며 내 목소리를 그곳에 녹음을 해서 ‘뭐하는거야? 새벽기도도 안나오고...’ 나오게 하는 서비스가 없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울리게... 그것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자?’ 제가 그렇게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역자가 20명 가까이 되는데 담임목사가 전화해서 새벽기도 나오라고 벨 울리다가 끄는 그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떨 때는 치사한 생각이 듭니다. 부 목사님을 시켜서 혼내주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전의 제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합니다. 새벽기도에 익숙해진다라는 표현이 있죠. 제가 보기엔 10년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10년이 걸립니다. 6개월, 1년, 안됩니다. 새벽기도가 몸에 밴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10년이 걸립니다. 10년 정도 되면 어느 정도 되냐면 눈을 딱 뜨면 거의 그 시간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뿐이지 기도 할 욕구가 흘러나오는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몸에 배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가 영적인 일이니까 몸에 배겠습니까? 내가 오늘까지 기도의 은혜로 충만했다가도 내일 다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고 습관이 이렇게 배는 것은 1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몸에 질병이 있다든지 매우 특별한 상황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새벽시간에 퍼져서 잠을 자는 것을 아주 수치스럽게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경험상으로 보면 새벽에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는 특별한 기도가 아니라 이것은 일반적인 기도이고 그리고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에는 밤에도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때로는 철야도 한다라고 하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원으로 자주 가는데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그런 기도의 기간을 정해놓고 쏟아놓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늘상 드리는 기도가 견고하고 두터워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여러분들 중에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목표를 최소한 ‘내가 학업도 하고 해야 하니까 내가 최소한 2시간 정도는 내가 하나님앞에서 기도하면서 살겠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변화를 가지고 깊이 몸부림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러분들을 잘 돌보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한 것이 ‘어느 교회라도 신학생’이라고 하면 그 딱지를 가지고 여러분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너는 신학생이니까 이 정도 해야한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영적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풀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나 교인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신학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보지 말라.’ 그리고 많이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보면 이것이 최선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무엇이냐 하면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무엇인가에 강력하게 통제를 받으면서 그러면서 다구침을 당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기도생활을 하면서 잘 살아가야 할텐데 그런 결심들이 너무 약한 것입니다. 작년에도 여러분들이 수련회 와서 펑펑 울었습니다. 진실입니다. 그런데 진심인데 그 다음에 기도 생활안하고 하는 것도 진심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거기에는 강력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희망이 뭐냐면 교회안에 학사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학사 같은 것이 있어서 다 받지 말고 검증을 거쳐서 그저 싹수가 보이는 사람은 학사 안에 입학을 시켜서 1년이나 2년 정도 공동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형제 사랑도 배우고 그리고 그 속에서 목회자로써의 공동체 생활도 배우는 것입니다. 평소에 좋은 분 모셔다가 강의도 듣게 하고 그리고 새벽기도 안나오면 가만히 안 두는 것입니다. 밥도 먹여주는데 가만히 둡니까? 그래서 강인한 사람으로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 험한 목회적인 상황을 헤치고 나아가는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일단 기도생활을 하려는 마음을 먹을 때 ‘자기가 별로 기도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면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주제 에 대해서 아주 중대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눈을 뜨게 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지식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전체적인 삶을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반드시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교역에 들어서고 나면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영혼의 어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무엇인가 방향을 선회하는 변화가 일어날것이다.’ 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축복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교 핑계 대고 그럴 것 없습니다. 그냥 ‘새벽기도 생활 그 자체가 이것은 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라고 생각을 하십시오. 하나님앞에 몇 일 기도한다. 이런 생각하지 말고 새벽기도에 나오십시오. 하나님앞에 나와서 기도하고 매달리고 그래서 아버지앞에 정말 기도하면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가운데 이 여호수아처럼 서서히 서서히 지도자의 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사람의 지도자로써 영적인 특성들이 구비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하나님앞에서 ‘여기서 깨트려져야한다. 내가 여기서 하나님앞에 매달려야 한다’라는 그 지점에서 정확하게 하나님앞에 매달리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목회자들이 분명히 지금은 결단을 하고 기도를 해야할 시간인데 그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랫동안 살아온 삶이 그런 식의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결단 없이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생활을 가로막는 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처지해야할 적이 무엇이냐 하면 게으름입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입니다. 죄가 좀있어도 부지런하면 하나님앞에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게으름이 문제입니다. 게으름은 육체와의 타협입니다. 게으름과 신령한 기도의 영성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육체를 가진 인간이니까 자기 체력도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이 게으름에 대해서 아주 혐오하는 마음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게으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방탕하다. 타락하다’라는 것이 아니라 허리띠를 동이고 시간을 아끼면서 열심히 살지 않는 모든 것이 다 게으름입니다. 그것이 기도생활을 가로막는 최고의 적입니다. 여러분들이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표를 그리면서 일과를 적어놓고 한번 그렇게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멍하니 넋을 놓고 시간을 보내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쓸모 없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사니까 항상 기도할 시간이 안나오는 것입니다. 엊그제 우리 집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하루의 기도를 쉬었는데 하루가 어떻게 긴지 살아도 살아도 시간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 집에 오면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어떤 때는 새벽기도 끝나고 내려와서 4시가 되도록 세수를 못합니다. 무슨일이냐 하면 그 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7시에 내려오면 7시에 시작이 되고 8시에 내려오면 8시부터 시작이 됩니다. 부지런히 살아야합니다.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날 때 여러분들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때에 ‘이 게으름이 나를 죽인다’고 생각을 해야합니다. 용수철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충성!’ 그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은 웃지만 저는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명이었습니다.
요즘도 제가 활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아침에 천근만근입니다. 토할 것 같습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충성하면 일어나집니다. 그리고 가서 새벽기도 가서 기도하고 오면 어떻게 또 하루를 삽니다. 그러니까 게으름을 타파해야 합니다. 미워해야 합니다. 그냥 친구들하고 노닥거리면서 시간 보내고 하는 것은 전부다 게으름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시간을 아끼면서 웬만한 거리는 뛰어다니면서 그러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기도생활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내가 사역을 하겠습니다.’ 손드는 사람은 많지만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소수입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영화롭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끼치고, 자기 자신도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은혜속에 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너무도 소수입니다. 일이 우리를 즐겁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즐겁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자신만큼 우리를 즐겁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은혜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앞에 정말 여러분들이 ‘이러한 친교를 누리면서 내가 일평생동안 내가 목회를 해야겠다. 그때에 비로소 내가 목회를 하면서도 나 자신도 거룩해져가고,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도 존경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에도 기쁨이 되는 사람으로 빚어져 갈 것이다.’ 라고 하는 그런 확신이 여러분들 속에 들지 않습니까? 부디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 메마르기 짝이 없는 이 강산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설교하러 다니면서 거의 죽은 것과 방불한 교회를 봅니다. 그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목회자 한사람이 와서 여기에서 몇 년만 피눈물만 흘리면, 그렇게 기도하면 이 교회가 살아날텐데...’ 결국은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결국은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한사람의 지도자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잠들어져 있는 교회의 평균적인 수준의 지도자가 되어서 그 교회에 가서 밥이나 벌어먹고 산다면 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 인생인데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죽을 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교회속에 들어갔을 때 견디기 힘든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친교가 없는 것에 대해서 집요하게 들어가는 탐구의 정신을 가져야합니다. ‘나의 영적인 문제의 핵심은 뭘까? 문제가 뭘까?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극복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중대한 변화에 직면하면서 필요성에 직면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이 될 때에 그때에 거기가 하나님을 만나는 광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모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이 그 광야에서 혹독한 몸부림 속에서 하나님앞에 세움을 받아서 오늘날 이렇게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로 살아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특별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준비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준비되기 위해서는 많은 헌신과 몸부림을 요구합니다. 값지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손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깊이 반성하고 그래서 기도생황의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기도생활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 전체가 그런 탁월한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그 영향력들이 여러분들이 돌보는 지체들에게까지 파급될 수 있는 그런 복된 사람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