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구역장 수련회 새벽 예배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녹취자 : 김세나
제사는 목적에 따라서 분류가 되고 또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의해서도 제사의 명칭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번제는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고, 거제는 제물을 들어서 드리는 제사이고, 요제는 제물을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이고, 그리고 관제라고 하는 이것은 뿌려서 드리는 제사에요. 그러니까 액체를 뿌리는 거죠. 그렇지만 무슨 제사이든지 간에 피 없는 제사는 없었기 때문에 이 관제는 홀로 뿌려서 제사로 성립할 수가 없고, 피를 흘려서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그 위에 뿌림으로써 보충적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이제 자신이 관제와 같이 자기를 드릴 날이 왔고, 나를 관제와 같이 드리리니 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이다 그랬으니까 이것은 순교를 가리키는 것이죠. 그러면 사도바울이 자기를 왜 번제물이라고 표현을 안 하고 관제라고 표현을 하면서 홀로 성립할 수 없는 제사, 하나님 앞에 피 흘려 바쳐지는 제사, 그 제물 위에 보충적으로 뿌려지는 관제로 자기 자신의 희생을 묘사하였을까 하는 거죠.
그것이 오늘 성경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 곧 빌립보 교회 교인들의 헌신과 수고에요. 이 빌립보 교회는 사도바울이 아주 깊이 아끼던 교회였습니다. 교인들이 모두 다 사랑해야 하는 교인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이름을 생각할 때 마음이 눌리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사랑해야 하는 교인이 있고 낙심이 되고 어려울 때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에 깊은 기쁨과 즐거움이 솟아나게 되어서 생각하게 되는 교인이 있듯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교회도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 같은 교회는 사도바울의 마음에 떠올리면 마음에 깊이 괴로움이 일어나면서도 사랑해야 하는 교회였지만, 이 빌립보 교회는 이름을 떠올리면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면서 사랑해지는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부유한 교회는 아니었지만 마게도니아 교회처럼 바울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바울이 꿈꾸고 계획하던 목회의 비전을 따라서 선교와 그리고 영혼을 섬기는 일에 협력한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한 마음이 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교회가 처음 설립될 때부터 제 마음속에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바로 한 교회, 한 예배, 한 회중이라는 것이었죠. 제가 경험한 교회는 다 천명 미만의 교회였습니다만, 그런데도 교회가 삼지사방으로 다 나뉘어져서 그래서 청년부는 대학부와 관계가 없고, 대학부는 교회와 관계가 없고, 한번은 교회에 뭐 안좋은 일을 보면서 그 대학생 청년이 전도사인 나에게 이러 저러한 교회의 불만을 토로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네가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면, 15년만 기다려라. 15년만 기다리면 교회에서 안수집사가 되고, 25년만 기다리면 장로가 될텐데 그때까지 잘 참고 교회를 사랑하다가 그 순수한 마음과 꿈을 간직하고 있다가 교회를 개혁하면 어떻겠냐 그랬어요. 대부분 대학졸업과 함께 교회를 떠나요. 오죽했으면 장년부에 있는 안수집사님이 대학부에 올라와서 임대료 내라고 그랬어요. 너희가 우리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냐. 임대로 내라고.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세우시려고 하셨던 교회의 모습일 수가 없는 거죠.
빌립보 교회나 마게도니아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장소는 달라도 사도바울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온 그 목회의 비전을 함께 나누어 가진 교회였습니다. 어느 부분은 잘 알기 때문에 사도바울에게 협력했지만, 어느 부분은 잘 몰라도 그 목회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굳게 믿으며 협력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 교회가 사도바울의 마음에 생각만 하면 감사의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던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 우리도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서 열린교회 본래 그러한 정신은 그리고 그 정신이 그저 목회자 한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조국 교회에 대한 많은 비성경적인 악풍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참 몰라요. 그래서 부서와 교구들은 할 수만 있으면 나뉘어져서 무엇인가 독립을 하려고 하는 그러한 움직임이 해가 갈수록 더 강해지는 것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껴요. 모두 해 본 것들입니다. 그래서 효율적인 것이 좋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그리고 있는 그러한 교회의 모습을 구현해 내는 거죠. 아무튼 그 빌립보 교회는 어려움 속에서도 사도바울을 위해서 함께 목회의 비전에 참여하며 열심히 헌신해서 그래서 주님의 복음에 진정 복음의 성공적인 사역을 이루어내는데 이바지 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알게 모르게 이 빌립보 교회가 얼마나 많이 수고했겠습니까. 아무도 사도바울의 이런 사역에 헌신하지 않는 때 조차도 빌립보 교회는 온 마음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러한 그 헌신이 하나님 앞에 드려진 헌신이고 그리고 그 헌신을 만약에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에 비유한다면 그 제사가 정말 온전하게 드려지는 하나님 앞에 드려진 향기로운 제사가 되기 위한 마무리로서 자기가 자기의 순교의 피를 그 섬김 위에 뿌려서 하나님 앞에 관제와 같이 드려지겠노라고 하는 것이죠.
구역이나 교구나 또 순이나 또 교회 전체나 꼭 그렇습니다.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혼자 섬겨서는 안 되거든요. 혼자 섬겨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예루살렘이 성을 쌓을 때, 사면으로 성을 쌓으면서 여기는 왕가에서 쌓고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는 귀족들이 쌓고,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는 백성들이 쌓고, 여기에서부터 여기까지는 온 백성들이 힘을 합해서 성을 쌓아 올렸어요.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 역사가 흐르면서 모든 성벽이 다 무너지고 마지막 북쪽 벽이 남아있었는데, 그게 바로 통곡의 벽이에요. 그 남아있는 벽이 공교롭게도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쌓은 벽이 아니라 왕가와 온 귀족과 군인과 백성들이 함께 쌓아 올린 벽만 역사 속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절대 유능한 한 사람에 의해서 되는 법이 없어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많은 사람이 필요해요. 많은 사람이 필요해요. 그것이 없이는 절대로 교회가 서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당신의 몸인 교회로 한 지체를 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는데 그렇게 모든 지체들이 함께 섬겨서 교회를 이롭게 하는 그것이 생명의 원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팔이 부러지든지 그러면 깁스를 하잖아요. 그래서 두 달씩 있잖아요. 그 다음에 깁스를 자르고 나도 이게 안 움직여집니다. 이미 온전한 지체가 아닌 거죠. 그래서 물리치료를 하고 근육을 풀어주면서 운동을 한동안 하면 그제서야 비로소 몸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능력이 한없이 많으셔도 교회를 건강하게 하시기 위하여 온 교회로 하여금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지금은 예전의 교회에 비해서 갖추어진 것이 참 많거든요. 예전에야 4킬로씩, 8킬로씩 되는 길 시골에서 다 별보며 걸어서 새벽기도회 별 보면서 걸었습니다. 지금처럼 뭐 버스를 돌리고 자가용을 타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저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찰이 어디 있습니까. 사찰이. 목사님 생활비 드릴 돈도 없는데 곡식이나 받으며 목회하던 때였는데 어떻게 사찰을 둡니까. 꿈도 못 꾸죠. 그러니까 장로님들이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당 문을 열고 집사님이 종을 치고 옛날에 새벽 기도회 시간은 오죽 잔인했습니까. 4시 30분이 새벽 기도예요. 초종이 4시 5분에 치고 두 번째 종이 4시 25분에 치고, 그러면 4시 30분에 새벽 예배를 시작합니다. 그 난로가 제대로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 추운 엄동설한에 그렇게 하면서 저도 기억이 나요. 처음 회심했을 때. 교회 더운 물이 어디 나옵니까. 커피포트가 어디 있습니까. 그 차가운 걸레를 돌덩어리처럼 땡땡 얼어 붙은 걸레를 찬물에 빨아서 손을 호호 불면서 그러면서 강대를 닦았어요. 그래도 그 때 교회가 안 가진 것 없이 가지고 있고 체제가 갖추어져 있어도 그 때 교회가 더 건강했어요. 왜, 온 교인이 함께 섬기니까 말이죠. 온 교인이 함께 섬기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온 교회를 온 성도들의 함께 섬기는 섬김으로 지어가시는 원리에요. 구역도 마찬가지이고, 순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종종 보면 유능한 목회자가 있는 교회가 의외로 건강하지 못하고, 조금 부족한 목회자가 있는 교회가 의외로 건강해요. 구역장도 성경 많이 알고 탁월한 사람이 구역이나 순을 인도하는데 의외로 건강히 않아요. 그리고 오히려 조금 부족한 것 같은 구역장이나 순장이 있는 곳이 건강해요. 왜냐하면 자기의 지체들에게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해서 혼자 할 수 없으니까 함께 하나님을 섬겨 가는 거예요. 거기에 참여하면서 성도들이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거죠.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갖느냐 하면 우리 구역장이나 순장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가 잘 도와 줘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져요. 그래서 함께 구역을 섬기고 함께 순을 섬기면서 그들이 놀랍게도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거예요.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섬기면서 말씀의 은혜를 받기 시작하고 또 지체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많은 상처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섬기면서 지체들과 관계를 갖으며 교제의 소중함을 알게 되요. 그래서 혼자 달려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참여하게 해서 섬기게 하셔요. 그것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관제가 없이도 번제가 성립하지만, 피 흘리는 제물이 없이는 이렇게 뿌려드리는 이 제사는 독립적으로 성립을 안 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비록 순교할 각오를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겸손하게 관제와 같이 자기의 생명을 뿌려 드리는 이 제사보다는 빌립보 교회의 헌신이 주된 제물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정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거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름 모를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건강해지고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무명의 많은 지체들 때문에 교회가 주님을 대신해서 이 일 저일로 섬기며 그렇게 세상 한 가운데를 지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체들의 섬김이 너무너무 필요해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구역 안에서 순 안에서 무의 도식하는 식구가 없게 해야 되요. 그것은 정말 목양을 망치는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도록 그리고 은사와 형편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도록 그리고 주님을 섬기면서 기쁨을 누리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것을 가슴에 꼭 새겨야 해요. 그런데 오늘 보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목회자인 바울을 사랑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바쳐서 훌륭하게 섬겼으나 사도바울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고 마지막 그 섬김 위에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섬김을 피처럼 뿌림으로써 관제로 바쳐서 그 헌신의 제사가 완전히 향기로운 제사로 만들겠다고 말합니다.
결국은 지체들이 아무리 많이 헌신해도 지도자가 헌신하지 않으면 그들의 헌신은 결코 하나님 앞에 완성된 제사가 되지 못합니다. 완성된 제사가 되지 못합니다. 그 모본을 우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거죠. 인간적으로 보자면, 아직 성령이 임하시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정도 밖에 살 수가 없어서 그랬겠지. 사도들도 고생 많이 하면서 헌신했습니다. 주님 못 박히실 때 잠시 도망가긴 했지만 워낙 부지런하신 주님을 따라다니시며 쉬실 날이 있었겠습니까. 지도자가 게으르면 백성들이 나태하지만 지도자가 부지런하면 백성들이 함께 부지런해집니다. 그렇게 이 예수님이 헌신하는 그 제자들 위에 당신 자신을 드려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써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당신의 보혈의 피로써 복음 사역의 혁혁한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성령 강림의 길을 여셨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지체들이 함께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지만 그 위에 그 위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제와 같이 다 뿌려서 우리가 돌보는 지체들의 그 헌신을 헌신의 제사를 완성시킨다고 생각을 해야 해요. 무제한의 헌신, 그것이 필요해요.
제가 목회를 해 보니까 헌신된 사람들과 목회하는 것과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을 지도자로 데려와 목회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차이에요. 헌신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의욕이 넘쳐요. 그래서 어떠한 문제를 토론할 때, 무제한의 헌신이 각오 되어 있을 때에는 토론이 생산적이고 긍정적이에요. 그러나 그 헌신이 안 되어 있을 때에는 그 토론이 항상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에요. 그것을 꼭 해야 합니까.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새벽에 누가 나옵니까. 그렇게 일을 벌리면 돈은 누가 냅니까. 우리들도 가정과 직장이 있고 개인적인 생활이 있는데 그렇게까지 희생을 해서 이 시간을 낼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그 자체가 무게가 되어서 교회를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거죠.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거죠. 중요한 것은 지도자 자신이 자기 자신이 그 모든 지체들의 헌신 위에 마지막 관제와 같이 자기를 녹여서 자기를 뿌림으로써 그 제사가 형성 된다라고 생각을 해야 해요. 그래서 구역장이면 구역원들 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되고, 헌금도 더 많이 해야 되요. 참는 것도 더 많이 참아야 해요. 희생도 더 많이 눈물도 더 많이, 말씀에 대한 사랑도 더 많이, 성도들이 온 힘을 다해서 헌신하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이 그 자기를 위해서 헌신하는 그 성도들의 헌신이 자기가 덜 희생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가가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이 충성하고, 더 많이 전도하고, 더 많이 헌신해야 해요. 그 때에 하나님이 그러한 지도자들의 헌신을 지체들이 드리는 그 헌신위에 뿌려지는 마지막 관제로 여기셔서 그래서 지도자의 마음을 다 쏟는 헌신이 없다면, 향기로워질 수가 없는 공동체의 헌신을 아름답게 해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구역장이나 순장들이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정말로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그 때에 그들의 섬김이 관제가 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는 거죠. 문제는 하늘이 열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늘을 활짝 여시고
(찬양)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치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하늘을 열고 하나님이 나의 섬김의 복을 확 부어 주시면 끊임없이 영혼들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리고 나는 포기했는데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변화시키시는 아주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게 목회의 복이에요. 우리 목양의 축복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포기한 지체가 어느 날 예배 시간에 회심을 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할 때에 그 때에 우리의 마음에 밀려오는 기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놀라운 기쁨이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깨끗해야 해요. 그리고 이 일은 두려운 일이라서 잘 감당하면 하나님이 큰 복을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삶 속에 부어주지만, 우리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우리의 영혼은 급속히 부패하고 우리의 양 떼를 올바르게 돌아오지 못할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져야할 책임은 아주 무거워 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지극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영혼들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돌보는 영혼들을 모두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제물로 자기를 드리게 하고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관제와 같이 뿌려서 우리가 섬기는 영혼 돌봄의 현장 그 전체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의 제물이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 구역에 우리 순에 큰 은혜를 부으시고 하늘을 열고 영혼 살림의 복을 내려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