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세미나
-2002.12.27-
1. "불"-심령의 매임(행20:22)2002.12.27 2
2. 이 시대에 저항하며 사는 길(롬12:2) 2002.12.28 18
1. "불"-심령의 매임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2002.12.27 신학생세미나 1
오늘 이 성경은 사도 바울이 순교의 위험을 무릎 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다가 남겨준 유언적인 가르침 가운데 나오는 자기 고백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바울이 올라가면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인가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증거가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거기를 향해서 올라가겠노라고 작정을 한 것이죠. 그런데 누가 그에게 그것을 시킨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 자신의 심령 속에 강한 매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매임 때문에 자기 자신이 피할 수 없이 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들이 흔히 마음의 불을 가졌다 그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흔히 열정이라고 말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은 열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불의 한 결과이고 그리고 열정은 그 불 자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불을 마음에 있는 영적인 불은 열정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불 그 자체가 열정 그 자체는 아니다 이거죠. 다시 말하면 불이 우리에게 따뜻한 것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불 그자체가 따뜻함이 아니라 따뜻함이라고 하는 것은 불에 속한 한 작용이듯이 열정도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죠. 이 열정은 다시 인간적인 열정과 신적인 열정으로 나뉘어 집니다. 인간적인 열정은 그 출발 자체가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외부적으로 자극이 되어서 어떤 열정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그 외부적으로 자극 될 때에 그것이 인간의 영혼을 깊이 변화시키는 그런 심층적인 작용에서 온 열정이 아니라 영혼과는 상관없이 인간을 자극을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열정적이도록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인간적인 열정이라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 요새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는 사법고시에 붇는 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 이었습니다. 요즘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보다는 훨씬 쉽다고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1년에 60명 정도 뽑았을 때고 지금은 1000명 가까이 뽑으니까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거의 하늘이 낸 사람들이라고 꼽을 정도였었죠. 그때 많은 고시생들이 있었을 때 그때에 고시생들이 고시하다가 낙방하고 해서 너무 낙망하면 즐겨 읽던 책 가운데 고시생들이 쓴 수기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시생의 아내였던 사람이 쓴 "나는 고시생을 이렇게 내조했다." (하하하) 아니 여러분들은 웃지만은 진짜 그런 글들까지 있었습니다. 저도 예수님 깊이 믿기 전에 읽어 보곤 했거든요. 근데 아주 굉장한 마음의 불을 가져다줍니다. 이렇게 거의 피를 토하듯이 자기의 성취를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완전히 게으름뱅이처럼 사는 구나 그런 어떤 자극 같은 걸 굉장히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그런 글들을 읽고 자극을 받으면 열정적이 되죠.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변화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아마 그런 종류의 감동을 받았을 때 도전받는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할 것입니다. 그죠? 그런데 그게 영혼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열정이죠. 그러나 신적인 열정은 기원 그 자체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또 그 열정은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께서 만지고 지나가시는 강력한 변화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볼 때 인간적인 열정하고는 구별이 되는 거죠. 인간적인 열정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나 영혼의 깊은 변화나 이런 것 없이도 얼마든지 인간적인 열정이 가능하고 그러나 신적인 열정은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새로운 앎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어떤 깊은 깨달음 거기서 오는 영혼의 충격 이런 것 없이는 결코 이런 열정들이 생겨나지를 않는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의 불을 가진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져다주는 아주 뚜렷한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제임스 파커의 책 []에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그들 모두가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었습니까? 모세 아주 열렬한 사람이었죠. 선지자들 두말할 필요도 없고 특별히 그 중에서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이 A급 선지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세례요한, 예수 그리스도, 사도바울, 요한사도, 뭐 성경을 이어가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열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비밀은 뭐냐 하면 신적 정렬, 신적 열정이고 신적 열정의 궁극적인 원인, 기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한번 이렇게 보십쇼. 열정이 너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열정이. 오늘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내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이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기다린다고 하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은 자기도 거기를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죠. 그런데 이지적으로는 내가 거기에 갈 수가 없고 가서는 안 되는데 그런 이지의 활동과는 상관이 없이 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떤 강제적인 힘이 사도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거예요. 이 비밀이 뭐냐면 그 사도로서의 소명의 핵심부붙이에요. 이것을 신적인 강제력이라고 묘사를 하는데 신적인 강제력이 결국은 뭐냐면 자기는 이지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무엇인가 그를 강하게 붙들어 매어서 그렇게 살게 해주는 강제력이 자기 안에 역사하고 있는 거죠. 이것이 열정의 기초가 되는 거죠.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한번 이렇게 가만히 보면 은 너무 열정이 결핍돼 있다고 하는 거죠. 모든 방향에 있어서. 예를 들자면 첫 번째로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일 년 전에 이 자리에서 모세의 지도력을 가지고 장작 5시간이나 강의를 들었고 바로 한해 전인 2년 전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오대산 기슭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그 말씀을 가지고 또 다시 도합 합쳐서 5시간 가까운 정말 그때는 열정적인 그런 세미나를 여러분들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한 해 두해 거치면서 여러분들이 정말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느냐는 것이죠.
그런 성장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한 어떤 깊은 안타까움과 거기에서 오는 어떤 아픈 불, 그런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느냐 하는 것이죠. 두 번째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섬기는 삶을 살아갈 것 아니에요? 만약에 오늘 여러분들이 미래에 하나님을 잘 섬길 것이라고 하는 기대가 오늘 여러분들로 하여금 게으르고 안일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꿈꾸는 미래는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희망을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사용하셔야지 만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죠. 무엇인가를 하여튼 섬기며 살아가고 있을 것 아닙니까? 섬기지 않고 무엇인가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헛된 삶입니다. 그 무엇인가를 섬기면서 살아가면 그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진전이 있습니까? 무엇인가를 섬기는 살아가는 그 일에 있어서는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진전이 있느냐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 내가 섬기는 그 일에 진전이 없다고 할 때 거기에 대한 깊은 아픔이나 그다음에 왜 나는 섬기면서 살아가는데 내 섬김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서 영혼들에게 참된 신앙을 심어주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유용하게 사역을 하는 일에 있어서 진전이 없을까하는 일 때문에 깊이 괴로워하는 그 불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세미나 할 때마다 빼놓지 않았던 것이 뭐냐면 지적인 진보입니다. 저는 요즘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 목회를 하고 나서 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 목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와서 느끼는 것은 뭐냐면 나 자신의 지성적인 결핍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입니다. 이제 많은 것을 쏟아놓고 그렇게 사역을 해야 할 이 시기에 아주 지성적인 빈곤을 느낍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뭐냐면 주님을 만나고 나서 소명의 길로 들어선 이래로 열심히 사느라고 애써서 살았지만 부분적으로는 길을 잘 몰라서 헛고생을 했고 또 부분적으로는 보다 덜 중요한 일에 몰두하느라고 보다 중요한 일인 지성적인 선상에 게을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요즘도 두세 달에 한번씩 책꽂이를 붙들고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한해 전에 비해서 여러분들에게 지성적인 진보가 있습니까? 그런 진보가 없는 것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고 더 많이 진보하려고 하는 그러한 불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겁니다. 정말 너무나 열정이 없어요. 목회의 세계를 드려다 봐도 마찬가집니다. 고구마 장수도 하다가 안 되면 판을 뒤집어엎고 군밤장수로 바꾸는데 뭘 한번 맡아가지고 사역을 감당한다고 감당하면 그 사역에서 어떤 변화가 없으면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왜 그런 축복이 없는지를 깊이 드려다 보고 괴로워하든지 아니면 그런 점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내 마음을 다 쏟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방법이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지는 않은지를 돌아보면서 부지런히 연구하고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는 그런 열정들이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을 해 나가면서 사실은 자신이 어떤 사역을 힘차게 이끌어가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역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끌려 다니는 그러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주님이 주신 귀한 세월들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모두 그런 상황에서 안분지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불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자기를 붙들어 매는 신적인 강한 묶임, 매임, 하나님의 강한 강제력 이런 것들을 그 사람 속에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지도자, 주님의 사람은 하나님도 하루아침에 만드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만드시지 않으시고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만들어질 수 없도록 하나님이 스스로 정해 놓으신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사도 바울과 같이 마음에 이런 강한 불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쓰라린 광야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남들이 안일하고 나태하고 그리고 세월의 흐름 속에서 무지 무각하게 그냥 그 흐름을 따라서 보내는 안일한 날들 대신에 자기를 부수는 탁월한 열심과 자기를 부수는 진지한 몸부림 속에서 살아온 그런 일생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너무나 열정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과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과정입니다. 한 편의 설교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심했느냐에 대해서는 설교자가 받을 상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 홀로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내면적으로 고통을 받고 그리고 몸부림 치고 없는 시간을 쪼개어서 진리를 탐구하고 지성을 연마하고 그리고 눈물의 기도로 그 설교원고를 적시고 이거는 상 받아야 되요. 하나님 혼자 하신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은혜는 주셨지만 그러나 피 흘리고 땀 흘리고 깊은 밤 등잔불 켜놓고 무릎을 꿇고 진리를 탐구하면서 그것을 어린 영혼들에게 먹이기 위해서 젖을 짜내는 심정으로 그 영혼들 입에 물려주는 이는 설교자 자신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과정이 너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교회 20여명이 넘는 교역자들이 있습니다만 은 나는 항상 결과보다도 난 솔직히 아니 아주 정직하게 이야기해서 결과 때문에 감동 받아본 적은 많지 않아요. 무슨 얘기냐면 한 교구나 한 교회학교나 얼마가 모이면 우리가 감동될 수 있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거는 얼마나 모여도 감동될 수가 없어요. 왜냐면 밖에서 유리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죠. 오히려 그 결과보다는 그 결과를 잉태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진지한 몸부림. 나는 그런데서 오히려 신뢰가 생겨요. 그 교역자에 대해서 얼마나 모이는지는 모르지만 새벽마다. 신음소리를 내며 가슴을 쥐어짜는 그 통곡하는 기도. 모두들 사라져서 편안히 잠들어 있는 야심한 시각에 텅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서 영혼들의 이름을 부르고 몸부림치는 교역자들의 흐느낌, 어떻게 하든지 간에 부흥이 없는 날에도 최선을 다해서 영혼들을 사랑하고 돌보고 그리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섬기기 위해서 누구에게든지 무릎을 꿇고 배울 용의가 있는 겸손한 자세, 모험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 거기에다가 사역을 걸고 성과를 가슴 조리며 기다리는 그러한 긴장 이런 과정들로 인해서 감동을 받는다 이거죠. 그런데 보세요. 오늘날 정말 우리들이 열정을 볼 수 있습니까? 신학교 안에 깃들여있는 깊은 질병중의 하나가 냉담함입니다. 아주 냉담함. 냉담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계획을 하면서 오늘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이러한 신적인 매임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도 싫다. 그러나 심령에 매임을 받아서 나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강한 매임, 그런 것들을 경험해 본 적이 있냐고 제가 묻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그리고 그 소명의 매임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안일한 삶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이유로든지 안일할 수 없고 나태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신학교에 9년 있는 동안에 어쨌든 힘을 다해서 그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의해서 부르심을 받아서 이 길로 사역의 길로 들어서지 않은 사람들이 다시 학교를 떠나고 그리고 평범한 신자로서 일생을 살도록 부지런히 제가 권면했습니다. 어림잡아 추산으로 제 설교나 강의를 듣고 깊이 찔림을 받아서 신학교를 그만둔 사람이 200여명으로 추산합니다. 나도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 때문에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삶이 아니라 보통의 삶을 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 나와서 이 세미나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의 목표가 뭡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해주시면 여러분들이 제일 행복하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는 이것은 신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신학교를 나오지 않았어도 옛날의 초대교회에서는 훌륭하게 목회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처럼 신학교를 나오고 외국에 가서 학위를 받고 공부를 많이 하고와도 그 목회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슴 속에 그 불을 간직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유일한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목회는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기능들이 종합해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게 하는 것인데 여러 가지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면 먹고 입고 마시고 심지어는 마당을 청소하는 지체 하나에게 까지 무엇인가 공통적으로 흘러야 할 어떤 spirit을 불어 넣는 그 무엇이 목회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오늘 여기서 이야기하는 목회자가 될 사람들을 묶고 있는 신적인 강제력이고 그것이 소명의 핵심부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심장부이기도 하죠. 그런 것들이 정말 있느냐고 하는 것이죠.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중요성은 사역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모으고 한 시대에 시선을 끄는 사역을 해도 그 사람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고 규모가 아주 작은 사역을 하면서도 그 사람이 매우 중요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더 핑크라고 하는 작가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의 책이 현재 3천만 권 정도가 읽혔을 것이라고 추산을 하는데요. 살았을 때는 그 사람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죽음 다음에 그의 남겨놓은 글들을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역의 크기를 보자면 그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아주 작은 사역을 하다가 간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한 20년 동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한국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치셨지만 그분은 불과 천여 명의 교회에서 설교하시던 목회자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사역 속에 깊이 베여 있는 어떤 spirit 이것이 그 사람의 사역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그 정신을 본받게 하고 그리고 그 사람을 스승으로 아는 많은 제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들에게 그러한 불이 있느냐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절대로 여러분들이 남다른 삶을 살아야 될 것이다. 신학교를 나왔으니까 사역을 해야 될 것이다. 신학교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사역을 나가야 할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빚어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보십시오. 여러분들 불을 가진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가슴에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이든 남다른 경건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신학생들이 배출이 되었고 그리고 그들에게 성직이 밥벌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 사람들이 변화되거나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이 조국교회는 부담이 너무 큽니다. 이제는 정말 특별한 사람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만이 간직할 수 있는 신적인 불을 가슴에 간직하고 예수님이 서셨던 자리에 서서 예수님이 섬기셨던 사람들을 섬기고 주님이 도전하던 시대의 흐름과 맞서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어떤 불을 가슴에 간직한 그런 사람들을 절실하게 너무나 절실하게 이 세상은 조국의 교회는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교를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들이 절대로 사역에 대해서 욕망을 갖거나 필연적으로 사역을 해야 한다거나, 사역을 안 하고 무슨 요나의 화신이 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생각에는 사역을 하냐, 평신도로 있냐 이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여러분이 누구를 찾는 사람이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평신도로 살면서 하나님을 찾지 않은 사람이 사역을 한다는 이유 때문에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런 불들이 너무 없다 이거죠. 종교 심리적으로 보면 신앙의 기본도 제대로 안되고 자기 자신의 경건도 이어가지 못하는 그러한 말하자면 부실한 신학생들이 사역을 하고자 하는 것은 부실함에서 오는 양심의 자괴감을 보상하려는 그런 심리가 거기에 개입돼 있는 것이에요. 사역이 장난입니까? 사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아무 희망이 없는 영혼들을 위해서 자기를 다 드리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다 드리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그 분신처럼 아무도 돌보지 않는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열심과 소유를 다 받쳐서 그 영혼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그 영혼들이 너무 귀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은 그 영혼들을 위해서 받쳐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자기 받침. 그것이 목회 아닙니까?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가슴아파하고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에게 다가올 심판을 자기가 당할 영혼의 위험처럼 괴로워하며 아버지 앞에 그들을 위해 도고하고 매달리는 그 일이 목회가 아니냐 이거죠. 그런데 그 흐르고 있는 정신이 없는데 무엇으로 하겠냐! 이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사람이 병들어서 연약한 환자들의 등을 처먹고 사는 의사와 자신의 인간의 영혼을 곤고함을 어쩔 수 없어서 의탁한 신자들의 삶을 기만하면서 사는 목회자에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거죠. 정말 중요한 것 아니에요? 우리 아들놈이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왔는데 언제부터 자기는 아빠처럼 되고 싶대요. 그래서 공부 많이 하고 목사가 되고 싶대요. 그래서 난 항상 부인합니다. "그래 넌 좋은 목사가 될 수 있을 거야 해라." 항상 부인합니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빠는 네가 그런 거는 중요한 게 아니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네가 동네 골목에서 웬만한 슈퍼를 경영하면서 살아도 난 좋고, 중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살아도 좋고, 기업체에 들어가서 예쁘게 양복입고 회사원으로 살아도 좋고 난 뭐든 좋다. 어젯밤에도 그 생각 했습니다. 내 소원이 뭔가?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해주시면 내가 행복할 수 있을까? 밤에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저를 보면서 우리 김 목사님 생애 일어날 수 있는 가슴 떨리는 행복한 사건이 어떤 것일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게 그런 사건일 거 같아요? 매주 4,5백 명씩 등록해서 십수 년 내에 10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정말 내가 행복할까? 아니에요. 확실히 아니에요. 요새 새벽기도 책이 엄청 잘나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책들을 썼는데 너무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인쇄가 일년에 한 10억 정도 들어오면 행복할까? 여기저기 어디를 가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고 영어, 불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번역이 되어서 온 지구상을 뒤덮어 그렇게 유명한 라이터가 되면 행복할까? 아니에요. 우리 애들이 잘 자라서 굉장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되면 행복할까?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뭘까? 그런 것들이 기쁠 거예요. 아마. 일어나보진 않았지만 일어나면 기쁠 거예요. 그렇지만 그것도 어떻게 보면 먹어도 해갈되지 않은 설탕물과 같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 뭔가? 뭐가 제일 행복할까? I want to be a christian in a my heart. 신자 되기 원합니다. 참 마음으로.
정말 단 1년 만이라도 참된 신자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다가 죽었으면 좋겠어요. 정말.
목회의 성공,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는 것, 교계의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나를 존경한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니는 것, 모두 헛되고 헛되니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정말,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불타게 만드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 속에 있느냐? 정말 우리에게 불이 있느냐 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본격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은 말씀은 어떻게 하면 정말 그런 그 불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죽음이 기다리는 길인줄을 아는데도 그래서 나의 의지는 그런 길을 갈 수 없다고 말을 하는데도 내 영혼의 심령의 강한 강제력이 있어서 그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강한 강제력이 그 심적인 매임의 불이 내 안에 있게 되는 방법은 뭔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하는 거죠. 우선 하나님이 무엇을 도구로 우리에게 이런 불들을 주시느냐할 때 우리는 성령과 진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왜 그러냐면 우리의 영혼의 변화는 오직 진리를 사용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성경의 진리를 사용하셔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성령과 진리 이 두 가지가 그 모든 불의 원 저자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그러한 진리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성령님이 역사해 주심으로 우리가 그런 불을 가진 사람이 되었는데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하나님께서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를 이루시는 거죠. 우선 첫째는 뭐냐면 우리에게는 정말 주님과의 깊은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불을 가졌던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뭐냐면 그 사람이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든 선지자의 가문에서 태어났든 간에 그런 불을 가지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깊이 만났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일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에요. 선지자들도 당시에 보면 크게 두 종류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엘리야시대부터 있었던 선지 학교의 출신들이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서 세우신 그러한 선지자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학교에서 나온 선지자들 중에는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선지자들이 거의 없어요. 아모스는 뽕나무를 재배하는 사람이었고 그리고 목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의 사람이었죠. 그런 사람들 한 사람 한사람이 불을 가지고 사역하기 이전에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개인적인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의 경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생애적인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만남의 경험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 말씀이 들려주시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그 사람 속에 역사할 때 하나님이 그를 바꾸어 놓으신 거죠. 그러면서 그 사람들의 영혼의 강력한 어떤 변화를 심으신 거죠. 그것이 불을 간직하고 사역을 하는 중요한 요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들의 영적인 비밀이에요. 사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죠?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개인에 대한 부흥에 가까운 체험은 정말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그런 은혜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가 그런 불을 불러 일으켜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지질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그렇게 만나주시도록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매달리지 않습니다. 심령이 너무 갈급해지고 곤궁할 때에 그 고통스러움을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며칠 간구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깊고 처참한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자신을 만나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고 그리고 주님이 자신을 그렇게 만나 주시지 않으면 자신의 가지고 있는 모든 인생의 계획과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주셨다고 믿는 그 소명에 대한 확신조차도 아무런 유익이 없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도저히 세울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처절하게 매달리는 그런 사람들을 저는 거의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에 호주에 가서 며칠 있는 동안에 그 죄인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존 번연의 자전적인 회심의 체험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권을 다 읽으면서 깊이 느낀 게 뭐냐면 어쩜 이렇게 집요하게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그러한 회심 전야를 존 번연히 한 2년 6개월 정도 지난 걸로 생각을 해요. 그런데 그것은 그러한 갈망을 유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에는 사실 너무나 긴 시간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소원이나 결심들이 얼마나 며칠 못가서 불꽃이 사위어져 재가 되듯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사라지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거의 어떤 응답도 들려오지 않는 상태에서 베드포드 강가의 떠다니는 물오리 새끼들을 보면서 재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긴 시간 동안을 몸부림친다고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거예요. 무슨 얘기냐면 그렇게 집요함이 있다고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영혼의 변화를 놓고 매달리는 집요함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 천로역정 같은 것이 거저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런 집요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변화를 추구하고 변화의 과정들을 해명하고 그다음에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또 다른 사실들에 대한 창의적인 작품이란 말이죠. 그런데 우리들이 그건 할 수 있다 이말이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 그러나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간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변화되어야 된다고 믿고 그리고 주님을 깊이 만나서 내 마음속에 주님이 무엇인가를 각인시켜 놓지 않으시면 내가 주님의 일꾼으로서 사역자로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 생각들이 하신 적이 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견고하게 여러분 속에 유지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쉽게 우리의 인생 전체가 달린 중요한 문제가 너무나 쉽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올랐다가는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다시 여러 가지 쓸데없는 욕심이나 헛된 생각들에 의해서 씻겨져 내려가듯이 쓸려 내려가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요 생각입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더 많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아니함으로써 그렇게 깊이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기회들을 우리들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정말 이 십자가가 한 신자의 삶과 한 신자의 신학적인 사고 속에 중심에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강력한 체험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한 집안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경건하게 신앙생활하고 복음의 은혜를 잔잔하게 받으면서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가지고 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정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거의 부흥에 가까운 강력한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자신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세상의 모든 사상과 헛된 것들을 쓸어내려버리는 그런 강력한 부흥에 가까운 변화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가 결코 불을 가진 사람이 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사역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죄를 보고 분노하며, 거룩을 갈명하며 쓰러져가는 자들을 보며 가슴아파하고 주님의 은혜로 세워져가는 자들을 보고 감사해하는 그래서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과 함께 웃는 그러한 삶, 그러한 삶이되기 위해서는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산실에서 태어나서 광야로 보내어져서 그 광야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광야의 흙냄새가 있고 주님의 은혜의 산실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의 풍조를 능가하는 거룩한 매임이 자신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에 야합하지 않고 그것에 거슬러 싸우고 그리고 그것을 거슬러 싸우는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정말 우리에게 있느냐? 나는 근본 적으로 그런 변화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모두 그런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변화가 뭔지도 모르고 그것을 구하지도 않는 사람이 그러한 변화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거룩한 부흥에서 인간이 어떤 것들을 하면 부흥이 일어난다고 하는 공식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예고 없이 부흥을 보내신 적은 거의 없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조짐이 있다. 산사태가 나기 며칠 전서부터 산이 울다가 산사태가 나듯이 커다란 지진이 있기 전에 지진의 조짐이 오랫동안 나타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지진이 일어나듯이 반드시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실 때에도 부흥의 조짐이 있고 난 후에 부흥이 온다. 그것은 개인에게나 교회 전체에게나 마찬가지다. 그 부흥의 조짐이 뭐냐? 처절하도록 그 부흥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에요.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일천하고 무엇 하나 정리된 것이 없고 가슴에 이 세상을 거스를 수 있는 어떤 활활 타는 어떤 불의 모습도 발견할 수 없을 때에 그것을 보며 비참해 하고 내 안에 불이 없고, 내 안에 사랑이 없고, 내 안에 거룩에 대한 열정이 없는데 내가 사역을 통해서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재능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많이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도대체 그게 뭐 말라비틀어진 것인가?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싶고 우리 앞서 지나간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 속에 간직했던 주님의 강력한 인치 심. 그것들이 자신 안에 있기를 원하는 그 가절한 갈망, 그래서 생각을 하는 거죠. 지난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한 해 동안에 영적인 진보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눈에 띄는 진보가 있었습니까? 영혼들이 돌보고 있는 영혼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어서 그래서 가슴 뿌듯한 열매들이 있었습니까? 내년이라고 해서 금년과 다르지 않습니다. 달라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서 돌아오지 않는 젊은 세월들은 바람처럼 지나갑니다. 저는 참 잘못한 게 뭐냐면 나이가 들 때에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게 되고 어떻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을 가만을 하지 않고 인생을 달려온 것이 저의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냐면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에서 처음 출발을 했습니다. 날도 춥고 몸도 뻑뻑합니다. 달렸습니다. 한 5km 달리고 나니까 몸이 쫙 풀리고 전체적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하면서 스파트가 붙기 시작합니다. 10km 달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진짜 온 몸이 최고조의 상태가 되어서 막 달리는 거죠. 그 때 딱 재보니까 4km를 달리는 데 가만히 보니까 얼마나 걸리나 보니까 10분밖에 안 걸리는 거예요. 4km에 10분해 놓고 앞으로 골인할 때 까지 모두 10분으로 친 거야. 근데 사실 달려보면 그 선수들 얘기는 뭐냐면 한 35km 넘으면 그다음서부터는 정신이 거의 없는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뛴단 말이에요. 그때 가면 쓰러지잖아요. 그러니까 나이가 들면 엊그제도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께 전화가 왔어요. 굉장히 건강하신 분이었습니다. 나이 65세에도 매일 4~5km를 뛰시는 분이셨어요. 한 1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실 수 있는 분이에요. 관절염에 걸리셨대요. 왜 그러셨냐니까. 너무 가슴 아픈 일이 있어서 힘든 일이 있어서 3일씩 세 번을 한 해에 하셨는데 그게 막바로 관절염이 오더래요. 그러면서 하시던 말씀이 "목사님은 70이 넘거든 절대로 금식하지 마십시오. 큰일 납니다." 젊었을 때 3일은 금식했다고 어디 가서 얘기도 못해요. 그래도 한 1주일은 해야지. 저도 그랬어요. 1주일씩 기도원에서 금식하고 친구들 가방 다 매고 산 넘었어요. 근데 그런걸 계산을 안 한 거예요. 보십시오. 세월이 흘러간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건 그거에요. 중요한 건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께로 시선을 고정을 시키고 그리고 내가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지 않으면 내가 이런 불을 간직할 수 없다. 내가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것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 속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만난 사람들 속에 불어 넣어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 갈 수밖에 하는 그 무슨 spirit을 그들 속에 넣어주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주님을 깊이 만나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분의 도장이 찍히지 않은 곳이 없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주님께 속한 거예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조짐이 있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면 변화 받을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해지는 거예요. 간절해지는 것.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못 만나고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에 거의 비생산적인 삶을 살고, 무엇을 해도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지 못하는 삶을 살잖아요? 경건의 열매가 있습니까? 전도의 구령의 열정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이 있습니까? 그런 것이 없잖습니까?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만나야 될 필요를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진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를 들어간 이후 지금 생각을 해 보면 25년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때 1학년 때 만났던 사람들의 인상대로 25년 이후에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그때 정말 기도 많이 하고 눈물 많이 흘렸던 사람들은 지금도 거의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때 뭔가 게으르고 뭔가 정치적이고 이랬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여튼 그때 좋아했던 친구들은 요즘도 만나면 너무 좋고, 그때 만날 때 이렇게 뭔가 아무것도 와 닿는 것이 없고 그러던 친구들은 지금도 그래요. 개중에는 교수도 되었고 개중에는 뭐 목회자도 되었고 개중에는 무슨 다른 사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디 가서 사역을 하든지 간에 그때의 그 모습대로 살아가요. 전 생각합니다. 어느 날 눈을 뜨고 보니까 신학교 들어간 지가 25년의 세월이 된 거에요. 그래 난 매일 아침마다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된다. 어떤 거는 그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었던 그 진전을 보지 못한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해결이 안 된 문제들이 있어요. 이 성화의 세계에서는 세월이 약이 아니에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하나님이 안 만져 주신 부분들은 안 고쳐진 채로 그대로 있다고 마지막에 관에 들어 갈 때까지 가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정말 변화받기를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가끔 신학교를 휴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뭔가 기대를 합니다. 얼마나 갈급하면 저럴까? 초창기 제가 은혜 받고 설교를 하고 주님을 영접한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대학 다니는 자매였어요. 여름에 그렇게 은혜를 받고 가을 겨울을 지나더니 봄에 불연 듯 시골에서 올라온 학생으로 기억하는데 "전도사님 저 휴학하려고 그렇습니다." “왜?” “제가 전도사님 설교를 듣고 거듭나고 그다음서부터 하나님을 열심히 찾았는데 빌립보서를 읽다가 휴학할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런데 나도 크리스천이고 바울도 크리스천인데 내게는 왜 이 고백이 없을까? 내게 이 고백이 없는데 공부는 계속하면 뭐하고 학교는 졸업을 하면 뭐하고 그렇게 해서 좋은 데 취직해서 밥을 벌어먹고 살면 제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저는 일년 동안 이 비밀을 나도 좀 알고 싶습니다.”이 신학교 휴학을 할 때는 기대를 좀 거는데 6개월 1년이 지나고 나면 도대체 왜 휴학을 했는지를 모르겠어요. 돈이 없어서 그런 것도 핑계에 지나지 않고 쉽게 이야기 하면 어떠한 여건이 주어지고 어떠한 시간이 얼마만큼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겨누고 있는 푯대가 없으면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거예요. 가장 가슴 아픈 것은 하나님 앞에 사역을 꿈꾸는 사람들이 주님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는 거죠.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 분에게 붙잡히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이렇게 사도바울처럼 주님의 그 사랑과 은혜에 매여서 피를 토하고 죽을 수 있는 삶의 어떠한 목표, 그리고 그 일을 이루지 못하면 죽는 순간에라도 두 눈을 부릅뜨고 감을 수 없어하는 자신의 인생 전체의 묶인 어떤 신적인 매임, 목표, 그것이 없다는 거죠. 그런 삶은 정말 더러운 삶입니다. 순결이 무엇입니까? 멍하고 앉아서 시골 처녀처럼 살아가는 것이 순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순결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고상한 목표 때문에 가슴이 불타서 속되고 더러운 것들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한 추구에 불타는 것. 주님을 더 알고 싶고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은 그런 열명의 가득 찬 나머지 다른 어떤 것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거 그런 것이 순결 아닙니까? 주님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부르심처럼 생각하고 주님께 매인바 되어서 자신의 의지로는 동의할 수 없는 그 길도 걸어가게 만드는 그 강력한 힘은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 아니면 간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때요? 젊어서는 한 1주일 10일 금식해도 문제 안 되더라고요. 주님, 금년에 저를 만나서 저런 설교를 들으면서 한 숨만 쉬어야하는 저의 처지의 어떠한 변화를 주시던지 그것이 힘드시다면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 버리게 하시든지. 간절히.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지 세상의 사람이 어떻게 당신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당신 앞에 제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제 생명을 담보로 걸었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이 걸어온 저의 영적인 순례의 길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가장 간절히 찾으시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역에 성공도 아니고 이세상의 부도 아니고 좋은 일자리도 아니고 사람의 명예나 재산의 자랑도 아니고 저를 정말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셔서 저를 통해서 영광을 거두시도록 도와달라는 기도. 그래서 주님이 나의 어떤 점들이 싫으시기에 내가 이렇게 간절히 주님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안 만나주십니까? 그게 내 손 때문이라면 도마 위에 놓고 도끼로 자르겠고, 그것이 바르지 못한 제 마음 때문이라면 갈비뼈를 헤집고 내 심장을 뽑아내겠습니다.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교수가 되고 4년째 되던 때였던 거 같아요. 기도원에 올라가서 하여튼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했어요. 기도 제목은 하나님 저 좀 사랑해 주세요. 내 온 영혼이 그것을 느낄 수 있도록 저 좀 사랑해 주세요. 그 때 하나님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 제게 주신 말씀이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였습니다. 하루 오전 동안에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너무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데 금도 필요 없고 성공이 보장되는 사역의 자리도 필요 없고 좋은 혼처자리도 필요 없고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데 나를 만져 주셔서 그래서 나를 주님의 사람 만들어 주셔서 내가 이 세상에 이렇게 살아 있는 것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실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다는데 그런 기도 아무나 합니까? 태어나서 한번도 그런 기도 안하고 죽는 사람들 많아요. 주님이 왜 왜면하시겠습니까? 그렇게 간절히 매달려야 해요.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기도생활이야. 기도생활이야. 나는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을 보면 정말 조국 교회가 걱정이 되요. 차가운 겨울 달밤에 쉭~하고 검이 허공을 긋고 지나가면서 그 달빛에 번뜩이는 섬뜩함. 그런 결단이 기도에 대해서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너무 그런 사람이 없어요. 너무 없어요. 그러니까 섬김을 보세요. 하나님을 그렇게 갈망했던 사람들, 온 맘과 뜻을 다해서 주님을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가장 열렬하게 매달렸던 은혜의 방편이 뭐였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무릎을 꿇는 것과 말씀의 지시하는 바를 따라서 주님을 찾기 위해서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생활이었어요. 존 오웬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그 글속에서 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영성을 영역을 길러가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불 받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직접 기도하는 것을 힘쓰는 것이라고 했어요. 직접 실천하는 것, 계속 기도를 힘쓰는 것. 그런데 사실은 정직하게 말하면 기도 안하는 게 아니라 기도 못하는 거거든요. 순환 적인 논리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고 주님의 사랑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못 받아도 그것 때문에 그렇게 가슴이 아프지 않고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지 않으면 그 사랑의 기쁨을 다른데 가서 맛보겠다는 거죠.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죠. 그 기도 생활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이 세미나에 오셔서 눈물 흘리고 돌아가도 주님 만나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보면 은 쉽게 주님을 만나는 것 같지만 어떤 때는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 정말 멀고 먼 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주님이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계셔서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주시지만 그러나 주님은 당신 만나러 오는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찌끼들을 다 버리게 하시는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고쳐져 가면서 주님을 만나는 거죠.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요. 나는 여러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여러분들에게서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해 놓고는 이제 열린 교회 와서 은혜생활 하면서 신학생들로서의 거들먹거리는 것들이 많이 빠져나갔어요. 아직까지도 그러한 사람들이 남아 있는데 많은 지체들이 너무나 측은하게 생각합니다. 많이 빠져나갔습니다. 나는 평신도들이 여러분들을 보면서 그분 신학생인줄 몰랐다 그럴 때 저는 굉장히 기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신학생 같았어요. 할 때 그것은 결코 어떤 깊고 영적인 오묘한 것들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거든요. 거들먹거리고 나서기 좋아하고 그리고 주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들지 않는 그런 오만함 들로 사람들이 신학생을 평가하기 때문이죠. 자랑스러워요. 그런데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된다 이거죠. 주님을 간절히 찾아 야해요. 그 중에서 제일 지적하고 넘어갈 게 기도생활이에요. 나는 여러분들 아무리 여러분 편이 되도 여러분이 왜 새벽시간에 새벽기도 안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무분별하게 밤 시간을 헛된 일에 사용하고 그리고는 새벽에 일어나질 못해서 헤매고 어쩌다 나와도 기도하지 못하고 거의 중언부언하다가 돌아가고 그러니까 새벽기도의 은혜가 뭔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서 시들어 가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해 지지난해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깊이 도전을 받고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여러분이 기도의 삶을 살았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닮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자기 깨어짐의 통로들이 있습니다. 새벽마다 자기 무릎을 적시고 흐르는 눈물로 자기 자신의 변화되고 깨뜨려지고 하나님 앞에 정말 생애 적으로 한번 나를 만나주시도록 한번 결단을 하라 이거죠. 정말 주님을 나를 사역자로 부르셨습니까? 부르셨다면 한번 생애 적으로 나를 만나주십시오. 안 만나주시면 없었던 걸로 하겠습니다.
한번, 하나님께 대해서 기드온처럼 말이죠. 한번 담대하게 배팅을 하면서 매달려 보라 이거에요. 그런데 그러한 간절한 기도드리기 위해 나는 여러분들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숙하거나 부족하거나 심지어는 범죄 해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람들이 사역의 길에 들어선다고 하는 것은 말입니다. 기도생활이 뭐냐 생각해 보십시오. 일평생 짊어져야 되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교회 나와서 가장 간절하고 간절하게 주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금년도 저 만나주시지 않고 한해를 지내 보내시렵니까? 간절히 매달리고 모자라면 금식하고 그러면서 주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 참 신자가 되고 싶다는데 아무것도 필요 없고 주님 자신이 필요하고 내가 변화되어서 주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데 하나님 왜 안 만나 주시겠어요. 기도생활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정말 안 됩니다. 나는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교역자들은 교역자니까 제가 불러 놓고 혼도 내고 그리고 때로는 권면도 하고 정신을 불어 넣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변화 받기 위해서 여기에 왔고 그리고 하나님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게 살아선 안 됩니다. 한번 하나님 앞에서 게으름과 나태를 청산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나는 그래서 그래요, 여러분 정말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렇게 동지적인 사랑을 하세요. 케임브리지에서 7명의 대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함 케임브리지 7이잖아요. 옥스퍼드에서 홀리 클럽에서 웨슬레와 윗필드를 비롯한 젊은이들이 무릎을 꿇고 그리고 인간 풍조는 나날이 변해도 우리는 믿음을 지키면서 살자고 서로를 자극했습니다. 그 작은 기도모임이 영국의 역사를 바꾸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서로 격려하지 않습니까? 왜 서로 격려하지 않습니까? 야 우리 이렇게 살면 안돼. 새벽기도 안나왔지? 너 나쁜 사람이야. 힘내자. 우리 주님을 찾자. 아직도 여러분들이 제 설교가 궁금해서 여기에 남아있다면 훨훨 날아가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 안엔. 그렇게 간절히 매달려서 주님을 찾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렵죠. 너무 힘들죠.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매달릴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크게 두 번째 그런 불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생애 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되겠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것과 함께 꼭 강조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매일 매일 자기에게 주어진 전투와 같은 삶을 이어가야 하는 거죠. 전투와 같은 삶으로 이어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개인적으로 부흥에 가까운 사건을 만나서 하나님을 깊이 생애 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말하자면 크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이것은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하나님 앞에 전투적인 삶을 살면서 하나씩 하나씩 획득해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두 가지가 항상 병행이 돼야 됩니다. 보십쇼. 이것은 우리의 모든 영적 생활에 있어서 균형이 잡힌 원리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중생을 통해서 우리의 죄의 지배가 끝나잖아요. 그럼에도 우리의 끊임없는 성화의 노력을 통해서 어떻게 되요? 주님을 닮은 사람이 더 되어 가잖아요. 중생을 성화가 대체할 수 없고 성화가 중생을 대체할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님과의 만남이 꼭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런 주님의 특별히 부어주시는 우리 생애의 몇 번 많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를 주신다고 할지라도 매일 매일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와서 하늘을 열고 하나님이 은혜의 단비를 쏟아부어주셔서 성령과 함께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에요. 그러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나오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저도 이렇게 얘기할 적마다 이게 제 자신의 올무가 됩니다. 어느 날은 새벽에 일어났는데 정말 인사불성이에요. 막 토할 것 같고 계단에 내려가다가 구를 것 같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그런데 그때 한 순간에 머릿속을 챙하고 스쳐가는 소리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내가 이런 자리에서 외쳤던 내 자신의 설교가 생각이 나는 거예요. 목숨을 걸고. 나는 매일 죽노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 함이라’
그러니까 내 것이 없다. 내 것이 아니다. 항상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상황에 밀리지 않고 인간의 풍조에 떠밀리지 않고 육체의 욕심에 우리의 영혼이 포로가 되지 않으려면 단 하루도 안 그래도 되는 날은 없습니다. 언제까지? 주께서 우리의 심장에 피가 멎게 하실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죠. 그러니까 제가 주님을 믿으면서 얼마 안 되는 세월을 이렇게 지내면서 생각나는 게 뭐냐면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살지 않는 날들을 통해서는 지금 내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산 시간들만이 오늘 하나님을 섬기는데 도움을 주지 최선을 다하지 않은 날들을 통해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너무나 요원하고 오리무중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무수한 기회들과 순간들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주어집니다. 어떻게 할 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때. 그게 뭐냐면 무엇을 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 마당을 쓸면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사람들은 설교단에서 설교를 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그것을 감당하느냐 하는 것이죠. 저는 오늘 목회를 하면서 사실 솔직히 얘기해서 목회의 골간이 되는 기본적인 것들은 목회를 하면서 새롭게 배우는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그대로 확인하는 거죠. 아 맞아. 그때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정신이 정말 중요하구나. 그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구나. 그런 것들을 확인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뭐냐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최선을 다해서 섬기는 가운데 터득되는 이치들이에요.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그것들을 그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해주시는 것이죠. 보십시오. 어느 날 영혼들을 돌보는 사역자들이 영혼들을 열심히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는 마음의 느낌이 생겨났어요. 그리고 두드려보니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며칠 동안 마음이 아팠어요. 어떻게 이렇게 영혼들을 돌볼 수 있을까? 그런데 한 사역자나 평신도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때는 거기에는 그렇게 섬길 수 없는 어떤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뭐냐면 대개 환경적인 난관이에요. 자기 안에 있는 게으름과 나태함도 혼자 역사하지 않고 항상 상황과 함께 역사하는 거거든요. 물이 흘러갑니다. 물이 흘러가는데 물이 천천히 흘러가다가 돌멩이가 막히고 오물이 막혀서 개울이 딱 막히게 되면 흘러가다가 물이 거기에 멈추게 됩니다. 그러나 그 물이 워낙 강력하게 흐르면 뭐가 막아도 흙이 쌓이면 흙을 뚫고 지나고 바위들일 있으면 바위를 굴리면서 자기 갈 길을 갑니다. 그런데 워낙 자기 속에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매임, 내적인 불들이 없으니까 환경에 쉽게 굴복하는 거죠. 전도를 나갔는데 며칠 전도해보니까 받아들이는 영혼들이 없어요. 마음에 내적인 불이 없으니까 그런 절망적인 환경 때문에 낙심하고 더 이상 전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방을 하러 가도 누가 환영하는 사람이 없고 문전에서 박대하고 개들이 와서 물려 고나 하고 말이지, 그런 거죠. 그러니까 몇 번 해보고 힘드니까 그다음에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저버리는 거죠. 매사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환경에 다 애워쌓여가지고 거기에 갇혀가지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거죠. 그러면 그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거든요. 다 에워싸고 그것들이 좁혀 오고 좁혀 오고 좁혀 와가지고 그것들을 그냥 거기에 순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죠. 그것들을 뛰어넘어야지만 영혼들의 결박을 풀어주고 그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환경을 뛰어넘어서 인간의 영혼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 같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거든요. 그렇게 안한다 이거죠. 환경에 아주 쉽게 굴복하는 거죠. 여러분 중에 누가 특히 2년 전에 해마다 거의 똑같습니다만 은 말씀생활에 대해서, 기도생활에 대해서, 지적인 탐구에 대해서, 특별히 원어의 훈련에 대해서, 거룩한 삶의 훈련에 대해서 제가 그렇게 여러분들에게 강의했습니다. 많이 울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정말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싶은 소원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아름다운 소망들이 아침 구름과 같이 쉽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절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자기 속에 이런 불과 같은 매임을 간직하는 영혼의 변화는 이렇게 한가하게 공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획득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거에요. 늦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고 결단해요. 그리고 정말 열린 교회에 남아 있으려면 이 교회를 통해 영혼의 유익을 받는 사람들만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뭐합니까? 제가 말씀드린 게 그거죠. 아무래도 내 마음에 불이 없어서 사역하는 게 내 뜻이 아니라면 개척교회 가서 봉고라도 끌어줘요. 여기 남아서 말씀을 듣고 그래서 주님을 향한 마음이 불타고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추구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조국과 조국교회의 미래를 가슴에 품고 불꽃처럼 단 10년이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변화되고 싶습니다. 무엇이든지. 제가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주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제가 똥이라도 푸겠습니다. 그러려면 남아서 열심히 하나님 추구하고 그게 아니면 다 흩어져. 어차피 변화되지 않을 텐데. 가서 개척교회 봉고라도 끌어주라고. 무보수로. 너무너무 필요로 하는 교회들이 많아. 만약 여러분들이 서울 변두리 교회 박봉직 목사님 교회 같은 교회 가서 제가 목사님 달구지라도 끌면서 목사님 돕겠습니다하면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뭐라도 한다 이거죠. 시골 교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청년들을 다 서울 가고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남아 있는 그런 교회에 젊은 청년 하나 가서 단기 선교간 마음으로 단 일년이라도 말이죠. 교회 마당이라도 쓸어주고 목사님 심방이라도 가면 가방이라도 들고 다니면 교회가 얼마나 힘이 되겠느냐고요. 뭐합니까? 이렇게 남아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그러니까 영적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서 영혼들을 뜨겁게 섬길 수 없으면 그런 거 없어도 섬길 수 있는 일이라도 가서 섬겨서 차선책이라도 하지만 도움을 줍시다. 선교지에 가서 선교사들 지프차라도 몰아주면서 여기서 이렇게 허송세월 할 바에야 지프차라도 몰아주면서 정글에 선교사님 모시고 다니면서 그렇게 하면 어때요. 자동차 정비 기술이라도 배워서 선교지에 가서 자동차라도 고쳐주면 어때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거에요. 섬겨요 섬겨. 무엇이든지 괜찮아요. 아침에 일찍 나와서 교회 버스를 몰아줘도 좋고 주일학교 내려가서 선생없어서 난리인데 가서 새 친구반 한두 명 일주일에 오는 애들 가르쳐 줘도 좋고 반하나 맡아서 가르쳐도 좋고 그럴 실력도 안 되면 은 아이들 신발이라도 정리해주는 거라든지 뭐든지 해요. 그리고 그렇게 자기에게 맡겨준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 싶어 하기를 바래요. 내게 주일학교 한반 맡겨주었으면 하나님 나에게 부흥을 주십시오. 내가 맡고 있는 이 영혼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맡고 있는 영혼들에게서 안 일어나는 축복의 증거를 내게 보여주십시오. 많은 어린이들을 보내주시고 그것이 어려우시다면 이미 보낸 이 영혼들이 더 깊이 변화되길 그것만이라도 허락을 해 주셔서 그래서 이 아이들이 가슴속에 저와 함께 주님을 알아갔던 날들이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는 그 흔적으로 가슴에 남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렇게 해 주시기 까지는 내가 여기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매달려요. 저는 목회에 관한 대부분의 것을 총각 집사 때 거의 파악했어요. 그 범주를 못 넘어가고 있어요. 특별한 것들에 대해서는 새롭게 알아가지만 그 기본적인 골격,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고, 어떻게 신방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영혼들을 사랑해야 하고 하는 것. 정말 그래서 난 요새 그래요. 내가 목사가 되었는데 어떤 때는 집사 때보다 덜 우는 것 같아요. 총각 집사 때 영혼들을 가르치면서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을 보고 그렇게 가슴 아프게 울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이렇게 목회를 하게 하시는데 그때 그 눈물을 가지고 있는가? 한해가 지나면서도 너무 마음이 아프죠. 물론 주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는 크죠. 그리고 만입이 다 있으면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더 많이 울어서 영혼들의 출석부를 눈물로 적셨더라면 지금은 미끄러져 있는 영혼들도 안 미끄러졌을 것이고 아직도 회심하지 않은 많은 영혼들의 상당수가 추수되었을 거예요. 왜? 요만큼 헌신했는데도 이렇게 축복해 주신 분이니까 더 많이 헌신했더라면 어떻겠어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이 아프죠.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정말 이게 있지 교회 일꾼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야. 뭐라도 섬겨요. 뭐라도. 특별히 영혼을 섬기려고 애를 썼으면 좋겠어요. 많은 수가 자신이 없으면 은 하나를 섬겨요. 그래서 그를 위해 우는 게 뭔지 배워보세요. 그리고 그가 실족할 때 가슴 아픈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름 하나에 희망을 거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죽어서 그가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그 희생이 무엇인지. 가시고기처럼 자기를 다 주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걸 배워가요. 그래서 나는 정말 그래요. 나는 여러분들이 이 교회 안에 왔으면 나는 개척한 이래로 이제까지 신학생들을 홀대하거나 그렇다고 해서 신학생들을 특별하게 취급해 준적도 없어요.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소원은 우리교회 모든 평신도들에게 가지고 있는 소원과 동일해요. 여러분들이 주님을 많이 사랑했으면 좋겠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수의 피가 가득 차서 예수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다음에 난 여러분들이 무얼 하든지 다 환영이에요. 선교사로 가도 환영, 목회를 가도 환영, 그 마음을 안고 골목에서 풀빵장수를 해도 환영이에요. 아무 거면 어때요, 뭘 하면 어때요?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람인데 변소를 퍼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거예요. 그게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난 이해가 가기 전에 여러분들이 깊이 결단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진짜 시골교회에 가서 봉고라도 몰아주든지 그러든지 아니면 은 열심히 일해서 돈벌어서 선교헌금이라도 해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남아서 주일학교 영혼들이라도 섬기되 한번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그래요. 전도하러 갔는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안받아줘요. 나 병신 취급하고 광신자 취급해요. 그건 주를 위해 받는 핍박이 아니에요. 신방을 가도 문전에서 박대를 당하고 쾅하고 닫는 아파트 대문에 손이 찌었어요. 그 문을 뜯고 들어가서 영혼을 만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지만 문 닫힌 현관에서 무릎을 꿇고 내게 맡겨진 영혼, 그리고 그 영혼을 돌볼 목자로 나를 세워주신 하나님 앞에서 그건 내가 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 내가 이 문을 뜯고 저 영혼을 탈취할 수는 없지만 내 이 아파트 현관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합니다. 저 영혼을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평촌을 휩쓸고 지나가는 부흥은 내가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전도하고 아파트 한 모퉁이라도 붙들고 하나님 이 곽때기 같은 아파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이 병든 영혼들을 하나님, 제발, 제발 이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시옵소서. 수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위대한 학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어떤 때는 책꽂이를 붙들고 펑펑 울어요. 어쩜 이렇게 세월은 살같이 빠르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토해 놓아야 할 때인데 아무리 헛구역질을 해도 맹물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러고도 목사입니까? 그런데 어느 날 내 마음에 위로와 그 포기가 동시에 스쳐지나갔습니다. 그게 뭐냐면 어차피 내가 이 나이에 공부를 해서 위대한 학자가 될 것인가? 그냥 힘 닿는 대로 주님이 보실 때 게으르게 살았던 사람으로만 기억되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영혼들을 돌보고 한 틈이라도 남으면 한자라도 읽어서 그래서 그냥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려고 하며 살다가 죽으면 절대량에 있어서는 한심하겠지만 그 자세를 보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그런 위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내년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하세요. 그래서 열린 교회 훨훨 날아가서 그래서 진짜 자기 변화되기 싫으면 그렇게라도 섬기세요. 어차피 변화 안 된다면 그렇게라도 섬기고 정말 변화되기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그래서 섬기세요. 그 대신 무엇에든지 생명을 거세요.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애를 쓰고 그렇게 살아야 되요. 나는 어저께도 그런 생각을 오후에 잠깐 했습니다만 이 전도자가 되지 않고서는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걸어온 그 길만을 가장 확신 있게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요. 교회가 뭐하는 곳입니까? 그렇게 해서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해 내는 사명이 교회에 주어진 중차대한 사명 아니에요. 근데 많은 목회자들이 전도자가 되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구령의 열정이 현저히 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구령의 열정을 대신해서 교회 성장의 욕망을 품게 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되어선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어느 해인가 우리 교역자들을 전부다 거의 지옥훈련에 가까운 ccc전도 훈련에 보냈어요. 부인까지 전부다 보냈습니다. 전통이 되어서 요즘도 그렇게 합니다. 올봄에 또 들어갑니다.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비싼 돈 내고 한 학기 공부를 철폐하다 시피 매달려야 되는데 그거 말고 그게 필요한 이유는 뭐냐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교역자가 되겠다는 사람 중에 극소수만이 전도자의 삶을 살아본 경험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회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교인들에게 살게 하고 싶은 그 모든 삶을 살아봤거나 살아가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좋은 신자가 되는 것이 좋은 목회의 지름길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그런 원리인 것이에요. 월요일 날 학교안가죠? 여기 계신 분들 중에 1/3이 학교를 졸업했거나 학교를 쉬고 있는 분들이죠. 그러면 월요일 날 나와요. 그래서 전도하세요. 손에 전도지 들고 운동화 신고, 아파트 경비병들에게 욕설을 먹으면서 동네에 전도하다가 개한테 물리면서 동네 주민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그렇게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 정도 가지곤 안 되고 정말 사도행전적인 삶, 그래서 오지를 두루 다니면서 그 추운 겨울에 이 동리, 저 동리, 흩어진 농가, 흩어진 산가의 마을을 방문하면서 예수 전하고 박해도 받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핍박도 받고 욕도 먹고 그래서 나 예수 믿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삶이 바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서 추구하는 삶,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모아져서 그것이 결국은 마음속의 불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보면 은 그렇게 생애 적으로 사도바울처럼 주님 못 만났어도 목사님들 중에 그 인생의 어려운 고난 시련의 때를 기도하면서 살아오신 분, 제가 아는 목사님은 아예 기도하시면서 그 우리들에게 기도하다가 늑대를 만나면 늑대를 퇴치하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어요. 자신이 만 난거에요. 여우도 만나고 늑대도 만나고. 어떤 목사님은 눈이 산에 가득 쌓였을 때에 효과적으로 기도처소를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어요. 어떻게 삽으로 웅덩이를 파고 어떻게 하면 거기가 기도할 만한 장소가 되더라. 제가 만난 어떤 분은 한강에 얼음이 꽝 얼면 거기에 방석 한 장 가지고 가서 무릎을 꿇고 조국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뭔가 야인적인 삶,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갑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온 목사님들은 비록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못 만났어도 확신과 부분적인 불이 있습니다. 그죠? 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살아온 사람들은 순종을 이야기할 때 그분이 비록 바울처럼 하나님을 못 만났어도 불순종 하는 자들에 대한 책망과 순종하면 그 길이 너무 어렵고 고난이 가득 차도 순종하는 자들에게 베풀 하나님의 그 위대한 축복을 말할 때 그 속에 불이 있습니다. 나는 너무 가슴 아픈 게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서 은혜 받은 성도들에게 전도자의 불을 지펴주시겠어요? 지펴줄 수 있겠어요? 가자. 희어져 추수하게 된 저 밭으로 가자. 사랑하는 지체들이여.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들리는 저 영혼들의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리지 않습니까? 회심하지 않으면 저들을 태우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지옥의 불붙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도전할 수 있겠냐고요. 그거는 이렇게 생애적인 하나님을 만남을 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전도하기 싫은 자기를 꺾고 살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여리고 전도 11시 우르르 몰려갔다고 12시 40분이면 들어오기 시작해요. 그렇게 해가지고 안됩니다. 그런 교회의 프로그램과는 상관이 없이 내가 정말 여러분들이 가르쳐 달라면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하도 그 현실이 가슴 아파서 제가 안양대학교있을때 토요일 마다 학생들 데리고 안양 역으로 전도하러 데리고 갔습니다. 그 학생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그 안양역 앞에서 손 붙들고 눈물로 기도하고 내가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이렇게 전도하는 거다. 그러다 은혜 받으면 그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늘 우리가 복음 전한 영혼들 돌아오게 해 달라고 광화문 지하도에서 안양 역에서 비산 사거리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의 지도자는 소쩍새 우는 서해안과 같이 그런 깊은 몸부림을 통해서 형성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그렇게 생애 적으로 바울처럼 하나님을 못만난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책임질 수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던것. 그리고 매일 매일 그 하나님이 만나실 만한 사람으로 순종하며 살지 않았던 것. 이런 것들은 우리들일 변명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주 분명하게 태도를 정하고 나는 이거는 여러분들이 정말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을 위해서 이 시절 지나가고 이제 여러분들이 어디에 가서 교역자라도 되면 누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 해주겠어요. 그죠? 정말. 여호와를 따를 자는 일어서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교회에서 나에게 장학금을 주든지 말든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해요.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삽시다. 그러는 가운데 주님 만나지는 겁니다. 저는 다 사람이라는 게 자기의 경험의 한도 내에서는 다른 사람을 보기 마련이지만 저는 목회 하면서 신방을 하고 영혼을 돌보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저는 전도사 생활 하면서 참 많이 은혜를 받았어요. 그러니까 제가 34살에 제가 교수가 되었는데 얼마나 바빠요. 이게 무슨 한가하게 외국에 가서 박사학위 받고 노트라도 잔뜩 만들어가지고 왔으면 교수가 됐으면 그것만 울궈먹어도 몇 년 가겠죠. 그런데 뭘 쥐뿔이나 아는 게 있습니까? 별 되지도 않는 사람이 교수가 되가지고 한 그냥 강의 준비하랴 강의하랴 교회 섬기랴 그러면서 사는 거죠. 그러니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새벽이면 인천에 살 때 5시 15분이면 출발합니다. 6에 학교에 도착하면 아직까지도 약간 어둑어둑 할 때에요. 그때 파카하나들고 방석 들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어요. 거기 가면 토치카처럼 푹 파진 데가 있어요. 거기 엎드려서 간절히 한 2시간 기도하면 아침 햇살이 환하게 뜨고 학생들일 웅성거리면서 오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면 연구실로 내려가고 그다음서부터 정신없이 하루 일과가 시작이 됩니다. 회의 상담 리포트 채점 시험 강의 뭐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옵니다. 학생들 보고 수요예배가라 그러고 교수가 거기 퍼질러 있으면 덕이 되겠습니까? 거기서 버스를 2시간 타고 세종로에 있는 교회 까지 수요예배 드리려고 가는데 허무합니다. 그때 제가 다니던 교회는 수요예배가 7시에 시작해서 7시 30분에 끝났습니다. 어떤 때 좀 늦게 가면 목사님 광고하고 계십니다. 설교가 딱 17분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설교도 못 듣고 광고를 들을 때는 허무하죠. 내가 광고 들으려고 거기까지 왔나. 그리고 그다음에 목요일 금요일 정신없이 돌아가고 이제 금요일 오후서부터는 주일날 설교할 것 쓰는 작업입니다. 리포트 원고지 60매씩 그렇게 썼습니다. 그렇게 다 써서 토요일 날은 일찍 나와 가지고 그 타이프를 치는 겁니다. 깨끗하게 쳐서 교정까지 봐서 원고를 깨끗하게 딱 만들어서 복사 집에서 크게 복사를 해서 가방에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오죠. 저녁 먹고 잠시 쉬었다가 밤 9시쯤 되면 은 내일 주일 준비 다 챙겨서 그리고 철야하러 교회 갑니다. 가서 9시 30분쯤 도착을 해서 예배당 뭐 사찰이 그렇게 깨끗하게 해 놓습니까? 옷 걷어붙이고 전부다 청소 혼자서 다시 했습니다. 한 이백여명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그러면 한 시간 반 정도 걸리고 온몸에 땀이 쫙 흐릅니다. 마지막에는 강대를 훔치면서 기도하는 거죠. 하나님, 내가 내일 여기서 설교합니다. 제발, 은혜를 주십시오. 그리고 인제 겨울에 스치로폼 하나 깔고 거기 엎드려서 기도하는 겁니다. 캄캄한 예배당에 한 열한시 정도에 기도를 시작하죠. 찬송가 서너 장 부르고 주님이 은혜주시는 대로 열심히 기도합니다.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 그 영혼들보다 더 불쌍하게 쓰러지는 교사들. 두시든 세시든, 네 시든 기도하고 거기서 자고 일곱 시 되기 전에 여섯시 반 되면 새벽기도 하려고 애들이 옵니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서 세수하고 양복으로 갈아입고 그리고 주일 하루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언제 영혼들을 돌볼 틈이 있습니까? 간간히 전화하고 엽서 쓰지만 발이 묶어서 어디를 갈 수 없습니다. 주일 하루는 신방을 하는 거죠. 4시쯤 교회의 일을 모두 마치고 안온 아이들 명단을 가지고 그리고 선생 한 두 사람 데리고 심방하는 거죠. 근데 그 시간에 가봐야 그놈들이 집에 없습니다. 다 어디 도망갔죠. 그러고도 기도하고 가면 신기한 게 간절히 기도하고 가면 꼭 만납니다. 그래서 아파트 앞에 서성거리고 전화걸어보면 나갔다 그러죠. 장년 심방이야 얼마나 폼 납니까? 먹을 것 까지 다 차려 놓고 목사님 오셨습니까? 여기 앉으십시오. 방석 내 놓고 그러죠. 심방 끝나고 나면 저녁 대접하죠. 전도사 그렇게 맞이해주는 사람 없습니다. 아무개 있어요? 없는데요. 교회에서 온 전도산데요. 우리 얘 제발 자꾸 불러내지 마세요. 쾅하고 닫죠. 그러면서 들어가면서 교양 없게 이놈의 계집애 들어오기만 해봐라 그러고 문 닫는 거죠. 뭐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느끼는 거죠. 그래도 그 대문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면 꼭 옵니다. 그 시간에 나타나요. 그러면 저 멀리서 그것도 영혼인데 거듭난 영혼인데 교회 안나오고 까불고 돌아다녔는데 그 영혼이 생기가 넘칠 리가 있습니까? 저 멀리서 누런 바지 하얀 잠바 걸치고 고개를 푹 숙이고 곤고하게 걸어와. 그러면 달려가서 막 안아주고 싶을 정도야. 그래서 붙들고 그래 너 어떻게 지내냐? 놀이터 옆에라도 앉아서 몇 마디 하면 정말 인간은 알아요. 정말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너무 힘들지. 그래도 주님은 우리가 미끌어질때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눈물을 쭉 흘립니다. 그다음 주면 교사들이 그렇게 전화해도 나오지 않던 영혼들이 7명씩 8명씩 나와요. 그러면 그렇게 사랑스럽죠. 그 영혼들이 한번 돌봐줬다고 영구합니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애달파하고 매일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하는 거죠. 그렇게 심방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침대 머리맡에서 그 영혼들을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하면 거기가 침실이 아니라 기도원이 되어 버려요. 다 떠오르는 거예요. 그 영혼의 곤고한 처지, 그 집안의 신앙의 무관심, 가정의 파괴, 방황하는 영혼들. 주님이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그러니까 모든 일을 그렇게 이 마음을 실어야 해요. 마음을 실어서 주께 하듯이. ‘내 맘을 드립니다. 다 드리면서 그러면서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없어요. 쾅. 이놈이 계집애 들어오기만 해봐라. 그런 소리 들으면서 교수도 아니고 전도사도 아니고 그냥 나는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 불신앙적인 가정에서 저 영혼을 어떻게 돌볼 수가 있겠어요. 다 차단됐는데. 엄마가 기도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한없는 비참함. 정말 저 영혼이 아니라 내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나에게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고 내게 맡겨 주신 영혼들을 간수 할 수 있도록 내 지식이나 자랑 가지고 안 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 지난주의 은혜가 지고는 안 되고 오늘 심방을 떠나는 이 순간에, 오늘 설교하는 이날에, 오늘 이영혼의 이름을 부르는 이 순간에 저 영혼에게 예수의 참 사랑을 말하는 그 순간을 주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사역에 복을 주셔도 자만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역에 복을 주셔도 눈을 돌려보면 쓰러지는 영혼들이 너무 많고 불가항력적으로 사단에게 유린되어도 내가 거의 도움 되지 않는 영혼들이 아직도 많은데 어떻게 주님이 주신 자그만 축복 때문에 자만할 수가 있겠어요? 불가능한거죠. 신학교를 갔는데, 교수로 들어갔는데, 애들이 주일날 교회를 안가는 거예요. 신학생들인데. 난 충격이었어요. 주일 저녁예배는 물론이고 주일 낮 예배야. 토요일 날 퍼질러 자다가 안가는 거야. 오후예배 가가지고 고개 쑥 내밀고 오고, 수요 예배는 가는 얘들이 거의 없고 전도사들 빼놓고. 난 교회에서 그런 얘들을 왜 내버려 두는지 이해가 안 갔어요. 그래서 가자마자 한 학기 지나고 나서 노트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예배에 참석한거 설교 내용, 주보까지 다 붙여서 한달에 한번씩 검사를 맡게 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녀석이 목사님 덕분에 생전 처음 머리털 나고 수요예배 갔습니다. 그렇게 일년을 쓰니까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하더라고요. 토요일 마다 데리고 안양시장으로 안양 역으로 비산 사거리로 광화문으로 전도하러 다녔어요. 이렇게 전도하는 거다. 화요일이면 지하 써클실에 모여서 기도해라. 문제는 중요한 거는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배운 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금년이 가기 전에 깊이 결단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엇을 섬기든지 섬겨요. 그리고 그 일에 아주 목숨을 걸어요. 저는 아직까지는 경황이 없었지만 앞으로 여러분들 더 많이 잘 섬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조국 교회의 희망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훈련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섬기지 훈련 받기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섬길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정말 그런 사모함을 가지고 그렇게 삶으로 실천하고 간절히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러한 주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이 시대에 저항하며 사는 길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누구든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방면에 있어. 그런데 이러한 이치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역시 동일하죠. 누구든지 그 시대에 태어나면 그 시대의 아들이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은 너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랬습니다. 이 얘기는 영원히 이 세대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우리보고 주후 1세기의 자기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그렇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시대는 흘러가고 그리고 우리는 도저히 2000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그 세대를 본받을 리는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영원히 현재적인 명령으로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받는다는 이 말이 희랍어로 suskematizw 라는 단어인데 다이케스트에다가 주물 같은 것을 집어넣어서 찍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쇳물을 녹여서 틀에다가 부으면 똑같은 것이 나옵니다. 겨울에는 특별히 요새는 붕어빵인데 옛날에는 국화빵이었습니다. 근데 그게 참 맛있었습니다. 요즘도 어쩌다 한번 사먹어 보면 은 전혀 그때 그 맛이 아니에요. 밀가루 국물을 부어서 팥을 넣고 한쪽이 익으면 뒤집어엎어서 국화모양이 나온다. 그래서 국화빵이라고 그러는데 수없이 만들어도 똑같은 형태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틀이 이미 짜여졌고 그 위에 곡식의 국물을 붓기 때문이죠. 누구든지 영적으로도 그러하다는 것이죠. 한 시대에 태어나면 누구든지 그 시대 안에서만 살아갑니다. 미래의 세대는 예측할 수가 없고 과거의 세대는 오늘의 현재의 일에 골몰한 나머지 과거의 일을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고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 시대에 태어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자기 시대에 사람들이 찾는 것들을 자기도 찾고 추구하는 것들을 추구하고 그렇게 하면서 똑같이 사람들이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찍혀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대량 생산되어져 나온 사람들은 모두 제품으로서의 가치 밖에는 별로 없습니다. 제품은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는 것으로서 시간이 지나면 소모되고 또 소모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직 좀 쓸 수 있어도 시대가 흘러가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또 자기 시대를 본받으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시대에 뒤져서 자기 시대를 본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옛 세대를 본받으면서 산 사람은 제품으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는 것이죠. 우리 음악도 가만히 보면 그렇거든요. 한 시대의 유행하는 대중가요나 대중음악은 그 인기가 클래식하고는 비교가 안 되죠. 그렇죠? 그냥 한 시대를 막 뒤 휩쓸지 않습니까? 그렇게 휩쓰니까 그 뭐 굉장한 거죠. 제가 요새 듣고 있는 사라브라이트만이라고 하는 가수는 그 'time to say goodbye'라는 하나의 single album을 가지고 유럽에서 800만장을 팔았습니다. 지금쯤은 기가셀러가 됐겠죠. 계산을 해보니까 거의 우리나라 돈으로 2천4백억 원어치 판이 팔린 거예요. 어떤 클래식이 그렇게 팔립니까? 팔리지 않죠. 그런데 조금만 지나 보십시오. 1년만 지나고 나면 잊혀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가지고 한 시대를 뒤덮는 법은 없지만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듣게 만드는 그래서 대중음악을 듣고 심취하다가도 그 클래식을 들으면 다시 그 클래식의 진가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그러한 곡이 있습니다. 수세기가 흘렀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듣고 들리고 또 팔립니다. 아마 세상 끝날 까지 계속 들릴 겁니다.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제품이요 내지는 상품이요. 또 하나는 불변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글을 쓰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야, 이게 한 시대에 태어나서 한 시대에 찬란하게 타올라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시대인의 가슴속에 불을 지피고 그 사람들에게 정말 열렬히 뭔가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대중음악과 같지 않고 클래식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대에 태어나면 모두 찍힙니다. 그런데 그렇게 찍히고 나면 그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무엇인가 좀 뛰어난 재능이나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동시대 사람들에게만 도전을 주지 세월이 흘러가고 세대가 바뀌고 나면 그 세대가 찍어낸바 된 사람들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음 시대의 사람들은 또 다르게 찍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교회의 역사와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보면 시대와는 상관이 없이 우리의 가슴에 깊은 감명과 불을 던져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침에도 칼빈을 잠깐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 길래 벌써 오백년 전의 사람인데 지금 읽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들까? 이 신앙의 깊은 이치들을 오백년 전에 깨달을 것을 보고 이제 우리 겨우 감탄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그런 분들의 고전적인 작품들은 두고두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비취게 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한 시대를 뒤흔드는 베스트셀러가 나왔어도 그 휘황찬란한 불빛은 수백 년의 세월을 두고 고고히 빛나고 수많은 어두움의 사람들의 역사를 광명의 역사로 바꾼 기독교 강요를 비롯한 청교도와 개혁가들의 저명한 저술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입니다. 그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그런 유산처럼 남을 수 있을까?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습니다. 쓰고 출판되었지만 되어서 한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다음 시대 아니 20년만 지나도 아무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는 그런 책도 있고 또 그 시대에는 그 시대에 출판되었지만 출판된 때에도 아무도 사가는 사람이 없고 자기와 가족들 이외에는 읽은 사람이 없고 다음 세대에는 더더욱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예 출판물로서의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는 그런 책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추구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백년, 이백년, 오백년, 육백년이 지나도 비록 한 시대를 뒤흔드는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꾸준히 찍혀 나가는 그래서 영향을 주는 작품과 같은 책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그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는 거죠. 선지자들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만약에 오늘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사도의 서신이 겨우 당시대의 산물이라고만 할 것 같으면 아마 오늘 우리들이 이것을 읽으면서 전혀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 시대의 틀에 넣어서 찍힌 그런 일률적인 획일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신의 은혜의 틀에 묶고 새롭게 찍으시는 그런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말과 글, 그들의 삶을 작품의 수준으로 까지 끌어 올리게 하는 것이죠. 오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요?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니까 모든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라는 것은 그저 학교에서 공부마치고 빨리 유학 가서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라도 받아가지고 와서 그래서 학교에서 교수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 지 말이죠. 세 보니까 학생 되겠다는 사람보다 교수되겠다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요. 그런가 하면 그다음에 인제 2,3학년쯤 올라가니까 그다음에는 보다 현실적이죠. 유학 그만두고 그저 웬만한 교회의 전임전도사라도 들어갔으면 그러다가 강도사고시라도 보고 그러면 좀 큰 교회 후광을 입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대개 그렇게 평균적인 생각 하고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저 주일 학교 하는 전도사님들은 청년부 하고 싶어 하고 청년부하는 전도사님들은 좀 웬만큼 규모 있는 교회 가서 목사가 된 다음에 부목사가 되고 싶어 하고 부목사가 된 다음에는 내로라하는 규모가 있는 교회의 젊잖게 담임목사로 가고 싶어 하고. 가고나면 남보다 좀더 좋은 차타고 싶어 하고 좀 넓은 사택에서 살고 싶어 하고 담임 목회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 동료들을 만나도 동료들 보다 좀더 큰 교회 하고 싶어 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그렇게 평균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일제시대 때 박해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그럴 때는 신학생들이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와서 박사학위나 받고 교수쯤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교수라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고 유학을 간다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죠. 그 시대는 그 시대 나름대로 그 시대에 맞는 틀이 있었죠. 그런데 그러한 틀에 의해서 찍혀 나온 사람들이 많이 생산될수록 교회는 별 희망이 없는 겁니다. 그저 특별히 나빠지지만 않으면 정말 백번이라도 감사해야 할 일이죠.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저 교회를 현상 유지하고 수적으로 좀 증가시킨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을 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너무 흐릿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목회사역의 목표로 삼을 수가 없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신학의 길을 걸어가도 자기가 이렇게 심하게 공부를 하고 어떻게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너무 낭만적이거나 너무 현실적이고 세속적이기 쉬운 것이 오늘 날의 형편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오늘 이 세대의 틀에서 찍혀 나온 결과라고 하는 것이죠. 특별히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여러분 이렇게 똑같이 신앙생활 하고 이렇게 살아도 특별히 여러분들이 정말 주님을 깊이 만나고 정말 새 사람이 되지 않고는 여러분들이 이다음에 이렇게 있어도 나중에 여러분들이 사회에 나가서 목회사역을 하고 해서 한 사람이 목회를 건강하게 하고 교회에서 목회를 잘 해서 그래서 제법 규모가 있는 그런 튼튼한 교회를 세우고 한 사람은 계속 부목사를 전전하다가 교회라고 하나 어떻게 구해서 갔는데 교회는 몇 십 명 되지도 않으면서 매일 싸움질하고 그리고 매일 목회자보고 들어가라 나가라 그러고 뭐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이 그렇게 목회에 죽을 쓰면서 고생을 하면 두 사람 사이에 교제가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누구 한 사람이 교만해 져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상대방이 자격지심 때문에 잘 만나주지도 않고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참 이상하더라고요. 그럴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거죠. 그런 것들이 결국 한 시대가 가르쳐 준 것들이에요. 즉 교회가 크면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풍조들이 어디서 왔습니까? 교회가 작으면 목회자들이 무시되고 이러는 풍조들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런 것들은 분명하게 성경으로부터 오는 것들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그런 물량주의 시대에 살고 있고 우리들이 그런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그런 것에 찍혀 나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여러분 자신도 이미 이렇게 찍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이 많이 먹은 사람들의 회심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한번의 격렬한 회심사건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죠. 젊고 어린 사람들은 상당히 신뢰할 만합니다. 특히 초등학생이나 중고등학생들의 회심은 아주 그의 인생에 깊이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대부분의 걸출한 영적인 인물들이 십대 초반이나 늦어도 십대 후반 안에 깊은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었어요. 대부분이. 스펄 전도 그랬죠.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랬죠. 존 오웬도 그랬죠. 토마스 카트라이트 같은 사람은 벌써 이미 4살 때 그런 회심을 경험했다니까. 그렇게 가슴에 깊이 새겨져서 그의 모든 삶과 사고방식이 그 강력한 회심의 영향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회심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에서 뿐만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감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가르쳐 주면 가르쳐 준대로 합니다. 그러나 근본도 알 수 없는 그러한 신학과 생각을 가지고 여기저기에서 사역을 하면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사람들 그러면서도 뭔가 처절하게 바른 길을 찾아가려고 애쓰고 진리의 빛을 담으려고 애쓰던 사람들은 틀린데 그런 것도 없이 그냥 한 시대에 익숙해져서 그냥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목회자가 깊이 회심하고 새 사람 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신학생들은 드물긴 하지만 가끔 있습니다. 허나 목회자는 그런 사람 거의 없습니다. 그냥 이제껏 자기가 살아오고 믿어온 바대로 그냥 계속 갈 뿐이지 그런 일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한 시대에 태어나서 틀에 찍혀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누구든지 태어나면 노력하지 않아도 그 시대에 그렇게 찍혀 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 나가는 것이죠. 그런데 누구든지 그렇기 마련인데 그렇게 된다면 아주 비극적인 일이고 그러면 희망이 없습니다. 이미 목사도 되지 않았는데 학교 다니는데 이미 목사처럼 직업적인 성직자의 고루함이 베여있는 신학생들 참 많이 만났습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고 울고 그래도 자기 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고보 선생도 말하기를 많이 선생 되지 마라. 심판 받을 일이 많다. 그래서 그렇게 찍혀 나와요. 이면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게 많습니다만 시간이 없으니까 이렇게 찍혀 나가는 것은 참 너무 가슴 아픈 일이고 그리고 그렇게 찍혀나가기만 하면 그러면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 이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뭐 기존의 교회의 시대에 대해서 분노하고 성직자들에 대해서 울분을 토하고 그래도 그렇게 해도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게 그 시대 속에 찍혀서 그 시대 사람들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이 찍어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자기를 찍어내는 이 시대의 커다란 영적이고 육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집요하게 항거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 항거하면서 사는 것을 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말씀드리고 싶은데 항거하는 방식을. 우선 첫째는 내면적인 것이고, 두 번째는 내면적인 것에 기초한 외면적인 것이에요. 그 내면적인 것은 뭐냐면 그 시대가 자기를 찍어내려고 한때 거기에 안찍힐려고 항거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경건입니다. 경건. 자기 안에 거룩한 경건의 세계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자기를 그렇게 시대의 평균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렇게 찍어내는 것에 아주 강력하게 항거하면서 사는 거죠. 그럴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이 바로 경건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누구든지 십자가는 싫고 자기 욕심의 즐거움은 좋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다소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육신적인 것에 대해서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는 낯설고 죄의 세계에 대해서는 친근하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사는 그 일은 훈련 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거스르는 일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기는 굉장히 힘든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하는 일을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있는 마음과 생각을 반드시 드러내게 되는 것이죠. 저는 교회를 지으면서도 그런걸. 참 많이 느꼈습니다. 내가 일하는 일꾼들에게 노가다 십장처럼 한 6개월 살면서 계속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뭐냐면 마음을 드려서 일을 해라. 그래서 이 일이 완전히 잘못됐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 마음이 담기질 않아. 반드시 그 일이 마음이 담기지 않은 흔적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처음엔 괜찮지만 두, 세, 네 가지 누적되면 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거죠. 그래서 아주 본보기를 보여줘요. 마음을 실지 않아서 실수 한 것을. 일꾼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다 부셔버리는 거예요. 남의 집을 만들어 놓고 그걸 주인이 그걸 부수니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망치 가지고 다 때려 부수는 거예요. 다시 해라 이거죠. 마음을 실어라. 너희들 집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해라 말이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은 기쁘고 그것을 거슬러서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겁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경건한 은혜가 가득 찼을 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참 기쁘고 쉽죠. 그러나 죄가 가득 찼을 때에는 그 손톱만큼 순종하는 것이 차라리 손목을 자르는 것보다도 훨씬 더 힘듭니다. 그래서 한 시대를 거스르고 저항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렇게 저항하고 거스르며 살게 하는 경건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경건 생활, 개인의 영적 생활이 그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전적인 작품을 남겨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지피는 그런 영적인 저술들이 모두 경건하지 않은 세계를 가진 사람들의 머리를 통해서 머리를 통해서 가슴으로 흘러나온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경건의 세계가 하나님이 그 사람과 동행하는 원천이 되었고 그 경건의 세계 속에서의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죠. 그러니까 남들이 알 수 없는 영혼의 비밀한 지성소와 같은 세계를 가꾸어 나가고 그 세계를 파수하려고 하는 열심이 없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 시대에 찍혀서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평생 학생밖에 더 이상 되는 것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생이 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리고 좀더 교회를 크게 하는 삶도 있을 것이고. 또 보다 수완이 좋고 능력이 있어서 교회를 잘 운영하는 사람은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개인의 이 경건한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파보다는 덜 필수적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런 경건한 은혜의 세계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가꾸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이 세상의 물결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죠. 그것을 사도바울이 경건의 능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그 경건의 능력. 그래서 세상이 자기를 찍으려고 할 때 그 찍히는 것에 강력하게 저항하게 만드는, 그래서 세상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훨씬 더 잘 빚어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영혼 안에 끊임없는 경건의 은혜가 넘쳐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자기 자신의 마음과 양심을 비추고 날마다 마음을 지키면서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그러한 내적인 열심 없이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루아침. 새벽기도 나가고 한 학기 하나님 앞에 새벽기도 나가고 어려운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번잡한 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속에서 진리를 찾고 그렇게 하는 것들은 하루나 이틀 그런 거 가지고는 그렇게 한 사람과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어떤 현저한 차이가 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거룩한 경건은 경건한 은혜의 세계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견디기 힘든 삶의 환경 그리고 여건과 더불어 분투하고 싸우면서 자신의 신앙의 세계를 지키려고 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피눈물 나는 경건의 헌신을 통해서 가슴 속에서 서서히 쌓여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탁월한 열심을 품고 자신의 경건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의 틀에 찍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예외 없이 세상의 틀에 찍혀서 그래서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기껏해야 평균적인 사람이 되어서 한 시대를 섬기고 살다가 다음 세대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글, 말, 사역, 행동, 인생의 본보기 같은 것들을 남기면서 시대가 끝남에 따라서 폐기물 처리되듯이 모두 쓸려져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시대에 반짝이는 별처럼 명단합니까? 나 설교를 꽉 잡았다. 나 목회 꽉 잡은 사람이다. 전도? 이런 방법이 있지. 교인을 모으려면 나같이 해라. 그러면서 한 시대에 반짝이는 별처럼 나타나서 수많은 청중들을 끌고 다녔던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나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년도 지나가기 전에 그들의 모든 섬김과 사역 이런 것들을 잊혀져 버립니다. 무엇 때문이죠? 영원한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무엇보다도 여러분과 같은 이 시기에 이 기본기에 충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다른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열심히 노력하고 배우면 다 배우게 됩니다. 뭔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기본기는 그렇게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제가 가르치던 학생 중에 탁구선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탁구 선수기 때문에 학교가면 매일 탁구 치는지 알았어요. 그랬더니 탁구 치는 시간은 훈련 시간의 1/3도 안 돼요. 뭘 하나 그랬더니 로드 웍을 하는 거예요. 10km 씩 뛰는 거예요. 아니 야~. 너 마라톤 선수냐 탁구 선수냐? 아니 탁구는 공으로 하는 건데 아니 그걸 자꾸 쳐야지 그 뭐야. 10~20km 씩 뛰기만 하면 뭐하냐. 그랬더니. 그렇지 않아요. 모든 개인기와 순발력 이런 것들이 기초체력에서 나오는 거지 기력이 떨어지고 나면은 안 된다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여러분 산행 같은 거 하다가 발 삐잖아요. 언제 삐냐면 탁 올라갈 때 그때 삐지 않습니다. 대부분 먼 산길을 걷고 지쳐서 다리가 후둘 거릴 때 그 때 삔다고. 왜냐면 행동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거야. 그래가지고 펄펄 날 정도로 강한 체력을 만들어 놓으면 스매싱을 가할 때도 전광석화와 같이 날아가서 꽂힌다는 거죠. 그런데 이것도 콩이야? 이게 몇 그람이야? 5그램인가 몇 그램으로 알고 있는데 뭐 하여튼 몇 그램 안 돼요. 그런데 그 까짓것 치는 데 뭐 힘이 들겠어요. 그게 탁구 시합에서 수십 번 반복하다 보면 후반에 가면 현격하게 체력이 떨어져서 가벼운 탁구공도 내리 꽂지를 못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펄펄 나는 체력을 길러 놓고 그다음에 구체적인 세기를 연습하는 거죠. 그러면서 탁구 선수가 되어가는 거죠. 똑같은 거예요. 그런 것들은 목회하면서 전도사 하면서 배우면 됩니다. 그런데 좋은 데 가서 제대로 배워야 돼. 이상하게 배워가지고 말이지, 꽁수나 부리고 그러면 안 돼요. 제대로 된 정신이 있는 교회에 가서 제대로 배우면 되는데, 그건 배우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뭐냐면 기본기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이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자세, 필요한 거죠. 이거는 하루아침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저녁때도 가끔 교회당을 내려와 보면서 가슴 한 구석이 이렇게 뭔가 이렇게 시려요. 그리고 이 교회가 정말 건강한 교회인가? 왜냐하면 이렇게 신학생들이 많고 젊은이들이 많은데 그 얼마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연도 많고 괴로운 일들일 많겠어요? 그러면 앞으로 사역을 감당할 지도 모르고 그런다면 뭔가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기도의 제목들이 있어서 40일씩 보름씩 날짜를 정해 놓고 철야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금식을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아니면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누구처럼 매일 밤 12시를 기도의 시간을 정해놓고 정해진 시간에 와서 깊이 매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럴 텐데 너무 없어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금요일 밤이 되면서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끝나고 나면 그저 몇 시나 될까? 2시쯤 될까? 그러면 혼자 교회에서 엎드려서 기도를 할라 치면 난로가 아깝다고 불을 다 끄고 가요. 그럼 얼마나 추운지 몰라요. 그땐 또 밍크 담요가 유행이어가지고 그 밍크담요를 두르고 교회당에 앉아서 하루 저녁 세우고 나면 아침에 몸이 동태처럼 얼어붙죠. 그런데 사실 하룻밤 날짜를 세우고 기도한다고 해서 아침에 무슨 찬란한 은혜의 빛이 보이냐 하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때도 있겠지만 안 그런 때가 더 많았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것들이 하나씩 쌓여가면서 우리의 신앙의 인격에 어떤 경건한 세계를 형성해 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경건한 세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몸부림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가슴이 녹도록 매달리지 않으면 갈급해서 견들 수가 없고 깊은 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인가 한 말씀이라고 감미로운 음성을 듣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그러한 영적인 need를 가진 사람들이 돼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몸부림이 너무 초라해요. 그러니까 세상적인 욕망과 이런 것들이 깊이 그 신학생들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래서 그 시대의 평균적인 사람들로 찍어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그 속에 무언가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인 능력이나 더러운 세상의 풍조나 육체의 욕심들이 흘러 들어올 때 단호하게 칼로 자르는 듯한 지도자로서의 단부함 이런 것들이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이 안 되는 거예요. 지금서부터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 그렇게 살아서는 전혀 그 사람이 그 시대에 의해서 찍히는 것들을 거스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돼. 사역의 현장으로 들어가면 여러분들은 거의 망가진 교회와 싸워야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요. 여러분들의 최대의 적은 교회입니다. 마귀가 아니라. 정말이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잘못된 채로 살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안 고치려고 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잠깐 읽은 칼빈에서도 그 얘기를 해요. 한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과 사단이 함께 일한다 이거에요. 함께.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 자신이 안바뀌려고하면 사실 어떤 의미에서 성령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아무라 강력하게 역사해도 사람들이 마귀에게 요동하지 않으려고 맘먹고 그 마귀를 대적하는 방식을 택해서 살아가기만 하면 마귀도 인간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사람이 우리의 중요한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로이드 존스목사님도 아침에 보니까 singleness of heart라고 하는 글속에서 그런 얘기를 했죠.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기독교는 어떠해야하고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하고 신앙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심지어 하나님은 어떤 존재여야 된다고 그렇게 어줍지 않게 주장을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어긋나는 것은 자기가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라도 다 쳐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그 마음 자체가 뭔가 하나님에 의해서 빚어지고 새롭게 되어지고 그러는 것 자체를 거절하는 것이라 이 얘기에요. 그게 사실은 목회의 가장 커다란 적이에요. 적이라고. 교인이 무너지면 마귀도 무너져. 사람이 깨뜨려지면 마귀의 권세도 깨뜨려 진다고. 그런 점에서 그렇게 사역의 대상이라 이거죠. 그런데 우리는 본성상 경건에 힘쓰면서 살기를 우리의 본성이 싫어해. 그걸 여러분이 알아야 해. 새벽기도 평생 새벽기도 작정해놓고 안 나오잖아. 도대체 그게 무슨 페시지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그렇게 안 나와도 나는 계속 작정을 받을 거예요. 언젠가 크게 회개하는 날이 오겠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거죠. 그래서 경건생활에 열심을 내야 돼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경건생활을 힘써야 한다는 강한 인식을 가져야 돼. 그 대표적인 게 뭐냐면 결국은 두 가지 에요. 성경을 계속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에요.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그다음에 그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리고 경건한 책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의 세계를 넓혀가는 것 그래서 신학적인 그런 책들이 아니고 그런 책들은 또 다른 의미에 속하는 거고 자신의 마음을 항상 따뜻하고 거룩해지고 싶고 순종하고 싶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싶은 그런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들을 읽으면서 자극을 받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경건해 지는 거죠. 또 하나는 기도생활이에요. 이점에 있어서는 말이죠. 여러분들이 철저하게 생활해야 되요. 지금 여러분들이 만약에 새벽기도 안하고 있으면 진짜 회개해야 돼. 이렇게 있다가 어느 교회 지금이라도 교역자로 가면 새벽기도 할까요. 안 해요. 여러분 동료들 중에서 전도사 생활하면서 새벽기도 하는 사람 한번 꼽아보라구요. 가뭄에 콩나듯이 해요. 무슨 배짱인지 무조건 안나가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포기하는 겁니다. 어느 목회자를 만났더니 열심히 짜고 있어요. 수시로 부교역자들이 새벽기도에 안나와가지고 어떨 땐 자기가 너무 힘들고 아파서 못 나가면 어떨 때 새벽기도가 펑크가 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짜고 있대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집어치워라. 집어치워라. 죄짓는 거다. 그 전도사들 부목사들 그렇게 가르쳐가지고 그 사람들이 뭐가 되겠느냐. 그러니까 자기 새벽기도 설교하는 날만 나오는 모양이라. 그런 게 어디 있어. 그게 무슨 교인들한테 봉사하려고 새벽기도 나오는 거예요? 그런 게 어딨냐고. 쓴 소리를 했죠. 당신이 쓰러 죽으라고 해도 나오고 그 자식들 안나오면 혼내 버려야 된단 말이지. 무슨 교역자가 그딴 놈의 교역자가 있냔 말이지. 이제 신학교 1학년이나 2학년에 다니면서 말이지 넥타이나 메고 거들먹거리고 말이지 교인들이 주는 봉투나 주면 챙길려고나하고 말이지 벌써부터. 새벽기도도 안나오고 그게 무슨 전도사냐. 그자식이지. 반 죽여라. 그게 그 영혼을 살리는 길이다. 자꾸 빠지면 야단을 치고 바르게 하라고 하고 도전을 하고 기도도 해주고 하다가 도저히 말을 안 듣고 그러면 확인 해야 돼. 너는 소명 아니다. 가서 뭐 다른 거 해라. 가서. 그런 경건의 기쁨이 없는 사람이 사역의 기쁨이 있다. 그거 거짓말이이에요. 그거 만약에 있다고 그러면 그거 이상한 세속적인 기쁨이지 자기가 하나님 만나는 기쁨이 없는 사람이 교인들 하나님 만나게 해주는 사역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요?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기쁨이 없는데 저 사람 순종하게 하는 그 사역에 내가 봉사하는데 그게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고? 그런 게 어딨냐구요. 다 거짓말이지. 그러게 맨 가짜들이나 만들어내고 말이지. 그러면서 그것도 사역이라고 하면서 말이지 어디 좀 큰데서 오라는 데 없나? 불러서 뭐하겠어요. 뭐냐.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가야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어떻게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분투하며 사는 일이 너무나 고단하고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될 때 자기가 그렇게 변화되고자 할 때에 어떻게 사단이 자기를 방해하고 자기 안에 있는 순한 악한 것들이 들고 일어나서 자기를 힘들게 하는 지를 터득하면서 어떻게 그 영혼들을 섬겨야 할지를 배워 나가야 된다는 거예요. 뭐냐? 뭐하고 있느냐는 거죠. 퍼질러 잘대로 퍼질러 자고 먹고 싶은가 실컷 먹고 하고 싶은가 다하고 가고 싶은데 다 가고 그렇게 사느라고 새벽기도도 안나오고.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며 매달리는 세계도 없고 그러는 데 어떻게 세상에게 찍혀냄을 받지 않을 수가 있느냐 이거죠. 뭐냐 이거죠. 난 아주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정말 가슴 아파. 그리고 분노를 느껴요.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저는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신학교 7년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다시 돌려 주셔도 내가 그 이상은 못살겠다. 그랬어요. 하여튼 오늘은 내 날이고 내일은 내 날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하여튼 힘닿는 대로 교회 섬기고 영혼들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랬는데도 지금 이렇게 제 모습을 보면 내가 되고 싶어 했던 목회자하고는 너무 거리가 멀어요. 그래서 그런 거 생각하면 참 눈물이 나요. 오늘 아침에도 하루가 밝은 걸 이렇게 보면서 이제 얼마만 더 있으면 나이 50이구나. 한 10년 정도 사역 더 할 수 있겠구나. 60까지. 그다음서부터는 이제 펼쳐놓은 보따리 개켜야죠. 어떻게 이렇게 빨리 지나갈 수 있을까? 한 번만 더. 한번만 더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어떤 땐 나도 견디기 싫을 정도로 제가 싫어요. 엊그제 저희 집사람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 나를 다시 읽었대요. 사모님들 하고 같이 스터디를 하면서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아 정말 당신은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었어. 거기 까지는 좋았는데. 그런데 당신이 그 책처럼 살고 있을까? 거의 그런 것 같지만 그래도 꼭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동의 했어요. 그래 나도 그런 거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노력해야지. 내 질문 몇 가지할게요. 몸부림치지 않고는 그 시대에 의해서 찍혀가는 것 저항할 수 없거든요. 그 첫째가 경건이에요. 정말 여러분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고 기도하는 그 일에 가장 기본적인 그 일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까? 매일 매일 성경 읽고 그 속에서 작은 음성이나마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까? 거기서 교훈을 받습니까? 책망을 받습니까? 바르게 함을 받고 의로 교육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그 말씀이 여러분들을 깊이 찔러서 아프게 하고 성경을 읽다가 거기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우는 날이 1주일에 한 번씩은 있어야 됩니다. 그래도 인간은 변하기가 힙듭니다. 기도합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합니까? 안됩니다. 정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가정이 있습니까? 양육의 책임이 있습니까? 싱글 들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아이들일 달려 있습니까? 이제 세월이 더 흘러가면 그런 자유를 누리기 쉽지 않습니다. 왜 새벽기도 안합니까? 추운 겨울에 산에 뛰어 올라가서 기도해요. 산에 뛰어올라가서. 그런 정도의 사모함이 있어야 돼. 그것도 나이 들면 못해요. 무릎이 아프고 관절염이 생기고 해서 못해. 새벽의 시간에 방석 한 장 들고 뒷산에 올라가서 간절히 부르짖고 나서 제 제자 하나가 있었는데 이년 반 동안을 밤마다 열두시가 되면 산속에 들어가서 기도 했어요. 공동묘지를 지나서 말이죠. 물론 가정 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일이 있긴 했어요. 자기는 일부러 그 공동묘지 앞에서 기도했대요. 으스스한 마음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싶어서 그랬대요. 사람이 딴사람이 되 가는 거예요. 어떤 때는 정말 마음이 찢어지는 거 같아요. 다 끌고 산에 올라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깊이 하나님 붙들고 매달리고 얼마나 기도해야 될 게 많습니까? 우선 변하지 않는 자신 위해서 얼마나 기도 많이 해야 합니까? 세월이 흘러가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변화가 없고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성장이 없어요. 그런 것들을 깊이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정말 몸부림쳐야 되지 않아요. 우선 다 집어치우고 새벽기도 왜 안와요.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냐고요. 하나님 앞에서. 밤늦도록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온몸이 파천지가 되도록 연구에 몰두하다가 잠들었더라도 새벽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정말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무엇인가를 몰두하는 삶입니까?
이제는 지체들이 많아서 누가 누군지 모르지만 몇몇 사람들 몇 년째 지켜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 왜 사나? 학교도 다니는가하면 휴학. 휴학하는가 하면 그만두고 그렇다고 다른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의 종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안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신학생이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안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평균적으로 보면 교인들 중에서 가장 질이 나쁜 삶을 택한 신학생들. 저는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들 목사 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말이죠. 왜 그렇게 삽니까? 보십시오. 자기 자신이 구도자가 되어서 주님과의 친밀함을 자신에게 소유하는 일을 위해서 경건에 힘써야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 생활에 억눌리고 너무나 비인격적인 생활이 너무 싫어서 신학생들이라도 모든 무거운 짐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그렇게 신학생으로 티내지 않고 자유롭게 성도들 틈에 섞여서 인격적으로 신앙 생활하도록 그렇게 만들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인데 어떤 지체들을 그런 기회들을 활용하는 것 같아요. 이 교회는 신학교를 다녀도 부담이 없다 이거에요. 왜? 다른 교회처럼 색안경을 끼고 신학생을 보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참 교회는 교인들은 신학생에 대해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기대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다른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어요. 매우 각성하고 나는 새벽의 시간에 나와야 되요.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고. 참 목사님 우리말로만 그러지 말고 우리도 늑대 쫓는 막대기 하나 가지고 우리 한번 태백산에 기도하러 갑시다. 나는 좀 그런 무모한 젊은이들을 만나고 싶어요. 만나고 싶어요. 좀 그런 기개 없어요? 금년 한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다스리시고 이 민족을 화해시키시도록 품돈이라도 모아서 태백산 올라가서 목사님 우리 기도하고 옵시다. 그런 거 없어요? 그러한 간절한 열심 으로 자기와 싸워야지. 어느 전도사가 참 그런 거 본받아야지. 새벽기도 하도 가기 힘드니까 머리맡에다 써 붙였어요. 새벽 기도 안 가면 개새끼. 이렇게 썼어요. 그러니까 항상 자명종을 놓고 눌 루고 퍼질러 자고 눌 루고 퍼질러 자니까. 퍼질러 자고 그러다가 자명 종 눌러 놓고 또 자고. 그리고 또 젊었을 땐 잠이 많잖아요. 그리고 일어나서 딱 보면 써 있어요. 새벽기도 안 간 개새끼. 얼마나얼마나 이게 힘들었으면 그랬겠어요. 그래서 신학생용 자명종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가장 효과적인 것은 제 목소리에요. 6시에 따라라락 울리면서 그 소리만 나면 돼.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정말 웃으면서 하는 얘기지만 난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자기와 싸워야 돼. 절대 안돼. 그러니까 이를 악물고 쓴물을 머금으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요. 그게 십자가의 길이야. 나는 이거 벽에 붙어 있는데 너무 부끄러웠어요. 도대체 우리 중에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게 진짜 십자가의 길을 가는 태도인가? 신학생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지 않고 여러분 만할 때는 거의 일년에 두 세 번씩은 금식기도 하고 싶은 욕망들이 생겨나야 돼요. 무모할 정도로. 그게 거룩에 대한 열망이잖아. 참 나는, 한번 손들어 보세요. 우리 교회서든지 동네 교회에서든지 정해진 시간에 새벽기도 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왜 못 들어 바보같이. 들어봐요. 보라고 손 내려요. 안하고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이렇게 들 수도 없고 안 들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이거에요. 안돼.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정말 무슨 대책을 세워야 겠어요. 어떤 때는 내가 진짜 큰 죄를 짓고 싶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들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거 그냥 내버려 두면서 저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되는데 말이지.
두 번째는 뭐냐면 자신의 삶으로 항거해야 돼요. 하나는 경건의 세계로 또 하나는 삶으로 항거해야 돼요. 그런데 이 사람의 내면의 세계정신과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밀접하게 연관이 되 있거든요. 그래서 나라를 전혀 사랑하지 않던 사람도 논산 훈련소 들어가서 몇 달 지나면 다 애국자로 변해. 부모가 면회를 갔는데도 충성 그러더라고. 그러다가 이제 병장쯤 되면 병장도 필요 없어. 일병쯤 되면 엄마 돈 부쳐줘. 나 탈영할 것 같아. 삶으로서 자신을 찍으려고 하는 거기에 항거해야 돼. 그런데 거기에 순응하면서 사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삶이라고 하는 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하나는 개인적인 생활이고 또 하나는 사역이에요. 그렇죠?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지만. 그 holy club을 중심으로 생겨난 그 사람들, 웨슬리와 윗필드 이런 사람들을 가르쳐서 우리들이 매쏘디스트라고 부르는 데 메쏘디스트라는 말이 메쏘드에서 온거 거든요. 그러니까 삶의 방식이 너무 까다롭고 철저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삶의 방식주의자들이라 그래서 메소디스트라는 말이 생겨난 거에요. 그런데 보세요. 이 세대에 자기가 안 찍히려면 자신의 생활을 좀 철저하게 해야 돼는 거죠. 그래서 지도자가 되면 지도자가 되려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볼 때 뭔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껴야 돼요. 제가 한때 조수미 씨를 참 좋아했거든요. 그 노래를. 그분이 인터뷰를 하는데 두 가지 얘기 정도가 참 인상 깊었어요. 우선 첫째는 뭐냐면 자기는 오페라에서 노래를 부를 때 수천 명의 관객들이 있는데 어떤 심정으로 노래를 부르냐면 내가 한곡 노래를 불러서 저 사람들을 다 쓰러뜨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거예요. 이게 음악적인 충격 때문에. 그래서 실제로 음악 역사를 보면 오페라에서 가수가 노래를 막 부를 때 소이 얘기하는 뮤지컬 오르가즘에 도달해가지고 사람들이 졸도하는 일들이 일어나요.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니고 그런 음악사의 사건들을 염두에 두면서 노래 부른다는 거죠. 그러니까 하여튼 뭔가가 있는 거죠. 또 하나는 뭐냐면 자기는 철든 다음부터 이제껏 시원한 물도 먹어본 적도 없고 따뜻한 물도 먹어 본 적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 항상 미지근한 물 이상은 먹지 않는다. 뭘 하려고?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 탄산음료 같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뭔가 대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우리들이 이렇게 우리들을 깊이 감동받게 하는 생활의 규칙이라는 것이 있어요. 메소디스트들이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만큼 자기 관리와 생활에 철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무엇인가 기이하게 여기는 삶의 부분들이 많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평범하잖아. 개기고. 힘들면 퍼져 버리고. 영혼을 돌봐도 거의 무책임하게 처신하고. 그렇게 평균적이잖아요.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미 신학생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안 해.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요즘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해. 왜냐하면 특별한 걸 아무것도 발견을 거의 못했기 때문에. 그건 반드시 좋은 현상만은 아니란 얘기죠. 신학생들을 만나보면 더 정직하고 더 진실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더 정직하고 그리고 더 열정적이고 어떤 면에서 더 단호하고 그러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되는 거죠. 그렇게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나가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생활하는 것은 너무 힘드니까 그렇게 생활은 안하는 거죠. 그러니까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그게 바로 하나님 없는 삶이에요. 하나님 없는 삶.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거. 그런 속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성이 깃들 수가 없어요. 그렇게 살아가잖아요. 자기 관리가 제대로 안돼는 거죠. 매일 도전받았다는 데 도전 받으면 뭐해요? 기도에 대해서 도전 받았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에 도전 받은 사람들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복음대로 믿고 복음대로 산 사람들이 가는 나라에요. 기도를 통해 도달하는 깊은 영적인 세계는 도전받은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기도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소유하는 나라라는 거예요. 도전 받아서 뭐하냐 이거에요? 듣기도 싫어 이젠. 도전 받아서 뭐하냐는 거죠. 뭘 위한 도전이냐 이 말이에요. 삶이 없는데. 삶이 반응이 없는데. 뭐하냐 이거죠. 그거 뭐냐.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가고 싶은 데 가고 하기 싫은 거 절대로 안하고. 그게 고린도 인들이 살아가던 삶이에요. 그게 하나님 없는 삶이라고. 예전에 거듭나기 전에 살았던 우리의 삶이라고요. 그렇게 하면 되냐 이거죠. 기도에 도전을 받았으면 명백하게 하루에 몇 십분 몇 시에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어떤 영혼의 상태로 돌아온다. 제 작년에 지적인 충격에 대해서 도전 많이 받았죠? 책 좀 읽어야 겠다. 많이많이 도전 받았죠. 그래서 뭘 읽었냐? 무슨 공부를 했냐? 이거예요. 구체적으로 삶으로 반응을 해야지 그게 그 시대에 찍히지 않고 살아가는 거지. 건들건들 건들. 루이스 베르크의 조직신학 한권도 안 읽고 졸업을 해. 기독교 강요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고 졸업을 해. 그걸 거슬러야 될 거 아니에요.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되는 거야 여러분.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일년 지났죠? 일년 동안에 책을 몇 권이나 읽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교회서 공과공부한 거 다 합쳐도 10권되기 힘들 거야. 그게 우리의 삶이에요. 이렇게 찍혀 나가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목표를 정해야지. 50p 이상씩 안 읽으면 나 밥 안 먹는다. 100p를 못 읽으면 잠을 안 잔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규율하지 않으면 반드시 똑같이 그 시대에 찍힌 사람들이 되는 거지. 전도에 대해서 도전을 받았다. 그러면 해야지. 그런데 이게 그 제대로 훈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항상 이중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에요. 그래서 뭐냐면 학교 가서 교수가 강의하는데 엎드려서 영어공부하고 그리고 한참 전도하면서 영혼을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도록 그 현장에 있거든. 근데 전도지 들고 항상 생각하는 거야. 내가 책을 한 권도 못 읽었는데 이러다 전도지나 들고 다니다가 깡통 되지. 그러면 또 책을 읽을 시간이 와. 기도도 못하고 책만 보다가 내가 너무나 공부만 잘하는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하지. 또 기도하러 가. 또 무릎 꿇고 앉아서 내가 이렇게 공부는 안하고 기도만 열심히 하다 신비주의자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러면서 허송세월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래서 삶의 방향을 분명하게 전하고 그리고 전도하러 나갔다. 그러면 그것을 전도하는 것 때문에 공부 못한다고 생각하면 안돼. 영혼을 섬기기 위해서 내가 공부를 하지 못한다. 그런 생각 하면 안돼. 기쁘게 생각해야 돼요. 그리고 아주 기쁘게 그 일을 감당해야 돼요. 무엇이든지 간에. 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해야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이 거기에 나를 세워 주신 것과 그리고 거기에서 하게 하신다는 것 때문에 기뻐하면서 하나님은 나에게 전도할 기회를 주셨구나. 그리고 감사하면서. 그러면서 전도가 자신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2시간을 전도해도 그게 전도한거에요. 심방을 가면 자기가 마치 세상의 모든 일 집어던지고 영혼을 심방하는 그 일 하나에 자신의 인생을 전부다 건 것처럼 그렇게 해야 돼요. 그래서 아파트 문을 두드리고 만나게 안 해주면 거기서 문고리 잡고 기도하고 안 되면 복도에 주저앉아서 기도하고 한번 해보라고. 또 가서 도전받았다는 얘기만 하지말고 실지로 해보라고. 오늘 토요일이잖아 가서 해봐. 사람 좀 보면 어때요? 복도에 앉아서. 복도에 꿇어 앉는 게 너무 창피하면 서서. 하나님 이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간절히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간구하고. 그렇게 삶으로 항거해야 해요. 자신의 생활 그 자체가 자기를 찍어내려고 하는 거기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살아야 되요. 그렇지 않아요? 도전 받아서 뭘 해? 누구를 위한 도전이냐 이거죠. 삶으로 반응을 안 하는데. 그래서 어려운 길이에요. 훈련의 내용이 무언지 설명을 듣는 오리엔테이션은 이렇게 들을 수 있지만 진짜 훈련을 받는 것은 자기를 훈련하는 일은 피가 나도록 땅바닥에서 기고 눈물이 쏟아지도록 매어달리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안 살거든. 그러면서 자기가 손해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렇지 않아요. 좁힐 수 없는 현저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쓰셔요. 반드시 쓰셔요.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자신이 삶을 그렇게 철저하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돼요. 쓸데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 틀림없이 있을 거야. 컴퓨터 앞에 매달려서 헛세월 보내고. 이상한 사이트에 들어가서 그런 거나 뒤지고 말이지. 그렇게 쓰레기처럼 살아서 앞으로 뭐가 되겠어요.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럼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가. 제발. 그래서 강도 높게 살아가야 돼요. 그 점에 있어서 제가 반성을 많이 해요. 정말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할 수 없지만 원하는 사람들이라도 정말 강도 높게 그렇게 훈련시켜 나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익혀 나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지성을 연마하고 기도 속에서 영성을 쌓고. 삶의 방식을 고치지 않고 되겠느냐고요. 엄격해 져야 돼요. 그다음에 작은 두 번째로는 사역을 통해서 부단히 시대가 자기를 찍어내려고 하는 그러한 세력에 대해서 강력하고 항거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그게 뭐냐면 사역을 맡겨 주면 이상하게 사람의 사고방식이 내면화 되어 버리는 거야. 내면화라는 게 뭐냐면 이런 거예요. 사역을 한찬 하다가 죽도 밥도 안돼. 교사로 사역해도 마찬가지고 교역자로 사역해도 마찬가지고. 그러면서 안으로 오그라들어가지고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나봐. 너무 죄가 큰 가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좋다 이거에요. 좋은데. 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야지.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면 하나님 앞에 진취적으로 매달려서 나 죄가 크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제가 못되고 패역이 꽉 찼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나를 깨뜨리시더라도 하나님의 사역에 복을 주셔야 겠습니다. 이렇게 진취적으로 매달려야지. 그 뭐.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 나는 아무래도 사명감이 없나봐. 내 안에 너무 죄가 많아서 하나님이 나를 축복을 안하시나봐. 그런데도 사명감을 고취할 생각도 안하고 두 번째로는 자기의 죄를 고칠 생각도 안하고. 저는 너무 무능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는데 유능해 지려고 노력도 안 해요. 그러니까 아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자기가 못나고 무능하고 게을러가지고 쥐뿔도 되는 게 없으면서 자기는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성공할 능력도 없으면서 뭘 그래? 뭐 성장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성장 시킬 능력이 있으면서 그런 얘길 해야지. 그것도 안하는걸 뭐. 아니 하다 못해 구멍가게라도 하다가 안 되면 유리창이라도 바꾸고. 군밤 장수 하다가 안 되면 고구마 장수로 바꾸고. 보신탕 하다가 안 되면 삼계탕으로 바꾸는데. 해도 해도 안 되는데 뻔한 건데 여태까지 섬겨도 안 되는데 교사 그렇게 섬겨도 영혼 변화 안 되잖아. 그러면 자기가 바뀌든지 뭐가 달라져야지. 왜 이렇게 될까라고 고민을 하면서 나를 이렇게 세워주셨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어드리는 게 없구나. 그렇게 고민을 하고 그러고 그것 때문에 신음을 해야지. 주일날 와가지고 일주일 내내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살다가 와가지고 와서 이것저것 거든다 그러고 가고. 매일 물어보면. 힘들어요. 제가 변화되지 않아서. 변화되지 않은 게 무슨 자랑이냐고. 그럼 매달려야지. 능력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게 무슨 자랑이에요. 그럼 매달려야 될 거 아니야. 능력을 주시도록. 무능하고 아는 것이 없고. 그럼 배워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무 것도 안하고 세월을 보내는 거예요. 그런 걸 통해서는 영락없이 그 시대를 통해서 찍혀 나가는 거예요. 계속해서 찍혀 나가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사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질 수도 없고 그 다음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니까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하기 붙드는 영적인 몸부림에 대해서도 터득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건 하나에 제가 만들어 낸 용어에 의하면 사역적인 패역이에요. 그냥 버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 그것은 이미 그런 어떤 섬김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현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지 않는 것은 사역자로서의 양심이 화인 맞은 거예요. 죄 때문에. 사역자의 양심이 거의 화인 맞은 거예요. 그래서 영혼들은 하나도 변화되지 않는데 영혼을 섬기라고 거기 두셨는데 자기 자신의 문제만을 가지고 시름하기 급급한 거예요. 나는 하나님 앞에 너무 부족한 것이 많고 기도도 안 되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부교역자를 보는데 부목사님이 그렇게 뺀질거리고 일을 안 해요. 영혼들도 팽개치고. 목사님이 하도 가슴이 아프니까.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당신 자신이 직접 챙기면서 그런다 이거죠. 너 이다음에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거예요. 하나님 더도 필요 없습니다. 저사람 가서 이다음에 가서 목회할 때 꼭 저 같은 놈들만 부목사로 만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심정을 헤아리도록 역사해 주십시오. 뭐 얼마나 답답하니까 그런 예화가 나왔겠습니까만은.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러니까 제 얘기가 그 얘기에요. 지금도 안 늦었어요. 태도를 확실히 해요. 길이 아니면 가지 마요. 이 길이 너무 어려운 길이야. 그리고 이렇게 대중적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아니라고 기도하면서 확신했기 때문에 그길 안 걸어간다고 하나님이 벌주시지 않으세요.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거지 모든 인간을 목회자의 길로 내 모시는 것이 하나님의 그 부르심은 아니에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리고 훌훌 털어요. 그리고 뭐 되지도 않는걸. 하려고 그래. 털어버리고 그리고 가서 뭐라도 해요. 직장에 다니고 그래서 진실한 교인이 되면 되잖아.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우리들이 보기에 아무런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갈망도 없고 교인 중에서도 아주 정말 질이 나쁜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사람이 목회자가 되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고 그래요. 그럴 필요 없다 이거죠. 훨훨 떨쳐 버려요. 그 힘든 신학교 그러고 다닐 필요 없다 이거에요. 그 길이 아니면 집어 치우고 하다못해 뭐라도 해요. 취직해서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은 공무원 시험이라도 봐서 직장이라도 다니고 그렇게 하면서 그러면서 좋은 교회 가서 훌륭한 목사님 만나서 말씀 듣고 겸손하게 섬기면서 그러면서 주님의 사람이 되어 가면 하나님이 뭘 기뻐하시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태도를 분명하게 하고 만약에 이것이 내 소명의 길이라면 대우각성하고 섬기는 걸 그렇게 섬겨서는 안 된다 그거죠. 한 영혼을 섬겨도 마음과 땀과 통곡이 있는 그런 섬김으로 살아가야 돼요. 붙들고 씨름하고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걸어가야 해요. 그렇게 평신도로 살다가 주님이 다시 한번 불러주시면 그때 신학하면 되잖아. 뭐 상관이 있냐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하나님이 한 사람이 한 시대에 소중하게 사용하시는 것은 성적순도 아니고 졸업순서도 아니에요. 그렇게 하나님 사랑하면 되잖아요. 그래서 한번 시험을 해봐요. 기도만 해도 해답이 잘 안나올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년 한 해 시험을 해봐. 그래서 한번 교사가 되든지 전도자가 되든지 무엇이 되든지 간에 한번 뛰어봐. 그래서 한번 자기가 정말 부르심이 진실한가. 진실하지 않은가 한번 시험해 봐. 그래서 한번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영혼을 섬기려고 해보세요. 정말 내가 영혼을 향한 사랑이 있는가. 정말 내 부르심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그렇게 하고 아니면 믿음으로 그만두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먹여 살리셔. 그러면 하나님이 먹여 살리십니다. 갈 길을 제공해 주십니다. 길을 열어 주신다구요. 그리고 이 길이 내 길이다 생각 되면 그냥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역 그것이 큰 것이든지 작은 것이든지. 월급을 받아야만 하나님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해. 그리고 우리교회에서 별로 할 일이 없다 생각되면 훨훨 날아가. 개척교회로 가요. 가서 봉고라도 몰고 거기에서 목사님 열심히 돕고 주일학교 한반이라도 맡아서 눈물 흘리면서 그러면서 한번 살아봐요. 그렇게 해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시대가 자기를 찍어내지 못하도록 자신의 온 사역으로 거기에 항거하면서 마음을 씻고 마음을 닦고 깊이 몸부림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해요. 주일 학교 영혼들 하나를 돌보고 교회 마당을 쓰레질을 하고 토요일 날 와서 청소를 하더라도 말이지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이 사람 하는 일을 보고 사람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보고 하나님 만나주셔요. 늘 제사장으로 살던 엘리도 못 만난 하나님을 세리가 하나님 만났잖아요. 성전에서.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보고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과 자세를 보면서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깊이 몸부림치면서 찍히지 않도록 이 시대가 여러분들을 찍어내지 않도록. 하나님 내가 특별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면 제 가는 길을 막아 주시옵소서. 내가 정말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면 내가 어떻게 주님의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런 신학생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냥 하루도 여러분 생각 안 하는 날은 없어요.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거 등록금 몇 푼 도와주는 거. 그거 가지고 안 되겠죠. 그죠? 그거 가지고 안 될 것 같아. 그거 말고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하면 되는 게 아니라 여러분도 어떻게 하면 내가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주님을 찾는 사람, 누가 나보고 소원이 뭐냐고 물으면 미국 유학, 큰 교회 사역자리 그런 거 대신에 정말 주님을 찾는 사람, 교회에서도 가끔 선택의 실수를 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그러나 교역자들을 뽑을 때 저 혼자 결정 안합니다. 사역자들을 다 불러 놓고 누가 했으면 좋겠냐? 누굽니다. 그런데 내가 예외 없이 물어보는 건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 찾는 사람이냐?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냐? 그렇다고만 대답이 나오면 60%는 접고 그다음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앞에 너무 죄송하지만 너무 그런 사람이 없어요.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찾는 것’ 정말 그런 사람이 없어요. 그게 문제에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면 뭐해. 여러분들은 장가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지? 가봐. 시집가서 남편 사랑받고 그렇게 살면 얼마나 아기자기 할까? 가봐. ‘죄 많은 이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수 없도다’ 다 지나가는 거예요. ‘잠시 머물 이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 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다 헛된 것들이에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에요. 그래서 다 헛된 것들이고 다 헛되고 헛된 것들이에요. 오직 영원한 것은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리고 눈물흘림을 며칠 당하고 행할 길을 다 갈 때까지 내게 주신 은혜, 내게 주신 지성, 그리고 내게 주신 이 영혼의 은혜를 가지고 어떻게 하든지 이 영혼을 섬기고 그래서 성화에 힘쓰고 그래서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정말 기쁨이 되는 그런 삶을 사는 것. 그것만이 의미가 있지. 젊음도 지나가고 고운 꿈도 다 시들고 다 사라져요. 육체도 쇄잔 해지고 사람의 명예와 좋은 평판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씻겨가는 거예요. 불변하는 그 무엇을 소유하고 살아야 해요.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여튼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요. 정말 그래서 일평생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로 여러분들이 정말 자라갔으면 좋겠어요. 주님의 사람들로.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아무 염려 없어요. 그 누가 뺏어 갈 수 있어요. 나의 하나님의 사람됨을 누가 뺏어 갈 수 있어요. 악마는 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헤어지게 할 수도 있고 욥처럼 나를 쳐서 건강을 앗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그 재산을 누가 뺏어 갈 수 있겠어요. 광야에 집어 던져도 그 사람을 통해 교회가 세워질 것이고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아무거나 되면 어때.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뭘 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 나는 선교에 뜻이 있습니다. 나는 목회에 뜻이 있습니다. 나는 도시, 시골 목회를 하겠습니다. 다 집어치워라. 아무거나 해라. 아무거나. 근데 중요한 건 뭐냐면 어떤 사람이 되냐. 그래서 주님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골에 가도 영광을 돌릴 것이고 유혹이 많은 도시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빛낼 것이고 선교지에 가도 그럴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은 자기의 사람됨을 능가할 수가 없어. 그래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되요. 그래서 난 여러분들이 게으르고 그냥 이렇게 시대에 흐름을 따라서 사는 거 보면 여러분들의 손에 의해 목양 받을 한 영혼들의 고통 하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든지 변화되어서 크게 쓰시든지 작게 쓰시든지 주님 마음대로 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만족을 드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일평생 세상의 환경이 나에게 만족을 안 줘도 나는 무엇을 하면서 섬기든지 주님의 마음에 만족을 드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사는 것. 그게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