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2002-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목회와 소명 2002.10.7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1
2. 목회와 순결 2002.10.14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10
3. 목회와 지성 2002.10.21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17
4. 목회와 인격 2002.10.14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28
5. 목회와 정서 2002.11.4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33
6. 목회와 영력 2002.11.4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38
7. 목회와 거룩 2002.11.4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42
8. 목회와 가정 2002.11.25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46
9. 목회와 독서 2002.12.23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50
10. 목회와 설교 2002.12.30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59
11. 목회와 지도력 2002.12.30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68
12. 목회와 기도 2003.2.2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72
1. 목회와 소명
소명이란 희랍어로 (프로스 칼레오) 프로스- 앞으로 칼레오-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있는 상태 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미션으로 부르는 것을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명은 좁은 의미에서 소명을 말합니다. 복음 사역자로서 자신의 직업이 없이 복음사역만을 위해서 부른 자들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나 안수 받지 않은 자라도 자신의 전 생애를 복음을 위해서 종사 하는 사람들을 회심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이 소명에 길에 들어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에 떠밀린 것을 소명이라고 생각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이것이 하나님이 부르는 한 방법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그것을 나는 소명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인격적으로 분명한 표징이 있어야지 상황에 떠밀려서 소명에 근거가 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옳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많은 사람이 소명을 받았다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나는 신학교에 있을 때 가르치는 것 말고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가 신학생 들을 돌려보내는 것이라 생각 했습니다.(신학교를 떠나게 하는 것)
9년 정도 교수로 있으면서 강의를 듣고 신학교를 떠나게 된 학생들이 짐작으로 200명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왜 신학교에 와서 목사가 되려고 하나고 물으니 고등학교 2학년에 부흥회 때 헌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더냐고 물으니 아무 말 하지 않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소명이 아니라고 말해줬습니다."
많은 황당한 사건들을 가지고 소명으로 생각 하고 왔었습니다. 지적인 기반이 안 된 상태에서도 은혜 받았다는 이유 하나로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오므로 나는 오늘날의 소명을 거의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대학부 과정에서는 70프로가 거짓말이고 신대원 과정에서는 40프로가 아닙니다. 소명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그 사람들이 다른 일에 종사 하면서 살면 좋겠습니다. 소명이란 것은 일을 생각 하다가 글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메여서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려고 하다 보니 복음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소명자체는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소명이 되어야 합니다.
김세윤 박사의 논문, 그 책은 구라파에서도 상당한 파문을 일으킨 책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분이 영적으로는 탁월한 분이 아닐지 모르지만 학자로서는 정확하게 바울의 소명에 영적인 특성들을 읽어 낸 분이라 생각 합니다. 그분의 논지는 바울을 단순한 사람이 아닌 복합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 영향 아래 있었고 문화 적으로는 헬레니즘 아래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사람이 낙천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많은 껍질들이 형성 되게 됩니다. 서신서는 물론이거니와 복음 사역 목회자로 선교사로서 많은 특성들이 나타나는 데 이런 것들을 다 깨고 파고들어 가보면 ‘코아’가 나오는 것입니다. 핵심이 나오는 데 그것이 다메섹 사건입니다. 예수를 만나므로 깊이 깨트려 지고 두 가지의 깨트림이 있게 됩니다. 첫째는 신학적 깨트려 짐이다 이것은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견고한 신앙이었습니다. 구약은 메시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동의 할 수 없는 것으로 성경을 보니 한계가 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깨트려 지니 그리스도가 들어오고 이제껏 까지 알고 있었던 구약에 방대한 지식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 한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 100볼트에서 220으로 스위치를 넣는 것처럼 생각해보라. 찬란한 빛이 들어 온 것입니다. 그의 회심 사건이 그것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는 이 사람은 인간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가기 싫은데 가지 않을 수 없도록 끄는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심령에 메임"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김교수는 신적인 강제력이라 설명한 것 입니다. 소명 받은 사람은 항상 두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심하게 핍박을 받을 때"그래 이제 더 이상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못 견디게 하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그리스도를 경험 한 것 입니다.목회자와 복음 사역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에 대한 비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체험(뼈저린) 신학과 모든 삶에 센터에 와야 합니다. 이것이 소명의 가장 기본 적인 요건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과격한 그리스도에 대한 회심의 체험 없이는 복음 사역자가 될 수 없겠네요."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떻게 답할 수 있냐면 신앙과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센터가 된다는 것~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중심성 이란 것은 사도 바울 적인 과격한 회심의 체험 위에 세워 지는 것입니다. 아주 과격하고 뚜렷한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저절로 십자가가 그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중심을 갖게 해주지 않을 수도 있고 과격한 체험이 없는 데도 그것이 중심 자리에 올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모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 분명하고 과격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면서도 끊임없이 그의 고난과 복음을 묵상함으로써 센터에 올수 있고 방탕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 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경험되고 그 속에서 체계적으로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내 인생과 삶에 신앙에 있어서 중심이 되실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되는 지속적인 경험 없이는 우연적인 경험적인 것으로 끝나고 물밀듯이 쓸려 나가기 쉽다. 사도 바울이 깊은 경험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이 그렇게 경험하고 그리스도예수가 자신의 센터에 올수 있었던 것은 이유는 나름대로 신학과 지적인 배경 이후에 계속 되는 성화의 은혜가 있었기에 이렇게 된 것 이지 다메섹 체험이 종자 씨가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소명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체험이 뚜렷하지 않은 것입니다 설교에 있어서 선이 분명 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잘해도 신학을 많이 한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상당히 강하다 그러나 설교할 때 는 예외다 선이 없는 것입니다. 구 자유주의 쪽의 설교도 좋고 신 정통주의 설교도 좋고 그 다음에 오순절 설교도 좋다는 것입니다.
목회 방식도 그렇게 타의 신학 적이 되가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신학 적인 견해를 양보 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십자가 중심의 신학이 경험된 신학으로 자기 안에 서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어 있으므로 잡다한 가지고 있는 신학으로 자기를 표명 할 수는 있지만 근간이 되는 뚜렷한 신학이 없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소명은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필수적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처음에는 일을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철저히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가 자신을 구원 해주셨다는 사실 앞에서 뼈저린 부채 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그 부채 의식이 모든 복음 사역에 동기가 되는 것이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에 대한 체험이 분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부르심을 체험 하고 나면 그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파도스도 우리와 체험되는 것입니다. 간략한 설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함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회심은 지난 죄에 대한 뉘우침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새롭게 소유하게 됨으로서 이미 거듭난 신자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와 연합이 강화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고 중생 한 순간에 우리의 영혼 안에는 아주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신비적인 연합입니다. 이것은 세 가지의 유추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고 교회와 머리 되신 그리스도, 남편과 아내에 대한 영적 결합입니다. 연합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신학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거듭 나는 순간에 결합이 이루어지는데 원리적으로는 다시 떼어 지지 않는 다. 만약 떼어진다면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는 것인데 절대 떼어 지지 않습니다. 결합을 풍성하게 누리면서 살 수도 있고 원리적으로는 붙어 있지만 그리스도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받지 못하는 핍절 한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화의 문제가 다시 들어오게 됩니다.
위대한 설교가 로이드 존스에 대해 토니 싸즌터가 책을 쓰는데 이 사람은 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5000편 가량 들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꼭 읽어 보기 바랍니다. 그는 그 책에서"설교자는 한마디로 말해서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아주 투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신령성 자체를 다분히 외부로부터 주입 되는 것을 많이 생각 하는 것입니다. 두 개가 같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내가 얘기하는 유니어 미스티카 쪽에 훨씬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예가 위로부터 부어지는 은사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거룩하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이 은혜와 은사의 차입니다. 유니어 미스티카 가 이루어 진 다음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므로 형성 됩니다. 이때 순결하고 정직한 삶을 살면 이 연합은 점점 더 곤고해집니다.
이론적이고 원리적인 연합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결합 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라 연합의 교리입니다. 개혁 주의 에 중요한 유산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것이 더 긴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애기하는 동행 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들은 성도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하나님과 동행 삶이라고 봅니다. 동행은 것은 오늘날은 이미 해석 되어서 재해석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히브리말로 히트 할락크의 삶인데 이 단어는 아주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 신인합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측면에서 유니어 미스티카로 본 것이고 그것이 삶으로 구현 될 때는 그분과 동행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질적으로 변화된 존재가 하나님의 신을 소유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론 적으로 적용 시키면 대표적인 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을 만나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문만 들은 상태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 할 때 오합지졸 이었을 것입니다. 아무 무기도 없이 히브리란 말 자체가 강 건넌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들이 왔는데 문을 모두 걸고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린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라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합일된 민족 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두려움이 밀려 온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려 할 때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공유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자기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그 마음을 자기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내가 교회를 설립하게 된 기초가 되었는데"목자 잃은 양 같이 고생 함이라 예수께서 무리를 보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 함이라"
창자에 이르기 까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창자가 흔들렸다는 것은 가슴이 찢어 질듯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립토- 내던지다. 스킬로- 괴롭히는 것,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던져졌고 괴롭힘을 당함 성경은 두 가지를 같이 얘기합니다. 죄인이 스스로 자기의 죄로 인해 타락하고 망가지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동태를 쓰는 것입니다.
소명 받은 사람의 중요한 표징은 영혼에 대한 불붙는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감격, 경험 , 영혼들에 대한 깊은 사랑,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닮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예수님이 이 자리에 살았더라면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되었을 그런 존재가 나도 되고 싶고 고난 받을 일을 나도 고난 받고 싶다는 소원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극대화 되느냐 안 되냐는 두 가지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소명에 대한 깊이와 그 후에 이 사람이 자신의 영혼을 어떻게 관리하면서 살았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동의가 안 되는 소명 받은 사람의 흔적을 약속이나 한 듯이 다 빼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없지는 않은데 흐릿한 것입니다. 목사도 안 됐는데 사고가 엄청 인본주의 적인 것입니다. 그 예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신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이"나는 한국에서 예수 때문에 신학을 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봤다 했다"처음에는 복음의 체험이 있었는데 들어와서 눈을 뜨고 보니 길이 엄청 많은 것입니다. 시골 교회 가서 핍박이나 받으면서 신앙생활(信仰生活)의 길을 걸어가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상당히 살만 한 곳이라 생각 하는 것입니다.
책을 만들어서 돈을 벌수도 있고 많은 사람에게 허락 된 자리는 아니지만 공부 좀 하고 와서 교수나 하고 하면 사회적으로도 대접을 받을 만큼 받고 500여명 이상 되는 교회 가서 사역하면 대접 받을 만큼 받고 이런 생각 들이 머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본래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강했으면 그런 것 때문이라도"내가 이러면 안 되지"하는 생각으로 싸울 수 있는 힘이 있는데 처음부터 그런 것들이 부족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나 세상사랑 버렸네, 주님만을 사랑하네."하는 뼈저린 고백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세상은 분토와 같고 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에 전부 다는 생각이 없는 상태에서 이것들이 들어오기 시작 한 것입니다. 실제로 많이 경험 한 것 들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세상에서 뭐가 되고 싶고 누리고 싶은 사람이 그라운드 만 바뀐 것입니다. 세상에서 교회 속으로 사역의 세계라는 것만 바뀐 것이지 나머지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 인격적인 위탁 이런 것들이 확립이 안 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남의 얘기를 하면 안 되고 동기를 생각 해 봐야 합니다."왜 여러분들을 불렀고 신학을 하고 있는지."
교수생활을 9년을 했는데 학문을 하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나는 한국 교회는 무식한 사람들이 목사가 되면서 소명을 많이 더럽혔다고 교육자들에게 얘기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보면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나서 목사가 된 사람들은 사회에 최상위 인텔리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니면 감히 되겠다고 얘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의 기본은 철학을 모두 섭렵한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얼마나 공부를 안 하는지 감동 받은 신학 서적 다섯 권을 적으라고 하니 바벨론의 변증학 그것 이었습니다. 그 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수업시간에 배운 교과서도 다섯 권 을 말하기가 버거운 그런 지적인 기반들이 없는 사람들이 목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신학을 하는 게 아니라 교수를 하면서 느낀 것이 학문에 대한 탐욕이 사람들은 얼마나 위험 한지를 잘 모른다.
그 사람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깊은 만남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부서진 경험이 없기에 욕망 자체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다시 정화 된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해서 정말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칼빈과 같은 그런 공부에 대한 소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즉 나누어 주는 누군가가 되겠다는 우월 의식 내지는 교수에게 주어질지도 모르는 사회적인 기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많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유학을 가서 고생해서 THM, PHD 마치고 웬만한 학교를 하나 거머쥐고 이곳으로 오면 이제는 누구도 그를 고쳐 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하나님 안 계신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비평주의가 득세 하는 것도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신학을 깊이 공부 하고 와서 이런 현상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는 신대원 들어간 지 2년 전에 분명한 사인을 받았습니다. 신학대학 들어가서 가르칠 기회를 주겠다는 사인을…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아는 게 없었습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보니 학문 자체에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인간을 잡아끄는 신비한 마력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학에 흥미를 많이 느끼는 사람이었는데 히브리어를 독학 했습니다 몇 년을 했는데도 뭔지 너무 어려웠다"하나님은 왜 이렇게 어려운 말로 가르쳤습니까?"나중에 알고 보니 가르치는 사람들을 잘못 만나서 상당히 어려움을 당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명감을 가지고 60번 정도 가르쳤었습니다. 가장 쉽게 가르치는 사람이 나라고 자부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아카드 제국" 에케디안을 독학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신대원 과정을 마치고 그 후에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과정을 통해서 깨달을 것은 현대의 우상이 세 개가 있는데"사이언스, 섹스, 스포츠"였습니다. 사이언스에도 어마어마하게 큰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진태 박사 같은 사람은 우가리다 전치사 연구 가지고 박사 학위 받은 분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명예가 따른다. 거기서 오는 포만감 들이 놀랍습니다. 배제명 교수님의 얘기가 10년에 한 명 정도가 히브리 성경 읽는 학생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나는 서북 팔레스타인의 비몬 과정을 놓고 텍스트까지 연구를 하고 창세기모세 오경을 6번 읽었습니다. 하도 많이 읽을 때 한글 성경을 읽으면 히브리 성경이 어디라는 것이 떠올랐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수업을 받고 나올 때 엄청난 포만감을 느꼈었습니다.
그 후에 주님을 만나면서 깊이 느낀 것은 인생이란 것이 분명히 소명이 있었다(세상사랑 다 버렸다. 모든 꿈을 다 버렸다). 느낀 것은 그리스도중심적인 체험을 접고 나면 신학교 안에도 세상이 있고 교회 안에도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꼭 같이 세상입니다. 울타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혔는지. 그리스도 때문에 정화 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 신적인 강제력이 잇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일 중요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전수 되고 나면 영혼에 대한 사랑이 생깁니다. 전도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사랑이 입증 되지 않은 것입니다. 소명의 깊이만 문제가 아니고 소명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삶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아봐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많이 실패 하는 원인이 삶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못 받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들일 때는 전도 하다가 전도 하십시오.고 전도사 만들어 주니 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제외 하고 우리 교회는 모든 교육자들이 매주 필드 전도를 나간다. 전도를 얼마나 해오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삶이 없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서지 않습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너무 극대화 되어서 너무 슬프고 아프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느낀다면 이것이 소명의 싸인 이라고 봐야 합니다. 소명이 무의식 적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인격 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체험 자체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명이란 것은 하나님의 대한 깊은 사랑이다 그것이 소명의 사인이 되는 것입니다.
잘 입증되는 것이 요한복음에 나온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소명 하셔서 예루살렘 교회 초대 담임 목사로 세우신다. 실패 하신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물으신 것이"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소명 받은 사람에게만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 적으로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소명을 받고 목회자가 되는 기초가 평신도의 기초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기초 위에 무엇인가 더 큰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안 어떤 경험이 평범한 신자로서는 살아 갈 수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소명 입니다.
네 번째는 거룩의 삶을 살고 싶은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성화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경험 모든 것들을 현재 적으로 계속 누리게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성결한 삶을 사는가와 관건이 됩니다. 거룩을 계속 추구 하는 것들. 소명을 받은 사인입니다. 사역의 길로 들어서면 기본적으로 이런 것들이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경향 자체가 자신을 전부 기울여서 주님을 더 찾고 싶고 뜻대로 살고 싶고 방향성들이 명료하게 있고 불붙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버렸고 나는 당신의 종일 수밖에 없다는 고백 없이 내가 소명 받았는데"뭘 할까"그런다면 성경에서 애기하는 소명과는 거리가 멀다.
목회자의 양심으로 반 이상은 확실하게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나는 이 과정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계속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자라면 그 밑에 많은 영혼들의 인생 자체가 완전히 망가지게 됩니다. 목양하고 돌봐야 할 사람이 소명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이 돌본다면 소명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숨길수가 없습니다. 무순을 씹으면 무 꼭대기를 썰어 먹은 매운맛이 그대로 나온다. 이것이 무슨 얘기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내면의 세계가 강력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훈련을 다 마치지 않았어도 그 속에 무 싹 같이 복음 사역자로서 살게 하는 퀼리티가 이미 내제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강의실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온 설교자는 광야의 냄새가 난다. 정말 그리스도에게 깊이 잡힌 사람은 절대 숨길 수 없습니다. 부르심 받지 않은 사람이 자기의 소명의 부제를 숨길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설교자로 부름 받은 자는 설교해야 합니다.
그를 설교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폭포수에서 떨어지는 물을 컵으로 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설교 할 것 이면 갑절의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또 다시 하나님께 설교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할 것 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 하면 오늘 날 소명 받았다는 사람 아무리 많이 양보해도 50프로는 아니라고 봅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기도 했습니다. 정말 아니라고…
강의를 들으면서 이런 의문이 생겨 날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나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소명 받은 것은 맞는 것 같은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은 평생에 설교를 어떻게 합니까?’하는 강의는 안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설교를 듣고 나니까 목회자들이 한없이 좌절을 느끼면서"내가 하는 것은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지 않았는데 이 길을 가고 있나 보다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그분이 아주 명쾌하게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당신은 아직 멀었습니다. 많이 고민해야합니다. 죽도록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 하면서 하십시오."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현실을 인정하면서 메 달리는 것입니다. 27살에 신학을 하고 대학원 과정은 30살에 했다나는 소명 체험을 작은 교회에 전도사도 한 사람 밖에 없는 곳에서 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나에게 주일 학교를 맡겨 주셨습니다.
주일 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사역을 하는데 어느 날 나보고 설교를 하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교육자를 쓸 수 있는 형편이 못 되는 교회였습니다. 청천 병력과 같은 말로 들렸습니다. 나는 죽어도 못한다고 했는데"순종하는 사람이 복 받는다고"하시면서 그냥 목사님은 가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영혼에 변화가 오기 시작 하면서 변화 받기 시작 한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목사님이 나보고"금년에는 아무 아무개 중고등부 전도사님이 너무 바빠서 여름 성경 학교를 도와 줄 여력이 없답니다."그러니깐 집사님이 휴가 내서 총대를 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직장을 휴가 내고 어쩔 수 없이 맡아서 했습니다.
"어떻게 성경 학교를 하나"여러 가지 걱정으로 직장을 다니면서 일주일을 금식을 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금요일이 되었는데 교회에서 기도 중에"하나님께서 그것 말고 너! 나한테 해결해야 할 것 있잖니. 하나님이 쓰시겠다면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그러면서 울어 버렸다. 이때 뚜렷한 사실 하나는"정말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은 없겠습니다. 어린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게 여겨졌고 일평생을 어린 영혼들을 위해서 사역을 해도 좋고 일평생을 영혼들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소원이 일었습니다."그러고는 깊이 회개 하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 (5년 정도) 오늘 날 설교 할 수 있게 된 개인 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생각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소명과 두 번째 소명이 있는데 나는 소명을 어떻게 봐야 되나 ? 여기서 느낀 것은 소명도 사람마다 경험 하게 하는 강도나 방식들이 획일 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소명을 정지 상태에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명이 다시 자신에게 불일 듯 일어나는(디모데를 보면 나온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 에게 편지 쓰면서"내게 안수 받을 때 있게 한 그것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함이라.") 그런 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한 번 이상이어도 좋고 첫 번째가 소명 받은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두 번째 부흥을 경험 하면서 소명의 콘텐츠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경험 하게 되고 전에는 나를 포기 한다는 것과 주님이 필요하다면 쓰십시오."하는 정도였는데 두 번째 경험 한 것은 자발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데비케이트 하고 거역할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에 의해서 사로잡힌 것들을 경험 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의 소명 체험이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소명에 대한 인식이 성장하는 문제와 그것이 자기에게 계속 유지 되는 문제! 무슨 얘기냐면 하나님이 소명 하신 사람이 다 소명대로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데마가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버렸잖아. 그것을 보고 이 사람이 소명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지 않나.” 사울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소명 하셨습니다. 다윗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소명 속에 살지 못하므로 불행한 결과가 온 것 입니다. 이 얘기는 하나님이 소명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10년 전에 나를 명백하게 불러 주셨기에 나는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 자체의 성화를 뒤집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사는 것처럼 소명에 대한 현재 적인 체험 속에서 사는 것 그게 중요 한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거룩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추구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선만 굵었는데 지속적인 거룩을 찾아가면서 자기의 소명의 콘텐츠들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체험이 결정 적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계속 성장 해 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전심으로 추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시련을 받는 가운데서도 성도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점점 자라 가는 것입니다.
소명에 증표라고 하는 것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굴복,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 거룩에 대한 갈망. 이런 것들은 한 번 소명이 영원이 이런 삶을 살도록 보장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성화의 영역에서 자기가 계속 죄와 더불어 싸우고 내적인 부패성과 더불어 싸우면서 자기를 관리해 가는 가운데서 계속 자기를 충만하게 채우면서 사역자로서 삶을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목회와 순결
건강에 대해서 양쪽 극단입니다. 진짜 건강이 필요 할 때 받쳐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의 영적 깊은 쇠퇴와 관련이 있습니다. 젊어서는 금시도 많이 하고 산기도도 많이 다니고 그런데 나이 들면 사우나나 다니려고 하고 왜 저러고 사나? 저건 타락입니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 한 사람입니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나이가 들면 신중해 집니다. 신중해 진다는 것은 몸 자체가 신중 하지 않을 수 만들어 준다. 경망스럽게 만들어 주면 몸 자체가 마음대로 움직이면 감당 할 수 없는 결과가 온다. 뛸 수 있다고 다 뛰어도 안 되고 일 할 수 있다고 해서 다 일하면 안 됩니다
철야를 하면 전도사 때는 일주일에 한 번은 철야 했는데 그 형편이 안 될 때 면 철야 공부를 했습니다. 전도사가 교인은 기도 하는데 전도사가 잔다는 것은 양심이 용납을 못했습니다. 공부가 밀렸을 때는 금요 철야하고 새벽 기도 할 때 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개인 적으로 기도가 필요 할 때는 꼬박 밤을 새웠다. 그래도 토요일 날 3시간 정도 자면 가쁜 했습니다. 지금은 하루를 꼬박 철야하면 후유증이 일주일이 되어도 극복이 안 됩니다. 3년 전에 체중이 너무 불어서 비관을 하고 두 달 만에 14킬로를 뺀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체력이 극복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철야 작업을 안 합니다. 밤을 새우고 나면 며칠을 해매고 다녀야 하므로 경제성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선배들의 길로 들어 선 것입니다. 언제인가 책을 쓰는데 8시간을 꼬박 앉아서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일어 설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척추 아래 하단 부분이 틀어 진 것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금도 허리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높은데 올라가고 할 때는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고생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나에게는 시간이 금이었습니다. 6시간 이상 자면 범죄라고 생각 합니다.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몰라도 극단적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으로 건강을 남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또 한쪽으로는 건강을 우상처럼 생각 하고 사는 것입니다. 몸이 성전이라고 하는데"몸 관리 하는 것이 주의 일이라고 하면서 그러면 주님을 위한 희생이란 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졸릴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쉬고 그렇게 한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스펼젼도 건강에 벌벌 떠는 사람들을 많이 나무랐습니다. 자신도 죽고 싶을 정도가 한두 번이 아닐 정도로 우울증과 무엇에 시달렸다. 성경이 제시한 건강에 대한 것이 무엇이냐? 건강을 무엇 때문에 해쳤는가? 스스로 욕심에 이끌려서 건강을 남용 했다면 잘못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살면서 일어난 일이라면
설교를 하면서 두 번을 쓰러 진적이 있습니다. 노르웨이 가수인데 카로스와 진리에 뒤를 이으면서 스테파노ㅡ 마리오란자. 바로 앞 세대입니다. 그 사람이 49세 꽃다운 나이에 죽는데 왜 죽었냐면,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노래 하다가 심장 쇼크로 넘어 지는데 의사가 안 된다고 했는데 끝까지 완주한 것이 원인이 되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런 예술혼과 비길 수 있는 것이 사역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계속 감당해야 할 때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 여름 성경 학교에서도 우리 교육자 두 사람이 쓰러졌다.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나 수련회 분위기가 고조 되었는데 만약 가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미련한 선수는 마라톤으로 달릴 때 100미터 달리는 것처럼 1킬로를 달리고 쓰러지지만 지혜로운 달리기 선수는 체력을 안배하면서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만 안 되냐면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 합니다.
‘나는 교육자들이 새벽 기도 나오지 않는 것은 용서 하지 않습니다. 내 신조는 잠자는 시간과는 상관없이 새벽기도는 간다. 어떨 때는 정말 힘들 때가 있다 몸이 허락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때 군대 시절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유혹을 느낄 때 거수경례를 하면서"충성"하고 일어난다. 일어 날 때 토 할 것 같은데 신기 한 것은 하나님이 기도 시간에 은혜를 주신다.’
문제는 누구를 위해서 건강을 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몸이 아파서 못나오는 것이 아니라 잠이 모자라서 죽지 않을 정도면 나오라고 합니다. 이를 악무는 정신이것이 충성입니다. ‘직장 다니는 아이들은 새벽에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온다. 어떨 때는 들어오지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새벽 기도 나오는 것은 이것은 노동이 아니다.’ 충성이 아니면 매 순간 주님 아니면 질 이유가 없는 짐들을 자기 자신의 안락한 삶을 살려는 것에 반하여 짊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교육자를 보면서 정신이 없는 것. 그것이 보고 싶습니다. 무순을 보면 무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씹으면 무 대가리 씹는 것과 꼭 같습니다. 아직 목사가 되지는 안았지만 지금은 신학생 일 뿐이고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이라면 다듬어 지지 않았지만 그 사람 속에 정신이 흐른다. 무순에서 무맛을 느끼는 것처럼 그런 것이 씹힌 다는 것입니다. 권위를 잡는 그런 목사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충성 심 때문에 환경에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 그것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상황에 꺾인다. 꺾이지 않으려면 엄청난 짐을 져야 합니다. 현실을 인정 하지 않으면 무거운 짐을 져야 합니다. 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생명이라고 나는 생각 합니다.사상만 청교도 들을 좋아하고 사상만 순교자들의 생애를 읽기 좋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리 만족을 하면서 어떤 신앙적인 히어로들의 삶을 보면서 자기가 감탄 하는 것이 자기의 신앙인 것처럼 생각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꺾이지 않는 이를 악물고 성경이 그려 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것이 질수도 있습니다. 전선이 밀리는 것은 별 문제도 아닙니다. 항복을 하는 것은 전쟁이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각오를 가지고 거룩한 의미에서 경쟁이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이 자기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자신의 건강을 반납하면서라도 새로 온 교육자가 며칠을 새벽 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몸이 안 좋았다는 것입니다. 안 좋으면 교육을 시작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교회를 시작 하는데 정신이 그 정도라면 미래에 어떻게 승리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나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일사 각오정신 매 순간 죽음을 무릎 쓴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눈 덮인 언덕에서 인디언들의 영혼들을 위해서 폐결핵 4기의 몸을 이끌고 기도 했습니다. 기도 하고 일어나면 눈이 뻘겋게 선혈이 물들었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다 양보 하고 나면 고난 받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주의 일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보다 힘들게 일하고 겨우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특별대우 받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 말입니다. 그런 정신들이 현격하게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만난 하나님과의 교제의 깊이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날 위한 사랑이었는데…
매 순간 그렇게 살 수는 없지만 예수정신에 지배 받으면서 (내가 안수를 늦게 받은 이유는 아직 정화 되지 않은 내 모습을 보면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제자들과 함께 안수를 받았다)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슴을 가르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순결이라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가슴에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순결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극치가 성적인 타락이고 그다음에 그 타락을 내버려 두면 우상 숭배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밀접한 관계입니다.
건강에 대해서 우상주의 적인 태도는 안 됩니다. 남용 하는 것도 안식년 얘기도 나는 반대다. 비 신학 적입니다. 쉬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깊이 동의 하지만 교수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해 정도 쉬게 하는데 그 시간을 쉬는 게 아니라 연구에 재충전을 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똑 같은 교회 직원인데 사찰들도 안식년 주고 있습니까? 운전기사는 담임 목사만 안식년 준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쉬어야 하는 것은 인정 합니다. 설교자에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특수하기에 시간 길이로만 계산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인정은 합니다. 그것이 안식년을 정당화 시킬 수 없습니다.
나는 아직 안식년을 안 했습니다. 교육자들에게는 7년 정도 되면 한 달 쉬게 해 준다. 충분히 휴가비도 드리고 간사 들 까지 나는 다 해 줄 것입니다. 누구든지 꼭 같이 나는 내가 너무 지쳤다고 생각 될 때 틈틈이 개척하고 나서 처음으로 호주에 10정도 있다가 왔다.
마음이 주님을 향하고 장시간 동안을 주님께 충성하고 자기를 쏟아 부었던 사람들 하나님과의 관계는 남아 있지만 육체를 소진한 사람들은 홀로 둘 때 일을 벗겨 내면 중심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강화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쉬게 두면 타락 하는 것입니다.
내 논리는 설교 할 때 보다 휴식 할 때 더 영역이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는 헛소리 할 수가 없다 분위기가 거룩하니 설교 할 때는 잘 모릅니다. 그 사람이 쉴 때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든 운동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때 비감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건강에 중요성을 알아서 철저히 해야겠다고 생각 하는데 뼈와 몸이 허락 하지 않은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70이 다 되어서 심폐 기능을 측정하니 20대로 나왔다 그는 매일 4킬로씩 뛰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화대 떠나기 직전에 주치의가 뛰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뛸 마음도 있고 체력도 있는데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섭리입니다.
우리 교육자들은 거의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법정 퇴근 시간은 6시지만 오죽 하면 11시 이후에 교구실에 남아 있으면 가만 안 두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대도 잘 안 지킵니다. 넘치도록 고생 합니다. 누가 체크 하고 그러지 않지만 아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혹사시킨다고 소문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보 같은 소리다.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 그렇게 살았던 그런 삶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것입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헬스클럽을 다니게 합니다. 한 달 다닌 수강 카드를 가지고 오면 헬스 비를 입금 시켜 줄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모자라고 전부 운동복 입혀서 대공원을 뛰게 하고 싶습니다. 군대처럼 그렇게.'나는 지금 많은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 족구 하고 할 때 나는 기도 하러 체플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주변에 산을 같이 걸으면서 얘기하고 게임도 하고 축구도 하고 온천도 합니다. 사역을 하면서 쌓였던 여러 가지들도 풀고 새롭게 정비해서 다음의 일을 같이 그런 것들을 목회자인 내가 순간순간 끊어 주지 아니하면 건강에 무리가 올수 있는 것입니다.
박기철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처럼 시간을 아껴 쓴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웨스트 민트에 60년도에 유학을 가셨는데 이름 모를 병에 걸렸다. 멘탈 텐션이 너무 오래 되어서 그렇게 된 것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학기 중에는 공부하고 방학 때는 돌짐을 지고 돈을 벌어 다음 학기에 쓸 생활비와 자기가 쓸 돈을 벌어놓고 생활 하셨다고 합니다. 보따리를 싸려고 마음먹고 휴게실을 내려갔더니 후배들이 탁구를 치면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자신이 처음으로 탁구를 치면서 미국 유학 가서 처음으로 박장대소 하면서 웃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부터 아프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계속 탁구를 치면서 7년쯤의 유학을 마치고 오신 것입니다. 내가 너무 아쉬운 게 맨 처음 헬스클럽을 넣었습니다. 교육자들의 의무적으로 운동을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공간이 나오지 않아서 못했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앞으로 교육자 뽑을 때 건강 진단서 꼭 넣을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너무 질려서 교육자의 조건에 신체 건강한 자 일 것! 어느 교회는 교육자 광고를 냈는데 족구를 잘 할 것 이라고 했다 합니다. 건강하게 사역 잘 하기 위해서는 자기 관리를 깔끔하게 잘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교육자들은 몸 팔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목사가 한 달을 아파서 입원하면 온 교인들이 철야하고 기도하고 그러지만 6개월만 입원해서 아프다면 다른 후임자가 언제 오나"합니다. 아주 냉혹한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잘 다스리면서 치우침이 없이 건강 때문에 불행한 결과가 오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너무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애처로울 정도로 자신의 건강을 해치면서 살아온 사람을 못 만났습니다. 칼빈이나 브레이너드나, 휘필드 같은 사람이라면 경고를 들어야겠지만…
두 번째가 순결입니다. 몸이 약하고 순결 한 것이 건강하고 불결한 것보다 훨씬 났다. 몸이 약하면 정말 불편하고 힘들다. 택하십시오. 면 후자가 훨씬 났다. 목회자가 타락하면이란 책입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동기가 10년이 넘었습니다.
미국에는 불면증 환자들이 2,50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4년 정도 복용해도 부작용이 없는 수면제를 개발을 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수면제가 미국제품입니다. 이 사람들은 밤에 텔레비전을 본다고 합니다. 베이컨이 창녀와 연루가 되어서 그들이 아끼던 크리스천들이 받은 상처는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유명한 대 주교들이 어린 아이들을 집요하게 성 추문 한 것이 다 폭로 된 것입니다.
세기가 바뀌면서 기독교에 대한 필요성은 증대 되는데 교회에 대한 필요성은 점점 감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일들이 진짜 있습니까? 하지만 쉽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면 정서적으로 병들었을 때에 의지 하는 마음이 많아집니다. 환자들은 의사에게 어린 아이 같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대 자기를 잘 도와 준 사람들을 쉽게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을 붙들고 있을 때는 문제가 안 되는데 은혜가 식게 되면 의존의 감정이 인간적이 감정으로 변합니다. 나한테 배운 사람인데 결혼을 하고 별거 상태에 있는 자매였는데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교회에서 열심히 가르침도 받았다 망가진 가정에서 자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데리고 와서 밥도 해주고 결국은 둘이 타락 한 것입니다. 신앙이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을 붙들고 하나님께로 가는데 은혜가 떨어지면 결국은 항상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 날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가 가져다주는 달콤함 보다는 몰고 올 파괴적인 힘과 비참함에 대해서 발생하지 않았어도 미리 감지하는 것이 그것이 영성의 깊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 날수 있습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목회에서 일어나는 경우에는 집요하게 계속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데 얘기 해보면 영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죄에 급습을 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목회자가 산다."9-10장을 보조 자료와 읽어 보기 바람. 그럼 이것과 같이 연결이 됩니다. 세 가지 정도로 여기에 대한 처방책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보는데 첫째는 매일 매일 경건한 삶에서 오는 기쁨이 자기를 지배 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만족이 헛된 것들을 생각하지 않도록 생각을 허락 하면 안 됩니다.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들을 물리 쳐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몸에 익숙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음란한 영화를 보는 것이 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몰고 오는 생각의 집요한 마음에 착상들이 몰고 올 결과는 엄청나게 파격 적입니다. 마이크 펠라워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목회자로서 섹스 중독에 걸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느 날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평범한 목회자였는데 어느 날 청소를 하는데 쓰레기 더미에서 플레이 보이지가 발견이 된 것 입니다. 태워 버렸으면 문제가 안 되었을 텐데 끄집어내어서 본 것 입니다. 그것을 본 것이 그 장면이 계속 머리에 떠오른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사지 삽을 드나들게 되었고 것 잡을 수 없는 섹스 에 빠지게 되었는데 너무 괴로워서 결국은 부인에게 고백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부인에게 감동을 주셔서 남편을 고치는 도구로 사용 하신 것입니다. 그 후에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 같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굉장히 저명한 사람이었는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추락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 회복을 하고"당신의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십시오."무너진 사람들의 새로운 논리들을 보게 해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미국에는 양심선언을 하고 하나님이 나를 만져 주셔서 회복 되었다고 하면 다시 활동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도 일어 날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깊음이 지혜로움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경건 생활이 있어야 하고 거룩하고 신령한 기쁨이 있으면 유혹을 훨씬 덜 받습니다. 새벽 시간에 드리는 기도와 하나님 앞에 공급 받는 말씀의 은혜 속에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충분 하지 않다면 밤에도 기도 하고 그래도 유혹이 많다고 하면 점심때도 하십시오. 유대인의 전통적인 기도 방식입니다. 상당히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경건의 실천"이라고 하는 루이스 벨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인데 영적인 거상들에게는 아예 필독서였습니다. 17세기 때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이 책 속에서 하는 말은 하루에 세 번 기도 하십시오.는 것이었습니다. 한 장씩 성경을 읽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경건의 깊음 속에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결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결혼하기 전에 성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 생활에 있어서 성의 위치와 만족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중요성에 대해서 클리닉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부부 사이에 어떤 결합.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이 필요합니다. 나는 형제, 자매가 결혼을 하고 사역을 시작 하면 자매가 무엇을 하고 있었든지 다 끊어 내고 그 남편이 사역하는 부서로 가게 합니다. 정 할 일이 없으면 옆에서 새 신자 안내라도 하시오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사모 구역이 따로 있습니다. 모이면서 나누는 기도 제목은 남편의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남편의 사역을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것이 인격적인 결합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라성 같은 영적인 인물들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의외로 가정에서 힘들게 고난을 받아야 했던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존 웨슬레입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던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육자들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두 달에 한 번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하루 정도 는 부인과 함께 하루 쉬고 그 다음날 오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가장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 게 영화구경입니다.
세 번째는 적당한 운동이나 취미 생활을 통해서 정서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발산 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도 조심해야 할 것은 지나치게 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취미는 가지는 것이 좋은데 빠지면 안 됩니다. 정서적으로도 발산 하는 통로를 같은 데 중요합니다. 본인들도 행복하고 하나님도 행복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육자들이 모이면 관심이 항상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께 대한 것들이 유지 되는 가운데 노패물의 배출구로서 그런 것들을 마련해야 합니다. 유혹 받을 가능성들을 자꾸 떨쳐 내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의 처신이 중요합니다. 항상 자신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긴장하면서 사는 이외는 방법이 없습니다. 좋은 부부 관계들을 유지하면서 웬만하면 부인들과 같이 움직이게 합니다. 두 번의 수련회 가운데서 한 번은 같이 갑니다. 한 시대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에게는 한 순간에 나타난 결정 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단호함 동일한 결단도 최고의 효과를 거두는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갈 길을 인도 하는 것 도 그렇다. 그때는 단호하게 칠 수 있는 것을 지도자들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투명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교육자들은 투명함이 몸에 베이게 해야 합니다.핵심적인 가치가 토대가 되어 있는 가운데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결혼 한 사람들이나 결혼 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습격을(유혹.) 받을 수 있다고 생각 하고 살아야 합니다.
3. 목회와 지성
우리는 목회자가 된다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뭘 하는 거냐면, 나는 사실 목회자라는 단어가 과연 우리를 설명하게에 충분한 단어입니까?
나는 그런 의문이 가거든 지극히 일부 밖에는 대변해 주지 못하는 단어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 우리는 흔히 목회를 한다고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된다고 그러면 목회자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그려 낼 때에 목회 그러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설교하고 성례전을 직접하고 심방하고 상담해 주고 병든 자를 심방하고 곤고하고 어려운자를 위로해주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이거는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목사의 그림이 아닙니다. 이거는 훨씬 후기에 내려와서 뭔가 목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이 많이 혼탁하고 흐려지는 가운데 생겨난 목회자에 대한 개념들입니다. 그럼 예전에는 어떻게 생각했냐? 그러면 예전에는 머 한 두 세기 2~3세기만 올라간다고 해도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intelligencer를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을 해야 되잖아. 신학을 한다는 것은 철학을 마친 사람이 신학을 한다고 보는 견해였습니다.
그러니까 intelligencer가 아니면 사실은 그런 신학을 공부하고 그리고 성직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유럽에서는 철저합니다. 그러니까 그 중에서 학문적인 토양을 탄탄히 마치기 때문에 사이비로 엉뚱하게 지성이 되는 목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또 있지도 않았고 머 그랬다는 말이지 그러다가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19세기말에 캔터키에서 크게 말하자면 부흥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그거 하나가 역사적인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자면 그렇게 커다란 물 가운데 19세기 말쯤 와서 어떤 현상들이 있냐하면, 부흥적인 극단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이 직접 세우시면 그딴 거 필요 없어도 소명 받고 목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파격적인 견해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 뿌리를 캐들어 가면 18세기 까지 나오거든요. 그래서 휫필드가 1차 대 각성때 부흥을 경험 하면서 은혜 받은 많은 교인들이 소위 말하는 거리의 선교자로 등장을 합니다. 근데 그 일이 계속 되다보니까 자기가 목회자인양 하는 풍조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진짜로 신학적인 훈련이 안된 사람들이 전도를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이제 본격적인 설교자로 등단하는 것입니다. 이러는 과정을 거치면서 반 지식적인 지식이 필요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 안에 있는 내적 생명을 질식 시킨다. 그런 견해들이 부흥 운동을 타고 확산이 되는 것입니다. 근데 원이 없는 역사는 없잖아요. 그것이 결국은 역사적으로 보면 소위 예기하는 종교 개혁이 있고 종교 개혁 후기에, 그것을 역사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는데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가 소위 얘기하는 정통주의라고 하는 것이 스콜라주의시기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니까 치밀한 신학적인 논증을 통하여서 치밀한 신학의 개신교 신학에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신학을 세우는 방식이 자기들이 비판하고 뛰쳐나온 중세의 스콜라 방식으로 해오는 것입니다. 이거를 근데 내용은 다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어쨌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신학이 굉장히 사변적으로 흘러가지만 그 사변적으로 흘러나가는 과정에 기독교의 영적인 유산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지적인 유산들이 그런 일이 일어나다가 18세기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머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계몽주의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계몽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제 계몽주의 사상들이 득세를 하면서 이제 그 후에 임마누엘 칸트나 그런 사람들이 나오면서 이 기독교의 참된 복음을 도덕으로 대치하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계몽주의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은 인간에 대한 성경적인 비관적인 견해를 청산하는 거거든 상당히 낙관적으로 보고 그리고 그 인간들이 무엇인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식이 되는가 하면,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초자연적인 것을 다 부정하게 되다 보니까 그 마지막에 남는 것이라고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계시 이런 것들은 소멸되어 버리니까 그러고 나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기독교가 그런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유주의 넘어가잖아. 구 자유주의로 넘어가게 되잖아. 그러면서 자유주의 물결이 막 계몽주의는 자유주의에 의하면 장난 이었다 이것입니다. 이제 계몽주의는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드러내는데 자유주의는 기독교를 부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얘기인지는 모르지만 자유주의가 한참 득세 할 때 유럽 전체의 대륙에서 평균 하루에 600개씩 교회가 문을 닫았다고 그러더라고 근데 머 그냥 쓸고 들어온 것입니다. 밀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자유주의가 밀려온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반발이 나오는 것이 소위 얘기하는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신정통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거 자유주의가 번져 갈 때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다 격입니다. 그런 낙관적인 견해가 쥐뿔이나 해준 거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우리들이 얘기하는 정통주의와는 조금 다른 신 정통주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근데 이전에 왜 미국에서 그런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지적인 자질을 갖춘 사람들만이 목사가 될 수 있냐. 하는 것을 청산 하게 되었냐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이미 그 물결들이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의 물결들이 이미 미국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무엇이냐면, 이 미국 내에서 나름대로 정통적인 교리를 지지하면서 그 끝까지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교회와 교단들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영적 생명이 너무 쇠약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이 사람들이 질식하듯이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런 것들이 진리이지만 무엇인가 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가 우리가 너무 지식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고 교리와 신학의 체계에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깨트려 버리고나면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적 직관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의 전달. 이런 황당한 주장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도 역사적으로 보면 경건주의 후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미국에서는 그런 이후부터 그것들이 부인하기 어려운 무시할 수 없는 강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그런 생각을 가진 신학의 조류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게 20세기에 무엇과 만나게 되냐면, 오순절아고 딱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아무런 생각들이 선교사들이란 사람들을 통해서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안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넘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목사 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자신들이 생각은 영적인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너무 한쪽에 치우쳐서 잘못 생각했기 때문에 결국은 지금 오늘 오늘날 볼 수 있는 반 지식적인 몰 지식적인 그런 목회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더 큰 요인이 되었냐면, 치열하게 좁은 입시 경쟁이 아주 비 정상적인 그 목회자들을 양성해 낸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들은 다 대학을 보냈어야 됩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보내주고 졸업을 하기 힘들게 그렇게 했어야 됐는데 이 동양 사회 자체가 인정에 얽어 맨 사회이기 때문에 일단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실력으로 정면으로 승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력보다는 교수 사회에서 교수를 뽑을 때 아직도 상당히 많은 대학들은 그 사람이 들어오면 자신들 말을 잘 들을 것이냐. 선배 대우를 해줄 것이냐. 그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작용을 합니다. 그니까 그런 분위기아고 맞물리면서 그런 현상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무인가 신학교들도 상당히 많이 문제가 되었고 그리고 목회의 현장 그 자체가 원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영적이고 깊이 있는 사람들을 요구했으면 좋은데 50년대 지나면서 60년대 70년대 오면서 이제 근대화에 맞물려서 성장과 번영 이런 것들이 최상의 가치로 떠오른 것입니다. 그렇게 최상의 가치로 떠오르면서 목회도 하나의 순수한 경영적인 측면에서 전략적인 성공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목표가 되고 그런 경영의 성장의 산술적인 수체에 의해서 목회의 성공과 실패가 일어난 물량주의적인 실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결국은 얼마나 깊이 진실 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냐는 꼭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러나 대중적으로 지지를 받고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수용되기 위해서는 그런 정도를 가지고는 안 된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무엇이 필요로 하는데 그거는 교회를 경영해 가는 능력이나 이런 것들로 많은 평가가 되게 되어있다 이 것입니다.근데 사실 어떻게 보면 학자이면서 공부를 많이 하면서 그런 조직 같은 것도 탁월하게 경영해 가면서, 이런 사람들이 흔해요? 대부분 그런 쪽으로 머리 돌아가는 사람들은 공부에 전념이 안 되고 공부에 전념한 사람들은 반쯤 폭탄 맞은 사람같이 무언가 그게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거의 수재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 포항공대 교수도 있고 그랬는데 교수들도 그러는데 머 사람이 좀 모자라고 항상 그래 그래가지고 우리교회 어떤 자매가 교회를 짓고 파도치는 격랑을 넘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점심을 먹으면서 “목사님 저는요 공부많이하고 똑똑한 사람 목사님 처음 봤어요. 우리 남편 참 걱정됩니다. 공부 많이 했거든 근데 자기가 볼 때는 생각하면 모른다. 이것입니다.
나는 해당이 없지 공부도 많이 안하고 얼마나 안했냐면 세상 적으로 볼 때 그 사람들이 똑똑하게 보였겠습니까? 공부하는 학자에게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일반이거든 근데 선교적인 상황은 구라파이 교회처럼 교회 가서 수백 명 서 있는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성장에 큰 부담을 갖는다든지 선교적인 부담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진리대로 설교하고 그저 나이가 들면 은퇴하고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아. 이건 맨 바닥에 빚을 얻어다 개척을 해서 시작을 했는데 교인이 안 모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재산이든 몸이라도 팔아가지고 돈을 대야 됩니다. 빚 얻어서 머하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이제 성직의 지적 부실화를 촉구했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적인 상황은 우리가 인정 한다고 그러더라도 그거는 상황은 상황이고 우리는 우리대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현실이래도 그거를 극복해야 되거든 근데 사실은 처음 나온 얘기지만 목회자라고 하는 말 자체가 너무 narrow한 것이고 그냥 목회를 하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사회에서 일어나는 철학 현상과 역사 현상 문화 현상들을 기독교적인 비유를 통해서 정확히 판단해서 그래서 해석된 사상을 주도해 나가는 역할을 목회자들은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시대에 일어난 문화 현상들을 정확하게 해석해 낸다 하는 것은 성경에 입각한 정확한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적인 비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문화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건 내 소관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느냐하면 그건 목사로써 자기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중요한 임무를 기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도들이 어디에 가서 배우겠습니까?
어디에 가서 그러니까 학문의 깊이와 이런 것들은 차이가 있겠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신학과 모든 성경의 지식과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정확히 분별해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사상가가 되어야 되는데 사상가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머리에 든 게 많을 때, 사상가가 되는 거지 물론 머리에 잡다한 지식이 많을 때 사상가가 하나도 없을 수 있어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상가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사상가가 나오는 거지 무학자에게서는 사상가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많은 양의 학문적인 정보들이 일단은 그 사람에게 섭렵이 되어야지만 그것들을 가지고 신학적인 비유를 가지고 늘 세워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가지고 집는 것은 아닌데 성경과 복음으로 그 비유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그런 지적인 토양들이 갖추어져 있을 때 비로소 사상으로 한 얼개를 가지고 체계화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체계화 속에서 이젠. 교회와 역사와 인간 자신과 문화와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고까지 되는 것입니다.
근데 엇 그제 우리한 번 “버너드램”가지고 공부한다고 그래서 다시 한 번 봤더니 버너드램은 한술 더 떠서 당대에 유행하고 있는 철학 현상들을 분석해서 파악하고 비평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것입니다. 그렇지. 지금 나는 솔직히 얘기해서 20세기 말기에 80년대 이후에 어떤 철학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이 탐구하고 있는 철학적인 논제들이 먼지 몰라. 그거 읽을 시간들이 없어 솔직히 얘기해서 가끔이야 보지. 제 작년이가 조지 쏘칼의 지적 사기라고 책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조지쏘칼이란 사람이 지적 사기라는 책을 썼는데 그게 유럽에서 유럽의 지성 사회를 발깍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었냐 하면, 이제 그 김용옥씨가 소위 얘기하는 넘나듦을 잘하잖아. 그 사람은 내가 볼 때는 천재입니다. 확실히 그 좋은 대학을 못가도 천재가 나오는가봅니다. 머 자기말로 그러더라고 자기가 생물학과를 들어갔다고 그러나! 거기는 걸어 들어가는 거였습니다. “나는 한국 불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거 690page짜리인데 하룻밤에 다 읽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어가지고 장도 없고 절도 없습니다. 그냥 통제로 19일 만에 다 썼는데 내가 그 사람도 그렇게 보는데 조지 쏘칼도 그렇습니다. 넘나들기야. 그걸 얘기하면서 머라고 그러면 논문이 먼지는 모르는데 아주 세속적인 논문을 발표를 한 것입니다.
막 최고의 찬사가 퍼져 나오는 것입니다. 철학 논문인데 굉장한 논문이라고 근데 한참 있다가 다시 발표를 했는데 “내가 말한 거 전부다 사기였다” 말도 안되는 걸 써서 낸 것입니다. 근데 유럽 지성인 비평하는 것입니다. 이거 멀 말하냐면 한 사람 비평하는데 쥐뿔이라도 알고서 하느냐. 그 얘기야. 어떤 사람은 철학을 하는데 (E=MC제곱)으로 새로운 철학을 세운 것입니다. 이게 상대성 원리 아닙니다. mc^ 그걸 가지고 이제 물리학에다가 철학을 결합시키고 그 철학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 꼬아놓은 것입니다. 현학적으로 그러고 이제 사람들이 볼 때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면 논제를 볼 수 없다는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철학 밖에 못했으니까 나의 너의 비유가 너무 narrow하기 때문에 넘나드는 것은 네가 못 보는구나. 그래서 할 수 없이 긍정적인 면을 찾아가지고 아 이거 상당히 괜찮다. 아 이 사람 상당히 넓은 안목을 가지고 있구나, 이 사람이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사가 막 퍼져 나오는 것입니다. 근데 다시 쓰면서 “내 논문 다 개소리였습니다. 말도 안되는 건데 내가 너희들 시험해 보라고 발표했다” 파문을 일으킨 것입니다. 근데 그 어떻게 분석을 하냐고 참 답답한 것입니다.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심지어는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하리수를 어떻게 생각하냐’ 나는 하리 수가 누구인지 몰랐어. 하리수가 누구냐? 노란머리 뒤에 나오는 그 여자. 그 여자 얘기를 얘를 할까? 여자인지 몰랐어.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돌겠는 것입니다. 성경과 신학을 연구해도 시간이 없는데 그것들을 답변을 해줘야 되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연구를 한 것입니다. 트랜스젠더가 머고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 그리고 법적으로 트랜스젠더가 인정받으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합니까? 나름대로 연구를 한 것입니다. 근데 그거를 잘 파악하고 나면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분명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궁금하면 옛날 질문 찾아보면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답한 게 나온다고 처음에 인터넷하고 얼마 안되었을 때는 원고지 80~100매짜리 답장을 썼다고 나도 미쳤지. 그래가지고 전도사 한 사람은 말이지 우리가 예배의 세미나를 했는데 그거 지금도 거기에 있어 논쟁에. 내가 나주에 책으로, 예배 세미나를 했는데 많이 모여서 온 사람도 있을 걸 총신대에서도 많이 오고 근데 이 친구가 이제 답장을 쓴 것입니다. 인터넷에다 올린 것입니다. 내가 볼 때는 성품이나 모든 면에서 예의 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막 거의 야·자~ 트는 식으로 너만 잘났냐? 이런 식으로 쓴 것입니다.
그리고 머 예배가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냐. 그리고 성경을 뭘 설교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고 그러는데 그러면 너희 교회 교인들은 IQ 300이 되냐? 내가 확 그어버리려다가 그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그리고 마지막에 무엇이었냐 하면 ‘할 말 있으면 편지해라.’ 이게 소위 얘기하는 신학교 다니는 전도사가 얘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4시간 매달려가지고 썼어. 80매 정도를 썼어. 그래서 편지를 보냈어. 일주일 뒤에 답장이 왔는데 참회하는 답장이 왔어. 머라고 그러냐면“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너무 무지했고” 그러니까 내가 그 주제를 놓고 신학적으로 하나하나 논박해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손을 들면서 “자기가 너무 몰랐다. 잘못했고 그리고 이렇게 답장을 쓰시는 목사님에 자기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잘못했다”고 편지가 왔다고 근데 그 그런 거 하기도 힘이 든데 지적인 할복이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젊은이들이 벼래 별 그걸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줄 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안주면 어떻게 되는가하면 교회와 설교에서 해답을 안 찾고 딴 데에 가서 찾는데 건강한 답을 찾으면 괜찮은데 건강하지 않는 답을 찾습니다.
나는 실제로 기독교 잡지라는 데서 말이지. 내가 하도 귀가 막혀. 교회에서 해결이 안되니까 잡지에다 상담을 했는데 자기 사귀고 있는 불신장애래요. 그런데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 그 상담에 답을 했는데 ‘머 그렇게 복잡하게 신경을 씁니까? 그냥 주님 주신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받지. 주님이 그렇게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자매의 아픔을 다 헤아릴 거라 이것입니다. 결혼하십시오. 이 것입니다. 이런 엉뚱한 게 어디에 있냐 이 것입니다. 교회에서 답을 안주니까 엉뚱한데서 답을 구해가지고 그렇기 위해서 그것들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지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6개월에 한 번 씩 책꽂이 붙들고 운다고 왜냐하면 치열하게 살았어. 나도 오죽했으면 학부 4년하고 신대원 3년하고 THM도 마찬가지이고 내가 다시 태어나도 그 이상으로 살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살았어. 그거는 그거고 아무리 자기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면 무엇해.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것은 없는 건데 그래서 내가 지금 깨달은 게 무엇입니까 하면 19~26살까지 그때 열심히 돈 벌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야 됩니다. 그리고 신명을 다 바쳐서 지적인 토양들을 쌓으세요.
그러니까 특히 하느라고 노력은 하는데 우선 역사에 대해서 거의 정 통해야 됩니다. 특히 영국의 역사나 구라파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꾀고 있어야 됩니다. 그 역사를 타고 기독교가 얽히면서 왔기 때문에 “찰스헤드윈다반”이라는 사람의 책을 세권 “history of speaking"이라는 고전적인 책을 번역했는데 책이 나온 지 지금도 100년이 되었는데 남가주 대학에서 설교학 교제로 쓰고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게 권위 있는 책인데 그 책을 번역을 하면서 한없이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냐 하면 이 사람은 설교의 역사를 연구하고 저술해 나가는 사람인데 세계의 정치 · 경제 · 역사 · 문화 · 음악 · 미술 · 조각의 역사까지 모두 꿰뚫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식의 장엄한 흐름 속에다가 자가 전공을 휘감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scale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 공부해가지고 골목에서 작대기 들고 싸움하는 거면, 로마의 전쟁을 장면들을 spectacle하게 쫙 펼쳐가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면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열정이 있어도 기본적인 지적 토양이 안 됩니다. 근데 이젠 늦었지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겠습니까? 유학을 간다고 하더라도 학문에 대한 위치에 대해서 알아야지만 쉽게 얘기하면 신학교 교수가 되고 1년 정도 지나고 내가 비록 THM거의 졸업할 때쯤 내가 신학이라는 것이 무슨 구도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고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목회와 함께 갈 수 있습니까. 하는 막연한 구도를 사실을 신대원을 졸업하고 2~3년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간다고 그래도 그렇게 대단하거 아닙니다. 내가 유학을 갈려고 한 번 그랬고 그때 하나님이 막으셨고 두 번은 갈 기회가 다 주어졌는데 내가 스스로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는 갈 상황이 명백히 주어졌는데 유학을 가서 내각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면 그런 지성을 현저하게 부족한 것입니다. 근데 지금은 어떤 상황이야. 스케줄 보면 알지만 이러고 살아. 이러고 사는데도 내 노트북 보면 알지만 30군데 설교 해달라고 오면 29군데 못 간다고 그러고 1군데 간다고 그러고 사는데도 이렇게 살아. 머가 남겠냐고 그래도 요즘에는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공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스터디 모임 만들어서 공부도 하고 그렇게 해 이미 읽은 책도 정리를 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해가지고 공부를 해 나가는데 황소걸음이지.
결국은 마지막에 보면 아침에도 얘기 했지만 죠앨 비키나 죤 파이퍼 같은 사람들의 글을 이렇게 보면서 결국은 이런 글을 못 쓰고 죽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비감하고 처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거는 자기가 노력을 해도 못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적은 것은 자기가 노력을 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이 떨어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가항력적인 것인데 지적인 것이 떨어지는 것은 공부안하고 탱탱 거리고 놀아서 그런 거 아닙니다. 머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는데 잠 줄이면 되잖아. 다 시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하고 싶은 것은 다해. 가고 싶은데 다 가고 완벽하게 다 가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품으면 가고말고 시간 내보면 알아. 우리는 그렇게 살아, 안된다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무엇이냐면 책들을 독서에서 예기하겠지만, 이 지성적인 예산들을 공부하는데 우리들이 예기하는데 써먹을 것들만 빨리 공부하기 위해서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근데 그 조나단 에드워드가 자기의 설교 속에서 그 예기를 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사변적인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가르치잖아. 근데 그 사람의 강연 속에는 머가 나오냐면 자기 교인들에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노스헴스텀을 떠나면서 하는 얘기가 제발 실제적인 것만 배우지 말고 사변적인 것들을 습득을 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되십시오. 사변적인 것을 공부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사고 자체가 충동적이고 단선적이야. 그래서 이단이 재미를 톡톡히 보는 데가 여기라고 그러니까 무언가 가슴에 뜨끔 와 닫기만 하면 다 버리는 것입니다. 신학이고 나발이고 다 버리고 거기에 다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라도 지성이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과도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방하고 머하고 설교준비까지 하고 나면 정말 시간이 존재를 안하는 것입니다. 존재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설교준비 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교수님이 한분 계시는데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머 히브리어 헬라어야 박식하시지요. 근데 그분이 한 기도와 영성에 많이 떠올라요. 그분이 머라고 그러면 독학을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여러분 들어보셨어요. 이순원 목사님이라고 헬라어. 지금이나마 헬라어 이렇게 하지만 그 당시에는 헬라어 히브리어 그렇게 하시는 분이 없었어요. 근데 그분이 완전히 독학파라고 그분이 외국에 안가고 혼자서 판 것입니다. 근데 그분이 신학교 선생을 하면서 한 300여명 모이는 교회로 간 것입니다. 근데 신학교 업무도 엄청나고 설교 준비도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10일인가를 금식 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하면 나는 도저히 이 몸으로 24시간을 쪼개도 죽도록 이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데 이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게는 꼭 필요한 게 있습니다. 제게는 큰 교회 머 높은 명예 그런 것도 필요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석한 시야를 열어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오해는 하지마! 이거에 대해서) 설교 준비 시간을 줄이면서도 양질을 설교를 할 수 있도록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달라고 사실 그런 기도 제목을 가직 10일 씩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 없어? 거의 없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놀랍게 응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에 의하면 자기는 설교를 할 때 한참만 펼치고 보면 쫙 열려. 확실한 거 하나는 그분이 들고 올라와가지고 쭉~ 일고 설교 한다는 것이 원고 이만큼 들고 온 교수들보다 설교 훨씬 더 잘하셔 김희보 목사님도 그런 분이셨거든 항상 설교 할 때 이렇게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분이야. 이렇게 펼쳐놓고 설교하러 올라오기 전에 교무과 앞에 창틀에서 이렇게 성경을 읽고 올라오신다고 원고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그런 설교를 하신다고 그러니까 그런 은사라도 있으면 어떻게 시간은 save하겠는데 이거는 누가 그러더라고 설교 부담스러워서 목회를 못하겠다고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써 먹는데 40분이면 다 된다고 그런데 실제로 시간이 안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한도 없고 끝도 없고 교회의 경영적인 일까지 자기가 관여해서 챙기지 않으면 교회가 꼴이 아닙니다. 자기가 체질을 놓아야 됩니다.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독서할 시간이 안나는 것입니다. 그니까 결국은 이제 어떻게 생각하냐면 어떻게 가는 길인지 알았으니까 일단 나는 가다가 쓰러지고 어떻게 길을 가는지나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자료나 많이 모아 놓았다가 고학들에게 물려주고 내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나는 그렇게 위대한 저술들은 못 남기지만 설교라도 남겨놓고 그걸 사다리 삼아서 내 어깨를 딛고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가 책을 쓰면서도 항상 나 자신을 위해서 쉽게 읽히는 책을 한권정도 쓰고 어렵게 읽히는 책을 한 두 권정도 쓰고 섞어서 습니다. 이번에는 두 권정도 나오는데 새벽기도하고 마음지킴이 마음 지킴이의 교리는 아직 멀었습니다. 다 썼는데 각주를 만지고 있는데 머릿속에 스쳐가는 자료들을 다 신학적으로 논증을 해서 달아놔서 내가 쓴 것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다시 학문적으로 내 이야기를 교두보로 해서 건너 뛸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슬픈 것입니다. 그래도 시간이 있는데 방학이 있습니다. 목회는 방학이 없습니다. 나는 목회도 방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방학. 방학이 있으면 난 할 만하겠습니까? 내가 지금 8년 ~9년 다 되는데 2주일도 못 쉬어 봤습니다. 안됩니다. 집에서 쉬고 가면 교회가 도망가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면 집에다 얘들 놓고 놀러 가면 설마 얘들 죽겠습니까? 근데 부모가 그럴 수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틈틈이 그런데다가 더 큰 문제는 무엇이었냐 하면 성경을 원어로 읽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거의 완벽하게 읽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거의 완벽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근데 나는 성경을 설교하면 설교 할수록 안됩니다. 그렇게 말을 해야됩니다. 아주 정직하게 말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설교가 안되는 것은 아닌데 결정적으로 헛방이 나오거나. 말도 안되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어 번역 대 여섯 개 가지고 놓고 꼼꼼히 따지고 , 요즘은 영어 정도만 할 줄 알면 툴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요즘 한글도 번역되어 나오는데 근데 툴(tool)을 가지고는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히브리어 헬라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이렇게 설교할 때 딱 펼쳐놓고 그 토라를 읽어 내려 갈 정도로 사회자가 읽으면 같이 읽으면서 은혜 받을 정도만 되면 좋겠지만 그 정도가 안되니까 그 정도가 안되더라도 우선 번역본을 대조해 놓고 무엇이 문제 인가 만을 찾아 낼 정도가 되어야 됩니다. 근데 그렇게 하려면 "question criticism"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번역하기 전에 어느 본문을 택할 것이냐가 선택해야할 주제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게 text가 나오면 이 text 밑에 아파락 투수가 나오거든 이게 석사 학위의 논문을 이걸로 썼다고 근데 아파락 투수가 나오는데 이 아파락 투수는 무엇입니까 하면 여기에 있는 것 가지고는 해석이 안되는 것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무엇입니까 하면 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됬고 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됐다는 수많은 논쟁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원본의 어떤 것일 거라는 택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안 도와죠. 그건 자기가 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그 다음에 번역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고 이제 여기에 소스들을 접근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들을 선택한 것들을 결국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데 하다가 보면 지난번에 예기했듯이 단어 40%가 사전을 만들었는데 이 사전이 다 여기에서 빼가지고 사전을 만든 것입니다. 그데 이 사전을 보면 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본문의 의미가 어떤 객관성을 못 갖는 거지 이게 문제지. 그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으니까 끝이 없는 것입니다. 등등은 공부하고 나면 그까짓 것 공부해가지고는 알 수 없다 그래서 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거 공부해 나가다 보면, 그걸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게 필수다. 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없는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들이 그걸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목회 사역이 요구하는 최소한은 갖추어야 되지 않나. 피눈물 나게 공부해야 됩니다. 히브리어 희랍어를 공부를 해야 됩니다. 희랍어를 많이 못한 게 한이 되는데 공부를 해야 됩니다. 거의 읽을 수 있을 정도 까지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근데 이것도 신학교 다닐 때 공부를 했으니까 했지, 지금 시작하고 그러면 신학 책 읽는 것보다 더 불가능 합니다. 지금 언제 동사표를 외우고 그러고 있겠느냐고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들이 히브리어코스, 헬라어코스 만들어 놓아도 하도 답답해서 들어가지마는 결국은 그걸 끝까지 하는 사람이 극소수지. 거의 없어요. 그러니까 공부하면서 매일 눈물 흘리면서 나는 신학책 읽고 싶은데 이거 하면 신학책 읽어야 되는데 이거 하면 성경 원어 공부해야 되는데 결국은 거기에서 느낀 게 무엇이었냐 하면 ’나는 참 머리가 없습니다. ‘이게 뛰어나가지고 어떤 사람은 1주일 만에 히브리어 땠다는 사람이 있더라고 그런 머리는 없으니까 그냥 꾸준히 소 잡아먹는 귀신처럼 말이지 그냥 나 죽었소 하면서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근데 이게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데 거기에다가 성실함까지 없다고 하면 로이드 존슨 목사님 표현에 의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근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면 주석도 말이지요, 좋은 주석은 무엇이었냐 하면 히브리어 헬라어 셉트아진트(70인역) 심지어 라틴어 그 벌게이트 성경의 이야기가 원어로 새까맣게 뒤섞여서 나오는 주석이 좋은 주석입니다. 깊이가 있다고 파고들어가니까 근데 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답답한 사람들은 히브리어 모음도 안찍었습니다. 자음 다 통하거니 하고 그냥 찍찍찍~~ 그어놓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모음을 다 찍어도 사전을 찾습니까? 하는데 다 생략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심령이 상하고 너무 아프지 교회에서도 지성인들과 같이 이야기 하다보면, 내가 이 분야에 대해서 내가 정말 몰라도 되나? 목사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야 되잖아. 행정학이든지 교육학이든지 문화라든지 미술이든지 음악이든지 어느 정도는 알아야 되지. 교양정도 수준은 알아야 되잖아. 근데 아는 건 알고 모르는 건 완전히 담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너무 기가 막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젠 주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냥 대친 듯이 시간을 조는걸 아껴가면서 그러면서 공부하고 배워 나가는 수밖에 없어요.
근데 이제 내 얘기는 무엇이었냐 하면 목회하면서 신학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래도 시간이 나면 머를 읽냐? 신간 서적 경건 서적 읽으면서 잘나가는 목회자의 간증집이나 아니면 뜨고 있는 설교자의 설교집을 읽어서 그래서 그거나 세미나 같은 자료나 읽어서 어떻게 그거 정리해서 교회에 학교나 하나 만들까 무슨 학교 무슨 학교 많잖아. 그런 생각이나 하게 되지. 깊이 있는 신학 책들은 절대 못 읽어. 그래서 나는 목회자들끼리 모여서 공부를 해 왔거든 그때 난 항상 얘기하는 것입니다. 가벼운 책은 난 싫다. 왜냐면 굉장히 무거운 책을 읽자 신학적인 내용이 무거운 책을 읽자 왜냐하면 그거 혼자서 읽기 잘 안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족쇄를 채워서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병행해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핵심 속에는 항상 머가 있냐면 성경이 있고 성경을 bound로 해서 신학이 있고 신학의 인접학문이 있고 신학의 인접학문에 교양이 있고 이렇게 퍼져나가 그러니까 자기 학문적인 아는 만큼 그 휘두르는 동심원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능력이 없으면 성경 가지고 빙빙 돌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경을 팽개치고 딴 데에 가는 것 보다는 낮다 이 것입니다. 심리학이나 자기 좋은 어떤 학문으로 빠지는 것보다 낮다 이 것입니다. 그니까 항상 이거 놓고 그리면서 영양이 되면 그리다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머 해박하게 풀어 나가는 거고 능력이 안 되면 이만큼 돌다가 끝나는 거고 근데 그렇게 되서는 시야 자체를 넓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면 스터디 그룹을 만드세요. 그리고 힘들어도 그거를 계속 공부해 나가세요. 신학 책들을 독서해 나가면서 신학적인 기반들을 세워 나가세요. 그렇게 하면서 축척되는 그런 것들이 그나마 목회의 선상에 나아 갈 때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 신학에 흥미가 많았어요. 조직 신학 보다는 아주 좋아했고 그리고 성경 신학을 공부했고 지금 설교를 하면서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된다고 느껴요. 그래서 성경 본문을 탁 펼치면 조직 신학은 이제 제가 나중에 공부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면 공부하겠는데 성경 신학은 제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이기 때문에 성경 본문을 딱 보면 성경 신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받으면서 그 본문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면 다른 본문을 설교할 때 다른 소리 안하고 조직 신학으로 unity를 이루고 성경 신학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두 본문 사이에 다양성을 드러내면서 본문은 다르지만 말은 똑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을 내어 가는 것입니다. 그니까 공부해야 됩니다. 다른 거는 없어요. 3가지 밖에 없어요. 하나는 건강해야 되고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살아. 충성된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이나 모두 24시간 주셨어.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하면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써야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허튼 데 쓰는 시간이 없어야하고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이냐면,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이 비상하리만치 축복해 주시는 거. 그렇게 해서 공부든 기도든 연구든 효율적으로 축복해 주시는 거. 무슨 얘기인줄 알지요. 공부를 하면서도 효율적일 수 있고 비효율적일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고 지금도 그런 신념으로 합니다. 6시간 이상 자면 범죄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 6시간을 더 자. 두부 장수도 6시간 이상을 안자는데 죠셉 얼라인의 그 책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어가지고 그 새벽을 우유 돌리는 얘들하고 신문 배달부에게 뺏길 수 있느냐. 그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창조주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 시간에 그 새벽 4시에 일어나서 8시 까지 기도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잠도 좀 줄이고 6시간이면 충분해 젊은 나이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좋은 몸으로 바꾸어 써서, 그래서 나는 신대원 다닐 때 싫은 사람들은 철퍼덕 앉아가지고 한없이 담임목사 흉이나 보고 떠들면서 시간 보내는 사람 있지요. 나는 그런 사람이 너무나 싫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나중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30분 한 시간을 아껴서 쓰면서 미친 듯이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이 없는데서 충성을 요구하시지는 않잖아. 어떻게 내가 그런 철학을 이해할 입장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그렇지만 주어진 시간을 가지고 열심히 살려고는 애는 써야 하잖아. 그리고 그래도 못사는 거는 하나님 앞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주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든지 용서를 구하든지해야 되겠지만 주어진 그것들은 열심을 내고 살아가야 됩니다. 내가 어제 교역자들 비상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굉장히 열심히 사역합니다. 우리교회는 출근시간은 있지 퇴근 시간은 없습니다. 그건 상관이 없어 자기네들이 사역을 하면서 무엇 했냐. 사역을 내가 그렇게 안합니다. 지금은 내가 막 보체. 건강 조심해라. 그리고 제발 11시 넘으면 집에 들어가라. 그래야지만 새벽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데 근데 무엇입니까 하면 내가 그렇게 살았거든 이게 그나마 몸부림 처서 들어간 것도 없지만 그거라도 해서 먹고 근근덕신으로 그렇게 목회를 하는데 이 친구들은 더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린나이에 발동을 거니 나는 솔직히 얘기해서 1학년 때 전도사 하는 거는 반대라고 그래서 나는 3학년 때가 좋습니다. 될 수 있으면 3학년 때까지 안하는 것이 좋고 근데 2학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공부를 해라. 우리 전도사들도 2학년 때까지는 많이 웬만하면 봐줍니다. 그리고 공부해라. 그렇게 매달려서 공부하게 하십시오.
근데 비상을 건 게 무엇이었냐 하면, 위기를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 저렇게 가면 머가 될까 아주 위기의식을 느껴.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탁월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으면, 지적으로 조금 모자라도 그래도 좀돼. 내가 이 시간 올라가서 설교를 해서 말씀으로 가슴을 녹여서 펑펑 울게 만들었는데 당신 어느 학교 나왔냐고 눈물 닦고 물어볼 사람 없다고 왜냐하면 선에 대한 진리에 대해서 말해주는 거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도 없습니다. 그것도 없고 머 물어보거나 그러면 논리적으로 이건 이렇고 이건 이렇고 하면서 자기의 지성적인 것들을. 딱 이거 한줄 외줄 밖에 아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그러더라고 영국에 가서 내가 머라고 말할까 내가 누가 있냐고 가면 그 사람이 내가 누구냐고 물어볼 텐데 그러면 내가 저 사람이 그렇게 물어보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내가 누구라고 얘기해야지. 그런데 각본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딱딱딱. 누구누구 있습니다. 그런 사람 없고요. 그 사람 이사 가고요. 막 이런, 그래서 마지막에 머라고 그러냐면, I am not English. 얼마나 웃겼겠습니까? I cannot speak English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 I am not English. 외줄타리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벗어나도 파악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있고 지성이 있는 젊은이들이나, 어느 정도 사고력이 있는 사람들은 목회자에 대해서 지적 빈곤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입니까 하면 외식을 하는 것입니다. 얘기했듯이 건 식품을 먹으면 괜찮데 그렇지 않고 아까 얘기했듯이 엉뚱한 거를 먹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속에서 신앙이나 그런 것들이 비빔밥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책꽂이 앞에서 운적 진짜 많아.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그러면서 울고 전에는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사서 울었는데 이제는 책 살돈은 좀 있는데 읽을 시간이 없어서 우는 것입니다. 난 진짜 책 사고 싶어서 운적이 많아요. 진짜 점심값을 모으고 차비를 아껴서 그냥 생명의말씀사 달려가서 점심시간에 원서하나 품에 안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오고 그랬는데 이제는 살 수 있어 살 수 있는데 근데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걸로 오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책 읽으러 가는 것입니다.
4. 목회와 인격
불안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목회 사역을 하기가 어렵다. 인식의 기능이 상식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품을 좋은 성품을 타고 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정확성이 떨어지고 칼 같은 사람은 융통성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잘 참아 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잘 참아준다.)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적 성품은 약간의 가치밖에 없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거듭난 성품입니다. 거듭난 성품이라는 것은 중생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부어진 새 본성을 얘기 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통해서 획득되는 인격 적인 특징을 말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심령이 애통 할 수도 마음이 청결 할 수도 온유 할 수도 심령이 가난 할 수도 없습니다.
인격이 변하지 않는 커다란 요인은 자기 깨어짐이 없기 때문입니다.(아주 상대적이고 죄라는 확신이 안들 때 깨어 질수 있습니까? 죄에 대한 확신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깨어 지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깨어지는 것이고 자기의 의에 대해서 깨트려 지는 것 이것이 청교도 들이 본 자기 깨어짐이다)
*좋은 인격을 가져야 할 이유는? - 우리가 왜 거룩해 져야 할까?
굽어진 인격 뒤에는 잘못된 습관이 있고 행동이 있고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죄와 관련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이유는? 죄에 대한 달콤함 때문에 죄를 버릴 때 전개될 자신의 삶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죄를 통해서 만족이 느껴 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절대 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은 자기 이기적인 극단적인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죄에 대한 사랑이 깨트려 지고 나면 혐오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혐오감이 생겨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한 평화가 증진됩니다.
오웬은 신자가 특정한 죄에 빠졌을 때 회개 했다 할지라도 그 죄에 대한 혐오감이 내면에 형성 되지 않는 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 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율법으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주하다시피 몸부림 쳤던 반응이 죄에 대한 회개라고 봅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것이 바뀌면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재편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의란? 자신이 의롭다. 제법 가치 있습니다. 쓸 만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덜 의지해도 된다는 것이 마음 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특징은 자만심입니다. 자기 의에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자기 깨어짐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산 세월을 전현 회상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용서해준 과거를 자꾸 회상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만나기 전 과거를 계속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목사 되고 나서 변한 사람을 나는 한 두 사람 밖에 못 봤다.― 지식은 자꾸 자라나는데 (신학생에서 박사로.) 자기 인격이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물에 잠겨서 참회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합니다. 자기 깨어짐이 있고 자신의 모난 모습을 보면서 아파합니다. 학문은 빨리 변하지만 인격은 빨리 변하지 않습니다. 신학생들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은 고민은 있는데 아픔이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에 대한 사랑, 자기 의에 대해서 깨트려 지면서 현존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거룩한 불만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처절한 안타까움, 간절한 몸부림 이런 것들이 인격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는데 이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결핍된 것은 목사들을 돌볼 목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의 결핍된 삶을 살면 분재처럼 됩니다. 영적으로 진리의 자양분을 가지고 신앙 안에서 계속 성숙해 져 가므로 거목이 되 가는 것입니다. 교육환경이 열악할 때는 영적인 스승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존경하는 스승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미숙함의 표시가 된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숙 되지 않는 것입니다. 웨스트민트 신학교에서는 한국 학생을 안 받으려고 합니다. 하도 커닝을 해서 잘못을 하고도 뼈저리게 죄라고 생각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신자로서 사는 내면의 기쁨이 없으므로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면서 왜곡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누적 되면서 쌓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사는 가치! 이런 것들이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 되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잘해야지 하는 것은 최면 효과는 있습니다. 잘해야 석 달입니다. 내 생긴 모습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너무 아파하시고 새사람이 되어서 사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너무 좋아 하구나"후자의 경유에는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증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 있는 영적인 파워를 공급 받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친교가 강화 되고 죄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잘해야지 하는 것은 길어야 석 달이다" 영적으로 뛰어나는 것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국화꽃이 핀 것을 보고 재배 자료를 얻어 가려고 했습니다.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더니 피 토하고 죽었더니 국화가 가을에 핀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과는 갖고 싶어 하지만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결과는 아름다워 박수를 받지만 비하인드 스토리는 피나는 절규이기에 소쩍새가 이른 봄부터 울기 시작 할 때 아무도 국화꽃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피 토하고 죽은 자리에 국화가 만개 한 것입니다) 이런 자기 깨어짐 속에서 영적인 것들이 만개 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하나님의 은혜의 강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양 같은 것은 자기가 노력 할 수 있습니다. 교육자는 아주 잰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품과 품위 하면서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행동들이 몸에 벤 사람이 교육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죄의 문제는 아니지만 자기를 가꾸는 일에 있어서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안은 예수 믿지 않는 집안이었습니다. 고모들이 먼저 열심히 믿었습니다. 집안이 상당히 기독교 적인 분위기로 많이 기울여 진 상태였습니다. 목사님이 한 번 심방 오셔서 잘 권면 해주면 교회 갈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음식을 준비해서 상을 차려 놨는데 그분이 식사를 마치고 다리를 쫙 벌리고 젓가락으로 이빨을 계속 쑤시고 물을 먹고는 입을 헹구는 모습에서 괄괄 소리를 내고 집안사람들이 이런 것에 엄청 예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족 복음화가 20-30년 이상은 후퇴 했다고 봅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지만 그런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들의 교양 없음과 천박함을 잘 모른 것이 큰 문제가 된 것입니다. 깊은 영성은 오래 자기 깨어짐에서 몸부림 쳐야 하는 것입니다. 사치 면에서 가 아니라 예의 교양 범절 면에 있어서 상류 사회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도 문제없어도 될 만큼 깨끗하게 다녀라. 천박한 인상을 주지 말라 기품 있게 절대로 교인들에게 기대지 말라(밥도 얻어먹지 말라)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라. 교육자라는 자존감을 수준 높은 교인들을 대하더라도 당당하게 가난한 집에 갔을 때는 무엇을 해 주더라도 처음 해주는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부잣집에 갈 때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음식이라도 먹어본 음식처럼 삶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깨어짐 자신의 노력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나는 세 가지 척도가 있습니다. 성경적이고 합리적이고 리더십에 일관된 부합하는 상태 여야 합니다. (복장을 자율화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끝이 없었습니다. 무릎 찢어진 청바지 입고 나가는 사람. 그래서 바꿨다.) 자존감 있게 대하십시오. (이렇게 했을 때 저 사람이 이곳에 왔을 때 자존감을 느낄까? 생각 하고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투자입니다.) 예의와 범절 이런 것 들을 통해서 인격이 드러난다. 그래서 언어 구사도 품격 있게 해야 합니다.
교회 사역을 하다 보면 말씀 앞에서 넘어진 사람들 보다는 인격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격이 사람을 회심 시키지는 않지만 인격적인 면에서 실망하게 되면 들었던 말씀을 모두 부인 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리더십의 두 가지는 소인배형 리더십과 군자형 리더십이 있습니다.
소인배형 리더십이란 자기편을 만드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자기에게 예속 시키려고 합니다. 군자형 리더십은 함께 하나님을 섬겨 가는 것입니다. 전자는 패거리의 오야봉 같은 것이고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입니다. 지도자는 생각이나 폭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당연한 논리의 계산 방식으로는 소인배적 리더십과 결별 할 수 없습니다. 요셉의 경우"당신들은 나를 헤치기 위해서 나를 팔았지만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다". 요셉이 통이 큰 리더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섭리(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살아봐야 들어나는 것)를 알고 믿었던 리더자였습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밖에 세워 놓고 화염 방사기로 녹이려 하지 말고 가시 같은 사람을 끌어안고 흐르는 피를 통해서 그것을 녹이려고 하십시오. 이런 지도자의 관용이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신앙적인 의미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배신이다(동역자의 신의에 대한 배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갈라놓을 때 까지는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한 무엇을 하든지 그대의 편으로 본다고 모든 직원들에게 나는 가장 용서 하지 않는 죄는 비난이다 사석에서나 공석에서나 신학적인 가장 큰 문제가 교회 론입니다. 교회의 잘못이나 사람들의 결함을 보면 교회 안에서 도려내야 할 암적인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음란의 문제라든지 우상 숭배라든지 이런 것을 제외 하고)
지체들의 결함이나 문제들을 보면 공동체 적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히 서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고 하냐면 그것은 섬김이 필요한 빈 부분입니다. 나를 희생하고 그의 결함을 보충하고 섬김으로서 교회를 온전하도록 세워 가는 것 다른 사람의 결함을 본다면 자신이 보충해 줘야 할 공동체 적인 보완에 콜링을 느껴야 합니다. 대게가 그러지 않고 칼부터 뽑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교회 자체를 몸으로 보는 이유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제일 싫은 사람들은 동역자들의 명예를 보존 해 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다(악이 있는 것을 싸고돌자는 것이 아니라 접근 자체를 공동체 적인 것으로 아파하면서 접근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교회론에 핵심이다) 말, 글, 생활면에서 인격적인 만큼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한상도 목사님의 훌륭한 점 (새벽에 전도사를 찾아가서"주일 설교를 준비 했는데 설교 가닥이 잡히지 않아서 왔습니다. 오늘 저 대신 설교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그래서 전도사가 사회를 보고 한 목사님이 사회를 봤다고 합니다.) 스승의 날에 8순이 다 된 그분은 당신 스승(박형룡 박사-돌아 가셨음) 의 부인을 찾아 가서 전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사람은 결점이 없는 사람이 없다(나와는 비교 될 수 없는 탁월한 부분을 보고 깊이 존경하고 그분들처럼 살려고 하고 결점을 보지 않는다)
배명준 목사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시다. 16살 중학생이었을 당시 어느 교회에서 전도사를 한 사람 추천 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가 정말 예수쟁이니깐 한 번 써보라고 하니 교회에서 인사도 안시켰다고 합니다. 빡빡 머리 중학생이 왔는데"어떻게 우리가 조사라고 부르냐." 그래도 집사가 설교 할 수는 없고 해서 16살짜리 중학생이 올라가서 설교를 했는데 교회가 뒤집어 졌다고 합니다. 통곡하면서 교회가 뒤집어 졌다고 합니다. 설교 한편에 (뭐뭐가 대동강을 건널 때 나는 알아봤다고- 그만큼 뭔가 하려고 독한 맘을 먹었기에 그 벌레가 폭넓은 대동강을 건넜을 것이라고 그 사람이 그런 벌레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정결하게 사신 분이시다. 남은 생애를 신사 참배한 자기 고백을 앉고 산 분이시다. 신앙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격적으로 깊이 깨트려 지고 그 안에서 주님을 닮아 감으로 영적으로 주님과 동행 하는 아름다움의 삶을 터득해 가야 합니다. 청교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라 했습니다. 동행하는 것.
자기 깨어짐의 시간이 많아야 하고 진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과 정직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편인 것으로 충분하다고 로이드 존스 목사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다수이지 그렇지 않는 사람의 다수는 물리적으로는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인격적인 삶을 닮아 가는 그 성숙의 그릇 자체가 자기 깨어짐입니다. 개인의 경건의 생활이 승부를 좌우 합니다. 그 속에서 그런 작용이 일어난다. 기도 하지 않고 말씀의 감화 없는 속에서는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지 자기 속에서는 그런 삶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5. 목회와 정서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회심이었습니다.(그래서 어떻게 회심 시킬 것인지 많이 괴로워하다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설교에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원고를 작성하는 시간이 이틀이 걸렸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하십시오., 불꽃 같이 살고 싶어요.)
수련회 마지막 날 이었는데 하나님이 뭔가를 이루실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그곳은 차가 자유롭게 다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70년대는 공비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습니다. 그때 억수 같은 비가 왔다. 골이 6개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회개가 끝나고 나서 영적인 놀라운 것들을 쏟아 부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만 제대로 된 크리스천이 될것인가? 어떻게 하면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 할 수 있습니까? 이것 설교 자체로 고민 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정직한 실존으로서의 자괴와 구도의 몸부림으로 한 사람의 신자가 되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 무엇이 (비밀) 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예리하게 칼을 갈아서 (논리의 칼을 세우고) 이해 수준에 맞게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다듬어 진리를 전달해야 하지만 칼이 잘 드는 것일지라도 이 자체 안에는 생명력이 없다(이것을 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칼을 휘두르는 기술과 적에 대한 증오심 싸움에서 이겨야겠다는 필승의 의지 이런 것들이 진검 승부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요인이 됩니다.
우리 삶이 생명이 없고 크리스천의 비옥함이 없는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의 피상성이 심각한 문제라고 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 이런 것들은 생명을 걸고 찾고 해야 한다고 묘사하고 있다(천국은 자기 밭을 다 팔아서 밭을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했다.) 자기희생이 없이 기독교 신앙이 가져다주는 유익들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보려고 하니 절충점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복음을 가르치고 소수의 사람이 크리스천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표준과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나머지를 그들의 선택과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는 것이 정직한 말씀사역자의 자세라고 합니다. 그렇기위해서는 자신이 전하는 크리스천의 뒤를 소유하는 자여야 하고 찾아가는 자여야 하고 그 모든 것에 자신을 거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목회의 관심보다는 구도자로서 관심이 나는 더 많습니다. 내가 꿈꾸는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는 교회다 하나님의 일꾼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마른땅을 가로 질러 흐르는 한줄기 개울과 같은 것입니다.(강은 사람을 좇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물가로 나오지)
사람의 판단에 연연해하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마른땅 한 복판을 지나가는 문제는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판명된다 할지라도 설교자는 그 마지막 남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하고 세상과 야합할 때 마지막까지 야합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은 설교자여야 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목사나, 장로지위가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구도자로서 그 사람 속에 있는 내면의 질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 하면 몸이 물이 필요하면 목이 마른 것처럼 사람 자신 속에 있는 것이지 지위나 직분 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복음으로 승부할 때 대중적인 환영을 받을 것이란 그런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도 선지자도 사도들도 그런 생각 한 사람은 없습니다.
진리이기에 진실이기에 진리를 말하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정직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을 너무 사람들이 가볍게 생각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는가.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서와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신령한 정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입니다. 처음부터 히브리 인들 뿐만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지식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체험을 동반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약을 연구할 때 히브리어의 동치어를 찾아야 합니다. 희랍어는 껍질일 뿐이고 진짜 알맹이는 히브리어에 있습니다. 체험이 없는 지식이란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식이 라고 봅니다. 항상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습득 할 수 없는 것이고 지식에만 갇혀 있는 것은 그노시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의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입니다.
제임스 파크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서와 신앙 정서와 이지. 그 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듯이 열정 자체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려내야 합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강렬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성품의 문제가 아니고
조나단 에드워드는 아주 차가운 사람입니다. 사교성도 없고
오직 공부와 기도 연구에만 전념했습니다. 냉담하다는 것은 영혼의 질병적인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것이 그 영혼에 건강함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 수 있지만 냉담함 은 그 영혼이 병든 것입니다. 열정적이 되려고 노력을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복음 안에서 깨트려 지는 것 전진적으로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 구도자 적인 매진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거룩한 정서를 함양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기도하고 전기를 읽고 이런 것들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주님을 전적으로 추구하면서 사는 삶 속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면 오늘 같은 바울 서신을 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죄악된 도시에서 자신의 성결을 지키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끊임없는 몸부림 속에서 살았기에 그런 것들이 가능했습니다.
오늘날 거룩한 정서의 가치들이 하찮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정서에 쉽게 흔들리는 것은 미성숙의 표지이고 정서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오래 믿은 신자 내지는 지성적인 깊이가 있는 흔들림이 없는 표징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느낄 수 없으니까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정서가 그를 통해서 흘러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항상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눈을 들어 영혼들에 대한 상태를 보면 다 도와 줄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흘리는 눈물은 재초제와 같습니다. 그 눈물이 흘러가서 쓴 뿌리들이 그 눈물을 머금고 마릅니다. 눈물이 그치면 쓴 뿌리들이 왕성하게 됩니다. 그들을 고칠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 그 사랑이 성도들을 향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병든 사람을 다 고칠 수도 오류에 빠진 사람들을 단숨에 다 돌이키게 할 수도 가난한 자들을 부유 하게 할 수도)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흐르는 눈물을 씻겨주고 주님이 주신인격, 주신 모든 재능을 동원해서 할뿐 우리들이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아파하는 자와 고통 하는 자와 함께 고통 하는 것뿐 그렇게 하면서 사는데 까지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이런 정서가 없는 것은 그 영혼의 질병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흘린 눈물은 30년이 간다고 합니다. 신학교 때 깊은 깨어짐 속에서 눈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기성목회자가 되어서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 때 그러지 못했던 사람들이 목회 하면서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 하지는 않지만 아주 희귀한 일입니다. 해답은 하나님을 추구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대치 할 수 없는 소명은 절대 일에 대해서 눈을 뜨지 마십시오. 일은 맡겨지면 성실하게 수행하고 지혜롭게 하고 마음은 빼앗기지 마라
마음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 초점이 흔들이면 기도 자체도 목회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략을 해 버리게 됩니다. 학기 중이므로 책도 많이 못 읽고 하지만 방학 하면 교회 일을 줄여라. 교회 가서 노다지 살지 말고 압축하십시오. 거기에다 신경을 바짝 써서 최상의 섬김을 하려고 하되 시간을 밀어서 농축 시켜서 자기 시간을 내어서 책을 읽고 여러분 자신들이 사상적으로 먼저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명 받는 것 소용없습니다. 감명은 짧은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잘 정리가 되어서 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추구 하는 사람이면 모든 것을 용서 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 사람이 엄청 부도덕 한 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도덕적으로 반듯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보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모든 것을 주고 싶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설교 속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 설교자가 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희미한 빛이나마 던져줘서 나를 새롭게 깨닫게 해 준다면 그 설교자의 모든 결점을 용서하겠습니다." 설교가 가져다주는 효과가 대단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고는 자기에게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빛을 던져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인지 잘 생각해보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 자신만으로 아는 참된 만족이 무엇인지가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 모든 목회자의 사례비를 균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 사람입니다. 부양가족이 많으면 좀 더 주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면 안됩니다.
맥체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입니다"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크리스천을 전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오늘과 같이 오류가 많은 시대에서는 더 많은 구도자 적인 몸부림이 필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그 누구도 참된 신앙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계속 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남이 심은 국화꽃을 보고 "참 예쁘구나"하는 것은 잘 하는 데긴 세월 울었던 소쩍새가 울다. 울다 피토하고 죽은 그 역사는 자기는 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을 에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진주가 나오는 과정은 양식 진주는 조개를 벌려서 칼집을 내어서 그 속에 씨를 심습니다. 플라스틱이나 사기 같은 것을 자신의 여린 살 속에 들어온 이물질로 인해서 아픔의 고통을 본능적으로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호르몬을 비롯해서 각종 몸 안에 있는 물질들을 밖으로 내뿜어서 그것을 에워싸서 그 영향이 신체에 미치지 못하도록 방호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결정체가 진주입니다. 진주를 품은 조개는 모두 병든 조개입니다. 살이 먹을 게 없습니다. 하도 고생하고 싸워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목회자다 하는 것을 보여주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어떤 것이란 것을 보여 주고 살고 싶습니다. 다른 것은 다른 사람이 상당히 많이 대신 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추구는 법률적으로 말하면 비대체적 자비 의무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이란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사역을 하다 변화 되는 사람도 많지만 안되어 사람도 많습니다. 그 사람이 목사가 되면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목사는 목사이기 전에 구도자의 삶(도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 올바른 도를 깨닫고 사람처럼 하루를 살 수 있다면 짐승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10년을 버리겠다는 그것이 구도자의 삶입니다.
6. 목회와 영력
하나님은 마음 없이는 계시를 준 적이 없습니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말 자체가 쓰기에 조심스러운 말입니다. 나는 영성이란 것을 한 사람이 거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맺히게 된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특징이라고 봅니다.
고승들이 열반에 들어간 다음 불에 태우는데 이때 사리가 나온다. 그 사람들이 사리 만들려고 참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사리라는 것은 기도 오래 한 기독교인들을 태워도 나온다. 호르몬 작용과 관계 된 것이라고 얼핏 들었다) 동일한 자세로 오래도록 생활 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사리가 몇 개 나왔냐에 따라서 얼마나 신령한 사람인지.
영성은 말하자면 사리를 만들기 위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 없듯이 영성을 목표로 겨냥하는 어떤 프로그램도 성경의 지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영성개발, 영성훈련 이런 것들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영성은 훈련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영성을 제고 하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 된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적인 접근이 80년대 이후에 한국에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김경제 교수의 주장을 보면 굉장히 위험 합니다.(모든 종교의 영성은 충돌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목사들도 절에 가서 참선도 할 수 있고 절에 있는 중들도 철야 기도를 참석 할 수 있고 이런 혼돈 속에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구도자로서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진리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혀지게 된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이 그 인격 속에 베어 지는 것입니다. 구도자로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문이고 하나님을 추구 하는 자는 무엇이든 용서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얘기하던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친구라 했는데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반드시 도덕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추구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목사님은 성경 읽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의 영적 생활을 간파 한 것입니다. 삶의 초점이 흐트러져 있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모아지지 않는 그런 영혼의 상태를 읽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력을 받고 싶다고 하는데 대부분 접근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능력의 근원이 성령이라고 봐야 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전 인격 적인 추구 속에서 주님이 자신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의 기대가 아닌 기도 하나로 승부를 보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동기 자체가 그런 능력을 받으면 자기가 큰일을 할 수 있겠다든지. 이런 쪽으로 자꾸 가는데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입니다. 영력이라고 하는 것이고 하는 것과는 구분이 됩니다. 영성이라는 것 이 인격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이라면 영력은 어느 한 순간에 기도나 말씀을 통해서 사악한 자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영적 세계의 대한 권세를 말합니다.
희랍어로는 엑소시아 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집을 쳐들어가는데 그 집 대문이 엄청나게 단단한 나무문에다 큰 쇠붙이가 빗장으로 걸러져 있다면 평범히 두드리거나 발로 차서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때 사용 되는 것이 도끼입니다. 도끼로 연필을 깎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확하고 예리한 날은 없어도 무거운 도끼를 가지고 몇 번 때리면 문이 우지끈 하고 부셔집니다. 면도칼은 예리하지만 그것으로는 그 문을 열수 없는 것입니다.)
정확한 성경의 지식과 강력한 영력의 차이가 그런 것입니다. 지식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영력으로는 해 냅니다. 지성의 예리함과 영적인 강한 파워를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런 것을 가지고 싶을 것입니다.(영성과 영력) 영성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신령한 것들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신령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감지력이 뒤떨어집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풍부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성 생각 의지 정서 이런 것들이 그 사람 속에 스며들어서 그 사람의 정신과 의지와 정서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서가 그 사람을 채우고 그 사람의 지식과 의지를 넘어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변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영성과 영력을 누구나 다 소유 하고 싶어 합니다. (7-8년 전에 충청도로 청소년 집회를 간적이 있습니다. 스태프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요즘 청소년 수련회를 어떻게 생각 하냐?"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수양회 식으로만 하고 놀려고만 하고 문화 쪽으로만 자꾸 접근 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을 영혼으로 보고 영혼을 변화 시키는 강력한 작업들이 수련회 속에서 일어나야 된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나이 드신 목사님 한 분이 귀를 기여 내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목사님! 그렇게 안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했습니다. 모두가 그 아이들이 주님 만나길 원하는데 안되니 그쪽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방향과 소원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 안에 그것을 이행 할 수 있는 힘이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성과 영력은 자신 이 자발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덧입혀 지는 것입니다. 영성과 영력을 얘기할 때 단번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것도 고려를 해야겠지만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빗어져 가는 측면을 함께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도 얘기 할 수 있지만 이미 내주하시는 성령도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살다가 어느 날 번쩍하고 불 떨어 져서 영력 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커다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소심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내 마음에 이런 생각들을 기뻐하실까? 이러면 안 되는데" 위로부터 부어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이미 내주하신 성령을 근심 시키지 않고 구도자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영적이고 정신 적인 특성들이 형성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3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다루실까? 영력은 하나님이 한 순간에 부어 주실 수도 있지만 영성은 하나님의 거룩을 추구하면서 생겨나는 죄가 빠져 나가고 거룩이 함양된 인격적이고 영적인 특징이기에 순식간에 이루어 질 일이 아닙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연단을 받으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예리하게 관심사가 하나님 한분께로 모아 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견딜 수 없는 갈망을 갖게 되고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도 기간이 필요 하신 것입니다.
키가 자라고 천천히 영성이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영성이 희박하고 영력이 뒷받침이 안되고 살아가는 큰 이유는 우리에게 광야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광야는 세상에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이 없고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서 그분을 추구하면서 교제하고 살아가는 삶, 교제를 엔조이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향해서 영글어 가는 소쩍새 우는 사연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모두 광야의 신학교를 모두 졸업해야 한다고 봅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라 합니다. (다바라하고 어원이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하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고 했다. 구약에 뛰어난 영적인 인물들이 모두 광야와 관계가 있다(모세 - 미디안 광야, 엘리야, 세레 요한, 예수님- 유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바울, 에스겔이 소명을 받은 곳이 그발 강가입니다.) 낮에는 뜨거운 해가 내리쬐고 밤에는 불을 피워서 추위를 피해야 하는 것이고 사나운 맹수들이 이글 거리고위기에 처해도 누구도 의지 할 수 없는 그런 곳이 광야다 신앙에서 고독이라고 하는 것은 청교도들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둘이 있을 때는 자신의 반만 보고 셋이 있을 때는 삼분의 일만 보고 문화, 대중 속에 있을 때는 자기를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본 사람들은 고독을 원합니다. 이유는 고독을 그릇으로 해서 하나님자신을 채우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일에 미쳐서 산다. 사역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혼자 있는 고독한 시간을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잘될 때는 하나님 앞에 무릎 끓을 때 한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혼자기도 할 수 없을 때는 거절감을 느끼면서 고독감을 느낄 때는 죽음을 경험하는 고독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충만하게 느끼냐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적 영성은 수도사적 명상주의와는 다르다.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깨트려 진 것을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 자신의 삶에 중심이 되고 기독론 중심론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사랑은 여기 있나니"ㅡ 기독론 중심 영성 자체가 기독론 중심적인 영성이 성경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되있기 때문에(뭐뭐가) 들어왔을 때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조직 신학을 전공하는 교수들도 따라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한계가 예리한 것 같으면서도 예리한 것을 넘어서는 어떤 체험이나 확신이 밀려오면 경험되지 않는 지성들은 여지없이 부서져 나간다. 영력과 영성 두 가지가 다 고려되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 할 때 하나님이 부으시는 성령 세례처럼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 한 번에 부어주시는 것도 매일 매일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안일한 사역, 초점이 없는 흐트러진 삶. 이것은 초점 맞지도 않는 돋보기 갖다가 신문지에 불붙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사 되고 나면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목회가 잘 된다면 천사가 와도 고치지 못합니다. 영력이 자라는 것도 사도행전에서 교회를 움직이는 세 가지 동인이 함께 작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기도, 성령 여기다 하나를 더 추구 하냐면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사용하셔서 우리들을 영력 있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설교자가 형성되어 지고 빗어져 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소망함은 이세상이 다 채워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날마다. 날마다 걸어가야 하는데 매일 가슴을 찢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계속 자기 안에 있는 자신을 허물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세워 가면서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없이 되는 모든 것들은 잘못 되어 가는 것들입니다.
7. 목회와 거룩
졸업을 하고 개척을 할 수 있고 청빈을 받아서 바로 목사로 갈 수도 있을 테고 아니면 상당 기간 동안 부목사로 사역 할 수도 있을 테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사역 일 수도 있을 테고 사역을 하고 난 20년 후에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을지? 우리 모두가 100년이나 200년 만에 태어날만한 역사를 부흥하게 이끌 주동 인물이 되기는 힘들다.
일에 대해서 너무 많은 기대를 같지 말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나서 보니 조국 교회가 아주 작아 보였습니다. 교회를 끌어 앉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점점 지나감에 따라서 내가 느끼는 것은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하고 죽을 수 있는 일의 양은 너무 작은 양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게으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사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쓰시냐에 대해서 관심을 너무 많이 갖지 말고 여러분들이 교회를 얼마나 크게 할 것 인가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교회라고 조국 교회에 반드시 좋은 영향을 미치냐면 그게 아니고 작은 교회도 마찬 가지다. 확률적으로 여러분 가운데서 1000명 이상 되는 교회를 이끌어 갈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 하면 됩니다. 1000명이 넘어가는 교회는 소수점의 숫자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얘기 하고 싶은 것은 특별한 일을 많이 하고 죽는다고 해서(사람들에게 시선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중요한 사람이라 말하면 안됩니다. 가치를 그렇게 두면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도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주신 기회와 재능에 따라서 성실히 배우려고 애쓰면서 잘 섬기다가 죽는 것이 소망이라 생각 하고 살길(1100명 넘을 때 까지 내가 신방 다 하면서 사역 했었다- 항상 머릿속에는 교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잘 이끌고 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하부구조(경영의 개념)일반 은총을 가지고 철저히 지혜롭게 해 나가야 합니다.
상부구조는 상부 구조대로 하나님의 영적 축복 없이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다 짊어지고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하부 구조가 우리의 많은 관심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 되지 않으면 우리는 변질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되면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힘쓸 수 있는 시간을 다 빼앗겨 버리고 이것은 시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사역하는(전도사 시절) 시절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추구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신앙생활(信仰生活) 밖에는 존재 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 섬기고는 있지만 그런 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 하지 않는 사람이 어마어마한 일속으로 들어갈 때 그가 하나님을 추구 하면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에워싸여 살기는 하겠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성장 하고 있는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성장하고 있다 할지라도 목사가 되고 나면 후퇴합니다. 진전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후퇴.) 나는 목사님들을 만나면 신앙생활(信仰生活)을 잘 하자고 합니다. 목사끼리도 만나서 신앙이 참 좋아졌다고 또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사이가 되어야합니다. 현실은 전도사만 되도"나는 신앙생활(信仰生活)은 다 뛰었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을 얘기하면 엄청난 모독으로 여긴다(더군다나 사역자한테다 생애를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신앙을 물어보다니. 그것이 얼마나 가소로운지는 사단도 안다.).
사도 바울의 최대 관심은 개인적인 신앙생활(信仰生活)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지 하려하여)
신앙생활(信仰生活)이 진전 없으면 영적 생활에 진전이 없고 영적 생활에 진전이 없으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회자가 되면 될 수록 유혹 받을 일은 더 많아 지는 것입니다. 전도사 때는 야단이라도 맞지만 목사가 되면 누구도 혼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도자로서 떠받들어 주는 교만 교회가 성장하면 돈도 있습니다. 그 돈은 거의 담임 목사가 사용 하는 것입니다(놀러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외부적인 통제의 수단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가야할 길 안갈 길 이것은 자신이 정하고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제도가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 문제입니다. 목회자가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목표를 거룩에 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기 개인의 신앙생활(信仰生活)에 관심이 사역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 잠식 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빈껍데기로 살다가 죽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그것이 큰 핸디캡으로 작용 할 것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일들이 자기 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그것은 철저히 내가 무슨 사역을 하느냐에 달린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구도자로서의 고민이 목회자의 고민보다 훨씬 우월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목회의 성공이나 큰 교회를 하는 것 이런 것 들을 하찮게 생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룩은 성화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주님을 닮아가고 그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끊임없는 추구점을 발견하면서 변화 되어가는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확신 그런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보다 목회적인 여건으로부터 오는 지위나 만족이 크므로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렇게 미전구투들을 하는 것입니다.
서울 시내 4-500명의 교회가 자리가 비었다는 소문이 있으면 엄청난 지원자가 몰려드는 것입니다. 노예는 노예대로.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세상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서 목회를 해야 합니다. 나는 20년 뒤쯤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 있길 꿈꾼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하나님의 터치를 풍부히 느끼면서 살고 싶습니다. 교회 역사가 내 이름을 기억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청교도들은 신자의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자신의 민족을 가장 이스라엘 되게 하는 요건이라고 모세도 생각 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구도자의 자세를 잃어버리면 무엇을 하더라도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설교를 통해서 수십만의 사람이 주님을 영접 했다고 할지라도 구도자로서의 정신, 구도자로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 하고 몸부림 치고 사는 사람이라면 학식이 조금 모자란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다듬어 가면서 사용 하실 것이란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설이 느껴 는 삶을 살아라(그 사람의 현존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아파하고 말씀에 대한 계시의 빛을 주님이 보여줄 때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깊이 아파하면서 (설교할 때 남의 얘기 하는 것 같은 설교만 하게 됩니다.)영적 지도자는 강의실이 아닌 광야에서 서서히 만들어 집니다. 그렇기 위하다 매일 매일 치열한 삶 속에서 생사를 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결코 거룩에 이럴 수 없습니다. (피나게 살아야 합니다.)최상의 상태로 잘 준비 되었다고 할지라도 목회 현장으로 나아가면 뒤로 물러가기 십상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는 회개의 눈물과 자기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살아야 합니다. 사역자의 눈에서는 매일 피눈물이 쏟아져야 합니다. 그래야지 자기의 부패성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엉터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매달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피를 쏟으면 교인들이 겨우 눈물 흘립니다. 목회자가 눈물을 뜨겁게 쏟으면 교인들은 겨우 땀 흘리고 목회자가 땀을 뻘뻘 흘리면 교인들이 겨우 진심을 알아줍니다. 사례금이나 따지면서 비교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사역은 끝났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열심히 자신이 주님을 닮아 가야하고 그것을 원을 그리면서 사역을 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용도대로 사람을 사용 하신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추구라는 것은(골방에 혼자 있는 다고 추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치열한 삶에 현장 속에서 내가 싫어도 하나님 때문에 하고자 하는 그런 속에서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전도를 해야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라도 전도를 해야 합니다. 나는 아주 내성적이었는데 성령님이 강하게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전철에서 여러 번을 전도 했습니다. 그것이 내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자기가 교회를 세우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신앙생활(信仰生活) 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다 얻어집니다. 전도도 사역이 아니라 신앙생활(信仰生活)입니다. 기도 도 사역이 아닌 신앙생활(信仰生活)입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없었기에 그런 기본기를 못 익힌 사람들이 목회를 하므로 모든걸 프로그램화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 것도, 기도도 전도도.)_
신앙생활(信仰生活)이 여러분에게 시키는 바에 더(사역이 시키는 것보다) 충실 하십시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분투하면서 살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지는 그 사람들이 너무 좋습니다. 나태와 안일과 게으름이 얼굴에 벤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가 되어서 이미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너무 많고 이런 사람들은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과 피나는 이런 것들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끌려 다니면서 자신이 너무 연약하다고 과도하게 자기연민에 빠지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디서 봉사 하던지 간에 신앙과 함께 특별한 삶을 살아라.(새벽 기도 도 죽을 정도가 아니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훈련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8. 목회와 가정
여러분들은 연을 띄어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큰 연을 위로 잡아당기는 힘은 굉장히 셉니다. 그래서 큰 연을 여러 개 띄워보면 마치 낙하산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연이 하늘을 향해 치어 오르려고 합니다. 그 때 흔히들 생각하길 줄을 끊어 버리면 연은 더 높이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줄을 끊으면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고 맙니다. 잡아당기는 그 부력으로 팽팽하게 연줄을 잡아당기면서 하늘로 높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정은 그러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지체들 나눠주고 싶으면 나눠주고 헌금하고 싶으면 맘껏 헌금하고 물질로 지체들을 마음대로 섬길 수도 있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렇게 할 수 없는 제약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 하나도 간수하기도 힘들고 맡겨진 영혼을 돌보기만도 벅찬데 이제는 아내, 혹은 남편의 영혼까지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을 오로지 해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데 가정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또 다른 상황이 생깁니다. 자기는 못 입고 못 먹을 수 있지만 아이들까지 그렇게 하고 싶은 부모는 없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는 고민이 무척 큽니다. 그래서 목회자들 중에는 자녀들에게 눈이 어두워서 교회재정상의 불미스러운 일을 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자신은 설교 시간은 늘 ‘나는 모든 것을 교회를 위해 바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렇게 설교를 하면서 며칠 지나지 않아서 외국에 사는 아들에게 가게를 내주기 위해 사모님이 엄청난 금액의 외화 밀반출 혐의로 구속이 된 적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교회와 성도를 위해 바쳐서 아무 것도 없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돈을 어디서 나겠습니까? 그런 것이 결국은 가정을 가지고 있는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또 다른 목사님은 고결하시고 훌륭하신데 막판에 교회와 재정적인 문제로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항상 가정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정이 없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없다는 것은 또 그 나름대로 또 값비싼 대가를 합니다. 가정이 없다면 우선 유혹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톨릭 신부들도 그런 점에서 실족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몇 달 전 타임지에 가톨릭교회가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겠냐는 제목의 기사에 대주교와 주교사이의 성추행 사건을 다룬 것을 본적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않는데서 오는 커다란 부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들은 격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술을 많이 마십니다. 그리고 신부가 되기 전에 그런 것들을 해소하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배웁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가정을 가진 성도들을 가정이 없는 사람이 돌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결혼하지 목회자를 정상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청빙을 좀처럼 하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결혼을 하고 목회를 하는데 가정과 목회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내와 연합하면서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삶이 목회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목회자의 가정이 깨트려지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정이 깨트려지면 목회자 자신이 바로 설 수 없고 자신이 바로 설 수 없으면 목회의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딜라이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가는데 기내식을 먹는데 자기 옆 사람은 금식기도로 아무것도 안 먹는다고 하기에 목사님이 자신도 크리스천이라고 소개를 하니 이 사람이 말하길 자신은 크리스천은 아니고 사탄교 신자인데 우리 사탄에게 매주 금요일 마다 신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목회자의 가정을 파괴시켜 달라고 기도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고 합니다. 그만큼 가정이 깨트려지면 유혹 받을 상황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이건 독신이건 둘 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한 방식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을 했다면 기쁨으로 둘 다 받아들여야지 어느 하나를 위해 어느 하나가 짐이 된다고 생각하면 점점 더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목회 때문에 가정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가정 때문에 목회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 다 기쁨으로 맞이하고 가정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해도 안되고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위하다가 영혼 섬기는 일을 직장처럼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올발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비적인 연합을 허락하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몸으로 하는 교회와 신자가 접붙여지는 것, 또 하나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신령한 연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령한 연합을 유지하고 지켜 나가는 가운데서 건강한 목회사역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 관계가 견고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와 연합과 같습니다. 우리는 거듭난 순간 원리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죽이고 정욕을 이기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사는 일이 있으면 이 연합이 실제적으로 강화되어서 주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고 나를 기뻐하시는 것을 느껴지지만 그 실재적인 연합이 깨트려지고 죄를 짓게 되면 원리적인 연합이 있지만 주님과의 결속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버림받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원리적으로 영적으로 묶어주셨다고 하더라도 계속 부부관계에서 장애물을 치우고 신뢰를 쌓고 사랑하는 실질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고 느끼고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정적으로도 그런 원리가 성립합니다. 주님이 결혼과 동시에 맺어준 영적이고 정신적인 연합을 견고히 하면서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의 사랑만으로는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고 결혼하고 나면 반드시 사랑이나 신앙이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의 성품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애는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바다를 보면서 구경하는 것이라고 하면 결혼은 바지 걷고 바다에 쪽배를 띄워서 파도를 헤치며 정해진 기항지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품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결혼과 함께 연합을 실질적으로 지켜 가지 위해 관계 사이의 장애물을 치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빛을 받으면서 잘못을 회개하는 내적이고 외적인 갱신들이 동반되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부부사이에도 결합이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생활면에 있어서는 결혼을 하게 되면 돈에 대해서 많이 집착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중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나 혼자만 건강하면 됐는데 지금은 나는 건강하더라도 남편이 병에 들어서 죽어버리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달하는 것입니다. 살아갈 때 물질에 대해 많이 집착을 하게 됩니다.그런 의미에서 가정이기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목회자의 아내들이 살림을 아주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정이 목회의 순수한 동기를 잃어버리게 하는 유인 동기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교육하고 집을 살 때도 항상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경제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오히려 물질을 가지고 동료들에게 나누어주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삶을 목회자 자신이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부부가 결합을 굳게 하면서 살아갈 때 가정에서 얻는 만족의 정도가 클수록 목회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역을 할 때 아내들에게 이상하게 목회사역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현상이 있는데 남편이 고민하는 문제를 아내가 같이 고민할 때 영적이고 정신적인 결합이 촉진이 되는데 그것들이 공유가 안되고 분리가 되니 남편은 남편대로 살고 아내는 아내대로 사는 위험한 경우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사역을 초기부터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사역해 나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중심으로 해서 만난 부부가 그 일을 중심으로 함께 고뇌하고 고민하고 기뻐하고 기도하면서 공통적인 목표의 성취를 공통적 성취라 생각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자기 존재의 의의를 발견하고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는 일이 시작에서부터 계속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편과 함께 사역을 하면서 자신도 성장하고 눈빛만 봐도 사역이 현재 어떻게 되어가는 지 알 수 있는 그런 팀스피릿을 형성해야 합니다. 가정적으로 잘 연합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낳게 되면 제일 어려운 것이 부모로서 모본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먼저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 받기 이전에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항상 신앙의 정당성 안에서 생활하려고해야 합니다. 폭력이나 욕설이나 강압적인 환경 속에서 아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모본을 보이는 삶을 살면서 자녀들에게 좋은 본을 끼치고 아내가 마음속에서 그 남편의 신앙과 헌신 하나님께 대한 열정, 자신의 성결에 대한 열심, 이런 것들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도록 살아야 합니다. 결국 참신자가 되어야겠다는 중심적인 구도의 갈망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완전한 아내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완전한 남편이 아니니까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트려지고 변화되면서 날마다 새 사람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변화의 은혜가 자신에 계속 살아있으면 아내가 남편을 이해할 수 있고 남편이 아내를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화의 삶에 거의 진전이 없이 퇴보한다는 느낌을 갖게 될 때 부부 관계를 지탱해 나가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많이 이혼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구도 그런 면에서 자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을 잘 세워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것을 짐이라고 하지 말고 이것이 나를 신앙적으로 보호해 주는 훌륭한 방파제라고 생각하고 가정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영적인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깊이와 깊어질수록 서로 같이 동반자적인 순례자로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아내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의 아내와 로이드 존스의 아내도 아주 아름다운 신앙을 지닌 분들이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연구회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대해 쓴 박사 논문을 쓴 후 사모님께 보여드렸더니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우리 남편에 대해 많이 모르십니다. 당신 책에서는 온통 우리 목사님의 설교이야기만 나오는데 내 남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남편을 존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존 캘빈과 이델레뜨 부부도 아주 모범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델레뜨가 죽기 직전에 큰 소리로 ‘하나님이시여,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우리 조상들이 찬양하셨던 하나님, 이제 나를 받으시옵소서.’ 라고 기도한 이야기는 아주 감동적입니다. 이 이델레뜨가 죽기 전 캘빈이 영생의 소망과 하늘의 축복에 대해 눈물 흘리며 설명을 해 주는 아주 아름다운 부부였습니다. 그런 반면에 또 힘들게 산 부부가 요한 웨슬레와 바제엘입니다. 부흥회를 하고 오면 목사님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어서 한줌씩 머리카락이 빠졌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그만큼 많은 한계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가정의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결혼도 결국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것이 일평생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순례자적인 동반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목회자의 가정의 원리와 일반성도들의 가정의 원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입니다. 기초자체는 같고 적용이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목회자의 아내 중 10명의1명 내지 2명은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원인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만큼 힘든 것입니다. 우선 건강하게 우리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항상 부부가 그 결합을 놓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부부간의 결합과 사역이 충돌의 되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면 저는 사역을 버리고 전자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역은 새로 시작할 수 있지만 결혼은 새로 시작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과 한 영혼을 결합시키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그때 한 사람이 죽더라도 한 번의 결합으로 족하다고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을 성경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딸이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갔는데 목사님이 너무 이 아이에게 헌신을 해서 새벽기도만 끝나면 이 아이를 태우고 강남의 학원을 전전하는 생활을 하였고 어느 한 계기로 교인들이 폭발해서 결국 교회를 그만두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제 아이를 직접 가르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더 그 시간에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 영혼의 목자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생각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가 우리 아이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그러면서 아이와 저와의 관계가 더 좋아졌습니다. 아이를 나무 가꾸듯이 물주고 가꾸고 바람이 불면 막아주고 가지쳐주고 추위가 오면 솜을 싸주고 하나님 앞에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만진다고 해서 아이가 얼마나 잘 만들어주겠습니까? 그러면서 이 아이와 제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이 아이가 점점 변화되는 것입니다. 제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인생의 참된 가치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 때문에 성화되는 사람이 많지만 결혼 후에는 아내와 남편 자녀로 인해서 성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가정이 자신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명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9. 목회와 독서
이제 “독서” 문제인데 그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독서라고 하는 거는 목회자로서의 독서 생활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학업을 연마해 가는 과정에서 교제로 채택되어 져서 공부시켜 주는 것은 자기의 선택 사항이 아니고 그거는 외부에 의해서 커리큘럼에 의해서 강제 된거니까 그거는 외로 하고 자기 나름대로 독서 계획들을 세워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원칙이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는데 비효율적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마치 교리적인 지식이 없이 여기 가서 설교 찌금 저기 가서 설교 찌금 듣고 나면, 무언가 굉장히 많은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삶을 판단할 때에는 어느 것 하나도 정확하게 판단 할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목회자가 잡다한 책을 읽어도 그런 성과를 가져 와요. 그래서 저는 원리가 있습니다. 원리가 무엇입니까 하면 “모든 책들은 한 책을 위한 책이어야 합니다.”
근데 그 한 책이 무엇이냐면 "Bible"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이런 얘기를 합니다. 독서를 폭넓게 해야 됩니다. 그러는데 그게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전혀 타당하지 않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얀 머레이’ 목사님 같은 목사님이 목회자의 독서에 대해서 한 번 강연한 내용들을 내가 보니까 그분도 그런 얘기를 해요 목회자가 이미 된 다음에는 독서를 폭넓게 해서는 안되고 독서를 좁게 해야 됩니다. 좁게 깁게. 넓게 폭넓게 하는 것은 이미 청소년 때 아직 신학대 들어오기 전 대학교 때 이런 때의 일이고 일단 목회자로 들어서기로 결심하고 나서, 더군다나 신학의 과정에 있을 때에는 우선 기본적인 것이 좁고 깊이 있는 독서가 되어서, 자기 사역을 하고 영혼들을 가르치고 하고 위해서 성경에 관해서 알 수 있는 지식들이 철저하게 파해 쳐 져서 뿌리까지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골격을 세우기 위해서는 좁고 깊은 독서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bible 이 이렇게 있으면 bible 만을 가지고는 안 되니까,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어가는 거잖아요. 그게 조직 신학일 수도 있고 교회사일 수도 있고 이렇게 하다보면, 성경이라는 그 자체가 문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계시이기 때문에 매체를 공부하지 않고는 그 계시 자체로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위 학문들을 함께 공부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특별계시라고 하는 것은 그 특성 자체가 일반계시의 빛을 받으며 특별 계시를 이해할 때 그 특별계시의 본래적인 의미가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근데 성경이 중심에 서고 그 성경에서 이렇게 외연을 그리면서 외연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학문적인 문맥이 맞으면 이 외연을 아주 많이 휘돌 수 있겠지요. 휘돌고 그래서 성경에 대해서 깊고 폭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외연을 넓일 수 있을 거고 또 학문적인 문맥이 모자라면, 외연을 조금 밖에 펼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중심축에 한 책인 성경을 놓고 그 다음에 읽어 나가면 기본적인 것은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의 잘못은 무엇이었냐 하면 더 많이 이해하기 위해서 한 책 그 자체를 구심점에 안 놓고 바깥으로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학문적인 방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 아주 좋은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제가 아는 한 형제 가운데 한 사람도 구라파? 로 공부 하러 가서 신학까지 공부 했는데 구라파로 공부하러 가서 무신론자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름만 대면 거의 알 수 있는 신학자 인데 그 사람은 한국에 있을 때 굉장히 복음적이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가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아주 공공연하게 “성경 영감론은 순 사기다” 그리고 신앙의 그 어떤 교리들에 대해서 포기하는 그런 거. 그런 것의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독서와 학문에 있어서 이 중심측이 성경이 되어서 성경 자체를 읽고 성경 자체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 하는 영적 세계가 없는 사람들이 공부를 하면 그러면 그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에 보면, non-christian인데도 신학자가 있거든요. 굉장히 웃기는 일이지요. 신학이라는 그 자체가 경배의 학문인데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non-christian은 우리나라의 우수한 대학에 있는 신학part의 교수들, 학생들이 와가지고 자기 교수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우수한 대학에 설치된 기독교 학과들이 있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상당히 많은 수가 교수들 자신이 교회 안나가! 그러니까 심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항상 중심축에 와서 돌 수 있는 만큼 이게 와서 외연을 돌아야 합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할 거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학문적인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자기가 돌 수 있을 만큼의 외연만을 도는 거지 그래서 이제 체계적으로 공부를 독서를 해나가야 하는데 우선은 얘기 할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래서 책을 부지런히 읽어나가는 그래서 책을 읽는 자체를 좋아하고 즐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부지런히 읽어나가야 되는데 넓게 읽어 나가는 것은 벌써 늦었습니다. 그러면 마냥 좁게 읽을 것이냐? 그렇기에는 조금 그렇잖아요. 그래서 이제 저 같은 경우에는 어떤 것을 택하냐? 독서를 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쉴 때 읽는 책과 진짜 독서용 책이 구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너무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읽는 책들, 그런 것들은 이제 그런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잖아요. 근데 시간이 없어요. 좁은 독서하기도 감당 할 수가 없어요. 머 요즘 비일비재한 예로 일반 머 비소설 부분에서 1-2위를 다툰다. 몇 달째입니다. 몰라. 그 내용이 먼지 살 엄두도 못 내고 읽지를 못하니까, 그런 책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근데 그런 책들을 좀 더 부지런해 져서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저는 일부러 잘 못하긴 하지만 조금 조금 씩 기회가 날 때 마다 청소년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잡지 같은 것을 읽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조갈이 남는 시간이라도 그런 저도 얻는데 쓰고 마음 같아서는 일반에 나오는 문화 비평이나 특별히 문화에 관한 이야기 들이나. 철학에 관한 이야기 들이나 특히 사회 비평이나 그런 것들 그런데 시간이 정말 안나요. 그래서 결국은 도는데 까지만 도는 것입니다. 어쨌든 책을 폭넓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 그것이 말하자면 자기가 중심적으로 읽어야할 좁은 범주 안에 있는 것들을 못 읽게 할 정도로 그렇게 산발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첫 번째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하지 않으면 슬프지요. 이제 건강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게 힘드니까 그러니까 자신의 건강도 잘 관리를 하면서 부지런해지는 것 밖에 없어요. 게을러지지 말고 부지런히 책을 읽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몇 페이지 이상은 읽어야 되겠다하면서 생활을 해보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투리시간이라도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가면서 공부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책을 정리하는 방식인데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방식인데 저는 그렇게 합니다. 일단 책을 사면, 먼저 한 번씩 다 읽고 책꽂이에 들어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일단 사면 다는 못 읽으니까, 불가능하니까 목차는 꼭 읽고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무엇을 다루고 있습니까. 그리고 특별히 내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펼쳐서 봅니다. 그래서 시간이 있으면 한 채프라도 다 읽고 쫙~훑어서, 아 여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고 싶으면 여기에 무언가가 있겠구나. 그러면 거기에 확실히 표시하는 것입니다. 후일을 기약하고 한권, 한권 들어오는 책들을 꽃아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롭다 하는 것을 깨달았고요. 그런데 그것이 한권 들어올 때는 괜찮지만 한꺼번에 들어오면, 한 번에 30권씩 들어오면 하루에 그거 끝내기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요즘에 저는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책을 여러분들도 기억 하십시오. 이제 혼자서 하는 시기는 지났어요. 다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함께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냐면, 지금 읽는 책을 전부 목차까지 입력해서 database하려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경건을 딱 두들기면 경건이라는 목차 속에 들어가는 책은 내 서가에 있는 모든 책이 한꺼번에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가 번호하고 책 번호하고 전부다 나오게 그래서 그게 한 번에 쫙 빠져 나오니까 그거를 두들기고 그러면 목차가 나오잖아. 그러면 이거는 낮겠습니다. 그러면 그 책을 빼서 볼 수 있게. 내 서가에 없는 것은 볼 수가 없지만 있는 것은 볼 수 있게. 근데 사실 지금은 쉽지 않거든요. 외어지지 않아요. 어떤 때는 머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몰라. 빨간 줄, 파란 줄 그어놓고 중요 표시까지 해 놓았는데 전혀 읽은 기억이 안나는 것입니다. 한참 읽다 보니까 줄이 쳐 있습니다. 그리고 느낌도 쓰여 있고, 그렇습니다. 근데 그래도 생각이 안나는 것입니다. 언제 읽었는지 생각이 안나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그랬겠지마는 그런 것들이 필요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책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자료하는 작업과 읽은 것들은 잘 정리해서 언제든지 빼서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중에 교회를 하면 다른 것은 몰라도 꼭 비서를 두세요. 그래서 나는 아직 그런 작업을 못했지마는 이제 앞으로 교회가 꺼지고 여력이 있어지면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 읽은 것을 가지고 통일성 있게 정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옛날에는 미련하게 reading card를 작성했잖아요. 나 머 10만장을 가지고 있네. 5만장을 가지고 있네. 다 소용이 없어요. 그게 있지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지금은 컴퓨터가 있으니까, 지금은 스캐너가 있기 때문에 일일이 스캔 받아서 정리해서 보관을 해도 되고 머 아니면 미국에서는 벌써 이미. “dictation program"말하면 컴퓨터가 쳐주는 것입니다. 근데 95%이상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게 텍스트로 탁탁 나오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나라도 상당히 많이 발전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미국은 95%라고 그러는 것이 3년 전입니다. 지금 거의 아마 거의 100%가까이 오지 않았습니까? 10년 전만 해도 70~80%밖에 안했고 프로그램도 3,000만원씩 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가격도 많이 떨어졌을 테고 문자 인식 프로그램 나왔을 때 그 dictation program 나왔을 때 문자 인식 나왔을 때 획기적이었습니다. 내가 미국 교수한테 들었습니다. 거짓말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 게 어디에 있냐고 그런데 보여 주는데 진짜야. 근데 그때는 우리는 문자인식 프로그램 상상은 했지만 나오지 않을 때야. 그런데 거기는 일반에서 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다 되잖아. 그니까 dictation program 있고 하니까 읽어가지고 하다 보니까 무슨 방법을 하든 간에 그 것들이 자료가 다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가지고 한사람이 그것들을 모두 다 기억을 하고 있어가지고 그것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든지 간에 책을 들어오면 그런 식으로 관리를 했습니다. 저는 그니까 여러분들은 다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관리를 해나가고 이제 그러다가 이제 책이 한꺼번에 200권 300권 들어올 때에는 이제 좀 어려움이 있었지마는 신학교 다닐 때에는 흥미 있는 책들은 한 번씩 읽어보고 줄도 쳐놓고 집어넣고 요새는 한 번 보면서 여기에 머가 있구나 한 번 파악하고 집어넣는 그런 식입니다. 그래서 책을 어디에 머가 있다 하는 것을 넓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세 번째는 이제 구체적으로 독서 방법인데 독서 방법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책을 읽을 때 테마별로 읽어야 할 때가 있고 인물 별로 읽어야 할 때가 있거든요. 테마별로 읽어야 할 때에는 대게 자기 연구를 위해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때에는 테마별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기도”그리면 기도에 관한 책들을 전부다 자기가 수집 가능한 책들을 봐서 중요도를 알 수가 있잖아요. 중요도를 놓고 1·2·3·4등급을 놓아서 1등급 먼저 읽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렇게 해서 책을 놓고 뛰어난 책은 평생 읽는 몇 권의 책으로 분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책을 읽어나가고 이것이 주제에 대해서 책을 섭렵하는 방법입니다. 그 경우에 좋은 점은 무엇이었냐 하면,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좋고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하면 굉장히 좋아요. 어떤 면에서 좋냐하면 마음을 먹고 저는 표현을 “기획 독서”라고 부르는 데 이렇게 보면, 특집 할 때에도 “기획 특집” 해가지고 하나의 issue에 대해서 끝까지 계속 파는 거 있습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눈을 확 열어주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지요. 나는 그걸 이제 책을 쓸 때, 예를 들자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에서 정서에 관해 쓸 때 정서에 관한 책들을 이렇게 막 쓴다. 솔직히 그 책에 인용된 것은 많지 않지만 거의 200권 정도의 책을 제가 참고를 했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내가 쓴 것이지만 각주를 하고 보완을 하고 하면서 200여권을 내가 읽었는데 물론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물론 책을 한권, 한권 다 읽지는 못했지만 또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그것들에서 흩어진 부분들에서 자기가 연구하고자 하는 고유한 주제들을 쭉 읽어 나가면 아주 넓은 안목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번에 짧은 시일에 식견이 넓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깊지는 않아도 넓은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깊이도 어느 정도는 있지만 넓게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보고요. 그 다음에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면, 저자별로 읽는 것입니다. 저자별로 읽을 때에는 주제에 대한 탐구 보다는 통일된 사상을 자기가 파지하기 위해서 붙들기 위해서 읽는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읽으려면 절대량이 많은 것들을 택해야합니다.
왜 그러냐면 절대량이 적은 사람은 글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overall하게 전부다 보여 주지를 못하니까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냐면 책을 읽어 나갈 때, 스펄젼이면 스펄젼 로이드 존슨이면 로이드 존슨 어거스틴 이면 어거스틴 한 사람만을 붙들고 그 사람이 써놓은 낙서까지 다 읽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쭉 읽어 가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같은 사람도 그렇게 했지요. 그리고 이제 저 같은 writer들은 작품이 굉장히 많거든요. 번역된 것도 많고 영어 원서로 된 것 같으면 무한대로 많고 그런 것은 읽어 가면서 그 한 사람의 신학 그 사람의 설교도 썼을 거고 논문도 썼을 거고 경건 서적도 썼을 거고 이런 모든 것은 그 사람의 신학이 영위 되었을 것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신학을 전체적인 뼈대를 많은 작품들을 읽으면서 한 거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깊이 심취하지 아니하고는 통일된 사상이 안 생겨 그래서 그건 사실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는 애정을 가지고 그걸 다 읽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무리 한국말로 번역이 되어 있어도 매튜 핸리 주석 그거 읽으라고 그러면 아무리 한국말로 되어 있어도 그거 못 읽는다고 애정을 가지기 전에는 못 읽는다고 스펄젼 설교 읽기도 마찬가지고 지금 설교 집으로 나온 것만 하더라도 65권이나 나왔는데 원서로 된 거, 그거 한 달에 한 권씩 읽어 내려가도 65개월을 읽어 내려가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만만하지 않거든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을 통해서 계속 읽어 내려가 그 유익이 무엇이었냐 하면 뼈대가 서는 것입니다. 근데 제가 느낀 게 무엇이었냐 하면 신학을 공부하고 가만히 보니까 내 생각이라는 것이 없더라고
어디에서 다 주워들은 거지 내 생각이라고는 없더라고 주워들은 것이 내 생각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는 주워들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신학적인 견해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 없습니다. 근데 주워들은 얘기가 자기 생각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이렇게 끼어야 되거든 그래서 자기가 들고 다녀야 자기 꺼지, 근데 실론도 앞에 조금 조금 배우다가 앞에 대고 막 하니까 레포트하고나면 끝나고 목회 상담학 50페이지 하다가도 나머지는 레포트 이런 식으로 하니까 아무것도 내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더군다나 주워들은 이야기 감으로 충돌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그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철저히 규명을 해서 누가 맞는지를 택해서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택하든지 아니면 둘 다 버리고 자기 거를 택하든지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연구 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면서 그나마도 그런 시간들을 갖는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paper를 열심히 썼어요. 그렇게 쓰는 것을 워낙에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예를 들자면 박형룡 박사의 이성 수위론을 논하십시오. 그러면 “신학의 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레포트를 그냥 많이 안내잖아. 요즘에는 보통 얼마나? 10매? 10매정도 쓰라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안하고 10매에 억매이지 않고 신학의 원리에 대해서 박형룡 박사의 견해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이분이 “로이스베르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얘기인데 로이스베르코는 어떻게 해석 했는가. 로이스베르코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가? 같은 프리스톤 신학자들에서는 이 문제가 어떻게 생각했는가 이거를 다 쓰면서 실제로 스터디를 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 페이퍼를 쓰면 몇 장이 되냐면 남들은 10장 정도인데 나는 40장 나와 그래서 조금만 확대하면 MDB논문 될 정도로 그렇게 쓰거든 그렇게 해가지고 자료를 죽 읽은 다음에 부분들을 복사한 다음에 뼈대를 작성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책 쓸 때는 뼈대를 작성한 다음에 뼈대를 작성할 때에는 나도 한 10매 정도 밖에는 안되지. 그 다음에 이제 third study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절을 쭉~보면서 여기는 아귀를 좀 더해야 됩니다. 이 부분이 논증이 더 필요 하다면 더 깊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그 부분을 다시 복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만큼 모이잖아. 그럼 그걸 가지고 다시 읽어가면서 이걸 뼈대를 다시 보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이 쓰는 거 보다 2주일씩 3주일씩 매달려서 페이퍼 하나 나오는 것입니다.
근데 좋은 점은 무엇이냐면 그거 관련된 이야기들에 대해서 통일된 식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얘기 했듯이 이서 수위론에 대해서 죽~ 부분적으로나마 테마 공부가 어느 정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게 되니까, 그렇게 공부하기가 쉽지 않거든 그렇게 하면서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실천 신학 레포트를 내줘도 얘를 ‘제자 훈련에 대해서 공갈을 논하십시오.’ 머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감도 가지고 있고 찬성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고 근데 그러지 말고 신학 서클 안에서는 이런 것들이 어떻게 논의되어 갔는가. 이런 것들을 죽 검토해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논리를 세우고 그렇게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나는 전도사일 때 청년들 특강할 때 항상 그거 가지고 나갔어요. 그거 하나 뜯어 가지고 나가면 얘들이 감탄을 하지. 어쩌면 그렇게 준비를 다해 오셨냐고 근데 옛날에 했던 거 꺼내가지고 가서 하고 하고 근데 제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2학년 때 저희 집에 형제 하나가 두 사람이 놀러 왔어요. 근데 가난한 전도사 때이니까, 우리 집사람도 지금 아르바이트 나가고 그 우리 친척이 백화점에 있었는데 그 거기서 명절 되면 같이 도와 주었어요. 그래서 라면이나 하나 끓여줄게 그래서 라면 끓여 먹고 그때는 비디오가 있어? 볼게 뭐가 있어? 신학 대학원생들이 책이나 봐라 그때는 책이 많지도 않고 봐라. 막 뒤지더니 “김전도사 이게 머야” 학부 때하고 신대원 때 쓴 paper야. 보더니 그 친구 하나가 말을 안하고 머리가 화가 난 것처럼 그냥 오후 내내 침울하게 있더니 가버렸어. 그 다음에 만나서 너 왜 그랬어? 그날 무슨 일 있었냐. 가서 형 쓴 레포트 보면서 나는 왜 살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래. 자기는 신대원 2학년 다니면서도 자기가 하나도 연구해 본적이 없었다. 이것입니다. 근데 무조건 적인 독서보다도 이렇게 종합해서 자기 것들을 만들어 내서 조합해 내는 가운데 굉장히 자기화가 많이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 것을 쭉~~ 공부를 한 다음에 그렇게 해서 뼈대를 세운 다음에 받아들인 다음에 다른 것들을 배우면 되잖아.
근데 네가 여기 신학적인 문제에 관해서 A는 B라는 견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근데 어느 책을 보니까 A는 C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되는 거지, 네가 이렇게 체계적인 지식이 없을 때는 말을 잘하는 것에 대해서 탁 택한다는 말입니다. 근데 여기서 지금 나는 A는 B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거는 한 사람을 깊이 받아 들였기 때문에 그 정보에 대해서 A는 B일 수밖에 없는지 논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A는 C라는 거지 그럼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식이야. 그러면 배타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왜 A는 C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가. 사실은 나는 A는 C라고 믿는데 그럼 이 결론을 나오게 하는 이 사람의 체계가 있을 것이 아닙니다. 그거를 논리를 파고 들어가게 되잖아. 그래서 많은 양을 집적해서 자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논리적이 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많은 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논리적이 되고 싶어도 논리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A는 B다는 분명히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A는 C라고 하는 것은 부인 하는 것이 아니라, A가 C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 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람 편에 서서 논리를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이 논리가 이것을 넘어 서야, 넘어 서고 그다음에 이게 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연결되는 다른 것들이 있을 것 아닙니다. 그 문제들 까지도 다 연결 시켜주어야 될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 이게 들어와서 A가 C가 되도록 내꺼 A는 B라는 체계 속에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 할 때는 괜찮지만 A가 C가 되는 논리는 그럴 듯한데 이제 다른 것과는 어떻게 연관이 되느냐 할 때 이 논리가 뒷받침 되어주지 못할 때건 자기 속에 비평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왜 다른 사람들은 A는 C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확연히 논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모든 학문의 기본 아닙니다. 그니까 일단 자기 것을 전체적으로 체계를 세우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비판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항상 정리 되었습니다. 정리 되었습니다. 얘기 하는 것이 그런 면에서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것입니다. 근데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며, 보세요. 나름대로 입체적인 사고를 가지고 교회와 역사와 사회 기독교 신앙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논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성경 속에 흐르는 맥들을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게 무엇입니까 하면 누군가 한 사람의 저서에 깊이 심취해서 많은 자료를 받아들여서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수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자기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야. 그래서 하나하나 부속이 각각 일제 이태리제 소련제 미국제 영국제 이렇게 만났는데 하나하나 부속 값은 비싼데 그게 연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에서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자기 것이 분명하게 자기의신학적인 구조가 서 있는 사람들이 공부하면 머 공부하고 머 얻어야 될지 판단이 분명한데 그렇지 않으면 지식이 많아지는데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태가 되기 쉽다 이거지 그래서 그런 식으로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나는 그렇게 깊이 1년 정도만이라도 한 사람의 것을 통일적으로 쭉~ 읽어나가. 칼빈이라면 칼빈 한 사람에 빠져서 칼빈의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을 심취해서 모두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비오를 갖는 것입니다. 칼빈이 다 옳은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그 다음에 다른 견해들을 보면서 부족한 것들은 빼내고 집어넣고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칼빈에게 이식된 견해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비유된 견해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해나가. 그리고 자기가 평생을 놓고 연구하고 싶은 주제! 이런 것들에 대한 책을 집중적으로 모으는 것을 본인을 위해서도 좋고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설교라는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면 설교에 관해서 다 모아버리는 것입니다. 몇 천권이라도 기도 그러면 기도에 관해서 다 모아보는 것입니다. 그런 열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경건 서적을 많이 모으려고 애를 썼지만 청교도 서적을 모으려고 애를 썼지만 주제에 대해서는 많이 모으지는 못했지만 몇 개의 주제들에 대해서는 평생 수집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도와 설교. 그리고 성화 이런 것들에 관해서는 기획 수집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책을 읽어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저자와 함께 숨 쉬고 그래서 말하자면 스승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는 방법이 있고요.
그리고 이제 우리가 읽고 있는 존 오웬 이라든지, 에드워즈 같은 경우가 훌륭한 작품이지. 예일대학에서 나온 새 전집을 주문했더니 229만원인가 달라고 그러더라고 20권에, 장난이 아닙니다. 그래서 싸게 사는 방법이 없나. 나는 사실 7권 가지고 있는데 40% off해서 샀거든 웨스트민스터에서, 여기에서는 예일대학 밖에는 없는데 사실 머 책이 필요한데 가격이 비싸서 안산적은 거의 없습니다. 근데 사는데 그렇게 자료들이 많은 경우에는 굉장히 유리하지요. 오웬 같은 경우에는 저 교리부터 시작을 해서 논쟁적인 거 실천적인 거 설교, 모든 것에서 더군다나 목회자였으니까 풍부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에드워드도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데 지금도 늦었다 생각하고 있는데 한 3년 죽었다가 살아나야 됩니다. 그래가지고 매일 50개 60개 단어 찾으면서 신학 서적에 무쳐가지고 탁 보면 눈에 들어올 정도로 그렇게 공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만약에 머 다 오웬전집 23권정도 에드워즈전집20권정도 읽어낸다고 하면 그것을 다는 몰라도 70%정도만 소화해 낸다고 하더라도, 아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지성을 소유하게 될 거야. 기독교가 어떤 것인가 기독교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통일적인 이해에 있어서 안일을 때와는 비교되게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날 정도의 그런 식으로 읽어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제 4번째는 무엇이었냐 하면, 특별히 어떤 분야의 책들을 읽어야 될 건가. 특별히 신학 분야에 들어와서 특별히 3종류의 분야의 책들 집중적으로 읽어야 됩니다. 첫 번째가 조직 신학 입니다. 조직신학에 속한 책들을 부지런히 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나라는 지성적으로 한탄스러울 정도로 엊그제 청교도 연구하는 목사님을 만났는데 미국에서 오신 그 목사님은 청교도 정신으로 목회를 하는데 거기는 세례 받고 난 교인에게 매튜 헨리 주석을 준데요. 매튜 핸리 주석을 이렇게 두꺼운 3권짜리 주석을 우리도 사실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임직식 하면 양복 맞추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박형룡 박사 주석 하나씩 주었거든 교제를 사주었어요. 헌금은 각자 알아서 해라. 그렇게 해가지고 사주었어요. 내녀에 장로를 세우면 전집을 주려고 합니다. 아니면 로이스베르코의 조직신학 7권을 주든지 칼빈의 기독교 무언가가 달라져야 하잖아. 박윤선 박사의 주석은 평신도 들이 한권씩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조직 신학에 관한 책들을 읽어 나가야 되고 다음에 두 번째는 무엇이었냐 하면 교회사! 교회사에 대한 책들을 부지런히 읽어 나가야 됩니다. 특별히 교회가 어떻게 확장되어왔고 믿음과 씨름 하면서 교회가 성장해 왔는가 하는 교회의 교회됨을 가지고 세상과 관계 속에서 교회가 변해 왔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고 보고요.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무엇이었냐 하면 성경 신학에 관한 책들! 그래서 구약 신학과 신약 신학에 관한 책들 그래서 거기 속에는 엄격하게 말하자면 구약학과 신약학에 관한 책들입니다. 그래서 introduction 서론부터 시작을 해서 개별적인 주제별 연구 나아가서는 구약 신학에 대한 책들을 꾸준히 읽어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조직 신학의 관점과 성경 신학의 관점이 딱 겹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느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성경 신학을 전공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그 쉽게 얘기하면, 성경을 단면으로 보는 동시에 통시적으로 볼 수 있어서 내가 설교하고자 하는 본문에 앞뒤로 이 계념들이 어떻게 발전되어 갔는가 하는 살필 수 있는 그런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성경 신학에서 연구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word study예요. 단어 하나하나에 구원이라면 구원이라는 개념이 무언가 고난이라면 고난이라는 성서신학의 개념이 무언가 그래서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계시에 대한 점진성을 고려한 전체적인 이해와 그 다음 딱 자른 조직 신학의 두 칼라를 한꺼번에 다루고 본문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성경 원어에 대한 지식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때가 좀 늦기는 했습니다. 신학교 들어가지 전에 했어야. 원어 공부를 근데 늦기는 했지만 사역을 하다보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됩니다.
저는 정말 진짜 강조하고 싶어요. 그래서 능숙하게는 하지 않더라도 번역본들을 대조해 놓고 비판할 정도는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어하고 헬라어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특히 히브리어는 중요성이 희랍어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리고 번역 자체가 신약성경이 구약 성경보다 정확하게 되어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그렇습니다. 그만큼 히브리어가 쉽지 않다는 얘기지. 그리니까 히브리어에 대해서 자기가 original source를 대해야할 필요성들이 있다 이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99년도가 2000년도인가? 오대산에서 신학생 수련회를 했거든요. 신학생 수련회 때 올 수 있으면 오십시오. 신학생 특강을 할 때 원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특강을 할 때 사실은 부담이 많이 되지. 영어도 힘이 드는 데 희랍어와 히브리어에 대한 자료는 거의 영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지막으로 책을 암기하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테마에 대해서 공부를 합니다.
그러면 -예를 들자면 구약 신학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리고 서술 방법이 조금 조금씩 달라요. 근데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있습니다. 구약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머 그런 거 아닙니다. 구약신학의 역사라든지 구약 신학의 주제라든지 머 그렇게 다루잖아. 그 중에서 가장 표준적인 거 하나는 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논리야. 하나를 외어가지고 기둥을 세우게 되면 그 다음에 다른 책을 비교하면서 자기의 비유를 가지고 비교 하면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걸 읽어도 자기 것이 서 있으니까 이걸 활용해서 자기 것을 보충할 수 있는데 이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100권을 읽는 것보다도 1권을 외우고 30권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감이 있습니다. 읽기는 다 읽었는데 먼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를 얘기 하면서 아참 그리고 그거를 다른 사람은 이렇게 얘기하면 막해~~그래서 그 하나를 분명하게 외우고 있는 사람이 독서를 어느 정도 한 다음에 얘기를 하냐면, 머 엄청나게 강의하는 내용들이 풍부해 지는 것입니다. 굉장히 박식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비취는 것입니다. 비취기 위해서 읽는 것은 아니지만, 왜냐면 자기의 것이 분명히 서 있으니까 누구는 이렇게 말했고 누구는 이렇게 말했고 이게 아니라, 이렇게 서 있는 거지 그렇게 한권을 외우면서, 원하지 않는 것은 빼놓고 원하는 것은 집어넣고 자기 비유를 가지고 다른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 있으니까 아! 이 책은 잘 되어 있구나. 체제가 문제가 없습니다. 이 책은 문제가 많습니다. 이 책은 이런 게 약점이지만 이런 것들은 잘 되어 있구나.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근데 그런 식으로 책을 암기해 나가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책들을 내가 보기에는 나도 그것은 시간이 상당히 많이 지난 다음에 깨달았는데 한 30권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지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 분야별로 한 5권 정도씩
그래서 예를 들자면, 내가 학교에 다닐 때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도널드 거스리의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거든 그게 1000page에요. 그런 정도의 책을 쓰는 사람은 앞으로도 안나올 거예요. 신약 서론이 1000page에요. 그런 거 하나를 체제를 외우고 있으면 거의 완벽하게 introduction에 대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거든 끌어안고 있거든 그러면 다른 것들이, 눈에 안들어 오지 그럼 머가 빠졌는지 탁탁 들어오지. 그걸 다 외울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골격을 외어 놓으면 그 다음에 그걸 가지고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독서를 하다면 그것에 책꽂이에 꽂아져서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주 안되어도. 한 20권 내지 30권 내지는 암기를 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직신학 그러면 우리 거의 외우잖아. 어디에서 어떤 내용을 다룬다. 이렇게 큰 골격에서 작은 골격에 빠져 나가면서 어떤 교파에서는 어떻게 얘기하고 거기에다가 교회사를 공부하면, 그쪽으로 다시 이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사도 교회사에서 다루잖아. 메시지는 어떻게 다루는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서를 하면 독서를 하는 것에 붙어서 점점 풍성해 져야 되는 건데 이게 암기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독서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얘기 했지만, 책꽂이 잡고 펑펑 울지. 이게 무언가. 너무 가슴이 아프지 그래도 할 수 있는데 까지 죽을 때까지 하는 거 밖에는 그런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10. 목회와 설교
강해 설교를 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설교는 다 강해 설교여야 합니다.) 여러 가지 양태로 설교를 나누는 것은 설교사에 있어서 후기의 일이라 생각 하고 종교 개혁자들이나 청교도 들을 보면 교리를 설교하더라도 철저하게 주석을 통해서 교리를 이끌어내고 설교를 했습니다.
존 머레이의 (웨스트 민트의 조직 신학교수)책을 보면 (조직 신학자들을 보면 성경 신학들의 이해가 현저히 부족합니다. 논리를 세우는 일에 몰두 하다 보니 성경 자체보다는 논리의 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세우고자 하는 틀을 따라 가면서 성경의 프로 텍스트를 찾는 것으로서 성경 신학에 만족했습니다. 예로 헤르만 바빙크를 제외하고는 조직 신학자들 중에는 조직신학자 자신들은 성경을 원문으로 읽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존 머레이는 접근 자체가 (총신에 학장을 지냈던 이상근 목사님이 이분 밑에서 배웠다) 철저하게 히브리어본문과 희랍어를 해석하고 주해하면서 거기서 교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그 방식을 청교도들이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루는 성경 본문을 해석 하는 데서부터 출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해 설교의 요체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찾아내고(그 시대의 문맥에서) 독자들에게 성경 기자가 전해 주고 싶었던 오리지널 문맥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른 정황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 시켜서 실제적인 삶에 지침들을 주는 것이 강해 설교의 핵심입니다. 모든 설교가 이 두 가지를 안 가지고 있으면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강해설교란 말 자체가 매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강해 설교라고 하는 것은 굳이 성경의 원문에 대한 이해가 필요 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성경에 참다운 뜻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 깊이 면에서 제악이 있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행정학 박사 한분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생각하기를 왜? 목사님은 성경 한 책을 설교 하지 않습니까? 생각 했다고 합니다. (현재 진행 되고 있는 마태복음을 가지고 설교를 하냐면 35년 정도가 소요 될 것이라 생각 했다 합니다.) 나는 35년으로도 안될 것 같은데…
작은 것을 다루어도 그 속에 신학적인 내용이 탄탄하게 들어 있다면 마이크로 코스믹한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다루는 본문이 한절인데 그것이"칭의"라면 상세하게 설교를 하면 성경 전체에 흐르는 칭의의 사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수백편의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설교가 있고 한편의 설교를 들었는데도 성경 전체의 이해가 생겨 날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마틴 루터 주석 서문을 읽으면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작은 부분을 이야기 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신학적인 내용이 들어 있으면 됩니다. (신학적인 이란 말 자체가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전망을 제공해주는 힘이 되기에 성경 전체의 이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설교의 목적 자체는 성경 진리를 전달함으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설교라는 작업을 성경에다 대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기초로 해서 연설문 같은 것 설교문이 성경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게 하고 연설문에 대한 인상은 사라질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설교가 성경적이어야 합니다.(내용상의 문제)
두 번째는 내용을 전달할 때 성령이 역사 하셔서 사람들 마음에 회개와 믿음을 심어주는 감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 일을 하는 도구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순수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왜곡하지 않으려는 의지적인 중심성이 있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런 자세를 가진다 할지라도 성경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역량이 모자란다면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매번 성령의 역사로 간섭해 주실 문제가 아니기에 성경자체를 정직하게 다루어서 진리를 설교 속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성경자체에 대한 지식이고 또 성경에 관한 지식입니다.
성경자체에 관한 지식은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과 성경의 원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이란 성경 신학적 지식과 교리신학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성경 신학적인 지식은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계시에 다양성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교리신학적인 지식은 다양한 계시에 양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관통에서 흐르고 있는 성경에 통일성을 이해하는데 필수라는 것입니다. 원문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것이 목사로서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신학교에서 많은 것을 양보 하고 있습니다. 이를 악물고 학교에서 가르친다면 다 합니다. 히브리어도 제대로 두 학기만 가르친다면 다 분해 합니다. (나의 경험)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시의 말씀을 배워도 습득하기 어려운 언어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나는 이런 믿음을 가졌다. 지식과 성령의 전달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사용하시지만)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께서 설교자들에게 향하는 메시지 속에서 설교자의 기본 자격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서제에서 공부하고 나오실 때 얼굴이 찬란하게 빛났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목격)교회 역사에는 그런 분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성령이 역사합니다. 설교단에 올라서면 성령에 감화된 사람인지 아닌지 금방 알게 됩니다.
세 번째 요소는 사람이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셨는데 붙잡힌 사람을 붙잡힌 사람으로서 흔적이 있습니다. 인격이란 요소입니다. 자기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전할 때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 말고 자신이 성령에 의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 있어야 하고 체험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 설교 시간은 주님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설교의 과정을 통해서 성령님이 설교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들에게 느껴지게 해서 회중의 마음과 함께 녹아서 커뮤케이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청중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설교자" 책에서 비유를 하자면 설교하는 본문에 올라가서 초가 녹듯이 흥건하게 퍼져 가면서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녹아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실 때 에는 마음 없이 말씀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마음까지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을 이해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마음까지 들어가면 말씀으로 새로운 말씀에 평온이 펼쳐지면서 수 없는 것들이 느껴집니다.
성경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말씀이 인격화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증거 하고자 하는 진리자체에 대해서 설교자 자신이 낯설지 않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체험 요소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 인 것과 영적 인 것과 지적인 것 세 가지를 함께 갖추고 있을 때 제대로 된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시편 119편을 꼭 설교 해 보길 원합니다. 한 주에 90분씩 잡아서 짧으면 5년 길면 8년 정도 걸릴 것으로 생각 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도 성경책 전체를 설교 한 것은 히브리서 한 권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13년을 설교 했는데 로마서를 다 못 끝내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려면 설교를 토해놓고 나서 그것이 그런 정도로 영적이고 학문적인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허무한 작업일 것입니다.
나는 본문을 선택할 때 우선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과 두 번째는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설교가 필요할까? 라고 하는 것.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나에게 주신 말씀들이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이미 나의 가슴에 와서 부딪힌 말씀들 한 권을 모두 설교 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학적으로 영적으로 가치를 가진 것들이 됐다면 그 사람은 진짜 설교 가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때 한 시리즈가 끝났는데 방향을 못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산발적인 설교를 합니다. 시리즈 전체를 설교하기도 그렇고 할 때는 이런 식으로 설교 하는데 유익이 뭐냐면 자신이 한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것들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길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설교시간 자체가 얼마나 길게 하느냐 짧게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얻을게 없는데 너무 길면, 그건 너무 잔인한 것이고 생각입니다. 서비스 차원에서 짧게라도 해서 끝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내용도 없이 설교를 늘여서 진을 뺀다면 말씀이 살아있던 시대에는 말씀이 길었습니다. 종교 개혁 시간에도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었고 청교도들의 설교도 최소한 두 시간이었습니다. 세 시간씩 설교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설교가 짧은 게 반드시 좋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경험 했던 것들을 나도 똑 같이 경험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를 누가 듣고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설교가 너무 많다"고 한 번 설교에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시편23편을 설교 할 때 15시간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혜도 생겼습니다. 설교자 자신이 설교해야 할 양, 회중들이 소화 해 낼 수 있는 능력 다 생각해야 합니다.
설교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남이 설교한 설교집을 많이 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 경우 에는 분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도저히 설교가 감이 안 잡힐 때와 둘째는 월등하게 된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가 설교 한 것을 보게 된 경우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설교 뿐 만이 아니라 남이 해 놓은 성경 해석도 안 보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일차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주석류 근데 이런 주석이 많지가 않습니다. 원어가 새까맣게 달려 있는 그런 주석이 좋은 주석입니다. 그것은 텍스트에 대한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선택되면 설교 본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으로 뭘 설교 할까 하고 뒤지는 것은 엉터리다. 자기에게 말씀하신 한도 내에서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요히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경 읽어 나갈 때 하나님과 교제의 수준에서 읽어야 합니다.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나오면 앞 뒤 문맥을 다시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움직이게 됩니다.
나 개인에게 한 마리 어린양으로써 말씀하심을 듣고 회개 할 것은 회개 하고 결단 할 것은 결단하면서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 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읽고 난 다음에도 기도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기도 할 수 있는 장소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 합니다. 부분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정리가 되고 나면"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냐면 어떻게 전할 수 있습니까?"그러면서 골격을 짜봐야 합니다. 오리지널 텍스트를 놓고 묵상하면서 참고 하면 좋습니다. 희랍어 텍스트가 있는데 사본 상에 다른 도법들을 이독이라 합니다. 이독이 나오면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성경 원문에 근접하는 선택이 될까를 생각해서 확정해야 합니다.
교수들은 자기 학문의 분야를 중요하게 얘기하기 위해서 과장을 합니다. 번역하기 전에 어느 것이 오리지널 텍스트 의 성경 본문인지는 자기가 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대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정해 놓은 다음에 정확한 번역을 먼저 얻어야 합니다. 해석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 능력이 없으면 영어 번역들을 다 비교를 해 보든지 아님 킹 제임스 버전에 더 가치를 두고 보든지 킴 제이슨 할아버지라도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번역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번역 성경에 영감은 없다고 봅니다. 내가 다 대조를 했는데 킹 제임스 버전도 틀린 것이 많습니다. 사람이 했는데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성경 신학 적인 것들과 조직 신학 적인 것들을 해석 예) 표류 하였느니라 하냐면 표류가 무슨 뜻인지 언어적인 뜻이 있고 주석적인 뜻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둘러싼 해석에 문제들을 다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리적인 문제와 신학 적인 문제가 없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거기서 중요한 워드가 나온다."구속이라든지 통치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오면 토픽에 대한 성경 신학 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탐구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설교를 준비하게 되면 급속하게 성경 신학 적인 지식들이 진보하게 됩니다. 제대로 하려면 혼자는 어렵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부인이 다 수발을 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고린도 전서3장1절을 설교 하려면 1절에 대한 해석만 복사를 해다 놔도 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 찾으러 다니다가 볼일 다 봅니다.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골격이 짜져 있으니 그런 내용들이 더해지면 깨달은 내용들이 더 증폭 될 수도 있고 변경 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기도 하면서 원고를 쓰는 것입니다.
원고를 쓸 때는 몇 번에 나누어서 쓰면 안되고 한 번에 써야 합니다. 왜냐면 끊어지기 때문에 한 번에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흐름에 문제가 없는가 보면서 교정을 봐야 합니다.
쓰는 것도 3시간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설교를 듣는 느낌으로 써야 합니다. 다시 교정보고 번호까지 다 매긴 다음에 큰 A4 용지에 복사를 하고 이것을 가지고 토요일 밤새워 기도하고 주일날 아침에 하나씩 넘기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성해서 가는데 20시간 정도 걸린다. 쉬운 작업은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서 내가 도움을 받았던 것은 정확한 표현, 정확한 묘사 그런 것들을 5년 정도 원고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겠지만 그랬기에 지금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설교를 해도 점층법, 대구법, 병행법) 하나님께서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자기를 절제하면서 참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3-4분 정도 지속 되게 되면 사람들의 집중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때 갑자기 깨면서 어디로 들어가냐면"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갑자기 흘러오던 것과는 연결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지거나 명제를 던집니다. 나는 이것을 도약이라 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다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갑자기 그러는 거다. 그때 똑 같은 얘기를 하다가 이해가 잘되면서 느슨해 졌던 풀렸던 텐션이 다시 오는 거다. 지금 그 질문이 왜 필요한지 답이 안나오는 상태다. 그것을 잘못하면 답을 정확하게 내어서 얘기 해 주면 집중도를 높여서 듣지만 답이 없이 어리벙벙하게 하면 설교자체에 신비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논리자체가 우기는 식이 되므로 병행법 같은 것"인간의 몸이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까운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죄악에 가까이 가게 됩니다." 상당히 길게 문장이 계속 되었는데도 두 번에 걸쳐서 반복이 되기에 하나도 잊어 먹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동일 대구법, 반일적인 대구법, 점층적인 대구법 이런 식으로 쭉 풀어나가면 설교전체가 한편의 시처럼 내려옵니다.
글 쓰는 것도 마찬 가지다. 처음에 들어가서 잡아끄는 그런 흡입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수사적인 표현과 논리 그런 것들이 정교하게 엮어져 가야 합니다. 전에 영화와 오늘날에 영화가 어떻게 차이가 나냐면 전에는 발단이 있고 전개가 있고 절정이 있고 파국이 있고 그러면서 대단원에 막을 내렸다. 지금 그런다면 영화가 안팔립니다. 처음에 펄쩍 뛰어 올라서 가면서 계속 그렇게 올라가면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래야 돈도 번다)
그런 시대인데 잘못하면 그 안에 다 자는 것입니다."여러분"하고 소리치면 깨어나겠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나는 설교를 어떻게 전달하는 건가 하는 것은 나름대로 원리는 터득했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파해야겠다고 욕구는 못 느낍니다. 잘못하면 사람들이 설교를 기술에 있다고 보게 됩니다. 오늘날 접근하는 설교 방식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질질 끌면서 가다가 찍 올라갔다 끝마치는 이렇게 하면 이미 사람들은 결과를 다 알고 기대감 없이 시시하게 영화도 보게 됩니다.
도약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허를 찌르는 그때 엄청난 도전들을 받게 됩니다. 선물도 갑자기 큰 것을 주면 감동을 받지만 줄 것을 1년 정도 계속 얘기 하다가 준다면 전혀 감동을 안 받습니다. 설교의 결론을 철저히 감추어야 합니다. 설교에 감동을 받게 되면 말도 예화도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그림이 생각나면서 찍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부교육자들이 무 원고 설교를 하는데 나는 맘에 들지 않습니다. 무원과 설교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 이라 생각 하는 자체가
우선 원고 설교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전도사 때 설교하고 생명의 말씀사에 줘서 나온 책이 십자가를 경험 하십시오. 입니다. 고친 게 별로 없습니다. 5-6만 부 정도 팔렸다. 성경자체를 드러낸 메시지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읽힌다.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원고를 써야 합니다.
고등부에 설교를 할 때도 설교에 공을 들여라. 설교로 승부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절대 길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이 있고 거역할 수 없는 성령에 부르심이 있지 않는 한 그들이 수납할 수 있는 한도에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그들이 설교 듣는 역량과 자기가 설교하는 내용의 역량들을 함께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무지막지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학생설교 할 때는 안되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었습니다. 졸아서라도 좋으니 가만히 있게 해야 합니다. 산만하지 않도록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은 흔들리는 물 컵에다 계속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흔들리기에 물이 안 들어 간다. 25분이 길면 20분에 맞춰서라도 1,2,3 이런 식으로 하지 말고 한 가지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기를 바라신다."라면 시작할 때는 내가 얘기 한데로 되지도 않으면서 남의 설교도 안보고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얘기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관록이 붙었을 때를 말합니다.
자신 없으면 스펄젼의 설교나 내 설교나 짧게 된 것을 꼼꼼하게 봐서 2-3장정도 작성해서 움직이지 말라고 얘기하고 딱 20분만 설교 하겠다고 하십시오. 그러고는 최선을 다해서 설교 하십시오. 군더더기 없이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도록 매달려야 합니다. 보고 하든지 안보든지 상관없습니다.
원고를 작성하십시오. 원고를 작성하면 설교를 놓고 자기 설교가 비교가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교를 할 수 없어 자기의 설교 수준이 어디에 와 있는지 자기가 모르게 됩니다. 설교 준비에 충성하십시오. (토요일 새벽기도 끝나고 나서 온종일 온전히 매달려라) 많은 양을 하지 말라. 책 전체를 할 능력이 안되면 시리즈로 설교를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한 주제에 대해서 집중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되지도 안으면서 대충 성경 보다가 줄그어서 강단에 올라간다면 나중에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교회 전도사들에게도 원고 작성 해가지고 오면 지도 해주겠다고 했는데 별로 안 온다. 한 두주 하다가 집어 치운다 쉽게 얘기 하면 영양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이들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에서 살고 죽으리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에 생사를 걸 생각은 않고 맨날 아이들 데리고 이벤트나 하고 아이들 행복하게 해주려고나 하고 이러면 되는 것도 안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영혼들이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설교자로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준비한 게 있어야지 부어달라고 기도 할 것 아닌가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얀 백발이 되어도 노력 하지 않으면 감은 오지 않습니다. 틀려도 자기가 직접 해 봐야 합니다. "나는 교수되고 나서 친구를 아무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학교 연구실에 찾아온 사람 외에는 친척도 마찬 가지다. 한편의 설교를 위해서 그렇게 20시간씩 매달렸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 존 오웬은 그리스도 복음에 종, 칼빈은 말씀에 종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말씀에 종 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들어 간 데로 나온다.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깊이 기도해야 하고 둘째는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회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쓰레기 같이 쓸데없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다니다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위한 기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설교와 기도가 어떻게 차이 나는가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항상 어렵다(물론 설교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설교는 쉽다) 문제는 거기 얼마나 비상한 능력이 깃들도록 하나님의 마음이 녹아서 성도들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설교도 기능적인 면이 있어 많이 하면 쉽고 처음 하면 어렵다. 설교는 관록이 붙는데 기도는 절대로 관록이 붙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의 문제와 시험의 문제이기에 기능은 제한하기 힘들다.(기능은 제한하기 힘들어도 하나님의 축복은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축복이 제한된다고 해서 기능이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많이 기도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한편의 설교를 작성하는데 드리는 시간보다 기도 하는 시간을 배나 더 가져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준비된 장작도 없고 불을 주소서 하는 몸부림도 없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삯꾼이 되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이 필요합니다. 설교를 잘 작성 해 놓고 나면 설교에 대한 기대가 생기고 기도 할 마음이 생기고 담력도 생긴다.(이렇게 설교 준비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하는) 한 사람이 뭔가 하나님에 관한 증언을 할 수 있기 까지는 남들에게 밝혀 지지 않는 세월을 몸부림 속에서 잡고 사는 것이 모든 설교자의 연단의 길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추구 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갈 수 있는 여지가 너무 없는 상태에서 어느 날 사역으로 뛰어 드는 것이 요즘 사람인 것 같습니다.
목회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세워져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요하게 뭔가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축복을 사모했던 사람들만 예수님 만났던 것 아닙니다. 너무 아파서 병원 갈 돈도 없어서 예수님께 의료의 혜택을 받습니까? 해서 나온 사람이 예수님 만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동기가 어디서 시작 되었던지 주님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 이것들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문제는 그 사람의 사람됨을 기도가 능가 할 수 없고 그 사람됨이 기도를 능가 할 수 없습니다. EM 바운즈가"하나님 앞에서 사람됨은 그가 홀로 하나님 앞에 무릎 끓고 엎드렸을 때 그 사람됨입니다. 그 이상도그 이하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총회장이다. 노예장이다. 작가다. 교수다 하는 것들은 그것은 사람됨을 얘기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포지션 일 뿐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난다. "내가 결혼 할 때 무기한 금식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때 심정은 나 죽는 것 보려면 응답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내가 기도하다 죽겠습니다.―"이런 마음이 필요 합니다.
지도자로서 우유부단함이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 있다면 그것은 적당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속적인 것과 싸울 수 없습니다. 신앙적 신념을 지키려고 할 때 손을 자른다. 그런 정도로 힘들다. 세속 적에 물들지 않는 것이 그 정도로 힘들다. 주님이 이 땅을 보시면서 아파하시는 이유가 그런 결단을 하는 사람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기도 생활은 일반 적인 기도 생활과 특별한 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것은 늘 얘기 하던 것들이고 아침 시간을 거의 하나님과 보내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바빠서 그렇게 못할 수 있기에 지금 해야 합니다. 저녁에 일찍 자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하고 새벽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으려고 힘써야 하고 자기의 맡은 기관이나 교회가 어려움에 봉착할 때 항상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 하면 해결 된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하나님은 내가 내 앞에 서라고 말씀하신다."
-설교에 대한 반응-
설교자들에게는 언제나 자기 설교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 회중들에 대한 수준들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는 다 있습니다. 근데 잘되는 쪽만 보지 말고 어두운 그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설교를 들었는데도 변화 되지 않는 영혼들을 보면 겸손 해지는 것입니다. 설교를 못했다는 후회보다는 그들을 위해 충분히 기도 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더 많이 든다. 기도가 충분하고 그들을 깊이 사랑했다면 하나님이 더 많이 역사 하셨을 텐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교회 있다면 자기의 정직한 모습에 대해서 엄청나게 오해 하게 됩니다. 이쪽을 보면서 소망을 얻고 위로를 받지만 다른 쪽을 보면서 할 말이 없는"자네 이 길을 가려나" 이 책을 썼을 때 처음 나오자마자 엄청나게 팔렸다.
한도서관에서 어느 학생이 그 책을 읽다 통곡을 했습니다. 주변 학생들이 다 놀라 달려 왔다. 그 책이 어떤 책이기에 시험공부도 하지 않고 그 책을 보다가 엎드려서 통곡을 했는지 해서 성경 옆에다 그 책을 끼고 다니는 것이 그 학기 내내 유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얘기 들었을 때"그런 역사가 왜 우리 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게 바로 하나님이 겸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이미 붙잡았다 함도 아니라" 티끌 같은 자신을 보면서 참 부끄럽다. 토요일 마다 거의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내일 설교가 어떨까? 주일도 마찬 가지입니다. 왜냐면 은혜를 많이 부어 주셨을 때는 환희 때문에 잠을 들 수가 없고 죽을 쑤었을 때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먼 길을 헤치면서 온 성도들을 생각 하면서) 이 손해를 무엇으로 보상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자책 때문에 잠을 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돌아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너무 비참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꽤 유명한 목사님이신데"구원이 엄청난 것처럼 얘기해도 성도들의 삶속으로 들어가면 그들이 생각 하는 구원은 십 원보다 조금 못합니다."했습니다. 권투 선수로 보면 찝 정도로 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많이 맞으면 매집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한방에 퍽 맞고 마우스피스가 빠지고 머리는 흩날리면서 땀방울이 퍼져 나가면서 캠퍼스에 대자로 눕는 것들이 필요 합니다. 쨉 좀 먹이고 해서 조금 눈물 흘리고 갔다고 해서 한주동안에 다시 살아서 회심 하지 않는 얼굴로 나오는데 정말 한심스럽고 낙심스럽다. 절망스럽다
"설교를 잘합니다."는 표현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것은 못하는 것이니 주신 한도 내에서"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말씀-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이름을 배반 하지 않았으니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어 이기지 못하게 하리라"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면서 가야 합니다.
11. 목회와 지도력
설교는 아홉 번을 못하다가 한 번만 잘하면 다 용서가 됩니다. 지도력은 한 번 실망을 주면 아홉 번을 잘 했는데도 한 번을 잘못하면 잘한 것은 기억을 못하고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또 어디다 우리를 꼬나 박습니까? 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지도력은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 영역 인격 열정과 함께 소중한 무형의 재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서1장을 보면 오네시모를 가리켜"저가 전에는 내게 무익 하였으나 이제는 너와 내게 유익하므로 내가 저를 네게 보내노니 저는 내 신복이라" 신복은 부하하고는 다르다. 부하는 아무 생각 없이 두목이 주는 몇 푼의 돈이나 이익으로 아부하듯 생각 없이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심복은 자기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정신과 비전에 대해서 깊이 동의하고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가 주도 적인 역할을 해나가는 것에 기꺼이 그 가치의 시간에 참여 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마음과 뜻을 다 하는 사람이 심복입니다.
지도자가 인격적으로 볼 때 지도력이라고 하는 것은 지도자라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 사람의 사람됨이 어떠하느냐에 있어서 그 지도력도 그 사람 안에 담기는 것입니다.
예) 인격이 야비하면 리더십도 야비하기 쉽다. 지도자의 인격이 자잘하면 지도력의 관심사도 자잘한 것에 관심이 쏠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맡겨 일하게 하실 때는 지도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이미 지도자의 길에 들어 선 것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기증 사실로 놓고 보면 그 사람이 변화되는 관정이 지도력이 변화 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지도력도 승화와 꼭 같이 한 번에 누구에게 지도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상황과의 싸움에서 주님의 손으로 빚어지면서 예전에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것에서부터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도력은 운전과도 비슷하다(처음에는 10분만 하면 차를 끌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운전을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계절을 세 번을 지나야 운전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유는 도로를 달려가는 것은 바보가 아니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매래 예측과 돌발 상황을 보고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을 보고 잘합니다. 못합니다. 말합니다.)
지도력도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자기가 옳고 순결하고 합리적이고 용기 있는 그런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깊이 몸부림치는 가운데서 자신이 변화 되면서 지도력이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순결해지면 지도력도 순결 해지고 강해지면 지도력도 강해집니다. 지도력이 성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지도력은 영적인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에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이 깊이 만져 주시는 변화가 있게 되면 지도력에 영적인 면이 많이 가미 되는 것입니다. 고난 감사 분투 이런 것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합리 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라도 헌금 할 때는 주판을 튕긴다.
그러나 베드로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는 비합리 적인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뭐 그냥 집 팔지 뭐, 없으면 아버지 집이라도 받지 뭐 믿음으로 하면 하나님 책임 져 주시겠지"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인격 속에 은혜가 담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화의 문제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합리적인 구조를 가지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하나씩 배워가고 적용하면서 가치를 확신하는 가운데서 합리 적이 되는 것입니다.
지도력에 있어 위험한 것은 편애다. 편애 받는 사람은 좋지만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은 박탈감을 느낀다. 모든 리더십에도 공평성을 잃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상식 적인 차원에서 생각 하고 잘 고쳐 나가야 합니다. 지도력은 영적 변화와 인격적인 변화 사고의 전환 삶의 습관 이런 것들과 총체적으로 연결 되어서 발산되는 결과물들입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지적이고 실천적인 삶에 총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도력은 혼자서 몸부림치면서 보다는 누군가 자기가 깊이 동의할만한 지도자 밑에서 생활 하면서 가장 많이 배우게 됩니다. (원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 것도 배우게 된다) 지도력은 교회에서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한 마리의 사자가 사슴의 집단을 끌고 가는 집단이 무서운 것입니다(영도자가 사슴이면 사자의 집단은 무섭지 않다)
지도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혼적인 사고를 심정을 자기의 지도를 받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불어넣어야 합니다. 역대의 지도자의 공통점은 웅변이다)
그리스 로마시대 때부터 웅변의 힘이 그렇게 강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대표적인 사람은 히틀러, 모택동, 스탈린 걸출한 웅변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넣어서 불을 질러는 것입니다.
사상이 없는 지도자는 가짜다. 독특하다는 것은 "사도 바울은 내 복음이라 했다."확신하는 것입니다.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연구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사상을 깊이 전수 받으면 지도자가 가지고 있던 현실을 보면서 안목을 키워 가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중요한 정신적인 자질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격적인 자질입니다. 자기가 살았던 삶을 이야기 할 때 내용과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분리 현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실천하고 인격화 된 삶을 살지 않으면 결코 확신을 가지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지도자는 자기가 지도 받아야 할 사람들의 삶을 살거나 자기가 그 자리에서 고뇌 해 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지도자가 실천력이 없거나 현저하게 떨어지는 조직을 이끌어 가는 이유는 그런 과정을 끌고 가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바닥을 기면서 살아가는 것은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기도 많이 해 보고 목회의 길에 올라온 사람은 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기도 시킬지 알고 있습니다. 전도도 자기가 바닥부터 기어서 전도 하냐면 황무지에 가서도 개척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지도자가 되는 비결은 앞으로 지도할 사람에게 기대되는 삶을 지금 충실히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것 위선 (속에 있는 것들을 토해 놓는 것이 위선이다)이런 것 들은 자기 속에는 있지도 않으면서 상황이 요구하니깐 있는 것처럼 말해야 하는 것 이것이 허위고 위선입니다. 착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주의에 빠져서 거들먹거리던 사람들이 한 번 회심 했다고 해서 권위주의를 청산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재용 목사님(황실의 후손) 의 자서전에 보면 왕손이 복음을 받아서 은혜 받고 목사가 된 것입니다. 대궐에서 마부가 된 사람이 장로가 된 것입니다. - 네 처지를 네가 알렸다. 어느 안전이라고 평상시는 안 나오다가 수틀리면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내용이 깊이 베여서 밖으로 흘러나오면 문제가 없는데 자꾸 충돌을 일으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자신의 외적인 것들을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 하지 말고 내적인 것들을 그렇게 함양 하려고해야 합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든지 거기에는 하나님이 세워 놓은 질서가 있습니다. 화장품을 영어로 카즈메틱이라고 합니다. 희랍어에서 온 것인데 우주, 질서라고 합니다. 질서 없는 얼굴을 빨간 칠하고 노란 칠해서 질서를 다시 잡아 준다는 뜻입니다. 화장을 많이 하는 것은 스스로 질서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런 질서가 있습니다. 연기를 잘하고 깊이가 있으면 잘생겼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 역할 하는 사람만 생각나는 그런 것입니다.
내적으로 인격과 지도력이 밖으로 흘러나오면 그 모든 것이 담겨서 지도력이 되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가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도 받을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삶을 충실히 살면서 충분히 고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도자의 기능면에 있어서 지도력을 행사 하는 데 있어서 고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진짜로 지도력이 필요 할 때는 교본을 통해서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지도력을 향상 되어 나가면 공통적인 분야가 일일지 모르지만 적용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자기화 되면서 독자적으로 그런 기능을 수행 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무엇인가 깊이 갖추어 져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해석해서 적용 해 나가는 것입니다.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적인 해석 능력입니다. 다 다르게 해석 하면서 나아가는 것이기에 누군가에 의해서 본인 자신에 의해서도 두 번 똑 같은 것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지도자에게도 그런 해석 능력이 필요합니다. 맥아더 장군의 지도력이 모자, 선글라스, 지휘봉. 이런 것 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닙니다. 지도력은 내면의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물처럼 흘러가면 누구도 흘러가는 방향을 돌릴 수 없습니다. 한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최고 지도자다. 탑 리더만이 돌려 놓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돌리는 것은 자기 역량에 달려 있습니다. 넓고 호연지기의 마음을 가진 지도력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포기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해서 사심 없는 지도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대도를 걷고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당한 리더십을 발휘 하는 자가 됩니다. 강력하고 영향력이 있는 리더십에는 무자비함이 있습니다. 사람을 많이 베려하는 리더십은 효율이 떨어지고 확신이 모자란다. 양자를 어떻게 조화 시켜야 할지를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맞서지 말고 항상 돌아 올수 있도록 여운을 남겨 줘야 합니다.
원칙을 따라 걸어라 희생이 따라도 항상 원칙을 따라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존 오웬도 지도자들이 어떻게 믿고 신실하게 따라야 할지 온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중의 하나다. 삶의 모습 자체가 교과서가 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냄을 받았지만 예수님의 실존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편으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반대편으로는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님이 자신의 실존을 통해서 보여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갖게 된 분명한 인식의 확대는 비 할 수 없는 명료한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리더십에는 똑 같은 원리가 적용 되어야 합니다. 리더십을 좋게 행사 하면서 걸었던 분들의 전기를 읽든지 해서 터득 해 가야 합니다. 영적인 매력을 줄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서 함께 일하는 것이 마취되는 것 같은 향취를 느끼게 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12. 목회와 기도
선지자의 직무는 말씀을 대언 하는 것이었고 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성령 감림 사건 이후 잠시 혼란에 빠지지만 신학적으로 정리를 하고 해야 할 직무가 말씀과 기도에 전무 하는 것이란 것을 복원합니다. 사도들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사역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말씀을 맡았던 예언자들의 삶이 신약시대의 맥락에서 재현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인 우리들이 사역의 아름다운 모본을 사도들에게서 찾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도 기도에 있어서도 말 할 수 없는 부요함을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회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기도하므로 응답을 받았다는 간증들이 계속 우리 가까이 있는 가운데 어떤 문제를 낳게 되냐면 기도가 목회 사역에 성공을 위한 한 방편이다 하는 오류를 낳기 싶습니다.
위기가 오고 어려움이 올 때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간증들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사도들이 기도를 그렇게 이해했습니까? 말씀과 기도에 전무 하여야 하리라 할 때에 전무 하겠다는 기도의 내용이 그런 사역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선지자들이 말씀 전하고 매진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들의 기도가 사역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나는 다르게 생각 합니다. 선지자들에게는 따라다니는 중요한 표가 있었습니다."저가 너를 위하여 기도 하리니 그리하면 내가 용서 하리라"아브라함의 세계 가운데 나오는 아비멜렉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얘기다. 선지자들에게는 기도 할 때 특별히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어떤 독점적인 특권이 따라다녔다.
그런 것을 보면 선지자들의 기도 세계는 단지 사역을 위해서 성공 방편으로 쓰여 졌다는 세계이기 보다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자신과 교통하는 독점적인 친밀함을 누리는 중요한 수단이었고 그 은혜의 방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 했고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한 현실에 안타까워하면서 부르짖는 기도의 세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환경적인 필요에 의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오늘날은 기도의 원래 뜻으로 상당히 멀어졌다고 생각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성화의 삶을 살면서 주님을 닮아 가는 수단으로 기도가 여겨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보면서 기도가 목회 사역에 승리와 성취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면 사셨습니다. 기도생활이 박약한 것은 아주 위험 한 것 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목사가 될 수록 뒤로 물러간다고 생각 하면 됩니다. 전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 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다. 목회를 하면서도 기도가 3,4 째에 가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났다. 나도 그런 위험을 경험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껍데기만 사는 것입니다. 위험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목사가 기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목사가 될 수록 일이 많아집니다. 전도사 때는 관심이 단순합니다. 어느 것 하나를 위해서 집중적으로 투구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두 부서를 맡기지 않습니다. 부동산부터 시작해서 별거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약해집니다. 영혼에 미치는 손해는 엄청 크다. (젊었을 때는 괜찮지만 나이가 들수록. 신체 조건이 변하게 됩니다. 편한 것을 등에 받쳐야 하고 좀 더 편안한 의자도 앉아야 하고 몸이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다) 예전에 어떤 신학생이 어떤 글을 잃고 독후감을 썼는데" 옛날 선지자들이 사우나에나 다니면서 목회를 했겠습니까? 좋은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말씀을 전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내용을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굉장히 통쾌하게 여겼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까 몸의 조건이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형식화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참회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 외에도 기도에 메어 달리면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개인 적으로 보면 사람들을 보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릇된 모본을 보지 말고 좋은 모본을 보고 그것이 모자라면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 하고 묵상하는 것이 기도 생활에 큰 힘이 됩니다. 목회자 자신이 현저하게 기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단순한 의무에 차원이 아니라 환경적으로 방해 받을 때도 있겠지만(집회를 가야 한다든지) 환경을 보호하든지 변화된 환경 속에서도 그것을 유지해야 합니다.
새벽에 기도 하는 것을 기본 뼈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저녁에 일찍 자야 합니다. 뛰어나게 가치 있는 일도 아닌데 별로 내용도 없는 일을 하면서 12시를 넘기는 부 교육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새벽 시간에 비몽사몽간에 일어나게 되고 새벽 시간은 망치게 됩니다. 저녁기도라도 하면 되는데 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그러면 그렇게 안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많은 주석가들은 이 장면을 예수님의 생애전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대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다. 당신이 질 십자가에 대한 통곡과 눈물이라기보다는 두고 가는 양떼들과 당신이 구속해야 할 백성들의 죄가 사랑하는 하나님께 입힌 불명예와 손해 이런 것 들을 부여하는 기도라고 봅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삶에 결정적인 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없었기에 예수님이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대속해야 할 백성들을 위해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기도에 있어서 제 2의 중보자가 되고 있습니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한 목회자가 목회의 성취나 목표 이런 것들은 열렬하게 기도 하는 것만으로는 기도의 깊이나 영성을 대변 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찢어지는 마음으로 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것인 것처럼 느끼면서 이런 사람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고 소명감에 불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도사 때 자신을 좀 가혹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원칙을 세우되 원칙대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 하면서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양보해야 합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말할 필요 없고 어느 만큼이 자신의 연약함을 인해서 자신을 관리하기 위한 양보인지 게으름과 나태함과 야합해서 의무를 태만하게 하는 것 인지 자신도 분별해 내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건강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삼 일은 반드시 운동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체력을 단단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핑계 할 수 없게 됩니다. 게으름과도 명확해 지는 것입니다. 전도사 때 맡은 일도 단순 할 때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서 그것이 자기 속에 인격 적인 특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역을 오래 했는데도 기도가 낯설어 지는 사람들 물리적으로는 상당시간을 엎드린 채 지남에도 기도의 세계에 진전이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마음에 열렬함이 없는 기도생활이 습관화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 속에 사는 게 자신은 기본적인 생활에 있어서 자신이 충실 하다고 생각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 잘 하는 사람보다 기도 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오래도록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보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목회자들이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목회를 해 나가면 상황이 인간 적인 방법들을 하도록 요구 하고 사람들과 부딪쳐 상처도 받고 일에 몰두하면서 경건에 손해도 보고 이런 것들이 독소로 작용합니다. 풀어서 작용하는 것들이 기도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루에 두 번씩 마음을 쏟으면서 기도의 자리를 눈물로 흥건히 적셔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가 기도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의 능력 있는 사역의 비결은 매일 의자에 앉아서 큰소리로 울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또 한 번은 내게 맡겨진 영혼들의 곤고함을 인해서 그는 눈물로 의자를 적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면 사역하면서 성공했다고 자만 해 지지 않을 것입니다. 일에 대해서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기도 속에서 자신을 형성 해 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광야의 신학교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모세처럼 엘리야나 바울처럼.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일이 많아도 휘둘리지 말고 기도의 은혜 속에서 승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방학 때 마다 일주일씩 금식 기도 했습니다.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 학기 동안 영혼의 묵은 때를 씻어 내는 거고 또 하나는 여름 행사들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 했습니다. 철원에 있는 대한 수도원에서 나이가 들면 금식 기도도 잘 안됩니다. (나이 들면 금식기도 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다. 예로 나 아는 목사님은 삼 일을 금식 기도 하고 났더니 관절염이 왔다고 합니다.)
괴로운 일만 보면 금식 기도해서 한 번에 해결 보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어느 날 내게 주님이"소원이 뭐냐?"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신자 되기 원합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나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나를 건너뛰고 지나가는 부흥이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교회 건축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기도를 많이 했지만 뼈가 녹는 것처럼 하는 기도의 제목들은 어떤 물리적인 것들보다는 자신 속에 있는 죄악된 본성과 하나님을 전하면서도 그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아주 기쁘게 여기면서 살려고 하지 않는 육적인 본성을 만날 때 참 절망스럽다.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한 없이 위로를 받으시는 존재가 한 번이라도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생각 합니다.
예수님이 통곡과 눈물로 기도 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에 몸부림 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자신의 한계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그 뜻을 다 이룰 수 없다는 깊은 몸부림과 긴박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큰 사역을 원대하게 욕심 내지 말고 자신을 성실히 준비해가면서 그 가치를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삶, 언제든지 주님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어서 주님이 아파하시던 그 지점에서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이 필요하고 고난에 대한 경건한 반응이 필요합니다. 그 반응이 많이 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극을 받아서 기도해야겠다는 것은 미성숙한 것입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헌신적으로 매달려서 기도 하지 않는 사역자들은 자신은 물론 이거니와 사역지도 변화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랜 시간 매일 마음을 다해서 기도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큰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15절에"이는 저 앞에 큰 자가 되면"주님의 두 눈 앞에서 큰 사람이 되면 세상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큰 사람이 되는 일들이 일어 날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면 참 좋겠습니다.
목회자 인턴십 세미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