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마 5:48)
I. 배경설명
A. 목회란 무엇인가?
그 목회의 길을 간다 그 말이 사실은 너무나 모호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이 뭔가 교회를 돌보고 또 지도자가 되어서 영혼들을 인도하는 그 일입니다.. 목회라고 그래도 좀 애매한데 “신학을 한다” 그러면 목회를 잘 하기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 하는 학문이 신학이고, 또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신학생들이다 우리들이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모두 그래서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틀린
자신은 특별한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는 생각이 꽉 차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자신은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잘 훈련을 받아야 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그 목회라고 하는 말을 사실 저는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애매하죠 목양사역이라고 하는 말은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제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아~ 그 사람 어떤 사람인데 그 사람이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어때? he"s good 그 사람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럴 때는 그 사람이 집을 아주 잘 짓는다는 뜻입니다. 또 어부면 그사람이 “good” 훌륭한 사람이다 하면 남보다 물고기를 잘 잡는 사람입니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이라면 그가 도자기를 잘 굽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 그분 좋은 목회자야 그러면 목회를 잘하는 사람이냐?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사람을 막 모아서 몇 천명이 되었고 교회빌딩을 짖고 그래서 여기저기 방송국에 나와서 인터뷰를 하고 설교를 내 보내서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청취자들이 많이 생기고 그러면 그가 좋은 목회자인가? 아니란 말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 그 자체는 기능이 따로 떨어지고 그 사람이 따로 떨어지는 그런 일 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그 사람이 좋다 라고 할 때는 목회를 잘한다는 그런 뜻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큰 교회를 가지고 있어도 좋은 목회자가 아닐 수 있고 시골에서 아주 작은 교회를 하고 교인들이 내는 헌금으로 생활이 안돼서 도시의 있는 교회들이 보내주는 구제 헌금으로 먹고 사는 목회생활을 해도 그 사람이 좋은 목회자일수 있는 겁니다. 원래 목회라고 하는 것을 제일먼저 가만히 생각해보면 전도는 아니잖습니까? 전도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인생을 살면서 이 복음의 도를 듣지 못하면 구원이 없고 그들이 구원받아야 되는데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당신은 죄인이니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생명에 참여하여 이제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라 그게 전도잖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 구원해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목회는 그것이 아니라 그것은 목회 속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시작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전도해서 구원 한 다음에는 마지막 자기 품에 안고 그 성도의 눈은 감겨주는 임종에 이를 때까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그리그 그 하나님을 위해서 전 삶을 하나님께 바치며 살아가야할지를 가르쳐주고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려니까 자기가 하기 싫어도 교회를 지어야 됩니다. 사람이 안 모이면 교회를 지을 필요가 없지만은 모이니까 교회를 짓고 교회를 지어야 되니까 건축도 알아야 되고 돈이 모자라니까 은행에서 돈을 어떻게 빌리는지 방법도 좀 배워야 되고 건축하면 사기꾼들이 하도 많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백지상태에서 사람들을 시킬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건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아 ~ 이거는 순 날림으로 지었구, 아~ 이거는 진짜 제대로 튼실하게 지었구나, 아니면 그러면 아~ 이거는 미학적으로 볼 때 같은 돈을 들였지만 정말 후지구나, 아~ 이거는 정말 같은 돈을 들였지만 미학적으로 볼 때 보편적인 아름다음을 가졌구나..등등 이런것들을 알아야 되니까 인테리어도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렇죠? 사람들이 모이고 그 사람들이 애를 자꾸나면 그 애를 우리에 가두고 가르칠 수 없으니 그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되는가 알아야되니까 교육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되고, 내가 직접 영아부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지만은 누군가를 시켜서 영아부 아이들을 가르쳐야 되니까 영아의 심리상태나 학습동기 같은 것도 공부를 해야 됩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들을 계속 낳는 자모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목회자요 남자니까 그러니까 아이를 가져 볼 수 없지만 간접경험을 통해서 아이를 가질 때 심리상태가 어떠하고 태교란 무엇이고 어떻게 그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이아를 265일 동안 배속에 품고 있어야지만 좋은 아이가 태어나느냐 그것도 공부해야 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요즘 보면은 우리나라 사회에서 이혼들을 많이 합니다. 뭐 이제는 너무 쉽게 이혼을 합니다. 그러니깐 당연히 교회 안에서도 이혼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주님을 믿게 된 사람, 불행하기는 하지마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도 참 질 못하고 이혼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도움이 필요하고 심리적으론 어떤 상태인가 홀로된 사람들에 대한 심리에 대한 이해도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 뿐 입니까? 사회에 하고도 관계를 해야 되니까 교회는 사회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세상은 또 어떻게 돌아가야 되는지 배워야 됩니다. 이런 것 들은 오늘 밤새도록 예기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런 것 들을 자꾸 배우게 되는 겁니다. 그
런데 그렇게 자꾸 하다보니까 본래의 그것을 왜 배워야할지 출발했던 본래의 동기는 상실하는 겁니다. 본래의 동기는 뭐냐하면 그런걸 잘 할려고 했던게 아니라 영혼들을 전도해서 그 전도한 영혼들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모를 때와는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아서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참된 행복과 덕을 누리면서 살수 있겠는가? 그것을 가르치고 실제로 그들이 그대로 살수 있도록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다 인도를 해야 되는 겁니다.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 목회의 본질이고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목회자가 곤로?하고 분투하는 많은 일들은 사실은 부수적인 일들이란 겁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나면 그러면 결국은 목회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냐면 영혼들을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받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기여하면서 살도록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그자신도 행복하고 인간으로 태어난 그 가치를 훌륭하게 성취하는, 그래서 인간으로 존재 할 때에 하나님 앞에 미백을 지닌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렇게 목회를 정의 한다면 그러면 결국은 교인들을 그렇게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래서 교인이 된 사람들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인간 존재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깊이 따르고 그래서 창조의 목적을 완성해가는 그것이 목회라면 그러면 그것은 이미 벌써 하나의 기능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저 사람에게 뜨개질을 해서 스웨터를 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의 도덕성과는 상관없이 기술대 기술로서 가르치고 전수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목양) 그런게 아니라 그 목양 받는 사람들이 그 목양 받음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덕을 완성해가는 겁니다.
B. 목회자의 소명(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영혼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긍휼)
그러면 그것을(목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여야 하냐면 자기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날은 목회라고 하는 애매모호한 이름아래 자기자랑과 자기성취 그리고 세상적인 욕망의 성취동기 같은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위 비젼이라고 하는 것도 보면 대부분이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고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것들을 비젼으로 내걸고 자기 자신을 헌신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가치 있는 걸로 삼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원래한 사람의 인간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본성적으로 변화가 와야 됩니다. 그 본성적으로 변화가 온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중생을 통해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그래서 영혼에 재창조에 가까운 본성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결코 점진적로 성취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에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자기사랑의 비참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으로 돌아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껏 자기인생을 이어가게 만들었던 사물과 모든 것들에 대한 질서가 거듭남과 회심을 통해서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질서대로 존재의질서의 받아들이고 그 존재의 질서에 가치질서를 부여하고 그 가치질서를 따라 사랑해서 하나님 사랑을 필두로 하는 그 모든 사랑의질서가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 정점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를 성취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기인생에 있어서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간들의 비참함과 불행을 보면서 그들을 교화해서 바른길로 인도하지 않으면 너무 그들이 너무 불쌍하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이 일 이외에는 다른 일에 종사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떨림 그것이 바로 목회의 소명입니다. 목회의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토대로하고 영혼에대한 말할 수 없는 궁휼이 토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목회를 하도록 인도를 하더라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학교를 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교를 간 모든 사람들이 목회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서 이 길이 출발이 분명하지 않거나 내 마음속에서 이 길을 가야할 필연적인 필요를 느끼지 못 한다면 자유해져야 됩니다. 자유롭게 전과를 하거나 다시 재수를 해서 새롭게 학교를 가거나 아니면 졸업을 해서 일반적인 직업을 종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나면 모든 인식들이 분명지게 되는 겁니다.
먼저 토대 기초부터 얘기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도덕적인 의지가 있는 것이고 의지가 있다면 도덕적인 통치가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도덕적인 통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도덕적 의지를 가지시고 그것을 기준으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행동과 모든 것들을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의지와 부합된 사람들은 칭찬하시고 상을 베푸시지만 거기에 거스리는 사람들은 벌하시고 그들이 바른길로 돌아오도록 책망하신다는 사실을 포함하는 겁니다. 그것이 이제 모든 것들을 사유함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도덕적인 의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게 뭐라고 말하지 않더라고 일단 하나님이 도덕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모든 삶은 평가될 수 있습니다. 너의 지금 행동은 선한행동, 너는 악한행동, 너는 그 기준으로 볼 때 좋은 사람, 너는 나쁜 사람, 너는 선한사람, 너는 악한사람, 이렇게 하나님이 판단하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사람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행동 하나 하나에 대해서도 판단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거듭나게 해주셔서 그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긴 했지만 그들 속에 부패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항상 첫 사랑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또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지식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하나님께 아픔을 드릴 수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똑같이 그런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매우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II. 목회자 온덕의 삶을 살고자 소원을 가진 사람
그래서 목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어떤 사모함을 가지고 있어야 되냐 하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온덕의 삶을 살고자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덕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말이냐 하면 이 완전이라는 말과 온전이라는 말이 있는데 완전이라고 하는 말은 정지적 개념입니다. 정지적인 상태에서 그것이 어떤 사물이나 일에 기대되는 결과와 목적을 모두 성취한 상태가 완전 입니다. 온전은 정지의 개념이 아니라 이행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온전해져가는 과정은 완전을 지향 합니다. 온전해져가는 과정이 마지막에는 완전을 지향하는 겁니다. 완전은 정지의 개념이고 온전은 이행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온덕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존재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을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그 계획에 완전히 부합되도록 끊임없이 그 표준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온덕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는 하나님이 그를 수 만명이 목회하는 사람으로 쓰실 수 도 있고 아니면 저 시골에 가서 젊은이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있는 시골에 가서 한 사람 한 사람 땅에 묻으면서 목회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또 강남에 가서 부자들에게 설교를 해서 물질적인 부요함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말고 인간답게 살도록 가르칠 필요도 있지만 가난한 달동에 가서 그들과 함께 조약한음식을 먹으며 일생동안 그들의 선생노릇을 해야 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어디를 갈 것이냐 그것이 국내냐 국외냐 시골이냐 도시냐 청소년이냐 어른이냐 아니면 노인들이냐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역에 있어서 양태의 문제일 뿐 입니다. 그가 누구이던지 그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고, 망가져서 희망이 없는 죄인을 고쳐주신 하나님의 뜻을 다라서 영혼들에게 참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비결을 가르쳐는 것은 어느 세대 어는 지역이나 마찬가집니다. 자! 도자기 굽는 사람의덕은 도자기를 잘 굽는 겁니다. 전쟁하는 사람의덕은 승리하는 것, 글을 쓰는 사람의 덕은 글을 잘 써서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 요리 하는 사람의 덕은 맛있고 영양가 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은 각각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근데 각각 뒤에 사람이란게 붙어 있습니다. 그 앞에 나오는 것은 이 세상의 학교에서도 가르쳐 줍니다. 근데 뒤에 나오는 공통된 것 도자기를 굽는 것도 사람, 전쟁하는 것도 사람, 글을 쓰는 것도 사람, 요리를 하는 것도 사람인데... 그렇다면 모두의 공통분모인 사람은 참으로 누구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훌륭한 것인가 이것을 말해 줄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학교나 학문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한 답을 말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이런 시대에 주식투자로 돈버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멍텅구리 같은 학생이 어떻게 공부를 잘해서 수재가 될 것인가? 그런 걸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도자기 굽는 사람이 그 도자기를 기가 막히게 구워내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당신이 도자기를 굽던지 전쟁을 하던지 글을 쓰든지 교수가 되던지 농부가 되든지 간에 그런 삶의 양태와는 상관없이 인간이라고 하는 본질로 돌아가서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지만 당신이 이세상의 창조된 목적에 따라 살고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 것인지 가르쳐줄 수 있다 이게 바로 성경이고 신앙입니다. 그러면 목회를 해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먼저 정말 내가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보다도 내가 가장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소원을 가지고 온덕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 아버지는 이미 온전하신 것이고 그래서 이미 완덕에 계십니다. 하나님 자신은 당신 자신에게 완전히 합치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의 목적에 거스리시거나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의도하신 바에 대해서 못 미치거나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완덕의 상태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덕의 길을 끊임없이 가야합니다.
A. 목회자의길 온덕의 길이란
그러면 온덕의길이란 무엇이냐 세 가지만 오늘 얘기 하겠습니다 세가지의 온전함을 추구함으로써 온덕에 이르게 됩니다
1. 온전한 앎: 지식
첫째는 앎의 온전함입니다. 앎의 온전함을 통해서 온덕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서 온덕의 길로 가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올바른 앎이 필요 합니다. 온전한 앎을 통해서 자신도 온덕의 길을 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도 온덕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온덕으로 가는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위험은 무엇인지, 그 위험을 극복하는 비결은 무엇인지, 이모든 것이 앎의 속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앎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온전한 앎이란 무엇이냐? 이것은 지식과 지혜로 나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지식은 어떤 사물이나 사물의 이치 이런 것들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르킵니다. 이것이 지식입니다. 그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 합니다. 그 지식을 기초로 해서 지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자기가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길 같아 보이는 갈래길에서 온덕의 길을 향해 가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잘 가르쳐 주어서 지식을 소유하게 하고 또 지혜를 갖게 만드는 것, 그것이 온덕으로 이르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러면 이 지식과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지식 지혜 모든 것이 진리에서 옵니다. 이 진리는 성경에 가장 많이 있긴 하지만 성경에만 이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도 많은 진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성경) 이 진리와(세상의 진리) 아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의 빛으로 이 성경진리를 봐야지만 성경이 잘 보이고 또 성경지리를 통해서 성경밖에 있는 진리를 봐야지만 진리를 어떤 것이 정확한 진리인지 파악하고 그것이 각각에 가지고 있는 가치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목회의 소명을 받고나면 한 10살 때 쯤 목회의 소명을 받은 다음에 학교도 안보내고 성경만 외우게 해서 나중에 목회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명을 받아도 고등학교 대학교 다 공부하게끔 만들고 신학대학원 가서 공부를 하고 훈련을 하고 목회자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지성의 필요성이 대두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밖에 있는 많은 진리를 알고 성경을 보는 사람 또 성경의 진리를 잘 깨닫고 그 모든 이 세상의 있는 진리를 보는 사람, 이렇게 둘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진리에 대해서 가르칠 때 아주 놀랍게 풍성한 진리를 가르쳐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밖에 있는 진리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 존재 하냐면 학문의 형태로 존재 합니다. 그래서 산이 하나있는데 여러 곳에서 산을 올라갑니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사회학, 문학, 미학, 예술 등등 이렇게 올라가면 마지막에 위에서 다 만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중세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놀랍게 학문의 통합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수학자가 천문학자고, 해부학자가 조각가고, 미술가가 음악가고, 음악가가 수학자고, 물리학자가 심리학자고, 이렇게 학문의 융합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다 쪼게어 졋지만 이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좀 못 했어도 워낙 진실하고 하나님과 영혼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목회에 헌신한 사람이 귀하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더 좋기 위해서는 아까 예기한 원리에 의해서 성경과 성경밖에 있는 학문을 두루 공부하고 진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그런 목회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정도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지식들을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많은 학문을 통해서 성경으로 돌아오고 성경을 통해서 학문의 진리에 참되고 거짓됨을 평가해서 마지막 얻게 된 수많은 지식들을 가지고 마지막에 목회하기 위해서 가슴에 움켜지고 있어야 할 그 지식이란 것은 무었이냐? 그것은 물리학이나 해부학이나 사회학이나 이런 것 들의 지식들이 아닙니다.
학문을 통해서 진리를 습득했지만 그 진리는 수많은 진리들이지만 그 진리들을 모두 습득한후 마지막에 가슴에 꼭 품고 있어야 할 지식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프라이케다 비겐디” 직역을 하자면 살아가는 삶의 교훈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은 나는 하우투리브 어떻게 살아야하나 그 하나님의 도덕적인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하나? 이런 지식들을 그 진리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레글라이 끄레덴디 직역을 하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규칙들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하나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아멘하고 믿어야 하는가? 이 두 가지에 대한 지식이 그 모든 학문을 쥐어짜고 학문 속에서 발견한 진리들을 쥐어짜서 마지막에 결정의 형태로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이것은 뭐냐면 프아이케다 비겐디 삶의 교훈과 레글라이 끄레덴디 신앙의 규칙들, 이 두 가지입니다. 좀 더 하고 싶은데 이렇게 하다가는 밤샙니다. 누가 아멘이레? 그래 뭐 한 김에 좀더 가 보십시다. 않되면 내일 새벽에 좀더 하면 되니까 가다가 세 게를 해야 되는데 다 못하면 하나만 하다 끝내겟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 이렇게 물을 것 아닙니까? 목사님 그러면은 이렇게 쥐어짜고 쥐어짜고 쥐어짜서 마지막에 가지고 있어야 될게 그 생활의 교훈과 믿음의 관한 규칙이라면 그 양이 작을것 아닙니까? 물론 작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언급한 학문에 기본적인 책들만 모아논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 중에 한 분야도 다 읽지 못 할 겁니다. 그러면 그 많은 것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짜고 짜고 짜고 짜서 마지막에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된다는데 아~ 그냥 많은 학문 공부하지 말고 우선 그것만 요약을 A4용지로 정리를 해서 나눠주면 우리가 그것만 딱 가지고 있으면 되는것 아닙니까? 근데 문제는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지식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무슨뜻인지 아시겟습니까?
제가 오늘 건강검진을 받고 왔습니다. 오늘 결과를 보러 갔는데 맨 마지막 코스에 영양사가 상담을 하면서 제 식생활을 체크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제가 균형 잡힌 식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식생활은 어느 한 쪽에 굽어있었는데 의지를 가지고 폈습니다. 그래서 먹기 싫은 브러컬리도 요새는 잘 먹고 야채 정말 싫어했는데 잘 먹고 그리고 우거지 같은 거 많이 먹으려고 애쓰고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렇게 좋아하는 통닭 튀김 같은거 않먹습니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 변비가 아주 심합니다. 계속해서 변기가 납니다. 가스가 차고 굉장히 힘들게 6개월째 지내고 있는데 영양사가 하는 말이 커피 많이 드시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커피 드시지 마십시오. 녹차가 몸에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중국 갈 때마다 지체들이 녹차를 하나씩 사다줘서 이렇게 쌓여 있습니다. 그냥 우려서 먹었습니다. 근데 큰일 난다고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 하나 설명을 해주는데 그런 녹차를 먹으면 녹차의 성격은 수분을 끌고나가서 밖으로 쏟아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을 통해서 수분이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빨리 흡수시켜서 빼버려서 장에서는 물이 계속 들어와만 변이 잘 흘러가는데 커피 사이다 콜라 녹차 이런 것들이 장으로 못 내려가고 위에서 다 흡수돼서 소변으로 내벼려지니까 속에서는 음식물이 마르고 비틀어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그럽니다. 난 소화가 안되고 속이 이상해 그러니까 사람들이 커피가 안 좋다고 그러데, 커피마시면 그렇다고 그러더라구. 근데 왜 그렇데? 그건 모르지만 아무튼 그 커피가 뭐가 몸에 좋겠어? 색깔도 시컴해 가지고... 그렇게 얘기할 때 그래? 그리고 내가 그렇게 했다고 그러더라도 지식을 따라서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근데 이 사람이(영양사) 아주 알기 쉽게 정확하게 설명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게 될 때 그것이 지식입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일지 알겁니다. 그러니까 A4로 정리해 가지고 이럴 땐 요렇게 살아라 저럴 땐 저렇게 살아라 그것을 달달달 외운 다고해서 지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식 에피스테메라고하는 것은 그게 그렇다고 아는것만 아는 것이 지식이 아니고 왜 그렇다는 것 까지 다 아는 것이 지식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지식이 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지식은 지식인데 완성된 지식은 아닙니다. 이 얘기까지 하면 길어지니까 이 정도로 끝내고 그래서 그렇게 해가지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많이 고민해서 마지막에 삶의 교훈과 신앙의 규칙 무얼 믿어야 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지식을 간직하는 겁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책을 많이 읽는 다고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게 나옵니까?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아~ 이걸 믿어야 되겟군! 이게 나오느냐 말입니다. 신앙이 무슨 학력고사 순 입니까? 아니잖습니까. 그거는 그렇게 학문으로 존재하는 진리들을 깨닫는 것은 지적능력에만 달렸지만 이것들을 통합해서 마지막에 쥐어짜서 무엇이 삶을 위한 규칙이고 무엇이 믿음의 규칙인지를 마지막에 짜내서 자기 가슴속에 간직하는 것은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그것을 많은 학문을 접할 때 짜가지고 가슴속에 자기가 심어 가지고 있 수 없는 겁니다. 이해됐기를 바랍니다.
2. 온덕의 앎: 지혜
그 다음 두 번째는 뭐냐하면 온전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사물의 척도입니다. 그렇게 정의 했습니다. 사물을 제는 척도입니다. 이것은 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들을 분별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 물리학 공부를 제대로 깊이 하게 되면 이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천체에 관한 물리를 공부를 하면 깨닫게 됩니다. 이 우주공간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있다면 수소분자로 차 있습니다. 차 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분자하나와 분자하나사이의 거리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곳에서 만들 수 있는 진공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우주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수소가 우주의 말하자면 본질입니다. 수소분자가 상상할 수 없는 거리만큼 떨어져있습니다. 밤하늘에 별이 저렇게 많지만은 별 하나에서 별 하나까지의 거리가 빛이 달려가서 최소한 몇 년, 그렇지 않으면 몇 백년, 몇 천년, 지구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은하계가 6000만년을 달려가야만 나오는 거리입니다. 밤하늘에 하얗게 무리가 지어있는 그 은하수가 별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별들 사이의거리가 다 몇 년씩 하는 거리들이란 말입니다. 다 빈공간입니다. 기체입니다. 근데 그것이 모여서 수소가 헬륨이 되고 모여서 모이고 모여서 원소가 되는 겁니다. 여기 지구상에서는 원소가 무슨 100리?(리는 거리의 단위인데...ㅠ발음이 잘 안들림) 까지 된다고 여태까지 발견이 됐는데 그것은 여기서 얘기고 우주공간으로 가면 훨씬 더 단순화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지구는 온 우주에서 희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엄청나게 원소들이 모여서 그것들이 서로 작용을 하면서 수많은 독특한 다른 원소들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주에서 아주 보기 드문 특성을 가진 더군다나 단단한 덩어리가 된다는 것은 기체가 밀도가 놓아지면 다른 양상으로 쉽게 변합니다. 특히 지구 같은 경우 공기가 기온이 떨어지면 액체로 변합니다. 더 떨어지면 고체로 변합니다. 그런 원리에 의해서 지구가 형성이 된 겁니다. 그러면 소위 상대성이론에서 얘기하는 블랙홀 이론으로 들어가면 어떤 작용에의 해서 이것들이 무한소로 돌아갑니다. 엄청난 힘으로 끌여 들이면서 엄청난 크기의 것들이 무한소로 돌아가는 겁니다. 지구가 만약에 블랙홀이 될 가능성은 없지만은 지구가 1.2미리정도의 크기로 돌아가면 블랙홀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은 돌아가면서 빨아들입니다. 그 빨아들이는 그 힘이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 합니다. 그 수치를 보면 그 빨아들이는 블랙홀에서 빛이 1년 갈 수 있는 거리에서 물체가 잡아당기는 그 힘으로부터 이탈하려면 1초에 약 900미터를 정도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힘이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 한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면 빨아들이는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러니까 어느 부분까지 가게 되면 빛조차도 도망을 가지 못하고 빨아들여져서 그 무한소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이 까만 테두리를 만듭니다. 그것이 소위 천문학에서 말하는 사건 지평선입니다. 거기에서는 사건이 보일 수 가 없습니다. 사건을 보려면 빛을 통해서 보는데 빨려들어 가니까 빛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고 그것이 하나의 시커먼 하나의 구덩이처럼 돼있으니까 우리가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빨려 들어가는 본질이 뭐냐 하면 이렇게 다양한 원소를 가지고 있는 지구가 그곳에 빨려들어 간다 그러면 이 원소가 원래로다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복잡한게 아니라 다 타서 없어진다. 그런 개념이 아니라 다 없어지고 원래에 있었던 단순한 원소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돌아가고 돌아가서 마지막에 양자 중성자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과학자는 양자 한 개에서 창조됐을 거라 봅니다. 양자의 크기가 10-1/12 10(앞부분 10인지 12인지 발음이 정확치 않음 확인 바람) 마이너스12승 센치미터 정도,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계산해보면 1조분의 1 센치미터 정도, 그런 하나가 폭발을 해서 우주가 됐다고 보는 겁니다. 하여튼 간에 쫙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없었던 거라는 겁니다. 그대들의 살, 피부, 옷 등등 없었던 거라는 겁니다. 이 지구라고 하는 독특한 환경 속에서 살아있는 것이지 그런 사건의 지평 속에 들어가서 쫙 빨려들어 가버리면 원래 고유의 우주에 있는 원소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외의 모든 것은 창조 하셨습니다. 그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없는데서 부터 창조된 겁니다. 그것은 지금 어눌한 설명이긴 하지만 천체물리학적으로 설명이 되는 겁니다. 빨려들어 가면 몸이 찢어지느냐? 찢어지는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다이아몬드반지를 연탄불위에 올려놓으면 탄소가 되어서 흔적도 없이 싹 사라져 버립니다.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면 않됩니다. CO라는 탄소분자로 싹 흩어져버린 겁니다. 만질 수 있느냐 만질 수 없습니다. 뭉칠 수 있느냐 뭉칠 수 없습니다. 뭉쳐있는 상태가 다이아몬드상태니까 마치 그런 겁니다. 물이 있는데 물을 계속 끓이면 다 날아가고 마지막에는 없습니다. 아~ 물을 한 컵이나 넣고 끓였는데 그물이 어디로 갔지 수중기가 됐나? 아니 수중기도 올라가다 말라서 증발되고 없는 겁니다. 수소분자하고 산소분자하고 흩어진 겁니다. 잡을 수 있습니까? 어디 가서 잡습니까 다시 모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모읍니까? 다 흩어졌는데 그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원소가 많이 모였다고 해서 손에 잡혀 지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해서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인간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 이세상 너머로까지 확장된건지 그런 것 들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가능하게해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자매가 있는데 배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미인으로써 결격사유 아닙니까? 배가 좀 많이 나와서 쳐지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심각하다 해서 헬스클럽에 가서 살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치킨도 안 먹고 배고픈 배 움켜지고 자면서 좀 빼 볼 려고 애를 쓰며 오늘 아침에도 운동하려 갈려했는데 마침 병원에서 당신 지난주에 받은 건강검진 오늘 결과가 나오니까 꼭 이 시간에 오셔야지 만이 선생님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럽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오늘은 병원에 들렸다가 헬스클럽에 가야지. 그러고 이제 한 두달 동안 헬스클럽에 다니며 살 좀 빠진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굉장히 배를 사랑스럽게 만지면서 병원에 갔습니다. 헬스클럽에서 쓸 기구들을 가방에 넣고 지방분해제까지 먹고 병원에 갔습니다. 근데 의사가 하는 말이 준비하셔야겠습니다. 예? 모르셨습니까? 네. 암 4기가 기울고 있습니다. 오래 사시면 한 달 사실 겁니다. 그러면 그 자매가 진단을 받고 오면서 아~ 괜히 간강검진 때문에 헬스클럽 못 갈 뻔했네 하면서 헬스장가서 허리살 빼겠느냐 하는 겁니다. 뺄까? 안뺄까? 왜 ? 어차피 한 달있다 죽으니까? 한 달있다 죽나 십년있다 죽으나. 왜 그러냐하면 죽움이라는 빛이 이쪽으로 끌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빛이 던져줄 때에 그래도 의미있는냐 하는 질문을 자기 행동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겁니다. 건강을 위해서 뺄수있습니다. 배나온데 대해서 자부심 갖지 말고 빼십시오. 죽음의 빛이 들어 왔을 때 의미를 지탱할 수 없는 겁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 하실 겁니다. 그렇게 죽음 정도가 아니라 영원이라고 하는 세계, 나라고 하는 존재 살과 피로 이루어졌지만 그러나 내가 사건 지평선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맨 처음에 내가 창조될 때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물체들은 분해가 되어서 모두 원소로 사라지고 원소는 매우 단순화되어서 그래서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을 알고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가? 자가기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이것이 내 영혼에 유익이 되는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이 지금은 즐거운데 영원의 빛 아래서도 지탱할 수 있는 즐거움인가? 이런 것 들을 제는 것이 지혜라는 겁니다.
3. 온덕의 삶으로 가기 위한 지혜
그 지식과 지혜로 사람들을 온전한 앎으로 인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런 지식과 지혜로 무장되지 않고 더욱이 그런 지식과 지혜를 향한 갈망이 없고 그것을 얻고자하는 열심이 없고 사모함이 없는 사람이 무슨 소명 받은 사람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목회를 하는 사람들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어야 할 앎이란 겁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앎을 상실했고 알려고 하지 않고 허무한 것들에 스스로 굴복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우리도 한 때 그런 사람들이 였습니다. 거기서 돌이켜 섯으니까 앎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께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목회를한다 이전에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사는 동안에 온덕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앎이 너무나 너무나 필요한겁니다. 이 앎이 없이는 온덕의 삶을 살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과 지혜의 중요성이 대두가 되는 겁니다. 이 지식과 지혜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지혜의 빛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비춰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지식과 지혜의 빛은 어느 한순간 얻었다 하며 끝날 빛이 아니라 온지에 이르러야 할 빛입니다. 온전한 지식에 이르러야할 빛 입니다. 온지에 이르러야 할 빛, 그래서 날마다 날마다 이 빛을 더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사람들은 돈 육의괘락 이런 것들을 찾아 헐떡거리는 사람이지만 온덕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저에게는 온전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저를 더 지식으로 가득하게, 어제보다는 오늘 저를 지혜롭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며 나아가야 됩니다. 기도만 할 뿐 아니라 학문을 연구해서 진리에 바다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지식들을 실제로 그 지식 통해 발견하게 된 진리, 삶의 교훈의 원형이 되는 진리, 믿음의 규칙의 원형이 되는 진리, 거기에 자기의 합치시키려는 삶을 실천하면서 진리의 빛이 쌓이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근데 거기서 끝나는 것은 바보입니다. 그것은 아주 기초일 뿐입니다. 신학생은 그래서 고3처럼 공부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품격이 있다면 그 품격은 지적인 품격입니다. 그 지적인 품격의 핵심이 지식과 지혜입니다. 시킨티아. 싸피엔티아 이것을 칼빈은 두개를 경건과 학문이라고 설명 햇습니다. 싸피엔 티아 지혜를 경건을 통해 획득된다고 보고 피에타스 경건을 학문이라고 본겁니다. 그것이 지적인 품격입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 좋은 목회자란 무슨 목회잡니까? 상대적인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싫다고 그럽니다. 그럼 누가 좋은 목회자인가? 좋은 목회자는 지적인 품격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곤고하고 혼미할 때 우리 목사님은 답을 알고 있을 거야, 지혜가 모자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의 규칙을 모를 때 우리 목사님은 알고계실텐데.. 그래서 온덕의 삶을 위해서는 앎이 온전하게 필요합니다.
B. 사랑의 온전함
두 번째는 사랑의 온전함입니다. 사랑의 온전함. 사랑의 정의는 한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끊임없이 그 목표에 고착되어 그것을 향유하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입니다. 그 향유 한다라고 하는 것은 누리는 것을 의미 합니다. 즐거워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온전해진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원래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고착하여 그 목표를 끊임없이 향유하려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인데 그 목표는 둘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 라고 보시는 겁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온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내장까지 빼버리고 완전히 새 걸로 갈아 끼워서 그래서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로 재창조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인간일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성적 피조물의 본질은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이런 질문을 해 봅시다. 로봇10대가 불타고 있고 그 옆에 한 사람이 불타고 있다면 누구를 구출 하시겠습니까? 당연히 로봇가격이 얼마이던 지간에 사람을 구출할겁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고성능 로봇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이 만든 물건 일 뿐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그렇게 도저히 자유로 선택해서 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완전히 선하기만 한 완전히 하나님의 요구대로만 움직일 수 존재로 창조하셨다면 창조의 의미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덕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피조물이 없는데 무슨 도덕적 목적을 하나님이 가지셨다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계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무슨 의미지 아시겠습니까? 로봇을 모아놓고 내 뜻은 너희들이 춤을 추는 거야 이것이 도덕적 목적의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도덕적 목적은 도덕적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성적 피조물을 통해서 성취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에게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 나게 하실 때에도 도저히 죄를 지울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 붙어있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죄를 짓지 않도록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신 겁니다. 근데 자신이 그것이 싫어서 자기사랑에 빠지면 여전히 죄를 지울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신 겁니다. 이 남겨두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죠나단 에드워즈는 “인간의 의존 안에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애절하게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죄가 없는 상태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애절하게 의지하지 않을 때 보다는 죄가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애절하게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애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오히려 그 죄 때문에 이 사람이 죄가 없을 때 보다도 더 하나님을 의지 하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겁니다. 이런 놀라운 지혜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이런 제도를 남겨놓으신 겁니다. 이런 죄들이 은혜에 의해서 충분히 정복 될 때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간접적인 도구가 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 할 경우에 이런 것들이 융성해져서 하나님만 사랑하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궁극적인 누림의 마지막 대상으로 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정상에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은 어떻해 해야 되겠는가? 다른 것들에 대한 사랑은 혼돈을 느끼지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물질을 사랑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동의 할 테니까. 그 물질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지성적으로 혼란을 하나도 안 느끼실 겁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 는 조금 혼란을 느낄 겁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에 그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목적으로 생각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그러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만이 즐거워하고 누리는 대상이어야 하는데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그를 목표로 정하고 끊임없이 즐거워하고 그에게 고착하려는 마음과 영혼의 작용이라면 하나님을 궁극적인 사랑의 목적에 놓아야 하는 것과 이것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다른 어떤 것들을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하라고 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자기 나 좋아? 좋지. 사랑해? 그럼 나 없이 살수 있어? 없지. 왜? 나를 사랑하는데? 돈이 많잖아. 이건 않된다는 겁니다.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이 사람을 통해서 이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보다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것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사랑해? 사랑하지. 정말 사랑해? 사랑하지. 나를 왜 그렇게 사랑하는데? 너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내가 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야.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너무 좋아 하시기 때문이야. 이것은 그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에게 우리가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일까요? 아닐까요 ? 아닙니다. 하나님 저 사랑하세요? 그럼 내가 너 사랑하지. 정말 제가 좋으세요? 그럼 좋아하지. 저를 왜 그렇게 좋아 하시는데요? 너를 사랑 하므로서 내가 나에게 사랑받기 때문이단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의 사랑이 자충적인 사랑이 되어서 하나님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걸 진실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사랑해? 돈이 많잖아. 그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걸 좋아하시잖아. 그러면 진실한 사랑입니다.
근데 그렇지가 않고 그 사람이 마지막이 되는 경우, 저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마지막 목표가 될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자매가 그럽니다. “그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저는 일단은 결혼을 하고 고난을 받더라도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런 경우는 그 사람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는 하지만 하나님을 이용해서 그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입니다. 원리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이 출발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던지 무얼 사랑하던지 자신을 사랑하던지 하는 것이지 누구에게 사랑이 멎어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세상사랑은 세상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좋아하는 자기사랑입니다. 궁극적인 사랑의대상은 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일생의 싸움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를 사랑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로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이 둘은 교통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겁니다. 이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까리따스는 아주 탁월한 개념입니다. 저는 이 까리따스를 지순의 사랑이라고 설교를 했지만 저는 온애라고 부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를 깨달은 다음에 그 감화된 사랑입니다. 그 사랑자체가 아가페에 감화를 받은 사랑이기 때문에 이 사랑의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인 사랑이고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대상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대상을 사랑하지만 그들 중에 누구도 궁극적인 향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대상은 많은데 그것은 궁극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걸 통해서 모두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니까 그럽니다. 놀랍게도 형제를 사랑하는데 돈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신실할 수 없습니다.
근데 이 사람들이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닌데 이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이 사랑이갑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닌데도 놀랍게도 신실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이니까 그 하나님의 신실함을 따라서 살아가는 겁니다. 나 좋아해 ? 왜 ? 돈이 많잖아...그러면 신실하지 않아. 그러나 나 사랑해? 그럼. 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잖아. 그럼 신실합니다. 왜 그럽니까? 물질 자체가 없으니까 그럽니다. 하나님이외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 자체가 영원의 빛을 견디지 못합니다. 끝없이 변동이 없는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완전과 불변과 영원 이 세가지를 충족시켜야합니다. 근데 하나님은 다 충족시키지만 그 형제를 사랑하기 위한 동기가 되는 돈은 이 세 가지를 충족시키지 못 합니다. 그러면서 온애의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근데 그 온애을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인데 그 하나님을 향한 온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겁니다.
1. 온애의 삶의 증거: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
한 사람의 신자가 온애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는 증거는 공동체의 지평 그 속에서만 확증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심각하게 결핍되어있는 정신은 공동체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다 경쟁상대가 되거나 무관심 하거나 그럽니다. 그러면 않됩니다. 신학 논리로 보면 중생이 회심보다 빠릅니다. 영혼이 거듭나야지만 보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내가 가슴이 찢어지는 회개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중생 했으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는 겁니다. 대체로 모태신앙가진 사람들이 그럽니다. 그러니까 내가 눈물 흘리고 회개하기 전에 나는 먼저 그리스도 예수 몸에 접붙여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는 숙명적으로 절대로 그는 혼자가 아닙니다. 숙명적으로 이미 그는 공동체 안에 한 지체가 되는 겁니다. 그가 거기서 떨어져 나오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손가락이 잘라서 떨어져 나갔으면 이것을 사람의 몸이라고 누가 말하느냐 이겁니다. 이게 몸에 붙어 있어야 몸이지 팔이 떨어져 나갔으면 그것이 팔이지 몸이냐 이겁니다. 까리따스라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일대일로서 있는 대자적 사랑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아모르 쏘끼아리스”(?)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에도 그렇게 창조되었고 거듭나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 날 때는 더더욱 모두 다 하나로 묶어져 있는 상태에서 태어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부탁할 것은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부터 배워야 됩니다. 부끄러울 정도로 수준 이하입니다. 저는 교회를 보면서 겸손해집니다. 그래서 온지와 온용이 있어도 그 모든 것을 끌고 가는 것은 온애의 삶입니다. 그 온애라는 것은 까리따스입니다. 그 까리따스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바보 같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눈물이 많이 나면 자기가 하나님에게 향한 까리따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을 자꾸 확인 하려 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상한 신앙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느낌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은 눈에 보이게끔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셨음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내가 기도할 때 눈물 흘리는 것, 이런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의 영성자체를 아주 내면화하고 개인주의화 하면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문제들이 심각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권하는데 아직 가정을 얽매이지 않을 때 공동체를 만들어서 3년 정도만 같이 생활해보십시오. 그것이 목회에 엄청난 도움을 줄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냥 함께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며 좋은 선배에게 지도를 받아가면서 자기를 깨뜨려서 남을 섬기고 희생하는 법을 배우며 형제의 발을 닦아주며 그 섬김을 배워야 됩니다. 남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를 깨뜨리고 남에게 작은 유익을 위해서 자신은 많이 희생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주신 것들이 남에게 많이 흘러들어가야 됩니다. .
그래서 성경에 그리스도를 묘사된 대로 그는 부요한 분이셨으나 우리를 위해서 가난해지고 우리는 가난한 자였으나 그분 때문에 부요해졌도다. 그것을 그런 공동체 속에서 점점 더 성장해가는 것이 온애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여기저기 세미나나 돌아다니고 목회 잘 되고 사람 많은 교회 돌아다니면서 나도 한번 비슷하게 목회 한 번 해볼까 하는 것은 모두다 세상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서 뭐하실 겁니까? 영혼에 대한 불쌍히 여김도 없고 세상의 영광을 교회라고 하는 그라운드에서 구하는 것이지 바뀐 게 뭐가 있습니까? 온애의 삶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이 온애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하던지 모든 것이 수단이 되고 마지막에는 그 사랑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로 자신이 한 없이 즐거워 할 것이 요구 됩니다. 어거스틴이 따가스티온과 히포스티온의 그들에게 마음을 다해서 강조했던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름다음을 묵상하는 겁니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사색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포함해서 영적독서입니다. 세 번째는 마음을 쏟아붓는 기도생활입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묵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죠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책 속에서 중생한 신자의 지울 수 없는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자신의 존재의 아름다움에 심취하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찬양)~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번에 열린 하늘에 보니까 어느 자매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함에 대해서 썻습니다. 그런 겁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사랑.,.. 그런데 그 사랑에만 심취해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통해서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자기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하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다. 교통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의 자기사랑입니다. 아까 이야기 했드시 하나님 한 분 앞에서 그 말할 수 없이 감동을 받아서 눈물 흘리는 그 사람의 사랑의 감정이 얼마든지 사적인 사랑의 감정일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지평 안에서 그들을 자신의존재의 목표인 것처럼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서 자신존재의 참된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고 그들이 자신을 이용하고 그들이 자기의 자원을 활용해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존재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거기에서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보고 즐거워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온애의 삶입니다.
2. 온애의 삶의방해: 자기사랑
이 온애을 삶을 살지 못 하게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사랑입니다. 자기사랑은 출렁거리는 커다란 욕망의 웅덩이를 가지고 자원으로 활용하면서 자기사랑을 성취해갑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이 온애의 삶이 아니면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온지가 있다고 하더라고 물론 이 온지는 온애를 통해서, 온애와 온지는 온용을 통해서 성취되고 이 세가지는 서로 따로 떨어지지 않지만 그러나 온지의 삶으로 나아간다하더라도 온애의 삶이 없으면 그 지식은, 그 지혜는 온덕에 이르게 하지 못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구도의 길에서 최대의 숙제는 어떻게 하면 이 추루한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창조주가 되시며 인간존재의 선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시는 하나님께만 우리자신의 신명을 바칠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질문은 그렇게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온애의 삶을 살기위해서 간단하게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제가 항상 강조하며 말하는 자기 깨어짐이 필요합니다. 온애, 그 까리따스의 온애의 삶을 살지 못 하게하는 것은 자기사랑입니다. 자기 깨어짐은 자기 사랑이 지향하는 자기애에 대한 깨뜨려짐 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자기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에 그렇게 수시로 자기도 모르는 살이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도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사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희생함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인간은 자기를 계속 사랑하고 자기편을 들고 그릇 된길로 가면서도 자기 애착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을 내버려두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사람에게는 여전히 자기가 사랑의 궁극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가 궁극적인 대상이기를 다른 사람에게도 요구합니다. 타인에게 자기사랑이 실현되지 못하면 그 인간이 몇 달 전에 결혼한 남편이라 하더라도 이혼하는 겁니다. 자기가 세운 질서 속으로 사랑의 질서를 수정해서 들어오지 않으면 돈을 많이 가져서 어느 정도 사거나 권력을 손에 많이 넣어서 어느 정도는 꼼짝 못 하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돈도 권력도 없고 자기사랑안에 들어오길 바라는데 안 들어오면 그러면 그것이 아버지라 하더라도 의절하고 교회지체면 마음속에서 단절시켜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며 기대 하셨던 삶과는 완전히 반대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삶은 자기를 죽이고 버려서 하나님이 최고의 질서인 것을 자기 속에서 보여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까리따스를 구현함으로 그렇게 사랑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이상의 목표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다니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왕부를 섬겼습니다. 무엇이든지 왕이 하는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왕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으며 왕을 존경하며 충직하게 일했습니다. 다리오 왕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기에 능하셨느냐” 다리오왕은 직감적으로 다니엘은 자기를 섬기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저 사람의 마지막 목표가 아니라 여호와의 종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니엘은 사랑의 질서를 사람들에게 심었던 겁니다. 이때 여기서 중요한건 사랑의 기쁨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사랑의 질서로 끝이지만 그 사람을 섬기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질서가 최곱니다.
그래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자기를 깨뜨리고 희생하면서 이 사람을 섬깁니다. 그런데 섬김을 받는 내가 섬겨주기 위해서 낮아지고 비천한 삶을 택한 이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느낌이 않드는 겁니다. 이때 까리따스의 정체에 대해서 호감을 갖게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섬겨주는 것 말고 네 안에 있는 그 기쁨의 원천을 나도 갖고싶다. 그때 사랑의 질서는 전염이 됩니다. (찬양)~~자기로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닌 동시에 매우 쉬운 길 입니다. 쉬운 길이 아닌 경우는 내가 자기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이 길은 형극의 가시밭길입니다. 왜냐하면 매일 죽어야 되니까 그러나 만약에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이 길은 매우 쉬운 길이고 이런 길을 가지 말고 자기의 행복과 영광을 위한 사적인 사랑 속에서 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됩니다. 그러면서 온애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3. 온애의 삶: 특별히 교회지체들에 대한 사랑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그렇대 대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온애의 삶으로 대해야 하는 사람은 교회의 지체들 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체가 자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들에게는 상처를 주거나 고통을 주거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마음으로 미워하거나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거나 그가 더럽다고 생각하거나 그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아주 더러운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다른 많은 섬김을 한다 하더라도 결코 온덕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고통을 자신이 당하고 형제에게는 평안을 주고 자신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지체의 명예는 보존해주고 자기는 낮아지고 멸시를 받아도 지체들은 존귀하게 하고 그래서 지체들이 온전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그런 길을 가야됩니다. 그 훌륭한 온애의 삶의 모본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은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을 수 없이 명백하게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얼마든지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그들을 미리 심판하심으로 당신의 정당성을 드러내셔도 아들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아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조차도 들어주실 수 없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주시옵소서” 형제가 명백한 죄에 빠졌을 때에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가 있냐하면 형제가 죄에 빠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정죄하고 미워하는 겁니다. 얼핏 보기에는 진리와 참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악을 경계하는 것 같지만 이미 그 이전에 그를 향한 사랑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가 죄에 빠졌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면허받은 상태애서 그를 미워하는 겁니다. 그건 죄에 빠진 사람보다 더 큰 죄를 짓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면역결핍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백혈병처럼 면역체계가 붕괴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손에 작은 가시에 찔려 상처 하나가 나면 그 상처가 아물지가 않고 계속 덧나기 때문에 죽습니다. 똑같습니다. 교회공동체가 건강하지 않을 때에 어떤 사람이죄를 지으면 명백하게 상처가납니다.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까리따스가 없습니다. 죄는 한 사람이졌습니다. 이 사람을 다른 한 사람이 미워할 때에 마음 놓고 정죄하면서 이제껏 까지 억제 되었던 형제를 향한 미움을 쏟아 붙는 겁니다. 그것을 본 많은 형제들이 헷갈리기 시작 합니다. “저 사람은 분명히 죄를 지었고 이 사람은 저 사람을 엄격하게 정죄하는데 저게 아마 공동체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거야” 하며 정죄한 사람을 본받습니다. 그러면서 전염이 됩니다.
반대로 공동체가 건강하면 한 사람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을 은폐하고 덮고 그런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이 미워하지만 그가 죄를 지은 것을 그렇게 가슴 아파하는 겁니다. 마치 에스라 10장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 에 에스라가 성전에서 엎드려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했던 것처럼 그리고 죄를 지은상태에서 안식을 잃어버린 그 영혼을 궁휼이 여기며 끌어안으면 상처가 금방 아뭅니다. 공동체의 건강함 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온지의 공동체가 되고 온애의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가득 찬 공동체가 돼야 합니다. 가관입니다. 앉아서 일말의 가책도 받지 않고 지체들을 험담하는 사람은 거의 기도 안하는 사람입니다. 기도가 막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살아있는 영혼이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겁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네가 나를 핍박하는데 가시체에 뒷발질 하는 것과 같다 ” 가시가 가득 있는데 뒷발질을 계속하면 자기온몸에 상처가 납니다. 사울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미워하고 비방하고 마음에서 그의 존재를 전혀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몸 밖에 있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을 박해할 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몸의 지체 중 하나가 자기 몸을 해할 때 예수님이 그를 바라보시는 평가는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 그렇게 미워하면 안 됩니다. 지체들이 여러분들에게 악을 행할지라도 그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희생이 따르는데 그렇게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부어주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온애의 삶을 살지 않는 한 자유가 있을 없습니다. 자기를 하나님께 다 드린 사람, 자기집착과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온애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자기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 라기보다는 우리의 삶의 양식과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깨뜨려지고 소멸되고 사라지고 멸실됨으로서 지체들 속에 자기가 사는 겁니다. 그래서 또 다른 화육의 원리가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있는 겁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자기를 다 버리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자기를 깨뜨려 남을 유익하게 하고 자기를 가장 가치 없는 자처럼 소멸하여서 지체들을 부요하게 하며 결국은 자신은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라져서 그 지체 속에 살아있게 됩니다. 죽어서 모두 흩어져도 그 지체 가슴속에 살아있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가 내안에, 내가 그리스도안에 동시에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이런 원리가 성립이됩니다. 그리고 이런 윤리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나 맛볼 수 있는 순결한 복락의 상태를 이 세상에서 앞당겨 누리면서 살도록 하나님께서 교회의 지체로서 우리를 한 몸으로 부르신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이러한 삶을 살면서 자기를 포기하고 부인하고 버리는 자기 죽음의 삶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참 다운 부활에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와 함께 죽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철저하게 나를 깨뜨려서 나를 죽여서 지체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내가 낮아지고 깨뜨려질 때 성례전적인 봉헌이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께 바쳐지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삶이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입니다.
(찬송) ~~ 마지막 피한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목회의 길은 이런 온애의 삶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정말 자기를 깨뜨려 지체들을 부요하게 하고 자기를 죽여서 지체들을 살리고 하나님을 많이 아는 더 많은 빛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내가 오히려 빛이 모자라고 추루해 보이기까지 한 지체를 위해서 거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일된 삶을 살게 되고 우리의 삶 전체가 성례전적으로 봉헌이 되고 우리가 봉헌할 때에 교회가 함께 하나님께 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많은 죽음을 통해서 몸이 더 온전해지고 그러므로 머리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길이 어떤 길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쉬운 길이 아닙니다. 얼마 안돼는 목회의 길이지만 제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깨달음은 “성도는 잔인하다”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진리를 가르쳐 줄 때 땀을 흘리면서 터득한 진리는 그냥 조용히 앉아서 듣습니다. 그런데 진한 눈물과 빼 아픈 눈물을 흘리면서 깨달은 진리는 그들이 듣고 나서 땀을 흘리며 그 진리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진리는 때론 너무 아프게 다가와서 피를 흘리게 만듭니다. 때론 그 진리의 칼 앞에 더러운 자아가 찔려서 그 죽는 아픔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더 이상 구도의 길을 갈수 없을 것 같은 그 핏 빚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것을 깨닫고 알게 된 진리를 설교 할 때 그것이 정말 피 묻은 진리입니다. 근데 그 피 묻은 진리의 설교를 들을 때 성도는 겨우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나서 피 흘리기까지 자기를 죽이며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요 지체들을 자라나게 하기 위한 비료에 불과하다는 것을 삶으로 고백하며 살게 되기 위해서는 그 앞서 가는 목회자가 얼마나 더 죽어야 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런 말 할 자격도 없는 자지만 하나님이 목회자를 주신 이유에 대해서 존 오웬 목사님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어떻게 온덕의 삶을 살아가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 말하게 하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는 사람인 목회자를 세우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길이 끝없는 형극의 길입니다. 그러나 아픈 그 길이 기쁜 길 일수 있다는 것은 신앙의 오묘한 비밀에 속합니다. 그래서 지금 신학교 다니는 시절에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방법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사람은 자기가 도달한 만큼만 살 수 있지 그 이상을 사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온덕의 삶이 바로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삶의 모둔 방면에서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온전해지고자 하는 눈물과 몸부림을 그치지 않으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심방을 하면 열렬하게 심방을 해서 자기의 온 마음을 드리고, 공부를 하면 그 공부에 자기의 온 마음을 드려서 몇 달에 한 번쯤은 공부하다가 책에 코피를 쏟고 엎드려질 정도로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면 정말 처절하게 기도해서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안스러워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기의 온 마음을 다 쏟아 부어서 기도하고 영혼을 향한 사랑에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나 그렇게 온전해지고 할 때에 온지의 삶으로 온애의 삶으로, 그것을 통해서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C. 인생의 소망, 온덕의 길
그래도 목회의 길을 가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길은 갈수 없어서 그렇지 갈수만 있으면 좋습니다. 이 길이 즐거움으로 가득 찬 길이 아니요 오히려 정확하게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있지만 이 길은 행복한 길이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사랑이 없어서 모두 헤메이고 기갈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온애의 사랑을 보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내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빛이기는 하지만 그 지적인 품격 안에서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한 가로등의 역할을 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 자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인데 그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식하고 있을 때나 의식하지 않을 때나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빛이신 주님을 생각하고 만나게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이미 말한바와 같이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있는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가치관과 인생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길이고 가서는 안돼는 길입니다. 끊임없이 온전한 앎과 온전한 사랑으로 온덕의 삶을 걸어가는 것 그 자체가 목회자이전에 인생의 소망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지성과 애성과 의지를 모두 바쳐서 그 구도의 길을 가려고하는 사람에게는 이 길 말고는 이 세상에 가고 싶은 길이 없고 다른 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길로도 만족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할 수만 있으면 이런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앎과 온전한 사랑을 가지고 온덕의 길을 걸어가는 신실한 신자가되어서 가슴 안에 진리의 빛과 사랑의 열로 가득 차서 가장 쓰레기 같은 죄인 안에서도 우리 예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가장 무지한 자에게도 그 빛을 나누어주고 싶은 그 소망에 불탄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리고 이 목회의 길은 오래가는 길이 아닙니다. 저는 40세까지는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총명이나 모든 것이 떨어져서 그랬는지 저는 40세에도 출가를 못한 것 같습니다. 빠르고 총명하면 40세, 그렇지 못하면 45세에 출가를 해서 딱 20년 정도 불꽃처럼 확 타오르고 인생을 마감하는 겁니다. 할 수 있으면 해보십시오. 주님을 의지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III. 온용의 삶
온덕의 삶은 신자이기 때문에 살아야하는 삶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마땅히 살아야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알다시피 전적인 부패성과 무능으로 온덕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가 영혼이 고쳐지고 고쳐진 그 영혼위에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계속되는 진리의 빛에 의해서 어느 길이 참된 길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되는 것을 끊임없이 알고 또 주위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온덕의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자로 먼저 만드신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 그 존재의 목적을 구현.....(파일이 깨졌음)것이니 그리스도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이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는 것은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 위함이고 신자의 온덕의 삶은 곧 인간존재 자체의 온덕의 삶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런 온덕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온전한 앎과 온전한 사랑이 필요하다고 어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 가지 더 오늘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온전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온지 온애 온용의 삶이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세 손발과 같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절재의 삶도 필요한데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 절제의 삶 온절의 삶은 온용의 생활 속에 포함됩니다.
A. 진리를 삶과 합치시키기 위한 요소 온용
용기가 없이는 누구도 절재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용기의 삶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았을 때에 그것이 항상 우리가 살았던 삶을 칭찬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가 우리에게 올바른 표준을 가르쳐 줄 때 삶의 있어서도 그 진리가 가르쳐주는 표준을 따라 살지 못했던 부분들이 드러나게 되고 또 믿음에 있어서도 그 진리가 보여주는 규칙을 따라서 주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던 부분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때에 진리를 통해 보여주는 우리를 향한 온전한 삶의 표준은 하나님의 기대가 됩니다. 그것이 온전한 삶 자체는 아니지만 그 표준에 따라 살 때에 우리들이 온덕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진리에 부합하는 삶, 진리를 통해 깨달아진 삶의 교훈에 부합하는 삶, 진리를 통해 깨달아진 믿음에 규칙에 부합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들은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온덕의 삶은 그 삶의 교훈들과 믿음의 규칙들을 준수해야만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준수해 나가면서도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탁월한 열심으로 생활의 교훈들을 지키려 애를 썼지만 그들은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 했습니다. 왜냐하면 온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없는 온전한 삶의 추구는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보다 자신이 월등한 사람이라는 자만심을 갖게 만들어주고 힘을 다해서 온전한 삶을 살기위해 애를 썼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을 앞세우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진리를 통해서 삶의 교훈들과 믿음의 규칙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또 희생과 수고를 치르면서 그 삶의 규칙에 부합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가 온덕의 삶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많은 지식을 얻고 진리를 통해서 생활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들을 터득했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온전한 사랑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오히려 그 지식이 우리를 교만하게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존재가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아이러니 한 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온전한 앎 속에서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온전한 사랑이 있어야하는데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또 나아가서 자기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 그 올바른 세 관계에 의해서 까리따스는 보존 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도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면 그 까리다스가 유실됩니다. 하나님께 회계하고 온전한 관계를 맺어서 까리따스를 회복했어도 돌아와서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할 때 그 까리따스가 신속하게 부패됩니다.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까리따스를 향한 사랑을 간직하며 살려고 할 때에 용기와 투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하지 못 하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도 사랑자체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리를 통해서 우리들이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진리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희생 그리고 헌신 속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가 우리 앞에 깨달아질 때에 우리는 끊임없이 그 진리 앞에서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온전이라고 하는 그 개념자체가 정지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는 이행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그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 였다”는 의미는 그 사람이 어딘가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께 계속해서 가까이 나아갔다는 온전 지향의 사람이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그런 원리에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깨달아지면 우리는 항상 거기에서 온전해지면 온전해질수록 아주 세부적인 것으로 들어가서 우리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그 진리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온전이라고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온전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죄 때문에 온전에 이르지 못하지만 많이 성화되고 나면 아주 작은 것들이 온전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런 것들을 진리를 통해서 깨닫게 되니까 당연히 성화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정치하고 아주 세밀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잡을 때 큰 물고기는 어망이 굵은 것으로도 잡히지만 작은 물고기를 잡기위해서는 커다란 어망을 가지고는 작은 물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 어망의 그물이 작아 야만이 작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 이것을 우리에게 비유한다면 처음 성화의 길에 들어섰을 때에는 커다란 교리의 틀만 알아도 얼마든지 그가 성화되지만 성화가 깊어지게 되면 죄도 작은 구멍에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미묘한 죄들입니다.
그러니까 더 촘촘한 교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삶의 교훈들과 믿음의 규칙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우리를 항상 옳다고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옳지 않다고 인정해줄 때에 그것에 깊은 찔림을 받고 그 순간에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어려운 것은 아닌데 회개하고 돌아와서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부합하도록 고치는 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알고 회개 이해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호기심만가지고도 가능한데 자기에 삶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는 피 흘리는 분투와 그리고 처절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희생과 노력이 필요한데 그때 필요한 것이 온전한 용기입니다.
그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던 대표적인 사람을 마가복음 10장에서 만납니다. 부자인 젊은 관원이 영생을 얻기 위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물으니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식으로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 였습니다. 근데 예수님은 이 사람이 영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이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가 바로 물질에 관한집착 이였기 때문에 그에게 하나님을 향하여 관심은 있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높은 사랑의 질서를 차지하고 있는 물질에 대한 사랑을 없애시기 위해 결단을 촉구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결국은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는데 재물이 많음으로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 가니라” 결국은 진리에 대한갈망도 있었고 진리도 만났고 또 삶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들도 터득했으나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실행에 옮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살다가 떠나간 사람이나 영생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여러 날들을 고민하며 예수님께 찾아왔으나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버려야할 것을 버리지 못한 사람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둘 다 그 나라를 얻지 못 한겁니다. 과정을 보면 부자인 젊은 관원이 훨씬 고상한 고민을 했지만 결과는 하나님 없는 삶이라고 하는 결과는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서 여기에서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용기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삭개오 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세리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다른 사람의 재물을 탈취한 것에 대해 율법이 정한 그 이상의 배상을 하기로 다짐하고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되돌아섰음을 고백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이러한 용기가 바로 온덕의 삶을 살기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작은 희생밖에 들지 않고 또 그 진리 앞에 자신의 삶을 비쳐보는 것은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정신적인 괴로움에 그 칩니다. 그러나 깨달은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을 해서 내 삶의 질서를 뒤엎고 바꿔 버릴 때에는 이전에 사랑하던 많은 것들과 결별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게 전에는 없던 수 없는 불편을 감수해야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많은 사람이 그 것을 못 하는 겁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하나님 앞에 진리를 통해 무엇인가 깊이 깨닫고 결단을 해서 예전에 오랫동안 계속해 오던 것을 안 한 것이나 혹은 예전에 안하던 것을 결단을 하고 새로 시작하거나 예전에 치르지 않았던 희생을 최근에 희생을 치른 적이 있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진리의 깨달음과 눈물은 잠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한 후에 다시 우리 삶의 질서를 바뀌어진 마음에 부합하도록 고치는데 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지속되는 불순종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한 후에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서 부패하면서 우리는 진전이 없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것 입니다. 죄에 대해 갈등을 하는 것과 투쟁을 하는 것은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갈등을 하는 것은 죄를 사랑하는 현실과 죄를 버려야 할 필연사이에서 그 좌우를 오가며 고통 받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 수 는 있으나 한 성도의 진실성의 향상은 그러한 고민의 양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진리에 합치시킬 때 거기에서 “베름” 진실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말할 필요 없이 자기가 깨뜨려지고 용기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포기해서 자신의 욕망과 결별하고 희생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자신을 합치 시키려했던 결단의 용기를 발휘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진실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을 아는데서 진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 뿐 아니라 자기의 삶을 용기를 통해서 그 진리에 부합하는 과정에서 진실이 함양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런 진실의 함양 속에서 이 사람의 마음은 진실에 대한 풍취를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골목을 지나가다 불고기집에서 연기가나면 마음이 동합니다. 호주머니 속에 돈이 있나 뒤져봅니다, 이것이 그 사람 안에 있는 풍취입니다. 요즘은 그러지 않지만 불고기집에서 식사시간쯤 되면 소기름을 석쇠위에 놓고 계속 구워서 그 냄새를 골목 바깥으로 내보냅니다. 그렇게 해서 손님을 받았습니다. 저는 빵을 참 싫어합니다. 그런데 열린 공간에서 아침이면 빵 굽는 냄새가 1층에서 2층 복도로 가득 찹니다. 그것이 다 상술입니다.<청충웃음> 저도 모르게 열린공간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속에 풍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사모하는 것 같지만 그 진리를 사모하는 것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진리를 명확하게 깨닫고 그 진리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합치시키는 과정에서 “베름”진실을 함양하게 됩니다. 진실을 많이 함양하게 되면 저절로 진리를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진실의 함양을 통해서 진리에 대한 풍취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계속 사모하게 되면 자기를 거기에 더 합치시키려하고 그러면서 진실이 더 증가하고 더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신령한 의미에서 신실함입니다. 신실하지 않게 되면 까리따스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도 변덕스러울 수 가 있습니다. 오늘은 펑펑 울면서 “하나님 제가 형제자매를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하고 미워한것 용서해주세요” 기도하면서 조금 잘하다가 한 이틀 지나면 “저 인간은 왜 존재하는 거야” 하면서 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면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사랑이 되고 맙니다. 진실해지는 이것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 인데 문제는 좋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엔조이 하는 것은 비용이 들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거기에 부합시켜서 자신이 진실해지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습니다. 때로는 그 진리가 우리에게 목숨을 요구하기도합니다. 여기에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는 희생을 무릅쓰는 용기입니다. 그것이 매순간 발휘되어야합니다. 그 용기의 발휘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잘 발휘하는데 자기를 향해서는 용기가 별루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을 정죄할 때 다른 사람은 가만있는데 칼 들고 목 치는 용기, 이것도 용기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자기를 처벌하는데서 발휘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의 용기는 선악을 분별할지 모르는 어린 아이에 손에 들려진 칼과 같습니다. 진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고 그 진리에 속한 것 이라면 그가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내 살이나 내 빼도 도려낼 수 있다 이런 용기를 가지고 가야 됩니다.
B. 온용 온지 온애의 상호작용
이 용기에 있어서도 점점 자라서 온전한 용기에 이르게 될 때 그 용기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 지식을 통해 사랑이 온전해지고 온덕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용기가 정말 필요합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희생한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진리에 우리자신을 합치시키기 위해서 그런 욕망이 없었더라면 치루지 않았을 희생을 무엇인가 치른 적이 있습니까? 이 용기있는 삶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증진시키고 온전한 사랑을 우리 안에서 증진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진리를 보여주시고 그 진리에 나 자신을 합치시기 위해서 용기를 발휘하여 나의 소유를 버리거나 나의 습관을 버리거나 혹은 나의 욕망을 포기하게 될 때에는 진리를 아는 놀라운 지식들이 증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 뿐 자신을 거기에 합치시키지 않은 사람은 진실해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온전히 알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킬 때 그 때에 그 지식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진리에 대해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식을 토대로 계속해서 또 다른 인식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에 증가는 단순한 공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통한 지식이 필수적이지만 자신이 그 지식을 통해 얻은 생활의 교훈과 믿음에 규칙에 부합시키려고 철저하게 용기를 발휘하게 될 때 말씀의 새로운 지평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이 신자 안에 있는 많은 죄에 대해서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바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덕의 길을 가고자 애쓰지 않았더라면 그런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또 그런 것 들을 극복하며 자기를 진리에 합치시키는 온전한 용기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지식이 계속 해서 발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힘든 것 입니다. 온전한 용기를 발휘하게 되면 그 진리에 합치시키기가 쉬워지고 합치시켜지면 그 용기를 통해서 더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니 이 용기가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많은 진리들을 깨달았지만 그 진리에 부합한 삶에 이르지 못했던 모든 것들이 용기 없는 비겁함 때문이 아닙니까? 진리는 옳고 그 진리는 내개 기쁨을 주지만 내가 그 삶을 진리에 합치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다면 내가 어떻게 될까? 이런 것들을 내가 포기해버린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불편할까? 또 내가 이런 것들의 희망을 포기한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쓸쓸 할까? 결국은 모든 관심사가 자기만족에 집중되기 때문에 온전한 용기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C. 온용에 이르는 길: 최고 가치 중심으로(하나님의사랑)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러한 온전한 용기에 어떻게 이를 수 있겠는가 하는 겁니다. 이러한 온전한 용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은 이웃이나 가족 그리고 다른 것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 그 다음에 행해보지 못한 의무를 짊어져야하는 두려움, 이미 가졌던 것들에 대해 버려야하는 희생의 대한 두려움, 이런 것들이 온전한 용기로 나아가게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용기의 삶은 사실은 온전한 사랑이 발전된 가운데 용기도 함양이 되는 것 입니다. 이 세 가지는 따로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나와서 함께 가는 것 입니다. 그 안에서 절제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항상 우리들이 자기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가치 자체를 자기에게 최고 가치를 두는 것 입니다. 사랑의 정의를 그대로 대입해보면 자기 자신을 목표로 정하고 자기가신에 고착하여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즐겁게 하려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이 자기사랑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의 질서를 포기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최종적인 사랑의 질서의 목표가 되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사랑은 꺾여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자기사랑은 온전할 수 없고 결국은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이러한 자기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생각 속에 어떤 생각을 명료하게 해야하냐하면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이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하는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 용기는 결국 순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순결한 마음의 결정적인 특징이 의지의 올곧음입니다. 순결한 마음의 결정적인 특징이 올곧음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하고자하는 올곧음을 갖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은 없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과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모두다 원소가 되어 흩어지고 무로 돌아가도 마지막까지 존재하는 분은 하나님 한분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대한 사랑은 영원한 사랑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문학 예술 이런 것들은 영원한 것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해도 영원한 것을 얻으면 내가 행복하다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진리에 부합하기를 힘써야 되며 용기를 가져야 됩니다. 그 용기가 점점 커지고 온전해질 때에 우리들이 온덕의 삶을 살게 되는 것 입니다.
D. 최대가치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러면 이제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이 온덕의 삶의 최고의 가치이다. 이것을 발견하고 나아갈 때에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들이 바라보아야할 대상이 있으니 그분이 중보자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중보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점점 더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며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치르셨던 수많은 희생과 용기를 보면서 감화를 받으며 이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그 모본을 우리들이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너희들이 죄와 싸우기는 싸웠지만 아직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는 않았다. 그러면서하시는 말씀이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그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상급을 위해서 잠시 받는 고난과 괴로움에 부끄러워하지 않니 하시고 자기를 다 바치셔서 고난을 이루셨다.” 예수그리스도를 보면서 우리가 참으로 진리에 자기를 합치시키기 위해서 용기 있는 삶을 살아야하는 모본이 무엇인가를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구나 생각하며 가슴에 새기면서 주님처럼은 아니지만 그 원리를 따라서 주님처럼 희생하고 주님을 닮은 헌신과 용기, 주님을 닮은 자기희생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그러므로서 우리들이 온덕의 삶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목회자의 삶은 끊임없는 구도의 길을 앞서 가는 자.
그러니까 이제 목회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 신학의 도상에 있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기본적인 온덕의 삶에 매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던지 마음을 다 바쳐서 온전해지기를 힘써야합니다. 학문이면 학문, 기도생활이면 기도생활, 영혼을 위한 섬김이면 섬김,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봉사면 봉사, 무엇이던지 간에 자기를 다 바쳐서 온전해지려고 힘스는 가운데 온전한 앎 온전한 사랑 온전한 용기가 무엇인가 하는 비결을 터득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손에서 손으로 전달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끊임없는 자기포기와 자기희생 그리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배우면서 그런 삶을 살아가노라면 어느 날 주님을 너무나 많이 닮아있는걸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목회는 자가기 걸어온 그 길을 이제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가고자하는 그 길 중에 목회자는 안가본 길이 없어야합니다. “나도 모르거든 우리 함께 연구해보자”이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철저한 온덕의 삶을 살 때에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된 것, 이것은 지식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식을 통해서 온덕의 삶을 산후에는 자신이 어떻게 온덕의 삶을 살수 있었는지 하는 비결들은 다시 체계화시켜서 교리로 만들어야합니다. 그래서 아직 그 길을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가고 싶도록 그리고 능히 갈 수 있을 것 같이 어려움을 만나면 그 지식으로 극복하고 그 길을 다 걸어갈 수 있도록 지성적으로 잘 가르쳐 주고 그걸 배울 때에는 마음이 뜨거워져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며 그리고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도 내가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리라 하는 용기가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 진짜로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그 위에서 그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형태는 다양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가르쳐 주던지 성경공부를 통해서 가르쳐주던지 책을 써서 가르쳐 주던지 정 없으면 잘 가르치는 사람을 써서 가르쳐 준다던지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열심히 따라 간다하면 그 목자는 저 앞서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앞서 걸어 가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것이 끊임없는 구도의 삶입니다. 그 안에서 목회를 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구도의 삶을 걸어가면서 행복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안일한 생활을 꿈꾸고 시간이 지나가면 교회에서 자리하나 마련하고 편안한 삶을 살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행복을 누리면서 걸어가야 합니다. 버려야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꿈꾸는 즐거움과 소망을 포기할 수있어야합니다. 포기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다 밥 먹고 결혼하고 옷 입고 살지만 아무것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모든 것들의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통합되는 그런 교통의 사랑이 되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완성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렇게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져서 온덕의 삶을 살게 될 때에 하나님께 말할 수 없이 사랑받을 것 입니다. 그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게 될 것 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삶과 죽음사이의 경계 같은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떠나있으나 여기 있으나 언제든지 건너갈 수 있는 어린 아이들이 땅바닥에 석필로 그어놓은 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세상에 일어나는 작은 일 때문에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가치가 적은 일에 엄청난 자원을 소비하는 어리석은 인생은 안 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생활이고 신앙생활입니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