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 신학의 진수
녹취자: 김경애`
당하면서 그때 그리스도 예수께로 투사시키는 것입니다. 이것도 굉장히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게 그렇게 해야 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되는 깊이가 은혜의 깊이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은혜의 물에 잠겨있을 때에는 자기가 고난을 받을 때 자기가 그렇게 해야겠다고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당하는 많은 고난을 그리스도 예수께 투사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은혜의 상태에 있는 경향성과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자기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서 이 괴로움을 당하는 이 모든 과정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투사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그 고난이 이천년이라는 간격을 뛰어넘어서 오늘날로 Actualize 즉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단지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어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어 가시는 그것이 영적으로 이천년이라는 간격을 뛰어넘어서 오늘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가는 그 대상이 바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슬러 살고자 하는 경향성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동일한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이 죽는다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한 살을 떼어내서 치료할 때도 아프고 썩어가는 살을 잘라내어서 수술할 때도 아픈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옛 본성과 새 본성이 있지만 우리가 새 본성의 아픔도 우리가 느끼고 옛 본성의 아픔도 우리가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옛 본성이 죽어갈 때 고통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통은 오늘 내 안에서 경험되는데 사실은 그것을 통해서 다시 환원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의미와 그 고통이 실제화 되어 경험되면서 들어오게 되고 경험되어진 그것 때문에 다시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환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죽음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비결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조건인 이것을 경험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것을 겨우 설명했지만 이것은 신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성으로 풀어서 설명을 하려고할 때 설명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입니다. 경건에 관한 많은 담론들이 서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이것들이 이성만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어려운 허황된 이야기로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삭제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마지막에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종교적인 의무를 행하고 그러는 것 이외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면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에 중생하고 회심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들은 현저하게 무지한 상태에 있어서 그래서 도저히 이런 것들을 설명해낼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우리들이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의 세속화는 결국 이것을 포기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회사역에서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이 방어선이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결코 목양할 수 없다. 그리고 목양하는 이 사람도 끊임없이 변화되지 않으면 결국은 목양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각오를 가지고 끝임 없이 이 영혼의 문제에 접근하고 그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 하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찬란한 진리의 빛, 불같은 성령의 역사,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 된 마음, 그런 속에서 체계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구원의 도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지식과 그리고 담론과 사상을 요구하겠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의 사역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지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가르쳐줄 수 있고 회개를 해본 사람이 회개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줄 수 있듯이 우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서 먼저 경험되고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중국 의학사에 신동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아주 전설적인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허준과 같은 그런 사람인데 그 허준보다도 훨씬 더 고대시대의 사람입니다. 스스로 의학의 길을 의학과 약학의 길을 개척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일평생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스스로 자신의 몸에 병을 만들고 그 병을 치료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몸 전체를 실험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상처를 내어서 피가 막 흐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무슨 약초를 바르면 되는가? 그러면서 어떤 약초를 발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덧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면 안 된다.’ 이것을 여기에 써넣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른 약초를 발라봅니다. ‘이것은 낫더라.’ ‘그런데 이것을 그냥 바르지 말고 쪄서 바르니까 더 잘 낫더라.’ 이런 식으로 해서 의학서를 완성하고 약학서를 완성했습니다.
그런 약학서적들이 말하자면 개혁파신학의 교리이고 그리고 청교도의 신학이 이런 성화의 교리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해도 되겠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먼저 자기도 질병투성이 인간으로서 또 다른 질병이 있는 사람들에게 목회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그 약을 발라보고 써보고 그래서 자기가 변화되고 나은 경험을 하되 그 사람들이 모든 것을 진술한 것이 아니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진술할 수 있습니까? 지금 여기의 경치가 아름다운데 여기를 묘사한다고 칩시다. 여러분 모두를 묘사해놓아도 사람마다 다 틀립니다. 그 다음 사람이 가서보면 물론 공통된 점도 있습니다. 라이트가 있고, 화단이 있고, 테크가 있고, 나무 몇 종류가 있고, 그 다음에 등불이 있고, 등등 이런 묘사는 공통되지만 그것이 어떤 색깔이고 어떤 것인지는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어떻게 하느냐하면 그것을 자기가 치료해보면서 이 사람들의 교리들 속에서 빠진 것 혹은 그 교리를 더 발전시키는 것 이런 것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작성해나가는데 그것을 자기 자신이 먼저 복용해보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자신이 먼저 복용해보고 자기를 치료해보고 그러니까 우리의 삶속에 일어나는 모든 삶의 정황들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참된 신앙의 도리를 깨닫고 실험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은혜 안에 있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고 충만하다면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나의 이 지성은 현저하게 밝아지고 예전에는 성경을 읽어도 지루하더니 말씀이 막 깨달아지더라. 그리고 말씀과 말씀 사이의 연결들도 어쩜 그렇게 놀랍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라보는 모든 것들을 볼 때마다 나의 사고가 내가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와는 현저히 다른 특징이 있더라. 그 특징이 무엇일까?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것을 청교도 제레미 테일러 같은 사람은 그것을 세크레틴이라고 그랬습니다. 정사의 삶입니다. 살피는 삶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 그랬구나! 이럴 때에는 내가 이렇게 하니까 이길 수 있구나! 이럴 때에는 이렇게 하니까 이런 결과가 오는구나!’ 하는 것들을 정리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과연 성경에 부합하는지를 다시 조사하면서 그러면서 이론들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교리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만약에 극단적으로 잘못에 빠졌다. 영적인 침체에 빠졌다. 심지어 죄를 지었다. 라고 할 때도 침체에 빠지면 내가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어지럽습니다. 이럴 때는 어떤 현상이 오는가? 이것도 그 안에서 살펴보아야합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은혜 밖에 있어서 미끄러지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물론 이제 자기 성찰까지도 모두 그쳐버리면 이런 것 깨달음 같은 것은 아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신자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죄는 죄 가운데 있기는 하지만 그 나름대로 그 안에서 또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졌을 때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정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을 때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가 뭐라고 그럽니까? 자기가 편안할 때에는 나의 이 편안함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했는데 불현듯 자기가 미끄러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나의 견고함이 마땅히 견고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들어주셨기 때문에 견고하구나! 하는 것들을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깨닫지 못했었는데 미끄러지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깨달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이 미끄러졌든지 은혜 안에 있든지 바라보는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삶의 모든 환경들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모든 이 지식에 있어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은혜 안에 살든지 미끄러지든지 어디서든지 건질 것이 있으니까 아무렇게나 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런 논리를 우리가 제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런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사망에서 건져내리오.’ 그가 만약에 침체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옛 본성과 새 본성의 그 격렬한 투쟁에 대해서 눈뜰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온몸 전체를 사용해서 그러니까 목회자 자신이 이미 완벽한 성화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인 것처럼, 믿음생활을 이미 완수한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사는 것은 순전히 허위라는 것입니다. 순 사기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가 성도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도 기도가 안 될 때 있습니다. 자기도 은혜에서 미끄러질 때가 있습니다. 없습니까? 왜 없습니까?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성도들은 표를 내지만 자기는 어디에 가서 은혜가 떨어졌다고 구역장에게 하소연하지 않을 뿐이지 마찬가지입니다. 또 주일날 설교를 해야 하니까 예배에 안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차이지 무엇이 다릅니까? 똑같은 삶입니다. 똑같이 목회자와 평신도의 차이 그 이전에 성도로서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목회에 대한 고민은 목사로서 어떻게 훌륭하게 살 것인가 이런 고민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하는 그 고민입니다. 목사로서의 고민은 성도에게 해당이 안 되는 고민입니다. 목사로서 그렇게 교회를 부흥시키는 비결을 터득해서 성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렵니까? 성도들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신실하게 신앙생활 해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있을 동안에 온 힘을 다해서 힘써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대부분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바다 끝까지 가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른 것이라면 틀릴 수 있습니다. 나는 추위를 잘 참는다고 그러면 추운 데로 가면 더운 데에 있는 것보다 힘을 더 낼 수 있을지 모르고 어떨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바다 끝으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지 학문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신앙으로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목회의 모든 비밀, 설교의 모든 자료, 이 모든 것들이 대부분 하나님을 향해 분투하는 자신의 신앙생활 과정 속에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깊어질 때 하나님의 객관적인 말씀은 새로운 각도로 다가오게 되고 성도들의 삶이 새롭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우습게 들으면 안 됩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직원들보고도 내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모든 것을 용서한다. 일을 못해도 사고를 쳐도 괜찮다. 신앙생활만 잘해라. 그러면 용서한다.’ 왜? 신앙생활을 잘하면 반드시 그 사람은 변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다 일을 잘하겠습니까? 그렇게 일을 다 잘할 것 같으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어떻게 부장, 사장, 전무, 직원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죽어라하고 일생동안 직장을 다녀도 과장 한번 못해보고, 부장한번 못해보고 퇴사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는데 그러면 어떤 사람은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어떤 사람은 받지 말고 그래야합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이야기해서 이런 식의 엘리트주의를 반대합니다. 오늘날에도 설교나 간증집이나 강연 속에서 굉장히 유행합니다. ‘누가 예수를 잘 믿었고 변화되었더니 서울대를 갔다더라. 미국을 가서 큰 출세를 했다더라. 어떻게 했더니 회심하고 나서 세계적인 학자가 됐다더라. 사업을 했더니 엄청나게 부자가 되어서 그룹을 이루었다더라.’ 해당사항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해당사항 없습니다. 그런 것을 몇 가지 케이스를 갖다놓고 뻥튀기를 해서 누구든지 꿈을 품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러는데 다 거짓말입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여전히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들이 있고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그렇게 미국에 가서 세계적이 장, 차관이 못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격려를 줄 수 있는 곳이 교회가 되어야지 엘리트주의로 교회가 나가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것은 인생의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이 아닌데 마치 신앙은 마치 그것에 엘리트주의에 목숨을 걸어야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간증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다른 의미에서 성공한 사람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진정한 희망이 무엇인가? 그들이 그렇게 성공한 것 때문에 신앙이 빛나는 것인가 아니면 신앙이 빛나는 것 때문에 그들의 지위가 빛나는 것인가를 물을 때 우리는 분명하게 답을 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그런 것이 싫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웰즈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속주의라는 것은 반드시 세상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도 얼마든지 세속주의가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세속주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세속주의를 방관하는 것 아닙니까? 전에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 이번에는 예수를 힘입어서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이것이 또 하나의 세속주의가 아닙니까? 어떤 아이들은 회심하고 나서 전교 1등을 했다고 그러는데 우리 아이들은 회심을 해도 전교 1등을 하지 않습니다. 왜? 바탕 자체가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항상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들은 구분해서 그 두 개를 한꺼번에 연결해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좌절을 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본질적인 것이 제일 앞서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목회를 하고 많은 날들을 돌아보면 목회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온 신앙의 날들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질문1)
물론 성령이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데…….구체적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깊이 있게 다룬 책도 없고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또 우리의 경건생활이나 실제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목사님께서 그동안 신앙생활 하시는데 어떤 식으로 역사하시고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지 명확하게 설명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그것도 사실은 어떻게 보면 경험적인 일입니다. 사람 속에 성령님이 오셔서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초자연적인 사실인데 어떻게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령이 성화의 맥락에서 구원에 있어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통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의 끊임없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은혜의 통치입니다. 통치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힘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가 나라인데 내가 다스립니다. ‘모두 내려가.’ 내려가게 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통치입니다. 그것이 ‘안 내려가면 여기서 총살당한다.’ 그것에 의해 내려가든지 아니면 ‘저분이 너무 훌륭한데 우리가 안내려가도 저분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잘 따르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내려가든지 아니면 일층에 내려가면 돈을 만원씩 준다고 그래서 내려가든지 어떻게 하든지 이 사람의 지시가 사람들에게 힘으로 작용해서 내려가게 하는 것 그것이 통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끊임없는 죄의 방해가 있어도 여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어서 결국은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그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입니다. 그 은혜의 통치는 곧 성령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설득하는 힘으로써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무엇이 들어오느냐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함부로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이런 식의 표현을 함부로 남용하면 성도들에게 미묘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이제 실감나게 간증하기 위해서 ‘나는 절대로 가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로 이해되지만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런 식의 묘사는 적합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의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설득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되 신비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설득하고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모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무수단적으로, 무방편적으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말하자면 우리를 충동하듯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갔다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이 우리 안에 들어왔을 때 하는 일입니다. 귀신이 그런 식으로 역사하는데 성령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마치 마귀는 기수와 같아서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라는 말을 탈 때에 미친 듯이 말을 몰지만 그러나 성령님은 말이 그렇게 날뛰어도 모실 때에는 그 말을 잘 다스리시면서 그래서 말과 마부가 기수가 하나가 되어서 그렇게 말을 달리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전자의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자기의 의지나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밀어붙이실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쓰시는 방편들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충만한 내주하심을 충분히 우리 안에 영향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의 빛, 그 다음에 진리의 말씀, 그 말씀을 깨닫는 것, 기도생활, 예배, 묵상하는 생활,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생활, 그 다음에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생활,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우리 안에 주님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셔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질문2)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다. 라고 하시며 목사님의 저서에서 인간은 완전한 사람으로 창조되었지만 안전한 사람으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그랬는데 저희가 성도들에게 계속 질문을 받다보면 어떻게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안전하지 않는데 어떻게 완전한가? 그 질문을 사실 직접적으로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그것은 기본적인 이해가 잘못된 것입니다. 안전하지 않은데 얼마든지 완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구르트가 있다고 칩시다. 요구르트는 발효유입니다. 그것은 아주 잘 발효된 상태로 유리그릇에 놓여있습니다. 완전한 요구르트입니다. 그러나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왜? 시간이 지나면 부패합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안전해야지만 완전하다면 요구르트가 발효유가 적당하게 있는 상태에서 백날을 내버려두어도 멈춰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어떻게 있습니까? 그럼 만약에 이것이 하루만 지나면 상한다고 그러면 완전한 식품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자기의 사유가 잘못된 것입니다. 상식에 속한 것인데 어떻게 안전성이 없어도 얼마든지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그런 상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랬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요즘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겠지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책 속에서 Speculative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사색적, 사변적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것을 별로 좋은 뜻으로 쓴 적이 없습니다. Speculative 라는 단어를 대부분 별로 좋지 않은 의미로 썼습니다. 그런데 고별설교를 하면서 남긴 유시와 같은 설교가 무엇이냐 하면 실천적인 지식만 가지려고 애쓰지 말고 사변적인 지식을 가지도록 힘쓰라고 긍정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한번 삐딱하게 사고가 되면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안전하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 완전한 것입니까?’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완전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말고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이외에는 모두 변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변하지 않는 것들은 완전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비교하면 아무것도 하나님처럼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나무로서 완전하다. 책상으로 완전하다. 인간으로서 완전하다. 기계로서 완전하다고할 때 기계는 기계를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지 카메라를 보고 ‘저것은 완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저것은 뛰지 못하기 때문에.’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사물의 범위 안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질문3)
사도 바울의 고백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답변)
그 부분이 그래서 결국은 그 구절은 우리들이 양쪽의 극단의 해석을 모두 피해야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이 은혜가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결국은 진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난 다음에 신자들이 탄식하는 그 상황이라는 해석도 배격해야하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영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단지 깊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너무 심오해져서 죄에 대해서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만 해석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로 충만해졌을 때는 오히려 사도 바울이 말하자면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냐?’ 죄의 권세를 묻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 죄보다 훨씬 강한 은혜의 힘! 그래서 둘 사이에 균형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보느냐하면 한편으로는 사도가 보다 깊은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진리의 빛과 성령의 계시 안에서 예전에 못 보던 자신을 깊이 볼 수 있는 영적 성숙의 상태에 대한 한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영적인 성숙의 상태에서 밝은 빛으로 자기를 비추면서도 여전히 충분히 은혜에 의해서 죄를 이겨내는 그런 아주 고상한 영적인 상태가 아니라 죄가 자기에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도록 강한 힘을 가지고 역사하는 그런 상태를 은혜의 탁월한 깨달음 속에서, 진리의 빛 속에서 보다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면의 상태를 보게 되는 것은 실제로 은혜가 많아야지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 항상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환하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면서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때 사진을 찍는 것처럼 어느 한순간에 불이 확 들어오면서 우리 자신을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에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을 받아서 성령의 조명으로 자기 자신의 악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뚜렷하게 보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것도 은혜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아직 경향성의 문제로 볼 때에는 이 죄의 성향이 충분히 죽고 자기가 온전히 승리한 그런 상태를 반드시 동반하는 것은 아니고 조명이라는 것은 은혜 충만하고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사람에게만 조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구렁텅이를 헤매는 사람에게도 은혜의 조명이 있습니다. 또 굳이 죄악의 구렁텅이가 아니고 은혜의 지상이 아니더라도 그냥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이 조명이 어느 한순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생각해본다면 사도 바울이 어느 한순간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평범한 상태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확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빛이 워낙 밝으면 그러면 그 빛이 없었을 때에는 ‘내가 무슨 죄야? 나만큼만 살라고 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형편없습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는 언제였느냐 하면 은혜가 떨어졌을 때가 아니라 은혜 안에 있을 때 그런 기도를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말하자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교도들 많은 사람들은 1번은 사도 바울이 보다 깊은 은혜의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자기의 심오한 죄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것도 받아들이면서 그러면서 또한 사도 바울이 은혜의 상태에서 많이 물러난 가운데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어떤 필연에 의해서 자기가 악으로 살아보는 것 아닙니까? 그게 뭐 미움이든지 욕망이든지 무엇이든지간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실제로 사도 바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런 것들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질문4)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존 오웬이
진짜 참된 신앙의 길을 걷게 하는 후세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 인문학적 소양을 가르쳐야 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를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목사님께서 40대 후반에 다른 학문분파의 통합과 관련된 경험을 하셨다고 하는데 어쨌든
답변)
우리 모두 그런 교육의 희생양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세부적인 것에 대해서는 사실 제가 말하기가 그렇고 제일 좋은 것은 교회에서 그런 포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개혁주의적 조망을 가진 사람들이 학교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기 밑의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필요하면 대학원까지 그렇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요원한 이야기이고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을 깊이 만나면 그러면 신학적으로 구속주에 대한 앎은 필연적으로 창조주에 대한 앎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을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그 즉시로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연애만 해도 달라 보입니다. 경험해보았을 것 아닙니까? 나무가 어제의 나무가 아니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을 본뜬 사랑에 빠져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키드 데이비드가 그런 노래를 했습니다.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왜 태양은 계속 빛나나?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왜 바닷물은 끊임없이 해변으로 밀려오는지? Don't they know it the end of the world? 그것들은 이 세상이 끝난 줄도 모르나봐? It ended when you say good bye.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이 안녕하면서 떠났을 때 끝나버렸는데. 그것입니다. 그런 인간 사이의 세속적인 사랑관에도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연애를 하고 기분 좋으면 새가 노래하는 것이고 똑같은 새가 앉았는데 둘이 싸웠을 때는 신경질이 나고 그리고 헤어졌을 때 슬프면 우는 것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주님을 만나면 우리 모두 세계 전체를 볼 수 있는 그런 눈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회심시켜놓으면 자꾸 묻는 질문이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것을 어른들이 자꾸 싹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을 못 만났더라도 이렇게 포괄적인 우주관에 대해서 가르쳐놓으면 주님을 딱 만났을 때 불이 확 들어오면서 그 전체의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통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지식이 아까 이야기한 인문학적인 소외나 이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의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 신화입니다. 어렸을 때 이 신화를 읽히는 것을 나는 맨 처음에 몰랐을 때에는 ‘이거 순 이교도들 아냐? 아니 성경을 부지런히 읽혀야지 왜 그리스 신화를 읽히는 거야?’ 하면서 ‘이것을 하면서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상상력을 넣어주려고 하는가?’ 그리고 사실은 내가 설교 속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신앙 속에서 그리스의 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닙니다. 그런 신화 속에서 아이들이 아주 놀랍게 익혀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판타지입니다. 반지의 제왕 같은 것들입니다. 선악의 대조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런 것들 자체가 신화 자체가 말하자면 어린아이의 사유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굉장히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그리스 신화를 쪼가리쪼가리 읽다가 다 버렸는데 그것을 열심히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지금 목사가 된 다음에 읽겠습니까? 그런 세계관들을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주면 그런 것 자체가 교육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개선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구라파의 문제입니다. 그래도 구라파는 이 통합의 전통이 조금 남아있습니다. 그 예가 무엇이냐 하면 한 대학 안에 같은 College 인데 다 공과, 물리학과, 심리학과, 철학과, 신학과 다 같이 들어옵니다. 굉장히 불편할 텐데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옛날 같은 통속은 안 일어나고 여전히 그 안에서도 계속해서 나뉘어있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전문가들을 양산해내는 이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거부하는 그러한 학문이기 때문에 학문 자체가 노력을 해서 서로 다른 학문이 통합된 객관적인 어떤 사실이나 진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노력 자체를 안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고 그리고 아주 파편적인 지식들이 유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바뀔 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교회에서도 회심한 어느 자매의 간증을 들어보니까 전에는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찬송을 해야 하나님이 느껴졌는데 회심하고 나니까 풀포기 하나에도 주님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구름 하나에서도 주님을 느끼는데 그것이 오래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래가게 하려면 어려서부터 이 모든 포괄적인 것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나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나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면서 생애 적으로 말하자면 오웬 목사님을 만나서는 내가 영적인 눈을 떴다면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면서 지성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빛처럼 막 쏟아져 들어오는데 내가 지금 써놓고 안낸 책이 두 권이나 있습니다. 만지작만지작 거리다가 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내면 김 목사가 이제 맛이 갔다고 그럴까봐 안냈습니다. 대부분 철학적인 담론들입니다. 미덕과 미성에 관해 써놨는데 안내고 덮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어느 한순간에 막 들어오면서 너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에게 그러한 자연적인 과학이나 사실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드러낸다고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계속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뭐냐 하면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가지가 있습니다. 이게 무질서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게 놀랍게 수열적인 질서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장미꽃이 있는데 꽃잎 하나도 다 그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먼저 부모나 교사들이 먼저 즐거워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좋아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면 자연적인 사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보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입니다.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우리는 모두 백합을 보면서 ‘그냥 피어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솔로몬을 생각하시고 그 다음에 인간의 영광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은 비교될 수 없다는 그런 진리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런 통합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아주 어렸을 때 그런 교육을 시켜야합니다. ‘이것은 누가 만드셨지?’ ‘하나님이!’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이것을 만드셨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니면 이것을 못 만드셨을 증거를 한번 찾아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교회교육에서 아쉬운 점이 무엇이냐 하면 주일학교 교육은 맨 처음에 성경을 가르치고 교리를 가르치려고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시민교육을 하려고 먼저 생긴 것입니다. 코를 닦아주고 발을 닦아주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이상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이 그렇게 자연과 함께 어울리면서 총체적인, 교회에 와서 회심집회에 와서 느껴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것이 중심이 되긴 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외형적으로 펼쳐지면서 그런 것 얼마나 좋습니까? 매번 할 수는 없겠지만 ‘밤하늘의 별보기’ 그 별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천체망원경이든지 뭐든지 말입니다. 아니면 내가 굉장히 감동을 받았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시간이 없어서 더 이상 못 갔는데 63빌딩에 1993년도에 가보고 못 갔는데 그때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맥스 영화관을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5층 빌딩 정도 되는 스크린인데 엄청 큰데 거기서 대게 다큐멘터리를 합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런 좋은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수시로 인간만이 아니라 이 모든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아이들에게 일러주는 자연주의적인 교육이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통합을 이뤄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제가 새로운 눈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요새는 무엇을 많이 보느냐하면 물론 개혁파정통주의 신학도 계속 공부하고 있지만 요새 나의 관심사는 무엇이냐 하면 기독교가 변질되게 된 원인은 여태까지 우리들이 Text와 교회 자체의 문제 그리고 인간의 타락성, 이런 것들 속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Context 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잠깐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왜 논리적인 설교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것은 어느 날 협정을 맺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교회 자체 안에서 생겨난 현상이라기보다는 밖에서 일어난 영향이 교회에 들어오고 교회가 그것을 물리칠만한 내적인 욕구가 없었기 때문에 야합을 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한번 그렇게 틀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 자체가 논리 자체를 집어치우고 나니까 누군가가 진리를 선포하고자하는 간절한 갈망이 있어도 그것을 선포할 수 있는 도구가 너무 빈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시대 속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자라니까 아예 논리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본 사상적 회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틀을 사용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순환적으로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것들을 요즘에 눈을 뜨면서 그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놀랍게 현대주의라는 정신이 18세기 이후로 들어오면서부터 17세기 18세기로 오면서 이 현대주의 정신의 말로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문화, 정치, 경제, 사회, 이런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굉장히 복잡하고 다양한 것 같은데 코드는 똑같은 코드를 가지고 똑같은 정도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영어사 직원들을 데리고 스터디를 잠깐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의 시대에 몇 가지 이야기한다. 뭐냐 하면 어마어마한 심리학의 발달, 영화산업의 엄청난 발달이 있을 것이다. 지금 현재는 이렇게 컴퓨터 그래픽을 하고 사운드 정도 가지고 만족하지만 이런 것 아니고 곧 향기 나는 TV도 나온다고 그러는데 그것보다 향기를 제쳐놓고 화면이 꽃밭을 지나가면 거기서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물가를 지나가면 물 냄새가 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모든 오관을 다 지배하면서 자기 자신이 빨려 들어가서 그것을 향유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점점 가정이 해체되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심각합니다. 내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하겠습니다. 심각합니다. 결국은 다 해체됩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런 시기가 빨리 올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영화가 나오는데 영화가 훨씬 더 낫습니다. 여러분 여러 해 전에 나온 토털리콜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으십니까? 거기에 뭐가 나옵니까? 선택을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PC방 같은 곳을 갑니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느냐하면 목성에 화성의 나쁜 사람이 지배하는데 ‘그것을 내가 물리치겠다.’ 그러면 ‘네가 얼마만큼의 군대를 데리고 갈래?’ ‘여기다가 로맨스를 집어넣을래? 말래?’ 넣고 싶으면 넣고 ‘열 명의 후보가 있는데 이 여자 중에 어떤 여자를 택할래?’ ‘이거!’ 그러면서 딱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Visual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다음에 그것을 객관적으로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Visual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고 있는 객관적인 자기는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들어가 버린 자신이 이게 객관인지 주관인지를 혼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구조가 매트릭스 같은 것이 세팅이 그런 세팅으로 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현대 철학적인 요소들을 배경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토털리콜에서 들어가서 거기서 적대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이 사람을 죽이고 싶습니다.’ 죽이는데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Visual이다. 네가 여기서 죽이면 네가 이 게임에서 못 빠져 나간다.’ 정말 갈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땀이 쫙 흐르는 것입니다. 이게 Visual이 아니라 현실 Actual입니다. 그리고 죽여 버립니다. 이런 식으로 되어가면서 인간의 정신이 황폐해버리는 것입니다. 영화산업이 발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현실에 대한 도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면 1900년대 중반 까지도 필요 없습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이렇게 장르가 규칙을 벗어나기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60년대 70년대 이후로부터 이 장르가 규칙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죽은 백남준 씨의 독일에서의 초연 작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랜드 피아노를 놓고 그것이 놓여있으면 올라가서 당연히 연주해야하는데 도끼를 가지고 올라가서 부숴버리는데 그러는데 피아노 위에 방금 자른 황소 모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연작품입니다. 그런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기존에 있는 모든 규칙을 다 파괴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체해버림으로써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관심을 끌고 미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미의 기준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와 추의 개념으로 사람들이 컴퍼스 속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을 찢으면서 나아가는 거기에서 인간은 만족을 느끼고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예술에 있어서 아방가르드라는 것을 보면 이번에 유럽에서 패션을 내놓았는데 말도 안 되는 패션입니다. 자바라 가지고 옷을 만든 것입니다. 싱크대에서 쓰는 그것 가지고 말입니다. 뭐할 것이냐? 원래의 옷은 몸을 가려서 따뜻하게 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고 보호하는 것이 옷의 임무인데 그것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누가 만들어 놓은 설정이냐? 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의의를 찾는 것입니다. 집 그러면 사는 집인데 여기는 땅에 안 짓는 집을 짓는 것입니다. 둥둥 떠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집이 공간에 부착되어 있어서 퇴근하고 꼭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그 법칙을 깨는 것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완전한 해체주의입니다. 이런 철학적인 자양분들을 20세기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미쉘 쿠퍼나 데리다, 들레쥬 같은 사람들이 다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 1900년대 중반에 일어났던 다다이즘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다가 어떻게 되느냐하면 결국 인간은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이 무엇이야 하면 굉장히 개인주의가 되는데 대중적인 것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더 대중주의가 판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대중주의가 그렇게 판을 치고 또 어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권력은 정치적인 권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권력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사기를 치고 도망간 여자가 있었는데 팬클럽이 생겨서 몇 만 명이 글을 올리면서 경찰보고 잡지 말라고 그럽니다. ‘왜?’ ‘예쁘니까?’ 그런 권력을 가진 것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추종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결국은 열렬하게 그 사람들을 추종하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 자신이 그 지배를 받고 싶어 하는 욕망과 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과 그 사람에 의해서 지배받고자하는 욕망은 이게 결국은 상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은 그 왕 앞에 아주 비굴하게 살아가는 것과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성취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금 노무현 대통령도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것도 이런 심리가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하면 나중에는 육관을 자극하는 기술들이 폭발적인 시장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디오가 나왔을 때 사회학자들은 영화는 망한다고 그랬는데 오히려 폭발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이제 이것 가지고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동하는 시스템이나 모든 것을 집어넣어서 똑같은 것을 구현해나가고 확실한 사실 하나는 한 50년이 지나 내가 죽은 다음에 그때까지 여러분들이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내 예감이 맞을 것입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할 산업이 로봇산업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로봇산업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로봇이 가족을 대치하는 시대가 옵니다. 왜냐하면 이미 철저한 자기 폐쇄적인 질서 속에 살기 때문에 공동체를 상실했기 때문에 누구와도 함께 살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애완견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늘어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애완견 수입액을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한 20년 전에 벌써 미국에서 고양이 사료로 수입하는 금액이 1년에 8000천억 원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느냐하면 그것이 현대인의 이 인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달래주는 것입니다. 개는 배반을 하지 않습니다. 애완동물은 배반을 하지 않습니다. 애완동물은 상처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만족을 얻는데 그게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봇이 나옵니다. 밥하는 로봇, 섹스 하는 로봇, 함께 말동무하는 로봇, 공부를 도와주는 로봇, 이런 것들이 생겨나서 가상의 공간속에서 살아가는 그런 시대가 옵니다.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렸지만 끊어 버리고나니까 객관적인 모든 것들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마저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 자기는 연관이 모두 끊어진 속에서 자기 혼자 동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 누구냐?’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설명이 안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설명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은 설명할 때 하나님보고 설명하라고 그래도 ‘너는 내가 만들었다. 너는 날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리고 너는 이 세상을 통치하도록 창조되었고 모든 것들은 네가 다스리게 되었다. 너의 몸은 땅에서 왔고 너의 영혼은 내가 창조해서 집어넣었다.’ 그렇게 해놓으면 우리는 기분 나쁠 것이 아닙니까? ‘아니 꼭 그렇게 말하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 끊어서 이야기해봅시다.’ 그러면 설명이 될 수 있습니까?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설명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는데 그것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설명할 때는 하나님도 연간관계가 없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계시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리에 의해서 오늘날 인간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런 것을 다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자살이 이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우물을 들여다보듯이 한없이 들여다보는데 그 속에서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자살과 자기 포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자유롭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더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또 다른 전체주의의 출현이 예고되는 것입니다. 문화적으로는 그것이 벌써 예고되고 잇습니다. ‘와’ 하고 몰립니다. 2002년도의 월드컵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어떤 공허감을 달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도전을 많이 받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여태까지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경을 들여다보고, 교리를 들여다보는 것은 막 시켰는데 오랜만에 지난번에 세계화……. 세미나도 한번 열어주었습니다. 교인들이 그때 지금 자기가 어디에 와있는지를 깨닫게 되듯이 이런 것들의 그림을 종종 보여주면서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큰 배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지금 테러범들에 납치되어서 가던 항로를 이탈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안에서 내가 나온 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내방을 찾는 것입니다. 너무 찾다보니까 지금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원래 가려고 하는 데가 아니고 다른 데로 가고 있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안에서 지금 빨리 내 동료들을 찾느라고 그 큰 수십만 톤 배를 며칠 동안 돌아다니다가 지쳐있는데 그러는 사이에 일본으로 갈 배가 북한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방을 찾아본들 그 배는 북한으로 넘어갈 것 아닙니까? 어느 방에 들어있든지 결국은 북한에서 발견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고민을 방을 찾는 고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