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교역자수련회2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1:1)
녹취자 : 김세나
어떤 도구가 참 좋다, 나쁘다 할 때에는 그 도구가 무슨 일에 쓰여지는지 알아야지만 그러한 판단이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못을 박기 위해서 만들어진 망치를 가지고 땅을 파면서 이것은 참 좋지 않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뜨거운 열심이 필요하고, 목회를 잘 할 수 있는 기술도 필요하고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을 위한 일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서부터 오늘 읽은 3장, 사실은 4장까지 읽어야 하는데 쭉 한꺼번에 읽어보면 결국 장엄한 우주론적인 구도 속에 교회가 있고, 그 교회론 적인 구도 속에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우주론적인 구도라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죄로 말미암아서 깨뜨려져서 그래서 천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에게 맡기신 이 지상 사이에 균열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통일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세상과 두 세계의 한 머리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고, 이 마지막에 될 위대한 일들을 이루기 위하여 선취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에 삼으셨다는 이야기가 1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장에서 우리가 바로 그러한 일들을 위해 구원을 받았는데 원래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3장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그 큰 능력으로 우리들을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먼저 교회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신 내용들이 여기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그렇게 그러한 우주론적인 구도속에서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론적인 구도속에서 바로 그 우주에 대한 계획이 녹아있고 그리고 우리는 바로 교회의 그러한 계획을 위해서 주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장엄한 교회에 관한 계획들이 결국 교회 속에서 사람들을 세우는 것으로서 나타나는데 사람들을 세운다고 하는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사업을 위해서 사람들을 세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 세움입니다. 그 세움은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을 교회에 일하기에 적합하도록 세우는 사역적인 세움이 아니라 그 이전에 영적인 세움이 먼저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론적인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론적인 계획 자체가 영적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이 지상의 나라는 영원히 있는 것이고, 두 나라가 장소적으로 합쳐지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세우는 그 자체가 영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영적으로 사람을 세운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로 충만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영의 충만함으로 나타나고 그리스도와 영의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그것이 미래에 두 세계가 아울러 그리스도로 머리가 되어 하나가 될 그 장엄한 말하자면 그 충만함의 한 모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성경에서 몇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16절에 다섯 개 요소가 나오는데 제일 먼저 강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사역자들을 세우신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론적으로 볼 때, 사역자의 가치는 성도를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으로 세우는데 있는 것입니다. 강건하다라고 하는 말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의지를 받아들여서 그것들을 사용하며 그러한 우주론적인 구도를 위해서 교회에 담으신 하나님의 경륜들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강건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사역의 목표입니다. 교인들을 즐겁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고, 자기 자신이 사역에 보람을 느끼는 그것이 하나님이 그를 세우신 목적이 아니라 성도를 강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우리 사역의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사역의 결과들을 사람 앞에 내놓을 때 사람들은 속을 수도 있습니다.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고 그것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기준이 하나님이 세우신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 평가해서 속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한 마음으로 보면 주님이 우리의 사역을 평가하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년 동안의 사역을 통해서 일생의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가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의 양떼들이 얼마나 강건해졌는가 하는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강건해 졌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역의 성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해에는 그렇게 영적으로 연약해서 시험에 들고, 세상의 유혹에 빠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세게 서지 못하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지난 6개월 동안에 열심히 말씀으로 먹이고 눈물로 위하여 기도해주고, 상담해주고, 그리고 곤고하고 힘들면 그들을 위하여 도와주고 하는 이 모든 섬김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이 사람이 강건해져서 결국 지금은 능히 그 모든 어려움과 위기들을 이겨낼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 그 사역이 하나님께 복받은 사역이고 성공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회사역의 꽃이 회심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회심은 사람이 그렇게 강해지는 첫 번째 작용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사역이 성공했는가 하나님의 복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사람이 혼자 도저히 못하는 일이 있는데 성도가 영적으로 강건하여지는 것은 사람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고 물질과 그리고 우리의 재물을 쏟아 부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는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 가운데서 계시게 하옵시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를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본다면 에베소 교회 교인중 누구의 마음속에 예수가 안 계시겠습니까. 만약에 안 계신다면 교인이 아니고 에베소 교회의 성도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게 하옵시며 라고 할 때에 이 말씀은 단지 그러한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순간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지만 실제적인 연합은 그의 성화의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히 성화의 삶을 살면 살수록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강하게 붙들고 함께 계신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뒤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옥속에서 이 편지를 쓰면서도 오히려 이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그와 실제적으로 연합가운데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역하면서 그러한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목회를 하다가 중간에 도중하차를 하는데 결국 너무 고통스럽고 어려우니까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전에는 더 큰 어려움도 견뎠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작은 어려움인데도 못 견딘단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믿지 않는 불신의 상태에서 고난과 시련을 견디는 것은 본성이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영적인 일로 부름을 받고 고난을 견디는 것은 우리가 본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있을 때는 충분히 견디던 일을 주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견디지 못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도들을 아무리 일하라고 족치고 그리고 채근하고 이래도 안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어느 성도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대학교수라고 하면서 열린교회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려운 일들에 대해서 상담을 구하는 설교를 썼습니다. 교인들이 이제 400여명 교회에서 갈라져 나와서 아픔 속에서 개척아닌 개척을 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서 교회가 1000여명 모이게 되었고, 70억 가까이 되는 큰 성전을 짓고 그렇게 담임 목사를 위임투표할 때 전교인이 투표용지를 찢어버리고 만장일치로 담임목사를 선택하고 또 교인이 의결을 해서 당회도 구성하지 않기로, 사실 동의할 수 없는 행동들인데 장로는 뽑되 당회는 구성하지 말고 목사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르자고 결정을 했답니다. 뭐, 신학적으로야 그것이 옳지 않지만, 분위기가 얼마나 은혜로웠겠습니까. 시간이 얼마 지나고 나서 그 다음에 교회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목사님이 그 교회 예배 시간에 그렇게 교인들을 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교인들이 십일조 안하는 집사들을 아예 임명을 안하고, 그렇게 해서 교인들이 떠나고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그 편지를 받고 그 편지를 보낸 성도의 사연도 별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목회자든지 교회가 그만큼 되고 교인들이 권한을 주고 그랬으면 교회가 잘 되고 서로 유순하게 지내기를 원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고 권한을 주고 했는데도 이렇게 성도들을 못살게 하고 야단을 치고 소리소리 지른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바르게 해보자고 하는 의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바르게 해 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러한 바르게 해 보자는 목회자의 의지나 이것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을 혼내는 설교를 하는 것은 설교자의 분노로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의로운 분노가 성도들에게 주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은 설교자의 분노 자체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도들과 교회 안에 있는 은혜가 그것을 되게끔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실제적인 연합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단을 쳐서 성도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것은 결국은 자기가 성도들을 강건하게 세운 분량만큼만 성도들을 야단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평소에 여러분들이 자녀들을 사랑으로 잘 대하고 희생적으로 가르치고 돌보면 몽둥이로 후려쳐도 아빠 잘못했습니다 하며 바지자락을 붙듭니다. 그런데 평소에 쳐다도 안 보고 집에서 폭언과 폭력이나 하고 돈도 안 가져다주고 술이나 마시고 애들이나 잡아패고 그럴 때 이 놈의 자식하며 몸둥이고 두들겨 패며 너 같은 놈 이 따위로 하면 당장 나가버려 하면 진짜 나갑니다. 어디 간들 내가 이만한 대우는 못 받겠는가 하면서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할 때에 책망이 두 번째 나오는 것을 눈여겨보라는 것입니다. 책망이 없는 목회는 가짜입니다. 거짓 목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책망을 받아들여서 교정되게 하는 교회의 힘이 그리스도와 그들이 함께하는 연합의 비밀속에서 나오는 거라 이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여러분들이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권사님들을 한번 예배 시간에 혼을 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심했다 싶을 정도로 아주 구체적으로 혼을 냈습니다. 담임목사가 교역자를 세우는데 대담하게 담임목사 사무실에 와서 아무개 교역자를 세우지 마십시오. 우리 권사들이 반대합니다. 개념없이 어느 권사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웃으면서 돌아가십시오 내가 알아서 하니까 기도만 하시오. 돌아갔는데 너무 괴씸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개념이 없는지, 그래서 설교 시간에 혼을 내놨습니다. 더 하려다가 그 정도로 접었는데 그러고 났더니 그날 밤에 문자가 왔습니다. 아마 많은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간절한 문자가 왔습니다. 그렇게 혼내 주시는 목사님이 계셔서 감사합니다. 답장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절대 야단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결국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지체를 강건하게 세우는 일에 실패하면 그리스도와 그들의 연합을 실제적으로 촉진시키는데 성공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성도들을 야단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는 굽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굽히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결국은 강건해 진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모든 강함의 비결이 사랑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게 해 주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사역의 목표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회개가 있는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다못해 유치부를 사역한다 하더라도 만약에 그들 속에서 회개가 없다면 하늘문이 닫힌 목회입니다. 가짜 목회입니다. 결국엔 그러한 본질적인 도전이 없이 목회를 하게 되면 쉽게 목회한 것은 결국엔 부메랑이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게 목회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온전하게 영혼들을 돌보는 목회가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하고 그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깊이 아파야 합니다. 영혼들이 회개가 없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것은 아주 숨길 수 없는 징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리고 죄에 대한 미움은 비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영혼들을 돌볼 때 깊이 그 영혼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주고 그 사랑의 정도가 어느 정도 말하자면 성숙되었는지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목회사역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자기가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기의 양떼를 보면서 그것을 눈물을 흘리고 아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제 이야기 한 것처럼 목회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지 다른 것에서 빌려오고 꿔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말하자면 중국 사람을 전도한다. 중국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으로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고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죄송스러워 하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돌보는 영혼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에 그러한 상태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사역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지식입니다. 지식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 그 지식의 충만함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대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충만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강건하게 세워 진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 안에서 힘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식물을 심을 때 식물을 심어놓고 이 식물들이 잘 자라기를 바라면서 옆에다가 큰 나무를 박고 나무를 묶어 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영혼이 강해지는 것은 말씀을 이렇게 붙들고 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 가운데 엎드러지고 쓰러졌을 때 어떻게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일어서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강건하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되고, 또 말씀을 통해서 사랑하게 되고 말씀을 통해서 회개하게 되고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비춤을 받아서 자기 자신이 돌이키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한명을 놓고 가르치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져서 그 사람이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인해서 깊이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붙들고 일어나지 않는 일은 열 사람을 모아놓아도 안 일어나고 열 사람을 모아놓아도 일어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모아놓아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원리를 생각하면서 깊이 고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공부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목표 자체는 부지런히 밭에 나가서 밀 이삭을 베고 그것을 가지고 와서 찌어서 가루를 만들고 하는 것이 결국엔 떡을 만들어서 자식들에게 주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 것인데 수없이 많이 캐서 자기 머릿속에 있으면 뭐 합니까. 그것을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지도 못하는 것을.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 지식은 실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조직해서 그래서 성도들에게 넣어주기 위한 그러한 종류의 지식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한 내용이 자신이 영혼을 사랑하고 돌보는 현장속에서 직접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 성경입니다. 수많은 책들을 읽어도 그 책들을 가지고 직접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 속에서 녹아나서 설교단에 올라갈 때에는 수많은 책들 논문 펴놓고 설교하듯이 하는게 아니라 이 성경 하나를 가지고 올라가서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책을 읽어도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요즘도 학생들 가리키면서 이야기 하지만, 나에게 배우겠다고 20명 가까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너무 모릅니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너무 무지합니다. 비유하자면 이제 졸업을, 졸업이 아니라 지금도 의사하는 흉내를 하는데 칼도 없고 붕대도 없고 장갑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이야기 했습니다. 어제 아침에 우리 아들보고도 그랬습니다만, 책 열심히 안 읽는데, 내가 경고하는데 너 그러다가 쓸모 없는 사람이 된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 2천권입니다. 2천권. 언제 읽으려고. 놓치를 말하야 합니다. 절대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꾸준히 책을 읽고 그리고 충성되게 나가야 합니다. 위대한 신학자야 한 세대에 몇 명 나오는 것이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해 놓은 골자라도 이해를 하고 있어야지 목회한지 10년 20년 되는 사람이 성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그 사람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탐구하고 공부해야 되지만 마지막에 강단에 들고 올라가는 것은 성경입니다. 영적인 변화가 설교자게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유는 공부는 공부대로 할 수 있는데 그 많은 공부를 성경속에 스며들어서 많은 공부한 것 제쳐놓고 이것을 놓고 설교를 했을 때 이 지식이 내게 유익을 주게 만드는 것은 이것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그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종류의 지식을 갖고 있고 성도들에게 나눠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대부분 이해를 못한다는 것을 충분히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열어달라고 그래서 이 모든 지식들이 성경 안에서 녹아나도록 그렇게 하게 해달라고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에게 한자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해야 합니다.
얼마 몇 주 전에 고신에 있는 노회에서 나를 강사로 불러서 가서 강의를 했습니다. 내가 다시 안 가도 좋으니까 아주 심하게 야단을 치고 왔습니다. 자기네는 고신이라고 하는 프라이드가 얼마나 강합니까. 20명 교사를 일으켜 세워서 지난주에 공과를 제대로 가르친 사람을 조사해 보니까 두 명이었습니다. 두 명. 나머지는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고신이 어떻게 이러냐. 얼마나 심하게 야단쳤는지 목사님들이 나 가는데 인사도 안 하였습니다. 하거나 말거나. 어떻게 그러냐.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는가. 그래서 결국 아이들이 10년씩 주일학교 다녀도 한번도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너 거듭났니 하고 물어본 적이 없는 그러한 아이들 되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짓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교역자들이 가르치려고 하는 열심은 있는데 남만 가르치려고 하지 자기는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배우면서 끊임없이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한권만 책을 읽어도 회심이 무엇이고 중생이 무엇인지를 알텐데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꾸준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독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깊이에 있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그래서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그저 붙들고 특히 여성교구, 남성교구는 그러한 위험들이 아주 많습니다. 특히 남성교구는 이러한 위험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하는 강한 의욕을 가진 성도가 구역에 들어갔더니 구역장이 데리고 놀라고만 한다고 고백을 심방을 하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겼다고. 설교를 들을 때는 은혜를 받고 집에 와서 말씀을 볼 때는 은혜를 받는데 구역예배에 가면 내가 이 구역예배에 나와야 하나 갈등을 느낀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그러한 사람들을 세울 때 얼마나 곤해하고 아파하며 세우는가 하는 것을 교역자 자신이 말씀이 얼마나 자신 속에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회심한 사람이 아니면 엄밀한 의미에서 영혼을 맡기면 안 됩니다. 절대로 돌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자를 세우신 이유가 충만하게 하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충만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 안에서 모든 것들이 하나로 통일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충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마음에 느끼게 되면 이것이 우리의 몸 전체로 퍼져서 일치하게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에 대해서 분노할 때 벌럭거리는 것은 심장이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우리의 온 몸이 함께 분노하는 것이지 심장만 뜨거워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충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을 소유하는 그 정도는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성화의 정도,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정도와 밀접하게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있고 말씀에 잘 서 있는 교회는 목회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것을 받고 이것이 하나님이 지금 우리 교회에 하신 말씀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을 전하고 목회자들이 그것을 가르칠 때 그것이 위의 당회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주일학교로까지 확 퍼져서 함께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그것이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한 정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 각 사람이 주님으로 충만해질 때 그 충만한 사람들이 모이면 그 주님의 마음과 모든 것들이 충만하게 교회에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러한 것들과 상관이 없이 마치 임대주듯이 청년부는 청년부 지도자의 비전을 가지고 막 돌아가고 어린이사역은 어린이사역대로 청소년사역은 청소년사역대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은 진정한 교회의 통일을 이루는 모습이 아닙니다. 행정적이고 정치적이고 법률적인 통일이 아니라 영적인 이러한 통일들을 이루어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속에서 주일학교의 아픔을 가지고 장년 교역자들이 기도할 수 있고 장년 교구의 어려운 일들을 가지고 교회학교 교역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전 지체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게 될 그 때에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신 상태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하반기에 목회를 하고 일년의 사역을 끝난 다음에 우리의 사역이 잘 되었는지 점검할 수 있는 다섯 개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맡겨 주신 지체들이 강건하게 되었는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양육속에서 서 있게 되었는가. 사랑속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 지식으로 온전히 세워졌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으로 통일을 이루었는가. 이것이 우리의 사역에서 말하자면 가늠자가 되는 것입니다. 6개월후에 우리가 이곳에 와서 다시 한번 정확하게 이 가늠자를 가지고 우리의 사역을 잴 때에 하나님의 큰 축복이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목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