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교역자수련회3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
녹취자 : 김세나
이 부분을 보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직분을 맡은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살게 해달라고 기대해야 된다, 그런 뜻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맡은 사람들은 충성스럽게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느니라. 구하시는 것이 주님이 구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충성스러운 사람들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시는 것. 이 의미입니다. 충현교회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물량주의적인 교회의 풍조에 무엇인가 본질을 일깨워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맡은 종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충성스럽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원리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릇의 비유입니다. 그래서 금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고, 큰 그릇도 작은 그릇도 있어서 어떠한 그릇은 하나님이 귀하게 어떠한 그릇은 천하게 그렇게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다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겠습니다. 그 그릇인데 그 그릇이 그러니까 어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와 그 예정 가운데 크게 하나님 앞에 사역할 수 있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밤 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아도 모두 밝은 별이 아니라 밝기가 각기 다른 별이 하늘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똑같이 하나님이 각기 자기의 그릇대로 하나님 앞에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본질을 접고 야망을 가지게 되면 반드시 거기에서는 문제가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전 쯤 일입니다. 25년 전쯤에 여러분들이 소속되어 있는 합동측 교단, 경기 노회에서 커다란 일이 하나 일어나서 신물에 대서특필되고 나라가 발칵 뒤짚힌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목사가 권총으로 어떠한 사람을 살해한 강도 사건이었습니다. 현재적으로 경기노회에 소속되어서 아주 작은 개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현직 목사요, 현직 목회자요, 담임 목사인 사람이었습니다. 2500만원을 강탈하기 위해서 제대할 때 가지고 왔다가 장롱에 놨던 권총으로 그 사람을 살해하고 2500만원의 돈을 사취한 사건이었습니다. 검찰의 수사를 받으면서 경찰의 수사를 받으면서 왜 목사가 이러한 나쁜 짓을 했는지 물었더니 그 다음에 나온 고백이 한국 사회에 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교회를 지으려고 그랬습니다. 세간에 있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그랬더니 하는 이야기가 자기 친구들은 자기만 못한대도 이미 큰 교회를 이루고 성공한 모습을 보았을 때, 자기는 스스로 굉장히 깊은 자괴감을 느꼈는데 그 모든 원인이 번듯하게 지어진 예배당이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실패이다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때는 2500만원을 가지면 교회를 지을 수 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조그마한 예배당을 짓는 것이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 시절은 160평 정도되는 예배당 지을 수 있는 땅을 건물 좀 달린 것을 6천만원에 샀으니까, 그당시 2500만원이면 아마 좀 더 보태고 하면 작은 교회당을 지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둘이 살 수 있는 전셋집이 150만원 200만원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2500만원 굉장히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사람을 살인한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도 사형언도를 받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집행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보면 10년 뒤쯤 찾아올 조국교회의 성공주의를 예고하는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본질적인 것을 제쳐두고 도망을 가게 되면 반드시 무리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어린이 사역으로 널리 알려진 교회를 우리가 한번 스터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떻게 하면 저런 교회처럼 열렬하고 뜨겁게 그렇게 사역을 하고 많은 아이들을 교회에 몰려오고 그 아이들이 변화되고 그럴 수 없을까 그래서 조사해 보니까 조금 굉장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 오는데 수많은 경품으로 유혹을 하고 심지어는 노트북 이렇게까지 하고 게임기, 이런 것들을 나누어주고 그리고 그것을 친구초청을 해서 티켓을 나누어주고 그것을 인터넷에 발표를 하고 그 다음에 교회 티켓을 들고 와서 찾아가고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로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를 크게 잘 해 보자라고 하는 욕망이, 야망이 되어서 본질을 뛰어넘을 때에는 그렇게 우리는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크다고 생각하시는가. 세례요한을 보면 그는 비록 설교 몇 편을 남기고 형장에 이슬로 사라져간 그러한 슬픈 인생을 살아간 사람이었지만 세례요한의 출생에 대해서 누군가는 말합니다. 저가 주의 두 눈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세상에서 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이 아니고 세상에서 아주 작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작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본질로 돌아가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을 크게 보실까 생각하면서 거기에 자신을 맞추고 그 본질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정말 크게 쓰신 사람들은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본질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길 원했던 다윗을 쓰신 대신 야망을 품었던 제사장이 하는 모든 일을 장악해서 나라를 권력으로 통치하려 했던 사울을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종교지도자로 큰 뜻을 품고 있었던 사도바울을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니까 예수 만나게 해서 그 야망을 버리고 예수의 붙잡혀서 본질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러한 것입니다.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 부를 정도로 과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이 주님의 좌편, 우편에 앉기를 원할 정도로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쓰시고자 하시자 그들은 본질로 돌아갔고 요한은 그 본질을 사랑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을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진실해야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 과실, 그리고 허위, 그리고 끊임없는 야망, 그러한 것으로 줄다름질 치면 교회가 망가지고 자기 자신도 파괴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야망을 가진 사람 가운데 착한 사람을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사역을 크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얼마나 영광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영광스러워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본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눈에 주님이 기대하시는 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맡은 자들이 주님 앞에 기대되는 것은 충성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충성스럽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야망을 가진 사람들도 열심히 살고, 주님 앞에 충성스러운 사람도 열심히 삽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야망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성공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하여 충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구속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앞에서 헌신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차이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야망 때문에 열렬히 사는 사람은 그러한 충성스러움이 가져올 결과와 그 결과를 통해 얻게 될 자신의 이익 앞에서 열렬히 사는 것이지만,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서 충성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사는 것이지만, 그 하나님이 당신이 어떠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의 인격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은 모양은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인격을 가진 사람의 몸이 아니라 사람의 인격이 아닌 인간의 몸이고 인생이고 오히려 그의 인격은 하나이셨으니 하나님의 인격이셨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볼 수 있도록 드러나신 것은 사람의 인격이었지만, 사람의 몸을 통해서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서 사는 것이 삼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라고 우리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주님의 인격 앞에서 사는 것이 목회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모든 것들은 주님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잘 목회가 안 되고 끊임없이 좌절스러운 환경이 시작될 때면 거기에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멸시를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것을 경험하니까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게 살아가는 몸부림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의 충성이 아니겠습니까. 잘 되고 모든 것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때는 주님이 충분히 영광을 받으시고 자신은 그 일을 위해서 매진하게 되는 것이니 그 또한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흔히 사람들 생각할 때 목회가 잘 되면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른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잘 되어도 힘든 것은 여전히 힘 듭니다. 그러한 속에서 주님 한분 만을 바라보고 그 분의 인격 앞에서 충성되게 나타나는 것은 사역의 결과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길지 않은 목회사역이었지만, 열린교회 할 때도 있고 열린교회를 하지 않고 전도사 생활을 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오히려 견디기 힘든 시련이 그리고 고통이 있는 시간의 때에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을 참 여러 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내가 목회를 잘 해서 교인들이 막 늘어나고 회심하고 은혜가 쏟아지고 이럴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신다는 느낌이 안 들었었는데 오히려 그 모든 일이 뜻대로 안 되고 내가 섬기는 영혼들이 변화되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나를 맞서겠다는 분들이 나타나고, 전도사 때도 그러한 일을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한 일들을 우리들이 겪으면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때, 목회 사역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바로 그러한 시기에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신다고 느낄 때가 참 많았습니다. 참 많았습니다. 내수동 교회에서 횟수로 7년 있었는데 하여튼 참 힘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개척교회를 해서 덜 힘들었는지 모르지만,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토요일 밤이면 철야를 하고 좌석버스를 타면 항상 광화문에 섭니다. 좌석버스를 타고 갔는데 한 8시쯤 집에서 밥 먹고 가방 싸서 출발했는데 하여튼 온갖 괴로움이 밀려옵니다. 어쩌면 그렇게 완악하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러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워낙 바람을 좋아하니까 창문을 이렇게 열고 밤에 8시반쯤 차도 별로 없습니다. 쭉 달립니다. 그러면서 갑니다. 바람이 막 붑니다. 그러면 내일도 예배를 드릴 생각을 하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 내가 왜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서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면서 이제 기도를 하면서 갑니다. 열 번이면 아홉 번, 그 마음 속에 그러한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음성이 들린다고, 떠오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 그러한 길인데.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많이 주셨으니까 그러니까 주님이 가신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지. 그러면서 불렀던 노래를 주님이 이 손 꼭 잡고 가소서. 외치는 이 소리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날 인도 하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눈물이 막 납니다. 그리고 이제 혼자서 기도하고 그러면 뭐냐하면 나는 주님께 매였다. 그리고 나는 물러설 수도 없는 사람이고, 다른 길로도 갈 수 없는 사람이고, 나를 돕는 사람도 없고, 나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 때 몇 년 동안 사역을 하나님이 참 기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뭐든지, 마음에 먹으면 그렇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마음에 먹으면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셨습니다. 단 하나, 영혼이 변화되는 것을 그렇게 풍부하게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래서 그게 이제 하나의 커다란 고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은 굉장히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누구든지 사역을 하면 능력을 인정받고 싶고 교회를 개척하면 잘 해서 순식간에 수 백명, 수 천명을 모아서 제대로 된 교회를 하고 싶어하는데 하나님의 생각은 많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결과에 관심이 많은데 우리 주님은 그게 아니라 과정과 태도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성과를 이루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놀랍게 바꾸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에 달구는 것처럼 그 몸부림 치면서 온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러한 몸부림이 있었던 사람은 있었던 사람이고, 없었던 사람은 없었던 사람으로서 그냥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온전한 경험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목표하고 추구하는 바는 훨씬 다릅니다.
지금부터 한 10년 넘었을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나의 성령 체험기라는 글을 써달라고 한국 교회 설교자 5-6명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나도 한꼭지 써서 보냈는데, 목회하는 방식이야 저와 많이 다르겠지만 부산의 정필두 목사님 간증을 읽으면서, 읽었고 직접 뵈면서 같이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면서 직접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역시 참 이 세상의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자기가 빚어지는 그것은 하나님이 결코 거저하시지 않으시는구나. 그것이 뭐냐 하면 그 분이 서울 물리대 출신이십니다. 그리고 ROTC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갔는가 하면 공군장교를 갔습니다. 공군장교를 갔는데 ROTC에 공군장교를 갔으니까, 목사안수 받고 갔으니까 그냥 뭐 장가도 가기 전이고 스물 몇 살 때 아닙니까. 솔직히 애들입니다. 교육전도사 전도의 수준 아니겠습니까. 갔는데 교회에서 예배당은 한 400명 들어갈 예배당인데 교회들을 안 나옵니다. 주일이면 그렇게 눈물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더랍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교인이 많이 안 나온다고 눈물 흘리지 말고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라. 그래서 어느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들을 보낸 부모 마음이 생각나더라는 것입니다. 공군 장교는 장비도 하고 행정도 하고 비행기도 타고 그러지만, 공군 쫄병은 비행기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산속에서 보초서는 애들입니다. 그러니까 추운 겨울에 대게 공군 기지에 해안가에 있는데, 추운 겨울에 동상까지 걸리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커다란 커피통에 커피를 뜨겁게 타서 군종병이 있을 것 아닙니까. 남들 다 자는 밤에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초소 하나하나를 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깜짝 놀랐습니다. 보초서는데 목사가 왔으니까. 나도 밤 보초를 한 6개월 서봤는데 지긋지긋 합니다. 다리는 얼어오고 따끈따끈한 커피한잔 줄 때 얼마나 고마운지. 주고는 그 다음에 기도를 해 줍니다. 기도를 해 주는데, 성령의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그 아이도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또래인데 그 아이를 보낸 부모의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눈물이 나더랩니다. 보초서는 아이들에게 기도해주고 나면 그렇게 눈물이 나고 아이들이 감동을 받는데 하루 한 것이 아니라 계속 몇 년동안을 그렇게 했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결국 텅빈 예배당이 그 400석이 꽉 찼던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게 말재주 가지고 되는 것입니까. 영혼을 사랑하는 그 정신이 목회를 하는 가운데 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나타납니다. 충성스럽게.
그러면 세 번째로 그러면 충성스럽게 나타나는데 어떻게 그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서 우리들이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항상 앞에 있는 푯대를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뒤에 있는 푯대가 분명한 사람이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 자기가 어떠한 은혜를 입었는지를 깨닫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께 어떠한 은혜를 입었는지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나면 내게는 너무 가혹한 목회 환경 그런 것 없다 이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믿겠습니다 할 때 이미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을 주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너무 힘든 환경이라는게 그러한 것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있겠습니까. 그래서 정말 무서운 것은 우리 사역이 잘 안되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말하자면 엉크러지는 것입니다. 원망과 미움, 좌절, 분노, 그 다음에 안될 것이라고 하는 낙심, 그 다음에 우리가 이제껏 까지 달려왔던 목회의 정신과 방법 이외의 제 3의 질러가는 또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입니다. 도슨 트로트맨이라고 하는 유명한 전도가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시대 이후로 수 많은 사람이 영혼을 전도하는 이 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이 일에 질러가는 지름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는데 그러한 모든 길은 항상 거짓으로 판명이 되었다. 질러가는 길 없습니다. 그런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충성스럽게 살아야 하는데 그게 결국은 목표를 세우고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주님 앞에 구속 받은 사람이고, 나는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참, 시대가 얼마나 놀라운지 압니까. 한 80년대 직장다니면서 직장선교하고 우리 집사람 만나서 처음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355장이 아주 아무 곳에 가든이 안 부르면 예배가 안 되었습니다. 복음 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신학교에서도 채플 시간에 노래만 부르면 학생들이 엎드려 펑펑 울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싹 사라졌습니다. 새로 개편된 찬송가에 나오는지 빠졌는지 실렸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있어도 안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가가 너무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복음들고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앉고 찾아가서.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외국에서 수 많은 목사들이 베껴가지고 가져갔다고 합니다. 이 곡은 우리나라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에서 특히 동남아에서 애창곡이었습니다. 이제는 안 부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인생을 살고 목회를 하다가 보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때마다 항상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I'm nothing. I'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덧붙여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없는 것이다. 더 큰 감화는 우리보고만 살라고 삿대질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 분이 그렇게 사신 것입니다. 그 고난을 다 당하면서 그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자신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보여 주시면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시면서 가시면서 결국 그분이 충성스럽게 가신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그리고 자기를 버리시고 한 알의 밀알이 되시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신 것입니다. 이 한 몸 바치마. 끊임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목표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목표를 가집니까. 목표가 어떻게 수치로 계산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 진실하게 끊임없는 자기 죽음으로써 주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리고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며 나는 없다라고 살아가는 삶, 그게 어떻게 수취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길, 그리고 바로 그 본질에 충실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의 영혼을 맡겨 주시든지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 덜 모여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지 않은데도 그것을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문제를 안 느끼고 살아가는 충성스럽지 않은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항상 그렇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을 열고 하나님이 내 사역에 은혜의 단비를 확 부어 주시도록 그렇게 나는 왜, 아닙니까. 나는 왜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만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게 절규하는 것은 목표를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본티치아누스라는 사람이 와서 안토니의 생애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회심을 한 것입니다. 성자다운, 말하자면 무욕의 삶을 이야기 할 때 그 때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회개하기 시작했고 그 때 펴서 읽어라 소리가 들려서 펴서 읽으면서 로마서를 읽으면서 그 때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절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왜 왜 안 됩니까.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한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고 싶은데 왜 오늘은 아니 되옵니까. 왜 또 내일이어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지는 것을 보고 절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과대망상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존오웬을 읽으면서도 칼빈을 읽으면서도 에드워즈를 읽으면서도 은혜를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분이 천재다라는 생각은 별로 안 했습니다. 나중에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조금씩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중세철학을 들어가 공부를 해 보니까 에드워즈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뿌리를 찾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면서 정말 수치스러울 정도로 이 사람은 천재이고 나는 아주 하찮은, 지성의 크기에 있어서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구나 그러한 것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여러 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이고 저는 누구입니까. 그렇게 어떻게 억울하다고 그럴까. 정욕이고 욕망이겠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어떠한 한 사람에게 이러한 장엄한 계시를 이렇게 독점적으로 보여주실 수 있을까. 너무너무 슬펐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마음과 비슷한 마음인데 다윗은 어차피 비교가 안 되지 않습니까. 성경의 저자이고 그러니까 별로 그렇게 샘도 안 나고 그냥 그래 당신은 잘났다 그러고 마는데. 같이 다윗을 읽고 바울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데 같은 성도의 입장이지 않습니까. 실제로 우리의 역사 속에 가깝게 살았던 사람인데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수 있는 그 분이 참 이렇구나 하면서 내가 이 다음에 죽은 후에도 누군가가 나의 설교에 대해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받은 나의 영향력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기도했습니다.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이고 저는 누구이길래 한 사람에게는 이렇게 위대한 우주의 비밀들을 보여 주시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고 이 영광스러운 위대한 계시를 보여주시고 나에게는 이렇게 하십니까. 며칠 있다가 그게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속에 주님이 꼭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틀림없을 것입니다. 얘야, 걔와 너와는 종자가 다르다. 그리고 너의 삶이 나의 사랑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비교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살아가는 삶을 비례하면 너가 아우구스티누스보다 더 많이 받았다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다음서부터는 눈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했습니다. 나는 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는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새로운 것은 몰라도 써놓고 돌아가신 그 분 것, 이해나 해달라고 도와주십시오라는 수준으로 기도를 낮추었습니다. 그래도 조금도 시샘나지 않고 동의가 됩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 앞에 인정을 하는 것,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자기를 다 쏟아 부어서 주님 앞에 진실된 삶을 살려고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인격 앞에서 충직하게 살려고 하면 성과와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그렇게 쏟아 부었던 과정을 통해서 복음의 비밀을 보게 하시고 온전해져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하시고 사역을 통해서 영혼들에게 거는 기대의 깊이와 넓이를 스스로 정하게 만드시는 구나. 그래서 그것을 따라 살게 하시는구나.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와 같이 있으면서 절대로 사역의 성과가 없다고 여러분들을 타박하지 않을테니까 그 질을 보십시오. 질을. 정말입니다. 가끔 보면 여러분보다 현저히 능력이 모자라서 사역을 그렇게 효과적으로 잘 못하는 교역자들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항상 마음 속에 사랑했습니다. 사랑했습니다.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들도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그렇게 주님 앞에서 살고 나중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매우 소중하게 사용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