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갈라디아서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싫어하고 유대교 완전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빠져서 율법으로 돌아가려던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친절한 인사의 문안도 없이 격렬하게 편지를 써 내려가던 바울의 가르침 속에는 격렬한 책망과 많은 복음적인 교훈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서신 끝부분에 와서 사도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다시금 그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향한 자신 안에 말할 수 없는 애정이 솟아나는 것을 피력하였으니, 그 사랑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은 할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백합니다. “누구든지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그러면 우리말 성경에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번역된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성화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처럼 보이는 이 문장 안에서 아주 뛰어난 수사학적 기교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그들의 꾀임에 빠진 갈라디아교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할례의 표’룰 ‘육체의 흔적’으로 보고, 참 신자의 길을 가는 자신에게는 그것과 다른 ‘영혼의 표,’ 곧 ‘예수의 흔적’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 안에 있는 예수의 흔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에게는 할례의 표가 있지만, 나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다. 너희에게는 육체의 표가 있지만, 나는 내 안에 영의 표가 있다. 나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았고, 한 때는 그것을 자랑하였으나 그러나 이제는 나에게 그것은 내게 배설물과 같은 것이다. 너희가 여전히 육체의 흔적을 자랑한다면, 나는 내 안에 있는 영혼의 흔적을 자랑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ta. sti,gmata tou/ VIhsou/)이다.”
II. '스티그마'(sti,gma)의 두 해석
본문의 ‘스티그마타’에 관하여는 대개 크게 두 가지의 해석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그 흔적이 문자 그대로 바울의 육신에 남은 흔적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는 다시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데, 하나는 그 흔적이 사도가 당한 핍박과 고난 때문에 받은 육체의 상처라는 해석이고, 또 하나는 신비주의적인 해석으로서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의 전설에서와 같은 신비한 성흔(聖痕, stigmatization)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 흔적은 성화의 맥락에서 해석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형상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A. 육체적 해석
첫째로, 이 고난을 육체적 고난의 흔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이 흔적을 핍박으로 말미암아 갖게 된 육체의 상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는 문자 그대로 상처를 의미하는데 소유격 예수는 그 상처의 원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핍박 가운데 생겨난 육체의 상처들을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는 여정 가운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해석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을 변증하고 있는 사도의 의도와 문맥으로 볼 때에 할례의 표를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사도가 자기의 신체적인 상처를 내세우며 “나에게도 육체의 흔적이 있다”라고 이야기 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율법-복음, 육체-영혼, 할례의 표-예수의 형상을 신학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해석은 이 흔적을 “성흔”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로마 카톨릭의 신비주의적인 전통에 따르는 해석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치열한 수도 생활 끝에 오상(五傷)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비적인 경험을 통해 실제로 육체의 상처가 났다는 해석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B. 형상적 해석
둘째로, 이 흔적을 신자의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성화의 맥락에서 다루어지게 됩니다. 이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는 ‘예수 닮은 형상’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할례로써 구원 받은 백성의 표를 삼고자 하지만, 나는 영혼에 예수의 형상을 지녔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백성임을 증거한다.”
1. 노예제도의 문맥에서 본 ‘스티그마(sti,gma)’
여기에는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노예들이 도망을 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몸에 표를 하였습니다. 큰 가문의 노예들은 그들의 등이나 이마에 그 가문의 불도장을 찍었습니다. 그것을 스티그마(sti,gma)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노예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방지하였고, 혹시 도망친 경우에는 그의 등을 벗겨 보면 그 가문의 고유한 문장까지 새겨진 흔적이 있어 그의 신분과 소속을 입증하였는데, 이 흔적을 ‘스티그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혹시 노예에서 해방된 자라면 그는 노비 해방 문서를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입증하여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고, 갈라디아서의 수신자들도 익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로마시대의 ‘스티그마’(sti,gma)의 문화를 사용해서, 자신에게 그러한 ‘스티그마타’(sti,gmata)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누로 씻거나 지우려고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 ‘스티그마’(sti,gma)는 일생동안 노예의 몸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2. 소유격 ‘투 예수’(tou/ VIhsou/)의 의미
사도가 말하는 바, ‘스티그마타’(sti,gmata) 뒤에 나오는 ‘투 예수’(tou/ VIhsou/)라는 소유격이 지시하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자신의 노예 됨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노예로 자처하게 된 기원과 노예로 계속 살아가고 있는 신적인 강제력을 보여줍니다. 그 기원은 곧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었고. 그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살아가게 한 것은 그 은혜의 사랑에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 그것은 사도의 자기 정체성에 관련해서 입니다. 이 소유격은 노예의 원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라는 표현은 ‘둘로스 크리스투’(dou/loj Cristou/)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의 모든 서신서의 머리 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혔습니다. 오늘날의 문맥에서는 가슴에 다가오지 않지만 노예제도가 엄연히 존재하던 때에 자신을 이렇게 ‘둘로스 크리스투’(dou/loj Cristou/)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당시 헬라인 수신자들의 눈에는 매우 특이한 일이 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목회자를 ‘주의 종’, 심지어 ‘주의 종님’이라 받들기도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단어를 보면 안 됩니다. 그 시대의 문맥에서 보면 이것은 그저 ‘노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무 소유도 가질 수 없고 자신의 몸에 대한 처분의 권한도 스스로 갖고 있지 않은 노예, 이것이 바로 사도의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노예’ 사상은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야훼의 종,’ 곧 ‘에벧 야훼’(hw"±hy>-db,[,() 사상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오래도록 지니던 자기인식의 전통이 바로 ‘야훼의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정체성이었고 그것을 새로운 기독론적인 해석 속에서 이어 받아 사도가 정체성(identity)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종이었던 구약의 선지자들을 이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 아래서 일했으나, 이제 그는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신령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예수의 흔적이 갖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스티그마’(sti,gma)가 단수가 아니라 ‘스티그마타’(sti,gmata)라는 복수로 나온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어느 한두 가지 장점을 닮아 간 것이 아니라 전 인격과 성품에 있어서 총체적으로 예수를 닮아간 것을 암시합니다. 노예의 ‘스티그마’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몸에 지님으로써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노예로서의 본성과 기질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노예의 길과 가치를 따르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자유인에서 노예가 되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무자비한 폭력과 공포로써 자유인인 그들을 노예의 본성과 기질을 가진 자들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은 노예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예의 ‘스티그마’는 단지 그의 외형적 신분 뿐 아니라 그의 내면이 노예 됨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암시하는 표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한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정신도 예수 노예의 정신이었고, 본성도 그분의 노예로 살아가기에 적합하도록 전 성품이 변화되었으며, 그의 삶의 길과 가치도 노예의 그것들을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목회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단지 조직을 이끌어 가는 보스나 오늘날 교회 성장면에서 이야기하는 커다란 경영적 조직의 리더가 아닙니다. 목회자 직에 그런 성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아주 주변적인 것이고 목회자의 정체성은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박학하고 경건한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 목사는 자신의 책 속에서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회자를 두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인간인 목회자를 두신 것은 참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고, 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를 위해서이다.” 또한 어떻게 이러한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23년간 정들었던 노샘프턴 교회(Northampton Church)를 떠나는 고별 설교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전심으로 진리를 탐구하여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닮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두 가지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설교자를 도와야 합니다.”
III. 신자의 영광: 그리스도를 닮음
신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이 무엇일까요? 목회자는 사역자이기 전에 신자입니다. 신자로서 실패한 삶 위에 쌓아 올려진 사역의 성공은 자기만의 바벨탑입니다. 신자로서의 최고의 영광은 보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는 것입니다. 청교도 로버트 머리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곧 성화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은 목적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합니다. 즉 인간은 맨 처음 창조될 당시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선을 따라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자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는 죄성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인간 존재로 하여금 자신이 창조된 본래의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도록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자연적인 본성을 정결케 함으로써 영혼도 본래의 목적을 따라 기능하고 그 영혼을 지닌 육체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원죄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는 죄책과 오염으로 이루어집니다. 죄책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지은 죄에 대한 인류의 책임이며, 오염은 타락한 인간 안에 물려받은 죄된 본성입니다. 전자는 칭의에 의해 즉각적으로 해결되지만 후자는 성화라는 이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통해 해결되어야 합니다. 오염은 곧 부패성으로서 우리의 본성과 관련하여서는 선천성을, 행위와 관련하여서는 전적인 부패성을 지니게 하였습니다. 이 부패성은 다시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인간 본성 전체가 남김없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전적인 타락의 교리와 또한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할지라도 의지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는 전적인 무능의 교리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참 인간의 형상이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은 타락한 모든 인류가 돌아가야 할 절대적이고 영원한 모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구원받은 즉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 안에 중생과 함께 심겨진 생명의 원리와 그를 통해 주어지는 성령의 은혜는 신자의 일생 동안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시류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닮아야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내면의 세계에 지니고 있어 그 사람 앞에 서면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는 사람, 그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을 걸고 추구했던 비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었으나 선교가 생애적인 비전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개척도 심지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그에게 있어 최고의 비전은 아니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지적과 같이 그의 최고의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그의 갈망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예수를 닮고자 하는 갈망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도록 가르쳤으며(빌 2:4), 또한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고백하였습니다(빌 3:9-14). 그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노시스 크리스투 예수’(h` gnw/sij Cristou/ VIhsou/),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작용은 죄의 부패성으로부터 신자의 전 본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신령한 작용인데 이러한 성령의 작용은 진리와 함께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청교도 존 오웬이 지적한 바와 같이 오직 복음만이 모든 거룩함의 뿌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였던 것은 그 지식을 통해서 거룩해 질 수 있었고, 부패한 전 본성이 새로워지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장 아름다운 존재와 생활의 상태를 그리스도의 그것들에서 발견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처럼 존재하고 살기를 원하나 자신들의 인격과 삶이 본받고자 하는 그리스도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스스로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만큼만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자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IV. 그리스도를 닮는 길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음으로써 복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죄된 본성을 벗어 버릴수록 그리스도를 닮은 형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신자는 진리를 통해 성령으로써 부패한 본성에서 쇄신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본성을 지니게 됩니다.
A. 진리로써 거룩해짐
신자가 거룩해지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를 거룩하게 하시는 도구는 진리입니다. 신자가 진리를 통해 거룩해지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보이는 진리로서 계시하셨으니 그분이 지상 생애 동안에 보여준 인격과 삶은 말로만 듣던 진리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현시하신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축복이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라고 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는 신자의 모든 삶이 진리를 구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교리적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1. 지성의 헌신
첫째로 진리를 깨닫기 위한 지성의 헌신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지성의 헌신을 통해 신자는 점점 더 부패한 본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아는 일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분을 알아가는 지성의 헌신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중 무엇이 제일 큽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여기서 마음이 ‘카르디아’(kardi,a)가 아니고 ‘디아노이아’(dia,noia)입니다. 지성을 가리킵니다. 먼저 지성이 헌신하면 그것이 여러분께 사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지성의 탐구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가장 으뜸가는 표현은 영혼의 가장 뛰어난 기능이며, 인간을 참으로 인간이게 하는 기능인 지성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에 말씀을 건네시며,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그 밖의 모든 것보다 훌륭하며 그보다 훌륭한 존재는 하나님뿐이시다.”
2. 삶의 합치
둘째로 자신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는 삶입니다. 모든 진리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이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기독교 신앙에 있어 지식은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위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얻는 지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영혼을 밝히시고, 지성을 깨우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께서 가르쳐주시는 진리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려는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지성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진리는 그들의 마음을 비추고 그들 안에 거룩한 은혜의 작용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하여 그 은혜를 받지 아니하였더라면 행할 수 없었던 일들을 행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진리의 작용은 그의 마음과 영혼의 전 본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영광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진리를 깨달은 자일지라도 거기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려는 사람은 많은 진리를 깨닫고도 그리하지 않으려고 하는 어떠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질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이신 당신이시여, 내가 님을 너무나 늦게 알았나이다. 내가 당신을 찾고 발견하기 위하여 오늘도 헐떡이나이다.” 그러한 진리 탐구에 대한 처절한 염원(念願)이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의 기본입니다. 지혜에 대한 사모함, 그리고 삶을 거기에 합치(合致)시켜야 합니다.
B. 성령으로써 거룩해짐
신자의 부패한 본성은 성령을 통해 쇄신됨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홀로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시고 진리를 인식하는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일하십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1. 옛 본성의 파괴
첫째로 옛 본성의 파괴입니다. 성령께서는 신자 안에 진리로 역사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옛 본성을 파괴하십니다. 여기서 파괴하신다 함은 곧 옛 본성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나 기능, 혹은 작용을 잃어버리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부패한 본성은 죄의 뿌리인 자기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신자는 성화되지 않은 만큼 뿌리 깊은 자기 사랑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은 곧 영혼 안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성으로, 마음 안에서는 각종 육체의 정욕으로, 그리고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러한 신자의 마음과 영혼을 은혜로 감화하심으로써 죄에 대한 사랑을 파괴하십니다. 신자가 지성을 통하여 진리를 깨달을 때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의 부패한 본성은 파괴됩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정신은 곧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독립의 정신입니다. 성령께서는 신자 안에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던 자기 의에 가득 찬 정신을 파괴하심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 속에 살아가시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시키십니다.
2. 새 본성의 강화
둘째로 거듭난 새 본성을 강화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신자 안에 진리로 역사하셔서 거듭난 새 본성을 강화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십니다. 부패한 본성의 파괴와 새로운 본성의 형성은 죄를 죽이는 삶의 실천과 은혜를 살리는 삶의 실천으로 구체화 됩니다. 존 칼빈은 이 두 가지가 신자의 성화의 두 축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죄에 대하여 죽는 것(mortificatio, mortification of sin)과 은혜 살림(vivificatio, vivification of grace)입니다. 성령께서는 진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신자의 마음과 영혼에 은혜를 강화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시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모습대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령에 의해 옛 본성이 파괴되는 그곳에는 언제나 거듭난 새 성품이 형성됩니다. 옛 성품을 지닌 채 죄악의 삶을 살던 사람들은 이렇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형성된 본성을 통해 의덕의 삶을 살아가게 되며, 이 삶은 곧 하나님께 대한 순명의 삶이니 이를 통하여 신자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V. 그리스도 닮지 못하게 하는 것
사도가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스티그마타 투 예수’(ta. sti,gmata tou/ VIhsou/)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그의 전 생애에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예수의 길을 좇아가는 제자의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었던 그 흔적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이것들은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A. 욕정(欲情)에 굴복된 삶
첫째로 욕정에 굴복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와 정서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욕정에 굴복하는 삶을 통해서는 지성이 진리를 포착할 수 없으며, 또한 그 영혼이 진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이해함에 있어 다음 사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1. 허위의 삶
첫째로는 이러한 삶의 허위성입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부패한 본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는 대로 부당한 자기 사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욕정에 굴복하는 삶은 자기 사랑의 발로이며, 이는 인간의 정신이 진리의 빛에 사로잡힘으로써만 막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불변하는 진리로부터 멀리 떠난다면 그에게는 자신을 향한 사랑, 특별히 자기 육체를 향한 사랑만 남게 됩니다. 신자라 할지라도 그의 지성의 만물을 다스리시는 불변하는 진리의 빛으로부터 달아나고 성령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행동할 때에는 자신과 자기의 육체 밖에는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허위의 삶이며 이런 삶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결핍된 삶입니다.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지만 이는 신자의 순종과 더불어 일하시는 것이지 성령님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 작용은 신자의 의지를 초월하여 역사하지 않습니다. 청교도 존 오웬이 지적한 바와 같이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은 “신자 안에서 신자와 함께 역사하시지 신자 없이 신자를 거슬러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신자는 모든 악한 욕망과 헛된 기쁨, 그리고 허탄한 생각들에 의해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서 명정하고 순전한 마음을 가질 때 인식론적으로 진리를 가장 잘 관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정에 굴복된 삶은 이미 그 마음이 이러한 욕망과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진리를 바로 알 수도 없고, 성령에 의해 진리를 알도록 감화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만큼 또 성령의 감화를 받고자 하는 만큼 자신의 전 존재와 삶을 이미 깨닫게 된 진리에 합치시키도록 통절하게 노력하여야 합니다. 형이상학적으로 허위란 진리를 알지만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려는 진실이 결핍된 것입니다. 허위의 삶으로서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2. 그릇된 사랑의 질서
둘째로는 그릇된 사랑의 질서(ordo amoris)입니다. 욕정에 굴복된 삶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존재질서와 가치질서를 전복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바로 악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존재의 질서를 따라 창조하셨고, 또 모든 만물은 그 존재의 질서를 따라 가치 질서 속에 정위됩니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게 하신 것은 그 질서를 사용하여 보다 더 높은 가치의 질서인 창조 목적에 기여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은 그런 분명한 창조 목적에 기여하도록 의도된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그러한 일들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마음과 영혼이 준비되고 삶이 거기에 기여할 때, 인간은 가장 탁월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욕정에 굴복한 삶은 자기 사랑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이 정하신 이러한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질서를 전복한 삶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인간을 변화시키고, 또 일하게 하시려고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시면서 또한 모든 사물들로 창조 목적을 향하여 존재하고 작용하도록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 아래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성령께서 욕정에 굴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자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지 않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부패가 건강에 상반되는 것이라면 건강은 곧 선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패가 침범하는 대상들은 모두가 선한 것들이고, 부패가 침범하는 대상들은 결국 부패된다. 그러므로 부패되는 사물들은 선한 것들이며, 다만 이것들이 부패되는 것은 최고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하다는 면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고, 최고선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그것들이 하나님은 아니다. 따라서 부패될 수 없는 선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밖의 모든 선한 사물은 그분에게서 유래하여 존재하고, 그 자체로 보아서는 부패될 수 있으니, 그것은 그 자체로 보아서는 곧 허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분의 덕을 입으면, 어느 면에서는 부패하지 않을 수도 있고, 부패했더라도 회복할 수 있다.”
B. 거짓된 표상(表象)을 좇음
둘째로 거짓된 표상을 좇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물들은 보이는 것이 곧 실재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그 존재와 의미가 일치하지 않게 인간들에 의해 얼마든지 오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판타스마타’(fanta,smata, phantamata)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을 이해함에 있어 다음 사실들을 숙고하여야 합니다.
1. 죄가 지성을 속임
첫째로는 죄가 지성을 속이는 것입니다. 인간 앞에 현전(現前)하는 사물이 전달해 주는 표상은 거짓된 영상들입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있는 그릇된 자기 사랑과 욕망으로 말미암아 표상들이 주는 의미에 지성이 속임을 당함으로써 사물들의 실재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그래서 영혼이 어두워지고 지성이 눈멀게 됨으로써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처럼 죄의 속이는 작용은 신자로 하여금 이런 거짓 표상들의 끊임없이 속게 합니다. 가치가 없는 것인데 목숨을 거는 일도 바로 이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본질이 아닌데도 거기에 생명을 거는가 하면, 본질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침으로써 스스로 지혜자의 길을 버려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더욱이 교회가 이런 거짓 표상에 속은 사람들에 의해 지도력이 행사된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 모두 죄가 신자의 지성을 속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2. 욕망에 의한 지성의 혼란
둘째로는 욕망에 의해 지성이 혼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이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힐 때 영혼의 기능인 지성은 그 작용을 심각하게 방해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지 말도록 그토록 간곡히 부탁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보십시오. ‘육신의 욕망’은 곧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며, 참으로 진정한 아름다움과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판단이니 곧 진리를 인식하여야 할 인간의 지성이 호기심이라는 욕망에 의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세상의 자랑’은 곧 이 세상에서의 야심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유와 이성을 추구하여야 할 신자의 본분을 오만으로써 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으로서는 결코 진리를 올바로 파악할 수 없으며 항상 헛된 표상들에 속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욕망의 어두워진 지성이 표상 넘어 있는 사물의 실재를 명정하게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불쌍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간이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변전하게 하고 결국은 그것들을 영원 속으로 앗아가 버리는데 이러한 사물들의 종말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이들은 바로 일생을 거짓된 표상에 속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아무 것에서도 즐거움의 근원을 발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잘 포착됩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진리를 알고자 하고 그 진리에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만 무한히 변화하는 사물의 표상으로 인해 지성이 고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물이 존재하는 공간은 우리가 사랑할 것을 제시해 주지만 시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마음에 각인되는 무수한 표상들은 목적 없이 사물 자체를 향한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지성은 번민하는 마음에 의해 불안정해지고,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그 표상들을 사로잡으려고 허탄하게 애쓰며 일생을 보냅니다.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는 옛 성품을 따라 이러한 옛 삶으로 돌아가도록 신자의 영혼을 어둡게 하고 지성을 눈멀게 합니다.
3. 거짓 표상을 극복하는 길
셋째로 끊임없이 지성을 속이려는 거짓 표상을 극복하는 길은 사랑입니다. 신자가 어떻게 하면 거짓된 표상에 속지 아니하고, 사물의 실재를 진리를 통해 올바르게 관상함으로써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져 갈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은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곧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인데, 이를 가리켜 ‘까리따스’(caritas)라고 부릅니다. 이 사랑은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agape)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신자의 사랑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사랑에 가득 찬 마음이 될 때, 그의 애성(愛性)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불붙게 되고, 의성(意性)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지성(知性)은 순수하고 명정한 상태를 유지하여 거짓된 표상에 속지 아니하고, 진리의 빛을 통해 표상 뒤에 있는 사물의 실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렇게 순수한 지성을 소유하지 못함으로 많은 신자들이 죄에 속임을 당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대신 세상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VI. 극복의 길: 자기 깨어짐
신자의 삶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지 못하게 하는 안팎의 대적들로 둘러 싸여있습니다. 이 세상도 거룩해지려는 신자의 편이 아니고, 또한 자기 안에 부패한 내면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들이 거룩함에 이르기를 간구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방해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길은 무엇일까요?
A. 자기 깨어짐을 통한 회복
이러한 경험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끊임없는 생명의 능력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 앞에 자신을 산 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죽은 자로 여겼습니다.
자기 깨어짐은 신자 안에 있는 죄된 옛 본성으로서의 자기가 생명이나 기능, 혹은 작용을 잃어버리도록 파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깨어짐은 회개의 경험 안에 있는 마음의 작용으로 이것은 영혼의 경향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회개가 죄에 대하여 죽어가고 의에 대하여 살아나는 과정이라면 자기 깨어짐은 죄에 대한 죽음의 실행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실행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됩니다.
존 칼빈이 지적한 바와 같이 신자는 자기 사랑으로 세상을 본받든지 혹은 지순의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신자의 회개가 구원에 이르도록 이미 이루어진 회심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는 것은 부패한 옛 자아에 대하여는 죽어가고 거룩한 새 사람에 대하여는 살아나는 전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죽음을 자기 깨어짐 속에서 자신 속에 실제화 되는 과정을 통해 날마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타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경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신자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과정은 곧 자기 깨어짐의 과정입니다. 신자는 여전히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사랑하고 자기 의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뿌리 깊은 본성이 끊임없이 변화되지 아니한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이 세상에서 죽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뵐 수 있으며, 또한 이 세상에서 사는 것만큼 주님을 뵈옵지 못한다.”
B. 자기 깨어짐의 열매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자기 깨어짐은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신자의 본성에 관련해서 입니다. 이것은 신자의 영혼과 마음에 관련합니다. 신자는 내재하는 죄성(罪性)으로 말미암아 자신 안에 있는 중생한 신자의 생명의 원리를 거슬러서 살아가게 되는데 자기 깨어짐은 그의 부패한 경향성을 파괴하고 거룩한 경향성을 내면의 세계에 구축함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합니다.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작용은 신자로 하여금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중생과 함께 신자 안에 심으신 생명의 원리는 약화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지 못합니다. 자기 깨어짐을 통해 이 두 가지 일이 가능해 집니다.
둘째로, 신자의 삶과 관련해서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어떤 사물의 본질이 “그것으로 하여금 그 사물 되게 하는 것”라면 본성은 “그 사물로 하여금 그렇게 작용할 수밖에 없게 하는 내적인 성질”입니다. 성화는 바로 이처럼 그의 모든 삶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신자의 전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깨어짐은 필연적으로 그의 삶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하여 내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외출적인 삶이 거룩해지도록 만들어줍니다. 이 삶은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써 그분을 신뢰하며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비록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자신에게도 행복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자기 깨어짐을 통해 획득되며, 자기 깨어짐은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셋째로, 신자의 존재와 관련해서 입니다. 신자의 존재에 대한 우주론적 정향(定向)입니다. 신자의 자기 깨어짐은 하나님을 거스르던 그 사람 안에 있는 적의(敵意, simultas)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반감(反感, aversio)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자기 사랑을 버림으로써 순전한 이웃 사랑에 이르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자의 이러한 자기 깨어짐은 구원받았으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지 않고 거스르던 이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부당한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 목적에 배향(背向)하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전향(轉向)하게 함으로써 그의 존재와 삶을 창조 목적에 맞게 정향(定向)해 줍니다.
VII. 결론과 적용: 피(血) 목회로 나아가자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를 참으로 교회되게 하고, 그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고쳐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목회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 필요한 섬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렇게 목회의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이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이니 새로운 목회의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언제나 한 시대를 풍비하던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려는 목회의 정신에 의해 그 영광을 다시 찾았습니다. 우리에게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본질로 돌아가는 목회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회의 정신은 구도의 길을 가는 신앙의 경험 속에서 형성됩니다.
우리가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목회의 정신은 자기 죽음의 목회입니다. 죽음, 목회자의 자기 죽음에서 시작하는 피목회의 정신이야 말로 우리가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오늘 조국 교회에서는 이러한 피목회의 정신들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는 그가 일생 동안 부른 토혈의 노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신 길이 그러했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땀을 흘리고, 눈물 쏟으며, 피 뿌리신 생애였습니다. 성경책의 모서리가 붉은 색으로 칠해진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손에 들린 이 성경의 진리가 많은 순교자들의 피 흘림을 통해 여기까지 전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경책이 금박으로 도금되는 것처럼 이런 본질적인 피의 정신이 사라지고, 세상적인 성공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류의 정신에 야합하는 대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일제 시대처럼 피 비린내 나는 핍박과 순교의 위협이 기다리던 때에는 이런 길을 가기 쉬웠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곧 굶는 것을 의미하던 때는 이렇게 본질로 돌아가기가 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풍요로운 시대에 박해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이 가던 고난의 길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기에 통절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변전하는 사물들의 표상에 매이지 아니하고, 그것들의 실재를 바라보며 본질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태평하던 시대에 흐느꼈고, 노래하던 시대에 슬퍼하였습니다. 방종한 인간의 사상과 허무한 철학들, 만연한 물질주의와 부도덕한 사조 속에서 땅에 떨어진 복음의 영광을 인하여 슬퍼하고,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그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며, 신학생들의 구도자적 몸부림은 다음 시대의 뱃머리 입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치열한 사역에의 헌신도 그 자체가 그 섬기는 사람의 영혼을 아름답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진리를 통해 지성으로써 관상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기 위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하며, 자신의 모든 삶을 그 진리에 합치하도록 헌신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쇄신되며, 부패한 본성은 깎여 나가고 자연적인 본성은 다듬어지며, 새 본성은 강화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는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존재가 됩니다. 그는 비록 많은 소유, 높은 지위가 없어도 그 시대의 등불이 될 것입니다. 어둡고 깜깜한 한 시대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너무 어둡고 그는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작용 속에서 날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갈 것입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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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당 세미나 ‘예수의 흔적’ 요약
이런 강의를 하는 이유는 설교시간에 다 다루기가 어렵다.
깊이 있는 말씀을 듣기 힘들어 하는 지체들
사모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의 개설
강의안 misprint - p.19 여기서 ‘마음’ → ‘뜻’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문맥적 상황
갈라디아 교회의 특별한 상황
사도바울이 떠난 이후 교회에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중에 유대교적 완전주의의 개념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음
JX를 통해 구원을 얻지만 그를 믿음만으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할례와 율법의 의무를 지어야 참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침
이러한 주장이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전통적 방식이지만 안정감을 주었을 것
구원에 있어서 보다 확실한 안정감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자신이 확실하게 구약에서 언약 백성인 할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언약관계 안으로 들어간다고 생각
사도바울에게는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중차대한 도전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거절하기 위해 사도의 권위까지 도전
이러한 정황에서 갈라디아서를 기록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항상 서두에 친절한 인사말이 있지만
바로 격정적으로 본문으로 들어간 갈라디아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
뒷부분에 가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사랑이 나타남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흔적’이란 말이 무엇인가?
스티그마
1) 상처
2) 낙인
3) 상흔 ... 의 의미
스티그마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대립
1) 육체적 해석
여기에 나온 예수의 흔적이란 것이 살에 난 상처라고 본 견해
두 가지로 분리됨
A. 사도바울의 복음 전파하다가 난 핍박으로 인한 몸에 난 상처
이 견해는 희박하다. 예수의 흔적보다는 거리가 멀다.
왜 그러한가? 유대주의의 거짓 교사들이 신앙이 약한 이방인들을 꾀는 상황
육체의 할례, 외적 표시에 대한 자랑
할례의 다의적 의미
우리의 논의에 있어 할례에 있어 언약 백성이라는 표징
그 언약 백성의 표로서 언약 백성의 삶의 방식, 율법에 대한 의무를 짊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
유대주의자들의 자랑은 우리는 예수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육체의 표를 가진 사람이다 라는 자랑
육체의 특정한 부분에 우리가 육체에 표시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자랑
오히려 사도는 고도의 수사학적 기교
복음과 율법을 대조 - 6장의 문맥
육체와 영혼을 대조
육체의 표와 예수의 흔적을 대조
한쪽은 신령하고 영적인 것이며 한편은 육체의 표
육체를 자랑할 때에 할례가 아니라 예수를 위해 난 상흔을 자랑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
주석학적 난점
‘내 몸에’ en somati mou
나의 몸 (안)에
그 몸이 일차적으로 우리의 신체적 몸을 가리킴
여기에 예수의 몸을 지님, 육체의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
이 해석에 대한 비판
a. 소마 가 물리적인 것을 가리키는 단어인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의 머리이시고 우리가 그 몸이라는 해석에서 그 ‘몸’ 소마 가 됨
신자들의 영적인 연합이 교회인데 그 몸은 보이는 교회로 나타나나 엡의 유기체성
소마라는 단어는 그 수식어구는 ‘흔적’ 이라는 말을 육체에 새겨진 핍박의 자국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그런 방식으로 대입시키면 고전 4:10? 이 해석이 되지 않음
예수의 흔적도 드러나게 하려함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는 그런 가책을 지고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는다.
예수죽임에 대한 가책을 지고 있다는 뉘앙스..
희랍어 원문에는 예수 죽임이 아니라 ‘예수 죽음’이다.
예수의 생명도, 삶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다.
- 예수 죽음과 예수 생명이 대조됨
우리 몸에 우리 몸에 반복
그런데 예수 죽음을 어떻게 짊어지는가?
- 추상 명사
페니페로 바스타조 - 의미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살’에 어떻게 예수 죽음을 짊어지는가?
예수의 생명이 살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그렇기에 결론적으로 ‘몸’→ ‘흔적’ 에 대한 물리적인 해석은 문제가 있다.
b. 신비적 해석
성흔이라는 해석 - 아시시의 프란시스
전설에 의하면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주님을 만나고 심오한 묵상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그에게 오상(五傷)을 선물로 받았다.
그래서 예수의 상흔과 똑같은 상흔을 받았다.
논쟁의 가치조차 없는 해석
여기의 ‘예수의 흔적’이란 형상적 해석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형상적 해석
형상 - Imago, Image , 모형
희랍 철학의 형상과도 관련이 있다.
‘질료와 형상’ 개념 - Aristotle
질료는 외연을 구성하고 형상은 개별자의 개체성을 지니게 하는 것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 - 질료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 - 형상
형상(形狀)적 해석 - 물리적인 육체 위에 새겨진 핍박으로 새겨진 육신적 상처가 아니라
사도바울의 내면의 세계, 그의 영혼 속에 있는 예수를 닮은 형상을 지칭하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
스티그마타 -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성화의 길을 달려오는 가운데 그의 마음과 정신안에 형성된 닮아진 형상
JX - 실체 / 人間 - 모상
인간됨의 동인
형상이 예수를 많이 닮을수록 예수 닮은 형상이 그의 모든 정신과 지적인 작용에 영향을 미쳐서 예수 닮은 의지 행위를 할 것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형상적 해석의 타당성
형상적 개념 -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이라 표현
삼위하나님은 ‘원형’ 적 사랑 - 요일
하나님이 사랑이신 이유
원래 사랑이신 하나님
대상이 있어야 사랑의 개념이 성립
하나님 밖에 존재들이 있으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것들이 존재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미 사랑이셨다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해야 할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신가?
그것이 삼위 하나님의 교통의 교리에서 해석이 된다.
사랑이 교통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Communion
그 안에서 교통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랑’
이런 교통적 성격 Why?
왜 그러한가? - ‘아름다움’ 美, beauty
사랑의 유일한 원인
사랑이라는 영혼의 작용이 생기게 되는 이유가 아름다움 때문
아름다움 때문에 완전하신 아름다움 때문에 각 위간에 사랑의 교통이 이루어짐
결국 사랑이 되는데 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교통적 사랑
그렇다면 이 美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의 성립요건
1)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
어떤 사물이 있는데 말하시는 표준과 요구가 있는데 그 사물이 있는데 이것은 이것이라는 정위(正位)상태로 꽉 차있는 상태를 전일성(全一性)이 충만한 상태라고 봄
이것이 개별적인 완전성이라고 보는 것
개별적인 완전성이 정점에 다다른 상태가 아름다움
2)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 - 어울림(조화)
어울림이란 조화와 균형, 절제의 요소를 만족시킨 상태
성부가 보시기에 성자는 참으로 성자이시기를 원하시는 성자의 상태
그 상태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함
성부와 성령이 삼위가 되어서 아름다움을 극대화함
성자는 각 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위 없이도 완전한 하나님
이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심으로 이 질서에 의해서 삼위 하나님 전체가 아름다우심을 갖게 되며 다른 두 위와의 관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갖게 됨
이런 완전성이 죄로 인해 부패하고 타락
이러한 사랑의 교통의 모상을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이성적 피조물, 교회 속에 두신 것
-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각 피조물의 질서안에서 의존하게 하고 고유한 영적인 연결(이성적 피조물)이 존재함
성도의 이미지가 하나님의 모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
따라서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면 이것도 영적인 해석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통해 삼위의 하나님을 닮는 것
예수의 형상이라 부르는 것
- 삼위 하나님이 가지신 형상적 특징이 육체와 결합되어 나타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나타나는 것
예수는 인성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인성안에서 실재와 작용했는가를 현실세계에서 보여주심
현실 세계에서 보여주셔다면 인간에게는 예수의 형상, 이렇게 이야기할 때 청자의 입장에서 가장 분명히 다가온다.
엄밀히 말하면, 삼위의 두 위와 단절된 예수의 형상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연결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예수의 인성을 통해 드러난 예수의 참 형상을 지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이셨음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신 것
살아가신 그것은 이 형상을 가진 인간이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을 통해 완성하고자 하는 참 사람의 모델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할 때 볼수도 만질수도 없는 성부의 형상, 성령의 형상이라고 이야기 할 때 얼마나 모호하겠는가?
아들의 형상, 예수의 형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을 보여주는 것
궁극적으로 이 사람이 성화되어서 예수의 삶을 닮아갈 때 ‘사랑’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 이 교통이 삼위하나님의 교통이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성자의 형상, 예수의 형상이라는 것에 그쳤으나
어거스틴이 이 삼위 하나님으로 확장시켰다.
이 견해가 이성적으로 성경적을 가장 부합된다.
하나님은 세 인격을 가지셨음에도 한 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 - 그 본질에 있어서
예쑤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선적으로 새겨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삼위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이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이 ‘형상’ 과 관련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tou Insou’ 가 무슨 말인가?
- 결론적으로 ‘소유’를 가리키는 말
흔적 ‘스티그마’
문화적인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로마 시대 이전 희랍 시대, 마케도니아 제국이 되기 전에는 소도시 폴리스로 영토가 분할되어있었음
당시의 노예제도
나 자신(김남준)은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며 인간됨을 구현하는 삶을 살았던 시기를 나는 폴리스 시대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인정하던 시기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후, 그 전쟁 이전에도 페르시아와도 교류하고 그리스 문명의 모태, 에게 문명 - 크레타 섬의 문명 역시 이집트에서 왔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지지
이집트가 본산이고 각종 도서의 문화가 결합된 것이 크레타 섬
이집트와 페르시아는 전제국가이고 생활의 기반이 농업
자연이 중요한 변수
강력한 전제군주들 - 신적 존재로 여겨짐
그리스 문명에 의하면 그런 전제 군주를 중심으로 한 통치가 우민 정책에 불과
- 자유와 평등, 도편추방제
오스트라카 문명, 전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
그런 생각이 노예에 까지 적용, 상당한 자유가 부여됨
인간의 존엄성, 권리가 인정된 노예의 신분
소크라테스의 최종 변론
: 에우디프론 - 노예를 죽였다는 죄목 때문에 고발당하며 죽임을 당했다는 설화
노예 주인의 일기 - 노예가 말을 듣지 않는가? 내가 밭을 매러 가야 하는구만..
로마 시대에 들어오면서 그런 상황이 역전됨
중앙집권적 국가
공화정이었기에 한 왕을 숭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조적 복종을 강요하게 됨
많은 자유와 권리가 박탈됨
당시 노예가 되는 이유 - 전쟁 포로, 채무 상황, 혈통적 세습 ...
모든 노예를 다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가문에서는 노예들이 자꾸 도망을 치고, 그들이 무리를 형성하고 도적떼로 변하거나 스파르타커스 반란과 같이 무력으로 로마에 대항하는 일들이 발생
그 때의 노예들에게 문신(Brand)를 새겨 넣음 (Brand Carve)
- 이것이 스티그마, Stigmazation
하나의 문학적 묘사로서, 연상법으로써 스티그마를 사용한 수사법
스티그마‘타’ - 복수 : 여러번 찍혔다는 것
그렇다면 예수의 흔적이란 육체에 새겨진 노예의 표식을 활용해서 사도가 유대 완전자들에게 대항하여 사도에게 움직일 수 없는 자기동일성(identity)이 있다는 것을 주장
예수의 종된 나 바울은, 예수의 노예된 나 바울은...
‘둘로스 크리스투’ doulos Xristou
종 -> 노예
그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한 사람은 없었다.
‘둘로스 크리스투’ doulos Xristou - 노예
자신의 소유도 없이 주인에 예속된 숙명적 존재가 바로 ‘노예’
사도 바울이 자신을 이렇게 지칭
다른 사도들도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
종 -> 노예
그렇다면 이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야 생겨난 종류의 표현인가?
구약의 개념 ‘에베드 야웨’ 야웨의 종 사상
야웨의 종 - 구약시대의 노예 - 여호와의 노예
모든 성도들이 자신을 종이라 부름
신약에서 사도들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라 할 때
그리스도의 노예는 직접적으로 여호와의 종 사상과 연결됨 -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협의의 개념인데 이것이 바로 구약의 ‘선지자’
Amos ‘내 종 선지자’
선지자들의 자기 고백 - 나는 여호와의 노예, 종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이 표현은 문학적으로 뛰어난 수사법이다.
노예의 흔적으로서 ‘흔적’
사도 자신은 예수의 흔적이기에 육체에 새긴 것이 아니라 영혼에 새긴 것
- 이것이 예수 닮은 형상인 것이다.
Point!!
그런데 노예가 최초 노예이기 위해서는 노예라는 신분적인 표지만으로 노예되지 않음
노예를 노예되게 하는 것
ex) 전쟁으로 인해 신분상으로는 A국의 자녀(ex: 공주)에서 B국의 노예가 된 어떤 사람
노예의 옷을 입혔다해서 그가 노예가 되는것이 아니다.
실효적으로 노예가 아니다. 노예로서의 효과가 없다.
- 몸은 노예이나 노예의 형상(↔질료)을 가지게 해야 한다.
노예가 되기 위해 그를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
사도의 자기 논증 - 복종케 함 douragogo - doulos + aro
노예가 노예되도록 노예화, 노예 근성화
노예됨으로 꽉 차야 노예가 된다.
그 때 그가 비로서 노예가 된다.
노예의 근성을 가진 노예는 주인없이 자유민의 삶을 살 수 없다.
자유가 없어져도 주인의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 그가 비로서 노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도 무늬만 기독교인인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자녀됨으로 충만해야 한다. - 예수의 형상을 본받는 것
예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변화되는 정황이 있어야 한다. ‘자기 부인, 자기 깨어짐’
에베드 야웨사상과 둘로스 크리스투 --→ 예수의 노예 사상으로 발전하는 것
구약에서 같은 사람들이 태어나는데 모든 사람이 다 예베드 야웨는 아니다.
선지자로 부름받은 사람들,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에베드 야웨가 되는 것
하나님이 단순히 노예라고 지정해서만 노예되는 것이 아니다
- 선지자의 소명 체험과 관련
선지자로서의 부름을 받는 체험,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신분 - 제사장과 선지자
제사장은 전통과 세습에 의거해서 제사장이 된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르심 ‘소명’ - 이것이 선지자로서의 결정적 요건
남자든 여자든 어떤 직업, 어떤 가문 이든지 소명이 임하면 그가 선지자가 되는 것
선지자가 될 때 에베드 야웨라 부르시고 하나님께서도 그가 자기 노예라는 인식을 가지심
선지자의 소명과 관련 - 선지자의 소명 속에서 소명 체험과 관련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에게 임하니라..’
그것이 바로 소명의 체험 ‘Into ~ ’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라
: 선지자가 부름을 받기 전에는 그 시대에 태어난 한 사람이었다. 그냥 한 사람에 불과
이 사람이 선지자가 되어서 어떤 필연을 소유하게 되는 것
여호와의 노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숙명적 인식을 갖게 됨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람에게 임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람에게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주시고픈 ‘계시의 말씀’
이 처음 임하는 것이 그를 선지자 되게 하는 것
단순한 정보 전달의 Communication이 아니라
부름의 전달, 그 메시지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영적 체험을 동반한다.
호세아 1:4 be hoseia
성령의 체험은 감각적 지각이 아니라 인식적 지식에 임하는 것
희랍의 사물 인식
1) 가시적 사물 - 육체의 감관으로 인식
2) 가지적 사물 - 지성의 판단으로 인식
추상적인 사실들에 대한 인식 -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은 가지적 사물에 대한 조명
인간 영혼의 기능 중 이성이 아닌 총명(悟性)의 영역
- 추론영역 - 판단영역
선지자의 소명 체험에서 하나님의 지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까지도 체험하게 됨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물들을 바라보게 됨 - 카리타스의 사랑
선한 의지가 분기되어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순명의 삶이 가능해짐
예전에 가지지 못한 세상의 길과 가치 포기가 이루어짐
이사야의 소명 체험 - 사 6장
천사들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임재 체험 - 영광의 빛을 체험 - 자신의 더러움과 비참함을 처절히 깨닫게 됨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 비추자 자신의 불결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
그런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의 카리타스를 통해 보편 세상(인간과 역사..)을 바라보고 이전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버림
사랑, 자랑 거리 모두의 총체적 변혁이 일어나게 됨
자기 사랑안에 있는 합치적 성격 때문에 자기의 인생의 목표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을 진실히 사랑하게 되면 나(이기적 자아)는 완전히 사랑하게 된다.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계시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완전한 합치가 하나님을 향한 순일한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신과 자기 사랑에 대한 사멸
영혼만 있든지 육체만 남던지..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태에 불과
육체와 영혼의 결합인가, 영혼만인가? 이런 것은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불쌍한 영혼이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도 불행한 것
자기 라는 존재도 언젠가 시공안에서 사멸될 것에 불과
결국 무엇이 남는가? 자기 영혼만이 남고, 오직 하나님만 남는 것
자기 영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자기 영혼을 진실히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실히 사랑하는 것
- 카리타스 사랑의 순일한 합치
예수 안믿고 사는 것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Crazy 한 것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이런 미션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향해 나가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에베드 야웨 사상
이렇게 선지자가 세상 한 복판에 등장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평균적 가치에 따라 사는 사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참된 신자가 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운 면들을 가지고 있다.
어두움이 어떻게 빛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빛과 어두움은 완전히 다른 것
빛의 결핍이 어두움
빛이 결핍되지 않으면 어두움이 어두움 될 수 없다.
서로를 부분적으로라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빛으로 드러날 수 없다. - 이것이 선교의 원리
JX의 말씀 -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 .. 빛으로 드러날까 두려워함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기독론적으로 넘어가는 것 - 그리스도 중심적
신약 시대에 들어오면서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것은 삼위일체적 사역
성부 성자 성령이 구원의 계획에 있어 성부, 구원의 실현에 있어 속죄는 성자가, 구원의 적용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예수의 성육신과 구속이 바로 성자의 독특한 사역, 이 사역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만유의 통치주가 되신다.
이런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는 것이 기독론적으로 넘어가면서 구원과 관련되어 신약의 기독론적이 된다.
여호와의 종 →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
이 둘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
→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누리는 구원론적 사건으로 변환해도 무방한 것
여호와의 종 사상 → 그리스도의 노예 사상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길과 가치를 택하는 것
과거와 미래의 계획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선적인 계시가 중요한 것, 이것이 선지자의 선포
따라서 선지자의 선포는 결코 대중적일 수 없다.
시대가 희망없을 정도로 타락하면 더욱 강력한 선지자들을 보내심
아합의 시대 엘리야와 엘리사
강력한 하나님의 계시, 그 계시가 역사속에서 성취될 것을 바랄 때에는 그 계시의 예언을 성취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이 떨어지지 않고 성취됨을 보이셔서 가깝게는 선지자의 신실성을 성취하고 말씀의 주인이시고, 우주의 주관자이며 통치자이며 보존자이신 하나님의 왕권을 당대와 후대의 사람들에게 보이심, 이것이 선지자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을 드러내는 특징적인 체험이 바로 ‘다메섹의 체험’
이사야의 체험과 비길 수 있는 적실성을 가진 것
사도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거기서 강력한 계시가 들어옴
계시 - 예수의 죽으심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백성에 대한 속죄와 십자가 대속이라는 신학적 이유, 이것이 계시의 내용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대속하셨나?
그 이유가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열심 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이 그 사랑앞에 거꾸러지고
과거와 세상의 가치를 버리게 됨
성령의 체험이 사랑의 체험이 됨
은혜는 사랑의 감화
은혜는 감화를 통해 사랑을 낳게 됨, 그 감화를 주는 분이 성령
은혜는 바로 ‘성령’이다. - 조나단 에드워즈
구약의 에베드 야웨 = 신약의 둘로스 크리스투
구약의 예언 -- 기독론 → 신약의 계시
성부, 성자, 성령의 합일적 사역으로 인간을 변화시킴
우리의 논의와 관련된 개념, 이렇게 되었을 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무슨 관계인가?
이 사람이 한 순간에 강력한 비춤을 통해 세상의 길과 가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그래서 숙명적으로 그리스도께 묶인 삶을 살게 됨, 그것을 좌우하는 것이 두려움이나 공포(구약)가 아니라 ‘사랑’(신약)이다.
나의 사도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 사도 바울
하나님의 은혜에 매여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다. - 사도의 아이덴티티
신분이 아니라 직무상의 차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기원은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의 은혜 →사도로 부르심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이 어떤 숙명에 매이기 된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숙명, 그것이 바로 신분에 매이게 되는 것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라,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션을 가지게 됨 - 나는 이방인의 사도라..
그렇게 그가 살아가게 됨
그렇다면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가 예수의 노예가 되는 체험을 할 때
사도의 체험이 매우 독특한 체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체험과 이질적인 것이라 말해서는 않된다.
- 요 10장 목자도 양의 문을 통과한 사람, 양도 문을 통한 사람
양의 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
목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고, 그에 의해 돌봄을 받는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한 사람
목자도, 양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목양하고 목양받는 것
각자를 소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체험
한 사람이 정말 목회자의 길로 부름을 받을 때는 그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보다 특별한 거룩의 경험, 아가페 사랑의 경험, 더 지고한 카리타스의 체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닫고 나니 그것에 대해 압도하는 슬픔
그들에게 영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기게 되는데
자신이 그 인식을 위해 살지않으면 않된다는 중차대한 부르심을 경험하게 된다.
외면, 저항할 수 없는 소명 - 이것이 목회소명의 본질
세상의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택한 사람, 그 숙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사람
영광과 숙명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으면 않된다는 인식과 체험
사랑안에 있는 목표의 합치성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인식과 체험은 가변적
이 인식과 체험이 아무리 처음에 강력한 소명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화, 가정, 직장, ... 에 대한 소명에 대한 강력한 인식과 체험을 느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그 한번의 체험 때문에 예수의 노예됨을 충만해 지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길들여져서 자유민으로서의 건방진 자아결정적인 성향이 다 폐기되고
노예 근성이 되어 주인에 대한 의지외에는 생존할 수 밖에 없는 노예 자체가 되어야 한다.
주인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두려움을 가지고 새로운 본성, 노예됨으로 가득해 져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노예됨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회심과 소명으로 그러한 인식을 가졌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결심으로 그칠 수 있다.
지속적인 쇄신과 갱신되어야지만 그 사람이 진짜 예수의 노예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 이것이 예수의 형상을 보다 온전히 닮아가는 과정이다.
예수를 온전히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과 온전히 일치한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나는 예수의 흔적 을 가졌노라
예수의 노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강력한 강제성과 경향성, 을 이야기 하는 것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 논증하는 것
예수의 형상이 왜 중요한가?
예수의 형상을 닮는 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계획 자체이다.
구원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
그 이야기는 예수를 닮는 것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지상에 두신, 의도하신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질료의 변화가 아니라
참 인간이 되는 것은 질료가 아니라 형상이다.
참 사람의 형상을 가졌을 때 그는 참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
그런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 안에 영혼 안에 있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이 죄와 부패로 더럽혀진, 사람의 기능을 온전히 할 수 없는 기능을 성령의 정결한 작용으로 그 불결함을 제거하여 순전한 영혼이 될 때, 순전한 영혼을 작용을 통해,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통해 창조의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어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참 사람이 되는 것이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는 것과 완전한 동의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존재에 관해 생각할 때 철저히 목적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 세상에 모든 사물들,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목적 없이 피조된 것이 없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의 목적에 부합될 때 그 피조물에게 참 행복이 된다.
원래 지정하신 자리로 돌아가고, 그 자리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를 창조하시고 살아가게 하신 목적, 그 목적에 부합되는 작용을 하고 있을 때 인간은 그 때 가장 탁월하고 아름다움, 그 때 자신도 행복하고 하나님도 영광받으심 - 이것이 인간의 본래 창조목적
선교라는 것 - 인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
성화 - 하나님이 창조 시 기능하게 하고 싶으셨던 인간의 지위와 위치를 유지하고 보존하게 하는 것, 그 성화의 과정이 예수 닮음의 과정을 통해 성취되는 것
성도의 가장 큰 행복은 예수를 가장 많이 닮는 것
그렇게 맛보는 행복이 세상으로 인해 썩어지거나 방해받지 않는 완전한 소유가 된다.
참 예쑤의 형상을 본받는 비결
1)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그것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예쑤의 흔적을 가지고 예쑤께 예속되고 예수의 노예로 살아가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지정하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
우리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언급할 때
a. 지성의 헌신
율법 중 가장 큰 개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디아노이아’
para dianoia - 과대 망상
신약에서의 디아노이아 와 고대 희랍 철학의 디아노이아와 완전히 다르다
희랍 철학 : 인간이 가진 지성적 기능중 특별히 산술적 기능 - 공간, 선분의 개념
깊은 인생의 지혜, 본분을 깨닫는 것은 인텔리켄치아의 개념 - 오성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예수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데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할 때 객관적으로 우리가 거룩해지고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아니다.
성경으로 도배한 집에 산다고 그가 성경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지성을 완전히 통과하여 영혼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것
이것에 지성의 헌신이 반드시 필요
형상의 개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지성’ 의 개념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며
영혼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지성
하나님 형상의 핵심이 바로 지성 - 영혼의 심장부
가장 뛰어난 것은 하나님외에 없다 - 어거스틴
하나님을 향한 지성의 헌신이 없다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 경외라 말할 수 없다.
조셉 벨라미 -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그것 자체가 바로 죄
무지한 대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반역
알 기회가 있었음에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패역
비유) 연애에 있어 상대방을 알아감
연애를 하고 사랑에 빠지면 그 특징이 상대방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
상대방의 키, 주소..
사랑하기에 지식을 계속 갈망하게 됨
하나하나 발견하게 될수록 그것에 대한 감탄
사랑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욕구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의 반증
하나님에 대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을 때 그대들은 충분히 부패해 있는 것이다.
사랑하면 너무 너무 알고 싶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여기서 나오는 개념이 ‘그노시스 투 크리스투’
숙명적으로 예수께 매여 예수의 노예로 필연적으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무엇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 구약의 ‘다트 엘로힘’ - 체험을 동반한 앎
구약의 하나님 앎의 정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목적을 따라 그를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원동력
그것이 빠지면 언약 백성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밖에 없게 하는 그 무엇인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삼위 하나님을 계획을 사랑하고 그 영광을 위해 살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그노시스 투 예수
그 지식과 형상이 어떤 관계인가?
그 지식을 쌓아가는 과정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과 완전히 일치
그 전인적인 지식의 성격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
예수를 알면 알수록 그를 더 사랑하게 되고 그를 경험하면 할수록 그를 더 알아가게 됨
- 통합적인 작용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바로 지적 행복
그리스도인이 무엇 때문에 행복해 질 수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슨 선물을 주었을 때 그것을 버리지 않는 것은 선물 자체의 값어치 때문에가 아니라 그것으로 관계를 확인하기 때문
일반섭리에 의해서 축복을 받을 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X
축복을 분여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그를 더 사랑하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그 베푸신 은혜 때문에 불변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 그것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배향하는 것
철저히 지성이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지성의 헌신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알고 싶어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해 주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성, ‘디아노이아’ 그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도록 가르치는데 그것은 무엇으로 형성되는가?
지성 ratio (이성과 오성)
- 理性 : 추론, 판단
- 悟性(총명)
이성과 총명이 증진되어 더 알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됨, 그 지식을 소유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 많이 닮아가게 됨
이 경우 이성과 오성이 어떻게 다르게 기능하는가?
이성
오성 - 빛 <- 조명
총명을 통해 판단력을 얻게 됨
ex) 회심을 하는 사람들을
말씀을 통해 어떤 지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지식을 통해 어떤 비침이 있었기에 예전에 없던 지식을 소유하게 되고, 예전에는 아파하지 않던 사실 때문에 아파하고,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엎드려 지는 것
이 모든 작용도 지성과 관련되는 것 - 깨달음없이 어떻게 회심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떤 비췸을 통해 이전에 가지지 못한 지식을 소유하고 자신의 비참을 깨달음
현실의 처지에 대한 미움과 애통, 참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에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설명할 수 없다.
스스로 반추 ... “내가 나인것 때문에 얼마나 아프셨는지를 깊이 아파함”
그런데 왜, 어떻게 그러한 반추와 고백이 일어났는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조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믿음으로 파지, 그것이 당시에는 이성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고대 철학자들이 진실을 찾아가는 두 가지 길
이성의 추론 기능(작용) - ratiokinatio
- ‘변증법’ dialectike
성령께서 빛을 지성에 비추어서 ratio.. 를 알게 된 사실, 이것을 지성적 작용이라 한다면
이것이 지성이라하면, 이것을 깨뜨리는 것이 dialectike
이것은 철학에서도 신비적인 경험으로 규정한다.
플라톤의 Politeia 5권 ‘동굴의 비유’
동굴에 비쳐진 Image를 잘 설명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성인으로 대접받는 동굴의 형국
그러나 어떻게 동굴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 - 동굴의 모상이 모두 가짜(모형)였음이 판명됨
불빛 뒤에 있는 찬란한 태양 아래 있는 찬연한 원형적 세상 - 장자의 호접몽
원판에 대한 외침 - 동굴의 사람들이 그 사람을 죽여버림
많은 사람들의 의문
숙명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
현실 세계의 표상(판타스마타) - 돈, 권력, 명예 ...
보편적인 진리 자체가 그것을 이끌어내는 이성의 힘
상당히 중요한 접촉점 -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심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영혼자체안에
완성인과 목적인을 가지고 있다.
완성인 - 영혼의 참된 상태로 완성될 때 영혼이 행복해 함
목적인 - 영혼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되어갈 때, 그 영혼에 영향을 줄 때 행복해 함
진리에 대한 갈망
오늘날 쾌락을 향한 미친 몸부림
-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영혼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은데서 오는 것
진리를 알게 하는 힘이 진리의 힘인 것처럼
자연적인 생각, 하나의 의견이었다면 오랫동안 고집한 그것을 깨뜨리고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지성적 원리, 그것을 이성으로 메꾸지 못해도 비춰지는 새로운 사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진리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전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
변증법 - 정반합 합이 되면 이전의 정과 반은 상실
변증법적 진보 - 헤겔의 절대 정신의 진보 과정
이런 철학의 맥락에서 진리가 이끄는 힘
모든 인간의 철학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영역을 필연적으로 포함
소크라테스의 에우테프론
- 왜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야하는가?
죽은 다음에 지옥에서 고통 당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답변
- 칸트의 정언명법
그러한 종교적 영역은
인간의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 자신이 찾아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번쩍하는 빛이 필요
이런 종류,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강력한 빛의 필요
신앙의 세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디아렉티케를 통한 진리의 수납)
이것은 흔들릴 수 없다.
번쩍하고 비추는 빛을 믿음으로 붙들면 이성적으로 똑똑한 사람이 와서 논변을 해도
성령을 통해 논변하는 진리 사실에 의해 굳게 믿고 확신하고 붙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
‘될거야’라는 자기 암시는 믿음이 아님
이성의 추론을 통해 왜 그러한가를 추론해 가는 과정
하나씩 알아갈 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음을 알아갈 때 강력한 진리의 빛이 비추게 됨
이렇게 성장해 가는 것을 가리켜 지식의 성장이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조명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에 왜 그러한가를 탐구하는 가를 고찰하는 과정,
이 과정의 반복이 어찌 지식의 작용만이겠는가?
전인격적인 과정이 된다. 지성과 정서, 의지의 전일적 작업이다.
이것이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지성이 밝혀져서 진리가 밝혀지기 위해서는 의지를 가지고 이성의 추론에 의한 하나님 지식을 자신의 삶과 합치시키려는 노력
그럴 때 이 지성이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
지성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알아갈 때 실제로 자신의 삶을 진리를 아는 지식에 합치시키려고 노력할 때 지성의 총명은 더해가게 되고 지성의 총명이 더해질 때 보다 더 온전한 삶을 상 수 있게 된다.
2) 성령에 의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쇄신되는 것
진리의 빛을 통해 역사하실 때 우리 삶의 질서가운데
사랑의 질서가 무너진 것을 말씀안에 비추시는 성령의 감화로 교정하심
사랑할 수 없던 것, 사랑하지 않던 것, 그 질서를 포기하게 하심
ex) 등산을 좋아하던 어떤 자매
회심후 고가의 장비가 쓸모없어짐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질서가 재편됨
우리 안에 성령의 작용이 쇄신되면서 새 본성이 날마다 새로워짐
이렇게
말씀과 성령의 관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
말씀과 성령의 관여 - 칼빈이 말한 바 십자가를 사용하심 (고난, 상처, ... )
이렇게 진리와 성령의 작용을 통해 예수 닮을 때
우리로 하여금 예수 형상 닮지 못하게 하는 것
1) 지성과 관련된 것으로서 거짓된 표상에 속는 것
어떤 것을 사랑할 때 현실 세계에 속한 그 어떤 것 - 나의 일, 나의 사람 ...
세상의 나고, 희노애락, 이 현실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비극
이것들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우리에게 화려한 환상으로 시공안에서 다가옴
공간안에서 그 대상으로, 시간안에서 그것을 낭비케 함
영혼아닌 육체를 사랑하게 됨 - 그러나 그것은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
결국 소멸될 그것을 사랑하는 것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현상’
어제의 이것은 오늘의 이것은 다르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결핍을 향해 흘러가는 보편의 질료
완전한 모든 것은 이 보편 세상에 없다.
있다가 사라질 것, 결핍을 지닌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결국 비극이 된다.
마지막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것은 지성에 관련되어 지성을 속이는 것
지성이 명정함을 유지하면 그렇게 변전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음
2) 사랑에 관련된 것으로서 욕정에 굴복하는 삶
지성의 혼탁함은 의지의 부패를 유발
선을 지향하나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상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순수지성을 소유하며 거짓 표상에 얽매이지 않음
영원과 순간의 또렷한 차이를 분별하게 됨
결국 사라지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해도 영원한 것만을 사랑하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절대 일치한다.
영원히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완벽히 일치
그것을 극복하며 사는 길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우리의 육신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도다..
그러면서 인간의 참된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다.
보편의 변전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보편개체의 속성을 분별하는 것이 바로 총명이다.
결론적으로 ...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에게서 기쁨을 얻는 것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지 말라
철저히 지성에 있어 헌신해야, 하나님을 지성으로 알아감을 철저히 추구해야 한다.
현실에서의 모든 헌신은 곧 하나님을 향한 궁극적인 헌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질문
1. 전일성의 차원
지성만이 아니라 지성이 지성에서 시작된 것이 애성으로 의성으로 흘러들어간다.
구획지어진 것이 아니라 흐름이다.
신자의 행복은 지적인 행복이고, 신자의 완성은 지식의 완성이다.
매일매일 전혀 몰랐던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행복
(그렇다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완전히 판별될 수는 없지만)
고통의 구렁텅이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인식
지성 - 애성 - 기능
종적인 통합 : 머리 -> 가슴 -> 실천
2. 소명에 대한 질문
소명은 하나님이 어떤 일로 사명으로 부르심
소명이 유효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애정이 결합된 부르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부르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대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사람마다 개별적인 소명의 attribute가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다양성의 문제이고, 통일적인 것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
어떤 이에게는 어떤 소명이 ..
사도바울에게서는 처음 하나님의 의로우심에서 나중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식
인간의 무지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식으로 출발함
이전에 알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앎으로 나아감
새로운 이해에 대한 인식에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됨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자신을 합치시킴
자신의 목적을 버리고 하나님의 목적에 합치시키려는 그에게
그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명의 영역과 그 어떤 태도와 능력을 갖추게 하시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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