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의 목적과 목회2
녹취자 : 허 혜숙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이 하루에 모두 일어난 일은 아니고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에게 에워 쌓여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엄청나게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때야말로 예수님을 대적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제대로 기도 펴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군중들이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했고 호산나 다윗을 외쳤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예수님께서 성을 가까이 오시자 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우시고’의 희랍어 단어는 ‘에클라오센’입니다. 예수님과 관련해서 ‘눈물을 흘리셨다’라는 단어가 성경에 두 번 나오는데 두 번은 ‘에클라오센’이라고 하는 단어 혹은 그 파생어이고 또 하나는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던 ‘에다클리우센’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에다클리우센’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의미하지만 여기 나오는 ‘에클라오센’은 영어의 cry입니다. 큰 소리로 목 놓아서 우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에워 쌓여서 예수살렘 가까이 오셨을 때에 큰 소리를 내어서 방성대곡 하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 우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그렇게 큰 소리로 목 놓아 우시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함께 따라가던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시점이 예수님이 우셔야 할 시점이라고 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도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다른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없으니까 우리는 성경본문에서밖에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본문을 읽어보면 더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큰 소리로 통곡하며 우신 이유는 성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그랬습니다. 여기에 씌여 진 단어는 ‘이돈’이라고 하는 분사입니다. 그렇게 획일적으로 두 동사가 나뉘어 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브래포’라고 하는 동사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대부분 의미했다면 ‘오라오’라고 하는 이 동사는 내면을 직관을 가지고 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그 동사가 여기에 사용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예루살렘 성을 보았고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보았는데 양자 사이에 보는 시각은 같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을 볼 때에 통곡하며 울어야 할 어떤 이유도 우뚝 서있는 예루살렘 성에서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 그 이면에 다가오고 있는 그 무엇을 예수님은 감지하셨고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 놓아 방성대곡하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강철같이 강한 분이셨습니다. 회개하는 죄인들에게는 온유하신 분이셨지만 뉘우치지 않은 완고한 죄인들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단호하고 강력하신 분이셨습니다. 당신의 생애 어느 한 곳에서도 나약함을 드러내신 적이 없는 강철 같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무엇을 발견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약한 자가 되어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계셨으니 그것은 기도의 변형된 형태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우셨는지 그 이유가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독백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네가 평화에 대한 일을 알았으면 좋았거니와 지금 네 눈은 숨기웠도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목 놓아 우시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그 예루살렘 뒤로 어떤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고 현제 예루살렘에 있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예루살렘이 그 속에 서 있는 그 존재의 어떤 상태를 예수님께서 읽어내시고 그것이 충분히 통곡하며 우셔야 할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목 놓아 우신 가장 골격적인 이유는 평화에 관한 일을 이 예루살렘이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이 당시로부터 약 1500년 전에 출애굽하면서부터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될 성소가 지시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왕권을 펼치시고 거기서 특별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주실 장소가 계시되는데 이동식 성전인 성막의 시대를 거쳐서 결국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안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학에서 이 예루살렘이 원래 무엇을 의미하는지 논란의 여지가 많은 흥미 있는 토론거리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대충 합의가 되어있는 보편적인 의견은 ‘우’와 ‘살렘’의 합성어일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울’은 고대근동에서 성을 의미하고 ‘샬라임’은 히브리에서 이야기하는‘샬렘’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강의 도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당신과 만나실 중앙 화 된 성소를 계시해 주셨을 때 그 성소 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의미 있는 핵심적인 사건은 하나님과의 평화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언약관계를 떠나고, 범죄 했고, 그래서 그 관계를 깨트리거나 위협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가차 없이 단칼에 그들을 정리하시고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파기하고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들도 깊이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함으로서 다시 언약관계에 충성을 다하도록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맺었던 언약이 그 성소에서 리뉴얼되기도 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던 죄악 된 성품의 innovation (쇄신)을 그 성소에서 경험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예루살렘이 한 장소로 지정이 되고 시온은 바로 그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였습니다. 성스러운 땅으로 여겨지면서 그 예루살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집니다. 그 예루살렘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율법이 가르쳐지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온다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를 통해서 이 세상 나라와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왕권이 사람 왕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시효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성이 하나님과 관계가 깨트려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평화에 대한 일을 네가 알았더라면 좋았거니와’ 여기에서 쓰여 진 ‘에이레네’는 정확하게 히브리어 ‘샬롬’의 희랍어 번역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만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전쟁이 없고 평안한 모든 상태, 갈등과 고통이 없는 모든 평안한 상태를 가리켜서 ‘샬롬’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지금도 히브리에 가면 원래 이 ‘샬롬’이라고 하는 말은 ‘hole' 혹은 wholeness'의 의미입니다. 지금도 히브리에 가면 빵가게에 가서 '텐리샬롬’ 이렇게 말하면 빵을 동그랗게 구운 큰 것을 주고 ‘텐 리 하찌’라고 말을 하면 빵을 반쪽을 자른 것을 줍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샬롬’ 이라고 하는 단어는 온전한 것, 쭈그러지거나 깨지거나 결함이 없이 온전하게 된 상태, hole 하게 된 상태가 ‘샬롬’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온전하게 된 hole의 개념은 holy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상상력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거룩함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함이라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holiness is wholeness' 다 라고 말합니다. 죠나단 에즈워드는 자신의 저작 전집 제 19권에서 로마서 7장을 해설하는 가운데 24절에 나오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그 구절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화에서의 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은 그 이루어 질 수 없는 목표를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추구한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perfectness는 결코 이룰 수 없는 goal 이지만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그것이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미리 그 완전함을 추구하는 노력을 거두지 않는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wholeness, 그것이 곧 holiness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 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비전을 따라서 혀가 빠지도록 일하는 것이 wholeness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꿈을 위해서 충성하다가 죽어버리는 것, 그것은 그냥 일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holiness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관한 모든 뜻을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선한 창조의 상태의 기원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는 자기의 창조론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모든 세계의 창조는 from father 아버지로부터 성부로부터, through son 아들을 통해서, in spirit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최종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리고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한 가지 방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계명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복종하고 전 방위적으로 순종하되 모든 성실함과 일체의 부지런함으로 마치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그 목적 하나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자기를 다 매진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위해 기대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죽어라 하고 하나님만 위해서 살면 우리는 무슨 재미로 살아?’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속에 죄가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면 되지 인간이 아무려면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나 같은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 때문에 그곳에서 한없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은 것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좋아하는 하나님 주권 사상, 코람데오의 삶, 쏠리데오의 삶,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거기에 온전히 순복할 때 하나님과의 샬롬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렸을 때는 그렇게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이탈해서 제멋대로 살아간 것에 대해서 깊이 가슴이 아프도록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 참회의 아픔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살았을 때 맛보았던 즐거움을 반드시 능가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떠난 창조의 목적을 이탈하는 즐거움이 다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가슴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죄에 대한 현고 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라도 무한히 용서하시고 다시 샬롬을 누리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샬롬이 생기게 되면 그 샬롬이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느냐 하면 제일 먼저 자기와 같이 이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음 아파하고 그들을 돕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샬롬이 흘러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그 샬롬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넉넉한 자원으로 모든 창조주의 부요함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향해서 너그러워 지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을 만나 봐도 목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잘 되고 교인들한테 존경을 받고 그러면 어디를 가도 너그러워 집니다. 밥을 먹어도 자기가 돈을 내려고 하고 뭐라도 하나 선물을 해 주려고 하고 그런데 교회에 돈도 없고 나가라 들어가라 그러고 맨날 싸움질이나 하고 그러면 모든 것이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너그러워서 나타나는 것이 자비 ‘헷쎄드’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사랑을 죽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평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예수님이 무엇을 생각하시면서 이렇게 통곡하신 것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주 오랫동안 이 예루살렘의 부패를 참으시다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후 70년에 있었던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침공이었습니다. 제가 그 날짜를 모두 외우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 용서하십시오. 이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온 성을 에워싸게 됩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때가 2월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모든 보급이 차단되고 그 포위된 상태에서 약 6개월 동안 대치하게 됩니다. 모든 보급이 다 끊어지고 그야말로 그 성은 비참한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6월 17일에는 결국은 모든 물자가 끊어져서 늘 드리는 제사조차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그 후로부터 며칠 후 안토니오 요세가 점령이 됩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서 결국은 총 공격을 받게 되고 그리고 예루살렘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참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죽었는지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피가 도랑을 흘렀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 속에서 아이를 잡아먹는 일까지 일어났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살육이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은 광경이 연출됩니다. 아직 아무도 그런 위험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예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해서 그 다가오고 있는 역사를 아셨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처참하게 멸망하는 광경을 미리 보고 계셨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같이 흐릅니다. 예루살렘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 이때만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당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도 망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올브라이트 같은 학자는 이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발전시켜서 설명을 합니다. 어떻게 설명을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공동체 속에 상이한 두 신학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main stream을 구성하고 있었고 또 하나는 아주 마이너리티가 되어서 흐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main stream은 아브라함 언약의 신학입니다. 그리고 그 아주 작은 마이너리티들은 모세 언약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설명하는 것들이 우습습니다. 왜냐하면 두 언약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언약이 모두 은혜언약 안에 포함 된 것은 사실입니다. 단 모세언약은 그것이 전적으로 은혜언약이라고 보느냐 아니면 은혜언약 안에 행위언약을 약간 포함하고 있는 혼합된 언약이냐에 따라서 신학적인 견해가 많습니다. 어쨌든 커다란 흐름은 모세언약도 아브라함언약과 함께 은혜언약 안에서 흐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사람들에게 실효되는 방식은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은 무조건적인 은총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실 때 ‘너 똑바로 살아라, 안 그러면 반 죽고 잘 살아 그러면 내가 복 줄게’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에게 순종을 기대하시면서 은총으로만 하나님이 다가가십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구약 백성들이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자꾸 떠올렸던 이유가 우리에게 은총만을 약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세언약이 들어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그 무한히 계속된 은총만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죽음의 칼이 동시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너희를 복 주고 또 복을 주지만 그러나 너희들이 이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하는 무서운 죽음의 개념이 함께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용어사용을 빈다면 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신앙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포함하지만 직접적으로 모세의 언약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없는 은총의 하나님이시고 용서를 빌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얼마든지 용서해 주시고, 다시 힘을 주시고, 샬롬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돌이키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음의 칼을 내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그 신학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이런 사람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59장 같은 데를 보면 원래 있었을 명백한 히브리어 본문을 70인 역을 번역할 때 신학적인 작업을 해서 거기에서 조건적 죽음의 개념을 빼버리고 무조건적 은총의 개념을 집어넣는 해석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다 의도 된 것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오늘날의 시대를 보면서 무엇인가 우리는 공정성을 잃어버리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고 있다고 하는 느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다른 곳은 다 망해도 예루살렘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러한 꿈이 신학적으로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법궤를 들고 블레셋과 싸우러 나갔던 아벡의 전투에서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다가 안 되겠으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간다고 그러면서 법궤를 들고 나간 것입니다. 싸움에서 졌고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훼의 종교가 얼마나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계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길에 서 있지 않는 언약의 백성들이 그들이 비록 언약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당신의 임재를 매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운명적으로 증거 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자유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방종하게 살아가는 기회로 삼습니다. 진리의 구원을 이 세상에서 마음껏 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택한 백성들의 표가 아니라 버림받을 백성들의 표입니다. 예수님이 이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너무 간절하게 우셨습니다. 왜?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뻔하였거니와’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자산이 뭡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큰 기업은 공유석 3만 불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신학교를 한국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날 동안은 가난하기도 하고 부하기도 하고 그렇게 삽니다. 저도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신학교 다닐 당시에는 데모도 하고 했습니다. 꼬박 교수님 연구실에 앉아서 하루에 13시간에서 14시간을 꼬박 앉아서 기도하고 공부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일어나면 하늘이 막 도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을 쓰러졌습니다. 그 때는 그것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였습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교수가 되고 나서는 조금 여유가 있어지고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껍질입니다. 언제 우리가 마음속으로 가장 부요한 삶을 살았느냐 하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였습니다.
(찬송)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은 이 참 좋은 나의 친구
우리는 바로 그것을 외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그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 모두와 원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것이 신앙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과 당신을 떠난 많은 백성들을 향해 오래도록 인내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날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그런데 여기에 희랍어 성경에 보면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카이’ 여기에는 end라는 뜻도 있지만 even입니다. 직역을 하자면 ‘너라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오늘 날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처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죄가 들어오기 전의 상태에는 모든 피조물이 communication에 의해서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누리고 있었고 거기에서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하나님은 만들어 놓고 고정된 창조의 상태에서 영원히 만족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영적인 연결을 통해서 당신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끊임없이 흘려보낼 때에는 뭔가 경향성을 가지고 일정한 방향으로 그것을 흘려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가는 신성의 충만한 것의 유출 속에는 목적론적인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될 것은 창조하신 세상이 어느 쪽으로 가기를 원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위에 신성한 충만을 그들에게 흘려보내고 또 그들을 관리해 나가시고 또 인간을 통해 관리해 나가시는 그 점에 있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리로 이행하고 있기는 했지만 순간순간이 하나님에게 불만을 드리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완전하면서도 더 완전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완전으로부터의 또 다른 완전으로부터의 이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경향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움직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천국도 그렇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이것을 신학 역사상 가장 풍부하게 설명한 사람이 18세기에 이 경험론적 철학을 렌즈로 해서 이 기독교의 역사와 사상을 보면서 설명했던 죠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나라는 고정된 상태로 회복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더 충만하게 증진되는 곳이다, 따라서 거기서 성도의 행복도 계속해서 증진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는 싫증이 있을 수 없다, 아침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영광의 빛을 보면서 그 속에서 성도들은 증진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지옥은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형벌이 주어지면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그 분노가 순간순간 더 그들에게 알려지면서 거기에 더 무서운 양심의 가책과 치열한 형벌이 점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설명하기를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선한 상태를 이탈한 인간의 죄의 질이 무한대이기 때문에 그 형벌 또한 무한대인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에 부합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너무 아름다워서 그것이 목적을 향해서 이행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모든 목적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바다의 파도와,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바람소리와,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와,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소리와, 아침에 내리는 이슬과, 그 아름다운 것 하나하나가 오케스트라처럼 되어서 연주되고 있을 때 인간의 지위는 무엇이든지 거기에서 그것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과 아울러서 찬양을 창조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거기 conduct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위입니까? 이것은 천사들도 누려본 적이 없는 지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싫다고 했습니다. 왜?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이것을 싫다고 했습니다.
저항적 가치관이 바로 죄입니다. 컨닝하고 도둑질하고 사기치고 이런 것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태도, 그리고 다른 것들로 살아가려고 하는 마음의 경향, 그 모든 것들이 다 죄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일반은총 속에서 사람들이 계속 태어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알 수가 없습니다. 어제 설명 드린 것처럼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세상을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 영원한 것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대부분이 관심을 잃어버렸고 또 남아있는 것은 곡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창조하신 이 자연의 세계를 통해서는 당신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당신께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충분히 알려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람, 한 가족, 한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계시를 힘입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감화를 힘입고, 영적인 연합을 이루면서 살면서 죄와 함께 끊어져버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원들을 공급받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독특한 윤리를 따라서 독특한 방식으로 살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왜 다른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사는데 저들만 저렇게 유별난 삶을 살까?’ 봤더니 그들 뒤에 그들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지식의 담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택한 것만 가지고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도시는 모두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예루살렘 너만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평화가 깨트려 졌을 때 다가올 역사의 뒤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발자국을 헤아릴 수 있어야 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많은 도시들에게 외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칼 라일은 자신의 책 ‘영혼과 그의 시대’라는 책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단은 이 세상 역사의 뱃머리입니다.’ 그래서 한 시대의 교회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시대를 향해서 ‘금과 은은 나도 있거니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사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을 배워야 됩니다. 성전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가 그들에게 한 푼 달라고 손을 내미는데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금과 은은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세상이 도저히 줄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그를 일어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미담이나 만들어내는 그런 공동체가 아닙니다. 신문지상이나 오르내려서 사람들의 박수나 받고 그런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지식의 담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부터 말미암고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이 세상의 무지한 죄인들에게 참된 지식의 빛을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빛을 담지한 사람들이 동시에 빛의 담지자가 되어서 그 빛을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빛들로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빛들로 나타나는 것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궐기대회를 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인지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교회 역사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경건한 사람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을 방문했을 때 그 때 시대의 교황이 이노센트 2세였답니다. 수도사에게 교황은 큰 창고를 보여주며 거기에 있는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들을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이보게 이제 우리는 굳이 세상을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네’ 그랬더니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답니다. ‘교황이시여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이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감동적이죠?
그러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던지고 있는 도덕주의 이런 것들은 율법주의보다 더 나쁩니다. 시간이 없어 더 이상 못하지만 교회를 다 말아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큰일 나는 것입니다.
먼저 지식의 담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중요한 것은 전도하고 그런 것이 교회의 본래의 사명이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그냥 거의 다 내팽개치고 맨 날 북 치고 장구치고 밥해 먹여서 사람들만 데려 와 가지고 교회에서 댄스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그것이 시장 통이지 뭡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항상 동일합니다. 세계 선교의 위대한 역사를 보면 모두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믿는 백성들에게 물같이 부어져야 합니다. 그들이 이것을 주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밀듯이 선교를 나가고 교회를 개척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은혜의 말씀을 전해서 그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자처럼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은 뭔가 틀렸어야 되었다 이것입니다. 다른 도시가 잠들어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러지 말았어야 되었다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예루살렘 된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하나님과의 평화의 도성인데 그 하나님과의 평화를 상실했습니다. 이 속에서 오늘날의 교회를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있을까? 오늘 이렇게 통곡하며 우시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비전보다 더 중요하고 자기 인생의 계획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 peace maker가 되는 사람입니다. 이 peace는 역시 하나님 없이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그런 peace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하여 임하는 놀라운 평강의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 전체를 위해서 이 화목제를 드립니다. 그러면서 모두 어울려서 먹습니다. 그 공동체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함께 어울려서 함께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그들은 우리가 언약 공동체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곳에서는 항상 극단적 이기심들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상체기를 내는 것입니다. 각자 각자가 하나님의 선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하나님도 자기의 수하에 두려고 하는 제왕적 가치관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겸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핸리 스콧이라고 하는 경건한 청교도는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책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한 신자가 참으로 진실한 신자인지는 그에게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과 참회를 보고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자기의 불순종과 내재하는 죄와 겉으로 들어나는 악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는 참회의 삶을 실천하고 있지 않다면 지금 그 사람은 bad christian입니다. 무언가 하면 좋을 어떤 것을 안 하고 있는 그것이 아니라 bad christian이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어기고 그 분을 거스르며 살면서도 참회할 줄 모른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결국은 그 속에 있는 죄가 그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 죄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은 부패한 본성에서 나온 죄악입니다.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그 표현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엑스트라 에이스 데 온’ 하나님을 대해서 원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in to God' 하나님을 속속들이 파고들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니 그가 신학활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찬양사역을 하든, 선교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근본적으로 그 죄의 본질적인 성격은 바뀌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게 쪼개도 성격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나빠하지만 제가 늘 비유하는 말이 있습니다. 큰 탱크에 똥을 가득 실은 차가 출렁거리면서 지나가고 있습니다. 더럽습니다. 뚜껑이 열려서 막 길거리에 쏟아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휴지조각하고 그 더러운 것들이 같이 쏟아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을 채에다 잘 걸러서 물로 만들었습니다. 스프레이에 넣고 안개처럼 좍 뿌렸습니다. 유사본질이 아니라 동일본질입니다. 크고 작은 것은 양의 문제입니다. 그 양도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그 양보다도 중요한 것은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적의’ ‘엑스트라 에이스 데 온’입니다. 정지의 개념이 아니라 이동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속속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정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참회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bad christian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기질이나 혹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서 매일 참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참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은혜의 상태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 분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는데 몇 시간을 기도하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눈물을 흠뻑 쏟아서 마음이 다 짓이겨진 상태가 될 때까지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철저히 짓이겨진 상태가 되었을 때 히브리 말로 ‘레브 다끄에’의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이 바로 시편에서 이야기 하는 ‘통회하는 마음’‘래브 다끄에’의 상태가 되었을 때, 문자적으로 철저히 짓이겨진 상태가 되어서 눈물을 씻고 일어날 때 그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어떤 의지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살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런 상태를 사모하면서 우리들이 모두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태를 사모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깊이 통회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라져버린 이 진실한 참회, 죄는 이전보다 훨씬 많이 지으면서 참회가 사라졌습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이래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는 믿음, 또 하나는 참회였습니다. 이 두 개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끊임없는 참회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참회의 눈물을 닦고 나면 항상 굳센 믿음이 생겨납니다. 이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릅니다. 그러니까 참회가 거의 없으니까 한 번 하나님과의 관계가 망가지면 복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죽어서 천당에는 가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천당 가려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회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이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의 계획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왜? 제왕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피조물의 위치에서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 부복하게 되니까 생겨납니다. 그래서 여러분, 친구 사귈 때에도 회개 하지 않는 사람과는 가까이 놀지 마십시오. 웃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귀기는 사귀되 깊이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한 웨슬레가 그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내 일생동안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과 계속 교제해야 되는 사람인지 교제하지 말아야 될 사람인지 첫 만남에서 대부분 판단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시간을 절약하면서 그를 만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이 신앙의 깊은 교분을 나누는 친구로서는 살아있는 사람들과 만났다. 그리고 옥스퍼드 holly club 이야기들이 모두 거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벌써 틀립니다. 나보다 공부를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대접을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여러 방면에서 남보다 더 능력이 모자라서 남들은 좋은 목회지 찾아가는데 찌꺼기처럼 처질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이 세상에는 에베레스트 산이나 몽블랑 같이 높은 산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동산들 중에도 아름다운 동산이 너무 많습니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가 만일에 진실한 참회자라면, 혼자 채플 실에 나와서 흐느끼면서 늘 진실하게 참회하는 선생님들을 깊이 존경하고 그런 학우들을 보석처럼 여기면서 가까이 두는 것은 여러분들 자신의 경건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부지런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는 것, 그 지식의 담지자가 되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고정적으로 받아서 가지고 있다가 담아서 그것을 다음세대에 물려주는 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한 달란트를 맡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된 신학은 끊임없이 개혁되면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세대로부터 받아서 그것을 내가 빛으로 삼아서 더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진지하게 몸부림치며 살아서 그래서 더 많은 풍성한 진리를 거기에 보태어서 다음세대에 진리를 전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더 많은 빛의 담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합니까? 그냥 노가다 목회나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목사 딱지 떼어버리고 가서 집사로 봉사하다가 죽으십시오. 그 예루살렘이 ‘너는 그것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너마저 몰랐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그 모르는 이유입니다. ‘지금 네 눈에 가리웠도다’ 히랍어로 ‘에클리베’입니다. 이것은 수동태입니다. 자기 스스로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누가 와서 못 보도록 가리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 지성의 소경의 상태가 됩니다. 영혼의 어두움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둡습니다. 어두우니까 총명의 판단은 흐려지고, 생각은 눈멂에 종속되고, 마음은 돌같이 굳어져서 웬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웬만큼 만져주셔도 참회를 안 합니다. 그리고 살아갑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마른 눈을 가지고는 천국을 볼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죄를 인하여 참회하고 이 세상에서 도처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지만 하늘나라를 보는 시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가리워 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으로 더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왜 이렇게 그러면 가리워지게 되었을까? 이에서 나타나는 기사가 성전 숙정기사입니다. 그렇죠?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는 장면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이것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시면서 이 일을 하시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문제 될 것도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원래 처음에는 자기가 기르는 짐승들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데 때로는 먼 길을 걸어서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면 짐승을 가지고 오려면 먹이, 배설물, 또 오다가 어디에 상처라도 나면 제물로서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편리한 방법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에 와서 사서 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성전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돈 문제도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돈이 세 나라 돈이 동시에 통용이 되었습니다. 그 전시대에는 헬라 돈이 통용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로마 돈이 통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돈이 히브리 돈이었습니다. 그것이 요즘 말로 표현을 하자면 히브리 돈은 양화였고, 헬라 돈과 로마 돈은 악화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희랍 돈과 로마 돈은 명목가치가 실제 가치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그래서 법으로 통용을 강요합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 돈은 명목가치와 실제 가치가 일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명목가치는 만원이라고 해놓고 실제 가치는 5천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겉 다르고 속이 다른 것이어서 가증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가지고 와서 히브리 돈으로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환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세미나를 하면 저 뒤에서 책과 태이프를 갖다 놓고 파는 사람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했는데 무엇이 문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숙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느냐 하면 편의로운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고 또 편의로운 방법으로 돈을 바꾸는 그 형태 때문에 예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행위 속에 숨겨져 있는 탐심과 마음드림이 없는 제사의 정신 때문에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내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았느니라 하였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뭘 발견하게 되냐 하면 결국은 여태까지 들은 이야기의 전개를 죽 보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그 다음에 그 속에서 잠들어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멸망을 앞두고 있는 도성에는 항상 잠들어 있는 교회가 있게 마련입니다. 잠들어 있는 성전이 있었고 그리고 그 성전 한 복판에는 영적인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지어낸 말씀이 아니라 이사야 5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사야는 제 삼, 제 사를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이사야서를 이사야 선지자의 단일 저작으로 보고 1장부터 39장까지가 1부이고, 40장부터 66장까지가 2부입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공교롭게 구약의 성경 39권과 일치를 하고 40장부터 66장까지는 공교롭게 성경의 신약 27권과 일치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39장까지의 분위기와 40장 이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40장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내 백성에게 정다이 말하라’ 그러면서 마치 고통 받는 백성들을 향해서 말할 수 없는 자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39장까지는 때리셨다면 이후에는 어루만지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의 부성애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40장부터 죽 전개되는데 이것이 53장에서 메시야가 예언이 되고 56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속사의 물결 위에서 찬란한 영광을 보면서 회복 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회복되고 온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주의 영광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는 축복 된 영적 상태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런 놀라운 구속사적인 영적인 변화가 성취 되는데 그 때에 특이할만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교회에. 그것이 교회의 성전에 괄목할만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키 배티 베트 테필라, 키 베티 이카렛, 베티 태필라 레콜하 암 님’ 이것을 직역하면 ‘왜냐하면 베티 내 집은 이카렛 일컬어질 것이다, 베트 테필라 기도의 집이라 일컬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나오는 구절이 ‘레 콜 하 암님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여기에서 이것을 우리말 성경에서 뉘앙스가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그렇게 번역이 되지만 사실 엄밀하게 보면 그것보다는 내가 목적을 위한 전치사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영광이 나타나서 그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샬롬을 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찬란한 번영을 이루게 될 때에, 영적 번영을 이루게 될 때에, 성전에 이전에 볼 수 없는 놀라운 특징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그 집이 기도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집이 되냐 하면 ‘래 콜 하 암 님’의 기도의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많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 중보기도의 집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놀라운 영적 부흥을 주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운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도로 성화의 상태가 될 때 그 때 그는 주기도문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성취가 실현되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너무 가슴 아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그 하찮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대적해서 주님의 뜻을 어기며 살아가는 것을 보며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어두운 세상 한 복판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example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 생애 전체의 농축 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애는 이 주기도문의 렌즈를 가지고 보면 예수님 생애가 찬란한 빛깔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고요한 사명입니다. 그리고 바로 목회자는 이런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 만은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예수 의에 심판 하시는 날
곧 가까이 있는 하늘에 믿는 자여 어이 할 꼬
그러면서 하나님을 버린 세상,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난 세상,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보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구속을 이루시고 그들을 위해 형벌을 다 당하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이것을 보고 들으면서 돌아오지 않는 이 세상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니 그들의 영혼의 고통이 내 아픔인 것처럼 그렇게 이 세상 한 모퉁이에서 흐느껴 울고 눈물을 씻은 후에는 그 기도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주기도문의 삶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지만 오늘날에도 교회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자신의 힘으로는 스스로의 죄를 위해 눈물 흘릴 수 있는 회심하지 못한 이 세상 도시를 위해서 가슴이 저미도록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펼쳐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바로 그 불씨가 되기 위해서 그 불신앙의 길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주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먹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여기에서 기도에 관한 치명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 제가 뭔가를 물어 볼 테니까 그렇게 하고 싶으면 아멘 하고 대답해 보십시오. 자, 물어봅시다. 제가 존경하는 스승 존 오웬은 그의 논문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라는 생애적인 논문 속에서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리를 내지 말아라’ 했습니다. 그대로 따르기에는 동의가 안 되는 면도 있지만 첫째는 대표기도 할 때, 두 번째는 성령께서 어찌할 수 없이 부르짖지 않을 수 없게 할 때, 두 가지 강조점은 소리를 내고 안 내고가 아니라 어떤 틀이나 이런 것으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깊은 내면의 속에서 진심을 담아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거기에서 spiritual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 인도할 때도 우렁찬 소리로 기도해야 되겠다고 하면 안 되고 또 그런 것을 조작하면 안 됩니다. 호소해서 진심으로 마음에 없는 형식이나 기도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기도 이것이 쇄신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신답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외로 하고 ‘자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으십니까?’ ‘아멘!’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잘 됩니까?’ ‘...’조용하잖아요? 개척교회를 하고 설교를 한 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래도 사명감 하나로 출발했으니까 뭔지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그냥 한 번 올라가면 성경을 다 털어놓고 오려고 하는 것처럼 100분씩 140분씩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 모든 고난을 이기고 성도들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수요예배를 끝났는데 10시 10분이었습니다. 내려오면 등에 땀이 흐르고 기운이 쫙 빠져서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젊은이가 걸어오더니 ‘목사님, 저 좀 상담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우리교회 교인이 아니면 상담을 안했습니다. ‘뭐냐?’그랬더니 ‘저 총신신학대학원 졸업반 학생입니다.’ ‘그래? 들어가자’ 사무실에 가서 ‘뭐냐?’ ‘교수님, 설교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그것은 설교 잘 하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라’ 1:0으로 졌습니다. 두 번째 또 질문이 하나가 더 있다고 했습니다. ‘뭐냐?’ 했더니 ‘옛날에 열렬히 기도했었는데 지금도 열렬히 기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래서 ‘열렬히 삽니까?’ 가만히 있었습니다. ‘열렬히 살지도 않는데 어떻게 열렬한 기도가 나옵니까?’ 굉장히 슬픈 기색으로 이 청년이 갔습니다. 6개월 후에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면담이 엄청난 충격을 준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깊이 파서 진짜 놀랍게 변화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열렬한 기도를 드리기 싫다, 나는 중언부언 기도하고 싶고 가식적인 기도를 꽉 채우면서 하나님 앞에 일생을 찍히고 싶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도 되면 언젠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면서 기도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그리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좀처럼 그 때처럼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깊은 자기성찰과 노련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오늘 다 다룰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은 기도 자체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영혼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상태가 순결하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분의 선한 의지와 목적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서 나 자신의 영혼이 거기에 충만히 영향을 받고 그 영혼에 따라서 내가 전적으로 그 분께 부종할 때 그 때에 열렬해 지고 싶지 않아도 열렬해 집니다. 가서 산에 올라가서 두 팔 벌리고 소나무 붙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뭐합니까? 목 만 아픕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개혁과 그 찬란한 경건을 가지고 있었던 그 찬란한 시대 퓨리탄의 시대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소위 말하는 리폼드 레가시(reformed regacy) 이 개혁주의의 유산들이 보석과 같이 소중한 것들이 굉장히 많은 부분들이 거의 실종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정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정’은 꼼꼼하다 할 때 정입니다. ‘사’는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기도도 아니고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닙니다. 곰곰이 말씀의 빛으로 자기가 한 나절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꼼꼼하게 마치 자기가 아닌 남에 의해서 조사를 받는 것처럼 자기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심지어 루이스 베일 같은 사람들은 하루에 세 번씩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이 경건이라고 하는 큰 아름다운 나무는 무지의 토양 위에서는 자랄 수 없습니다. 무지의 토양위에서는 그래도 반짝하고 자라는 나무는 ‘열광주의’라는 나무입니다. 그것은 무지의 토대위에서도 자랍니다. 그러나 거룩한 경건은 탄탄한 지성의 토대 위에서 자랍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철저하게 이 경건의 비밀이 무엇이고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고 하는 것들, 그 죄를 이긴 후에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삶의 계획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철저하게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의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입니다. 신앙을 위한 신학이 되어야지 신학을 위한 신앙이 되면 안 됩니다. 신학을 위한 신앙이 된다면 교리를 위해서 교리를 섬기다가 수많은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는 카톨릭의 길을 따르는 것밖에 무엇이 차이가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 바보 같은 일입니다. 옛날에는 세상의 ground에서 놀았는데 이제는 교회의 ground에서 노는 것입니다. ground만 틀려졌지 기본적으로 주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는 모습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기본적으로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순결한 상태, 성경적으로 순결은 무엇인가를 비워버린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무엇인가 비워보려고 노력을 해도 비워지지가 않습니다. 이번에 읽은 책 가운데 OO라고 하는 책 한 번 읽어보십시오. 물론 약간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읽으면 유익이 됩니다. 그 책에서 이 사람이 누구였냐 하면 resort college 학생이었습니다. resort college에는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세계를 움직인 20세기의 복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신 제임스 파커교수가 거기 계셨습니다. 거기에 가서 로마서 강의를 듣는데 그 분의 탁월한 영성으로 해석되는 로마서의 진리의 파노라마를 보면서 막 감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료수를 먹으려면 학교를 나와야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음료수를 파는 그 자리 그 바로 앞에 도색잡지가 좍 있는 것입니다. 쓱 쳐다봤는데 이것이 가슴에 꽂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가서 또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관심이 더 증폭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임스파커의 그 영광스러운 기독교 교리를 듣고 와서 도색잡지를 의도적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이상한 여자들의 그림을 보고 그것도 상상을 치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이 착한 학생이 결심을 합니다. 이 지구상에서 음료수를 파는 집이 그 집이 마지막 집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그 집에 안 간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죄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났다 라고 하는 환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 때 집에 갔는데도 어쩐지 기도가 안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곰곰이 며칠을 생각해보니까 결론을 얻게 됐는데 이것이 얼마나 죄가 많은 지, 얼마나 이것이 교묘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긴 것까지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적어도 내가 그런 것에 대한 것을 극복했다는 자기 의에 대한 생각이 마음을 꽉 채운 것입니다. 결국은 쓰레기차 피하려다가 똥차하고 박치기 한 것입니다. 어차피 기도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늘 경험하는 바이지만 이 분은 정말 놀랍구나, 이 죄의 circulation 이 죄의 미묘함, 그래서 존 오웬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경건한 내면의 깊이는 남이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죄를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느냐에 달려있다’ 고 말입니다. 불 받은 것이 영성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사는 것이 경건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게 순결한 상태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다 받아들이고 사랑을 한없이 받는 상태에서 내 마음의 틀, frame,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하비토스, 이 속에 있는 내 안에 있는 내적인 가능성과 하나님이 일하시려고 하는 그 지향적인 경향성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때 이 기도는 열렬한 기도가 되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향이 그 신자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교통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spiritual의 핵심입니다. 은사를 소유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와 거짓된 성도들의 차이는 진실하지 않는 성도들은 삶의 가치관이 자기만족적 행복입니다. 그래서 지금 신앙생활 하는 것도 하나님께 아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하면 뭔가 나의 행복이 증진될 수 있지 않을까, 관점 자체가 자기 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제왕적 가치관입니다. 그러나 증진하는 성도의 표징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서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거룩해지기를 원합니까? 거룩해 진 그 깊이만큼만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과 communication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결국은 일에 치이는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일에 over lead된 그런 사람이 아니라 grace over flow 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속에서 계속 넘쳐나는 사람,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 은혜는 나에게서 흘러넘치지만 그 은혜의 본질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이 사람이 내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나정도하고는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사람, 누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진정한 목회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잊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은 기억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여기에서 그런 죄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탐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탐욕과 하나님을 향한 허무주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내면이 하나님 앞에 어떤 상태에 있고 또 그 속에서 내 영혼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는 것, 이것이 기도의 본무입니다. 그러니까 성찰이 없는 기도는 이방인에게 드리는 제사 행위입니다. 자기 성찰이 없는 기도는 이방신에게 바치는 인본주의적 열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헌신 된 것 같아도 결국은 그 사람은 절대로 거룩해 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 하면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성찰해서 신학을 공부합니다. 어떻게 믿을 것인가를 생각해합니다. 끊임없이 목회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잘 섬길 것을 궁리를 합니다. 비전도 꿈꾸고 영혼도 돌보고 모든 것을 다 합니다.그런데 그 모든 작업이 이루어진 마지막 결과는 밖에 있어서는 안 되고 자기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됨됨이는 결코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 그 기도할 때의 됨됨이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한 신자의 됨됨이는 그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의 그 됨됨이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었는데 어떤 하나님의 숨결도 느낄 수 없고 하나님에 의해서 이 기도가 거절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가 그 존재를 하찮은 상태에 있는 사람, 구속해 주신 자녀라는 점에서는 존귀한데 지금은 너무나 멀리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찮은 사람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막 흘러들어옵니다. 성경을 폈는데 주님의 음성이 막 들려옵니다.
(찬송)
험악한 세상을 이끄시는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나는 지금 핍박과 고난으로 가득 찬 상태에 있습니다. 육신도 병들었고 공부도 많이 못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친밀함이 막 부어집니다. 형언할 수 없는 그 교통에 행복을 느낍니다.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성자로부터 은혜를, 성령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가득 찬 이 사랑과 은혜와 위로를 다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 매우 의미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겠지요? 우리 모두 다 주님의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도 우리를 차별대우 하시나요? 물론 차별대우 하십니다.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이 똑같이 대해주시지 않으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구원을 끝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많이 성화되고 끊임없는 참회 속에서 자기를 버리고 부패한 자기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수없이 기도해도 안 듣는 그 기도를 그 사람이 기도할 때 들어주십니다. 증거가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아합의 시대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 누가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시선을 끌지 못했습니다. 단 한 사람 엘리야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다시 하늘을 열고 비를 내리셨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람들이 나를 유명한 목사로, 유명한 선교사로, 큰 교회를 한 일꾼으로, 기타 등등으로 우리를 아무리 많이 불러주어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그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두 눈 앞에서 나의 됨됨이가 지금 현재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렇게 비둘기파는 사람들, 그 삶, 돈이나 몇 푼 바꿔서 이익을 착복하려는 그 탐심, 이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한데 거기에서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온다면 성경을 전부 다시 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쏟아지는 기도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이 일은 고단한 성화와 인내의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서 사는 성도의 얼굴에는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하다‘
매 순간을
(찬송)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겨 고난 길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 하소서
죄와 유혹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순결한 주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의 모든 핍박을 기꺼이 받으면서 안으로 안으로 영글러가는 나는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주게서 오시는 그 날에 흠도 없이 점도 없이 주 앞에 나타나리, 내 신앙의 정절이 이 모든 순결을 간직한 채 오직 그 분 한 분의 신부로 내가 나타나리라, 그런 종말 사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들을 좀 더 하찮은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은 이 기도는 죄 죽임의 기도의 열렬함은 죄 죽임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 기도의 열렬함을 통해서 죄가 죽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reformed 개혁주의 유산가운데서 사라져버린 것이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뿐 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학교에서도 누가 말하기를 ‘bible says' 그러면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나 캘빈 said 하면 다 끝납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를 할 때 토를 다는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로 안 찍혀도 캘빈 said 할 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하면 거기에서 완전히 찍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교주처럼 떠받드는 칼빈 중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공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분의 성화 론을 읽어보십시오. 교회 론을 읽어보십시오. 성화 론을 읽어보면 완전히 성화 론 적 교회입니다. 'sanctification' 결국은 뭐냐 하면 이 성도가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 이 고통 하는 세상에서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동안에 당하는 이 고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성례전 적으로 주님 앞에 봉헌하는데 그 성화의 결과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교회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이신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피 절이도록 그의 신학에 베어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교리가 닥트린 오브 몰티피케이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죽임의 교리’입니다. 그 죄를 롬8:13절을 기초해서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생기를 없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래로부터 이 기독교 경건의 가장 basic이었습니다. 가장 기초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청교도 조셉 벨람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잃어버리는 것은 오직 하나 때문이다, 그것은 참된 죄 죽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참된 죄 죽임이 없는 한 그는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현재적으로 느낄 수 없다’ 오늘날 이 혼돈스러운 영적 상태에 대해서 한 방에 처방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영국으로 유학 간 내 후배가 여러분들이 들으면 매우 섭섭한 이야기를 나한테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 동의를 했습니다. ‘선배님, 제가 이번에 논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다 객관적인 상태에서 조사를 해 봤는데 보수적인 교단일수록 가장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회피한답니다. 그리고 오히려 순복음교회에서 복음을 많이 전한다고 합니다. 동의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냐고 하니까 ‘아니 그 사람들은 복음의 비밀까지는 다 몰라도 그래도 그 쪽에서 나오는 설교 집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는 이야기는 자주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교 보수 교단에서는 아예 사라져버리고 고난주간에 딱 한 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혹시 예배를 드리면서 진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 떨어지는 핏방울에 젖어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우리 모두가 그 십자가의 은혜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증거 하는 설교를 듣고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서 펑펑 울어본 기억이 얼마나 됩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옥스퍼드 채플에 가서 설교를 하고 나왔을 때 그 연로하신 학장의 부인이 존스 목사님의 손을 꼭 잡으면서 ‘제가 이 학교에 온 이래로 여기에 앉아있는 옥스퍼드의 이 지성인들을 죄인이라고 설교하신 분은 당신 한 사람이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어떻게 죽이는 것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은혜는 죄를 죽이고 죄는 은혜를 죽이는 것입니다. 기도도 역시 같이 죽는 것입니다. 존 라일이 자기의 책에서 ‘죄는 들어오는 즉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은혜를 죽이는 일을 한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은혜는 들어오는 즉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죄를 죽이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죄가 기도를 죽입니다. 은혜는 들어와서 제일 먼저 기도를 살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받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우리가 진동치 못한 나라를 받았은 즉 우리가 그 일을 하자’ 그러면서 그 은혜 안에서 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이렇게 비둘기파는 자들의 상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그 은혜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죽일 수 없으니까 성령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우리 안에 남은 죄를 죽이시도록 하나님 앞에 깊이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오다보니까 한 시간 기도 할 원우 모집한다고 하는데 그만 두십시오. 그것이 뭐하는 것입니까? 한 시간 기도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한 시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목회를 하고 저술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기도를 일방적으로 시간에 의해서 잴 수는 없습니다. 왜? 20분도 깊은 기도를 할 때가 있고 4시간을 엎드려 있어도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생각이 흐트러져서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건강한 영혼의 상태를 가졌다고 칠 때에 목회 사역을 위한 기본적인 기도 시간을 최종적으로 볼 때 3시간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새벽에 나아가서 깊이 엎드려서 거기에서 철저한 참회의 은혜를 경험하고 새벽기도 시간에서 일어설 때에는 이 설교자의 설교가 하늘의 이슬에 흠뻑 젖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머리의 생각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마음의 감정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을 해도 하루를 하나님께 영광을 못 드리는 날이 영광을 돌리는 날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할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수시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런 기도하는 상태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남이 알지 못하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아무나 데려다가 교회에 놓아도 교육 전도사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은 못 하겠습니까? 그러나 일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한 사람이 일을 하면 그가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일하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중입니다.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갑니다.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선한 목자가 아니면 목회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못을 박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에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를 백분의 일도 털어놓지 못했지만 이제 헤어져야 되겠습니다. 다시 어디에서 만날 지 아무런 기약이 없지만 어쨌든 이 조국 교회 어느 곳에서라도 여러분들은 먼저 목회자가 되기 전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하나님 앞에 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을 전심으로 소중히 여기는 그래서 우리의 목회 사역에 깃들이시는 모든 세속적인 가치관과 하나님의 영광 외에 또 다른 바램들을 모두 십자가 아래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온전히 그 분께 영광을 드리도록 이제는 철저하게 기도에 헌신된 삶을 살도록 이 시대의 예언자들이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