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세미나
▷우리들은 이런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은가? ‘영성의 깊이’라는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언제일지 모르는 미지(eschatose)의 종말이다. 종말이 이미 이렇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깊이가 영성의 깊이다. 이것이 이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주는데, darkness가 사라지게 하고 bright, 밝게 만들어 지성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다양한 표상, 미혹되기 쉬운 표상들을, 거둬내고 실재(레알리따스)를 인식하게 만든다. 사실은 잠세적인 세상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매 순간 결단하는 삶을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한다. 사람들이 결단을 내릴 때에 결단이 지향하는 가치는 표상 속에 흔들리는 잠세적인 것이면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레알리따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이 인식은 결국 보는 어떤 사람이나 물질을 비롯한, 많은 대상들을 보는 가운데 사유가 생겨난다. 보고 인식할 때에 표상들을 못 거둬내고, 이 표상을 따라 생각을 하게 된다면, resolution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resolution이 된다. 이것들을 끊임없이 거둬내게 되려면 종말의 빛이 들어와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도 결국 철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또 다른 본성의 빛이어야 한다. (물론 그 본성의 빛은 거듭난 본성을 통해 비추신 빛이다) 인간이 종말을 맞았을 때 행동이 틀리고, 종말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의 행동양식이 틀릴 것이다. 그러면, 이때에 작용할 법한 본성의 작용방식을 매일의 삶속에서 그대로 자각하면서 행동을 하게 될 때에 영원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이 된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만 나는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한다. 내가 사유하는 바는 이문제이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여기에서 차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극단적인 (extreme) 죽음에 처했다거나, 아니면 어마어마하게 실존자체가 뒤흔들릴 정도로 사건에 있어서 비치는 본성의 빛이 강력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사람을 일부러 세울 수는 없다. 그래서 결국은, 새로운 extreme한 상황에서 비춰지는 빛이라고 하지만 그 빛 자체는 이성의 빛이다. 여기에 착안하여 이러한 사람들에게 extreme하게 깨달았던 이성의 빛을 이 사람들의 경우에 이성의 빛을 계속 비추어줄 때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계시를 아웃도리따스라 보고 이성을 보완시키면서 계시는 아웃도리따스로 주어지는 것이고 이것들 사이에 이성적으로 추론을 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명제들을, (명제와 명제는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명제사이에는 논리와 인과관계가 존재하니까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 논리를 이성을 통해서 형성해 나가야 하지만 소위 지적인 친밀성을 가지게 되어 안살무스가 이야기 한데로 진리에 견고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마지막 얘기는 이렇게 해서 들어오는 빛이 이성의 강렬한 빛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고 하면, 이 사람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백번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죽어도 그 선을 찾아갈 수 없지만, 여기선 이미 가야할 선에 대한 인식이 충분히 있고 거듭난 이 사람의 영혼 안에 계명이 주시는 거듭난 이성의 빛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들을 이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끔 촘촘히 짜여 진 사상을 갖게 해줄 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것 뿐 아니라, 외연을 확대시켜서 신앙의 영역이 우주적으로 확대되어서 외연을 확장해 갈 때, 그때 비로소 이 사랑은 단지 다른 외연으로부터 동떨어진 고립된 세계 속에서 씨름하는 이런 종류의 싸움이 아니라, 이렇게 해서 칸트가 이해한 대로, [잘 생각해 보아라, 그러면 선을 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이성이 회피할 수 없는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게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죄가 들어오는데 죄가 고래로부터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두 가지이다. 속임(deceive)과, 힘(force)을 가지고 작용을 한다. 속임은 지상에서 작용을 하고, 힘은 영혼의 마음속에 작용을 한다. 아담과 하와도 맨 처음에 지성의 속임을 받아서, 죄를 짓게 된다.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다. 굉장히 많이 논증이 된 바이다. (마지막으로 얘기하려 했지만,) 외연으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안에서 사고할 때 많은 속임이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가 아까 얘기하였던 이원론적인 생각이나, 여기까지 생각하고 더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가 속일 수 있는 영역들을 굉장히 많이 남겨두는 것이다. 그러나 외연을 확장해 간다. 그것은 너무나 현존하고 명백한 논리이기 때문에 죄가 속이기가 매우 힘든 결론에 도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거듭나지도 않고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확신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옳 곧게 갈 수 있었는가? 이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결국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The good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본성의 빛을 통해서, 사유를 촘촘히 하게 되니까 방향의 궁극적인 목표는 몰랐지만 진전되어져가는 사고 자체가 이성적으로 짜임새가 있었기 때문에 육욕에 치우친 삶을 살수가 없었다. 단순히 철학을 잘해서, 김용욱씨를 보면서도 그런 것을 느끼지만, 상당히 도덕적(Moral)한 사람일 것이다. 동양철학이든, 서양철학이든 상당히 moral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은 철학을 가장 가로막는 것이 욕망, 슬픔, 기쁨 두려움, 이다. 이 네 가지 요소가 참된 철학적 사유를 가로막는 최고의 적이라 본다. 그래서 관조의 세계로 들어가야 된다고 본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이 된다고 본다. 제가 요즘에 사유하는 것들이다.
▶ 아주 명쾌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제가 하이데거 적 사유를 학부 때 굉장히 좋아 했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부분에 해결을 주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사용하시는 용어, 침투, 빛을 비춘다. 이런 용어들이 하이데거가 사용했던 용어들이다. 죽음이 일상에 침투한다. 새로운 현존주의란 말도 그가 썼던 말들이고, 목사님께서 사유된다는 게 대단한 것 같고, 하여튼, 그런 문제가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대답이 되지만,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의 해답을 둘 수 있느냐 였습니다. 제가 석사 때 페이퍼에 썼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삶의 변화의 원동력이, 새 사람이 만들어지는 원동력이라고 하이데거가 말했지만, 그렇게 해서도 삶에서 또 다른 난관이나 딜레마, 문제에 부딪힐 것인데, 그러면 그때 또 다시 죽음에 부딪혀야 할 것이냐, 계속해서 그런 경험들을 경험해야 지만 인간의 삶이 옳 곧게 나갈것이냐의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다른 궁극적 지향점이 주어지고, 그 경험이 경험으로서 나아지고 경험으로 인해서 시작에 불과하고 그 다음으로 궁극적인 지향으로 나아가는 추론들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가 저의 하이데거의 비판의 초점이었었는데, 목사님의 설명하는 방식이 제게 분명한 대답이 됩니다.
▷나는 회심한 이레 존 오웬이나 에드워즈를 만난 이후의 최대의 발견이다. 그런 사유를 어거스틴이 많이 촉발을 했고, 그런 점에서 사유의 촘촘함은 사실은 에드워즈에 의해서 많이 보이는데,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가 너무 기독교 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랫동안 내가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죄와의 싸움도 마찬가지라 생각을 하고, 굉장히 나름대로 죄에 대해 분투하고, 이런 상상까지 해 보았는데, 나에게 직면하고 있는 죄가 있는데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누가 이것을 이길까, 잘난척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에 대해 깊이 파헤쳐서 가르쳤는데, 나도 죄를 이기지 못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데 죄와의 싸움에서 수없이 몸부림치면서도 헛박자를 도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에 대해 오웬이 전집 1권에서 The glory of the christ 라고 하는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묵상해야 하고 그것 말고 다른 것을 묵상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와 보니까, 자세히 쓰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결국은 지금 내가 이야기 하는 사고의 의연이 우리의 삶, 대부분 우리는 이 기독교 자체가 우리의 목적을 위한 기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뻗어서 이것을 우주의 의연으로 확장시키는 마지막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만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신학자이기 때문에 절제를 한 것이다. 그것도 우스운 것이 뭐냐면, How to meditate the glory of god 어떻게 하나님을 묵상할 것인가? 어떻게 보면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게 된다. 철학적 지식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묵상한 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교도 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초점이 된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칸트가 구분해놓은 전제를 서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된다면, 기독교는 비이성적 영역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된다. 비이성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한다는 말은, 이교도들이 본다면 이성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신비세계에 빠져서 참선을 하는 등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영역이 신앙의 영역이라는 것이 전체인데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사유가 철학적 사유 없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묵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명백하게 기술해 갔지만 사실 읽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라는 것이 무엇인가? 실지로 우리주위에도 묵상에 대해서 나온 책 등을 보면 철학이 안 되어 있는 다시 말해 묵상할 수 있는 질적인 재료가 없는 상태에서 묵상을 한다는 것은 이교도적인 관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돼서 결국 중세시대에 있었던 많은 신비주의, 주님과의 혼합 교리 등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주관화 되고 혼미하게 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내가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되는 결론으로 간절히 기도 하는 것은, 외적인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아도 좋으나, 목회를 잘하거나 좋은 글을 남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도 , 진리를 향한 열외의 삶, 심지어 신앙과 계시조차도 참된 진리를 열외 하는 삶을 위해서 도구라는 것이다. 신앙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그 눈을 확실하게 뜨게 해 주는 책이 베라릴리기온이었다. 거기에서 계시와 이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전에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을 온몸에 비늘이 덮이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알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한 인간이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참된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온전한 성화의 삶을 살게 하신다. 그 온전한 성화의 삶을 살아가면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가까이 가게 되고 하나님이 존재하기를 기대하셨던 참된 인간됨으로 그 선함의 인간의 표준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가게 되면 그 존재가 하나님 앞에 goodness라는 존재가 되고 그 사람 속에서 goodness라는 삶이 흘러나오면, 천지만물로 하여금 good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때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지점이다. 그런 쪽으로 지향되는 인간의 이 지성의 구조는 철학적이고 사유하는 구조여야 한다. 끝까지 근원부터 사유하는 그런 존재일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순간순간 경험하는 어떤 은혜에 대한 체험이나 불에 대한 경험으로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그 책에서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를 말하였다. 철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정리한 것은 이것이 good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혹은 거기에 부합하는 상태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이 목적을 지향하면서, stance를 잡고 있다. 이 상태 자체가 goodness라 본다. 이렇게 정위 되어 있는 상태, 이 상태가 영혼이라는 것들이 작용하면서 길을 따라 간다. 이것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버츄]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가면 소위 말하는 배향을 하는 것이다. 배향자체가 아베르지오, 이 자체가 죄가 된다. 배향을 하면 badness가 된다. 배향을 하며 가면, 이것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바이스]악덕이라 본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보는데, 문제는 인간의 경우 중생하면서, goodness가 형성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노래할 때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나는 두 가지 의미를 지시한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 자신이 good이다는 것, 또 하나는 하나님이 good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는 어떤 행동,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는 어떤 섭리, 등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런 지향점을 갈 수 있도록, 같은 방향으로 action이 들어오거나, providence 가 들어온다. 하나님의 이런 행동 자체가 goodness가 된다. 그러면 당신의 good을 향해서, 당신자신이 goodness를 갖는다. 하나님은 언제나 badness할 수 없고, 당신의 good에 대해서 goodness가 되시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항상 하나님이 보이시는 작용, 인간 속에서 행하시는 슬퍼 보이고 기뻐 보이는 모든 다양한 작용들의 표상은 달라도, 이분이 당신 자신의 good를 배향하지는 않는다. 항상 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온 세상에는 하나님의 goodness가 가득한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의 goodness를 수업이 이야기 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나오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good를 배향하시지 않고 항상 자신의 good을 향하여 섭리하시고 작용하시면서 goodness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배향하려 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goodness가 [이빌]처럼 느껴진다. 충돌을 일으킨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거스려서 badness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절대 goodness가 파악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goodness를 많이 보여줄수록 그것이 자기에게 [이빌]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배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정의 되어서 goodness의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어디서든 모든 하나님의 작용이 goodness로 느껴지고 모든 것들 사이에 완벽한 통일이 이루어진다. 질서롭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낀다. 다른 배향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을 정향하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것들이 다 설명이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문제는, 이런 good이 있는데 인간이 항상 goodness를 갖고 정향으로 살아가는 삶이면 좋은데 하나님을 배향하는 모습, 변질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정향으로 가지 않고, 가정적 good을 향해서 배향한다. 결국은 good이 아니고, 악을 향해 가는것이다. 이것을 자신이 말하자면 선이라고 생각하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분명히 a가 선이라고 가르쳐 주시는데 자신이 설정한 b가 선이라고 하고 간다. 그 뿌리가 지적오만 (수베르비아)이라는 것이다. 오만의 형이상학적 정의는 전도된 질서에 대한 집착이다. 이러면 결국 존재론 적으로 자기가 위에 있고 하나님이 밑에 있다. 이 전도된 것을 사랑한다. 이 길을 가며 동력자체가 (아모르수이) 자기사랑이다. 근데 이제 깨어짐이 무엇인가? 뿌리 자체가 아모르수이이다. 깨어짐이라는 것은 이 길을 가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다. 결국은 아모르수이가 깨어지지 않으면 수베르비아도 깨어지지 않고, 그다음에 전도된 질서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엔 죄에 대한 사랑이 깨어져야 한다. 깨뜨려져서 돌아오면 가는데 다시 또 다른 것 설정하며 깨뜨리고 돌아오고 또 설정하고 깨뜨리고 돌아오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good을 찾아가는데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런 구도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이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것들을 버린다. 스베르비아의 반대말은 겸손일텐데 이것은 결국 전도된 질서를 사랑하는 것이 스베르비아라면 지정된 질서에 대한 만족이 겸손이다. 결국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인간이 회복하게 되는 것이 이 질서 안에 있으면서 아모르수이를 버려도 자신의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행복 속으로 통합되어 버리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가운데 시편 73편에 나와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서 일자에로 합일 되어 가는 삶이 가능하다.
▶자기깨어짐의 동력은 무엇이 되는 것인가요?
자기깨어짐은 결국은 어디로 가겠는가? 본성의 변화로 이어진다. 고착되었던 경향성이 중한 충격으로 부러지게 되는 것이다. 본성의 변화를 가져와서 새로운 tendency,를 창조한다. tendency, disposition, 등이 형성이 돼서 말하자면 예전에 그 사람의 존재가 되니까 다른 삶이 나온다. 하나님이 이 본성의 변화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는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거룩한 삶이 항구화되기 때문이다. 또 영광을 받으시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자신이 창조하신 원리대로 재창조된 인간이 그렇게 되길 원한다. 창조의 원리는 하나님의 신성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인간도 변화된 본성이 흘러나와서 삶으로 이어질 때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 안팍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자기깨어짐이 어떻게 일어나느냐, 본성적 깨어짐이 있는데 그 깨어짐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본성과 깨어짐의 관계등이 있는데 신령한 자기깨어짐이 발생하는 방식, 깨어진 본성에 성령이 작용하는 방식 등이 있는데,
우선 제일먼저 발단이 인식이다. 이것은 조명으로 해결이 된다. 인식을 하게 되고, 결국은 표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은 인간의 영혼이 어두어지고, 지성이 가리워지면서, 죄의 deceit(속임)가 가해질 때, 결국 이런 표상들이 잘못 맺혀서 이게 더 자신을 행복할 수 있다고 믿고 가치 있다고 믿어서 가게 된길을 밝혀서,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성령의 조명,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작용을 하는데 조명은 성령이 인간 속에 작용하는 것이 지성에 적용된 것으로서 조명을 이야기한다. 조명을 통해서 인식을 한다. 그 파악된 것이 감화가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신 뜻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충돌하는 것을 파악하게 되고, 여기에 꾸삐띠다스가 작용하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이것이 가져다 줄것은 상세하게 작용을 해서 이 죄에 대해 인식하고 난 다음에 자기 심판의 과정이 주어지게 된다. 어떤 과정이냐하면, 성령의 조명-자기 죄의 인식-자기심판이 이루어지는데, 자기심판이란 자기가 양심의 기능을 통해서 공정하게 자신을 처벌하게 된다. 여기서 고통을 맛보게 된다. 이 고통이 실제적으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실제론적 고통이기 보다, 회개의 특성자체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회개에서 자기 처벌을 통해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양심이 처벌하고 굉장히 아파하는데 이것이 마지막으로 당하게 될 궁극적인 심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회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죽인 것도 아닌데 아파하는 것과 같다. 2000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침투해 들어온다. 그리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기쁨이 느껴지는데, 미래의 부활의 기쁨이 침투해 들어온다. 그래서 이렇게 처벌하게 되는데 그리스도와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이 실제화(actualize) 돼서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다. 칼빈이 말한 유니어꿈크리스도의 핵심이다. 여기서 죽고 다시 부활하여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이런 사유의 틀을 가지고 전개한 것이다. 미덕과 사악함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니,,,그러면서 이렇게 되면 이교도들이 모든 레살루션이 이 틀안에서 설명이된다.
▷몇가지 질문들은 제 질문으로 강화되길 바라면서 질문드리는 바 성령의 조명이 중요한 역을 감당해 성령이 굉장히 중요한데 보통 이교도들이 충분히 질문할 수 있는 게 성령이 인격적인 분이 선택하는 자들만이 자기깨어짐을 경험 할 수 있고, 선택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깨어짐을 경험 할 수 없느냐는 질문이 던져 질 수 있고,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똑같이 주시지만, 그것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첫 번째 핵심적인 요소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각사람에게 성령의 은혜가 골고루 비춰주시지 않는다면, 성령님은 공평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반박과, 각자의 신자의 반응에 좌우 된다면 인간의 구원의 문제가 인간에게 달려있는것이냐를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조명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 같나? 차이가 나는 것 같나?
▷저는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이 성경으로서 로고스로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각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은 이미 하나님이 로고스로서 주셨고,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께서 주어주신 계시들, 로고스, 말씀으로 판단을 내릴 때 인식, 실제로 허상이고 존재하지 않는 판단, 궁극적인 선은 이쪽 방향이다라는 것을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판단의 주체는 인간일지 모르지만, 그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기 때문에 구원의 주체가 인간이라고 주장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하나님께서 주신 로고스에 대한 인간의 판단에 의해 자기 깨어짐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거듭나지 못한 인간에게도 하나님께서 본성의 빛을 준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본성의 빛의 정도가 같지 않고,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기에 따라서 본성의 빛이 작용하는 정도자체가 다르다.
▷빛은 동일하게 비치는데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는 건가요?
▶받아들인다는 정도보다는 본성의 빛 자체가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정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리적으로 그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 죄에 꽉차있는 사람이지만 죄가 항상 같은 (volum)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불신자중 간음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나쁘다는 판단을 내리지만, 자신이 비슷한 죄를 짓는다면, 다른 논리를 낳는다.
▷그렇다면, 성령의 조명은 동일하고 각 사람의 상태에 영향이 있는 것 같다. 각 사람의 죄의 정도에 따라 성령의 조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양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인가요?
▶하나님께서 그런 조명을 보이시지만, 사람이 죄나, 편견, 기타 등등에 의해 이런 조명들이 배척을 당한다.
▷하나님은 동일하시고 변함이 없이 성령의 빛을 비추시지만, 인간의 어떤 상태에 따라 조건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는가요?
▶조명이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형제가 예수를 믿지 않는 상태이고, 하나님이 비추고 계신다.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서 못 깨닫고 나를 만나서 인간이 왜 죄인일 수밖에 없는지 설명을 한다면, 그러면 빛이 더 많이 들어간다고 설명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 방식으로 성령의 빛이 더 많이 들어간다고 말한다면, 성령님이 공평하신가를 거론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은 굉장히 클래식한 문제이긴 하지만.
▶명백한 것은 똑같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똑같다는 부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조명이 성령님께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맞고 실제로 역사하시는 데 이런 틀에서 성령님의 인격적인 역사 부분을 강조하면, 우연적인 요소가 마치 개입되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이 그려진다. 틀 자체는 논변의 틀인데 중요한 전제 자체가 유연적인 요소로 부각되어,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역사하시지만 논변에서는 우연적으로 보여져서, 명백한 말씀으로 대치가 된다면,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지고 인간이 판단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의 경험을 보면 인간의 상태에 따라서 물론 그 조명해주시는 빛들을 더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느냐는 틀림없지만 이것 한 가지만 가지고는 다 설명하긴 힘들다. 분명히 한사람이 회심하는 시기나 그런 상황이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혹은 환경을 통해서 말씀을 알게 하셔 하나님께서 더 많이 빛을 비추신다고 말씀하실 수 밖에 없다. 조명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신학적으로는 이해할 수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이 회심하게 된 상황에서 조명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주여 뉘시니이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종류의 조명을 언제 어느 시기에나 받고 있었다라고 말하기에는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하나는 우유적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이 어떤 사물들을 인식할 때 지성이 이것을 파악하는데 문제는 예전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같이 인식하면 행동할 수 없다 라고 말을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르게 말한다. 지성자체를 사변적 지성과 실천적 지성으로 나뉘는데 인식하고 지식을 갖는것은 똑같으나 어떤 지식은 거기에서, 베리타스로 끝나는 것이 나니라, 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어진다. 진리는 이성에 세계 속에서 관심사지만 실제적인 관심사는 선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어지게 될 때 실천적 지식이 되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조명해 주신 진리가 자기 깨어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인식도 못하거나 인식하고 참인 줄 알았으니 거기에 그쳐보는 사람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인식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이 있다.진에 대한 관심이 선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고, 참된 믿음은 결국은 진에서 선으로까지 가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죽은 믿음이라 한다. 아퀴나스 같은 경우, 어떤 지식은 사고에서 끝나고, 어떤 지식은 실천으로 이어지냐에 할 때 답을 못한다. 우유적뿐이라고 말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도덕적 책임은 면제된다.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성경은 왜 깨닫기만 하고 선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가? 인간은 그런 비난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게 우유적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도 도덕적 판단을 하실 수 없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그런면에서, 목사님의 틀에서 인간의 책임 부분이 더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이 각 사람에게 있어서 시기와 다른 방식으로 각기 달리 베푸시는데, 그 베푸실 은혜에 대해 각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것이 죄의 인식까지 나아가는 과정.
▶나는 그것을 자기 깨어짐 자체 속으로만 볼 때는 submission으로 본다. 항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라고 본다. 그런 표현 자체가 모든 것을 포함하긴 힘들다고 보지만, 일단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을 때 인간이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인상을 받은 다음에 인간이 그것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어떤 조명을 통해 진리를 파악하려면, 그것을 붙들려는 파지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성경에서 여러 번 강조한다. 인간이 이것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굉장히 적극적인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지난번에 화살에 비유하듯이 그런 측면이 작용한다고 본다. 인간이 성령이 조명하실 때 인간이 진정으로 그 조명의 빛을 따르고 파지하려고 노력한다면, 참된 자기 깨어짐에 이를 수 있지 않는가? 그것에 대한 증거가 자기 깨어짐의 결과가 겸비함인데 깨어지는 조건도 겸비함이다. 성령님이 말씀하시고 조명하실 때 그것을 부패한 이성의 추론으로 억누르고 피해가고 도전하려는 사람들은 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완전히 submission 되면, 깨어짐을 경험하게 되고, 겸비해 지고, 열매도 겸비함을 얻는다. 겸비한 상태가 하나님 의존적인 상태가 된다.
▷승복하는 것이죠? 성령의 조명에 엎드려 지는 것이죠, 그것이 자기 깨어짐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 처음 시작이기 때문에, 그 부분이 강조가 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조명에서 바로 죄의 인식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소제목에서는) 성령의 조명과 개인의 순복이 같이 이야기되야 될 것 같다. 그러면 어느 정도 이교도들에 대해 반박을 할 수 있겠다. 이교도 들은 하나님이 제멋대로라는 어떤이는 구원하고, 어떤이는 구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텐데 하나님이 특별히 빛을 비추시기도 하고 동일하게 빛을 비추시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그 빛에 대해 어떤 식으로 순복하는지, 하나님의 조명하심과 인간의 순복이 같이 역사를 할때 자기 깨어짐이 처음 시작이 되겠지요, 그부분이 중요하게 이야기가 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순복 후에 죄의 인식에 대한 판단이 있을텐데 그 판단은 무엇이 기준이 되는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조명하심 때문인가? 아니면,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고 순복함으로서 인간 스스로 무엇이 진리인지 알게 되었고, 분별 할 수 있게 된 것인가? 인간의 지성을 사용하여서 궁극적으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인가를 집어보는 것입니다. 전자는 인간은 지성이 없어도 된다는 반박이 예상이 되며, 후자는 성령의 조명으로 새롭게 된 인간이 이성과 지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조명하신 바로 좇아간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우리들이 흔히 청교도에서 얘기할 때는,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는데 계명, 조명, 감화를 말한다. 계명은, 영혼을 비추는 것으로 darkness가물러가게 하는 것이고 조명은, 지성을 비추는 것이고, 감화는 그 사람 자신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 관심을 갖는 것은, 지성부분이고, 통합적으로 일어나지만 확대해서 얘기한다면, 세 가지로 설명이 된다. 첫째는 성령의 빛을 비추고 자신이 submission하고, 여기서 다루었는데 자기깨어짐을 감당하게 하는 인간의 책임 부분에서 말하는데, 그렇게 빛이 비추게 되면, 항거하지 않고, submission 한다. 그러면 그 빛이 자신 속에서 들어와 작용하고,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본성에 작용해서, 결국은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여 작용한다. 신학적으로도 회심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성령님의 단독적 사역이 아니라, 인간과의 협력적 사역이다. 여기에서 이제 탁월한 진수를 보게 되는데 He 는 holy ghost 인데, [1:12~1:20]??이 교리를 만든다, 그렇게 submission하게 되면 그담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하시고 의지를 재 조성 하신다. 성령님 자체가 인간의 지적인 본성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의지에 역사하셔서 행하게 하시고 정서에 역사하셔서 느끼게 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령자신이 역사하실 때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 한도 안에 메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적 감각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아까 얘기한데로 판단의 문제가 여기서 나온다 보고, 두 번째로 놀라운 본성들이 신적감각이 생기면서, 하나님의 쾌, 불쾌에 대한 divine sense 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꽃을 딴다고 할 때, 그 행동에 대한 미추에 대한 이론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나, 하면서 항상 엄마가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느끼는데, 그런 종류의 감각들이 성령을 받으면 생긴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 속에 막바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하신다. 그런데 또 하나 여기서 우리들이 무시할 수 없는 문제들은, 이것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지식의 유무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에 바울이 완전히 이교도였다면, 예수님을 한번 만났다고 해서 탁월한 신학을 지닐 수 있었을까? 그 문제를 설명할 때마다 드는 비유가, 전구를 300W 짜리를 220V를 끼워야하는데 300개를 끼워놓고 전류는 110V를 사용했다. 그러면, 5V밖에 빛을 못 발한다. 제대로 꽂으면 그 촉광 그대로 내는 것처럼 설명이 된다.
▷아까 꽃얘기하셨던 것처럼 어머니가 왜 싫어할지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으면 어머니가 불쾌해 하실 것을 알고, 그것을 인한 원인과 결과를 생각할 수있다.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쾌, 불쾌하게 하게 될 것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책임 면에 있어서 조명하실 때 인간의 책임, 자기 처벌할 때 인간의 책임으로는 다루지 않았으나, 깨어질때 조명부터 시작해서 자기 부인, 자기 처벌, 이 모든 과정들이 모두 고통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으로 인한 고통이므로 당연한 것이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어느 단계에서나 인간은 이탈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게 있는데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것이 결국은 처음 받은 조명의 빛이 마지막에 회개의 열매로 맺혀질 때가지 그것을 파지한다.
▷여전히 계속해서 인간의 책임들이 강조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믿음이라는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라는 거죠.
▶그 사람이 말씀에 대한 아주 체계적인 지식을 갖으면 갖을수록 파지하기 쉬워진다.
▷제가 계속 강조하는 이유는 nonchristian은 크리스천 같지 않게 계속해서 이 부분들을 공격하는 핵심부분이다. 거기서 인간의 책임은 어디까지고, 하나님의 책임은 어디까지냐라는 것을 묻고, 그리고 하나님을 자꾸 강조하면 인간의 책임은 없어지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행동을 한다. 이교도들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물론 인간과 성령의 공동작업이 이 성화의 단계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만 책임이 귀속될 수는 없으나,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말씀에 대한 이해함. 이것도 결국에는 근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계속해서 궁극적으로 원인이 어디고 근원이 어디있느냐 하면 결국엔 하나님께 갈 수밖에 없다라는 것을 어쨌든 이틀에서 얻어내는 결론인데, 이교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이구요,
그렇지만 이부분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 부분, 하나님의 역사하는 부분, 이 경계들이 어느정도 명확하게 보이면, 이것들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 보면, [인셉티피케이션]에 있어서는 (initiative)주도는 성령에 있다. 인간의 submission라는 표현이라는 것을 썼는데, 여기서 이제 믿음과 사랑이라는 두 측면이 다 있다고 본다. positive한 측면에서는 그분의 약속을 굳게 파지하고 믿고 그분을 향한 사랑을 자신안에서 작용하게 함으로써 모든 이탈될 과정에서 끝까지 파지해서 회개의 열매에 이르게 되는 것인데 negative인 의미에서 성화에 있어서 많은 부분의 의미가 하나님께 승복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역사하시게끔 자기 자신을 맡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양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된다. 이쪽으로 치우치면, 신앙이 소위 18세기에 있었던 영국의 스미스진 같은 쪽으로 넘어가서 지금의 구원파 같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만히 있으면 주님이 성화시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임스파커를 옥스퍼드 시절에 침체에 빠뜨렸던 교리이다. 반대로는 굉장히 인간의 결단과 모든 것들에 의해서만, 도덕적 개선이 되는 것으로서 회개를 대체할 염려가 있다. 그것도 본성에 어떤 영향을 주어서 새로운, resolution을 하게 했지만 그것은 자연적 본성 만이다. 그 본성 자체에 자연적 변화만 있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변화된 가운데,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선을 지향하는 goodness를 가진 그런 존재로의 참다운 변화는 아니라고 본다. 이것이 사유를 통해서 책속에 들어간 것이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가지, 순종의 부분이 negative해 보이지만, 상당히 positive한것이다. 자기 사랑을 버리는 것이 사실은 순종이기 때문에 자기를 안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순종의 형태 다는 것, 제가 아까 강조했던 부분들은 이 책이 초점이 이교도들에 대해 대안으로 간다면 그 사실이 표현된듯 하구요.
크리스천 내에서는 많은 부분들에 대해 충분히 잘 이해될 수 있을 부분인가요?
오늘은 사실 팔미니우스를 할 시간 이었잖아요. 제가 구지 팔미니우스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게 또, 제가 계속해서 던졌던 이유는, 팔미니우스가 사유를 하신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이랑 거의 똑같은데 어떤 점이 다른가 하면, 성령의 조명이라는 이 부분이 생략이 되죠. 없어지고 그 대신 진리의 획득이 거기에 들어가죠. 진리를 획득하게 되면 당연히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그 진리를 근거로 해서 계속해서 판단해 내려가면 궁극적인 옳은길로 가게 된다는것이 팔미니우스적 사유의 핵심적 부분이죠,
▶그 파지한 진리가 참된 것이라는 것이지
▷그것이 문제죠.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그래서 플라톤도 이데아를 보아라, 이런 식의 설명이 되는 것이다. 굉장히 거기서는 초월적이고 요즘의 근대인들이 생각하기에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신적경험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기독교가 해답이 된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해서 진리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 진리의 정당성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성령이 역사하심이 우리가 옳은 길을 찾아가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목사님이 설명하신 틀 자체가 아주 철학적인 틀 속에서 철학이 해답해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답을 제시해주시는 역할을 해주신 것이죠.
▶이책나오면 추천서 하나써줘요.
▷그런 식으로 신학이 설명이 되어야죠.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거기서 어떤 작용들이 일어나고 인간의 삶이 믿으면 네 삶이 변할 것이다. 를 넘어야 한다.
▶내가 맨처음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해서 문학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철학을 하고 했는데 그 안에서 사실은 안식을 얻었지만, 맹목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더 재미있는것은 살아있는게 힘드니까 맹목하는 것이라도 하고싶었다. 누가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처럼 내가 사유한 그 철학적 사유의 틀과 복음들을 어떻게 조화를 시킬지 원수처럼만 생각을 했지, 이것들을 어떻게 조화를 해서 기독교 신앙이 이교도 모든 철학의 완성이 될 수밖에 없는가의 전망은 가질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