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비밀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개혁신학을 공부하면서 이 개혁신학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아름다운 개혁신학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난도질을 당하고 혹은 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 까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들이 간단하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말하면 되는데 그럴 수 없어서 불태워 사형을 당하고 칼로 찔려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이 개혁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것은 학문의 글자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질서를 어떻게 세우고 어떤 사람들이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될 수 있을 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삽입구처럼 탄식하듯이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가 없도다. 그러면서 갑자기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그러면서 기독론을 써내려 가는 거예요. 이러한 단절성은 무엇을 보여 주는고 하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요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학문의 한 분과지만 개혁주의자들이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생각할 때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의미했어요. 학문적으로는 그것을 얻는 방법이지만 요체 그 자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에요. 이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국은 구약에 나오는 ‘다트 엘로힘’의 지식이에요.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서 언약 관계에 충실하게 살게 만들어 주는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그 무엇이에요. 과장해서 말하자면 예레미야가 골수에 사무쳤다라고 하는 것도 이 다트 엘로힘이라는 말이죠. 이게 신약에 와서 사도바울에 의해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성육신 사건과 관계가 있어요.
그 기독론적인 전환에 의해서 구약의 ‘다트 엘로힘’은 ‘그노시스 크리스투’로 변모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묘사와 같은 그러한 서술과 같은 지식이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그림처럼 생생한 묘사에요.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찬란한 햇빛과 같은 지식의 광채들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거죠. 그러니까 개혁신학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지식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이야. 그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에게로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가 있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거예요. 이 그리스도 예수를 증언하는 성경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아가 보려고 했던 모든 빗나간 노력과 실패한 결과가 그 수많은 이교의 신지식들이에요.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 일어났던 이 모든 이단적인 사상과 비정통적인 생각들은 그 다리를 잘못된 데서 찾은 것이라 이거죠. 그러면 이렇게 명약관화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하는 성경적 방법, 즉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언약백성과 맺으시는 관계를 통해서 단순하고 무한하시고 순수하신 그분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맺으시는 그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그 찬란한 속성에 대한 지식들을 습득하는 이것이 주님이 지정하신 방법이거든요.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학을 하지 않고 목회를 하지 않느냐 이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들의 영혼을 우리들이 직접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은 볼 수가 없지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한계는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 무엇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귀납해서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에요. 믿음으로 연역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는 것은 이렇게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 귀납의 방법을 통해서 그분을 알아가는 거죠. 난 항상 태양의 비유를 좋아합니다마는 찬란한 태양이 있어요. 이 땅에는 그 태양빛을 받는 수많은 효과가 나타나요. 얼음이 녹고 봄이면 물이 흐르고 새싹이 나고 그리고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해요. 그러나 태양 안에는 꽃도 없고 물도 없고 봄도 없고 여름도 없어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결국은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이 다트 엘로힘의 요체에요. 이 다트 엘로힘의 요체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특별히 그분이 이 땅에 있는 인간과 맺으셨던 관계를 통해서 찬란한 빛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을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신학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고 이게 바로 목회를 위한 소명의 핵심 부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예루살렘 교회를 목회하도록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물으셨던 질문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이었어요. 절대 영혼사랑이 목회의 동기가 아니에요. 더구나 목회의 비전이 목회의 동기일 수 없는 거예요. 더군다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목회의 동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자아를 세우는 것이라 이거예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개혁신학은 사랑받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배척을 받고 그래서 개혁신학은 피 묻은 신학체계의 역사에요. 그리고 이것은 세상 끝날 까지 그렇게 될 거에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개혁신학은 어떤 사람들에게 그렇게 뜨겁게 사랑을 받았고 어떤 사람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았느냐 그런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거죠. 그 핵심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에요. 우린 오늘 무조건적인 사랑만 이야기해요.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이거에요. 성경적인 신앙의 요체는 경건이에요. 이 경건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에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이것을 보여주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모든 생애를 사시고 죽으시고 승천하셨지만 그 지상의 모든 생애는 하나의 지점을 향해서 달음질치고 있었던 거예요. 확대하면 신구약의 모든 역사가, 인류의 모든 역사가 하나의 지점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었으니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만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이루실 때도 다 이루었다 말씀 안하셨어요. 오직 딱 한 순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그것도 맨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거예요. 그 십자가 사건이 이 두 개의 신앙의 핵심을 수렴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히 떨리는 두려움이에요. 그것이에요. 죄에 대해서 진노하셔서 자기의 이들이라도 그렇게 처참하게 죽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보면서 죄인들은 두려워 떠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려움이 도망치고 싶은 노예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워서 가까이 갈 수 없으면서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이끌리는 사랑을 동반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냐 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러면서 자기가 아무 가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러면서 그 사랑에 강력하게 이끌리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나를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이 죄의 경향을 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나는 발산하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질서 속에 티끌 같은 인간일 뿐이고 온 세계와 이 땅 가운데 찬란한 영광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인정을 하고 거기에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부복하는 그것이 바로 ‘삐에따스’ 경건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학문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그 요체는 학문을 통해서 전수가 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전수가 될 수가 없는 거죠. 절대로. 그러니까 그렇게 경건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슐라이어마허 같은 사람들이 개혁신앙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이것은 혈육을 나눈 부자지간에도 전수시켜 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 훌륭한 신학자인 박윤선 목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아들 때문에 고생하신 이야기는 유명하잖아요. 전수가 안 되는 거예요. 이건 오직 누구만 전수할 수 있느냐 하면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그 영혼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고 지성을 눈뜨게 만들어 주고 쉽게 이야기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그 가슴에 불을 지르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누구도 개혁신학자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때로는 그런 일이 없이 개혁신학자가 됐다면 그는 언제든지 변절할 수 있는 세뇌된, 학습된 그런 신학자에요. 학습된 칼빈주의자라 이거죠. 더 큰 학습이 주어지게 되면 언제든지 포기해요. 변절을 하는 겁니다. 칼빈주의자는 칼빈이 뼛속 깊이 품었던 복음의 그 불을 품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거에요. 그것이라 이거에요.
재미있는 간증을 한 2분하고 마치겠습니다. 저희 교회에 구역장 수련회를 갔는데 자기가 구역장이 된 것을 간증을 했어요. 그런데 이 자매는 젊은 자매인데 교회를 잘 안 나와요. 간신히 예배를 드리고 도망을 가는데 구역장이 맨날 따라다니면서 신앙생활 잘하라고. 직장 다니기 때문에 나는 바빠서 못 간다고 이러다가. 직장 까지 그만뒀어요. 그러다가 이제 도저히 이 교회에서는 고통스러워서 신앙생활을 못하겠다 그러고 다른 교회로 도망가자 마음을 먹고 딴 교회를 가보니까 그래도 여기가 내용이 있더래요. 그래서 그냥 여기서 더 버티다가 이사 가면 완전히 가자 그랬대요. 이제 직장까지 그만두니까 구역예배 오라고 구역에서 막 빗발치는 거예요. ‘그래, 내가 한 번 가주지’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내가 구역예배 안 나가니까 아무것도 든 게 없는지 아나 본데 내가 이번 첫 번 구역예배에 가서 한 번에 눌러줘야지’ 그러고 도서관에 나와서 칼빈 책을 빌리기 시작을 했어요. 이사야, 예레미야 읽기 시작을 했어요. 거기서 회심을 한 거예요. 그러더니 뭐라고 그러냐 하면 “나는 우리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왜 우리를 그렇게 쥐 잡듯 하는지 죄인이라고 몰아붙이는지 나는 너무나 짜증이 나고 힘들었다. 그러나 칼빈의 책을 읽고 보니까 우리 목사님은 칼빈의 1/3도 안한다. 너무 부드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구역장이 됐어요. 그게 우리 신학자들의 가슴에 떨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열렬히 기도해야 합니다. 열렬히 열렬히 기도해야 합니다. 수없이 개혁신학을 공부해도 ‘하나님, 이것으로서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갈멜산에 쌓아올린 장작일 뿐이옵니다. 하나님, 불을 주셔야 됩니다. 이것은 어느 신학자, 공부한 선생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오직 하늘을 열고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불이옵니다. 하나님, 주시옵소서’ 그렇게 목마르게 간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불을 받고 여러분 모두가 우리처럼 개혁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는 약합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주님의 교회와 복음의 진리는 어두운 세상에 꺼져가는 심지와 같고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진리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굳건한 확신을 가지게 해주셔서 우리들이 이기고 승리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