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사역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1-3)
녹취자 : 이민희
교사세미나를 통해 우리가 여태까지 다룰만한 중요한 기본적인 주제들은 다뤄왔습니다. 즉 교사의 부르심의 기초, 말씀생활, 교사의 기도생활, 전도생활, 심방, 큐티, 제자훈련, 성경공부, 상담, 이런 것들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함께하는 사역'이라는 문제를 우리들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 사역을 하면서 제 생애에서 가장 기쁘던 때가 두 번 있었는데 한번은 회심한지 얼마 안돼서 처음 간 교회에서 총각집사로 봉사할 때였고 (지난주 자매 2명이 교회에 와서 잠깐 인사를 한 적이 있는데 둘 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가르쳤던 자매들이었는데 이제 노처녀가 되어서 찾아왔었습니다.) 또 한 번은 그 다음교회에서 제가 주일학교와 청년사역을 같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제 영적인 수준은 일천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의 주일학교 사역이 참 기뻤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교사들이 뛰어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그 교회에서 참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주일학교를 숫자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참 축복해주셨습니다. 아이들 하나하나는 직접 챙기지 못하고 교사들만 붙들고 씨름하면서 독특한 주일학교를 해보았는데 (당시 청년부 사역에 힘을 더 썼고 주일학교는 부업이었지만) 그런데도 하나님이 청년보다 주일학교에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셔서 아이들이 놀랍게 늘어나고 성장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주일학교는 교사만 꽉 잡고 있으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여러 해가 지나 내수동교회에 가서 3년간 중고등부 사역을 하면서, 그 때 교사들이 훨씬 더 탁월한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변화가 없어서 참 힘들었습니다. 내수동교회에 와서도 그 전 교회의 주일학교처럼 교사들을 꽉 붙잡고 했는데도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내 영혼에 창자가 녹는 것 같이 괴로웠습니다. 교회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그래서 감당은 해야 되겠고, 당시 많이 괴로웠는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그 의미를 생각해보니까(상황은 같은데 그 결과는 왜 달랐을까 생각해보니까) 그 원인이 하나만은 아니었겠지만 기도도 많이 했지만 그런데도 변화가 안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저는 성경의 이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이 본문이야말로 우리가 주목을 요하는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파하니까 열두제자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열두제자가 예수님 주위에 있어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함께 있게 하시고 함께 복음도 전하게 하시게 하시려는 두 가지 목적으로 제자들을 부르셨는데 그들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귀신들렸다가 쫓아내시고 병 고침을 입은 어떤 여자들이 따랐다고 되어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들, 또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의 구사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 등 다른 많은 여자들이 따랐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만히 보면 신분이 다 틀려요.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들렸다가 나은 여자이고, 창기였던 사람도 있고, 헤롯이 청지기의 아내 같은 상당히 영향력 있는 귀부인에서부터 시작해서 수산나 등 신분과 처지가 같지 않은 다양한 여자들이 모였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은혜의 지향점도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신이 들렸다가 나아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병들었다가 나아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런 다양한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각기 예수를 만난 체험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제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를 만난 체험이 없는 사람은 이 귀한 사역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월급을 받는 사람들도 아니고 자기 소유를 팔아서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식생활이나 구제하는 일에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앞장을 서면서도 하등의 대가를 원하지 않았던 그런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체험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 없이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보수도 없고 이력도 남지 않는 그 일을 위해서 자기를 소비하고 자기의 소유까지 소진하는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주일학교를 하면서도 교사들 각자의 은혜의 체험이 다 다릅니다. 죽을 병 걸렸다가 병 고침 받았던 사람, 말씀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주셔서 하는 사람, 심지어는 주일학교 봉사하면 하나님이 그 대가로 자기의 자식들을 앞으로 잘 되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봉사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이거라도 해야지 신앙을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주일학교 봉사를 하는 등 각기 사람마다 은혜 받은 체험이 다 틀리고 은혜 받은 동기라던가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폭풍과 같이 어떤 사람은 이슬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훈련을 거의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술 먹고 어둠의 골짜기를 헤매던 사람들도 있고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체험과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된 동기는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고 어느 것이 덜 가치 있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각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섬기게 된 동기와 이유를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뛰어난 교사를 가지고서도 제대로 사역을 하지 못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전에 주일학교 교사들은 그렇게 자기들끼리 모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제 앞에 있던 선임자는 하도 안모이니까 주일학교 모임 자체를 폐지했습니다. 그것을 제가 가서 그 모임에 꼭 나오라고 꽉 잡았습니다. 불성실하게 봉사하던 교사들을 보내고 헌신적으로 주님을 위해 봉사할 사람들을 다시 모집했고 당시 청년부의 청년들이 대거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들은 청년부에서 제자훈련을 통해서 각자 맺어진 관계들이라서 자기들끼리 사정과 형편을 너무 잘 아는 관계들이었고 그 연대감이 굉장히 탁월하게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작용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주일학교 교사의 동료이기 전에 한사람의 영혼으로서 그가 어떤 고통가운데에서 예수를 믿고 성장했는가를 그 내면의 모습과 기도제목을 서로가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훌륭한 지체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들어와서 그렇게 생활을 하니까 그 모습이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전도하러갈 때도 1, 2, 3학년이 있으면 쭉 전도해서 다른 선생님 반으로 보내주고 자기가 심방하러 가는 길에 다른 반 아이가 있으면 꼭 들러서 그 아이를 만나서 그 반으로 보내주는 그런 관계가 아주 훌륭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때로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도 그 뛰어난 사람들의 섬김의 총합이 평범을 밑돌 때가 있는데 그것은 함께 섬기는 그것들을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구나 그런 것들에 비교의식과 교만감과 수군거리는 마음을 사단이 집어넣게 되면 힘을 합해서 영적인 전쟁을 싸워서 영혼들을 세워서 보호하는 일에 교회의 힘이 씌여지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일에 자신을 다 소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많은 열매를 거두지 못한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제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잡지에서 미국의 '윌로우 클릭교회'의 하이버빌리스 목사님이 계신데 그 분은 전도설교에 있어서 탁월한 메시지를 가지고 계신분입니다. 시카고에 있는 그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들을 제외한 새로운 교역자를 뽑을 때 첫 번째는 달란트를 가장 중요시하고 두 번째는 그 달란트를 가지고 다른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얼마나 하모니를 이루며 섬길 수 있느냐를 본다고 합니다.
교회가 한 가지 달란트를 가진 사람만 모이게 되면 그 교회는 뛰어난 교회가 되는 동시에 문제가 가장 많은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달란트가 다른 사람들이 가진 그 달란트를 귀하게 여기면서 자기가 갖지 못한 부분을 채워주는 사람들로 이해하면서 소중하게 받아들여야만 교회가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면에 있어서 훈련이 매우 안 되어있습니다. 무슨 과제를 던져주며 '여러분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면 한국 사람은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둥그렇게 세워놔도 어느 순간 둥그렇게 서는 것을 싫어하고 일렬로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뭔가 합당한 이유를 매겨서 서열을 정하고, 그때 사람들은 꼴지에 있어도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의 정서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이렇게 하모니를 이루며 섬기기에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약점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깊어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사람들 사이에 골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힘들을 쓸데없는 일에 소진하게 됩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이렇게 신분도 다르고 예수를 믿게 된 동기도 다르고 은혜를 체험한 이유도 다른 사람들이 훌륭한 하모니를 이루면서 예수그리스도를 필두로 열두제자들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사람들이 한 하모니가 되어서 아름다운 목표의 성취를 이뤄가고 있습니다. 교회학교 내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형제자매들을 새롭게 만나고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 사이에서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모인 이 사이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너희 안에 진정한 천국을 이루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통하니까 여름성경학교 같은 큰 행사를 하면 저쪽에서 눈짓만 해도 이심전심으로 다 통합니다. 눈빛만 봐도 마음속에 흐르는 것이 있고 전심으로 도와주고 싶고 그러면서 한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섬길 때 섬기는 그 자체가 정말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주일이 되면 목회자는 성도들을 보고 싶어 하고 성도들은 목회자가 보고 싶고 성도들이 서로 그리워집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생활입니다. 육신의 형제는 몇 달을 안 봐도 안보고 싶은데 교회의 형제자매는 일주일만 안 봐도 보고 싶은 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교통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최고의 형벌은 '출교'(excommunication)였습니다. 성도의 교통을 못하게끔 잘라내는 것입니다. 넌 이제 우리와 함께 교통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벌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랑하는 형제자매들과 끊어진 교통가운데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은 징계하지 않아도 excommunication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누구인지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것은 정상적인 신앙의 인식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안에서 함께 구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저밀정도로 그렇게 깊이 사랑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경험되지 못한 커다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우리가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체험해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도와의 교통 속에서 이것을 느껴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교회에 나올 때 자기 마음이 설렙니다. 사랑하는 지체들을 보는 그런 마음들, 그것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교통인데 이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동역 속에서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있는 형제, 함께 오늘도 사역하는 자매, 그가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그의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짜증나고 그것은 이미 그가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란 어느 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었더라고 했을 때 그냥 좋은 것 그게 소명입니다. 피 한 방울도 안 섞였는데 회개하고 은혜 받고 구원받았더라는 소식만 들어도 그냥 좋은 것. 변화도 못 받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깨뜨려져서 하나님 앞에 중심을 드리는 멋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더라 하는 소식을 들을 때 내일처럼 기쁘고 즐거운 것, 누가 예수 믿다 실족 했다더라하는 소식에 슬픈 것, 바울이 말하길 '너희중 하나가 실족한 즉 내가 아파하지 아니하냐. 내가 마지막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너희가 면류관이 아니냐' 하는 그런 마음이 영혼을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벗어버리면 여러분도 내 앞에 한 영혼이고 저도 여러분 앞에 한 영혼입니다. 그런 의식이 없는 교사들 사이에는 중보기도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는 진실 되지 않습니다. 중보기도하고나면 다 잊어버리고 그런 것들은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정신이 아닙니다. 지금 무엇을 원하고 어떤 것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그런 눈빛들을 보면 청년부 안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우리가 도와야할 부분인지 이심전심으로 통할정도로 유대 되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 것들이 안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2년 교사섬기다가 이민을 가도 울어주는 사람도 없고 소 닭 보듯이 산다면 함께 사역함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기보십시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사역의 관계는 언제나 깊이 끊어낼 수 없는 관계로 연락되어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보면서 그의 진정한 사랑의 실천, 겸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수건 허리에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그런 섬김의 정신으로 종 된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독불장군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교회를 새롭게 하실 때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연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연합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연합할 때 언제든지 잡음이 많은 사람들은 환경과 구조가 잘 못된 경우도 있지만 대게는 개인의 성화의 문제입니다 .인격이 깎여져 나가고 다듬어져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품어 안고 연약한 형제자매들을 섬김의 대열에 동참시키며 혼자서 백보를 가기보다는 백 명이 한보를 전진하는 함께 섬기는 정신들이 교회 안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주일학교가면 은혜받는다더라는 소문이 퍼져서 교사 구하는 게 너무 쉬웠습니다. 교사들안에 사랑이 있어서 사랑으로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찾아가고 위해서 기도해주고 상담해주고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섬기면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영혼들을 섬기기 위해서 심방하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다보면 냉랭해진 마음이 불이 붙습니다. 그래서 교사하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은혜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한 기관에 있는 멤버가 그 기관에 있는 지체들을 만나기를 즐거워하고 아주 기쁘게 여기는 모임으로 만들 책임이 지도자와 구성원들에게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즐거운 것이 아니라 거기 안에서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거기 안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모범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속에서 진리를 진리답게 전하기 위해 분투하고 영혼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말하자면 목양자의 모습을 그 속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그 모임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곧 이어집니다. 이것이 세속적인 교통일 때는 그 사람들과 빠져들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가난한 마음도 사라지는데 그 모임이 신령할수록 그 모임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깊어집니다. 나도 저렇게 헌신된 삶을 살고 싶다는 몸부림들이 막 생겨납니다. 영혼을 섬기다 지쳐서 그만두고 싶어질 때 그래서 그만두어야겠다고 다른 지체에게 얘기할 때 구석에 데려와서 얘기하면서 자기가 이 영혼들을 섬겨오면서 받아왔던 지난 시련들, 영혼들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자기가 치렀던 피눈물 나는 승리들을 얘기해주면서 둘이 붙잡고 울면서 기도하는 그러한 돌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함께 주님을 섬기는 현장에서 받는 것. 제자훈련은 밀실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투쟁하며 몸부림치는 그 교사가 그렇게 서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는 영적인 전쟁의 한 복판에서 주고받는 삶의 훈련입니다. 그때 비로소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 것들이 없을 때에는 자기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영혼들을 섬기는 듯이,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영혼을 섬기는 것과 그 영혼을 섬기는 지체들이 함께 연합되어서 함께 그 모임을 천국과 방불하게 만들어가면서 영혼을 하나님 앞에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나가는 일들이 마치 충돌을 일으키는 듯이 생각하는 아집과 독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뛰어난 빌립보교회에 대해서 칭찬을 하면서도 여전히 바울은 '너희에게 무슨 선한 일이 있든지 이것을 기억하라 하면서 너희는 각각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라' 뛰어날수록 말하자면 신앙에 대한 인식, 성경지식, 자기의 신앙에 대한 자부심이 성화를 앞서가면 튀어나온 부분만큼 늘 문제를 일으킵니다. 교회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연합을 구현해나가는데 늘 저해요인으로 작용하는 사람은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나님 앞에 많이 쓰임 받아서 넘치도록 헌신할 때는 더더욱 자기가 넘어질까 조심하면서, 헌신될수록 사람들의 많은 주목을 받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섬김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고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교회를 더 교회답게 세우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자기를 비우는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함께 섬긴다는 것, 함께 하나님이 다 사용하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 이 사람 각자 받은 은혜의 체험과 영혼들을 섬기는 이 자리에 왜 서게 되었냐는 이유는 다 다르지만 합치되는 한 가지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체험이 귀하면 저 사람의 신앙의 체험도 귀하다 그리고 저 사람도 나처럼 많은 사연을 안고 여기에 서있다 나만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여기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영혼들을 섬기기 위해 서있는 것이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해주고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여서 함께 사역하는 이것이 기쁘고 즐거운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교회는 지옥과 방불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섬김이 이제는 정사와 권세와 어두운 세상의 주관자들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지체들을 향한 싸움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이 우리를 갈라놓고 흩트려 놓으려하는 사단의 계교에 의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역사할 수 없도록 사랑으로 단단하게 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돌보는 지체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만큼 함께 섬기는 다양한 체험들을 가진 지체들을 향해서 깊은 사랑과 애정을 가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함께 섬기면서 신분도 틀리고 출신도 틀린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와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도구들도 쓰였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영광스러운 열두제자의 이름이 주님의 보좌, 거기에 무릎 꿇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 기념비로 세워질 때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그 지체들을 사랑하며 섬겼던 그 여인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근심하지 않는 기뻐하시는 모임이 되어서 그 모임 자체가 그 구성원들을 향해 치유의 능력이 있는 그런 건강한 모습들로 바꿔져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 되니까 모여서 기도하라고 하면 간절히 기도하고, 모임이 있으면 자기네끼리 전화하고 연락해서 다 오게 하고, 그러니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3개월에 한번 모여서 평가하고 밤 세워 기도할 때 한사람도 빠짐없이 참여할 때 큰 기쁨과 도전적인 믿음이 교역자와 함께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득 심겨집니다. 이러한 교사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저는 그 모임을 정말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자기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했듯이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8장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함께 섬기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 놀랍도록 기쁨이 되었고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아무리 드려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제는 우리교회에 꼭 필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교회만큼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 모인 곳도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린교회에 와서 말씀을 붙들기까지 많은 사연을 안고 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과 마주했다는 자의식들이 있는 곳일수록 이런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아무리 뛰어나도 덕을 세울 수 있어야합니다. 기름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물속에 함께 있으면서도 물과 같이 동화되지 않는 세속화되지 않는 신앙이 있으면서도 내가 없었을 때 원활하지 않던 섬김의 현장에 내가 들어가서 내가 용해되고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영혼을 세우는 이 일에 생산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드리는 이런 일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여기까지 있게 된 것들에 대해서 영혼을 섬기는 이일 영혼을 돌보고 자신의 영적인 변화에 대한 소망까지 걸며 생활하는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깊이 공감해줄 수 있는 인정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셨나 하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듯이 그 사람을 그렇게 봐달라는 것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을 단지 교회학교를 섬기면서 혹은 구역이나 영혼들을 섬기는 현장에서 능력의 유무나 성실의 유무 때문에 도움이 되고 걸리적거리는 그런 한 부속품으로서가 아니라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한 지체, 고민과 고집과 고뇌와 실패와 좌절과 고집과 불신앙과 바르게 함과 책망과 도전과 회개 속에서 일정하게 하나님께서 목적하고 의도하고 계신 그길로 걸어가기 위해서 수많은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여기에 서있는 한 고귀한 지체로서 이해해야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담임목회자가 아니면 도저히 교회 안에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에게 들고 나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나를 이해해주고 기도해줄 사람들이 많아서 목회자에게까지 문제를 들고 올 필요가 없을 정도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그리스도예수안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을 노출하고 개방하고 용납되어지는 경험을 하고 허물이 많은 데 덮어주는 즐거움을 체험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또 다른 모습들이 구축되는 것입니다. 1,2년을 함께 섬기면서도 어디에 사는지 부모님이 계시는지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진정한 동역자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한 마음이 될 때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를 베푸십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120명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성령이 오셨습니다. 열흘 동안 모여서 기도했는데 언제 오셨습니까. 열흘간에 걸쳐서 서서히 오시다가 마지막 날에 불의 갈라진 혀 같이 성령님이 오셨습니까. 한순간에 성령님이 임하셨고 그들은 불붙는 복음의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오시기 직전까지 그 기간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하나 되어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나의 부주의한 말이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나 충만하지 못한데서 오는 마음의 잘못된 정서 때문에 교회를 한 마음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역할을, 헌신이나 물질적인 섬김으로 이런 모든 자신의 결점을 보상하려는 것들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한마음이 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한마음이 되어야한다는 절박한 필요를 지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 이상으로 느끼고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마음이 되는 것에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여의도의 집회만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미스바의 성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에스라의 수문 앞의 집회만을 하나님인 인정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세 사람이 모여도 너희가 거기에서 합심하고 기도하면 내가 이루리라 여러분 두 세 사람으로 모여 기도하는 모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가운데 역사하는 체험이 매우 드문 것은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 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하나 되지 못한 사람을 하나 되도록 불러들이지 못하는 용납하지 못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서 하는 기도는 수없이 많아도 두 세 사람이 모인 그 곳에서 그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고 있는 기도에 내리는 축복들을 체험하는 현장들이 매우 소수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 메시지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지도자들과 함께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 된 섬김의 공동체의 모습으로 구현해나갈 수 있겠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사모하고 있는 좋은 영적인 축복들이 우리가 한마음이 되지 못하는 데서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확신들을 여러분들이 갖게 되길 바랍니다. 무엇이 우리의 부주의와 무관심과 무절제한 말이나 행동이 우리의 하나 됨을 저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희생을 치르면서라도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는 모임들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육적인 하나만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 됨을 우리의 섬김과 사역 속에서 구현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너무 기쁘고 주님과 영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의무와 짐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특권처럼 느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