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와 성도의 복된 삶 1
Ⅰ. 들어가는 말
인간이 지혜가 틔고 나면서 즉시 도대체 자기의 존재는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리고 자기가 매일 대면하는 이 세계의 기원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자의 개념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절대자의 개념과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절대자의 개념은 좁힐 수 없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절대자는 비인격적인 것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으시면서 이 인간들을 다스리고 교제하시는가 하는가를 설명할 때에 정통기독교는 항상 그것을 삼위일체로 설명해왔습니다. 이 창조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의 원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수는 그분의 존재양식에 있어요.
Ⅱ.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그 존재 양식이 뭐냐 하면 삼위일체에요. 이 삼위일체에서 이 삼위는 세 위격 혹은 인격을 가리키는 것이고 일체의 뒤의 체는 우리의 이런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적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에요. 즉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되어있으시지만 공통적으로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삼위일체의 고백이에요. 그래서 나는 이 삼위일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참되고 영원하시며 한분이신 하나님은 동일한 신적본질 안에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데 당신 자신 안에서는 아무로부터도 말미암지 않고 누구에게서도 낳은바 되시지 않은 성부와,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신 성자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성령으로 존재하시며 당신 자신 바깥으로는 창조하신 성부와 구속하시는 성자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시는데 각 위격의 영광과 능력과 영원은 동등하다.” 이것이 제가 진술하는 삼위일체의 교리에요.
A. 삼위일체의 신앙고백
그러면 역사적으로 이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고백해왔는가? 정통적인 기독교의 많은 신앙고백과 문서들이 있지만 아마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신앙고백과 신조들은 아마 5개 내지 7개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역사적인 두 신조가 있는데 하나는 하이델베르크 케터키즘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장로교가 신조로 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요.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그런데 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는 이제 1563년에 제정되었고 팔조의 선제부가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라는 개혁신학자에게 자신들이 믿어야할 참된 기독교신앙의 대의를 가르치도록 이 카테키스누스를 의뢰했습니다. 이 카테키스누스는 특별히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풍부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에요. 그런데 이 두 신조는 여러분들이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조를 이룹니다. 즉 하이델베르크 케터키즘은 경륜적 삼위일체로부터 시작해서 존재론적 삼위일체 혹은 내재적 삼위일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말은 뒤에 설명하겠지만 경륜적 삼위일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와 맺으시는 관계 속에서 설명되는 삼위일체를 가리키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혹은 영원적 삼위일체 혹은 존재론적 삼위일체, 본체적 삼위일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세계와 관계없이 삼위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 안에서 한분이시며 세 위격이 되시는지를 고찰하는 삼위일체에요.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래서 제일 먼저 경륜적 삼위일체를 말한 다음에 그 다음에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어떻게 되는지를 순차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데에 비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없이 곧바로 내재적 혹은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두 고백서가 똑같이 제가 말씀드린 그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라는 것, 그러면서 세 위격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 그리고 세 위격은 동등하게 하나님 본질 하나라는 것, 그리고 세 위격은 각각 영광과 능력과 모든 권위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신적 본질은 하나이지만 세 위격으로 되어있는데 그분이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성부는 낳은바 되지 아니하시고 성자는 낳은바 되시고 성령은 나오셨다. 혹은 발출하신분이시라는 이 신앙고백을 정확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B. 성경과 삼위일체 교리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이 성경과 삼위일체교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비난을 합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인간이 지어낸 사변적인 궤변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용어가 성경에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중고등부는 성경에 있습니까? 어떤 분이 그랬대요. 중고등부학생 하나가 수련회를 가서 물에 빠졌는데 중고등부를 만들라는 것이 성경의 어디에 있느냐고? 그러면 중고등부를 만들었을 때 그런 것을 만드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말해도 좋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나와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너무 문자에 매이는 잘못된 생각이죠. 얼마든지 용어가 문제가 아니라 사상이 성경 속에 있느냐? 그것을 표현할 정확한 표현을 우리들이 만들어서 성경의 사상을 대변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신학 작업입니다. 그래야지만 온전하게 이 기독교신앙의 정수들이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1. 구약성경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는 구약에서도 증거가 나오고 신약에서도 증거가 나오는데 직접적인 증거로 나타나기도 하고 간접적인 증거로 나타나기도 해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복수로 제시하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혹은 ‘저가 선악과를 따먹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겠다.’ 라는 복수의 표현들. 이 표현들은 학자들 간에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푸르랄리스 마에따띠스 라고 해서 장엄한 것을 가리키는 것의 복수이지 수(數)의 복수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개혁파 정통주의학자들 중의 상당수 많은 학자들이 이것을 하나님의 삼위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소위 얘기하는 성경에 나오는 창조세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현 이것들은 바로 하나님의 삼위의 지상적 현현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마주했던 세 천사 같은 것들이 바로 이런 구약에서 삼위일체를 증거해 주는 구절들 중의 하나라고 보았던 것이죠.
2. 신약성경
신약에서는 이것들이 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고 또 하나님이 예수님과 하나라고 하는 주장을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더욱이 더 결정적인 것은 지상명령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의 분부가 나타납니다. 거기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는 삼위의 소유격 형태로 되어있는데 그 소유격이 걸리는 그 최종적인 목적어는 ‘오도마이’인데 이것이 말하자면 단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라는 표현으로 나온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성부의 음성이 들려오고 또 성자가 거기 계시고 성령이 동시에 임하신 이 사건은 지상세계에서 삼위일체의 장소적 동시 임재를 보여주는 아주 유일한 순간이고 그리고 매우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분들이 받은 이 강의안 속에 성경의 근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으니 여러분들이 사후에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Ⅲ. 삼위일체 교리의 특성
A. 신앙의 근본조항
그러면 도대체 이 삼위일체의 교리는 어떤 것이며 또 어떤 특성을 갖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은 하나이며 영원하신 한분 하나님이 동일한 신적 본질로 삼위 안에서 존재하시고 그 삼위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고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하신바 되었다고 하는 기본적인 교리에요. 이 삼위일체론의 중요한 특성이 뭐냐 하면 이것이 신앙의 근본조항이라는 것이에요.
우리들이 교리를 논쟁할 때 근본조항과 비근본조항이 있어요. 비근본조항은 비록 견해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견해가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비근본교리를 가리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교회의 정치를 장로제로 할 것인가, 회중제로 할 것인가, 감독제로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은 각각 어느 정도 성경에 근거가 나왔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까지는 믿지 않아요. 그래서 감리교 교인들도 장로교 교인들과 그리고 침례교 교인도 감리교 교인들과 형제가 될 수 있는 것이죠. 더욱이 세례를 줄 때 사람을 물속에 빠뜨려야 되느냐, 물을 뿌리기만 해도 되느냐 이런 것은 각각 성경의 근거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본조항이라기 보다는 비근본조항에 속하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중의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이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제시하는데 훨씬 더 더 바람직한 것이라고 각자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서 견해가 다른 사람들도 용납할 수 있는 조항이 비근본조항이에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자기 입장은 확고히 하되 견해가 다른 사람들도 포용할 수 있는 그러나 거기에 끌려가지는 않는 그런 융통성이 요구되는 것이죠.
그러나 근본조항이 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사실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죠. 예를 들자면 성자가 동정녀로 탄생하지 않으셨다고 하거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말을 하든지 혹은 하나님도 누군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든지 이런 중요한 근본교리에 속하는 내용들이 사도신경 속에 담겨있습니다. 모두 담겨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들이 거기에 담겨있다는 것이죠. 이런 것들은 부인하게 되면 그것은 이단이 되는 것이에요. 이 삼위일체교리는 바로 그런 것이죠. 그래서 제가 비유를 하자면 교리 전체가 인간의 몸이라고 한다면 교리 하나하나의 가르침을 살이나 뼈라고 말한다면 이외에 다른 교리들 중에 칼질을 하다가 손을 좀 비거나 혹은 뼈가 부러져도 살아가는 것에는 별 지장이 없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 교리가 있는가하면 손톱깎이로 한 점만 뜯어내도 죽는 살점이 있어요. 심장의 살점, 췌장, 혹은 간, 혹은 콩팥, 쓸개 이런 결정적인 장기는 손톱깎이로 자르면 그것이 몇 그램이 안 되지만 그냥 절명한단 말이죠. 삼위일체의 교리가 바로 심장이나 장기의 중요한 장기의 살점 같은 교리기 때문에 우리들이 올바로 알고 있어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에 보면 이상하게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논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종교개혁자중 어떤 사람도 삼위일체에 대해서 장황하게 쓴 사람이 1세대에는 없었어요.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중세시대까지 계속 내려오는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삼위일체와 견해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나 후에 역사가 흐르고 종교개혁의 1, 2세대들이 죽고 3세대 이후로 계속되면서 이제 교회적 상황은 많이 변하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커다란 교회 밖의 이교나 이단사상들에 대해서 맞서야 했는데 이번에는 개신교 안에서 다양한 이단들이 생겨나게 되었어요. 소키누스주의라든지 혹은 Remonstrants라고 불리는 항론파 사람이라든지 이 사람들은 도르트 회의의 결정사항에 반기를 든 사람들로서 신학적으로 알미니우스에 입각한 알미니안 주의자들이었어요. 그런가하면 사벨리우스주의자 같은 이런 각종 삼위일체를 둘러싼 이단적 사상들이 생겨나면서 그들이 정통적인 삼위일체의 교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 개혁교회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 삼위일체의 교리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신학자들은 이것을 정교하게 논증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B. 이성을 초월한 신비
그런데 이 삼위일체 교리는 왜 이렇게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까요? 그것은 바로 이 삼위일체 교리 자체가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선 우리의 사유의 대상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데 문제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 하나님은 이제 이 창조세계 시간과 관계는 갖고 계시지만 이것을 초월해서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셔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사물과 대상을 파악할 때는 항상 우리 안에 있는 기존의 정보들이 특별히 인과 관계와 범주에 대한 정보들이 작용을 하면서 사물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 사물들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해계신 하나님이시죠.
시간이 없지만 예를 들어 본다면 우리가 생전 처음 어떤 날아다니는 곤충을 하나 발견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빠른 순간에 여기에서 사물이 보일 때 막 움직입니다. 파일이 움직여요. ‘아 저것은 움직이기 때문에 무생물이 아니지!’ 그러면서 한쪽 생물의 파일이 움직이는 것이에요. ‘저것은 움직이고 살아있고 장소를 이동하니까 저것은 동물에 속하는구나! 완전한 동물이 아니니까 저것은 곤충에 속하는구나!’ 그리고 보니까 날개가 달려있어요. ‘날개가 달린 곤충에 속하는구나!’ 계속 파일이 좁혀오는 것이에요. ‘저것이 파리일까?’ 가보니까 파리보다는 몸의 길이가 길어요. ‘잠자리일까?’ 그러면서 파일이 좁혀지면서 그것이 들어갈 위치를 정확하게 따지는 것이에요. ‘아, 종류가 다른 잠자리였구나!’ 끝까지 찾아낼 수 없으면 파리도 아니고 잠자리도 절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여태까지 내가 본 종류에 속하지 않은 그런 곤충이구나! 저게 무엇일까? 하고 물음표를 친 채 내 곤충파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며칠 후에 생물도감을 보다가 최근에 발견된 생물이라고 나오면 그때 그 이름이 외워지고 정보로 기억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군다나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가 어렵다고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이제껏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책에서 혹은 목사님이 여러 사람들이 이런저런 비유를 많이 사용했을 것이에요. 이 시간에 깨끗이 지워버리고 그 비유는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대표적으로 여러분들을 현혹시켰던 교리들이 ‘아빠, 장로님, 부장님’ 이런 비유, 한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버지가 집에서는 아빠, 교회에서는 장로, 회사가면 부장 이렇게 되는 것이 삼위일체라는 주장, 또 같은 H2O 이지만 어떤 때는 액체인 물로 어떤 때는 고체인 얼음으로 어떤 때는 기체인 수증기로 존재한다. 이런 것은 모두 다 올바른 삼위일체의 교리를 지시해주지 못하는 잘못된 비유이고 그 비유가 성공적으로 이해된다면 기껏해야 양태론을 전달해줄 뿐인데 이것은 사벨리안적인 이단교리입니다.
언젠가 열린 교회 교리반을 열댓 명씩 인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에 20명쯤 모였을 때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60%가 양태론인 이단이에요. 그리고 40%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결국 모르거나 잘못알거나 둘 중의 하나일 뿐이고 더욱이 그 20명에게 교회에서 60분이라도 삼위일체를 배워본 적이 있느냐고 하니까 그중에서 손을 든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교리는 너무 어려운 교리라고 말할 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대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데 까지는 갈 수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그래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신앙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교리가 되어야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즉시 저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목사님이 늘 스승처럼 존경하시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삼위일체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삼위일체를 우리 인간들에게 설명해보겠다고 저술해놓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이 1950년 이전까지 우리들이 신학계에서 이해하고 있었던 이해였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신비에 속한 삼위일체를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그래서 이 삼위일체를 썼다고 믿는 것이죠. 그렇지만 1960년대 이후에 나온 학계의 새로운 학설은 이미 기존의 그런 학설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이미 입증하고 새로운 가설을 세웠는데 이 가설이 오늘날에는 훨씬 더 커다란 공감을 얻고 있고 나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삼위일체라는 아주 어려운 저술을 저작한 것은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에요. 자, 삼위일체를 모두 읽어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손을 내리세요. 손을 내릴 사람이 없군요. 그러면 표지라도 본 사람 손들어 보세요. 표지도 못 봤어요? 열린 도서관에 가면 표지는 있습니다. 한번 보세요. 매우 어렵습니다. 그 책을 비난하는 글들은 많이 나왔는데 그 책처럼 그렇게 포괄적으로 설명한 책은 없어요.
그런데 최근에 그러면 60년대 이후에 나오는 새로운 삼위일체의 저술의 동기에 대한 학설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두 가지 동기에서 삼위일체를 저술했다고 보는 것이죠. 우선 첫째는 카테키스누스적인 용도를 위해서예요. 즉 묻고 대답하는 그래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가르치고자하는 교육학적인 의도가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액세르키타치오 아미니라고해서 영혼의 훈련을 위해서예요.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정신의 단련을 위해서 이 삼위일체를 썼다는 것이죠. 그래서 대화체로 나가면서 그러면서 독자들과 함께 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설명하고 설명을 해나가면서 그것을 따라오다가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기독교지성의 발전을 위한 근육을 계속 사용하게해서 이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올바로 기독교의 진리를 섭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이단적인 사상에 대해서 방어할 수 있는 정신의 훈련용으로써 이 삼위일체를 저술하였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삼위일체 정도를 읽으려면 읽다가보면 굉장히 모르겠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이 있지요? 그게 청소년들 필독도서인데 청소년들은 그것을 읽어도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궁금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니까 이게 아마 말년의 간증이겠지! 그러고 갖고 가서 읽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즉시 그 책의 1/10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것은 46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썼는데 그의 철학과 신학과 성경에 대한 사랑이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을 때에 쏟아져 나온 대작이에요. 그래서 거기에서는 철학, 미학, 신학, 윤리학, 정치학, 수학, 성경 신학 이런 많은 지평들이 다집형으로 한꺼번에 만나서 펼쳐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성의 경연장과 같은 작품이에요. 저는 그 작품을 거짓말 안보태서 수십 번을 읽었어요. 그런데 저는 어느 날 한번 제가 강의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았는데 매주 두 시간씩 일 년 정도를 강의하면 기본적인 내용들은 강의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어마어마한 대작이에요. 그런데 이 삼위일체론은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 삼위일체는 여러분들이 공부를 해야 돼요. 그러면 이 지성의 근력이 발달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보면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 이렇게 팔굽혀펴기를 하면 손이 마루아래까지 쭉 내려갔잖아요. 지금은 아마 무릎까지도 안내려갈걸요. 이따가 한번 해보세요. 안돼요. 그것은 근육이 굳어진 것이에요. 그것은 다시 운동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쭉쭉 내려갑니다. 그런 근육을 길러주는 그런 용도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를 저술하였던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것을 깊이 신뢰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는 믿음을 가져야된다는 이야기에요.
자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리된 주장을 여러분들이 교재 16p 본문 밑에서 두 번째를 읽어보겠습니다. ‘하인리히 헤페에 따르면(루터파 신학자에요.) 이에 대한 개혁파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⑴ 삼위일체교리는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비이다. ⑵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문제투성이가 된다. ⑶ 철학의 이성적 예리함을 합해도 삼위일체에 대한 진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⑷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고 만약 이것이 이성으로 해부될 수 있다면 신앙은 철학으로 전락할 것이다. ⑸ 어떤 자연적 이성에게도 하나님은 한 본질과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결론을 내릴 능력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이죠? 오직 성경의 계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 다음 잘 들으세요. 그렇게 믿은 다음에 그 다음에 그 교리가 맞는다고 치고 그 증거들은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많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이에요. 삼위일체의 모상들을 보면서 찾아내는 것이에요. 그러나 거꾸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신앙이 먼저 그 다음에 그 신앙이 맞는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우리들이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에요. 그 파악은 우리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파악이 되는 것이지 멍하고 있으면 파악이 안 되는 것이에요.
C. 삼위일체는 사변적 교리인가?
그러면 삼위일체는 사변적 교리인가?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이것은 굉장히 공허하고 그리고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런 사변적인 탁상공론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이 삼위일체의 교리야말로 가장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교리에요. 저는 이번 싫증을 공과공부를 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배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의 공과를 내주면서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여태까지 배운 공과 중에서 꽤 철학적이고 어려운 것이어서 여러분들이 잘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해서 사실은 구역장들을 위해서 사실 교역자들을 아침마다 모아놓고 한 시간, 한 시간 반씩 강의를 해서 그것을 동영상을 찍어서 구역장들이 볼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리는 일까지 그렇게 한 교재는 이것이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어려운 그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삼위일체의 공부를 하면서 아주 놀랍게 변화되는 성도들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변화된 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삼위일체의 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나니까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고 교회가 본질적으로 어떠해야하는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공통된 고백이었어요. 이처럼 삼위일체의 교리는 매우 사변적이지만 또 아주 즉각적인 현실 실천성적인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현대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제 삼위일체 교리의 황금기 혹은 르네상스 오브 트리니티 라고 불릴 정도로 그렇게 삼위일체 교리의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어요. 여러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보프, 혹은 캐서린 모리 라쿠나, 존 지지울라스 같은 이런 신학자들에 의해서 삼위일체론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우리들이 그들의 현대신학적인 논의에 모두 다 동의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그들은 사회 속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현대인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들의 해결을 그 상황 속에서만 해결하던 모든 사회적인 노력을 한번 뛰어넘어서 그래서 하나님 삼위일체를 새롭게 이해하여 그것을 현대의 삶속에 해석학적인 틀로 사용하고 그 삼위일체의 이론을 적용해서 종족간의 갈등의 문제, 남녀 간의 차별의 문제, 그리고 불평등의 문제, 가난의 문제 이런 문제들을 풀어보자고 하는 아주 적극적인 시도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의 내용을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러한 의도 자체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천성이 있는 삼위일체 교리의 특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묵상한다는 것이에요. 즉 성경 속에 나타난 어떤 사건들을 우리들이 묵상해도 결국 성경속에서 발견하는 수많은 사건과 그리고 역사들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속성은 아주 쉬운 말로 얘기하면 그것을 빼면 하나님이 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특성이에요. 그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지식과 연결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은 어떤 사건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 사건을 통해 비친바 된 하나님의 속성을 명상하는 것이고 그 속성을 묵상하고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어떠한 분이신지를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성경의 진리는 한 하나님께로 빨려 올라가고 그 하나님이 바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것이죠. 청교도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침묵의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 시간에 그들이 집중하고 있었던 교리는 신론이었어요.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에서부터 비롯된 이 세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고 그리고 자신이 그 성품의 빛 아래서 어떤 신앙을 가지고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결단하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던 것이죠. 시간이 없지만 예를 들어서 이런 말을 해볼까요. 시인이 곤란한 일을 만나고 굉장히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산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고난가운데서 묵상하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었던 것이죠.
Ⅳ. 삼위일체론을 위한 주요 개념들
자 이렇게 되면 이제 삼위일체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해야겠는데 이 삼위일체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이제 중요한 개념들을 정리해야 되는데 사실은 삼위일체에서 삼위일체가 어렵게 생각되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 본문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려는 이 삼위일체의 주요 개념들을 설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삼위일체론이 그렇게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에요. 삼위일체 신학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딱 두 가지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하나이심이에요. ‘우니타스’라고 그러는데 단일성이라고 말해요. 하나님의 그 ‘우니타스’와 그 다음에 셋이심 ‘뜨리아스’라고 하는데 그 ‘우니타스’와 ‘뜨리아스’ 하나이심과 셋이심을 어떻게 완벽하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개념이에요.
그래서 이것들을 만약에 ‘우니타스’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는 것을 희생시켜서 셋을 설명하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다신론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만약에 하나를 잘 설명하기 위해서 셋이심을 희생하게 되면 위격을 부정하고 오직 한 위만 있다고 믿는 단위신론이 되거나 혹은 성부와 성자만 계시다고 하는 양위신론에 빠지기 쉽게 됩니다. 그 단위신론의 대표가 바로 아리우스였어요. 아리우스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딱 한분이시고 성자가 하나님께서 낳으셨지만 그분은 거의 하나님께 가까운 분이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아니셨다는 것이죠. 거의 하나님께 다가가신 신적인 존재였다는 것이죠. 신은 아니란 말이에요. 왜? 신은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만약에 신이 복수로 존재한다면 그러면 복수는 서로를 의존하게 되어있는 것이죠. 그러면 복수 중 어느 신도 꼭 필요한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에요. 그렇게 돼서 신에 대한 개념 전체가 무너진다고 보았던 것이죠. 이 아리우스의 사상은 정확하게 헬라의 철학에 기초한 것이에요. 철학에서는 신의 존재를 상정하는 모든 철학자들이 아리우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워버리기에는 성경이 너무나 명백하게 성자의 하나님 되심과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되면 철학을 높이고 성경의 명백한 계시를 무시하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이단에 크게 흔들릴 때 정말 하나님이 준비한 지성의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 사람이 바로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이에요. 그 아타나시우스가 아주 유능하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한분이시지만 삼위로 계시고 그러면서도 그분이 동일하게 한 하나님이신지를 아주 유능하게 설명했고 결국은 교회는 그것을 선택했고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정죄 받게 되었던 것이에요.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교리가 정확하게 세워진 것인데 이것은 그때 세웠다기보다도 이미 기독교회가 믿고 있었지만 정교하게 논리적으로 고백하지 못했던 것을 아타나시우스가 정리하여 정통교회가 믿어오던 바를 확고하게 세운 것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도올 김용옥선생이 이것을 비판하면서 결국은 그것은 처음에는 알려지지도 않은 교리였는데 예수를 높이는 어떤 인간들이 자기의 희망을 교리 속에 그리고 성경 속에 투사해놓은 것이라고 비난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이미 대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그 교리를 이단에 직면해서 재천명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A. 본질
그럼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개념이 나오는데 하나는 본질의 개념이고 그 다음에 위격의 개념이에요. 이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여러분들이 읽어야겠습니다. 19p를 보십시오. ‘본질 형이상학적으로 본질이란 사물의 무엇 됨 라틴어로 뀌디따스를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본질 혹은 본성이라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철학적으로 본질과 본성은 같은 것이라고 봐요. 나는 그 두 가지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본질은 무엇 됨이고 본성은 그것이 우연적으로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을 때에 자연스럽게 본질이 작용하는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H2O가 만약에 본질이라면 그 본질이 어떤 조건에서는 이것이 액체가 되요.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는 고체인 얼음이 되지요. 어떤 조건에서는 수증기로 증발해버려요. 그러면 H2O는 본질이며 동시에 본성인데 본질과 본성의 차이는 본질이 다른 외부환경과 연관을 맺어서 나타나는 작용의 방향이 바로 본성이에요. 그래서 본성은 본질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안에 있는 경향성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경적인 용어이기도한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계시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도덕적 통치에서 상세하게 설명했어요. 나중에 찾아보세요. ‘추상적으로는 데오테토스=신성, 휘시스=본성, 데이아휘시스=신적본성 혹은 불변하는 지혜이며 히브리어로 투시아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삼위하나님이 하나의 신적본질을 가지셨다고 할 때 이것은 삼위 하나님 모두가 동일하게 가지고 계신 “신적 성질” 하나님으로서의 성질을 가리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는 그 무엇이란 말이죠. ‘하나님 안에는 동일한 신적본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신적 성질이며 이 신적본질은 나뉘지 않으며 삼위하나님 안에서 모두 하나이고 각 위안에서도 하나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성질 안에서 단일한 영, 의지, 능력을 가지신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신적 본질을 밀가루 반죽같이 생각하고 그것을 세 토막으로 나누어서 한 덩어리는 성부, 한 덩어리는 성자, 한 덩어리는 성령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따지면 본질은 다 똑같잖아요. 본질은 똑같은데 그렇게 되면 동일한 본질을 가진 다신이 되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면 밀가루 반죽덩어리처럼 둥그렇게 있는데 그것을 길게 펴서 세 토막으로 나누어서 다시 동그랗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세 개를 놨어요. 그러면 본질은 똑같아요? 달라요? 달라요? 왜 달라요. 똑같지! 본질은 똑같아요. 그러니까 수제비나 칼국수나 마찬가지에요. 수제비는 넙적넙적하게 뜯은 것이고 그래서 강원도에서는 뜯어국이라고 그래요. 그리고 칼국수는 밀어서 넓적하게 만들어서 썬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세 덩어리가 있어도 본질은 같은 것이죠. 그러면 그냥 삼위 하나님이 동일한 본질이시라고 이렇게만 말한 것 가지고 삼위일체가 된다는 것이에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셀 수 없이 많잖아요. 그 신들이 모두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어요. 동일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신들이 여럿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삼위 하나님이 동일한 신적 본질이시라는 이 교리는 매우 중요하고 치명적이지만 이것 하나로는 삼위일체를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아주 중요한 결론을 머릿속에 기억하셔야합니다.
그 다음 ‘우연적 사물은 현존하는 우연적 요소와 본질이 구별되지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서 우연적 사물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우연적 사물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에서만 그 형태로 있는 사물이에요. 이해되세요? 그것을 가리켜서 우연적 사물이라고 그래요. 여러분 신기하지 않아요? 잘 들어보세요. 불이 활활 타올라요. 여기에 나무가 있어요. 나무하고 플라스틱은 물건의 종류가 달라요? 같아요? 다르죠! 옷감이 있어요. 옷감은 플라스틱과 달라요? 같아요? 그것도 면이라고 치면 완전히 다른 것이잖아요. 그런데 신기하게 불이 확 타는데 나무를 집어넣었어요. 그랬더니 확 타서 없어졌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플라스틱을 던져버렸더니 이것도 확 타서 없어져버렸어요. 다만 나무와의 차이는 검은 연기를 많이 내면서 탔다는 것이에요. 솜이불을 던졌더니 이번에도 불길을 일으키면서 그러면서 목화솜이니까 깨끗이 타버리는 것이에요.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불, 나무토막, 플라스틱 바가지 이 세 가지가 우연적인 사물이라는 뜻이에요. 왜? 그것은 이렇게 뜨거운 불길이 없고 온도와 모든 것이 맞는 한도 안에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알지요? 그런 조건하에서만 양태를 다르게 해서 존재하는 것이에요. 던져버리면 확 타서 없어져버리는 것이에요. 나무에서는 나무의 원소들이 각기 나와서 어디론가 흩어지겠지요. 플라스틱은 플라스틱의 원소들이 나와서 어디론가 흩어지겠지요. 그 다음에 목화솜은 목화솜대로 나와서 흩어지겠지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은 우연적인 사물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본질이나 실체라 할 때는 어떻게 되는 것이죠? 그런 우연적인 사물 즉 온도와 시간 조건 이런 것들이 맞을 때에만 겨우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에요.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해를 해야 해요.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본질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죠. 본질이라는 말을 이렇게 쓰잖아요. ‘목사님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항상 잘 쓰는 말이 뭐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이지만 이렇게 디지털시대에는 그게 목표가 아니라 부자가 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자꾸 변한다면 그것은 본질이 될 수 없는 것이죠. 시간과 상관없이 계속 흐르는 것이 도덕적인 본질이라면 사물의 물리적인 본질은 바로 그런 조건을 초월하는 본질이라는 것이죠. 좀 더 들어가서 우리가 과학적인 사고를 발동시켜서 생각해보면 예를 들면 우리가 얼음덩어리를 불 속에 집어넣었다고 칩시다. 막 탔어요. 불이 워낙 셌으니까 얼음도 녹아서 수증기가 되어 버리고 수증기도 태워서 건조시켜서 날아가 버리면 H2O가 되잖아요. 다이아몬드 반지를 만약에 연탄불에 던져서 태웠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C라는 탄소가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는 연탄을 갈면 안 돼요. 가스가 되어서 날아가 버린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그러면 분명히 둘은 H 와 O라는 원소고 하나는 C라는 원소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그러면 이 차이가 최종적인 차이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다양한 원소로 존재하는 것도 이 지구라는 환경 속에서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만약에 우리가 우주선을 타고 우주 밖으로 멀리 나가게 되면 그런 다양한 원소들이 존재하지 않고 H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면 H도 그 조건에서 존재한다는 것이고 최종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죠. 그렇게 끝까지 무한퇴행해서 더 이상 회귀할 수 없는 사물의 근원이 무엇이냐는 것이 커다란 물음표가 되는 것이죠. 어마어마한 사유들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죠. 그것을 우리는 질료의 상태라고 보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그 질료를 창조하시고 그 질료의 상태에서 만물들을 빚으신 것이 창조의 사역이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는 마지막 실체는 결국은 신이나 절대자일 것이라고 보고 그것과 모두 혼연일체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면 결국 인격적인 신이 계셔야 될 자리에 이 모든 사물들이 마지막으로 존재의 본질로 돌아가고 본질로 돌아가서 더 이상 퇴행할 수 없는 존재의 마지막 근원으로 돌아갈 때 그것이 신의 세계 속으로 수렴되어버려서 신과 이 세계가 일체가 되어버린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범신론 사상이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거기에도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고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마지막에 있는 그 마지막 사물의 끝 자체가 하나의 통일된 실체일 뿐이지 그 자체가 무엇인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고 그것은 무의식인데 그 자체가 의지의 덩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 의지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의지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 모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덩어리라고 보는 것이죠. 거기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수많은 이교와 이단사상과 그 다음에 뉴에이지 뭐니 하는 수많은 사상들이 거기에서 수없이 하늘의 별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럼 누가 답을 내릴 수 있겠어요. 성경의 계시를 믿지 않는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확 퍼져나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같은데서 나오는 소위 Process Theology 혹은 Process Philosophy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신과 모든 세계의 사물들이 하나의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이 죽고 사라지고 만물들이 사라지면서 그것이 퇴행하고 본질로 돌아가고 돌아가면 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고 그런 본질을 담지하고 있는 우리는 신이 우리 속에 침투한 존재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에요. 이 모든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신도 우리와 함께 형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아주 멋있는 자기네가 보기에는 아주 멋있어 보이는 것이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이 삶이 신을 신답게 되어가도록 만들어주는데 이바지하는 삶이라고 하면서 신과 이 모든 자연세계의 혼연일체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뉴에이지사상의 형이상학적인 근저에요. 그래서 이미 오래전에 화란에서 파문을 당해서 죽은 그 스피노자 같은 사람이 오늘날 이렇게 화려하게 부활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세계관이 오늘날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각광을 받는 것이라는 거예요. 이때에 우리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확실하게 정립해서 하나님과 이 세계의 타자성을 확고히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하나님과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고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삶으로 보여주고 말로 선포하고 그래서 우리의 진리의 체계를 확고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참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9p 밑에서 7째 줄입니다. ‘우연적 사물은 현존하는 우연적 요소와 본질이 구별되지만 하나님은 우연적 사물이 아니시기 때문에 본질 자체에요. 우연적 사물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존재를 타자에게 의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심으로 본질 자체이시고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어떤 타자에게도 의존하지 않으신다.’ 동일 본질이라는 것은 호모우시아 호모는 여러분들이 아는 호모에요. 동종의 동일의 라는 뜻이에요. ‘동일 본질이라는 표현은 원래 성부와 성자 사이에 신적 본질의 일치를 지시하기 위한 용어였다. 따라서 이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로서 모두 동등하고 완전하게 같은 신적 본질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 본질이라는 표현 하나로만은 삼위가 하나님을 지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랍의 신들은 동일 본질을 자지고 있으면서도 다신이었기 때문이다. 삼위가 동일본질이라고 고백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그래서 위격의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그 어려운 본질의 문제, 본성의 문제를 정리했어요.
자, 그래서 여기에서 정리하는 소결론은 이것이에요. 삼위 하나님은 하나의 신적 본질이시다. 하나님이 본질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물들은 사물이 본질을 가지고 있지요. 왜? 이것 자체가 우연적 사물이니까 말이에요.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조건하에서는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존재의 형태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가 곧 본질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다.
B. 위격
그 다음에 위격이라는 말이 나와요. 굉장히 어려워요. 잘 들으셔야 됩니다. ‘창조된 사물들은 우연적인 존재 아래 실체’ 이 실체는 바로 본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에요. 각주 15번에 내려가 봅니다. 그 속에 라틴어가 나오지요? 제가 한번 읽을게요.……. ‘Sed quia nostra loquendi consuetudo iam abtinuit ut hoc intellegatur cum dicimus essentiam quod intellegitur cum dicimus substantiam, non audemus decere unam essentiam, tres substantias, sed unam essentiam uel substantiam.'
맨 밑에 보세요. Tres substantias 이게 뭐냐 하면 아니라고 부른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세 Substantias 세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Unam essentiam 하나의 본질 uel 혹은 Substantiam 하나의 본질 혹은 하나의 본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번역을 보면 ‘그러나 우리는 본질이라는 용어가 지시하는바나 실체라는 용어가 지시하는 바를 모두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한 본질, 세 실체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한 본질 한 실체라고 말한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실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사물들을 거슬러 올라가고 거슬러 올라가고 거슬러 올라가면 더 이상 뒤로 퇴행할 수 없는 그 사물의 무엇 됨의 마지막 이것이 실체인데 이것을 본질이라는 말로도 부른다는 뜻이에요. 정리되었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창조되시지도 않으셨고 우연적인 요소가 없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체는 곧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과 같다.’ 여기는 줄치셔야 됩니다. 가이사랴의 바실 이 사람은 갑바도기아 상인의 대 학자가운데 한사람이었고 이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동방초대교회 교부들인데 이 사람들에 의해서 삼위일체의 교리, 특별히 삼위의 구별성에 대한 교리가 세워지는데 이 세 사람이 아주 크게 이바지하는 대학자입니다. ‘가이사랴의 바실은 삼위가 모두 신적 본질의 동일성뿐 아니라 동일실체성을 갖는다고 진술하였다.’ 거기 줄치세요. 자, 설명할게 들어보세요. 신적 본질의 동일성만을 갖는다고 하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똑같은 밀가루 반죽을 셋으로 쪼개놔도 동일 실체를 나누어 가진 것이에요. 이해되시죠? 그렇게 하면 삼신론이 되요.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하면 동일 실체성 그 실체가 셋으로 나뉘지 않은 하나인 채로 삼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을 좀 더 들어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왜? 그 정도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가서 어려우면 하나님께 감사해야지요. 프랜시스 튜레틴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변증신학 강요라는 책에서 진리를 찾아 헤맸던 신앙의 선배들에 대해서 회고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들은 성경을 탐구하였습니다. 쉬운 구절 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고 어려운 구절 속에서는 겸손을 배웠습니다.’ 아멘. 그러니까 오늘 삼위일체 강론을 들으면서 아무것도 이해 못해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내려가도 그게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 그 사람이 중심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버스 안에서 ‘하나님 나는 돌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기도하며 눈물을 흘린다면 그게 오늘 이 시간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겸손의 계기가 되겠느냐는 것이에요. 아멘. 돌이 많으시네요. 자, 그 다음. 점입가경입니다.
‘그는 실체가 곧 하나님이라고 보았으며 이 하나의 실체가 나눠지지 않고 삼위로 존재하는 방식이 위격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 여기에서 제가 정리를 좀 해드릴게요. 우리가 신학 책들을 보면서 혹은 제가 설교하는 가운데 삼위일체의 삼위에 관해서 딱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이에요. 위, 위격, 인격 이런 세 종류의 말을 사용한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것이에요. 그러죠? 정리를 해드리면 위, 위격, 인격은 완전 동일어입니다. 다만 위격과 위는 아무 말이나 써도 상관이 없고 다만 인격이라는 이 말은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만 위와 인격이 나눠지는 것이에요. 라틴어에서는 페르소나에요. 그리고 희랍어에서는 이것이 프로소폰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연극할 때 가면을 쓸 때 그것을 프로소폰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사실은 그 말은 맞지만 사실 여기서 이야기할 때 이 페르소나라는 이 말이 그것에서 바로 온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설명은 잘못된 설명이에요. 그래서 어쨌든 그 말이 희랍어에서는 휘포스타시스 그리고 그 다음에 라틴어에서는 쓰부스딴띠아 혹은 페르소나라는 말로 사용되었어요. 이것이 영어로 들어와서는 이제 Person 이라는 말로 정착이 되게 되요. 그러면 영어의 이 Person은 사실은 위에서 이야기하는 이 인격, 프로소폰이라는 것과 희랍어의 휘포스타시스 위 혹은 위격이라는 것 쓰부스딴띠아라고하는 이 개념까지 모두 다 같이 들어오는 것이에요. 휘포스타시스, 페르소나, 쓰부스딴띠아 이 모든 개념을 다 끌어서 영어의 Person속에 들어가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Person은 알다시피 우리가 ‘위’라고도 번역을 할 수 있고 ‘위격’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고 ‘인격’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런 미묘한 언어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삼위에 대해서 그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위 끼리 관계를 가질 때에, 그 다음에 우리 인간들과 관계를 가질 때에, 그 다음에 이 모든 세상의 사물들과 관계를 가질 때에, 그 때 이것을 적절하게 구별하여 사용하자는 것이에요.’ 자, 정 중앙을 한번 보십시오. ‘나는 위 혹은 위격을 의미하는 희랍어 휘포스타시스를 라틴어로 옮길 때에 페르소나라고 하였다. 이 페르소나는 인격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여기에서 용어사용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함에 있어서 영어 Person이라는 단어는 위, 위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격을 의미한다. 우리말 용어 사용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야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나 위들 간의 활동 Opera ad interna 와 관련하여 이 말을 사용할 때에는 위 혹은 위격이라고 부르고 도덕적인 피조물인 인간과의 교통과 관련해서 이 말을 사용할 때에는 인격이라고 표현해야 되겠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위격적으로 찾아오셨다고 말하지 말고 오늘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인격적으로 다가오셨다. 삼위하나님은 나를 다루심에 있어서 인격적이시다. 이런 표현을 쓰면 아주 좋은 표현이란 말이죠. 그리고 성부 하나님이 자신의 위격 안에서 아들을 낳으셨다고 말해야지 성부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 안에서 성자를 낳으셨다는 이런 표현은 좋지 않다. 이렇게 정리를 해드리는 것이에요.
그 다음 그러나 여기에서 인격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혼란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잘 들으세요. 우리들은 인격 그러면 한 개체가 한 인격을 갖지요. 다중 인격이라는 질병이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두인 격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인격의 기능 자체가 분열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되고 우리는 한 사람에게는 한 인격이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인격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게 되면 결국은 삼신론이 되고 마는 것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는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에 각각의 인격이 없으시다면 세 분 사이에 신적인 위들 간의 교통이 불가능한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삼위하나님은 세 인격으로 되어있으신데 그 인격의 성질이 우리 인간 속에서 유비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한사람에게 한 인격인……. 그래서 두 인격이 만났다는 것은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이에요. 인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 본질일지 모르지만 개체가 완전히 다른 존재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인격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한 개체적 존재를 구성하는 인격이에요. 그러나 신적인 인격은 이런 인격이 아니에요. 그러면 삼신론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계속 들어보세요.
‘오히려 여기에서 인격이라고 할 때 우리는 한 개체적 인간이 하나의 인격을 갖는다는 개인주의적인 관점보다는 관계적이고 교통적인 관점을 가지고 생각하여야한다.’ 그런 이야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한분이시면서 삼위 안에서 세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능력, 지혜, 의지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그 다음 정신 차리세요. 줄치세요. ‘삼위는 신적본질이 나타나는 현현 양식(거기에다 X표 하세요.)이 아니라 존재양식이다.’ 그러면 현현양식이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나듯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죠. 제가 이렇게 이런 옷을 입고 있으면 그냥 강의하는 학교 선생님이나 뭐 잘 보면 목사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을 해요. 좀 쉬어가도 되겠지요? 고속도로에서 차를 타고 쭉 가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을 하다가 밤이었는데 갈림길이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될지 몰라서 일단 섰어요. 그랬는데 뒤에 차가 오더니 내 뒤에 똑같이 서는 것이에요. 이상하다. 왜 봉고가 서나? 그래서 내렸거든요. 그랬더니 자기도 같이 내리는 것이에요. 그러더니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나하고 똑같이……. ‘목사님 여기에서 강원도 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요?’ ‘아니 당신이 내가 목사인지 어떻게 아느냐?’ 그러니까 ‘목사님 아니세요?’ ‘맞는데요.’ 그때 티셔츠에다가 스웨터를 입었는데 신기하지 않아요? 밤중의 초면에 내가 목사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쓰여 있어요.’ 그래요. 즉시 깨달았어요. 제가 사실 입어보고 싶은 옷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외국여행 할 때마다 입어보고 싶은 옷이 있는데 비행기 조종사 옷이에요. 그것을 딱 입고 모자를 딱 쓰고 그리고 선글라스를 딱 쓰고 네모난 가방을 딱 들고 비행기를 탈 때 너무 멋있어요. 내가 언젠가는 한번 몰아보고 말거에요. 그렇게 내가 선글라스까지 쓰고 나타나면 나를 얼핏 못 본 사람들은 모두 내가 아시아나 747비행기의 주조종사라고 생각할 것이에요. 그렇죠? 이것은 존재 양식이 아니라 현현양식이에요. 사람은 그대로인데 옷만 바꿔 입은 것이에요.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옷만 갈아입고 나타났지 한위밖에 없으신 그런 하나님은 아니에요. 그래서 존재양식에다가 동그라미를 진하게 그려놔요. 존재양식이에요. 존재 자체가 그렇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이에요.
‘삼위를 현현양식으로 설명하면 그것은 양태론적 오류입니다. 즉 위라는 표현은 하나의 단일한 신적 본질이 세 실재’ 여기에 줄치세요. 굉장히 어려운 단어가 나왔어요. Subsistence에요. 어려운 단어에요. 세 실제로 존재함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삼중성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이며 하나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이 Subsistence 라는 영어는 제 기억으로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쓰부스딴띠아라는 말을 만들어서 사용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솔직히 이 쓰부스딴띠아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철학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어보았는데 신통한 답이 없어요. 그래서 사실 저도 확실하게 이 개념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런데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 들어보세요. 아까 설명으로 돌아갑니다. 이런 것들이 우연적인 사물이라고 그랬지요? 물병과 이것은 완전히 다른 사물이지요. 이렇게 존재해요. 그런데 이것들이 본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이것을 불에 던져버리면 다 타버려서 나중에는 원소로 돌아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사실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것이 되게 하고 이것은 이것이 되게 하는 이것과 이것은 각각 서로 다른 존재가 되게 하는 마지노선에 그 무엇이 있을 것이 아니에요? 상상할 수 있지요? 어휴, 참……. 다시 한 번 할게요. 불에 태우면 다 없어져서 원소로 돌아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이것일 수밖에 없고 이것은 이것일 수밖에 없이 만들어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의 마지노선이 있을 것이 아니에요? 그것을 실재라고 부르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실재를 가지고 있으면 이 존재는 저 존재와 하나가 아닌 것이에요. 그래서 이 본체, 혹은 본질은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이고 이 실재라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하나님이 셋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에요. 여기에 중요한 신비가 있는 것이에요.
좀 더 설명을 해볼게요. ‘하나님은 삼위로 존재하신다. 삼위는 하나이며 단순하고 동일한 신적본질을 분할하지 않으면서도 세 위격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삼위는 신적 본질이 실재하는 양식들인데 이것들은 위들 간에 동일하지 않으며 각 위에 고유한 비공유적 양식이다. 자연적 사물인 경우에는 구성요소를 지니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은 다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과 이것이 합해져서 이 물체가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렇게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고 구성요소들 간에는 힘이 작용을 하고 그것들이 서로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이 되어서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물의 존재 형태인 것이에요. 그것이 피조물들의 운명이에요. 그런데 이런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피조물인데 그 구성요소를 가장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사물이 하나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영혼이에요. 그래서 그 영혼이 하나님을 가장 닮은 형태의 존재물이 되는 것이에요.
줄치고 잘 들어보세요. ‘자연적 사물의 경우에는 구성요소를 지니지 않을 수 없으며 한 존재 안에 여러 실재를 가질 수 없다. 또 여러 실재를 가지면서도 본질이 나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사물 안에서 실재하는 양식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하나일수가 없고 사물이 하나라면 구성요소가 아닌 채 여러 실재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인 자연사물에서의 이치이다. 창조되지 않으시고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 관한한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신비이다.’
C. 본질과 위격의 관계
그 다음에 본질과 위격의 관계. ‘하나님 안에 있는 위격들의 관계에 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는 속성에 대한 확신으로 출발한다. 즉 하나님의 무한성과 신비성이 그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계시를 접할 때 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써 세상 사물들의 유비로써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비밀스러운 삼위 존재 양식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정수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삼위와 신적 본질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하나의 신적 본질이 분할되어 삼위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면 삼신론이 되고(당연하겠지요?) 하나의 신적 본질이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삼위로 본다면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양태론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의 신적 본질이 삼위에게 배분이 된 것으로 본다면 도표에서 보는 것처럼 삼신 일신적 본질론이 되어서 사신론이 되는 것이에요.’ 한 본질삼 위격 그래서 사신론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의 신적 본질이 성부, 성자, 성령에게 배분되는 것이에요. 배분되었다는 이야기는 먼저 신적본질이 삼위 중 아무것에도 속하지 않고 있다는 것 아니에요? 이렇게 되면 결국 사신론처럼 되어버리는 것이에요. 이게 위르겐 몰티만 이라는 신학자가 삼위일체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어요.
그 다음에 ‘유사하게 되거나 일신일신적 본질론이 되어서 이신론이 될 위험이 있다.’ 어떻게? 삼위 전체가 하나의 신이라고 보고 그 다음에 본질 위에 또 하나의 신적 본질이라고 보고 그래서 신적 본질이 한 신에게 신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결국은 이신론이 되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프란시스 튜레틴은 위격과 본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⑴ 위격들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과 구분되는 반면 하나님의 본질은 위격들과 구분된다. 위격들은 교통한다는 점에서 신적본질과 구별된다. ⑵ 피조물의 경우 하나의 존재에는 오직 하나의 실재가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자신의 존재 안에 여러 실재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이게 바로 피조물의 경우와 하나님의 경우에 다른 것이란 것이죠. ‘⑶ 세 위격은 삼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 위는, 하나이며 무한한 신적본질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각 위가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각 위는 하나이며,’ 하나이며 다음에 나오는 (,)을 ‘각위는’ 다음으로 옮기세요. 그러니까 ‘각 위는, 하나이며 무한한 신적본질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⑷ 그러나 위격들은 서로 구별되기 때문에 한 위가 다른 위가 될 수가 없다.’
‘삼위가 신적 본질을 소유함에 있어서 이질공존본질이 아니며’ 각각 질이 다른 세 본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다음에 ‘유사본질, homoiousios가 아니고’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질이고 예수와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과 매우 유사한 본질을 가지신 그런 식의 삼위일체가 아니라는 것이죠. ‘동일본질이시다.’ homoousioi 혹은 호모웃시오스 이다. ‘삼위는 각각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면서 삼위로 존재하면서도 그 셋으로 존재하심이 피조물이 셋으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니 수적으로는 하나이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Ⅴ. 삼위로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
자, 그러면 이제 삼위일체의 각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26p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한꺼번에 성령까지 설명하겠습니다. 자 우선 성부 하나님의 위격적인 특성은 낳은바 되지 않으심 이것이 특징이고 성자는 낳은바 되심 이것이 특징이고 성령은 나오심 혹은 발출하심이 특징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이렇게 한 것이냐 하면 삼위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나머지 두 위에 대해서 갖는 관계를 기준으로 특성을 진술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의 위격적 특성이 낳은바 되지 않으심 이란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성자와 성부가 구별되신다는 뜻이고 성령과 성부가 구별되신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삼위 중에서 낳은바 되지 않으심 이 특성은 성부만 영원히 갖는 것이에요. 낳은바 되심 이것은 성자만 갖는 것이에요. 나오심 혹은 발출하심은 성령만 갖는 특성이에요. 그것이 삼위 안에서 각 위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위격적 특성이라는 것이죠.
A. 성부 하나님: 낳은바 되지 않으심
첫째 하나님 아버지는 낳은바 되지 않으심이라는 특성을 가져요. 그것은 뭐냐 하면 다른 두 위에 자신의 존재의 기원을 의탁하지 않으신다는 뜻이에요. 그것을 가리켜서 26p를 보십시오. ‘소극적으로는 누구에게서 나은바 되지 않으심 악게네시아가 아니라 미스프린트에요. 앙게네시아에요. 소극적으로는 누구에게서 낳은바 되지 않으심 즉 앙게네시아이다. 성부의 낳은바 되지 않으심은 아무로부터도 말미암지 않음을 가리키는 아겐네시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자, 두 단어를 머리에 잘 넣어두세요. 앙게네시아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으로부터 낳은바 되시지 않으신다. 위격들 안에서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아겐네시아는 뭐냐 하면 아=없다. 겐=나오다. 시아=명사로 어떻게 되느냐하면 원천이 없으신 것이에요. 어디에서 비롯되어서 하나님이 된 것이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아겐네시아에요.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되요. 성부 하나님만이 아니라 아겐네시아는 따라서 삼위일체 전체가 아겐네시아를 갖는 것이에요. 삼위일체는 삼위일체가 아닌 어떤 사물이나 또 다른 절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이 아니기 때문에 삼위일체는 삼위일체 전체의 신적본질이 아겐네시아를 가지고 있어요. 성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모두 자신들 삼위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아겐네시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성부는 그 아겐네시아 위에 앙게네시아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성자와 성령으로부터 낳은바 되시지 않으신 스스로 계신 분이시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에 대해 스스로 계신 분이고 성부 하나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스스로 계신 분이에요. 그것이 바로 성부의 앙게네시아에요. 외워두셔야 합니다.
B. 성자 하나님: 낳은바 되심
건너뜁니다. 성자의 특성은 뭐냐 하면 낳은바 되심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께로부터 낳은바 되심 이것이 바로 성자의 특성이에요. 그래서 성자의 기원은 아버지에게로 돌려져요. 아버지에게로부터 낳은바 되심 이것이에요.
C. 성령 하나님: 나오심
성령의 위격적 특성은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발출이에요. 나오심인데 프로세시오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두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지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떻게 일어나느냐하면 서방교회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으시고 성령이 나오셨는데 이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셨을 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성자로부터도 나오셨다. 그래서 삼위는 하나이다. 이렇게 설명한 것이에요. 이렇게 했더니 동방교회에서는 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지요. 왜 반기를 들었느냐하면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은 인정하는데 모든 위격의 근원은 하나의 위격에 있어야지 두 위격이 함께 기원을 가지면 신의 단일성을 침해한다고 믿었던 것이에요. 그래서 이 동방교회 사람들이 보기에는 서방교회의 이론은 이신론에 흐르기 쉬운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믿은 것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말했느냐하면 성령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오셨는데 성자를 통해서 나오셨다. 그래서 성부의 신적인 본질이 성자의 신적 본질을 나누지 않고 그 신적 본질을 통과해서 성령을 낳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서방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설명은 또 어떤 문제를 낳느냐하면 만약에 성자가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면 성부가 성령을 발출하게 하는 일을 할 때에 성자가 제외된다면 그것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사이에 일관성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보았단 말이에요. 그러면 서방교회 사람들이 보기에 동방교회의 그런 시도는 이신론이 아니라 삼신론을 만드는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에요. 이 토론의 격차를 줄이지 못해요. 그래서 동서방교회가 찢어지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요.
그래서 이 설명을 두고 이것이 정말 좁힐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신학적인 격차를 가지고 있는 이론이었느냐고 생각하던 사람도 있었고 헤르만 바빙크라는 교의학(敎義學)자는 이 둘 사이가 그렇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설명방식의 문제였기 때문에 이것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에 대한 각도가 다른 설명이었다고 조화를 꾀해보기도 하였던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궁금한 생각이 금방 떠오를 것이에요. 몇 가지 중요한 궁금한 생각이 떠오르지요. 첫째는 뭐냐 하면 그렇다면 성부가 홀로 계셨고 그다음 성자가, 그 다음 성령이 계셨구나! 그러면 우리들이 생각할 때 성부는 혼자 계시던 때가 있었고 그 다음 성자가 나셨으니 성부와 성자가 성령 없이 계시던 때도 있었고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이 계시던 때도 있었으니까 삼위일체를 기준으로 본다면 3기로 나누어서 성부단독 존속시대, 성부 성자 양위존속시대, 마지막으로 삼위 공존시대로 나눌 수 있겠구나! 라는 이런 사고가 당장 들어오지 않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시간의 개념을 물고 들어가서 삼위일체를 설명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죠. 이 삼위일체는 시간의 세계 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낳았다고 할 때 그것이 우리가 애를 낳은 것같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것은 완전히 다른 개체를 낳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영원 속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러면 영원은 어떻게 되느냐하면 시간 자체가 사상되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영원 속에서는 나중에 발생되었다든지 먼저 발생되었다든지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설명을 드렸잖아요. 2차원은 평면이에요. 사각형을 그려요. 똑같은 사각형을 그리면 그 A사각형을 B사각형 위에다가 겹쳐놓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수학적으로 선은 두께와 부피를 가지지 않은 줄이에요. 그러니까 무한소로 가는 그 사각의 선 위에 똑같은 크기의 선을 엎어놓았을 때 그것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2차원에서는 사각형 위에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이 위에 얹어지지 않는 것이에요. 아무리 설명을 해도 2차원의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이죠. 그러나 3차원에서는 성립이 되는 것이죠. 두꺼운 벽돌 위에다 똑같은 벽돌을 올려놓을 때 이것은 분명히 2개가 존재하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삼위가 나시고 발출하신 그것이 결국은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발출하셨지만 삼위는 누구도 각 위없이 홀로 혹은 두 위만 있으셨던 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그것은 시간개념을 물고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나는 풀렸어요.
두 번째 질문이 또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죠? 그러면 도대체 아버지 성부가 성자를 낳으신 것과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출하신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몰라요. 그래서 여러분 32p를 보세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합니다. ‘이 정도가 내가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알 수가 없다. 낳은바 되심과 발출하심의 차이도 모르고 그 차이점을 충분히 제시할 수도 없다.’ 우리 선생님이 못하겠다는데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믿을 뿐입니다. 아멘. 이런 것이죠.
(요약)
이제껏 까지 배운 것을 좀 정리해드리는 것이 여러분들에게 유익할 것 같아요. 그렇죠? 정리를 하겠습니다. 너무나 친절한 강사에요. 그러면 맨 처음부터 정리를 해드리겠어요. 우선 첫째 이 세상 사람들이 철학으로 찾던 절대자와 기독교에서 찾던 하나님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 그 다음에 또 하나는 그러면 그 하나님이 이 세계와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을 드러내시는지를 설명할 때에 바로 삼위일체의 교리로 설명했다는 것. 이것이에요. 그리고 모든 교리의 기둥과 같은 것이 삼위일체의 교리이기 때문에 이 삼위일체의 교리가 올바로 세워지지 않으면 다른 교리들도 나쁜 영향을 받게 되어서 삼위일체의 교리가 무너질 때 그 지붕에 깔리게 된다는 것이 첫 번째 서론이고요.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하신 한 하나님이 동일한 신적본질로서 삼위로 존재하시는데 성부는 낳은바 되지 않으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신 것.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에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시작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로 설명을 옮겨가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에 집중합니다. 성경에는 구약과 신약에 여러 곳에서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없다고 해서 삼위일체의 교리 자체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삼위일체 교리의 특성은 신앙의 근본조항 즉 양보할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을 양보해서 잘못 진술하게 되면 참된 기독교신앙이 아닌 이단이 될 수밖에 없는 근본조항이라는 것. 이것을 명심해 두어야하고 이 삼위일체의 교리가 종교개혁자들과 가톨릭신학자들 사이에도 커다란 논란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었던 교리였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의 교리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안에서 구체적으로 진술되기 시작했던 요인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톨릭 때문이 아니라 개신교 안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신생 이단들 때문이었다. 알미니우스주의, 사벨리우스주의, 소키누스주의 이런 이단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삼위일체에 대한 고전적 교리를 당대의 방식으로 새롭게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에요.
그 다음 삼위일체 교리의 특성은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비유는 그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비유로 드는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 그것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경험하게 될 오류를 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또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성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신앙으로 믿을 때에 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붙들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을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게 하신다. 그 예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는 이성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쓴 저술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교리문답을 강화하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을 지성으로 훈련시켜서 자신들이 믿는 바를 올바로 판단하고 올바로 변증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지성의 훈련의 도구로써 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면 삼위일체의 교리는 사변적인 교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고 기독교의 모든 교리 중 가장 실천적인 성격을 가진 교리이고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믿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결과물이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사변적인 교리가 아니라 정말 실천적인 교리이고 그래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할 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품 즉 삼위일체를 통하여 뿜어져 나오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와 그 경륜적 삼위일체의 근원인 하나님의 삼위의 존재방식인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묵상이었다. 거기에서 생사를 초월하는 커다란 신앙의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부흥을 부르고 있는 보프나 그리고 라꾸나 그리고 지지울라스 같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한 삼위일체론은 진술방식과 이론은 우리들이 모두 동의할 수 없지만 삼위일체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보려고 하는 그런 자세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높이 평가를 하고 우리들이 어려운 교리라고만 생각하지 많고 끊임없이 그것을 배워서 교회의 삶속에, 가정의 삶속에, 그리고 우리의 사회생활 속에서, 특별히 우리의 영혼의 활동 안에서 이것들을 적용하는 노력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위한 중요한 개념들이 있는데 본질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 사물 되게 하는 그 마지막 무엇 그것을 본질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을 웃시야라고 하고 이것을 실체라고도 하고 본질이라고도 하는 것이니 실체와 본질은 용어만 다를 뿐 같은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다. 우연적인 사물이라는 것은 어떤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서 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인데 하나님 이외의 모든 피조물은 우연적 사물이다. 그 우연적 사물 너머에 있는 다른 모든 사물들과 공통된 하나의 전체적인 실체를 우리들이 그 사물의 본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그 마지막 퇴행하는 마지막 지점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질료라고 부른다. 이 세상철학에서는 이 마지막 실체와 신의 실체가 동일한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런 주장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부정하는 아주 이교적인 입장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물질 사이에는 가를 수 없는 격차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물질이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상태가 질료이고 그 모든 우연적인 사물들의 마지막 고향이 바로 그 질료다. 그 질료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존재하게 된 그러한 피조상태이다. 우리가 이렇게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개념은 하나님은 동일본질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동일 본질이시다. 삼위가 셋이지만 세 위는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신 것이라는 말로 우리들이 깨끗하게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로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나면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교리는 옹호해서 단일성이 방어가 되었는데 그러한 단일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실체가 나누어져도 동일본질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에 삼신론을 막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위격의 개념이다. 그 위격의 개념이 뭐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낳으시고 발출하셨는데 이 각각의 실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실재는 각 인격 안에 존재하고 그래서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면서도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서로 교통하고 사랑하고 똑 각각의 인격으로 다른 두 위와 함께 이 세상과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창조와 구속의 경륜을 이루어 가신다. 이 세상 사물에서는 하나의 사물 안에는 하나의 실재가 있을 뿐이고 만약에 또 다른 실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눈에 보일 때에 하나의 사물일 뿐이지 사실은 두 개의 사물이지만 영원한 세계 속에 계신 피조물의 존재와는 다른 순전한 영이신 하나님에게는 하나의 존재 안에 세 개의 다른 실재를 가지고 계시는 것이 가능하다. 그 실재는 바로 함께 교통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신데 이것을 우리들이 위 혹은 위격이라고 부른다. 위와 위격 인격 이 세 단어는 모두 동일한 단어인데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당신 자신 삼위 안에서 서로에 대해서 구별되는 위를 지칭할 때에는 위 혹은 위격이라고 부르고 그 위격이 창조세계의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이 본질과 위격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만약에 하나의 신적 본질이 있고 삼위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을 배분한 것이라면 삼위일신적 본질론이 되어서 까닥하면 이위 일체의 개념이나 혹은 사위 일체의 개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신론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만약에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하나로 보고 신적 본질을 하나로 본다면 이것은 이위 일체론에 떨어질 이신론의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은 삼위이지만 한 하나님으로서 삼위의 존재양식을 가지고 존재하신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현현양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삼위로만 존재하셔야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각론에 들어가서는 성부 성자 성령은 다른 하나님 이외의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아겐네시아를 가지신다. 이 아겐네시아는 무엇으로부터도 말미암지 않음이다. 그리고 이제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위격적 특성을 가지시는데 이 위격적 특성의 기준은 삼위가 서로를 향하여 맺은 관계를 기준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성부는 성자와 성령으로부터 낳은바 되지 않으시고 자신의 존재의 기원을 두위에 의존하지 않으시는 스스로 계신 성부이시다. 이것이 바로 ‘낳은바 되지 않으심’ 이것이 바로 성부의 위격적 특성이다. 성자는 그 아버지에게로부터 ‘낳은바 되심’이 위격적 특성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심 혹은 발출하심’이 위격적인 특성이니 성부는 낳은바 되거나 발출하실 수 없고, 성자는 낳은바 되시지 않거나 발출하실 수 없고, 성령은 낳은바 되시거나 혹은 낳은바 되시지 않음 이것을 가지실 수 없는 그런 삼위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이 각기 성부가 제일 먼저 계시고, 그 다음 성자가, 그 다음 성령이 계신 것이 아닌가? 논리적으로는 그것이 맞지만 그것이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 속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부 없이 혼자 계신 적이 없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 없이 두 분이 계신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영원 세계 속에서 일어난 신비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속에도 분명해지게 되는데 우리가 오늘 일이 일어난 것은 어제 일어난 일보다 나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어제 일어난 일이 먼저 떠오르고 오늘 일어난 일이 나중에 떠오르는 그런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하나의 평면에 찍힌 점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는 시간을 초월한 형태로 기억이 남아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지막의 질문은? 그렇다면 성자는 성부로부터 낳은바 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셨는데 그러면 낳은바 되심과 발출하심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도 모른다고 했으니 우리도 겸손하게 모르도록 하자. 그것을 몰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데는 아무 이상이 없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