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20 교직원예배
그리스도의 일꾼의 감사제목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녹취자: 전병선
사도바울이 인생 말년에 자기의 걸어온 길을 회고하면서 이제 자신은 사라져가는 세대이고 떠오른 하나님의 새로운 세대의 종인 디모데에게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한다고 했는데 이 감사함이 사실은 우리 모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넘쳐야할 마음의 정입니다. 감사가 우리 모든 섬김의 동기가 되어야 한단 이런 뜻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때 감사함이 없으면 그 일을 해나간다면 일하는 과정에서 많이 상처를 남길 것이고 그걸 이끌어갈 수 있는 힘조차 없다면 결국은 그만두게 됩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제가 여러분들의 기질 중 기복이 심한 사람들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것들은 성화되어서 은혜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충성스러운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감사함이 우리의 마음에 넘쳐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함이 없으면 일을 못하거나 하면 많은 상처를 냅니다. 그러나 감사함이 넘치면 그 모든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합니다. 사람들을 수없이 함께 거느리며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직감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할 때 눈빛하나만을 봐도 저 사람 마음속에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을 하려고 하는 의지의 크기가 얼만큼인지를 거의 남김없이 측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 의지로 충만한 상태이면 그러게 기쁘고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시킨 일도 거두게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화) 제가 한 10년 전에도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노조운동을 하던 사람가운데 양아무개라고 유명한 운동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ㄷ공부했습니다. 중학교밖에 못나왔습니다. 노동자로 일평생을 살다가 신학을 했는데 그 사람을 인터뷰한 내용이 어느 잡지에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얘기가 자기는 하나님께 매일 기도한다고 합니다. 나는 공부고 짧고 하나님의 일을 할 줄도 모르고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크게 써달라고는 감히 기도도 못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맡기시는데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들이 있으면 안 하겠다는 사람 자꾸 조르지 마시고 자기를 써달라고 그렇게 기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감사는 은혜의 소산입니다. 누고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보면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불만하지 않는 것만 목표로 하지 말고 감사함이 넘치게 하십시오. 그래서 지도자들은 감사가 마음속에 푹 배어야 합니다.
저는 수많은 외국의 학자들을 만났지마는 릴릭 총장을 좋아하는데 처음에는 참 충격이었습니다. 와서 몇 시간 동안 교제를 하는데 무엇인가 내가 우리교회든지 아니면 선교든지 아니면 외국에서든지 뭔가 좋은 일이 있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면 이 사람은 언제나 두 손을 모으고 'Glory to God! Praise ye the Lord!' 이게 지어낸 마음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한 사람을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Praise ye the Lord!' 하나님을 찬송하도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게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게 진정한 칼빈주의자입니다. 칼빈주의자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이라고 말한다면 그 은혜의 합당한 최고의 반응은 감사입니다. 정말 감사하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감사의 이유인데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사도바울을 능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참 하나님이 나를 유능하게 하셨지.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지난 일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능하게 하셨구나.’ 사도바울이 사도로 살아가면서 일평생마음에 지녔던 컴플렉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느꼈던 컴플렉스였고 예레미야가 느꼈던 컴플렉스였습니다. 그것은 말을 잘 못하는 컴플렉스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일 말하기를 ‘나는 말에는 졸하나 능력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렇게 고백할 정도로 말에 능하지를 못했습니다. 신약을 연구하는 학자가운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유식한 사도바울이 쓴 편지보다는 뱃사람이던 베드로가 쓴 베드로 전후서가 수려한 명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지만 어쨌든 로마서신의 마지막에 보면 더디오라는 사람이 바울의 말하는 것을 구술했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사도바울이 일평생 가지고 있었던 컴플렉스가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었는데 어디 말뿐이었겠습니까? 그는 기독교 사역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감사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맨 처음에 목회를 시작할 때는 누가 뭘 못하면 참 힘이 들고 화가 났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제 와서 돌아보니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섬김의 과정이 하나님이 우리를 능하게 만들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참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해서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지도자를 믿고 기다려 줄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그 섬기는 과정을 통해서 때로는 불같은 시련과 치열한 연단 혹은 자기의 가지고 있는 못된 성품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드러나게 하시면서 기다리면서 그 사람을 바꾸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감사한 것은 바로 그렇게 무능하던 그 사람을 정말 유능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그를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감사의 제목은 하나님이 그를 충성되이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문맥으로만 보면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사도바울이 충성된 것을 보시고 직분을 맡기셨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게 사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충성되기는 커녕 하나님 앞에 반항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엎드러져 있던 사도바울에게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네게 나타난 일과 장차 나타날 일들의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로써 네게 이방인들의 빛으로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거룩한 기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택했노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충성된 것을 입증할 새도 없이 하나님이 그를 회심과 함께 사도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을 그런 시간적 순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충성되이 여긴 것이 직분을 맡기신 동기라기보다는 그가 이제껏 하나님 앞에 살아온 모든 삶이 사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충성스러운 삶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감히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충성스럽게 살았습니다. 입에 침이나 발라야지.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런데 감격했던데 뭐냐면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은 자기를 충성된 사람으로 간주하셨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며칠 전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이름 석 자를 밝히고 긴 편지도 아니고 열 줄 정도 되는 편지를 섰는데 온갖 좋은 말은 다 써서 자기가 내 책에 받은 감동을 적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냥 덮어두려다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답장을 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존 오웬이 죽을 때 말했던 것처럼 노예선 배 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젓는 노예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괴로운 일입니다. 좋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생긴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랬습니다.
어느 교구를 지역 심방을 갔더니 화분을 하나줬는데 화분 끝에 글씨를 매달았는데 ‘목자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랬습니다.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은혜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이 충성된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충성이라고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덧입혀주는 인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덧입혀주는 인정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가는 언제나 후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충성을 들여서 섬긴 사람들에게는 그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평가가 언제나 감당할 수없는 크고 높은 것이었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가는 언제나 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충성된 삶을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히 충성되게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매순간 나를 충성되게끔 인정해주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그렇게 중심을 들여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목양이 어떻게 감독이 되겠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게 감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 한분 앞에서 사도바울이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온 발걸음 을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것이 아주 많았지만 감사한 것은 그렇게 살아온 자신을 하나님이 충성되이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교회를 섬기다가 떠난 다음에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변함없이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겼구나.’하고 생각나는 사람, 그리워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충성이라는 말 그 자체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냐면 충성스럽게 살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일을 할 때에 자기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을 탐닉하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충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애들이 요새 새로 나온 게임에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고 테니스에 충성하고 계시군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초기교회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들어왔을 때 갓망건을 쓴 교인들이 와서 선교사님을 찾으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코트에서 나오니까 ‘아이고 선교사님 아랫것들 시키시지 힘들게 왜하십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충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충성은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든 안 밖의 시련이 있고 그런 속에서도 자기의 가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올곧은 사람들의 내적인 상태를 충성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제 생에의 여행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면 칼빈 500주년 기념으로 백 목사 부부와 유럽을 여행한 것이었습니다. 9일 동안 6500km를 달렸으니까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몸은 고단했는데 비텐베르그 루터의 유적지 앞에 갔을 때는 눈물이 안 났습니다. 그분은 내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혁명가로 살았습니다. 칼빈이 목회하던 삐에르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습니다. 칼빈은 일평생을 자기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해외집회를 두 번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제네바를 떠난 것이 두 번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예배당에 들어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삶. 루터 같은 혁명가도 아니었고 강력한 프리드리히 3세 같은 군주가 받쳐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일차로 추방되어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마틴 부처(Martin Bucer) 밑에서 견습생처럼 목회를 하다가 8년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샤돌레토(Jacopo Sadoleto)의 편지를 받고 기겁을 해서 제네바의 시의회가 칼빈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자기 요구조건을 모두 관철시키면서 제네바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추방될 때 설교했던 설교분무의 뒤를 이어 다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면 모든 제네바 시민들이 이사람 밖에 대안이 없었으니까 지도자처럼 떠받들며 그 목회에 복종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정말 치열한 시련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서른한 가지 질병에 시달렸고 돌아다니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적인 성격에 그 야비한 대적자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그런 모든 시련들이 있는데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고 걸어가는 삶. 이게 충성된 삶입니다. 즐겁게 목회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련 속에서 그렇게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항 하면서 가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오전하게 하려고 하면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거기서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이냐면 충성된 사람들에게 그것을 맡기면 반드시 그것을 극복을 합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면서 물길을 막으면 기다렸다 모여서 넘어가고 옆으로 돌아서라고 흐르는 것처럼 충성된 사람은 결국은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리고 충성되지 않은 사람은 일이 안 되는 이유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보태면 이 충성은 일에 대한 집념이 아니라 자기를 불러주신 그리스도에 대하 사랑으로만 가능한 덕목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이 그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이 그에게 감사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이 직분은 화려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떠받듦을 받는 직분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옥에 갇힌 것도 이 직분대문이었습니다. 이 직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들의 노예가 되어 발을 씻기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자신의 직분을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이바지하는 한 지체로서의 직분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권위는 영적이고 신령한 권위이지만 이 권위의 행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세우는데 이바지되는 권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권위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과 어느 부분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권위는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온전케 하는데 쓰여져야 하는 권위이여야 하고 이 권위가 올바른 사람에게 주어지고 올바르게 행사되는 곳에는 철저한 복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많은 개신교회의 많은 무질서가 이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에 대한 존중심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 직분을 맡겼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어울려야 존중을 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바뀌는 것이고 그 직분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직분은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으로서의 권위와 존중심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계에 보면 나쁜 사람들이 가끔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힘이 셉니다. 결국은 부딪히고 싸우다가 교회가 분열이 됩니다. 그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나쁜 사람들도 조금 있으면 죽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다시 합치고 그다음에 나쁜 사람 나타나면 또 찢어질까요? 과연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런 것일까요? 잘못된 지도자가 교계에 부패한 부분이 있는데도 그 공동체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것에 동조해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참고 견디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케 하는 일을 위하여 이바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교회를 섬기면서 사람은 항상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직분에 대한 존중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존중심과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질서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직분을 맡겨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직분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종이 되라고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워 거기에 이바지하는 노예가 되라고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깊이 감사할 수 있었으니 이는 직분을 가진 자신의 위치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직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신 그 일의 목적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입니다.
(예화)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에이든 윌슨 토저가 자기의 책속에서 했던 그 비유가 생각이 나고 아주 오랫동안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어느 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천사 세 사람에게 하나씩 도구를 주셨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큰 홀을 주셔서 한 나라의 임금이 되어 다스리라 그랬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주판을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주셨고 세 번째 사람에게는 철모에다 막대기를 끼워서 똥 푸는 도구를 만들어 손에 쥐어주면서 ‘모 동네에 가서 너는 평생 똥을 퍼라.’ 그리고 세 천사가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더랍니다. 에이든 윌슨 토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세 사람이 내려올 때 다른 마음이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 나는 드디어 이 금홀로 사람을 다스리는 구나. 그렇다면 장사해서 돈이나 버는 장사치와 똥이나 푸는 저 천사와는 나는 구별된다.’라고 생각했겠냐는 말입니다. 이일의 존엄과 여광을 그것을 부여한 주체에게 있는 것이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이나 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려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다스리면 가장 비천한 일이 되고 똥을 퍼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모퉁이를 하나님을 위해 정화하면 거룩한 성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직분 자체에 있는 영광을 너무 탐닉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부패한 성품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에게 이 직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은혜 받은 성도에게는 존경을 받았고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사도바울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 싶을 정도로 존경과 감사를 표했지만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고 짓밟힘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 존귀하고 미천한 일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자기 같은 사람을 통해 섬김을 받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되게 사십시오. 나머지는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충성되게 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 인생을 결코 허무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예화) 마지막으로 은혜로운 간증하나를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방배동에 살 때 그 옆에 맹인 목사님이 하는 2층 교회가 있었습니다. 맹인으로 안마사 일을 하다가 은혜를 받고 회심을 해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잘 하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모님이 같이 학교 모시고 다니면서 노트필기도 해드리고 했는데 그 교회가 윌 옆에 있어서 우리는 그 교회에서 기도를 참 많이 했고 특히 곤고하고 어려울 때 거기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찢어질듯 가난한 시기에 분유살 돈은 없는데 우리아들은 어찌나 많이 먹는지 그게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집사람이 기도를 좀 하려고 하면 애가 부산을 떠니까 그때 우리 애를 자기조카처럼 그렇게 따뜻하게 돌봐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건강이 매우 안 좋고 공부도 그렇게 많이 못했습니다. 맹인목사님 사모님이 언니입니다. 언니네 집에 와서 언니를 도와주면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거기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건강도 매우 안 좋아서 매일 늘 약을 먹고 그랬습니다. 그때 그 자매를 보면서 저 자매의 인생이 활짝 필 것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불행해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에게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스럽습니다. 기도하고. 그러더니 얼마 전에 소식을 들었는데 정말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서 얼굴도 미모도 별로 없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좋은 형제를 만나서 아주 집안도 좋고 신앙 좋은 가정으로 시집을 가서 남편이 교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되게 살아가는데 시집가서 낳은 아니가 벌써 스물둘, 셋이 됐다고 하니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다 말씀드릴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그 자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산 사람들에게 언제나 끝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한번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을 주님의 일꾼으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혀 충성스럽지 않은데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기쁨을 주셔서 섬길 곳이 있게 하시고 여기서 주님의 교회를 온전케 하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심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며 섬겨야겠다는 믿음이 생겨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