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1)
녹취자 : 조원정
우리 목회에 있어서 회심에 있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회심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목회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중생하고 회심하지 않았어도 교회생활이 익숙해진 사람들을 가리켜서 길들여진 짐승이라고 하였습니다. 야수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잘 길들여진 이런 상태라는 이야깁니다. 우리에게는 용기가 필요한데 용기가 뭐냐 하면 목회의 본질에 도전해야겠다고 하는 그런 종류의 용기입니다. 사람들이 알면서도 잘 못하는 이유는 주변의 환경이나 여건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이 어떤 본질적인 것들을 경험하고 겪으면서 그것을 해야 되겠다는 강한 의지나 결심이 생기는 것이지 목회자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는 그 본질에 충실해야겠다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목회를 본질적으로 도전을 한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성공이 보장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반대로 본질을 떠나서 세속적으로 하면 반드시 성공합니까? 지난 시간에 조엘 오스틴 이야기도 드렸지만 아주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이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 사역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사역도 번성하고 우리의 신앙도 성공하면 최고일 것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사역도 쭈그러들고 우리 신앙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좀 더 본질적인 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을 해 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목회자의 삶의 전 과정은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과정인데 우리가 비록 열심히 본질을 따라서 산다고 해서 모두 엄청난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자기의 신앙과 목회사역이 일치가 되어서 사역을 한다면 최소한 신앙을 팔지는 않습니다.
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하늘에 모두 밝은 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밝은 별도 있고 흐린 별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별마다 영광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릇도 은그릇도 있고 금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듯이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받은바 능력, 재능, 우리가 태어난 시대가 각각 다르니까 서로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떻겠습니까?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고 만약에 한 달란트를 받아도 한 달란트를 잘해서 남겼다면 그 사람도 똑같이 주인으로부터 잘했구나,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주인은 그렇게 인정해주지만 세상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일단 성공하고 봐야지 인정을 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처음부터 목회 사역에 들어설 때 성공하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고 괄목할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이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보면 마음이 편안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저는 21년 전에 7명이서 교회를 개척해서 오늘날 까지 왔는데 저도 게으르지 않고 천성 자체가 게으른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부지런히 달려왔는데 저는 목회하면서 한번도, 신학교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졸업을 한 후에 목회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이고 주위에 있는 동역자들을 경쟁상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사랑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나의 갈 길을 가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위에 큰 교회들이 있고 해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바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우리들이 본질에 접근할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고 내가 하는 이 일이 세상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고 할지라도 몸부림치면서 살아온 그 흔적이라면 충분하지 않느냐 그런 생각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교회에서 인턴쉽을 하는데 목사 되기 직전의 사람들을 한 학기 정도 모아놓고 월요일 마다 훈련을 하는데 아침 시간에 한 시간 반 정도는 항상 제가 합니다. 오늘도 열여덟 명 정도 모여서 책을 한권씩 읽고 와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책을 읽다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에 대해서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 어떤 인상을 갖고 있는지 아십니까? 같은 책이라도 목사님이 썼다고 하면 안 읽는답니다. 제가 주기도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한 달 정도 아주 최선을 다해서 썼고 제가 쓴 책이 60권정도 되는데 두고두고 남겨두고 싶은 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다른 책에 비해 많이 팔리지 않습니다. 9쇄 정도 했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은 이런 책을 안삽니다. 왜 안 사는지 압니까? 왜 안 사는지 물었더니 목사님이 써서 안 삽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김남준 썼음’ 하면 독자들의 생각이 어렵고 읽기 짜증나고 힘들다고 생각을 한답니다. 안 그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95년부터 책을 쓰기 시작해서 여태까지 200만권 정도 찍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후회하지 않는 것이 그 후에 제가 끊임없이 탐구하고 공부하고 발전하면서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이야기해야지 마음에 없는 것을 이야기하면 자기 자신에게 만족이 없습니다.
계속 저는 공부를 하고 학문을 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갔고 독자들은 계속 쉬운 책만 읽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얘기했습니다. 목사는 요리사가 아니라 의사이다. 목사님 책은 아무리 읽어도 금방 써 먹을 수 없습니다. 이번 주에 읽고 당장 다음 주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 담겨있어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 너무 어렵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읽어야 하고 이런 것들을 독자들이 피곤하게 생각을 하고 쇼파 같은 데에 기대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는 요리사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먹고 싶다는 데로 주어서는 아니 되고 전문가인 의사가 오늘날의 이 병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치료하기 위하여 무엇을 주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그런 목회의 본질에 접근한다고 할 때 제일 먼저 염려해 두어야 할 것이 회심입니다. 회심이 없으면 절대로 그 사람은 목회가 안 됩니다. 목회가 안 되니까 인간관계로 그 사람을 묶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목자와 양의 관계 속에서 오는 영적인 그러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면 되는데 왜 안 합니까?
(예화) 한 15년 전에 충청도 쪽에 커다란 집회를 내려갔습니다. 천명 모아놓고 집회를 하는데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데 연세 드신 목사님이 저를 배웅한다고 따라오셨습니다. 왜 오늘날은 사람들이 모이면 근거도 없이 이 사람들이 모두 신실한 그리스도인일거라고 생각을 합니까? 이중에 태반이 하나님 못 만난 사람입니다. 불신자라고 생각을 하고 설교를 해서 이 사람들이 회개하고 거듭나도록 해야 되는데 왜 그렇게 본질적인 것을 도전을 안 합니까? 그랬더니 연세 드신 목사님이 그러십니다. 목사님 그걸 누가 모릅니까? 머릿속으로 모두 알아도 그것을 어떻게 도전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도 잘 모르고 두 번째는 방법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도전할 수 있는 힘이 모자라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시간과 다음 시간에 걸쳐서 들려드릴 강의는 바로 그러면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해서 목회자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어떤 생각을 정리해야지만 이 본질적인 것에 우리들이 도전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오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여러분에게 모두 강의안을 나눠드렸는데 첫 페이지를 넘기시면 성경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본문 나옵니다.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이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레 24:1-4)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짓는 규례와 어떻게 등불을 켜고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 그것을 가리키는 내용들이 이 안에 나옵니다. 첫 페이지를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에서 당신을 섬기는 규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던 성막은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창문도 없이 해달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든 텐트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지나 바람과 비를 맞으며 성막의 겉모습은 아름다울 것이 없는 빛깔이 되었습니다. 성막의 크기는 약 열여덟 평이었고 직사각형으로 된 열여덟 평 정도의 직사각형으로 된 방이 둘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 방이 열두 평정도 되었고 작은 방이 여섯 평정도 되었습니다. 열두 평 자리를 성소라고 불렀고 여섯 평 자리를 지성소라고 부르고 둘 사이에는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교대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였고 지성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차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성막 밖으로 오는 모든 빛은 철저히 차단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성막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불빛이 필요했습니다. 등잔불을 어떻게 밝히고 유지해야 할지 가르쳐 주었으며 아론에게 주어진 특별한 임무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과 같이 목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때에 임무를 보여주는 지침입니다.
제사장과 오늘날의 목회자 성전과 교회 사이에는 신학적으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성취하심으로 성막과 성전 제사장들을 통해 예표하던 바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혁자들은 만민의 제사장이 된다는 교리를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교회의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보다 큰 의무와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의 지적같이 목회자로 서명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그 이상의 사람입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메리데스 클라인에 말한 바에 비추어 볼 때 성소적 소명이 목회자에게 특별히 주어졌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화목하게 된 자들의 새 언약 공동체가 이루어졌는데 목회자가 이 언약백성을 재창조하도록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분량과 종류에 있어서 많은 사역들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 외에도 다변화된 사회에서 선교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있습니다. 산업화 이후에 퍼진 경쟁과 성장 위주의 목회 방식들은 더 많은 일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예배 공동체가 아닙니다. 역동적인 선교를 위해 새 정책을 수립하고 조직을 모으고 사람들을 모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하고 이것을 분배하고 사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도 예전에는 가정의 몫이었으나 대부분이 교회에 위탁되었고 이를 위해서 교회는 더 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배를 중심으로 진리를 깨닫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신앙을 특징으로 삼았던 교회들은 교인들이 현대 사회에서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종교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넘치는 프로그램과 행사들은 이러한 선교 상황의 요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바빠지고 목회자들은 더 많이 일하지만 신앙의 깊이는 얕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극지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빙하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우리에게 촉구한 강력한 촉구는 아직도 유효한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성막의 등불에 관한 규례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제도를 가르쳐 주셨을 때 그것은 창문이 없는 구조였습니다. 성막을 만들 때 창문을 몇 개 내서 빛을 들어오게 하시지 왜 지붕을 가죽으로 덮어서 일체의 빛이 없는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까?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하나님 섬기기 위해 빛이 필요했고 빛이 아니면 어떠한 섬김도 주님께 올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는 진리의 빛으로 섬겨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 빛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운영해 감에 있어 세상의 상식이나 이성의 논리에 도움을 받기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신앙의 규범들은 오직 진리의 빛으로만 얻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캄캄하게 어두운 장막 안에 등불이 켜집니다. 밖에서 볼 때 거무칙칙해 보였고 우리의 눈길을 끌만한 아무 아름다운 것이 없었겠지만 막상 성막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온갖 색실로 곱게 꼰 휘장들이 있고 아름다운 기구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등잔 불빛이 비췰 때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햇빛이 아니라 이 등잔불의 빛으로만 제사장들이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빛으로 이것을 비추어 당신을 섬기게 하지 않고 규례를 따라 만들어진 등잔불을 통해서만 이것을 비추어 당신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진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예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보다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다면 진리는 하나님 자신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워 양떼들을 목양 받게 하신 목적은 목회 사역을 통해 성도들에게 진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선한 의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죄인이 참으로 그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가 순수한 말씀을 전하고자 애썼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앞에서 말하노라. 진리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는 교훈, 그것을 따라 믿을 수 있는 규칙의 형태로 이 진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계명입니다.
목회는 바로 이것을 탐구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진리의 빛으로 가득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진리를 탐구할 뿐만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고 자신이 그 진리에 합치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경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찬란한 등불이 빛이 비췰 때 캄캄하던 성소에 온갖 아름다운 기구들과 내부에 장식들이 화려하게 드러났던 것처럼 목회자에 의해 밝혀진 진리는 교회를 밝게 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 진리를 몰랐을 적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과 그리스도, 교회와 하나님의 성품에 아름다움에 대한 충만한 지식을 갖게 하고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목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어거스틴이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목회는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던 사람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두 번째로는 수시로 그 사람이 심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하나님 사람으로 불붙게 만들어 줘야 되는데 그것은 단순한 섬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을 때에 그 마음이 뜨거워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진리의 참된 말씀이 없이 사람들을 뜨겁게 하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1990년대 후반에 있었던 토론토 블레싱을 기억할 것입니다. 존님버, 아노트, 이런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던 운동입니다. 1995년도에 정말 어마어마한 부흥이 일어났다고 해서 제가 일부러 캐나다를 갔습니다. 가서 정말 실망했습니다. 평일 날이었는데 제가 갔을 때 그날 온 사람들만 이십 몇 개국에서 왔습니다. 아노트 목사님은 없고 다른 사역자들이 인도하는데 말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마지막에 막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워 가지고 와서 한국에 와서 사람들을 막 쓰러트리고 그랬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고 후에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 같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기어 다니면서 막 짐승 소리를 내고 이랬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참된 진리의 말씀 없이 사람들을 뜨겁게 하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항상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목회자들이 자기 인식에 있어서 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도 그렇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 본질적인 것에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결국은 본질적인 것에 승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말씀에 마음이 뒤흔들리면 그것을 설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도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피상적으로 진리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없고 피상적인 목회사역으로는 하나님의 지혜의 아름다움과 경륜의 탁월함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성품이 시행되는 탁월한 방식을 깨닫게 함으로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진정한 예배자가 되게 하는 것이 목회 사역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둘째로 진리의 빛으로 교회를 밝혀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며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는 진리입니다. 본질에 충실하게 섬겨본 목회자들만이 그 직무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지를 압니다. 그는 천사도 알고 싶어 하는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사역을 자신에게 맡기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회 사역을 일로 여기는 사람들은 성취하는 경험의 이상을 즐길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신적 경륜의 성취로 여기는 사람은 복음 사역을 통해 창조와 구속, 완성의 경륜을 이루어 가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와 설교, 심방, 교육, 교회운영과 치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목적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찬란한 태양빛을 받은 구슬들이 각기 찬란한 빛깔을 드러내듯이 모든 섬김들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찬란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다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호세아서를 보면 여로보암 시대 때 쓰였는데 4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기 때문에 망한다. 이스라엘이 지식을 버렸으니까 나 여호와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얘기하는 지식이라는 것은 히브리말로 ‘다트’라는 말인데 ‘야다’라는 동사에서 나옵니다. ‘야다’라는 동사가 제일 처음에 쓰여진 데가 어디냐 하면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 가인을 낳았다고 할 때에 동침하다는 단어로 사용이 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경험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신학 공부를 통해서 쌓여지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함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졌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신학적으로 속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 공의, 거룩하심,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그런 사랑이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것을 가리켜서 속성의 시행방식이라고 합니다. 그 두 가지에 대한 앎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목회 사역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성도가 처음에는 하나님을 요만큼 알았었는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커져야 되는 것입니다. 커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지식으로 알고 경험하고 두 번째 그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인생 속에서 시행이 되는지 그것을 경험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을 통해서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모든 인간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시지 허공에서 홀로 하나님이 그 일을 하지 않습니다.
좀 더 설명을 드리자면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긍휼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려면 비참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데 비참한 사람이 있습니다. 비참한 사람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십니다. 이 사람은 죄인입니다. 잘못했습니다. 계속 공의로 밟아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괘씸하긴 했지만 그렇게 비참한 몰골로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마음으로 자식을 끌어안듯이 이 비참한 인간을 향해 하나님이 당신의 긍휼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교만하고 죄지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비참한 사람을 필요로 하고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시고 사도 바울이 내가 자랑할 것이 있으면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했는데 약한 것이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약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나와 함께 해주셨다. 결과적으로는 나의 능력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닌데 내가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기회로 삼아주셨으니까 나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얘깁니다.
그것을 목회적으로 핵심적으로 집약을 하면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줘야 합니다. 그리고 재미없게 가르쳐 주면 안 됩니다. 재미라고 하는 것은 신나게 가르쳐 준다는 뜻이 아니라 생생하게, 예를 들자면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스포츠고 드라마고 다 때려치우고 오직 세월호 사건에다 다이얼을 맞추고 라디오를 듣고 텔레비전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세월호와 상관없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타서 간신히 구조 받고 병원에 있는 사람과 어떠했는지 인터뷰를 하는 것입니다. 몇 시쯤 되었는데 물이 확 들어오고, 그 사람은 신나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들은 아주 심각하게 실감나게 듣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모여서 호랑이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나오더니 호랑이는 밤에만 나타납니다. 묘사를 얼마나 그림같이 하는데 밤에 나타나고 호랑이는 언덕위에 항상 있고 옆에는 대나무가 있고 호랑이는 두발을 앞으로 내밀고 하늘에는 달이 떠있고 그 이야기를 하는데 이발소에 걸려 있는 그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하품을 하고 잡니다. 묘사는 실감나는데 자기네들이 이발소에서 늘 보던 그림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연사가 올라와서 1951년 10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태백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호랑이 이야기도 안 나왔는데 사람들이 침을 삼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직접 만나서 죽을 뻔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가 이발소 그림을 본 것 같은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렇게 말끔하게 설교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재미라는 것이 엔터테이먼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저 사람이 지금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저것이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뼈 사이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정학하게 보여주고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지식으로 전달 될 때 마음속에서 커다란 감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정말 하나님을 몰랐구나! 그런 놀라운 사랑을 가진 하나님을 내가 불신하며 살았구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데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구나! 이런 감동이 밀려올 때 사람들이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지식을 성령님이 사용할 때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누가 나에게 목회가 뭐냐고 물으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예배를 통해서 전하는 이 설교 안에서 그려지고 있는 하나님이 예쁘지 않습니다. 희미하거나 아니면 전달되기는 전달되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전달하는 목회자 자신이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 깊이 감동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요새 건강식품을 선전하는 선전의 유형이 먹어보고 써 본 사람의 간증을 신문에 막 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더해주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나와 가지고 분자표를 만들어 가지고 이건 좋은 거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뒷집에 순이 엄마, 앞집에 똘이 아빠가 그것을 먹고 비실비실하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소비자에게는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제가 한번 도전해 볼 테니까 들어보십시오. 최근에 성경을 읽으면서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 이진리가 여기에 있구나! 설교는 잔인한 것입니다. 제가 20년 목회해 보니까 설교는 우선 기본적인 것이 목회자는 부지런히 공부해야 됩니다. 두 군데가 달아야 하는데 무릎은 기도하고 팔꿈치는 책상에 붙이고 있어야 합니다. 일주일이 되어도 설교시간 외에 한 시간도 책상에 안 앉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목사 아닙니다. 그러니까 뻥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하면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진실한 목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는 것 없이 진실해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매순간 모른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황당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도 영혼을 가진 사람인데 자기가 말씀의 은혜를 못 받는데 자기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치열하게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고 다음에는 성경을 읽으면서, 공부를 해도 어느 순간 설교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하고 성장하고자 할 때에는 하나님이 설교자라고 하는 사람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으시면서 설교의 세계가 상승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일생을 예수만을 위해 살았는데 마지막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 역에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살아있는 설교를 하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자로서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훌륭한 설교 청취자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경을 통해서, 그 속에서 자기가 깊이 찢어지는 경험을 할 때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와 함께 조직해 내어서 그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설교를 할 때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설교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입니다.
솔직히 목회자가 설교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누구 말대로 약 파는 것인데 신약과 구약,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객관적으로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그것들이 자기를 찢으면서 자기를 바꿔 놓은 말씀으로서 설교되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면서 자기가 무너지고 깨어지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살아있는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설교의 본질적인 도전을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뛰어난 학자일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행정에 능한 사람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중들보다 뛰어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는 목회자일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근거를 둔 체계적인 사상과 설교로서만이 아니라 지식 안에서 그 지식과 함께 지식에 의해서 살아가는 인격과 삶으로서 판가름 나는 것이 목회 사역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 목회 사역은 진리의 빛으로서 수행되어야 합니다.
현대정신은 절대적인 진리와 도덕적인 규범을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인간을 자기를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행복을 최고의 가치라고 여길 뿐만 아니라 자기를 신처럼 여기는 시대입니다. 성경 계시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신앙대신 이성을 계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모든 비인간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져야할 인간의 죄는 부적응이나 환경적인 결핍으로 이해되고 오늘날 죄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전부다 상처가 어떻고 저렇고 치유가 어떻고 저렇고 그럽니다. 사실은 신학적으로 심각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아주 명료한 인간관으로 돌아가야지만 기독론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토드 빌링스라고 하는 분이 책을 한권 썼는데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런 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거기서 오늘날의 시대를 MTDA라고 불렀습니다. 도덕적이고 치유적인 이신론 시대라고 한 것입니다. 이신론은 여러분 신학교에서 배웠으니 알 것입니다. 이신론은 계몽주의 이후에 뉴튼과 데카르트, 칸트,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인간의 이성이야말로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판단에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는 계몽주의 사상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다시 말해서 세계가 그들이 보기에는 과학적이고 기계론적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기독교 신앙과 이것을 어떻게 조화를 시킬 수 있겠는가를 고민을 하다가 만들어 낸 것이 이신론입니다. 이신론은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법칙을 창조해 놓으셔서 그 법칙을 따라 모든 세계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법칙을 초월해 계십니다. 초월해 계시기만 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가 없고 우리는 법칙에 굴복하며 살아야 하니까 그냥 보통 때는 살다가 너무 어려운 일을 당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사건을 해결해 주신 다음에 다시 위로 올라가십니다.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신관 자체가 인간의 자기 치유적인 신입니다.
매순간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든지 성령으로 우리와 충만하셔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이끌고 인도해 주신다든지 이런 것들은 계몽주의 시대 이전에 벗어나지 못한 미신적인 신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디트리 본훼퍼 같은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미성숙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개입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성숙해서 인간들이 훈련된 시대이기 때문에 이제는 자율적으로 살아가게끔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본훼퍼 같은 사람이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거슬러 올라가면 르네상스 시대 때 그 이전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 시대 때 르크라티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피코 미란돌라 같은 사람이 유명한 자료인데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이라고 하는 유명한 자료입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보면 찾을 수 있습니다. 읽어보면 완전히 사고방식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아담아 내가 너를 지었다. 인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을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한 것이지 너희들의 운명이라든지 앞으로의 계획 같은 그런 것은 나에게 없다. 너희들이 이제 나로부터 창조되었으니 소신껏 너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이런 인간관입니다.
그런 것들이 오늘날 현대주의에 교훈적인 토대가 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자주 쓰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왜 안 되는데, 이런 말인데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왜? 왜 안 되는데, 이혼하면 안 돼? 왜? 왜 안 되는데, 동성애 하면 안 돼?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그런 어떤 것들을 감추고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닙니다. 심지어 이렇게도 묻는 것입니다. 엄마하고 결혼하면 안 될까? 에구 말도 안 돼. 당신이 말도 안 된다고 하는 근거가 뭐야?
피터징거라고 하는 미국의 학자는 짐승과 사람의 결혼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저변에 뭐가 깔려 있는가 하면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예전에는 희미하게나마 있었습니다. 인륜, 천륜, 어쩌고저쩌고 얘기합니다. 공통 도덕 감각 상실 얘기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초 자체를 다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지난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현대인들이 무슨 사고 속에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jtbc에서 저도 사실 너무 바쁘니까 다 못보고 몇 번만 보다가 말았는데 절찬리에 상영되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그런 드라마 속에 현대인들의 사고가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드라마 중에 밀회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20세 먹은 제자와 선생인가 사모님인가 어쨌든 김희애가 나옵니다. 20년 나이 차이로 사랑하는 사이로 엄청나게 인기를 끄는 것입니다. 이유는 뭐냐 하면 너무 아름답다. 그것이 옳다 그르다는 문제가 안 됩니다. 아름다우면 됐어 오케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데 막 빠지고 매료되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데 매료되는지를 모릅니다. 사상계 속에서 거대한 조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바타 같은 영화가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히트를 치는 것입니까? 그런 속에서 그런 코드들이 쭉 심어져 있는 것입니다. 너무 바쁘니까 저도 못 가는데 노력을 많이 합니다. 영화관에 가서 볼 때는 항상 입을 헤 벌리고 침을 흘리면서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고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는 좀 떨어져서 저 속에 도대체 뭐가 있는 것인가? 이렇게 현대인들이 미친 듯이 감칠맛을 느끼면서 저렇게 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보면 코드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 코드는 전에는 도덕적인 것을 감추고 이랬다면 이제는 뿌리를 공격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뿌리를 잘라 버립니다. 뭐가 문제인데? 왜 안 되는데? 이겁니다. 결혼을 왜 해야 되는데? 자식을 왜 낳아야 되는데? 다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목회가 기독교 선교가 너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불교는 좀 낫습니다. 불교는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생각 자체가 상대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노장사상, 노장사상이 그렇게 인기를 끄는 것입니다. 재밌는 얘기 해 드리겠습니다. 백지를 하나 펴놓고 동그란 원을 그립니다. 중심은 몇 군데입니까? 한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닥에 깔린 종이가 아니라 공을 하나 갖다 주고 중심을 찍어보라 합니다. 몇 군데입니까? 그 표면에 아무데나 찍으면 중심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현대사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카톨릭은 아주 눈치가 빠릅니다. 이미 벌써 이런 문제를 가지고 1900년대 초부터 고민을 시작을 합니다. 이미 1950년 60년 들어서면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전 까지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절과 카톨릭 교회가 부처님 태어나신 것 축하합니다. 예수님 오신 것 축하합니다. 서로 현수막을 나누어 걸고 하는 것들은 다 70년대 이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구라파에서 한국까지 넘어오기 까지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지금은 다원주의 쪽으로 흘러갑니다. 이번에 동성애도 간신히 부결되었습니다. 저거 금방 넘어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성의 한 유형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그것을 고수를 하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뭘 잘못한다고 욕을 많이 먹지만 모든 종교 중에 개신교만 타락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안합니다.
제가 오늘 한 책을 읽었더니 미국에서 지금부터 한 십년 전에 카톨릭 교회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이런 타이틀로 뉴욕 타임지에 실렸습니다. 미국에서 사제들의 성추행으로 배상한 돈이 오천 억입니다. 교구 하나는 교구 전체가 차압이 붙어서 경매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개신교만 유난히 그럽니까? 현대사상과 너무나 안 맞는 길을 고수하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도 많이 있지만 그것까지도 함께 겹친 것입니다. 굉장히 기분 나쁜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모든 것들이 상대주의화 되어 가는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의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날의 교회에서 회심과 중생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사라지는 이유도 결국 상대주의 적인 것들이 확 밀려오는 자체를 사실은 지성도 부족하고 확신도 부족한 목회자들이 지탱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주 깡다구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확고한 지식의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양보할 수 없는 사상이 됐든지 하는 사람 외에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질에 승부를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이 없는 것입니다. 회심이 없으면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라고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들이 이안에 가득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까? 정말 너무너무 어려운 시대에서 우리가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10년 20년 지나가고 나면 더 심각해진 상황이 될 거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제가 안타까워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너희는 때를 알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때가 뭐냐 하면 시대의 사조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알고 더 목회의 본질적인 것으로 들어가서 알기 때문에 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지만 본질에 워낙 확고하기 때문에 본질에 대한 양보는 없는 죽든지 살던지 목회에서 결판을 내려고 하는 거룩한 큰 희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쪽으로도 밀리고 저쪽으로도 밀리는 것입니다.
후배들이 교회를 개척하는데 거의 안 됩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보셔서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옛날에 개척하신 분들이 나은 것입니다. 지금 막 개척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선교적으로 상황도 매우 나빠져서 교회가 여러 가지 덕을 못 세우니까 전도하라고 하면 예전에는 다음에 갈게요 이러는데 이제는 막 욕설을 퍼붓습니다. 이런 시대가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절대 행복한가 하면 절대 안 그렇습니다. 너무 곤고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자살들, 예전에는 생계를 비관한 자살이 많았는데 요즘 좀 뜸한데 연예인들이 꼬리를 물었던 자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얼마나 현대인이 황폐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목회자가 어떻게 보면 이것이 위기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정말 참된 신앙들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확고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영적인 지적인 토양들을 제공해 주고 이 사람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잘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그리고 그것을 인격화해서 육화한 목회자 자신의 삶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