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2)
녹취자: 김경애
18페이지를 계속 보겠습니다. 이 목회사역은 진리의 빛으로써 수행되어야합니다. 현대정신은 절대적 진리와 도덕적 규범을 거부하는 시대입니다. 19페이지로 건너가서 이것은 바로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진리의 빛 대신 세상의 정신의 빛으로 교인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와 개혁교리들은 이미 현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종교적 독선이나 유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18세기 독일 교회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복음적인 생명력을 잃어가고 이성주의가 득세하자 살아있는 신앙, 새로운 삶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경건주의가 태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합리주의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 사상을 추종하는 태도는 결국 설교단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독일교회 안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설교들이 강단에서 설교되었습니다. 주일에 설교되는 설교제목입니다. ‘하나의 음료로써의 커피의 가치’,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말할 수 없는 축복’, ‘가축들을 축사에서 먹이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더 좋음’, 이외에도 예수님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설교의 소재로 삼거나 부활절을 앞두고는 사람이 생매장 당하는 것의 위험이라는 설교제목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이러한 설교가 선포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사실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역사와 함께 계시로 전달되었습니다. 이것들을 합리주의로 재보니 사실을 입증할 만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의 복음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모두 거부해버렸고 그러자 마지막에 남은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좋은 교사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
셋째로 진리를 탐구해야할 목회자의 사명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도록 부름 받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보냄 받은 사람이 있으니 요한이라 증거하러 왔으니 빛에 대해 증거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온 자라.’ 목회자는 진리의 빛을 증거함으로써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은 온전한 성도가 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진리의 빛으로 사역을 하는 것은 어떤 영광보다 탁월한 것이며 이 일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힘써야합니다.
성경과 학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첫째 성경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첫째로 기록된 진리를 잘 믿는 것입니다. 신학하면서 잘 믿으려는 경향은 잘 추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은 가장 중요시되어야합니다. 잘 믿는 것은 믿게 된 것을 부지런히 탐구하여 잘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믿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미 믿은 바를 알고자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신뢰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미 믿은 바를 앎으로써 지성적인 치밀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더 깊은 앎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학문행위가 아니라 신앙 고백적 행위입니다. 목회자가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야할 내용은 세상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살게 해주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발견한 지혜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도의 지혜의 핵심입니다. 목회자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좌우하는 지혜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직업도 목회자만큼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목회는 교인들의 영혼을 위해 진리를 베푸는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말씀의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사람이 아니면 권위는 허세이며 설교단에 입고 올라가는 가운은 유니폼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는 목회자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을 성경과 개혁자들 청교도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간 선지자들의 후예이며 신약성경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이다.’ 이처럼 목회자의 직무가 숭고하기 그지없는 탁월한 것이기에 그는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많은 책들의 사람이 되기 이전에 먼저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시절에 성경을 많이 읽고 진리를 발견하고 마음을 그 진리에 담그는 습관이 몸에 배이게 해야 합니다. 많은 책들의 사람이기 이전에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둘째로 신학과 학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학이 학문일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학은 학문일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이성적으로 자명한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신앙은 신앙적으로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학이 개별적인 사항들 예를 들어서 성경의 인물과 행적을 다루면서 규칙이나 교훈들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 오히려 진정한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가 논한 지식은 오직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식, 곧 구원하는 믿음을 말하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강하게 하는 지식들입니다. 아퀴나스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신학은 믿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학문을 자연이성의 빛으로 알게 되는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과 더 상위의 학문의 빛으로 알게 되는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으로 구분하면서 신학이 바로 후자의 학문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신학은 학문이다. 학문에는 두 종류가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첫째로 어떤 학문은 지성의 자연적 빛으로 인식하게 되는 원리로부터 시작하는데 산술, 기하 같은 종류의 학문이 그것이다. 둘째로 삼위하나님을 인식의 빛으로 인식하게 되는 원리로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광학은 기하학에서 세워진 원리에서 출발하며 음악은 산수가 지시한 원리로부터 시작하는 학문입니다. 신학은 이 두 번째 방식의 학문인데 상위학문의 빛 즉 하나님과 지복 자들에 관한 지식으로 알게 된 원리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음악이라는 학문은 산수가 지시하는 원리를 믿는 것같이 신학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된 원리들을 믿는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학문이란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추론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일차적으로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관점에서 본다할지라도 신학이 학문이 틀림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즉 성경의 진리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발견된 명제들은 연결을 이루며 지식을 전달함에 있어서 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종교를 통해 종교 안에서 획득한 지식을 체계화하고 전달하는 데는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지혜를 발견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여야하며 또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자기시대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성경뿐 아니라 다른 학문들도 공부해야합니다.
둘째로 성경을 믿고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열렬함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파수하고 전파하는 일은 견고한 신앙과 확고한 신학의 체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통해 잘 수행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다음 주일에 자료로 쓸 마음으로 공부하지 말고 헐벗은 산에 묘목을 심는 마음으로 신학과 필요한 모든 학문들을 공부해야합니다. 여러분은 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인내하고 싶을 때까지만 참는 것은 진정으로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대의 헌신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영혼의 움직임은 활발해지고 지성은 능력은 강화됩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는 여러분은 명심하십시오. 이 시기에는 덜 자고, 덜 놀고, 덜 먹고, 덜 쉬고 모든 시간과 마음을 신학과 학문을 연구하는 일에 쏟아야합니다.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로서 널리 알려졌던 요한 크리소스톰의 탁월한 설교의 영향력은 단지 타고난 탁월한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10대부터 치열하게 연마해온 수사학적 훈련과 성경에 대한 설교의 구조뿐 아니라 내용과 전달 면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황금의 청산유수로 알려진 동방교회의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오웬은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의 정치함과 청교도의 경건을 결합하여 영국뿐 아니라 대륙에까지 칼빈주의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습니다. 이 유능한 사람도 역시 10대 때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정도로 학문을 탐구하는 일에 열심히 헌신하였습니다. 학생시절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이 태만할까봐 걱정하던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습니다. 저는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저의 소홀함 때문에 쓸모없이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심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최대로 유익하게 사용하자.’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말년에 그리스도께로부터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사명은 그분께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7교회의 사자들에게 편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두루마리가 주어졌고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고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서나 땅 아래에서나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다.’ 이때 100세 가까이 되었던 늙은이 요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어린아이처럼 크게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사도 요한은 그가 두고 온 교회와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해고도에 유배된 자신의 외로운 처지 때문에 울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할 사명을 받았고 그 계시는 인간들이 알 수 없기에 큰 소리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어주신 것은 이렇게 통곡하며 매달리는 노 사도의 통렬한 울음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목회자는 이런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사모하여야합니다.
둘째로 성막 안에서 등불을 켜는데 사용된 감람유입니다. 성경에서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하고 기름은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을 예표 합니다. 이것은 목회사역에 있어서 순수한 성령의 역사와 철저한 자기 깨어짐의 필요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첫째로는 성령의 순수한 성령의 역사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성막을 밝히던 등잔불의 빛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진리와 지성을 예표 하는 것이라면 기름은 의심할 여지없이 은혜와 성령을 예표한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성경적인 경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교회에서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질 때 불건전한 신비주의의 이단들이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몇 해 전 나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방문했을 때 로버트 갓프리 마이클호튼 교수를 만나서 신학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설교라는 주제로 이어졌고 이어서 요즘 각광받고 있는 조엘 오스틴이라는 설교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조엘 오스틴의 신학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최근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중 어떤 사람은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평가하기를 영지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 현대번영주의의 합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엘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후기 영지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를 현대에 재현할 의지를 가지고 탐구하고 설교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를 비판하는 박식한 신학자들이 자신은 교회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해석해서 그의 설교에 옷을 입혀준 것입니다. 오스틴의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반문했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설교에 신학이 있습니까?’ 그러면서 나는 한마디로 이 모든 질문에 답했습니다. ‘만약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런데 또 우리나라 설교방송에서 이것을 막 다투어서 내보내고 참 걱정입니다. 보십시오. 순수한 진리의 선포가 사라지고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그치는 교회에서는 인본주의와 이교의 사상이 진리를 대신하고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성령의 은혜를 대신합니다. 참된 신앙의 힘은 지식과 경건의 결합에 있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면서도 경건을 함께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학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살기위한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이 순수한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등잔의 불빛은 열과 함께 비추며 등잔의 열은 불빛과 함께 방사됩니다. 한 성경을 믿고 같은 신앙을 배운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목회사역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성경, 같은 신학을 배워도 그것을 통하여 경험하는 하나님의 성품의 측면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신학뿐만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사람됨이 그 신학을 결정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그가 하는 신학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사랑의 신학을 할 것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아름다운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이 미학적 신학을 펼칠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칼빈과 주권사상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주권의 신학을 좋아할 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신학이 교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개혁신학의 대의들은 성경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에 심겨질 수 없습니다. 목회자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목회사역은 본질적으로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타락한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며 들을 귀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그가 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도는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람 곧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성막을 밝히는데 사용되었던 기름은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찧어낸’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까띠뜨’ 라는 단어입니다. ‘까띠뜨’는 ‘깨뜨리다’ ‘때리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 ‘까따뜨’의 수동분사 남성형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감람을 찧어낸 순수한 기름을’ 순결한 기름이라고 그랬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감람유를 먹기도 하고 상처에 바르기도 하고 제사에 쓰기도 하고 집에서 불도 밝히고 아주 다용도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올리브가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렇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름을 채취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둘입니다. 그것을 빻아서 프레스에 넣고 짭니다. 그러면 기름의 양은 많이 나오는 대신 세게 누르니까 찌꺼기가 함께 쏟아져 떨어집니다. 그러면 불을 붙일 때 그을음이 납니다. 그래서 그 다음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절구에 찧거나 연자 맷돌에 넣고 돌립니다. 양을 많이 넣고 돌리면 질척질척한 찌꺼기처럼 됩니다.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둡니다. 그것들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파여진 홈으로 기름이 서서히 모여서 흐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탁 탁 탁 올리브를 깨면 그냥 착즙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기름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기름을 건져내면 착즙을 하지 않았으니까 기름이 순순히 내려옵니다. 그러면 기름의 양은 많이 얻을 수 없지만 그것이 아주 순도 높은 기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기름으로 등불을 켜야지만 그을음이 나오지 않고 훨씬 더 밝은 빛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이 나쁜 등유를 쓰게 되면 그을음도 나오고 불이 밝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기름을 쓸수록 그을음이 나오지 않고 아주 빛이 밝게 비추게 됩니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찾아낸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오래되었는데 10년 전에 은혜를 받고 쓴 것인데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런 진리의 어떤 밝은 빛이 찬란하게 비추는 것은 진리 자체의 내용도 있어야겠지만 성령님이 역사해주셔서 이것들을 밝게 비추는데 그때 그 기름이 감람을 찧어낸 것인 것처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자신의 깨뜨려짐이 그 안에 있어야지만 그것이 진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정한 간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호와 증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변호는 어차피 자기도 현장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떤 이유로 그것을 변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은 뭐냐 하면 현장에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말씀을 전할 때 가장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그 말씀이 자신 속에 들어와서 요한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그러니까 먹습니다. 먹으니까 입에서는 참 단데 속에서는 쓰더라고 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즐거운 일일 수 있고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것은 유쾌한 일일 수 있지만 그 속에 들어가서 자신을 그 진리의 말씀에 합당하게 만드는 데는 많은 고통과 눈물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획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문제입니다. 설교에 시간과 마음을 다 쏟아야합니다. 그래서 잠잠한 교회당이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 깨어날 때 그때 목회자도 다시 말씀에 도전할 의욕이 생기게 되고 교인들도 그런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그렇게 사역을 해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야지만 본질적인 것에 도전할 수 있지 어디에 좋은 방법이 있다더라. 저기에 좋은 방법에 있다더라. 이렇게 해서 목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는 맞는 방법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다른 것들이 있으니까 방법을 찾지 말고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어떻게 도전할 것인 가하는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그 다음에 좀 더 보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람나무에서 열매의 기름을 추출하는 방법이 둘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감람나무 열매를 절구처럼 움푹 파인 돌에 놓고 찧거나 발로 밟아 기름을 추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이보다 더 큰 압착기 같은 것을 고안해서 감람나무 열매를 압착기로 눌러 기름을 추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양의 기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추출된 기름은 압착하는 과정에서 불순물도 함께 섞여 나와 성막을 밝히는 순결한 감람유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름은 등잔불을 켤 때 밝지 않을 뿐 아니라 검은 그을음까지 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회사역에 있어서 자기 깨어짐의 필요성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학 함이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는지를 보여줍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적용되기까지는 우리를 진리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고 또 살게 하지도 못합니다.
또 목회사역에 있어서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패스하려고하는 것입니다. 패스를 아십니까? 공을 받아서 던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좋은 이야기를 하면 받아서 던지는 것입니다. 자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생생한 생명력은 말씀이 자신 속에 들어와서 자신을 깨뜨리고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자신의 피와 자신의 땀과 눈물을 바르고 나올 때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잠깐 이야기했던 것이 일평생 설교준비 안하는 방법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말씀에 깊은 은혜를 받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면 그 자체가 설교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한 설교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기가 감동을 받고 잘 아는 것을 설교하는 것은 쉽습니다. 매일 전도하러 다니는 목사님께 전도설교를 하라고 하면 원고가 필요 없습니다. 매일 기도를 많이 하시는 목사님께 기도에 대해서 설교하라고 하면 원고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매일 말씀을 탐구하는 목사님보고 말씀을 탐구한 것에 대해서 설교를 하라고 하면 원고가 필요 없습니다. 왜? 마음속에 말씀이 가득 차 있으니까 말입니다. 안 하던 것을 하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자기가 기도를 한다고 계속 1년 365일 동안 기도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신앙이 종합적이니까 종합적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자기가 다 자신을 헌신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깊이만큼만 하나님의 말씀이 펼쳐져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것을 얼마나 유능하게 아주 장황하게 펼쳐내느냐? 소박하게 펼쳐내느냐? 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그러나 일단 기본적으로 이런 것입니다. 원리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식자재 자체가 워낙 신선하고 맛이 있으면 손을 대지 않고 그냥 요리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요리입니다. 예를 들어서 고기가 한우인데 너무 맛있습니다. 그러면 일체 손을 대지 말고 그냥 숯불에 구워서 질이 좋은 소금에 찍어먹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게 맛이 약간 가고 질깁니다. 그러면 연육제를 집어넣습니다. 누린내가 약간 나면 양념을 잔뜩 넣는 것입니다. 생선인데 도미 큰 것 펄떡펄떡 뛰는 것을 잡아왔습니다. 그러면 간단합니다. 요리가 필요 없습니다. 비늘을 깨끗이 뗀 다음에 한쪽은 생선회로 먹고 한쪽은 석쇠에 그대로 굽습니다. 그리고 질이 좋은 죽염을 찍어서 먹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생선 눈이 약간 불그스름합니다. 그러면 마늘, 고추 잔뜩 집어넣고 푹 끊여야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 고기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어느 날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성경을 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았습니다. 막 가슴이 뜨겁고 벅찹니다. 그런데 설교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맞는지 찾아봐야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책도 보고 주석도 보고 영어 성경도 보고 해서 딱 떴을 때 그것이 신선한 고기이고 신선한 생선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수많은 사람의 예화의 장단에 안 해도 됩니다. 가슴의 생생한 것을 떠서 올라가서 설교준비를 해서 충심으로 전달하면 말이 어눌해서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목사님이 정말 저 말씀에 은혜를 받았구나!’ 전해지는 것입니다.
목회를 저도 해보지만 사람은 계속해서 안 되면 스스로 안 되는 것에 적응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도전해야합니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하면 지금으로부터 교회가 세워지고 5년 정도 되었으니까 16년 정도 되었는데 매해 여름마다 교인들이 무교회 지역에 전도를 나갔습니다. 올해도 천여 명이 갔습니다. 가서 모두 교인들이 자비량으로 가서 시골교회가 있으면 교회에 진을 치고 한 이틀 동안 그 지역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전도해주는 것입니다. 한번은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을 갔습니다. 그곳은 저도 갔습니다. 어쨌든 15년 전 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는데 교회는 14명이 모이는데 온지는 6년이 되었다는데 목회사기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스물 댓 명이 모이는 교회에 와서 6년 동안 목회사역을 하다가 13~4명 남았으니까 그때 그분의 연세가 50대 중반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서 열심히 전도를 했더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동네사람들을 전도했는데 동네가 아주 완고한 시골동네 교회였습니다. 웬만해서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6개 마을이 있었고 가정수가 470가정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전도대원 14명이 내려가서 한집 한집을 다 심방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너무 싫어합니다. 빗자루를 집어던지고 삽을 내던지고 흙을 던지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가서 안마를 해주고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전도를 하니까 겉으로는 투덜대면서 가만히 있습니다. 계속 주물러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틀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였습니다. 일주일 만에 476가정을 다 복음을 전했고 누가 살고, 이름은 뭐고, 복음을 전했더니 어떤 반응이 있더라, 다 적어서 책을 만들어서 목사님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이 일주일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깊이 은혜를 받고 내가 정말 이렇게 목회를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면서 깊이 회개를 하고 은혜를 받은 후에 이분이 정말 제2의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전도대원 14명이 사흘 만에 심방할 수 있는 이 470가정 6개 마을을 나는 6년이나 있었는데 다 안돌았다며 회개를 하고 마지막 날 제가 설교를 했는데 한 70명, 80명이 모였습니다. 물론 시골이니까 대부분 노인데들이었습니다. 어쨌든 모여서 복음을 전하고 같이 저녁을 먹었습니다. 대개의 교회들은 한번 그렇게 해주고 나면 다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려서 다시 고무줄처럼 원위치로 갑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14명 모이는 교회에 가서 아주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희교회 설교를 계속 듣고 그분이 하나도 보탬이 없이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 14명의 교회가 100명이 되었습니다. 100명이 한번 되었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목사님이 한 3, 4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까지 그 목사님이 80명을 목회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당신 자신이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교인이 80명이 모여도 그래도 시골교회니까 가난했습니다. 저희 교회가 목사님 돌아가신 후에 사모님을 조금 도와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동적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 일이 있고나서 이분들이 목회를 새롭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 봉고를 2대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3시에 주일까지 포함해서 매일 새벽 3시에 두 대의 봉고를 한 대는 사모님이 한 대는 목사님이 몰고 도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노인네들이 새벽기도를 갈 수 없으니까 봉고로 돌아서 데리고 와서 그분들에게 같이 새벽예배를 드리고 기도해주고 데려다주는 것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65일 했습니다. 은퇴하실 때까지 했습니다. 정말 훌륭하신 분들입니다. 더 감동적인 것은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설교가 은혜를 받았다고 단숨에 변하겠습니까? 그래도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심방을 하고 그랬더니 이 노인네들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너희는 정말 나쁜 애들이다.’ ‘할머니 왜요?’ ‘그렇게 좋은 예수님이라면 왜 이제 왔느냐? 내가 좀 젊을 때 오지?’ 그렇게 해놓고 우리 교회 지체들이 전도하던 집과 연결을 맺어서 시골에 남은 노인네들과 양어머니를 삼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편지를 보내고 추석이 되면 내복도 보내고 가끔 일 년에 한번 정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오히려 안 옵니다. 자식보다 훨씬 낫습니다. 자식들은 전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시로 전화를 해서 ‘춥지는 않으세요? 보일러는 잘 들어와요?’ 물어보고 가서 보일러도 고쳐주고 그러니까 가을철이 되면 고추, 깨 이런 것을 바리바리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선교의 모델을 발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할머니한데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해서는 할머니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두 너무 외로운 것입니다. 자식들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자식들은 죽은 후에 땅이나 차지하러 올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 지원을 해주니까 그 교회에 대한 인상이 더 좋아지는 것입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인데 노인네들이 다 못 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예배시간을 늦추고 목사님이 봉고에 체인을 감고 할머니를 모시러 가는데 저기서 할머니 한분이 눈길에 엎드려져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왜 그러세요?’ 그러니까 신발에 새끼줄을 묶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세요?’ ‘목사님 내가 살면 얼마나 살고 내가 주일을 몇 번이나 지키겠어요?’ 주일날 교회에 가려고 그러는데 이렇게 힘이 없어서 언덕에서 계속 미끄러져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같이 울고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수천 명의 목회는 못했지만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으실 것이다. 너무너무 착하십니다. 그게 결국은 본질로 돌아가는 목회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모든 사람의 것은 아니지만 정말 진정한 마음으로 진리를 외치면 그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설교를 하는데 사람들이 듣지를 않아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한테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저기 열심히 듣고 있는 사람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열심히 듣는 사람을 보고 용기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은 이 진리는 네 것이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본질에 승부하면서 하면 그러면 최소한 우리의 심령은 깨끗해집니다. 그렇게 하다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인간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까?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배우는 모든 진리의 진정한 목표는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합치된 사람이 되고 그런 삶을 살아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신 목적을 실현하는데 기여함으로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그렇게 해야지만 말씀을 가장 올바로 효과적으로 전해 구원하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청교도는 말했습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성공하면 듣는 사람의 귀까지 이르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은 그 사람의 마음에까지 다다른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체험된 성경진리입니다. 사변적 지식으로서의 신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실천에까지 이르도록 질서지우는 힘으로써의 신학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진리의 힘은 목회자로 하나님 말씀에 의해 깨뜨려진 자로 전하는 말씀의 힘입니다. 한 사람이 성경을 대면할 때 그는 신학자나 목회자로서가 아니라 어린양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에 감화를 끼칠 때 두 가지 깨어짐을 경험합니다.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그때는 진리와 상관없이 욕망을 따라 살려는 자신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하는 그리스도를 향해 다시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깨닫고, 책 읽고 사색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고 죽고 정죄 받음으로다.’ 만약 우리가 대하는 개혁신학이 복음주의의 결점을 지적하는 용도 이상 아무것도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진학함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내용뿐 아니라 방식도 물려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의 철학이 아랑곳하지 않고 거룩한 확신에 넘치는 칼빈주의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거룩한 열정에 불붙은 신학은 어디서 옵니까? 주권을 설교할 때 뿐 아니라 인생을 거기에 맡기고 순종하는 칼빈주의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한 신학자의 사상을 배움으로써도 아닙니다. 그를 영적으로 변화시켰던 진리의 빛을 자신도 받으며 그 앞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뜨려지는 경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한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가장 탁월한 표지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경건한 신학을 하는 우리에게도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지식조차 거룩한 은혜의 물에 잠겨야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마음은 거칠고 메마른 땅과 같습니다. 파릇파릇한 경건의 싹은 기도하지 않는 마음의 밭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는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철학은 진리에 관해서 말하고 신학은 그것을 버려두지만 기도는 그것을 누리게 합니다. 치열한 지성의 탐구와 간절한 마음의 기도 안에서 지식과 경건은 결합되어야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면서 그분을 경외하는 삶을 배우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소명 없는 신학공부 안에서 체계적이지 않은 학업습관과 자유주의 신학에 스며들게 되면 그는 신학에 있어서 떡 대신 돌을, 생선대신 뱀을, 앎 대신 전갈을 받게 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스며들고 소명이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입학함으로 신학교는 예전과 같은 기도의 분위기를 유지하지 않습니다. 열렬한 기도는 치열한 신학의 탐구로 메마르기 쉬운 그의 마음과 신앙을 보호하고 북돋게 해주는 해독제입니다. 오웬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유일한 외적수단이자 하나뿐인 보고는 성경이지만 이 말씀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성경에 종속된 세 가지 수단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묵상하는 노력과 성도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말씀사역입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목회사역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 적용됨으로 밝히 비춰집니다. 이 계시의 책속에는 아름다운 빛들을 목회사역에 충만하게 드러내고 성도들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어디가든지 진리대로 살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회자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목회의 영광은 학문 때문에 박수와 갈채를 받는데 에 있지 않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목회자인 그의 영광은 자신의 온몸과 마음을 말씀에 바치고 성령 안에서 자신의 모든 삶을 태워 진리의 빛을 교회와 세상에 비추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과 외침으로써 그들을 빛이신 그리스도께 돌이켜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구속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목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은혜로써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성으로 진리를 알도록, 의지로써 진리를 따라 살고, 은혜를 통해 살아갈 힘을 얻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먼저 진리를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여야합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가신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는 바로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여 아름답게 하고 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 그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합치시켜 그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한 무지입니다. 목회자는 세상에 자신이 빛으로 살고 많은 양떼를 빛으로 나타나게 하기위하여 부름을 받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이 거룩한 직무를 진리의 빛과 성령의 불로 수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성경을 사랑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심령을 드려야합니다.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로써 성령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전한 한마디 설교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증언이 되기 위해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진리 앞에서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진실에 도달하기를 힘써야합니다. 우리가 만약 이렇게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갈대처럼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번영과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이바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마쳤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면 질문해주십시오.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질문1) WCC에 대해서 긍정적인 견해도 있고 부정적인 견해도 있는데
답변1) WCC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는 우선 두 가지가 고려되어야합니다. 우선 첫째는 자기가 거기에 서명을 하거나 가입을 하게 되면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대해서 승인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WCC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성령이 가르쳐주는 기독교의 내용과 합치하느냐를 먼저 고려해야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자기가 소속된 교파를 생각해야합니다. 내가 지금 감리교에 속했다. 장로교 합동 측에 속했다. 아니면 고신 측에 속했다. 그러면 내가 속한 교파는 역사적으로 어떤 신앙을 가져왔는가를 알고 그 스탠스가 WCC에서 추구하는 것과 상치되지는 않는지를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판단해야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각자 사람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견해에 따라서 입장이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다원주의적인 사고 자체를 아예 교단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WCC에 가입하는 것이 큰 어려움을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기독교신앙에 대해서 어떤 확고한 교리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WCC와는 화합할 수 없는 신학적인 거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경우에는 동참하기 어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2) 목회자가 기쁨으로 살아야하는데
답변2) 이런 것입니다. 목회자가 매일 기쁨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요즘에 보면 마땅히 그래야하지만 목회자가 현실적으로 항상 기쁘게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기쁘고 성령 충만할 때는 설교를 하고 안 좋을 때는 설교를 하지 않고 도망을 가도 된다면 그렇게 하겠는데 주일은 어김없이 돌아옵니다. 어느 가정에서 노모가 그러더랍니다. 아들을 자꾸 설득하면서 ‘주일인데 아들아 교회에 가자.’ ‘엄마 나 그 교회에 이제 안가.’ ‘그래도 가자 다른 교회에 가면 특별한 것이 있겠냐? 그 교회에 가자.’ ‘엄마 나 안 간다고 하는데 왜 자꾸 그래 나 절대 그 교회 안가.’ ‘그래도 가야지.’ ‘엄마는 내가 꼭 그 교회를 가야해?’ ‘아니 담임목사님인 네가 교회를 가지 않으면 누가 설교를 하겠니?’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어차피 우리의 신앙의 길이라는 것은 목회자나 평신도나 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야 할 이상과 현실 사이에 언제나 격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의도하면 위선이지만 그것이 약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백을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는 이런 것이고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본질적인 사역이라는 것들을 확고하게 줄을 그어놓고 그 표준을 자기가 거기에 미칠 때나 미치지 못할 때나 계속 따라가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이 표준입니다. 마치 우리가 내비게이션을 찍고 운전을 하면 실수해서 똑바로 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알려주어서 가려고한 길로 돌아오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들에게 뚜렷한 선, 내가 그 선에 충분히 갈 때도 있고 약간 못 미칠 때도 있지만 이것이 그 길이라고 하는 확고한 길에 대한 신념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해서 잘되었다고 하면 휘청하고 휘청하면서 교회가 그렇게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목회의 본질적인 것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눈을 뜨면 만나는 목회의 현실이 항상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딛고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평화와 사랑과 은혜로 우리들이 충만한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이 가장 훌륭한 존재에 의한 선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진리는 한 사람의 삶으로 인격으로 나타나야지만 진리는 정말 아름다운 것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으로 돌아와서 우리들이 생각해보면 진리를 이 세상에 알리는 방식이 한 가지가 아닙니다. 한편으로 그 진리는 아무리 아름다운 인격과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언어로, 말로, 글로 무지한 사람들을 향해 선포되고 외쳐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나만 내재적으로 ‘내가 이렇게 진리 안에서 살고 은혜를 받으니까 행복하고 아름다워 나 부럽지 않니?’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받기위해서는 들리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지만 바라보며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클래식을 들을 때 어떤 사람은 소음처럼 들리고 어떤 사람은 깊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클래식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꽹과리처럼 들리는 것이고 듣는 사람은 그것을 오래도록 들었을 뿐 아니라 클래식 속에 흐르는 지식들이 있기 때문에 그 감동이 전해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의 세계든지 성경의 진리든지 우주든지 꽃이든지 미술이든지 음악이든지 모든 것들이 아는 것만큼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들이 잊지말아야할 사실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인격으로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면 너무나 훌륭하지만 그것과 함께 절대로 약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설교자는 말로써 글로써 하나님의 진리는 이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의 지성과 마음속에 선포하고 외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를 불렀을 때에 하나님이 숯불을 그의 입술에 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다 목회자는 헌신해야하고 특별히 목회자는 학문에 끊임없이 정진하고 헌신해서 깊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질문3)
답변3) 존 오웬은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것이 하나의 논문인데 60페이지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460페이지정도 썼습니다. 기본적인 사상은 존 오웬에게서 배운 것이고 그것을 훨씬 더 제가 가지고 있는 신학으로 확장시키고 상세화하고 그분은 17세기의 사람이고 17세기에 설교를 14, 15살 정도 먹은 어린 대학생들에게 설교하던 내용인데 저는 그것을 훨씬 더 확대하고 상세화해서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사상은 같습니다. 그것을 썼는데 그 책도 두껍습니다. 글씨도 작고 그래서 그것을 집에서 꼬박 읽는데 8일이 걸렸다고 하는데 요새 누가 8일씩이나 그것을 읽는데 헌신하겠습니까? 많이 안 읽히는데 그 내용은 사실은 오늘날 왜 이렇게 교회가 성도들의 삶이 한없이 무너지고 있는가에 대한 결정적인 답변을 그것이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이번에 구원파 세월호 사건이 났는데 구원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성화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 성화는 어떻게 보면 목회자가 된 다음에 헌신하여야할 대부분 목회사역의 영역이 사실은 성화입니다. Sanctification 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에게 즉각적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간다는 값싼 신앙주의가 우리에게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성화에 대한 교리나 지식이 없습니다. 성화의 세계는 엄청난 것이고 결국 우리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은 Already but not yet.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왔지만 아직 완성하지 않은 그래서 세상의 나라와 이미 침투해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까지 남아있는 세상의 나라가 겹치는 이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Tension이 있고 Conflict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적으로도 나타나고 우리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본성과 그리고 하나님을 거스르고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사는 것들이 충돌을 일으키는데 자기를 주인 삼으면서 살려고 하는 것을 가리켜서 정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정욕은 좁은 의미에서는 그릇된 성적 욕망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를 주인 삼는 삶을 살려고 하는 모든 욕망의 총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끊임없이 자신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불신자들은 하나의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이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성향이 마음에 심겼기 때문에 죄를 지을 때는 이 두 가지가 복합의지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실상을 가르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자기 삶이 왜 이렇게 무너지고 곤고하고 괴로운가하는 것의 원인을 자꾸 밖에서 찾는 것입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취업이 안 되기 때문에, 경제가 나쁘기 때문에, IMF 때문에, 정치지도자들이 잘못해서, 아니면 교회가 성도들을 힘들게 해서, 이런 식으로 자꾸 밖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이미 읽으셨겠지만 그것을 꼼꼼하게 읽으신 후에 청교도신학의 책들이나 개혁주의 신학 책들을 보면 왜 그 설교자들이 죄에 대해서 피를 토하듯이 설교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책을 쓰고 났더니 나를 평가하기를 내가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신학교수가 그런 식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을 잡지에 실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진리를 내가 말하는 것도 시간이 없어죽겠는데 그런 분들과 내가 언쟁을 하겠습니까? 그냥 내버려두지만 굉장히 슬픈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성경적인 교리들에 대해서 이런 것에 무관심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청교도들과 비근한 예로 존 칼뱅의 책만 읽어보아도 설교내용 중에서 항상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죽이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 미래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인데 거기서 나온 유명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와 은혜의 지배의 결정적인 교리가 있는데 Mortification 죄 죽임의 교리입니다. 그 책이 존 오웬의 책 중의 한권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부흥과 개혁 사에서 번역되어서 나왔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십시오. 원서로 볼 수 있으면 원서로 보시면 더 좋습니다. 굉장히 긍정적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존 오웬의 신학’ 이라는 책을 하나 썼습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보면 오히려 존 오웬의 신학이 훨씬 더 쉽게 보일 것입니다. 존 오웬의 신학 책은 1600년대에 쓰인 영어책이라 쉽지 않습니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 너무 많고 구문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 책을 보시면 이해가 훨씬 빠르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읽어보시면 그것이 왜 그렇게 결정적인 교리인지 아실 것입니다. 요즘에 너무 마음이 아픈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스턴트나 정크 푸드를 먹듯이 신학도 모든 것을 만들어서 주면 놓고 맛을 보고 내가 먹고 다음 주에 설교할 수 있는 재료거리를 주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신학적인 체력 자체가 강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런 책들을 보면 깊이 있게 바짝 매달려서 일주일동안 읽어보면 눈이 확 열릴 텐데 그리고 나서 은혜를 받으면 새로운 설교가 나올 것입니다.
질문4)
답변4) 그 책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존 오웬의 신학이라는 책은 얇아서 쌉니다.
질문5)
답변5) 사실은 영혼의 문제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제가 사실 존 오웬을 20년을 읽었습니다. 존 오웬은 제가 나의 최고의 스승으로 생각하며 살아왔고 그분 존 오웬 목사님이 책 18,000페이지 정도의 책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중에서 한글로 번역된 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것을 번역할만한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영어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저는 26권을 한 두 권 정도는 못 읽고 거의 다 읽었습니다. 정리까지 다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존 오웬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나니까 우리들이 신앙이나 우리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작용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것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지성, 감성, 이런 작용들이 일어나는데 근본적으로 그것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Function 입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기에 컵이 있으면 이렇게 소리가 나는데 소리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이것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 지성, 의지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혼에 대해서 공부를 너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기 보다는 영혼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는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그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정말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실 영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데 그런 영혼에 대한 공부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자기의 기독교강요 속에서 영혼에 관한 공부를 추천하면서 영혼에 대한 공부는 참 재미있다. 철학적인 것도 많이 탐구해보았으니까 시간이 나면 봐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자기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성경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영혼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런 우리들 가운데 그런 것들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현저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접근할 때에는 성경은 영혼의 존재보다는 Function 기능에 관계가 있으니까 그것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토대로 삼고 그러면 영혼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사유를 할 수 있는가?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한도는 어디인가? 그리고 성경 밖에서 또 이미 신학을 했던 사람들은 영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철학자들은 영혼에 대해서 어떻게 사유했는가? 그것을 저 옛날부터 더듬어보면서 ‘아, 영혼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경의 관심사는 이쪽이구나!’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과 아무런 지식이 없이 설교를 하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내용들을 만들어내기 쉽다는 것입니다. 영혼에 대해서 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불멸하는 것 중에는 무시무종한 것과 유시무종한 것들이 있습니다. 무시무종한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한 사물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시간 안에서 멸절되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정하셔서 영원히 멸절되지 않도록 지정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천사들도 멸절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도록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하면 영적인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의 오류가 무엇이냐 하면 멸절설이 왜 나오느냐하면 죽음의 개념을 영혼에 대한 죽음의 개념을 육체의 죽음의 개념과 똑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멸절이라는 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결국은 몸이 해체되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육체가 죽으면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혼의 죽은 행실이라고 나옵니다. 죽은 영혼인데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의 개념이 육체의 죽음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생명이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영혼의 고유한 기능과 성질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들이 죽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멸절의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에 멸절된다고 하면 굉장히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하늘에서 누리는 영원한 복락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러면 그것도 얼마 있다가 없어지는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수면 설을 선택합니다. 수면한다고 하는데 다양한 변형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경이 이야기하고 제시하는 내용들을 굳게 붙들고 우리는 목회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