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쁨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녹취자 : 김세나
지난주에 왕의 희생에 생명이 있음이여 라는 잠언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오늘도 보면 그 예수님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에 바로 이러한 메시지들이 녹아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내 기뻐하는 자라. 청교도들은 이것을 가리켜서 이중의 인칭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는 관계에 대한 인칭,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사역에 대한 인칭이라고 보았죠. 이 두 가지가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혹 잘못해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행동을 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가능성이 낮은 일이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던 사람도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일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관계가 깨지니까요. 또 반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그 관계를 복원하는 것 없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의 인침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관계가 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관계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으로 중요한 그 요소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님이 왜 하나님이 이렇게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그러셨을까. 이것을 멀리 멀리부터 바라보는 것이 있고 이 문맥에서 바라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멀리 삼위일체적 관계에서 바라본다면 이 스가랴서 6장에 나오는 평화의 언약으로부터 언약으로까지 거슬려 올라갈 수 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계획을 받아들이시고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 이 세상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까지 낮아지신 것, 이것부터 시작을 할 수 있겠죠.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 큰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문맥에서도 그것이 아주 구체화되어서 그 박혀 나옵니다. 어떤 시점에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까.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는 분이었거든요. 왜냐하면 세례의 의미 자체가 죄씻음을 의미하는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이죠.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죄인들이 받으시는 이 세례에 참여하셨을까. 참여하셨을까. 그것을 레온 모리스같은 사람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이 예수님이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이렇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기의 모든 언약 백성들에게 언약 백성 밖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 언약 백성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모든 백성들과의 그 아이덴티파이 된 것을 보여준 것이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또 하나 구속사적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보고 또 하나의 의미를 여기에 추가하고 싶어요. 이것이 아마 레온 모리스가 이야기 한 것 보다는 훨씬 더 무게가 있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례를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세례를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죄 씻음을 의미하는 거거든요.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어요. 그런데도 죄 씻음을 의미하는 이 세례의 참여하시는 거예요. 이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 율법과 관련이 되요. 율법과. 무슨 뜻이냐 하면 왜 사람들이 세례 의식은 중간사 시대에 생겨난 것인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그 물로 자기를 정결케 하는 이 의식을 행하고자 했던 이유가 뭐겠어요. 죄의 씻음을 가리키는 거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지 않으셨을 때에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후에도 실제적으로는 죄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죄 씻음의 의식이 필요가 없었지만 이렇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당신이 죄와 관련이 있게 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그 죄는 어떤 식으로 관련이 되는 죄일까요. 당신 자신이 짓거나 당신 자신 속에 있는 죄 때문에 씻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 지실 어린 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 자신에게는 죄가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온 백성의 죄를 짊어 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그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을 지향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많은 백성들과 예수님이 한 몸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이 세례를 통하여 결국은 당신 자신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이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당신이 죽으실 때에 세례에 의해서 이 죄가 씻겨지는 것처럼 또한 당신 자신이 이 죄를 짊어 지고 죽으심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씻겨 지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던 거예요. 그것이에요. 이 일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제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죄인인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죠.
또 하나의 의미가 추가되는데 그것은 이렇게 예수님이 백성들과 하나되기 위해서 또 결국은 당신이 자신이 짊어지고 죽으실 죽음의 세례를 상징하는 뜻에서 이 세례를 받으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례의 사건을 통해서 다른 의미를 전혀 다른 뜻을 부여하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메시야의 공적인 취임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리는 광경을 통해서 이 평화의 의논을 이룩하신 삼위가 다시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말하자면 회합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일치를, 일체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위해서 오신 그러한 메시야 이시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공적 취임의식으로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사용하신 것이에요. 바로 그러한 문맥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맥에서의 교훈으로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비결이 무엇이겠어요?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영교를 누리는 사람의 공통적인 인격의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겸비함이에요. 겸비함. 겸손함.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영교를 누리는 사람의 인격적 특징이에요. 예수님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 그것 만 예수님의 마음속에 살아있었습니다. 마음 속에 살아있었습니다. 당신은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예수님의 마음에 최고의 그 관심사였어요. 그 때에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했던 것이죠. 우리들이 사역을 해도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들이 희생적인 이유가 바로 그거예요. 희생적인 이유가. 우리들이 사역에 있어서 갖고 있는 대부분의 많은 한계들은 실제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한계에요. 더 사랑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어려움이나 한계인데, 사랑이 모자라니까 못하는 거예요. 왜 그런지 설명해 볼께요.
(예화) 자기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지 않아요.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할 때에는 막 희생을 요구하는 거예요. 희생을 요구하는 거예요. 우리 아들이 이제 군대가서 고생을 많이 하고 있는데, 엊그제 지 엄마하고 통화를 하면서, 엄마 여기 장난이 아니야. 왜, 매일 아침 체력 훈련을 하는데 하여튼 완전 군장을 하고 거기는 3.8Km를 100미터 달리기 수준으로 달린대요. 산에 올라가서 다시 6Km를 뛴대요. 그게 일과에요. 한번은 철봉에 매달려서 턱걸이를 하라고 그러더래요. 온 힘을 다하여서 턱걸이를 해서 이제는 도저히 못 하겠다 내려오려고 하는데 선배들이 발을 딱 붙잡아 주더래요. 그러면 다시 힘이 생겨서 몇 개 한 대요. 그래서 이제는 도저히 못 하겠다. 그러고 내려오려고 하는데 혁띠를 잡아 댕겨준대요. 결국은 마지막으로 젖 먹은 힘까지 쏟아 부어서 체력을 기르게끔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들은 헌신적이야. 헌신적이야. 아끼는 게 없어요. 그 사랑의 한계. 사랑하면 다 극복하죠. 사랑하는 극복하죠. 그리고 목표의식이 뚜렷하면, 인간은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합니다. 예전에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특공대 출신이었어요. 그런데 천리행군을 일 년에 한 번씩인가 한 대요. 천리인데 진짜 천리래. 400km래. 걷는 구간이. 전쟁에 나가면 그런 사람들이 진짜 그 적진에 침투해서 못할 일들을 해내는 거죠. 문제가 뭐냐 그러니까 제일 큰 문제는 발에 물집이 생기는 거래요. 자기 눈으로 똑바로 봤는데, 대원 하나는 발바닥에 보면 두꺼운 가죽 살이 있잖아요. 그게 통째로 떨어지더래요. 통째로. 그러니까 신방 깔창 벗겨지듯이 발가락서부터 시작을 해서 한번에, 너무 너무나 구보를 해가지고 한 번에 떨어지드래요. 소대장이 피가 흔건이 고여 있는 자기 병사의 발바닥을 붙들고 펑펑 울더래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예수 믿는 그 형제, 지체들이 사랑이 식으면 그 군대만도 못해. 군대는 피가 뚝뚝 떨어지니까 병사의 발을 붙들고 소대장이 펑펑 울더래요.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된 거예요. 그렇게까지. 인간의 목표를 향한 집념은 끝이 없는 거예요. 끝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정말 헌신적이에요. 왜,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앞에 자기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그것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섬김과 그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혹시 불일치가 일어나는 것은 그것은 잠시 동안의 일이고 삼투합 현상처럼 그 둘은 평생을 이루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잘 섬겨 보려고 애를 쓴들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그 높은 수준의 섬김을 유지할 수가 없죠. 또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 여건에 의해서 조금밖에 섬기지 못하던 사람이 계속해서 그렇게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영혼에 대한 연민이 꽉 차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이 뭔지 아세요?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것. 다시 말해 볼게 들어보세요. 영혼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고통이 뭔지 아세요?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 그게 고통이에요.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것은 지옥이에요. 그것은 지옥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살 수가 있겠어요? 내 마음에 불이 있는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뭐라고 고백했어요? 골수에 사무쳐 중심이 불붙는 것 같으니 내가 견딜 수가 없나이다. 그게 그게 말하자면 그게 말하자면 고난이죠. 고난. 그렇게 연결이 되요. 그래서 결국은 이 이중의 인식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그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요. 그러니까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하나님이 유별나게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이미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어요. 예수님이 뭐라 그러셨어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상태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에요. 핵심이죠. 그러면 그 연합의 본질이 뭐에요? 사랑이에요. 사랑.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에요.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거예요. Everything.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걱정할 게 없어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은 뭘 구하든지 예수님 좋아하시는 것 밖에 구할 수가 없어요. 왜,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꼭 이루어주기를 원하는 일이죠. 예수님이 이루고싶으신 그 일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원이 되는 거예요. 바로 그거예요. 우리의 사역에 우리의 사역은 일입니다. 일. 이 일에 사람이 일을 하면 일을 합니다. 그리고 일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이 일을 하면 일은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죠. 사람이 일을 하면 일이 되지만, 사람이 일을 하면 일이 되지만, 그러나 사람이 일을 하면 일이 되지만, 그렇지만 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면 그러면 이 일에 생명이 흐르게 됩니다. 생명이 흐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중요한 것이에요. 생명이 있는 사역이 되는 것이에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생명이 없는 사역은 이런 거죠. 지도자가 되어서 이런 일을 좀 해봐라. 섬겨라. 그랬는데 계속 거기에서 다툼과 분쟁과 시험과 문제만 생겨나는 거예요. 생명이 없어요. 섬기던 사람들이 점점 멀리 떠나가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 하다가 만 일만 자꾸 남아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이것 좀 해봐라. 뜻하지 않게 그게 그 일을 하면서 막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변화되는 거예요. 그러면 일이 계속 해서 흘러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명이 있는 사역. 생명이 있는 사역. 그러면 그 일이 계속 해서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그렇게 물이 흘러요. 그래서 사역 자체가 아주 기름진 사역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생명이 흐를 때 일이 잘 되는 거죠.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하니까.
(예화) 제가 13년 동안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2800편 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정확하게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대게 그 정도이고 약 280 시리즈 정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것이 모두 다 녹취가 되어서 텍스트로 보관되고 있어요. 원고지 16만 매 분량입니다. 1부터 16만을 한 번 세어 보십시오. 1부터 16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400페이지짜리 책 , 400페이지짜리 책 40권 정도의 400페이지짜리 책 400페이지짜리 책이 원고지 2천 매 정도이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엄청난 수 십권 분량이 텍스트로 풀어져 있죠. 책 한권이 대게 100만번을 타이프를 쳐야지만 일이 이루어지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다 풀려 있습니다. 저 거의 신경 쓴 적이 없습니다. 초창기에 잠깐 신경 썼죠. 자기들이 흘러갑니다. 테이프를 풀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니까 사람들이 시키지 않아도 계속 그 일을 5년, 6년, 7년 째 그 일을 해옵니다. 한 사람이 70개, 80개씩 1년에 테이프를 풀어요. 이 일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런 것은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계속 생명이 역사하면서 흘러가는 거예요.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우리가,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렇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가야 해요. 그것을 감당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온전히 감당하려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많은 부족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족을 발견하게 돼요.
(예화) 똑같은 티셔츠인데, 이태리에서 만든 티셔츠 한 장으로 이태리에서 만든 티셔츠 한 장으로 태국에서 만든 티셔츠 200장을 살 수 있어요. 더 심하면, 이태리에서 만든 티셔츠 한 장으로 중국에서 만든 티셔츠 400장을 살 수 있어요. 500장 정도까지 살 수 있어요. 차이가 뭐죠? 한국의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일을 맡기면서 속 터지는 것이 그거예요. 잘 만든 한국 제품을 보여주면서 똑같이 만들어라 그러는데 비슷하지도 않게 만든 거예요. 그런데 평행선을 달리는 거예요. 똑같지 않냐. 뭐가 다르냐. 전혀 아닌데. 박 목사가 중국에 처음 가서 그런 이야기 했죠? 목사님, 중국에 오니까 한국에 있는 것 다 있네요. 샴푸, 비누, 칫솔. 그런데 다 달라요. 사역에 있어서도 똑같아. 사역자들이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과 똑같아. 그래가지고 이렇게 놓고 말이지. 아니 저 잘 좀 섬겨. 똑같잖아요. 뭐가 틀려요? 나도 심방했죠. 출근했죠. 설교 했죠. 안 한 게 뭐가 있습니까. 똑같잖아요. 이게 보면 좀 틀리거든요. 품질이 달라요. 그러니까 한눈에 금방 알잖아요. 그러면 사역에 있어서 발전이 없는 거야. 사역의 발전이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끊임없는 온전을 추구해야 해요. 끊임없는 온전을 추구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아. 더 가슴을 찌르는 이야기 해 볼까? 내가 구역의 식구들을 맡고 있어. 내가 한 부서를 맡고 사역을 해.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애이씨, 요즘 세상에 100% 회심이라는 것이 어디 있어? 절반만 회심 해도 한국 교회 평균은 넘지. 그리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미끄러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아니야? 그 뭐 완전한 신자가 어디 있어? 그렇게 생각을 하고 구역장을 하거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영혼의 회심을 위해서 몸부림 칠 가능성이 전혀 없어요. 왜, 회심하지 못한 50%를 보면서 가슴아파하지 않고 회심한 나머지 사람들 보면서 자기 사역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면 어때요? 하나님 은혜가 필요 없는 거죠. 그러나 온전해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항상 하나님 앞에 자기 부족을 느끼는 거예요. 그 부족을 자기의 힘으로 매꿀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하나님 앞에 호소하게 되는 거죠. 호소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결국은 사랑이 시키는 거란 말이죠. 사랑이 시키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지금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무슨 아픈 과거. 이 사람이 태만하고 평화롭게 살 때,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예전에 많이 깨뜨려졌던 사람. 그리고 예전에 많이 울었던 사람, 지금도 그 가슴 속에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것이죠. 그래서 그 마음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모든 사람은 슬픔의 사람이고, 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목회가 무엇인가. 마음의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 그게 목회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하나님이 편애하셔요. 편애하셔. 편애하시는 것 같이 느껴요. 공정한 편애지. 사랑하시는 거예요.
(찬양)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아주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의 실수 까지도 선을 이루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움직이시는 거예요. 놀랍게. 그래서 결국은 정말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생명이 있는 사역이에요. 사역이 잘 될 때는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심령이 쇄신되고 잘 안 될 때에는 자기의 탓이라고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변화되어 가는 거죠. 그래서 내년의 목표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역자들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는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것. 그런 존재가 되는 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뭐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어디로 자리를 옮기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그렇지 않을 수가 없어요.
(예화) 큰 교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었던 사람이 은퇴를 했어요. 시골에서 몸도 성하지 못해서 지팡이를 짚고 산책이나 하면서 기도하면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 무직의 상태가 되었어요. 현직에서 물러났으니 이제 내 기쁨도 끝이다. 그래서 아니에요. 거기에서도 그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에요. 큰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렁차게 외치던 사람이 핍박을 받아서 강제 수용소에서 똥 퍼는 신세가 되었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뭘 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은 거꾸로 되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것은 모두 이 세상의 삶의 양태 일 뿐이에요. 싱글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늘 근심이 되었는데, 부잣집 남자에게 시집을 갔어요. 그러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까?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렇죠? 남편과 함께 인생을 살아갈 때에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었던 여성이 남편이 죽고 홀로 되었어요. 그러면 주님의 기쁨이 끝났을까? 아니죠. 안나와 같은 여인을 생각해 보세요. 남편을 잃고 홀로 된지 그 긴 세월 동안 성전에서 밤낮을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선지자들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영광을 보여 주셨죠. 메시아를 만나게 해 주셨어요.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더 찌르는 이야기 해 줄까. 전도사 때, 부 목사 때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아닌 사람이 담임 목사가 되면 저절로 기쁨의 사람이 될까. 아니에요.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정말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정말 이런 고백이 여러분들 속에 있어요?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단 한 가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 고백이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살든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연초에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의 교리를 탐구하면서 이런 것을 경험했어요. 성도의 공동생활도 거기에서 나오고, 아 너의 존재의 가치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 접붙여진 지체다. 너의 할 수 있는 너를 다 깨뜨려 그래서 교회를 이롭게 하고 너의 가지고 있는 자원을 다 깨뜨려 연약한 지체들을 섬기고 그리고 심지어는 지체가 너에게 고통을 줄 때에도 잘 참으면서 그래서 결국은 그 지체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된다. 내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거예요. 주님, 저는 도대체 뭡니까. 주님의 대답이 뭔지 아세요? You are nothing. 그러면 저는 뭡니까.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대답하냐 하면, 너 아무것도 아니야. 주님 그러면 도대체 저는 뭡니까. 그 때에 우리의 마음에 고백되어야 할 것이 이것이죠. 그렇게 많이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리고 죽어 주님이 말씀하셔요. 너는 그렇게 뭐든지 양보하고 깨어지기만 하면 그러면 넌 뭐냐. 그 때에 우리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I am nothing.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문맥에서 그러면 저는 주님 뭡니까.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면 주님, 제게 돌아오는 것이 뭡니까. 주님의 대답입니다. 내가 너의 것이잖아.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이런 논리가 나오는 거야. I am nothing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주님이 그 안에 충만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논리가 아주 허접해 보이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라는 고백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깨뜨려지고 자기를 버리고 그렇게 희생해서 남을 이롭게 하면 나는 뭡니까. 너 nothing. 아무것도 아니다. 그 대신, 내가 있지 않냐. 그래서 something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내년에는 목표가 오직 내가 주님의 마음의 기쁨이 되는 거예요. 나의 동역자들과 양떼들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 주님이 기뻐하시는 부서가 되는 것, 주님이 기뻐하는 가정이 되는 것, 주님이 기뻐하는 팀이 되는 것,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가 되는 것,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셔요.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