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레 24:1-3)
녹취자 : 조원정
오늘 이 성경은 평범해 보이는 본문이지만 우리 목회자를 위한 아주 치명적인 하명과 그에 대한 가르침을 적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계시해 주셨고 그 성막은 성막 뜰과 그 뜰을 에워싸고 있는 천으로 된 벽, 그리고 한 가운데 있는 직사각형의 텐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출발한 이래로 어디에 가든지 항상 이동식 성막이 펼쳐지고 그것을 중심으로 12지파의 진이 쳐져서 하나님의 임재가 그 모든 이스라엘 진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다가 그 성막이 멈추면 그 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직사각형의 텐트는 약 18평 크기의 텐트이고 그중 3분의 2가 성소라고 불렸고 그중 3분의 1이 지성소라 불렸고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한차례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와 마주하며 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텐트의 덮개는 물돼지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비바람, 햇빛에 모두 낡아 거무칙칙한 모습을 한 텐트가 밖에서 보일 때는 뭔가 화려하고 남달라 보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각양 놀라운 재료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해 볼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러한 텐트 그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아론 자손들의 사명이 신학적으로 어떤 것은 구약에 이미 성취되었지만 어떤 것들은 지금까지도 그 정신이 우리에게 이어져오는 성막의 등불의 규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성막을 지을 때 거기에는 어디에도 창문이 없습니다. 완전히 밀폐된 공간으로 위에는 물돼지 가죽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에 어떤 자연적인 빛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성막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등잔불이 필요했습니다. 오직 등잔불로 빛을 삼아서 대제사장과 성소에까지 들어가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공경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편리상 텐트 여기저기에 창문을 좀 내어서 바깥에 환한 빛이 들어와서 또 다른 등잔불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다가 밤중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불을 켰으면 얼마나 편리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일체의 그런 빛 없이 오직 그 등잔불,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여 만들게 하신 그 등잔의 불빛만 이용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목회자들이 주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진리의 빛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빛은 구약성경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목회자가 교회를 섬기고 운영해감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이 세상에서 통하는 상식이나 이성의 논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그것은 적절히 사용을 할 때 교회는 모든 제도와 형식들이 갖추어지게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 공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화) 저는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당시 이름만대면 알만한 아주 유명한 신학자 한 사람이 작은 교회를 목회하면서 자기네 교회에는 중고등부도 없고 주일학교도 없고 여전도회도 없다고 자랑하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어디 성경에 중고등부 하라는 이야기가 있느냐고 하는데 얼핏 보면 맞는 이야기 같지만 무엇인가 듣고 나면 이치에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어느 성경에 중고등부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분이 중고등부를 절대로 안하게 된 동기가 있는데 옆에 있는 교회에서 중고등부 수양회를 갔다가 한 학생이 물에 빠져 죽고 그 아이가 하필이면 불신자 집안에 4대 독자인가 5대 독자인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죽도록 고생을 하고 거액을 배상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나서 중고등부를 하는 것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어디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중고등부만 다녀서 물에 빠져 죽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가치로서의 이성과 건전한 상식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경이 명백히 우리에게 진리라고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좀 상식적이고 민주적이고 올바르고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와서 보아도 그건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에 맞다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교회를 해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화) 또 제 신학교 시절에 어느 목사님은 성경을 연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공동의회 때 선포를 했습니다. 성경을 보니까 십일조는 제사장이 갖게 되어 있다. 나는 목사가 제사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례금을 안 받고 교인들의 십일조를 내가 갖겠다고 하는데 교인들이 착하니까 목사님이 그것이 성경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고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십일조가 줄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받던 월급의 3분의 1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내가 가만히 성경을 연구하니까 그건 구약시대이고 이제는 월급을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이미 교인들의 마음을 갈라질 대로 갈라지고 교인들은 그 십일조를 들고 방황하면서 이 교회 저 선교단체 각자 기부하는 것으로 십일조를 사용을 했으니 그것도 상식에 어긋난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더 황당한 이야기는 제가 아는 어느 노회의 목사님은 물론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부임하자마자 선포하기를 자 이제 내가 이 교회에 왔으니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겠습니다. 누구든지 장로하고 싶은 사람은 오늘 밤에 사택으로 찾아오십시오. 그리고 사택으로 찾아 온 네 사람을 장로를 시켜 버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아무리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통하는 상식이나 규칙, 교회에 있는 법들을 따르지 않는데서오는 무리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라고 하더라도 부지런히 이 세상에 돌아가는 이치를 배우고 상식과 교리를 따라서 교회를 운영해서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그렇게 일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교회를 건축하고자 건축위원장을 세우고 회계를 하나 세웠더니 세운 회계가 얼마나 목사님께 순종을 잘하고 극진히 대접을 잘 하는지 며칠에 한번 씩 요리 집에 가서 대접을 하고 교회 와서는 건축위원회 돌아가는 상황을 건축위원장보다 더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이따금씩 와서 여기에 저기에 도장을 찍으십시오. 하며 몇 달이 지나고 교회가 거의 지어질 무렵 회계 집사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몇 억을 가지고 도망을 쳤는데 서류를 조사해 보니 전부 목사가 떼먹은 것으로 서류를 만들어 놓고 도망을 간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석한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면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늘 어려움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예화) 저희 교회에서도 생전 그런 법이 없었는데 교회 빌딩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이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했습니다. 왜인가 했더니 소송을 하기 전에 교회 옆에 길이 있는데 그것이 개인 사유지니까 이제 교회에서 교회 바짝 붙여서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빌딩을 살 때 거기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샀고 길이 된 지가 19년이 되었고 당신들 땅이지만 길인지 이미 알고 샀고 교육관 빌딩 바로 옆에는 공장이 있어서 그 길을 통해서 트럭이 들어가고 공장으로 짐을 실어 나르는데 당신들이 교회 앞에다 집을 바짝 붙여서 집을 지으면 당신들이야 이득이 되겠지만 교회 빌딩은 어떻게 기능할 수 없는 멍텅구리가 되지 않는가 하며 그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락바락 우기면서 교회를 수없이 괴롭힙니다. 그래서 소송을 하라고 했습니다. 소송을 하는데 나도 법을 공부해서 법을 아는데 당신 절대 못 이기고 변호사비만 날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 두주 있다가 큰 교회 법률 꽤나 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 교회에 판사, 검사, 변호사가 모여서 이 사람을 위해 대책 회의를 했답니다. 와서 연설을 하면서 이 땅은 목사님이 동의를 해 주셔야지만 되는 땅이고 목사님이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5분 동안 내가 아는 데로 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러므로 당신들은 절대 이 재판에서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한 교회의 안수집사라면서 교회를 상대로 재판을 하면 하나님이 정말 착하다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뺏고 싶으면 재판을 하십시오. 나는 동의해 줄 수가 없으며 상식적으로라도 동의해 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1심에서 자기네들 패소하고 2심에서 패소했더니 대법원까지 가서 괴롭혔습니다. 대법원에서 아예 각하를 시켜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상식이 없고 건전한 이성이 없이 우리의 교회를 올바르게 이 거친 세상에서 인도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종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주님의 뜻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는데 진리를 가르치는 면에 있어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섬겨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이 모든 것들은 강대 아래에서 우리끼리 통하는 이야기이지 이것이 설교의 제목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고 인간이 누구인지 보여주어서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서 자신도 행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아니라 그 찬란한 등잔의 불빛으로 만이 가능한 것이니 이것이 곧 진리의 말씀이라 하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신앙으로는 진리의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피상적인 목회사역으로는 하나님의 지혜의 아름다움과 경륜의 탁월함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호주에 집회를 갔을 때 어느 교회에서 성도의 집으로 인도를 받아 점심을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젊은 목사님이 오늘 점심을 대접하는 그 집의 집사가 안수집사인데 얼마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좋은 믿음을 가진 훌륭한 집사라고 칭찬을 하는지 옆에 있는 제가 민망스러울 정도로 추켜세웠습니다. 이제 점심을 대접을 받고 거기서도 제가 잠깐 기도를 했고 그 전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믿음이 좋다는 집사가 저를 조용히 부르다가 조용한 방으로 데려가서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하고 물어봅니다. 자기 딴에는 매우 궁금했기 때문에 강사인 저를 다른 방으로 불러서 질문을 한 것인데 그 질문의 내용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심각하게 묻기를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 믿으면서 평생에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목사님 말씀 듣고 예수님과 성경이 진리인지 알고 평생을 예수 믿었는데 마지막에 죽고 보니 마호메트 이슬람교가 진리이고 기독교가 모두 거짓이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제가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분 같습니다. 교회에서는 안수집사님이라고 불리우시지만 제가 보기에는 당신은 구원이 없습니다. 다시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제발 배우십시오. 그리고 그 방을 나왔습니다. 나는 그 분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을 그렇게 입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신뢰하는 목회자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저렇게 신뢰하니 교회일 많이 맡길 텐데 사실 상 믿음이 전혀 없는 불신자로서 목사의 말을 잘 듣는, 저렇게 중요한 일을 맡겨서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니 걱정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 하면 합니다. 그리고 눈칫밥이 생겨서 교회에 오래있다 보면 무슨 말을 하면 안 되고 목사님이 어떤 표정이면 뭔가 불만이 있으신지, 도움을 바라는지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렇게 오래 교회를 다녀도 진리에 맞닥뜨려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속의 은혜와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라는 사실에 맞닥뜨려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신앙의 회심과 진실함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모여서 자기네 교회가 크다. 성도가 얼마 모이고 돈 많은 장로가 어느 교회에서 자기네 교회로 왔다. 그것도 이야기 꺼리는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목회의 영광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목회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진리가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이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영광입니다. 비록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서 희미하나마 진리의 빛을 받고 그것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사람이 되고 예전에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이 목회의 영광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교회가 작고 목사님이 유명하지 않고 설교에 큰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실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깃든 교회입니다.
(예화) 한 6-7년 되었습니다. 5월이면 가정의 달입니다. 깨어진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여섯 가정에 한 가정이 깨어진 가정이라고 하니까 우리 어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깨진 가정이 많습니다. 가정에 대해서 설교를 할 때인데 교인 중 한 사람이 자기 친구가 하도 곤고하게 사니까 교회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사람에겐 교회가 처음이었습니다. 교회를 오자고 하면 안 올 거니까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하면서 불러서 조금 일찍 만나서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으러 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남편하고 살다가 살다가 이제 살기가 싫어서 이혼도장을 찍고 남편보고 매일 도장을 찍으라고 조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여자가 남편하고 적어도 십년 이십년을 살다가 애들까지도 있는데 헤어지기로 독하게 마음먹었을 때에야 얼마나 괴로움이 컸으면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교회에 왔는데 설교 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이었습니다. 그날 하나님이 정말 은혜를 주셨습니다. 생전 처음 교회 나온 이 자매가 거기서 의자를 붙들고 대성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꼬이고 꼬인 이 불행이 저 인간 잘못 만났기 때문에 불행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자신이 하나님 없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매가 집으로 갔습니다. 남편을 불렀습니다. 남편은 생각했습니다. 저 여편네가 또 도장 찍으라고 족치는구나하며 들어갔더니 뜻밖에 아내가 자기에게 걸어오더니 무릎을 탁 꿇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여보 그동안 내가 정말 잘못했어. 당신을 내가 너무 많이 힘들게 했어 나 같은 사람 만나서 미안해 여보” 그러면 남편이 ‘너 때문에 힘든 것을 이제 알았나?’ 그랬겠습니까? 남편도 앉아서 “아니야 여보 내가 여태껏 당신을 너무 괴롭혔어”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돈으로 됩니까? 아니면 사람의 말 한마디로 됩니까? 진리의 힘은 우리 사람의 일평생 바꿀 수 없었던 인생의 길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이 성막의 등불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진리의 빛으로 교회를 밝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추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 성도들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 성도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그 진리의 빛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판단하고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생각하며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처럼 목회를 하다보면 때론 하나님이 목회자는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데 하나님이 그리스도 교회의 양떼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정말 우리는 마른 막대기만도 못한데 하나님이 그 어눌한 가르침에 담겨 있는 티끌만한 진리라도 사용하셔서 성도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시고 그들을 하나님 멀리 떠났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으니 우리의 목회도 변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 말이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 정말 많은 변화들이 필요하고 또 우리들이 전도하고 목양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현대 속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이해하고 목회에 참고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이야기이지 한 사람을 어둠속에서 빛으로 오류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은 성령의 거룩한 역사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성령의 임재, 한 사람을 세상 사람을 버리고 십자가의 사람을 만들어 주는 불붙는 놀라운 변화는 인간의 제도와 방법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려는 그 사랑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월요일부터 며칠 동안 한 20여년이나 교제하고 있는 목사님들과 대 여섯 명이 수련회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중에 대부분은 나보다 연배가 아래 이지만 친구처럼 지내면서 이십여 년을 지내왔습니다. 그 중에는 몇 천 명의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도 있고 작은 교회도 목회하고 있는데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놀랐습니다. 설교를 30년 넘게 했는데 아직까지 모든 원고를 손으로 작성을 한 답니다. 그거 보면 나는 참 설교를 쉽게 준비하나 했는데 가만히 생각을 했습니다. 설교를 한 30년쯤 했으면 이제는 이력이 붙을 만한데 그런데도 겸손하게 일주일에 거의 열 시간 스무 시간을 헌신해서 그렇게 바쁜데도 주일 설교를 정성껏 준비하는 그것은 마치 사랑하는 양떼들을 위해 들판에 나아가 정성껏 이른 아침에서부터 꼴을 베는 선한 목자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진리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 필요는 있지만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진리의 빛은 세상의 풍조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진리의 빛 대신 이 세상의 빛으로 교인들을 가르칠 때에 교회는 세월이 흐를수록 빛 대신 어두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18세기 독일의 교회사를 보면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 개혁자들의 생생한 복음적인 생명력이 사라지고 이성주의가 득세하게 되었고 살아있는 신앙, 새로운 삶이란 표어를 걸고 경건주의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감정과 체험, 생생한 교제를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합리주의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계몽주의의 물결이 되어서 유럽 전역을 쓰나미처럼 덮쳤습니다. 이제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미몽에 깨어나지 못한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이해되었고 독일교회 안에서는 당시 현대인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설교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자료를 조사해 보니까 이런 제목의 설교들이 주일날 교회에서 선포되었습니다. 하나의 음녀로서의 커피의 가치,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축복, 가축들은 축사에서 먹이는 것보다 방목하면 더 좋다, 예수님이 결혼하시지 않는 이유, 사람이 생매장 당하는 위험이라는 설교가 부활 주일에 설교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이러한 설교가 선포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사실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계시로 전달되었습니다만 어줍지 않은 과학적인 합리주의에 비추어 보니 사실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복음진리라고 믿던 모두 쓰레기처럼 처리되었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이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좋은 선생님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어두운 텐트 안에 밝은 빛이 없이는 캄캄한 어둠 밖에 남은 것이 없어서 제사장이든 대제사장이든 우리 주님을 섬길 수가 없었으니 이는 진리를 탐구해야 할 목회자의 사명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자가 하여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닙니다. 목회자가 해야 하는 많은 일들 가운데는 그저 일상적인 해야 할 일도 있지만 안 해도 하나님 앞에 불충하다고 까지는 인정을 받지 않는 일이 있는가하면 모든 일을 다 하지 않으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을 본질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의 말씀을 진리의 말씀답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참 어렵습니다. 이제 중국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고 거기에 미국이 항의를 하고 소련은 세계 제 2의 해군력으로 갖추었습니다. 실제로 어느 군사 전문가들이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중국과 한판 붙으면 중국 해군은 괴멸이 되어 버리고 일본 함대는 절반 정도 부서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데 우리는 매우 미묘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군사력이 중요하게 대두되고 군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데 말입니다.
(예화) 어느 군인이 있는데 사람이 참 좋습니다. 가는 곳마다 부하들의 신망을 얻고 상사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얼마나 너그러운지 가난한 사병들에게 자기 있는 것 모두 나눠주고 검소한 삶을 살아갑니다. 책은 얼마나 많이 읽는지 남들 골프치고 술이나 먹는 시간에 열심히 학문을 탐구해서 군인 최고의 상식을 갖추었습니다. 얼굴도 잘 생겼고 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쟁 하나만은 못합니다. 그 사람을 군인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인심도 후하고 동료 목사들에도 인정도 받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굽신거리며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하며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전할 줄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삯군 목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한 교인을 스쳐지나가는 대합실에서 만나듯이 한 번씩만 설교하고 지나가는 교인들이라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설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한번 교회 오면 좀처럼 안 나갑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미 교인이 30년씩 혹은 여러분 부임하던 때부터 여러분과 함께 목양을 받던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도 여전히 은혜를 받고 있습니까? 30년을 설교를 들었는데도 목사님이 성경을 펼치면 무슨 설교를 할지 가슴이 설렐 정도로 여러분은 진리에 익숙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까?
목사는 화를 잘 다스려야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저기서 오는 스트레스도 많고 말도 되지 않는 일들로 고통을 주는 장로나 교인들도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 목사는 어느 12월에 한 교회에서 이십년이나 목회를 했는데 장로도 아니고 어느 집사 친구가 오더니 목사님에게 불쑥 주보를 내밀면서 목사님 일 년 동안 교인이 하나도 안 늘었습니다. 도대체 목사님은 무슨 비전으로 목회를 하십니까? 그러는데 그것이 어디 사람으로 들을 말씀입니까? 그렇게 비전이 훌륭하면 자기가 신학교가서 목회를 하지 왜 그 교회 와서 목사를 괴롭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저도 교회 건축이라 하며 사소한 것이지만 그래도 두 번이나 고생을 하며 해 보니까 이것은 정말 사람이 태어나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교회를 들어서면서 교회를 쳐다보면서 마음이 알싸합니다. 이 지방에 이런 정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목사님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까?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리고 희생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종종 기도원에 가보면 이십일 기도 사십일 금식기도하고 목숨을 걸고 예배당 짓게 해 달라고 하는 목회자들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모든 것들이 잘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가 반드시 완성되어야지만 모든 헌신은 보람이 있는 헌신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교회가 진리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예화) 저희 총신 신학교에서 60년대 총장을 지내시던 김희보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인품이 아주 훌륭하시고 제가 보기에는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선비 같은 성자 같은 신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저와도 깊은 교분을 나누시고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교회에 오셔서 두 번이나 설교를 하시고 한번은 임직식에서 설교를 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어느 날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답니다. “선생님 김 아무개 목사입니다.” “오, 그래. 반갑구나. 교회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고생 많이 하지?” “목사님 정말 저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이번에 큰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래. 정말 고생했다.” “교수님, 그런데 이제 제가 사표를 내려고 합니다.” “아니 왜 그렇게 교회를 크게 지어놓고 갑자기 사표를 내니?” “목사님 작은 교회에 와서 열심히 목회했더니 교인이 천칠백 명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소원이던 큰 예배당도 지었습니다. 이제 다 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편한 교회는 후배에게 물려주고 저는 다시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 교회를 개척해서 다시 세우려고 합니다.” 이 선생님이 “너는 어쩜 그렇게 훌륭하니?” 하고 칭찬을 해 줄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야단을 치셨습니다. “너는 내게서 신학을 배웠니? 건축학을 배웠니? 교회를 크게 지어놓으니 이제는 할 일이 없어? 교인이 천 칠백 명 모이니까 이제 이 교회는 편안한 목회가 될 거라고 천 칠백 명 교인 모두 성도냐? 그 중에는 짐승도 섞여 있다. 이제 네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지었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위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지은 것이니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그렇게 예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먹이고 목회를 해야지 그것이 무슨 망발이냐?” 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 목사님이 눈물로 회개를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진정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외형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하려고 하는 하나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세워질 때 그 교회가 초막이나 궁궐이나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일생을 그 교회에서 종신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끝까지 자기의 수명을 다하였던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 요한이 나옵니다. 그는 말하기를 복음의 증거를 인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매인바 되었다. 밧모라는 섬에 유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고 모진 고문을 받고 전승에 의하면 요한을 끓는 기름 가마에 튀겨 죽여 버리려고 집어넣었지만 타지를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정말인지 거짓인지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먼저 간 사도들 못지않은 고난을 그 긴 세월 살면서 다 받았는데도 성경 어디에도 핍박이 무섭고 힘들어서 울었다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요한 계시록 4장과 5장에 보면 요한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를 주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봉한 두루마리를 받았고 거기에는 장차 이루어질 일들이 기록이 되었는데 그것을 풀어서 모든 교회에 소식을 보내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요한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기쁨으로 두루마리를 받았는데 불행히도 그 두루마리는 인봉되어 있었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땅위에서나 땅 아래에서나 이 인봉을 떼어 서신의 내용을 보게 할 자가 없다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때 백세에 가까운 사도 요한이 노구를 이끌고 보였던 반응이 무엇인지 압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이에 요한이 크게 우니라 했습니다. 에클라우센 포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소리를 내어 방성대곡하며 통곡하는 것입니다. 핍박과 시련과 고난이 올 때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백세 가까운 노 사도가 이제는 더 이상 네가 하나님의 계시의 뜻을 알 수 없다는 천사의 음성이 들려오자 어린 아이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런 눈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 나에게 성도들을 충분히 먹일만한 진리의 말씀이 없습니다. 짐승과 같은 나를 깨우치셔서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사랑하는 양떼들에게 먹일 수 있도록 예수여 도와주소서.
(예화) 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지금은 작고하신 선생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교회도 개척해서 담임하시고 신학교에서도 가르치시고 집회도 다니시는데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바쁘십니다. 이분 표현에 의하면 죽어라 하고 설교를 준비해 놓으면 톡 써먹고 톡 써먹고 도저히 설교를 준비하는 이일에 자기를 헌신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가 소진 되는 것입니다. 이 분이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나는 이렇게 해서는 주님이 내게 주신 이 많은 일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열흘 동안 금식을 하셨습니다. 기도의 제목은 속 썩이는 장로 내보내거나 교회에 돈이 없으니 큰 헌금이 들어오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오직 둘도 아니고 단 한 가지 ‘하나님 내 눈을 열어 주님의 법에 기이함을 보게 하소서’ 열흘 동안 목숨을 걸고 금식해서 기도했고 어느 날 기도 응답이 주어졌는데 그 이후로 부터는 성경을 펼치기만 하면 신기하게 말씀의 은혜가 밀려오면서 설교의 대지가 또렷하게 생각이 나서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게 전하며 사실 수 있었다는 간증을 저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학식의 차이가 있을 것이고 집안에 있으면서 구할 수 있는 책의 한계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젊은 날처럼 학문에 헌신하기 어려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탐구해서 예전에 선조들이 보지 못했던 진리의 빛을 보여주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이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해 전 저는 충청도 아주 깊은 지역으로 집회를 갔습니다. 많지도 않은 목회자들이 모여서 저에게 세미나를 요청했고 그때에 저는 거기서 서울에서 내려온 지 5년 정도 되는 아주 작은 교회의 후배 목사를 만났습니다. 세미나가 끝나고 개인적인 자리에서 그는 저에게 뜻밖에 고백을 하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 오년간 부목사 생활을 했는데 서울 목회가 얼마나 고달픈지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져서 고통하고 있는 때에 시골 교회에서 청빙이 왔답니다. 그 교회에 갔더니 너무 좋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열대여섯 명밖에 안 되지만 교인들이 모두 순수하고 너무 좋더라는 것입니다. 심방하거나 다른 교회와 경쟁할 일도 없고 열심히 목회하고 설교하고 하면서 한 오년 정도 책도 열심히 읽고 자신을 잘 훈련해서 오년 후에는 다시 한 번 도시에 목회에 도전해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고 했더니 처음에는 그 정신을 가지고 새벽에 나가서 열렬히 기도하고 낮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준비도 했는데 막상 주일이 되어보니 설교를 준비해도 교인들은 자고 안 해도 자고 열심히 준비해도 열다섯 명 안 해도 열다섯 명,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꼭 이렇게까지 설교준비를 해야 하는가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책도 놓게 되었고 그러면서 채마밭이나 가꾸고 닭이나 이십 마리 정도 키워서 친구들 오면 하나씩 잡아먹고 친구 목사님들이 비슷한 처지에서 젊은 목사님들이 월요일 날 나가서 읍내에 가서 볼일이나 보고 오후에는 족대회로 개울이나 훑고 이러면서 오년이나 지났는데 이제는 그럴 리도 없지만 서울에 있는 웬만한 교회에서 자기를 담임목사로 오라해도 도저히 갈 자신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목사님에게 따끔하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그대가 그 나이이니까 이런 반성이라도 하지만 십년 더 지나가면 이런 반성을 옆에서 하는 사람이 짜증스럽게 느껴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기에 당장 그 족대회도 집어 치우고 채마밭도 가꾸지 말고 여기가 수도원이냐? 월요일이면 친구 목사님들과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는 것은 나쁠 것은 없지만 오전에 모여서 열심히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공부를 하십시오. 책을 읽으십시오. 오후에는 같이 점심도 먹고 거기에서 신선한 도전도 받고 다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도시에서 잘 배우고 빤지르한 교인도 예수님이 사랑하는 영혼이고 시골교회에서 당신 설교 아무리 준비해도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영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양떼입니다. 졸아도 졸음을 깨우고서라도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몸부림치다가 죽는 것이 목회의 길이 아닙니까? 제 친구 목사 한 사람이 멀리서 목회하는 분인데 저보고 그런 얘기를 합니다. 김 목사 이 지방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 노인네들뿐입니다. 부 전도사 한 사람 쓸려고 해도 여기는 너무 멀다고 와서 하겠다는 사람이 없답니다. 사례비도 적고 하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비전은 무슨 얼어 죽을 비전인가? 우리가 무슨 장사꾼인가? 그럼 당신은 비전이 없나? 비전이 있으니까 교회도 옮기고 짓고 하는 것이 아닌가? 비전은 무슨 애 하나 더 낳으면 집도 큰 곳으로 옮겨야 되고 팬티라도 하나 더 사야 하는 것처럼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지 젊은이들이 그렇게 그리우면 신촌에다 교회를 개척해야지 왜 이 지방에 있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 때려치우고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홍대 앞에 가서 한번 교회를 세워 봐라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을 이 지방에 부르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사람이 없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을 생산해 내라고 그럽니까? 있는 사람 열심히 목회해야지 하는데 다 노인네들 밖에 없답니다. 그럼 노인네들 밖에 없는데 어떡합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여기 두셨으니 열심히 목회해서 하나하나 죽을 때 품에 안겨서 숨을 거두고 염해서 천국으로 보내고 그렇게 해서 동네 사람들 모두 죽고 나면 당신도 은퇴할 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올수도 있고 당신이 나 있는데 올 수도 있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난 젊은 시절에 그렇게 시골 목회를 노래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도시에 두셨습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외향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 진리의 빛으로 목회하려고 하는지 어떻게 하든지 이 진리의 말씀을 나누어 주어서 사람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는가 거기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한 가지 여기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등잔불에 기름을 공급하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 찧어낸 감람열매였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세멘까띠뜨 라고 나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올리브유인데 감람열매인데 짜내는 것이 아니라 찧어낸 감람유입니다. 까띠뜨 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깨트리다 하는 피동분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올리브유를 채취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올리브를 큰 틀에서 깨트린 다음에 그것을 프레스에다 넣고 꽉 짜면 많은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기름의 양은 많지만 거기 불순물이 섞여 나와서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나오고 불빛이 밝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감람나무 열매를 절구 같은 것으로 깨트리고 으깨면 자연적으로 기름이 흘러 나오게 됩니다. 그것을 한 쪽에서 모아서 채집해서 만든 것이 등불에 쓰는 기름입니다. 기름의 양은 적지만 순수하고 불꽃이 밝고 그을음이 없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기름을 찧어내어 사용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밝게 비취는 그 빛이 진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그 기름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회가 성령의 목회가 되어야 하고 이것을 위해서 목회자인 우리들이 그저 교회를 경영하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의 양떼들에게 우리의 말씀 사역에 영혼을 돌보는 우리의 목양에 하늘로부터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간절히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사람이 만든 제도나 방법위에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위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한 사람을 순전하게 만들고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고 그 진리를 따라 죽도록 헌신하게 하도록 만들어 주어 유혹과 시험이 가득한 목회생활 속에서 오직 올곧고 순전하게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밖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람이 깨트려 열매가 깨트려 지면서 순수한 기름이 흘러나온 것처럼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깊이 깨트려질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와 도움이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때에 진정한 자기 깨어짐이 있고 거기서 하나님을 위해서 진정한 회개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일곱 명의 교인들을 데리고 교회를 개척해서 여러분과 똑같이 힘든 목회의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돌아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만 해드린 목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인 우리들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는 깨트려지지 않고 성도들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목숨을 버리는 희생 없이 성도들이 많이 희생해서 그 덕에 목회가 편안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목회의 일선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기 시작하면 교인들은 겨우 움직입니다. 목회자가 강대에서 눈물을 비처럼 쏟으면 교인들은 겨우 땀을 흘립니다. 드디어 목회자가 피를 쏟으면 그때야 교인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회도 시대 때 유명한 바둑 이야기가 있습니다. 각각의 가문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바둑을 두었고 두다가 한 쪽 사람이 완전히 불리해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바둑이 끝났을 때에 그는 돌을 내려놓으며 바둑에서 진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해서 반상위에 피를 토하고 절명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일본 바둑 사에서 유명한 토혈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바둑을 두다가도 지니까 피를 토하고 반상에 엎드러져 절명을 했다는데 우리는 놀이나 오락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이 곳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목회 사역의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목장이 병들어 갈 때 주님이 사랑하는 양떼들을 우리들이 잘 돌보지 못할 때 우리는 눈물 흘리지 못했고 피를 토하여 절명할 정도로 헌신하지도 않은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처음 우리들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임지로 왔을 때 설레던 마음, 보따리를 풀지도 못하고 강대에 엎드려서 타향살이 같은 이곳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아 잘 목회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뜨거운 눈물로 빌던 그 순수한 부임의 때를 생각해봅시다. 정말 고난이 오고 어려워도 우리는 예수님 생각했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저도 이 시간에 회개합니다. 전도사 때는 그렇게 눈물도 많았고 어느 영혼이 실족했다고 하면 천리를 멀다 마지않고 심방하고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울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목회하고 있나 반성을 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를 불러주시는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여기에 여러분을 두시는 날 동안 정말 헌신해서 우리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