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레24:1-2)
녹취자: 유혁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에서 밝힐 등잔불에 관한 규례로 나오는 성경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짓도록 제시하신 성막의 제도를 따르면 이 성막은 이동식 성전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어디에 정착하든지 머무는 그곳에 제일 먼저 성막을 펼치고 성막 주위에 12지파의 진들이 쳐졌습니다. 어디서든지 볼 수 있었고, 그 위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토록 탁월한 경외심을 가지고 대했던 것과는 달리 물질적 식양으로 본다면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지붕은 물 돼지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직사각형의 방이 울타리에 둘러 쌓여있는 제도였습니다. 큰 방의 크기는 12평 정도였고, 휘장을 지나면 6평 정도의 작은 크기의 방이 하나 더 나오는데 큰 방을 성소, 작은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고,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만 1년 1차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 성막과 이 성막 위에 지붕은 물 돼지가죽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어떠한 창문도 하나님이 만들도록 허락지 않으셨고 따라서 성막 안에 들어가면 캄캄한 어두움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당신을 섬겨야할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시게 함에 있어서 밝은 태양빛을 도움 받아 그 일을 하게 하시지를 않고, 오히려 밖에서 오는 모든 빛을 완전히 차단하여 캄캄하게 하셔서 그 곳에서 오직 등잔불을 밝혀 그 빛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제도를 가르쳐주신 것을 보더라도 무리가 없으신 참 배려심이 깊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성전을 돌이나 나무, 그리고 흙들을 이용해서 지어야 하는 고정식 성전이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행하는 것보다도 성전을 짓고 버리고 떠나는 일에 더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간편하게 텐트처럼 챙겨서 이동하여 펼치기만 하면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는 성막이 되게 하셨으니 얼마나 합리적인 분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당신 섬기게 하지 말고 천당에 뚜껑을 좀 열든지 가장자리에 창문을 내어서 그 빛으로 당신 섬기게 하시면 좋을 텐데 모든 빛을 완벽히 차단하고 오직 이 등잔불에 의해서 당신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정황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빛으로부터 차단되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 이 규례는 우리로 하여금 빛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빛, 히브리 성경에서 ‘오르(אוֹר)’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 그리고 등잔이라고 되어있는 ‘네르(נֵר)’라고 하는 이 단어, 이 단어는 히랍어에서 ‘뤼키노스(λύχνος)’ 혹은 ‘뤼키나(λυχνία)’, 그리고 빛, ‘오르’라고 하는 단어는 ‘포스(φῶς)’로 나옵니다. 그 포스라는 단어가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a)”고 하셨을 때 바로 그 빛 입니다. 인간이 발견한 모든 사물들 가운데 가장 신비한 사물이 있다면 이 빛일 것입니다. 그래서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자기의 어떤 책속에서 이 빛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철학적인 존재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리고 뉴턴은 자기의 광학이라는 책속에서 이 빛의 성질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의하였던 것입니다. 이 빛은 그래서 성경에서 보면 다의적인 의미로 많이 쓰인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세 가지 카테고리로 이 빛이라고 하는 단어의 용례가 나오는데 하나는 물리적인 빛이고 또 하나는 신학적인 빛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인 빛입니다. 물리적인 빛은 그저 빛을 의미하는 것이고, 신학적인 빛은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고, 윤리적인 빛은 그 진리의 기준을 따른 사람들을 향한 거룩한 삶을 표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빛은 구약성경 안에 풍부한 비유의 소재로 사용이 되고, 이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아니라 대부분 신학적으로는 진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이 됩니다. 진리는 엄밀히 말해서 존재와 인식 사이의 걸쳐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나와 상관없이 진리는 언제나 진리일 뿐이지만 그 진리가 나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면 나의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에서 이 진리는 존재와 인식 사이에 걸쳐있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빛도 사실은 존재와 인식 사이를 걸쳐있습니다. 빛이 무엇이냐 하는 규정은 물리학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의 본질이 파장이냐 입자냐 하는 논쟁이 계속되어 왔지만 지금은 그 빛이 파장인 동시에 입자로 알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빛도 가시광선이 있고, 가시광선의 대역을 벗어나는 광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파장이기 때문에 전파의 속도와 똑같이 1초에 30만km를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아는 것은 가시광선 대역에 있는 아주 스펙트럼 중 일부에 국한된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이 빛을 무엇이라고 정의할까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이 빛은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성막에서 당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일체의 빛 없게 하신 것은 오직 이 바깥에서 오는 태양빛이 아니라 등잔의 불빛 하나만을 의존해서 당신을 섬기기를 원하신 것인데 이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수종들고 당신의 선교의 위업들을 이루어갈 때에 우리가 근본적으로 섬겨야 할 도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진리임을 우리들이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에 의해서 진리처럼 떠받들어지는 그 기원 자체를 사람에게 둔 많은 사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에 오직 이 등잔 불빛 하나를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이 목회사역을 감당하는 이 일이 진리를 수종드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가서 교회를 하고 사역을 하는 것을 흔히 목회사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말처럼 애매모호한 말이 없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는 목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사실이고 그리고 그것은 곧 양떼를 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양떼를 친다고 하는 그것이 오늘날에는 원래의 본래 의미들이 쇠퇴되고 지금은 그저 교회를 경영하고 운영하고 사업가처럼 교회를 움직이고 이끌고 하는 그러한 수단가 내지는 경영가 이런 쪽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술을 가지고 전문적인 일들을 해나가면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 교회의 최고 책임자 내지는 교회의 CEO 같은 위치가 부각이 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오늘날도 목회자가 훌륭한 목회자라고 하는 개념이 예전엔 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능하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훌륭한 목회자라는 그 개념이 유능한 목회자라는 개념하고 많이 결합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세상 이치에 대해서 많이 알아서 교회를 성공적으로 경영하고 운영해나가는 말하자면 그런 실질적인 재능이 꽃피워서 열매를 맺게 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훌륭한 목회자, 성공한 목회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그러면 오늘날 우리 목사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이죠. 목사는 철저하게 진리와 관계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리에 말씀, 즉 이 세상에서 철학과 사람의 사상이 인간에게 참 으로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지 못했던 그것을 성경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철학에서 풀지 못했던 길을 보여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것이 이것이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고, 이 일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교회를 운영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사람들을 돌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모든 것 중심에는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가 자리하고 있어야지 그 사역의 독특성이 확보되는 것이지 진리와 상관없이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한 6,7년 전이었습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비서실에 연락이 왔습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해요. 저는 제 얼굴이 막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힘들어 하는 사람이거든요. 어떤 때는 토할 것 같은 그런 감정을 느껴요. 정말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이제 그렇게 해주는 것이 좋을까 그리고 인제 한 번 알아보라 그랬더니 선교적으로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고 그래요. 그래서 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잡지는 기독교 잡지가 아니라 일반 잡지였습니다. 돌아가면서 종교, 정치, 체육, 문화, 예술, 이렇게 돌아가면서 거기에서 좀 어떤 사람들 한 사람씩 인터뷰해서 표지에다 싣고 심층기사를 하는데, 취재 온 사람들도 불신자였습니다. 그래서 한 한 시간동안 자기네는 묻고 나는 대답하고 그러면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대부분 내용이 전도에 대한 것 아니겠어요? 왜 예수를 믿어야 됩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나는 이야기하고 다했죠. 한 시간 좀 넘게 인터뷰를 했는데 그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신부님들도 인터뷰하고 개신교 목사님들 많이 인터뷰했거든요?” 그래서 “그런데요?” 그러니까 “그런데 목사님은 목사님 같지 않아요?” 그럼 “무엇 같아요?” 그러니까 “스님 같으세요.” 정확하게 말하면 “고승같으세요.” 그래서 그때 내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면 ‘이 불신자의 눈에 스님들은 철학과 가깝게 느껴지고 개신교 목사들은 사업가와 가깝게 느껴지는구나.’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 사람 한 사람한테만 들은 게 아니라 몇 사람한테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이 목사라고 하는 성직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목사는 누구일까? 나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과 그리고 걸출한 복음주의자들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있을 목사에 대한 Definition을 이렇게 내려요. 목사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다가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손이라고 말입니다. 사도들의 후예라고 말입니다. 결국은 예언자들이 외쳤던 것, 그리고 사도들이 땅 끝까지 전파하고자 하였던 것, 모두 하나님의 지혜였고, 그것은 곧 성경에 실린 성경에 기록된 거룩한 빛인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결국은 하나님이 이렇게 등잔불빛을 의지하여 하게 한 것은 우리의 목회사역과 모든 것이 그 기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와 모든 섬김의 그 빛이 진리의 빛이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목회를 할 사람들은 어떤 일에 유능한 사람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사람일수도 있고, 학문이 뛰어난 사람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사람들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진리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죠. 그러면 이 진리의 빛을 자신이 받고 그 진리의 빛 아래서 사는 기쁨을 알고 그 진리를 떠나서 사는 삶의 비참을 동시에 자각한 사람이 이 진리의 빛을 몰라서 어둠 속에서 고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베푸는 것이 이게 목회라고 하는 것이죠. 나는 목회가 무엇이냐고 묻는 모든 사람들에게 목회는 정확하게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계승한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으니 목회자는 전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을 위해서는 이 성경은 하나님이 네 가지의 목적으로 주셨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딤후3:16), 이것을 위해서 주신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을 향해 목회를 할 때에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훈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삶을 위한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목회자는 진리를 알고 자신이 그 진리대로 살아간 사람이어야지 귀로 듣고 와서 입으로 전달해주는 장사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학을 무엇이라고 Definition 하십니까? 나는 이 신학을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 페트로스판 마스트리우트와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통을 이어서 나의 설명을 보태어서 나는 이 신학을 삼위일체적으로 정의합니다. 신학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이다. vivendi Deo,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신학은 사는 것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1차적인 관심이 이걸 가지고 논쟁하고 그리고 이걸 가지고 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살라고 주신 것이죠. 목사의 제일가는 기능은 그들에게 교훈하는, 못살았을 때는 심하게 책망을 해서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하는 것을 꾸짖을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그 길을 올바르게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거룩한 뜻을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의지를 좇는 생활을 하도록 그를 의로 교육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회직의 본질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은 진리와 탁월하게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러면 도대체 진리라고 하는 그 망망바다와 같은 개념을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이죠. 이 진리는 망망대해와 같이 한 없이 넓은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는 하나를 중심점으로 그 진리의 성분들이 파편처럼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것이죠. 그리고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이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진리 자체를 인식하는 우리 인식기능 자체에 중대한 문제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소위 얘기하는 Imago Dei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이 Imago의 개념은 테르툴리아누스와 이레나이우스 같은 사람들은 이것을 형상과 모양을 나누어 보면서 하나는 우리의 정선적의 영적인 측면이고, 하나는 우리의 육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을 뜻한다고 말했는데 상당히 플라톤주의의 물들어 있는 모습을 보이죠. 그러다가 이것들이 발전을 하면서 중세에 와서는 이것들이 이제 원의의 개념을 도입을 합니다. 그래서 이 형상과 모양이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연적인 본성의 영적 기능이 있고 하나님이 원래 우리에게 주셨던 원의가 있는데 이 원의 자체는 타락으로 사라졌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에게 주신 기본적인 기능들은 살아있다 라고 보는 것이죠. 루터 쪽으로 넘어가서는 종교개혁시대 와서는 형상 개념 자체를 이렇게, 말하자면 두 가지로 나누어 보는, 스콜라주의 후기에는 이것을 하나를 열등한 기능에, 그 다음에 또 하나를 고급한 기능의 것으로 보고 고급한 기능에 의해서 열등한 기능들이 통제되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다라는 개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마르틴 루터는 이 양분된 개념들을 모두 폐기해 버리고 하나로 묶어서 그것은 자체로 소위 얘기하는 ‘justia originalis’ 즉, 원의다. 그래서 이 원의는 타락과 함께 모두 깡그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그렇게 되면 타락한 이후에 인간은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구분점이 없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칼빈과 이후에 오면서 이런 작업들이 조정이 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종합적으로 whole man의 개념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이 하나님의 형상의 개념 속에서 원의는 사라졌고 하나님이 주신 영혼의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이 되는 그런 기능들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에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 구속과 중생으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의 형상은 회복되었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은 성화를 통해서 온전한 형상으로 다시 회복되어져 간다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본 것이죠. 아무튼지 간에 어떠하든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의 영혼의 기능에 중대한 하자가 생겼고, 이는 진리를 보는 상당한 어려움들을 내포하게 되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하나님 의지하는 마음 없이는 누구도 인간의 맨 지성으로서는 하나님을 아는 참다운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그것만이 아니죠. 하나님의 일반계시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모든 자연세계의 사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이런 모든 자연세계의 사물들이 죄로 말미암아서 상호 교통이 끊어지면서 이 모든 것들은 본래 하나님이 창조세계 속에 유기적으로 충만하게 깃들게 하셨던 하나님의 신적인 영광을 하나님이 거두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흔적들만 남아있는 것이죠. 그 흔적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소위 얘기하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아내는 지청적 작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그 모든 사물들이 본래에 찬란하게 전달해주던 자기를 지으신 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하는 그 모든 영광의 아름다운 빛들은 현저히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두 가지 모두의 객관적으로 계시의 도구들이 주관적으로는 인식하는 주체가 원래의 완전한 상태에서 멀어져 버렸기 때문에 우리들이 자연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 일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정말 그 죄인이라고 하는 정죄의 사실 같은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고, 그 흔적들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 양심으로 남아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런 계시의 도움이 없이는 자기가 정말 비참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바로 그 사랑의 표현으로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고 하는 것 같은 것들을 우리들이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자연신학의 한계와 그리고 유익을 우리는 동시에 인정하게 되는 것이죠. 이 진리는 파편처럼 이 모든 세계와 자연 속에 아주 아름답게 흩어져 있기 때문에 자연의 세계를 잘 관찰하기만 해도 정말 이것이 우연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의 어떤 필연성들을 읽게 만들어주는 유신론적인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하나님의 살아계신 그 증거, 사실 이것은 아름다움의 파편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모여서 아주 아름다운 집적을 이루고 있는 엑기스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성경을 사랑하고 이 성경의 진리가 모든 진리의 정수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이 모든 진리의 정수인 성경, 성경의 진수이신 성육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외연으로서 성경, 성경의 외연으로서의 이 세상에 있는 일반학문의 지식들의 진리의 성격들을 통전적으로 공부해갈 때에 여러분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성경을 여러분에게 주신 그 목적을 교회 안에서 계승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을 방문했는데 어느 잡지에 ‘Preaching’이라고 하는 잡지의 뒷면에 어느 신학교가 자기 학교에서 신학생을 모집한다고 전면 광고를 썼습니다. 너무 인상적이었던 것이 그냥 깨끗한 표지에 다 낡은 강대의자 하나가 놓여있습니다. 한 3~4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낡은 의자가 하나 있고, 맨 위에 캡션이 뭐라고 나왔냐면 It’s not an easy chair 이렇게 나왔습니다. 이 의자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학교로 오십시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목사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오늘 목사가 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관련짓자면 진리와 관계 하여서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럼 이 진리를 목회사역과 관련짓는다면 여러분의 사명은 이 빛을 교회 안에 가득하게 하여 이 빛에 도움을 받으며 성도들을 섬겨서 그 성도들이 이 빛을 가득 품은 사람들로서 이 세상에 나아가서 빛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목회자가 되려고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옛날에 주님을 한 번 깊이 만나서 은혜를 받고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들을 가지고 너무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겨우 출발일 뿐이고 시작일 뿐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출발했어도 출발한 그 폼보고 등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성공적으로 자신의 경주를 일평생 달려가느냐에 달린 것이죠. 여러분이 평생 목회하면서 자기가 목사 될 소명 받았을 때에 가슴이 뜨겁고 눈물 펑펑 흘렸던 그 간증만 하면서 목회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면 여러분은 처절하도록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의 첫 번째 자격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의 진리를 잘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잘 믿고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서 매일 아침 성경을 펼치고 조용히 학교에 가서 읽으면 아멘 하고 이 마음속에서 그 깊은 영혼의 동의, 지성의 기쁨들이 일어나서 그 진리를 꽉 붙들고 사랑하고 거기에다 나의 삶을 붙들어 매고 싶은 거룩한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 신학활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것입니다. 찔리는 질문 하나 해볼까요? 여러분이 여기 와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학교가 대단히 발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그런데 여러분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최근에 성경을 읽으면서 정말 진리가 아름답다 그래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에요?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성경은 특별계시입니다. 이 특별계시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많은 연관학문들을 공부하여야 하는 것이죠. 특별히 신학자체에 있는 학문들, 성서학, 그 다음에 역사학, 성서신학, 역사신학, 교의신학 혹은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 등등의 학문을 철저히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 원어를 공부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여러분 때에 안하면 절대 못해요. 여러분 중에서 히브리어와 히랍어 성경을 그래도 떠듬떠듬이라도 볼 수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요. 여러분이 만약에 그 공부를 안 하고 목회를 하려고 그러면 해부도면을 못 읽으면서 수술을 하려고 하는 의사 같은 사람입니다. 이 젊은 나이에 왜 못해요? 치열하게 공부해서 성경의 원어를 펼치고 해야죠. 어떤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한 시간 내내 바나바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그가 권위자라는 말을 설교했는데 시종일관 Authority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웃지 않는 것 보니까 여러분도 혐의가 있습니다. 집에 가서 찾아보세요. 이런 것들은 성경 원어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절실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되요. 한 시대를 움직였던 위대한 인물들은 탁월하게 공부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도 아니고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 한 획을 그었던 중요한 인물들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신앙의 경험과 학문의 치열한 탐구를 겸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야 되요. 얼마나 공부할게 많은지 말도 못해요. 나는 여러분이 이렇게 게으르게 사는 것을 보면 화가 나요. 저 아까운 시간에 왜 저러고 살까? 매년 와서 내가 하는 이야기지만 여러분 때에는 1년도 짧아 한 학기에 한 키씩 책을 읽어야 되요. 한 키씩. 집에 가서 입학한 다음에 여태까지 읽은 책이 레포트 쓸려고 읽지도 않고 날려가듯이 베낀 것 말고 몇 권이나 읽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라 이것입니다. 재미로 읽은 소설책이나 그런 잡지 같은 것 집어치우고 순수 신학책을 말입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십대 때 얼마나 공부했는지 생명의 위기가 올 정도로 그렇게 공부를 했고 그리고 황금의 입으로 불리는 요한 크리소스톰도 십대 때 그렇게 공부를 했습니다. 마지막 동방교부의 신학자 다마스커스 요한은 황금의 청산유수라고 불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걸출한 사상가요 철학자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수는 열심으로 치열하게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때에 6시간 이상 자면 죄짓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어요? 잘 것 자고 먹을 것 다 자고 학문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취미생활도 그렇게 해서는 안돼요. 한 4시간 자고 그리고 먹는 시간 노는 시간 다 잘라버리고 기도와 학문에 온전히 쏟아 부어야 되요. 거의 고시 공부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되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거를 최소한 5년 정도는 그렇게 쏟아 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도 5년. 교회 봉사 다 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치열하게 공부해야 되요. 대학원생들 만나서 이야기 해보면 참 걱정돼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미안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니까 가서 그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치열하게 공부해야 되요. 신학에 있어서 조직신학과 성서학, 그리고 역사신학, 실천신학은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될 것이고, 여기에서 멎으면 안 되고 외연을 뻗어나가서 특별계시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보석과 같은 것입니다. 보석상에 가면 이 다이아몬드를 허연 종이 위에다 놓는 것이 아니라 까만 벨벳 위에다 올려놓는 것처럼 일반학문들을 공부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이야기하는 문사철로 이야기 되는 문학, 역사, 철학 이런 것들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상당한 정도까지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헛되이 흘려버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지나간 시간들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그래서 깊이 들이파서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은 마치 일평생 목회하는 사람이 부전공처럼 공부를 해야 되요. 가까이 두고 옛날에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만이 아니라 현대의 우리가 동의하기 어려운 그러한 소위 언어철학과 분석철학에 이르기까지 왜 사상이 이렇게 흘러 왔는가? 특별히 요즘에 와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사상적 배경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니체의 철학이나 하이데커, 사르트르 이런 사람들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루어지는 이 철학, 그리고 요즘와선 철학과 물리학의 융합 같은 것들에 대해서 깊이 이해를 해야 되요. 전문적인 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그저 중견학자하고 앉아서 열 서른 시간동안 대화를 해도 대화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해야 된다 이것입니다.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여러분이 모르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죠. 진중권씨가 트위터에다가 그런 글을 올렸다고 신문에 나왔습니다. 기독교에 지역 방언화 현상이 너무 심각해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방언을 해도 그래도 말귀는 알아듣는데 이제는 언어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얘기를 해요. 우리들이 학문은 신학은 계시로 한다고 할지라도 이 계시의 말씀을 풀어내는 이 학문의 형태는 계몽주의의 언어와 방식을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세 말기부터 이어지는 13세기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르네상스와 휴머니즘, 그 다음에 남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던 예수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와 북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던 지성적 인문주의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너무너무 중요하고 이런 것들이 결국은 종교개혁 운동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이후에 이어져온 개신교의 역사들이 그리고 개신교 역사들뿐만 아니라 개신교에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 세력들 역시도 이런 인문주의 사상에 의해서 토대를 깔고 현대사상들이 전개되어 내려온 것이거든요. 그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지만 우리끼리 하는 언어인데도 우리끼리 있을 때는 괜찮은데 이 언어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을 해서 소통이 되게 하고 그들에게 이 기독교의 지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고, 이 세계를 통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인류가 만들어 낸, 만들어냈다기 보단 인류가 발견한 가장 위대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여러분이 깊이 이해하는 한 시대의 지성인으로서 세상이라는 대양 위에 교회라는 배를 몰고 항해하는 항해사입니다. 그리고 이 바다는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시대의 조류라고 하는 것을 따라서 흐르고 있고, 이 세상에서의 풍조라고 하는 것들이 끊임없는 파도가 되어서 이 교회라고 하는 배에 부딪히고 이 속에서 조류를 타고 파도를 뚫으며 그러면서 이 대양을 가로지르며 어디론가 자신이 확고하게 하나님이 부르시는 귀향지가 있다고 믿고 교회와 이 성도들을 끌고 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 기독교 사역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christian philosopher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지식 속에서 그 믿음의 길을 가는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오늘날의 신학 교육은 여러분이 교육을 받지만 통합의 기능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목회하고 설교하는 현실과 연결이 되질 않아요. 그러면 이것들은 결국은 훌륭한 선생님이 있어서 보여주시면 될 텐데 목회 속에서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될 몫이 되는 것이죠. 저는 지난해에 웨스트민스터 서부 신학교를 방문해서 마이클 호튼 교수와 총장님을 비롯해서 몇몇 교수들을 만났습니다. 같이 대화하는 가운데 내가 이런 조크를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들이 굉장히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웃었고 마지막에는 우리 모두가 우울해졌죠. 어느 성도가 성경을 읽다가 너무 어려우니까 목사님한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이거는 너무 어려워서 목회자들이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를 찾으라고 했대요. 그래서 신학자를 찾아가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내용 좀 물어보고 싶다고 그러니까 교수님이 미안한데 전 조직신학이라서 성경은 잘 모릅니다. 그랬대요. 그럼 어떡하냐 그러니까 다른 전공을 찾지 말고 성서학을 전공한 교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성서학 전공한 교수를 찾아가서 물어봤더니 또 그러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성서학을 전공하긴 했는데 구약을 했기 때문에 신약은 잘 모릅니다. 그럼 어떡하냐 했더니 신약 성서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래요. 신약 성서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봤더니 그 분이 또 하는 말이 정말 미안합니다. 제가 공관복음서 전공입니다. 뭐 어떻게 해야됩니까? 하니 바울 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신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아갔더니 바울 신학을 한 사람이 맞아요. 아 이 사람한테는 답을 들을 수 있겠구나 그랬더니 이사람 하는 얘기가 미안합니다. 제 전공은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그러더라고요. 로마서는 잘 모른다고 그러더래요. 그럼 어떡하냐 그러니까 로마서를 전공한 사람을 찾아가래요. 가까스로 찾았습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 전공하셨다면서요? 이것 좀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몇 장입니까? 그러니까 8장인데요. 그러니까 아 미안합니다. 제가 9장을 전공했습니다. 이 얘기가 뭘 보여주냐 하면 통합의 기능이 사라져가는데 이게 신학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사실은 계몽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근대주의가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기계론적 세계관들이 들어오면서 모든 학문들이 다 갈기갈기 찢어졌고, 그래서 결국은 옆에서 뭘 하는지를 모르고 그렇게 옆에 것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오늘날 권위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가 깊을 博자 박사가 아니라 얇을 薄자 박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목회에서는 사실 이런 종류의 학문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의 찢고 쪼개져서 산산이 조각이 되서 파편화된 전문적인 지식 예를 들면 내가 요한복음 3장 16절 한 절을 20년 동안 연구했다면 그 한절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회는 그것 하나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세상의 철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교회의 역사 속에서 누가 무슨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해석하고 한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의미를 체득하고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던져주어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학문은 훨씬 더 포괄적이고 통합적이고 통전적인 형태가 되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슐라이에르마허 이후로 이 신학계 안에서 똑같이 이 모든 것들이 다 소위 이야기 하는 한 학재 간에 벽이 생기면서 단절이 도입되고 그러면서 단절된 가운데 그 자체로만 심화되어 간 것이죠. 그것들이 유익이 있을 수 있을 진 모르지만 목회를 위해서 유익을 주는 면들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들이 일반학문을 배울 때도 이런 식으로 공부하고 신학교에 와서도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하니까 나중에 목회현장에 나가보면 목회현장이 수요일은 조직신학 신론 강의하고 금요일은 실천신학 교육학 강의하고, 이런 것이 아니거든요. 이걸 전부다 묶어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이것이 바로 목회자가 해야 될 일이고 그런 진리를 따라 살아갈 때에 어떤 사람이 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회자의 존재의 가치거든요. 이런 것들이 오늘날 너무나 신학의 본질로부터 현저하게 멀어져서 신학의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이 아닌 또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죠. 이렇게 해서 우리들이 신학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죠. 어쨌든 여러분은 이 진리를 향해서 깊이 매진하고 그리고 치열하게 공부해서 신학교 다닐 때에 그래도 한두 번쯤은 공부를 하다가 병원에 실려 갔어야지(웃음) 아니 왜 웃어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정도는 되었어야죠. 어떤 학생들은 교수는 다섯줄로 문제를 냈는데 답은 세 줄을 쓰고 나가요. 그런 사람들이 소명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고는 나중에 목회자가 된 다음에는 모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학생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목회자가 된 다음에 그렇게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교인들이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진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뻥치는 것이죠. 그렇게 하고 살아가요. 그렇게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세요. 오늘 여러분이 낭비하면서 성경과 학문을 치열하게 탐구하지 않으면 나중에 쓸모없는 목회자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것입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되요.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넘어가겠습니다. 또 하나 오늘 이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이 등불을 밝히는 기름입니다. 이 기름은 올리브를 짜서 만든 올리브에서 나오는 그 기름이고 이 기름이 불을 붙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서 빛나는 찬란한 불빛이 진리를 예표하는 것이라면 이 진리의 불빛이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은 기름이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러면 이 결국은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긴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지식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8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지식은 결국 사람을 교만하게 하기 마련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학문 활동이 끊임없이 성령의 은혜에 깊이 잠기는 실질적인 은혜의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학문이 되기 어려운 것이죠. 신학을 기껏 가르쳐놓으니까 칼을 만들어 가지고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복음주의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목에다가 칼을 겨눕니다. 물론 복음주의도 잘못하는 게 있을 테니까 고쳐주어야 되겠죠. 그렇지만 큰 칼을 만들었으면 갖고 가서 이교를 향해 휘두르고 세속주의를 향해 휘두르고 이 세상과 한판 뜰 생각을 해야지 교회 안에서 그것도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는 신실한 형제들을 향해서 공격을 하는데 그게 결국은 오늘날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주업이 되고 말았죠. 왜? 세상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것이 없고 이 세상의 비진리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같은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끼리 그 칼을 만들어서 목에다가 겨누는 것이죠. 이것이 과연 정직한 학문 활동이라고 우리가 공정한 학문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죠. 그래서 치열하게 공부할 뿐만 아니라 항상 이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성령의 놀라운 사랑에 붙잡혀서 여러분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감람을 찧어낸 기름으로 순결한 기름으로 등잔불을 밝히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쎄멘 자이트 자크 카티트(כָּתִ֖ית זָ֛ךְ זַ֥יִת שֶׁ֣מֶן)’ 히브리어 단어들이 나와요. ‘쎄멘’은 기름이고 ‘자이트’는 감람입니다. ‘자크’는 순결함이고 그런데 ‘카티트’라는 말이 나와요. 카타트(כָּתַת)라는 히브리어의 피동남성분사입니다. 카타트는 break, beat 이런 뜻입니다. 직역을 하자면 깨뜨리어진 감람의 기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람기름을 짜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맷돌 같은 데에다가 이 감람을 갈아서 그래서 이거를 프레스에다 넣고 꽉 눌러서 기름을 짜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름의 양이 많이 나오죠. 그 대신 기름에는 어차피 불순물들이 섞여 나오게 되어 있잖아요? 양은 많을지 모르지만 고급의 기름이라고 할 수 없고 이 기름을 밝힐 때 거기서 그을음이 나오는 것이죠. 그런데 이 절구 같은 데에 빻아가지고 딱 깨뜨리면 거기서 자연적으로 그 기름이 흘러나오는데 그것만을 한쪽에 흘러나오게 해서 채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감람을 깨뜨려 채집한 기름입니다. 이건 순도가 높고 아주 순결해서 성전의 등불을 밝히는데 이 기름을 사용했던 것이죠. 이것은 결국 무엇을 예표하느냐 하면 목회자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리로 수종을 든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지식을 습득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듯이 선심 쓰듯이 나누어주는 그런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진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가르쳐주고 그 모든 것에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면 이 진리는 인식한다고 할 때에는 누구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도덕적 진리일 경우에는 이 진리를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인식하는 즉시 이 진리에 의해서 인정을 받거나 책망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해요. 그러면 이 진리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이야 말로 신학활동의 가장 중요한 한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되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뜨려져서 자기가 그 진리에 합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뉘우치고 회개하고 새로워지는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하고 명상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하여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서 신학자가 되어가는 것이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이 진리를 향해 부단한 몸부림 속에서 죄에 대한 사랑에 대해 자기가 죽고 자기 의에 대해서 자기가 깨뜨려지고 해서 자아사랑이 끊임없이 파괴되는 가운데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며 이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사람을 향한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향해서 살아가려고 하는 삶에 대한 욕구와 동반하여 이 학문의 진리들을 탐구해가는 총체적인 활동이 신학활동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라야 되요. 그 자신의 온 전 존재로 삶을 던지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가고 그 속에서 진리를 얻어서 그래서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사역이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들이 문학작품을 가끔 보지만 그 문학작품이 모두 두껍게 쓴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작품이 아니죠. 어떤 것은 그저 코미디나 시트콤에나 나오면 적합할 내용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의 작품은 우리의영혼의 시선을 잡아끕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근본적으로 묻게 만듭니다. 이런 작가들의 공통점은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다닌 이 정신적인 순례가 있었던 사람들이 이런 작품들을 쓸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것들의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나 그리고 지적인 측면에 있어서나 인격적인 측면에 있어서나 우리는 지금 훈련받는 때이고 우리는 비상하리만치 탁월하도록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인격적으로 학문적으로 신앙적으로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영적으로 진보를 이루어서 옛사람을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부수어 버리고 주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모습을 본받아 가는 가운데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모든 질들이 이 진리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그래서 마치 그 진리가 나의 진리인 것처럼 내가 진리의 소유인 것처럼 내가 진리를 붙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진리가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런 진리와의 혼연일체 속에서 우리들이 믿음생활을 해나가고 이런 점에 있어서 진력하여서 자신의 진보를 탁월하게 이루어야 할 시기가 이 시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태만입니다 태만. 잘 것 다 자고 가고 싶은데 다 가고 볼 것 다 보고 쉴 것 다 쉬고 먹을 것 다 먹고 그러고 여러분이 어떻게 공부할 수 있겠어요? 거의 여러분은 수도사적인 정신을 가지고 이 신학교시절을 지나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땀을 흘리고 공부하지 않으면 30년 후의 목회현장에서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일본의 바둑의 역사가운데에 유명한 토혈국이라는 기보가 전해져 내려와요. 아직까지도 역사 속에 그 기보가 전해져 내려와요. 정치적으로 양쪽 산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바둑을 두었고 그리고 한쪽이 불계로 지게 되었습니다. 이 게임이 끝났을 때 그는 너무 억울해서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고 바둑판 위에 엎드러져서 절명을 했습니다. 칼로 찌른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바둑에 졌다는 억울한 감정이 피가 솟구치게 해서 토하고 바둑판 위에 엎드러져서 절명을 했다 이 이야기입니다. 아니 게임을 하는 사람들도 몰입을 하면 그렇게 한 게임 졌다고 피를 토하고 죽는데 신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 이것이죠. 독서의 양이나 기도의 열심, 전도에 대한 열의 이런 것들이 현저하게 약해요. 내가 7년 동안 매일 그렇게 했다고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예전 신학교 다닐 때 10시 10분, 10시 30분 되서 학교에서 나오면 간절히 채플실에서 기도하고 전도지 한 묶음 가지고와서 전철에서 집에 올 때까지 계속 나눠주면서 전도했습니다. 깡패들이 끌고가려고 그러기도 하고 그런 봉변들도 몇 번 당했습니다. 아니 무엇이든지 전도면 전도, 기도면 기도, 말씀이면 말씀, 아니면 공부면 공부 치열하도록 그렇게 해서 피를 토하듯이 공부를 해야 되는 것 아니에요?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의 이야기 속에서 요세푸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의 위대함은 군인들에게 있었다 그래요. 군인들이 군인다움을 잃어버렸을 때에 로마는 쇠망하기 시작했는데 한창 전성기 때에 로마의 군인들은 어떠했느냐, 로마의 군인들에게는 전투와 훈련이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에게 훈련은 전투는 피 흘리는 훈련이었고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투였다고 했습니다. 치열하게 공부해야되요. 한 가지만 마지막으로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학문이 없이 무지한 목회자가 진실한 주의 종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 하진 않아요. 그러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워요. 그러면 공부를 많이 하면 무조건 진실한 종이 되느냐 그렇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무지하면서도 진리에 무지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정직한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힘듭니다. 왜 그런 힘든 길을 가려고 해요? 치열하게 그래서 한 학기 시험이 마치면 몇 사람은 병원에 응급실에 가야돼요. 아니 여러분은 웃지만 나는 추호도 웃음이 나오지 않아요. 그리고 치열하게 공부하기를 이 신학교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목회하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계속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제가 살아온 삶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와는 비교될 수 없는 열심히 이런 삶을 살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