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기독교 선비로 살다가 죽다
녹취자 : 오희열
Ⅰ. 들어가는 말
이제 여러분이 졸업을 하고 목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목회자가 무엇인지, 여러분은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교회를 개척하고 5년이 지난 후에야 목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겨우 윤곽을 뜰 수 있었습니다. 목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특히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다기화된 사회에 있어서 목회자를 향한 선교적인 요구와 활동에 대한 기대는 아주 다양하게 분출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개혁신학적인 확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목사는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청교도와 개혁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목사란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피뿌리고 죽어갔던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땅 끝까지 선교하다가 죽은 사도들의 후예이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하기를, “The servant of The Word of God”,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고 했고, 그 후로 약 100년 뒤에 존 오웬은 자신의 정체성을, “The servant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하나님의 말씀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 이것이 바로 목사의 정체성입니다.
Ⅱ. 목회자를 세우신 목적
A. 목회자직의 이중적 목적
하나님이 목사를 세우신 목적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계승합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이중적이라고 디모데후서에 나타나는데, 첫째는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 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받게 하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목회자는 바로 그렇게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계승합니다.
1. 불신자를 믿어 구원받게 함(딤후 3:15)
그래서 첫째로는, 목사는 전도자입니다. 끊임없이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복음을 전한다는 말에 크게 두 가지 동사가 사용되는데, ‘케렉소’라는 단어와 ‘요안겔리조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요안겔리조마이’는 사람들이 수근 수근하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케렉소’는 많은 공중들을 향하여 인생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복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일인,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직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아주 정확하게 설교하고 그것을 통해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을 믿고 싶도록 하는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함(딤후 3:17)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인데, 첫째는 그의 인격과 성품을 참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바로 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형상, 아들의 형상이라는 말을 동의어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서 온전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선하신 분으로써 당신 스스로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계에 목표를 정하셨기 때문에 그 자체도 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 자체이신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의 선과 모순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타락함으로 인간이 그 선에서 떠났고 그 인간을 참된 선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B. 진리를 위한 사명
1. 실존의 아우라(aura)
목회자는 바로 이런 일을 이 세상에 있는 권력이나 혹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을 통해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가지고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 자신은 진리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학문을 통해 탐구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학문이 그 진리의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진리를 향하여 산다”고 할 때, 그렇게 살기 때문에 독특한 향취가 납니다. 이것을 ‘아우라(aura)’라고 말합니다. ‘아우라’를 일본말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아우라’는 라틴어입니다. 영어로는 ‘오라’입니다. 이것은 ‘영기’, ‘영적인 기운’입니다. 혹은 ‘영적인 기풍’입니다. ‘아우라’는 그 사람의 독특한 실존 때문에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풍겨나는 그 어떤 메시지가 이 존재 속에 담겨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목회자로서의 아우라를 가지고 그가 하는 일은 이 진리를 ‘설교’라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선포하고 자신이 가르치고자하는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실존을 통해서, 그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개척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개척을 두려워서 꿈꾸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개척을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획을 세웁니다. 기도는 어떤 권사님들이 해주고, 돈은 어떤 장로님들이 대주고, 코어 멤버는 집사들 중에서 선택을 하는 등등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이렇게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거기가 신도시든지 광야든지, 청빙 받아서 간 곳이 수천 명의 교인이 있는 예배당이든지 간에, 목회자의 실존 자체가 이 진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을 사람들을 향해 쏟아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는, 그 어떤 신적인 강제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습니까? 소위 말하는 ‘아낭케(anatkh)’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숙명’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기가 광야이면 어떻습니까? 거기서 외치다가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수천 명이 있는 교회에 갔어도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거기 사람들의 모인 수가 자기의 영광입니까? 진리의 참된 효용가치는 대중이 이용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이용을 하든지 안 하든지, 심지어 사람들이 말귀를 알아듣든지, 알아듣지 못하든지 진리는 진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 진리에 사무쳤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골수에 사무쳐서 답답해 죽을 것 같은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단 한 명을 놓고서라도 이것을 외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목사가 되는 사람입니다.
2. Kerygma와 Didache
초대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고, 그 후에 사도들이 설교자로서는, 성령강림사건이 기독교적으로는 설교자를 양성해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토해냅니다. 그 토해낸 것이 ‘케리그마’입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에 대한 장중한 선포, 핵심적인 진리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그중에 중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재림 등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C. H. 다드(C. H. Dodd, 1884-1973)라는 사람이 유명한 책을 한 권 씁니다. The apostolic of preaching and development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케리그마’와 ‘디다케’를 나눕니다. ‘디다케’는 여러분이 아시듯이 ‘디다스코’라는 ‘가르치다’에서 온 것입니다.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나누면서, ‘케리그마’는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공중적 선포이고, ‘디다케’는 이미 예수를 믿은 교인들에 대한 ‘에티카’ 즉, ‘교훈’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부터 약 20년이 지나면서 이런 이론들을 신뢰할 수 없는다는 반론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유는, 과연 성경에서 ‘케리그마’와 ‘디다케’를 이렇게 칼처럼 나눌 수 있는가? 왜냐하면 ‘케리그마’와 ‘디다케’는 C. H 다드에 의하면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나뉜다고 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케리그마’와 ‘디다케’가 계속 섞여서 나타납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이외에 어떤 서선이 불신자에게 쓰여진 서신이겠습니까? 모두 교회들에게, 혹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물론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썼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서신서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보낸 편지, 예를 들면 에베소서 5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생축과 제물로 드리셨다는 ‘케리그마’가 나오고,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케리그마’와 ‘디다케’가 계속 꽈배기처럼 섞이면서 나옵니다. 모든 윤리가 ‘케리그마’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케리그마’에 대한 감동이 윤리와 함께 엮어지면서 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신약의 선포와 윤리에 관한 구조입니다.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진리를 설교하는 것이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말한다면, 이 진리는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한 목회자를 움직여서 그로 하여금 진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가? 그것이 바로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Ⅲ. 목회자가 되는 길: 그리스도와의 만남
목회자가 되는 길은, 외적으로 본다면 코스를 밟아야 합니다. 대학을 나와서 목사후보생 고시를 보고, 노회의 추천을 받고, 총신 신대원에 합격을 해서 3년의 학점을 이수해야합니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해에 강도사 고시를 보면 그 다음해에 목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목사입니까? 마치 중세의 길드처럼 조합에서 과정을 밟아서 면허를 딴 것이지 그것이 진짜 목사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목사는 어떻게 되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A. 십자가와 부활사건
우리는 이 모본을 사도바울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는 성장배경에 세 가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 종교적으로는 주다인, 문화적, 학문적으로는 헬레니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배경 속에서 살아온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아주 엄격하게 율법을 따르는 유대교 지파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허망한 풍설이 도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풍설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의 강력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심리적인 편견은, 유대인 이외에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라는 편견이었고, 신학적인 편견은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는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가진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메섹에서 들려오는 기독교 선교에 관한 소식을 들으면서 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갑니다. 그 길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부활한 예수였습니다. 만약에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다면 사울이 부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팩트가 대립을 이룹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다는 사실과, 지금 살아나신, 부활하신 분으로서 자신 앞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사울은 이미 유대인의 관례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무슨 의미인지 신학적으로 설득당한 사람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형시키라고 하지 않고 굳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사형 방법입니다. 죽이면 되는 것인데, 왜 그 방법까지 제시했는지, 이것은 하나의 신학적인 음모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신명기 28장에 따라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신학적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방식으로 죽이게 되면 억울한 모함으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나무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정치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죽음이었다는 것을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못박아 두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의 죽음은 신적 저주의 죽음이고, 그래서 우리 인간이 그 의미를 뒤바꿔 놓을 수 없는 신학적 결론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새겨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그 구도를 따라서 하나의 팩트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 그런데 문제는 ‘resurrection’이었습니다.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에녹이 65세에 무드셀라를 낳고 300년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전통에 있어서는 모세조차도 부활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켰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했다고 보았습니다. 엘리야가 살아있는 채로 병거를 타고 하늘나라로 갑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정하신 죽음을 비껴가거나 그 죽음을 딛고 부활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엄청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두 가지 팩트가 합의 할 수 없이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인정하실 리가 없으니 다시 살아나실 리가 없고, 다시 살아나실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하실 분이라면 저주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을 경험하고 있던 그 때에, 지성에 벼락을 때리는 것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였습니다. 이 충격적인 선언이 주어지면서 한 줄기 강력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빛은 ‘대속의 교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 두 가지 팩트가 모두 진실일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신 것, 모두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 저주의 이유가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류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이 두 가지 팩트를 연결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도바울의 지성을 찢는 커다란 충격이 밀려옵니다. 그러면서 이 사실 하나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주다이즘,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 학문적으로는 헬레니즘,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상을 꿰뚫고 들어오는 강력한 것이, 마치 번개같이 내려치면서 이제껏 가지고 있던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 모든 것들이 확 뒤바뀌면서 이 질서를 따라서 재편되는 것입니다. 중앙에 있던 것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뭐라고 합니까? “소피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소피아 데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소피아”는 헬라와 로마 철학자들이 얘기하는 바로 그 “소피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이 주는 의미는 아주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보같이 사도바울이 아데네에서 전도를 실패한 후에 고린도에 돌아가서 고백하기를, “심히 두렵고 떨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다짐했노라.” 이것을 모든 세상의 학문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버립니다. 다시 성경을 잘 읽어보십시오.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했던 “소피아”, 인생의 기원이 무엇이고, 세계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이고, 앞으로 세계는 어떻게 되고, 사회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일목요연하게 관통하는 이 지식이 “소피아”인데, 이 “소피아”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똑같은 일들이 이레네우스나 테르툴리아누스를 비롯한 어거스틴 등의 모든 교부들에게 벼락을 맞는 것 같은 지적인 각성을 주고 간 것입니다. 그 후에 신학자가 된 것입니다. 목사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 복음의 의미에 붙잡혀 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김세윤 박사님은 ‘신적인 강제력’이라고 말합니다. ‘Divine enforcement’ 그래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입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무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이 모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주적으로, 인류적으로, 학문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인식은 사도바울에게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도들이 공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나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처럼 전 세계를 포괄하는 장중한 하나님의 경륜을 풀어낼 수 있었던 사람은 사도바울 한 사람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부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식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면 훌륭한 신앙인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장중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인류의 위대한 역사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 그리고 끊임없이 변천하고 흘러가는 현대문화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해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탈 세계적인, 초월주의적인, 세상과는 상관없는 탈 현세적인 복음들을 만들어내고, 탈 역사적인 신앙관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진리를 외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와 관계가 없는 진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진리를 다 깨닫고 나면, ‘진리가 그런 것이었구나.’가 아니라, 눈물을 펑펑 흘리며 ‘내가 잘못 살았구나!’ 그리고, ‘나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구나!’하는 위로와 용기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 진리가 주어져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지혜”의 발견이라고 하는 것은 ‘theology’입니다. 신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관심사가 바로 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지혜”, 이것이 신학입니다. 17세기 신학자 폴라누스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일들에 관한 지혜”, 이것이 신학입니다.
B.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1. 나의 회심 이야기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우리나라 나이로 15살 때의 일입니다. 정확하게 미국식으로 계산하면, 제가 태어난 지 14년 4개월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의 나이였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고 있었는데, 가다가 논둑에 엎드러져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왜 그렇게 울었겠습니까? 집이 가난해서 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를 울린 것은 ‘의미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그 당시 매일 아침마다 자지러지도록 무서운 것이 있었습니다.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사는 것도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나 풀포기가 부러웠습니다. 15살 먹은 아이가, 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나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마지막에 신은 존재하는가? 저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저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해서 교회 다니면서, 저 사람이 나를 영혼으로서 정말 사랑한다는 느낌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의 설교가 수없이 울려 퍼졌지만, 저 사람도 인생에 대해서 정리가 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있는 신앙 좋은 어른들이라는 사람은, 인생의 고민들에 대해서 나만큼도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믿고, 저 사람은 저렇게 믿고 그냥 각자 자기 좋은 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도 특별히 감화를 줄 정도의 고상한 삶을 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추운 2월 겨울 논둑에 엎드러져서 펑펑 울고 나서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 아이는 결심했습니다. ‘이제 이 순간부터 나는 일생을 무신론자로 사는 것이다. 신은 없다.’하고는 무신론자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의 구원은 책읽기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의 고민을 이야기해도 그저 나를 유별난 인간으로만 취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이 이렇게 팔렸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도 없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단 하루도 학교 다니는 것이 행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스스로 엄청나게 머리가 나쁜 학습 지진아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진짜 사실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간 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해보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아주 잘 했습니다. 총신을 다녔습니다. 더 잘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하니까, 이 나라의 교육이 저에게 정말 맞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안 맞아도 매우 안 맞았습니다. 그래서 이 교육제도에 부적응자 처럼 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제도권의 교육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의 공부는 교육부가 제공한 커리큘럼을 버림으로써 시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커리큘럼에 따라서 여기에 와 있으니까 모순입니다.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참 위로가 되었던 것이,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문학 작품 속에는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제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몇 년 이 일을 하다 보니까 계속 공감은 하는데, 아무 작품도 저에게 답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나와함께 의문을 제시하는데 저는 느낌표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읽기 시작한 것이 사상서, 철학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문학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미 많이 늦었지만 말입니다. 10대 때에,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 혹은 셰익스피어 문학 작품들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을 가지고 수많은 의문을 제기한 것만큼, 사상서들을 읽는 데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버틀란트 러셀, 사르트르, 하이데커, 쇼펜하워, 니체, 이런 사람들의 책들, 그 당시에 많이 읽던 책들이었습니다. 칸트의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이 사람들이 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답인 줄 알고 꽉 붙들고 서보면 바닥이 견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가는데,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내가 성숙하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는데,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사는 날 동안, 단 하루도 자살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헤르만 헤세 같은 사람은 자살에 대해서 실제로 용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스테판 울프’, ‘황야의 이리’라는 책속에서 그런 암시를 많이 줍니다. 이렇게 사는데 그래도 살아가는데 재미를 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영어공부였습니다. 영어공부가 너무 재밌어서 못 죽었습니다. 그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서로 버틀란트 러셀이나 수필집이나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나와 같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워싱턴 포스트, 뉴욕타임즈 등을 자유롭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하니까 우리교회 어떤 권사님들은 “목사님이야 워낙 조숙하고 총명했으니까 열다섯 살에 그런 고민을 하셨지만, 우리 애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하나요?”, “네.”, “그게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 향락문화나 감각적인 문화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 진정한 목회는 그들 안에 있는 인생에 관한 이 본질적인 질문들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education입니다. 그것이 위대한 목회자나 설교자가 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신이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실존적인 운명과 마주하게 될때, 복음이 왜 필요한지, 정말 복음이 왜 복음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어거스틴이 고백록 제1권 5장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도대체 당신을 향하여 내가 누구이기에, 나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내가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크게 화를 내고 엄청난 벌을 주실 것처럼 나를 겁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뒤에서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 무슨 손해라도 된다는 말씀입니까?”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누구의 책을 읽으면서도 그 사람이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이나 칼빈도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희대의 천재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의 전집을 20년 동안 거의 다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이 사람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아니라 한 인간의 위대한 지성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정말 천재입니다. 내가 이 천재에게가 아니라 이 천재성을 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6개월 동안은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거스틴은 누구이고 김남준은 누구이기에, 그 사람에게는 이런 천재성을 주시고 저는 열심히 공부해야 겨우겨우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아직까지 응답이 없습니다. 마침 어느 날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너와 어거스틴은 종자가 다르다. 너의 너 된 것에 만족을 하며 살아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위대한 인물입니다. 저의 최고의 스승입니다. 250권 가까이 책을 남겼는데, 대부분 읽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저는 어거스틴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청교도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청교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참된 기독교 신앙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어거스틴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된 신앙을 알기 때문입니다.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 1884-1978) 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있는데, 중세 철학사,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대해 책을 많이 썼고 특히 데카르트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데카르트의 사상이 중세 13세기와 어떤 연관관계에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데카르트의 사상이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나온 사상이라는 것을 밝힌, 소위 ‘질송테제’(Gilson Thesis)의 주인공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사상이 사랑으로 수렴되면 수렴 될수록 그의 사상은 결국 어거스틴적인 사상으로 된다.” 이것은 사실, 동양에서 말하는 인의사상도 굉장히 어거스틴적인 사상입니다. 그래서 통하는 면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설명에 따르면, 한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는 것을 역사적으로 신학자들이 다양한 패턴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사단에게 팔려간 죄인을 구하는 속상이론으로 보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만족이론, 도덕적 감화설, 이런 것들입니다.
C. Agape와 Caritas
그런데 어거스틴은,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무엇입니까? 참된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인데, 이 사랑으로 한 죄인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고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아가페입니다. 이런 아가페를 경험하고 나면 이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 사랑이 ‘까리따스’입니다. 이것을 ‘애독’이라고 번역하는데, 저는 ‘지순애’(至純愛)라고 부릅니다. ‘아주 순결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랑의 주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때문에 인간이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두 가지를 포함하는데, ‘amare Deum’, 그 다음에 ‘amare Deo’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탈격으로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그 사람은 자기의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예전에는 ‘amor sui’, 자기 사랑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던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이 모든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참다운 행복은 자기를 사랑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모든 것을 동원해서 이 사랑을 확장시키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세상나라인데, 이것이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자아가 각기 자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 속에서 자기 질서를 구축하면서 투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도 미친 듯이 돈을 벌려는 치열한 경쟁사회도 이걸 많이 차지하는 사람이 이 질서의 외연을 확장시켜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이 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많이 확장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굉장히 많이 확장시켜서 누렸던 사람들이 제국의 황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불행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기를 주인삼은 깃발을 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 우주를 휘돌아 이 세상을 감싸고 있고 마지막에는 결국 하나님 자신으로 돌아가는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고 나니까 자신은 자기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만족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입니다. 순전한 사랑입니다.
결국 신자는 이런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 아직 죄가 남아서 그의 안에서 ‘cupiditas’라는 욕망, 육욕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과 더불어서 끊임없이 싸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으면서 살아가는 성화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영원한 칭의를 이야기 했지만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D.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삶을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어거스틴은 ‘amor pravitus’, 사랑은 사랑인데 사적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amor societatis’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사랑입니다. 이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항상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자기의 사역을 사랑하게 되는데, 마지막 이 모든 사랑은 하나의 초점을 향해 집약이 되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Ⅳ. 목회자로 살다가 죽는 길
그러면 목회자로 살다가 죽는 길이 무엇인가가 오늘의 본론적인 강의입니다.
A. 조선시대 선비에 관하여
1.유학자와 선비는 다르다.
나는 목회자의 이상을 오늘 현대에서부터 잘못된 껍질들을 모두 벗기고 적어도 18세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 목회자 상에 가장 가까이 와 있는 것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조선시대의 선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는 누구이겠습니까? 선비는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인의예지를 구현하면서 사는 유교정신에 입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유학자가 있고 선비가 있습니다. 모든 유학자가 선비는 아닙니다. 유학을 공부해야만 선비가 될 수 있지만 유학을 공부한 모든 사람이 선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가운데 「호질」(虎叱)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호랑이가 야단을 친다”는 뜻인데, 나쁜 놈들이 호랑이에게 혼나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북곽’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유학을 공부하는 유학자였는데 밤마다 과부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위선자였습니다. 그런 사람은 유학자이긴 하지만 선비는 아닌 것입니다. 학문과 도덕을 분리시키면 선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비는, 학문을 통해서 두 가지 위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참된 자아를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타인을 완성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학문을 배우면 자신에게 먼저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한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결국 선비는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조선시대 지식인으로 도덕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두 이상이 있는데, 자신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아주 존엄한 인간이기는 하지만 덜된 존재이기 때문에 성숙으로 나아가야한다,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학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나타납니다. “자기를 갈고 닦으며 남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기”(修己)는 인간을 대단히 존엄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보면서도 불완전한 존재이고 때 묻은 존재이기 때문에 날마다 정화되어야 하면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야한다, 그 기준을 “도”(道)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인”(治人)은 이 “도”가 정한 질서가 있고 여기서 갈고 닦아 온전하게 하면서 모든 이웃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과 완력을 가지고 사람을 억압하고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 질서를 따라서 사람들을 배치함으로써 이웃도 자신과 함께 한 “도”안에서 행복해지는 삶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수기치인”이라고도 보고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도 보는 것입니다.
2. 선비의 이상: “立身揚名”의 참 뜻 -“立身行道 揚名於後世”「孝經」
이 사람들이 추구했던 “효경(孝經)”에 보면 이들이 추구했던 이상은 “입신양명(立身揚名)”입니다. 우리는 “입신양명”이라는 것을 나쁜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입신양명을 위해서 목회를 합니까?”하면서 별로 좋지 않은 뜻으로 봅니다. 여기에 글자가 빠져있는데 “입신행도(立身行道)”가 나오고,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가 나옵니다. “도를 행함으로 자신을 견고히 세우고”, 이것이 “수기”입니다. 그리고 “후세에 이름을 드높인다.” 당대가 아니라 후세에 이름을 드높이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후세입니까? 이 사람이 찾고 추구하는 이상이 워낙 고상하기 때문에 당대에는 이해를 못 받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3.「論語集註」에 나오는 유학자의 세 등급
「논어집주」(論語集註)라는 책에는 유학자의 세 등급이 나오는데, 첫째는 도덕에 뜻을 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공명에 뜻이 없습니다. 도덕에 뜻을 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고 명예를 얻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공명을 찾는 사람은 이 세상의 부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도덕을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의 공명에 관심이 없으나, 공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부귀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귀를 추구하는 사람은 무슨 짓이라도 할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왜 목사 이야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께 제시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준 이상과 아주 흡사합니다. 우리는 기독교 목사로서, 자기를 완성해 가야할 소명에 대해서 너무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학생이지만 목사를 대할 때, 인격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한 종교에 귀의하여 그 신을 사랑하고 그 도를 따라 살고, 그것을 설교하고, 그것을 탐구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 몸부림치면서 살았는데, 그 도와 그 인격이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할 때, 그 선배는 개떡 같으니까 그런 사람이겠거니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여기 다닐 때 여러분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공부 열심히 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 때에는 여러분보다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물론 안 한 사람들은 그때도 있었습니다. 기도도 안 하고 공부도 안 하는 사람들은 그때도 있었습니다. 매점에서만 사는 사람들이 그때도 있었습니다. 채플 빼먹고 컵라면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 그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사의 사명, 목사이기 전에 참 인간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온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온전한 교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빛들로 드러나는 것이 사도바울이 생각했던 이상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이웃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전도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과 질서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결심문 1번에서 “나와 내 이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냥 나 혼자 잘 하면 된다는 것은 선비의 정신이 아니고 목사의 자세가 아닙니다. 온 몸을 던져서 이웃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할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저 강대에 세워놓으면, 역사의식이 하나도 없는 탈 역사의식적인 축복사상이나 설교하고,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기들만의 산꼭대기에서 누리는, 마치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하는 설교나 하는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진리라는 것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고, 거기서 확장되는 신약성경과 구약성경, 그리고 잠시 후 나오겠지만 헤르만 바빙크의 ‘로고스 리얼리즘’(Logos Realism )과도 연결이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볼 때, 이 진리에 대해서 목사는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이것은, 그 진리를 얻는 방식이 학습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습은 그 진리를 인식하는 한 통로에 불과한 것이지, 한 사람이 그 진리를 체득하는 데 있어서 아주 지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4. 조선중기 문장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4체(體)
16세기 조선시대 중기의 문장가 가운데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선비가 진리를 체득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재밌습니다. “체인(體認)”, “체찰(體察)”, “체험(體驗)”, “체행(體行)”입니다. “온 몸으로 인식하라”, 김남준 목사의 표현대로 하자면,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와서 제가 얘기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일 년에 한 번씩은 응급실에 실려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뭐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책이라도 끝까지 읽은 책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뭐가 되겠습니까? 온 몸으로 공부해라, 그리고 그것을 앵무새처럼 받아들이고 남에게 말하는 것은, 가장 싸구려 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이지학(口耳之學)”입니다. “입으로 말하기 위해서 귀로 듣고 전파하는 학문”인데, 이것은 지식을 팔아 밥벌이 하는 싸구려들이 하는 짓입니다. 요즘 설교표절이 문제가 되는 것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독서로 공부해야하고, 이것을 위해서 “체찰”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과연 그러한지를 베뢰아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찰하는 것입니다. 온몸으로 그것을 자신에게 시험해보아서 그것이 정말 진리인지를 스스로 확증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것이 진리임을 확신한 다음에는 그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선비의 인격 안에서 “사체”의 체험으로 순환하는 가운데, 이 사람은 자라면서 점점 진리의 사람, 도의 사람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입니다.
베르나르두스(Bernardus)를 비롯해서 중세의 신비가들 조차도 “notitia”와 “amor”라는 것, “사랑”과 “지식”이라는 것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지식은 사랑을 포함하고 사랑은 지식을 동반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참된 지식은 사랑을 동반한다고 보았습니다.
5. 자아의 완성은 타자의 성취와 함께
근대의 문을 열었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956-1650)는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로 철학사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그래도 마지막에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의심하고 있는 나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끄 라깡(Jacques Lacan, 1901-1981)같은 사람은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정신병적인 명제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그렇게 모든 타자와의 관계를 끊고 자신 속으로 돌아와서 자신 혼자만을 대면함으로 인간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적인 명제는 정신병적인 명제라고 보았습니다.
당연히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자기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라는 요구를 우리에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은 추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타자를 소외시키지 않는 것처럼 자기도 소외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목사라는 것은 자기 안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면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선비들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함께 연관을 가지면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주 소중한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이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인의예지”(仁義禮智 )의 나라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 바로 이상형이라고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이 사랑이라면, “의”는 공의가 되겠고, “예”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지”는 이 모든 것들의 근본을 밝혀주는 지식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작년쯤에 김용옥 씨의 「사랑하지 말자」를 읽었습니다. 얼마나 재밌게 썼는지 창가에 서서 한 번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다 읽고 나서 무릎을 치면서 안타까웠던 것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기독교의 사랑을 비판했는데, 그것은 기독교에서 가르친 사랑이 아니라 예수를 잘못 믿은 사람을 통해서 배운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비판하고 있는 그 사랑은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준 사랑이 아닙니다. 당신이 사랑하지 말자고 공격하는 사랑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사랑이 아닙니다. 당신이 만약에 그 사랑을 안다면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비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세상이, 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나와서 그 사랑이 온 인류를 휘돌고 마지막에 당신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그 사랑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고, 목사는 자신의 온 삶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사의 삶인 것입니다.
B. 기독교 선비로서의 목회자
1. 대의(大義)에 살고 죽음
기독교 선비로서의 목회자, 이 사람은 “대의”(大義)에 살고 죽는 것입니다. 이 “대의”라는 것은 결국 “도”, “진리”에서 오는 “대의”입니다. 이 대의를 따라서 “수기치인”과 “수기안인”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대학(大學)에서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개념은, 어떤 사물과 부딪혀 그것을 끝까지 탐구함으로써 이치에 이르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이상도 이러한 선비들의 이상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시사 하는 점은 매우 큰 것입니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 1463-1494)라는 인물이 화면에 나오고 있는데, 이 사람은 1463년에서 1494년을 살았던 이태리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남긴 유명한 책이 하나 있는데 얇아서 책이라기보다는 팜플렛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연설”(De hominis dignitate oratio)입니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인문주의 정신을 요약한 “마그나카르타”라고 보았습니다. 제가 읽어보았는데, 그 안의 모든 사상을 우리 정통 기독교가 다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것이, 중세에 억눌렸던 인간들을 해방시키면서 두 가지 사실을 천명하는데, 첫째, “인간은 매우 존엄하고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이다.” 이것이 첫 번째 명제이고, 두 번째 명제는, “그러나 그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을 향해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의 존재는 이 세상의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데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디테일에 있어서, 정통 기독교에 비해서 인간 자율성과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지만, 대의의 면에 있어서는 동북아 철학이나 르네상스나, 성경의 기독교나 동일하게 한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두 가지로 규합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소중한 존재이지만 불완전하기 때문에 온전해져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로 경제로 다른 방면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인류사회의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굳이 목사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평신도로 사회사업하고 기업해서 돈 많이 벌고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면서 살면 되는 것이지, 굳이 목사가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그런 가지고는 안 된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불행의 증상을 치료하는 것뿐이지 근원적인 문제는 해결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통한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 대장부와 같은 삶
그러면서 선비는 대의를 찾는 사람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을 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따라서, 진리가 주는 대의를 따라서 생활을 하고 결코 거기에 굽히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비는 선비가 되는 그 순간, 선비는 항상 죽음을 삶의 친구로 옆에 둡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대의를 굽히느니 그 대의를 따라서 죽는 각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부귀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히려 그 부귀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정심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공명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명은 높은 것이기는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기는 하지만 도를 따르는 것만큼 훌륭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맹자」(孟子)의 등문공편(滕文公篇), 하에 나오는 한 구절이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원문을 열어보십시오. 감동적입니다. 居天下之廣居 (거천하지광거)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데서 살아가고, 이것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품지 못하는 것이 없기때문입니다. 立天下之正立 (입천하지정립), 가장 올바른 곳에 자리를 잡으며, 이것은 정의입니다. 行天下之大道 (행천하지대도), 천하에서 제일 큰 길로 행하며, 得志, 與民由之 (득지, 여민유지), 뜻을 얻으면 이웃과 함께 그 길을 걷고, 不得志, 獨行其道 (부득지, 독행기도),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라도 그 길을 가는 사람이다. 富貴不能淫 (부귀불능음), 부귀와 음탕함에 빠지지 않으며, 貧賤不能移 (빈천불능이), 천하고 빈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중심을 이동시킬 수 없다. 威武不能屈 (위무불능굴), 무력과 폭력이 그를 무릎 꿇게 할 수 없으니, 이런 사람을 일러 우리는 ‘대장부’라고 부른다.”
목사가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용서 못할 사람이 없고,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은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이 땅의 공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그 공의를 위해서 필요하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걸어가도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니면 홀로 좁은 길을 가는 사람, 그 좁은 길을 대도라고 믿는 사람, 자신에게 다행히 뜻이 주어져서 지도자가 되면 모든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자기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홀로 외로이 있으면 혼자라도 그 길을 걷는 사람, 그 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울고 웃고 좌절하며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 아무리 이 세상에 있는 부귀가 자기를 유혹해도 이 도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중심이 어지럽혀지지 않는 사람, 그리고 네가 이 일을 하면 부해지고 잘못하면 버림을 받을 것이라는 빈천의 기대가 그의 마음의 중심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사람, 큰 정치적인 압박과 권력으로 혹은, 죽음의 칼이 자신의 목을 겨누어도 그것에 의해 겁박하고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목사”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3. 도(道)의 사람으로서의 목회자
어느 불신자 잡지사에서 저에게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언론에 나오는 것을 토할 것처럼 싫어하는 사람인데 나를 인터뷰를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의 각 지도자들을 인터뷰하는데 종교 차례였고 천주교와 불교를 다 돌았고 개신교 차례이니 인터뷰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반 정도 인터뷰를 했습니다. 마치고 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봤습니다.”, “그런데요?”, “목사님은 목사 같지 않습니다.”, “네? 그럼 뭐 같으세요?”, “스님 같으십니다.” 그때 제 마음에 스쳐간 우울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불신자 눈에 스님은 철학자처럼 보이고 목사는 비즈니스맨 처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C. 열심히 학문을 탐구함
1. 자신의 부족을 알기에
시간이 다 끝나서 여러분에게 한 줄로 정리를 하겠습니다. 수신편(修身編)에서 순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라”는 뜻입니다. “夫驥一日而千里, 駑馬十駕則亦及之矣(부기일일이천리 노마십가칙역급지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한다. 그렇지만 미련한 말도 열흘을 가면 따라잡으리라.” 즉,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학문을 공부하고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그리고 결국 목회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그 진리에 대해서 죽고 다시 살고, 그 진리 때문에 행복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도열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도 때문에 슬픕니다. 왜냐하면 그 도를 내게 비췄을 때 나는 거기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수만 명의 교회를 할 사람도 있지만 평생 4,50명 하다가 죽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자가 목사를 행복하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후자가 목사를 불행하게 하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후자가 목사를 행복하게 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그런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 열 몇 살에 주님을 만났고, 인생의 도를 터득했으며, 그 이후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내가 그 복음의 빛 아래에서 우리 주님과 동행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나는 그 도를 매일 누렸으며 그 도 안에서 즐거웠으며, 그 도를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 기쁨이었고, 그들을 그 도 안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위해서 나의 일생을 바친 것이 기쁨이었다. 이렇게 살다가 어느 한순간 유명하게, 혹은 무명하게 죽는 것입니다. 별거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비전에 눈을 떠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목회자의 일생이 끊임없이 공부하는 일생이어야 한다는 것을 영상으로 보여드리고 이 모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