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덕목은 용기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삼상 16:18)
녹취자 : 오희열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정치계에 얼굴을 내놓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여기에 실려 있습니다. 이미 여호와의 영은 사울에게서 떠났고 악령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사울왕은 깊이 번뇌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지혜로운 신하들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해서, 말하자면 음악치료를 받으라고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추천된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수금을 타면 악령이 떠나간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음악이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그 속에 여호와의 영적인 기운이 들어있어서 축사의 작용을 하는 어떤 종교적인 면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지 추측해볼 수 있고, 두 번째는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령이 그에게 임에서 그를 사로잡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인데, 일반 은총적인 차원에서 이 음악이 거기에서 오는 어떤 광적인 혼란의 효과들을 어느 정도 경감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일반 은총적인 차원에서 수금을 타는 것과, 악령으로 번뇌하는 사울의 치료가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이 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에 대해서 신하 중 한 사람이 평가를 하는데 첫째는 수금을 잘 친다고 합니다. 수금을 잘 친다고 하는 것은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기 보다는 이 상황이 수금을 칠 줄 아는 사람을 찾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다윗이 적합한 이유가 수금을 잘 탄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다윗은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을 우리가 주관적인 즐거움의 관점에서 보면 고상한 음악, 저급한 음악이 있을 수 없고, 우리를 즐겁게 하는 다른 모든 쾌락적인 도구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음악은 인간의 주관적인 자극을 통해 만족을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음악은 학문과 매우 유사합니다. 학문이 이성의 논리를 통해서 객관적인 진리와 관련을 맺고 있고 그래서 그 학문을 통해서 만족을 얻을 때에 가치관이나 정신의 질서 같은 것들이 올바로 잡히면서 참된 도덕생활, 혹은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누리게 하는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음악은 단순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있는 질서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질서는 아주 작은 분자나 원자의 파동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멀리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질서들이 음악 속에 반영이 되고, 만약 꽃 한 송이가 핀 것이 매우 아름답다면 그것이 바이올린 독주에 비교할 수 있고, 또 몇 송이의 꽃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것은 실내악에 비할 수 있겠지만 장엄한 풍경이 어우러져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교향악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클라리넷 같은 악기는 봄을 대표하고 하프는 여름의 기운을 느끼게 해주고 첼로는 가을의 기운을 바이올린은 겨울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 젊음과 늙음, 어둠과 밝음, 높음과 낮음, 이런 모든 것들이 함께 어울려지면서, 심지어는 있음과 없음, 질서와 탈질서까지 어우러지면서 우리 의식 속에 바깥에 있는 어떤 질서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줍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신은 음악에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어떤 음악을 즐기고 그 음악에 대한 어떤 이해를 갖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과 정신의 세계에 학문 못지않은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다윗은 음악을 즐거워하고 그 음악 속에서 질서와 조화를 찾아가는 폭넓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시들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본받자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사람마다 타고난 음악적 감각의 크기가 다른 것은 마치, 천재성들을 각기 타고나고, 이런 천재성들을 평범한 사람들이 능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천재는 매우 희귀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평범한데, 조금 더 평범한가, 덜 평범한가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한계이고 다만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격차를 줄일 수도 있고 벌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타고난 정신의 크기 안에서 만족을 하고 그 음악을 즐거워하고 그 음악 속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 것을 배워나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세계를 풍요하게 할 것이고 또 이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우리의 정신도 고양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그것을 배웁니다.
두 번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무용입니다. 무용은 용맹스러운 무술입니다. 제가 총신대학원에서 강의를 할 때 스무 살, 스물한 살 먹은 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너희들이라면 꼭 하고 싶은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5개 국어를 마스터하는 일과 열심히 기도하는 일과 평범한 남자 세 사람 정도를 맨 손으로 제압할 수 있는 무술을 배우고 싶다. 그렇지만 평생 그것을 사용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무용이라는 것은 다윗의 특징이었는데, 사실 다윗이 그때까지 살아온 경험은 목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무술을 필요로 하는 삶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보면 그가 양떼들을 습격해오는 맹수들과 싸워야했고 야곱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것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단지 양떼들을 사랑하는 온순한 목자가 아니라 그런 무력이 있는, 실제로 그것들을 제압해서 양떼를 지킬 수 있는 그러한 힘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바로 그러한 무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지금 태권도 학원이라도 다녀야한다는 말인가?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후일에 다윗이 지도자가 되면서 수많은 전쟁을 수행하며 백성들을 이끄는 데에 중요한 지도자의 자질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구변이었습니다. 말이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웅변의 소유자였습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성다움의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 지금 세 가지의 자질을 언급했는데, 첫째는 풍류를 즐기고, 둘째는 무술을 익히고, 그 다음에는 구변이 있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설득력 있게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용기입니다. 두 번째에 등장하는데 용기입니다. 용기가 무엇입니까? 용기라는 것은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용기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대의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훼손되길 싫어하는 어떤 가치를 붙들고 있는 사람에게만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용기라는 말 자체가, 넓은 의미로 보면 자기의 이익을 침해하는 모든 것과 결연히 맞설 수 있는 정신의 담력을 가리키지만, 고유한 의미에서 용기를 볼 때는 항상 거기에 ‘정의’, ‘도리’라는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특별한 생각 없이 자기의 기분이 상할 때 ‘팍!’하고 성질을 부리는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설령 그 사람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용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용기는 언제나 대의와 연결이 됩니다.
여러분은 혹시 배신과 변절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아십니까? 배신과 변절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배신은 작은 이익의 관점에서 본 정의입니다. 변절은 정의의 관점에서 본 큰 이익입니다.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배신이라는 것은 옳고 그른 것보다는 이익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먼저 입각점을 가지고 정의를 대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자기를 배신할 때 배신이라고 하지 변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작은 이익과 관련된 것입니다. 변절은 정의의 관점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그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누리는 이익이 어느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서게 됩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돌아보게 되면 우리나라에 조선같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정도전과 함께 꿈꾸었던 이성계의 이상이 실현되었더라면 아마 우리나라의 역사는 엄청나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좌절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정도전이 꿈꾸고 있던 개혁은 입헌 군주제였습니다. 상민이라도 똑똑하면 제상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고려가 계속 이어지는 것보다 조선이 생겨난 것이 좋다고 보지만 여전히 고려의 왕실을 배신했던 사람들은 그 당시의 정권에 대해서는 변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개국했기 때문에 역사에 미쳤던 좋은 영향은 별도의 평가입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안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경우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정의를 배신하고 자기를 팔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목적으로 정의를 배신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매우 나쁜 사람들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제가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지만, “도덕을 구하는 사람은 공명에 관심이 없고, 공명을 추구하는 사람이 없고 부귀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부귀를 탐하는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야기할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많이 있어왔지만 본인은 변절자나 배신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떤 상황을 맞이해서, 특히 지도자가 되어서 정확히 판단하고 정의의 원칙과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서 일관성있게 행동하지 않을 때,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주 나쁜 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중에 한 사람이 최규하 씨라고 봅니다. 이 사람은 씻을 수 없는 역사의 과오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신군부에게 위협을 받아서 정권을 내준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동 서기 정도였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대통령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위협을 받았으면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불법으로 정권을 찬탈당했다는 것을 밝혀야하고 위협을 받지 않았는데도 자기 손으로 정권을 내 주었다면 배임죄이므로 처벌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권을 내어주고, 마지막에는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에 대통령이 자기 정권시대에 있었던 일을 사후에 공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고 침묵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외무고시에 합격해서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고 아주 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검소해서 대통령을 했는데도 40년 된 선풍기를 사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무서웠을까?’ ‘머리에 총을 맞아 죽든지, 아니면 목에 칼을 찔려 피를 토하고 절명했든지 둘 중에 어느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그 불법한 자들의 정권찬탈에 대해 사전, 혹은 그 중에, 아니면 사후에라도 항거하는 것이 맞았다, 순간의 판단을 잘못해서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비극입니다.
용기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확신하는 가치를 훼손당하거나 혹은 그 가치에 모순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맞닥뜨려야할 모든 고난과 시련을 감내할 수 있는 정신의 저항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없는 사람은 남자가 아닙니다. 남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된다면 그 공동체는 매우 비극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면서 눈물이 나오는 이유가, 정말 정의가 승리해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제 36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부역하고 그것 때문에 호의호식하고 관직을 누리며 일생을 살았고,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씻을 수 없는 큰 실수를 했는데 새로 접수한 남한을 통치하기 위해서 자기들을 도울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친하게 되었고 그들 대부분이 친일분자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에 의해서 엮여져서 지도자들이 구성이 되었는데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제 36년 동안 일본에 부역하며 살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이 망하면서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그들을 모두 기용하면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미 일제청산은 물 건너간 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군정이 지나고도 마찬가지 일들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7년 동안 비시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결국 광복을 한 후에 7년 동안 비시 정권에 협조했던 사람들 8천명을 사형시켰습니다. 그리고 단 한 줄이라도 나치 정권에 대해서 우호적인 글을 쓴 모든 신문과 간행물들을 폐간했습니다. 그리고는 역사가 확고하게 섰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프랑스 사람들의 자존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정의의 원칙에 따라서 나라에 봉사하면 나라는 그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라를 배신한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 프랑스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역사의 인식이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경제발전을 많이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서 여전히 부끄러운 과거로 남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우리나라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와 있는 정의에 대한 좌절감, 그리고 정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치고 항거해도 마지막에 보상이 없거나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당하거나 죽었는데 그 죽음의 원인도 캘 수 없는 그런 결말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할 것인가는 깊이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옳지 않는 현실에 부딪힐 때, 오래참고 인내하고 사랑으로 용납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조화를 이루어 가야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보면,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불의하고 악하게 행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살해하기 위해서 자객을 풀고 추격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다윗은 칼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정권이 불의하다고 하는 생각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모든 고난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자신의 인생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용기입니다. 무엇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라는 판단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특히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숨 쉬는 것과 같은 행위여야 합니다. 매순간 무엇이 옳은가, 나의 원수라도 어느 한 시점에서 그것이 옳으면 그를 옳다고 인정해줄 수 있어야하고, 정말 나와 가까운 친구라고 할지라도 옳지 않은 시점에서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과거든 현재든지 간에 옳음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환영과 박수를 받으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백번 양보해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사람을 살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존재감이 없는 삶입니다. 결국은 어떤 사람들의 이익과 관련될 때에,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옳고,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과 성경지식은 물론이고 법률적인 지식과 때로는 일반적인 자유시민의 상식까지 동원해서 자기가 받을 혜택에 마음이 끌리지 말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최대한 판단하고, 그렇게 최대한 판단을 했는데 그 판단이 빗나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한계니까 어쩔수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양심에는 부끄러움이 없도록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판단하고 그 정의를 판단함에 있어서 자기의 이익이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이 고려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최대한 판단하고 그리고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이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의 크기는 양심을 비껴 걸어간 그 길이 후일 자신에게 가져다줄 모순의 갈등보다는 훨씬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고통을 받으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결국 이렇게 길을 걸어도 우리는 끊임없는 시련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런 원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항상 승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마음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나를 책망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양심이 있습니다. 사자의 울음소리에도 요동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담대함이 치고받고 싸우면서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 대장부의 도리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가장 큰 집에 거하며 마땅히 서야할 그 자리에 정확히 서며 가장 큰 길로 행하며, 뜻을 얻으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뜻을 얻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그 길을 걷나니 부귀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할 것이며 귀천이 그의 뜻을 바꾸게 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권력과 죽음의 위협이 그를 무릎 꿇게 못하나니 이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대장부라고 부른다.”
어차피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완전한 판단을 하며 완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모순되는 삶을 사는 것은 인간에게 매우 커다란 수치입니다. 더욱이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사는 것은 사람이 걸어갈 인생의 길이 아닙니다.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저의 경험에 의하면 원칙을 지키는 것 때문입니다. 그 원칙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 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칙을 꾸준히 지키면서 걸어서 자기 자신의 원칙에 대한 신념과 모순되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살기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릴 각오도 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지지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존경을 잃어버릴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매우 어려운 길이고, 그래서 지도자는 모든 일이 평안하고 질서대로 움직일 때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지도자가 할 일이 별로 없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사람들이 괜히 좋은 차타고 좋은 것 먹고 많은 월급을 받으며 한가하게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순간이 옵니다. 그때는 누구도 그 고난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난 2년간 단 하룻밤도 내일 아침에 눈뜨고 싶은 밤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많은 고통 속에 함께 한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다가 속상하면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이야기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겠습니까? 밤에 걷습니다. 누가 같이 걷자고 하는 것이 가장 싫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고백록을 들으면서 혹은 다 끄고 조용히 걷습니다. 생각이 정리가 되면 7km, 안되면 13km.분노, 신앙의 속삭임, 인간적인 혈기, 그 모든 것들이 그 몇 시간동안 한 없이 가슴에서 출렁거립니다. 그것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반성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될까?’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상황 속에서, 먼 훗날, 한 10년의 세월이 끝나고 내가 이 고단한 목회 사역이 다 끝났을 때,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나의 신념과 모순된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써낸 수십 권의 책들과 모순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고민입니다. 그리고 이 고민 하나면 어떤 의미에서 충분합니다. 지금도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것은 모든 만사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거나 복수를 꿈꾸거나, 아주 인간적인 방법에 의한 계교들에 계교로 대항하는 것은 대장부의 할 일이 아닙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애를 썼고,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려고 노력을 했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의 책이었습니다. 나의 설교였습니다. 심포니처럼 울려 퍼지면서, “내가 이렇게 너를 에워싸고 있으니 너는 네가 토해 놓고 쓴 글대로 행하라” 그렇게 하려고 온 힘을 다했습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교회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나오는 원리를 따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공정한 평가를 내려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회의적이었습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나를 비겁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모순되지 않은 삶을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유체이탈적인 화법으로 살지 않을 것인가?’, 왜냐하면 이 현실은 내가 이탈할 수 없는 현실이고, 이 현실 속에 내가 한 주체로 서 있고, 나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자신에 대해서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려고 애썼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용기가 없으면 진실함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진리에 부합하는 상태인데, 용기가 없으면 그 진실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순간 용기를 요구합니다. 혁명을 일으키고 무력에 무력으로 맞서는 용기는 한 순간이면 충분할지 모르지만 용납하고 포용하고 끊임없이 끌어안으면서 한 공동체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용기가 부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용기는 사랑과 긍휼을 배제한 용기가 아닙니다. 다윗은 이런 성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역사에 한 장을 써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나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바닥까지 내려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일생의 걸어간 길은 완전한 길은 아니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로는 다윗이 걸었던 그 길이 왕들의 선악을 평가하는 지침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열왕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평가는 “그가 일평생 다윗을 길로 행하였더라.”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도 제 인생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한 토막일 것입니다. 제 임기 중에 주님의 부름을 받지 않는 한, 살아온 인생의 한 토막일 것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모두 헤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상황은 없어져도 그 상황 속에서 살아갔던 나는 일평생을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까지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심판받고 용서받고 난 후에도 그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억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 지도자로서 자기 자신을 잘 가꾸고, 선배들을 통해서 배우고, 나를 비롯한 선배들을 보면서 ‘저런 모습을 정말 아니구나, 나도 저렇게 될 수도 있겠지?’라고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다시 자신을 올바르게 하는 데에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지도자로서의 품성들을 길러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