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와 영적 부흥 1
에스겔의 소명(겔1:1-3)
제 삼 십 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 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오일이라 갈대아 땅 그 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
오늘 저는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았던 이 일장의 3절까지에 나오는 기사를 가지고 꼼꼼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정해진 이 한시간 동안에 이 부분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소명을 새롭게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났던 많은 선지자들이 모두 그러했지만 특별히 이 에스겔은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시대에 예언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선지자였더라고 하는 점에서 오늘 우리는 이 선지자를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선지자는 유다 나라가 이미 다 망하고 그리고 이제 여호야긴 왕이라고 하는 사람도 사로잡혔고 그리고 나라는 망해가고 있을 그때에 부름을 받아서 나라를 잃어버린 상황에 남의 나라 땅에서 예언의 사역을 감당해야 했던 불우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들마다 각기 독특한 시대에 사명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평탄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도 모두 그 속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은 평탄한 시대 속에서 고통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그러한 도구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민족에게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았지만 그들은 그래도 자기네 나라에서 쓰러져 가나마 그 나라안에서 그 나라를 붙들고 예언했던 사람 이였습니다 만은 에스겔은 이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 특별히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 나라를 잃어버리고 그리고 자기 자신 조차도 포로가 되어버린 그러한 이방의 땅에서 예언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하고 유다는 멸망했으나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음을 오늘 우리는 이 에스겔 서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성경은 제 삼 십 년 사월오일에 내가 그 발 강가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그랬습니다. 삼 십 년 사월오일이라는 이상한 달력이 여기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왕은 이미 망해버렸기 때문에 왕의 연대와는 관계가 없고 에스겔이 하나님 앞에 소명을 받았던 그때 그 나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타당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이 직임을 맡게되는 최소연령은 삼십 세 되는 해였습니다. 에스겔이 삼십 세 되던 해 사월 오일 영원히 에스겔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 에스겔을 하나님이 선지자로 불러주신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삼십 년 사월오일 이 특별한 날에 에스겔은 하나님께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에스겔은 가장 비참한 민족사의 고통스러운 한 순간을 동족들과 함께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예루살렘의 성전도 아니고 나라는 이미 망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정든 고국의 땅에서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포로 중에 한사람이 되어서 그 역시 사로잡힌 자 중에 함께 있었던 때였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이 어떠한 상황에 있었으며 에스겔이 어떠한 여건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이 음성을 듣고 비전을 보고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 이스라엘의 모든 포로들과 유대인들은 한없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바벨론 강변에서라는 제목을 부칠 수 있는 시편 136편의 시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 강변에서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고 말했습니다. 바벨론 강변에서 우리는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이방 중 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조롱하는 말이 너희는 옛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한번 불러 보라 말하니 우리가 이방의 땅에 있으며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리오 우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포로로 끌려온 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은 이방의 땅에서 환영받는 많은 대접이 아니라 노예와 같이 비참하게 노역을 당하고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을 섬기는 외로운 종살이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일과가 끝나고 나면 아마 석양이 뉘엿뉘엿 지는 그 저녁때야 잠시 휴식을 취하며 그들은 강가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두고 온 고향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시온의 노래와 예루살렘의 찬양을 마음껏 부르던 때를 생각하면서 그들은 눈물로 자신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그리고 어느 때에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돌아가게 할꼬 하나님 앞에 탄원 어린 기도와 눈물의 시간들을 바벨론 강변에서 가졌습니다. 아마 에스겔도 이 그 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에 바로 이러한 때가 아니었나 생각이 되어집니다. 사로잡힌 자 중에 포로가 되어서 있을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부르셔서 소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나라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이 민족의 비참한 불행 속에서 에스겔을 하나님께서 주목하셨던 것입니다. 삼십 년 아니 영원 전부터 에스겔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혼탁하고 영계가 어지럽고 그리고 민족이 멸망해버린 이 암흑과 같은 비참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새로운 역사의 새벽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새벽을 알릴 하나님의 전령으로서 에스겔을 하나님께서는 택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가 어두울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강력한 메시지를 소유하고 그리고 시대가 패역 할 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거룩한 기운으로 부은바되고 그 능력으로 부은바되고 이 시대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떠날수록 더욱더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하나님의 종들을 준비하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어둠을 가르고 하늘로부터 비취는 거룩한 빛을 비춰주므로 말미암아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을 떠나고 부패하고 그리고 패역의 길로 달려갈지라도 하나님은 이 민족을 향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과 기대가 그치지 아니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하나님의 성품의 증거로 당신의 선지자들을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그 민족에게 주시고자하는 그 멧세지들을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알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들 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아무리 타락하고 어두움 가운데 달려갈 지라도 우리는 이런 타락한 시대와 교회를 인해서 슬퍼하거나 마음 아파하거나 마음을 쓰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의 피로 값 주고 산 거룩한 교회역사는 오로지 이 모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신 거룩한 하나님 한 분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교회가 어떻게 될까 이것을 염려하면서 허송세월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손 안 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이 어두운 시대에 알려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망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민족이 왜 멸망했으며 이렇게 비참한 멸망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누가 선지자의 외침으로 나아가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줄자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 앞에 이러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시대가 어두울수록 강력한 하나님의 멧세지를 소유한 당신의 종들을 이 역사 속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이 에스겔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준비된 사람이 길래 그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나감으로서 마지막에 이 포로생활 속에서도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예언을 폭포수와 같이 쏟아 부어서 그 시대에 백성들로 하여금 진정한 역사는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는 영적인 왕국의 구속의 역사를 바라보고 그리고 다가올 그리스도의 이상을 향하여 소망을 갖게 만들었던 그 비결이 무엇인지를 오늘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로잡힘과 좌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비전이 내게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그 사람은 소명을 받을 때 하늘이 열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부르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처럼 소명을 받을 때 하나님을 특별히 만나는 체험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 에스겔을 위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이 그 에스겔의 마음속에 부은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는 죄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감당하시기 전에 죄 있는 자의 몸이 되어서 죄 있는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하여 요단강 강변으로 나아오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세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내렸고 하늘에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 부분을 이중의 인 침 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일꾼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대한 확인 이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그가 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표증을 그에게 인 쳐주는 역사가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의 첫 마당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의 교회를 위해 첫 번째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설교자 스데반을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박해하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었지만 그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구속의 역사를 장쾌하게 꿰뚫는 한편의 설교를 남겼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이 한편의 설교를 남겼습니다. 설교가 다 마치지 못했을 때에 사람들은 귀를 막고 이를 갈며 돌을 집어던져 스데반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돌 무덩이 밑에 그를 묻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죽어갈 때에 그는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못박은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였다. 너희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라 이것이 너희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이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남기셨던 죄 사함을 위한 기도를 함께 동참하며 그는 죽어갔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는 이러한 고난 속에서 장엄한 최후를 마치며 그리고 자기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며 장엄한 선지자로서의 최후를 마칠 수 있었 습니까? 설교자로서의 최후를 마칠 수 있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하늘을 보매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하늘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것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의 사람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내가 너를 이스라엘과 이방의 손에서 너를 구원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생명과 하나님의 나라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입은 무리들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기 위하여 내가 너를 불렀노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변화된 삶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말합니다. 내가 이전에 내게 유익했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예전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그리스도 예수께 붙잡힌바 되어서 그 평생소원은 자기도 고백하기를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 평생소원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여 이전에 뒤에 있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과 그에 관한 증거를 인하여서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추방당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이제는 여객선도 오가지 않는 외딴 섬 밧모에 그리고 푸른 파도와 갈매기만을 벗삼아 살아가던 요한이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그 마지막날에 될 위대한 일들을 받아서 우리에게 남겼습니까?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고독 속에서 씨름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늘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열린 하늘을 통해서 하나님은 장엄한 마지막 날들에 되어질 위대한 일들의 계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하늘이 열리자 그는 마지막날들에 하나님의 교회에게 이루어질 위대한 비밀들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고 교회는 이 천여 년이 넘는 동안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가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쓴 편지에 무릎을 꿇고 성령이 깨닫게 하시기를 구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붙잡혀서 위대한 복음의 진리의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 받았던 위대한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한결 같이 이처럼 하나님이 하늘을 여시고 그에게 생명의 기이한 빛을 비춰주시며 계시의 위대한 빛을 비춰주셨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하여 문을 열고 그리고 기이한 열려진 하늘을 통해서 마지막날들에 되어질 위대한 비젼을 보여준 종들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뤘던 위대한 많은 사람들 중에 누가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체험하고 그분으로부터 하늘을 열고 그분이 이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지 아니하였던 은밀한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는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지 않고서 한 시대 역사를 움직였던 영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여러분 이 시대는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의 모든 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평범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아니라 비범한 한사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식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온 사람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의 빛으로 비춤을 받은 귀한 표증을 소유한 비범한 설교자들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비전이 그에게 보였습니다 이 비전은 결코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만들어낸 자기 인생의 목표나 전도의 목표나 사역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이건 모두 자기 암시적인 계획입니다. 성경이 인정하고 있는 진정한 비전은 신적인 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놀라운 비전인 것입니다 에스겔은 소명을 받을 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며 그 속에서 주님이 이 민족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리를 전함으로 말미암아 이 어두운 시대에서 나라는 망했으나 쇠하지 않고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왕국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비전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민족을 향하여 이러한 지도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민족의 갈 길이 무엇이냐고 물어올 때 우리는 분명히 이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뒤를 따라 오라 그리하면 이 민족이 살리라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들이여 그리고 주안에서 부름을 받은 사랑하는 후배들이여 여러분은 끊임없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하늘을 여시고 오늘 나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기이한 비전을 보여 주셔서 하나님이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선지자의 후예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기도하며 이 체험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선지자는 말하기를 갈대아 땅 그 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인 나 에스겔 에게 특별히 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그 사람이 이 어두운 시대에 예언의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특별히 임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왔으나 그들은 모두 율법 책을 들고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사람 들 마다 그 말씀을 읽고 배우고 가르치고 들려주고 또 듣기를 사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에게 임한 말씀은 그런 식의 말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율법의 말씀이었고 선지서의 말씀이었으나 에스겔의 영혼 깊은 곳으로 들어와서 그 영혼을 사로잡고 그 말씀에 사무치게 만드는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오늘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특별한 말씀의 사람으로 에스겔을 변화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통터지는 일 이 무엇인지 압니까? 설교를 하도록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설교시간이 도무지 진지하고 열정에 넘치지 않은 다는 것입니다 차갑고 냉담하고 그리고 상식과 배운 지식을 따라서 지식을 나열하는 식의 설교로는 결코 민족의 역사를 바꿔 놓을 수 없고 사람들의 심령에 거룩한 고민을 불러일으키고 하나님을 배옵기를 원하는 진실한 갈망들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이러한 불붙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뜨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그 마음 속에 활 화산처럼 타오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진리를 위해서 살고 이 진리를 외치기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 들 이었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외칠 때에는 마치 그 진리의 말씀 속에 그들의 목 속에서 터져 나오는 피가 맺혀 나왔습니다. 한사발의 피를 토해내는 것처럼 그들은 한 장의설교를 남겼습니다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한번의 복음의 증거와 한번의 생명을 아낌없이 바꿨습니다. 진리에 붙잡힌바 되지 않은 수많은 상식적인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들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붙잡히고 거룩한 하나님의 열정으로 기름 부은바 되지 않은 모든 뜨겁지 않은 설교자들은 교회의 독입니다 그러므로 그 설교자 밑에 수많은 형식적인 신자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학식이 틀렸고 신분이 틀렸습니다. 왕가에 태어난 사람이 있는가하면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불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물을 소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분노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특징이 그들에게 있었으니 그것은 뜨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결코 불때서 얻어지는 뜨거움이 아니었습니다.하나님의 진리가 그의 인격 속에 부은바 되어서 그칠 수 없게 그어놓은 흔적이었고 뜨거움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것을 소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칠 이유가 있었고 부르짖고 통곡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진리의 말씀이 이것을 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들 노래하는 태평하던 시대에 심판을 외쳐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호의호식하는 시대에 발가벗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너희가 참으로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와 같이 비참하게 너희들이 붙잡혀 가리라. 그들은 예언해야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정도 버렸습니다.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를 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야 했고 그리고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 관계로 돌아오라고 그 백성들에게 외쳐야 했습니다. 한결같이 진리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가슴속에 불붙는 것 같아서 이 진리가 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없는 연민의 마음이 소명을 받은 자의 가슴속에 흐르는 눈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 없음을 인하여 고통하며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권능으로 부으셔서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진리로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에 한 획을 긋도록 그 때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과 탄원으로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과 거룩한 하나님사이에서 통곡하는 이 제사장의 일들이 홀로 있을 때 언제나 이루어 져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기회를 줄 때 그는 담대히 서서 눈물을 씻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설교자임을 말씀증거를 통해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작년에 기도원에 6월 달에 올라갔었습니다. 어느 목사님하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목회를 하는데 설교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괴로울 정도래요.
여러분 소명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소명은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참답게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어떠한지 말씀을 드릴까요?강단아래서 그는 몸이 아파서 기운이 없어서 다 죽어 가는 것 같다가도 강단에 세워놓으면 마치 물을 만난 고기와 같이 그리고 길길이 뛰는 사자와 같이 이전의 연약함은 사라져 버리고 비범한 하나님의 능력에 기이하게 사로잡혀서 상상할 수 없는 열정으로 진리를 토해내고 그것을 인하여 한없이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누구입니까? 분명히 하십시오. 누구입니까? 여기가 무슨 학교입니까? 무슨 학교요? 그런데 왜 졸업을 하고 가서 가운을 입으면 제사장처럼 행세를 하죠? 난 저와 함께 여러분 모두가 너희가 누구냐고 물을 때 여러분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묻는 그 사람들에게 우리는 담대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두운 시대 속에서 피 뿌리며 죽어갔던 위대한 선지자들과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땅 끝까지 순교했던 사도들의 후예라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자 찰스 스펄젼은 그래서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도록 말씀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설교해야합니다. 그를 설교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쏟아지는 폭포수를 컵으로 받아내려고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아무리 환란과 핍박과 위협과 그리고 협박이 그에게 밀려온다고 할지라도 그는 기어이 설교하고 말 것이며 설교하고 난 후에 그는 아무리 그 한번의 설교로 말미암아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고 할 지라도 설교가 끝나고 나면 즉시 그는 만족해 할 것이며 또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기도하기 시작 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하고 그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매 삼 주 오 일년에 한번 성경 읽는 것 가지고 신학생으로 이름 값을 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 장을 읽으라고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 속에서 에스겔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비젼을 보고 말씀이 특별히 임했던 것과 같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이 열리고 그 속에서 기이한 빛이 비쳐서 내 영혼을 사로잡아서 내 안에 그것이 뜨거운 불이 되어서 이것을 전하지 않고 이것을 들려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고 너를 보고 왜 사느냐고 물으면 내 마음 속에 있는 이 뜨거운 불을 토해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더 이상 인간이 가르쳐준 지식의 나부랭이나 그리고 평범한 신앙의 경험을 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그러한 사역 자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하늘이 열리고 영혼의 그 기이한 비젼의 빛을 받은 흔적 있는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소유한 사람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선생으로써 이 학교에서 여러분들을 가르치면서 아직도 수많은 학우들이 이전에 두고, 이전에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소명을 받을 때 이미 그 땅에 버려 두고 왔어야 했을 많은 꿈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스겔이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로써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나타났고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예언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민족들은 그 예언을 들었고 민족의 역사는 그 예언을 따라서 에스겔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에스겔이 어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습니까?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때 가운을 입고 무슨 색 후드를 들고 나타났고 무슨 수료증을 보여주었습니까? 에스겔은 단지 강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백성의 포로가운데 한사람이 되어서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노라 증거 할 때 모든 사람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준 그 사람에게는 이처럼 비범한 표식이 있어서 누구도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영적인 권위를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수많은 학위와 지식의 나부랭이와 그 엉터리 같은 수료증과 이런 것들로 자기의 이력을 치장하고 그리고 사람들이나 알아줄 그 많은 이력들로 이력서를 가득 채우고 그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아가서 행세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 것입니까? 마음이 비고 허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그 마음속이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런 것들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임을 직접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사람으로 받아야할 인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런 게 필요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지식을 소유하기 원하기 보다 그것 보다 더 뜨거운 열망으로 고통가운데 있는 이 백성에게 참 길을 보여줄 수 있는하나님의 빛나는 생명의 진리를 이 선지자와 같은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 단상에 올라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설교자들은, 이런 식으로 세상에 있는 졸업장이나 헛된 이력서를 가지고 자기의 진리 없는 그 허한 설교와 심령을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진리의 말씀이 특별히 그 심령에 임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증거 할 때 여러분들은 그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양떼들이 놀랍게 참회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하고 있죠? 만약에 원하지 않는 다면은 여러분들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말씀을 증거 할 때 양떼들 속에서 이런 거룩한 참회와 진실한 슬픔과 그리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체험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일 들이 무엇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만약에 그 사람이 가슴속에 생명을 다해서 증언하지 않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거룩한 가운과 아름다운 후드와 그리고 현란하게 켜진 교회의 모든 촛불들과 조명들은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를 소유하고 그리고 그 진리가 그 사람의 성품 속에 부은바 되어서 그 사람자체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이 위대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부름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이 여러분들의 설교를 듣고 깨어지고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 만큼 여러분들이 바쁜 레포트와 학교생활 속에서도 성경을 펼 때마다 깨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에스겔은 그 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그 날짜를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 십 년 사월 오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어서 그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생일 보다 중요한 날이 되었습니다. 왜요? 그 날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했기 때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사로잡힌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마지막으로 이 에스겔에게 여호와의 권능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전해준 이야기라면 의심이 갈 수 있겠지만 에스겔 자신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음이라. 에스겔은 진리를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놀라운 권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시대는 점점 발달되고 지식은 늘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책들을 신학생들이 읽고 졸업을 합니다. 점점 더 학위를 많이 갖고 실력 있는 목회자들이 당 회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왜 영적으로 점점 어두운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까? 왜 세상의 그 흙탕물과 같은 거친 세속의 물결이교회로 들어올 때 아무도 그것을 막아서서 그 세상의 혼탁한 물줄기가 흘러 들어오는 대신에 교회를 통해서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흘러나가 어두운 세상이 맑은 물로 변하는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일들에 있어서 교회가 무능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 것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되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나타남으로 증거 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 그 권능만이 하나님의 양떼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길을 잃고 유리하며 산 넘고 물 건너 방황하다가 그리고 성난 사자와 같은 사단에게 물려가서 입안에서 씹히고 있는 양떼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 어둠의 세력으로 달려가 사자와 같은 사단을 끌어안고 그 목을 꺾고 그 빰 을 때리고 이빨을 꺾어서 씹혀 가는 양떼를 꺼내어 그들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고 고쳐서 선한 자로 만들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다시 한번 돌려주는 이 위대한 일들이 무엇을 통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악한 사단이 여러분들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도전장을 내어놓으며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목을 꺾고 이빨을 꺾고 그들의 빰을 때리고 그들의 발을 꺾고 그리고 허리를 분질러 뜨릴 것입니까? 그리하여 다시는 하나님의 양떼들이 노닐고 있는 목장을 넘나볼 수 없게끔 혼을 내주고 그들의 콧대를 꺾어버리고 그들의 머리를 부수어 버리는 이 위대한 일들이 무엇을 통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일년이나 이 년이나 삼 년이나 사 년 오 년이나 칠 년 배운 여러분의 지식의 나부랭이를 가지고 이런 위대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학위를 수십 개를 받고 가운을 수백 번 갈아입어도 사단은 하나도 그런 것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졸업을 할 것입니다. 강도사 고시를 보겠지요. 합격을 할 것입니다. 안수를 받겠지요. 교회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됩니다. 필요한 것은 제도로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 그 위에 뛰어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써의 영적인 권능의 표징을 소유할 때에 하나님의 교회는 그 사람들에게 소망을 걸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모든 놀라운 일들이 에스겔의 영혼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디서 이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그 발 강가에서 일어났습니다. 혼탁한 예루살렘의 거리나 그리고 유흥가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발 강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나라를 잃은 슬픔에 한량없이 가난해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그 민족의 죄를 인하여 슬퍼하며 제사장으로써 흐느끼며 이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고민하며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구하는 이 가난한 마음을 가진 에스겔에게 고요한 그 발 강가에서 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도 뭘 하는 건 지 모르겠습니다. 맨 날 왔다갔다, 그 발 강가와 같은 시간이 과연 언제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깊이 사무치는 마음으로 그 발 강가와 같은 시간을 가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위대한 만남을 우리에게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혀를 깨물고 새벽기도에 나와보십시오. 졸 리 운 잠을 눈을 비비고 그 발 강가로나아가십시오. 아니면, 한밤 깊은 밤에 그 발 강가로 나아가십시오.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그 그 발 강가와 같은 시간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나를 부르셨으나 그러나 내가 얼마나 하나님이 부르신 이 부름에 합당하지 않고 주님이 나를 어떻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고 이렇게 세상의 물결에 떠밀려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 밖 에 없는 비참한 인생인 것을 깨달으며 꿈이 야무지고 거룩하다고 할 지라고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진리와 놀라운 능력으로 무장되어지지 아니하고는 결국은 원하는 그 모든 꿈을 간직한데 한을 남기고 죽는 그 사람들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뜻을 남김없이 이루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그 발 강가는 어디입니까? 요새 그 그 발 강가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 그 발 강가에 여러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습니까? 거기서 에스겔과 같이 여러분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 음성으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이 시간에도 연약하고 부족한 저희들을 불러주시고 이처럼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 드리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여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삼 십 년 사월 오일에 그 발 강가에 나타나 주심으로 말미암아 에스겔을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로 세워 주셨던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여호와긴 왕이 사로잡힌 것과 같은 아버지 하나님이여 어두운 시대에 저희들을 불러 주셨 사오니 하나님 아버지여 저희들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이 아버지 하나님과 복음의 사역들을 위하여 주여 감당할 수 있도록 역사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버지여 도와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을 새롭게 만나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우리 앞에 하늘을 여시옵소서. 우리 앞에 기이한 비전을 보여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하늘을 여시옵소서. 우리 앞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하시옵소서. 우리 앞에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하시옵기를 원하옵나이다. 그 말씀에 사로잡히게 하시옵소서 그 권능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주시옵소서. 그 권능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 진리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옵소서. 그 말씀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셔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이 어려운 사역들을 감당하는 종들이 다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 역사 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저희들이 그 발 강가로 돌아가기를 원하오니 하나님 아버지여 역사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고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에게 온전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이러한 선지자로써의 부르심을 불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역사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을 세워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역사 하여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여! 돌이키는 놀라운 역사들을 저희들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 하옵나이다.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두운 시대에 에스겔을 통해 거룩한 뜻을 이루셨던 것처럼 하나님 저희들이 여기 이 땅에 있는 인생들이지만 우리 앞에 주의 거룩한 하늘을 한번 여시옵소서. 그의 기이한 비전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에게 이 메마른 심령에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권능으로 임해서 그 말씀에 사로잡힌 종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 하나님이여 가치 없는 것들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못박으며 오직 이 진리 하나에 붙잡힌 종들이 되도록 역사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우리의 그 발 강가가 어디인지를 보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 그 발 강가에 우리를 세워 주시고 에스겔과 같은 만남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설교자와 영적 부흥 2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삼상 1: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 하니라.
약속대로 오늘부터 글쎄, 아직 마음을 못 정했어요. 언젠가는 한번 목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몇 달에 걸쳐 설교를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 그저 두 번 정도만 하고 말까아니면 한 일곱 여덟 번 할까 아직 마음을 못 정했습니다. 그래서 확실한 것은 이번 주하고 다음주는 확실하게 한사람이 목사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 안들은 사람은 안수식 할 자격이 별로 없어요.
오늘 읽은 본문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선지자 사무엘이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장면입니다. 이 사무엘 선지자는 사연이 있는 사람 아니었습니까? 사경회 때 설교를 잠깐 했습니다만 이 한나가 아이가 없어서 고통을 하고, 많은 고심을 하다가 온갖 설움과 원통한 일을 다 당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간절히 기도해서 얻은 자식이 바로 이 사무엘 이었습니다. 근데 이 사무엘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고 이 여종을 잊지 아니하셔서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겠나이다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것은 민수기 6장에 나오는 나실인 의 규례 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앞에 구별된 나실인으로써 그 머리를 밀지 않는 것이 구별된 표였습니다. 어쨌든 그런데 그 약속대로 젖떼기 전까지는 데리고 있다가 젖을 딱 떼는 날에 이 성전으로올라 와서 그 아이를 여호와의 집에 바치는 겁니다. 한번 그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아이가 다 자라서 그래서 큰 아이가 되어서 군대를 가도 눈에 밟혀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울고 불고 하는데 이게 이제 젖을 뗄 때쯤 되니까 몇 달에 젖을 떼는가 요즘은 젖먹이는 애들을 못 봐서 모르겠는데 아마 거의 돌 될 때까지 먹지 않겠어요? 한 여덟 달 먹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얼마나 진석이보다 어릴까 말까 한 나이인데 그렇게 한창 눈에 밟히고 아주 눈에 아른아른 할 나이에 그걸 띄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게, 차라리 안 낳는게 낳지, 그걸 어떻게 젖을 뗄 때 그 아이를 그시기에 하나님께 바치겠어요? 그런데 바친다라고 하는 건 그냥 신학교 보낸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아주 드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부모로써 그 아이에 대한 모든 주제권을 포기하는 거예요. 한나가 그 일을 했습니다. 역시 참 믿음의 어머님 밑에서 믿음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죠. 아마 한나는 틀림없이 세상 적으로 볼 때는 바늘로 찔러도 피도 안나올 그런 여자였는지도 몰라요. 우리 같으면 하나님 앞에 가서 다시 한번 내가 이 어린 걸 띄어놓고 어떻게 살랴, 차라리 내가 가서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옛날 것 취소라고 한번 기도를 해보자. 그리고 올라가서주님 여종을 기억하시고 내가 눈에 밟히는 그 놈을 어떻게 띄어놓겠습니까. 옛날 것 한번만 취소해 주십시오. 네? 이렇게 구차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나님 앞에 한번 발설해서 드린 것은 여호와 앞에 한번 서원한 일은 해로울 지라도 갚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 이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믿음이 좋은 한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목사가 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믿음이 좋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서 한나와 같은 처절한 기도의 여인의 중보 기도를 받으며 그 간증을 쌓고 그 사람의 손에 이끌려 하나님 앞에 바쳐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히도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우리 어머니가 한나와 같이 못해요. 그건 본인도 알고 저도 알아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에게 궁금한 것은 한나보다도 더 중요 한 게 이 사무엘이 오늘 우리의 관심이에요. 그 사무엘을 통해서, 사무엘이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에요. 선지자였죠. 그러면 여러 면에서 그 사람은 오늘 날 목사와 매우 유사해요. 목사는 한 교회를 목양 하고 돌보는 사람이에요. 이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굳이 목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선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칠 년이나 팔 년 전에 안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키면서 꼭 목사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지금도 사실은 솔직히 별로 느끼지 못하고 강도사니까 강도 짓이나 좀 더 하고 싶은 그런 생각인데 그만 하라고 하시니까 강도 면허증을 반납을 해야되겠습니다. 반납했어요 엊그제 갖다가. 그렇게 했습니다 만은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 교회를 목회 하는 목회자. 그런데 사무엘은 이스라엘이라는 큰 교회를 목회 했습니다. 그는 또한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계획을, 뛰어난 영적인 지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는 일에 그 일을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 백성들을 돌보는 사람이 었습니다. 그는 또 재판을 해 주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를 세우는 것도 그 사람의 일 이였고 심지어는 그는 이스라엘 나라, 즉 구약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큰 교회가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하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말한 기도의 사람 이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는 사무엘이 하던 일들을 충실히 하면 그건 꼭 목사의 직 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는 것과 다름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사는 아니지만 목사의 직을 설명할 때에 이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드는 것이 전혀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 오늘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목사는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즉시 반문 할 것 이예요. 아니, 그러면 성도는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고 세상에 드려진 사람이냐. 아니에요, 물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위해 그 피로 구속하시고 사셨을 때에 여러분도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이에요, 모두 애굽에서 구원해 내어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을 때에 그 할례를 받았을 때에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만 속했다는 표거든요. 그런데도 그 안에는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진 것 말고 그 이상으로 인생이 드려진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뭐냐하면 어려서부터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은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다 드린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냐하면교과서적으로 보자면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 앞에 드려진 사람들 이였죠. 그러나 걸어다니는 나실인, 머리가 길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나실인들을 볼 적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옷깃을 여미는 것이에요. 왜,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졌지만 저 사람들은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인생이 드려진 사람이다 이런 것이죠. 목사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보다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께 만 드려진 사람들. 하나님께 만 드려진 사람들. 그러니까 목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제 이전에 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이제는 못 한다고 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어요. 우리 동창 가운데 이번에 나하고 같이 안수를 받는 형제가 있어요. 인제, 그 친구하고 나하고 막차를 탔죠. 고시에 떨어지지 않는 한 안수를 24일날 받겠죠. 근데 그 친구가 아직도 회사에 다녀요. 그런데 아주 사심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하고 같이 들어온 사람들은 지금 팔 백 만원 씩 받는데요, 월급을. 칠 백 만원 내지 팔 백 만원을 받는데 자기는 백 만원을 가지고 들어간데요. 근데 부인이 그런데요, 여보 당신을 어떻게 십 일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근데 그 부인이 아주 돈 많은 집안에 아주 가정교사를 넷 씩 두고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그런 아주 부잣집 딸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그랬데요, 와서 제일 먼저 내가 너에게 고생을 가르쳐 주겠다. 그래서 네 식구가 백 만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살려니까 뭐 만만하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그 회사가 종일 다니는 게 아니라 아침에 가서 딱 출근하고 그리고는 자기 돌아다니면서 일 보고 그리고 저녁때 가서 마감을 하고 그리고 집에 들어오니까 실제로 회사에 가는 시간은 별로 없다는 거죠. 그래 내가 강도사 까지 다, 안수 받으면 안 된다 인제, 그리고 교회에 부담을 끼쳐라, 그리고 교회에 밥솥을 걸고 거기서 먹고 사는 거다. 이게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다. 이게 그래서 권면 했어요. 안 된다. 여러분, 바로 그런 겁니다. 목사가 되면 이제는 영원히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 그것 하나를 위해서 살도록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에요.그러니까 전도사 시절에 가서 아르바이트, 세차도 하고 신문도 돌리고 빵도 팔고 새우젓 장사도 하고 하는 건 전혀 흠이 아니에요. 나는 오히려 너무 훌륭해 보여요. 신학교 다닌다는 이유하나 때문에 여기저기서 손 내밀고 대접을 받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이런 사고방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앞으로 교회를 해도 매우 위험한 사고의 지배를 받아요. 전도사가 뭐냐? 교회 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가르치도록 부름 받은 일꾼이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세상 적인 직업에 종사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요. 이런 건 양해 될 수 있어요. 그러나 목사는 어떤 이유에서도 그 것은 가능하지 않아요. 물론 우리는 바울과 같이 인생 전체가 하나님앞에 드려 졌으면서도 자신과 동행의 쓸 것을 위하여 텐트를 기우며 복음을 전하던 그런 특별한 처지에 있는 선교사 적인 사람들을 우리는 잘못했다고 부인할 수 없어요. 내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저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어요. 근데 그 목사님이 간증하는데 전 눈물이 나더라고요. 얼마나 힘든지, 교인은 열 명도 채 안나오는데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 에요. 그런데 동네에 나가면 꼬마들이 돌멩이 들고 와서 야 전도 간다, 그러면서 전도사를 인지시키는 무슨 전도인줄 알고 사 자도 빼 버리고 돌멩이를 던지고. 목사가 돼서. 근데 교인이 아홉 명인가 그러니까 끼니가 안되잖아요. 풀을 끓여 먹으려고 해도 밀가루가 있어야지, 누구 말 따나 밀가루가 있어야지 솥을 빌려다가 숱을 꾸어다가 죽을 쑤지. 자기는 아무것도 없는 거죠. 그니까 나중에는 목사님이 인제 가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디 가서 손을 벌리겠느냐. 열심히 새벽에 기도하고 노가다 판 에 가서 등짐을 지면서 그러면서 교회에서 주지 못하는 사례금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꾸리는 거예요. 몇 달 동안. 그런 거 우리는 정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런 특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이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거지요.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이에요. 불이익을 불면은 뭐냐하면요그 목회자의 모든 괴로움은 가정적으로나 교회적 으로나 그다음에 형제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나 사람들이 목사가 된 자신을 향해 이런 성숙한 견해를 가져야 하는데 이게 아니거든. 부모는 여전히 내 아들이라 여기고 아내는 여전히 내 남편이라 여기고. 자식들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라. 형제들은 여전히자기 형제라. 그러니까 거기에서 이제 많은 갈등이 빚어지는 거죠.하나님께만 자신을 드리면서 하나님께만 자신을 바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목사인데 부모도 주권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아내도 주권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자식들도 주권을 놓으려고 하지 않고 그 다음에 주위 많은 사람들도 여전히 그 주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 이 한나가 사무엘을 바쳤어요. 율법에 뭐라고 되 있어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율법의 커다란 계명 중 하나 에요. 그 부모를 욕하거나 때리는 자는 죽임을 당할 거예요. 예수님께서도 비난하셨던 문제가 뭐죠? 너희들이 껌벅 하면 하나님께 바쳤으므로 우리에게는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나이다. 그런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이다. 주님이 심하게 책망하신 거예요. 소위 얘기하는고르반의 교훈 아닙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율법이 그렇게 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바쳐진다음에 한번도 사무엘과 한나가 만나는 장면이 안나와요. 정말 재미있어요. 한나가 어디서든지 몇 살에 죽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한나가 오래 살았더라면 사무엘이 그 엘리 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서 선지자로 자라 가는 장면과 국가적인 지도자가 되어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신문지상에 텔레비전에 수시로 오르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나가 사무엘을 찾지 않은 것을 보십시오. 뭐죠? 하나님 앞에 사무엘을 드렸을 때에 이 아이는이미 내 아이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이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신앙고백을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목사도 그런 사람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사와 가정에서의 갈등 중 하나는 뭐냐하면 부모가 그 자식을 목사가 되었는데도 목사가 먼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낳은 자식이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목사에게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목사에게는 항상 무거운 후고의 짐이 되는 것이지요. 뒤에 있는 짐이 되는 거죠.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짐이 되죠. 그래서 제가 아는 한 동역자는 목사안수를 딱 받는 날 부모님을 불러놓고 얘기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님 아버님, 당신이 이제 그 사랑하고 그 품에서 기르던 아들 아무개는 오늘 날짜로 죽었습니다. 부모님, 이제 저는 이 세상에서 죽은 자식으로 치십시오. 그리고 제가 주님이 힘 주시는 대로 마음껏 여호와 만을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럼, 후레아들이라서 지금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무엇 이냐 하면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이 부모님생신에 안 찾아가겠어요 아니면 회갑 때 예배를 안 드리겠습니까, 아프시 다면 병원아 안 찾아가겠어요. 그러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악한 자라고 성경은 쓰고 있죠. 그러나 정신은 그런거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계획이 있고 부모가 죽었으면 그러면 그 나실인은 눈물을 삼키며 복음을 전해야 해요. 주의 말씀을 전해야 해요. 이게 바로 나실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이에요. 신명기에 보면 이 나실인은 부모가 죽어도곁에 가면 안 되요. 자매가 죽어도, 형제가 죽어도 곁에 가면 안 되요. 그렇게 구별되는 사람 이였다는 것이라는 것이죠. 가정에서 겪는 갈등은 무엇입니까? 여기도 아마 이후에 목사하고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오늘 얘기 잘 들으십시오. 목사의 아내가 되길 원하는 사람은 목사와 동일한 소명을 하나님 앞에 느껴야 해요. 자기는 좋아서 결혼하고 하나님 앞에 사후승인을 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정이 목회 사역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겠다는 형제가 있어서 자매를 하나 소개해 줄까. 어떤 자매입니까. 신앙 좋고, 기도 많이 하고, 말씀 통달하고, 경건하고. 뭐 그랬죠. 나는 목사 사모가 아니라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다고 그래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기왕이면 배 튀어나오고 목 짧은 여자말고 목이 길고 배도 홀쭉하고. 그런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아니 목사 아내가 되는 거야 목사 노릇은 목사가 하지 목사 아내가 합니까,가리키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가르쳐 지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의 아내가 됨에 있어서 그 남편이, 때로는 그 남편과 결혼을 하면서도, 그 남편에 대한 주권이 자기에게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사람 이여야 해요. 그건 솔직히 말해서 세상 적으로 보면 사랑과 그런 논리는 성립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자기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나랑 결혼하길 원해? 그럼. 근데 나는 당신한테 줄 수는 없어. 말이 되요? 누구 놀리는 거예요 지금? 근데 목사의 세계는 이 논리가 통해야 되는 데가 있다는 것이죠. 자, 이 얘기도 잘 새겨들어요. 너무 그렇게 슬퍼 할 필요 없어요. 목사 아내가 될 사람 많구만. 이렇게 슬퍼하는 것 보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남편이 아내가 곤고 하고 아플 때에 죽게 내 버려 두겠어요, 아니면 뭔가 결핍을 느낄 때에 그 결핍을 채워 주지 않겠어요. 노력을 할겁니다. 그러나 원리에 있어서 그건 기억을 해야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결혼을 하면서도 한없이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을 받는 관계인데 둘이 그렇게 사랑하면서 결혼을 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내 것이 아니다. 그걸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 목사 사모가 되면은 그 목회자에게 한없는 괴로움을 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는 여자와 결혼 할 바에야 나는 바울처럼 혼자 사는 것이 좋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차피 오래 살 인생도 아닌데, 기껏 해봐야 한 팔 십 년 살고 죽을 건데 그렇게 올무에 매여서 살 바에야 마음껏 하나님을 위해서 섬기고 위하다가 죽는 것이 옳다. 자신의 경건만 지킬 수 있다면. 참 기억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여자를 얻어야 내야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너무 중요해요. 제가 지금, 그가 우리나라에 안 계셔요. 그래서 내가 말을 할 수 있죠. 아주 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널리 알려졌던 분이에요. 그런데 그 분이 결국은 사모 때문에 목회를 그만 두었어요. 그 목사님이 상처를 했어요. 그리고 혼자되니까 그 목사님이 재혼을 했는데 그 교회에 있는 청년부 자매 하나가 죽자고쫓아다녔어요.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근데 그 목사님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자매는 사모로서는 무슨 소명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말하는 것 뭐냐하면 목사님, 사모가 별거입니까. 내 목사님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 거 아닙니까.그런데 상처를 하고 중년에 접어들려는 분이 이제 갓 피어나는 젊은 청년 자매가 막 눈물을 흘리면서 결혼하자고 애원하고 뭐 이 자매는 주님의 뜻이, 뭐 그렇게 어려운 뜻은 모른다는 거예요. 하여튼, 확실한 건 하나는 난 목사님을 사랑하고 죽기까지 따르오리 할 수 있다는 거예요. 하여튼 목사님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결혼을 했죠. 그게 눈물의 씨앗 이였어요. 참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참 많아요. 그렇게 됐는데 밖에서 목사의 가정의 세계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서는 만날 때야 다 자기 껀가 그랬죠, 그런데 결혼하고, 그분이 목회 하시는 교회가 꽤 큰 교회였어요. 아마 한 오 육 백 명, 팔 백 명 가까이 모이는 교회였어요. 그리고 학교에서 신학교 선생님도 하셨어요. 어렵쇼, 그러고 보면 한창 그 뭐 찬란한 꿈을 꾸면서 그 젊은 아가씨가 결혼을 했는데 이건 뭐, 정신 없거든요. 신학교에서 강의한다, 외국에 집회를 간다. 밤중에도 교인들이, 팔백 명이니까 수시로 죽는 사람도 생겨나고, 그리고 무슨 뭐 또 옛날에는 외국만 나가도 목사님들이 또 공항까지 쫓아갔잖아요. 참 고달팠어요, 그거 보면. 오죽했으면 목사 죽은 시체는 호랑이도 안 먹는데요. 속이 하도 썩어 가지고 맛이 없데. 그리고 이건 뭐, 그런데다가 또 지각없는 교인들은 목사님한테 할 얘기 있다 그러고 뚜드리고 들어와 가지고 뒷방에 들어가서 한참 또 얘기하고 앉았지. 그것도 여자가 말이에요. 야, 이게 이 치밀대로 치미는데 ,그 사역을 계속 하고 있는 한 꺼질 수가 있는 거예요? 그거 집어치울 수가 있는 거예요? 안되지요. 그 목회 철학만 가지고도 안 되요. 왜 그래요? 아니, 교인이 팔백 명씩 천명 씩 있는데, 이거야, 그러고 예, 그러고 군대식으로 옮겨 주면 목사만 하겠네. 되겠어요 그게? 근데 이게 쌓였네. 그러니까 나중에 이러다가 목사님하고 감정이 틀어졌네, 그러고 나가서 그담에는 주일날 저희들이 일부러 튀는 거죠 인제. 반발하는 거예요. 그래봐야 스물 셋, 스물 넷 고 또레니까 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애들 같이. 그걸 튀는 거예요. 튀는 게 뭐, 주일 저녁때 일부러 말예요. 아주 청바지 몸에 짝 달라붙는 거에다 새빨간 티셔츠를 입고 단발머리로 나오는 거예요. 스레빠 끌고. 오죽했으면 당회 에서 당회록 에다가 사모님은 저녁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 그러고 도장을 찍어놓은 거예요 장로들이 오죽했으면 그러고 청바지에다 손 넣고 청년들하고 야자 하는 거예요. 그거 왜 그래요? 사랑을 독차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발 심리로 이제 반항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그만 두셨어요. 여러분, 이런 것들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에요. 그런데 그 모든 이유는 무엇 이냐 하면 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결혼하는 것이에요. 그 말은 같은 말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 사모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은 좋은 신랑감 찾으러 다니지 말고 그것도 찾으러 다녀야겠지 만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하면서, 그 여자도 하나님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이 되야 해요. 이런 얘길 하면 여러분들은 뜻밖에 충격이 될지 모르지만은 요한 웨슬레 목사님. 그 분이 육 십 년 동안에 새벽 네시에 일어난 강철같은 사람 아닙니까. 그 분 설교 집 한번 읽어보셨어요? 불이 튄다고요 지금도 . 삼백 년이 지났는데도 지금도 읽으면 불이 튀어요. 이백 오 십 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그가 마이크도 없는 곳에서 수 만 명에게 외칠 때 대단한 사람 이였죠. 집에 들어오면 마누라, 사모도 아닌 마누라야. 마누라가 그 사모님은고결하신 우리 목사님, 흰머리가 나 있는 목사님의 머리채를 잡고 집회 갔다 오면 도는 거야 방안을. 그래서 한 웅큼씩 흰머리를 뽑았다. 그러니, 근데 그 모든 비극의 원인은 개인의 비극은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게 교회의 비극이거든. 그러니 목회자가 돼서 줘 패겠어요, 어떻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목회자의 설교에 가장 은혜를 못 받는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사모야, 사모. 그런데. 막 설교하면 뒤에 앉아서 니 나 잘해라. 그래 목사님이 설교하니까 사모가 이불 가져 와서 목사님 나 오늘 강단에서 자겠수다. 아 왜 그러냐, 나는 여기가 제일 좋수다. 강단 위에서 하고 내려올 때하고 사람이 틀리다 이거죠. 근데 이 모든 거는 빨리 꿈을 깨야지만 빨리 그 목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 목사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깊이 간파하고 그리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들을 정리를 하지 못하고 그냥 늘 생각하는 건 뭐냐하면 러브 스토리 같은데 나와서두 여자 남자가 오직 세상에 아무것도 없고 뜨겁게 사랑하다가 잘 먹고 잘 살다 죽는 그런 러브스토리가 담긴 영화, 그런 환상적인 것들이나 그리면서 목사 세계에 와서 들여다 보니까, 이건 대체 뭔지 맨 날 돌아다니고 말이야, 집회 다닌다 그러고 말야, 뻑 하면 밤 세워 기도한다 그러고.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든 문제들이 뭐냐하면 목사가 하나님께만 받쳐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 그럼 왜 결혼을 했느냐, 그렇게 묻는 사람은 왜 그런 사람한테 시집을 와? 그러니까 어때요, 목사가 될 때에도 주의를 해서 목사가 돼야하고 그리고 목사가 된 사람에게 시집을 오는 사람도 깊이 그걸 생각해야해요.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의 아내는 아무나 될 수 없어요. 그리고 그냥 대충 하고 온 사람은 반드시 사역을 해 나가면서 그 자기의 잘못된 사고와 편견을 고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고난을 받아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뭐냐, 하나님께만 바쳐졌다 라고 하는 것들을 아내가 인정을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때요, 세속에 있는 아내들이 남편에 대해서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특권들을 때로는 상황이 되면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고 기꺼이 목사가 그렇게 살아도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만의 그것을 세길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한다. 그러니까 어때요? 나는 확실히 믿어요. 한사람의 목회자가 하늘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상급을 받을 때 그런 모든 여자로서의 평범한 특권을 포기하며 한 목사를 섬겼던 그 여인네들. 그 이상의 빛나는 면류관을 하나님 앞에 받을 것입니다. 누가 알겠어요? 그 뺑 하니 돌아오는 그러한 남편이 아닌 남편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내들, 그를 누가 알겠어요. 그런데 그 것이 원망과 고통으로 쌓이기 시작하면 한이 맺혀서 목회를 못 하는 거예요. 가슴에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그 상처가 치유되기 전에는 영혼을 돌보는 일을 삼가야 해요.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상처를 통해 영혼을 바르게 돌보지 못해요. 그런데 목회자의 아내가 그 목사로부터 계속해서 상처를 가슴속에 쌓으면서 그러면서 이 속이 끓는다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그리고 아내 때문에 목회의 길을 걸으면서 신념을 포기해야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쉽게 하면 이런 얘기 아니에요 목회자의 아내가 되었으면 목회자의 사례금에 맞춰서 살아야 되요. 그건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예요. 그런데 옛날에 입던 그런 허황할 적 경험을 그냥 가지고 있는 거라는. 그럼 어때요?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에는 목사는 집에서 고통을 받게 되니까 더 많은 수입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그러면 이미 말씀 사역은 뒷전에 가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때요, 얼마의 사례금을 받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던지 불평 없이 살아야 되요. 그런걸 가지고 불평을 할 사람은 시집을 잘 못 온 거 에요. 사장하고 결혼하지 뭐 하러, 변호사나 판사하고 그런 사 자 돌림하고 결혼하지. 하긴 목사도 사 자는 사 자이지. 하나님 앞에만 바쳐진 사람이에요. 그거를 아 내가 이해해야지. 이러면 하나님이 보신다는 거죠.나와 하나님이 서 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내가 포기해야 한다. 이 것이 상처가 아니라 즐거움이 되야 되요. 그래서 이것은 분명한 소명이 필요해요. 근데 그 목사가 하나님께만 바쳐졌다는 사실을 그렇게 가정에 관해 용납 되서는 안 되요. 흔히 교회에서 인정을 해 줘야 되요.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아주 인격이 고매하고 사심이 없으시고 말씀 잘 전하시는 분이에요. 근데 결국이 그 교회를 떠났어요. 거의 개척하다 시피 한 교횐데 떠났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집회 많이 다닌다고 교회가 목사님 잘른 거야. 그래서 전에 있던 교회에도 보면 목사님이 신학교 나가서 강의하시는 아니, 이건 절대 저를 변론하기 위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신학교 강의 나가는 걸 가지고 집사들이 구시렁 대는 거야. 하루만 나간다 그랬다 이틀씩이나 나간다. 그래 속으로 정말 잘났네. 우리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앞에서 살아가면서 거시적인 시야를 갖지 못하고 언제든지 이런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는 거죠. 교회가 그럼 왜 목사님에게 당신이 무슨 권리로 목사님이 가서 강의를 하든지 설교를 하든 당신이 뭣 땜에 그러냐고. 논리는 간단해요. 교회에서 밥 먹여 주는데 왜 딴 데가서 힘빼느냐 이거예요 이게 성경주의입니까, 아니면 자본주의입니까. 그러면 목회자가 사례금을 반만 받겠다고 하면 설교 반만 하다 내려가면 내버려두겠어요? 딱 클라이막스 올라가다 사례금을 반으로 주시니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그러면 받아주겠어요? 더 듣고 싶으면 돈 더 넣으라고. 그러면 미친 목회자라고 할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그 목회자 수준에 그 목회자 교인. 난 그래서 그 집사님 보고 그랬어요. 목사님이 당신의 목사님이냐. 아 그러면 우리 목사님이지. 그러면 우리 목사님인데 왜 그렇게 헐뜯고 돌아 다니냐. 여러분, 헌금을 했으면 목회자는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헌금을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바칠 때 여러분은 하나님께 바치는 거에요. 그리고 목회자는 사례금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거에요. 그 일을 누가 그래? 주보를 두 개를 딱 가져와서 어느 장로가 자 목사님 보십시오. 물론 이미 이제는 감정이 안 좋아서 틀어져 있었지만. 보십시오. 목사님 이거는 작년에 십이월 마지막 주 주보이고, 이건 올해 마지막 주 주보입니다.
한 명이 늘었군요. 일년동안 그 많은 사례금 가지고 뭐하시고 겨우 한 명 전도 하셨습니까. 목사님 그 사례금 날 주십시오. 내가 한 명보다는 더 하겠습니다. 이거 뭐, 철이 안 들어도 보통 안 들은 게 아니지. 그래서 요즘 기도 제목이 주님, 철없는 한국교회 장로들 주께서 철 좀 들게 해 주십시오.그게 요새 기도 제목 이예요. 그렇게 밖에 말 할 수 없어요. 그걸 영적인 수준, 뭐 그런 거 가지고 얘기하면 소용이 없어요. 그런 어려운 말은 필요 없어요. 아직 철이 없는 거예요. 누구 말 따나 천방지축 하늬 에요. 그러니까 그건 그런 거예요. . 목사는 그 목사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이예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면 여러분 모두를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 목회자 에요.목사 에요. 그런데 그 월급 몇 푼 줬다고 목사를 그걸로 개 줄에 목매듯이 그렇게 목매서 끌고 다닐 생각을 한다면 당신들은 복 받기는 예전에 틀렸어요. 옆에서 어이구 참, 가재는 게 편이네. 난 게도 아니고 가재도 아니지만 사고방식은 고쳐야해요.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도 교인들이 불쌍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목회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울이 에배소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가면 죽는 데니까 고난을 받는다니까 딱 매달리니까, 바울이 뭐라 그러면. 이러지 마라. 그런데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잖아요. 아이고, 이 양 떼들을 두고 내가 어디를 가나. 이렇게 생각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뭐라그러냐면 이러지 마라.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죽는 것도 각오하였다. 왜, 누구 때문에 바쳐졌기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바쳐졌기 때문에. 살고 죽고, 목양 하는 일을 그만하게 두고 하나님 모든 일에 하나님이 홀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그거를 가정과 교회와 그 목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속히 인식해 줘야 되요. 그 때 가능 한 거에요. 그렇게 열심히 주를 섬기고 그렇게 바르게 살아가다가 그 목사의 마음을 찌른 한 마디가 있어요. 야 임마, 형들이 얘기하는 거죠. 야 임마, 니가 우리 형제로써 형제들한테 쥐뿔이나 한 게 뭐 있냐. 그거 할 말이 없어요. 실제로 그 모든 것들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처럼 모든 것들을 모범으로 하고 그러면서도 하나님도 열심을 다해 섬기고 모든 분야에서 A학점 받는게 가능하면 왜 바울이 수시로 집으로 가서 아버지한테 문안인사를 안 드렸을까요. 왜 제자들이 배와 그물과 부모를 버리고 떠났겠냐는 거예요. 그것이 딱 가슴에 와 닿아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동생이결혼을 하는데 큰 형이니까 부조를 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뭐, 교회에서 칠 만원 받아서 육 개월에 사십 이 만원인데 등록금 고지서는 사십 오 만원 나오는데 그게 뭐 거지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데. 뭐 만원을 할거야, 이 만원을 할 거예요. 그 때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깨달은 것은 그런데 이렇게 마음 아파하면 안 되는 거예요. 거룩한 백성의 아들이라면난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다. 교회가 이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 늘 뭐 누가 그러데. 전도사 사례금을 준다고. 큰 교횐 데요, 아무튼 우리 교회보다는 많이 주지만 이 십 만원 삼십만원. 우리는 삼십 만원도 못 드리지 만은. 내가 그랬어요. 장로님들한테 난 학교에서 생활비 주니까는 교회에 기대지 않습니다 만은 그게 뭡니까. 가서 불고기 집에 가서 식구들하고 저녁한번 먹으면 십 만원 이 십 만원 먹는 사람들이. 애 둘 딸리고, 아내하고 사글세 내고 사는데 삼 십 만원 가지고 등록금 한 학기에 팔 십 만원 씩 내고살으라고. 따라 그냥 살아 보란 말이야. 살아지냔 말이야. 그러니깐 대답이 걸작 이예요. 우리가 삼십만원 드리는데 한 주 나와서 봉사하는데 팔 만원씩 드리는 건데 그런데 이 계산 방법이 순 방직공장 직공 월급 주는 거 계산하는 방식이야. 참 딱해요. 이미 성직에 들어서기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 앞에 교회에 바쳐졌을 때 그는 교회에서 그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저는 교회를 개척해서 있을 동안 내가 무슨 사심을 가지고 이게 무슨 뭐 사례금 앞으로 많이 달라고 무슨 지금 뻥치는 겁니까.그런 거 아니에요. 원리적으로 지금 제 말이 하나님 말씀이에요.그러니까 충분히 훌륭하게 호사스러운 생활은 필요 없지만 인간다운 생활을 하면서 물질 때문에 무거운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그렇게 만들어 줘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으로 바쳐진 사람은 여러분, 교회가 이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 그 때 교회와 목회자 사이에 끊임없는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그리고 늘 목회자를 바라보면서 그가 수고하는 모든 일과 자신들이 주는 돈을 비교하는 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이에요. 이건 목회자의 삶도 문제가 되지요. 누가 그 얘기 하더라. 우리 목사님은 어디를 가시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러냐, 아침에 아침 먹고 가벼운 차림으로 자가용 몰고 살살 돌아다니시다 저녁때 들어오는데. 아무도 어디 가는지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안 되요. 목사에 대한 품위 에요. 설교하러 간다. 선교하러 간다. 몇 일 동안에 기도하러 가는데 어느 기도원에 간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든지 그 목사님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그 것을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고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 교회와 목사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똑같거든요. 아내의 관계와 똑같아요. 아내가 남편이 뭐 하는지 관심이 없으면 그 다음부터는 말을 안 해요. 또 남편은 남편대로 살고 너가 그건 알아서 뭐하냐 그러구 서로부부 관계가 소원해 지는 거나 마찬가지죠. 교회가 목사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인정하면서 그의 사역을 위해 애쓰고 그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함께 기도하고 고뇌하며 그래서 그 속에서 함께 주님을 섬겨야 하는 이런 일 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제가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집회를 하다가 너무 힘들면 그러면 이제 전도사님한테 부인한테 전화를 하면 그러면 그긴 점 조직으로 되어 있어요 비상 연락망이 그래서 sos를 치면 한 두 시간만에 전 교회로 다 퍼지는 거야. 집회가 이틀까지 잘 나가다가 한 삼 일째 완전히 곤두박질 치는데 이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야. 그러면 집회가 다 기울어지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면 아 지금 누가 기도하는구나. 올라와 그러면 돌아와서 함께 나누고 기도의 승리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거죠 이것이 바로 교회와 목사와의 관계라는 거죠 그러니까 절대로 그런 편견을 가지면 안 되요. 마지막으로 하나 결국 결론 적으로 말해서 이 짧은 성경에 보면 결국은 하나님께 드렸다 라고 하는 것이 계속 반복해서 나와요 두 번이나 나와요. 그리고 성경에 보니까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정말 내가 솔직히 말해서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 중의 한 이유는 강도사까지는 돌이킬 수 있어요. 하여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지만 내가 그만 두고 가서 햄버거 가게라도 차리면서 살면 사는 거 아니겠어요? 그 옛날에 가졌든 소원대로 글이나 쓰면서 혹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처럼 400만 부나 팔려서 돈방석에 앉아서 살면 사는 거 아니겠어요? 강도사까지 와서 돌아서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안 되요. 근데 목사는 불행히도, 강도사 그만 두면 누가 강도사라고 안 부르거든요. 그러나 목사는 죽어도 묘비에 목사라고 쓰는 거예요. 이제 족쇄 채우는 거예요. 이건 물르지도 못해요 지울 수가 없어요. 호적에 있는 것은 재판소 가서 지우면 되는데 이건 면직이 되도 목사예요. 죽은 다음에도 수 백년 후에 이름 석자를 떠올릴 때 그 뒤에는 이 백년 전에 살아서 사당동에서 목회 하시던 김 남준 목사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영원히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건 지워지지 않는 거예요. 내 끊임 고민은 이 이름에 합당하게 살 수 있겠나 하나는 내가 너무 자신이 없고 그 다음엔 주위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요.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나를 향해 주권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믿어지고,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아니 예요, 한 사람이 안 수를 받고 목사가 될 때는 그사람은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다 드린 사람 이예요. 다른 사람들한테 줄 것이 없는 사람 이예요. 교회도 가정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그에 대한 주권을 포기해야 되요 이건 하나님의 명령 이예요. 그리고 만약에 그러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교회는 목사를 가질 자격이 없어요. 평생 강도사하고 목회하면서 살면 되요. 근데 그러니까 이 목사 안 수식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안수를 받으면서 자신이 모두 하나님께만 드려진다고 하는 것을 인치는 의식 이예요. 그렇게 안수를 할 때 실제로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그러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아요.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앙적인 의미는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때요? 목사 안수 식 때에는 식구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너무 기뻐하면 안 되요 너무 . 내가 장가갈 때 우리 할머니가 아주 지각 있으신 분 이예요. 돌아가셨지만 요새는 늘 그분이 뵙고싶어요 뭐라 하시냐하면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에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진지한 할머니 얼굴을 뵌적이없어요. 나한테는 항상 웃으셨으니까. 식장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 너무 웃으면 안 된다.난 농담 비슷하게 아니 웃으면 어때요? 그러니까 안 된다. 아 너무 시선이 얼어붙을 정도로 그렇게 절박하게 요구를 하시는 거예요. 근데 나중에 결혼하는 사람들 보니까 남자는 좀 나은데 여자가 식장 들어갈 때 좋아 가지고 입이 허벌레 하고 있으면 아이구 팔푼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저 옆에서는 엄마 아빠가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그 좋다고, 만난 지 몇 달되지도 않았으면서 허벌레 해 가지고 푼수같이 보이더라고요. 작년에 목사안수 식 하는 거 봤어요. 나도 뭐 그 이상의 마음으로 목사 안수에 참여할 수 없지만 너무 슬펐어요. 그 안수 식 하는 장면이 다른데서 내가 목회를 하지만 너무 드라이해요. 메말랐어요. 하나님 앞에 자신을모두 다 드리는 건데 이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모든 사람과의 미련을 그 날로 버리는 게예요. 그리고 자기와 관계를 맺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 주권을 행사할려고 해도 받아드려 줄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나는 오직 하나님 그 한 분을 위해서 남김없이 모두 드려진 사람이다. 그 하는데 우는 사람이 없어. 어떤 예식장에 가보니까 더 가관이예요. 깜짝 놀랐어요 안수 받는다 그래서 갔더니 여기서부터 책상이 한 이 십 개가 죽 놓여있는데 아무개측, 아무개측 하며 결혼식장에서 봉투 받는 것처럼 죽 서서 사람들은 한복을 입고 머리를 볶구, 손에 손에 봉투를 들고 꽃다발을 들고 줄줄이 사탕으로 와서 거기다 내면 또 적어요 . 뭐 하는 겁니까. 그리고 또 물통인지 하나씩 주니까 가지고 가 이게 결혼식 장이야 그리고 갈비탕 먹는 것 까지 똑같애. 근데 아예 어떤 사람들은 안수 식 오래 걸리니까 갈비탕 집에 가서 갈비탕부터 먹는 거야. 이게 무슨 시집 장가 가는 날이에요? 너무 하세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목사 안수 식에 봉투 들고 오는 것 아니에요. 그거 어디서 배운 것들이래. 꽃다발 같은 거 들고 오고 그런 거 아니라고. 한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날이에요. 한없는 기쁨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윽한 슬픔이 그 속에 있는 거 에요. 그거 보면 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 천주교에 그 서품이 라는 천주교에서는 그걸 보면 정말 그 안수의 정신이 생각나요. 안수 받을 사람들이 와요. 그러면 이 넓은 교회당에서 십자가위에 엎드려요. 십자가를 하나씩 쭉 갖다놓고 그 위에 엎드려요. 그러면서 사회가 물어요. 지금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여러분이 이 고난과 시련의 길을, 이 외로운 사제의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돌이키실 분은 돌이키십시오. 근데 아무도 돌이키지않고 그 서품을 받겠다고 할 때, 성도들이 수 천명이 성당에 모여서 미사 수건을 쓰고 그렇게 안수를 받을 때 뭐 하는지 아세요? 손수건을 꺼내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거예요. 아, 한 사람이 하나님께만 바쳐지는구나. 저가 이 목양의 길을 걸어가며 당하게 될 그 모든 고난과 성직자로서의 시련을 기억하면서 성도들이 우는 거예요. 물론 끝나고 돌아가서 국수도 삶아 먹을 것이고 함께 또 기도를 하겠죠. 바로 그런 것들을 교회가 잊어버렸죠. 그러니까 목사 안수 식에 와서 꽃다발 들고 그 다음에 뭐 봉투 이런 거 들고, 악수하면서 뭐 승진을 축하한데나. 뭔 소린지. 강도사에서 승진 한 거다. 그러면 무슨 벼슬이나 한 것 같이. 이게 바로 교회가 얼마나 세속화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렇게 성도들이 그 날이 무슨 엄청난 잔칫날인 것처럼 법석을 떨고 꽃다발을 들고 와서 설치는 것을 보고 결국은 그 사람들이 목사를 누구로 이해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 사람들 눈에는 목사가, 목사만 되면 "쑡 일은 전도사가 하고 발 펴고 이제 겨우 살게 되었다.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걸로 목회자들을 생각하는 게 그 안수 식 현장 이였어요. 그러나 그 날은 하나님께만 바쳐진 날이에요. 그리고 살아가면서 또한 난관과 시련과 그리고 나를 목사로써 하나님 앞에 바쳐진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권을 행사할 지라도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만 자신을 드리는 것이에요. 그 많은 식구나 교회의 식구나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만 자신을 다 드려야 한다는 이 절대적인 소명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에요. 그러므로여러분들이 안수를 가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주실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은 훌륭한 선물이나 아름다운 음식이나 많은 꽃다발들이 아닙니다. 아, 저 분이야 말로 하나님께만 바쳐진 분이다. 일 평생을 그렇게 하나님께만 바치시고 누구도 저 인생에 대해서 주권을 행사할 수 없는 그런 구별된 인생으로 외길을 걸어가시옵소서, 하는 눈물의 기도 야 말로 안수 식에서 목자가 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그는 하나님께만 바쳐진 사람입니다. 그를 향하여 주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번민과 갈등과 괴로움이. 그리고 그로 하여금 마음 편하게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 자신만의 인생을 드리고, 또 드리고 다 드리다가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 열심히 남은 육체마저도 바칠 수 있도록 그렇게 자유를 주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목사가 되는 그 주위에서 당연히 그 사람을 향해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주권을 포기하고, 그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고통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으며 함께 주님을 섬기는 일에 동참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동역자 들로써 면류관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목사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복된 생애가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한 사람이 태어나 목사가 되기까지 수많은 사연을 안고 인생의 고비 고비를 살았는데 이제 우리가 목사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만 메이고 하나님께만 바쳐진 것임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게되기를 기도할 수 있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은 머리를 숙이며 말씀 듣고 새롭게 깨달은 사랑하는 주님의 자녀들을 축복하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셔서 사랑하는 영들이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사랑하는 목자의 그늘에서 목양을 받게 하시며 또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부름을 받은 목사에게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장애물이 되지 아니하고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기쁘게 자신의 이름들을 동역자로 추천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주의 놀라운 말씀과 기사만을 전하며 살기에는 너무나 많은 거치는 것들과 그리고 달려갈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사람 속에, 환경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치는 길을 열어주시고, 아무도 붙잡지 못하고, 하나님 한 분만이 붙잡으셔서 주님을 위해 사용하시고,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인하여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자와 영적 부흥 3
기도의 능력(수10:12-14)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므르라 달아 너도 아얄란 골짜기에 그리할 찌어다 하매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오늘도 라디오에서 들으니까 역시 어느 교회인지 설교가 나와요. 설교를 늘 하는 사람으로써 설교를 들을 때 강단아래에서 듣는 그 느낌 전할 때 하는 느낌과 다른 것도 있지만 같은 것도 많습니다. 그것은 무엇 인고하니 확실히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매우 중시하신다는 거죠 무슨 뜻인가 하면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삶의 변화가 있을 수 없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의 삶을 붙들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가운데 살아가는 그 말할 수 없는 즐거운 영적인 삶, 이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너무나 알지 못하거나 혹은 알아도 피상적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왜 일어나는고 하니 깊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으면 변화가 일어나요 저는 여러 해 전에 여러 해도 아니죠 한 이 삼 년 됐는데 서울에 있는 어느 잘 알려진교회 청년분가 대학분가 집회를 갔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설교시간에 아멘 하는 거 있잖습니까 난 아주 혐오하고 한편으로는 아주 좋아해요. 문제는 뭔가 하면 한번은 학교 채플 실에서 설교를 하는데 이건 한 문장 끝날 때 마다 아멘 이 나오는 거예요 다 모아보면 아멘 소리가 설교소리보다 더 길게 생겼어요. 근데 이게 무슨, 은혜가 될 때, 직감적으로 알잖아요 그 아멘 소리가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아멘 인지 요기서 나오는 소리인지 알잖아요. 근데 여러분 제가 오늘 성경을 폈습니다. 아멘!, 뭐 어떻게 했다는 거야. 그래 나중에 아멘 하지 좀 말라고, 내가 그랬어 제발 아멘 좀 하지 말라고 헷갈려 가지고 설교를 못하겠다고 아멘 하고 싶으면 다 모아 났다가 한꺼번에 끝날 때 도매금으로 크게 하든지 열 번 하든지 백 번하든지 맨 마지막에 가서 혼자 하라고 그랬더니 그걸 들으면서 또 아멘 하는 거예요. 그런 아멘은 가슴에 와 닿지 않아요. 잠깨기 위해서 아멘 하는 거 같아서 싫어요. 언제 몇 년 전에 간 그 집회에서 난, 그걸 다 얘기하면 몇 시간 가도 다 얘기 못하죠. 하여튼 기상 천외의 집회였어요. 내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이 세상에 그런 사람들 모아놓고 집회를 하라 그러니 차라리 고문하는 게 낫지 하여튼 상상하기 싫은 그런 집회였어요. 안 들어 설교를, 안 들을려는 사람들에게 뭐 하러 그 시골까지 불러 설교를 하라 그러는지 난 이해가 안가요. 그런데 이틀째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아 몇 사람이 무너지기 시작해요. 근데 자매하나가 있는데 그 교회는 원래 아멘 하는 교회가 아니야. 이름대면 내, 개인적으로 와요 그 교회가 어느 교횐지 알려 줄 테니까 그 교회는 원래 아멘 하는 교회가 아니야. 통성 기도도 없고 아멘도 없고 박수 도 없는 교회예요. 근데 좋아요 뭐 자기네 좋아서 그렇게 하니까 근데 그 사람들 중에 누가 왕년에 아멘 을 해 본 사람이 있겠어요. 근데 막 성경을 풀어나가는데 그땐 정말 정신 없이 성경을 풀어나갔어요 하나님이 풀어나가시더라고 그래 세 시간을 설교를 했어요 근데 뭐 이렇게 점잖게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성으로 시작해서 악을 쓰듯이 세 시간 동안 설교를 하는데 야! 자매하나가 앞에 딱 앉았는데 난 아직 그 자매 이름도 몰라 근데 그 자매가 그렇게 생각이 나데 몇 일 동안 생각이나 앞자리에 딱 앉았는데 얼굴도 별로 잘 생기지도 안았어 근데 막 무너지는데 누가 가르쳐 줘요 근데 막 떨면서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는 거야. 그러면서 그것은 진짜 이 속에 있는 불이 시킨 거야. 그 아멘 을. 자매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나도 없어 설교자도 안 보이는 거 같아 주위의 친구들도 안 보이고 오직 하나님만 보이는 거야. 설교를 계속 끌어나가는데 막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면서 온몸을 덜덜덜덜 떨면서 그러면서 아멘, 아멘 하는데 그 흉내를 못 내겠어 그때 그 아멘 하는데 그때 내 마음에 확 다가왔던 그림이 뭐냐하면 장마철에 물에 빠져 가지고 막 허우적거리다가 뭘 막 이렇게 잡는 그런 몸부림. 잊혀지지가 않아요. 뭐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막 무너지는 거야 근데 우리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말씀을 하거나 말씀을 듣는 태도가 뭐냐하면 전문가의 견해를 자기의 삶에 참고하고 싶잖아요.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 예요. 그 지식이 바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한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나니, 아주 찬란한 기독교의진리도그 사람을 교만하게 할 수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진리 그 자체를 아는 방식이 잘못되면 그 지식이 아무리 참된, 참 되다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그 진리가 있는데 그 진리를 아는 지식의 내용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이 잘못되면 그는 자기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교만하게 해요 나는 꽤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아주 잊혀지지가 않아요 막 통곡을 하고 우는 것도 아니고 막 비 오듯 눈물을 쏟으면서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아멘 하는 거야 손을 딱 붙들고 이렇게, 세시간 동안을, 난 잊을 수가 없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가장 원하시는 바는 듣는 거야 내 언젠가 들으라 시리즈를 한번 할 테니까요. 구약을 누비다 보면 어디에라도 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어요. 들으라. 들으라 근데 요즘 세대는 듣는 것 보다 말하고 싶어 아주 안달이 나요. 그러니 신앙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하나님은 말하고 너희는 듣고 하는 이 관계가 계속 잘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항상 충만한 은혜와 하나님의 임재 하심이 있었어요. 근데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 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듣는 일 들을 못 하는 거예요. 안 듣게 되면 괜찮은데 안 듣는 관계 속에서 다른 것들이 들려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설교자는 설교하는 일 에 면역이 되는 것,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는 설교를 듣는 일에 면역이 되는 거야. 이게 제일 무서운 거예요. 그것 보다 무서운 게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전심으로 마음을 기울이고 그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르쳐 주시는 은혜와 지식에 따라서 살아야 되겠다는 절박한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열리는 거예요 그 사람들 속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 오니까 그 말씀의 깊이를 더 이해하게되는 거예요. 신앙의 모든 요소들은 분리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한동안 기도와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들어왔습니다만 오늘 도 또 그 얘깁니다만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과 삶도 분리가 안 되는 거예요. 보세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야 똑바로 살죠 똑바로 살다 와 야지만 그 말씀의 능력을 알게 되요. 오늘 왜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오늘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여호수아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어 드리는 본문은 이미 그 요단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밀 듯이 가나안 땅을 점령해 가는 과정이었어요. 모세가 카리스마적인 통치력을 가지고있고 또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게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모세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요단강을 못 건너고 죽었어요.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안수해서 그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서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이었어요. 왜 그래요?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었어요. 율법의 인도는가나안 그 기까지 예요. 율법의 인도는 구약시대까지 예요. 여호수아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이예요. 율법이 거기까지 인도하고마지막 구원을 성취하지 못한 것을 결국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처럼 같은, 이름도 같죠? 예수, 여호수아, 같은 히브리 말 입니다 그 여호수아에 의해서 새로운 가나안땅을 정복해 나가는 거예요. 새로운 언약의 시대가 열린 거죠. 그렇게 정복을 해 나가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이제 아모리 족속과 싸우게 됐어요. 하나님의 명령은 너희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거기 있는 모든 족속을 다 진멸 하라는 거였어요. 근데 그 명령을 완벽하게 순종을 못했기 때문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거죠 근데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듣고 아모리 사람을 치기 위해서 줄달음을 치는 거죠. 근데 이놈들이 도망을 가는 거예요. 근데 가만히 보니까 자꾸 해가 기울어져요 어두워지면 추격할 수가 없죠. 어디 엔가 산지에 가서 숨을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 할 수가 없죠. 그러면서 막 공격을 해 가는데 계속해서 도망을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그 유명한 기도를 드리는 거죠 기도치고는 오늘 좀 이상하죠.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머무르라는 것은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서 있으라 . 그러니까 태양이 지면서 달이 떠오르니까 그러니까 태양도 멈추고 달도 같이 멈춰야지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태양아 너는 거기 서 있으라, 달아 너도 거기 가만히 있어라. 이렇게 명령을 하니까 즉시로 여호수아의 말에 순종해서 해가 멎고 달도 그 자리에 정지한 사건이에요. 나는 뭐 과학을 모르니까 뭐 이런걸 과학으로 푸는 것에 대해 난 별로 흥미도 없지만, 언젠가 잡지를 보니까 과학자들이 그 지구의 자전한 그걸 갖다가 컴퓨터에 다 집어넣었는데 열한시간 사십오분인가가 모자른 다는 거죠. 시간이 안 맞는거죠. 시간이 실종된거라고요. 그러면서 그 대답을 성서학자들에게서 듣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온 시간하고 그 다음에 히스기야의 일령표가 멈추는 시간 그것하고 계산하니까 그 실종된 시간하고 딱 맞아 떨어지더라 이거죠.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은 그런 얘기도 하더라 이거죠. 하여튼 우리가 알 수 있는 시간 하나는 태양이 멎고 달이 멈췄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기도였다는 것이죠. 여러분 기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것을 기도라고 볼 수 있어요? 기도할라면 이렇게 해야 하잖아. 하나님 저 태양을 멈추게 해 주시옵소서. 그게 기도 아니에요? 근데 그냥 명령하는 거에요. 태양아 거기 서라. 달아 너도 거기 가만히 있어라. 이것을 오늘날 성경은 여호와께 고하는 기도였다고 말합니다. 이게 이 사람만 이렇게 했는줄 알았더니 뒤로 넘어가보니까 사도 바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볼 수 있죠. 하나님, 귀신이 들린 이 자매를 주님 고쳐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귀신아, 그 아이에게서 나와라. 그래 나왔어요. 하나님,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시기를 간절히, 아픈 사람을 그렇게 간절히 한다고 하니까 죽은 사람이니까 그 간 자를 길이를 한 세 배는 해야 되요. 그죠?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그래야지만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죠? 예수님만 그러셨나 그랬더니 뒤로 나가보니까 바울도 똑같아요. 바울도 같아요. 병든 자를 고칠 때 명령을 해서 고치는 거예요. 귀신 들린 자를 고칠 때 명령을 해서 고치는 거죠. 이게 제가 보기에는 아주 높은 수준의 기도라고 생각을 해요. 아주 높은 수준. 그러니까 그것은 결국 뭐냐하면 영적인 면에서 보면 그건 싸움이 아니라 명령하는 거죠.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 악령의 세력들과 싸웠다고 말하기에는 그 삶이 너무나 당당했어요. 싸운다는 건 뭐 줄다리기를 하면서 한 평만 달라, 못 준다. 그러다가 막 줄다리기를 하는 그런 건데 그게 아니에요. 나와라, 사망이 붙들어서 시체를 썩히면서 이미 죽어서 냄새가 나게 하는 그 사람을 컴 온,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렇게 명령하는 거예요. 죽음을향해서 명령하고, 사망을 향해서 명령하고, 귀신을 향해서 명령하고 환경을 위해서 명령하고.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 에요.풍랑이 일어나는 바다를 보고 뭐라 그러셨어요?. 주님 이 풍랑을 잠잠케 해 주시옵소서. 그러냐 안 그러냐? 바다야, 잠잠 하라!. 잠잠해 졌잖아요. 이것도 기도라는 사실을 오늘 알고 가시길 바랍니다. 이게 기도예요. 그런데 오늘은 말이에요. 어떻게 이 여호수아가 길지도 않은 짧은 기도로 이렇게 하늘을 운행하고 있는 해를 멈추고 떠오르는 달을 정지시킬 수 있으리 만치 그렇게 위대한 기도의 능력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오늘 우리들이 한번 검토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아름다운 결과에 대해서만 주목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죠? 언제든지 좋게 보인 것 하나만 주목하면서 그 결과를 보고 우리는 그 결과를 부러워해요. 그래서 지난주인가 지지난주일인가 소쩍새 우는 얘기를 했죠?사람들이 보니까 가을날의 국화가 이슬을 머금고 함초롬하게 멋있게 흐드러지게 핀 것이에요. 야, 국화가 멋있다. 어떡하면 저렇게국화가 멋있게 필까. 나도 한번 저렇게 되어 봤으면. 그렇지만은봄부터 소쩍새가 우니까 울다 울다 나중엔 소쩍새가 피 토하고 죽은 거에요. 그러니까 국화꽃이 하나 피어난 거라고요. 그러니까오늘 이 태양아, 달아 이렇게 하면 봐요, 이스라엘 군대들이 아모리 군대들을 쳐부수기 위해서 공격을 할 때 시간이 모자른다는사실은 누구나 다 인정했어요. 아, 시간이 모자른다. 시간만 있으면 저놈들을 어두워지기 전에 다 진멸 해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은 모든 사람이 다 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진짜 기도 한 사람은 이 사람하나 에요. 놀랍지 않아요? 어느 목사님이 그래요. 아프셔서병석에 누웠어요. 그런데 나중에 저를 만나서 하는 말이 참 이상하데요. 왜요. 목사님이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으니까 친구 목사님들이 문병을 많이 오는데 아무도 와서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데. 대장간에 쓸 칼이 없는 거죠. 우리는 이러한 말하자면 허구 이런 것들을 굉장히 신앙생활에서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 중에 대표적 인 게 또 뭐냐하면 베드로가 옥에 갇혔잖아요. 야고보 하고. 야고보는 벌써 목이 갔어요. 그리고 온 교회가 모여 가지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통성 기도하고 철야기도하면서 주님, 우리 베드로를 살려주시옵소서. 그러고 기도를 했는데 진짜 천사가 옥문을 열어줘 가지고 베드로가 나왔어요. 그래가지고 두드리면서 나 왔다, 문 열어라. 그러니까 사람들이 너 헛소리 들었구나. 계집아이가 와 가지고 베드로가 왔다고 하니까. 야, 잘못 봤겠지 계속 기도하자. 이게 신앙의 허구 에요. 이런 허구들을 우린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는 거에요. 이런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의 신앙생활이 허한 거에요. 그런데 이 여호수아가 그렇게 간구 하는 정도가 아니라 명령하면 그것이 설이라고 하는 그러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의 기도 속에 그런 능력이 있었어요. 그것은 결국은 그것이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되는 거 에요. 이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우선 성경구절을 하나 찾아봅시다. 출애굽기입니다. 십 팔 절부터 제가 읽겠습니다. 어, 칠 절부터.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 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 으로 나아가며 모세가 회막 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으로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와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이 얘긴 뭐, 언젠가 우리가 한번 들은 기억도 있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난 너희들과 같이 안 간다. 가나안은 내가 준다고 했으니까 주겠다. 그 대신 하나님의 심정은 잘 먹고 잘 살아라. 다 가져라. 난 이젠 너희들하고 상종 안 한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바야흐로 이스라엘과 맺은 결혼을 취소하고 이혼하시려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잘 먹고 다 잘살아라. 난 이제 너희들하고 안 논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야 정신이 팍 든 거에요. 아 하나님 없이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면서 사람들이 다 회개하기 시작한 거에요. 회개하기 시작해도 한번회개할 때에는 다같이 동참해도 그 회개가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깊이 회개하고 그 회개가 궁극적으로 그런 자기들이 처한 삶의 개선에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말이에요, 오랫동안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가 회개할 때 즉시 회개에 대해서 응답해 주시는 적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많은 경우에는 회개를 하고 용서를 받고 회복될 때까지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진 바깥에다 회막을 쳐 놓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라, 그렇게 만들어 준 거에요. 사람들이 와서 기도한 거죠. 분명히 소수의 사람들 이였을 거에요. 어느 시대나 그래요. 그런데 모세도 와서 기도했어요. 신령한기도를 하고 돌아갔어요. 그런데 끝까지 돌아가지 않고 회막에남아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에요? 여호수아에요. 회막에서 뭐 했어요? 장기 뜨면서 사람들 기다렸어요? 아뇨,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지도자를 만드시는 방법이에요. 이것은 오랜 세월 걸리는 거에요. 어떤 형제가 한번은 학교를 찾아 왔어요. 제가 신학을 할려고 합니다. 그래 내가 그랬어요 나이가 몇 살이냐 그러니까 스물 여덟이라 그러나 아홉이라 그러나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신학을 먼저 할려고 그러지 말고 신앙생활을 잘해라. 교역자가 되는 것은 일년 만에도 될 수 있어요. 아주 쉬워요 . 그게 무슨 이야기냐. 신학교 들어가고 1학년때 전도사 되면은 1년 아니예요 1년은 무슨 일년이야 요즘은 학적부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가서 설교하겠다고 강단으로 뛰어 오르는 세상이니까. 그건 진짜 일년 아니라 한달 만에도 되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라 그리고 완전하게 목사가 되는 것까지도 끽해봐야 사년 반이면 뒤집어 쓰고 남아요. 그러니까 언제해도 늦을게 없어요 .그런데 뭐가 있어야지 되지 않느냐 그러니깐 무슨 이야기예요. 신학교 입학 시험을 보는데 어떻게 해서 신학교 오게 됐어요? 하는말에 교수님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 집사람이 다 압니다. 아니 그래 내가 그랬어 그럼 집사람을 보내지 왜 선생님이 오셨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다 지금 목사가 됐어요.그러니까 교회 무슨 소망이 있겠어요.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뭐냐하면 이러한 뼈를 깍는 것과 같은 깊은 고뇌와 그리고 영적인 단련의 기간이 너무 없는 거야 그게 없으니까 사람들이 가볍죠. 가벼우니까 기도가 가벼울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가볍고 피상적이니까 본질적인 얘기는 언제나 가슴에 와 닿질 않고 그건 복잡하고 귀찮기만 하고 자기처럼 가볍고 피상적인 이야기가 입맛에 딱딱 맞는 거예요 피상적인 그 본성이 피상적인 삶을 부채질하는 거예요 .그러니 피상적인 설교가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목회현실도 피상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여호수아가 한번의 기도로 그렇게 정말 모세와 같지는 않지만 한번의 기도를 가지고 위대한 역사를 불러일으키고 태양을 멈추고 그 다음에 떠오르는 달을 정지시킬 수 있는 이러한 놀라운 기도의 능력은 ,우리들이 그러한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싶다는 것도 탐심 이예요. 문제는 뭐냐하면은 모세가 그러한 놀라운 능력을 갖기까지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오랜 기도 속에서 다져진 거예요. 깊이 다져 졌어요. 그러니깐 전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오늘 기도를 안 하면 오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기에 역부족이지만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미래에 살아가는 삶을 힘들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보약과 같은 효과도 있는 거예요. 기도 속에서 오랜 기도생활 속에서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능력과 기도하면서 사태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의 저력이 서서히 쌓아져 온 거예요. 그리고 그는 모세가 살아있을 때 그 곁에서 거의 바보 비슷한 생활을 했어요. 누가 그 여호수아를 주목을 했겠어요. 모세가마지막으로 이 여호수아에게 바톤을 넘겨주며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들보가 무너지는 것처럼 답답했을 거예요 그렇죠?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 이였어요 마지막을 보면 모세가 죽기 전에 다 죽어 가는 기력 없는 모습으로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는 거예요. 그때 여호와의기회의 신이 여호수아에게 충만히 임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만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하면 그렇게 변화된 모습이 오늘 여기 나타나는 거예요. 모세와 함께 해주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의 시대에 거의 동일하게 함께 해주신다는 놀라운 증거들을 속속히 들어 보여주는 거예요. 쉽게 얘기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기전에 모세라는 지도자를 잃었지만 그러나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자기의 사역을 감당해 나갈 수 있었어요 왜? 준비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 예요. 내 개인적인 얘길 해서 안됐지만 내가 김 승기 전도사를좋아하는 이유가 그거예요. 친구들은 다 목사가 됐거든 .내가 그래서 그랬어요 우리교회는 축도 해줄 사람도 없는데 빨리 안수를 받고 축도를 좀 해라 그랬더니 그럼 제가 축도 목사입니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이렇게 겉에 보이고 외관에 있는 것들이 우리를 완성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속에 하나의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 혹은 남이 갖지 않은 놀라운 사역의 비결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밑에는 말하자면 한없이 고통스러운, 여호수아도 사람이었어요. 다 진으로 돌아가서 다 낮에는 열심히 기도했을 지라도 밤에는 가서 밥 먹고 자고 텔레비전 도 좀 보고 가족들하고 신문도 좀 보고 그렇게 쉬고싶은, 누가 그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모세는 모든 사람이 돌아간 가운데 외로움과 싸우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기를 위해서 기도한 거예요. 모세도 아마 체력이 진하여서 돌아갔을 지도 모르죠 그러나 여호수아는 젊은 날에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렸어요. 여러분, 여호수아가 이렇게 매달리며 기도할 때 앞으로 위대한 기도의 영역을 갖기 위해서 기도했어요. 다시 한번 물어볼게 대답을 좀 해 봐요. 모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앞으로 내가, 이 선배가 정년퇴직하면 내가 이 자리를 타고 앉을텐데 그때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지금부터 기도해야 된다. 그래서 기도했어요? 아니에요. 앞으로 내가 지도자가 될 텐데 지금부터 이렇게 기도 해야지만 하나님이 나를 예쁘게 보실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기도했어요? 아니에요. 그게 뭐에요? 한순간 한 순간을 하나님 앞에 이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없는 그런 마음을 안고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는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을 다 바쳐서 헌신한 거에요. 그리고 그 방법이 그 상황 속에서는 깊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이였어요. 그러면서 준비되어 가는 거에요. 너무 급해, 너무 너무 급한 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천천히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을하면서 그런 간증들을 굉장히 많이 가졌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제가 전에 있던 교회 목사님인데 그 말씀을 아시는 거에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의 교회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열심히 충성했더니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했는데 세월이 흘러가고 보니까 그렇게 충성을 해서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을 잘 섬길려고 했는데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바꿔 놓으시고 그리고 그렇게 나는 섬기고 나왔으니까 끝났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섬겼던 과정들의 열매가 사실은 내 인격과 내 신앙 속에 있더라 이 얘기 에요. 그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여호수아는 그때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물론 그 때도 간절히 기도했죠. 만약에 간절히 기도해서 전부다 그렇게 해가 멎고 태양이 멈추고 달이 안 뜬다고 하면 온 세상이 보통 복잡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야. 그렇죠? 야간업소 하는 사람 맨 날 기도하기를 태양아, 너는 땅 속에서 나오지 말지어다. 전부 그럴 거야. 그리고 낮에 유원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태양아 너는 거기 가만히 매달려 있거라. 그럴 거에요. 그게 얼마나 혼란이 일어나겠어요. 누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겠어요. 삼 년 육 개월 동안 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을 때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 엘리야 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누구든지 간절히 기도하지요. 고통이 당하면 그 고통이 미워서라도 누구나 다 간절히 기도하죠.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것은 물론이지만은 그러나 그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에요. 이 사람은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기도의 능력을 천천히 쌓아 온 거에요.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한번 철야하고 온 것이 뭐 금방 응답을 가져온 적도 있겠죠. 그러나 한번 철야하고 온 것이 그 다음날 아침에 뚜렷한 결과로 나타나지 않아도 여호수아는 그렇게 할 수 밖 에 없었어요. 왜 그래요? 하나님이 그 마음을 움직여서 기도하게 하셨는데 누가 멈추게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그 심령을 움직여서 하나님 앞에 민족과 이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셨는데 누가 멈출 수 있느냐 는거에요. 기도했어요, 매달렸죠, 간구 했어요. 그러면서 이제 기도의 영역이 서서히 쌓아져 갑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필요할 때 태양아 멎어라, 하니까 그 자리에 멈추는 거에요. 평상시에는 기도 하나도안 하던 사람이 위기를 만나면은 그 손을 들고 통성 기도를 하고 기도원으로 내 뛰는데 왜 그래요? 평소에 기도하지 않았던 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런거야 근데 그게 보상이 통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아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세상 부귀 안일함과 명성 원치 않으며 즐겁게 고난 길을 가는 마음으로 자기의 안락과 안일함을 포기하면서 장시간에 걸쳐서 기도와 투쟁하며 기도 속에서 전쟁을 배우면서 그렇게 기도 속에 백전노장이 된 사람과 어느 날 하루 갑자기 그런 거, 고등학교 다닐 때 그런 거 잘 했는데 요즘은 별로 안 하는 것 같애. 나라가 어수선 하면 꼭 뭐해 주냐면 공산군이 쳐들어 와서 옛날에 우리나라 다 말아 먹던거 그런 것 보여주고, 얼마나 그 공비들이 남파 되어서 잔인한지 보여줘. 그러면 애들이 전부 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 부들, 그 때 영화 끝나고 일어나서 동해물과 부르면 인제 감격적이야, 우리 부흥회 때 찬송 부르는 것 같애. 그러고 나서 다들 난 전쟁 나면 난 당장 군대 갈꺼야. 그건 그때지 , 그 때. 그래 전쟁 나서 간다고 칩시다. 그러면 거의 전쟁도 해 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나라를 위해서 죽겠노라 하면서 부엌칼 하나 들고 전쟁으로 뛰어 가는 것, 그것 마음은 좋다 이거죠. 그런데 그게 무슨 나라에 도움이 되겠어요? 말하자면 그런 거죠. 평소에는 아무런 기도가 없고 위기의 순간에 주여 믿사오니 하고 기도하는 건 평소에는 전쟁이란 것 하나도 모르고 훈련이란 것 모르고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에 복받치는 애국심으로 부엌칼 들고 뛰어나가는 것과 똑같다 이거죠. 그런 사람이 어떻게 수많은 세월동안 기도의 전쟁에서 악한 세력들의 총탄을 맞으며 혹은 칼자국을 맞으면서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며 그리고 그 적군들의 치열한 공격이 그치지 아니하는 들판을 포복으로 지나면서 백전노장이 된 기도의 용사와 당할 수 있겠느냐 이거 에요. 두 사람이 믿어도 같이 믿는 게 아니고 두 사람이 간절해도 수준이 틀린 거에요. 두 사람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도 수준이 틀리고 두 사람이 눈물을 흘려도 눈물의 농도가 틀려요. 근데 이런 것들이 너무 무시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뭐라 그러냐면 믿으라 그래서 믿었는데 안 된다 이거에요. 간절히 기도하라 그래서 간절히 했는데 간절히 어떻게 하면 되냐 이거에요. 간절히 살아야지 간절히 기도가 되지. 그 사람이 와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답답해서 매달리는 거야. 물론 그런 기도도 하나님이 들으시죠. 출발은 그렇게시킬 수 있어요. 그런데 출발이 거기서 멎어서는 안되죠. 들어가야 되는 거죠. 계속 들어가야 되요. 계속.
새벽기도. 여기 가까이 있는 분들은 새벽기도. 이 새벽기도 얘기 또 하네 새벽기도 나와야 되요.아 답답해 그냥 새벽기도 나오는 것을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남이 안 하는 거 보너스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니까 새벽기도 안나오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새벽에 따르릉 종이 울리면 아 운명이야 그러고 나오면 나오게 되는 거야. 이건 숙명이다, 끈을 수 없다. 그러고 나와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집이 먼 사람들은 새벽기도까지 세 시간씩 걸려서 못 오는 것이니까 그러면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거죠. 약속 해 놓고. 그게 때로는, 오늘 새벽기도 한번 빠졌다고 해서 오늘 아침에 무슨 타이어가 빵구가 납니까, 회사 월급이 떨어집니까. 그런 것 없어요. 아무 일 없어요. 걱정 마세요. 그런 점에 있어선. 그런데 계속 곶감처럼 빼 먹으면 우리의 기도의 저력이 자라지 않아요.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렇게 영권을 가지고 상황을 움직일 수 있는 영력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없어진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똑같아요, 교육자의 세계도 마찬가지야. 신학자의 세계도 마찬가지야. 딱 보면 맨 날 땅바닥에서 우유나 먹고 신앙 생활 하고 교회를 섬기다가 자란 사람인지 진짜 들판에서 맹수의 울부짖음 소리를 들으면서 손을 높이 쳐들고 주여 믿사오니 광야의 먼지를 맞으면서 기도를 하면서 자라온 사람인지 벌써 표시가 난다고. 요만한 어려움에도 견디지 못하고 헉헉 하는 거에요. 요만한 혼란이 와도 성도들이 견디지 못하는 거에요. 그리고 요만큼 기도하고 실망하기는 이만큼 실망하는 거에요. 뭐, 기도해도 안되더라고. 그런 사람들 대개 보면 기도를 별로 안 했어요.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기도를 뭘 열심히 해. 새벽기도 몇 번 눈 비비면서 간 것 가지고 뭘 그래. 요만큼 기도하고 실망은 이만큼 하는 거야.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다하지 않았나. 아무래도 요즘 하나님은 옛날 하나님하고 효과가 틀린 것 같아. 이런 소리나 하고. 요즘 하나님 옛날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여러분, 여호수와는 이런 저력을 다 쌓아온 거에요. 내가 그래서 신학을 하려고 한 사람들에게 그렇게 권하는 거에요. 이 땅에서도 전도를 못 하는데 무슨 선교냐. 뭐 신학교 가면, 설교를 듣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그러면서될 수 있으면 말렸어요. 그 이유가 뭐였던 간에. 제도 속에서 이런 것들을 얻어내는 것들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렇죠. 무슨 미래가 있습니까. 여러분도 마찬 가지에요. 우리교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가만히 다니면 세례 줘요.안 빠지면은. 그리고 다니면 집사 됩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나이 먹어서 허리가 약간 구부러지면 권사 되요. 남자는 흰머리 나면 장로 되고. 다 되게 마련이에요. 근데 그게 무슨 하나님이 세우신 것하고 거의 관계가 없을 적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거에요. 그러니까 먼저 중요한 것은 여호수와의 위대한 기도의 능력을 보지말고 여호수와 자신 속에 일어난 변화를 보라고. 오랜 세월이 걸려요. 추구해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얼마나 추구했는데. 일년, 오 개월, 육 개월. 날짜 세면서 작대기 그면서. 이게 무슨 하나님 만나고 변화 받는 게 무슨 개 타는 것 인줄 아세요?
여러분, 여호수와는 그런탐욕이 없었어요. 그는 그 당시의 상황에 충실한 것 이였어요. 왜, 민족적으로 교회적 으로 볼 때 기도 해야 할 상황 이였어요. 기도했어요. 연로하신 모세는 들어가 주무셔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 회막을 지키겠는가. 지켰어요. 그리고 넘치는 헌신으로 살았어요. 그 광야 교회의 당 회장님 아니십니까, 모세가. 여호수와는 전도사쯤 되지 않아요? 부 목사나. 당 회장이 자기는 철야기도 안 하면서 나는 왜 하나. 그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는 자신의 상황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뜻에 수행하고자 하였어요. 모세는 들어갔어요. 그러나 자기는 지켰어요. 그는 하나님 앞에 매달렸어요. 이게 여호수와가 앞으로 아모리 족속을 쳐부수는 총사령관이 됐을 때 태양을 멈출 수 있는 저력을 키워가고 싶어서 그런 겁니까?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는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교회와 조국과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 그대로 충성하였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서서히 축적되어 온 거에요. 왜 하나님께서 오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여호수와 한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어요? 여호수와 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 놀라운 표징이 있었어요.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옛날에 교부들은 말이에요, air theory 라고 해서 공중설을 믿었어요. 이 공중설이란 것은 무슨 얘기냐면 이 하늘에 새들이 날라다니는 하늘이 있고, 유대인들의 말하자면 공중관이거든요, 두 번째 하늘은 악한 영들이 지배하는 하늘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세 번째 하늘이 신령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삼 층 천을 왔다가 갔다는 것이 바로 그 신령한 세계를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는 십 층 천을 갔다왔다고 그러던데. 그게 그렇게 자꾸 고층 빌딩처럼 올라 가는 게 아니라고. 삼 층이 끝이여. 거기가. 참 이상한 사람들 많아. 그래서 어떻게 생각했냐면 그들은 그랬어요. 성도들이여, 오늘도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기도의 화살을 쏘자.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화살이 맥아리가 없으면 이 층 천에 있는, 그 사람들의 생각이 그랬단 말야. 이 층 천에 있는 악령의 세력들이 기도의 화살이 올라오면 에잇, 톡 치면 떨어지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새 들이 날라다니는 하늘까지 날라가다가맥이 없어가지고 픽 떨어지는 거야. 그런데 어쩌다가 가끔 강력한 화살이 날라오는 거야. 피욱 하고 쏘니까 이게 이 층 천에 있는 악한 세력들의 지붕을 뚫으면서 순식간에 미사일처럼 하나님의 보좌 위로 날라가 버리는 거야.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이 성서적으로 타당 하느냐 아니냐에 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기도에 대한 예지를 알 수 있어요. 그 예지는 뭐냐하면, 기도는 말 한다고 해서 다 기도가 아니다. 강한 영역의 후원을 이루면서 악한 영들의 세력과 씨름에서 그들의 권세를 찌르면서 하나님 앞에 보좌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개념은 성서적이에요. 성경 적이라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이들은 기도의 수련을 계속 쌓았던 거죠. 그러니까 정말 광야의 풋풋한 냄새가 나는 기도의 사람들 이였어요. 어느 교회의 장님 목사님이 설교를 하러 가셨어요. 직접 그 교회에 있는 교역자한테 들은 얘기니까 프라이머리 소스죠. 딱 올라갔는데 눈이 머셨으니까,조금 보이는 장님이 아니라 아예 안보이는 장님이에요. 지팡이를 들고 일로 올라가시라고 하니까 일로 올라가는데 담임 목사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앉아 계시고 부목사님이 사회를 봤어요. 다 같이 묵도하시겠습니다. 사회를 다 봤는데. 오늘 사회보신 분이 누굽니까. 끝난 다음에. 부 목사님이 와서 아 목사님 접니다. 나하고 방에 좀 잠깐 들어갑시다. 방에 들어갔죠. 근데 이 사람 눈이 멀었습니까 이 부 목사님 나이가 몇인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모르죠. 그러니까 가서 앉혀놓고 하는 말이 당신, 교역을 할 꺼야 집어 치울거야. 그래서 이 사람이 뒤통수를 맞은거죠. 아 내가 뭘 잘못한게 있나. 그러고 눈을 껌벅 거리고 있는데 이 사람이 눈을 껌벅이는지 안 껌벅이는지 장님이니까 모르죠. 그래서 그 사람 하는 얘기가, 목사님, 제가 목사님께 무슨 결례를 했습니까? 이 사람아. 목숨을 걸고 하나님하고 한번 담판을 지어서 교역을 하던지 집어치우던지 둘 중에 하나를 하게. 이게 무슨 소린지 그 양반 모르는 거야. 이거 쉽게하면 무슨 얘기냐면 이 양반은 워낙 영적으로 깊이가 있으니까 성경 봉독하는 것 듣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야 이거 완전히 생짜구나. 딱 느낌이 온 거야. 이게 기도의 도가니에서 삶아지고 진리의 도가니에서 구워진 사람이 아니구나 라는 것들이 느낌이 오는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이 목회자라고 와 가지고 교회에 타고 앉았으니까 안타까우니까 직설적으로 한 거에요. 대단한 사람이죠. 그런 영역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면 따귀나 맞지. 그런데 뭔가 땅바닥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데 주위의 교역자들도 그 속에서 위엄을 느끼는 거에요. 아 이건 저 사람이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느끼는 거죠.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오래도록, 보세요. 여호수와가 그런 사람 이였어요. 여러분, 짧은 기도로 이 땅에 위대한 능력을 이 땅에 불어넣는 기도는 많이 나오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오랜 시간동안 하나님 앞에 깊이 훈련된 가운데 매달리는 거에요.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깎이고 깎여 가면서 이루어져 가는 거에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몇 십 년이 걸려서라도 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합당하게 붙잡히기만 하면 그 사람이 백년동안 할 수 없는 일을 몇 달 동안하고 죽는 거라고. 그 사람들은 늘 방법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누굴 찾으셔? 준비된 사람을 찾으시는 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기를 기뻐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기도를 통해서 그 기도했다는 것 자체가 의의가 되거나 그 기도 한 것 때문에 무슨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해 대해서 보상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만 자꾸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이거에요. 우리들은 오늘 내 주를 사랑하고 그리고 나를 통해서 명백하고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뜻들이 있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계획과 뜻들이 나의 인간의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서 성취되지 못하는 오류가 없도록 끊임없이 나를 복종시키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들이 무너지기를 소망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묶고 속박하고 그들을 꺾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불철주야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그렇게 살아가는 진지한 기도생활이 내일의 기도생활의 놀라운 변혁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 내일 새벽기도 사람 많아서 어떡하지? 큰일났네. 또 한가지 본문을 보면서 이해 안 가는 게 있어요. 잘 보십시오. 거기 뭐라 그랬습니까? 제 얼굴 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거기 보세요. 뭐라 그랬어요? 그 십 이 절 보면 이상하잖아요.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어떡하던 날? 이게 히브리 성경에는 완료형으로 되었습니다. 주님이 오늘 이제 부치실 예정이 아니라 이미 부치셨어요. 부치셨다는 말은 뭐에요, 한 마디로 말해서 밥이라. 그렇게 번역하면 가장 적합해요. 하나님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의 밥으로 만드시던 날에. 그렇게 이해하면 되. 밥이에요. 밥. 손에 올려놔 준 거에요. 그건 이미 완료형이에요. 이미 부쳐 버리셨어요. 그거 무슨 기도가 필요해요. 하나님이 부치셨는데 누가 하나님을 막을 수 있겠어요. 막을 수 있다면 이상하잖아요. 이미 하나님이 손에부치셨어요. 아모리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밥이 되게 만들자. 앞으로 그렇게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를 보면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밥으로 만들까, 말까. 그러신 게 아니라 만드셨어요. 완료형이에요. 주셨어요. 그런데도 뭐가 필요했어요? 기도가 필요했다는 거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어도 그 승리가 오늘 현재적으로 성취되게 하시는 것도 물론 하나님이야. 약속하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 승리의 약속을 오늘 우리의 현대적인 삶 속에서 성취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에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주신 약속을 스스로 성취하시지만 그러나 성취하시는 방법은 기도를 통해서 성취하시는 거에요.쉽게 얘기하면 기차가 어디든지 다갈 수 있어요. 근데 레일이 깔린 곳 이여야 해요. 레일만 깔아놓으면 공중으로도 올라갑니다. 물속으로도 가요. 땅으로도 가고 산도 넘어가요.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호수와의 기도를통해서 그렇게 역사 해 가시는 거에요.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되요.왜, 하나님이 홀로 일하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그러한 특권을 우리들이 누리게 되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여호수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아모리 사람들을 완전히 부치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여호수와가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태양을 멎게 하시고 달을 더 떠오르지 못하게 하심으로 완전히 이 아모리 사람들을 진멸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남았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에 얼마나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에요, 이것이 바로 부흥의 필요성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교회. 그래서 그들과 특별히 친근하시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되고 그렇게 뛰어난 교통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이에서 소유하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들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것처럼 들어주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불순종하니까 뭐라고 말했냐면 하나님의 사랑을 너희가 왜 의심하느냐. 봐라. 하나님이 기도할 때 우리처럼 들어주시는 민족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독점해 오면서 살았다. 그러니까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싶고 그런 모든 시도들과 노력들은 올바르지 않은 것이에요. 늘 신앙은 총체적인 것이에요. 어느 하나를 개선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총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이에요. 기도하나를간절히 하나님 앞에 하기 위해서는,엊그제 어떤 분이 그래. 간절히 기도하는 법이 무엇입니까. 간절하게 살아라. 그것이 간절하게 기도하는 방법이다. 삶이 하나님 앞에 간절하고 절박할 때 기도도 절박하게 되는 것이죠. 기도 하니까 삶을 간절하게 사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풀려지지 않는 것이죠. 신앙의 어느 한 요소만을 개발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이렇게 보세요. 왜 하나님이 이같이 사람의 목소리를 완전히 들어주신 날이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는 뜻이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이 이처럼 그 이스라엘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간단한 말을 통해서 우리는 뭘 발견하게 되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롯한 여호수와가 하나님과 사이에서 누렸던 그런 영적인 교통이 얼마나 탁월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 속에서 깊이 깊이, 말하자면 하나님과 교통하면서그 하늘에 은혜와 능력을 한 손에 쥐고 그 어두운 가나안 땅을 혁혁히 지나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똑바로 보여주셨어요. 한번 여러분들이 여호수와의 입장이 되지 않고 아모리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봐요. 막 도망가면서 하늘만 쳐다보며 도망가는 거에요. 이게 뭐에요, 무력으론 도저히 당할 수 없고 아이고, 이 해가 떨어지는 구나. 해만 떨어지면은 우리는 살아나겠지. 근데 이게 뒤에서 뭐라고 뭐라고 떠드는데 가만히 보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거야. 태양아 멎어라, 달아 스톱. 그러는 거야. 그렇게 계속 가다보니까 아무리 답답해서 시계를 봤는데 이게 밤 아홉시가 되도 해가 안 떨어지는 거야.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죽기 전에 이미 죽음을 경험했을 거에요.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그러면서 이렇게들 저 사람들이 보통 민족이 아니구나. 도대체 우리 가나안 땅에서 어느 민족이 어느 신한테 호소를 해서 태양을 중천에 스톱하게 한 민족이 있느냐. 한번 잘 묵상해 보세요. 도망을 가는데 인제 해만 떨어지기를 고대하고 달려가는데 이게 아홉 시 열 시가 되는데도 훤한 거에요. 그래서 얘들아, 어찌 된 일이냐 하니까 전하, 태양이 멈췄나이다. 얼마나 무서웠겠어. 이게 단순히 웃을 사건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게 어마어마한 두려움이죠.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 보다도 더 간담이 서늘해 지는 두려움이죠. 그러니까 이런 일 들이 가나안 족속들에게 알려 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 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신발가게에서 신발 하나 안 사 신고 그러고 돌아다녔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어떻게 주셨겠지 하고 돌아다니는데 그러고 돌아다니는 그런 떨거지들이 말야. 뭐 무슨 소총을 들고 왔겠어요 대포를 몰고 왔겠어요 탱크를 몰고 왔겠어요. 그러고 달려드는데 그 떨거지들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거에요. 왜, 그들의 모습은 초라했지만 그들 속에 놀라운 권세와 능력이 있는 거에요. 이 놀라운 능력과 권세가 그들과 함께 하니까 그 심령들이 막 녹아서 벌벌 떠는 거야 이게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서 깊이 교통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영적인 힘 영적인 능력 이예요.저는 이제 이번에 책을 한 권을 끝내고 다시 한 권을 쓰고 있는데 요번에 쓰고 있는 것은 진짜 부흥이 뭔가에 대해서 쓰고 있어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늘 그것을 보면서 귀한 자료를 하나 봤어요 그게 뭔가 하면은 16세기의 종교개혁 지도자 존 낙스 예요. 그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설교자였어요. 근데 그사람은 하여튼 불굴의 사람 이였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묘비에 뭐라 했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던 존 낙스 여기에 잠들다. 묘비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요. 매리라고 하는 여왕이 있었어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란 말 이예요. 영국이 둘로 갈라졌을 때 잉글랜드 위에 스코틀랜드. 근데 스코틀랜드의 여왕 이였거든요. 이 여자가 가만히 보니까 개신교 신앙을 갖고 싶어요. 근데 보니까 존 낙스가 개혁 신앙을 외치는데 안 그래도개신교 신앙을 할라 그러는데 가만히 보니까. 남편이 죽었어요. 남편이 죽으니까 그런 결혼에 관한 이유 때문에 카톨릭으로 가야 자기가 유리하겠거든 그러니까 다시 카톨릭으로 가겠다고 로마 교황청으로 사람을 보내는 거야 그렇게 줄타기를 하는 거야 그걸 보니까 존 낙스가 그 여왕이 신자니까 와서 예배를 드릴 것 아니야. 그럼 막 설교하는 거야. 그럼 이 여왕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가는 거야. 나중에는 이 여왕이 얼마나 근엄한 지, 여왕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대통령을 백 명 합쳐놔도 왕의 권세를 따라갈 수 없는 거야. 그 여왕하고 둘이 독대를 했어요. 여왕페하 그러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하는 말이, 내가 존 낙스 당신 맘에 들어볼까 해서 우리 숙부들 하고 싸우면서 어떻게 하면 당신 맘에 들까 ,여기 희망이 없는 거죠. 왜 그 사람 맘에 들어 하나님 맘에 들어야지 내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인 당신의 맘에 들기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인 노력을 한지 모릅니까 하면서 그 여왕이 면류관을 집어던지고 존 낙스 앞에서 펑펑 우는 거예요. 살려 달라고 이게 뭐예요? 권세예요 위대한 권위예요 그 사람이 말년에 설교했던 그 기록은 제 마음을 감동 시켰어요. 어느 날, 죽기 이 년 전에 1572년에 죽었는데 70년에 중풍에 걸려요. 어느 정도 중풍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교는 할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이 어느 날 단상에 올라서 설교를 했을 때 그 설교를 그 지방에서 일년동안 경청을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제임스 멜빈 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여기 딱 앉아서 존 낙스가 하는 설교를 받아 적었는데 그게 뭐냐하면 다니엘서 강해 였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한 반시간 동안 다니엘 서를 강해를 했대요 그리고 나서 적용하는 부분에 들어가서 설교하는데 받아 적을 수가 없어요. 신적인 두려움으로 벌벌 떨려서 적을 수가 없어요. 그때 그 사람이 외모가 어땠는지 아세요? 그 기록이 뭐라 했느냐 하면 존 낙스는 목도리에목에 털목도리를 두르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교회당을 걸어 왔다 설교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몸을 강대 상에 기대고서야 겨우 설교할 수 있으리 만치 불편했다.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위대한 영력이 쏟아져 나온 거예요 그게바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 속에서 살 던 사람의 저력 이예요 능력 이예요.사람이 변화되니까 그런 위대한 능력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남긴 유명한 기도가 그거예요. 하나님 나를 귀족출신의 사제로 부르지 않으시고 평민 출신의 설교자로 부르셔서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게 하심을 감사하옵나이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 밖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 낙스가 여기에 잠들다. 여러분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 들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러한 권세를 소유할 때 이 세상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 예요. 오랫동안 육신의 즐거움과 세상의 안일을 포기하며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고 매 순간 순간 주어지는 그 상황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의 안일함 과 육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영적인 고난을 택하고 오늘의 달콤함보다는 오늘의 쓰디쓴 고통을 통해서라도 완전히 성취되는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고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이런 놀라운 일 들을 경험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짧은 기도로 위대하게 태양을 움직이고 달을 움직이는 이 여호수아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마치 탈랜트 지망생이 유명한 탈랜트를 바라보고 박수를 치고 흉내를 내는 것 같이 우린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요.우리는 진지하게 이 본문을 보면서 이렇게 놀라운 기도의 능력을 소유하기까지 여호수아가 살아왔던 진지한 영적인 삶의 방식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 순간 그렇게 쓰디쓴 영적인 삶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육신 적인 요소와 더불어 싸우면서 자신을 말씀 앞에 거룩한 소망 앞에 굴복시키면서 살아갈 때 여러분들도 능히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 속에서 믿음의 증인들로 기도의 증인들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 이 시간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헌신된 마음과 여호와 한 분 앞에 살기를 원하는 절박한 소망들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이와 같이 커다란 기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세워주시고 이렇게 하나님 의 세우시기까지 우리들이 여호수아가 살아왔던 그런 진지한 영적인 삶의 방식들을 배워가도록 하나님 도우시고 우리 안에 경박한 것과 안일 한 것들을 쫒아내어 주시옵소서 다시 한번 기도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게 하시옵소서 살아 계셔서 오늘 도 동일하게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자들을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미천하고 연약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을 바라보며 그 속에 역사 하셨던 하나님을 인하여 놀랍니다 질 그릇과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 하나님 손에 붙잡힐 때 사자와 같이 살 수 있고 진흙처럼 아무것 도 아닌 인생들이 여호와의 손에 붙잡힐 때 보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을 믿사오니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안 일함과 이유를 알 수 없는 나태함과 하나님 앞에 충성되지 아니한 것과 여호와의 사명을 향하여 신실하지 아니한 것과 성도로서의 삶의 게으른 모든 것을 하나님 악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 분노할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자신의 안일 한 삶과 환경과 타협하는 연약한 믿음을 악하게 여기고 분노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시고 그러한 삶이 잘못되었다고 그어버릴 수 있는 용단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열린 교회 모든 사랑하는 식구들을 하나님이 붙잡으셔서 결코 이들을 안일과 나태 속에서 세상 풍조에 길들여지는 사람들로 만들지 마옵시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차가운 물에 집어넣으시고 때로는 언덕에 굴리시며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위해 훌륭하게 일하다 죽을 수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들로 만들어 주시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 한 사람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들어 사용하여 그를 통해 국화 꽂과 같은 아름다운 역사를 피우시기 위해서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 동안 그가 고통과시련 속에서 세상의 부귀와 안일함을 미워하며 여호와께 그 말씀에 부종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닮고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교회와 역사를 바라보기 위해 살아왔던 많은 날이 있었음을 기억하도록 하나님 도와주시길 원하옵니다. 하나님 교회를 하나님이 강하게 붙드시고 세상의 즐거운 일 들과 그리고 마음을 달콤하게 하는 음성들을 듣기를 위해 왔던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실망하고 무너지게 하옵시고 오히려 그런 다수의 사람들로 교회가 차지 아니하고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의 불을 가지고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많이 세워주셔서 그들로 조국의 교회역사에 징금 다리를 놓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