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레 24:1~3)
녹취자: 김경애
오늘 제가 첫째 시간에 생각해 보고자하는 것은 우리들의 복음사역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강의안은 제가 2년 전에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83회 개강예배에 초청을 받았고 그때에 영문으로 작성한 강의안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한글로 만들어서 나누어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글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선교사든지 목회자든지 우리의 사역이라는 것은 한 가지 일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일을 하지만 일이 모두 다 해야 되는 일이지만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냐를 가지고 우리들이 고민하고 그것에 집중해서 승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가 이 글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저에게 80분 정도의 시간이 있는데 70분 정도의 시간 안에 내용을 압축해서 여러분들에게 자유롭게 강의를 하고 여러분들은 강의가 끝난 후에 차근차근히 이글 전체를 읽어보시면 이 주제에 대한 원만한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아는 바와 같이 여기에는 모세에게 성막을 지시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막은 이동식 성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로 이동하든지 즉석에서 텐트를 쳐서 하나님께 제사를 하고 예배할 수 있는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그 성막은 약 18평정도의 크기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직사각형의 방이 다시 둘로 나뉘어져서 하나는 12평정도 되는 약간 큰방이고 마지막 하나는 6평정도 되는 작은방으로 구획 지어져 있습니다. 조금 큰방을 우리들이 성소라고 불렀고 6평정도 되는 작은방을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들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었고 그리고 지성소는 일 년에 한차례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곳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봉사를 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성막을 짓는 규례가 나오면서 그 성막을 덮개로 덮으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 덮개가 물돼지가죽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방 전체가 바깥에서 햇빛이 들어올 수 없도록 완전히 차단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방이 이렇게 나뉘고 이 전체를 덮개로 덮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연적인 빛이 들어올 수 없도록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선교사도 마찬가지고 목회자들이 해야 될 일들은 종류가 엄청나게 많고 분량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명이지만 그래도 실제적으로 하는 일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현대교회 자체가 이제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역동적인 선교를 위해서 교회를 조직하고 재정들을 모으고 헌신할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런 것들을 적절히 분배하고 사용하는 일들이 필요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은 일차적으로 가정의 것이었습니다. 가정에서 해야 할 이런 모든 사명들이 교회에 위탁되었고 그래서 교회는 많은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그것뿐만 아니라 현대 산업사회와 도시생활에서 오는 여러 가지 정신적인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런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이 아닌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사도행전 6장에서 나오는 경험처럼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이 교회에서 나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사도들의 반성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제쳐놓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성할 정도로 본질적인 것과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이 도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와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막은 일체 창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체 밖의 태양빛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그 안에서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서는 태양빛이 아니라 거기에 등잔불의 불빛을 사용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그런 구조로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캄캄한 장막 안에 등불이 켜지면 그것을 가지고 이제 섬기게 되는데 거기에 밖에서 보면 성막이라는 것은 그렇게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물돼지가죽으로 덮여있고 그것이 햇빛을 받고 바람을 맞고 이렇게 하면서 찌드는 것입니다. 거무칙칙한 빛깔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일체 태양빛이 없고 거기에 등잔불을 밝히면 그 빛을 가지고 온갖 색실로 짜진 휘장들이 드러나고 그 안에 있는 도구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성소였을 것이라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오직 등잔불로만 빛을 삼았던 것처럼 또한 목회자와 복음사역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 빛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있고 섬김이 있는 것이지 진리가 없이는 섬김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찬란한 등불이 캄캄한 성막에 비췰 때 아름다운 것들이 드러났던 것처럼 오직 등잔불로만 빛을 삼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선교를 하거나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이 세상의 상식이나 아니면 이 세상의 학문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정보들이 유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이 모든 목회와 선교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빛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을 우리들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오늘 살펴볼 수 있는 것은 23페이지입니다.
진리의 빛으로 밝힘
본질에 충실하게 섬겨본 목회자들만이 그 직무가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한지를 압니다. 그는 천사도 알고 싶어 하는 구원의 경륜에 이르는 사역을 자신에게 맡기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목회사역을 일로 여기는 사람은 일을 성취하는 즐거움 이상을 경험할 수 없지만 그 사역을 신적경륜의 성취로 여기는 사람은 복음 사역을 통해 창조와 구속, 완성의 경륜을 이루어 가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 설교, 심방, 교리교육, 교회운영, 치리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목적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찬란한 태양빛을 받은 구슬들이 각기 다른 빛깔을 드러내듯이 모든 섬김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찬란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의 시행방식을 아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뛰어난 학자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행정에 능할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회중들보다 뛰어나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목회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본질적 사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근거를 둔 체계적인 사상과 설교로써만이 아니라 그 지식 안에서 지식과 함께 지식에 의해 살아가는 인격과 삶을 판가름 나게 하는 것이 목회사역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역은 빛으로 수행되어야합니다. 현대정신은 절대적인 진리와 윤리적인 도덕규범을 거부하는 세대입니다. 오늘날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뿐 아니라 심지어 인간 자신을 신처럼 여기는 시대입니다. 계시에 자기를 굴복시키는 신앙 대신 이성을 계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비인간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는 부족이나 환경적인 결핍으로 이해되었고 구원은 인간이 자아를 온전히 실현해 행복한 상태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조차 인간을 그렇게 행복하게 하는 도구로 기독교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도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조차 현대정신에 깊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이 진리의 빛 대신 세상의 정신으로 교인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와 개혁교리들은 이미 현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종교적 독선이나 낡은 유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18세기 독일교회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이성주의가 득세하자 살아있는 신앙, 새로운 삶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경건주의가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독일 교회 안에서 다음과 같은 제목의 설교들이 주일 강단에 선포되었습니다. ‘하나의 음료로써의 커피의 가치’,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문화의 축복’, ‘가축들을 축사에서 먹이는 것보다 방목하는 더 좋음’ 이 외에도 예수님이 결혼하지 않으신 이유를 설교의 소재로 삼거나 부활절을 앞두고 ‘생매장당하는 위험’ 이라는 설교의 제목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설교가 선포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사실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계시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과학적 합리주의로 재어보니 사실성을 입증할만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에 복음 진리라고 믿었던 것을 거부해버렸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다.
진리의 빛을 탐구함
셋째로 진리를 탐구해야할 목회자의 사명을 보여줍니다.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나니 이름은 요한이라 증거하러 왔으니 빛에 대해 증언하고 자기로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해 증언하러 온 자라.’ 목회자는 빛을 증거함으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이 모든 일이 진리의 말씀으로써 수행합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목회자가 진리의 빛으로 충만한 사역을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세상적인 영광보다 탁월한 것이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에 힘써야합니다.
성경과 학문을 탐구함
첫째로는 성경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목회자가 진리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적인데 성경의 진리를 잘 믿는 것과 그것을 더 깊이 이해하고 전달하기 위한 신학의 탐구입니다.
1. 성경진리를 잘 믿음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잘 믿는 것입니다. 신학 함에 있어서 잘 믿으려는 경향은 추론하려는 경향보다 중요합니다. 성경의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모든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은 믿게 된 것을 부지런히 탐구하여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믿는 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믿는 바를 알고자하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신뢰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미 믿은 바를 앎으로 지성적인 친밀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더 깊은 앎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단순한 학문행위가 아니라 신앙 고백적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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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목회자란 과연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성경과 개혁가들이 청교도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간 선지자들의 후예이며 신약성경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다. 목회자의 직무가 숭고하기 그지없는 탁월한 것이기에 성경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잘 믿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는 많은 책의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신학을 하면서 성경을 많이 읽고 진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마음을 진리에 담그는 경건한 습관이 몸에 배어야합니다. 많은 책의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한 책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목회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우리들은 이 신앙을 이야기할 때 평신도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자들은 이 신앙을 이미 완성했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이 전혀 없는 목회자자 복음사역자들도 많고 신앙이 훌륭한 평신도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개되는 많은 목회사역이나 복음사역에 있어서 문제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비록 학문이 좀 모자라도 신앙이 투철하면 사실은 해결될 수 있는 많은 문제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신앙이 약해지니까 문제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 구약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신약에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인데 이 믿음은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찬동, 의존, 신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경외, 믿음, 찬동, 신뢰 이런 모든 것들은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이 결국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목회사역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목회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신자로서 성경을 대하면서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매일 매일 만나는 이것이 사실은 모든 학문의 탐구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학문으로써가 아니라 신앙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우리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면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위대한 학자가 자신은 이 학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것은 그 학문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겠지만 우리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만약에 이런 집을 짓는다면 집이 탄탄한 기초위에 놓여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개 수십 층을 지으면서 표면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없습니다. 상당한 깊이로 내려가서 지하를 일부러 파서 건물을 지탱할 수 있도록 만들고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기초가 되는 것인데 이 쌓아올리는 것이 학문이라고 한다면 이 바탕을 이루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나 선교사들은 신앙심이 모두 뛰어난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오히려 여러분들이 목회사역을 하기 전에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가 훨씬 더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은 학문이 해결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선교의 세계나 목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보면 그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안 일어날 문제들이 신앙을 잃어버리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학문이 모자라서 일어나는 문제는 오히려 더 적은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목회자라는 사람은 결국 진리의 빛을 목회자나 선교사나 마찬가지로 그의 사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계승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가 불신자에게는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나니’ 그럽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입니다. 두 번째는 구원받은 신자는 점점 더 거룩하게 만들어서 성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화되게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됨을 온전하게 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온전하게 되는 것 어른스러워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목회사역, 선교사역이 성경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 자신이 성경과 친밀해서 성경으로부터 감화를 받고 영향을 받는 것이 모든 복음사역의 토대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신자에게 예수를 전해서 예수를 믿게 만들고 신자들은 더 온전히 성화되게 만들고 온전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목회사역과 선교사역 즉 복음사역이 이것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성경과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 우리의 사역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 이 사역을 복음사역이 계승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역을 조용히 반성해보십시오. 굉장히 비즈니스화 되어있습니다. 사업화되어 있습니다. 선교지에 갔더니 어느 선교사가 선교를 하다보니까 자기는 복음에 마음이 불 붙어서 여기 선교지에 왔는데 자기는 사업가가 된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10개년 장기계획, 5개년 장기계획, 1개년 계획 등 끊임없이 사업계획이 나오고 자기가 하는 사역은 자기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은 것은 관심이 없고 교회를 몇 개를 짓고, 무슨 일을 하고, 돈은 얼마를 모으고, 어떤 결과를 맺고 하는 이런 것들로 평가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사역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을 계승해나가는 것이 현실화되고 있지 않다는 불만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성경을 펼치고 비록 학문이 조금 모자라도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두 가지 이유 즉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복음사역자는 잘못돼도 많이 잘못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거스틴이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비상한 천재였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어느 책의 저자도 나는 천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칼빈이나 위대한 신학자 루터 같은 사람도 탁월하다고는 생각했지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존오웬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탁월하신 분입니다. 그래도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신학 안에서는 그렇게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플라톤을 읽으면서는 이 사람은 정말 천재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권에서는 어거스틴이 처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정말 천재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천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뭐냐 하면 자기는 이 세상에서 정말 머리가 좋고 똑똑해서 수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과 만나서 많은 대화를 해보니까 ‘내가 뭔가 진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면 겨우 겨우 말귀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 선생도 없이 스스로 그 모든 것을 깨우쳤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회심하기 직전에 어떤 고민을 하느냐하면 이런 고민을 하는데 양심의 소리와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는 엄청나게 많은 학문을 공부했다. 그리고 학문에 뛰어난 수재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말하는 것을 겨우 설명해야지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가만히 비교해보니까 자신의 삶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서 자신은 평안이 없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동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생각나느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단정한 부녀자들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자를 무시했습니다. 그런 배우지도 못한 아줌마 같은 젊은 여자들은 삶에 있어서 자기가 부러워해야할 정도로 탁월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경건하고 안정되고 평안하고 그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깨닫게 된 것이 뭐냐 하면 ‘신앙과 은혜의 언약’ 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학문 하나도 모르는 이런 부녀자들이 너보다 이렇게 탁월한 삶을 사는 것이 자기 힘으로 된 것인 줄 아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이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이 신앙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복음사역을 하는 첫 번째 기초는 성경을 잘 믿는 것입니다.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저는 23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지금 23년이 지났습니다. 7명이 지하실의 교회에서 개척했는데 23년이 지났는데 최근에 개척을 하고 제가 설교를 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했는데 약 5,300편의 설교를 23년간 했습니다. 새벽설교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내가 새벽기도는 몸이 안 좋고 병원에 입원하고 외국에 집회를 나가서 못나가는 때가 많았는데도 어쨌든 5,300편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는 저는 설교를 할 때 풀 텍스트로 설교원고를 다 써서 그래서 설교를 한 것이 아니고 칼빈처럼 요만한 메모지에 요렇게 써서 항상 즉석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준비하는데 시간은 걸리지만 준비를 하고 설교를 하고 설교를 한 것을 나중에 텍스트로 풀어서 보관되어있는 것이 지금 원고지 약 400만매 정도 됩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라는 것이 누구나 다 한계가 있는데 5,300번이나 설교를 했으니까 일 년에 200편 이상 설교를 했다는 것이고 새벽설교를 제하고 나도 주일 낮, 주일 오후, 수요예배설교는 제가 몸이 아프거나 일정이 있어서 밖에 나가지 않는 한 제가 여기에 앉아서 부교역자 설교를 들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있으면 항상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횟수가 굉장히 많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설교를 무엇을 할까하고 생각하면서 방황해본적은 거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비결이 뭐냐 하면 성경을 읽으면서 제가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제가 성경을 읽는 노트입니다. 매일 매일 기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쭉 따라서 읽다가 제가 세미나를 할 때 평생 설교준비 안하는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는데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기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해놓고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읽으면 많이 읽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싶으면 그것은 다른 시간을 정해서 읽고 이것은 묵상을 할 때는 요한복음이면 요한복음을 찬찬히 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루에 어떤 시간을 정해놓고 천천히 읽습니다. 읽는데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면 계속 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읽는데 무엇인가 감동이 다가옵니다. 거기서 멈추는 것입니다. 더 나갈 목표는 없습니다. 다시 뒤로 옵니다. 또 읽고, 읽고 반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분명한 메시지들이 다가오는 것을 자기가 감지하는 것입니다. 옆에는 항상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성경 사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자기가 한글 성경으로 읽은 다음에 다시 희랍어 성경이나 히브리어 성경을 펼치고 우리 말 성경이 맞는지 왜? 원래 성경에 없는 것을 번역해놓았는데 그것을 가지고 붙들고 도전을 받아봐야 성경이 근거한 것이 아니니까 성경 원전을 읽고 원전으로 다시 그 부분을 묵상하면서 도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설교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깊이 도전을 받고 회개를 하고 은혜를 받고 그 다음 시간에는 일체의 필기도구 없이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라고 할 때 교회건축,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지우고 갑니다. 그리고 이것을 내밀면서 이것이 내 기도제목이니까 하나님이 들어주셔야한다고 기도합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기도하고 싶은 기도제목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게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기도제목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훌륭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깊이 다가와서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천천히 묵상을 하면서 깨달아야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회개하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빨리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지식들이 거품처럼 일어납니다. 그것을 시간이 흐르기 전에 빨리 노트에 적고 아주 빠른 속도로 정리를 해야 합니다. 완벽한 원고가 아니라 무슨 말씀을 하시고 내가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쭉쭉 정리를 해야 합니다. 정리를 해서 두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오래전 것인데 2005년 1월 13일 10시경에 제가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서 어디 한적한 곳으로 혼자 갔습니다. 방에 앉아있는데 설교준비를 하러갔는데 그곳에서 설교준비만 하고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설교준비를 하기 위해서 그 당시 읽고 있었던 민수기 28장을 계속해서 차례로 읽어갔습니다. 아침 10시경에 천천히 읽는데 28장 3절에서 5절이었습니다. 읽었는데 엄청난 깨달음이 오고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을 오전 내내 은혜를 받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리가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밤 9시 24분에 끝났습니다. 뒤까지입니다. 여기에서 두 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다 설교를 못했습니다. 여기서 7번 정도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20회 정도를 설교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을 아실 것입니다. 이중에서 한 칼럼에서 나온 책입니다. 이렇게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을 설교할 필요가 있을 때 다시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설교를 준비해서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히브리어성경을 펼쳐서 어떤 구절로 되어있는지를 확인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3년 동안 있으면서 하고 싶은 설교가 해야 할 설교의 기회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지금은 조금 덜한데 한창때에는 주일에 예배가 끝나고 나면 늘 걱정이 되었습니다. 할 이야기는 많은데 어떻게 일주일을 기다리나……. 사람들은 가고 일주일에 모이는데……. 수요일에도 모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요즘은 제가 아니가 들고 주일날 예배를 4번이나 드리니까 그렇게 체력의 안배가 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보통 설교만 매회에 100분씩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성경을 잘 믿는 것 그것이 자신의 영혼이 사는 길이고 목회사역을 잘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잘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내려가 보면 두 번째가 나오는데 진리의 빛을 탐구하여야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읽으면서 보겠습니다. 27페이지입니다. 둘째로 거룩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함입니다. 둘째로 신학과 학문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연 신학이 학문일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신학은 학문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은 이성적으로 자명한 원리에서 출발하지만 신학은 신앙적으로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학이 때로는 개별적인 사항들 예를 들어서 성경의 인물들을 행적들을 다루면서 믿음의 규칙이나 생활의 교훈들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신학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서 내가 논한 지식은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지식, 구원은 믿음을 낳고 양육하고 보호하고 강하게 하는 지식뿐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활동하던 당시에도 신학이 믿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학문일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에 대한 이런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학문을 자연이성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과 더 상위의 학문의 빛으로 알게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으로 구분하며 신학이 바로 후자에 속하는 학문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은 학문이다.
두 종류가 있음을 명심해야합니다. 첫째로 어떤 학문은 지성의 자연적 빛으로 인식하게 된 원리로부터 시작하는데 예를 들자면 산수, 기하 같은 종류의 학문이다. 둘째로 상위의 학문의 빛으로 인식하게 된 원리로부터 출발하는 학문인데 예를 들자면 광학은 기하학에 의해서 세워진 원리에서 출발하며 음악은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로부터 시작하는 학문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규칙성이 있게 이루어지면서 음의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옛날 같으면 수학을 모르고는 음악을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바흐의 평균율 제2번 같은 곡조는 아주 엄밀하게 수학적인 수열에 의해서 작곡된 것이고 그 수열의 조화가 우리가 귀에 들을 때 아주 질서 있는 소리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흐가 이야기하기를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음악이 아니라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여기서 아퀴나스가 수학을 모르고는 음악을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음악은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로부터 시작하는 학문이다. 신학은 두 번째 방식의 학문인데 이른바 지복자들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알게 된 원리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지복자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자기를 아는 지식이고 그 다음에 지복자들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온전한 지식입니다. 그것들로부터 원리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나옵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 자신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에게 계시해주십니다. 그것을 믿음으로써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가지고 신학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실은 신학이 그런 면에서 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음악이라는 학문이 산수학이 지시하는 원리들을 믿는 것처럼 이런 것입니다. ‘따라라라따라라라’ 하고 될 때 그러면 이렇게 정확하게 수학적인 비율을 따라서 작곡하면 인간의 귀에 아름답게 들린 것이라는 그런 들리는 법칙은 이것이라고 먼저 믿으니까 그것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규칙을 따라서 음악을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을 믿음으로써 이것이 참된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보고, 인간을 보고, 세상의 역사와 사물들을 보면서 거기서 이제 하위의 학문으로써의 신학적인 개념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학문이란 사물의 원인과 결과를 추론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일차적으로 사물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니까 병이 나았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자연의 학문의 대상은 안 되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에 그것도 우리에게는 공부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신학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신학이 학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이성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나 발견된 성경의 명제들은 논리적인 연결을 이루며 지식을 전달함에 있어서 체계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개별적인 앎은 종교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종교 안에서 획득한 진리를 체계화하고 전달하는 데는 계몽주의의 언어를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지혜를 발견하고 전달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하며 또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들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B. 성경과 학문을 탐구하는 자세
열렬한 자세가 요구됩니다. 진리를 파수하고 전파하는 일은 견고한 신앙과 신학의 체계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을 통하여 잘 수행될 수 있습니다. 오늘과 다음주일에 쓸 수 있는 자료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공부하지 말고 헐벗은 산에 묘목을 심는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인내하고 싶을 때까지만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무한대의 헌신을 각오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나드는 가운데 영혼의 움직임은 활발해지고 지성의 능력은 강화될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는 여러분들은 덜 자고, 덜 쉬고, 덜 먹고, 모든 시간을 신학과 학문을 연구하는 일에 써야합니다. 황금의 입을 가진 설교자로 알려진 요한 크리소스톰은 탁월한 설교의 영향력은 웅변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십대 때부터 치열하게 연마해온 수사학적 훈련과 성경에 대한 연구는 구조에서뿐만 아니라 내용과 전달 면에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황금의 청산유수라고 알려진 동방교회의 신학자 다메섹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존 오웬은 개혁파 정통주의신학의 정치함과 청교도의 경건함을 결합해 영국뿐 아니라 대륙까지 칼빈주의의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유능한 사람 역시 10대 때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정도로 학문을 탐구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학생시절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이 태만할까봐 걱정하던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습니다. 저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저의 소홀함 때문에 쓸모없이 뒤로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셀러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순간의 시간도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가능한 최대한 유익하게 사용하자.’ 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말년에 그리스도께로부터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사명은 말씀을 받아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두루마리가 주어졌고 거기에는 요한이 알고 싶어 하는 계시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힘 있는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나 능히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100세 가까이 되었던 늙은 요한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어린아이처럼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두고 온 교회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해고도에 유배된 외로운 처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계시를 전달할 사명을 받았고 계시는 봉인되어 알 수 없었기에 큰 소리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어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통곡하며 매달린 노사도의 통렬한 울음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목회자는 이러한 열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사모해야합니다.
제가 한번 어느 선교지에 갔습니다. 동남아에 있는 선교지였는데 선교사가 그곳에서 선교사역을 오래 잘했습니다. 예배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기에 앉아서 목회하고 있는 설교내용을 다 듣고 나니까 한숨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십니다. 아멘. 우리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렇게 20분을 설교하고 끝냈습니다. 그래서 그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확신을 가졌습니다. 처음 전도할 때에는 그런 설교를 해도 될지 모르지만 비록 원주민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들은 이미 자기 교회에서 5년씩 10년씩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인데 저런 설교를 가지고는 절대 믿음이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렸을 때에는 그저 죽이나 먹고 젖이나 먹고 자라지만 아이가 크면 좀 더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합니다. 그리고 영양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날 멀건 죽만 쑤어서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신앙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가 자랑을 하면서 이 사람이 우리 교회의 최고의 일군 중 한사람이라고 그러는데 제가 설교를 하고났더니 그 다음에 저하고 상담을 하고 싶답니다. 그 교회에서 가장 잘한다는 자랑하는 일꾼이 4년째 남편과 별거중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사역자들은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해서 자기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말씀의 세계가 참 깊고 넓구나 하는 것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느낄 수 있어야하지 공부를 안 하고 만날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고 천국을 간다는 이야기만 10년째 하고 있으니 그 교인들이 좋은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선교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역을 하고 주님을 섬기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헌신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헌신합니다. 목사가 되고 복음사역을 하는 일꾼이 되었는데 신학적으로 거의 정리가 되지 않는 설교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양떼들이 제대로 꼴들을 먹지 못하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셔야합니다. 성경 자체를 읽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성경의 원리를 깨닫고 그 다음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들을 조직화한 신학 책들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지성을 연마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그 깊이가 더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야기할 것입니다. ‘목회할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하기 싫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진짜 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기 마련입니다.
저희 교회에 부교역자들이 30여명이 있는데 오래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얼마나 바쁜지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보고를 할 때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합니까? 좀 과장된 것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호소하는데 담임목사 보라고 사역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날 저녁에 우리 집사람하고 심야영화를 갔습니다. 목회자들도 영화를 좀 봐야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기도 해야 하니까 갔습니다. 오줌 누러 갈 시간도 없다던 그 부교역자 부부를 그 영화관에서 만났습니다. 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합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 하고 싶으면 결국에는 합니다. 세상에 어느 종교지도자가 배우지 않고도 종교지도자를 할 수 있는 것은 무당밖에 없습니다. 무당도 일정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깊이 변화를 받기 전에 제가 손금을 잘 봅니다. 그것도 책이 한없이 많습니다.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가 없습니다. 가르칠 내용이 없습니다.
자 그 다음에 거기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하면 ‘찧어낸 감람을 사용하여’ 라고 나옵니다. 보겠습니다. 둘째로 성막 안에서 등불을 켜는데 사용된 감람유입니다. 성경에서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하고 기름은 믿는 자들이 받게 될 성령을 예표 합니다. 이것은 목회사역에 있어서 순수한 성령의 역사와 철저한 자기 깨어짐의 필요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순수한 성령의 역사
첫째로 순순한 성령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창문을 뚫어서 열면 하늘의 빛이 들어오니까 등잔이 필요 없는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모든 창문이 없이 성막을 설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햇빛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막고 등잔불은 그것도 감람을 찧어낸 기름으로 만든 그것으로써 하게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성령의 역사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등잔 불빛이 지성과 진리를 예표 하는 것이라면 기름은 성령과 은혜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성령의 역사 없이는 성령적 경건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에서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사라질 때 불건전한 신비주의의 이단들이 널리 유포되었습니다. 몇 해 전 나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방문했을 때 갓프리 총장과 마이클 호튼 교수를 만나 신학적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설교라는 주제로 이어졌고 최근 미국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조엘 오스틴 들어보셨습니까? 긍정의 힘입니다. 제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이 누구냐고 자꾸 사람들이 나한테 묻는데 나는 한마디로 대답합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책을 기독교출판사에서 출판을 해서 초판에 몇 십만 권을 팔았답니다. 육십만 권을 팔았다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마지막 날에 전부 다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얼마나 대단하냐 하면 미국에 가서 숙소에 가서 무심코 tv를 틀면 이 사람이 나옵니다. 말도 안 돼는 개소리를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리모컨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청산유수입니다. 얼굴을 탤런트처럼 예쁘게 생겼습니다. 한 4만 명이 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있는데 원고도 보지 않고 설교를 하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 들어도 그 이야기에 푹 빠질 정도로 너무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가 지금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만 명이 나온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어디서 그것을 보느냐하면 메리케인과의 인터뷰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거기에 보면 그 기록의 고백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어마어마한 헌금을 합니다. 울고, 웃고, 울고, 웃고, 그러다가 돌아가면서 거기서 자기가 치유 받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만한 이야기꾼의 설교자가 없습니다. 얼굴이 그만큼 예쁘게 생긴 목사도 없고 요즘은 조금 늙었는데 예전에는 영화배우로 나와도 성공할 정도로 그렇게 예쁜 얼굴로 나와서 수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엘 오스틴의 신학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최근에 미국 복음주의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오스틴의 신학을 평가하는데 후기 영지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 현대 번영주의의 합성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영지주의와 펠라기우스를 연구해서 그것을 탐구하고 그것을 설교하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를 비판하는 박식한 신학자들이 자신의 교회역사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해석을 해서 설교에 옷을 입혀준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해서 나는 반문했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설교에 신학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일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를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 같이 만날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보십시오. 순수한 진리의 선포가 사라지고 순수한 성령의 역사가 그치는 교회에서 인본주의와 이교사상이 진리를 대신하고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성령의 은혜를 대신합니다. 참된 신앙의 힘은 지식과 경건의 결합에 있습니다. 신학을 가르치면서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우리는 순수한 성령의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빛은 열과 함께 비치며 등잔의 열은 불빛과 함께 방사됩니다. 성경을 믿고 개혁신학을 배운다고 할지라도 목회사역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성경 같은 신학을 배워도 그것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성품의 측면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신학의 내용뿐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사람됨이 신학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그가 결정하는 신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사랑의 신학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에드워즈와 같이 미학적 신학을 펼칠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칼빈의 주권사상에 이끌린 사람이라면 주권신학을 좋아할 것입니다. 개혁신학이 교회에서 외면당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개혁신학의 대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지 않고는 마음속에 심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목회사역은 본질적으로 하늘의 신령한 진리를 타락한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들이며 들을 귀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 그가 전하는 미련한 하나님의 도는 인간의 지혜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사람 곧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순전한 자기 깨어짐
성막을 밝히는데 사용되는 기름은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었습니다. 찧어낸 이라고 번역된 ‘까따띠’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깨뜨리다’, ‘때리다’의 의미를 가진 ‘까따뜨’의 수동분사남성형단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람나무열매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열매를 절구같이 움푹 파인 돌에서 찧거나 밟아서 기름을 추출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로는 더 큰 압착기 같은 것이 고안되었을 때에는 감람나무열매를 압착기로 눌러서 기름을 추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더 많은 양의 기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추출된 기름은 압착하는 과정에서 불순물이 섞여나와 성막을 밝히는 순결한 감람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기름은 등잔불을 켤 때 밝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을음을 내기 때문입니다. 목회사역에 있어서 자기 깨어짐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신학 함이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는지 보여줍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적용되기까지 우리를 진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없고 살게 할 수도 없습니다. 배우는 모든 진리의 목표는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합치된 사람이 되게 하고 그런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실현하는데 기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그것으로써 말씀을 가장 올바르게 효과적으로 전하여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온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 청교도는 말했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은 성공하면 귀에까지 다다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마음까지 다다른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체험된 성경진리입니다. 사변적 지식으로써의 신학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실천까지 이르도록 질서 지어진 힘으로써 신학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진리의 힘은 목회자가 말씀에 의하여 깨뜨려진 자가 전하는 말씀의 힘입니다. 성경을 대면할 때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어린양으로서 그리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화를 끼칠 때 두 가지에 대한 깨어짐을 경험합니다. 죄에 대한 사랑과 자기 의에 대해서 입니다. 이때는 진리와 상관없이 자기 욕망을 따라 살려고 하는 자신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하시는 그리스도를 향해 다시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깨닫고 책을 읽고 사색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살고 죽고 정죄 받음으로써이다. 만약 우리가 배우는 신학이 복음주의의 결점을 지적하는 용도 이상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개혁주의의 신학 함이 아닙니다. 개혁자들로부터 내용뿐 아니라 방식도 물려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철학의 아랑곳 않고 확신에 넘치는 칼빈주의, 풍조에 흔들리지 않고 열정에 불붙은 칼빈주의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우리가 단지 주권을 설교할 뿐 아니라 인생을 거기에 맡기고 살게 하는 순종적 칼빈주의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이곳은 단순한 신학자의 사상을 배움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변화시켰던 진리의 빛을 자신도 받으며 그 앞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뜨려지는 경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한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가장 탁월한 표지는 기도입니다. 지식이 교만하게 한다는 경고는 신학을 하는 우리에게도 사실입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조차 은혜의 물에 잠겨야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학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거칠고 메마른 땅과 같습니다. 파릇파릇한 경건의 싹은 기도하지 않는 마음 밭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옥토와 같은 마음 밭에서 자라납니다. 철학은 진리에 관해 말하고 신학은 그것을 보여주지만 기도는 그것을 누리게 합니다. 치열한 지성의 탐구와 간절한 마음의 기도 안에서 지식과 경건은 결합되어야하며 하나님에 대해 배우면서 경외하는 삶에 대해 배우지 않는 것은 위선입니다. 소명이 없는 신학공부 안에 체계적이지 않은 학습습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게 되면 신학교에서 떡 대신 돌을, 생선대신 뱀을, 알 대신 전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자유주의 신학이 스며들고 소명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입학함으로 신학교는 예전 같은 기도의 분위기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열렬한 기도는 치열한 신학의 탐구로 냉담해지기 쉬운 그의 마음과 신앙을 보호해줍니다. 구원에 따르는 계시를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자 단 하나의 보고는 성경이지만 이 말씀이 우리 영혼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종속된 세 가지 수단 때문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묵상하는 노력과 2. 성도들의 상호간의 가르침, 3. 교회의 말씀사역입니다. 특별히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생각들은 목회사역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속에 적용됨으로써 밝게 비춰집니다. 이 계시의 책속에는 진리의 빛들을 목회사역 속에서 충만히 드러내고 가슴속에 쌓아 어디를 가든지 진리대로 살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회자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목회자의 영광은 학문 때문에 박수와 갈채를 받는데 있지 않으며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영광은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말씀에 바치고 성령 안에서 자신의 삶을 태워 진리의 빛을 교회와 세상에 비추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과 외침으로써 그들을 빛이신 그리스도께 돌이켜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영원한 진리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속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신적 지혜와 사랑의 극치입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성도들로 하여금 진리로써 지혜를 알고 은혜로써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성으로써 진리를 알도록 하고 의지로써 살게 하며 은혜를 통해 힘을 얻게 하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진리를 알고 사랑하며 순종해야합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는 바로 이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여 아름답게 하고 선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그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합치시켜 그분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지혜와 사랑을 모르는 무지에 있습니다. 목회자는 빛으로 살고 양떼들을 빛들로 나타나게 하기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거룩한 직무를 진리의 빛과 성령의 불로 수행합니다. 그럼으로 마음을 바쳐서 성경을 사랑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바쳐야합니다.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로써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마디의 설교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증언이 되기 위해서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 동안 진리 앞에서 진리에 자신을 합치시키는 진실에 도달하기를 힘써야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목회자의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갈대처럼 연약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영적인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이바지하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