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의 상을 위하여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3-14)
녹취자: 성경열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이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일생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기도 했고 교회적인 것이기도 했고, 또 우주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비전이 바로 예수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어떻게 역사하시고 움직이시고, 인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사람의 도리일지를 가르쳐 주는 수많은 비밀들이 들어있는 커다란 상자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자가 잠겨있습니다. 그 상자를 여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열쇠 없이 유대교라는 사상에 미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해야할 사람을 박해했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야 될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예수가 바로 그 세계의 경륜의 비밀이 모두 들어있는 큰 트렁크를 여는 열쇠였던 것입니다. 그 예수를 열쇠 삼아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 있는 모든 비밀이 아주 찬란하게 눈부신 빛으로 사도 바울의 지성에 밀려 왔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메셋에서 회심하면서 결정적으로 그 키를 손에 넣게 되었고 주님의 은혜로 그 키를 돌려 하나님과 이 세계와 인류에 관한 인생에 관한 비밀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박스는 너무너무 커서 일생동안 뒤져내도 그 속에 담겨있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발견 되든지 그것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말년에 이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구나 하는 어마어마한 깨달음들이 밀려왔던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호롱불을 켜고 생활하던 집안에 한 번에 몇 십만 광 촉의 빛이 내려 쬐이는 전깃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그 유장한 로마서에서 시작해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빌립보서를 써 내려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나옵니다.
감옥에 갇혀서 이제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처지에 있었지만 그것은 사도 바울의 큰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열쇠로 연 하나님과 세계와 인류에 관한 위대한 비밀들을 계속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열쇠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 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인 열쇠는 한번 열면 다시 필요가 없는데 이 열쇠는 그런 열쇠가 아니라 열쇠를 놓고 돌려서 그 트렁크를 열면 그 열쇠,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안에 있는 모든 지식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과 세계와 인류에 대해서 아는 것이었고,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었고, 행복에 대해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최고의 인생의 숙제는 10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의 참여함을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혔기 때문에 내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잡혀서 사니까 진정으로 붙잡아야할 목표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가 무엇일까요? 예수 누구신지를 알고,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대로 사는 것, 요즘 저희들이 공부하고 있는 ‘내 인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분이 원하시는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모두 그 안에서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인문학에 열풍이 붑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는 설교보다 인문학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는 인문학 강사를 불러서 줄지어 강의를 하게 하는데, 참된 인문학은 기독교입니다. 젊은이들이 가끔씩 묻습니다. 인문학이 무엇입니까? 수학, 자연학, 철학 등등 어쩌구저쩌구들 합니다.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 뭔가 경우에 어긋난 일을 보고 어르신들이 ‘사람의 도리로 그러면 안 되지. 사람이라면 그러면 쓰나?’라는 말을 하시는 것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의 도리가 바로 ‘인문학’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인문학은 그것을 아주 희미하게 보여줍니다. 일반 은총의 세계니까 그렇습니다. 일반 은총의 세계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알고 그 생각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가 마치 외딴섬처럼 보이거나, 기독교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자기들끼리만 예수를 믿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 목표였습니다.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그래서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구나. 아, 그래서 그분이 33년 동안 인간의 모본을 보이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아, 그분이 남기신 복음인 성경이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그런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도 사도 바울 혼자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니라 온 인류가 걸어가야 할 길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성경은 못 읽으면서도 드라마나 장편 소설 같은 책을 보면서 ‘아, 인생이 저런 측면이 있지. 아 정말 새롭게 깨달았구나. 좋다.’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세상문학이나 예술이 이야기하는 그 모든 것들은 인생의 한 측면을 에둘러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신비한 이야기의 모든 본체가 바로 성경의 진리 안에 있으니,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지식 가운데 실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 때문인 줄을 몰랐나이다.”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갈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향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예수님도 못 만난 것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도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서 세계와 인류의 비밀에 관한 지식의 큰 보고를 열어 보인 것처럼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이 진리의 말씀으로 설득하여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무엇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무엇을 했고, 어제도 무엇을 했으며, 내일도 무엇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매순간 그것은 과거로 넘어갑니다. 어떤 일은 잘한 일이라 여겨져 계속 기억하고 싶고, 또 어떤 일은 잘못했기 때문에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음악을 즐겨 듣는데, 어떤 음악은 좋아하면서도 듣기가 싫은 음악이 있습니다. 음악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음악을 들었을 때에 너무 고통스러운 일을 겪었기 때문에 음악이 전달하는 연상 효과로 인해 그 음악이 싫은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을 때에는 괜찮습니다.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자면 코나투스가 많을 때에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슬픈 일을 생각하면 감사를 드리거나 비장미 같은 것들도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유튜브에 들어가보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음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음악을 들으면 당신은 10분 안에 울 것입니다’라고 올려져 있는 음악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클릭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경험하는 것처럼 다양한 정동들을 겪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무엇이라고 합니까?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잘한 일을 자꾸 기억하면 교만해 질 것이고, 못한 일을 생각하면 수치와 실패를 운명처럼 뒤집어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푯대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열쇠로 세계와 인류에 관한 비밀의 뚜껑을 열었을 때 발견한 것, 그 목표를 따라 살 때에 우리를 기쁘게 기다리시면서 상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그것이 푯대요, 우리는 그것을 향해 달립니다.
1년 전에 여기서 우리는 공동의회를 했습니다. 그때의 일들을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다시 공동의회를 합니다. 한 해 동안 저나 여러분이나 정말 기억하고 싶었던 잘한 순간도 있고, 너무 고통스럽고 부끄러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잊어버립시다. 잊어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잊어버리십시오. 어차피 인생은 계속 흘러갑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눈을 높이 들어 위에 있는 부름의 상을 바라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속의 은혜로 우리를 깨우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이 세계가 무엇이며, 인간은 누구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을 푯대 삼아서 완벽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끊임없이 그 길를 가려고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면 건강에 좋다고 체조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 동작들이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고 예쁜지 모르겠습니다. 마루에 누워서 흉내를 내보면 제가 생각해도 정말 아닌 것입니다. 이쪽 무릎이 어깨가 도저히 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동작이 착착 붙어서 합니다. 그리고는 다리를 벌리고 앉는데 일자로 똑바로 찢어집니다. 한번 따라 해보려니까 진짜 찢어져서 병원에 가게 생긴 겁니다. 그래서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완전한 본을 보여주셨고, 사도바울은 완벽에 가까운 본을 보여주었구나.’ 이분들은 말하자면 세계 정상급 체조 선수인 셈입니다.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못해도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생을 다 끝나고 나면 후회 되는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겠지만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구나. 나의 인생이 시련도 많고 사연도 많았지만 우리 주님과 함께 올 수 있어서 참 행복했구나.’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교회를 한 4일 정도 떠나 있었습니다. 하도 갑갑해서 잠깐 산책을 나왔는데 멀지 않은 곳에 절 같은 것이 있었는데 가까이 가봤더니 공동 묘지였습니다. 수목장을 하는 묘원이었습니다. 그거 괜찮더라고요. 작은 나무 하나를 사면 그 밑에 자기와 자기 가족들의 뼈를 땅에 묻어 주는 식입니다. 한 삼 사십 분 동안을 걸어 다녔는데 묘지 하나씩 하나씩 보면서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어떤 아이는 서른 살에 죽었고, 어떤 사람은 저보다 어린 쉰일곱에 죽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육십에 죽었고, 그 죽은 아빠를 그리워하면서 네모난 아크릴박스를 짜서 거기에다가 아빠가 쓰던 안경이며 볼펜이며 즐겨먹던 활명수, 대일밴드 등과 같은 물건을 넣어뒀습니다. 거기는 불교신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천주교 신자의 묵주도 있고, 불교신자의 염주도 있고, 기독교인의 교패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보는데 가슴이 아린 겁니다. ‘아, 마지막에 결국은 저런 유품 몇 개를 남겨놓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이구나. 우리에게 그런 날이 매우 가까웠구나. 나도 안경과 성경, 내가 쓰던 물건 몇개를 남겨놓고 우리 자녀들이, 우리 손주들이 와서 이렇게 들여다보며 할아버지가 혹은 아버지가 쓰셨던 것이라고 말을 하겠지.’
잠시 머물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부름의 상을 향하여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인 줄을 믿고, 그리로 달려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이름으로 빕니다.